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여성의 몸의 수행성

Performativity of a Dying Female Body

  • ABSTRACT

    This essay aims to read Margaret Edson’s W;t as a new academic, medical, and feminist drama in the age of technoscience by focusing on the performativity of a female professor’s body dying of advanced ovarian cancer in a university hospital. In this technoscientific age, the issues of females, especially their disabled dying bodies, are taken up as things related not just to sexual politics but to technoscientific biopolitics. Thus, this paper explores subversive possibilities of the perfomativity of a medicalized female body under the control of technoscientific biopolitics in the institutional spaces of the hospital and the university. W;t foregrounds the dying woman Vivian Bearing’s dramatic performance of commenting ironically on the performativity of her body in her own language of literary “wit” to fight against the medical “wit” of Dr. Harvey Kelekian and his student Jason Posner and against the suffering and fear of her impending death. But gradually this play reveals that the witless nurse, Susie Monahan, the most marginalized character, i.e., a “minor” character, is the hero of the play. Susie is Vivian’s most needed company as she lies dying, and she can help Vivian find a line of flight from the closed system of biopolitical control over her dying body and a line of light towards redemption and grace. Thus W;t can be regarded as a new feminist academic medical drama, a minor literature.

  • KEYWORD

    performativity , female body , technofeminism , medicalization , medical drama , academic drama , feminist disability studies , minor literature

  • I. 대학 드라마, 의학 드라마, 그리고 페미니스트 드라마로서의 『위트』

    1999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위트』(W;t, 1995)는 아틀란타의 한 공립 초등학교 현직 교사 마가렛 에드슨(Margaret Edson)의 첫 작품이자 공연과 출판이 된 그녀의 유일한 극작품이다. 『위트』의 주인공은 비비안 베어링(Vivian Bearing)이라는 17세기 형이상학파 시, 특히 존 던(John Donne)의 시에 대한 전문가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영문학과 여자 교수 이다. 최근 대학 캠퍼스를 배경으로 한 대학 문학, 특히 대학 소설은 학생이 아니라 교수를 주인공으로 하는 경우가 더 많다.1) 그러나 대학사회 풍속도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대부분의 대학 소설의 주인공들은 주로 악한이라는 직업적 이미지를 갖는 남자 교수들로 풍자의 중심적인 대상이 된다. 그러나 비비안은 대학소설의 전형적인 남성 주인공들과는 차별적이고 예외적인 사례의 여자 교수이다.2) 따라서 50세 비혼의 여자 교수 비비안을 주인공으로 하여 대학병원에서 난소암 말기환자로 죽어가는 과정을 극화한 『위트』는 대학 드라마이자 의학 드라마로 분류될 수 있는 극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은 비비안이 경험한 호전적인 8개월의 화학요법치료 과정을 통해 치명적인 암과 강력한 투약의 동시 공격을 받는 여성의 몸, 즉 여성의손상된 몸(damaged body)의 재현과 젠더 수행성(performativity)을 다루고 있는 페미니스트 드라마이기도 하다. 따라서 본고는 대학병원에서 죽어가는 여자 교수의 몸의 수행성을 주목함으로써, 대학 드라마, 의학 드라마, 그리고 페미니스트 드라마로서의 『위트』의 상호적 읽기를 시도하고자 한다.

    소설 장르 뿐 아니라, 대학 캠퍼스를 무대로 한 드라마의 경우도 여자 교수가 주인공이 되는 경우가 드물다. 예컨대, 올비(Edward Albee)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Virginia Woolf?, 1962)와 마멧(David Mamet)의 『올리아나』(Oleanna, 1992)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학 드라마의 경우, 남자 교수, 특히 백인 남자 교수를 주인공 또는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시킨다. 지난 반세기 동안 고등교육(higher education) 기관으로서 대학은 인문학 중심의 교양교육(liberal arts)기관에서 전문직 기관(professional institution)으로 변모하는 역사적 대변화를 겪게 되었다. 최근 이러한 변화를 겪은 대학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교수의 정년보장(tenure)이 학문적 자유의 보장이 아니라 교수직 자체와 학문적인 “제멋대로의 장난”(high jinks)의 보장으로 변질되고 있음을 주목하고 있다(Tierney 171). 이와 같이 자신만의 학문적 관심의 유희에 빠진 “건망증 교수들”(absent-minded professors)3)을 브로트만(Mikita Brottman)은 아스퍼거 증후군(Asperger’s Syndrome)이라는 일종의 자폐증 환자로, 즉 직면을 피하고, 사교적 상황을 힘들어 하며, 한 가지 관심사에만 집중적으로 전념하는 증상의 신경증적 장애를 가진 환자로 진단을 내린다(B7). 사실 대학 사회 자체가 구성원들로 하여금 이러한 “강박증적, 인색한, 무례한, 신랄한”(obsessive, miserly, rude, truculent) 사람들의 신경증적인 특이성들을 갖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그의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B7). 오늘날 변화된 대학 환경 자체가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동시에 이러한 특성들을 지닌 대학 교수의 이미지를 생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대학 사회를 다루는 대부분의 문학 작품들은 거기를 떠나는 것, 즉 거기서 우리의 몸을 해방시키는 것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비비안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빛을 향해 걸어가는 『위트』의 엔딩 장면 역시 드디어 죽음을 통해 얻게 된 몸의 해방을 시사하는 과격한 해결 방안 제시로 볼 수 있다.

    신경증적인 특이성을 가진 남자 교수를 풍자의 대상으로 등장시키고 있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그의 신체적 결함 또는 병든 몸의 이미지를 교수 이미지의 일차적인 특징으로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손상된 몸의 이미지와 대학 생활에 의해 길들여진 딱딱하고, 음탕하며 가학적인 악한의 통속적 남성 이미지가 결합된 전형적인 남자 교수의 이미지가 부각되고 있다. 반면에 대학 사회에서 예외적인 인물로 항상 부차적인 역할이 맡겨지는 여자 교수는 대체적으로 급진적 페미니스트의 이미지를 가진 등장인물로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다(Leuschner 340). 그러나 여자 교수의 경우도 남자 교수처럼 손상된 몸의 이미지는 면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자 교수의 손상된 몸은 손상된 대학 사회의 건강도를 반영하는 타자의 몸 또는 “젠더 수행성”4)의 몸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위트』의 주인공인 여자 교수 비비안의 몸은 바로 이러한 대학 사회의 타자와 젠더 수행성의 몸으로 이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대학병원에서 말기암 환자로 죽어가는 비비안의 몸은 여성의 몸으로서의 젠더 수행성뿐 아니라 의과대학의 암연구자들의 연구 대상, 즉 의학적 텍스트로 강요되는 일련의 반복적인 규범적 행동의 수행성이 요구된다. 그러나 『위트』는 비비안의 몸이 그러한 수행성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그 규범들의 부당함을 주목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나아가 그녀의 몸의 반복되는 수행, 즉 수행성의 반복성을 통해 오히려 그 수행성을 전복하여 그녀만의 단독적 행위의 수행에 이를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버틀러가 그녀의 수행성 이론을 전복성으로 보완하고 확대하듯이, 『위트』의 비비안의 몸의 수행성 역시 대학, 특히 대학 병원과 의학담론의 문제점과 한계를 드러내 보이는 전복성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위트』는 대학과 의학 담론이 요구하는 규범적 행동을 수행하는 비비안의 죽어가는 몸의 수행성이 규범을 강화하기 보다는 전복하는 것을 강조하는 페미니스트 드라마로 간주될 수 있다.

    1)대학 소설(campus novel, academic novel)은 대학 사회를 다루는 소설 장르로 피츠제랄드(F. Scott Fitzgerald)의 This Side of Paradise(1920)에서처럼 주로 학생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했었고, 8,90년대에 들어와 교수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자 교수가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여전히 드물다.  2)쇼월터(Elaine Showalter)는 대학 소설이 윤리적인 고등교육 체제 확립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 공헌을 인정받을 수 있고, “품위 있는 교수라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고, 옷을 입고, 생각하고, 글을 쓰고, 사랑하고, 성공하고 또는 실패하는가를” 간접적으로, 자신에게 가르쳐 주었지만, 긍정적인 롤 모델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풍자의 형식을 통해서라고 지적한다(2). 그리고 특히 여자 교수의 사례를 찾기는 힘들었다고 그녀는 밝힌다(13).  3)“건망증 교수 효과”(absentminded professor effect)는 실험심리학의 용어로, 일반적으로 한 가지 일에 몰두하다가 다른 일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4)본 논문에서 사용하는 수행성이란 용어는 쥬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수행성 개념에서 빌어 왔다. 젠더는 수행적으로 구성된다는 젠더 구성의 관점에서 수행성을 설명하는 버틀러에 의하면, 여성의 몸은 이성애의 규범적인 장치에 의하여 강요되는 행위를 반복하여 수행함으로써 지배적인 가치를 강화시키는 수행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수행성은 항상 규범 또는 일련의 규범들의 반복이기 때문에, 단독 “행위”가 아니지만, 그것은 반복의 관습이라는 것을 숨기며, 하나의 행위 같은 입지를 획득한다는 것이다(Butler 12-13).

    2. 여성의 몸에 대한 의학 담론에 내재한 은유의 정치성

    미국의 한 신자유주의적 보수 논객인 캐리 로버츠(Carey Roberts)는 급진적 페미니즘을 강력한 의학적 치료가 요구되는 암으로 진단한다. 즉 급진적 페미니즘이란 지적이고 사랑스러운 젊은 여자들을 젠더 이데올로기로 무장시켜 이성과 공감을 상실한 젠더 십자군으로 만들어 건강한 민주주의 자유시장의 미국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기관인 전통적 가정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질병인 암에 비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5) 보수 논객이 사용하는 이러한 생물학적, 의학적 은유는 전통적 가정의 기반인 남성적인 몸을 건강의 척도 기준으로 하여, 이러한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 여성의 몸을 선천적으로 결핍된 병적인 몸으로 전제한 비유법이다. 또한 이러한 비유법을 사용한 담론은 여성의 몸을 전체적인 미국 사회의 몸의 건강도를 측정할 수 있는 그리고 동시에 통제가 필요한 타자의 몸으로 간주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 페미니즘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진단과 담론은 새로운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항상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어 온 여성의 몸, 특히 재생산을 하는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적 통제에 대한 필요성과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종교, 그리고 과학이 발달한 이래로는 의학이 이러한 통제를 당연한 것으로 강조해왔다. 최근 기술과학시대에 이르러 의학은 이러한 통제권을 더욱 강하게 발휘하고 있다. 예컨대, 급진적으로 발전한 신재생산기술(new reproductive technology)은 여성의 몸을 이제는 “공적인 스펙터클”로, 즉 사회적 감시를 받는 공적인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Balsamo 83).

    사실 여성의 몸에 대한 담론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담론은 의학 담론이다. 비비안의 주치의 켈리키언(Dr. Kelikian)은 비비안의 몸을 그의 새로운 암치료 연구를 위한 최적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그녀의 몸, 더 엄밀히 말해 그녀의 난소에 대한 최신 연구 논문을 써서 유력한 의학 학술지에 발표하여 영향력있는 의학 담론을 형성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담론은 결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이 아니라 젠더 이데올로기적으로 위치화된 입장의 관점을 표명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바로 로버츠가 암으로 진단한 급진적 페미니즘의 대표적 이론가들인 아드리엔 리치(Adrianne Rich)와 메리 데일리(Mary Daly) 등이 의학 담론에 대한 이러한 지적과 문제 제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이들은 여성의 몸에 관한 의학 담론에 내재된 전통적인 여성폄하적 신념들의 부정적 표출을 주목하고 비판함으로써, 기존 의학 담론이 행사해온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과 억압에 대한 인식 촉구와 이에 대한 저항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해 왔다.

    의학 드라마로서 『위트』에 대한 인터뷰에서 닥터 필립(Dr. Abraham Philip)은 연애를 해보거나 출산을 한 적이 없는, 그래서 감정적, 심리적으로 불모의 상태인 비비안이 난소암이라는 재생산 기관의 악의적 보복에 마침내 굴복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 작품의 가장 멋진 아이러니로 지적한다(Diehl, 116 주.8). 그의 매우 솔직한 지적은 여성성, 몸, 그리고 질병에 대한 악의적인 성차별주의적 의학 담론을 반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의사로서 닥터 필립의 연극평은 여성에게 부과된 자연스러운 역할, 즉 감정적이며 수동적인 어머니 역할에 부응할 수 없는 비비안의 무능력과 직무 유기에 따른 처벌의 결과로 그녀가 난소암에 걸렸음을 암시한다. 의사의 이러한 견해는 여성의 몸에 대한 이해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생물학적 은유의 정치성을 함축한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에 이어 최근 사이보그 페미니즘(cyborg feminism)과 테크노페미니즘(technofeminism)을 비롯하여 과학기술시대의 페미니스트들 역시 이러한 기존 의학 담론의 은유의 정치성에 대한 비판적 논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새로운 “페미니스트 정치성”을 행사하고 있다.6)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난소암을 앓고 있는 비비안의 몸의 수행성은 “여성의 몸의 의료화”(the medicalization of women's body)7)와 동시에 전복성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5)로버츠는 한 컬럼(“How Will We Cure the Radical Feminist Cancer?”)에서 대학, 정부, 그리고 주류 미디아를 3대 거점으로 하여 퍼지고 있는 페미니즘이라는 암을 그 뿌리부터 뽑는 매우 공격적 치료를 주장한다. 우선 대학에 대해서는 잘 교육 받은 여성들을 신병으로 모집하는 베이스캠프, 여성학 프로그램을 설치한 것에 대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소송을 제기하여 남성학 프로그램을 설치하여,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혜택을 받아야한다는 시민권법 9장을 주장하도록 촉구하는 치료법을 제시한다.  6)정문영. 「기술과학 시대의 신재생산기술 담론과 페미니스트 정치성」. 『영미문학페미니즘』 17.1 (2009): 297-322. 참조.  7)기술과학시대에 이르러 더욱 가시화되고 있는 “여성의 몸의 의료화”와 더불어 여성의 몸은 선천적으로, 즉 생물학적으로 결핍되고 병든 몸으로 간주되어 개인의 정체성과 인격의 기초로서 불안하다는 논리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최근 페미니즘 담론의 중심적인 화두가 되고 있다. Franca Pizzini. “The Medicalization of Women's Body” 참조.

    3. “생명권력”과 여성의 몸의 의료화

    몸은 생물학적 그리고 사회적 차원의 혼합의 산물로 개인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즉 개인의 정체성과 개성의 기초가 되는 것은 단순히 뇌-정신 체계 (그리고 최근 강조되는 유전)가 아니라 오히려 전체적인 몸, 즉 그것의 공간성, 유동성, 느끼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전체적인 몸이다. 그리고 여성의 몸은 무엇보다도 재생산의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인적인 몸이 아니라 사회적 통제와 관리가 필요한 몸이라는 논리도 당연시되어 왔다. 따라서 최근 화두가 되는 여성의 몸의 의료화는 바로 이러한 통제의 필요성에 대한 기술과학시대의 논리와 해답인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여성의 몸이 어느 시대 그리고 어느 문화권에서도 사회가 압제와 통제의 권력을 가장 많이 행사할 수 있는 장소가 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푸코(Michel Foucault)는 근대이후 권력을 “생명권력”(bio-power) 또는 “생명정치”(biopolitics)로 명명하며, 생명을 억압하는 권력이 아니라, 생명을 유용하게 길러내는 권력, 즉 생명에 대한 권력(the power over life)으로 설명한다(139). 다시 말해, 푸코에 의하면, 근대이전의 주권을 가진 군주의 권력(sovereign power)은 자연적으로 실존하는 생명체,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목숨을 제거하는 것, 죽이는 것으로 표현되는 죽임의 권력이며, 반면에 근대이후 생명권력은 “살게 만들거나 죽게 내버려두는” 권한을 의미한다는 것이다(135). 이렇게 구별되는 두 권력을 비교함에 있어서 주목해야할 가장 중요한 차이는 군주의 권력이 “살기”를 “내버려두기”의 대상으로 보지만, 반면에 생명권력은 “살기”를 “만들기”의 대상으로 본다는 사실이다(진태원 220). 다시 말해, 근대이전 군주의 권력은 삶, 생명을 자연적인 것으로, 권력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주어진 것으로, 따라서 권력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미리 전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이후, 특히 기술과학시대의 생명권력은 삶, 생명을 만들기의 대상으로, 따라서 더 이상 주어진 것, 자연적인 것, 내버려두어야 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즉 생명권력은 오히려 삶, 생명을 권력이 관여하여 관리하고 증대시키고 확산시켜야 할 일차적인 대상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Foucault 137).

    푸코에 의하면, 개인의 몸을 유순하고 생산적 효율성이 뛰어난 개체로 만들고 관리하는 생명권력은 자본주의 발전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141).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 발전의 주요 동인이 되는 생명권력은 여성의 몸을, 생산성뿐 아니라 재생산성에 대한 감시와 처벌을 엄중히 행사해야하는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최근 여성의 몸의 재생산성에 관여하는 신재생산기술은 부르주아들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개선하고, “생명을 최대화하려는” 수단으로 개발하고 발전시킨 성의 감시 기술들 가운데 “가장 최근의 담론 세트”로 규정될 수 있다(Sawicki 83). 특히 신재생산기술 가운데 초음파 검사시스템, 전자현미경, 단층X선촬영스캐너와 같은 새로운 시각화 기술은 비가시적인 내부 기관을 가시화함으로써 여성의 몸을 더욱 객관화하고 파편화시켜 공적인 스펙터클로 만드는데 공헌한다. 『위트』에서 언제라도 벗겨질 채비가 된 두 장의 천으로 된 환자복을 입은 비비안의 몸도 태아 대신 배양되는 음험한(insidious) 난소암세포의 성장 감시를 위해 반복되는 초음파검사를 통해 파편화되고 객관화된 하나의 공적인 스펙터클을 제공하고 있다. 그 결과 그녀의 몸은 여성의 몸의 마술적이고 신비한 아우라 뿐 아니라 여자 교수의 몸으로서의 권위적인 아우라도 상실하게 된다. 최고의 지성이 경쟁하는 닥터 켈리키언의 랩에서 일하는 수련의로 학부 때 비비안의 강의를 수강했던 제이슨(Jason Posner)을 감탄하게 만드는 것은 스승 비비안의 정신도, 그녀의 전체적인 몸도 아니고, 다만 파편화된 그녀의 몸, 즉 자궁에서 “배양되는 [암세포의] 불멸성”(Immortality in culture, 56)이다. 다시 말해, 그녀의 전체적인 몸은 파편화된 몸, 음험한 암세포가 배양되는 자궁, 연구와 정복의 대상으로서의 의료화된 몸으로만 이제 그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4. 비비안의 몸의 수행성과 동시대화기법

    『위트』의 첫 장면은 텅 빈 무대에 링거대를 끌며 대머리의 마른 비비안이 맨발로 등장하여 관객을 향해 말을 거는 것으로 시작한다. 극의 시작부터 등장하여 시종일관 무대에 존재할 비비안의 몸은 의료화된 몸으로 생명권력의 통제와 감시를 받고 있는 몸임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가시화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치 전통 연극의 프롤로그를 말하는 것처럼 관객에게 직접 자신이 주인공이 될 극의 전개에 대하여 아이러닉한 어조로 소개하며, 2시간 안(공연 시간)에 난소암으로 죽게 된다는 결말까지 미리 말해주는 것으로 극을 시작한다. 그러나 비비안의 이러한 관객에게 말걸기는 단순히 프롤로그로서가 아니라 이 극의 주요 극적 기법으로 메타연극적인 동시대화기법(simultaneous discourse)에 의한 것이다. 사실 전반적인 『위트』의 전개는 주인공 비비안이 다른 등장인물들과의 대화와 동시에 관객에게 직접 말걸기를 하는 동시대화기법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다. 에드슨이 사용하고 있는 이 동시대화기법은 연극뿐 아니라 샐리 포터(Sally Porter)의 『올란도』(Orlando)에서 볼 수 있듯이, 페미니스트 영화에서도 주로 사용되는 기법이다. 이 기법은 주인공을 극중 행위자이자 동시에 목격자 또는 스토리텔러로 극중인물들과의 대화 뿐 아니라 관객을 향하여 직접 말을 거는 방식으로 전통적인 극적 관습을 깨뜨린 아주 특이한 기법이다. 이러한 동시대화기법은 일종의 브레히트적 거리두기인 소외효과의 낯설게 하기 연기방식이기도 하다. 『위트』의 비비안은 이 기법을 통해 그녀가 수행하고 있는 젠더와 의료화된 몸의 수행성을 스스로 목격하고 있음을 드러내 보임으로서 관객 역시 그녀가 처한 상황에 몰입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보도록 유도하고 있다. 따라서 관객은 감정이입보다는 객관적 목격을 통해 비비안의 몸에 가해지는 의료기술적 통제에 따른 수행성과 그것에 대항하는 저항적 전복성을 동시에 볼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에드슨은 동시대화기법을 비비안의 젠더와 의료화된 몸의 수행성과 그것의 전복성을 동시에 드러내 보일 수 있는 효과적인 연극적 전략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트』는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비비안이 극의 전개 과정을 스스로 목격하고 관객에게 그것에 대한 자신의 스토리텔링을 동시에 하는 기법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관객은 자신의 죽어가는 몸이 대상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과정을 스스로 목격하고 있는 비비안의 관점에서 극의 진행을 보도록 유도되고 있다. 그리고 관객을 자신의 관점에서 보도록 유도하고 있는 비비안은 위트(wit)와 기지(conceit)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자신의 몸의 수행성을 강요하고 있는 규범과 가치들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분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에 근거하여 그녀는 더 이상 스토리텔링을 계속할 수 없을 때까지 자신에 대한 극을 진행시키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비비안이 관객을 향해 던진 첫 대사, “안녕하세요. 오늘 기분이 어떠세요?”(Hi. How are you feeling today? 5)라는 인사는 병원 의료진들이 환자를 대할 때마다 하는 반복되는 의례적인 인사이다. 17세기 존 던 시를 전공한 교수 비비안은 죽음의 순간에도 듣게 될 이 의례적인 인사의 아이러닉한 의미를 분석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 유감스럽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그녀는 더 이상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게 될 때까지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몸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마치 존 던의 텍스트를 분석하듯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죽음 그 자체와 죽음의 공포까지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다시 말해, 그녀는 “억지스러운 위트의 참을 수 없는 발산”(“Itchy outbreaks of far-fetched wit” 20)으로 존 던이 정의한 재간, 기교, 단호한 지성으로 구성된 위트(wit)의 아이러니와 역설의 위력으로 자신의 죽음에 대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실 비비안의 담담한 스토리텔링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의 위트의 위력을 인정하도록 유도할 수 있는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연극과 영화 매체에 등장하는 비비안과 같은 말기암 환자를 비롯하여 장애(disability)를 가진 몸들은 대체적으로 감정적 또는 정신적 결핍의 은유로 제시된다. 최근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장애 연구(disability studies)는 바로 이와 같이 병든 몸과 같은 장애의 몸을 하나의 차이, 즉 특색을 가진 몸으로 보기 보다는 타자의 몸으로 보는 기존의 부당한 인식을 반영하고 강화시키는 매체에 대하여 비판적인 분석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장애 연구와 페미니즘 이론과의 접점에서 구축된 페미니스트 장애 연구(feminist disability studies)8)는 비비안의 죽어가는 여성의 몸과 같은 장애 여성의 몸에 대한 인식과 재현에 대하여 비판적인 관점을 제공한다. 따라서 『위트』가 보여주고 있는 비비안의 병들고 죽어가는 몸은 페미니스트 장애 연구가 주목하는 “문제의 몸”(problem body)의 연극적 또는 영화적 재현과 투사에 대한 적절한 분석의 대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투사란 감정적 방어기제로 우리 자신 부정적 또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과 감정을 타자에게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132). 따라서 비비안의 스토리텔링은 정상의 몸을 가진 관객이 그녀의 병든 몸을 자신의 정상성과 강인함에 대한 인식을 지지해주는 타자의 몸으로 보고자 하는 부당한 투사에 대한 페미니스트 전략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비비안의 죽어가는 몸은 젠더 수행성, 의료화된 몸의 수행성, 그리고 관객의 죽음의 공포(timor mortis)가 투사되는 문제의 몸으로서의 수행성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는 몸이며, 또한 동시에 이러한 모든 수행성의 전복성 구현을 시도하고 있는 몸이기도 한 것이다.

    8)최근 연구의 사례로 Ha l, K im Q . Ed. Feminist Disability Studies. Bloomington: Indiana UP, 2011 참조.

    5. 위트의 스토리텔링

    비비안의 주치의 닥터 킬레키언이 비비안에게 단도직입적인 어조로 전문적인 의학 용어를 사용하여 암선고를 내리는 플래시백 장면에서, 그녀는 문학적 언어와 위트의 담론에 의존하여 그의 의학적 담론의 위력에 도전하고자 한다. 이와 같이 의사와 환자, 그리고 의대 교수와 영문과 교수로서의 두 사람의 대면을 보여주는 이 장면에서 비비안은 말기난소암에 대한 전투적인 치료에 대한 킬레키언의 위협적 경고에도 자신의 학자와 교수로서의 강인함(toughness)으로 충분히 대처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보여준다. 이어서 또 하나의 플래시백으로 전개되는 비비안의 지도교수이자 멘토인 애쉬포드 교수(Prof. E. M. Ashford)와 학부 시절 비비안과의 면담 장면에서 학문적 엄격성과 탁월성을 성취한 스승과 제자로서의 두 여자 교수의 비교를 통해 비비안의 연구에 대한 집중된 관심과 집착을 보여준다. 애쉬포드 교수의 존 던의 소네트, 「죽음, 자만하지마라」(“Death, Be Not Proud”)에 대한 해설은 이 극을 통해 에드슨이 다루고자 한 죽음의 주제와 비비안이 맞이할 죽음에 대한 수용을 함축적으로 예시하는 대사이다. 애쉬포드 교수는 제자 비비안에게 “죽음은 무대 위에서 느낌표로 공연되는 그런 것이 더 이상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쉼표, 휴지이다.(death is no longer something to act out on a stage, with exclamation points. It’s a comma, a pause. 14-15)”라는 해설로 존 던의 죽음관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존 던의 형이상학적 기상과 위트, 단어와 구두점의 유희에 몰두하고 있었던 학부생 비비안은 스승의 해석의 요점도,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삶을 즐기라는 충고의 의미도 파악하지 못한 채,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비비안의 모습에서 아스퍼거 증후군의 특이성을 가진 교수로서 비비안을 예견할 수 있다. 교수가 된 비비안은 여전히, 학부 때 잘못된 원전을 인용했던 존 던의 마지막 시행, “그러면 죽음은 더 이상 없게 될 것이다; 죽음이여, 네가 죽으리라!”(And Death shall be no more; Death, thou shalt die!)로, 즉 세미콜론, 느낌표로 죽음을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그녀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극적 공연의 스토리텔링으로 죽음의 공포와 위력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고, 그녀의 스토리텔링의 마지막 대사로서 이 시행을 인용하기도 한다.

    『위트』에 등장하는 두명의 여자 교수들 중, 애쉬포드 교수는 학문적 성취를 통해 위트보다는 인간적 공감과 사랑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는, 쇼월터가 찾았던 긍정적인 롤 모델의 여자 교수로 간주될 수 있다. 반면에 자신의 지적인 강인함과 철저함 그리고 도전성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비비안은 학문적 성취를 통해 더욱 철저하고 비인간적인 학자와 교수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통증을 느꼈지만 존 던 연구에 중요한 공헌을 할 글을 끝내고 검사를 받은 비비안은 말기난소암이란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대학 사회가 부과한 “출판하라 아니면 망할 것이다”(Publish or Perish)라는 강박관념 속에 갇혀 죄수처럼 또는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처럼 살아온 비비안은, 오히려 연구와 출판에 전념한 결과, “출판했다 그래서 망했다”(Published and Perished 33)”라는 역설적인 결과를 맞게 된 것이다. 이제 그녀의 뇌가 토해낸 토사물은 존 던에 대한 연구의 산물이 아니라 암연구를 위한 “산물”(output 33)로 취급된다. 그리고 그녀의 죽어가는 몸은 생명권력을 행사하는 의학 담론의 관리와 통제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저명한 영문학자이자 독하기로 소문난 여교수 비비안은 이제 말기난소암 선고를 받아, 교수와 학자로서의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고 마치 격리된 죄수의 몸처럼 그녀의 몸은 온갖 고문과 억압의 기계들의 속박을 받게 된다. 치욕과 고통을 견디며 지적인 강인함을 무기로 무자비한 항암치료의 8개월 코스를 모두 견뎌내는 신기록을 세운 비비안의 몸은 이제 최신 종양약 연구를 위한 훌륭한 의학적 텍스트로 사용된다. 비비안이 그녀의 대학원 문학 수업과 비교한 닥터 켈리키언이 제이슨을 비롯하여 그의 수련의들을 데리고 실시하는 “대회진”(Grand Rounds) 장면은 바로 그녀의 몸을 텍스트로 한 의과대학 수업이다. 그러나 비비안은 그 장면을 자신이 연출하는 하나의 극, 극중극의 장면처럼 소개를 한다. 이 회진 장면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내는 수련의는 매번 검진 때마다 병상 환자에 대한 예법(bedside manner) 준수, 그리고 스승이자 환자인 비비안을 한 인간으로 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오로지 불멸의 암세포에만 관심이 집중된 아스퍼거 증후군 증세가 가장 심한 제이슨이다. 제이슨이 비비안의 문학 수업에서 우수한 학생이었듯이, 켈리키언의 학생으로서도 뛰어난 그의 수제자이다. 켈리키언이 강조하는 “강박적으로 자세한 검토”는 바로 비비안이 수업 시간에 강조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녀의 연구방법론인 신비평에서 강조하는 “면밀히 봄”(scrutiny)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몸이 텍스트의 역할을 하는 그녀가 겪는 “면밀한 봄”(scrutiny)은 객관적인 연구방법론이 아니라 “사악한 업무”(nefarious business)로 굴욕감을 느낀다(40). 닥터 켈리키언과 제이슨은 비비안의 몸을 텍스트로 면밀하게 검토한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하여 학계의 명사가 될 것이지만, 그 논문에서 그녀는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냥 표본병, 책커버, 검은 흔적들이 있는 흰 종잇조각일 뿐이다(53). 이러한 사실을 관객에게 말하고 있지만, 그녀는 여전히 의학적 담론 형성을 위한 텍스트로서 그녀의 몸이 흰 종이 위의 검은 흔적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의미를 생성하는 하나의 시 텍스트로 간주하며, 면밀한 검토로 그 의미를 읽어냄으로써 문학 담론을 형성하고자 한다.

    비비안은 의학 담론에 맞서 그녀가 받은 의학적 치료를 문학 장치들과의 유추를 통해 분석을 시도한다. 그녀가 받은 각각의 화학요법치료 주기는 시의 한 단위인 시행들로 구성된 “연”(strophe, 41)으로, 따라서 총 8번의 치료 주기들은 8개의 연으로 구성된 하나의 시로 비유된다. 그러나 시에서는 연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시의 통일성과 일관성을 가져다주지만, 종양치료에서 치료 주기들은 상호 침투를 통해 몸의 통일성과 응집성을 깨뜨리는, 즉 몸의 건강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비비안을 결국 죽게 한 것은 암이 아니라 그것의 치료를 위한 화학요법이 야기한 간기능상실과 심장마비이며, 이것이 바로 『위트』가 다루고 있는 최대의 중요한 역설이다. 비비안은 자신의 몸이 맞이한 이러한 역설을 존 던의 시에서 다루어지기에 적절한 주제로 간주하고 일종의 지적 게임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실험을 위한 과도한 투약(full dose)의 8주기 치료는 결코 존 던의 시를 구성하는 “산뜻한 작은 연들”이 아니라, 간독성(hepatoxicity), 신경마비(neuropathy) 등의 부작용을 초래한 “변주들, 서브플롯, 일탈들”에 비유될 수 있다(41). 사실 비비안은 “출판하라,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라는 대학 사회가 조장한 강박관념에 전념한 결과, “출판했다 그래서 망했다”라는 역설을 경험했다. 이제 그녀는 대학 사회에서 예외적인 존재로 취급되는 지독하고 철저한 여자 교수의 강박관념에 따라 초인적인 투쟁으로 8번의 고강도의 치료를 “견디어 내는”(survived, 53) 기록을 깬 결과, “견디어 냈다 그래서 죽었다”라는 최대의 역설을 직면하게 된 것이다.

    사실 비비안의 주도적인 스토리텔링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이다. 죽어가는 몸의 고통은 “목소리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 고통은 “함께 나눌 수 없는 지각적 경험”으로 구성되어, 부정될 수도 동시에 확인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Scarry 3-4). 다시 말해, 몸의 고통은 재현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재현은 산 경험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시도인데, 고통은 목소리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고통 가운데 있는 자신의 몸을 “의미론적인 위치”(semantic position)에 고정시키려는 비비안의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Bronfen 53). 물론 자신의 몸의 고통과 맞이할 죽음에 대하여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자 하는 비비안도 그것이 다른 것을 말하는 방식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다른 방식이란 바로 그녀의 연구방법론인 존 던의 텍스트에 대한 신비평적 분석 방식이고, 그것이 자신의 몸 텍스트를 읽어낼 수 있는 유추적인 수단을 제공할 수 있다고 그녀는 믿고 있다. 그러나 극이 진행되는 동안 반복 등장하는 그녀의 존 던 시 강의 장면들은 이러한 유추 관계에 대한 그녀의 확신과 더불어 좌절을 부각시키고 있다. 특히 존 던의 시 강의를 하며 스크린 앞에 선 그녀의 몸 위로시 텍스트가 투사되는 영화9) 장면은 그녀의 확신과 좌절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하고 있다. 사실 영화에서 반복되는 시 텍스트와 그녀의 몸 텍스트의 오버랩은 유추 관계 보다는 충돌 관계를 더 강조하는 효과를 자아낸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비비안이 시도한 시 텍스트 분석 방법을 통한 유추적 담론의 스토리텔링은 관객에게 그녀의 몸이 느끼는 고통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입증하는 역설을 초래한다.

    9)『위트』는 2001년 마이크 니콜스(Mike Nichols)와 엠마 톰슨(Emma Thompson)에 의해 영화로 각색 제작되어, 에미상(Emmy Award)을 수상하기도 했다.

    6. “그녀가 누워 죽어가고 있을 때”

    『위트』의 후반부에 이를수록 에드슨은 비비안의 관객을 향한 직접적인 말걸기를 점차 줄임으로써 그녀 자신의 언어로 몸의 고통을 표현할 수 없는 무능력을 드러내 보인다. 골반과 대퇴골까지 뼈로 암세포가 전이되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비비안은 단지 고통스럽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다. 그녀는 이제 언어라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그녀의 유일한 방어책을 상실하여, “나”라는 일인칭 화자로서, “나의 연극의 마지막 장면의 극적 통일성”(70)을 완결하기 위한 주도적 역할을 더 이상할 수 없게 된다. “이 말이 나의 마지막 이치가 닿는 대사입니다. 이제 행위는 전문가들에게 맡겨야만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오래 끌다가, 그것[죽음]은 너무도 빨리 온 것 같습니다. 적절한 결말을 위한 시간조차도 없네요”(72)라고 기운이 빠진 비비안은 관객을 향해 마지막으로 말걸기를 한다. 그녀가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죽음―대문자 D―은 더 이상 없으리라―세미콜론; 죽음―대문자 D―그대가 죽으리라―느-낌-표!”(73)라는 존 던 시의 마지막 시행을 당당하게 오용함으로써 자신의 결말을 맺으려는 시도를 하지만, 실패한 것을 알고 체념한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이제 극이 비비안 자신에 대한 비비안의 이야기에서 비비안에 대한 이야기로 급진적인 변환을 하게 된다는 신호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전환은 극의 시작부터 비비안의 안내를 받아온 관객을 무척 당황하게 만들며, 비비안의 입을 통해 의미를 부여해 온 그녀의 수행성에 대하여 이제 관객이 직접 그 의미를 읽어내야 하는 상황을 의식하게 된다.

    언어를 상실한 비비안은 이제 자신의 수행성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극의 행위를 주도하는 인물이 아니라 대학병원 암병동의 병실에서 혼자 누워 죽어가고 있는 몸의 수행성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스펙터클이 된다. 월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의 『내가 누워 죽어가고 있을 때』 (As I Lay Dying, 1930)의 주인공 에디(Addie Bundren)는 미국문학에서 가장 냉소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여주인공이다. 그녀가 누워있는 침실 밖에서 장남 캐쉬(Cash)가 짜고 있는 관이 죽음의 냉소적인 메타포를 시사하듯이, 에디의 죽음은 냉소적인 유머와 메타포로 무의미하고 부조리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본인의 침실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고향 제퍼슨에 묻히게 되는 에디의 죽음은 비비안의 죽음처럼 현대인이 병실에서 맞이하는 전형적인 의료화된 “더러운 죽음”은 아니다(황훈성 277). 현대인은 첨단 의학 기술의 발달로 생명을 연장 받는 대신 품위 있는 죽음을 맞지 못하고 폐부를 찌르는 고통과 무감각한 혼수상태를 오가는 격렬한 고통 속에서도 시시각각 죽음에 대한 공포로 괴롭힘을 당한다. 달리 말해, 현대인은 생명권력의 관리와 통제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첨단 시설을 갖춘 병원의 침대에서 비비안이 맞이하는 고독한 죽음은 바로 전형적인 현대인의 더러운 죽음이다.

    작가 에드슨은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위트』가 구원에 관한 연극임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말한다(Eads 241). 사실 『위트』는 중세 도덕극 『만인』 (Everyman, c. 1510)처럼 죽음을 맞이하게 된 주인공 비비안이 궁극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신을 경험하고 은총을 받게 된다는 구원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 『만인』의 현대적 버전으로 볼 수 있다. 중세극의 주인공 만인처럼 비비안 역시 영혼의 구원의 문제에 앞서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같이 해줄 동반자들이 필요하다. 『만인』에서 주인공이 필요한 것은 선행(Good Deeds)이고 지식(Knowledge)도 죽음 직전까지 동반하지만, 더러운 죽음을 맞이한 현대인의 전형인 비비안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애쉬포드 교수와 그녀를 “자기”(Sweetheart, 69)라고 유일하게 부른 친절한 간호사 수지(Susie Monahan)의 동반이다. 즉 현대인 비비안이 필요한 것은 위트가 소멸시키지 않고 오히려 고양시킨 애쉬포드 교수의 동정심 그리고 그녀가 잃어버린 그러나 수지에게서 다시 배운 “개인적 접촉”(personal contact)과 “인간적 친절함”(human kindness)이다(58-59).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가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수지가 가르쳐 준 심폐소생술금지(DNR) 선택권 행사, 즉 그녀에게 강요되는 더러운 죽음을 거부할 수 있는 인간적인 권위 회복이다. 다시 말해, 유일한 방문객 애쉬포드 교수는 존 던의 시 대신 『도망치는 버니』(The Runaway Bunny)라는 ‘영혼의 작은 우화’를 읽어주며, 끝까지 자식을 포기하지 않는 모성의 따뜻한 사랑으로 구원을 약속하며 임종을 맞는 비비안을 위로해주기 위한 동반자 역할을 한다. 수지는 비비안의 부탁대로 생명권력에 대한 저항, 즉 그녀의 죽을 권리를 그녀가 수행할 수 있도록 대신 싸워주고 끝까지 함께하는 가장 중요한 동반자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위트』가 수지와 같은 입지에서 자신이 일하며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라고 에드슨이 밝히고 있듯이,10) 수지는 미완성으로 남겨진 비비안의 극의 적절한 결말을 제공할 수 있는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에드슨의 분명한 지적 뿐 아니라 비비안도 이제 위트가 아니라 수지의 “단순함”과 “친절함”의 시간이 도래했음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69), 놀랍게도 대부분의 비평가와 관객은 여전히 수지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적절한 결말과 메시지를 찾으려고 한다. 이러한 특이한 현상은 일종의 극적 아이러니의 역설로 설명될 수 있다. 위트에 대한 강박적 신념을 가진 비비안의 인도를 받아온 관객은 똑똑한 비비안이 미완성으로 남긴 결말을 똑똑하지 못한 수지가 제공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다. 다시 말해, 관객은 여전히 비비안에게서 그녀의 수행성의 전복적 성과를 찾으려는 욕망을 투사하며 다른 곳에서 결말을 찾고자 한다는 것이다.

    “나는 상당히 똑똑하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70)라며 위트의 중요성을 확신하고 극의 전개를 주도해온 비비안은 이제 극적 행위를 전개시켜나갈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자신의 몸의 수행성에 대하여 직접 스토리텔링을 해온 비비안 대신에 관객은 이후 병원의 전문가들의 손에 맡겨진 그녀의 죽어가는 몸의 수행성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해야할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관객에게 병실에서 말없이 누워 홀로 죽어가고 있는 비비안의 몸은 이제 존 던의 시 텍스트도, 의학적 텍스트도 아니고, 그녀의 몸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배운 것의 결말, 즉 『위트』가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를 발견하도록 유도하는 스펙터클로서의 텍스트이다. 사실 후반부에 이르러 극적 행위를 주도하는 인물은 수지이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위트』의 기존 읽기들은 인간적 관계 맺기에 부적당한 특성을 공유한 비비안과 제이슨과는 대조적인 인물인 수지를 주목하지 않고 주요 논의에서 배제하는 경향을 보인다.

    작가 에드슨은 수지를 배제하는 전반적인 비평가들의 반응에 놀라며, 한 인터뷰(CBS News, Sunday Morning, 1999년 3월 14일)에서 자신이 『위트』에서 주력한 전략은 역설의 전략이었고, 극의 메시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이 오히려 그것의 정반대를 보여주는 역설적인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결말에 이르러 자신의 이러한 역설의 전략에 익숙해진 관객이 충분히 위트가 아니라 수지와 그녀의 인간적인 친절과 배려의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작가 본인은 기대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에드슨은 비비안이 주력하고 있는 위트의 기법을 사용하여, 위트가 아니라 그 반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사실 관객의 위트를 요구하는 에드슨의 역설의 전략은 실패함으로써 오히려 『위트』의 메시지를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실패의 역설로 효력을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관객의 위트를 요구한 전략의 좌절은 『위트』의 메시지가 비비안의 위트보다는 수지의 단순과 친절의 중요성임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의 역설의 전략은 실패를 통해 목적을 달성하게 되며, 역설적인 결과로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사실 전경화된 비비안의 미완성 극을 완성시키는 역할을 수지가 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한 관객은 비비안의 수행성의 전복성 역시 수지의 인간적인 배려와 확고한 책임감의 돌봄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10)에드슨은 1985년 메릴랜드주 베세스다에 있는 국립암연구소의 암과 에이즈 병동에서 가장 말단 보조원 일을 하면서 관찰한 사람들, 암과 싸우고 있는 환자들과 가족들 그리고 의료진들에 대한 관찰 경험을 통해 『위트』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7. “적절한 결말”과 수행성의 전복성

    『위트』의 마지막 부분은 병실 침대에서 고독하게 현대인의 굴욕적인 더러운 죽음을 맞는 비비안의 죽어가는 몸의 스펙터클의 구축과 그곳으로부터의 탈주의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비비안의 몸이 겪는 굴욕은 그녀의 임종 순간에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비비안의 심장이 멎은 것을 발견한 제이슨은 연구 대상으로서 비비안의 몸의 회생을 위해 심폐소생술 금지를 선택한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심폐기능소생(CPR)을 시도하고 청색 경보(blue code)를 발동한다. 출동한 경보팀이 황금시간(golden time) 내의 응급조치를 위해 광란의 소동을 벌이는 가운데 비비안의 몸은 이제 완벽하게 생명권력의 통제 관리 시스템에 갇힌 몸이 된다. 이러한 생명권력의 닫힌 구조 속에 갇힌 비비안의 몸을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은 우선은 비비안의 선택권이기는 하지만, 수지의 강력한 개입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엔딩 장면은 부각시킨다. 통제 시스템에 대한 수지의 저항으로 비비안의 몸은 ‘무경보’(no code), 즉 ‘죽게 내버려둔’ 몸으로 죽을 권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비비안의 죽어가는 몸의 수행성의 전복성은 수지의 강력한 개입과 저항에 의하여 마침내 구현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위트』에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비비안의 전담 간호사 수지는 이 극에서 가장 관심을 끌지 못하고 하찮은 지위에 있는 ‘소수’(minor)의 주변적인 등장인물로 취급되고 있다. 사실 이전에 극작품을 써본 적도 없는 에드슨은 단순히 간호보조원으로 일하면서 관찰한 것을 쓰기 위하여 극작을 하였다. 그녀는 극작이 특별한 전문가적 능력을 요하는 작업이 아니고 병원에서 말단 보조원으로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그냥 듣고 기록만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위트』를 썼다고 CNN의 제이미 알렌(Jamie Allen)과의 인터뷰(1999년 5월 3일)에서 말했다. 이러한 그녀의 극작 의도와 극작에 대한 태도는 들뢰즈(Gilles Deleuze)가 말하는 소수문학을 지향하는 작가의 입지에서의 극작 의도 또는 태도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작가 에드슨의 입지는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소수의 입지에서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대 위보다는 무대 밖에서 전개되고 있는 중요한 것까지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상황 파악을 더 잘 할 수 있는 수지의 입지와 일치한다(Kafka 50). 사실 에드슨은 자신이 보조원으로서 한 일이 하찮은 일이지만, 무대 연출가가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순조롭게 진행시키기 위해 해야 하는 일처럼 꼭 필요한 일이라고 회상한다(McGrath AR4). 간호사 수지 역시 비비안의 전담간호사로 사소한 일들을 하지만, 미완성으로 남긴 비비안의 연극을 진행하고 완성시키는 연출가의 역할을 한다. 특히 비비안의 체력적 한계와 고통을 잘 파악하고 있는 수지가 제이슨에게 약물 투여량을 줄여줄 것을 제안하고 제이슨이 이를 거절한 시점부터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수지의 연출가로서의 역할은 두드러지게 감지된다. 연출가로서 수지는 죽어가는 비비안의 몸을 돌보며 스펙터클을 구축하는 동시에 그 속에 내재한 전복성을 통하여 탈주의 가능성을 구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위트』의 엔딩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비비안의 몸에 대한 제이슨과 수지의 태도의 차이를 보도록 유도하고 있다. 존 던의 시를 비비안에게서 배운 제이슨은 구원과 삶의 의미가 아니라 “점차 증가하는 복합성의 차원으로 사물을 볼”(76) 수 있는 능력을, 즉 퍼즐을 해결하기 보다는 퍼즐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능력을 배웠다고 말한다. 반면에 “soporific”이라는 단어의 뜻이 “졸린”이라는 것을 비비안에게서 배운 위트가 결여된 수지는 “졸리게 만드는” 몰핀 주사로 비비안에게 안식의 잠을 가져다줌으로써 단순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무한히 증식하는 암세포의 “불멸성”에 끌려 암 연구에만 전념하는 제이슨은 영문학과 의학의 대가 비비안과 켈리키언의 제자이다. 등장인물들 중 아스퍼거 증후군의 특성이 가장 두드러진 제이슨은 오늘날 우리 학문과 대학 사회의 구성원의 전형을 보여준다. 특히 기술과학시대에 본격적으로 접어들면서, 가장 인문적인 관점에서 인간 존재를 대해야 할 전공 분야인 문학과 의학은 모두 객관적이고 단호한 지성에 굴복하고 “삶의 의미라는 너절한 것”(meaning-of-life garbage, 77)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다. 다시 말해, 비비안의 문학적 지성의 위트와 제이슨의 의학적 지성의 위트는 이들이 학문을 통해 추구해야할 인간에 대한 관심과 인간성을 오히려 상실하게 만드는 역설적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이러한 학문 분야와 인재들로 구성된 대학사회는 자폐적인 닫힌 구조의 시스템을 구축하게 된다. 문학의 주요 방법론인 신비평과 의학의 연구 방법론은 모두 강박적인 치밀한 보기(scrutiny)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기에만 전념하는 대학사회의 구성원들은 그들을 가두고 있는 닫힌 구조를 볼 수가 없고, 그것에 대해서는 관심 역시 없다. 따라서 대부분의 대학소설들이 이러한 대학사회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그곳을 떠나는 결단적인 방법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해가 된다. 『위트』 역시 죽음이라는 엔딩으로 결말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도 이러한 경향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위트』가 전경화하고 있는 비비안의 극의 무대가 되고 있는 대학 병원의 닫힌 구조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등장인물이 바로 수지이다. 들뢰즈(Gilles Deleuze)가 말하듯이, 수지는 전경화된 비비안의 극의 행위 전개에 직접 가담하는 “행위자”(agent)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소수의 입지11)에서 “보는 자”(seer)로 행위자들이 갇힌 닫힌 구조의 구축과 그 닫힌구조로부터 탈주할 수 있는 틈을 볼 수 있는 것이다(Cinema 2 126). 따라서 이러한 탈주의 가능성을 볼 수 있는 수지는 담요를 벗겨 그녀의 몸을 가두고 있는 닫힌 구조를 상징하는 병실 침대로부터 그녀가 일어나 탈주선을 찾도록 도와줄 수 있다. 따라서 수지는 소수적 입지에서의 보기를 통해 비비안이 면밀한 관찰로도 볼 수 없었던 탈주의 가능성을 마침내 볼 수 있도록 유도하여 비비안의 미완성의 극에 적절한 결말을 제공하는 연출가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비비안의 몸의 수행성에 잠재된 전복성의 구현을 통해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빛을 향해 나아가는 비비안의 벗은 아름다운 몸을 “불멸의 직접적인 화신”(Kim 164)으로 등장시키는 엔딩은 『위트』가 작가가 의도한대로 구원에 관한 연극임을 효과적으로 시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문 극작가이길 거부한 에드슨의 유일한 작품이자 퓰리처상으로 집중적인 주목을 받은 『위트』는 말기암으로 죽어가는 한 여자 교수의 몸의 수행성의 스펙터클의 구축과 그것으로부터의 탈주 가능성의 구현을 통해 기술과학 시대의 새로운 대학, 의학, 그리고 페미니스트 드라마를 지향하고 있는 극작품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11)작품에서는 수지가 흑인 여성으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공연들이 수지 역에 흑인여성을 캐스팅함으로써 수지의 소수의 입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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