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 감독 <연애의 책임>(1936)과 장르의 횡단

Director Tomoyoshi Murayama <Renainosekinin>, and crossing of a Gen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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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본 논문은 1926년부터 프롤레타리아 연극 및 대중연극에서 연출을 담당한 무라야마 도모요시의 첫 영화작품 <연애의 책임>에서 그가 끊임없이 시도한 연극적인 요소와 영화적인 요소의 융합의 의미를 사회적인 측면과 기술적인 측면에서 고찰했다.

    연극을 주 무대로 활동했던 무라야마는 1930년대 당시, 대중문화의 꽃으로 불렸던 영화에 점점 관심을 갖게 되며, <눈사태>(PCL, 1937), <신센구미>(PCL, 1937), <지평선>(다이토, 1939)에서 시나리오를, <연애의 책임>(PCL, 1936), <첫사랑>(도호, 1939)에서 감독을 맡으며 영화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본 논문에서는 첫째, 이 시기 무라야마가 자신이 감독한 영화에 신협 극단의 연극배우를 적극적으로 캐스팅했다는 점이다. 이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변화기라는 영화계의 구조적 변화, 경제적으로 곤란했던 극단의 운영을 위해 수입창출이라는 표면적인 이유와 함께, 영화 출연을 통해 극단 배우들의 인지도를 높임으로써 극단의 대중화를 모색하기 위한 궁극적인 이유를 엿볼 수 있다.

    둘째, <연애의 책임>에는 연극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롱 테이크와 영화적인 특징인 부감촬영이 병행하며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영화계는 극히 제한된 경우에 한해, 사용되었던 롱 테이크와 부감촬영의 빈번한 사용은 오히려 영화의 스토리를 방해하는 요소로 기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라야마는 관객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영사만을 되풀이 하는 영화의 기술적인 특징을 극복하기 위해 롱 테이크를 선택, 관객과 배우의 거리감을 극복하고자 한다. 또한 연극에서는 불가능했던 영화 특유의 기법인 부감촬영을 통해, 현실에서의 불가능에 안주하기 보다는 불가능을 현실로 만들려고 한 무라야마의 도전을 살펴볼 수 있다.

    예술 장르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려한 무라야마의 도전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 흑백영화에서 칼라영화, 3D에서 4D로 이어지며 끊임없이 발전을 거듭해 오고 있는 영화계에 의미있는 행위로, 그에 대한 평가 또한 과거에 그치지 않고 현재에도 깊이 새겨볼 만하다.


    This paper considered the technical side of the meaning of the actor of analysis and theater appearing the responsibility for Tomoyoshi Murayama’s love on a movie, a movie, and theater.

    Murayama which tried the possibility of the movie in the theater work, It comes to be increasingly concerned with a movie positively from the second half of the 1930s, It takes charge of dramatization in two movies, a <Nadare> (PCL, 1937) and a <shinsengumi> (PCL, 1937), and acts as a film director further to <Renainosekinin> (PCL, 1936), and a <Hatsukoi>(Toho, 1939).

    Observing in this paper is that Murayama of this time appoints new The actor of Shinkyougekidan as film making positively, and it is having explored the possibility of the advance to the movie of the theatrical people who suited the tendency divided till then.

    I think that the economical situation of the theatrical world, and the not only the structure side of the motion-picture world but trial to an expression original with a movie were also hidden in the meaning of the advance to theatrical people or the motion-picture world of Murayama.

    Moreover, <Renainosekinin> which was not studied at all is examined until it continues up to now, and Murayama is in this movie. While clarifying investigating the synergistic effect of long Take, a dramatic technique called a High angle, and a technique peculiar to a movie, the meaning of such a trial was analyzed.

  • KEYWORD

    무라야마 도모요시 , 신협극단 , <연애의 책임> , 롱 테이크 , 부감촬영 , 배우 , 무성영화

  • 1. 서론

    1932년부터의 프롤레타리아 문화단체에 대한 당국의 탄압에 의해, 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 1901∼1977)1) 는 프롤레타리아 문화 활동으로부터의 전향을 강요당하고, 그의 활동 영역 또한 좁혀질 수밖에 없었다. 전향이후의 그의 활약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동화책의 삽화와 프롤레타리아 연극동맹으로 활약한 연극인에 의해 1934년9월에 새롭게 설립된 신협극단(新協劇團)의 연극 활동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무라야마가 중심이 된 신협극단은 중앙극장(中央劇場), 신쓰키지극단 (新築地劇団), 미술좌(美術座), 이전의 프롤레타리아 연극인들이 합동한 극단이었다.

    무라야마는 극단을 통해 “진보적이며 예술적으로는 양심적인, 관객과 타협하지 않는, 연출에는 통일성 있는”2) 연극을 지향했다. 당시, 경제적인 면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대부분의 극단이 흥행을 위한 대중적인 작품을 공연한 데 비해, 신협극단은 자본으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연극만으로는 경영을 유지할 수없게 된 신협극단과 배우들을 위해서, 무라야마는 ‘경제적 기반 만들기’를 도모하며,3) 그 해결책으로 연극인의 영화 진출을 통해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실제로, 무라야마는 1934년 10월에 신협극단의 연극인들을 PCL영화제작소(Photo Chemical Laboratory, 1933년부터 1937년까지 영화제작 활동을 했던 사진과학연구소의 자회사, 후에 도호영화사로 통합)가 제작한 영화에 출연시키는 계약을 성립시킴으로써 그계획은 실현되기에 이른다.

    무라야마가 감독한 <첫사랑>을 선전하는 신문광고문 “무대에서 갈고닦은 연기가 들려주는 작품, 신협극단의 야심작, 신선한 기획을 자랑하는 도호영화의 전진! 기대와 화제의 작품” 4) 이라고 하는 프레이즈를 볼 수 있어, 연극중심이었던 신협극단의 영화계 진출이 세상의 주목받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연극인이 영화계로 진출할 수있었던 구조적인 배경에는 영화의 음성 변화를 생각할 수 있다. 신협극단이 설립된 1934년을 전후하여, 일본 영화계는 변사의 설명이 더해졌던 무성영화로부터 음성을 집어넣은 유성영화가 등장했기 때문에, 발성이 좋은 연극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신협극단의 배우 한명, 한명을 이전부터 잘 파악하고 있었던 무라야마가, 유성 영화시대에 가장 필요한 인재로서 연극인을 생각해 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것은 무라야마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의 대부분이 신협극단의 연극인이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연극인 무라야마의 영화계 진출이 가지는 의미 속에는, 연극계의 빈곤한 경제적 상황의 타파와 영화계의 기술적 구조의 이행이라는 표면적인 이유와 함께, 연극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영화만의 독특한 표현에 대한 무라야마의 도전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도전은 신협극단의 배우가 출연하고, 무라야마가 감독한 영화 <연애의 책임>속에 묘사된 연극적 표현법의 분석을 통해 끊임없이 연극과 영화의 기법을 융합하려한 무라야마에게 영화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밝히려한다.

    1)무라야마 도모요시(1901∼1977) 연극 연출가. 극작가.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소설가. 동화작가. 화가. 무용가, 도쿄출생, 도쿄제국대학 철학과를 중퇴한 후, 원시종교 연구를 위해 독일로 유학했다. 1922년 유럽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다다이즘’ 미술에 영향을 받고 다음해 귀국, 전위예술단체인 ‘마보(MOVO)’를 결성, 유럽의 미술을 일본에 소개하는데 전념했다. 1926년부터는 연극을 중심으로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에 가담, 세 번에 걸쳐 투옥을 경험했다. 대부분의 프롤레타리아 문화단체가 해체된 1934년 이후부터는 신극의 대동단결을 위해 연극단체인 ‘신협극단(新協劇團)’을 조직해 생애 1000여 편에 이르는 연극을 연출했다. 이중 1938년 3월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의 고전 춘향전을 연극 작품으로 상연했으며, 같은 해, 10월부터는 조선에서도 상연했다. 전후에도 무라야마는 춘향전을 한 번의 오페라(1948.11)와 세 번의 연극(1972.4, 1973.1, 1973.8) 작품으로 관여했다. 무라야마와 영화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연애의 책임(戀愛の責任)> (PCL, 1936년 10월), 두 번째 작품으로 <첫사랑(初恋)> (신협극단⋅도호(東寶) 공동제작, 1939년 7월)을 감독했다. 또한 <눈사태(雪崩)> (나루세 미키오감독, PCL, 1937년 7월), <신센구미(新撰組)> (기무라 소토지 감독, PCL⋅전진좌 공동제작, 1937년 10월), <지평선(地平線)>(요시무라 미사오)감독, 大都, 1939년 10월)의 3편의 영화에서 각색을 담당했다.  2)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 <신극단 대동단결의 제창(新劇團大同團結の提唱)>≪개조(改造)≫, 개조사, 1934.09, 191쪽.  3)후지모리 세쓰코(藤森節子), 『여배우 하라 센코-나카노 시게하루와 함게 살다(女優原泉子-中野重治と共に生きて)』新潮社, 1994, 190쪽.  4)≪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 요미우리신문사, 1937.07.05, 석간2면.

    2. 무라야마와 PCL영화사-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무라야마가 영화감독을 시작한 것은 1936년 <연애의 책임>부터 이지만, 영화사와의 관계는 그 이전부터 시작된 듯하다. 이것은 무라야마가 옥중에서 그의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무라야마는 연극 <시무라 나쓰에(志村夏江)>를 연습하던 1932년 4월의 어느 아침,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었다. 1933년 12월까지 도요타마(豊多摩)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된다. 옥중에 있었던 1933년 11월 25일에 쓴 편지를 후년 정리하여 주를 첨부한 이하의 문장에서 영화사의 일원이 되어 근무할 예정임을 읽을 수 있다.

    1933년 당시, PCL(Photo Chemical Laboratory)과 무라야마의 지인 사이에 무라야마의 영화계 진출에 대한 계약의 움직임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편지에는 형무소의 검열 때문인지 영화사명이나 무라야마를 영화사에 소개한 인물이 누구인지 밝히고 있지 않지만, 세월이 지나 당시 상황을 묘사한 무라야마의 부연설명으로부터, 이 영화사가 PCL임을 알 수 있다. 무라야마가 옥중에 있었던 1933년에 이미 PCL 사의 소속이 결정됐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출옥 후, 곧바로 이 계약이 이행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현재, 무라야마와 PCL과의 관계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는 신협극단의 PCL사 제작 영화 출연에 관해 1934년 10월에 맺은 계약뿐이다. 무라야마를 PCL에 소개한 인물이 누구였 는지는 현재까지도 명확하지 않지만, ‘영화사로부터 상당한 월급’ 으로 일하게 할 수 있는 영향력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극작가이거나 감독의 신분인 것만은 확실하다.6)

    무라야마가 PCL에서 영화감독으로서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서는 요모타 이누히코(四方田犬彦)의 다음 지적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PCL은 1929년에 영화 필름의 국산화와 현상(現像)을 꾸준히 연구해 온 우에무라 다이지(植村泰二)가 도쿄에 설립한 사진과학연구소(写真 科學研究所)가 모체다. 유성 영화의 등장으로 인해 녹음 기술이 중요시되자 우에무라는 필름 기술과 녹음 기술의 연구를 집중적으로 진행 하였다. 그 결과, PCL은 드디어 1931년에 일본에서 최초로 ‘야외동시녹음촬영’을 성공시켰으며 ‘일본 최초의 본격적 토키 영화사’ 가 되었다.8) 이로 인해 영화제작 기술을 높이 평가받은 PCL은 닛카쓰(日活) 와 제휴해서 영화제작사업으로도 범위를 넓혀 초기 유성영화의 실험작이라 할 수 있는<강 건너의 청춘(河向の青春)> (기무라 소토지(木村 荘十二), 마쓰자키 게이지(松崎啓次)각색, 1933년), 뮤지컬 코미디 영화인 <얼큰하게 취한 인생(ほろよい人生)>(기무라 소토지감독, 마쓰자키 게이지, 1933년)등의 제작에 참여했다. 두 작품 모두 일본프롤레타리아 영화동맹(이하 프로키로라 함)에서 활약했던 기무라와 마쓰자키가 제작을 담당했으며 <강 건너의 청춘>에는 다키자와 오사무(滝沢 修)와 스스키다 겐지(薄田研二) 등의 좌익 연극인들이 출연했다. 또한 프로키노 후원회(プロキノ友の會)에서 프로키노를 지원한 도쿠가와 무세이(徳川夢声), 프롤레타리아 연극동맹에서 좌익연극인으로 활동한 마루야마 사다오(丸山定夫), 우노 쥬키치(宇野重吉) 등의 좌익문화인도 PCL의 영화제작에 관계되어 있었다.

    요모타가 지적하듯 사상을 막론하고 좌익문화인들에게 활동의 장소를 준 PCL은 그들에게는 당국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아지르(Asylum)’였음을 알 수 있으며, 장르와 사상을 뛰어넘어 영화를 제작한다는 회사 방침을 통해, 쉬르리얼리스트였던 다키구치, 일본의 희극왕이라 일컬어진 에노켄9)은 물론 좌익연극인으로 전위예술운동의 경험이 있는 무라야마가 영화를 제작하기에 충분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로는, 무성 영화로부터 유성 영화로 전환하는 영화제작의 구조변화가, “사일런트 배우의 연기력의 부족을 보완하기위해 신극 배우를 요구”했기 때문이다.10) 즉, 배우의 표정이나 움직임만을 촬영해서 변사에게 대사를 맡긴 무성 영화에 비해, 배우의 음성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하게 된 유성영화에는 발성이 가장 뛰어난 연극배우가 적당했던 것이다.

    그럼, 무성영화로부터 유성영화로의 변화에 따라 영화계에는 어떠한 움직임이 있었는지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일본에서 최초의 유성영화라고 일컬어지는 고쇼 헤이노스케(五所平之助, 1902∼1981) 감독의 <마담과 마누라(マダムと女房)> (쇼치쿠, 1931년)의 영화제작비용은, 무성영화의 제작비보다 몇 배나 고액이어서, 대형영화 회사의 쇼치쿠가 아니었다면 도저히 제작이 불가능한 작품이었다. 또 유성영화 작품을 상영하기 위해서는 영화관의 구조도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1938년까지는 상당한 수의 무성영화가 유성영화와 병존해서 공개되고 있었다. 유성영화에 대응한 영화계의 구조변화의 영향은, 일본 영화 데이터베이스에 공개된 작품을 그래프화한 다음 표에서 읽어낼 수 있다.

    <표 1>에서 1931년 이후 1934년까지 영화제작 편수가 감소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유성영화의 등장에 의한 것이라 할 수있다. 막대한 제작비로 인해 한정된 제작비로는 이전처럼 많은 영화를 제작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후 1937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감소하고 있는 것은 이 해에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전쟁 수행을 위한 당국의 압력이 영화제작에도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소시민적 생활을 찍은 것, 향락적인 것, 사회의 어두운 면을 묘사한 영화는 금지되었고 신동 아건설(新東亞建設)이라는 국책에 동조하는 작품만이 제작 가능했다. 1940년에는 영화법의 시행에 의해 필름의 사전검열이 제도화 되었고 이듬해에는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영화 필름 편수가 제한되면서, 영화 제작 편수 또한 더욱 감소해 갔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1935년에서 36년에 제작 편수가 471편에서 540편으로 증가한 것인데 그 배경에는 유성영화의 제작이 활발해진 것을 들 수 있겠다. 영화사 연구자인 기타다 리에(北田理惠)에 의하면, 1934년에는 무성영화가 316편 (72.3%), 유성영화(유성영화와 부분적인 유성영화를 포함)가 121편 (27.7%)이었지만, 1935년에는 무성영화가 190편 (40.3%), 유성영화가 281편 (59.7%)이 되어 유성영화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12)

    또한 유성영화의 등장으로 인해 영화관의 구조 또한 변화되었다. 영화 상설관이 1931년의 1449관 (이중, 유성영화 상영관 92관)에서 1936년의 1627관 (이중, 유성영화 상영관 1516관)으로 대폭 증설되어 상영 시기의 차이는 다소 있지만, 전국적으로 같은 유성영화를 즐길수 있게 되었다. 확실히 연극에도 무대와 관객과의 사이에 밀접한 교감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영화가 담당한 대중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1920년대부터 연극과 영화의 차이에 대해서 연구해 온 무라야마는, 영화의 이점으로서 ‘연극보다 훨씬 많은 관객을 흡수하는 것’13) 을 들고 있다. 연극은 한정된 장소가 아니면 공연할 수 없었지만, 영화는 기본적인 조건만 충족되면 다양한 장소에서 공개가 가능했다. 실제로, 신협극단의 1934년부터 1939연말까지의 공연을 분석하면, 도쿄를 중심으로,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나고야(名古屋) 등의 대도시만의 공연이며, 동북이나 규슈(九州)에서의 공연은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성영화에 의한 연극인의 영화계 참여는 영화계의 요구로 이루어졌지만, 신협극단이나 무라야마의 영화계 진출의 배경으로는, 극단내부의 방침인 경제적인 자립은 물론, 신협극단의 존재를 보다 광범위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대중성을 상징하는 영화를 선택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5)무라야마 도모요시, 『연극적 자서전4(演劇的自叙伝4)』, 東京芸術座, 1977, 427쪽.  6)1937년 10월 15일의 ≪동아일보≫ 기사 <映畵 1本 製作에 돈은 얼마나 드나(下)>에는 당시 일본의 영화제작에 관해 자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일본의 영화사 감독은 대부분 회사의 월급제를 통해 제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수당은 감독에 따라 70원에서 최고 5,6 백 원의 급료를 받고 있었던 듯하다. 감독 중, 무라야마의 예를 들며, 그가 PCL과 계약 조건으로 1년에 4편의 영화를 감독하는 조건으로 매월 100원의 월급을 받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또한 시나리오는 1편에 100∼200원의 원고료를 받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로써 감독과 시나리오를 함께 담당한 무라야마는 영화사를 통해 상당한 금액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7)요모타 이누히코, 박전열역, 『일본영화의 이해』, 현암사, 2001, 104쪽.  8)다나카 쥰이치로(田中純一郎), 『일본영화 발달사Ⅱ(日本映畵発達史Ⅱ)』, 中央公論社, 1976, 229쪽.  9)에노켄은 1930년대에 배우, 가수, 코미디언으로 활약한 에노모토 겐이치(1904∼1970)의 애칭이다. 에노모토는 패전 전, 롯빠(후루카와 롯빠, 1903∼1961)와 함께 인기로, 수많은 연극과 영화를 통해 대중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하지만 1940년대에는 작품을 통해 전쟁에 깊이 협력했음을 지적하고 싶다.  10)무라야마 도모요시, <신극 1년사(新劇一年史)>, 구라바야시 세이치로(倉林誠一郎), 『신극연대기 전중편(新劇年代記 戦中編)』, 白水社, 1969, 145쪽.(≪新協劇団パンフレット第一号(신협극단 팸플렛 제1호)≫)  11)일본영화 데이터 베이스, www.jmdb.ne.jp  12)기타다 리에(北田理恵), 「토키 시대의 변사(トーキー時代の弁士)」, ≪영화연구(映畵研究)≫ 第4号, 日本映畵學會, 2009, 13쪽.  13)무라야마 도모요시, 『프롤레타리아 영화입문(プロレタリア映畫入門)』, 前衛書房, 1928, 168쪽.

    3. 무라야마와 ‘유닛’영화

    1934년에서 1940년까지의 신협극단의 특징으로서 들 수 있는 것이, 기존 극단들이 소속 배우들의 영화 출연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데 비해 신협극단은 배우들의 영화 출연에 적극적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그들이 지향한 “진보적이며 예술적으로는 양심적인, 관객과 타협하지 않는, 연출에는 통일성 있는” 연극 활동만으로는 극단을 꾸려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극단의 배우들에게 매달 정기적으로 월급을 제공해 그들의 경제적 안정을 목표로 한 연극인의 직업화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배우들의 영화출연은 수입을 안정되게 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타개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연극인의 영화진출은 그들의 경제적 안정뿐만 아니라, 영화가 가지는 대중성에 의해 신협극단의 존재를 대중에게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 구체적인 예로서, 극단 배우들의 영화 출연에 적극적이었던 무라야마가 자신이 감독하는 영화에 단원을 출연시킨 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무라야마는 1936년 이후, PCL에서의 첫 감독 작품인 <연애의 책임>(1936년10월 11일)을 시작으로, <눈사태(雪崩)>, <신선구미(新選組)>, <지평선(地平線)>의 각본, <첫사랑>의 감독을 맡았다. 이들 영화의 특징은, 이미 말한 것 같이, 출연한 배우의 대부분이 신협극단의 연극인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면, 무라야마 각색의 <신선구미>에는, 신협극 단은 아니지만, 전진좌의 배우 대부분이 출연했다.14)

    그럼, 무라야마와 신협극단은 영화계 진출을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신협극단에는 창립 당시 56명의 배우 중, 무대에 서는 배우는 27명 있었다. ≪신협극단5주년 기념 출판≫에 의하면, 극단조직 속에 연극조직이외에 영화위원회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매주 연극영화 연구회를 열어 연극 물론, 프로키노에서 영화 제작을 경험한 이와사키 아키라(岩崎昶, 1903∼1981)나 마쓰오 데쓰지(松尾哲次), 무라야마 등을 강사로 초대해, 전반적인 영화연구를 진행시킬 만큼 영화에 주목하고 있었다.

    특히 1936년부터는 무라야마가 감독을 맡은 <연애의 책임>을 시작으로, <목장이야기(牧場物語)>(기무라 소토지감독, 도호, 1938년), <첫사랑>(무라야마감독, 도호, 1939년), <공상부락(空想部落)>(치바 히데 키감독, 남왕(南旺)영화, 1940년), <오쿠무라 이오코(奥村五百子)>(도요다 시로감독, 도쿄발성, 1940년), <다진코무라(多甚古村)>(이마이 타다시감독, 도호, 1940년), <벽돌공장 여공(煉瓦女工)>(치바 히데키감독, 남왕영화, 1940년)에 많은 극단원이 캐스팅되었다. 아카기 란코(赤木蘭 子), 우노 쥬기치(宇野重吉), 오자와 에이(小澤榮), 신 긴조(信欣三), 다키자와 오사무(瀧澤修), 하라 센코(原泉子), 호소카와 치카코(細川ちか子), 마쓰모토 갓페(松本克平), 미시마 마사오(三島雅夫) 등 극단의 주요 배우들은, 영화에 출연하여, 경제적 자립을 달성하는 것은 물론, 대중영화를 통해서 그들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도 하였다. 신협극단의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를 감독한 사람 중에는 1940년 이후에 국책에 협력하는 이마이, 도요다 등도 있지만, 기무라를 시작으로 이전의 좌익계 영화인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신협극단은 이 영화위원회를 통해서, 각 배우의 개인적인 영화출연에 머무르지 않고 극단소속 감독과 배우들이 주축이 된 ‘유닛작품(그 자체로 완전한 단일체, Unit-필자)’ 영화를 기획했다. 신협극단에 의해 탄생한 ‘유닛’ 영화는, 무라야마의 <연애의 책임>과 <첫사랑>뿐이다. 신협극단의 ‘유닛’ 영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나카노 시게하루 (中野重治)는, “밖에서 보니 무라야마 이외의 영화감독이 없”는 현재, 신협극단의 장래를 위해서는 ‘유닉’ 영화를 기획⋅실행할 수 있는 신인 감독을 적어도 “3, 4명의 영화감독을 새롭게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15) 1937년에 미야모토 유리코(宮本百合子)나 도사카 준(戶坂潤)과 함께 1년 반에 걸친 집필금지의 경험이 있는 나카노는, 향후 무라야마의 활동 금지의 가능성을 예상하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때문에 영화감독으로 프로키노에서 영화 제작을 경험한 사람이나 좌익계 영화에 공감을 가진 이마이나 기무라, 야마모토 등을 염두해 두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영화제작을 담당하는 감독이나 기술자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무라야마는 1939년의 시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용으로부터는 신협극단은 ‘연극과 영화 모두를 할 수 있는’ ‘세계에 전례가 없는 극단’이라는 무라야마의 자부를 읽어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가부키를 전문으로 하는 전진좌가 이미 연극과 영화에서 이러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다만 조직적으로 연극⋅영화 모두를 하기 위해 신협극단의 방침을 밝히고 있는 데에 무라야마의 독특함이 있을 것이다.

    이미 앞에서도 살펴보았듯, 연극인으로서의 경제적 자립과 전문적인 직업성의 획득을 목표로 한 신협극단에서는, 배우가 개인이라 하더라도 각 영화 회사의 작품에 출연하는 것을 적극 수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라야마는 극단의 배우가 개인적으로 영화에 출연하는 편협한 활동보다는 신협극단이 중심이 되어 ‘유닛’ 작품을 제작하는 보다 넓은 의미의 활동을 꿈꾸었다. 이러한 무라야마의 포부는 이미 각 영화에 출연해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끌었던 신협극단의 배우들과 연출자에 의해 제작되는 ‘유닛’ 작품은 이전까지 신협극단 배우의 존재를 몰랐던 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예를 들면, 1940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된 신협극단의 배우 다키자와 오사무(1906∼2000)의 옥중에서의 다음과 같은 경험담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무라야마가 감독한 영화 <첫사랑>에 출연한 다키자와는 이 영화를 본 형무소 교도관으로부터 호의적인 관심을 받을 수 있었으며, 영화로 인해 옥중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 영화보다 입장료가 2배나 비쌌던 연극은 한정된 공연 횟수나 극장의 대도시 집중에 의해, 일부 사람들만이 접할 수 있는 장르였다. 다키자와의 에피소드는, 연극을 접할 기회가 적었던 사람들(형무관)이 보다 가까워진 대중적인 영화를 통해서 일체감을 공유한 실례다. 또, 신협극단은 아니지만, 전진좌의 영화를 보고 연극인이 될 것을 결심한 쓰가미 다다시(津上忠, 1924∼2014)와 같은 인물도 있었다.

    쓰가미와 같이 연극보다는 영화에 관심을 갖던 청년들이 영화를 통해 극단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극단의 팬이 된 후, 연극의 세계로 입문 하는 경우는 이외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렇듯 연극으로는 도저히 미치지 못했던 계층이나 지역에까지 널리 퍼진 영화는, 이로 인해 무라야마와 신협극단에 경제적인 안정을 도와준 것은 물론, 극단의 고정적인 팬의 확보와 함께 후진 양성의 계기 또한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화가 가지는 외적인 대중성과 함께 영화가 가진 내적 표현을 통해 무라야마는 어떠한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일까?

    14)전진좌는 1931년 5월, 가부키계의 봉건적인 제도에 반발해 가와라 조주로(河原長十郎), 나카무라 간에몬(中村翫右衛門)에 의해 설립된 극단이지만, 그들의 좌우명인 「이제는, 앞에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를 제안한 것은 무라야마였다. 극단의 첫 번째 공연작품으로 가부키 배우들 사이의 신분문제나 금전적인 문제 등 낡은 가부키세계의 이면을 폭로한 무라야마의 소설 「가부키왕국(歌舞伎王国)」이 선택된 것부터 무라야마와 관계가 깊은 극단임에 틀림없다. 전진좌는 고전을 중심으로 한 연극과 함께 영화⋅라디오 드라마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면 <거리의 야쿠자(街の入墨者> (야마나카 사다오감독, 닛카쓰와 전진좌 공동제작, 1935년), <인정종이풍선(人情紙風船)> (야마나카 사다오감독, PCL, 1937년), <신선구미>(기무라 소토지감독, 도호(東寶), 1937년), <아베일족(阿部一族)>(구마가이 히사토라감독, 도호, 1938년), <대일향촌(大日向村)> (도요다 시로감독, 도호, 1940년), <겐로쿠 주신구라(元禄忠臣蔵)>(미조구치 겐지감독, 쇼치쿠, 1941년)등 역사물 영화를 중심으로 영화와 관계하고 있었다. 전진좌는 가부키를 포함하는 연극의 혁신과 생활의 향상을 목표로 했으며 1937년에는 예술(연극)과 생활을 직결시키기 위해서 단원과 그 가족이 무료로 생활할 수 있는 집단생활 시설을 건설하게 됨으로써 예술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문제인 배우들의 경제적인 안정을 실현했다.  15)나카노 시게하루, <우견1, 2, 신협영화의 장래에 대해서(愚見一、二ー新協劇団の将来について)>, 『나카노 시게하루 전집 제25권(中野重治全集 第25巻)』, 치쿠마 쇼보(筑摩書房), 1978, 11쪽.  16)무라야마 도모요시, <신극의 발전과 그 속에서의 신협극단(新劇の発展とそのなかの新協劇団)>, ≪신협극단 5주년기념 출판≫, 신협극단, 1939, 23쪽.  17)다키자와 쇼이치(滝沢荘一), 『명배우 다키자와 오사무와 격동의 쇼와(名優⋅滝沢修と激動昭和)』, 新風舎, 2004, 87쪽.  18)쓰가미 다다시(津上忠), 『연극과 문학 사이에서(演劇と文學の間)』, 光和堂, 1982, 190쪽.

    4. <연애의 책임>의 장르의 융합

    <연애의 책임>의 특징으로서 들 수 있는 것이, 연극적 효과를 채용한 쇼트이다. 이미 1930년대 전후 연극 속에서 기존 영화나 영상을 사용해서 그 효과를 시도한 무라야마가, 이번에는 영화 속에 연극적 효과를 도입하려고 시도한 것이다.19) 또 반대로, 연극에서는 불가능했던, 쇼트를 움직이면서 잡는 이동 촬영이나 배우⋅관객의 눈높이보다도 위에서 촬영하는 부감촬영을 이용한 것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무라야마는 <연애의 책임>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영화 <연애의 책임>은 아버지의 급사와 계모에 의해 몰락한 기타야마(北山)가의 두 딸(仙子와 朱子)이 자립하는 과정과, 각자의 연애를 그린, 가타오카 뎃페이(片岡鉄兵, 1894∼1944)의 원작 『흐름 있는 경치(流れある景色)』를 무라야마가 각색⋅감독한 작품이다. 다키자와의 경험담에서도 알 수 있듯, 영화로서 어느 정도의 흥행은 된 듯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당시, 검열로 인해 완전한 작품의 형태로 상영되지는 못했다.

    가타오카의 원작 제목과는 동떨어지게 무라야마의 영화가 <연애의 책임>이라고 하는 타이틀을 사용한 경위를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사실 무라야마 영화의 원래의 타이틀은 <입맞춤의 책임(接吻の責任)>이 었지만, 영화 제작 후 검열에 의해 ‘자유연애를 명백하게 주장’한 영화는 부적당하다며 필름 중 300미터이상이나 잘려나갔으며, 타이틀도 <연애의 책임>으로 변경되었다.20) 타이틀의 변경에 대해서는 원작자인 가타오카와 감독인 무라야마가 내무성의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던 인물이었던 것과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이 영화를 둘러싼 당시의 영화계 상황을 이와사키 아키라(岩崎昶)의 다음 문장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영화에서의 키스 신의 금지에 대해서 대단히 잘 묘사한 이탈리아 영화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 (주세페 토르나토레감독, 프랑스⋅ 이탈리아공동제작, 1989년)에 등장하는 영화기사인 알프레도를 상기시키게 된다. 그는 영화 상연 전, 지역 신부에 의해 검열로 삭제된 입맞춤의 쇼트만을 연결시켜 완성한 한편의 불완전한 영화를 후에 영화 감독이 되는 소년 토토에게 선물한 것이다. 영화제작 당시에는 가능했던 입맞춤의 묘사가, 상영될 때에 각 지역 권력자의 규제에 의해 공개가 금지되었다고 하는 세계 공통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시네마 천국>의 무대와 거의 같은 시기의 일본에서도, 영화법으로 인해 입맞춤 금지가 행하여지고 있었으며, 그 대표적인 작품이 무라야마의 <연애의 책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연애의 책임>의 영상분석에 앞서, 무라야마에게 영화적 표현과 연극적 표현의 차이는 어떠한 것이었나 확인하기 위해서, 그가 프로키노를 위해서 쓴 『프롤레타리아 영화입문(プロレタリア映畫入門)』을 참조해 보기로 한다.

    연극의 연출자로서의 무라야마에 의한 인용에서 연극에 대해서는 현실성이나 무대와 관객과의 직접적인 관계가 높게 평가되는 것에 비해, 영화에 대해서는 그 기술적 효과가 중요시되고 있는 것을 알 수있다. <연애의 책임>에서는 의외로 “영화를 연극의 모사로부터 해방하는 유력한 방법” 23) 으로 여겨지는 몽타주의 기법은 별로 보여 지지 않는 것에 반해, ‘무대 위와 관객석과의 교감’ 으로 현실감 넘치는 연극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롱 테이크(長回し)’ 가 눈에 띈다.

    무라야마의 <연애의 책임>의 시나리오에서도 ‘롱 테이크’, 새 맨션으로 이사한 두 여인의세면장에서 이 닦는 쇼트나 ‘대단히 긴 쇼트, 하지만 회전하면서 촬영’이라고 한 지시에 따라, 이에 해당하는 쇼트가 2분 이상이나 화면의 변화 없이 흐른다. 대단히 긴 롱 테이크를 도입하려고 하는 무라야마의 의도는, ‘같은 작품이 두 번 다시 존재할수 없는 연극이 가진 순간성’의 중요성을 익힌 신협극단의 단원이 캐스팅되었기 때문에 실현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무라야마는 장소의 변화가 거의 없이 오랜 시간 한 장소에서의 전개되는 연극의 특징을 영화에 가져온 기법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롱 테이크를 이용함으로써 쇼트와 쇼트의 연결에 의한 신속한 전개를 특징으로 하는 영화에서는 결여되기 쉬운 ‘실제 인물이 가진 현실감’을 보충하고, 관객에게 안정감을 주고, 배우의 심리에 쉽게 동화되도록 했다.

    이렇게 영화 속에서 연극상의 효과인 롱 테이크를 시도한 무라야마가 <연애의 책임> 속에서 또 주목해야만 하는 것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촬영하는 부감촬영이다. 좌석에 의한 높이의 차이는 있지만, 관객의 눈(아이 앵글)을 기준으로 이루어지는 연극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거의 바로 위에서의 부감의 기술을 이용함으로써 무라야마는 무엇을 의도했던 것일까?

    먼저, 영화 <연애의 책임>의 제작 현장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문장으로서 남겨져 있는 야마모토 사쓰오(山本薩夫, 1910∼1983)의 회상을 보기로 하자.

    야마모토의 문장에서 무라야마가 당시의 ‘일본 영화기술로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것 주문’ 을 제작 스태프에게 의뢰해서 촬영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무라야마는 외국 영화를 꾸준히 연구하고 있었던 듯하다. 1924년에서 1927년까지 도쿄 미나토구에 있었던 외국영화 전용극장인 아오이간(葵館)의 무대장치나 영화관 간행 잡지 표지 제작에 참여한 무라야마는 이 영화관에서 상영된 거의 모든 영화를 보았다고 『연극적 자서전(演劇的自叙伝)』에서 밝히고 있다. 25) 젊은 무라야마를 ‘열광시켜 연극의 연출, 연기에 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 던 것이 외국의 영화였다. 무라야마는 연극 활동의 초기부터 영화에 자극을 받아서 다양한 기법이나 아이디어를 짜내, 끊임없이 연극과 영화의 이질적인 부분을 상호의 발전을 위해서 살리려고 노력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야마모토의 앞 문장에서 ‘천장으로부터’ 내려다보는 ‘원 컷(one cut)’ 촬영의 기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그러한 일을 한 감독은’ 없었으며, ‘일본 영화기술로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지시였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부감촬영을 의미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 부감촬영이 알려지게 된 것은 어느 때 부터일까? 1916년 미국에서 만들어져 3년 후 일본에서 공개된 D⋅W⋅그리피스(1875∼1948년)의 <인톨러런스(intolerance)> (트라이앵글⋅필름⋅코퍼레이션사, 1916년)로부터다. 다음 화면은 부감 촬영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으로 <인톨러런스>와 <야마센 와타세 노농장-교토(山宣渡政労働葬―京都)> (프로키노, 1929년)를 통해 그 효과를 확인해 보기로 한다.

    <그림 1>은 낡은 기록을 바탕으로 재현된, 길이 1⋅6킬로에 달하는 광장에서 행하여진 바르사 자르 왕의 승리를 축하하는 향연의 쇼트이다. 거대한 세트를 이용해서 촬영된 <인톨러런스>는, 로우 앵글(Low angle)이나 아이 앵글(Eye angle)에서는 전체상을 파악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하이 앵글(High angle)인 부감으로 촬영되었다. <인톨러런스> 의 영향으로 이후, 영화에서는 풍경이나 전체의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서 부감촬영을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현재도, 일본의 영화계나 텔레비전 업계에서는 촬영용으로 쓰이는 받침을 ‘인토레’ 라고 부르고 있을 정도여서 그 당시 무라야마가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충분히 짐작된다.<인톨러런스>가 제작된 무성영화 시대의 카메라는 파르보와 같은 유성영화 시대의 카메라에 비해 훨씬 가벼웠기 때문에 위쪽으로의 이동이 용이했음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림 2>는, <야마센 와타세 노동장-교토>에 사용된 부감촬영 쇼트로 1929년 3월 5일 도쿄의 간다(神田)의 한 여관에서 우익에 의한 테러에 의해 살해된 야마모토 센지(山本宣治) 의원을 추도하기 위한 장례식 행렬로, 프로키노가 16밀리 소형 카메라로 촬영한 장면이다. 당국으로부터 촬영이 금지된 프로키노가 당국의 감시의 눈을 피해 건물의 안쪽에서 비밀리에 촬영한 부감촬영이었지만, 이 쇼트로 인해 장례식 행렬의 추도에 동조하기 위해 참가한 택시의 행렬이 절묘하게 촬영되었고, 행렬의 전체상을 이 쇼트만으로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가 유성화로 바뀌게 되면서, 카메라의 무게가 무거워짐에 따라 상하의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고, 1930년대 중반에는 영화제작에서 부감촬영은 제한적으로 사용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라야마의 <연애의 책임>의 시나리오에는 다음과 같이 부감촬영의 지시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시나리오에는 13곳에 달하는 부감의 지시가 보이지만, 이 작품에서의 부감촬영은 일반적인 부감 숏과는 그 성질이 크게 다르다. 곧 <인톨러런스>나 <야마센 와타세 노농장-교토>에서의 부감 쇼트가 장대한 스펙터클 쇼트를 만들어 내거나, 군중이나 시가지의 모양을 극적으로 포착하거나 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에 비해, <연애의 책임>에서는 실내의 일상적인 쇼트를 부감촬영으로 사용한 점이다. 그럼, 13군데 속에서 가장 부감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쇼트와 그에 해당하는 시나리오를 확인해 보기로 한다.

    <그림 3>은 슈코와 신스케가 슈코의 맨션 방에서 앞으로 일을 해서 자립해야할 슈코의 일자리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하는 장면이지만, 실제 영화를 보면, 슈코와 신스케의 음성이 다른 장면에 비해 대단히 작은 것이 눈에 띈다. 로우 앵글이나 아이 앵글과 같은 보통 촬영의 경우에는 마이크를 붐(Boom)에 매달지만, <그림 3>과 같이 천장에서의 부감 촬영일 경우 화면에 비치지 않도록 붐을 멀리하는 것 이외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영화를 보아도 대사는 지극히 알아듣기 어렵다. 즉, 무라야마는 이러한 부적합을 범해가면서 까지 부감촬영을 고집하고 있다. 카메라의 존재를 될 수 있는 한 숨김으로써 관객을 영화의 화면 속으로 이끌어 리얼리티 속에 억지로 몰두하게 하는 것이 영화제작의 기본이지만 무라야마는 그 리얼리티를 무시하면서까지 영화의 테크닉중 하나인 부감촬영을 사용하고, <그림 3>과 같은 쇼트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렇다면 부감촬영으로 촬영된 이 장면의 공간적인 구조(미장센)를 살펴보기로 하자. 둘의 대화에서는, 현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슈코에게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림3>에서는 창문에 커튼이 내려져 있는 것을 제외하고 ‘8죠(八畳) 정도의 방’에는 생활에 필요한 것은 아직 대부분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이 쇼트를 아이⋅앵글로 찍으면 ‘아, 정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네’라고 자각하는 슈코의 의지할 곳 없는 공허감과, 텅빈 방의 공막감은 관객에게 잘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커튼이딱 닫아져 있는 것에도 알 수 있듯 슈코가 이 방에 갇혀 있는 장면이, 방의 사방 벽을 강조하는 부감 숏으로 의해 효과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슈코의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부감촬영이 어울린 것이다. 그 이유는, 대단히 높은 곳에서의 부감에 의해 슈코의 공허감은 보다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19)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무라야마는 자신이 연출한 연극 속에 영화나 영상을 사용함으로써 연극에서는 표현이 불가능했던 표현(전투의 생생한 모습, 장소의 이동 등)들을 보완하려고 시도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논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李正旭 (이정욱), 「무라야마의 도모요시의 연극과 영화의 융합(村山知義における演劇と映畵の融合)」, 이와모토 겐지편(岩本憲児編) 『무라야마 도모요시 극적첨단(村山知義 劇的尖端)』, 森話社, 2012.  20)피터 B. 하이(ピーターB. ハーイ), 『제국의 은막(帝国の銀幕)』, 名古屋大學出版會, 2001, 44쪽.  21)이와사키 아키라(岩崎昶), 「영화통제의 현황(映畫統制の現狀)」, 『신쵸(新潮)』, 新潮社, 1936. 12, 113쪽.  22)무라야마 도모요시, 『프롤레타리아 영화입문(プロレタリア映畫入門)』, 前衛書房, 1928, 15∼16쪽.  23)오카다 스스무(岡田晋), 「몽타주(モンタージュ)」, 오카다 스스무편(岡田晋編), 『개정 현대영화사전(改訂現代映畵事典)』, 美術出版社, 1973, 124쪽.  24)야마모토 사쓰오(山本薩夫), 『나의 영화인생(私の映畵人生)』, 新日本出版社, 1984, 58∼60쪽. 야마모토는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재학 중에 학내의 영화연구회에 소속하고, 스타 선수의 점유 유용하게 된 운동장사용의 문제를 둘러싼 스포츠에서의 계급문제를 비판한 <스포츠>(1932)를, 프로키노의 지도를 통해 제작한 인물이다. 전후, 도호쟁의(東宝争議) 에서는 조합 측 대표로서 영화제작의 자유를 위해 앞장섰다. 도쿠나가 스나오 (徳永直) 원작의<태양이 없는 거리(太陽のない街)>(신성영화, 1954), 야마모토 센지(山本 宣治)를 그린 <무기 없는 싸움(武器なき斗い)>(다이에이, 1960), 무라야마의 원작을 영화화한 <침입자(忍びの者)>(다이에이, 1962), <속⋅침입자(続⋅忍びの者)>(다이에이, 1963), <전쟁과 인간(戦争と人間)>(닛카쓰, 1970∼73)등 사회문제를 취급한 영화를 많이 제작 했으며, 무라야마와도 깊이 관계된 감독이다.  25)무라야마는 『연극적 자서전』에서 당시 본 서양 영화를 내용적인 측면이 아닌 기술적인 측면에 중심으로 해설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아벨 간스감독의 『철로의 흰 장미』는 「처음으로 플래쉬 백의 기법을 구사한 영화」이며, 조셉 폰 스턴버그 감독의 『구원을 요구 하는 사람들』은 「아마추어가 모여, 단돈 4500불로 만든 영화지만, 최고의 리얼리즘으로 격찬 받았으며, 스턴버그를 일거에 대감독으로 만든」영화이며, 프랭크 무르나우감독의 『최후의 사람』은 「무성영화이면서 완전히 무자막의 영화로 유명」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무라야마 도모요시, 『연극적 자서전2』, 198∼199쪽, 참조.  26)무라야마 도모요시, <PCL 시나리오 키스의 책임 (PCLシナリオ 接吻の責任)>, ≪세르팡(セルパン)≫, 第一書房, 1936. 08, 185∼186쪽.

    5. 결론

    본 논문에서는, 무라야마의 작품 <연애의 책임>을 통해 신협극단의 영화계 진출의 의미와 연극적인 효과인 롱 테이크와 영화적이라 할 수 있는 부감촬영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먼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변화에 맞춰 이루어진 신협극단의 영화 출연은, 표면적인 이유와 내면적인 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문화 활동으로부터 전향한 무라야마는, 1934년에 그의 주도로 설립된 신협극단을 극단과 배우의 경제적 안정을 통해, 진정한 프로페셔널 극단으로 자립시키려고 고심했으며 거의 무급에 가까운 배우들의 엄격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그 해결책으로 영화를 선택했다.

    또, 대중성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영화는, 계급이나 지역을 뛰어 넘는 것으로, 신협극단에 부정적이었던 사람들(교도관)이나 소도시(농촌)의 사람까지를 관객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연애의 책임>은 문화 활동으로부터 배제되어 온 사람들까지도 관객층으로 끌어들인 무라야마와 신협극단의 활동을 대중화로 이끈 첫걸음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무라야마가 <연애의 책임>빈번하게 사용한 롱 테이크와 부감촬영을 통해서는 당시 연극과 영화가 내포한 현실적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타장르와의 융합을 시도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관객 앞에서 동시적으로 공연된 연극의 특징을 파악하고 있었던 무라야마는, 일방적으로 영사될 뿐 관객의 감정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영화의 특징으로부터, 관객이 될 수 있는 한 배우에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 여유를 주기 위해서, 두드러진 빈도로 롱 테이크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영화가 가지는 관객과 배우와의 거리감을 조금이나마 좁혀보려 한 무라야마의 도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통상의 영화촬영에 있어서는 한정된 장면에 한해 사용되어왔던 부감촬영이 <연애의 책임>에는 부자연스러우리만큼 사용됨도 살펴 보았다. 무라야마가 이미 10대의 어린 나이에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잡지 『어린이의 벗』을 통해 데뷔하며, 꿈과 같은 세계를 부감풍의 그림으로 그려왔던 것을 생각한다면, 현실에서의 불가능에 안주하기보다는 불가능을 현실로 만들려한 무라야마의 끊임없는 노력을 <연애의 책임>도 볼 수 있었다. 이는 연극에서는 불가능했던 영화만의 수법, 부감촬영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이용하려한 무라야마의 모습 또한 살펴볼 수 있었다.

    전문영화인이었던 야마모토의 지적처럼, 무라야마는 아마추어 영화임에 틀림없다. 오락성을 소중히 여긴 당시의 영화계에서 보면, 영화의 이점을 무시하면서까지 제작한 <연애의 책임>은 실패작이었다고도 할수 있다. 관객의 시선에서 보면 익숙치 않은 부감이나, 슬로우 모션이 라고도 생각되는 롱 테이크의 기술이 빈번하게 사용된 <연애의 책임> 은, 영화 회사의 이익을 위해 흥행을 거두어야 했던 영화인 무라야마에 게는, 하나의 모험이었으며 실패를 무릅쓴 도전이었다. 하지만, ‘무대로 부터의 명배우, 극작가, 소설가, 음악가의 영화계 진출’을 통해, ‘다양한 유파와 경향으로 풍부한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당시의 프랑스 영화계를 높게 평가한 우치다 키미오(内田岐三雄, 1901∼1945)의 의견27) 은, 일본의 영화계도 다른 장르의 예술인, 곧 무라야마와 같이 예술 장르를 횡단하며 활동하는 사람들의 도전의 필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27)우치다 키미오,<프랑스 영화계의 현황(仏蘭西映畵界の現狀)>, ≪신쵸(新潮)≫, 新潮社, 1936.08, 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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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 무라야마 도모요시 <그림3> <연애의 책임> google
  • [<표 1>] 1930년부터 1947년까지 제작된 영화작품의 총 편수11)
    1930년부터 1947년까지 제작된 영화작품의 총 편수11)
  • [<그림 1>] <인톨러런스> DW그리피스감독, 1916년(왼쪽)
    <인톨러런스> DW그리피스감독, 1916년(왼쪽)
  • [<그림 2>] <야마센 와타세 노농장> 프로키노제작, 1929년(오른쪽)
    <야마센 와타세 노농장> 프로키노제작, 1929년(오른쪽)
  • [<그림 3>] 슈코(朱子)의 방에서 슈코와 신스케(新助), 영화 <연애의 책임>
    슈코(朱子)의 방에서 슈코와 신스케(新助), 영화 <연애의 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