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 재현된 문자예술 *

The Literal Art on Big Scr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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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It looks clear that the film is the most popular and strongest device of narration of these days. This new method of Art grows really fast by absorbing contents from Literature. Though there are enormous amount of films that based on Novels. the Art and skills of that adaptation in not studied enough.

    In this paper I studied Vladimir Nabokov’s novel Lolita and Stanley Kubrick’s film of same title as texts. What I try to find out are difference and similarities of two pieces of works, and I also discuss on reasons of the difference.

    Today, Nabokov’s Lolita is considered one of the most important novels of this century, but when it was published the book was banned publication because of its lewdness. Even though Actual theme of the novel is endless love and longing for the English literature, they don’t try to look inside of the narration.

    As most of Kubrick’s works did so, the film Lolita gain more positive response than the time of its release. Kubrick wanted to inform the absurdity of modern-Western by the story of four normal Americans who have strong appetite for possession.

  • KEYWORD

    Stanley Kubrick , Film , American-movie , Lolita , Vladimir Nabokov , Literature , English Literature , Hollywood-movie

  • 1. 서론

    영화가 단순히 움직이는 외부세계의 재현적인 도구가 아니라 메시지를 전달하는 예술의 영역에 들어선 이래, 그것은 조금씩 문학의 영역에 자신을 겹쳐 넣어왔다. 문명의 긴 역사 동안 서사의 왕좌를 지키던 문학은 그 영광을 영화와 공유하게 되었고, 덕분에 두 예술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닮아갔다. 특히 영화는 문학으로부터 많은 콘텐츠를 흡수하며 발전을 거듭하였는데 그 결과, 투입된 자본과 몰려든수용자의 규모에 맞춰 짧은 시간 만에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오늘날 가장 대중적이고 강력한 서사전달의 매체가 영화라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수많은 멀티플렉스 극장들을 찾아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들은 해를 더할수록 늘어가고, 예술에 참여하는 대중들의 열의와 양은 장르 전반의 질로 전환된다. 관람이라는 방법으로 영화예술에 참여하는 수가 증가할 때마다 영화의 기술적 수준은 향상 된다. 영화와 소설이 모두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지만, 현대인들이 소설이 전하는 이야기보다 영화가 전하는 이야기에 더 몰리는 이유는 극장과 영화가 만들어내는 마술 같은 효과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영화가 특별한 것은 그것이 타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이면서 동시에 혼자 감상할 수 있는 예술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문학은 이러한 강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철저히 고립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며 개인의 특성에 따라 감상의 시간이 달라지는 행위이다. 한 페이지의 소설을 얼마의 시간 안에 읽게 된다는 절대 값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두 연인이 동시에 한편의 소설을 읽기 시작해 같은 시간에 마지막 장을 덮고 그 감상을 교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반면 영화는 그것이 가능하 다. 함께 극장을 찾은 가족은 분명히 영화관의 불이 꺼지고 상영이 시작된 이후부터는 분명히 그 혼자만의 경험을 했는데도, 영화를 ‘같이’ 봤다고 인식한다. 그것은 모든 관객에게 동일한 시간동안 상영되는 영화의 절대적인 특성 때문이다.

    많은 문화 활동이 가족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대의 사회에서 이러한 특징은 중요하게 작용하며 영화가 가지고 있는 산업적 성격 때문에 그 서술법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영화란 일정규모 이상의 자본이 투입되어야만 완성할 수 있는 예술이기 때문에 실패의 확률을 줄이고 성공하기 위한 법칙을 찾으려는 노력이 더욱 활발해지기 마련이다.

    문학을 원작으로 하는 그야말로 방대한 영화들이 존재하고 앞으로도 그 같은 추세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전망이지만, 문학을 영화로 각색하는 작업을 더욱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비교방법은 아직도 많은 부분이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이것은 영화가 예술로 자리매 김하던 시기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신매체에 대한 철학적 논의와는 다른 성격을 가지는 작업일 것이다. 물론 소설의 서사를 영화에 옮기는데 필요한 최적의 서술법을 완벽하게 규정하고 법칙을 부여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시도이다. 다만 우수한 기존의 사례를 찾아 원작과 영화를 비교해보고, 그 각색과정에서 이루어진 유의미한 변주법을 찾아내 밝히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연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리고 그런 연구들의 기록이 축적된다면 그것은 영화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에서 두 매체의 차이와 유사점을 알아보기 위해 텍스트로 삼은 것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Nabokov)의 소설 『롤리타(Lolita)』 와 그것을 원작으로 한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의 동명영화다. 『롤리타』는 지금까지 두 번 영화화되었는데, 큐브릭의 62년작과 애드 리안 라인(Adrian Lyne)의 97년작이 모두 같은 타이틀로 개봉되었었다. 전자가 엄청난 논란 속에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남겼다면, 후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철저한 배제를 받았다. 특히 배급사들로부터 외면 받았던 라인의 <롤리타>는 미주지역에서 극장이 아닌 케이블유료영화채널 쇼 타임(Show time)을 통해 처음 공개되어야 했다. 이후 배급사가 결정되고 극소수의 극장에서 상영되기는 했지만 이 영화는 그것이 가진 작품성에 비해 처참한 흥행성적을 거두고 스크린에서 내려졌다. 그러한 수치적 결과는 그간 성인들의 에로스적 관계묘사에 탁월한 필모그래피를 자랑하던 애드리안 라인 감독에게도 치명적이었지 만, 그보다도 『롤리타』라는 문학작품이 영화화 되는 것에 대해 내려진 금지 선고였다. 라인의 영화 이후 이 텍스트를 스크린에 옮기는 작업은 기획단계에서부터 커다란 저항에 부딪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동에 대한 성적 욕망이 금지되는 것이 하나의 분명한 기준 으로 자리 잡고 있는 현대서구 사회에서 이 소설이 가진 에로스적 특성을 모두 살린 채 영화화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라인의 <롤리타>는 큐브릭의 동명작품에 비하여 에로스적인 측면에서 원작 소설에 좀 더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희경, 이상엽 등은 라인의 영화를 중심으로 하여 그것을 원작 소설과 비교하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나희경은 「<롤리타>-시적 에로티시즘」 1) 를 통하여 나보코프, 큐브릭, 라인이 만들어낸 롤리타의 세계를 비교하고 라인의 작품에 드러난 에로스의 시적 가치에 대하여 논했다. 또 이상엽은 「 포스트모던 소설 <롤리타>에 나타난 패러디와 블랙 코미디의 영화화: 그 어려움과 한계」에서 라인과 큐브릭의 동명 영화를 함께 분석하여 라인의 작품이 가지는 우위에 대해 논하였다. 2) 확실히 라인의 <롤리 타>는 큐브릭의 동명영화와 비교할 때 표면적으로 원작소설과 유사한 면을 더 많이 보유하고 있다. 특히 험버트에게 님펫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만든 그의 유년에 대한 언급이나, 소녀와의 금지된 성적 관계가 직접 묘사된 것, 또 퀼티를 죽이는 사건이 맨 마지막으로 배치된 플롯의 구성 등이 그렇다. 그에 반해 큐브릭의 영화는 원작으로부터 훨씬 더 많은 변형이 이루어진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문에서 큐브릭의 버전을 텍스트로 삼은 것은 몇 가지 분명한 이유 때문이다. 먼저 동시대성과 작가의 일관성이다. 소설이 50년대, 영화가 60년대 발표되었기 때문에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등장인물들과 그들이 전개하는 서사도 거의 동일 하다. 또 많은 큐브릭의 영화와 달리 원작자가 직접 시나리오를 집필 하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큐브릭의 <롤리타>가 텍스트로 선정된 이유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원작소설이 담고 있는 어두운 유머의 정서, 누구도 수용자로부터 동정 받을 수 없는 기묘한 관계, 그리고 은유적 상징들의 영화적 재현, 그리고 현대 미국사회라는 괴물에 대한 고발이 이 작품에서 더욱 선명하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이 남긴 문화적 유산은 나보코프가 심혈을 기울여 창조한 스토리가 아니라, 논란 속에서 탄생한 님펫(nymphet)의 신화와 세음절의 이름이다. 성적 매력이 있는 사춘기 소녀라는 의미의 이 신조어 ‘님펫’은 오늘날 영어권에서 정착되었고, 롤리타 콤플렉스(또는 Lolicon)는 일본의 대중문화에서 소녀도착증을 지칭하는 어휘로 널리 사용된다. 그만큼 이 동명의 소설과 영화는 아직도 꽤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있으며 과거에 찍혔던 포르노그래피라는 불온한 낙인 때문에 제대로 이해될 기회를 박탈당해왔다. 심지어 애드리안 라인에 의해 <롤리타>가 다시 영화화되었던 20세기의 끝자락에서조차도 어떤 사회는 그것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개봉을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은유와 상징들로 가득 차 있는 큐브릭의 『롤리타』가 스스로의 위상에 걸 맞는 명작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수많은 연구자들과 비평가 들이 면밀한 관찰을 통해 그 속에 담긴 가치를 발견하면서 가능해졌다. <롤리타> 역시 큐브릭의 영화가 대부분 그랬듯이 개봉 당시보다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의 관객들에게 훨씬 커다란 찬사를 받았다. 이하에서는 각 작품을 개별적으로 분석하고 원작소설이 영화화되면서 어떠한 서술 기법의 차이를 가져왔는지에 대하여 논하겠다.

    1)나희경, 「<롤리타>-시적 에로티시즘」, 『영미문학 영화로 읽기』, 동인, 2001, 337쪽.  2)이상엽, 「포스트모던 소설 <롤리타>에 나타난 패러디와 블랙 코미디의 영화화: 그 어려 움과 한계」, 『문학과 영상 4권 2호』, 문학과 영상학회, 2003, 205쪽

    2.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분석

    『롤리타』를 단순히 금지된 에로스에 대한 집요한 탐미로 보는 것은 경솔한 독자의 몫일 것이다. 숨 막히는 욕망, 광기어린 집착, 윤리에의 도전, 풍부하고 지적인 언어유희와 푸쉬킨을 연상시키는 유머 등 나보코프가 이 소설에 씌워둔 가면은 셀 수 없이 많지만, 레비스트로 스가 지적했듯 가면의 기능은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감추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감추어진 것의 정체가 드러날 때 비로소 이 논란 가득한 소설의 가치가 밝혀진다. 드러난 것들과 숨겨진 것들의 차이는 나보코 프의 독특한 인생을 개관하는 과정 속에서 발견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회고했듯이 이 소설은 영어라는 언어를 향한 그의 개인적 연정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1899년 러시아 상 페테르부르크에서 귀족으로 태어났지만, 볼셰비키 혁명과 백군의 패배 이후 독일로 이민을 떠나야 했던 시점부터 나보코프의 인생은 그가 쓴 소설에 못지않게 극적인 사건들의 연속이었 다. 영국에서 수학하고 독일에서 유대계 러시안 아내를 만나 잠시 안정기를 가진 그를 위협했던 것은 나치 독일군의 진군이었으며 이로 인해 1940년 그는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했다. 중년에 낯선 대륙에 정착한 그는 귀족이었던 유년시절에는 상상해보지 않았을 노동자(비록 그것이 연구원이나 교수였으므로 육체노동은 아니었지만)의 신분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미국의 북동부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중년 이후의 시간을 보냈다. 정리해보면 그는 부유한 러시아귀족으로 20년, 불안한 서유럽 도피생활로 20년, 미국에서 지식인이민자로 20년을 살았던 것이다. 3) 그에게 장소적인 개념의 정착이란 없었다.

    유년시절의 이상적인 기억들이 가득한 고향은 절대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곳으로 바뀌었고, 몇 번에 걸쳐 이주를 할 때 마다 새로운 모국어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했던 고달픈 디아스포라의 삶이었다. 비록 유년시절부터 영어 과외를 받았고 케임브리지에서 수학했다고는 하지만, 십대 말미에 자비로 시집을 출간했을 만큼 언어를 다루는 직업을 지향했던 나보코프가 이 과정에서 겪었어야 할 고통은 상당했을 것이다.

    그가 1956년판 롤리타에 덧붙인 「롤리타에 대하여」에 썼듯이 수입을 위한 여러 가지 일들 사이에 진행해야 했던 이 작업은 더디게 진행되었고 몇 번이나 원고를 태워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만큼 괴로운 일이었다. “그만의 러시아와 서유럽을 만들어내기까지 자그마치 40년이 걸렸건만 이번에는 미국을 만드는 일에 매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4) 그가 느낀 괴로움은 단순히 새로운 문화와 언어, 지역을 자기화하는 물리적 장애보다도,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이유로 이전까지의 그가 소유 했던 문학적 자산들을 통째로 무화시켜야만 한다는 상실감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나보코프의 감정은 『롤리타』에서 어린 연인이 사라져버린 이후 요양원 신세를 지고, ‘믿음직한 친구’인 권총으로 상상 속의 범인을 사살하거나 자신의 목숨을 끝낼 것인가를 고민하며 미친 듯이 그녀의 흔적을 찾는 험버트의 방황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나보코프는 자신의 지적능력과 문학적 소양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작품 속에서 험버트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이 책을 서기 2000년 이후에나 출간해달라고 부탁한 대목에서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비극의 탄생」을 저술했을 당시에 니체가 보여 줬던 오만함이다. 6) 그는 소설 속의 인물을 통해 동시대의 사람들이 자신이 작품 속에 함축시켜 둔 이야기를 모두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이 상당 부분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한때 프랑스에서조차 포르노그래피로 몰려 출판금지처분을 받았던 이 소설은 오늘날 20세기의 중요한 명저로 인정받으면서 으레 두툼한 해설과 주역들을 달고 출판된다.

    하지만 아무리 스스로 평가하는 작가로서의 그가 대단하다고 해도, 『롤리타』가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 이전에 미국인 나보코프의 삶은 직장에 예속되어 있는 소시민의 모습 그 자체였다. 자본주의라는 거울에 비친 중년의 그는 더 이상 ‘성인여자 가운데 누구라도 손가락만 튕기면 차지할 수 있는’ 매력의 소유자가 아니라 ‘낡아빠진 파란 색 세단’ 을 고쳐가며 조심스럽게 타는 수준에 불과했다. 작가 자신이 한 미국 비평가의 말을 변형하여 인용하면서 적었듯이 소설 『롤리타』는 러시 아어를 모국어로 하는 지식인의 “영어라는 언어에 대한 연정의 기록” 7) 이며, 문학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가난한 디아스포라의 고백 이고, 동시에 외부인의 시선으로 바라 본 신대륙 미국의 낯설고 어딘가 부조리한 문화에 대한 고발이다.

    주인공 험버트에게 님펫에 대한 열망을 심어주었던 어린 시절 애너 벨과의 애틋한 체험은 곧, 포(Edgar Allan Poe)의 시, 애너벨 리가 사춘기 노보코프의 감성에게 주었던 한없는 흥분과 충격이다. 처음 접한 이후 시에 대해 흥분하며 열중하였고 동경했으며, 모국어를 바꾸면서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란 두려움에 떨었던 그의 심리를 로리타를 만나기 전까지 험버트의 인생을 통해 고백한다. 험버트가 롤리타를 처음 만났을 때의 나이와 나보코프가 첫 영어소설을 발표했던 때의 나이 역시 37과 40으로 거의 일치한다. 이처럼 롤리타가 상징하는 것은 영어 문학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 소유욕이고, 문학 그 자체를 향한 열망이다. 롤리타를 탐닉하고 그녀에게 굴종하고 때로는 원망하기도 하지만, 영원히 그것을 잃었다고 느꼈을 때 괴로워했던 험버트처럼 나보코프 역시 문학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느 날 사내(나보코프 또는 험버트)는 사라졌던 연인으로부터 곧 그들의 사랑이 만든(비록 다른 남자의 아이이지만 원인을 따지고 보면 그들의 유희가 문제의 발원점이었다.) 의도하지 않은 형태의 결과물이 태어나야 한다고 통보받는다.

    이것이 비록 사내가 바라던 형태의 출산은 아닐지라도, 나보코프의 머릿속에서 구체화되어버린 이야기는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면서 결국 활자화되었다. 왜냐하면 나이를 먹고 초라해져 님펫의 모습을 잃은 롤리타를 보고 자신이 사랑했던 것이 단순히 ‘어린 소녀’가 아니라 롤리 타였음을 비로소 깨닫는 험버트처럼, 중년의 나보코프 역시 영어 문학에 대한 애정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귀족 네플류도프와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카추샤처럼, 롤리타는 알래스카로 이주하고, 험버트는 자신을 불행으로 빠뜨린 퀼티를 찾아 나선다. 오랜 연인 롤리타가 그녀의 유산을 세상에 내놓기 전에 나보코프는 먼저 스스로를 타자화하여 대면하고 과거에 대해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퀼티는 여러 모로 험버트와 닮아있다. 그들은 불어에 능숙한 작가이자, 같은 담배를 피우는 애연가들이고, 모두 미성년 자인 롤리타의 성을 탐닉했다. 험버트의 도취적인 시를 퀼티가 칭찬하는 대목에서 동질성을 드러낸 두 사람은 격투를 벌이며 하나로 뒤섞 여버린다.

    이처럼 나보코프는 험버트와 퀼티의 대결 장면에서 호칭을 혼동시킴으로써 둘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함을 전했다. 퀼티는 자기연민과 변명, 양심과 방어기제를 제거한 험버트이다. 자기애를 모두 벗어버리고 나서 자신과 마주한 귀족 출신의 미국 이민자는 스스로의 과거에 대한 향수와 증오가 죄였음을 인정한다. 클레어 퀼티(Clare Quilty)라는 악역(antagonist)의 유희적 명명법(appellation)에서 연상되는 단어는 ‘유죄선고(Declare guilty)’ 혹은 ‘명백한 유죄(Clear guilty)’다. 이는 소설 전체에 걸쳐 자신의 사랑이 무고함을 주장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다시 말해 험버트는 즉자적으로는 그저 남들과 조금 다른 대상을 사랑할 뿐인 ‘정상적인’ 10) 사람이지만, 대자적으로는 권총을 쏘아죽여도 죄를 받을 것 같지 않은 악한이었던 것이다. 결국 험버트는 또 다른 자기 자신을 향해 총을 발사해 유죄인 자아, 퀼티를 처벌한다.

    이러한 모든 주제의식들에 대해 나보코프는 구체적인 의견을 밝히길 꺼렸다. 소설 속의 험버트가 자신의 욕망이 사람들에게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계속 도피했던 것처럼, 나보코프는 이 소설에서 자신이 정말로 말하려는 것을 자꾸 깊이 감추려 하는 성향을 보인다. 사실주의 소설과 참여문학을 혐오했던 나보코프에게 있어 자신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작품 속에 숨기는 것은 필연적인 선택이었다고도 하겠다. 은밀함이라는 소설의 주된 정서를 형식이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소녀와의 금지된 에로스가 전면적으로 표면화되어 강조되고 논란의 중심에 놓일수록 자신이 소설을 통해 정말로 하려던 이야기들, 사회비판적이고 조금은 모순적인 미국적 질서를 풍자하는 시선은 감추어진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평생을 타지에서 보내야 했던 디아스포라였고, 러시아혁명, 나치의 박해, 매카시즘의 광풍 11) 속에서 견뎌내야 했던 구 러시아의 귀족이 자연스레 소구했던 방어기제 였으리라 보인다. 이는 그가 『롤리타』를 다른 대륙의 프랑스에서 처음 발표하며 가명까지도 고려했던 이유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이 책으로 인해 비난을 뒤집어쓰거나 자칫하면 교수직에서 파면 당할지 모른다는 점을 걱정 12) 했던 점에서 짐작 가능하다.

    롤리타가 상업적 성공을 거두자 그는 대학 강의와 나비 수집 표본 들을 뒤로 하고 20년 이상을 살았던 미국을 떠나 스위스로 이주하여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비록 『롤리타』라는 현란한 어휘의 연가를 남겼지만, 그의 마음은 제 2의 모국 미국이 아니라 더편안한 곳에 묻히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3)그 후 나보코프는 미국을 떠나 말년 20년가량을 스위스에서 보냈다.  4)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김진준 옮김, 『롤리타』, 문학동네, 2013, 501쪽.  5)위의 책, 411쪽.  6)프리드리히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21세기에야 자신의 사상이 제대로 이해되고 보편화될 것이라 주장했다.  7)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앞의 책, 509쪽.  8)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위의 책, 427쪽.  9)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앞의 책, 480쪽.  10)이 표현은 영화 <롤리타>에서 퀼티가 험버트를 향해 말하는 대사 속에서 몇 번이나 반복된다. 퀼티는 “우리처럼 정상적인 사람”이나 “선생님처럼 정상적인 분”이라는 말로 자신과 험버트가 똑같이 비정상의 영역에 속해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냈다.  11)매카시즘이 미국 전역을 경직시켰던 것이 대략 1950년부터 1956년까지였고, 하워드 혹스(Howard Hawks)가 공산주의자를 상징하는 외계괴물을 등장시킨 영화 를 만들어 상영한 것이 1951년이다. 리차드 콘돈의 소설 『맨츄리언 캔디데이트(Manchurian Candidate)』가 발표되어 인기를 얻은 것이 1959년이었으니 1950 년 이후 미국인들의 저변에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커다란 공포와 적대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의 본산이 된 나라출신의 이민자가 겪었을 제 2의 조국에 대한 배신감 이나 심리적 압박이 얼마나 컸을는지는 별다른 부연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12)모리스 쿠튀리에 책임편집, 임미경 옮김, 『롤리타』, 이룸, 2003. 12쪽.

    3. 큐브릭의 영화 <롤리타> 분석

    스탠리 큐브릭은 스튜디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게 <롤리타>를 만들기 위해 영국으로 이주했고 이후 그곳에 정착하였다. 사라진 조국과 디아스포라가 나보코프에게 소설 『롤리타』라는 작품을 쓰도록 만들었 다면. <롤리타>를 만들기 위해 큐브릭은 스스로 디아스포라의 길에 오른 것이다. 스탠리 큐브릭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에 관심을 보인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둘 다 체스 광이었고 작품 속에서 웃음을 중요하게 다룬다는 사실 외에도 두 사람에게는 유사한 점이 많았다. 한 사람의 디아스포라였던 나보코프처럼 큐브릭도이 작품을 영화화하기 위해 영국으로 이주하였으며, 그의 예술에 대한 지극한 애정과 자부심은 험버트가 롤리타에게 품었던 연정의 크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소설의 영화화를 결정하고, 나보코프에게 시나리오 작업 까지 맡길 만큼 큐브릭이 매료되었던 진짜 이유는 『롤리타』의 인물들이 선한 얼굴의 가면 사이로 종종 내비치는 과오와 기벽, 괴물에 가까울 만큼 큰 욕망 때문일 것이다. <스팔타커스(Spartacus)>를 감독하며 그가 제작진들과 마찰을 빚었던 것이 주인공 스팔타커스에게 더인간적인 약점을 부여하고자 하는 고집 때문이었을 만큼, 스탠리 큐브 릭은 영화 속 인물에게 절대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할리우드 거의 전체가 비극의 주인공에게 연민어린 시선을 던지거나 영웅을 찬미하는 서사를 고착화시키던 시기에 스탠리 큐브릭이 원했던 것은 이처럼 다른 스타일의 이야기였다. 그가 영화를 만들면서 중점을 두었던 것은 관계 내에서 힘의 우위를 가진 이와 그렇지 못한 이 간의 대립, 그리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모순과 비극을 그리는 일이었다. 큐브 릭의 필모그래피 내내, 권력의 균형추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인물 들의 행동과 대화는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다루어진다.

    문명초기의 유인원부터 21세기의 인간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모든 관계가 뼈다귀(권력이나 정보)를 가진 자와 빼앗으려는 자간의 쟁탈전이 라는 그의 주장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저 유명한 뼈다귀와 우주선의 디졸브 씬에 함축적으로 담겨있다. 또 <배리 린든>의 우울한 라스트 씬에 자막으로 삽입된 “이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라는 조롱 에서 알 수 있듯이, 큐브릭은 ‘모두가 평등한 사회’라는 20세기의 담론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시각은 분명 타당한 면이 있었다. 13)

    금지된 에로스를 향한 끝없는 열망을 전면에 내세운 원작소설과 달리, 영화 <롤리타>는 오프닝 시퀀스를 제외한다면 성적인 요소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블랙코미디다. 큐브릭은 원작소설의 전반부에 길게 서술된 험버트의 사춘기체험, 그로 인해 형성된 성도착증, 그 성적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한 대체재를 찾는 노력들 따위를 과감히 생략함으로써 주인공을 옹호하기 위한 일체의 변명을 제거해버렸다. 덕분에 흥미롭게도 <롤리타>는 큐브릭이 만든 ‘신뢰할만한 화자가 완전히 부재 한’ 첫 번째 영화가 되었다.

    니콜라우스 슈뢰더를 포함한 몇몇 평론가들은 큐브릭의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로 시점 인물의 부재를 꼽는다. 관객이 서사에 등장하는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할만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에게 감정을 이입함으로써 내러티브에 몰입하게 되는 시점 인물은 고대 그리스 비극부터 이어져오던 서사의 오랜 전통이었다. 『시학』에서 아리스 토텔레스는 성공적인 비극을 만들어내기 위한 주인공의 요건으로 ‘열 등하지 않은 훌륭한 인물’이어야 한다거나, ‘비극의 원인이 비행이 아니라 중대한 과실’이어야 한다거나 하는 까다로운 규칙을 제시해두기도 했다. 14) 그만큼 주인공과 관객의 감정을 연결하는 것은 성공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내는데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어왔다.

    큐브릭 역시 그의 초기작품들을 만드는 동안에는 이 해묵은 서사의 대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였었다. 그의 본격적인 데뷔 작이라 할 56년 작 <킬링(The Killing)>이나 57년작 <영광의 길(Path of Glory)>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창조한 주인공들은 약하게나마 전형성을 갖추고 있었다. 대자본이 투입되어 대본수정이나 편집에 제약이 있었던 <스팔타커스>는 아예 비극적 영웅을 전면에 내세운 할리우드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롤리타>는 네 명의 주인공 중 누구하나 행복해지지 않는 비극이지만, 관객은 그 중 아무에게서도 감독의 연민어린 시선을 발견할 수 없다. 이 영화는 결코 선인이라 할 수 없는 험버트, 퀼티, 샬롯, 롤리타가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려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 이다. 이들 네 명은 모두 복잡하게 얽힌 채 관계를 맺고 있으며 서로를 억압하고 소유하기 위해 타인을 배제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바로 전 세계를 뒤흔든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의 경험 속에서 야기된 가치관의 혼란과 철학의 상실에 대한 풍자였으며, 그렇게 여러 차례나 비극을 겪으면서도 반성하지 않는 사회(특히 미국)에 대한 경고였다.

    이것은 항상 영화 속에서 당대의 미국이 가진 정치적 문제를 비판 적인 시각에서 다루고자 했던 큐브릭에게 『롤리타』가 매력적인 재료로 느껴졌을 두 번째 큰 이유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반전의 메시지를 내포한 이 소설에는, 2차 대전 중에 태어나서 자란 미국의 ‘방탕한’ 전쟁둥이들과 기성세대들 사이의 극한 대립,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가장을 잃고 불행해지는 가정들의 문제, 나아가서는 미국이 자랑스럽게 말하는 ‘자유국가’ 15) 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까지도 담겨 있다. 큐브릭은 가장의 상실이 가져오는 불행을, 문란하게 농락당하는 성(性)의 관점으로 접근해 감각적으로 서술했으며, 이 같은 표면서사는 평론가들과 관객에게 불편함을 주고 논란을 일으켰다. 롤리타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이 누구였는지를 들어버린 험버트의 심정처럼 때로 진실은 꽤나 불편한 것이다.

    자신의 영화에 대해 사회가 격렬하게 반응을 하고 찬반의 목소리가 시끄러워지는 것에 대해 큐브릭이 크게 두려워하거나 우려했던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는 고의적이라 보일 만큼 논란의 중심에 서는 영화들을 다수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그가 영화라는 예술매체를 통해 시도했던 모종의 저항이라 이해할 수 있다. 가치관이 획일화되도록 조작되고 통제받는 사회에 대한 그의 고발과 반항은 험버트가 늦은 밤모르는 감시자로부터 전화를 받는 씬을 통해 은유적으로 제시되었고, 이 주제는 훗날 <시계태엽오렌지(A Clockwork Orange)>등을 통해 보다 감각적으로 구체화되었다.

    큐브릭처럼 지금/여기의 알레고리를 스크린 위에 옮기려는 적극적인 작가가 있듯이, 저항의 대척점에는 당연한 것처럼 규제가 있다. 현대에 예술의 표현에서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정한다는 것, 그것도 단순히 이론적 권장이 아닌 실질적인 규제가 이루어진 다는 발상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지만 1950년대와 60년대의 미국에서는 그러한 통제가 엄연히 실제로 존재했다. 당시 예술의 저항을 무화 시킴으로써 체제와 그 뒤에 숨은 위법적 현실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가 구체화된 사례들 중 가장 유명한 이름은 아마도 윌 H. 헤이즈의 이름을 딴 헤이즈 법(Hays code)일 것이다. 한때 미 공화당 의장이었던 헤이즈는 1922년부터 미국 영화제작자 및 배급자 협회의 초대 의장으로 추대를 받아 ‘영화계의 이미지를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일의 대가로 월 10만 달러의 급여를 받았다. 평균적인 영화입장권 가격이 25센트였던 시절 그 엄청난 보수를 받으며 그는 13개의 ‘금지’ 조항과 25개의 ‘조심해야 할’ 조항들 16) 을 만들어냈고 영화를 창작하는 이들에게 그것의 준수를 강요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다수의 영화들은 대중을 기만하고 그들에게 환상을 심는 아편의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사회의식을 담고 있었다. 원작소설에서 롤리타가 사라진 이후 험버트가 기대어 심리적 안정을 얻었던 여인 리타는, 그 이름에서 연상할 수 있듯 당시 최고의 인기여배우였던 리타 헤이워드로 대표되는 전후 할리우드 영화를 상징 한다. 대중문화에서 비추는 미국인의 삶은 언제나 시속 90킬로미터로 달리는 그녀의 멋진 소형 쿠페처럼 비정상적인 안정과 풍요로움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것은 ‘샬롯이 헤겔로 보일만큼’ 멍청했다.

    <롤리타> 역시 미국의 극장에서 상영하기 위해서는 헤이즈 법의 검열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나보코프가 정성들여 썼던 시나리오에서 에로틱한 장면들이 모두 삭제되었고, 험버트의 성도착증은 은유적으로만 표현되었으며, 롤리타는 소설보다 나이를 더 먹은 소녀로 설정되었 다. 이러한 피치 못했던 변화들은 이후 오랫동안 큐브릭이 스크린 위로 옮긴 <롤리타>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나보코프의 원작에서 그가 만들어낸 열정과 에로틱한 에너지, 광기에 매료되었던 독자들이라면, 또는 요정과 인간의 중간 정도에 속하는 ‘님펫’의 신화적 이미지에 사로잡혔던 팬들이라면, 큐브릭의 영화가 불만족스러운 결과물이었으리라는 점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애초에 원작소설이 단순한 소아성애자의 엽기행각을 말하는 포르노그래피가 아니었기에 가치가 있었던 것처럼, 영화 <롤리타>가 추구했던 주제와 형식은 에로스의 유무와는 무관하게 의미를 가진다.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들이 일그러진 욕망에 의해 파괴되는 과정을 우스꽝스럽게 그려낸 이 영화는, 할리우드식의 거대한 악의 세력이 굳이 개입하지 않더라도 현대서구의 이기주의가 얼마나 맹목적으로 비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를 말한다. 험버트와 샬롯, 롤리타와 퀼티, 이 네 명의 등장인물들이 타인의 약점을 이용해 종속화하려다가 비참한 종말을 맞는 <롤리타>를 보면서 그들의 어리석음을 통감하는 관객 들에게 큐브릭은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씬이나 대사를 통해 과제를 남겨두었다. 전쟁 후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미국으로 이주하는 유럽인소녀 가정부들, 그리고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었다고는 하지만 당시까지도 늘 미국 경제의 최하층에 속했던 흑인일꾼들. 감시의 대상이어서 마음을 졸이고 살아야 하는 이민자들, 전쟁에 동원되어 찰리처럼 사망 하거나 빌이나 딕처럼 신체를 훼손당한 후에야 돌아온 사람들, 그들은 모두 미국 백인중심의 편의주의에 이용당하는 피해자들이었다. 큐브릭은 영화의 서두에 험버트가 퀼티에게 읽힌 T. S. 엘리엇의 시를 모방 인용한 사형선고문을 통해 그것이 왜 죄인가를 적시한다.

    다시 환기하자면 험버트가 판결한 이 죄의 형량은 사형이었다.

    13)노만 쥬이슨(Norman Jewison)의 79년 작 <용감한 변호사(…And Justice for All)>의 오프닝 씬, 높은 계단 위에서 굽어보는 법원의 모습에서 고발하고 있듯 세상은 선고하는 자와 받아들이는 자의 지위를 엄격하게 나눈다. 대중문화에 대해 탁월한 분석을 제시해온 프레드릭 제임슨은, 20세기 중반 이후 서구 자유주의 ‘평등’ 문화가 확산되는 것을 ‘미 국적 신화’라고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했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무기 고가 보유하고 있는 가장 영속적인 테마이자 자유주의와 반공산주의 수사에 의해 개발된 가장 효과적인 주장 가운데 하나가 계급 소멸의 개념이다.”(프레드릭 제임슨, 남인영 옮김, 『보이는 것의 날인』, 한나래, 2003, 79쪽.)  14)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시학』, 문예출판사, 2004, 77-83쪽 참조.  15)소설과 영화에서 롤리타는 행동을 제약당할 때마다 여기는 “Free country”라며 항의한다.  16)이 규준에 따르면 영화에서 알몸은 물론 과열된 키스 씬을 오래 비추는 장면도 불가했 고, 관리는 희화화되어서는 안 되는 대상이었으며,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범죄에 동정 적인 시선을 주는 것과, (흑인 노예는 괜찮지만)백인 노예가 등장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문란하고 추문이 많았던 20년대 말 할리우드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사업을 사회의 비판적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시작된 이 헤이즈 법은 정부의 묵인, 일부 종교지도자들의 편협한 성향이나 HUAC 활동으로 대변되는 매카시즘 열풍 등의 보조적 원인에 힘입어 30년 이상 존속되며 미국 영화인들의 창작 자유를 제한했던 대표적인 악법이었다.  17)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앞의 책, 481쪽

    4. 활자와 이미지, 그 간극

    영화와 소설 서사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으로 기억되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사람들이 영화에서 기억하는 것은 물론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서사를 기억하게 하는 것은 얼굴이나 목소리⋅음악⋅시퀀스의 색조⋅혹은 음향⋅분위기 등에 의해서이다. 18) 나보코프가 소설 속에서 험버트의 입을 빌려 말하는 롤리타와 애너벨에 대한 기억의 차이 는, 소설과 영화가 어떻게 수용자에게 인식되고 다시 기억 속에서 재현되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그의 말처럼, 소설은 애너벨에 관한 기억처럼 문장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영화는 롤리타에 관한 기억처럼 이미지로 재현된다. 『롤리타』라는 소설에 담긴 미국의 정서 그 자체가 할리우드와 깊게 연관되어 있을 만큼, 나보코프는 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시대에 상업영화의 가장 커다란 생산지이자 소비지에서 살았던 그는 셜리 템플로부터 비롯된 아역들이 영화산업의 중앙에서 이용되고 보호받지 못한 채 소비되는 모습을 목격하였고, 할리우드의 스타들이 십대들에게 얼마나 막강한 영향을 끼치는지 삶 속에서 경험했다. 나보코프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 롤리타와 험버트가 함께 200편 가까운 많은 영화를 보는 것으로 설정하여 전후세대 미국인들의 삶과 영화의 밀접한 관계를 표현하였으며, 리타라는 인물을 통해 위안을 얻는 것으로 설정함으로써그 자신 역시 영화를 보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음을 내비쳤다.

       1) 묘사와 제시

    이러한 관심들에도 불구하고 나보코프가 썼던 시나리오 그 자체는 영화화되기에 조금은 부적절한 면이 있었고, 큐브릭은 그것을 다시 수정하여야 했다. 처음 나보코프가 시나리오에 기술한 장면과 큐브릭의 영화에서 실제로 재현된 씬을 비교해보면 뛰어난 소설가가 자신의 작품을 운동하는 프레임 속에 옮겨 넣는 작업에 얼마나 서툴렀는가가 드러난다. 다음은 험버트와 롤리타가 처음 만나기 직전의 장면에 대한시나리오의 설명이다.

    롤리타가 등장하는 불과 몇 초의 순간을 극적으로 제시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나보코프가 선택한 방법은 은유가 가득한 환상적인 영상들이었다. 하지만 큐브릭은 그렇게 복잡한 화면의 전환을 채택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영화가 가진 몇 가지 장점을 사용하여 서사를 명료하게 진행시키면서도 극적 효과를 높였다. 샬롯과 험버트가 흥정을 하던 어두운 실내와 대비되는 햇살 가득한 정원, 그곳에서 들려오는 경쾌한 음악, 샬롯의 대사가 이어지는 도중 갑자기 교체된 쇼트에는 반라의 어린 소녀가 환한 풀밭 위에 앉아 있고, 그녀를 향해 걸어 나오는 험버트의 클로즈업된 얼굴에 마치 롤리타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조명이 쏟아진다. 입을 벌린 채 빛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험버트의 표정과 명암의 대비는 ‘동화에 나오는 유모’ 영상을 삽입하는 것보다 몇 배나 선명하게 그가 롤리타를 처음 만났을 때 받은 충격과 감정을 관객들에게 전달할 것이다.

    서사의 극적인 효과를 조작하기 위해 두 예술가가 취했던 이러한 접근방법의 차이는 어쩌면 영화와 소설의 서술법이 어떻게 다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례일지도 모른다. 문학에서 묘사는 정적(靜的)이 다. 시간에 따른 행위를 설명해주는 서술과는 다르게 묘사가 진행되는 동안 시간은 계류한다. 제라르 쥬네트는 묘사를 “시간의 흐름을 중지 시키는 듯하고 공간 속에 서술을 펼치는데 기여하는” 21) 요소로 정의한다. 서술에 속하지 않는 시간 외의 어느 곳에 위치시킬 수 있는 소설의 경우와 달리, 영화에서의 묘사는 스크린 위에 자연스럽게 제시되는 영상이고 일반적으로 사건의 진행과 함께 제시된다. 다시 말해 대개의 경우 영화의 묘사는 서술의 속도에 영향을 주지 않고 진행되는 것이다.

    그런 일들이 가능한 이유는 영화가 가진 시각 예술의 성격 때문이다. 영화의 쇼트는 소설의 한 페이지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단 시간에 전달할 수 있고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으며, 대립과 압박, 집중과 분산 등의 추상적인 감정까지도 구도와 분할, 색과 조명의 배치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 나보코프가 소설에서 공주의 유모 은유 뿐아니라 ‘리비에라의 연인’, ‘꿀빛으로 물든 가녀린 어깨’, ‘맨살을 드러낸 매끄럽고 유연한 등’, ‘풋가슴’ 등 한 페이지에 걸쳐 늘어놓은 수식어들은 모두 여배우 수 리온(Sue Lyon)의 모습으로 대체되었다. 이간단한 시각적 재현은 영화만이 가진 강점인 동시에,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가 가진 분명한 약점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소설이 영화화될 때 작가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인물들은 특정한 배우를 통해 구체적으로 재현되어야 하는데, 이 과정이 언제나 순조로운 것은 아니 다. 22) 나보코프의 상상 속에서는 12살의 롤리타가 아이 같은 순수함과 치명적인 성적매력을 동시에 가질 수도 있고, 그녀의 모든 행동이 사랑에 빠진 험버트의 눈을 통해 서술되기 때문에 실제 이상으로 매력적일 수 있다. 그리고 소설 속의 인물은 작가가 원하는 대로 나이를 먹고 아름다워지기도 초라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12세부터 14세, 17세 임산부까지의 일관적이면서도 미묘하게 변화된 외모의 롤리타를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또 12세의 어린이와 중년남자가 성적 긴장감을 만든다는 것은 당시의 검열기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무모한 행위였다.

    큐브릭의 <롤리타>를 비판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너무 성인 같은 롤리타’의 역할은 그런 이유들로 만들어졌다. 캐스팅 당시 14세였고 자신의 나이보다 성숙해 보이는 외모를 지닌 수 리온에게 롤리타의 역할을 맡겼는데도 이 영화는 개봉 당시 뜨거운 도덕적 논란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님펫을 원하던 팬들과 엄숙한 질서를 바라는 집단으로부터 모두 비난을 받은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큐브릭과 나보코프가 16세처럼 보이는 14세의 소녀로 롤리타의 신화를 물화(物化)해야 했던 이유는, 영화가 구체적인 도상기호를 통해서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고, 행동과 상황의 제시를 통해 이야기를 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제약이 큐브릭에게 상당한 불만이었을 것이란 점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후 <시계태엽 오렌지>나 <아이즈 와이드샷>에서 보이는 과도한 노출과 에로스는 <롤리타>에서 표현하지 못했던 장면들에 대한 향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설을 영화화할 때 고유한 시각적 구체성이 문제를 야기하는 또다른 경우는 인물의 성격설정에서 발견된다. 나보코프의 소설 속에서 롤리타는 모호한 소녀다. 원작에서 그 어린 님펫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느껴지는지에 대한 묘사가 엄청난 양으로 존재하는 것에 비해 정작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거의 기술되어 있지 않다. 특히 험버 트와 금단의 관계를 갖고, 어머니 샬롯의 사망을 통보받은 이후에는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하다. 이처럼 그녀의 내면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 다는 것은 두 가지 사실에 대한 형식적 알레고리이다. 첫째 롤리타의 수수께끼 같은 특성이다. (이 부분을 영화에서는 험버트가 퀼티를 죽이는 플롯을 먼저 배치하여 미스터리적 극의 형식을 취하는 것으로 대체하였다.) 둘째는 험버트가 자신의 욕망(그녀의 육체)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의 욕망에는 무관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두 인물이 종종 한 쇼트 내에 위치해야 하는 영화에서는 이러한 형식을 표현하는데 분명한 한계가 도출된다. 그래서 큐브릭은 <롤리타>를 만들면서 때때로 원작소설에서는 생략되어있는 인물의 행동까지도 상상하여 삽입해야 했다. 원작소설에는 설명되어 있지 않은롤리타의 평상시 모습들을 구체화하면서 그녀의 성격은 조금 더 분명 해지고 가시적으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큐브릭 특유의 연민이 없는 시선이 도입되자, 원작소설보다 영화 <롤리타>의 님펫이 조금 더 밉살스럽고 사악해 보이는 결과를 낳았다.

       2) 시간과 검열의 제약

    영화에는 시간의 제약이 있다. 삼부작(trilogy)으로 애초부터 기획되는 시리즈가 크게 유행하고 있으며, 6부작의 <스타워즈>, 8편에 달하는 <해리 포터>까지 등장한 현재에는, 그 의미가 약간 희석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영화를 상영하는 시간은 두 시간 내외로 여겨진다. 그것은 영화가 가진 상업적 측면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다. 대중들의 기대, 인간의 생리현상, 상영관의 수익, 제작비 등의 문제는 영화의 분량을 제한한다. 한꺼번에 많은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영상의 특성을 감안 한다고 해도 이러한 제약은 극복하기 쉽지 않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영화 예술가들은 보다 짧은 시간 동안 더욱 많은 메시지를 텍스트 내에 담을 수 있는 기법들을 개발해왔다. 숏의 삽입 순서와 관계, 프레임 내의 구도, 색깔과 명암, 배경음, 인물과의 거리에 이르 기까지 영화의 수많은 표현 기법들은 대중들의 수용능력에 맞춰 점점 섬세해지고 발전해왔다.

    스스로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고 밝혔던 나보코프가 큐브릭의 의뢰를 받아 쓴 시나리오는 영화로 만들면 거의 4시간 분량이 될 지경이었다. 1974년에 출간된 <롤리타>의 시나리오 서문에서 나보코프가 별로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인정했듯이 큐브릭은 방대한 양의 시나리오 중에서 ‘몇 개의 조각 장면’만을 썼을 뿐이라 하겠다. 23) 큐브릭에 의해 수정된 <롤리타>에는 소설과 시나리오의 에로틱한 장면들이 모두 빠지고 변태적인 관계나 성적인 표현은 은유적으로만 암시되었는데, 24)당시의 검열 수준을 감안한다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대신에 큐브릭은 원작소설에도 없고, 나보코프가 쓴 시나리오에도 없는 독특하고 인상적인 오프닝 씬을 독자적으로 창조하여 이것으로 이 영화의 전체적인 성격을 함축적으로 제시해주었다. 소녀의 조그만 발에 성인남자의 투박한 손이 페디큐어를 바르는 이 오프닝 씬은 앞서 나보코프가 풍부한 언어로 전달하려 했던 많은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동시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작은 소녀의 발에 어른을 위한 장식을 한다는 것은 장차 이어질 스토리가 부자연스러운 것이고 금지된 관계여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시도임을 상징한다. 또 이들이 유희 삼아 시작한 성적인 접촉이 소녀에게는 발가락 사이에 끼워진 솜처럼 불편한 억압이 될 것이고, 남자에게도 즐겁지만은 않은 의무가 되리라는 예언이기도 하다. 이 널리 알려진 장면은 훗날 타란티노에 의해 <펄프픽션(Pulp Fiction)>에서 발마사지라는 표현으로 인유되었다.

    은유를 통해 긴 설명 없이도 함축적으로 상황을 제시하고 동시에 검열을 피하는 수법은 영화초반 한 번 더 등장한다. 하숙집을 결정한 시퀀스가 지나간 후, 화면에 갑자기 붕대를 푼 괴물의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드라이브 인 극장에서 모녀와 험버트가 함께 보는 이 괴물영 화는, 험버트의 점잖은 외양 뒤에 감춰진 괴물적인 취향을 의미하며 동시에 이들의 욕망이 일그러지고 병적인 형태의 관계로 진행될 것임을 응축하여 암시한다. 험버트를 가운데 두고 앉은 샬롯과 롤리타가 무서운 장면이 등장할 때마다 손을 뻗어 험버트의 손을 쥐다가, 결국은 모녀의 손이 맞닿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연적이 된 샬롯과 롤리타가 서로의 마음을 들키고 견제하게 될 것이라는 복선이다. 나보코프가 원작소설에서 11챕터 거의 전체를 사용하여 묘사하려 했던 이 같은 심리적 움직임이 아주 짧은 자동차극장의 시퀀스에 담긴 것이다.

    단순히 검열을 피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에서 소설 『롤리타』의 많은 부분들이 과감하게 생략되고 무시되었다. 원작소설의 서두는 출판업자가 험버트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하는 가짜 편지의 장황한 설명으로 시작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인물도 그의 목소리로 전개되는 나레이션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스토리를 명확 하고 단순화시키기 위한 작업이었는데, 자신을 옹호하기 위해 거짓 화자를 내세웠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착각과 혼동으로 인해 점차 그정체가 드러나는 형식은, 두 시간분량의 영화에서 시도하기에는 부담 스러운 실험이었고 반드시 필요한 가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사라져버린 감성들도 존재한다. 그것은 어쩌면 소설 『롤리타』에는 있고 영화에는 없는 특별한 정서일는지도 모른다. 원작소설을 읽지 않은 채 오로지 영화만을 본 관객들이라면 험버트가 오랜 기간 심각한 페도필리아(pedophilia) 25) 의 열병을 앓아 왔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또 여느 사람들과는 다르게 아주 사소하고 개인적인 특별한 경우에만 성적인 욕망을 느끼는 험버트를 서술하기 위해 나보코프가 동원했던 풍부한 수사나, 수많은 역사적 사례들 역시 빠르게 지나가는 한 줄의 대사만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문학적 정서였다고 하겠다.

    다양하게 인용된 많은 작가와 작품들은 단순히 어린 소녀에 집착하는 성적 취향이 과거부터 허락되어온 즐거움이라는 변명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보코프가 『롤리타』라는 한 편의 소설을 써내기 위해 먼 과거부터 취해왔던 문학적이고 지적인 자양분들을 은근히 드러냄으로써 밝힌 작가 자신의 노력의 기록들인 것이다. 고대의 왕들, 보들레르, 바이런, 장 콕토, 도스토에프스키, 앙드레 지드, 니콜라이 고골리, 에드거 알란 포, 랭보, 차이코프스키, 마르셀 프루스트 그리고 그외에도 실로 무수한 실제사례의 증인들과 그들의 문학적 유산을 가지고 벌였던 언어유희의 즐거움은 영화 내에서는 상당부분 사라졌다.

    대신 큐브릭이 내세웠던 것은 오로지 영화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예술적 노력과 고민의 기록이었다. 사진가로서 경력을 시작했던 큐브 릭은 빼어난 미장센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영화<롤리타>에서 그가 중점을 두었던 것은 구도를 통한 심리묘사였다. 덕분에 인물들 간의 관계가 매우 복잡하게 변화하는 이 영화에서 매순간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가 하는 점은 거의 대부분 프레임내의 구도를 통해 파악이 가능하다.

    먼저 스탠리 큐브릭은 관계의 우위를 점유하고 있는 이가 쇼트 내에서 더 높은 위치에 서도록 배치해두었다. 롤리타와 험버트가 호텔에서 함께 처음으로 밤을 보낼 때, 침대에 누운 롤리타와 화장실에 우뚝 선 험버트는 매우 선명한 상징성을 보인다. 두 인물 간의 힘의 차이는 프레임 속에서 보이는 두 인물의 물리적 높이차이만큼이나 확연 하다. 그러나 이때 ‘경찰’, ‘타인’ 등의 어휘가 개입되고 결국 시퀸스의 결말에 이르러 위축된 험버트는 납작해진 간이침대에서 잠들게 된다. 험버트와 팽팽히 대립하던 샬롯이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한 씬에서도 바닥에 누운 피해자, 길에 걸터앉은 가해자, 어리둥절한 채 서 있는 험버트의 구도는 그들이 그 당시 가지고 있는 힘의 크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반면 파티 씬에서는 험버트를 가운데 앉히고 주변에 다른 인물들이 늘어선 중앙 집중형 구도를 취했다. 이는 험버트가 샬롯과 그 친구들로부터 심리적 압박을 받아 곤경에 처해있음을 드러낸다.

       3) 기호와 코드의 활용

    영화의 표현을 더욱 함축시켜 시간의 제약을 극복하는 서술방법으로 상징적 기호와 코드의 활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영화텍스트는 기호들로 이루어진 분절적 텍스트이자 동시에 텍스트자체가 의미를 직접 가지는 비분절적 텍스트이다. 영화의 스토리와 영화의 쇼트에 배치된 기호가 말하는 바는 각자 다를 수 있다. 26) 물론 역의 경우로 쇼트의 기호가 영화의 스토리를 지원하여 더 선명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영화 <롤리타>의 여러 부분에서 우리는 앞서 거론했던 구도의 문제를 포함하여 큐브릭 영화 특유의 코드화된 기호 들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이 영화를 기점으로 이후 큐브릭의 표현기법이 점차 초현실주 의적인 방향으로 변환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롤리타>의 기호 사용은 면밀히 살펴볼만 하다. 선글라스와 안경의 기호나 특유의 응시 (Kubrick Stare)처럼 이 영화를 통해 큐브릭이 획득한 여러 기호와 그것에 연결된 코드들은 이후 그의 영화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먼저 살펴볼 것은 파티라는 기호다. 그의 영화에서 파티가 하나의 고유한 장치로써 사용된 것은 57년 작<영광의 길>부터인데, <롤리타> 에도 원작소설에는 존재하지 않는 파티 시퀀스 가 배치되어 있다. 그의 영화에서 파티는 기대를 가졌던 주인공이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신분을 인지하거나 배제됨으로써 좌절하게 되는 장소인데, 이 기호는 <배리 린든>, <샤이닝>, <아이즈 와이드 샷> 등 장르를 달리하는 작품에서 꾸준히 사용되었다. <롤리타>의 파티에서 험버트는 흰 턱시도를 입고 있다. 온통 검은 수트와 드레스 뿐인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게 흰색 옷을 입은 사람들은 험버트 자신과 그가 갈망하는 롤리타 뿐이다. 이 시퀀스에서 숙맥처럼 앉은 험버트와 대조를 선명하게 이루는 인물은, 검은색 수트를 입고 검은 드레스의 여인과 능숙하게 춤을 추는 퀼티다. 험버트는 흠모하는 롤리타와 춤을 출 수도 없었고 마을 전체의 스타가 되지도 못한다. 그렇게 위축된 그에게 주어진 선물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어머니 샬롯과 밤을 보내라는 주변의 권유뿐 이다. 이 10여분짜리 시퀀스는 소설에서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복잡하게 소개되는 샬롯의 지인들, 롤리타의 친구들을 알리고 그들의 관계를 가시화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두 번째는 화장실이라는 공간이다. 큐브릭이 화장실을 기호로서 사용한 것은 <롤리타>가 처음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서 남성용 소변기가 없는 가정용 화장실을 자세히 보여줌으로써 가장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를 상징적으로 드러냈으며, 샬롯이 낯선 이방인 사내 앞에서 좌변기의 물을 내리는 장면을 통해 문란한 성적 관계가 이어질 것임을 암시하였 다. 이 영화는 화장실의 원형적 의미인 배설과 해소의 상징성을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품이었는데, 화장실에서 어린 롤리타에 대한 연정을 일기장에 적었던 험버트나 어머니의 죽음을 전해들은 롤리타가 모텔의 화장실에서 통곡하는 장면처럼, <롤리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여러 가지 감정을 그 내부에서 해소한다. 이후 큐브릭의 거의 모든 영화에서 화장실 시퀀스는 반드시 라고 할 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졌고, 그 안에서 점점 적체된 감정이 마침내 폭발하거나 해소되기 때문에 긴박감을 주는 무대이기도 했다. 87년 작 <풀메탈쟈켓>에서 훈련소의 긴 학대를 거쳐 살인기계로 거듭난 로렌스가 섬뜩한 눈빛으로 앉아 있다가 교관을 사살하는 장면에서도 화장실이 무대였다.

    세 번째는 눈의 코드이다. 큐브릭이 눈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롤리타>에서는 원작 소설과 마찬가지로 선글라스를 쓴 눈, 맨 눈, 안경을 쓴 눈의 세 가지 롤리타가 등장하는데, 그것들은 각각 내면을 알 수 없는 변수, 동물적인 인간, 계산적인 냉정함을 의미한다. 큐브릭은 다음 작품인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도 1인 3역을 맡았던 피터 셀러스(Peter Sellers)에게 이 기법을 그대로 사용할 만큼 눈의 기호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전통의 일부는 <아이즈 와이드 샷>에서도 발견된다. 27)

    마지막으로 <롤리타>에서 사용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기호는 가면이다. 붕대를 풀어 얼굴을 드러내는 프랑켄슈타인, 선글라스로 눈을 가린 롤리타, 연극무대에서 화려한 분장으로 소녀의 모습을 감춘 롤리타, 험버트가 정성껏 발라 롤리타의 발톱을 덮는 페디큐어, 총을 든 험버트 앞에서 자신의 악함을 감추려는 듯 흰 시트를 고대 로마인 들의 토가처럼 두르는 퀼티 등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로 다양한 수단의 가면을 동원하여 본질을 감춘다. 나보코프의 원작소설의 주제가 소녀와의 에로스라는 표면서사 뒤편에 깊게 숨었던 것과 밀접 하게 연관되어있는 부분이다.

    특히 영화에서 퀼티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1인칭을 채택한 원작소설에서는 시점 문제를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퀼티가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비밀스러운 인물이었던 것과 달리, 영화에서는 퀼티를 제2플롯의 중심인물로 배치하였다. 퀼티가 험버트의 죄의식과 어두운 욕망을 상징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그의 존재를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전달한 것은 소설보다는 영화 쪽이었다. 영화 속에서 그는 마치 그림자처럼 험버트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존재한다. 파티와 모텔, 비어즐리, 연극무대, 심지어 험버트의 집 안에도 들어와 있고, 자동차를 타고 달아나도 뒤를 쫓으며 먼 도피처의 가장 어두운 밤에도 전화로 존재를 알린다. 가장 은밀하면서도 소중한 공간 이라 할 수 있는 롤리타의 빈 방에서 혼자 남겨진 험버트가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에도 벽에 붙은 퀼티의 포스터는 그와 함께 있다.

    소설의 맨 처음과 마지막에 모두 ‘롤리타’라는 단어가 배치될 만큼 원작소설은 롤리타에 대한 사랑이 주된 정서였다면, 영화는 험버트가 외치는 퀼티(=guilty)로 시작하여 퀼티로 끝을 맺는 영화다. 그만큼 이영화에서 퀼티는 중요하게 다뤄지며, 그래서 사랑보다는 고발과 죄의 식의 환기를 더 큰 주제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퀼티가 인간의 어두운 욕망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험버트는 퀼티가 뒤집어 쓴 이성과 교양의 가면이다. 그 맥락에서 본다면 험버트의 처형은 가면이 오히려 본질을 살해하는 아이러니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만든 법과 사상이,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고 차별하는 뒤틀린 사회의 모습을 <롤리타>의 순환적 구조를 통해 큐브릭은 이야 기하고 있는 것이다.

    18)프랑시스 바누아, 송지연 옮김, 『영화와 문학의 서술학』, 동문선, 2003. 53쪽 참조.  19)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앞의 책, 21쪽.  20)모리스 쿠튀리에, 임미경 옮김, 『롤리타』, 2003, 64쪽.  21)프랑시스 바누아, 앞의 책, 101쪽.  22)리 차일드의 소설 『One Shot』이 영화화되면서 196cm의 키에 115kg의 몸무게를 가진 근육질 전사로 묘사되었던 잭 리처의 역할을 톰 크루즈가 맡아 논란이 있었던 것은 최근의 사례다.  23)모리스 쿠튀리에, 위의 책, 63∼65쪽 참조.  24)소설에서처럼 둘 사이의 성적유희에 대해 자세히 서술할 수 없었던 큐브릭은 카메라의 구도와 롤리타의 치마와 다리 방향으로 둘의 관계를 암시하기도 했다. 영화의 중반 험버트와 롤리타가 처음 한 방에 묵었을 때 롤리타는 치마를 험버트의 반대방향으로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비어즐리에 이주한 뒤 롤리타는 치마를 험버트의 얼굴로 향하고 누워 있다. 이는 두 사람의 성적으로 이미 익숙한 관계임을 암시한다.  25)사춘기 이전의 아이와의 행위나 그런 공상으로 성적 흥분을 얻는 성도착증의 형태  26)유리 띠냐노프 등 공저, 오종우 옮김, 『영화의 형식과 기호』, 열린책들, 2001. 208쪽.  27)박수미, 『종이에서 필름으로, 서사와 관념의 디아스포라』, 지금여기, 2012. 104∼105쪽 참조.

    5. 결론

    양자 간에 조금 차이가 있지만 <롤리타>는 원작소설과 영화 모두 금지된 형태의 에로스를 스토리로 제시하고 있고, 그 표면 서사를 통해 손상되어 버린 소중한 가치에 관한 파토스를 수용자들에게 전달한다. 이때 손상된 것은 꿈처럼 기억에 남은 유년의 추억이거나, 아름다웠던 미국독립의 정신이고, 포의 시를 통해 전달받았던 영어권 문화였으며, 한국전쟁에서 전사하기 전 소녀들에게 둘러싸여 지내던 찰리, 이탈리아 에서 잃은 빌의 팔, 다리를 절던 노신사, 전쟁 때문에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 그리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었던 아름다운 소녀의 영혼이다. 험버트가 로마인처럼 꾸민 퀼티를 처형하기 위해 중세풍의 초상화를 통과시켜야 했던 장면이 암시하듯, 인류는 긴 역사 동안 늘폭력으로 타자를 도구화하였고 그들의 소중한 아름다움을 파괴해왔다.

    소설을 영화화하는 작업은 창조이면서 동시에 파괴를 수반한다. 그것이 새로운 예술작품으로 거듭난다는 점에서 영화는 소설의 서사에또 다른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매체를 옮겨 서사를 수용 자들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종이 위에서 반짝이던 문장들의 빛을 바래게 하거나 심오한 주제의식을 송두리째 사라지게 만드는 위험성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와 소설은 그 유사점만큼이나 많은 차이를 가진 예술이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소설을 스크린 위에 재현 하는 작업은 조심스럽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원작의 문학성이 강하고, 복합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서사일 경우 그런 문제들은 더욱 크게 부각된다. 서술의 방법이나 표현의 형태처럼 기술적인 문제보다, 서사의 본질을 꿰뚫어 파악하기 위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화란 단순히 텍스트를 플롯의 순서대로 스크린 위에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 표면에 감춰진 정수를 시간-운동의 이미지로 재현해 낼 때 비로소 성공을 거두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롤리타』는 꽤나 난해한 소설이고, 영화화했을 때 실패할 위험성이 높은 텍스트이다. 자아도취적인 실험이나 불편을 야기하는 첨예한 고발 등은 현대의 대자본 상업영화 내에서는 점점 허용되기 어려워진다. 그만큼 폭넓은 대중들과 만날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그런 이미에서 어쩌면 큐브릭은 상업오락과 예술의 균형점을 외부의 간섭이 아니라 자의로 찾을 수 있었던 가장 최근의 사람인지도 모른다. 비록 짧은 역사를 가졌지만 영화의 서술법은 큐브릭과 같은 예술가들의 세공을 거치면서 더욱 정교해지고 점점 더 발전해왔다. 그 탁월함과 차이를 지적하여 언어로 설명하는 작업 역시 영화의 미래를 만드는데 아주 작은 기여가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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