일제 식민지기 재래시장의 사회사적 분석을 통한 식민지근대성론의 사회변동론적 재구성*

Reconstruction of Colonial Modernity Approach as Social Change The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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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이 글은 일제 식민지기 재래시장에 대한 역사적 사례 분석을 통해 식민지근대성론을 사회변동론의 관점에서 적용할 수 있는지 가능성을 타진한다. 서구에서 유래한 기존의 사회변동론들은 식민지사회의 근대적 사회변동을 설명하는 데 한계를 보여왔다. 사회변동이 구조와 행위주체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이라는 프레임 위에 서 있다면, 확산론적 관점에 선 기존의 사회변동론들은 식민지사회의 행위주체를 배제함으로써 이 복잡한 상호동학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일제시기 한국 재래시장의 구조는 공영 없는 공영제, 시장의 폭증과 상대적 비중 감소, 민족적 분절, 식민지 자본주의적 진전과 시장원리의 부정에 이르기까지 식민지적 구조가 뚜렷해졌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이러한 구조적 규정성 아래서 재래시장에 대한 선호를 지속하였고, 시장을 민족적 사회생활의 중심으로 만들었으며, 저항의 장소로 활용했고, 권리와 의무에 대한 인식과 사회적 공론장으로 발전시켰다. 이 과정에서 식민권력은 일관성을 상실했고, 통치의 무능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재래시장에 참여한 식민지 주체들은 근대성이 자신을 보편으로 정립할 수 있도록 평가절하됨으로써 그 근대성을 구성해주는 외부가 됨과 동시에, 그 내부에서의 주체적 행위를 통해 끊임없이 그 식민지적 구조를 비틀고 변이시키는 내재하는 외부로서 작동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사례 분석을 통해 확산론적 사회변동론과는 달리 식민지근대성론이 식민지 사회변동의 동학 이해를 위한 좀 더 현실적합한 틀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Is it possible to apply the concept of colonial modernity to social change theory for colonial societies? This paper tries to examine this possibility through theoretical and historical analysis. If social change is advanced by complex dynamics between structure and subject, main theories of social change have a distinctive weakness to describe such dynamics, because they regard modern change of colonial societies as a simple result of diffusion of western modernit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colonial power reorganized the structure of the Korean traditional markets: Public management system focused on policing, rapid growth and relative fall of portion, ethnic segregation, advance of colonial capitalism and its turn to self-negation. Under these structural forces, colonial Korean continued to prefer traditional markets, made them as centers of Korean society, used as locus for national resistance, and developed as public spheres for debating social rights and obligations. Colonial power lacked consistency in market policies and showed its incompetence before the collective acts of colonial subjects.

    Although traditional markets and subjects were devaluated as inferior exterior by colonial power, colonial subjects in the traditional markets contorted and changed colonial structure itself by their own active practices, and became constituitive and internalized exterior of modernity. By this case study, we can expect that colonial modernity approach could provide a useful theoretical framework for understanding dynamics of colonial modern change.

  • KEYWORD

    식민지근대성 , 식민성 , 식민지 주체 , 전파론 , 서구중심주의

  • Ⅰ. 문제제기 - 재래시장에 대한 완강한 선호와 식민지근대성

    현대 한국사회에서 재래시장의 경제적 중요성은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다. 2005년 1,660개이던 재래시장 수는 2012년 1,511개로 9% 감소했고, 같은 기간 동안 시장 내 점포 수 또한 239,200개에서 204,237개로 14.6% 감소했다. 일평균매출액 감소 정도는 더욱 커서 동기간에 5,801,400원에서 4,502,400원으로 무려 22.4%나 감소했다.1) 재래시장은 사실상 경제적 유통기구로서의 의미보다는 지키고 보호해야 할 ‘전통시장’이나 ‘민속시장’으로서 간주되어야 할 듯하다.

    하지만 사태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정부는 2004년과 2006년에 연이어 재래시장 육성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재래시장의 위기 타파와 활성화를 도모해왔다(김주영·박정은, 2011: 64). 선거 시기든 평시든 정치인들이 재래시장을 찾아서 서민의 살림살이에 대한 자신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것은 한국정치의 익숙한 풍경이다. 추석 연휴를 하루 앞둔 2014년 9월 5일, 박근혜대통령은 한 재래시장을 찾아 장바구니 물가를 점검하고, 상인들에게는 서민경제의 회복을 다짐했다. 대통령은 그 2주 전에도 지방의 한 재래시장을 찾았다. 당연히 이런 행보는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언론은 서민들의 살림살이를 보여주는 지표로 곧잘 재래시장의 장바구니 물가를 든다. 재래시장은 현대 한국사회에서 일반대중의 경제상황을 상징하는 최상의 기표로 작동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재래시장은 경제 전반의 성장과 함께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성장한 다음 정체상태에 이른 후 줄곧 쇠퇴하고 있다. 소비자유통의 중심이 백화점과 대형마트, 전문점, 편의점 등으로 옮겨진 지 오래다. 그렇다면 정치와 언론이 합작하여 생산하는 재래시장의 상징적 중심성은 말 그대로 상징성에 불과한 것일까? 여기에 역설이 있다. 지속적인 쇠퇴에도 불구하고 재래시장을 찾는 사람들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 당 일평균 고객수는 2005년 1,782명에서 2012년 2,824명으로 58.5%나 폭증했다. 지갑이 얇아진 서민들은 더 적게 쓸지언정, 재래시장을 더 자주 이용했다. 정치인들과 언론의 관심에는 상징성 이상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이 완강하고 지속적인 한국인들의 재래시장에 대한 선호라는 집합적 습속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였다. 물론 재래시장에 대한 선호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싼 농수산물 가격, 주거지와 가까운 입지상의 유리함과 같은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이유들 또한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 하지만 불편한 시설환경, 불투명한 상관습, 부족한 상품종류 등 재래시장을 멀리 할 이유들 또한 무수히 많다. 이를 따지는 것은 이 논문의 과제는 아니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이들 현재의 경제적·실용적 동기들이 아니라, 재래시장 선호와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구조화되어온 경제적 요인들과 그와 결부되고 길항하던 정치·사회·문화적 요인들이다. 그것은 한국사회의 근대이행기(일제 식민지시기)에 형성된 재래시장의 위상, 역할 및 재래시장 참여자들, 즉 행위주체들의 의미 부여적 실천과 관련된다. 이 글은 재래시장이 서민생활의 중심지라는 이 강력하고 실제적인 집합표상의 역사적 유래를 추적하면서, 그 경과의 규명을 통해 식민지근대성이라는 탈식민주의적 개념을 사회학적 사회변동론의 관점에서 응용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려는 시도다.

    재래시장에 대한 한국인들의 완강한 선호라는 현상은 이미 일제시기부터 줄곧 주목되어온 해묵은 논란거리였다. 이 시기에 재래시장 수는 폭증하였고, 거래고 또한 대폭 상승하였다. 사회경제적 근대화, 즉 수요밀도의 증가와 교통체계의 발전과 더불어 재래의 정기시장이 통합되고 상설시장화되면서 수가 줄게 된다는 근대화이론적 시장이론들(Skinner, 1965: 211-21; Hodder and Ukwu, 1969: xii; Fagerlund and Smith, 1970: 336; Eighmy, 1972: 313)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엄청난 성장에 대해 당대와 이후의 연구들 대부분이 견지한 태도는 ‘비정상적 왜곡’이라는 것이었다. 당대에 이루어진 가장 체계적인 재래시장 조사연구 중 하나에서 문정창은, 현대적 상업조직이 발달하면서 당연히 자취를 감추어야 할 재래시장이 급증한 것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시대를 역행하는 “변태적 현상”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하였다(文定昌, 1941: 213-6), 일제하의 시장정책은 외견상 근대적인 양식을 갖춘 것으로 보이지만 그 운영내용에서는 식민지적 수탈을 거듭하였다거나(김성훈, 1977: 133), 재래시장 활성화는 임의적인 ‘정책적 차원’에 근거한 것이었을 뿐, 토지생산성 제고, 근대 교통의 발달, 상업의 자본주의화 등 근대화 과정의 구조적 요인과는 무관했다는 분석들이 제시된다. 재래시장의 활성화를 근대화 과정의 구조적 변수들과 관련된 현상으로 해석한다면 식민주의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시된다(이재하·홍순완, 1992).

    이 시기 재래시장의 성격 이해를 둘러싼 또 하나의 중요한 쟁점이 있다. 그것은 재래시장을 둘러싸고 벌어진 무수한 갈등들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점이다. 즉 재래시장과 관련된 이해관계에서 발생한 조선인 대 조선인, 조선인 대 식민권력 사이의 갈등들의 위상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라는 논점이다.2) 모든 종류의 시장에 대한 관리 및 처분권한을 식민권력이 독점했기 때문에 재래시장을 둘러싼 갈등들(이하 시장갈등으로 약칭함)은 조선인들 간의 갈등인 경우조차 식민권력을 향한 갈등적 집합행위로 나아갔다. 물론 이 갈등들은 결코 혁명적이거나 체제변혁적인 투쟁으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다. 요컨대 대중의 생활상의 이해와 요구에 기반한 식민권력에 대한 투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그것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조선인의 민족적 이익을 실현하려 한 일상투쟁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비타협적, 혁명적 반제국주의의 관점에서 식민권력이 허용한 한계 안에서 이루어진 개량투쟁, 경제투쟁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것은 위대해지거나 소소해진다. 식민지 주체들의 집합적 행위를 평가하기 위한 제3의 대안은 없을까?

    한국사회에서 정상적인 근대화 과정과 다르게 보이는 수많은 현상들을 식민지적 왜곡의 유산으로 간주하는 것은 매우 익숙한 관습이다. 이런 맥락에서 식민지를 거친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근대성은 ‘미완의 프로젝트’로 여겨진다. 남겨진 과제는 이 부정적인 왜곡의 유산을 제거하고, 정상적인 근대의 발전경로를 걷는 것이 된다. 정상적인 근대성은 이미 서구에서 먼저 선취되었고, 우리는 - 실정에 맞게 변용한다는 단서를 달더라도 - 그 정상모델을 따라 사회변동을 의식적으로 추진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 사회학계에서 수용해온 서구 유래의 거시적 사회변동이론들, 예컨대 탈콧 파슨스 등의 근대화이론, 막스 베버 등 독일 사회학적 전통의 합리화론, 칼 마르크스 등 비판사회이론 진영의 자본주의화론 등이 국가에서부터 기업과 노동, 문화, 가족구조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변동의 ‘특수성’을 해명해온 기본적인 태도는 이러한 전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 거시적 사회변동론들이 가진 이론적 잠재력과 통찰력은 여전히 소중하고 유효하겠지만, 어느 경우든 식민지 경험이라는 역사적 경로가 미치는 영향을 정상적 경로로부터의 일탈이라는 각도에서 접근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또한 이 사회변동론들은 서로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변동의 원인이 서구에서 먼저 유래하였고, 이후 비서구로 확산되었다고 간주한다는 점에서도 동형적이다.3) 근대성의 이론화에 진력해온 앤소니 기든스에게서도, 근대성은 “대략 17세기경부터 유럽에서 시작되어 점차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사회생활이나 조직양식”으로 간주된다(Giddens, 1990[1999]: 17).

    식민지 경험의 배제가 사회변동론의 현실적합성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이들 서구 중심의 이론들이 식민지를 경험한 사회를 위한 변동이론으로서 갖는 가장 결정적인 한계는 해당 사회의 구조변동을 서구적 사회구조의 확산, 전파, 이식, 심지어 - 불완전한 - 복제의 문제로 대체한다는 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사회학이론에서 구조와 주체, 구조와 행위의 문제는 가장 첨예한 이론적 쟁점의 영역이며, 특히 구조의 변동을 다루는 사회변동론의 영역에서 쟁점은 더욱 첨예해진다. 이는 구조와 행위, 구조와 주체가 존재론적으로 구분되는 이산변수와 같은 것이 아니라, 상호 내재적이며 상호 규정적으로만 성립하고 단지 인식론적으로만 구별할 수 있는 범주이기 때문일 것이다. 행위주체가 구조의 내면화, 습속화를 통해 구조를 재생산하는 것만큼이나, 구조는 주체의 행위의 결과이자 총합으로서만 성립한다. 그리고 이 상호규정적 과정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심지어 모순적인 동학으로 가득 차 있다. 구조의 내면화는 그에 맞서는 저항이나 변용, 일탈을, 때로는 과도한 내면화-동일시의 과정을 포함하며, 구조의 규정력 속에서 실천되는 주체의 행위는 구조를 재생산하는 만큼이나 구조의 안정성을 뒤흔들고 심지어 구조를 변경하면서 새로운 구조를 생산한다. 구조의 변동을 다루는 사회변동론은 구조와 행위, 구조와 주체가 갖는 이 복잡다단함이 집약되는 지점을 다루는 셈이다. 더욱이 서로 다른 구조들이 조우하고 충돌하는 제국-식민지관계에서 이 복잡다단함은 극도로 증폭될 수밖에 없다.

    확산론, 전파론, 이식론적 관점에 선 서구 유래의 사회변동론들이 비서구사회에 적용될 때 초래되는 결정적인 난점은, 이 복잡다단한 구조 변화의 동학을 비서구사회의 주체를 배제한 채로 설명하게 된다는 점이다. 주체의 동학이 배제된다는 것은 동시에 구조의 변동 또한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구조와 주체 사이의 복잡한 상호 동학이 배제된 사회변동론의 시야에서 서구와 차이를 보이는 비서구의 근대적 사회변동은 결국 서구적 이념형에 대한 왜곡된 확산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왜곡이나 결여라는 인식 자체도 문제시할 수 있지만, 좀 더 본질적인 문제는 주체의 동학이 배제된 접근에서는 구조변동의 과정에서 그러한 뒤틀림이 발생하는 계기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 뒤틀림의 계기는 비서구사회의 전통성, 후진성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데, 이는 비서구사회의 후진성이 본래적인 후진성에서 유래한다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서구 유래의 사회변동론들은 서구중심주의적 함축을 벗어나기 어렵고 현실적합성도 떨어지게 된다.4)

    근대로의 이행 과정에서 식민지를 경험한 것이 한국만의 사정이 아님은 불문가지다. 사실 근대는 국민국가가 부상한 시대인 만큼이나 제국-식민지의 시대이기도 했다(Cooper, 2005). 따라서 근대로의 이행을 식민지 경험과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회변동의 이론적 프레임은 한국사회의 구체적·역사적 경험에 좀 더 현실적합하다는 면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사적 보편화의 가능성을 담지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더욱 적극적으로 사유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일제 식민지기 재래시장을 둘러싸고 벌어진 구조적 변화와 식민권력, 식민지 주체의 행위, 특히 재래시장을 둘러싼 갈등적 집합행위를 상호 규정적 사회변동의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관계론적으로 접근하고 분석하고자 한다. 나아가 이러한 사회변동 과정을 그동안 정련되어온 식민지근대성론을 통해 방법론적 개념화의 차원에서 해석해 보고자 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일제 식민지기에 더욱 강화된 재래시장에 대한 한국인의 선호와 다양한 집합행동들, 갈등적 실천들은 서구근대적 구조의 식민지적 확산 과정에 중대한 한계와 변이를 불러일으킨 식민지 주체의 집합적 대응을 보여주는 주체적 대응으로 평가되리라고 기대한다.5)

    1)재래시장에 대한 통계적 사항은 국가통계포털(http://kosis.kr)의 국내통계->기관별통계->소상공인 시장진흥공단 항목에서 이용할 수 있다. 현재 재래시장에 대한 공식명칭은 전통시장이다. 이 논문이 연구대상으로 삼는 일제시기 재래시장의 법규상 명칭은 1호시장이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공식문헌을 포함한 절대 다수의 문헌들과 언론에서 조선인이 주로 이용하는 노천의 개방 시장을 가리키던 명칭은 재래시장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이런 관습은 이어지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이 논문에서는 재래시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한편 이 시기 일본인들이 주로 이용하던 시장의 법규상 명칭은 2호시장이었으나, 공식, 비공식 문헌을 가리지 않고 가장 널리 쓰이던 명칭은 공설시장이었다. 때로 신식시장, 신식 공설시장 등과 같은 명칭도 사용되었다.  2)시장갈등의 성격, 해석을 둘러싼 논점들에 대한 상세한 정리는 다음을 참조할 것. 조형근(2009).  3)스튜어트 홀에 따르면 계몽주의 시대에 출현한 ‘사회의 과학’은 단일한 발전 경로를 따라 단계적으로 모든 사회들을 추진시킨 여러 힘들에 대한 연구였다. 그 발전 경로 상의 위치에 따라 사회들은 위계적으로 배열되었다. 서양을 모델로 하는 진보의 보편적인 척도라는 생각은 계몽사상이 탄생시킨 새로운 ‘사회과학’의 특징이 되었다. 특히 마르크스의 아시아적 생산양식 개념과, 베버의 세습적 지배형태 및 이슬람과 중국, 인도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연구로 대표되는 근대 사회학적 사유는 이런 경향의 전형으로 간주된다(Hall, 1992: 312-6).  4)서구사회이론들의 서구(유럽)중심주의적 성격과 한계에 대한 총괄적인 비판으로는 영(Young, 1995), 블롯(Blaut, 2000)의 논의를 참조. 로버트 영이 주로 유럽 마르크스주의의 흐름 속에서 서구중심성을 발견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반면, 제임스 블롯은 막스 베버, 마이클 만 등의 사회학자, 로버트 브레너와 같은 맑스주의 경제학자, 린 화이트 주니어, 데이비드 랜디스 등의 역사학자 등 폭넓은 대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5)이 글은 재래시장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화의 한계가 있다. 식민지근대성론을 식민지사회의 일반적 사회변동론의 차원에서 검토하기 위해서는 재래시장 이상의 일반화된 시야가 필요하다. 물론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동일한 양상이 전개되었을 리는 없다. 울퉁불퉁한 요철로 가득 찬 그림을 얻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일제 식민지기는 무수한 식민지근대적 사회갈등들이 분출한 “사회운동의 시대”이기도 했다(김중섭, 2012). 재래시장만이 아니라 무수한 영역들에서 갈등들이 분출하고 있었고, 식민지 주체들은 곳곳에서 의식적 실천을 조직하고 있었다. 소작투쟁이나 노동자파업과 같이 잘 알려진 사안들만이 아니라 교육운동, 형평운동, 학교, 공공기관, 도로 등 공공재의 설치 및 이전 관련 운동 등 수많은 지역의 사안들이 갈등과 집합적 투쟁의 대상이 되었다.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주민들은 “지역에서 발생하는 거의 모든 공적 사안에 대해서 자신들의 판단과 의사를 실현하기 위하여 다종한 형식의 집합행동을 전개하였다”(한상구, 2014: 103). 이 연구는 시론으로 제한되지만, 생활상의 요구에 기반한 다종다양한 공공적 집합행동의 성격을 사회변동론의 차원에서 일반화할 수 있는 첫걸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Ⅱ. 식민지근대적 시장구조의 형성

       1. 일본 시장구조의 변화

    여기서는 식민지 조선의 재래시장이 지닌 구조적 식민지성을 좀 더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 식민권력이 유래한 본국 일본의 시장구조를 간략히 서술하고자 한다. 일본에서 시장제도의 개혁은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산업혁명의 진행으로 도시에 축적되기 시작한 국내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국내 소비자 대중의 수요 충족을 위한 국내 시장제도의 합리적·근대적 재정비로서 시장 공설화의 축과, 농산물 가격 형성력 확보를 목표로 하는 공동출하제도 및 주산지 형성을 핵심으로 하는 농업의 시장경제적 재편이라는 또 하나의 축이다. 이 두 축은 1923년 중앙도매 시장법 제정 및 1932년부터의 농촌경제갱생운동을 통해 통합되었다.

    일본에서 러일전쟁기를 전후하여 본격화된 도시 공설시장제도의 성립과 관련된 긴 논란은 산업혁명기 도시 노동자계급의 형성이라는 문제와 긴밀히 연관된 것이었다. 자본의 원초 축적기를 노동력 재생산 방식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면, 원초 축적기는 노동력이 생산수단만이 아니라 생활수단으로부터도 분리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분리가 진행되면 될수록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생활수단 유통기구로서 시장개혁의 역사적 중요성이 부각된다(原田政美, 1991: 137). 도시 일용품 소비 시장 성립의 역사적 필요성은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다. 이 시장을 통해 소비재가 안정적으로 공급될 때에만 자유로운 노동력 이동이 가능해지며, 이 때 비로소 자본주 의적 노동시장이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도시 일용품 소비시장은 노동시장의 성립을 위한 물질적 기초임과 동시에 산업혁명을 뒷받침하는 핵심적 사회간접자본으로 기능한다. 이 때 도시 소비시장은 특권적·폐쇄적 상인조직(길드, 동업조합, 주중간, 객주·여각 등)의 해체와 같은 상업조직상의 변화, 경쟁체제의 도입과 더불어, 표준가격제 정착, 현금거래제도 및 상설 개시와 같은 거래 관습상의 혁신을 동반하는 근대적 제도로 재편되지 않으면 안 된다(藤田貞一郞, 1986).

    일본에서 공설시장제도의 도입 논란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 아래 진행되었던 것이며, 관련 이해당사자들 간의 지루한 논란이 종식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1918년 8월에 일련의 대도시들에서 발생한 쌀소동이었다는 사실은 이런 점에서 더욱 시사적이다. 나카무라 마사루가 지적하듯이 이 쌀소동은 식량문제라는 형태로 나타난 도시의 노동문제·빈민문제였던 것이다(中村 勝, 1981: 200).

    1923년에 제정된 중앙도매시장법은 이러한 산업혁명적 과제와, 생산자 농민의 이해관계를 가능한 한 통합하려 한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지루한 논란 끝에 최종적으로 실현된 구상은 기존의 도매시장을 중앙도매시장에 통합하고, 생산자까지도 출하조합으로 조직하는 일관 유통경로의 확립이었다. 이런 일관 유통체계의 수립이 이후 1932년부터 진행된 농촌경제갱생운동에서의 공동출하제도 확립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일본 농림성은 계통농회와 산업조합이라는 두 계열의 농업단체를 통해 판매 증가가 기대되는 농산물을 위한 공동판매 경로를 정비하는 데 정책적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특히 농민을 각종 공동출하조직으로 조직화하는 데에는 유통관계 보조금 정책이 주효하게 작용했다. 1934년을 기점으로 농림성의 유통관계 보조금은 한 단계 높은 수치로 증가하였고, 농가소조합 및 농사실행조합이라는 촌락 단체들에 대한 보조금 또한 1930년대에는 대폭 증가하였다. 이를 통해 지역 브랜드의 형성이 용이하게 수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松本武祝, 1997: 194).

    식민지 조선의 경우는 과연 어떠했을까? 제도상으로만 보면 대동소이한 것처럼 보인다. 시장 공설화는 일본보다 앞서서 일찍이 1914년의 시장규칙 발포와 동시에 거의 ‘단숨에’ 성취되었다. 1930년대를 전후하여 농회, 식산계 등 각종 산업단체를 중심으로 한 농산물 공동판매제도가 강화되었다는 점도 일본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실상은 너무나 판이했다. 1914년의 시장 공설화 정책은 기존 재래시장의 상인 집단, 내적 과정에 대한 어떤 개혁도 수반하지 않은 채, 시장의 소유권을 식민권력이 장악하고 공안적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법률적 근거를 확보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1930년대의 공동판매제도 강화는 유통 보조금 제도의 지원에 기반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일본 (독점)자본을 위한 저가의 원료공급제도로 기능하였다. 공동의 품질 관리 및 공동출하를 통한 지역 브랜드 형성 및 가격 형성력의 확보는 ‘식민지’ 조선에서는 애초에 허상에 불과했다. 식민권력은 그런 방향을 염두에 두지도 않았지만, 설혹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려 했더라도 성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식민지 조선의 도시 지역에서는 원격지에서의 주산지 형성을 촉진할 정도로 충분한 소비계층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두말할 나위 없이 조선인 도시 노동자의 생활수준의 저위성이라는 식민지적 구조가 있었던 것이다(松本武祝, 1997: 196).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공설시장제도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던 1918년의 쌀소동의 궁극적인 해결은 국내적인 공설시장제도의 구축으로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을 저가의 미곡생산기지로 재편한 ‘산미증식계획’을 통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식민지 조선과 제국일본은 연결되어 있었다.

    물론 일본의 시장구조 개편 과정 역시 매끄러운 것은 아니었다. 개편의 방향을 두고 농상무성과 내무성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공설시장 설립에 맞서는 소매업자들의 반대운동이 있었으며, 중앙도매시장 창설과 관련하여 기존 영업자들에 대한 보상문제가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일관된 유통체계를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은 시장제도의 개편이 자본축적의 위기와 그에 따른 체제 안정의 문제로서 제기되고 있었다는 데 그 이유가 있었다. 1920년대 초 중앙도매시장법의 제정이 전반적인 유통기구의 재편으로까지 확대된 데는 반동공황 이래 심화된 자본의 위기의식이 작용하고 있었다. 자본측은 이윤율 하락이라는 위기의 주요인으로 높은 생산비를 꼽았고, 다시 높은 생산비의 주범으로 노동자의 높은 생활비=고임금을 지목하고 있었다(原田政美, 1991: 130). 그러나 일방적인 임금하락을 추진하기에는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 치하에서 노동운동이 상당히 고양되어 있었다는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자본측은 생활비를 낮추기 위한 방편으로 유통기구의 전반적인 재편에 주목하게 되었던 것이다.6) 마찬가지로 1930년대 공동출하 및 보조금 지급제도를 핵심으로 하는 농산물 유통체계의 개편은 1925년 이래의 농업공황 및 1930년대의 대공황에 따른 농촌사회의 질서 붕괴 가능성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본 국내시장에서의 일관 유통체계의 성립 과정과 비교할 때, 식민지 조선의 시장경제화와 그에 따른 시장갈등의 대두는 그 식민지적 성격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시장경제화의 진전과 그에 따른 시장갈등의 대두는 산업혁명상의 도시노동자계급 창출이라는 과제와도 무관했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에 대한 대책과도 무관했으며, 농촌사회의 안정적 재생산을 위한 과제와도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시장을 둘러싼 식민지 주체의 대응과 다양한 갈등들은 이런 종류의 거시적 개편과는 또다른 맥락에서 이루어진 시장구조의 재편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그것은 식민지자본주의의 모순을 감내해야 했고, 스스로 기회를 찾아나가던 식민지 주체의 사회적 실천을 매개로 발현하였다.

       2. 재래시장에 대한 폄하와 형식적 공영화

    서구식민주의가 식민화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근대적 문물을 우월한 것, 보편적 것으로 내세우고, 식민지의 제도와 관습을 열등한 것, 특수한 것으로 폄하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제 식민권력 또한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이른바 문명개화의 사명에서 찾고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재래시장이라는 경제활동의 영역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내세우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구조를 발전된 것, 우월한 것, 보편적인 것으로 내세우기 위해서 일제는 조선의 재래시장을 철저히 폄하했다. 재래시장을 묘사하는 핵심적인 키워드는 ‘원시성’이었다. 1910년대에 “경제상태가 애매한 시대에 물물교환에게서 기인한 유습으로서, 오늘날 문명국에서는 … 이미 그 흔적이 사라졌지만, 조선에서는 지금도 … 일용화물의 매매는 대개 시장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조선은 아직 “자연경제”의 영역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菊池武一, 1910: 570, 587). 1920년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총독부 촉탁으로서 시장조사를 전담했던 젠쇼 에이스케는 서울을 비롯한 극히 일부 도시를 제외하면 “국내상업의 대부분은 원시적 경제생활에서 보는 바의 물물교환시대의 유물인 재래의 시장”에서 행해지고 있다고 간주하였다(朝鮮總督府 庶務部 調査課, 1924: 1). 경성제국대학 교수 시가타 히로시는 재래시장을 “중세적, 봉건적 경제조직의 유물”로 보면서, “직접교환적 시장이 구태의연하게 그 일반 민중에 대한 상거래 상의 지위를 파악하고 있다”고 평가했다(四方 博, 1929). 1930년대에 들어서도 이런 생각은 의연히 지속되었다. 역시 조선총독부 촉탁이었던 무라야마 지준은 조선의 시장이 “화폐의 유통이 거의 없이 물물교환을 하는 원시시장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간주하였다(村山智順, 1932: 93). 일제 식민권력 측의 재래시장에 대한 가치절하와 폄하는 식민지기 내내 거의 일관된 것이었다.

    조선의 재래시장이 이토록 원시적이고 열등한 구조인 한 그것은 자연스럽게 도태되고 신식의 상설시장으로 대체될 것이었다. 1910년대 후반에 시장의 수는 감소하면서 거래고는 오히려 증가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데 대해 조선총독부는 이렇게 평가한다. “시장 수는 해마다 감소함에도 불구하고 그 거래고가 오히려 증가를 보이는 것은, 사회의 진보에 따라 상설점포를 개설하는 자가 많아지고 교통기관이 갈수록 정비되는 데 기인하여 자연스럽게 시장의 도태가 초래됨과 동시에, 일면으로는 시장에서 거래의 범위가 확장된 데 덧붙여 시장규칙 시행의 결과 거래상의 폐해가 점차 제거된 데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朝鮮總督府, 1916: 185).7) 시장의 자연도태를 예상하는 한 시장정책에 장기성, 체계성이 결여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재래의 정기시장이 자연스레 소멸하는 대신 그 자리는 신식 건물과 합리적인 거래방식, 유통망을 갖춘 신식의 상설시장이 대체해갈 것이었다.

    식민지의 전통적 시장구조가 폄하되는 만큼 근대적인 대안이 식민권력에 의해서 새로운 보편으로서 제시되어야 했다. 식민권력이 축조한 시장구조의 정책적 기초는 1914년의 시장규칙 제정을 통해 성립하였다. 여기서 핵심은 모든 시장을 원칙적으로 지방의 공공단체, 즉 행정기관만이 소유하고 경영할 수 있는 시장공영화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1885년부터 1921년까지 일본 본토와 식민지에서 제정된 64 사례의 각종 시장규칙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개설자 제한조치였다”(中村 勝, 1981: 42). 이 강력한 허가주의는 국권주의적 의식을 기초로 하고(朴慶植, 1973: 98), 표면으로는 공익을 내세우되(中村 勝, 2002: 301), 실제로는 “민도가 낮은 조선인들 사이에는 공동시설을 하는 경우가 적다”(四方 博, 1929: 138)는 인식에 기반한 것이었다.

    조선인의 낮은 민도를 이유로 이 공영화 조치 속에는 시장의 개설, 폐지, 분시, 이전 등에 관한 처분권이 지방행정권력으로 독점된 것 이외에 어떤 구체적인 시장개혁 방안도 담겨 있지 않았다.8) 이 조치에는 시장의 경영을 위한 공적 재원의 확보 방안도, 자신들이 비판하던 각종의 구태적 상관습을 폐지할 수 있는 방안도, 무차별적인 시장 개설 경쟁을 제한할 수 있는 시장권 제한조치도 부재했다. 모두 일본의 시장규칙 속에는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이것은 공영 없는 공영화였다.

    재래시장에 대해서는 공영 없는 공영화를 실시하는 한편, 실질적인 시장 공영화는 조선 거주의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는 2호시장, 소위 공설시장의 설립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1919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개설된 2호시장은 운영주체가 공공단체로 지정되어 있었고, 실질적 공영제가 추진되었다. 2호시장의 상인들은 임차상인이었으며, 공공단체에 사용료를 지불하게 되어 있었다. 공공단체는 이들의 경영을 감독할 근거로서 자세한 경영규칙(心得)을 구비하게 하고 관리하였다(文定昌, 1941: 74).

    공영 없는 공영화와 동시에 식민권력이 실행한 것은 재래시장에 대한 공안적 개입이었다. 시장규칙 제18조는 도장관은 물론 헌병, 경찰이 시장의 경영을 직접 단속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경찰관이나 헌병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시장의 영업자나 출입자에 대해 공안교통이나 위생의 취체에 관한 임시조치를 할 수 있었다.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라는 포괄적인 규정에 따라 경찰의 개입과 통제는 언제든 자의적으로 가능했다. 또한 제21조는 제18조에 의한 경찰관이나 헌병의 명령을 위반하는 자는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고 규정함으로써 강제력을 부과하였다.

    심지어 시장세를 순사가 징수하고, 부정신고 혐의가 있을 때는 엄청나게 구타하는 경우도 있었다(松田利彦, 2006: 374-5). 헌병 분대와 경찰서가 “관할 부락 내의 장날에 헌병보조원, 조선인 순사, 순사보를 변장시켜 주막에 잠입시킴으로써, 인민의 담화 중 정치, 경제, 종교, 교육, 징세, 농·상·공업에 관련된 사항, 기타 여러 부설(浮說), 항설(巷說) 등에 이르기까지” 수집하고 정리하였다(公州憲兵隊本部·忠淸南道警察部, 1915: 松田利彦, 2006: 362에서 재인용). 특히 3.1운동 후 식민권력은 재래시장 주위에 목책을 설치하고 출입구를 지정하거나, 단속원을 위한 사무시설을 정비하고, 재래시장에 대한 단속을 수시로 강화하였으며, 개시 당일에는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단속에 주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경찰의 눈을 피해 불온한 언동을 농하는 자가 있고”, “치안을 문란하게 하는 선전선동”이 발발하고 있었다(朝鮮總督府 庶務部 調査課, 1924: 514 이하).

       3. 종속적 시장경제화의 모순적 진전

    재래시장에 대한 통일적이고 체계적인 전망이 부재한 가운데 식민지 조선의 재래시장은 식민지자본주의의 진전 속에서 점차 구조적 변화를 겪고 있었다. 그 구조적 변화의 특징은, 재래시장의 폭발적 증가, 전체 유통경제에서의 비중 감소, 시장경제화의 진전, 그리고 일본자본주의를 위한 집산기구화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시장의 양적 성장을 살펴보자. 재래시장 수는 1911년에서 1941년 사이에 47.0%가 증가했고,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서 재래시장과 신식시장을 별도 집계하기 시작한 1920년부터 1941년 사이에도 28.9% 증가했다. 거래고는 1911년에서 1941년 사이에 약 10.4배나 증가했고, 1시장당 거래고는 약 7.1배 증가했다. 물가 수준을 통제한 실질거래고는 동기간에 약 3.5배 상승하였으며, 1시장당 실질거래고 역시 약 2.4배 증가했다. 일제 식민지기에 재래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9) 서론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런 현상은 사회경제적 근대화의 진전과 더불어 재래의 정기시장이 소멸하고 상설시장화된다는 근대화이론적 시장이론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태다. 원시적 유제로서 조선의 재래시장이 자연스럽게 도태되리라던 식민권력의 예상과도 완전히 어긋난 현상이었다.

    둘째, 이런 폭발적인 수적 증가에도 불구하고 재래시장이 전체 유통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역설적으로 급속하게 감소하고 있었다. 시장거래고 또한 급격히 증가했지만, 시장을 경유하지 않는 점포거래액의 증가폭이 훨씬 컸다. 기무라 미츠히코는 1939년 임시국세조사의 상업체 조사 자료를 활용하여 점포거래액을 얻고 이를 시장거래고와 비교하는 방법으로 식민지 후기 조선에서 점포거래액이 시장거래고보다 훨씬 컸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木村光彦, 1989: 301-3).

    셋째, 재래시장의 종속적 시장경제화가 진전되었다. 1910년대에 농가는 연간 생산물 중 평균 2~30% 정도를 상품화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이헌창, 1990: 245), 1930년대 말에는 연간 생산물 중 최소한 50% 이상이 상품화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文定昌, 1941: 127). 농가는 생산물의 상품화를 위해 주로 재래시장을 이용하였다. 이런 상품경제화의 진전은 동시에 대외종속적인 것이기도 했다. 기무라는 1920년대가 되면 조선의 재래시장이 국제분업관련에 완전히 포섭되기에 이르렀다고 평가한다. 이 시기 재래시장의 거래액이 전체 농산액과는 상반되는 움직임을 보인 반면, 오히려 - 일본을 주대상으로 하는 - 대외 무역액과 밀접하게 연동했다는 것이다. 이는 재래시장이 조선 내의 자체 유통기구로서가 아니라 식민지적 무역품의 집산기구가 되었음을 보여준다(木村光彦, 1989: 290). 조선의 미곡 가격 변동은 일본 자본주의를 매개로 조선의 시장체제가 세계시장에 편입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조선의 미곡 가격은 1차 대전 기간 동안 다섯 배 가까이 상승한 후 1925년까지 정체하다가 1925-31년 동안 약 60% 폭락했다. 이는 일본의 미곡 가격 변동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었고, 쌀과 긴밀한 대체재 관계에 있는 보리, 콩과 같은 잡곡의 가격 또한 비슷한 경로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가격 등락은 1차대전기의 공급 부족과 1920년대 중반에 촉발된 세계적인 농업공황의 영향에 따른 것이었다(車明洙, 1991: 73-4).

    넷째, 종속적 시장경제화의 진전 이면에서는 시장원리 자체를 부정하는 시장의 공동매매기구화가 진행되었다. 일제 당국에 의해 반관반민 단체로 조직된 농회, 산업조합, 금융조합 등이 1930년대 이후 유통기구화하면서 재래시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었고, 따라서 농민들 간의 잉여생산물 교환이나 지역 거주 중간상인에 의한 직접 재판매와 같은 수평적 교환의 비율은 현저하게 감소하였다. 재래시장은 농민의 생산물 판매라는 측면에서는 공장원료에 대한 공급시장으로 전화되었고, 구매의 측면에서는 공장 생산품의 판매시장으로 변화하였다(文定昌, 1941: 118-9). 문정창의 추정에 따르면 1938년 제 단체가 관여하는 거래액은 정기시장 거래액의 74%에 이르렀다(文定昌, 1941: 220). 재래시장은 농민과 지방민 사이의 수평적 교환기구에서 대자본과의 수직적 교환기구로 급속히 전화하고 있었다.

    농회, 산업조합, 금융조합 등이 실시하는 공동판매와 공동구매는 강제적이었다. 생산자 농민이 자유로이 출하시기와 출하량, 거래상대를 선택할 수 없고, 가격결정 과정에 참여할 권리도 없는 강제매매의 상황 속에서 재래시장은 조선에 진출한 일본자본, 즉 ‘유치공장(留置工場)’의 원료공급 기관화를 피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와 같은 공동브랜드화나 보조금 지급도 없었다. 이런 현상은 공산품과 원료 농산물간의 ‘협상가격차’로 인한 구조적인 불균등 교환(文定昌, 1942) 수준을 넘어서는 시장원리의 부정이었다. 상이한 우클라드간의 교환이 외형상 시장교환의 형태를 띤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구조화된 불균등 교환이 강제되는 상황이라면 이것을 시장교환의 일반화라고 보기는 어렵다.10)

    요약하자면 일제 식민권력이 주도적으로 창출한 시장구조는 여러 측면에서 자기 모순적이었다. 외형적으로 볼 때 식민권력이 강제한 시장구조의 변동은 본국에서의 근대적 시장구조 개혁을 이식하고 전파하는 것처럼 보인다. 도시소비자-노동자계급의 생활임금 안정을 목표로 삼는 시장의 공영화와 농민의 가격협상력 유지를 위한 공동출하제도를 뼈대로 하는 일본에서의 시장제도 개혁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형식적으로 반복되었다. 하지만 시장의 공영화는 재래시장의 내적 시장과정이 초래하고 있는 모순을 전혀 개혁하지 않은 채, 시장에 대한 처분과 공안적 통제의 힘을 식민권력에 부여하는 것으로 귀착되었을 뿐이다. 재래시장의 수와 거래고 모두 대폭 증가했지만, 전체 유통경제에서의 비중은 현저히 감소하였다. 이는 조선인이 참여자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재래시장이 경제 순환에서 차지하는 구조적 위상이 하락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재래시장은 일본자본주의와의 무역을 매개로 종속적 자본주의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시장경제화의 진전 자체는 강제적인 공동판매 및 구매의 비중이 증가하면서 시장원리 자체의 부정이라는 모순적 결과를 초래하고 있었다. 식민권력은 재래시장의 원시성을 강조하면서 식민권력에 의한 근대적 시장구조로의 이행의 당위성을 선전했지만, 어떤 면에서도 그러한 당위성은 실현되지 않았던 것이다.

    6)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양당 정치를 대표하고 있던 헌정회와 정우회가 당시 보인 입장은 이런 점에서 분명히 체제 위기에 대한 자본의 인식을 대변하고 있었다. 헌정회는 1921년 10월에 발표한 “물가조절책”에서 “현재 우리나라에서 물가가 낮지 않은 까닭에 무역의 쇠퇴를 초래하고 국민의 생활을 위협한다”고 지적하면서 “생활필수품 가격 하락과 더불어 임금의 정리를 행함”으로써 “재계의 안정 회복을 촉진한다”고 주장하였다(憲政會, 1921: 43). 정우회 또한 1921년 4월에 이른바 “생활개선론”을 주창하면서, 공설소매시장의 개선은 “생활비를 경감시켜서 일본국을 살기에 적합한 낙토로 만들뿐만 아니라, 생활비의 경감과 능률의 증진으로 우리나라의 생산비를 감소시켜 이 나라로 하여금 공업의 대발전에 적당한 조건을 구비하게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山本条太郎, 1921: 28).  7)이는 『朝鮮總督府施政年報』 1916년판의 평가지만, 동일한 평가가 1917년판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8)규정상 시장에 대한 처분권은 도장관(이후 도지사)에게 귀속되었지만, 실제로는 처분에 관한 권한은 군이, 경영에 관한 사항은 읍·면이 관장하였다(허영란, 2009: 81).  9)자세한 추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조형근(2005: 54-76)  10)자유판매와 공동판매의 가격비교 사례는 이런 구조적 불균등 교환 상황을 잘 보여준다. 한 사례에 따르면 고치 판매의 경우 모든 등급에서 공동판매 가격이 자유판매 가격보다 30% 정도 낮았다. 심지어 자유판매에서는 3등급 이하 판정이 없었던 반면, 공동판매의 경우는 4등급과 등외판정까지 나오고 있었다(동아일보, 1936.6.20.). 자세한 논의는 다음의 논의를 참조하라. 조형근(2005: 160-2).

    Ⅲ. 식민지 주체의 행위와 시장구조의 변이

    지금까지 일제 식민권력의 작용에 의한 시장의 구조적 변동 상황을 개괄해 보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러한 구조변동은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의 행위, 사회적 실천을 매개로 해서 진행된 과정이었으며, 거기에 대응하는 식민지 주체의 사회적 실천을 통한 예정되지 않은 변이를 그 자체 수반한 것이기도 했다. 식민지 주체의 실천은 식민권력이라는 압도적인 힘이 구축한 구조적 압력에 의해 규정되고 제약되었지만, 바로 그러한 구조의 규정 속에서 구조 자체의 방향을 뒤틀고 예기치 않은 변이를 발생시키고 있었다.

       1. 재래시장 대 공설시장, 민족적 대립구조의 축조

    전술한 바와 같이 재래시장에 대한 일제 식민권력의 기본적 방침은 공안적 통제를 제외한 실질적 방임에 가까웠고, 이에 따라 시장의 공영화는 소수의 재조 일본인을 대상으로 제한적으로 진행되었다. 1919년 12월, 경성에 두 곳의 2호시장이 설립된 이래 전국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한 이 일본인 대상의 2호시장, 세칭 공설시장 혹은 신식시장은 표면적으로는 1차대전 말기에 폭등한 물가의 안정적 관리가 목표였다. 일본에서도, 식민지 조선에서도 공설시장은 고물가로 고통받는 도시 소비자계층의 생활안정을 위한 공적 기구라는 명분에서 구상되고 설치되었다. 경성부의 경우 1911년의 물가지수를 100으로 할 때, 1919년의 물가지수는 259에 이르고 있었다(京城府, 1941: 652).

    하지만 공설시장이 설립된 지역들과 공설시장이 설립되기 시작한 1919년 12월이라는 시점을 돌이켜보면 공설시장의 설립을 단지 물가안정이라는 사회정책의 차원에서만 이해하기는 어렵다. 만약 물가안정만이 유일한 목적이었다면, 공설시장은 물가상승으로 훨씬 고통받고 있던 조선인을 주대상으로 구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설시장은 곧 일본인 시장이었다. 공설시장은 일본인 거주지역을 중심으로 건설되었고, 일본인 소비자들의 취향에 부응하는 상품들을 주로 거래했으며, 상인들 또한 대부분 일본인들이었다. 식민권력은 조선인을 주고객으로 삼는 공설시장은 이후에도 결코 건설하지 않았다. 1928년 현재 존재하던 16개의 2호 공설시장은 모두 일본인 인구가 3,000명이 넘는 부(府) 및 지정면 지역에만 설치되어 있었다. 시가타 히로시는 이들 일본인 대상의 공설시장이 “일반 조선인의 경제와는 그 점포의 경영자 일부가 조선인이라는 것 이외에, 많은 상관이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공설시장은 일종의 상설 소매점포로서 조선인 경제에는 대단히 사소하게 기능하는 데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있었다(四方 博, 1929).

    물가안정이라는 표면적 목적 이면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1919년 12월 시점 이전에 일어난 3·1운동 과정과 시장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만세운동의 과정에서 재래시장은 상인들에 의한 철시와 개시투쟁이 빈발하고, 수많은 만세시위가 발생, 증폭, 확산되는 결정적인 결절점으로 기능했다. 특히 운동 과정에서 출현한 일본인 거주자들에 대한 불매(不買·不賣)운동은 식민권력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조선인 상인들은 일본인 거주자들에 대한 물품판매를 거절했고, 조선인을 상대하던 일본인 영업자들은 판매고의 격감으로 고통을 받았다. 요컨대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경제적 거래가 격감했다. 공설시장은 시장이 민족적 대립의 진원지로 전화하던 시점에 일본인의 생활안정을 위해 등장한 기구였다(中村 勝, 2002: 251).

    일본인 대상의 신식 공설시장이 1919년 3·1운동 이후에야 급격히 추진되었다는 사실은 시장의 민족적 분절, 이원화가 식민권력의 예정된 프로그램이 아니었을 수 있음을 함축한다. 이는 1914년 시장규칙 제정 당시에 2호시장, 즉 신식의 공설시장을 규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설립을 위한 어떤 구체적인 움직임도 없었다는 데서도 입증된다. 최초의 2호시장이 1915년에 등장했음에도 『통계연보』에서 2호시장 항목을 반영하기 시작한 것이 1920년부터라는 사실도 이를 보여준다.11) 전술한 바와 같이 애초에 식민권력은 재래시장의 자연도태를 예상했고, 일본인 정주의 도시지역에서도 재래시장의 소멸과 신식시장으로의 자연스런 전화를 예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일본인 위주의 2호 공설시장체제의 수립과 이를 통한 민족적 대립구조의 축조라는 현상은 식민권력의 예정된 프로그램 속에서가 아니라, 3·1운동 과정에서 보여준 식민지 주체의 상거래 단절이라는 실천 속에서 강제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격화된 민족간 대립의 표상 속에서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민족상권 수호 담론이 부상하였다. 조선인들은 도시생활자의 수가 증가하고 공설시장 이용에 대한 욕구가 늘어나는 경우에도 일본인 대상의 공설시장을 이용하기보다는, 바로 그 인근에 조선인 전용의 일종의 무허가 공설시장을 가로에 형성하고 그것을 이용하였다(文定昌, 1941: 200).12) 시장의 민족적 분절에 대한 순수히 경제적인 접근은 구매력 있는 조선인 도시 생활자들이 별도의 무허가 공설시장을 이용하는 행태를 설명할 수 없다. 고석규는 여기서 민족상권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비롯된 특별한 근대성의 경험 때문에 장시는 민족상권이란 이름으로 장시의 근대성을 채워나갔던 것이다. 우리의 전통상권이란 이미지가 일제에 의해 장악된 근대적 상설시장과는 반대로 많은 조선인들을 끌어당겼던 것이다”(고석규, 1998: 236).13)

       2. 완강한 재래시장 선호

    재래시장이 민족상권이라는 표상을 얻는 과정은 동시에 재래시장이 조선인 일반 민중들의 생활상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조선인들에게 재래시장은 단지 경제적 거래기구로서만 아니라 총체적인 생활의 중심지였고, 망국의 상황에서 유지되고 있는 조선인 사회의 표상이었다. 이는 조선인 시장참여자들, 특히 압도적 다수를 이루고 있던 생산자 농민들이 판매와 구매의 시점 이외에도 지나칠 정도로 자주 재래시장에 출장(出場)하고 있었던 데서도 드러난다.

    물론 농민의 재래시장 선호는 경제적인 동인을 갖고 있었다. 일본 자본주의를 축으로 한 식민지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인해 가격의 불확실성이 증가하였다. 가격은 가시적인 풍흉이나 국내적인 수요변동이 아니라 파악하기 힘든 미지의 변수들에 따라 요동쳤다. 판매자로서 농민은 정보 획득의 필요성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시세를 파악하고 출하량, 출하시기를 조절하기 위해서도 잦은 출장은 필연적이었다.

    하지만 정보 획득의 필요성이 농민과 일반 조선인들의 재래시장 선호를 설명하는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농민들은 정확한 정보를 획득하기도 어려웠지만, 설혹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정보를 실질적인 판매력으로 전화시킬 수 없었다. 농민의 저열한 경제적 능력, 보관시설의 미비, 수확기에 집중되는 조세와 대부 반환의 요구 등에 대한 대응의 긴박성으로 인해 농민은 적절한 출하시기를 선택할 수 없었다. 결국 농민의 출하기는 수확기 직후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판매자로서 농민의 정보 획득 필요성에 따른 재래시장 선호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시세 정보 획득이 잦은 출장의 주된 원인이었다면, 농민의 출장은 생산물의 출하시기를 전후하여 집중될 것이다. 하지만 농민의 출장 선호는 일관된 현상이었다.

    농민들은 재래시장에 가는 것을 얼마나 좋아했을까? 1932년 당시 전남 농회장이던 정교원에 따르면 전남의 경우 농가 1호당 평균 구성원 5명 이상에 연간 노동 가능 일수가 약 650일에 달하지만 실제 노동 일수는 409일에 불과하여 241일은 노동에 종사하지 않고 있다. 무라야마 지준은 이 자료를 근거로 연간 241일의 비노동일이 최소한 한 명 이상의 가구원의 출장에 의해 낭비된 것이며, 이는 농민의 노동 가능일 중 2할이 시장 출장으로 소비되고 있는 셈이라고 주장하였다(村山智順, 1999: 175).14)

    물론 조선인의 재래시장 선호는 식민지기 이전부터 주목된 현상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재래시장 선호를 노동력의 손실로 간주하게 된 식민권력이 1930년대 초중반 이래 개시일 축소를 포함한 재래시장 억압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선호가 억제되기는커녕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재래시장 억제정책은 결국 실패로 귀결되었다. 식민권력은 농민의 재래시장 선호에 대한 억제를 포기하고, 1938년을 기점으로 오히려 재래시장을 식민정책의 선전과 동원을 위한 기구로 활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허영란, 2009). 이런 점에서 권력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완강하게 지속된 이 재래시장 선호는 반복되고 축적된 제도화된 행동패턴이었다.

    정보 획득이라는 목적과 식민권력의 억압을 넘어서 농민이 재래시장을 선호하게 된 이유는 재래시장이 조선인들에게 일종의 유토피아, 해방의 공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시장은 단지 화물수급의 기관에 그치지 않고, 오락기관의 설비가 결핍된 지방에서는 시장이 민중 위안의 낙천지(樂天地)가 되며, 그들은 시장에서 혹은 친한 벗과 서로 만나 음식을 함께 먹고, 혹은 새로운 보도 듣기를 즐기며, 혹은 시장에서 금융의 편의를 얻는 등, 단순한 조선 사회에서는 시장이 경제, 사교, 오락 등에 모자람이 없는 기관”이었다(朝鮮總督府, 1929: 176), 재래시장은 문물의 전파 및 소개에 큰 역할을 수행하는 장소이기도 했다(文定昌, 1941: 150-1). 재래시장은 농민의 일상이 연장되는 공간임과 동시에 그 일상이 단절되는 해방의 공간이었으며, 촌락의 밀도 높은 인간관계로부터 해방되는 공간임과 동시에, 더 넓은 인간관계와 접촉하는 상승의 입구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결과는 매우 역설적이다. 재래시장이 조선인에게 해방의 공간으로 간주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곳이 식민권력에 의해 구태의연한 전통적 형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던 데 기인하기 때문이다. 식민권력이 재래시장 상당수를 실질적 공영화를 통해 개혁했다면 농민의 지나친 출장 선호라는 현상은 구조적으로 제약될 수 있었다. 공설시장은 일정한 건물 속에 폐쇄되어 있었고, 허가받은 임대상인을 제외한 생산자 농민의 판매가 금지되어 있었다. 반면 전통적 형태가 유지된 재래시장은 노천시장으로서 공간적으로 개방되어 있었고, 참여를 제한하는 진입장벽은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새로운 문물과 뉴스가 자유롭게 교환되었고, 우발적인 만남과 유흥, 오락의 기회가 넘쳐났다. 농민의 재래시장 선호는 식민지자본주의의 전개와 공영 없는 공영화라는 식민지적 구조변동이 빚어낸 예기치 않은 변이였다.

       3. 저항의 장소로서 재래시장

    재래시장이 조선인 경제생활의 중심이자 사회생활상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됨으로써 초래된 중요한 결과 중 하나는 재래시장이 저항의 중심적 공간으로 기능했다는 사실이다. 3·1운동과 6·10 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등의 저항운동에서 재래시장이 시위의 중요한 거점으로 기능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정호기, 1998;. 中村 勝, 2002; 조형근, 2005). 3·1운동 당시의 시위 횟수나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재래시장을 이용한 시위가 다른 시위보다 더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정호기, 1998: 243). 대중들은 재래시장의 시공간적 주기에 맞추어 시위를 계획했고, 시장권의 연결망을 통해 시위를 확산시켰다. 남한 지역의 경우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북한 지역의 경우 약 2/3 정도의 지역에서 재래시장을 활용한 시위가 행해졌다(정호기, 1998: 245).

    무라야마 지준은 조선의 재래시장이 도로에 개설된 노천시장이라는 사실에 중요한 특색이 있다는 데 주목한 바 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도로에서 개설되는 이상 재래시장은 폐쇄될 수 없고, 특권적 상인집단이 장악할 수도 없으며, 대중이 특정한 구역으로 집결할 수도 없어서 참여자들 간의 수익 차이도 최소화될 수 있었다.15) 이런 개방성과 수평성 속에서 이 도로시장은 “조금의 계급관념 또는 배타관념도 없이” 기능하고 있었다. 요컨대 조선의 재래시장은 공도(公道)의 노면에 세워져서 누구라도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평등한 공적시장이었다(村山智順, 1932: 111).

    재래의 정기시장이 갖는 저항성에 대해서는 일찍이 미하일 바흐친이 주목한 바 있다. 그는 “민중의 시장이 서는 광장”과 그 광장에서 벌어지는 카니발-축제의 저항성을 연관시켰다(Bakhtin, 1968[2001]: 32).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 고귀한 것과 비천한 것의 위계가 전도되고 전복되는 카니발적 삶이 공개적, 집합적으로 경험되는 가장 중요한 장소가 바로 시장이었다. 축제와 결합하는 광장으로서의 정기시장은 중세의 공식적인 세계 내부에서 독특한 제2의 세계로 존재하며 여기서 카니발의 참석자들은 ‘광장의 군중’으로 변모하여 “스스로를 주인으로 여기는 참여자”가 된다(Bakhtin, 1968[2001]: 388).

    아난드 양은 영국 지배하 인도 북동부의 비하르주에서 지역 시장(bazaar)들을 대상으로 식민지 정부, 인도인 엘리트, 민중들이 보여주는 복잡한 통합과 이산의 다면성을 분석한 바 있다(Yang, 1998). 1920년에서 21년 사이 간디와 인도 국민회의가 주도한 불복종 운동의 과정에서 시장은 집합적 정체성으로의 통합(유토피아)과 무수히 특이한 아이덴티티들로의 분할(헤테로토피아)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인도인 엘리트들은 시장에 모인 군중들을 향해 민족주의적 호소와 함께 불복종과 비폭력을 강조했지만, 이 호소에 호응한 시장의 군중들은 곧잘 식민주의의 지배 기관들에 대한 물리적 공격으로 나아갔고, 나아가 인도인 지역 엘리트들에 대한 폭력과 샤리바리를 수행하기도 했다(Yang, 1998, 4장 참조).

    어느 경우든 중요한 사실은 시장이 권력을 향한 분리와 민중을 향한 연대를 낳는 거점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서구의 카니발 시장에서 전복의 에너지가 지배층이 거부할 수 없었던 민중의 강고한 관습(카니발)에서 유래했다면, 이민족이 지배하는 식민지 사회의 재래시장은 시장의 민족적 분리와 전통적 형태 속에서 저항의 에너지를 폭발시키고 있었다. 식민지 조선의 경우 재래시장에서 저항 에너지의 분출을 가능케한 또 다른 구조적 조건은 시장의 내적 근대화-시설 개선을 외면한 채 형식적 공영화만 선언한 식민권력 그 자체가 제공했던 것이다.

       4. 해결되지 않는 시장갈등과 식민지 주체의 집합적 실천

    일제 식민지기의 재래시장에 대해 정보를 알려주는 신문기사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재래시장을 둘러싼 무수한 갈등들이었다. 시장갈등은 1920년을 경과하면서 증가하여 전국적으로 진행되었고, 아무리 짧아도 수개월, 보통 2~3년을 끌었으며, 긴 경우에는 10년을 넘기기도 하였다. 갈등은 대중의 다양한 집합행동을 수반해서 관공서 쇄도, 연서와 진정서 제출, 시민대회 개최, 시위, 세금불납, 공직사퇴, 도로파괴에 이르기까지 상승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고 있었다. 일제시기 신문들의 사회면은 온통 재래시장을 둘러싼 갈등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인다.16) 시장갈등은 매우 다양한 사안을 둘러싸고 벌어졌지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시장의 신설, 이전, 분시, 폐지 등 재래시장 자체의 처분을 둘러싼 이웃 동리간 갈등이었다.

    1) 갈등의 구조적 원인

    왜 이런 종류의 시장갈등이 그토록 많이 분출되었는지 그 구조적 원인을 살펴보자. 첫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의 농촌이 지닌 근본적인 경제적 취약성에 있었다. 1910년대 후반의 호경기 이후 1920년대 일본의 반동공황, 1925년 이후의 국제적 농업공황, 1930년대의 세계대공황 등을 거치면서 조선 농촌의 경제는 갈수록 피폐해져갔다. 식민권력의 선택적이고 국지적인 공업화 정책으로 인해 영국이나 일본의 경우와는 달리 농촌공업의 발달과 결합한 농촌시장의 성장 역시 진전되지 못했다.17) 이런 상황에서 재래시장은 생존의 강구라는 소극적 측면에서든, 발전의 추구라는 적극적 견지에서든 농촌촌락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기회였다. 재래시장을 신설하거나, 이웃마을의 시장을 옮겨오거나 시일을 나누는 것, 또는 폐지하는 것은 한 촌락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경제적 기회였고, 다른 촌락의 입장에서는 생존의 위협을 초래하는 사건이었다.

    둘째, 조선의 전통적 시장구조 속에서는 우시장과 약령시, 모시시장 등 극히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면 특산물시장은 발달하지 않았다. 물론 지역적 특산물 자체는 존재했지만, 원격지 교역의 미발달로 인해 특산물시장화에 기반한 시장간 분업의 진전과 상호의존성의 심화는 발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특산물의 지역브랜드화 및 계통출하가 진전되어야 했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식민권력은 일본에서와는 달리 이러한 개혁을 사실상 방기하였다. 이는 식민지 조선의 재래시장 대부분이 동형적인 종합시장으로서 치열한 상호경쟁, 나아가 갈등의 상태에 놓일 가능성이 높았음을 의미한다.

    셋째, 식민권력이 재래시장의 경영과 관리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재래시장의 처분에 관한 권한만 독점한 공영 없는 공영화는 전술한 구조적 조건들이 장기적인 갈등으로 전화하게 만든 구조적 조건으로 작용했다. 재래시장의 신설, 이전, 분시, 폐지 등을 둘러싼 갈등에 대한 해결권한은 전적으로 지방의 행정당국, 즉 식민권력에 있었다. 하지만 일선의 식민권력에게는 이러한 갈등을 해결할 재정적 능력과 전망이 부재했다. 식민권력이 선택한 대응전략은 갈등하는 이웃마을들 간에 시장의 유치나 유지를 위한 자원동원을 부추기거나, 자체적 합의를 유도하는 것, 결국 결정을 끊임없이 연기하는 것이었다. 이웃마을간의 자원동원 경쟁은 무한경쟁과 갈등의 심화를 초래할 뿐이었다. 자체 합의의 유도는 공적 재원이 투입된 보상물이 제공되지 않는 한 요원한 것이었다. 갈등의 해결은 끊임없이 지연되었고, 지루한 소모전 양상 속에서 식민권력의 무책임성에 대한 비판이 부상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시장갈등은 일상의 수준에서 식민권력의 무능력이 폭로되는 계기였다.

    2) 시민주체의 성장과 집합행동의 방법론 발전

    재래시장의 참여자는 일반농민, 상인, 중개인, 이동상인, 도시상인 자본의 출장원, 주막업자 등 매우 다양했지만, 일제 식민지기를 통해 가장 중요하게 부상한 주체는 이러한 집단들을 대부분 포함하면서도 경우에 따라 시장촌락의 비상업 종사자 주민(지주와 양조장 등 약간의 농촌공업 종사자들, 일고 노동자들)이나 심지어 부재한 재래시장을 유치하고자 집합행동에 나선 주민들까지 아우르던 ‘시민’이라는 집단이다.18)

    시민이라는 용어는 매우 의식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시장의 신설, 이전, 분시 등을 추진하거나 반대하는 갈등의 참가자들은 자신들의 집합적 주체성을 표현하는 단어로 압도적으로 시민이라는 용어를 선택하고 있었다. 많은 경우에 이들은 시장번영회, 시장기성회 등 특정한 형태의 조직화에 나섰다. 시장갈등의 과정에서는 각종의 집합행동을 주도하고 참여했으며, 시장의 유치나 발전을 위한 자원동원(기부금의 모금이나 토지 기부, 노동력 제공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특히 이들 시민이 보여준 집합행동의 방법론은 매우 인상적이다. 식민권력이 시장에 대한 행정적 처분권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민의 집합행동은 대부분 권력을 향한 위력 과시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수많은 시장갈등이 반복되면서 집합행동의 뚜렷한 양식화가 관찰된다는 점이다. 갈등의 시간적 경과와 갈등의 강도는 특정한 패턴을 띠면서 높은 상관관계를 맺게 되었다. 초기 단계에서 집합행동은 시민들의 관공서 쇄도와 질문으로 발단되며, 이어서 조직적인 요구를 담은 연서나 진정서 제출이 실행되었다. 다음 단계에서 집합행동은 요구와 집합행동을 결합한 옥내에서의 시민대회로 진전되었다. 여기까지가 식민권력이 허용하는 합법성의 경계 안에 있는 집합행동이라면, 갈등이 더 한층 심화될 경우 시민들은 불법적인 관공서 앞 농성과 옥외시위로 나아갔고, 지역사회의 지배구조에 타격을 가하는 (면협의원, 읍회의원 등의) 공직사퇴로, 심지어 세금불납으로까지 나아가기도 하였다. 합법성의 경계가 뚜렷했기 때문에 상당수의 집합행동은 시민대회 수준에서 머물렀지만, 경계를 뛰어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집합행동의 양식화와 일반화가 ‘권력에 대한 투쟁을 통한 학습’의 측면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시장갈등의 당사자들은 스스로를 의식적으로 시민이라는 집합적 주체로 표상하였고, 자신들의 조직을 결성했으며. 호혜적인 상호원조와 권력에 대한 집합행동의 양식을 터득해가고 있었다. 식민지 주체들이 이렇게 치열하게 주체화의 양식을 개발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식민권력의 권한 독점과 책임 방기라는 재래시장의 구조적 모순에 있었다.

    3) 권리-의무 의식의 성장과 공론장의 형성

    시장갈등과 관련된 식민지 주체들의 집합행동 과정은 지배하는 식민권력과 피지배 식민지인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심화를 동반하였다. 무엇보다도 재래시장을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고 지역사회의 발전을 추구하며, 민중의 생계를 보장하는 것이 “인민의 복리를 책임져야 할 당국이 마땅히 책임져야 할 의무”라는 인식이 부상하고 있었다. “대저 일면(一面)은 면민의 복리를 지배하는 기관인즉 만일 면의 복리가 될만한 사(事)이라 하면 백난(百難)을 극복하고 기기도(其企圖)하는 것이 면 당국의 책임이 아닌가? 대저 시장은 설치 여하에 딸하서 기면(其面)의 상공업의 발전과 복리를 좌우하는 것”이라는 준엄한 비판이 권력과의 갈등 과정에서 싹트고 있었다(東亞日報, 1933.1.15).

    1936년 대전읍 본정의 우시장을 영정으로 이전하는 것과 관련된 갈등에서, 부회의 결정으로 시장을 뺏기게 된 본정 주민들은 수백 명이 모여 시민대회를 개최하고 본정 지역 공직자들의 총사퇴를 요구하였고, 결국 본정 출신 부회의원 7명, 상공회 의소 의원 6명, 구장, 조장 8명 등 총 21명의 공직자가 사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東亞日報, 1936.4.3). 1930년 9월, 함남 신흥군 원평면 중리의 원평시장 이전을 둘러싼 갈등에서도 이전에 반대하던 원평시장 시민측은 두 차례의 공직 총사퇴를 단행했다(中外日報, 1930.9.10; 東亞日報. 1930.9.14). 장장 11년 동안 지속됨으로써 식민지기 최장의 시장갈등으로 기록되는 함남 북청의 북청시장을 둘러싼 갈등에서도 공직 사퇴는 중요한 이슈로 부상하였다. 동리에 있던 북청시장을 이전해가려고 운동하던 서리 주민들에 반발한 남리 주민들은 진정서 제출과 시민대회는 물론 면장과 부면장에 대한 사직 권고 및 사직 진정서 제출로 맞섰다. 동리와 내리의 구장들 또한 총사직으로 남리 주민들의 요구에 호응하였다(東亞日報, 1927.5.23, 1927.5.28). 민중에게는 권력에 대해 책임을 요구할 권리가 있고, 권력은 그에 응할 책임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기 시작했다. 공직 사퇴의 요구나 자발적인 사퇴는 그러한 권리와 의무, 요구와 책임의 관계를 드러내고 공식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권력과 피지배 민중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의 진전은 동시에 갈등하는 이웃마을과의 관계, 나아가 지역공동체의 성격에 대한 인식의 진전을 동반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시장갈등의 참여주체들은 자신들의 요구,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담론적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런 담론적 전략들은 크게 보아 발전주의 담론과 생계보장 담론으로 나눌 수 있다. 대부분의 시장갈등은 ‘지역의 발전’을 전면화하면서 불거졌다. “장시 유치는 지역 전체에 걸친 이익 창출의 계기로 작용했고, 그것은 시민들의 이익 증대와도 직결되어 있었다.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지역발전에 대한 추구가 장시에 대한 관심과 열망으로 나타났던 것이다”(허영란, 2005: 149).

    동시에 정반대의 측면에서 재래시장을 통해 살아가는 민중들의 생계유지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부상하고 있었다. 재래시장은 주민들이 생명을 연명하는 생활선이니 발전을 내세우면서 함부로 이전을 운위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부상했다(東亞日報, 1936.8.12). 새로운 경쟁시장의 설치는 “사형선고”로 받아들여졌다(東亞日報, 1927.6.13).

    표면적으로 보면 발전주의 담론과 생계보장 담론은 대립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어떤 정당화 담론을 선택하는가는 주체들이 처한 사회 경제적 차이가 아니라 의제 제기의 우선성에 따랐다. 재래시장의 신설이나 이전 등을 먼저 추진하는 쪽은 언제나 발전담론을 내세운 반면, 그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되는 쪽은 생계의 보장을 내세웠다(조형근, 2005: 247).

    흥미로운 사실은 두 담론 모두가 근본적으로 균형의 유지에 대한 요구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발전을 요구하는 쪽이나 생계보장을 요구하는 쪽 모두 그 심층의 근거는 이웃마을간의 균형의 유지였다. 예를 들어 시장이 한쪽에 치우쳐 위치하여 특정 지역 주민만 혜택을 입는다면 분시의 요구는 “사회도덕에 비추어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었다(東亞日報, 1928.11.4). 균형주의는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균형에 대한 관점, 자기 마을을 넘어서는 지역 전체에 대한 시야를 동반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지역 전체에 대한 시야가 확보된다고 해서 갈등이 쉽사리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식민권력이 갈등 해결의 결정적 권한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야의 확보가 해결의 첩경일 수는 없었다. 중요한 사실은 발전주의와 생계보장의 담론이 균형주의의 시야와 결합함으로서 지역사회의 공론으로 전화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수없이 개최된 시민대회는 이런 공론이 조성되고, 당국에 요구하고 때로는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자치의 장이었다(한상구, 2014).

    11)최초의 2호시장이자 1919년 12월 이전 유일한 2호시장은 1910년에 개설되어 1915년 9월 허가기간이 끝난 후 2호시장으로 변경, 재허가된 부산 부평정의 일한시장이었다(京城府, 1936: 35). 2호시장이 된 과정이 보여주듯 이 시장은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민영시장으로서 식민권력의 프로그램 속에서 설립된 것은 전혀 아니었다.  12)이와 관련하여 전북 지역의 시장들을 대상으로 상권을 분석하고 있는 한 연구는 흥미로운 결과를 보여준다. 군산과 같이 대표적인 식민지 도시로 새로 성장한 지역의 경우는 기존의 정기시장이 소멸되면서 신식시장으로 상권이 흡수되는 반면, 전주와 같은 전통적 도시는 정기시장이 위축되면서 일본인 거주지의 상가와 대립하게 된다. 이리, 김제, 정읍 등은 일본인들의 상설시장과 조선인의 정기시장이 함께 성장하면서 민족적으로 분리된 상권을 보여주며, 내륙 지방의 경우는 조선후기 정기시장의 모습을 비교적 유지한다. 박선희(2003).  13)시장의 민족적 분절, 이원화라는 현상 자체는 식민지사회의 익숙한 이중구조를 재확인하는 수준에 그칠 지도 모른다. 이중도시, 위생의 오아시스, 분리교육 등과 같이 식민자와 식민지인을 분리하는 이원적 구조는 매우 보편적이다. 문제는 이런 낯익은 이원구조의 동학을 발견하는 데 있지 않을까? 이 이원구조는 한편으로는 식민자의 통치 편의성의 차원에 기반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식민지인과의 접촉과 뒤섞임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도 기반하였다. 이 이원구조 자체의 이중성이 발생하는 동학을 규명하는 것은 이원구조를 확인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할 것이다.  14)조선총독부 촉탁 무라야마 지준이 재래시장에 대한 조사, 연구한 미발표 초고가 1999년에 출판되었다. 초고는 적어도 1932년 이후에 탈고된 것으로 추정된다(朝倉敏夫. 1999: 291).  15)중앙의 간선도로를 끼고 있는 주막업자들의 점포와 그 앞마당이 주로 외래화물의 산매 기능으로서 소매 기능과, 향락적, 소비적 교역 기능에 활용되었다면, 이로부터 떨어져 있는 지로와 소로, 즉 장말(場末)은 주로 화물의 집매장으로서, 인근의 농민이 지역의 중개상이나 외래 행상인들과 교역하는 생산적 교역장소(도매)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한다(中村 勝, 2002: 303-4).  16)한 연구에 따르면 1920년부터 1940년까지의 신문기사 검색을 통해 집합행동을 동반한 총 264건의 중복되지 않은 시장갈등이 발견된다(조형근, 2005: 45). 이는 전국 일간지에 보도된 것만을 기초로 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의 시장갈등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고 볼 수 있다.  17)일본의 사회경제사학자 오오츠카 히사오에 따르면 영국과 일본의 자본주의 이행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농촌공업(소상품생산)과 결합한 농촌의 국지적 정기시장의 발흥이었다(大塚久雄, 1969: 29).  18)원래 서울의 시전 상인을 가리키던 시민이라는 용어는 19세기 후반, 늦어도 갑오개혁을 거치면서부터는 전업적으로 상업에 종사하는 인구를 가리키는 범주로 ‘확장’되어가다가, 1910년대를 거치면서부터는 식민도시를 중심으로 시가지 주민까지 지칭하는 것으로 그 용례가 더욱 확장내지 변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이후 각종 보도 기사에 등장하는 시민의 용례는 시가지 주민에서부터, 시장 주민, 시장의 정주 영업자, 소비자, 시장 유치운동에 참가한 주민 등 대단히 다양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다음의 논의를 참조하라. 조형근(2005: 219-28).

    Ⅳ. 식민지근대성론의 방법론적 검토와 적용

       1. 식민지 경험을 반영한 사회변동론: 식민지근대성론의 가능성과 난점

    일제 식민지기 재래시장의 번성과 그것을 둘러싼 시장갈등은 오랫동안 식민지적 왜곡의 뚜렷한 징표로 여겨졌다. 정상과 비정상, 정상과 왜곡이라는 이 구도 속에서는 식민지적 모순의 축도로서 무소불위의 식민권력과 희생당하는 민중이 그려진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재래시장의 구조적 변화 과정에서 진행된 식민지 주체의 대응과 식민권력과의 상호작용은 이러한 일방적인 구도로는 제대로 포착되지 않는다. 무소불위의 억압과 안타까운 희생이 존재하는 만큼, 식민권력의 무책임, 무능과 식민지 주체의 능동성 또한 두드러진다. 식민지 주체의 집합행동들은 식민지적 시장구조의 바깥에서 진행된 것도 아니고, 그 구조를 와해시킨 것도 아니지만, 그 구조를 뒤틀었고 균열시켰다. 이런 역사적 행로들을 단순히 왜곡이나 일탈, 억압과 희생이라는 구도로만 파악하는 것이 현실적합할까?

    이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행로를 구조와 주체의 행위간의 복합적인 동학의 측면에서, 즉 사회변동론의 관점에서 포착하기 위해서 식민지근대성이라는 개념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추출해 보자.19) 식민지근대성론은 근대성과 식민성은 양립 불가능하고, 식민지 상황 속에서 서구 근대성은 끊임없이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식민주의자들과 반식민주의자들 모두가 공유해온 오랜 통념에 대한 도전으로서 제기되어왔다. 식민성은 근대성의 왜곡이나 일탈이 아니라 근대성 자체가 출발한 지점에서 함께 형성된, 동일한 현상의 이면이라는 새로운 해석들이 등장하였다(Blaut, 1993: 179-198; Mintz, 1985[1998]: 130-132; Stoler, 1989; Arneil, 1996). 식민지는 서구인들의 과거의 기원만이 아니라 미래의 약속을 위한 터전까지 제공했다는 점에서 서구세계에 이중의 기원이 되었다(Arneil, 1996:, 1-6).

    이러한 접근이 근대의 기원을 배타적으로 서구에 귀속시켜온 지적 관행에 중대한 반성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미뇰로는 “근대성은 그 어깨 위에 식민성이라는 무거운 짐과 책임을 지고 있”고, 따라서 식민성 없는 근대성은 없으며, 서구근대성과 식민지근대성은 근대/식민지세계체계라는 하나의 세계의 양면으로 존재할 뿐이라고 강조한다(Mignolo, 2000: 37-43, 49-50). 양자가 하나의 세계의 양면일 뿐이라는 주장을 서구에는 서구근대성이, 식민지에는 식민지근대성이 존재한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양자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며, 서로의 어두운 곳을 가리는 그림자다. 식민지사회를 분석하면서 서구근대성을 끊임없이 환기하게 되듯이, 서구근대성의 분석을 위해서는 은폐된 식민지근대성의 그림자를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이제 근대성과 식민성이 시종 하나의 과정의 양면에 불과하다면, 이른바 식민지적 왜곡과 일탈을 극복하고 미완의 프로젝트인 근대성을 완성시킨다는 시도는 오히려 식민성을 재생산하는 것이 될 뿐이다(Mignolo, 2005[2010]: 26).

    이런 새로운 접근은 재래시장을 둘러싼 구조적 변동과 주체의 행위를 논하는 이 글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재래시장의 구조적, 식민지적 모순들은 - 우리의 경우에는 일본을 경유한 - 서구근대성의 비정상적 왜곡이나 일탈이 아니라, 서구근대성과 하나의 사태를 구성하고 있는 식민지근대성이라는 현상 자체로서 평가해야 한다. 서구근대성과 식민지근대성은 양자가 조우하고 충돌하던 경계에서 출생하여 마치 샴쌍둥이처럼 자란다. 식민지 조선의 식민지근대적 시장구조는 일본 시장구조의 비정상적 일탈이 아니라 일본 시장구조가 성립하기 위한 이면이다. 두 구조는 서로를 규정하는 하나의 사태의 병행하는 양면일 뿐이다.

    이런 접근의 혁신적이다. 하지만 여전히 중대한 난점 또한 존재한다. 여기서도 식민지와 그 주민들이 수행하는 역할은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비서구, 동양, 식민지는 서구가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조우하고 충돌할 때, 비로소 대상이 되고 주체가 되며, 근대에 진입하게 된다는 암묵적 전제를 근본적으로 혁신하기 어렵다.

    따라서 근대성의 기원의 장소를 서구로부터 서구와 비서구가 만나던 경계로 옮겨 오는 작업 이상이 필요하다. 단지 경계라는 장소만이 아니라 경계에서 충돌하던 주체들 간의 상호작용을 중심에 두는 관계론적 문제설정이 필요하다. 서로 다른 구조들이 충돌했을 때 생성된 새로운 사태를 창출한 주체들의 부딪힘과 뒤얽힘의 경험을 서술하고, 그 사회변동론적 함축을 개념화할 장치들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식민지근대성 연구는 그 출현의 무렵부터 식민지 주체가 처하게 된 특이성, 그 가능성과 난점들에 주목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예컨대 이 용어는 영국 지배하의 인도인 엘리트들이 전통과 근대성 사이의 긴장에서 겪은 경험의 복합성을 묘사할 필요에서(Chakrabarty, 1993), 비서구인이 이른바 ‘보편적 역사’의 주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서구인들이 제시한 계몽의 프로젝트를 수용하는 과정이 자신들의 고유한 역사적 행위능력에 대한 부정이라는 역설을 초래한다는 역설을 묘사할 필요성에서 출발하였다(Dabashi, 1993). 혹은 식민지 주체들은 서구에 대한 동일시와 내면화는 물론, 저항, (어긋나는) 모방/흉내내기, 변용, 전유와 같은 다양한 대응을 통해 이 역설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주체의 공간을 확보한다는 사실(Bhabha, 1994)을 포착하기 위해서도 이 용어는 유용하다. 비서구인에 의한 서구 근대성의 자발적 내면화와 식민지적 무의식의 형성이 지니는 복잡하고 역동적인 과정(小林陽一, 2002: 31-5), 식민지적 억압에 대한 비판과 식민주의가 동반한 과학, 평등, 진보의 가치의 수용이라는 양면성(Nandy, 1983[1993]: 13-4), 식민지인과의 충돌과정에서 식민주의자가 겪게 되는 부메랑적 심리적 갈등과 불안의 동학(Mannoni, 1990; Césaire, 2004; Bhabha, 1994) 등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식민주의가 강요하는 구조적 변동의 압력만큼이나 식민지인의 대응이 그것의 이상적 실현을 끊임없이 제약하고 난관에 빠뜨리는 측면을 분석의 중심에 둘 필요가 있다. 요컨대 식민지근대성의 문제설정 속에서는 힘의 관계에서 열세에 놓여 있으면서도 수동태로 축소될 수 없는 독특한 주체의 역할에 중요한 이론적 지위를 부여하고, 그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부상한다. 요컨대 식민지 조선의 재래시장을 둘러싼 조선인들의 대응과 집합행동을 구조적 압력에 구속된 것으로 이해하면서도, 그 구조 자체를 재규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개념적 도구가 필요하다.

       2. 근대성의 구성적 외부이자 내재하는 외부로서 식민지근대성

    구조와 주체가 상호 규정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것처럼 서구근대성과 식민지근대성 또한 하나의 사태의 양면이며, 상호 규정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이는 서구근대성이 자신을 보편적인 것으로 주장하고 정립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비서구적인 것, 식민지적인 것의 존재를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역설적인 관계를 구조적 힘과 주체의 행위라는 사회변동론의 틀 속으로 도입하기 위해 티모시 미첼이 제안한 근대성의 ‘구성적 외부(constituitive exterior)’로서의 식민지적 차이, 식민성이라는 개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는 보편주의적 역사의 논리와 운동이 그에 대해 이질적인 것, 외부를 설정하면서 이를 절하함으로써만 산출될 수 있다면, 역설적이게도 이 이질적인 것들이 보편적인 것의 “구성적 외부”로 역할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 이질적 요소들은 한편으로는 근대성의 형성과 지속에 외부적으로 참여함과 동시에, 근대성의 방향을 끊임없이 뒤틀고 변이시킨다(Mitcell, 2000: xiii).

    미첼에게서 식민지적 차이, 식민성은 매우 역설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근대성이 성립하고 지속하고 전개되기 위한 외부로 기능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근대성의 성립과 전개에 내재적이다. 근대성은 끊임없이 이 외부와의 접촉, 충돌 속에서만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외부는 ‘내재화된 외부’이기도 하다. 내재화된 외부란 내부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점에서 내재화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부에 의해 완전히 폐쇄되지 않는 어떤 위상학적 관계를 지칭한다.20)

    이 독특한 외부는 힘의 우위에 근거한 근대성에 의해 평가절하되지만, 동시에 그 평가절하를 통해서 근대성 자체를 성립 가능하게 하고, 근대성의 지속적 자기주장을 위해 완전히 절멸되지 않는 외부로서 끊임없이 이질적인 힘을 행사하여 근대성의 행 로 자체를 변이시킨다. 근대성의 주장과 실천들은 자신의 보편화를 위해 이 외부의 소멸과 자기 내부로의 통합의 경로를 예정하지만, 완전한 통합, 내부화는 곧 근대성 자체의 자기부정을 뜻하게 된다는 역설에 부딪히게 된다. 식민성의 주장과 실천들은 이 역설과 빈틈 사이에서 끊임없이 근대성의 행로를 뒤트는 이질적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여기서 구성적 외부와 내재하는 외부라는 개념을 사회변동론의 관점에서 구조의 변화, 주체의 행위와 어떻게 연관 지을 수 있는가라는 과제가 제기된다. 서구와 비서구-식민지의 만남은 서로 다른 사회구조간의 만남이며, 여기서 서구근대성은 자신의 구조를 우월한 것, 보편적인 것으로 주장하면서, 이질적 구조간의 위계를 정립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이다. 물론 이 과정은 식민주의적 권력의 전략적 실천에 의해 수행된다. 그러나 구성적 외부, 내재하는 외부의 관점에서 보면 열등한 것으로 간주된 비서구의 전통적 구조가 바로 서구근대성의 성립과 지속 자체를 가능하게 한다. 식민지 주체는 서로 다른 구조의 충돌과 갈등 속에서 우월한 것으로 간주되는 서구의 구조의 압력을 수용하는 만큼이나 바로 거기서 발생하는 간극과 틈 사이로 내재화하면서 그것의 보편화를 저지하고 훼손하며 예기치 않은 변이를 일으킨다.

    19)식민지근대성(colonial modernity)과 식민지근대화(colonial modernization)는 어떻게 같고 다른가? 1980년대 초에 미국의 한국학계에서 식민지개발주의라는 형태로 발원하고, 1980년대 후반, 90년대를 거치면서 일본과 한국에서 정립된 식민지근대화론의 가장 큰 특징은 – 논자들 간의 개별적인 차이를 일단 차치한다면 - 식민지에서의 근대화 과정을 의연히 서구근대성의 확산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데 있다. 예컨대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경제사 연구의 경우 식민지근대화 과정은 시장경제원리라는 ‘보편적 원리’가 식민지에서도 의연히 관철되는 과정으로 파악한다. 식민지인의 능동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수용’의 관점에서 파악된다. 이 접근에서는 식민지 주체가 처하게 되는 다양한 역설과, 그에 대응하여 이들이 수행하는 저항, 전유, 변용 등 단순한 수용을 넘어서는 다양한 집합적 실천들이 사라지며, 결론적으로 이 집합적 실천에 의해 초래되는 서구/식민지근대성의 예기치 않은 ‘변이’의 계기들이 포착되지 않는다. 식민지근대성론과 식민지근대성론의 비교, 차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논의로는 조형근(2006)의 논의를 참조.  20)식민지근대성의 이해에서 티모시 미첼의 구성적 외부와 질 들뢰즈의 내재하는 외부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할 것. 조형근(2007: 406-10)

    Ⅴ. 결론적 함축 - 사회변동론의 관점에서 식민지적 구조와 식민지 주체의 재발견

    일제 식민지기 조선의 재래시장은 식민지자본주의의 전개 과정에서 일제 식민권력에 의해 외부화된 존재였다. 그것은 식민권력으로부터 자연도태될 원시적 유제로서 폄하되고 가치절하당했다. 그리하여 식민지자본주의의 전개를 보편화하기 한 외부, 타자라는 자리를 할당받았다. 식민권력은 이 타자화된 외부가 자연도태되리라고 믿었지만, 그것은 쉽사리 소멸하지 않았다. 이 외부는 불구화된 채로, 흔히 왜곡이나 결여로 묘사되는 형태로 계속 존재했다. 게다가 재래시장과 참여자들은 불구화된 수동적 주체가 전혀 아니었다. 재래시장은 식민권력의 예상과는 달리 지나칠 정도로 번성했고, 민족 간 대립을 구조화했으며, 많이 시끄러웠고, 권력의 낭비를 촉진시켰으며, 그 속에서 식민지 주체들은 각성해나갔다.

    식민권력은 조선에서 재래시장에 대한 가치절하, 외부화와 함께 식민지적 시장구조를 확립하였다. 공영 없는 공영제와 공안적 통제, 양적 폭증과 상대적 비중의 감소, 종속적 자본주의화의 진전과 시장원리의 부정에 이르기까지 식민지적 시장구조는 강력한 압력으로서 식민지 조선의 일상을 규정했다.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식민지 주체는 이 구조의 규정력을 벗어날 수 없었고,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안에서 구조의 변이와 뒤틀림이 발생하고 있었다.

    식민권력이 권한만 독점한 채 의무는 방기한 이 버려진 외부, 보잘 것 없는 재래시장 속에서 예견 불가능했던 변이들이 산출되기 시작했다. 식민지자본주의가 초래한 생존의 위기에 맞서거나 생활의 기회를 찾고자 했던 식민지 주체들에 의해 시장은 폭증했다. 권력의 장기적 프로그램이 부재한 가운데, 독립운동을 매개로 시장은 민족적으로 분절되었으며, 재래시장은 도태되기는커녕 민족적 사회생활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내적 개혁이 방기된 재래시장은 전통적인 경제적 기능은 물론 정보의 획득, 문물의 전파와 사회적 소통, 오락과 유흥의 기회까지 제공하면서 조선인의 재래시장 선호 경향을 강화했고, 식민권력의 노동력 동원에 타격을 가했다. 이렇게 식민지에서 조선인 사회의 중심이 되면서 재래시장은 민족적 저항을 위한 계기적 네트워크로도 작동했다. 조선 전체에 만연한 채 기약 없이 지속되었던 수많은 시장갈등들은 식민권력의 무능을 폭로하고, 조선인의 집합적 주체화를 초래했으며, 권리와 의무, 균형주의를 둘러싼 지역사회 공론장의 형성을 촉진했다. 식민권력은 재래시장에 대한 전체적인 시야를 결여했고, 상황의 변화에 우왕좌왕했다. 초기에는 재래시장을 폄하하고 무시하다가, 1930년대 초중반에는 강력한 억제책을 구사했다. 하지만 억제책은 근본적으로 실현 불가능했다. 결국 1930년대 말에는 다시 적극 활용론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 적극 활용론 또한 전쟁의 전면화와 함께 불가능한 프로젝트로 귀결된다. 식민권력은 자신의 구상을 진척시켜나갔지만, 어느 하나 예정된 대로 진행된 것은 없었다. 요컨대 재래시장에 참여한 식민지 주체들은 티모시 미첼이 말하는 의미에서 구성적 외부, 즉 근대성이 자신을 근대성으로 주장할 수 있도록 평가절하됨으로써 그 근대성을 구성해주는 외부가 됨과 동시에 그 내부에 존재하면서 끊임없이 그것을 비틀고 변이를 일으키는 기이한 존재, 즉 내재하는 외부가 되었다.

    물론 이 내재하는 외부, 식민지 주체의 역할, 능동성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미화하기는 어렵다. 그 주체적 대응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이중적이었다. 재래시장의 폭발적 성장은 식민지 주체의 대응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허가권을 권력이 독점한 이상 권력과의 일정한 타협 속에 진행된 과정이기도 했다. 시장갈등의 상황에서 최종 결정권력으로서 식민권력의 무책임성과 무능함은 갈등 당사자들의 공통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동시에 식민권력의 방임전략에 따라 시장갈등은 조선인 주민간의 지역갈등이라는 형태로 한정되기도 했다. 시장갈등은 식민권력과 전면 대립하는 독립운동이 아니라, 생활상의 이해와 요구에 기반하여 권력이 허용하는 경계를 넘어서지 않으려 한 일상투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적극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재래시장의 성장을 둘러싸고 식민지 주체와 식민권력 사이에 수행된 이런저런 교섭과 타협들 자체는 이미 식민권력이 스스로 표방한 문명화, 시장구조 개혁의 명분을 최소한 부분적으로 자기 부정하는 것이었음도 사실이다. ‘시세와 민도의 차이에 대한 고려’라는 일반론으로는 식민지기를 일관한 재래시장 개혁의 마스터 플랜 부재를 설명하기 어렵다.

    물론 이런 전략적 프로그램의 부재를 식민권력의 편의주의적 태도로 이해할 수도 있다. 권력의 경제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식민권력의 제한된 자원, 비용을 재래시장에 쏟는 것은 낭비였을 수도 있다. 재래시장을 둘러싼 갈등은 체제의 정당성 자체를 의문시하지 않는 일상의 이익투쟁이었으므로, 관리 가능한 수준 안에서라면 감내할 수 있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21)

    재래시장을 둘러싼 식민지 주체의 행위들은 권력의 무능을 드러내는 집합적 실천임과 동시에 구조의 한계 안에서 그 질서를 재생산하는 행위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양면적인 것이었다. 문제는 후자의 관점, 즉 재생산의 관점이 권력과 근본적으로 적대하지 않는 모든 주체적 실천, 투쟁은 모두 권력의 경제 속으로 포섭된다는 선험적 결론으로 귀결될 위험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식민지 주체의 집합적 실천 자체는 결코 구조를 전복하는 혁명적 내용과 형식을 취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실천은 식민지 구조를 근본적으로 철폐하지 않는 한 개선되지 않는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민중의 권리와 권력의 의무라는 인식의 확산과, 지역사회의 공공성에 대한 자체적 시야, 지평의 확보라는 계기는 이런 점에서 중요하다. 시장갈등을 비롯한 다종다기한 지역사회의 갈등 사안에서 무수히 개최되었던 “시민대회나 군민대회는 어떠한 사상단체로 집회되는 것이 아니요, 실제적 문제를 포착하여 이를 해결하고자 할 것이나 …자치의 의미로서 집회가 불무(不無)하리라”는 당대의 언명은 이래서 중요하다. 식민지 주체들은 이 소소한 일상의 투쟁과 집회들 속에서 “우리 손으로 된 정치기관 즉 대의제라든가 소비에트제가 무(無)하므로 더욱 차종 대회의 절실을 통감”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東亞日報, 1926.9.2).

    당연한 말이지만 이 공공적 자치의 꿈과 실천들은 식민구조 자체의 철폐라는 전망과 결합되지 않는 한 실현이 요원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한낱 한계에 불과하다고 폄하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런 투쟁들이 없었다면 동시대인들은 물론 후대의 우리조차도 식민지라는 구조의 정당성에 대한 본질적인 심문을 제기할 근거를 확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식민지근대성 속에서 규정되고 제한되었지만, 바로 그 속에서 그 외부를 사유할 수 있게 한 출구가 되었던 것이다.

    21)식민권력이 부, 읍 등의 도시지역과 면 이하의 농촌지역 시장갈등에 대해 보여준 상이한 태도는 이런 권력의 경제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종종 일본인도 관련되었던 도시지역 시장갈등에 대한 태도에서 식민권력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타협을 유도한 반면, 농촌지역 시장갈등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방관적이었다. 그들에게는 사안의 경중과 처리의 우선순위가 있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조형근의 논의를 참조(2005: 196-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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