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괄량이가 아닌 야수 길들이기

The Taming of Not the Shrew But the B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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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If the Elizabethan England has brought Shakespeare a shrew as a wild but tamable human animal, the emergence of the first woman leader/president in South Korea assigns women-on-screen a role of taming wild non-human animals. The heroines of films such as Howling (2012), A Werewolf Boy (2012), and Mr. Go (2013) advantageously domesticate such wild beasts as a dog-wolf hybrid, a werewolf, and a circus gorilla, respectively. However, this paper neither celebrates the historical elevation of women’s status nor aims at an ideological reading by identifying such fictional tamers with the new South Korean president. Rather, it pays attention to how the tamers are, along with the beasts, alienated and otherized in South Korean society, represented as an inexperienced and belittled police detective (Howling), a tuberculosis patient (A Werewolf Boy), and a mercenary Chinese circus girl (Mr. Go). Tellingly, each woman finds solace in her cultured relationship with nature, namely the beast despite a King-Kong-film-like obstruction and social prejudice against their co-habitation. Donna Haraway’s metaplasmic concept of “naturecultures” allows me to explore this aberrational domestication that “remodels” both the handlers and the animals as “companion species.” However, partly because wild beasts are far from companion animals and partly because the beasts are much more otherized and even instrumentized than the women in human society, the “co-constitution” of the kinship between them is soon ruptured and interrupted by Althusserian ideological apparatus. In considering this constitution and rupture of the natureculture and reconsidering the meaning of domestication of human (female) and non-human animals, this textual analysis addresses how the alienation/otherization is related to the gender dynamics in South Korea, just like Shakespeare’s time, in the age of its woman leader.

  • KEYWORD

    여성 , 동물 , 조련 , 젠더 , 타자(화) , 동물성 , 자연 , 문화

  • 들어가며

    왜 2010년대 초반에 한국영화에서 이전까지 드문 소재였던 늑대가 등장하는 영화인 <하울링(2012)>과 <늑대소년(2012)>이 갑자기 한꺼번에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2012년 초에 개봉된 <하울링>은 유하 감독의 연출과 송강호, 이나영의 호화 캐스팅에 탄탄한 원작 일본소설의 서사구조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참패했지만, 2012년 가을에 개봉된 <늑대소년>은 그 해 최고의 히트작중의 한 편으로 떠오르며 주연배우인 송중기를 톱스타로 안착시키는데 성공했다. 흥행 면에서는 갈림길에 섰지만, <하울링>과 <늑대소년>은 공교롭게도 늑대와 관련된 야생 생명체, 즉 늑대개와 늑대인간을 등장시킬 뿐만 아니라 그들과 주인공 여성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영화들이다. 흥미롭게도, 늑대는 아니지만 다른 야생동물을 길들이는 여성은 2013년에도 계속해서 등장한다. 2013년 여름 최고의 블록버스터 기대작이었음에도 흥행에 실패한 <미스터 고(2013)>의 여주인공 소녀는 야구장 한가운데에서 채찍을 휘두르며 끊임없이 야구선수로서의 고릴라를 조련한다. 고릴라에게 직접적으로 채찍질을 하지는 않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소녀의 제스처는 매저키즘의 창시자인 자허마조흐(Leopold Von Sacher-Masoch)의 소설,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 등장하는 비너스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게 느껴질 정도로 위압적이다. 영화 속 소녀와 고릴라의 관계가 자허마조흐의 소설 속 남녀처럼 수직적으로 묘사될뿐더러, 굴욕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계약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채찍질당하는 소설 속 남자주인공과 달리 고릴라가 매우 자발적으로 소녀에게 복종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2012년과 2013년에 개봉된 이 세 편의 영화들의 여주인공들은 애완동물도 아닌 야생동물들을 길들여 친구 혹은 동반자나 반려자로 삼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반려자가 된다는 측면에서 볼 때 영화 속 여성과 야생동물의 관계는 도나 해러웨이의 “반려종 (companion species)” 개념에 가깝게 보인다. 흥미롭게도 해러웨이는 쌍방향의 사랑을 강조함에도 인간과 애완동물의 관계를 수평적이기보다는 수직적으로 이해해 조금은 고통스러운 사육이나 훈련의 과정이 궁극적으로 양측에 도움이 됨으로써 인간과 동물이 서로 융성(flourishing)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1) 해러웨이의 반려종은 인간과 애완동물, 특히 애완견의 관계에 근간하고 있기는 하지만, “문화융성”을 강조하는 박근혜 정부의 집권을 전후해 등장한 이 한국영화들 속에서 여성들이 야생동물을 조련하고 반려종으로 삼는 모습은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의 취임과 전혀 무관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무성영화 시절부터 주기적으로 꾸준히 만들어지는 헐리우드의 <킹콩(King Kong)> 시리즈가 예증하듯, 여성과 야생의 맹수 사이엔 뭔가 끈끈한, 혹은 로맨틱하거나 에로틱한 연결 고리가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그러한 영화가 등장한 것일까? 길들인다는 것이 사회화 과정을 의미함을 감안하면, 영화 속에서 길들여지는 야생동물들은 사회화에서 더 나아가 일종의 인간화 과정을 겪게 되는데 그것이 혹시 남성화 과정인 것일까? 그렇다면 야생동물들은 남성, 즉 아버지나 남편, 아들, 혹은 로맨틱한 애정의 대상을 대체하는 존재들일까?

    본고는 2010년대 한국영화 속 여성들과 야생동물들의 관계를 단순히 남녀의 역할 구도 변화로 읽어 동물을 조련하는 여성들이 박근혜 대통령이나 한국의 여성리더들을, 야생동물들이 한국남성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려는 의도는 조금도 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세 편의 한국영화는 보다 복잡한 젠더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수컷 야수를 길들이는 여주인공들은 남성을 뛰어넘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부를 거머쥔 이들이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타자인 데서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완전히 소외된 타자들이다. <하울링>의 은영은 남성 동료들에게 조롱받고 차별받는 무기력한 여성 형사이고, <늑대소년>의 순이는 폐병 환자로서 가족들에게 짐이 되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고등학교 자퇴생이며, <미스터 고>의 웨이웨이는 서커스단에서 자라면서 고릴라 링링을 야구하도록 조련해 왔기 때문에 링링과 함께 한국 야구단에 스카웃되어 돈을 벌러 오게된 중국인 소녀이다. 은영은 늑대개를, 순이는 늑대소년을, 웨이웨이는 고릴라를 만나고 길들이면서 자신들의 타자성을 극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본론에서 상술하겠지만, 그 극복의 과정에서 해러웨이가 제시하는 인간과 동물의 이상적 공동체인 “자연문화(natureculture)”의 형성이 발견된다. 그러나 영화 속 동물들이 애완견이 아닌 늑대와 고릴라라는 야수이기 때문인지, 혹은 이 야수들이 타자인 여성에 길들여지면서 또 다른 타자로서 인간사회에 편입되기 때문인지 영화 속의 자연문화는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 하는 한계점을 보인다.

    게다가, 영화 속 여성들의 성격도 이기적이거나 고집불통으로 자신들이 스스로를 타자화하는데 일조하는 경향도 있어서,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말괄량이 길들이기(The Taming of the Shrew)」에 등장하는 야성의 말괄량이 여주인공, 캐터리나(케이트)를 연상시킨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길들임의 의미와 상징을 젠더 역학의 측면에서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말괄량이를 지칭하는 영단어 shrew는 본래 성질 나쁜 여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말괄량이가 남편에 의해 길들여진다면, 세 편의 한국영화 속 야수들은 까칠한 성격의 여성들에 의해 길들여진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단순히 여성이 길들여지는 위치에서 길들이는 위치로 승격했다는 점이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세 편의 한국영화 속에서 시차를 극복하고 성질 나쁜 여자들이 등장하는 공통적인 사회적 배경이다. 셰익스피어 작품의 많은 공간적 배경이 그렇듯, 「말괄량이 길들이기」도 잉글랜드가 아니라 유럽의 다른 나라, 즉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지만, 희곡은 세 편의 한국영화가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의 집권을 전후해서 만들어 진 것처럼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의 집정 당시에 쓰여 졌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사회적 타자인 여성의 타자성은 차치하고라도 순종과 복종을 미덕으로 하는 길들임의 젠더 역학이 더 부각되는 작품들이 시공간을 초월해 여성 통치자의 시대에 남성 감독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혹시 두 나라의 역사상 최초의 여성 통치자가 등장하는 것에 대한 남성들의, 혹은 사회적 불안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본고는 이러한 질문들을 인식론적 시발점으로 삼아 해러웨이의 “자연문화”와 철학에서의 “동물성”개념을 중심으로 <하울링>, <늑대소년>, <미스터 고>를 여성과 야생동물의 관계 및 동물성, 길들임의 역학에 초점을 맞춰 분석하고자 한다. 본론에서는 영화 속에서 타자로 재현되는 여성과 야수의 관계를 “교체”와 “타자의 타자”라는 지칭을 통해 해석한 후 그에 맞춰 세 편의 영화 텍스트를 분석할 것이다.

    1. 길들임의 젠더 역학: 여성과 동물의 타자의 위치 교체

       1-1. 타자의 타자로 자리매김하는 동물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의 타자화 역사는 길고도 지난하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남성에 대치되는 약하고 하등한 인간으로서 실질적으로 타자화된 것은 물론이고, 사악한 동물로서의 실체를 숨기고 인간으로 둔갑해 남성을 파멸시키는 요물로서도 오랫동안 비유적으로 타자화되어 왔다. 동아시아의 구미호 설화는 여성을 간사한 여우에 비유하는 전통을 한국, 중국, 일본에 심어놓았고, 유태교와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성경 속 이브 혹은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도록 부추긴 죄로 뱀이 언제나 여성과 연관되어 악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사악한 존재로서의 뱀은 여성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메두사가 그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테레사 드 로레티스(Teresa de Lauretis)가 지적하듯, 그리스 신화를 포함한 서구의 원형적 서사는 여성을 비인간화하며 메두사처럼 “파멸(destruction)”의 상징으로 그리거나 축축하고 음습한 동굴 등의 비유로 “공간화(spatialization)”하고자 하는 “오이디푸스적인(Oedipal)” 혹은 “가학적인 욕망(sadistic desire)”을 표출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2)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여성의 타자화는 동서양에서 수천년에 걸쳐 이루어 졌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영화 속에서 여성으로 둔갑해 남성을 홀리는 동물의 효시는 프랑스 출신의 헐리우드 거장, 자크 투르뇌르(Jacques Tourneur) 감독의 1942년작 <캣 피플 (Cat People)>에 등장하는 흑표범으로 추측된다. 평범한 미국인인 남자 주인공이, 자신이 동물로 변하는 저주에 걸렸다고 믿는 세르비아 출신의 여성 이민자와 결혼해 초현실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는 이 고전 영화 속의 여주인공은 남성 캐릭터를 파멸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그를 관객과 함께 충분한 혼란과 매혹의 도가니에 몰아넣는다. 사람이나 작은 동물을 해하는 야수의 본성을 깨달은 여주인공이 아직 인간의 모습일 때 스스로 영화의 첫 장면에서 남편과 만났던 동물원의 우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 아침에 표범의 모습으로 그와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은 이민자로서 뿐만 아니라 비인간으로서도 타자화 된 한 여성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압축해서 보여준다. 비(非)미국인 여성의 타자화를 차치하고라도 <캣 피플>의 동물원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인데, 그 이유는 영화가 뉴욕의 동물원에서 시작해서 거기서 끝남으로써 레이몽 벨루(Raymond Bellour)가 말하는 “반복(repetition)”과 “대칭(symmetry)”의 헐리우드 영화의 형식적 리듬3)을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물원이라는 공간을 통해 타자화되는 동물의 모습까지도 함께 드러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여성이 산업화, 근대화와 함께 진행된 여권 신장 운동으로 수천년에 걸친 실제적, 상징적 타자화에서 약간은 해방된 것과 대조적으로 동물, 보다 구체적으로 비인간종(non-human species)이라고 불려야 할 인간이 아닌 동물은 동물원에 갇히기 시작하면서 보다 완전하게 타자화되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캣피플>의 오프닝과 엔딩의 동물원 장면은, 다시 레이몽 벨루의 용어를 빌자면, 영화의 형식적 “교체(alternation)”4)로서 같은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하나이면서 둘인 여성 캐릭터의 육체의 교체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인간 여성과 비인간종 동물의 타자화의 교체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동물원이 비인간종 동물을 인간의 눈앞에 전시하는 방식을 통해 타자화하거나 주변화(marginalization)하는 방식은 이미 1970년대부터 비판되기 시작했다. 존 버거(John Berger)는 1977년 에세이, “왜 동물을 보는가?”에서 산업화 이전에는 동물이 한편으로는 소나 말처럼 노동노예, 혹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영혼이 없는 기계로서, 다른 한 편으로는 이솝 우화처럼 인간의 성격을 대변하는 비유적인 대상으로서 인간생활 속에 친숙한 존재였으나, 인공 기계의 등장과 동시에 인간으로부터 유리되기 시작했음에 주목한다.5) 즉, 산업화, 도시화, 자본주의화가 진행되면서 동물은 인간 생활권의 주변부로 밀려나 더 이상 인간 생활의 일부가 아니라 애완동물이나 “스펙터클”의 형태로만 인간이 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버거는 애완동물보다는 스펙터클로서의 동물에 특히 관심을 기울이는데, 동물이 장난감 인형이나 디즈니 애니메이션, 동물원의 구경거리로서 상품화되는 과정이 중하층 계급의 팍팍한 삶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버거의 글 속에 등장하는 동물이란 단어를 모두 여성으로 대체해서 “왜 여성을 보는 가?”라는 에세이를 쓴 수잰 캐플러(Suzanne Kappler)는 동물 인형을 바비 인형으로,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하드코어 포르노로, 동물원을 스트립쇼로 봐도 무방하다는 무리수를 둔 논지를 펴며 여성도 동물처럼 주변화되었다고 주장한다.6)

    여성과 비인간종 동물이 인간 사회에서 타자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둘의 주변화가 캐플러가 주장하는 것처럼 같은 시간대에 같은 방식으로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버거의 논지대로, 동물은 산업 기계의 등장으로 생산 노동력으로 활용될 필요가 없어지면서 애완동물을 제외하고는 인간으로부터 멀어져 공장식으로 사육되거나, 동물원에 갇히거나, 미개발 혹은 개발제한 구역으로 밀려나며 주변화되었지만, 여성은 산업화와 함께 오히려 산업 인력으로 거듭나 남성과 함께 생산 활동의 중심부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편입이 대다수의 경우 “여성화(feminization)”되었다고 여겨지는 공장 등지에서의 단순 노동인 경우가 대다수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비인간종 동물의 주변화처럼 시야에서 멀어져서 동물원이나 그림책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스펙터클의 형태로 전환된 주변화를 뜻하지는 않는다. 즉, 여성은 근대화와 산업화를 통해 오히려 인간사회의 중심부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얻으며 남성과 균일한 일상을 누리게 되었으나, 동물들은 인간사회로부터 완전히 멀어지고 주변화되어 일상에서 애완동물이 아니고서는 실물을 접할 기회 자체가 희박해진 것이다. 따라서 앞서 <캣 피플>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언급했듯, 산업화와 근대화가 오히려 여성의 주변화나 타자화를 동물의 그것과 기묘하게 교체시켰다고 보여진다.

    비인간종 동물과 여성의 타자화의 교체는 서론에서 언급했던 세 편의 한국영화에서도 나타난다. <캣 피플>이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산업화 이후 포디즘을 통한 경제 부흥을 거쳐 대공황을 겪고 난 이후 2차 세계대전에 발을 들인 1940년대 미국에서 존 버거가 희화화하는 “동물원”을 주요 배경으로 삼아 만들어졌다면, <하울링>, <늑대소년>, <미스터 고>도 압축적으로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산업화를 통한 경제성장을 거쳐 IMF 쇼크의 여파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도입한 후 그 후유증에 시달리는 2010년대의 한국 사회에 등장했다. 말하자면, 한국 사회에서 7,80년대에 사람들과 함께 도시의 길거리를 활보하던 똥개들이나 농촌 가정에서 한두 마리씩 기르거나 기르기를 희망했던 소들마저 공장식 사육장으로 보내짐으로써 전통적인 반려동물7)이었던 소나 개, 돼지, 닭 등을 포함한 비인간종 동물들이 인간의 생활 구역에서 애완동물이 아니고서는 찾아보기 힘들어 지게 되자 한국에서도 동물원은 아니지만 동물원적인 “조련”의 장치를 통해 타자화된 동물과 여성의 관계를 다룬 세 편의 영화가 등장한 것이다.

    이 세 편의 영화 속 동물들도 <캣 피플>의 동물원 속 타자인 흑표범처럼 여성과 전통적인 타자의 위치를 교체해 여성을 대신한 자본주의 사회의 타자, 즉 서커스 동물 (<미스터 고>), 경찰견처럼 조련된 훈련견 (<하울링>), 한국 최초의 웨어울프 (<늑대소년>)의 형태로 등장한다. 다음 절에서는 이러한 교체의 과정을‘타자의 타자화’라고 부르며 본격적으로 영화 텍스트들을 살펴볼 것이다. ‘타자의 타자화’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세 영화가 기존에 여성이 인간 사회에서 차지하던 타자의 위치를 동물로 더 극적으로 대체시키며 현실에서도 ‘타자의 타자’로 주변화된 상황을 상징적으로 재현하기 때문이다. 이때, 타자의 타자로 교체된 동물들은 전통적인 사육종이 아니라 <캣피플>의 흑표범 같은 야생동물, 그것도 야수라고 불리울 만한 제법 사나운 짐승들인 늑대와 고릴라이다. 비인간종 동물들 중에서 가장 인간에 가까울 정도의 높은 지능을 지녔다는 이 늑대와 고릴라는 인간의 눈에 띄지 않는 야생에서 살며 주변화된 동물들이지만 인간세계에 발을 들이면서 여성보다 더 타자화된 타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또한, <캣 피플>의 표범 여성이 더 이상 약한 동물이나 인간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동물원 철창 속에 걸어 들어감으로써 사육화의 길을 택하는 것처럼, 세 편의 한국영화 속의 동물들도 인간 여성을 만남으로써 야수의 생활에서 이탈해 길들임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렇다면, 세 영화 속에서 각각의 야수들은 그 길들임을 통해 어떻게 타자의 타자가 되는 것일까?

       1-2. 타자(여성)가 타자의 타자(동물)를 길들이기

    『반려종 선언 (The Companion Species Manifesto)』에서 도나 해러웨이는 기존의 자연/동물과 문화/인간을 분리해서 사유하는 방식에 대항해 “자연문화(natureculture)”와 “반려종”이라는 “어형변이적(metaplasmic)” 용어를 사용하는데, 어형변이의 영어 단어인 metaplasm은 개조 혹은 리모델링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해러웨이는 우리의 생활권이 실상은 인간과 비인간종 동물, 특히 반려동물이 서로의 반려자가 되어 “개조(remodelling)”되고 “공진화(coevolution)”하는 “공생(co-habitation)”의 공간인 자연문화임을 역설한다.8) 해러웨이의 반려종 개념은 주로 애완견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하울링>, <늑대소년>, <미스터 고>의 야생동물들도 인간과 같이 살고 길들여지면서 반려종이 된다. 그러나 전통적인 반려동물들과 달리, 영화 속 야수들은 반려종이 됐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세계 속의 타자, 즉 타자의 타자가 된다. 타자의 타자인 그들을 길들이는 것은 타자인 여성들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하울링>에서 늑대개를 길들이는 것은 여주인공이 아니라 남성 경찰견 조련사이지만, 영화 속에서 늑대개와 더 긴밀하고 친숙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남성 조련사이기 보다는 그의 딸과 여주인공 형사이다. 게다가, 조련사의 딸이 늑대개의 조련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기 때문에 타자의 타자를 길들이는 여성 타자의 존재는 <하울링>에서도 매우 유효하다.

    그러나, 서론에서도 언급했듯, 세 영화의 여주인공들은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타자인 것이 아니라 각기 외톨이 형사로서, 폐병환자로서, 외국인으로서 한국사회의 타자로 표현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울링>의 은영은 고아로 자라 유일한 가족이었던 남편이 형사라는 그녀의 직업을 문제 삼자 기동대로 옮겼다가 이혼 후 다시 강력계로 복귀한다. 영화의 초반에 은영이 남자주인공인 상길의 새 파트너로서 남자들로만 구성된 팀에 소개되자, 동료들은 그녀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약간은 꺼림칙해 하면서도 처음에는 미인인 그녀를 반긴다. 그러나 그들은 곧 은영이 싹싹하거나 애교 있는, 즉 한국남성들이 기대하는 여성적이거나 순종적인 성격이 아닐 뿐더러 무뚝뚝하고 고지식하며 고집이 세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녀를 따돌리고 대놓고 모욕을 주기 시작한다. 영화 속 은영은 가족도 없고 직장동료들로부터도 소외 됐음에도 시종일관 타자로서의 자신의 위치에 굴하지 않는 집념의 여성이다. <늑대소년>의 순이는 가족들에게 내색은 하지 않지만 폐병환자인 데다가 우등생도 아닌 자신의 상황에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매일 밤 스스로를 저주하는 일기를 쓴다. 게다가, 최근에 예고도 없이 세상을 떠난 사업가 아버지의 동업자 일가가 사업체와 재산을 차지해 버려서 번역가인 어머니의 수입에만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갑작스런 빈곤의 경험도 순이에게는 몹시 불만스럽다. 또한, 순이가 은영처럼 약간은 무뚝뚝하고 까칠한 성격임에도, 그녀가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강원도 시골 마을에 집을 사 주고 거기에서 요양시켜 건강을 회복한 후 결혼할 목적으로 자꾸 집에 찾아오는 동업자의 아들, 지태의 존재도 못마땅하고 부담스럽다. 폐병환자로서 이미 사회적 타자인 순이는 지태가 순이 가족을 서울에서 산골로 이사시킴으로 인해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인적이 드문 산골에 살며 사회와 더더욱 유리되고 고립된다. 이와 달리, <미스터 고>의 웨이웨이는 고아인 자신을 영아 때 거둬준 서커스 단장 할아버지 휘하에서 서커스단 동물들 및 다른 어린이들과 어울려 중국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게다가, 야구광인 할아버지로부터 야구를 하도록 조련된 고릴라 링링으로 인해 서커스단은 한국에 까지 유명세를 떨친다. 그러나 대지진으로 할아버지를 여의고 갑자기 할아버지의 빚을 독촉하는 깡패 집단의 행패가 잦아지자 웨이웨이는 빚을 갚기 위해 링링을 야구선수로 스카웃하려는 한국인 스포츠 에이전트의 제안으로 한국행을 선택하게 된다. 한국어가 능숙한 데다가 에이전트의 호화로운 펜트하우스에서 링링과 편안하게 살게 되지만, 15세 중국인 소녀 웨이웨이에게 외딴 타국 땅에서 기댈 수 있는 존재라고는 링링 밖에 없다.

    흥미롭게도 세 여성들이 타자화되는 데는 그들의 소외되고 주변화된 사회적 위치뿐만 아니라 서론에서도 언급했듯 그들의 성격도 한 몫 한다. 그들은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 여느 남성도 선뜻 결혼할 엄두를 내지 못 하는 노처녀 케이트처럼 남성에게 비순종적이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여성들이다. <하울링> 속 은영의 대사대로 “적당선을 타지 않는”원리원칙주의자인 은영의 성격은 같은 팀 남성 동료들뿐만 아니라 그녀를 접하는 모든 남성들, 물론 범죄자들로부터 형용할 수 없는 욕과 극심한 구타를 유발한다. 물론 남자 주인공인 상길은 서서히 은영의 능력과 열정에 높은 점수를 주며 그녀에게 협조하기 시작하지만, 그의 은영에 대한 옹호는 영화 전체에 걸쳐 미미하고 소극적이다.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처럼 자기주장이 뚜렷하고 순종적이지 않은 여성이 남성중심사회에서 살아남기가 얼마나 녹녹치 않은지 명명백백하게 보여준다. <늑대소년>의 순이도 전술한 대로 까칠하고 불친절해서 끊임없이 기태를 무시하고 모욕감을 안겨준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순이 또래의 인물이 지태와 늑대소년 밖에 없기는 하지만, 순이에게는 친구도 없다. 고등학교 3학년에 중퇴하고 바로 산골짝으로 이사해 홀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순이에게 편지를 보내는 친구조차 한 명도 없다. 병으로 인해 신경이 날카로워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순이는 어린 동생들이나 어머니에게도 퉁명스럽고 신경질적이다. 고립된 산골 속에서 순이는 스스로를 더욱 더 고립시키고 마음을 닫아버린다. <미스터 고>의 웨이웨이는 아직 가냘픈 체구의 어린 소녀이지만, 서론에서 잠깐 언급했듯 매우 위압적인 캐릭터이다. 단순히 채찍을 가지고 다닌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소녀의 전투적인 말투와 행동은 링링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만나는 모든 성인 남성들이 그녀를 얕볼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그녀의 건방지고 고집스러운 성격은 고릴라로서는 완전한 노년인 링링을 힘들게 할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의 스스로의 입지도 위태롭게 한다.

    <하울링>, <늑대소년>, <미스터고>의 여주인공들이 스스로의 무난하지 않은 성격 탓인지 보통의 인간 대신 야성의 동물들과 교감하고 그들을 길들여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처럼,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가난한 남자주인공 페트루키오도 순종적이고 평범한 여성들 대신 부잣집 딸이지만 어떤 남성도 신부로 맞이하려고 하지 않는 왈가닥 노처녀의 지참금을 노리고 결혼해 새 신부를 남편에게 순종하는 전통적인 아내로 탈바꿈하고자 온갖 회유와 압박을 다 동원한다. 희곡의 결말 부분에서 여성의 순종성을 찬양하는 케이트의 일장연설을 놓고 셰익스피어 학자들 간에 반어법이다 아니다 논쟁이 있어 케이트가 실제로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여성으로 길들여진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선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다. 게다가, 셰익스피어가 길들임의 과정이나 결과를 연극 대사로 짧게 표현했기 때문에 케이트의 탈바꿈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보다는 오히려 희극이라는 장르에 충실한 코믹 요소이거나 성 차별을 희화화하는 사회적 비판으로 보이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셰익스피어 원작보다 이 대문호의 희곡을 자주 영화화하는 이탈리아 감독 프랑코 제피렐리(Franco Zeffirelli)가 연출하고 영국 출신인 리처드 버튼(Richard Burton)과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 커플이 주연한 1967년도 헐리우드 영화판 <말괄량이 길들이기(The Taming of the Shrew)>가 길들임의 과정을 더 상세하게 극적으로 표현한다. 영화는 약간은 꼬인 성격이지만 멀쩡한 케이트9)를 길들인다는 명목하에 페트루키오가 학대에 가까울 정도로‘조련’시키는 과정을 조금은 경악스러울 정도로 상당히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0세기 초반부터 서구에서 급부상하기 시작한 페미니즘 운동의 확산으로 전 세계의 여권이 신장돼 왔다고는 하지만, 여성에게 요구되는 남성에 대한 순종의 미덕은 16세기 엘리자베스 조(朝)의 잉글랜드나 동시대의 이탈리아건, 제피렐리의 영화가 만들어진 20세기 후반의 서유럽이나 미국이건, 21세기 한국의 박근혜 정부건, 문화 텍스트 속에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적용되는 현실의 반증이 아닐까도 싶다. 어찌 됐든, 셰익스피어의 케이트와 마찬가지로 세 편의 한국영화 속 여주인공들은 스스로의 비순종적이고 불친절한 성격으로 인해 스스로의 사회적 타자의 입지를 더욱 굳건히 다지게 된다. 차이점이라면 케이트는 길들여지는 입장에 있다는 것이고, 한국영화 속 여성들은 야수에게 길들여지는 위치를 전가시킴으로써 길들이는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세 영화의 여주인공들이 여러 가지 여건으로 인해 한국 사회의 타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 속 동물들도 인간사회에 발을 들인 야생동물로서만 타자인 것이 아니라 정체가 불분명한 혼종이라는 측면에서도 타자이다. <하울링>의 질풍은 개와 늑대 사이에서 태어난, 한편으로는 늑대이며 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도 늑대도 아닌 울프독이다. <늑대소년>의 철수는 한국전쟁 당시 괴짜 과학자의 실험과 인간보다 강한 군인을 양성하려한 군의 비밀 프로젝트에 의해 탄생한 늑대인간이다. 헐리우드 영화에는 흔하게 등장해 왔지만 한국영화에서는 최초로 차용된 웨어울프로서, 철수는 질풍처럼 인간이며 늑대인 동시에 인간도 늑대도 아닌 존재이다. 질풍이나 철수에 비해, <미스터 고>의 링링은 로랜드 고릴라로서의 종의 입지는 확실한 비인간종 동물이지만, 인간의 언어를 이해한다고 믿어지는 별종의 서커스 고릴라이다.

    이렇게 이미 존재론적으로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않는 타자인 이들이 타자 중의 타자로 거듭나는 것은 오히려 인간을 접하고 길들여지면서부터이다. <하울링>의 질풍은 본디 투견이 될 목적으로 혼종으로 태어났지만, 열 다섯살에 가출했다가 변칙적인 성 매매 단체에 의해 약물중독자가 되어 임신까지 한 채 길거리에 버려진 딸의 복수를 다짐한 경찰견 조련사, 강명호에 의해 살인견으로 키워진다. 질풍은 명호의 딸, 정아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정아와 남매처럼 자라지만 명호에 의해 철두철미한 살인기계로 훈련돼 연쇄살인범이 되고 경찰의 추격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늑대소년>의 철수도 헐크처럼 분노하게 되면 늑대로 변하는 살인기계로서의 일면을 가지고 있다. 괴짜 동물학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산골에서 홀로 굶주림에 시달리던 철수는 과학자의 집에 순이 가족이 이사 오면서 인간세계를 접한다. 말도 못 하고 늑대처럼 으르렁대지만 소년의 외양을 갖춘 철수를 전쟁고아라고 오인한 순이의 엄마는 철수를 보낼 고아원이 마땅치 않자 본인이 거두게 되고, 순이는 우연히 발견한 애완견 조련법에 대한 책을 본 후 개처럼 행동하는 철수를 조련해 언어를 가르치고 인간의 식사법 및 매너를 훈련시킨다. 순이 가족과 순박한 산골 사람들은 철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도시 출신인 데다가 옹졸하고 이기적인 지태는 철수를 질투할 뿐만 아니라 그의 정체를 언제나 의심하며 마을 사람들과 철수의 관계를 이간질한다. 언제나 순이의 주변을 맴돌며 철수를 자극하는 지태의 존재는 결국 온 마을 사람들 앞에서 철수의 야수적 본성을 드러내게 해 철수도 질풍처럼 군의 추격을 받게 된다. <미스터 고>의 링링은 웨이웨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할아버지의 서커스단에 있던 터줏대감으로서, 고릴라지만 아버지처럼 헌신적으로 웨이웨이를 보살피는 한 편 인간 언어를 다 알아듣는 것처럼 웨이웨이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한다. 그러나 링링이 인간을 능가하는 야구 타자로서의 뛰어난 능력 위에 거대한 몸집으로 조금만 팔을 휘둘러도 엄청난 힘으로 주변의 물건을 박살낼 수 있는 위력을 지닌 만큼 군중들에게 가공할 공포를 심어주기도 한다. 질풍, 철수, 링링은 모두 인간의 사랑을 받고 인간세계에서 상호교감하며 길들여지지만, 그들의 야수적 본성은 그들을 길들인 이들 외의 사람들에게 공포를 자아내 그들은 “자연문화”에서 축출돼야 할 재해와도 같은 “자연”, 즉 인간의 오랜 타자가 되어버린다.

    2. 자연문화의 형성과 해체

       2-1. 언어, 호명 및 훈련/조련을 통해 나타나는 일시적 자연문화

    질풍, 철수, 링링이 타자의 타자가 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인간의 언어에 의해 조련되고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인간과 (비인간종) 동물을 구분하는 절대적 기준을 이성을 기반으로 한 언어의 사용으로 보았지만,10) 세 편의 영화는 이러한 구분을 상당 부분 희석시킨다. 세 동물이 언어를 통해 조련되기 때문이다. 언어 조련의 첫 단계는 명명, 즉 이름짓기이다. 질풍처럼 빨리 달리라는 의미에서 <하울링>의 정아는 늑대개에게 질풍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늑대 소년>의 순이 엄마는 늑대소년에게 1950년대 당시 한국에서 가장 흔한 남자 이름 중의 하나였던 철수라는 이름을 붙이고, <미스터 고>의 고릴라는 링링이라는 이름이 이미 주어져 있지만 한국 야구선수로 데뷔하면서 고릴라의 앞자를 딴 미스터 고라는 별명으로 한국 청중에게 소개된다. 인간이 지어준 이름으로 불려 지면서 세 동물들은 알튀세(Louis Althusser)가 말하는 “호명(interpellation)”을 통해 인간사회의 이데올로기에 편입된다.11) 알튀세는 라캉(Jacques Lacan)이 “거울단계(the mirror stage)” 이론에서 제시하는 상상계(the Imaginary)-상징계(the Symbolic)-실재계(the Real) 모델을 따라 인간이 언어적 호명에 의해 국가나 교회 같은 “이데올로기 장치(ideological apparatus)” 속에 갇히게 된다고 본 바 있다.12) 즉, 어머니에게 안긴 아기가 처음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보는 순간 어머니와 다른 개체인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이를 ‘나’라든가 ‘엄마’라는 언어로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언어 이전 단계인 상상계를 벗어나 도덕과 법으로 규정지어진 상징계에 접어들면서 인간화되는 과정이13) 인간이 이데올로기에 포위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라캉은 아기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에 매료되고 기쁨을 느끼는 것을 인간만의 특성으로서 동물, 특히 유인원 중 유전적으로 인간에 가장 가까운 침팬지와도 대비되는 현상으로 규정하기는 했지만, 질풍, 철수, 미스터 고는 어찌 되었든 인간 언어로 표현되는 이름을 갖고 호명되며, 언어를 통해 길들여지고 사회화된다. <하울링>에서 질풍은 정아와 오누이처럼 자라는 한 편, 명호의 언어적 명령과 훈련에 따라 살인을 저지르기 때문에 아무나 공격하거나 물지 않는다. 은영이 동료들의 반대와 협조 거부로 혼자만의 끈질긴 추적 끝에 명호의 집 창고에 몰래 들어서서 단독으로 질풍과 마주하는 순간, 이전 수사 과정에서 우연찮게 질풍이 살인하는 현장을 목격한 적이 있던 그녀는 곧바로 공포에 휩싸인다. 이 때 나타난 명호는 겁에 질린 은영이 경찰임을 알게 되고, 질풍이 자신의 명령이 아니면 아무도 물어뜯지 않음을 주지시키며 은영을 질풍과 함께 창고에 가두고 나가버린다. 명호의 말대로 질풍은 으르렁대면서도 은영을 공격하지 않고,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방화범으로 인해 집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여 은영이 질식 직전의 순간이 되자 오히려 은영에게 비밀통로를 알려줘 그녀가 불길 속에서 탈출하도록 돕는다. <늑대소년>의 순이는 먹을 것만 보면 개처럼 달려드는 철수에게 “기다려!”라는 말로 멈춤을 지시하고 “먹어!”라는 명령으로 식사 예절을 훈련시킬 뿐만 아니라 글씨 쓰는 법까지 가르친다. 비록 순이와 철수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지낼 수 있는 행복한 시간동안은 철수가 말을 하지는 못 하지만, 영화의 말미에 할머니가 돼 미국에 살고 있는 순이가 집을 팔라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오랜만에 산골 집으로 찾아가 철수와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철수는 입을 열고 말을 한다. 예전 그대로의 소년의 모습으로 자신을 계속해서 기다려준 철수에게 순이가 미안함을 표시하자, 철수는 괜찮다는 말로 그녀를 위로하기까지 한다. 철수는 홀로 산골에 남아 다시 야생으로 돌아가지 않고 문명화된 모습으로 순이의 명령대로 언어를 훈련하며 계속 그녀를 기다려온 것이다. <미스터 고>의 링링도 야구능력으로 한국 언론에서 조명되기 전부터, 웨이웨이의 모든 언어적 명령을 수행함으로써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으로 전 세계 언어학자들의 관심을 집중해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에 출연한다. 나중에 고령으로 몸져눕게 된 링링이 다시는 야구를 할 수 없게 될 위기에 처하자, 웨이웨이는 모처럼 자신과 링링의 관계에 대해 깊이 재고하게 되고 동물인 링링이 사실은 자신의 말을 모두 알아듣는다기보다는 아버지 같은 배려심으로 그녀의 명령에 따랐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인정하게 된다.

    반은 인간인 철수를 제외하고, 질풍과 링링이 어느 정도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는지 영화들이 물론 아주 명확하게 보여 주지는 않지만, 세 편의 한국영화는 루소의 가정처럼 비인간종 동물에게 언어나 언어와 같은 비유적 표현 능력이 전혀 없다는 전제를 깔고 동물 캐릭터에게 접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언어를 통해 야생동물이 인간에 의해 훈련 혹은 조련됨으로써 인간과 함께 자연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해러웨이는 자연문화가 서로간의 사랑 및 존경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수평적이기보다는 수직적 관계 위에서 동물의 “자기통제”와 “[훈련동물]이 되기 위해 필요한 감정적이고 인지적인 능력을 요구하는 힘든 작업”14)을 통해 이루어짐을 강조한다. 이런 고된 작업을 통해야만 “반려동물의 훈련(training)이라는 상하위계적 훈육에 의해 가능해 지는 종 횡단적(cross-species) 성취”15)와 함께 “훈련이라는 관계적 작업을 통해 실현”16)되는 재능의 발견 또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반려종들은 “상호주체성(inter-subjectivity)” 뿐만 아니라 “인간과 동물의 번영(human-animal flourishing)”17)에까지도 이룰 수 있다고 해러웨이는 기대한다.

    그러나 세 편의 한국영화 속에서 자연문화는 길들임 중의 짧은 기간으로만 제시된다. <하울링>의 경찰견 조련사 명호는 예기치 않은 방화 사건으로 중태에 빠져 병원 침대에 누워 정아와 질풍이 행복하게 뛰어놀던 아름다운 과거를 회상한다. 그는 질풍이 끝까지 정아의 복수를 대신 해 주기를 희망하면서도 늑대개를 살인견으로 조련한 것에 대해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여러 번 반복해서 그 자연문화의 장면을 회상한다. <하울링> 속 또 다른 자연문화의 예시는 기동대 출신의 은영이 오토바이를 타고 질풍을 추격하며 한밤중에 질풍과 함께 질주하는 장면이다. 은영은 명호의 딸, 정아를 포함한 미성년자를 약물로 꾀어서 불법 매매춘에 연루시키고 약물중독자로까지 만들어버린 거대 인신매매 조직을 파헤치기 위해 질풍을 따라 달린다. 질풍이 방화 사건 때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이후로 은영은 해러웨이가 말하는 무한한 “존경과 신뢰”를 늑대개에게 갖게 되고 무슨 이유에선지 질풍도 그렇게 행동한다. 동료들의 반발로 결국 수사 팀에서 쫓겨났음에도 질풍을 따라가면 매춘 조직의 핵심인물을 잡을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갖게 된 은영은 팀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 질풍을 쫓아가게 되고, 질풍도 그것을 아는 냥 빠른 속도로 달리면서도 은영을 배려하며 그녀를 범죄의 중심부로 안내한다. 질풍은 경찰인 은영이 포획하거나 사살해야 하는 살인견이지만, 여경과 늑대개는 조련을 통해 동고동락한 사이가 아님에도 처음 만난 순간부터 강렬한 눈빛을 교환하며 서로 교감해, 질주 장면에 이르러서는 질풍이 오히려 인간인 상길보다 은영의 파트너 역할을 매우 훌륭하게 완수한다. 질풍이 물어 죽이는 인신매매단의 중심인물들 중에 여성도 한 명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새끼 때부터 정아와 함께 자라고 정아의 복수를 대신 수행하도록 훈련되어서인지 영화 속 질풍은 대체로 사회적 타자인 여성에게 보다 더 크게 교감하고 반응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남성 감독이 만든 영화지만 여성 소설가의 원작을 바탕으로 해서인지 <하울링>은 짐승보다도 더 포악하고 잔인한 남성들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정아나, 영화 전편에 걸쳐 그들에게 얻어맞고 쌍욕을 듣는 은영을 통해, 남성 중심사회에서 타자화된 여성이 오히려 같은 종의 인간 남성보다 비인간종 동물과의 교감과 연대를 통해 자신의 타자화를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울링>의 명호같은 전문적인 조련사는 아니지만, <늑대소년>의 순이도 제법 엄격하게 철수를 훈련시키는 한 편, 철수가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 애완견에게 하는 것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당근과 채찍의 조련을 한다. 늑대소년은 소녀의 명령에 순응하는 한 편 끊임없이 소녀의 눈치를 보며 호감을 살 만한 행동을 해 쓰다듦을 받으려고 애쓴다. 순이가 위계질서를 갖고 철수를 대하기는 하지만, 철수가 반은 인간이기 때문인지 영화는 세 편의 한국영화 중 유일하게 여성과 야수의 교감을 로맨틱하게 그린다. 전술한 대로 까칠하고 타인에게 무관심한 순이지만 철수에게 이성적 호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철수가 조련의 결과로 힘세고 친절하고 자상한 “오빠”의 모습으로 순이의 두 동생을 포함한 동네꼬마들과 놀아주기 시작하자 곧 은근슬쩍 이에 가담해 함께 뛰어놀게 된다. <하울링>의 회상장면이나 질주장면처럼, <늑대소년>은 산과 들판에서 함께 어울려 뛰어노는 아이들과 철수, 순이의 모습을 영화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으로 그려낸다. 그 완벽한 자연문화의 순간동안에는 웨어울프인 철수도, 사회적으로, 성격적으로 타자화됐던 순이도 타자의 위치를 극복하고 타자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만끽한다. <미스터 고>에서도 중국의 대지진 전에 할아버지의 서커스단에서 행복하게 함께 사는 링링과 웨이웨이의 모습이나, 한국에 온 그 둘이 도심 속 야구장의 대형 조명등 꼭대기에 앉아 발 밑 세상을 내려다보는 장면에서 돈을 많이 벌어 귀국하겠다는 희망에 부푼 웨이웨이에게 동조하듯 나란히 앉아있는 링링의 동반자적 형상을 통해 자연문화를 엿볼 수 있다. <미스터 고>도 <하울링>이나 <늑대소년>처럼, 중국에서는 서커스단의 고아소녀였고, 한국에서는 중국인 동물 조련사로서 타자화된 웨이웨이가 링링과의 상호 교감이 가능한 자연문화 속에서만 서로의 타자화를 함께 극복하고 이상화된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준다.

       2-2. 인간의 동물성 회복을 통한 영구적 자연문화 형성의 가능성

    영화 속 동물 캐릭터들에게 이름이 주어지고, 그 이름으로 호명되며, 인간이 언어로서 명령한 것에 복종하도록 길들여지면서, 그들은 “상징계”라는 인간사회의 법칙과 규범, 즉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아버지의 이름(the name of the father)”을, 알튀세식으로 말하자면 이데올로기를 따를 것을 요구받게 된다. 길들임의 “상징계”에 (비인간종) 동물이 편입되며 인간과 형성하는 조화로운 삶은 해러웨이가 뜻하는 자연문화에서 더 나아가 도미니크 르스텔(Dominique Lestel)이 말하는 “잡종 공동체”로도 해석될 수 있다. 르스텔은 “인간과 동물의 길들임은 상호 연결되어 있고, 이런 상호성은 잡종 공동체의 중요한 토대를 형성”18)해 궁극적으로 그들이 “하나의 동일한 공간, 즉 물리적이거나 지리적인 공간 이전에 하나의 의미의 공간에서 살아가야 하는 방식”19)인 “동물성”에 도달해야 함을 강조한다.

    르스텔의 동물성을 통한 인간과 비인간종 동물의 잡종 공동체의 제안은 아감벤(Giorgio Agamben)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동물론을 차용해서 부각시키는 동물의 개방성에 대한 해석과 인접하는 부분이 있다. 하이데거는 비인간종 동물이 인간보다 빈약한(poor) 지각 능력으로 세계를 파악하기 때문에 동물을 “세계의 빈곤(poverty in world)”이라 칭하는데, 이 독일 철학자는 바로 이 빈곤함으로 인해 동물이 오히려 인간처럼 여러 가지 정황에 정신이 팔리지 않고 주변 환경에 완전히 “사로잡히고(captivated)”, “몰두(absoprtiona)”할 수 있다는 견지를 표한다.20) 동물이 온전히 그가 처한 상황과 주변 환경에 “붙잡혀(taken)” 있음으로 해서 그는 (인간이 만든) 세계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그럼으로 인해 자신에 대해 숨길 것이 없어진다. 따라서 이러한 “은폐 없는 개방성 (openness without disconcealment)”21)은 동물이 “외부의 순수한 공간(pure space of the outside)”22)으로 나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마찬가지로 인간도 동물처럼 순수하게 주변 환경에 몰입하거나 몰두할 수 있게 되면 열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감벤은 인간이 자신의 “동물성(animality)”을 회복하고 “동물화(animalization)”됨으로써 동물과 함께 열린 세계로 나아갈 것을 제안한다. 순수한 몰입을 통한 개방성을 강조하는 아감벤의 동물성은 르스텔이 주창하는 동물성, 즉 인간이 동물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획득하는 동물성과 맞닿아 있다. 르스텔에 따르면 인간이 동물 혹은 동물성을 식물이나 사물과 같은,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리자면, “무세계성(worldlessness)”과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은 동물이 “인간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특별한 이타성을 구현”23)하기 때문이다. 결국 아감벤과 르스텔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회복해야 할 것은 인간성이라기보다 동물성, 즉 비인간종 동물의 포용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인간도 궁극적으로 동물의 일원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타자화된 인간이 가장이나 위장을 통해 스스로를 은폐할 수 있는 것과 달리 타자의 타자가 되는 동물은 “은폐 없는 개방성”으로 인해 숨김없이 자신을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예상치 못한 위험이 그들에게 다가오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하울링>의 질풍은 미성년자 매춘업체의 우두머리를 물어뜯는 데 몰두하는 동안 상길이 쏜 총탄을 맞고 쓰러지고, <늑대소년>의 철수는 순이를 이용해 자신을 자극하는 지태에 대한 분노로 주변의 보는 눈들을 의식하지 않고 늑대로 변신해 지태를 공격하고 결국에는 죽이게 된다. <미스터 고>의 링링은 주변의 어떤 것에도 신경 쓰지 않고 언제나 오직 웨이웨이만을 바라보고, 그 결과 자신이 아픈 줄도 모르고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버린다. 링링과 대조적으로 웨이웨이는 링링에게 언어 능력이 있어서 자신이 하는 말을 고릴라가 다 이해할 수 있다는 거짓말로 주목받고 싶어 한다. 십대 소녀에게 있어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링링마저 없어지는 세상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지만, 그녀는 끝까지 강한 척, 굳센 척 한다. 이와 달리, <하울링>의 은영이나 <늑대소년>의 순이는, 전술했듯, 소외되고 고립될망정 자신에 대해 뭔가를 숨기고 은폐하는 캐릭터는 아니다. 그러나 순이의 솔직함이 르스텔이 말하는 이타성을 결여한 배려 부족의 이기심으로 흐르는 반면, 은영은 자신의 일에 대한 몰두와 천성적인 비은폐성으로 질풍과 더 끈끈하게 교감하고 유대를 쌓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은영은 하이데거나 아감벤이 말하는 동물의 개방성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선 인간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산업화, 근대화와 함께 문명으로부터 주변화된 비인간종 동물들은 영화 속에서 길들여짐을 통해 인간 생활권으로 들어왔다가, 한편으로는 인간문화권에서 강요하는 이데올로기와 “아버지의 법”에 의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동물의 특권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개방성으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타자의 타자가 되어 다시 문명 밖의 자연으로 축출되고 만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보면 영화 속 동물들이 타자의 타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의 동물성 자체보다는 그 동물성을 나쁜 의도로 이용하는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다. <하울링>의 질풍은 딸을 약물중독자로 만들어버린 “개(같은 인간)에게는 개로 복수”하려는 명호의 목적에 의해 철저하게 살인견으로 훈련된다. 늑대의 영리함과 맹수성에 더불어 개의 충성심을 갖춘 질풍의 재능은 거의 전적으로 살인기계로서 계발되고 결국은 도구로서 폐기처분되는 것이다. <늑대소년>의 철수도 군사적 목적으로 인간에 의해 탄생한 전쟁병기인 데다가, 그의 거주 지역에 홀연히 등장한 순이 일가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인간화된다. 어떤 면에서 철수는 그를 조련하는 순이의 욕망에 따라 맞춤형 남성으로 디자인된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순이의 “기다려!”라는 명령어를 가슴에 품고 그녀가 지시한 대로 얌전하게, 이제 완전하게 인간화된 모습으로 순이가 할머니가 될 때까지 그녀를 기다려온 철수의 모습은 로맨틱하다고만 여겨지기엔 조금은 충격과 경악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아무리 초인간적인 늑대인간이라 하더라도 생명체임에 분명한데 어떤 경위로 반세기동안 조금도 늙지 않고 소년의 모습 그대로인지 영화가 전혀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순이는 본인의 표현대로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았는데, 왜 철수는 그동안 자신의 모든 동물적 욕망을 억누르고 오히려 사육 동물처럼 산골집의 창고에 스스로 갇혀 살면서 순이만을 기다려 왔는지 상식으로는 설명될 수가 없다. 짧은 시간 동안의 이성애적 사랑만으로 기다림을 설명하기에는 그 모든 것이 철수에게 너무 불공평하기 때문이다. <늑대소년>이 오직 나만을 변치 않고 사랑해 주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로맨틱한 판타지에 어필해 성공한 영화라고는 해도, 철수의 과도한 기다림은 극도로 이기적인 여성이 개과 동물인 늑대의 충성심을 과하게 이용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미스터 고>의 웨이웨이도 아직 어린 소녀라지만 링링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지나치게 일방적이고 이기적이다.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혼절한 웨이웨이를 구해준 것도 링링이고, 웨이웨이가 서커스단의 빚을 갚을 수 있도록 온몸이 부서지도록 한국의 야구단에서 활동하는 것도 링링이다. 그럼에도, 링링이 아파서 꼼짝도 못 하고 누워 있는 동안 웨이웨이는 울며불며 짜증을 내고 고릴라에게 어서 일어나 다시 야구를 하라고 호통을 친다. 그동안 서커스단에서, 야구장에서 링링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강압적인 조련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늙은 링링이 아픈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아무리 인간처럼 간사하지 않은 비인간종 동물이라지만, 서론에서 잠깐 언급한대로, 링링의 웨이웨이에 대한 무조건적인 희생과 봉사는 매저키즘으로 밖에는 설명될 수가 없다.

    해러웨이는 반려종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사랑을 경계한 바 있다. 반려동물, 특히 개의 경우에 사람들은 흔히 “무조건적인 사랑(unconditional love)”을 떠올리지만, 해러웨이는 이를 인간의 나르시시즘에 기초한 신경증으로 파악하며, “사랑할 때의 복잡한 조건들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변명될 수 없는 신경증적 판타지”24)임을 역설한다. 사랑의 방식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건 인간과 비인간종 동물의 사이에서건 달라질 수 없다. 비인간종 동물들이 데카르트가 연역적으로 논증하는 것처럼 “생각은 우리가 느끼는 방식 속에 내포되어 있어서 짐승에게조차도 어떤 유사한 생각을 부여”25)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음으로 해서, 즉 그들이 생각하는 능력이 없다고 여겨짐으로 해서, 영혼이 없는 “기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벤담이 공리주의 적으로 “노예들이 그들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 동물들도 역시 언젠가는 그럴 수 있으리라고 예언”26)한 것처럼 그들도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으로 해서 마땅히 권리를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사랑이 오래 지속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주체 각자가 한 편으로는 상대방을 배려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스스로의 이기심을 억누르며 노력해야 하는 것처럼, 반려종 간에도, 해러웨이가 강조하듯, 인간과 반려동물이 상대를 배려하는 사랑의 상호작용을 일상화할 때에만 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 세 영화들 속에 표출된 일방적 길들임으로 인해 반려종의 자연문화, 혹은 잡종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개는 아니지만 늑대개와 늑대인간, 고릴라의 충성심을 이용하는 세편의 한국 영화 속 등장인물들, 특히 여성의 이기심은 해러웨이가 경계하는 신경증적 판타지와 다르지 않다. 특히 <늑대소년> 의 순이나 <미스터 고>의 웨이웨이처럼 일방적으로 사랑을 받기만 하려는 이기심은 진정 인간의 자기도취적인 신경증적 판타지임에 분명해 보인다. 그들의 이기심이나 신경증이 아니었더라면 <하울링>의 질풍은 살인기계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늑대소년>의 철수도 기계처럼 늙지도, 실연의 고통을 느끼지도 않으며 미련한 기다림의 미덕을 실천하지 않았을 것이고, <미스터 고>의 링링도 기계적으로 야구를 하거나, 중국의 서커스단을 떠나 한국에 오는 수고로움을 감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여성 통치자의 시대에 오히려 문학이나 영화 텍스트 속에서 사회 환경과 현실이 여성에게 더 가혹하게 재현될 뿐만 아니라 여성 자체도 이기적이고 신경증적인 비호감 캐릭터로 그려지는 것일까? 물론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케이트는 자신의 야성적 본성을 억누르고 순종적 외피를 두르면서까지 남편의 위신을 세워줘야 하는 사회적 희생자이지만, 어떤 의도에서 영국의 대문호가 그녀를 창조했건 간에 케이트는 셰익스피어의 고전 텍스트 속에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인류문학사 상 가장 성질 나쁜 여자, 혹은 길들여져야만 하는 왈패의 대명사로 길이길이 기억되어야만 하는 오명을 벗어버리기 힘들 것이다. <하울링>의 은영도 외고집이고 무뚝뚝할 뿐 이기적이거나 신경증적인 캐릭터로 그려지진 않지만, 영화 속에서 그녀를 상대하는 거의 모든 남성들에게는 문제적인 여성 캐릭터로 낙인 찍혀 있다. 여성이 정치적 지도자로 부각되는 시기에 오히려 문화 텍스트 속에서 평범한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훨씬 소외된 캐릭터로 그려지는 것의 배후에 혹시 자신의 노력과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족적, 혹은 봉건적 배경에 의해 정치적 통치권의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는 기득권 계층의 여성에 대한 사회적 경계심도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머니 앤 보울린(Anne Boleyn)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음에도 아버지 헨리 8세에게 남성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뜻하지 않게 여왕이 되었고 평생을 미혼으로 살았던 엘리자베스 1세와, 양친을 총기 암살로 잃고 거의 20여년 동안 집권했던 아버지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을 등에 업고 정치 입문 초반부터 유력한 대선주자로 꼽혀왔던 데다가 아직까지 미혼인 박근혜 대통령 사이엔 상당한 유사점이 엿보인다. 자수성가한 인물이 아니라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역사상 큰 족적을 남긴 아버지의 딸이란 이유로 최고 통치자가 된 데다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여자로서의 평범한 일상을 모르는 두 여성이 집권하는 두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회적 성공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성들은 물론이고 여성들마저도 어쩌면 오히려 더 소외감과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혹시 세 편의 한국영화 속 여주인공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타자로서의 소외된 입지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흔한 애완동물인 개와 고양이가 아니라 야생동물을 길들이고 그들을 희생시킴으로써만 타자성을 극복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어떤 이유에서건 201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세 편의 한국영화 속 비인간종 동물들은 벤담의 고통을 느끼는 존재라기보다 데카르트의 동물기계에 가깝게 묘사되어 그들의 존재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목적을 위한 수단의 역할만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연문화나 잡식 공동체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수직적 관계라 하더라도 인간과 반려동물 간에 일방적이지 않은 상호간의 길들여짐과 존중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영화 속 길들임은 동물의 희생만을 요구하는 일방적인 흐름으로 전개된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게만 요구되던 순종과 희생의 미덕을 비인간종 동물이 대신 실천함에 다르지 않다. 앞서 언급했듯, 여성과 비인간종 동물이 타자의 위치를 교체한 후 결국 동물은 타자의 타자로서 인간 문화권에서 이용만 당하다가 자연으로 추방되거나 죽음을 통해 자연 속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세 편의 한국영화 속에서 자연문화는 결국 자연과 문화로 다시 분리, 해체되는 것이다. 버거는 인공기계의 등장으로 데카르트적인 노동기계로 이용되던 비인간종 동물이 인간 생활권에서 사라지게 되었다고 보았지만, 21세기의 한국 영화 속 동물들은 오히려 데카르트적인 기계로 환원돼 타자의 타자가 되고 그들이 반쯤 건설한 자연문화로부터 추방된다. 인간이, 특히 여성이 아감벤이나 르스텔이 말하는 동물성, 즉 개방성이나 이타성을 회복하기 전까지는 애완동물이건 야생동물이건 간에 비인간종 동물과 함께 반려종 관계를 형성하고 이상적인 자연문화, 혹은 잡종 공동체를 이룩하기는 요원해 보인다.

    1)Donna Haraway, The Companion Species Manifesto: Dogs, People, and Significant Otherness (Chicago: Prickly Paradime Press, 2003), passim.  2)Teresa de Lauretis, “Desire in Narrative” in Alice Doesn’t: Feminism, Semiotics, Cinema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4), 103-149.  3)다음을 참조할 것. Raymond Bellour, The Analysis of Film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2000), 69-76. 콘스탄스 펜리(Constance Penley) 교수가 편집한 이 책은 히치콕 (Alfred Hitchcock) 영화에 대한 벨루의 글들을 주로 담고 있는데, 3장인 “The Obvious and the Code (on The Big Sleep)”에서 벨루는 예외적으로 하워드 혹스 (Howard Hawks) 감독의 <빅 슬립 (The Big Sleep, 1946)>에 대한 분석을 통해 반복과 대칭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4)Ibid., 262-278. 책의 8장인 “To Alternate/To Narrate(on The Lonedale Operator)”도 히치콕이 아닌 그리피스(D. W. Griffith)의 <론데일 통신사(The Lonedale Operator)>를 분석하며 교체를 설명하고 있다.  5)John Berger, “Why Look at Animals?” in About Looking (New York: Vintage International, 1991), 3-28.  6)Suzanne Kappler, “Why Look at Women?” in The Pornography of Representation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6), 63-81. 필자는 「포르노그래피, 바디장르, 그리고 페미니즘: 1980년대 한국에로영화에 대한 페미니즘 논의를 중심으로」(『문화과학』 75호, 2013년 9월)라는 글에서 캐플러를 포함한 젠더 본질주의 페미니스트들이 포르노그래피 영화를 주 타겟으로 삼아 시각적 주체인 남성과 시각적 대상인 여성의 단순한 이분법을 통해 여성 육체의 시각화를 맹비난하는 논리를 문제화한 바 있다.  7)도나 해러웨이는 The Companion Species Manifesto에서 “반려동물 (companion animal)”이라는 표현이 미국에서 197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했다고 언급한다. 애완동물이 미국처럼 보편화되기 시작한 최근에서야 한국 사회에서도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이 상용화되기 시작하기는 했지만, 전통적으로 가족의 일부로서 한국의 가정에서 키워지던 소나 개, 돼지, 닭 등의 동물들은 단순한 사육동물이라기보다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에 더 적합하다고 여겨지므로 여기에서는 반려동물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8)Haraway, Companion Species Manifesto, passim.  9)흥미롭게도 영화 속에서 캐터리나는 케이트로 약칭되는 것을 계속 거부하지만 희곡 속 여주인공은 통칭 케이트로 알려져 있다.  10)Jean-Jacques Rousseau and Johann Gottfried Herder, On the Origin of Languag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6), 175.  11)Louis Althusser, Essays on Ideology (New York: Verso, 1970), 11.  12)Louis Althusser, “Ideology and Ideological State Apparatus,” Lenin and Philosophy and Other Essays (London: New Left Books, 1969), 127-188.  13)Jacques Lacan, “The Mirror Stage as Formative of the Function of the/as Revealed in Psychoanalytic Experience,” in Ècrits: A Selection (New York: Routledge, 2001), 1-6.  14)Haraway, Companion Species Manifesto, 38. 필자 번역.  15)Ibid., 51.  16)Ibid., 52.  17)Ibid.  18)도미니크 르스텔, 『동물성: 인간의 위상에 관하여』, 동문선, 2001, 74.  19)같은 책, 93.  20)Martin Heidegger, The Fundamental Concepts of Metaphysics: World, Finitude, Solitude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5), 263. 다음의 책에서 재인용: Giorgio Agamben, The Open: Man and Animal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4), 52.  21)Agamben, The Open, 55.  22)Ibid., 57.  23)르스텔, 『동물성』, 78.  24)Haraway, Companion Species Manifesto, 35. 필자번역.  25)René Descartes, Discours de la Méthode (Paris: Flammarion, 1966), 78. 르스텔, 『동물성』, 24, 재인용.  26)르스텔, 『동물성』, 42.

    마치며

    남성중심 사회에서 사회적 타자인 여성은 남성이 원하는 대로 순종의 미덕에 걸맞게 길들여질 것을 요구받는다. 순종적인 여성이라면 스스로를 타자로 인식하지 않고 살 수 있지만, <하울링>의 은영처럼 그렇지 않은 여성의 경우 극심한 소외와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케이트는 남편이 원하는 대로 길들여진 것인지 길들여진 척 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길들여짐을 가장함으로써 순종의 이데올로기에 복속돼 스스로의 타자성을 버리고 남성과 타협하는 쪽을 택하는 것 같다. 인간으로서의 타자는 길들여짐을 가장해 “아버지의 이름”속에 살면서 인간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축출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 타자의 타자로서 편입된 야생동물은 그 동물성으로 인해 길들여지면서도 길들여지지 않고, 길들여짐을 가장하지 못 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문명으로부터 추방되거나 주변화될 수 있는 위험요인이 있다. 하지만 비인간종 동물들이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인간처럼 연기를 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인간보다 더 큰 가능성을 안고 있다. 바로 아감벤이 제시하는 열린 자세로 세상과 조응할 수 있는 그들만의 개방성이 그것이다.

    영화 속에서 비범한 등장인물들의 평범한 사회적 조화를 자주 다루는 프랑스 감독 자크 오디아르(Jacuqes Audiard)의 최신작 <러스트 앤 본(De Rouille et d'Os, aka Rust & Bone (2013)>에서 범고래 조련사인 여주인공은 그토록 사랑하던 바다 동물의 갑작스런 발작으로 인해 두 다리를 잃게 된다. 직업마저 잃은 그녀가 변화된 신체와 환경에 서서히 적응하도록 육체적, 정신적으로 도움을 주는 이는 그녀가 사고 전에 우연히 나이트 클럽에서 만났던 권투선수를 꿈꾸는 비정규직 남성 육체노동자이다. 처음에는 그냥 쿨한 친구 관계로 시작해서 서로의 결핍과 타자성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고 서로 보완해 주던 두 남녀는 서서히 서로의 동반자, 반려자가 되어간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직업 권투 선수가 된 남자친구의 매니저를 자청하게 된 여주인공이 인공 의족을 부착한 채 권투 도박꾼들로부터 돈을 수거하러 다니는 장면인데, 남자 주인공은 그런 그녀를 장난처럼 “로보캅”이라고 부른다. 도나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을 출판하기 20여 년 전인 1980년대 중반 레이건 시대에 「사이보그 선언(A Cyborg Manifesto)」을 발표해 서구 사상이 전통적으로 분리해 온 자연과 문화는 물론 유기체와 기계의 이분법을 전복시키고자 한 바 있다.27) 네덜란드 출신 감독 폴 버호벤(Paul Verhoeven)이 80년대 헐리우드의 대표적 흥행작 중의 한 편인 <로보캅 (Robocop, 1987)>을 연출해 인간이며 기계인 로봇 경찰을 선보인 것은 해러웨이가 「사이보그 선언」을 발표한 지 2년후이다. 물론,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기계라든가 사이보그 캐릭터는 이미 불멸의 SF 명작인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의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A Space Odyssey, 1968)>와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1982)> 에 이미 등장한 바 있다.

    그러나 해러웨이의 글 이후에 등장한 영화 속 사이보그들은 이전 영화들보다 더 변증법적인 캐릭터들이다. 로보캅이 인간의 감수성과 기계의 초인간적인 전투 능력을 동시에 지닌 남성 사이보그라면, 오디아르 영화의 여주인공은 인간의 정신과 유기체적 상체에 기계의 하체를 지닌, 거동이 다소 제한되어 있지만 남성 투기꾼들과 말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여성 사이보그라고 볼 수 있다. 비인간종 동물을 길들이던 여성이 길들임에 실패해 뼈와 살로 된 두 다리를 잃고 금속과 인공 합성물로 이루어진 인조 다리에 적응해 가는 영화 속 과정은 인간과 기계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종) 동물에 대해서도 재고해 볼 여지를 준다. <러스트 앤 본>과 달리, 본론에서 분석했던 세 편의 한국영화 속에서 길들임의 실패와 폐해는(여성) 조련자보다는 고스란히 동물들에게만 전가된다. 서로가 사회속 타자인 여성과 동물들은 한 때 자연문화 혹은 잡종 공동체를 형성하며 서로의 타자성을 극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관계성 속에서 일방적인 희생의 역할은 이제 여성을 떠나 동물들에게 전가된다. 그렇다면, 여성이 자신의 사회적 타자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른 타자를 희생양 삼아야만 하는 것일까?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등장한 이 시기에, 한국 남성 영화인들은 <하울링>의 은영을 제외한 영화 속 여성들을 너무 못 되고 성질 나쁜 캐릭터로만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한국인들의 비인간종 동물들에 대한 인식이 너무 인간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자기도취에 취한 신경증적인 것은 아닐까? <러스트 앤 본>의 여주인공처럼 야생동물을 조련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타자화된 자신의 신체적, 사회적 취약점을 다른 사회적 타자와 함께 공조해서 극복할 수는 없을까? 여성과 남성, 기계, (비인간종) 동물이 함께 조화롭게 자연문화를 이루고 사는 것은 소수의 동물 애호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진정 불가능한 것일까?

    개인적으로 2012년 상반기의 흥행작인 <내 아내의 모든 것>이 제피렐리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뿐만 아니라 2012년 하반기에 개봉된 <늑대소년>에 대치되는 영화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까칠하고 제멋대로인 아내에게 질리고 겁먹은 남편이 이혼을 유도하기 위해 마성의 바람둥이를 고용해 아내를 유혹하도록 하려다가 오히려 자신이 다시 아내에게 매혹당하게 된다는 <내 아내의 모든 것>은 이성을, 혹은 애정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영화의 결말은 바람직하지만, 영화 전반에 깔려있는 남편의 태도를 보면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순종성의 미덕이 아직도 유효함이 재확인된다. 전통적인 이미지의 아내를 꿈꾸는 남편보다 오히려 수많은 여성을 만난 적이 있는 바람둥이가 영화속에서 아내에게 더 열린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바로 그 열린 자세가 아감벤이 하이데거를 인용해서 말하는 “내버려 둠(letting be)”의 미학을 통해 가능한 것은 아닐까? 주체가 그 대상이 이성의 인간이건, 비인간종 동물이건, 기계건 있는 그대로의 존재 자체로서 대상에 매혹(captivation)되는 것은 진정 대상에 대한 몰입(absorption)을 통한 개방성(openeness)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주체와 대상이 상호길들임을 통해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기반한 상호주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몰입에 의한 개방성을 체득해야 할 것이며, 그것은 아감벤과 르스텔이 말하는 동물성의 회복이 우선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27)다음을 참조할 것. Donna J, Haraway, “A Cyborg Manifesto: Science, Technology, and Socialist-Feminism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in Simians, Cyborgs, and Women: The Reinvention of Nature (New York: Routledge, 1991), 149-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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