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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Revolutions in Early 1960s and Issue of Social Existence in Historical Turning Point 1960년대 초 혁명과 역사적 전환기 사회적 실존의 문제
  • 비영리 CC BY-NC
ABSTRACT
Revolutions in Early 1960s and Issue of Social Existence in Historical Turning Point
KEYWORD
Social existence , Revolution , Historical Turning Point , Death , Family Movie , Value of Generation , Money , Conduct of Life , Theory of Vocation
  • 1. 들어가며- 영화, 혁명의 징후 혹은 효과

    영화를 혁명의 징후 혹은 효과로서 읽는 것.1) 이는 1960년대 초반영화를 해석하는 데 있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시각이다. 2년이 채 안되는 사이에 발생한 4.19혁명과 5.16쿠데타는 당시의 급격한 정세 변화를 알려 주는 상징이자, 역사적 사건에 휩쓸려 요동쳤던 제반 사회 영역들의 움직임들을 ‘혁명’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해석하게 하는 중요한근거를 마련했다. 한국 영화의 경우에도 1960년 초반의 혁명과 쿠데타는 195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하던 산업화의 기틀 마련에 급격한 제동을 걸었고 1961년 5.16쿠데타 이후에야 비로소 새로운 산업화의 정책이 마련되었다.2) 말하자면 1960년대 초반의 짧은 시기는 마치 유예기간과도 같아서 영화계에서도 혁명과 관련된 새로운 모색과변화들이 시도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런 만큼 한국 영화에 반영된 혁명의 징후 혹은 효과를 해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때 영화를 해석하는 규준으로 작용하는 것은 무엇보다 혁명의 정치성과 그것의 영화적 재현 양상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첫째, 1950년 대 후반부터 1961년까지의 영화들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 영화에 재현된 시각적 표상물들이 도시 중간층의 어떤 욕망과 가치관에 의거하고 있는지를 정치적 변혁과 연관하여 살펴본 논문이 있다.3) 둘째, 1960년대 초반의 사극과 가족 영화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영화에 재현된 인물과 상황 등을 당시 4.19혁명과 5.16쿠데타로 형성된 국가적 기획과 연동시켜 분석한 논문4)을 들 수 있다. 4.19혁명과 5.16쿠데타의 징후와 효과가 영화에 기입된 방식을 탐구한 이들 논문들이 공통적으로 주목한 대상은 바로 ‘가족 영화’5)이다. ‘가족’이 요한 이유는 그것이 혁명과 쿠데타 주체 세력들의 이데올로기를 가장 분명하고 첨예하게 보여주는 거점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아버지-아들’에기입된 ‘가부장제의 논리’와 ‘신-구세대의 갈등’ 그리고 ‘국가-국민’의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서로 경합한다. 이로써 4.19혁명 주체 세력들의 가치관과 신념, 5.16 쿠데타를 통해 구현하고 자 했던 군사 정권의 국가관과 국민상 등이 가장 효과적으로 재현되는 것이다.

    논자들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논의의 방법론에 다소 차이를 보인다 하더라도6) 결과적으로 1960년대 초반 영화, 특히 가족 영화가 4.19혁명과 5.16쿠데타의 정치적 파장 안에서 해석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물론, 잇따른 혁명과 쿠데타를 직접 호출하지 않고서 당시의 영화를 분석하는 논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1961년을 전후로 제작된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분석하되, 그것을 근대적 민족국가 성립의 이데올로기와 국민 만들기라는 관계 안에서 분석한 논문이 이에 속한다.7) 그러나 이 경우 또한 5.16쿠데타와 4.19혁명의 전제 하에, 가족 영화에재현된 가부장제의 헤게모니 형성 과정을 ‘근대민족국가’와 ‘국민’의관계 성립으로 치환시키고 있어 결과적으로는 위의 논의들과 궤를 함께 한다. 요컨대, 1960년대 초반의 영화는 장르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직ㆍ간접적으로 특별히 4.19혁명과 5.16쿠데타의 징후와 효과로서 주로 읽혀 왔던 것이다. 그런데 특정한 사건이 내장한 이데올로기의징후와 효과로서 영화를 분석하는 경우 영화의 의미를 매우 단일화하는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있다. 이는 영화에 재현된 다층적인 의미들을 특정 이데올로기의 반영으로서만 취급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혁명과 쿠데타의 징후와 효과가 ‘가족’이라는 특정한 단위 속에서 어쩔 수없이 표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가족’의 영화적 재현안에는 단순히 국가 이데올로기라는 특정 필터에 의해 걸러지지 않는 다층적인 의미도 분명 존재한다.

    가령, 1960년 당시 가족 영화에 지나치리만치 따라다녔던 수식어인 ‘서민의 애환’이라는 구절에 주목해 볼 수 있다. “<박서방>은 신인의작품으로서는 서민의 애환이 비교적 잘 그려졌고”,8) “그가 히트하고 또한 즐겨 맡는 역은 대부분이 애환어린 밑바닥 서민이다. <로맨스빠빠>가 그렇고 <박서방>이 그런가 하면 마부가 이를 말한다. ”9)는 표현이 이에 해당한다. 뿐만 아니라 “이 코메디도 <삼등과장>과 동계의 서민생활을 앵글에 잡은 것인데”10) “이봉래 감독이 즐겨 그리는 소시민의 애환 시리즈의 하나랄까? 그런 공통인수의 감각 속에서 샐러리맨의 생활핵과 그 주변이 시네스코 화면에 담긴 작품”11)이라는 평가 혹은 “구청 계장의 많찮은 월급으로 7남매와 노모 그리고 놈팽이 동생까지 열한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답답한 이야기가 예의 소시민의 애환판으로 펼쳐진다.”12) 등의 평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영화의 핵심에는 ‘서민의 애환’이 자리잡는다.

    혁명과 쿠데타 주체 세력들의 가치와 신념 그리고 국가 이데올로기 에 입각한 영화 해석에서 ‘서민의 애환’이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수식어였다. 좀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서민’ 혹은 ‘소시민’, ‘대중’은13)영화 관람의 주체이자 영화 재현의 주요 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해석 차원에서 소홀하게 취급되거나 잊혀진 존재들이었다. 그러다보니 ‘가족 영화’에 늘 따라붙었던 ‘서민의 애환’에 대한 관심도 잊혀지기는 매일반이어서, 특별히 1960년대 초반의 영화에는 ‘서민’이나‘소시민’이 증발되어 버린 감마저 있다.14) 물론, 혁명 주체 세력들의 가치와 신념 및 국가 이데올로기가 영화에 재현될 때 이것이 대중의욕망과 부합되었다는 짐작은 충분히 가능하다. 어쨌든 국가 이데올로 기의 자장 안에서 대중의 삶도 재편성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논의의 방점은 국가 이데올로기에 국한된 혁명의 징후와 효과를 분석하는 데 찍혀 있을 뿐, 그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던 주인 공들, 혁명이라는 거대한 헤게모니 각축장에서 슬쩍 비켜나 그 역사적전환기에 주변의 생활 세계에서 자기 삶을 정립해 나가던 대중(서민으로 일컬어지는 주체) 욕망이 영화에 재현되는 다각적인 양상에는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영화가 대중 욕망의 구현물이라는 점은 재론을 필요치 않는 상식적인 논의이다. 그렇다면 논의의 핵심은 기존 연구 성과와 관점을 달리하여, 1960년대 초반 가족 영화의 의미를 규정하던 ‘서민의 애환’이란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연 영화 안에서 재현되는 ‘서민의 애환’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며 그것이 영화를 어떻게 의미화하고 있는지를 질문하게 되면, 영화를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반영물로서가 아니라, 서민 대중의 실제적 삶을 총체적으로 반영하는 재현물로서 새롭게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본 고는 4.19혁명과 5.16쿠데타의 격변기였던 1960년대 초반을 ‘혁명과 역사적 전환기’라 명명하여 이 시대를 살아가던 대중의 삶을 ‘사회적 실존의 문제’와 직결시킬 것이다. 이는 일차적으로는급격한 사회적 변화에 대한 대중의 불안과 공포 및 정체성의 혼란, 사회적 삶에 대한 고민 등과 연관된 규정 방법이다. 당시 『사상계』의한 필자는 “4.19를 겪고 또 해를 바꾼 바로 이 순간에도 우리 사회는 역시 정신 불건강한 갖은 징조로 고통을 겪고 있음을 새삼스러이 다시금 느껴 볼 수 있으며 이것은 또한 모든 신ㆍ구 세대 알력의 원인이 되고 일면 그 결과로도 되고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15)고 하였거니와, 1950년대 후반부터 사회적으로 자살자와 범죄자 및 정신질환자가 증가하여 일반 대중의 사회적 안증은 가속화되고 있는 실정이었다.16) 1950년대 후반의 사회적 불안정의 공기를 호흡하고 1960년대 들어서 발생한 두 번의 혁명을 경험한 대중에게 1960년대 초반은 정신적 혼돈과 사회적 자기 정립의 불안을 증폭시키는 결정적 국면으로 인식되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대중의 사회적 실존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당시 ‘가족’을 다룬 영화에서 극적인 방식으로 재현되는데, 본 고가 주목하고자 하는 ‘가족 영화’가 바로 이러한 대중의 삶을 반영한다고 판단되는 1960~62년 사이에 제작ㆍ상영된 영화들이다.17)

    요컨대 4.19혁명과 5.16쿠데타에 따라 급격한 변화를 경험해야 했던 시기에 제작된 일련의 가족 영화들은 당시 대중이 감당해야 했던 역사적 전환기 사회적 실존의 문제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일정한 방 식으로 재현했다고 보는 게 본 고의 기본적인 시각이다.

    이에 근거하여 우선 논의해야 할 사항은 1960년대 초반 일반 대중의 ‘사회적 실존’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호출하던 영화적 장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주로 ‘극적 죽음’의 형식을 통해 영화적으로 재현된다. 인간 실존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자기자신에 대한 관심과 내부에로의 행동 방식에서 출발하는 것일 때,18)죽음은 가장 강력한 자기 내향성과 세계에 대한 부정성을 발현하는 계기가 된다. 또한 영화에서 죽음은 관객에게 가장 극적인 감정의 고양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멜로드라마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멜로드라마가 “우발 사건들, 동시에 일어난 사건들, 어긋난 만남, 갑작스러운 전환, 마지막 순간의 구원과 뜻밖에밝혀진 새로운 사실, 기계신 결말”을 특징으로 갖는다는 주장19)을 참조하자면, 영화에서 극적 죽음은 영화를 대하는 관객들의 감수성을 자극함과 동시에 실존의 문제까지 건드리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로 기능한다. 1960년대 한국 영화에서 재현되는 ‘극적 죽음’이 혁명과 역사적전환기의 불안과 공포 등에서 기인한 실존 문제의 한 상징이 될 수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본 고에서는 1960년대 초반 가족영화에서 재현된 극적 죽음과 그것에 결부된 당대 대중의 사회적 실존의 문제를 관련시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극적 죽음과 실존의 문제’를 통해서 형성된 1960년대 세 대의 가치관을 추려낼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당시의 영화에서는 ‘돈’이라는 경제적 가치관과 결부된 처세와 성공의 세속화된가치관이 대중의 사회적 실존의 문제를 봉합하는 유효한 삶의 기제로서 의미화된다. 특히 김소동의 1958년 작품인 『돈』에서 재현된 ‘돈’의 가치와 1960년대 초반 가족 영화에서 재현된 ‘돈’의 가치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환된다는 점, 1960년대 삶의 총체적 가치 체계로 ‘돈’의의미가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족 영화’에 수식어처럼 따라 다녔던 ‘서민의 애환’이란 바로 혁명과 역사적 전환기 사회적 불안과 공포, 자기 정립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고민하는 사회적 실존의 대중화된 명명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또한 영화에 재현된 죽음과 ‘돈’의 가치가 대중의 사회적 실존의 문제를 해결하고 삶의 욕망을 위로하는 영화적 장치이자, 4.19혁명과 5.16쿠데타가 반향했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손쉽게 만날 수 있는 접점이었음을 분석할 것이다.

    1)여기서 ‘혁명’은 통칭하는 것으로 사용함을 밝힌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4.19와 달리 5.16은 ‘군사쿠데타’로 명명되는 게 사실이다. 이 점을 인정하면서도 본 고는 가족영화가 제작ㆍ상영된 1960년대 초반 당시에는 4.19와 5.16을 모두 ‘혁명’으로 명명했다는점에 근거하여 4.19와 5.16을 ‘혁명’으로 통칭하고자 하는 것이다.  2)한국 1950년대 중후반부터 국산 영화 면세 조치를 필두로 제작 편수의 증가 및 해외영화제의 진출이 이루어지고, 기업화 정책의 필요성이 대두되며 영화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해 나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영화 산업화에의 노력은 1960년의 4.19혁명과 1년뒤의 군사쿠데타로 실현되지 못했으며, 1961년 영화법 제정, 1963년 영화법 개정을 통해 영화사 통폐합이라는 강압적인 형태로 이루어지게 되었다.(이우석, 「광복에서 1960년까지의 영화정책(1945~1960)」, 『한국영화정책사』, 김동호외, 나남출판, 2005. 박지연, 「영화법 제정에서 제4차 개정기까지의 영화정책(1961~1984)」, 앞의 책 참조)  3)노지승, 「영화, 정치와 시대성의 징후, 도시 중간계층의 욕망과 가족」, 『역사문제연구』 25, 역사비평사, 2011.  4)조준형, 「1960년대 초 정변기 한국영화 연구」, 중앙대학교첨단영상대학원 박사, 2011.  5)‘가족’을 다룬 영화에 대한 명칭은 논자에 따라 각각 다르다. 일반적으로 ‘홈드라마’ 혹은 ‘가족 멜로 드라마’, ‘가족 멜로 영화’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게 흔하다. 그러나 모두 ‘가족’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영화를 다룬다는 점을 감안하여, 본 고에서는 ‘가족 영화’로 통일하여 사용함을 밝힌다.  6)노지승의 경우에는 혁명의 주체 세력으로서 등장한 젊은 대학생을 중심으로 욕망하는 단위로서의 가족을 설정하고 그 안에서 중간계층으로서의 젊은 세대들이 4.19혁명과 5.16쿠데타의 가치를 실현하는 양상을 분석한다. 여기서 중점이 되는 것은 중간계층의상승욕망과 재건 주체로서의 위상 정립 및 가부장적 질서 확립과 여성의 소외 등이다. 한편, 조준형은 가족 영화를 분석하면서 세대 교체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 세대교체의화두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라고 지적함으로써 영화 안에서 4.19혁명과 5.16쿠데타를 ‘세대교체’의 문제로 읽는다. 동시에 이러한 가족의 세대교체 제를 ‘국가’의 기획 문제와 연관시켜 앞의 논자와는 차이를 보인다.  7)김선아, 「근대의 시간, 국가의 시간: 1960년대 한국영화, 젠더 그리고 국가권력 담론」, 『한국영화와 근대성』, 주유신 외, 소도, 2005.  8)허백년, 「1960년 영화회고」, 『한국일보』, 1960. 12. 25. 4쪽.  9)「어제(語題)의 스타 김승호」, 『서울신문』, 1961. 3. 13. 4쪽.  10)「【신영화】풍자로 카버한 비속성 이봉래 감독 『마이동풍』」, 『동아일보』, 1961. 10. 17. 4쪽.  11)「【새영화】통쾌한 풍자정신 이봉래 감독 <월급장이>」. 『서울신문』, 1962. 7. 22. 4쪽.  12)「【새영화】즐길 수 있는 드라마 박종호 감독 <골목 안 풍경>」, 『서울신문』, 1962. 7. 1. 4쪽.  13)‘서민’과 ‘소시민’, ‘대중’은 당시 영화평에서 산만하게 섞여서 사용되었다. 당시 일반 관람객을 ‘대중’으로 일컫는가 하면, 비슷한 내용을 다루는 가족 영화를 평가하면서 ‘서민’과 ‘소시민’을 섞어서 사용했는데 그만큼 용어 사용의 일관된 기준이 없었던 셈이다. 본 고는 논의의 전개상 용어를 통일하고자 한다. 직접 인용문의 ‘서민’, ‘소시민’ 등의 용어는 사용하되, 분석의 과정에서는 ‘대중’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대중’은 일반 서민을 일컫는 것으로 의미를 한정한다.  14)가령, 노지승의 경우 <박서방>과 <마부>를 비롯한 ‘서민의 애환’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던 일련의 영화들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이 영화가 ‘하층민’을 소재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장남을 중심으로 한 계층 상승 판타지에 주목한다. 4.19를 전후로 하여 사회적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한 계층 상승 판타지가 도시 서민을 다룬 가족 영화에서 징후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 논의의 주요 골자이다.여기에서도 논의의 중심은 도시 중간 계층으로 명명되는 학생이나 셀러리맨이라고 할 수 있다.(노지승, 앞의 글, 169~176쪽 참조)  15)유석진, 「신세대와 구세대 간의 알력」, 『사상계』, 1961. 4. 106쪽.  16)1958년도 『사상계』 기사를 보면 당시 사회적 범죄의 양상과 사회 분위기를 어느 정도 일별할 수 있다. 소년범죄, 고등학생 및 대학생의 범죄와 살인의 증가 등을 다루는 이 글에서 필자는 현재 우리 사회의 범죄 문제가 극도에 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가령, 1958년도 우리나라의 자살자수는 1957년에 4288명, 1956년에 2467명인데 그 원인으로 염세와 실업 등이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자살자수가 계속 증가 추세에 있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19세기까지에는 완전히 신이 있었으며 오늘에 와서는 인간성마저 잃고 로봇트화되어 가는 현대인간들은 심리학적인 상호관계에 있어서 그 기반을 끊기고 통제성 없는 분산된 사회를 이루어가는 가운데 무엇인가 완전한 행복을 찾지 못하고 불안과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중략) 우리나라의 정신의학계에서 분석한 세태를 보면 정신분열자가 백명에 일명의 비율로 있으며 전국의 환자수가 26만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그 원인은 물심양면의 공포가 발병의 원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자살은 앞으로 감소될 가능이 없다.”(권순영, 「범죄예방책의 과학화-범죄와 세상」, 『사상계』, 1958. 9. 참조)  17)본 고에서 주요한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영화는 다음과 같다. 1960년 작품으로는 강대진의 <마부>와 <박서방>, 신상옥의 <로맨스빠빠>, 김기영의 <하녀>이며 1961년 작품으로는 유현목의 <오발탄>, 이형표의 <서울의 지붕 밑>, 한형모의 <돼지꿈>, 박성복의 <해바라기 가족>, 이봉래의 <삼등과장>이며 1962년 작품으로는 이봉래의 <월급쟁이>, 한형모의 <골목 안 풍경>이다. 유현목의 <오발탄>과 김기영의 <하녀>를 제외한 작품 대부분은 당대의 시각에서 일반적으로 서민의 애환을 담은 <가족 영화>라고 명명 되던 것들이다. 본 고에서는 <하녀>와 <오발탄>이 가족을 서사 중심에 놓았다는 점과 당대의 사회적 불안과 실존을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 근거하여 <가족 영화>의 범위에 넣어 분석하고자 한다.  18)1950년대 우리나라에 도입된 실존주의를 소개하는 『사상계』의 한 글에서 필자는 실존 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실존주의는 바로 개인 자체라는 것이다. 그의 근본적 관심은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다. 그의 행동을 내부에로 향한다. 실존주의자의 사상은 자기 자신과 자기의 생애에만 국한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기가 살고 있는 커다란 사회 에서 고립되어 있다. 그는 자기 개인의 주검의 관념에 붙들려서 여념이 없고 사회적 연 관성을 마음에 인식하지 못한다.”(「실존주의의 몰락」, 『사상계』, 1955. 3. 133쪽) 여기서 필자는 실존주의가 개인주의에 국한된, 사회적인 것에 대한 무관심을 전제로 한 것이라 고 주장한다. 실존주의를 개인적 문제로 국한시킬 때, 죽음은 자기 자신의 실존을 가장 극한의 지점에서 고민하는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다.  19)존 머서ㆍ마틴 싱글러, 『멜로드라마』, 변재란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11, 146~147쪽.

    2. 극적 죽음, 사회적 실존의 대중화된 판본

    ‘죽음’은 ‘삶’과 직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죽음의 부정성과 삶의 긍정성은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영화에 재현된 죽음의 문제또한 이처럼 삶의 부정성과 긍정성이라는 양가적 가치를 표면화하면서 의미를 획득한다. 여기에 1960년대 초반 상황적 조건이 첨가된다. “이(李) 정권 하에서 불안과 위기의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던 정치적상황이 일변하여 4.19 이후 영화도 표현의 자유를 찾았다는 것이 커다란 전환이 아닐 수 없다.”20)고 했거니와 ‘자유’는 영화계에서 ‘삶과죽음’에 대한 다채로운 영화적 재현을 시도하는 데 일조했다.

    <서방>, <마부>, <삼등과장>, <월급쟁이>, <로맨스빠빠>, <골목안 풍경> 등이 서민의 애환을 그리는 과정에서 죽음과 권선징악적 해피앤드로 귀결되는 과정, <하녀>, <오발탄>, <해바라기 가족> 등이 심각한 죽음의 문제를 상정하고 암담한 전망을 제시하거나 불편한 해피앤드로 마무리되는 것도 이러한 죽음의 양가적 가치와 조응한다.

    이를 통해 1960~1962년이 삶의 부정성과 긍정성이 혼돈스럽게 대면 하고 있던 시기라는 점, 영화에 재현된 극적 죽음은 바로 이러한 대중이 처한 사회적 실존의 대중화된 판본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영화에 재현된 ‘죽음’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죽음은 연민과 공포를 야기하는 존재에 투영된 대중들의 심리적 작용과 결부된다. 특히 이러한 존재들은 일종의 신파적이고 오락적 요소를 동반함으로써 대중의 감정 이입을 고양시킨다. 한편으로 연민과 공포를 야기하는 존재들의 죽음은 현재적 삶의 가치와 방향을 조정하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한다. 여기서는 이러한 죽음의 재현 방식을 ‘가난한 하층민의 죽음’과 ‘무능한 가부장의 죽음’이라는 두 가지 구분 하에서 살펴본다.

       1) 가난한 하층민의 죽음

    이는 1960년의 충격적이고 놀라운 영화인 김기영의 『하녀』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모래성같이 공들여 쌓은 안정을 유지하려고 번민하는 소시민의 생활감정”을 어렴풋이 전달하면서 “인간성의 맹점, 의지의 문제”21)를 다룬 이 영화에서 하위 주체 여성인 하녀는 소시민의 안정된 가족을 파탄으로 몰아가는 존재로 재현된다. 사건의 중심이 되는 하녀의 신체는 금욕적인 소시민 가부장의 성적 판타지를 만족시키고 하위 주체 여성의 감정선을 자극하지만 동시에 새출발하는 가정의위협물로도 작용한다. 폐쇄된 양옥집 안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않는 하 녀는 소시민 가정에 포섭되지는 않되, 끊임 없이 가정의 윤리와 규범의 방향을 한정짓는 기능을 한다. 음악선생 동식과 하녀의 불륜은 폐쇄된 가정 안에서 일종의 기이한 예외 상태를 재현하고 있다. 동식과하녀의 죽음은 바로 이러한 존재들에 대한 대중의 공포를 가장 극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이자, 새롭게 구성되는 소시민 가정의 윤리와 가치의 방향을 대중으로 하여금 내면화하도록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는 곧 당시의 사회적 삶의 방향성과 자기 정립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마부>나 <오발탄>에서 죽음에 이르는 여성도 마찬가지이다. <마부>에서 큰딸은 남편의 폭력과 아버지의 무관심으로 인해 자살하며 <오발탄>의 만삭 아내는 남편의 보살핌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채 아이를 낳다 죽는다. 이 둘의 공통점은 ‘침묵’당한 채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마부>의 큰딸이 벙어리라면 <오발탄>의 아내는 말을 잃어버린 존재인데, ‘언어의 상실’은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가부장의 폭력과 가난의 문제를 여성의 성적 지위를 통해 재현하는 방식이다.

    <마부>에서 딸의 자살은 근대와 전근대의 가치가 혼종하는 1960년대 초반 가치 충돌의 문제를 여성 문제로 치환한 경우이다. 다만, 여기서 핵심은 신파적 요소를 가미한 딸의 자살이 봉건과 근대 사회의 지향 가치에 대한 대중적 질문을 동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부의 가족은 큰아들의 고시 패스로 성공과 계급 상승을 희망할 수 있지만, 이러한 욕망은 봉건제의 희생양인 딸의 자살로서만 완벽하게 구현될 수 있다. 여기서 큰딸의 죽음은 대중의 연민을 자극함과 동시에 새로운 근대적 가치 지향을 구성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일종의 불안의 상징이다.

    <오발탄>에서 아내의 죽음 또한 당시 사회의 극단적 가난과 불안의 실체를 가장 또렷하게 보여 주는 경우로서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유발한다. 가난한 빈민 여성의 외면당한 죽음은 사회에서 자리잡지 못한가장 비참한 상황을 반영한다. 영화 안에서 영호가 은행에서 탈취한 돈을 들고 도주하는 씬을 보면, 화면 전면에 우는 아이를 업은 채 목을 매달고 죽은 여자의 모습이 잠깐 장한다. 이 모습은 철호 아내의 죽음과 쌍을 이루면서 1960년대 초반 극심한 불안과 가난의 문제를 찰나적이면서 충격적인 방식으로 재현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영화 <오발탄>에는 소설에서는 형상화되지 않았 던 몇 가지 장면이 추가되는데, 이는 당시 대중의 실생활에 더욱 근접하여 그들의 심리적 공감을 얻을 만한 것들이다. 첫째, 설희와 영호 그리고 설희를 사랑한 가난한 시인의 삼각 관계가 그것이다.22) 영화에서 재현된 설희와 가난한 시인의 죽음은 당대의 소통 불가능성과 그로 인한 고독을 철호와 설희의 사랑, 시인의 설희에 대한 사랑이라 는 멜로드라마적 장치로 재현한다.

    둘째, 목숨을 잃는 것은 아니더라도 일종의 ‘사회적 매장’의 형태로 죽음에 직면하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바로 영호와 함께 제대한 군인들이 이에 속한다. 특히 상이군인 경식은 전후의 상이군인 문제를 적극차용한 대목이다. “사람들은 상이군인이란 말 속에서 폭력, 구걸, 강매따위의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렸고 가능하면 그들과 부딪히고 싶지 않았다.”23)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당시 상이군인은 대중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영화에서도 경식은 마치 밤의 유령처럼 어두운 밤이나 폐쇄된 다방 등의 공간에서만 재현될 뿐이다. 그런데 경식과 명숙과의 사랑은 이러한 경식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불식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경식의 전쟁 체험으로 인한 육체적ㆍ정신적 상처가 명숙과의 순수한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명숙이 양공주로 전락하는 과정을 보여 줄 때, ‘사랑’이라는 신파적 장치는 대중으로 하여금 경식을 비롯한 상이군인 및 영호와 같은 실업자 집단, 명숙과같은 빈민 여성에 대한 연민의 감정과 불안을 동시적으로 경험하게한다. <오발탄>에서 적극적으로 재현한 군상들은 “모두 앞길이 깜깜하게 막힌 절망의 군상들”이며 이를 통해 영화는 “확실히 이땅의 어떤 어두운 면들의 진실을 그리고 있다.”24)

    요컨대 대중들이 영화를 통해서 맞닥뜨린 하층민의 죽음은 근대와 전근대의 가치 혼란, 혁명과 쿠데타 이후에도 해결할 길이 없는 극심한 가난과 계급, 사회 범죄 등의 문제를 극적으로 재현하는 장치이다. 신파적 요소를 대거 차용한 죽음은 곧 대중이 느끼는 삶의 부정성과 사회적 실존에 대한 물음을 동반하는 중요한 상징이다. 동시에 “국민은, 희생적이었다는 영화인들과 새벽길 같이 훤해 가야 할 그 길을 안타까이 기다리고 있다.”25)는 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죽음은 삶의 부정성으로부터의 극복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했다.

       2) 무능한 가부장의 죽음

    가부장 아버지의 죽음은 김승호 주연26)의 가족 영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해바라기 가족』에서 부호 정진구의 죽음은 자식들의 불행한 삶으로 인해 발생한다. 물질적 부와 반비례하는 비극적 가정 분위기 속에서 배 다른 자식들이 겪는 고민과 방황은 결국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모는 근본적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창식과 중식의 방황과 불안은 매우 파괴적이다. 큰아들 창식은 쇼펜하워의 책을 탐독하며 염세주의에 빠져 사는 실업자로서,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자신에 대한 환멸로 인해 아버지와 가장 적대적인 관계에 놓 여 있다. 이에 더해 식모의 아들로 태어난 둘째 아들 중식은 자신의 불행한 출생에 대한 반항의 방법으로 권투선수로 활약하지만, 그것이끝내 좌절되자 여동생 영애의 애인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현실 타개에 실패하고 만다. 중식의 살인으로 인한 충격으로 고혈압을 앓던 정진구가 죽음을 맞음으로써 끝내 흩어졌던 가족은 창식을 중심으로 복구된다. 죽기 전 아버지는 끊임없이 과거의 과오(여자들에 대한 편력)를 잊고 자식들과 행복한 미래를 꿈꾸려 하지만, 꿈 속에서 ‘과거의 신’ 과 만남으로써 어쩔 수 없이 과거로부터 자신의 현재를 저당잡힐 수 밖에 없는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다. 아버지 자체가 이미 과거의 현재적 현현인 것이다. 창식을 비롯한 자식들이 끊임 없이 아버지와의 불화 속에서 한자리에 모일 수 없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이와 같은 논리에 의해서이다. 결국 ‘과거와 현재의 불안한 동거’ 특히, 아버지 세대가 지닌 과오가 현재와 미래를 구상할 수 없는 근본적 이유이다. 사실, 아버지의 과오인 축첩문제는 4.19혁명 이후 신생활 운동을 통해 극복되어야 할 과거의 잔재로 치부되었는데 영화는 이를 적극 차용한다.27) 그러나 이러한 영화적 차용보다 더 핵심적인 것은 아버지의 과거가 야기하는 현재적 불안과 공포이다. 창식으로 대변되는 젊은 세대가 지니는 사회적 불안과 공포는 아버지가 마련해 놓은 사회적 지위를 거부할 정도로 심각하다. 폭력의 양성화된 방법으로 묘사된 권투를 통해 사회적 위치를 선점해 보려는 중식의 노력도 근본적으로는 아버지의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가족에 청신한 기운을 불어 넣는 존재가 미원이다. 미원 또한 색마인 윤동하의 희생양이었지만 창식의 연인이자, 기생에게서 난 막내 아들 인식의 마돈나로 새롭게 자리잡음으로써 과거와 결별할 수 있게 된다. 미원이 영화의 한 축에서 ‘구원의 여인상’ 역할을한다면, 아버지의 죽음은 가족에 근본적으로 도사리고 있던 불행과 불안의 기운을 몰아내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요컨대 ‘사랑’과 ‘죽음’ 이것이 바로 『해바라기 가족』이 내포한 심각한 사회적 실존의 문제를 대중적 방식으로 재현한다고 정리할 수 있다. 가족은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방황과 불안의 염세적인 고통을 덜어내고 ‘사랑’을 통해 미래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요컨대 이 영화는 ‘사랑’과 ‘죽음’이라는 신파적 요소를 활용하면서 세대적 관점에서 젊은 세대의 사회적 실존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엮어낸 것이다.

    한편으로 아버지가 ‘자살’의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죽음’의 형식이 영화에 개입되는 경우가 있다. <골목 안 풍경>과 <월급쟁이>는 전체적으로 월급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소시민 가부장의 취직과 실직을 문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내러티브상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이는 ‘가정경제’의 문제로 수렴되는데, ‘자살 소동’은 인생의 희비를 교차시키면 서 대중이 겪었던 경제적 실존의 문제를 건드린다. “생활의 시달림 속에서 그래도 정정당당히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의지 굳은 주인공(김승호 분)을 그렸다는 이 작품에서 그는 웬간히 관객을 웃길 것만 같다.”고 하면서도 “50대 평사원 김승호 일가와 그 주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펼치면서 서민생활의 애환을 담게 될 이 영화에서 역시 이봉래적 철학이 물씬하게 풍기리라는 것이 영화가의 숙덕공론”이라는 평가가 이를 반영한다.28) 또한 <골목 안 풍경>을 다룬 글에서도 “이야기 는 골목 안 한 가정을 중심한 시정 생활을 그린 것인데 더러 사회문 제를 곁들인 멜로드라마로 충분히 수준작이 된다.”29)고 하거나 “이러한 소시민의 생활상이 지저분하지 않고 산뜻하게 그려져 가기 때문에 가슴에 오는 공감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되었다”30)고 지적함으 로써 두 영화가 서민 생활의 애환을 희극적으로 다루면서도 철학과 사회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골목 안 풍경>의 가난한 공무원 고주사는 9남매를 둔 집안의 가장으로서 박봉으로 생활하며 겨우겨우 가족을 이끌어 나간다. 고주사의 자살 소동은 가족 경제를 책임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어머니의 맹장 수술을 위해 악덕업자 김사장으로부터 돈을 빌리지만, 세금체납을 한 김사장의 업소를 차압함으로써 고주사는 위기에 처한다. 김사장과 부패 공무원으로 인해 직장을 그만둔 고주사에게 죽음밖에는 해결책이 없었던 것이다. 죽음은 고주사의 경제적 책임과 고단함을 내려놓는 최후의 수단이다. 고주사의 실직과 자살의 제스처가 영화의 가장 심각한 위기를 장식하고 감정이입을 동반하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 물론, 고주사의 자살소동은 그저 잠깐의 현실도피로 끝나지만, 이는 ‘자살’이라는 극단적 해결방법까지 고민해야 했던 당시 서민 가정 경제의 위기와 불안감을 효과적으로 재현하는 장치이다.31) 여기에 세금탈루의 주범이자 부패의 장본인으로 대변되는 김사장과 다방 마담 은미의 불륜 관계 등을 통해 영화는 당시 사회에서 요구된 ‘정직함’의 가치를 강조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여 고주사로 대표되는 세금징수 공무원의 삶이 ‘정직함’의 가치 표본으로만 완벽하고 행복하게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고주사의 경제난과 실직에의 위기와 위험은 ‘자살’이라는 경우의 수를 동반하면서 영화에 반영된 서민 애환의 실상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살’은 사회에서 요구한 ‘정직’이나 ‘성실’의 가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현실적 부조리를 폭로함으로써 대중이 늘상 겪는 사회적 공포를 재현하는 것이다. 영화는 서둘러 희극적인 해피앤드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만 이는 ‘자살’에 동반된 사회적 죽음의 현실적 고민을 봉합하고 은폐하는 장치일 뿐이다.

    <월급쟁이>도 이와 마찬가지어서 만년 계장 박중달은 바른생활 사나이지만 회사 내의 부패 세력인 부장과 과장의 횡령 제안으로 위기에 처한다. ‘월급’이라는 가족 생존의 절대적인 문제 앞에서 ‘정직함’을 내세우다 쫓겨나고 만 박계장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서 없어지는 일뿐이었다. 빚에 쪼들리던 박계장과 아내가 자살 소동을 벌이는 장면이 희극적으로 제시되는데 여기서도 ‘자살’은 죽음의 형식을 빌어 사회적 생존의 갈림길에 선 대중의 불안과 공포를 환기하는 장치이다.

    이 외에 가족 영화를 표방하는 <로맨스빠빠>나 <삼등과장> 등도 비슷한 패턴으로 가난한 일반 서민의 애환을 ‘실업’과 경제난을 중심으로 문제 삼는다. 이들 영화에서는 비록 ‘죽음’이 명시적으로 재현되지 않지만, ‘실업’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생존’이라는 절박한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4.19명과 5.16쿠데타를 통해서도 쉽사리 해결되지 못했던 민생고 때문에 일반 대중의 사회적 생존 문제는 매우 심각했다. 물론, 만연한 사회적 부패와 불건전성은 4.19혁명 이후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신생활운동을 통해 해결되는 듯 했다.32) 그러나 장면 정권의 국정 실패와 잇따른 5.16쿠데타로 인한 또다른 변혁 속에서 이 운동은 체계적이고 자발적인 사회운동으로 쉽사리 정착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이러한 역사적 격변기에서 일반 대중이 체감하는 실업과 경제난은 일종의 사형선고와도 같을 수밖에 없었다. 1960~62년 사이의 가족 영화 속 실업과 죽음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대중이 체감해야 했던 사회적 생존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안의 문제를 떠안고 있다. 가난한 소시민 가부장의 실업과 자살 소동이 대중으로 하여금 진한 페이소스를 야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동시에 영화는 비단 여기에만 머물지 않고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에 대한 답을 모색한다.

    20)허백년, 앞의 글.  21)「【신영화】미수(未遂)했으나 주목할 실험 김기영 감독의 <하녀>」, 『동아일보』, 1960.11. 9. 4쪽.  22)설희와 영호의 사랑과 설희를 사랑하는 가난한 시인의 등장은 소설 <오발탄>에서와 달리 영화 <오발탄>에서만 재현되는 장면이다. 철호가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는 동안 간호를 해 줬던 간호사 설희는 우연히 전쟁 후에 철호와 재회한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을 다니는 설희와 대학을 그만둔 채 방황하는 영호는 서로의 처지에 공감하고 잠시 사랑하게 되지만 설희를 사랑하던 가난한 시인이 설희를 안고 창에서 뛰어내림으로써 설희와 시인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23)이임하, 「상이군인, 국민 만들기」, 『중앙사론』33, 중앙사학연구회, 2011. 6.  24)「지평선」, 『한국일보』, 1961. 4. 14. 1쪽.  25)앞의 글, 『한국일보』, 1961. 4. 14. 1쪽.  26)김승호는 1960년대 초반 가족 영화에서 ‘아버지’역을 맡음으로써 당시 가장 서민적인 아버지상으로 이미지화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은 이러한 김승호의 이미지를 가장 명확하게 표명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가 히트하고 또한 즐겨 맡는 역은 대부분이 애환어린 밑바닥 서민이다. <로맨스빠빠>가 그렇고 <박서방>이 그런가 하면 <마부>가 이를 말한다. 또한 이것이 아시아의 설움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는지도 모르겠 다.(중략) 지난번의 영화제에는 ‘한국의 할아버지’ 그 다음에는 ‘아시아의 아버지’라고 불리워지는 그는 이번에는 어떻게든 타이틀을 붙여 대접했는지 궁금하다고 하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앞의 글, 『서울신문』, 1961. 3. 13. 4쪽) 김승호는 훌륭하게 ‘서민의 아버지’상으로 등극하면서 이승만 정권 시절 대통령의 정치 연설에 동원되어 곤욕을 치렀던 과거의 흔적을 지우고 새롭게 1960년대의 스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를 감안하면 ‘서민의 아버지’라는 김승호의 이미지는 가족 영화의 흥행보증수표 역할을 톡톡히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27)사상계사는 1960년 9월 ‘신생활운동의 요령’이란 좌담회 기사를 잡지에 싣고 있는데, 축첩에 관한 내용도 신생활 운동의 여러 실천 방안을 논의하는 와중에 제기된다. 좌담회에 참석한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교수 최인순은 다음과 같이 축첩제도에 대해 논의한다. “그때 축첩자 문제도 났는데 남성들도 반대할는지 모르지만 건전한 가정 없이 건전한 생활이 없고 건전한 생활이 없이 건전한 새 생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어났는데 계속해서 앞으로 국산품 애용운동을 해야 할 텐데 그것을 정부가 협력안해 주고 전체가 조직적으로 다 협력 안해 주면 안 됩니다.”(「【좌담회】신생활운동의 요령」, 『사상계』, 1960. 9. 218쪽)  28)「제명으로 한몫? 이감독과 <월급장이>」, 『서울신문』, 1962. 6. 6. 4쪽.  29)「【새영화】참신한 연출 역량 <골목 안 풍경>」. 『경향신문』, 1962. 6. 28. 4쪽.  30)「【새영화】즐길 수 있는 드라마 박종호 감독 <골목 안 풍경>」, 『서울신문』, 1962. 7. 1. 4쪽.  31)당시 서민생활의 고단함은 가정 경제의 적자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이와같은 현실은 다음의 글에서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선 도시나 농촌이나 우리나라 국민의 살림살이는 수입과 지출의 불균형,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가계의 적자를 들수 있다. 서울 근로자 가계 조사에 의하면 1961년도에는 월평균 총수입 8,970원에 총지출은 9,670원으로 매달 700원의 적자를 나타냈으며 1962년 1월~3월에는 수입 8,620원에 지출 9,650원으로 1,030원의 적자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소비생활의 불건전성은 ① 수입수준이 적으며, ② 수입에 있어서 비노동소득이 차지하는 중이 크며 ③ 일반적으로 경제안정이 지속되지 못한 데에 기인된다고 볼 수 있다.(「【특집 서민의 경제학】서울 시민은 어떻게 사나」, 『사상계』, 1962. 11. 164쪽)  32)신생활운동을 시작한 대학생뿐만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위정자들의 역할을 당부하는 다음의 글은 정치가들로부터 국민에 이르기까지 범국민적인 운동으로 신생활운동이 확대ㆍ실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지난 7월부터 경제혁명을 모토로 하여 서울대생을 중심한 서울 문리대생들의 신생활 운동은 그 목적을 혁명완수의 제2단계로서 경제혁명의 수립을 외쳤으며 보다 나은 생활을 국민 전체가 영위할 수 있는사회발전을 위하여 범국민운동을 전개하여 왔다.(중략)신생활운동의 전개는 경제, 사회, 정치적 안목에서 체계적으로 구상 계획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각 분야의 계획연구를 위하여 지도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학생들에게 제의해 둔다.(중략)끝으로 학생들의 신생활운동의 적극협조를 위하여 국민 전체의 일대 각성을 요청하며 이 길만이 민족국가를 살리는 길임을 위정자들은 다시 한번 명심하기 바란다.”(「【국내의 움직임】신생활운동과 위정자의 각성」, 『사상계』, 1960. 11. 157~159쪽 참조)

    3. 영화에 재현된 ‘돈’과 ‘처세’의 철학

    가난과 실업 등이 빚어낸 사회적 생존과 불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화는 ‘돈’과 ‘처세’의 가치를 긍정적인 삶의 지침으로 상정하는 길을 밟는다.

    <돼지꿈>에서 집 없는 서민인 창수 부부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돼지’를 키워 목돈을 마련하는 것과 찰리 홍의 밀수품을 사들여 장사를 하는 일이었다. 주택문제가 심각했던 1960년대 서울에서 집 없는 서민들에게 가혹한 세금과 주택 대출금을 갚기 위해서는 ‘돈’이 무엇보다 필요했다.33) 창수 부부도 당장 집 없는 설움을 해결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나쁜 것인 줄은 알면서도 ‘밀수품’에 손을 댄것이다. 물론, 이들의 꿈은 찰리 홍의 사기 행각에 의해 물거품이 되고, 설상가상으로 아들마저 잃게 되어 산산조각 나고 만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창수는 그 모든 과정이 “태양을 똑바게 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부르짖는데, 이 말의 의미는 다소 모호하지만 ‘전한 생활 가치’의 전제 하에 정직하게 돈을 벌어서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적 가치의 추구로 인해 ‘돈’의 가치가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돼지꿈>에서 창수 부부의 돼지 사육은돈을 벌기 위한 건강한 노력으로 비춰지며 사실 아들의 죽음은 사기꾼 찰리홍을 찾으려다 발생한 일이다. ‘부정한 돈’은 나쁜 결과를 가져오지만 ‘돈’ 자체의 의미와 가치는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재현된다.

    <삼등과장>이나 <월급쟁이>, <골목 안 풍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기와 횡령 등으로 재현되는 돈은 주인공을 실업이나 자살과 같은위기에 처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돈’의 가치 자체가 모두 부정적으로 재현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 영화에서 ‘돈’은 가정 경제의 번영과 삶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중요한 가치이다. 이를 보면 이 당시 가족 영화에서 서민의 애환은 실생활에서 ‘돈’이라는 가치에 집약되는 것으로 읽힌다. 그들의 실존과 불안을 촉발하는 것이자 그것을 잠재우는 최고의 가치가 바로 ‘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는 1950년대의 ‘돈’에 대한 가치와는 다른 양상 을 보인다. 김소동의 1958년 작품 『돈』에서 ‘돈’이라는 가치는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재현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벌판 저 멀리서 달려 오는 기차는 농촌을 침투하는 일종의 근대적 산물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기차에서 내리는 억조는 바로 봉수가 사는 농촌마을의 악덕고리대금업자로서 봉수의 삶을 짓밟는 중심 인물이다. 주인공 봉수는 아무리 뼈 빠지게 일을 해도 돈 한푼 만질 수 없는 가혹한 현실에서 ‘돈’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는 농민으로 등장한다. 그는 억조의 꾀임에 빠져 놀음으로 돈을 잃고, 소를 판 돈까지 서울에서 사기당해 위기에 처한다. 그 와중에 그는 억조가 땅에 흘린 돈에 눈이 멀어 억조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 돈 때문에 죄도 없는 영호와 옥경이가 수갑을 차고 기차에 실려 가는 것을 따라가며 봉수 가 부르짖는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모두가 돈 때문”이라는 절규는 ‘돈’ 자체의 부정성을 성토하는 말이다. ‘기차-서울-돈-사기-놀음’이 라는 연관을 통해 근대적 가치인 ‘돈’은 철저히 농촌사회를 파괴하는 ‘악’의 존재로 환원된다. 돈이야말로 근대적 부정성의 물질적 상징이다. 당시 이 영화를 두고 리얼리즘을 획득했다고 평한 것을 볼 때,34) 1950년대 후반 근대화의 화폐 가치인 ‘돈’이 지닌 정성을 영화가 어느 정도 현실적으로 구현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영화가 도시가 아닌 ‘농촌’이라는 특정한 장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돈’의 의미를 특정한 공간에만 국한시켜 재현한 점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영화에 재현된 ‘돈’이 옥경이가 돈을 벌기 위해 가려고 하는 ‘도시’를 상징하고 서울을 사기꾼이 판치는 공간으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근대 적 가치인 ‘돈’은 공간을 막론하고 부정의 가치로 의미화되기에 충분하다.35)

    이러한 1950년대 후반 ‘돈’의 가치와는 달리, 1960~62년의 가족 영화에서 ‘돈’은 삶을 파탄내기보다는 오히려 극적으로 구출하는 구원의 가치가 된다. 돈은 실업과 가난의 문제를 전면화하고 등장 인물들에게 삶의 불안을 야기하지만 결과적으로 해피엔드를 맞게 하는 계기이다. <돼지꿈>에서 “태양을 똑바로 보는 계기”를 ‘돈’이 마련해 주는 것처럼 1960년대를 살아가는 세대에게 돈은 사회적 실존에 영속성을 부여 하는 소중한 가치로 변모한다.

    ‘돈’이라는 경제적 가치가 사회적 실존을 담보해 주는 물질적인 것이라면, ‘처세’와 관련된 ‘성공’의 가치는 정신적인 면에서 대중의 실존을 보장해 주는 가치가 된다. 4.19혁명과 5.16쿠데타의 급격한 변화속에서 자기의 입지를 굳히고 나아갈 방향을 설정해야 하는 대중에게 ‘처세’는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개인적 안정과 행복을 성취하는 문제와 직결되었다.36)

    그런데 여기에서 처세의 범위는 정직과 성실의 가치를 구현하되, 사회적 부의 축적이나 명성의 획득과 같은 대(對)사회적 범주로 확장되는 게 아니라,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는 ‘직분론’에 국한되어 있는 게 특징이다. 이는 부정적으로 보자면 일종의 ‘보신주의’와 ‘보수주의’ 적 가치를 내면화하는 일이다.

    <마부>와 <박서방>에서 구세대인 아버지를 계승하는 아들은 각각 고시패스와 해외지사 파견이라는 ‘성공’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이들이 밟는 길은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의 생계와 삶을 책임져야 한다 는 ‘가장’으로서의 직분에 국한된 것이다. 아들 세대는 사회의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아버지 세대의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공해야 하지만 동시에 성공을 통해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아들 세대에게 건전함과 성실함의 가치가 요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4.19혁명 이후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영화 곳곳에서 언명되는 영화<로맨스빠빠>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월급 4만5천원으로 빠듯하게 살아가는 소시민 가정에서 아들과 딸들은 아버지의 무능에 불만을 표시하면서 자신들에게도 돈과 시간과 자유를 달라고 외치기도 한다. 고등학생 바른이의 “아버지와 투쟁하여 싸우고 이기겠다”는 투지 어린태도 또한 혁명 이후의 분위기를 실감케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영화의 명랑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는 있을지는 모르나, 퇴직한 아버지를 중심으로 온 가족이 똘똘 뭉치는 주제와는 겉돈다.이 영화에서도 아버지의 실직과 생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식세대는 자신들의 역할을 찾고 그 직분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선언을 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오히려 자식들은 그동안 외쳤던 ‘자유’와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자발적으로 철회하는 것이다.

    <삼등과장>에서도 대학생 아들 영구가 아프레걸과 연애나 하며 놀고 먹는 한량이면서도 자신을 혁명 주체라고 으름장을 놓는 장면이등장한다. 할머니의 입을 통해서도 4.19혁명이 잠시 언급되지만 결과적으로 영화는 구과장 부부를 중심으로 한 가족애와 역할을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가족이란 합승 택시에 타고 있는 손님과 같은 것” 이며 부부가 바로 “운전수”라고 하는 대사에서 ‘행복’의 가치는 가족을 중심으로 한 구성원들의 직분론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이영화에서 구과장은 만년 과장의 딱지를 떼고 출세를 하기 위해 전무의 불륜을 눈감고 부정을 저지르지만 이러한 구과장의 출세 욕망은 곧 탄로나고 만다. 영화는 지나친 출세의 욕망이 온갖 부정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보여 줌으로써 가족을 중심으로 한 성실한 가장으로서의역할 혹은 자식으로서의 역할이 ‘행복’의 조건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월급쟁이>에서 실직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취직 전선에 나선 고분이의 적극성과 영화 말미에서 재취업에 성공한 아버지를 중심으로 새출발하는 가족은 모두 비슷한 패턴을 형성한다. 『서울의 지붕 밑』에 서도 시의원이 되겠다는 아버지의 출세 지향적 태도는 철퇴를 맞고, 장남인 현구는 출세와 성공보다는 진실한 점례와의 사랑을 우선시하는 정직하고 건실한 존재로 등장한다. 그리하여 현구와 아버지의 화해는 출세의 욕망이 사그라진 후 이루어지는데, 여기에서도 처세의 범위는 주어진 직분에 충실하는 것으로 국한된다.

    요컨대, 성실함과 정직을 기반으로 한 직분에의 충실이 곧 사회적 성공의 발판이 되는 셈이다. 위의 가족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실직과 실업의 위기에 직면하면서도 정직과 성실함을 지키려고 노력할 때 오 히려 사회적 지위를 다시 회복하는 패턴이 반복되는 것도 이와 관련 된다.

    이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 또한 매우 호의적이었다. 공감할 만한 소재와 주제로 무장한 가족 영화에 대해 대중이 그만큼의 화답을 했던 것이다. “금년도에 개봉된 85편 중 흥행적으로 힛트한 것은 <흙>, <로맨스빠빠>, <박서방>, <진주탑> 등”37)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박서 방>과 <로맨스빠빠>가 1960년의 대표적 흥행 영화로 자리매김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962년도 영화 중 2만명에서 3만명 안팎의 관객을 동원하여 비교적 흥행한 것으로 <월급장이>, <골목 안풍경>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분명 관객의 취향이 개입되어 있다. 즉, “이런 계산서를 놓고 관객의 취향을 살며보면 역시 서민물로 쏠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월급장이>, <신입사원 미스터리>, <골목 안 풍경> 등”이 그것인데, “서민생활의 애환을 담아 일상생활적인 공감을 요구하는 작품들이 모두 하한기의 회상을 보면, 비교적 좋은 흥행”을 기록했다.38) 비록 ‘서민물’로 일컬어지던 가족영화가 신파성과 안이한 연출력으로 인해 비판의 대상으로 몰리는 경우가 발하기는 했지만39) 관객이 그만큼 몰린 이유는 이 영화가 서민들의 애환을 가장 잘 반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족영화는 신파성의 문제를 충분히 극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작품성 면에서는 비교적 좋은 점수를 받았다. 1961년도 상반기 의 영화의 ‘베스트5’를 뽑는 자리에서 각 대학의 영화과 교수들이 지목한 작품 중에 가족 영화가 제법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앙대 교수인 김정옥은 국산영화 베스트5에 <오발탄>, <삼등과장>, <마부>를 들고 있으며 한양대 교수인 현상열도 <돼지꿈>과 <오발탄>, <마 부>를 들고 있다. 중앙대의 정일몽 또한 <오발탄>과 <등과장>, <마부>가 주목할 만한 베스트 영화라고 지목하여 가족 영화의 작품성을 인정한다.40) 말자하면 가족영화는 대체적으로 일반 서민 대중과 지식 인들에게 공통적으로 공감할 만한 내용을 포함하는 동시에 작품성 측 면에서도 어느 정도 호의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이러한 대중적 공감과 작품성 안에 위에서 밝힌 대로 돈과 처세에 대한 대중적 인생 철학이 놓여 있다는 점이다. 가족을 중심에 상정해 놓고 이루어지는 처세와 돈의 가치에 대한 철학은 어찌 보면 매우 소박하지만, 1960년대 초반의 격변기에 있어서 는 사회적 실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승만 부패 정권의 경험, 4.19혁명과 5.16쿠데타로 이어지는 정 치적 격변을 겪는 것도 모자라 근대적 물질문명이 삶의 전근대성을압박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대중은 거창한 것보다는 생존을 해결해 줄돈이나 처세와 같은 소박한 것들에 집중했다. 그런 점에서 가족영화에 드러난 서민의 애환과 1960년대 세대의 가치는 역사적 전환기를 살던 대중의 정신적ㆍ물질적 대응 양상이라고 볼 만하다.

    물론 이러한 1960년대 세대의 가치는 일종의 보수화된 보신주의에 영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인다. 가족을 중심으로 한 돈과 처세에 대한 소박한 인생 철학은 사회 제 분야에 대한 관심과 사회 구성원 간의 연대감 형성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다.41)

    또한 오로지 정직과 성실을 통해서 가족의 생존과 안정을 구가하는 게 ‘행복’이라는 설정은 4.19혁명과 5.16쿠데타를 거치면서 형성되었던국가의 근대화 정책과 쉽게 만날 수 있는 일종의 대중 생활 담론이었다고 볼 수 있다. “50년대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선거구호에 숨어있던 “잘 살고 싶다”는 대중의 욕망이 이제 지식인들에 의해 “잘 사는 것”은 곧 빈곤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는 것으로 표상되게 되었다.”42)는 지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60년대 초반 경제 근대화 책은 국가 이데올로기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가족 영화에 재현된 돈과 처세를 통한 행복 추구의 철학은 이러한 국가 이데올로기와 쉽게 접목 가능한 가치였다. 가족영화에 반영된 소박한 대중철학이 국가 기획을 반영한 계몽적 텍스트로서 읽히게 되는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가족 영화는 일방적 국가 이데올로기의 반영물로서가 아니라 당시 대중적 삶의 다양한 숨결과 가치를 적극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서민 대중의 욕망과 삶의 지향점을 보여 주는 좀더 풍부한 텍스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33)다음의 기사를 영화 <돼지꿈>의 시작 부분에서 영화의 ‘돈’ 문제와 결부되어 있는 도시의 주택난과 인구 증가에 대한 구체적인 나레이션과 관련된 내용을 다룬 것이다. “지난 6년간(55부터 61년까지)의 서울시 인구 증가수는 연평균 14만1021명이었고 세대수는 1만3천 세대였다. 이와같이 인구는 증가 일로를 보이고 있는데 시민수용능력은 고작150만명을 초과할 수 없다고 하니 주택난은 조만간에 해결될 것 같지 않다. 참고로 6년간(55년부터 61년까지) 서울시에 건설된 주택상황을 살피면 시에서 3701호, 주택영단에서 5476호, 산업은행에서 6218호, 그리고 개인들이 10만1018호, 모두 해서 11만6천4백13호에 불과하다(6년간의 세대증가수는 20만7924 세대나 된다)(중략)선사시대의 원시인들보다 약간 나을 정도의 생존을 영위하고 있는 생명들이 21세기를 앞둔 한국의 수도에는 아직도 허다하다. 현재까지의 통계를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시나 주택영단 또 는 산은 등 세 기관에서 건립한 주택수보다 개인의 힘으로 건립한 주택수가 더 많다. (중략)따뜻한 가정을 이루어 밝은 마음으로 삶의 예찬을 구가할 수 있는 복된 날이 이민족 위에 한시 바삐 찾아오기만을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시민의 45.8%가 집이 없다-요원한 서울의 주택난 해결-」, 『사상계』, 1962. 11. 192~193쪽 참조)  34)“영화 『돈』은 같은 리아리즘이란 입장에서 본다면 훨씬 미화된 리아리즘이라 하겠고,『자전차도적』에 비해 손색이 있는 점도 없는 점도 있기는 하지만 한국영화가 지향할 수 있는 뚜렷한 길임에 틀림이 없고 보면 다만 한국의 암흑상을 그렸다는 이유만으로써 국내의 상영이 혹은 해외에의 진출이 당국에 의하여 저지되는 이유를 알 길이 없다.(중략) 당국은 우리나라에 소개된 허다한 외국영화를 통하여 『돈』이 그런 이상의 무엇을 보았을 것임에 비추어 우리나라의 특수 사정-일종의 열등의식-만을 고집할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제5회 아세아영화제 출품작 심사위원)”(황영빈, 「영화제 출품과 나의 의견 <돈>의 레알리즘을 이태리 것과 교한다」, 『한국일보』, 1958. 3. 9. 8쪽) 한편 당시 영화 <돈>의 아세아영화제 출품을 놓고 논란이 불거진 가운데 이 영화의 소재의 진부함과 작품성의 미흡을 두고 출품을 반대하는 입장도 있었다. “돈 때문에 한숨을 쉬고 절망 끝에 사람이 죽기까지 하는 암담한 이야기가 어느 농촌 한구석을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흔히 있는 낡은 소재일뿐더러 여기에서 다루어진 테에마에서 새삼스러운 것을 발견할 수 없고 한 폭의 농촌풍속도를 보는 듯한 흥미는 주지만 준엄한 작가의 레얼리티같은 것을 찾아보기에는 너무나 소홀하고 안이한 것을 느낀다. 이것은 감독이 어째서 돈이 필요한 것인가 하는 절실한 동기와 내재적인 이유보다도 결과를 앞세워 관객에게 의식시키려고 한데서 오는 것 같다.”(「【신영화】<돈>」, 『서울신문』, 1958. 3. 14. 4쪽)그러나 여기에서 ‘소재의 진부함’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당시 ‘돈’의 가치에 대한 부정성이 만연해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돈>이 당시 ‘돈’의 의미가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사회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35)이영일은 『돈』을 포함한 김소동의 세 작품을 논하는 글에서 당시의 농촌문제가 곧 사회 전체의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그것을 김소동이 리얼하게 잘 묘파해냈다고 평가한다. 이에 따르면 ‘농촌’을 침투한 돈의 문제는 곧 당시 한국 사회 전체를 침투한 돈의 문제와 그 의미가 상통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당시 대개의 작품이 도시에 소재를 얻어서제작된 데 반하여 이러한 김소동의 세 작품은 버림받은 농촌의 절실한 현실을 소대로 취한 뒤 농촌 사회 문에에서 다시 한 걸음 확대하여 한국사회의 현실에 하나의 비판을가한 작품들이었다. 소박하고 도식적인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로컬리즘을 배경으로 한 주목할 작품이 아닐 수 없다.”(이영일, 『한국영화전사』, 소도, 2004, 263쪽)  36)이와 관련하여 천정환은 ‘1960년대 자기계발과 문학문화’를 분석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요컨대 지배적인 정치이데올로기 및 자본주의의 발전 국면과 자기계발의 담론이 맺는 관계를 섬세하게 연관짓는 일이 필요하다. 개발의 연대였던 1960년대에도 다양한 형태의 처세ㆍ수양ㆍ교양 서적이 발간되었다. 이는 식민지 이래의 독서문화를 ‘계승’하고 ‘식민지 상태’를 약하게 반복하는 것이었으면서 동시에 획기적으로 새로운 것이기도 했다. 1960년대의 ‘주체’들은 오래된 민족주의와 ‘대화’ 이데올로기, 그리고 급격하게 부상한 경제제일주의의 자장 속에서 ‘자기’와 한국사회를 새롭게 연결짓기 시작했다. 종족본질론과 후진국콤플렉스가 민족주의와 근대화론에 내재한 집단적 자아상이었다는 점을 빼놓기 어렵다.”(천정환, 「처세ㆍ교양ㆍ실존-1960년대의‘자기계발’과 문학문화-」, 『민족문학사연구』40, 민족문학사학회, 2009. 96~97쪽) 그에 따 르면 1960년대의 다양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출현에 따라 대중도 그러한 변화에 맞춰자신의 자아상을 성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다양한 처세와수양, 교양 관련 서적들이 출현하여 사회의 집단적 자아상 형성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이를 참조하면 1960년대 출현한 가족 영화에 재현된 처세와 성공의 가치들도 이러한 급변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변화에 맞춰 집단적 자아상을 형성하는 데 어느 정도 일조했다고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즉, 이 당시 쏟아져 나온 처세와 수양, 교양 서적들과 더불어 영화 또한 대중의 집단적 자아상을 형성하는 대중문화적 도구일 수 있다는 것이다.  37)「60년의 영화계」, 『동아일보』, 1960. 12. 21. 4쪽.  38)「【연예】영화계의 하한기 결산」, 『서울신문』, 1962. 9. 3. 4쪽.  39)가령, 다음과 같은 <월급쟁이>와 <박서방>에 대한 영화평은 당시 가족영화를 평가하는기사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대목이다. <월급쟁이>에 대한 경우 “우리나라의 희극은 왠지 감상적이다. 희극이 갖는 밝은 웃음과 축축한 눈물은 상관이 없을 성 싶은데 우리희극에선 그것이 이상하게 동거하고 있다. 만년계장의 노 샐러리맨(김승호)의 직장과 가정생활을 그린 이 영화 역시 인정희극이라고나 할까, 코메디 터치면서 때때로 신파 비극조다.” (「【신영화】소시민적인 인정희극 이봉래 감독의 <월급쟁이>」, 『한국일보』, 1962. 7. 22. 4쪽)라고 신파성을 비판한다. 또한 <박서방>에 대해서도 그 영화의 안이한 연출력과 신파적 멜로성이 문제로 제기된다. “박서방이란 아궁이 전문의 노동자의 가정을 중심으로 서민생활의 애환을 묘파한 김영수 원작의 연속방송극의 영화화로 감독은 <해떨어지기 전에>의 신인 강대진(중략)그러나 무의미한 이동(촬영)을 되풀이하는 안이한 연출은 지나친 대중에의 영합만을 일삼아 후반에 이르러 파탄, 속된 멜로드라마가 되고 말았다.”(「【영화장평】<박서방> 원작 못 살린 안이한 연출」, 『조선일보』, 1960.10. 5. 4쪽)  40)「우리가 본 영화」, 『동아일보』, 1961. 7. 18. 4쪽.  41)이와 관련하여 강내희는 이른바 4.19세대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형성한 가치관이 매우 보수적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것이 현재와 미래 세대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논의한다. “우리는 사회 대신 경제를 선택하고, 연대 대신 경쟁을 선택하고, 성평등 대신 남녀차별을 선호하고, 생태계 대신 개발이득을 추구했을 뿐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 4.19세대는 고향을 버리고 부모를 무시했으면서도 부모들의 지원으로 삶을 이어간 세대, 나아가서는 미래 세대의 많은 기회와 자원을 미리 빼앗은 세 대인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부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은 적게 받았을지 모르지만 사회적 지원은 크게 받았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핵가족을 시작하면서 부모 모시기를 중단했다는 점에서 부모의 자양분은 흡수하고 그에 대한 보답은 하지 못한 셈이다. 아울러 우리는 자녀들을 위한 근대적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했다. 우리가 행한 부동산 투기나 생태계 파괴는 우리의 자녀와 그들의 자녀의 미래를 빼앗은 것이나 다름 없다. 우리는 과거를 흡혈하고 미래를 수탈한 세대라는 지탄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세대가 4.19라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에서 성장하여 한국의 민주화에 일정한 역할을 했으면서도 지금 가장 보수화된 세대로 바뀐 것은 그동안 겪은 경험의 축적된 결과다. 우리 세대가 향후 좀더 개혁적이거나 진보적인 세대로 바뀔 전망은 거의 없다. 물론 우리 세대에도 민주적 태도, 진보적 사상, 개혁적이고 진취적인 기상을 갖춘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전체로 놓고 보면 그런 사람은 예외적 개인에 속한다고 봐야한다.”(강내희, 「4.19세대의 회고와 반성」, 『문화과학』62, 문화과학사, 2010 여름, 156쪽)  42)이상록, 「경제제일주의의 사회적 구서오가 ‘생산적 주체’만들기-4.19~5.16 시기 혁명의 전유를 둘러싼 경합과 전략들-」, 『역사문제연구』25, 역사비평사, 2011. 136쪽.

    4. 나가며- 영화, 공감과 위로의 대중적 텍스트

    본 고는 1960~62년 사이의 가족 영화를 되도록 ‘혁명’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상징적 재현물로서 읽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서민의 애환’에 주목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의 ‘가족 영화’가 상징적으로 재현하는 혁명 이데올로기로서는 ‘서민의 애환’이란 것을 중점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가족 영화’에 혁명의 이데올로기가 특정한 징후와 효과로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문제는 이러한 분석이 지나치게 ‘서민’으로 명명된 일반 대중을 영화 해석의 차원에서 도외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영화 분석이 일방향으로 획일화되어 가족 영화의 의미가 매우 고정화되고 있다는 인상마저 받게 된다. 이런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본 고는 서민의 애환에 주목하되, 두 번의 혁명을 거친 1960년대 초반을 역사적 전환기로 상정하고, 그 시대를 살아가던 대중의 사회적 실존의 문제를 영화에 재현된 ‘죽음’과 ‘돈’, ‘처세’의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했다. ‘죽음’이 대중이 겪어야 했던 사회적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다는 점은 근대와 전근대의 충돌, 경제적 생존, 세대 간의 갈등과 화해 등의 문제를 ‘죽음’을 통해영화적으로 재현한 데서 확인하고자 했다. 이 ‘죽음’은 어떤 종료나 완료를 의미하는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죽음’은새로운 재출발의 의미로 적극적으로 삶의 긍정성 안으로 포섭된다. 대중의 애환과 고뇌를 반영하는 죽음은 1960년대의 새롭게 부상하던 ‘돈’과 ‘처세’의 철학을 형성하는 토대로 작용한다. 1960년 초반의 격 변기를 살아가던 대중에게 ‘죽음’과도 같은 위기가 찾아오지만 여기에 서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극복할 방법으로 ‘돈’과 ‘처세’의 철학이 급부상하게 되는 것이다. 1950년대 후반영화 <돈>에서 드러나듯이 ‘돈’은 삶을 파괴할 만큼 매우 부정적인근대의 물질적 가치로 의미화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가족 영화에재현된 돈은 그 가치가 급변하여 삶의 안정과 행복을 보장하는 절대적 지향 가치로 의미화된다. 또한 ‘처세’는 일종의 직분론으로 수렴되어 사회적 부와 명성 혹은 출세의 가도를 달리기보다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주어진 직분에 충실해야 하는 것으로 수렴된다. ‘정직’이나 ‘성실’과 같은 윤리적 가치에 기반한 소박한 직분론이 ‘처세’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를 통해 ‘돈’을 자연스럽게 획득할 수 있게 되고 그것이 바로 삶의 안정과 행복을 위한 유일한 길인 것으로 영화에 재현된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를 재현한 가족 영화는 당시 대중 흥행에도 성공함과 동시에 작품성도 인정받으면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기에 이른다. 물론, 가족 영화에 재현된 세대적 가치는 분명 일신의 안녕만을 도모하여 대중의 보신주의와 보수적 가치 형성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인다. 또한 이러한 가치가 혁명을 통해 달성하고자 했던 지배 집단의 경제 근대화 정책과 만날 수 있는 지점이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면이다.

    그러나 가족 영화는 단순히 두 번의 혁명이 가져온 특정한 사상의 재현물이라기보다는 혁명을 겪는 과정에서 대중이 지향하고자 했던 가치의 반영물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영화는 무엇보다 대중의 공감과 위안을 그 기본 전제로 삼고 있다. 그러나 1960~62년의 가족 영화에 대한 해석이 과연 이러한 기본 전제를 얼마만큼 충족시켜주고 있었는지를 묻는다면 그 답은 그리 충분하지 못했다고 해야 할것이다. 4.19혁명과 5.16쿠데타가 1960년대 초반을 규정짓는 유일한 사건으로 굳건히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회 방면에 이러한 혁명의 징후와 효과는 일방적으로 적용될 소지가 크다. 그러나 적어도 대중문화의 방면에서 이는 다시 신중히 검토되어야 한다. 대중의 공감을 획득하고 대중을 위로하면서 흥행과 작품성을 획득하는 영화의 특성상 혁명 이데올로기의 반영물로서가 아니라 혁명기를 살아가던 대중 삶의 반영물로서 영화를 해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이것이 가족 영화의 분석에서 미흡하게 이루어진 이상 가족 영화에 대한 해석은 다른 차원에서 앞으로도 끊임 없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본 고는 이러한 해석 작업의 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이후 1960년대 중반부터 출현하기 시작하는 이른바 ‘중산층’ 을 재현한 영화들에 대한 분석 작업도 영화에 재현된 사회적 실존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 다각도로 해석되어야 할 여지가 많다. 무엇보다영화에 재현된 대중의 사회적 실존 문제는 정치 사회적 담론과 대중의 일상적 삶이 변증법적으로 교차하는 중요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지점에서 비로소 영화와 대중 그리고 정치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각각의 가치를 온전히 유지하면서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재현된 대중의 삶 또한 더욱 다각도에서 명확하게 규명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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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 1962
  • 29. 1961
  • 30. 1955
  • 31. 1962
  • 32. 1962
  • 33. 1962
  • 34. 1961
  • 35. 1962
  • 36. 1960
  • 37. 1961
  • 38. 유 석진 1961
  • 39. 1960
  • 40. 1961
  • 41. 1962
  • 42. 1960
  • 43. 1962
  • 44. 허 백년 1960
  • 45. 황 영빈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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