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inematic Space of Dissemi/Nation

탈/국가의 영화적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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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is essay compares North Korean cinema’s construction of the North Korean nation-state with the representation of North Korea in other transnational cinemas such as South Korean refugee and Korean Chinese (Chosun-jok) films. North Korea is an ethnocentric country whose slogan is “Our Nation, the First (Uri Minjok Jeiljuyui)” and that refuses transnational capitalism as well as post-communism, unlike Russia or China. However those who have been repressed by the idea of ethnicity, the most important principle for the ethnocentric nation, return from outside of North Korea to interrupt ethnic sentiment. They appear here and there in various films such as Korean Chinese cinema, North Korean refugee cinema, and Korean Japanese cinema. Here, what is important is the gaze of the outsider. This parallax view offers semantic value to the cinematic imagery that circulates around the nation called North Korea. This viewpoint neglected both in North and South Korea offers one possible approach for the comparative study of North and South Korean cinema. For this purpose, we need to explore the specificities of North Korean films, which distinguish them as ‘North Korean’cinema. We need to examine the national ideology pervading the North Korean film arts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ir ideology and aesthetics. Such a visual topography of nation-state in North Korean cinema is the substructure for post and anti-national cinemas of minorities derived from and scattered by that topography itself. Following this discussion, I will develop the analogy between the inside and outside of the cinematic frame and the inside and outside of North Korea through two key film examples; The Journal of Moosan, The Dooman River. The movement into the nation-state and deviation out of it will be discussed in terms of the rhetoric of ‘on screen’ and ‘off screen.’


  • KEYWORD

    North Korean Cinema , Carde/Cache , Nation and Fate , The Journal of Moosan , The Dooman River , Film Aesthetics , Transnational Cinema , East-Asian Cinema

  • 1. 서론

    한국에서 행해졌던 동아시아 문화연구에는 하나의 사라진 장소가존재해 왔다. 지도에는 존재하지만 담론을 생산하는 어느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 그 곳이 있었다. 바로 북한이 그 곳이다. 동아시아 문화연구는 북한을 배제한 채 중국, 일본, 한국의 언어, 종족, 역사의 공통지대에 대해 논의해 왔다. 북한은 이들 국가 간의 한 가운데에 심연처럼 놓여 있지만 동아시아 블록에서는 제외되어 있었다. 북한은 중국과 국제 사회주의의 역사를 함께 했으며-또한 김일성이 항일운동을시작한 곳은 중국이었다-, 일본과는 귀국사업, 조총련, 항일의 역사 등 복잡한 역사가 얽혀 있으며, 한국과는 언어, 종족, 자연을 공유하고 있지만, 동아시아 연구에서는 일정 정도 배제된 장소로 남아 있었다. 지리적으로 세 국가와 함께 동아시아를 형성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북한을 세 국가와 함께 논하지 않고 있으며 이러한 단합된 침묵은 북한을 고립시키거나 독립시켜 북한의 과도한 특수성만을 강조해 왔다. 북한과 남한이 함께 하고 있는 언어와 종족적 동일성은 중국-일본-남한을 잇는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동일성에 선점을 당하면서 학문적 불균등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자본주의의 세계화에 걸맞는(?) 이러한 편향적 경향은 또 다른 배제의 장치를 가동시키고 이러한 배제의 장치들은 자본만큼 유동적인 새로운 주체들을 학문적으로 포착하지 못한 채 담론적 기능을 상실할 위기에 몰려 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최근에는 다양한 접근을 통해 동아시아를 관통하거나 남한과 북한의 영화를 비교 연구하려는 흐름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중국, 북한, 남한에 걸쳐 있는 조선족,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 온 탈북자, 그리고 귀국사업 등으로 일본과 북한 사이에 놓여있는 재일동포 등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주체들이 집단적이거나 개별적인 주체로 현실에서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출현했을 때 이를 포착하려는 영화학의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는 것이다.1) 이들 복잡하고도 불안정한 삶의 주체들은 일국적인 혹은 북한을 배제한 채 바라볼 수없는 학문의 사각지대에 놓여있고 한국의 영화학자들은 이 사각 지대에서 비가시적이거나 사라져 버리는 행위자들을 포착하여, 그/그녀들에게 일종의 담론적 권력의 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물론 동아시아 문화연구가 개혁개방을 부르짖으면서 북한과는 또 다른 ‘우리식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중국이 지닌 시장 잠재력으로 인해 제 연구의 중심이 되는 경향은 여전히 지배적이다. 그렇기에 더욱 남북한 비교연구, 젠더와 동아시아 내셔널 시네마의 관계 연구, 탈북자등 새롭게 등장한 역사적 행위자에 대한 영화적 재현 연구 등 다성적인 목소리의 개입이 지금보다 더 요구된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을 동아시아가 아닌 외딴 섬처럼 고립시켜 연구하는 경향은 현재의 동아시아 연구와는 또 다른 판본, 즉 북한학이라는 분과를 낳았다. 북한학은 남북통일을 대비하기 위한 동질성 회복을 목적으로 하며 북한 내부의 관점에서 북한을 바라보는‘내재적 접근’을 강조한다. 내재적 접근은 반공의 시각이 아닌 북한 고유의 특수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학문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시도이지만 동시에 북한을 바깥으로 내어 놓고 비교의 조건을 만드는 시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내부로만 향하는 폐쇄적인 접근을 야기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고유성, 특수성, 독자성, 일개성만이 강조되어 보편성과 일반성과의 관계를 상실, 고립되어 버리고 만다. 북한에 대한 연구 지형들이 북한은 대내외적으로 고립시키고 있는 정치적 판본을 닮아있는 모습은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동아시아 문화연구나 북한학 연구는 제 각기 분과되어 발전하면서 일종의 학문적 사각지대를 낳았다. 사각지대는 국경과 국경 사이에서 발생하기도 하며, 국가 내부의 한복판에서 국가를 외지화하는 데에서 발생하기도 한다. 이 사각지대는 기존의 분과학문 간의 학제적 연구, 북한과 남한 공통의 문화연구나 남북한 역사에서의 타자에 대한 학문적 접근으로 보완되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현재 북한에 대한 접근은 동아시아 문화연구라는 외적인 지형과 북한학 연구라는 북한 내적인 지형을 동시에 교정하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영화라는 매체는 국경을 넘나드는 데 여타의 예술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마찬가지로 영화학은 타 학문이 배타적으로 쌓아 놓은 동아시아 연구와 북한학을 보다 상호작용하고 융합시킬 수 있는 간학제적 학문이자 겹학문의 자리에 있다. 따라서 앞서 논한 영화학의 간학제적 시도는 지금보다 더 다양하게 시도되어야 하며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본 논문은 약 2000년대 중반 경부터 시도해 온 영화학 내부의 일정한 비교 연구적 선행 연구를 계승하여 중국, 북한, 남한의 영화를 비교한다. 다만 본 논문은 북한, 중국, 남한 각각이 중첩되고 교차되는 비가시성/가시성의 역학이라는 형식 미학에 집중하여 그 형식이 내재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이 지닌 제 특수성을 소각하지 않고 남한과의 임의선(휴전선)을 넘어 여타의 주변 동아시아 국가들과 북한을 매개하고 절합할 수 있는 문화적 준거점의 자리를 마련하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북한이라는‘네이션’을 수립하기 위해 구성된 장치, 즉 내셔널 시네마로서의 북한영화와 북한 외부에서 구성되고 있는 디세미네이션 dissemi-nation 혹은 탈네이션적 흐름을 등가로 놓고 비교해 보는 작업은 문화적 준거점을 마련하기 위한 시도 중 하나일 것이다. 즉 현재의 트랜스내셔널 시대에 북한의 내부와 외부에서 발견되고 있는 국가의 이미지-기호를 통해 민족 국가에 대한 심상의 지도를 그려보는 것이다. 북한의 안과 밖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북한의 탈/내셔널 시네마의 이중운동에 대한 남한의 시각적 관찰은 북한을 고립이 아닌 중심으로 놓고 트랜스내셔널 시대의 탈/내셔널적 지도를 그려보는 것이다. 이는 임의로 그려진 휴전선을 고착화하는 걸 벗어나 남북한이 서로 교통하고 횡단, 통일의 지도Carte 를 그리기 위한 시도일 것이다. 네이션과 탈네이션의 영화의 동학은 북한을 둘러싸고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북한영화를 논하지 않고서는 이 동학의 전체 지형을 절대 파악할 수 없다. 동시에 북한과 남한의 내셔널 시네마 혹은 민족서사나 공통 기억에 호소하는 영화와는 대립해 있는 탈 혹은 반내셔널 시네마의 특성을 보여주는 영화들은 북한과 남한 모두를 비판하고 있다. 이들 영화는 남한과 북한의 국가 내부의 한복판에 놓여있는 공백과 국가 내부로 동화될 수 없는 절대적인타자의 차이를 드러낸다. 그러면서 남한과 북한이라는 대립 구조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흡수되는 게 아니라 남한과 북한을 함께 명명할 수 있는, 새로운 장소 정체성을 띤 임의의 장소를 지향한다.

    본 논문은 북한영화에서의 ‘북한’이라는 민족국가의 영화적 구성과 남한을 포함해서 북한에 대한 영화를 탈민족적 영화로 놓고 비교한다. 북한은 트랜스내셔널 자본주의 시대에 ‘트랜스’되지 않는 ‘우리민족제일주의’ 국가이다. 그러나 우리민족제일주의국가가 제일로 삼은 민족이 억압한 것은 북한 외부에서 민족의 정서를 침해하면서 귀환한다. 북한 내부에서의 억압된 것들은 조선족 영화나 탈북자 영화 아니면 재일동포 영화라는 이름으로 출현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북한을하나의 원인 대상으로 놓고 이들 영화를 바라보는 ‘외부자’의 시선이다. ‘외부자’의 시선은 북한의 안과 밖을 동시에 바라보면서 그 분리된 국경을 횡단하는 비판적 관점을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북한이라는 네이션을 둘러싸고 순환하는 영화 이미지에 의미론적 가치를 부여한다. 이는 기존의 제작국가, 감독의 국적, 주제에 의한 분류 등에 따른 표준적인 내셔널 시네마적 접근과는 다르다. 또한 이런 접근은 북한영화와 남한영화를 분리시키고 대립시키는 게 아니라 북한이 영화 스크린에서 쫓아내어 제 민족국가 공동체 역사에서 배제한 타자들을 소환해서 트랜스내셔널 시대에 북한의 장소를 살펴보는 것이다. 북한 내부와 남한이라는 외부에서도 부정되는 이 관점은 남북한영화의 비교연구를 위한 한 방법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북한영화를 ‘북한’영화라고 다르게 구분할 수 있는 북한영화의 특성을 살펴봐야 한다. 북한영화의 형식에 스며들어가 있는 국가 이데올로기 혹은 영화형식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북한영화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민족국가의 심상지리는 그것이 파생하고 산포시킨 소수자의 탈/반민족 영화의 토대가 될 것이다. 그런 다음 몇 편의 영화를 통해 현재 북한의 내부와 외부에서 각각 등장하고 있는 국가의 표상을 비교해 볼 것이다. 민족국가 내부로의 운동과 외부로의 이탈은 영화영사막의 내부와 외부라는 은유 아래 서술될 것이다.

    1)이러한 학문적 흐름은 다음과 같다. 남한과 북한의 영화를 역사적인 시기별로 비교 연구한 정태수 책임편집, 송낙원, 오영숙, 장우진, 정태수, 조지훈, 황보성진 지음, 『남북한영화사 비교연구(1945~2006)』, 국학자료원, 2007가 있고, 오영숙과 강성률은 한국영화에서 급증한 탈북자에 대한 영화적 담론을 형성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오영숙, 「탈북의영화적 표상과 공간 상상」 『영화연구』 51호, 한국영화학회, 2012, 185~212쪽, 강성률,「영화가 탈북자를 다루는 시선들」, 『현대영화연구』 12호, 2011, 5~31쪽. 한편 주진숙ㆍ홍소인, 「장률감독 영화에서의 경계, 마이너리티 그리고 여성」, 『영화연구』 42호, 2009,597~620쪽과 이명자, 「해방기 남북한 영화에 나타난 근대성과 여성담론 비교연구」, 『현대영화연구』 11호, 2011, 195~222쪽은 여성을 준거점으로 하여 국가간의 경계와 젠더의 문제를 비교했으며, 김선아, On Three Topographies of National/Transnational Cinema, 『현대영화연구』 10호, 2010, 125~154쪽는 트랜스내셔널 시네마의 지형에서 장률 감독의 영화를 놓고 있다.』

    2. 북한이라는 ‘네이션’

    북한에서 영화는 여타의 사회주의 국가처럼 당에서 발행하는 신문의 사설이어야 하며 인민들을 향한 교양 사업의 지위를 갖고 있다. 유일당체제에서 영화는 국가에 종속되어 있으며 영화라는 장치는 인민(관객)이 본받을 수 있는 이상적 자아와 같은 공산주의적 전형을 제시하기 위한 인간학에 복무해야 한다.2) 북한영화가 놓인 이러한 사회문화적 조건은 분명 남한을 비롯한 여타의 동아시아와 다르며 자본주의로 세계화를 이룬 동시대에 외부 세계로 북한을 남겨두게 만든다. 남한을 포함한 여타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북한영화는 자본과 장르가선점하는 보편적인 시네마에서 벗어나 있으며 동시에 국경 외부의 시선이 영화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내셔널 시네마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북한 영화의 주관객은 북한 인민들이며, 수출을 목적으로 하는영화는 극히 드물고 국고지원의 제작 시스템과 국가 검열에 의해 영화가 제작되고 있으며, 유일당 국가의 체제 옹호와 선전을 위해 복무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해외로 수출되어 극장에 정식으로 개봉된 북한 영화는 <꽃파는 처녀>(1973), <도라지꽃>(1986), <한 녀학생의 일기>(2006) 등으로 손에 꼽을 정도이다.

    북한영화에서 개인의 사적 발화는 언제나 사회의 공적 발화이며 따라서 개인은 국가의 알레고리로 작동한다는 제임슨 식의 제삼세계 문학의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3) 이러한 공적인 기념비적 역사만을 현재에 간직한 알레고리적 인간은 북한이 제시하는 공산주의적 인간의 전형이다. 1992년부터 현재까지 제작되고 있는 다부작 예술영화<민족과 운명>은 개인과 국가의 관계를 제목에서부터 연결하고 있다. 영화는 민족의 운명은 곧 개인의 운명이라는‘종자’를 다루고 있다. 홍영자나 차홍기 등의 가공된 인물이 민족의 운명과 구분이 불가능한 운명을 지닌 개인 주인공들로 등장한다. 영화에서 반복되는 형식적 특징으로는 플래시 백 기법과 줌렌즈 기법을 들 수 있다. 플래시 백 기법은 한국전쟁이나 그 이후 국가 재건에 힘을 쓴 천리마 세대의 삶을 회상하는 데에 자주 사용하는 관습적 기법이기도 하다. 현재를 고양시키고 각성시킬 일종의 역할 모델로서의 주체적 인간형을 제시하기 위해 과거를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극적 시간이며, 이러한 과거로의 회귀를 위해 플래시 백 기법을 관습적으로 동원하는 것이다. 이후의 영화들과의 비교의 준거를 마련하기 위해 더 중요한 건 플래시 백 기법보다는 플래시 백 기법만큼 자주 사용되는 줌 렌즈 기법에 있다. 줌렌즈는 부분에서 전체로의 운동성을 보여주며, 민족의 운명을 짊어진 개인은 다수의‘민족 집단적 개인’으로 확장된다. 이럴 경우 개인은 특정한 개별성을 상실하고 집단적인 다수에 익명으로 사라지게 된다. 또한 줌 렌즈의 특이한 점은 줌 렌즈가 인간의 눈과 신체를 모방한 게 아니라 순수 기계의 눈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를 사용할 경우 그 인위적인 움직임이 금방 눈에 띠게 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영화 카메라가 대상을 포착하는 기준은 인간의 신체를 기준으로 해왔다. 이는 이미 영화 카메라라는 기계의 눈이 인간의 관점을 모방하고 있다는 걸 알려준다. 특히 줌 렌즈 효과는 카메라의 순수한 물리적 운동과 인간의 눈을 닮은 쇼트에 의해서가 아니라 운동이 정지한 상태에서 렌즈라는 영화기계의 눈의 인공적인 조절에 의해 야기된 효과여서 기계의 눈의 조작을 더욱 가시화시킨다. 결국 인간의 눈을 모방한 인간/카메라의 눈과 카메라 기계의 눈 그 자체가 줌 효과에서 분열되는 것이다. 또한 <민족과 운명>시리즈는 일반적으로 익스트림 롱 쇼트에서 롱 쇼트로 쇼트의 크기를 점점 더 축소해서 대상에 접근하는 데꾸빠쥬를 선호하지 않는다. 이러한 방식을 전체에서 부분으로의 운동이라고 부른다면, <민족과 운명>은 쇼트 안에 전시되어 있는 특정한 대상에서 시작해서 줌 렌즈를 사용해서 전체로 확대되는 쇼트 구성방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부분에서의 전체로의 이동은 특정한 사물을 분리해서 보여주다가 이를 줌렌즈라는 인공적인 경로를 통해 환경이라는 전체 안의 일부분으로 위치해 놓는다. 그러니까 환경과 단절된 부분 대상을 먼저 제시하고 이를 전체 환경과 연결하고 그 안에 위치하기 위해서는 줌렌즈의 인위적인 기계의 개입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영화는 인간학이라는 북한영화 고유의 미학과는 배리된 형식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줌 효과로 간섭한 기계의 눈이 전체와 부분, 환경과 존재 간의 질적인 비약을 야기하며 동시에 이를 봉합하기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매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역설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바로 개인을 민족으로, 부분에서 전체로, 대상을 환경 안에, 생활 세계를 역사의 합법칙성이 지배하는 주체적 사실주의 세계로 포함시키는 것 자체가 (줌 효과처럼)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비약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족과 운명> 시리즈는 플래시백을 통한 시간, 줌 렌즈를 통한 매개 효과에서 나아가 화면 안과 밖 화면 내부와 외부 간의 단절을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영화의 화면은 쇼트와 쇼트의 연결만이 아니라 가시적인 쇼트(의 안)와 비가시적인 쇼트의 바깥으로 구분할 수 있다.<민족과 운명>의 화면은 화면 내부로의 끊임없는 수렴과 응집을 보여준다[그림 1 참조]. 북한에서 영화의 조직구성을 크게 세 가지 조직, 인간관계 조직, 사건조직, 감정 조직으로 나누며, 이 중에서 감정 조직을 제 일의 상위 조직으로, 이를 중심으로 극이 구성되어야 하는 걸 미학 원칙으로 삼고 있다는 걸 안다면, 화면 내부인 쇼트 그 자체로의 이러한 수렴과 응집이 바로 관객의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민족과 운명>시리즈는 관객의 심장에 도달하거나 그 심장을 다시 뜨겁게 하기 위해-북한에서 공산주의자란 뜨거운 심장을 가진 자로 정의된다- 격렬한 음악, 천둥과 번개 등 거부할 수 없는 자연기후, 운명으로 결합된 민족과 개인이라는 주제 등을 응집시키는 강도 높은 화면을 제시한다. 시리즈에 통일되어 거듭 등장하는 크레딧 시퀀스는 이러한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한 응집력 높은 화면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체와 단절된 부분대상에서 쇼트가 제 시각의 기원점을 갖는 것 또한 화면의 강도를 높이기 위한 방식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앙드레 바쟁 Andre Bazin 은 회화와 영화를 구분하면서 틀/프레임 Carde 과 은신처 Cache를 구분한 바 있다.4) 내부로의 폐쇄적인 운동을 특징으로 한 북한영화의 쇼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쟁의 화면바깥 개념을 우회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보인다. 바쟁이 보기에 전통적인 회화의 경우 프레임 즉 틀 Carde 은 그림의 내부에 명상의 공간을 개시해주는 일종의 구심적 작용을 갖는다. 한편 영화의 영사막은 실재의 일부만 드러내어 다른 것을 숨기는 은신처 Cache 이자 마스크이며 차폐막의 기능을 한다. 따라서 틀이 공간을 내부로 집중시키는 반면영사막은 기본적으로 바깥을 향하는 원심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쇼트는 늘 쇼트 외부를 절단한 현실의 일부, 부분, 단편이다. 쇼트가 현실을 향하기 위해서는 쇼트의 외부, 관객이 보지 못하는 곳, 부재하는 것, 비가시적인 쇼트의 바깥 그리하여 상상되어야 하고 유추되어야 하는 정신의 작동을 요구하는 외부와의 관계를 쇼트가 구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화면 내부와 외부가 단절되어 모든 것이 화면 내부에 응집되어 있다면 관객은 더 이상 화면 바깥의 비가시적인 것을 상상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민족과 운명>의 쇼트 구성의 특징인 쇼트 내부로의 응집은 전통적인 회화의 틀을 유지하는 것이며 쇼트 바깥의 현실과 단절되거나 현실을 숨기는 은신처이자 마스크로 기능한다고 보인다. <민족과 운명>은 ‘쿨레쇼프 효과, 즉 영화감독에게 있어서나 관객에게 현실에 대한 믿음의 가장 저속한 형태, 가장 손쉽게 처리된 현실’5)을 제시한다. 보니체 Pascal Bonitzer는 영화의 영사막이 갖고 있는 현실의 은신처로서의 기능을 바쟁의 리얼리즘론을 끌고 와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 바 있다.

    화면 바깥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절단되어 있는 환영의 세계에서는 국가의 기호가 넘쳐 흐른다. <민족과 운명: 노동계급편>에서는‘내 나라 제일’이라는 액자가 걸려있는 거실, ‘3대혁명만세’라는 문구를 새긴 열차의 앞머리,‘하나는 전체를 향하여, 전체는 하나를 향하여’, ‘당과수령께 충성과 효성을 다하자’, ‘모두 다 풀베기 전투로!’ 등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온갖 구호가 붉은 글씨로 새겨져 있는 공장, 집단 농장,마을의 입구, 선전화가 점령하고 있는 도로와 거리 등 국가의 선전기호들이 관객들에게 ‘읽기’를 강제하고 있다. 화면의 중심인 서사 이미지의 배경에 자주 자리하고 있는 일종의 미장센으로서의 과잉 기표들은 <민족과 운명>시리즈에서 나아가 북한영화라는 내셔널 시네마의서명과 같다. 여기에서 영화의 스크린은 국가의 기표가 과잉된 세계와 현실을 절단하는 일종의 차폐막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은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의 재일동포들을 ‘귀국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북송을 시행한 바 있다. 이 시기에 북으로 넘어간 재일동포들을 다룬 북한영화인 <봄날의 눈석이>, <민족과 운명 : 귀화한일본일 여성편>이나 남한출신의 군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인 <민족과 운명: 차홍기편> 등은 재일동포와 남한출신 인물 등 외부의 정체성을 가진 인물들을 국가 권력의 과잉기호라는 내셔널 시네마의 미장센으로 반복해서 흡수되고 통합된다. 그러면서 다시 동질적인 민족 공동체의 닫힌 환영이 구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내셔널 시네마적 형식은 진공에서 나온 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내용의 형식화라고 할 수 있다. 80년대 말부터 북한의 유일 지배 담론은 우리민족제일주의론, 사회정치생명체론, 사회주의대가정론, 우리식 사회주의 담론 등이었다. 이 담론에서 진정한 공산주의자는 수령-당-인민이 아버지-어머니-자식으로 대가정을 이루면서 조국을 배신하지 않는 의리 있는 자를 말한다. 조국의 의리를 지키는 자는 향토애와 조국애를 등가로 놓는다. 따라서 쇼트의 반복되는 내부로의 구심력은 곧 외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산주의의 몰락과 위기를 봉쇄하기 위한 일종의 차폐막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위의 담론들은 우리 모두는 가난하고 우리 모두는 제국주의의 희생자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억압받는 우리들은 ‘민족’이라는 동질적인 집합으로 뭉쳐야 한다는 걸 강조한다. 여기에서 민족은 가라타니 고진이 말한 ‘민족’ 개념과 유사하다. 고진은 네이션이 혈연과 부족, 또는 언어공동체 등을 넘어선 것이며, 실제의 친족이나 부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것을 위해 죽는 것이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한다는 기분을 갖게 했을 때’비로소 형성된 것이라고 보았다.7)

    결론적으로 <민족과 운명>시리즈는 민족이라는‘조국patrie’을 향한 개인의 소속감과 귀속감을 유발해서 이를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인간의 감정을 견인하기 위한 매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민족과 운명>은 김정일이 아버지의 실제 죽음에 대비하여 마련한 80년대 말 지배담론들의 영화적 형상화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가 민족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애국자를 반복해서 영화 이미지로 생산해내지만 민족을 위해 죽을 수 없는 자, 즉 민족의 희생제물이 되기를 거부하고 민족을 배신한 자들이 존재한다. 영화 영사막 안에 갇혀있는 공산주의 유토피아의 세계를 벗어난 배신자들은 <민족과 운명>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을뿐더러 가시화되더라도 국가의 과잉 기표들이 장식하고 있는 스크린 내부로 응집되고 동질화된 에너지에 휩쓸려 사라진다. 90년대 북한의 지배담론을 응축해 놓은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민족을 위해 기꺼이 죽지 못한 개인은 북한과의 접경 국가들에서 다시 유령처럼 출몰한다.

    2)북한의 영화미학에 관해서는 김정일이 1973년 『영화예술론』을 출간한 이후 평양 문학예술출판사가 1998년 『사회주의 영화예술건설』(리현순 지음)을 필두로 간행하고 있는 『주체영화리론총서』(련속편)가 있다. 한국에서는 대표적으로 이명자, 정태수, 서정남 등의 북한영화연구를 들 수 있다. 본 논문은 이후에 등장하는 <무산일기>와 <두만강>과 북한영화 간의 대화의 지평을 만들기 위해 북한영화 미학에 대한 통사론적인 접근이아니라, 계열체적인 접근을 선택했다. 본 논문의 한계인 북한영화미학에 대한 과도한일반화는 앞서 제시한 북한영화 연구를 참조하길 바란다.  3)Fredric Jameson, “Third World Literature in the Era of Multinational Capitalism”, Social Text, No. 15, Autumn, 1986, pp.65~88.  4)슈테판 귄첼 엮음, 이기홍 옮김, 마르크 리스, ‘영화위상학, 그리고 그 너머’, 『토폴로지』, 에코리브르, 2010, 395쪽.  5)파스칼 보니체 지음, 김건, 홍영주 옮김, 『비가시 영역: 영화적 리얼리즘에 대하여』, 도서출판 정주, 2001년, 114쪽  6)보니체, 위의 책, 위의 쪽.  7)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문자와 국가』, 도서출판 b, 2011, 25~27쪽.

    3. 국가 내부의 外地 : <무산일기>

    영화가 국가-민족-국민으로 번역될 수 있는 내셔널 정체성을 형성하고 주조하며 선을 긋고, 호명하고 보장하는 일종의 장치로 작동하는 것은 북한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남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영화 또한 90년대 자본주의의 세계화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 세계시장을 점유하기 위한 (거대) 영화 산업화에 주력해 왔다. 2000년대에 접어들자 대기업들의 영화산업 진출은 가속화되었고 스크린 쿼터 일수는 축소되었지만, 다양성 영화-국가에서 보조금을 지원하는 아트 시네마 상영관에서 상영되는 중저예산 영화(SMEs, small to medium-sized enterprises)-를 국책사업으로 육성하게 된다. 2000년대 중반이 되면서‘한국영화’는 디지털 기술과 동아시아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일본, 한국, 중국 동북아시아 디지털 영화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중저예산 영화와 디지털 기술을 중심으로 시장의 확대 방안이 전면적으로 대두되었다. 그럼에도 한국 영화는 여전히 해외 시장보다는 국내 시장에서 주로 유통되고 있으며 주관객 또한 한국 관객에 머물러 있는 상태이다. 서구의 해외 영화제와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서 각종 국제영화제에 출품되고 있지만 역대 흥행 기록을 깨뜨렸던 한국 영화들, 예를 들어<쉬리>(1999), <공동경비구역 JSA>(2000), <태극기 휘날리며>(2004),<웰컴 투 동막골>(2005), <괴물>(2006) 등은 공통적으로 한국전쟁과 분단을 소재로 하고 있다. <포화속으로>(2010)와 <의형제>(2010)까지도 한국 전쟁과 탈북문제 등 분단이 야기한 특수한 장소의 경험에 의존하고 있다. 한국 영화의 보편성은 분명 장르의 규칙을 따라 ‘국내’, 즉국가 내부라는 공간의 동질적인 시간화를 통해 성취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영화에는 국내 관객을 주관객으로 한 동일한 장소가 갖는 공통 기억을 동질적인 국가 공간의 시간적 경험으로 전치시키는 영화들과는 다른 영화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즉 국가라는 영토가 갖는 장소감이 민족 정체성으로 번역되는 과정을 다르게 겪는 영화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경계>(2005), <우리 학교>(2006), <디어 평양>(2005), <굿바이 평양>(2009), <두만강>(2010), <무산일기>(2010) 등 다양성 영화 지원정책에 의해 남한의 제작지원을 받은 중저예산 영화들이 그것이다. 다양성 영화는 한 마디로 남한의 ‘다문화주의’ 의 영화적 판본이다. 그러나 이들 다양성 영화들 중에는 분단을 소재로 하지만, 다른 형식으로 분단을 표상하고 있는 영화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영화는 또한 북한 영화의 폐쇄적인 네이션의 운동 이미지와도 차이를 드러내면서 남한과 북한이 역사적으로 형성한‘네이션’의 표상을 동시에 거부한다. 이들 영화에서 ‘네이션’은 대도시와 주변부 지역 혹은 이중 언어의 장소로 흩어지거나 중첩되어 있다. 그리하여 호미 바바의 말대로 주변부 인민들이 고향과 공동체의 정서가 사라진 도시의 역사와 픽션을 쓰기 위해 도시로 귀환한다.8) 개별국가를 자본주의 시장으로 결연해서 탄생한 대도시에서 네이션에 대한기억을 간직한 주체는 오히려 이산민, 이민자, 망명자들이 되는 것이다. 주변부 인민들은 떠나온 본국과 거주하는 타국 사이에서 혼란스러움과 난처한 상황에 자주 빠진다. 경험하는 주체와 장소 정체성은 분리되어 장소에의 적응과 동화를 주체에게 강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변부 인민들은 민족국가가 처리하기 곤란한 공백의 장소를 내부에서 형성하여 오히려 민족과 국가를 동시에 불안정하게 하는 내부의외지화를 이룬다. 동시대에 이러한 대표적인 주변부 인민들 중 하나는‘탈북자’라고 할 수 있다.

    탈북자 출신인 김규민이 감독한 <국경의 남쪽>(2006)과 <크로싱>(2008)이 만들어지는가 하면, 베트남에서 온 이주노동자와 탈북자간의연대를 다룬 <처음 만난 사람들>(2007)이나 탈북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무산일기>도 등장했다. 이들 영화들은 탈북자라는 소재 외에는 장르나 규모, 관점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현재 한국에서 제작되고 있는 탈북자 영화는 일정한 경향성을 띤다. 첫째는 반공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우편향성이다. 이러한 영화들은 영화의 마지막대결 구도에서 언제나 연공을 선택하는 북한의 다부작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시리즈와 대척점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우편향적이다. 북한은 탈북자와 같은 이산민을 발생시킨 원흉이며 남한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그들을 받아들이는 수혜국이다. 가해자인 북한 국가와 피해자인 탈북민들의 구도에서 슬픈 피해자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탈북민의 존재 자체는 북한을 비판하기 위한 도구이자 동정어린 피해자가 된다. 두 번째 경향은 계급편향적 관점이다. 이주 노동자와 탈북민들이 등가가치를 지닌 그래서 교환 가능한 이미지 기호들로 표상되어 이들의 이산의 과정이 지닌 역사적 관점은 마치 쿨레쇼프 효과처럼 간단하게 봉합되어 버린다.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남한에서 탈북자는 경제적 주체이기 이전에 법적 주체로서의 지위를 먼저 획득해야 하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탈색을 먼저 요구받는다. 이들이 남한에서 가장 먼저 방문하는 곳은 공장이나 사업체가 아니라 하나원이라는 국가 기관이다. ‘분단’이라는 특수한 지정학 속에서 언어, 전통, 과거를 공유했던 남한을 선택한 탈북민들의 맥락은 자본주의의 경제중심적 관점과 탈이데올로기라는 이름아래 문화와 역사의 공집합이 존재하지 않았던 이주노동자들의 맥락으로 흡수 통합되어 사라져 버린다.

    <무산일기>를 여기에서 특별하게 언급해야 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이전 탈북민 소재 영화의 우편향적이며 계급편향적 시선을 걷어내고 하나이면서도 두 개인 분단국가의 현재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약 60년 이후 남한은 돈을 자본주의의 유일한가치로 놓고 이를 수심인면으로 쫓고 있다. 한편 북한은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인민의 기본적인 생존권조차도 보장하지 못하는 무능한 국가이다.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당과 수령의 국가에서 돈의 국가로 건너온 탈북자에게 떠나온 고향은 빈곤해서 돌아가 봤자 아무 것도 없는 물질적 폐허의 땅이고, 이주해 온 남한은 인간들이서로 돈에 ‘환장한’ 삭막한 정신의 땅이다. 국가 이데올로기의 경합, 무관심, 협력을 반복하면서 지속된 ‘분단’은 남북한 어디에서도 자신의 집을 찾지 못한 탈북민을 낳은 것이다. 영화는 북한이 남한의 외부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남한 내부의 공간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미장센을 통해 알려준다. 조용필 평양콘서트 비디오 테잎이 노래방 책장에 끼어 있고, 북한을 향해 휴전선 근처에서 대북홍보전단을 뿌리는 보수단체에 관한 뉴스가 나온다. 노래방의 화면에는 북한의 기념일 행사 장면이 나오고 탈북자들을 위한 남한적응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경철은 강의를 한다. 교회는 탈북자 프로그램을 마련해 놓고 있으며 탈북자인 승철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반긴다. 북한(민)은 이미 남한의 일상에 놓여 있으면서도 무관심의 대상으로서 제 기호의 무게를 갖지 못한 채 유행의 기호처럼 흘러만 간다. 북한과 남한은 모두수령과 돈이 아닌 인간을 숭배하고 존중한다는 것을 무엇인지를 잃은 지 오래된 장소이다.

    그 곳에서 승철의 상실감, 불안함, 남한에 대한 감정 즉 친숙하면서도 낯설며 섬뜩한 감정은 거친 핸드 헬드 쇼트의 반복으로 드러난다. 한편 남한의 서울이라는 대도시는 민족 국가를 표상하는 단일한 기호의 장소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모든 것을 노출하고 토해내는 물신(화폐숭배)의 장소로 제시된다. 서사의 연쇄 고리는 돈이다. 승철의 친구인 경철은 탈북자 브로커로서 중국을 거쳐 북한에 돈을 보내는 일을 한다. 경철의 친구들은 경철에게 북으로의 송금을 맡겼다가 봉변을 당한다. 승철은 돈을 벌려고 애를 쓰지만 남한을 벗어날 수 없는 탈북자의 애매한 국적으로 인해 변변한 취직자리를 얻지 못한다. 거리의 벽보를 붙이는 일은 같은 지역에서 다른 벽보를 붙이는 폭력배들로 인해 쉽지가 않다. 경철은 친구들의 복수가 두려워 미국행을 결심하면서 승철에게 자신이 빼돌린 돈의 위치를 가르쳐 주면서 그 돈을 자신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다.‘우정’이라는 말을 건 경철의 부탁으로 승철은 경철에게 배신당한 친구들이 점거하고 있는 집에 들어가 돈을 빼온다. 승철은 돈을 갖고 경철과 만나기로 한 정거장을 그냥 지나쳐 경철의 돈을 다시 빼돌린다. 돈은 남한에서의 탈북자들 간의 관계를 연결하는 매개이자 이들의 관계가 물화된 관계로 변질되는 원인이 된다. 남한에서 모든 것은 민족국가의 가치보다 화폐 가치로 결정된다. 노래방 도우미, 불법적인 술판매, 북으로의 송금, 백화점에서의 절도에서 나아가 교회에서의 모임에서도 사람들의 모든 고민은 IMF 등으로 인한 경제적 문제와 갈등들이다. 서울은 물신의 세계이며 이 세계에서 화폐는 하나의 신앙이며 종교이다. <무산일기>라는 제목에서 무산은 함경북도에 속해있는 도시로서 주인공인 정승철의 고향이자 김일성이 두만강을 넘나들며 항일운동을 한 자취가 찍혀있는 북한혁명사에서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정승철은 무산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먹을 것 때문에 친구와 다투다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살인죄를 피하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정승철은 중국을 거쳐 남한으로 들어오게 된다. 수령이 항일혁명운동을 했던 역사적 장소인 ‘무산’은 먹을 것이 없어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짐승의 “땅”이 된 것이다. 수령이라는 영웅의 영광스러운 발자취는 인민에게 옥수수 한 조각도 남기지 않은 채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다. 정승철은 그런 무산을 떠나 서울에 도착한다. 그러나 서울은 화폐라는 물질을 숭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일성을 숭배하는 역사적 장소인 무산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수령과 돈에 대한 남북한 각각의 종교적 믿음에서 개인은 그 종교의 희생 제물일 뿐이다. 영화는 위장된 聖의 세계와 노골적인 俗의 세계로 북한과 남한을 표상하면서 두 국가 모두를 부정한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무산과 노래방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절도를 저지르고 금주법을 어겨야 하는 서울에서 살인을 속죄할 길은 없는 것이다. 승철이 겪는 무산과 서울 간의 기억과 공간의 분열은 그 두 곳 어디에서도 완벽하게 의미화되지 않는 표정을 한 그의 얼굴에 담겨 있다. 그가 겪고 있는 기억과 공간의 분열, 이데올로기 기호들의 분열,상실, 혼동, 난처함이 그의 얼굴로 드러나는 것이다.

    영화에서 주로 사용하던 핸드 헬드 기법이 아니라 롱 테이크로 처리된 장면 중 하나는 절도금으로 새 단장을 한 승철이 성가대의 일원이 되어 찬송가 연습을 함께 하는 장면이다. 일종의 강조점으로 기능하는 이 롱 테이크 장면은 무산에서 살인죄가 서울에서의 절도죄로 용서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속죄 행위는 또 다른 죄를 저지르는 행위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이는 영화의 맨 처음 장면인 교회를 향해 폐허가 된 재개발 지역을 거쳐 수직 운동을 하는 승철의 움직임과 대조를 보인다. 승철은 살인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교회에 소속되어 남한에서의 귀속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 그러나 교회는 그가 닿을 수 없는 천상의 꼭대기에 있다. 영화의 중간에 제시된 롱 테이크는 교회 공동체와 승철의 수직적인 관계가 수평적인 관계 즉 승철이 교회에 귀속되어 다른 삶을 살 것이라는 걸 보여준다. 한편 영화에서 롱 테이크 기법을 사용한 또 다른 장면은 맨 마지막 장면이다[그림 2참조].

    이 장면은 승철이 일하는 노래방을 나와 백구와 함께 편의점에 가서 숙영이 부탁한 맥주를 사오는 장면이다. 카메라는 노래방에서 길을 건너 편의점을 들렸다가 다시 노래방으로 되돌아가는 승철을 한 쇼트로 처리한다. 쇼트 내부는 길을 건너고 걸어가는 승철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한편 쇼트의 외부에서는 롱 테이크 쇼트가 시작했을 때 함께했던 백구가 차에 치여 죽은 사건이 발생한다. 백구는 쇼트 내부에서는 살아있고 쇼트 외부에서는 죽었다. 승철의 움직임은 하나의 쇼트를 구성하지만 정작 사건은 쇼트 외부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여기에서 쇼트의 내부는 외부에서 벌어진 사건을 유추하고 해석해야 하는 의식의작용을 요구한다. 북한 영화의 내셔널 시네마적 특징이 쇼트 내부와 외부의 단절을 통해 현실과의 접점을 상실한 국가 공동체의 재현이라면, <무산일기>는 쇼트 외부를 향한 내부의 카메라 운동을 통해 현실을 다시 영화의 영사막과 연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쇼트의 내부와 외부의 관계는 영화의 초반부와 결말부에서 대구를 이루는 수직의 핸드헬드 기법과 수평의 롱테이크 기법과 상보관계를 이룬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외부를 향한 운동에 대한 의미론적 해석이다. 북한 영화가 동질적인 국가 공동체를 위해 끊임없는 내부로의 응집을 추구한다면, <무산일기>는 화면의 외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은 영화가 포함할 수 없는 과잉의 장소, 즉 탈북민의 현실은 영화의 내부에 완전하게 포섭될 수 없다는 것을 명시한다. <무산일기>의 프레임은 프레임의 외부를 외부에 그대로 남겨놓는 것, 이미지의 공간이 현실의 모든 것을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면서 비로소 환영의차폐막이 아닌 현실의 접점이 된다.

    8)호미 바바 편저, 류승구 옮김, ..국민과 서사.., 휴머니타스, 2011, 19쪽.

    4. 국가의 이중적 장소 : <두만강>

    <망종>(2005), <경계>(2006), <두만강>(2009)은 장률 감독이 한국의 제작지원을 받아 한국을 포함, 국제무대에서 선을 보인 영화들이다. 그의 영화는 북한은 물론 중국에서 개봉을 금지당하고 있는 그야말로 망명자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의 제작지원을 받은 중저예산 영화에는 중국, 북한, 한국간의 삼각 지대 사이에 끼여 있는 조선족을 다룬 영화와 ‘귀국사업’과 조선학교 등 북한, 한국, 일본 간의 삼각 지대에 끼여 있는 재일동포를 다룬 영화가 포함되어 있다. 이들 영화는 이중 언어의 공간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동일하게 묶을 수 있다. 중국어와 일본어 자막이 한국어로 발화하는 이미지와 가끔 겹치면서 이국성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일한 인종과 종족의 기원과 남북한의 분단으로 인해 파생한 공간의 거주자들이기에‘이국성’보다는 친밀감을 더 갖게 된다. 모국어나 조상어와 현지어가 혼합되어 있는 이중 언어 영화들의 ‘약간의’ 이국성은 방언의 ‘악센트를 지닌 영화’라 할 수 있다. 이중 언어의 영화는 표준어와 방언의 차이를 악센트로 드러내면서 단일 언어를 구사하는 일국으로 포섭되지 않는 사이-공간을 표식한다. 장률감독은 지속적으로 중국어 내부에 존재하는 한국어의 장소가 내포하고 있는 지정학적 위상을 드러내온 감독이다. 중국은 티베트에서 홍콩까지를 식민화했으며, 조선족을 비롯한 여러 다른 종족의 거주 장소이자 북한과 국경지역이어서 탈북자들의 주된 탈북 통로이기도 한 국가이다. 장률 감독은 중국의 한족중심주의로 인해 억압되어 있는 내부의 소수자들을 주로 다루고 있으며 장률 감독 당사자가 귀속되어 있는 조선족은 내부의 소수자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소수자의 방언의 공간에서 발화하는 그의 영화는 한마디로 국가와 탈국가 혹은 네이션과 디세미네이션의 사이 공간에 있는 주변부 인민들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장률의 영화는 네이션을 나타내는 상징적이며 정서적 기호들이 남아있지 않은 장소에서 남아있는 잔여들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그의 영화는 주로 원초적이며, 물질적이며, 육체적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그의 영화가 왜 이런 인상 혹은 느낌을 유발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많이 없는 편이다. 따라서 그의 영화가 지닌 표준적인 특징 즉 갑작스러운 결말과 죽은 시간의 서사를 관통한 인상의 기원을 추적하는 일이 필요하다.

    장률 감독의 영화에서 국가는 원래 물리적 영토이자 주어진 자연환경이다. 그의 영화에는 근대에 발생한 민족국가에 대한 근본적인 염오(厭}惡)가 영화 전반에 깔려있다. 근대 국가는 자민족중심주의에 빠져 조선족과 같은 소수민족을 희생자로 만들었으며, 그들이 사는 이중 언어의 공간, 법과 문화가 분리 통치되는 사이 공간은 죽음의 장소를 형성한 원인이다. 장률감독의 영화에서 벌거벗은 채로 제시되는 국가는 국가의 표지가 산재하고 산포된 장소가 아니라 삭막한 자연이며 이에 적응해야 하는 인간들의 영토일 뿐이다. 그의 영화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지표적 무게감은 자연에 적응해서 일상을 살아가는 소수종족이 민족-국가의 상징적 기호들과 불화하는 데에서 형성된다. 조선족과 같은 소수종족 공동체의 공간은 다수 종족의 권력이 소수종족의 일상적인 삶에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물리적인 힘의 공간으로 의미화된다. 국경지대의 소수종족 공동체는 불균등한 세계 공간에서 가장 커다란 피해자이다. 근대 민족 국가가 여타의 권력 규율 장치를 통해 국민 되기를 요구하고 호명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해자의 권리를 통해 국민 되기를 강제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제 영토 내 인간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는 생사여탈권으로까지 확장된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는 여성의 신체를 침입할 수 있는 권리로 미끄러진다. <망종>에서 조선족 여성은 젊은 중국 경찰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국경>에서 탈북한 창호의 어머니는 중국 경찰에게 성폭력을 당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공동체는 마치 원시적 폭력의 근원지로 해체에 이른다. <두만강>에서 창호의 누나가 탈북자에게 성폭력을 당하는 데에 오면 폭력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는 권리는 국가 권력의 소유에서 나아가 국경 마을 공동체를 침입할 수 있는 침입의 권리로 확산된다. 창호는 북한에서 건너 온 친구인 정진이 중국 경찰에게 잡혀가자 자살을 감행한다. 국경이라는 사이 공간은 폭력과 죽음으로 뒤덮인 국가 내부의 외부 지역으로 남아있다. 영화는 얼어붙은 두만강에서 혼자 시체놀이를 하고 있는 창호에서 시작한다. 마을 주민이 화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면서 전방에 누워있는 창호에게 다가간다. 그러자 창호는 갑자기 일어나 도망을 간다. 이 첫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창호의 자살과 의미론적 대구를 이룬다. 창호는 화면 밖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지붕 위에서 뛰어내린다. 화면 바깥으로의 도주와 화면 외부로부터의 낯선 침입이 반복되면서 내부로의 인력이 아닌 외부로의 척력(斥力)이 작동한다. 화면내부로 끌어당기는 힘보다 화면 바깥으로 밀어내는 힘이 더 작용하면서 화면 내부는 중심을 잃게 된다. 이는 조선족이 놓여있는 장소에 대한 은유적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척력의 프레임은 동시에 내부로의 응집을 강조하는 인력의 몽타쥬를 프레임 내부에서 분할하고 해체하는 방식으로, 즉 그에 대한 부정으로 구성된다.

    척력이라는 은유적 영화 형식 속에서 중국과 북한 사이에 놓여있는 두만강은 흐르지 못한 채 얼어붙어 있는 죽음의 공간으로 제시된다. 장률 감독의 영화가 반복해서 보여주는 건 소수종족 공동체가 국가의 내부의 외부라는 이중적인 장소에 놓여 있으며 침입과 착취에 취약한 장소라는 것이다. 언어와 음식 등 각종 생활양식은 북한 및 남한과동일하지만, 중국의 관할 아래 놓여있는 조선족의 이중적인 위치는 그세 국가와 모두 관계를 맺으면서도 동시에 세 국가의 침입과 폭력에 완벽하게 무방비 상태에 놓여있는 조선족의 생활세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조선족이라는 소수종족 공동체는 크게 세 가지 힘들이 벌이는 척력에 의해 철저하게 해체된 공동체로 묘사된다. 가장표면에 노출된 가해자는 북한이다. 접경지대 조선족 공동체가 해체되어 결국 어린 창호가 자살을 택하게 된 원인이 바로 중국내륙지방으로 가기 위한 통로로 마을을 삼은 탈북자들이 마을에 침입하면서 부터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두만강과 접경해 있는 조선족 마을은 북한민이 강을 넘어오기 전까지 평온한 마을로 묘사된다. 그러나 창호의 누나는 탈북자에 의해 성폭력을 당하고, 마을에서 상점을 운영하던 남자는 탈북 난민들의 도피를 도운 죄명으로 중국 경찰에게 잡혀 간다. 그 남자의 아들은 이에 앙심을 품고 북한에서 넘어온 창호의 친구인 정진을 경찰에 고발한다. 또 다른 척력의 국가는 남한과 중국이다. 중국은 내부의 소수민족을 그저 통제와 규율로 통치하면서도 지역경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경찰국가로 제시된다. 한편 남한은 창호의 어머니와 마을의 두부를 파는 여자가 돈을 벌기 위해 향하는 땅이다. 조선족 경제는 남한에서의 송금으로 운영되지만 남한은 조선족을 하층계급의 지위만을 부여할 뿐이다. 조선족 공동체는 세 국가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장소이지만 그 어떤 국가도 그들에게 국민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 버려진 땅으로 제시된다. 그 틈바구니에서 창호 가족, 상점주인의 가족, 정진의 가족, 이장 가족 등은 이산가족들이 되고 마을공동체는 노인들 밖에 없는 죽음이 임박한 활기 없는 장소가 된다.영화에서 척력이 중첩된 영화 공간 혹은 사이 공간으로 제시되는 장면은 상점 주인의 아들이 정진을 고발한 후 폐허의 빈 집에 숨어있는 장면을 들 수 있다[그림 3참조].

    쇼트의 한 가운데 상점 주인의 아들은 프레임의 구도의 축으로 앉아 있다. 아들이 앉아있는 장소 위로 창문이 두 개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의 프레임은 크게 세 개로 나뉜 배치로 이루어져 있는 데 세 개의 배치에는 각각 중국 공안, 북한인인 정진, 그리고 정진을 중국 공안에 고발한 조선족 아이(상점 주인의 아들)가 놓여있다. 상점 주인의아들의 위치는 중국과 북한 사이에 정지된 채 숨어있는 조선족의 종족-공간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또 다른 조선족인 창호는 정진이 떠난 텅 빈 공간을 죽음으로 장소화한다. 프레임은 복잡하게 얽혀있는 내이션의 척력과 동시에 분할되고 해체되는 내이션의 이중적 공간을 구성한다. 이 프레임은 인력에 대한 부정으로서 구성되는 척력의 프레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조선족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 그 어떤 국가와도 완벽하게 동일화되지 않는 상황에서 남겨진 말 그대로의‘자연’이다. 영화는 ‘자연’을 국가의 경계를 허무는 하나의 이상향으로 제시한다. 중국, 북한, 남한 모두는 이 자연의 도도한 흐름을 거스르고 인위적으로 만든 국가일 뿐이기 때문이다. 창호의 누나가 벙어리가 되고 창호의 아버지가 죽은 이유는 북한에서 일어난 큰물(홍수) 때문이었다. 거대한 자연은 인위적인 국경을 넘어서 불어 닥친다. 인위적으로 그려진 국가는 이를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장률 감독의 영화는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산은 나누고 강은 합치는 경향’9)에 맞는 국가라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얼어붙은 두만강이 국경을 넘어 흘러갈 때 정진과 창호는 자유롭게 만나 축구를 할 것이며, 할머니는 북한으로 다리를 건너가고, 조선족은 비로소 ‘공동체’를 가질 것이다. 두만강사이를 오가는 창호 누나의 그림, 할머니의 상상, 애니매이션의 세계에만 제한되어 있는 국민국가에서 자연으로의 회귀란 불가능한 폭력적인 꿈이 아닐까.

    9)에른스트 르낭, 호미 바바 편저, 위의 책, 38쪽.

    5. 결론

    본 논문은 동아시아 문화연구와 북한학 연구를 확장해서 기존의 담론의 지도를 다르게 그리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영화연구에서 내셔널시네마 담론은 동아시아 문화연구와 북한학을 접속시킬 수 있는 학제 간 연구를 열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내셔널 시네마 담론은 영화의 제작국적에 의한 ‘네이션’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근대 국민국가가 형성되면서 야기된 ‘네이션’, ‘국민’, ‘국가’, ‘이산’ 등의 개념의영화미학적 형상화를 통해 동시대 현실에 개입하는 담론이기 때문이다. 동시대 국민국가의 경계는 분명 위협받고 있으며 국가 내부의 ‘국민’은 분열되어 있다. 자본주의의 세계화는 이전의 민족주의보다는 연성화된 그래서 네이션을 단일함과 동질성만으로 설명하지 않으며, 국가의 높은 경계를 버리고 도시와 지역으로 세계 지도를 재편하고, 계급 차별을 통해 ‘국민’의 지위를 고수하는 등 이전과는 달라진 현상들을 보여준다. 자본주의라는 발 없는 말은 국가의 경계라는 울타리와 언젠가는 대면하게 된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세계화와 국민국가의 관계는 영화의 내부와 외부의 관계와 운동으로 응축해서 파악해 볼 수 있다. 동아시아 지도에 차지하고 있는 국민(인민)국가 중 하나로 북한을 놓고 그 인민국가의 경계가 어떻게 위반되고 있으며 그 내부가 어떻게 외부와 단절을 겪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북한을 고립이 아닌 협상의 테이블로 끌어내는 작업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은 일본과 미국에 대항한 반제국주의적 민족주의에서 나아가 소비에트를 비롯한 구사회주의 국가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피아로 구분하면서 ‘우리 식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그 ‘우리’라는 말에 포함된 애국적 국민의 지위를 성취하지 못한 자들은 바깥으로 쫓겨나 비가시적으로 된다. 이러한 북한식 민족주의는 북한영화의 쇼트 내부의 인력과 외부의 관계 의 단절로 드러난다. 텍스트에서 말하지 않는 것이 폭로되는 장소는 북한의 경계 즉 남한과 중국에서이다. 북한 영화에서 쫓겨나 보이지 않았던 자들은 두만강 국경에서 출몰하거나 남한의 서울 한 복판에서 등장한다. 결론적으로‘국가라는 통치 기구에 의해 억압당하는 민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집단적이며 저항적인 ‘민족’은 앞에서 언급한 영화들에서처럼 흩어져 있으며, 산포되었기에 들뢰즈의 말대로 인민 people 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북한영화는 탈북자, 재일동포, 조선족 등을 말하지 않고 보여주지 않은 것 자체로 인민을 억압하고 있으며 동시에 국가와 민족을 여전히 동질적으로 파악하면서 집단적이며 획일적인 과거의 ‘민중’에 사로잡혀 있다. 反민중으로서의 인민은 산포된 공간에서 중첩된 정체성을 지닌 채 집단적 민중이라는 과거의 기억과 쟁투를 벌이고 있다. 영화 스크린은인민이 사라진 국가(북한)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인민(탈북자의 남한과 조선족의 중국과 두 개의 조선)의 대립과 갈등이 펼쳐지는 하나의정치적 장소이다(끝).

  • 1. 강 성률 2011 [『현대영화연구』]
  • 2. 김 선아 2010 On Three Topographies of National/Transnational Cinema [『현대영화연구』] 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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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 호미 바바, 류 승구 2011
  • 11. Fredric Jameson 1986 “Third World Literature in the Era of Multinational Capitalism” [Social Text] google
  • [그림 1] <그림 1> 흐릿하면서도 응축된 현실의 은신처로서의 스크린. 배경에는 과장된 슬로건 문구와 압도적인 크기의 회화가 위치해 있다. 응집된 화면은 북한 내셔널 시네마의 서명과 같다. <민족과 운명: 노동계급편>(1992)시리즈 중 한 쇼트.
    <그림 1> 흐릿하면서도 응축된 현실의 은신처로서의 스크린. 배경에는 과장된 슬로건 문구와 압도적인 크기의 회화가 위치해 있다. 응집된 화면은 북한 내셔널 시네마의 서명과 같다. <민족과 운명: 노동계급편>(1992)시리즈 중 한 쇼트.
  • [그림 2] <무산일기>의 마지막 롱 테이크 장면. 주인공과 함께 하는 카메라는 개의 죽음을 화면 외부에 남겨두어 스크린 공간과 현실을 접속시키고 있다.
    <무산일기>의 마지막 롱 테이크 장면. 주인공과 함께 하는 카메라는 개의 죽음을 화면 외부에 남겨두어 스크린 공간과 현실을 접속시키고 있다.
  • [그림 3] 영화 공간 내부/사이에서 혹은 남한, 북한, 중국의 분할과 공존의 경계에 조선족을 위치해 놓은 <두만강>.
    영화 공간 내부/사이에서 혹은 남한, 북한, 중국의 분할과 공존의 경계에 조선족을 위치해 놓은 <두만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