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브리 애니메이션의 최근작 ‘코쿠리코 언덕에서’ 분석

Analysis on the recent Movie of Ghbli Anime, ‘Kokuriko-zaka k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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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e animation <Kokuriko-zaka kar> is most recently produced and was released in Korea in 2011'. Miyazaki Hayao planned this amimation, co-wrote the script and it was directed by his son Goro Miyazaki. This animation allows to predict a person who will succeeded to the next generation of Ghbli

    The animation is composed of three stories. First story is about a struggle between a school that tried to demolish and the student who keep the memories of seniors and to build a new building. The second story is about first love that aroused the suspicion of a brother and a sister. The third story is about a young girl who is waiting for her father.

    It can be considered to be special as Anime <Kokuriko-zaka kar>, narration of ‘only Japan’ that attempted to preserve space of ‘parents’ is compared with Korean dramas or narration in novels. Since there are some differences in struggle between <Winter Love Song> of our generation that turn the desire of a heroine that presents a model, saying, "Build my house" into reality of a new house ‘for only us’ and narration, this study tried to compare and analyze.

    Especially, while analyzing the meanings of space in <Kokuriko-zaka kar> such as ‘house’, ‘club hall’, ‘father’ and etc., the reasons why this work is considered as a work for ‘only Japan’ and ‘only Ghibli’. can be found in the aspects of the subject, characters, and background.

  • KEYWORD

    restoration of tradition , affection motive between a brother and a sister , a young girl who is the head of her household' , waiting for a father , structure of storytelling , group cosciousness , keep the memories , first love , Ghbli Anime

  • 1. 서론

    본 연구는 2011년 개봉되었던 지브리 스튜디오의 최근작인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중심 서사 구조와 상징 안에서 발견하는 집단의식을 살펴보고자한다.

    이 작품은 은퇴를 선언했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극본과 기획을 맡았고 지브리의 차세대 감독인 그의 아들인 미야자키 고로가 연출한 작품이다. 그동안의 작품에 비해 매우 소품이고 일상적인 서사라는 것을 쉽게 느끼게 되는데 지브리 스튜디오가 그동안 보여준 주제와 의식의 면에서 공통점은 무엇이고 공통점으로 파악되지 않는 지점은 무엇인지 중심 서사구조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서사 구조 분석은 첫째, ‘카르티에라탱’의 공간서사로서 그 복원을 둘러싼 학내 투쟁을 살펴볼 것이고 둘째, 남매간의 사랑 모티프가 서사에 발동한 추이를 파악할 것이며 셋째, 소녀의 ‘아버지 기다리기’의 소명이 갖는 의미를 찾아볼 것이다.

    특히 이 세 가지 중심서사는 모두 주인공인 소녀가 관찰자의 모습에서 주체로 나서거나 상대 혹은 집단과 함께 과업을 이루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주인공 주체적인 행동의 결과인지, 작가의 선망이 주인공을 통해 나타나는 대리자로서의 수동적 역할, 즉 판타지적 인물에 불과한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가적 작품으로 흥행과 작품성에서 모두 성공했으며, 그 양대 산맥인 다카하타 감독의 경우는 판타지를 거부하고 현실세계를 그려왔지만 그 역시 흥행과 작품성에서 모두 성공한 편이었다. 그런데 본고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최근작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한국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그리 큰 흥행을 하지못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지 서사구조와 서사에 흐르는 집단의식을 살펴봄으로써 작품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특징이 지브리 스튜디오의 이전 작품들과 어떻게 다른지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의 일련의 작품에서 보이는 서사구조와 집단의식이 환상을 걷어낸 일상 현실을 그려낸 이 작품에서 오히려 더욱 명확해 진 것은 아닌지 살펴보려 한다. 그렇다면 지브리 스튜디오의 화려하고 길었던 명망에 어두 운 그림자가 깃든 것 즉, 지브리 스튜디오의 서사구조와 의식이 보편 성이나 당대성으로부터 후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증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흔히 드라마 코드로 사용되어지고 있는 ‘남매간의 사랑 모티프’의 작동의 특징 뿐 아니라 특히 ‘집단’, ‘전통 복원’, ‘가업’, ‘개인의 역할을 다하며 아버지의 자리 남겨놓기 혹은 기다리기’, 그리고 ‘어머니 부재의 소녀’ 등의 원형적 상징이 나타나는데 각 지점을 서사구조 안에서 분석해보고자 한다.

    판타지를 걷어낸 이 작품이 오히려 그동안 지브리스 튜디오의 작품들(‘반딧불의 묘’, ‘추억은 방울방울’의 감독 다카하타도 있지만 작가와 총책임자로서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일련의 작품들)이 보여준 사상과 의식의 실체가 무엇인지 오히려 분명하게 알아낼 수 있는 작품으로서의 기능을 한다. 데뷔작이었던 전작 애니메이션 ‘게드 전기’에서 흥행 성적이 좋지 않았던 미야자키 고로(지브리 스튜디오의 차세대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의 연출력 이전에 작품 안에서 구현하려했던 서사 혹은 고로 자신은 미처 의식하지 못하였을지도 모르지만 관객의 눈으로 읽어낸 서사를 중심으로 분석하려 한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최근작인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중심서사와 상징을 살펴보고 그 내부에 작용하는 일본인의 집단의식의 내용과 관계를 분석하는 일은 일본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독특성을 인정받아온 지브리 스튜디오의 현재와 이후 그리고 그 역사까지도 다시 고찰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2. 카르티에라탱의 공간서사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중심서사는 무엇인가. 남매간의 사랑 모티프로서의 첫사랑의 이야기로 반듯한 여자주인공과 이성적이며 능력 있는 남자주인공이 등장하여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를 떠올리게도 한다.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할 때도 사춘기의 아픈 첫사랑이야기라고 홍보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러브스토리는 시간 배분이나 비중(갈등의 강도)에서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영화의 포스터도 마찬가지이다. 소녀가 언덕에서 깃발을 올리며 바다를 향한 모습인데, ‘깃발’은 ‘아버지’를 상징한다. 즉, 이 가정의 주인이며, 부재해도 살아있는, 그래서 언제나 아침 해가 떠오르듯 그를 올려드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영화는 감성적으로는 어린 시절 추억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 역시도 영화의 분량상 ‘카르티에라탱’의 공간 서사에 미치지 못한다. 즉 영화의 분량상 그리고 영화가 수행하며 이 루어내고 있는 중심 갈등과 사건은 이 ‘카르티에라탱’을 둘러싼 서사에서 발생한다. 그곳이 1963년도의 일본의 청(소)년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학교 당국의 철거방침에 대한 학생들의 해결과정은 어떠한가. 그리고 이 문제를 주인공은 어떻게 대응하고 목적을 성취해가는가 이다. 그동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 속 소녀주인공의 역할에 비하면 매우 과소하고 또한 혼자의 힘이 아닌 남자주인공의 보조 역할이라는 점에서도 특징적이다. 소녀의 감성과 지혜가 동원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에게는 그 수행과제가 절체절명의 것도 아니었다는 점도 특징이다.

    ‘카르티에라탱’은 프랑스 대학가의 건물을 모방한 것이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전쟁이 끝나고 경제부흥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1963년도인데, 이 ‘카르티에라탱’은 1950년대 이후 전후 실존주의철학과 유럽의 멜랑콜리한 문예가 수입되어 젊은이들의 청춘과 추억이 서린 곳이었을 것이다. 주인공 소녀의 이름은 ‘우미’이며 한편으로는 프랑스어의 ‘라 메르(바다)’에서 따온 별명 ‘메르’라고 불린다. 유럽과 프랑스풍을 옹호하는 낭만적인 성격의 주인공과 현실적이며 자기 성취가 강한 소녀의 어머니가 미국유학 중이라는 점도 의미 있게 읽힌다. 아버지를 상징하는 깃발이 화이트, 블루, 레드라는 점에서 작품은 프랑스, 즉 이국적인, 유럽의 문물과 예술을 지향하는 분위기를 풍기고 옹호한다. 그러나 작품의 현재는 일본이 패전 후 가난을 벗고 부유한 강국으로 세계에 그 실력을 뽐낼 동경올림픽을 앞두고 있다. 즉 세상은 낭만과 실존을 이야기하던 시기를 지나 근대화와 산업화, 경제부흥에 박차를 가해야 할 시기의 출발선에 놓여있다. 그러므로 자유와 낭만의 공간 ‘카르티에라탱’은 철거의 대상으로 지목될 수밖에 없는 구시대의 산물로 전락할 지경에 있는 것이다.

    한국의 대학생들에게도 추억의 공간이 있다. 1960년대에 서울대학교 문과대가 자리하던 마로니에공원은 시인들의 노래로, 소설가들의 공간으로 등장해왔다. 즉 작품 속에서 회자되고 회상되던 공간이다. 지금은 문예회관 극장이나 ‘학전’ 이란 커피집 등이 그나마 보존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코쿠리코 언덕에서’처럼 장소가 이전되거나 철거 혹은 구조 변경의 문제로 목숨을 걸고 집단투쟁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좀 더 가까운 예를 떠올려본다면, 학생운동의 절정기였던 1980년대의 대학교 동아리연합회 건물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변화하는 세상에 맞춰 경영상태가 좋은 학교부터 구조 변경이 시작되거나 아예 철거된 후 신축건물이 생겨났다. 학생 광장은 주차장이 되거나 문화상점이 밀집된 아케이드가 되었다. 1980년대 중후반의 한 여자대학에서는 학생관 앞의 소나무 숲을 밀어버리려던 학교 측에 학생들이 반발하고 나선 일도 있다. 학생들의 주장은, 학생관 앞은 정신대로 끌려간 학생을 기리며 그때마다 총장이 친히 나무 한 그루씩을 심어주었다 전해지는 치욕의 공간이어서 그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보존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집단소요사태를 발생한 일은 없는 듯 하다. 이렇다보니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중심서사 자체가 우리에게는 낯설다. 풋풋하고 서정적인 청소년 생활동화같은 작품에 선뜻 맘을 열기에 장애가 되는 요소이다.

    달리 생각해보면 지브리 스튜디오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꾸준히 산업화의 부정적 가치에 대비하여 자연 생태적 공간, 모성적 공간으로의 회귀갈망과 판타지(‘이웃집 토토로’, ‘붉은 돼지’ 등)를 보여줘 왔을 뿐만 아니라, 지브리 스튜디오의 양대 산맥인 다카하타 감독의 ‘추억은 방울방울’ 등에서 보이는 도시처녀 농촌으로 돌아가기 역시 추억과 기억을 보존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간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과 크게 다른 모습은 아니며 오히려 그 이전의 작품의 주제를 기억하고 소급할 수 있게 해준다.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서 이해하는 것이 우선일 듯 하여 영화에서 보여주는 배경을 다시 찾아본다. 어렵지 않게 영화 곳곳에서 거리나 건물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발견한다. 영화는 동경올림픽 한 해 전인 1963년이 배경이다. 포스터는 ‘1964년 도쿄 아름다운 도쿄에서 올림픽을 성공시키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대형선박이나 분주한 대기업 사무실의 모습이 당시 도약기의 일본을 그리고 있다. 이때는 국민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일해야 하며, 엄마가 부재한 집에서는 소녀가 그러해야하고, 대개 평범한 가정에서는 남편은 일하고 여자는 집안을 돌보고 시장의 주요소비자가 되는 ‘가정’이 대두되게 된다. 즉 산업이 부흥하려면 일하는 남편이 돌아와서 쉴, 혹은 근대의 교육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기거하는 하숙(주인공 소녀의 가정은 공동 집단 하숙이다)은 생산의 현장만큼 중요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카르티에라탱’ 같은 자유와 낭만의 공간보다도 산업현장같은 가정이 더욱 중요한 공간이 되는 것이다. 학교는 이제 낭만의 공간에서 산업역군을 길러내는 예비 산업현장의 모습으로 탈바꿈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전쟁의 시기에 한국에 물자를 보내면서 경제를 회복한 일본은 한편으로는 전사한 남자들을 기리면서 오히려 자신들은 전쟁의 피해자라는 생각으로 통일되고 가해의 역사는 자연스럽게 떠올리지 않는 것 같다.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부재한 남자들은 모두 한국전쟁 때 배를 타고 나갔다가 침몰된 경우이다. 이 배에는 미국의 군수물자가 실려 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 영화가 한국의 관객에게 그리 쑥 달갑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게 역사 속으로 침몰한 남자들은 이 영화의 소녀가 기다리는 아버지이며 마음속의 주인이며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실체이다. 그러므로 ‘카르티에라탱’이란 낭만적 공간을 사수하는 영화의 기본 갈등에 소녀 주인공은 보조적으로 참여하며, 오히려 소녀만의 주요한 목표는 ‘아버지 사수’ 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카르티에라탱의 자유와 낭만이라는 영혼과는 다른 즉, 전쟁과 경제부흥의 저 밑바닥의 희생자이자 언제나 그들을 떠올리면서 자신들의 삶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상징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여서 이 영화의 공간서사와 아버지의 상징 사이에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기도 한다.

    영화는 ‘남자어른’ 들이 ‘바다 사나이(해외무역의 일꾼)’로 나가거나, 노동 후 집에 들어와 한 잔 하며 텔레비전을 보며 쉬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반면에 주인공인 어린 (청)소녀는 하숙집의 책임자로서 새벽밥과 저녁밥 그리고 도시락 싸기 등 분주하기 그지없는 수행과제를 예의 단정함을 잃지 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마치 성직을 수행하듯 집안을 돌보고 하숙을 관리하는 그녀는 주요한 생산 활동의 주체로 충분하다. 농촌을 떠나 미대, 의대 등을 다니느라 하숙을 하게 된 예비전문지식인을 뒷바라지하는 그녀는 전문여성을 필요로 함과 동시에 그녀들을 돌보는 자기 역할에 충실한 모습, 즉 자기 자리에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는 과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여고생 이지만 공부하는 모습보다 밥 짓는 모습이 제일 많이 나온다. 그녀는 장차 ‘주부’들이 할 일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의 1960년대는 가난했고 추웠고 절망적이었다면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여자주인공의 집은 외할아버지가 운영하던 병원을 개조한 하숙집(여자대학생들의 하숙으로 경제가치가 생산되는 집)이며, 어머니는 미국에서 유학 중인 교수로 부유한 계층이 절약하고 사는 모습을 보인다. 소녀에게 집은 물려받은 자산이고, 이어가야 할 집으로 경제적 가치(동생 외에 할머니와 하숙의 식구들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를 생산하는 곳으로 그녀만의 소명이 부여된 공간이다.

    그러다 돈을 벌어오는 아버지, 살림살이를 하는 어머니의 역할 중심에 있던 소녀는 새로운 일을 부여받는다. 그녀에게 주어진 일은 학교 편집부의 일이고 카르티에라탱과의 만남이다. 집안에서의 그녀가 사회에서의 과제와 만날 때, 아버지가 아닌 연인을 만나게 된다. 하지 만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하숙집 식구들의 밥을 챙겨주느라 바빠도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 침착하게 학교에 등교하는 소녀에게는 사회에서 부여받은 일도 자신의 집을 돌보는 일 다음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연인도 아버지 다음으로 갈등의 요소가 된다. 언덕을 내려가는 것(공부하고 일하고 경제성장의 현장으로 모이기)보다 언덕을 오르는 일이 소녀에게 더 중요하다. 소녀가 ‘집’을 지켜내듯이 소녀가 속한 집단에서는 카르티에라탱이 중요하다. 즉 자신들이 지켜온 자유와 낭만, 그리고 선배들의 전통의 손길을 지켜내고 싶었던 것이다.

    본 논문 제 4장 ‘아버지 기다리기’에서 다시 분석할 내용이지만, 아버지의 부재와 상관없이 전통적으로 해 온 일, 과거의 아름다운 기억을 놓지 않고 이어가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의 복원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이 행동은 카르티에라탱의 복원과 관계 맺게 된다. 소녀가 학교에서 알게 된 곳은 학생들의 집이었던 카르티에라탱 이었던 것이다. 집이란 돌아가야 할 곳, 안식처, 존재감 확인의 장소로서의 역할을 갖는다. 남자주인공은 이 장소를 지켜내기 위해 투신까지 감행한다. 하지만 투신사건은 연인의 만남과 설레임 그리고 낭만적 재 미를 추구하고 있다. 투신을 하다 방화수조에 빠진 남자주인공에게 여자주인공이 다가가서 손을 내밀자 박수를 치는 학생들과 여학생들로 부터 이후 스타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남자주인공의 묘사는 1968년 전공투세대와는 다르고 그 낭만적 전신 쯤이라고는 할 수 있겠다. 그래도 이 장면은 학생운동의 이념보다는 ‘낭만적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집단회고성 장면으로 다가온다. 영화에서 흐르는 유럽풍 재즈선율과 어울리지 않게 합쳐지는 교가제창 등이 그렇다. 종종 그들이 함께 부르며 숙연해하는 노래의 실체가 궁금한데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벚꽃이 진다는 식의 멜랑콜리가 첨가된 일체화로 뭉친 숭고미 의식으로 느껴진다.

    이 작품에서 주요서사의 중심이 된 동아리 건물로 주인공 ‘우미’가 발을 들여놓게 된 것 역시, 동생이 그 멋진 오빠를 보고 싶다고 졸라서 편집부로 찾아갔기 때문이다. 동아리 방은 마치 ‘센과 치이로의 행방불명’에서 나오는 청소해야할 목욕탕처럼 더럽기 그지없다. 미야자키 하야오 에게 청소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청소상태가 완벽한 나라일 것 같다. 잘 보존할수록 자신들의 가치를 높이고 효율성과 정체성을 함께 고양하는 일이 청소였을 것이다. 근대는 계몽의 시대이고 위생담론으로서의 청소가 큰 역할을 하였는데, 여기에 일본인의 정갈함을 선호하는 미의식이 결부되어있고, 정화와 수행이라는 불교적 종교성까지 포함한다.

    카르티에라탱에서 많은 학생들은 자기마다의 작은 ‘집’을 점유하고 자신들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카르티에라탱은 파리의 지식과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곳으로 모두 라틴어를 사용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프랑스의 학문적 분위기가 무르익은 이곳은 각종 서점, 문구점, 카페, 레스토랑, 음반점, 옷가게 등이 몰려있는 곳이다. 서구화와 실존주의, 그리고 자기들만의 예술을 이야기하던 우리나라의 6, 70 년대 대학들을생각나게 한다. 우주과학을 연구하거나 고전철학을 연구하고 또 역사를 논하거나 화학을 실험하는 학생들은 선배들이 남긴 것을 버리지 않는 한편 자신들이 연구하고 있는 것을 늘어놓고서 거기서 거의 ‘살고’ 있다. 다만 여자주인공은 남자주인공을 만나 그를 돕게 되면서 시험지를 필사하는 일을 하게 되는데, 그녀는 자신이 빠지면 돌아가지 않는 ‘돌보아야 할’ 가족이 있는 집으로 허둥지둥 돌아 간다. 집으로 돌아가면 할머니와 동생은 텔레비전을 보고 계시고, 하숙집 언니들은 밥을 기다리고 있고, 낮에 일하러 온 아주머니는 장도 보지 않고 가버리셨다. 그녀는 ‘집’을 책임지고 이어가기 위해서 ‘밥’을 한다.

    선배들이 물려준, 전통이 살아있는 공간에서 그들은 선배들의 답안지를 발견한다. 적중률 백퍼센트의 시험지도 발견한다. 그렇게 그 공 간이 좋아지고 있었는데, 학교에서는 철거에 찬성하는 다수파와 복원으로 지키려는 소수파간의 회합이 벌어진다. 남자주인공은 강단으로 나가기 위해 학생들 머리 위를 날아서 착지한다. 그만큼 그는 의지가 투철하고 ‘사회적’ 일에 앞장선다. 역사도 모르는 것들이라며 전통을 복원하자고 주장하는 그와 세상의 진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논박하는 학생들 간의 몸싸움이 벌어진다. 그러나 곧 누군가 선창하는 벚꽃 날리는 봄을 추억하는 노래를 제창하는 순간 숙연해진다. 낭만적인 학생운동의 표현을 넘어 배경음악이나 영화주제가의 현대성에 비해 ‘일본적’인 냄새가 짙게 풍긴다.

    그들에게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은 여자주인공인데, 청소를 제안한다. 여학생으로 구성된 청소부대가 전투 복장처럼 마스크와 머릿수건에 앞치마를 두르고 빗자루와 대걸레를 매고 남학생들로만 모인 동아리 공간에 등장한다. 여학생들도 함께 하자는 뜻으로도 보이고, 협동정신을 발휘하는 모습이기도 한 이 장면은 그동안 지브리 스튜디오가 보여준 ‘여성적 대안’으로 읽혀질 수 있다.

    이들은 보존된 건물을 이사장에게 보이기로 하고 그를 설득하러 간다. 그는 경제부흥기의 경제 권력으로 결제해야할 서류, 회의, 끊이지 않는 전화때문에 채 5분도 시간을 낼 수 없지만 여주인공의 부드러움에 설득된 이사장이 학생들에게로 찾아온다. 이사장을 초대하고 그 앞에서 긴장한 학생들은 마치 대통령이나 신적 권위에게 하듯 차렷 자세로 질문에 답하곤 하는데, 이사장은 아주 관대하고 호탕한 사람으로 이들의 청춘과 패기, 카트리에라탱의 보존을 인정한다. 학생들은 자신 들의 공간으로 권력자를 초청하여 진가를 인정받고 드디어 그 공간의 보존에 성공하게 된다. 즉 과거는 가치를 갖게 되고 부활하게 된다. 이사장을 감동시킬 수 있었던 것은 남녀학생이 협력하고 특히 여자주인공이 대화에서 보여준 진실한 태도 덕택이었다. 이사장은 경제의 주역이지만 젊은 시절 서구의 실존주의니 모더니즘이니 하는 철학을 받아들인 선구자였고 학생들의 선배이다. 천문학이니 모더니즘이니 하는 것들은 지식과 이성을 받아들인 ‘근대’의 발견이었지만 동경올림픽을 목전에 둔 현실은 사상적 ‘근대’보다 경제성작과 도약이라는 실질적인 자본의 논리가 더 우세한 지경이다.

    한편, 여자주인공의 하숙에 남학생들을 초대하게 된다. ‘가정’이 가족들만의 것이라기보다는 이웃과 타인들을 위한 접대, 그리고 가족 중심으로 더 큰 ‘가족’을 만들려는 모습일 지도 모른다. 여하간 맛있는 음식준비의 몫은 역시 여자주인공이다. 그들을 먹이고 그들에게 이 공간을 소개하고 진가를 인식시킨다. 남자주인공 슌에게 여자주인공 우미(메르)는 설명한다. ‘이곳은 의사였던 우리 외할아버지의 병원이다, 어머니는 교수이고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가셨다, 그 동아리 방만큼 이 방은 전통이 살아있는 곳이다’라고 자랑스럽게 설명한다. 아버지 부재의 사실 역시 좌절의 어조가 아닌 오히려 자부심의 어조로 설명 한다. ‘아버지는 바다에 나가는 분이셨는데,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를 위해 어릴 적부터 깃발을 걸어놓곤 했다, 아버지가 한국전쟁으로 돌아가신 후에도 집에 깃발을 걸어놓는다’는 설명이다. 즉, 아버지는 부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한다. 깃발로 상징된 아버지, 언젠가 이곳을 보게 될 아버지, 아니 매일 이곳을 보고 계실 아버지를 위해 그녀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도 본 논문 제 4장 ‘아버지 기다리기’에서 다시 설명될 것이다. 단 하나만 먼저 밝히면 이 소녀에게 소년은 응답을 하고 있었고, 교내신문에 이에 대해 시를 쓰기도 한다. 즉 아버지가 아닌 이 소년이 앞으로 아버지를 대신하여 아버지가 보내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는 할머니가 우미에게 좋은 사람이 생겨서 이제 그만 깃발을 올렸으면 좋겠다는 말에서도 설명된다. 새아빠가 생긴다는 말로도 이해되었지만, 맥락상 우미에게 남자가 생기면 아버지를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이 부분은 다음의 제 3장에서 논의할 ‘남매간의 사랑모티프’와 연관된다. 이곳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사진 한 장이야말로 ‘남매간의 사랑모티프’의 발단이 된다.

    1)김필동, 『일본적 가치로 본 현대일본』, 제이엔씨, 2009, 79-80쪽.  2)최석진, 『여기에선 저 일본이 신기루처럼 보인다』, 써드아이, 2002, 44쪽

    3. 남매간의 사랑 모티프

    신화는 보편성을 갖는 것으로 원형은 특히 최근의 대중서사 즉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사용되어져왔다. ‘막장드라마’로 일컬어지는 서사는 대부분 ‘출생의 비밀’이 장애로 등장하여 ‘근친상간’, ‘금기와 터부’로 발전하는데, 이는 비극의 시초로부터 사용된 스토리텔링의 기본적 요소였다. 즉 ‘남매간의 사랑 모티프’는 단순히 대중적 영합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화적, 원형적 모티프로 작용하여 운명과 상대하는 인간의 갈등과 해결을 보여주는 비극의 플롯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구조주의 비평은 서사에서 제기되는 신화적 서사나 형식을 찾아내 려고 한다. 그리스 비극은 오이디푸스나 일렉트라, 메데이아 등에서 보이는 근친상간과 금기의 서사, 그리고 운명으로 다가오는 장애를 벗 어나고자 노력하는 신과 동급 혹은 일반인보다 월등한 주인공이 등장 한다. 그들은 그 장애와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혹은 그것과 투쟁하여 승리하고자 하지만 결국 죽음으로 패배하는, 그래서 고매한 정신이 승리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것이 근현대로 오면서 성격으로 인한, 즉 인간성을 가진 주인공의 갈등이 부각되거나, 혹은 지켜야할 절대정신을 부정하는 현대의 모더니즘으로 변화되어왔다.3)

    즉 대중서사가 독자나 관객을 위해 일부러 과격한 소재를 사용하려는 것이 아니고, 인류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무의식에 자리 잡은 보편성으로서의 금기 신화는 이전부터 사용되어지고 발견된 모티프이다. 스토리텔링이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서사를 작품 속에서 이루어가려는 노력일 것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그 보편적인 원형의 무의식을 인정하지 않지만, 작품 안에서 그것을 상기하였을 때 긴장하고 그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데 참여하게 된다.

    한류드라마로 각광받은 ‘겨울연가’, ‘가을동화’를 비롯한 작품들이 첫사랑을 그리고 그 첫사랑이 하필 ‘남매’라는 운명을 갖거나, 남매가 아닌데 남매로 오해받고 살아온 이야기를 담아서 화제가 되고 사랑받았다. 그러나 막장드라마라고 폄하되거나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식상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 원인은 운명적 장애요소로서의 모티프가 제대로 발휘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운명과 상대하여 싸우는 투쟁의 과정과 사랑을 쟁취해가는 과정이 비극으로 제대로 치닫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그저 멜로드라마의 공식 속에서 반복되기보다는 비극적 아이러니로 상승된다면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내는 주인공이 충분히 매력적이라면 작품은 강하고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좋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코쿠리코 언덕에서’도 이 보편적 갈등과 모티프를 이용한 방식을 확인하게 된다. 여자의 집으로 초대된 주인공(‘겨울연가’ 에서도 이들은 수업을 빼먹고 놀러갔다가 여자의 집으로 돌아와 여자가 밥을 하는 사이, 여자의 동생이 보여준 사진을 보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사진을 설명하는 같은 사진을 보자 놀라서 뛰쳐나간다)이 여자가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사진을 본다. 하지만 ‘겨울연가’에서처럼 남자 주인공은 뛰쳐나가지 않는다. 관객인 우리도 놀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겨울연가’는 어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해서 그녀에게 복수하고자 아버지를 찾아오는 남자주인공의 이야기로부터 갈등이 시작되고 부모들의 잘못으로 인한 운명적 결과를 해결해야할 상황에 빠진 특히 어머니의 거짓말로 인해 초래되는 비극이다. 그에 반해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아버지가 부재하지만 아버지는 언젠가 돌아올 분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누군가의 잘못이나 실수로 생긴 일이 아니어서(잘못이라면 한국전쟁뿐이다.) 복수해야 할 이유도 없기에 비극이 성립하지 않는다. 즉 남매간의 사랑의 모티프가 겪어내어야 할 갈등이 크지 않고, 그들만이 세상에 살아남는 존재도 아니다. 각자 찾아야 할 아버지를 찾아내는 일에 몰두하고 있고, 나아가서는 남매간의 사랑보다 중요한 아버지 사랑으로 인하여 그를 아버지가 보내준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순응의 모습마저 보여 갈등은 애초에 남매간의 사랑으로 인한 부분은 치솟지 못하고 가라앉게 된다. 아버지가 보내준 사람이라고 받아들이면 되니, 남매여도 상관없다.

    미술을 전공하는 하숙집 언니의 말에 의하면 언제나 언덕 위의 깃발에 답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에 소녀는 아버지가 살아있다고 믿는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라 연인이 될 소년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하지만 꿈속에서 만나 기뻐하고 감격하는 것은 아버지이다. 소녀에게는 남매간의 사랑보다 아버지의 사랑이 더욱 우위에 있고 우선한다. 즉 사랑보다 권위와 체계, 상징계의 질서가 더욱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아직 독자적 정체성을 이루지 않은 여성이며 자녀세대이다.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연인관계가 남매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크지만,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과오를 의심하게 되는 사실이 더 심각하고 슬퍼 보인다. 아버지의 과거는 명백히 순결했음이 밝혀지는 결론에서 소녀는 다시 안정을 되찾고 소년도 마찬가지이다. 첫사랑이 완결한 사랑으로 쟁취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매일 올리던 깃발처럼, 목숨처럼 지켜낸 카르티에라탱처럼 자신들이 지키려던 것을 지켜낸 기쁨이 더 크게 보인다. 자신의 정통성과 자존심에 흠이 없음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 과정에서 더욱 사랑이 깊어진다기보다 오히려 아버지의 전통을 함께 확인하는 과정으로 나온다. 즉 모두 이들이 고수하는 가치를 위해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알아내려고 분투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초래한 결과로 인해 비극으로 끝나거나 그 안에서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는 캐릭터의 승리를 보여주지 않는다. 아버지는 전혀 의심할 분이 아니었음을 손쉽게 (문제없이, 큰 선박의 선장인 믿을만한 타인의 설명으로) 알게 되어, 역시 처음처럼 상징인 아버지를 올려드리는 이야기로 끝난다.

    결국, 남매간 사랑 모티프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주제, 전통을 복원하자는 더 큰 주제에 봉사하는 하위 갈등에 불과하다. 원래 이 모티프는 결혼을 가로막는 장애로 사용되는데, 결혼이란 새로운 가정의 출현이다. 그러나 소녀는 아직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소녀는 과업을 이어야하며, 아버지를 여전히 기다린다. 생산적인 가정의 돌봄의 주체이며 실질적 가장이지만 정신세계에서는 권위와 부권을 제일 상위의 가치로 두고 있는 모습이다.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은 일본은 보수적인 사회이자 특이한 모권사회이기도 하지만, 오래 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가치관이 변하였다는 점이다. 즉 한국의 관객이 볼 때 낯선 거리감 외에도 일본의 현재의 관객들도 이 부분에서 큰 호응을 보였을 리가 없다. 오히려 그들은 한류 드라마 ‘겨울연가’의 ‘불가능한 집’을 지어주는 남자주인공의 판타지에 열광하였다.

    카르티에라탱을 둘러싼, 사회적 수행과제를 함께 겪어가며 친해진 두 사람의 사랑이 막 시작될 무렵에 아버지의 문제가 끼어든다. 사랑은 그리하여 남매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불타오르는 게 아니라 얌전히 꺼져버린다. 장애를 만나 사랑이 불타오르는 게 아니라 사랑은 멀어져가고, 함께 부모의 결백을 찾아내면서 오히려 남매처럼 다정한 사이가 되어가고 사랑은 소멸된 것 같이 느껴진다. 여자 주인공은 안심하고 깃발을 올리고 집의 가장노릇을 계속 해갈 것이고, 남자 주인공은 더욱 자신감 넘친 학교생활의 리더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사실 리더는 아니고, 묵묵히 학내신문의 편집을 맡는 일이다.

    거리에 작은 이층집인 남자주인공의 집은 여자주인공의 집에 비해 좀 더 서민적인 집이다. 중요한 것은 언덕 위의 집처럼 전통이 복원 된 집은 아니다. 창문을 열면 거리의 소음이 그대로 섞이는 집이다. 즉 집의 정통성으로는 여자주인공의 집이 좀 더 확고하다. 왜냐하면 남자 주인공은 아버지를 모르고 길러진 아들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자주인공이 늘 아버지를 선망하듯이 이제 남자주인공도 마음속으로 인정할 아버지를 찾아내야 한다. 길러주신 아버지의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정체성의 문제이고 심하게 말하면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자랑스러운 외가 전통같은 것은 없고, 바다로 간 아버지의 신화도 없지만, 낡은 책상 서랍 속에 아버지의 사진이 들어있다. 그 사진에 아버지가 있음은 분명하지만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아버지가 왜 죽었는지도 모른다. 사진을 들고 길러준 아버지에게 가서 친아버지에 대해 묻는다. 내가 네 아버지이라고 말하는 양아버지 는 묵묵하지만 가정적이며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상징계의 전형이다. 하지만 아이(소년의 속마음)가 바라는 것은 호적상의 아버지나 사실에 존재하는 아버지보다는 자신의 꿈과 이상에 합치하는 상징을 넘어선 아버지를 찾으려는 것이다. 아버지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신화는 구축하고 형성해나갈 수 있다.

    갓난아이를 잃은 신혼부부였던 남자주인공의 부모에게 아이를 안은 아버지의 동료(여주인공의 아버지)가 찾아왔었다고 듣는다. 그 아이는 전사한 다른 동료의 아이라는 것이 이야기되긴 하지만 희미하게 말해져서 그때 아이(남자주인공)를 안고 온 아버지의 동료(여자주인공의 아버지)가 남자주인공의 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즉 소년소녀가 남매일지도 모른다는 서사로 나아간다.

    여자주인공에게 미국에서 유학중인 조교수이신 어머니가 다니러 온다. 어머니는 미국의 육포를 내놓으시고 여자주인공과 동생은 돼지고기냐고 물었다가 어머니에게 소고기야 라고 타박을 받는다. 즉, 어머니는 ‘모던’한 미국에서 왔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떠올리는 모성의 공간의 어머니는 아니다. 오히려 그 공간에 소녀가 있다. 집에 와서도 저녁에 잠이 안 온다며 전공 책을 읽으신다. 이 어머니에게 소녀 우미는 딸 이전에 여자가 되어 묻는다. 어머니에 의하면 임신한 채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아이를 데려와서는 전사한 동료의 아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임신 중이고 공부도 해야 해서 아이를 받을 수가 없었고, 아버지는 그 아이를 다른 집으로 보냈다고 한다.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둘은 남매간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 남매가 아니라도 그 때 엄마가 아이를 받았다면 남매로 길러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소녀 우미는 어머니가 오시기 전에 꿈에서 엄마도 만나고 아빠도 만났었다. 그러고 나서 진짜 엄마가 현실에 왔던 것이다. 꿈에서 엄마에게 언제 오셨나고 물으니, 무슨 소리냐면서 늘 집에 있었다고 한다. 그 말에 여자주인공은 실망하고 기다리던 아버지의 출현에는 감격에 겨워한다. 꿈에서 엄마를 만나고, 엄마는 늘 여기 있었다고 대답할 때 아이는 충격을 받는다. 관객도 함께 섬뜩하기까지 하다. 즉 아이는 엄마의 부재는 오히려 당연한 것이고, 아빠만 기다렸던 것이다. 엄마의 부재는 오히려 아이가 꿈꿨던 엄마 대리자로서의 주부 그리고 아빠의 짝이 될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것인데 꿈속의 엄마는 언제나 여기 있었다고 한다. 주인공은 너무나 놀라고 충격적이어서 아버지를 만나고 더욱 슬피 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꿈에서 깨어난 후 어머니가 오시고, 어머니와 대면하여 묻는다. 그 아이가 진짜 아버지의 아들이면 어떡하죠? 이 말에 어머니는 딸의 상황을 짐작하게 된다. 흥미로운 또 다른 점은 어머니는 남편이 안고 왔던 아이가 실제 아버지의 아이라면 어떡하냐는 딸의 물음에 고민할 법도 한데, 잘 컸는지 보고 싶다고 깔끔하게 대답한다. 그 말에 소녀는 펑펑 운다. 어머니의 ‘근대성’에 비해, 소녀는 최후의 낭만소녀의 모습이기도 하고 소녀가 독립성을 깨닫는 장면이기도 하다.

    카르티에라탱 문제를 함께 해결한 후에 비로소 소녀는 소년에게 고백하였었다. 오빠여도 사랑한다고. 아버지가 보내준 오빠이기 때문이라고. 이것은 상징계에서 소녀소년이 취해야 할 도덕적인 매우 올바른 대응이다. 하지만 상징계 이전의 세계 즉 꿈에서 자신의 모습과 감정을 알게 된 소녀는 말을 못하고 슬피 울 뿐이다. 그날 밤 꿈꾸기 전에 소녀가 고백한 내용은 피하지 말아달라는 것, 오빠여도 상관없다는 것, 왜냐면 아빠가 보내준 선물이라고 여기겠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남매일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서먹서먹하던 사이가 소녀의 재빠른 순응과 긍정적 사고로 큰 갈등 없이, 갈등의 증폭 없이 그야말로 ‘오누이’처럼 다시 관계가 좋아져서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머니는 서글프게 우는 딸을 안아준다. 그리고 알아차린다. 딸은 사랑에 빠졌고 또한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더욱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점을. 매일 해가 솟으면 언덕 위에 매어 올리는 깃발에 얼룩이 생길 지도 모른다. 어머니 역시 딸의 과제를 돕고 나선다. 그래야 딸이 정상의 자리로 돌아올 것이고 자신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어머니가 남자주인공의 아버지를 만나는 장면이 잠시 나온 뒤, 동아리 방이 복원되게 되어 축하의 향연이 벌어지는 동아리회관으로 전화가 온다. 소년소녀는 달린다. 청춘의 열병이라며 도망쳐라, 떠나라 하고 환호해준다. 비밀스런 사랑연애보다 집단적인 지지와 인정이 중요한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주인공도 곧 행복을 맞이할 것이고 이들을 응원하는 집단이 있으니 드라마는 갈등보다는 예정된 해피 엔드로 보인다. 그들은 초대형 선박에서 기다리는 낯선 남자를 찾아간다. 경제도약을 향해 출발하려던 대선박의 선장으로 이들을 위해 불가피하게 출발을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도약과 출발의 순간을 잠시 미루고 우선적으로 확인하여야 할 일이 ‘아버지 확인하기’ 인 것이다. 즉 주인공들은 아버지를 찾은 게 아니다. 찾으려고 모험을 나선 것은 더더욱 아니다. 즉 아버지는 항상 존재했던 가치이고, 아버지의 사실적 존재여부와 정체성 확립에 금이 가지 않고 자신들을 인정하게 하는 확인 작업으로서의 ‘아버지 가려내기’ 이다.

    아버지(들)는 모두 한국전쟁 때 바다에 침몰된 분들이며 역사의 희생자들이라는 점, 그러나 언제나 우리는 그들을 향해 깃발을 올려드림으로써 전쟁의 가해자이니 피해자이니 하는 나라 밖의 논쟁과는 상관 없이 아버지(들)를 공경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다만 남매가 될지도 모르는 사랑의 이야기는 이를 위해 잠시 끼어든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사랑보다도 아버지의 가치를 더욱 우선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인들에게 더 호응을 받았던 ‘겨울연가’의 사랑 지상주의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지브리 스튜디오의 최근작 ‘코쿠리코 언덕에서’가 일본에서도 흥행하지 못한 것의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즉 현재 일본인들은 과거의 일본인들과 다르다. 사랑지상주의의 한류드라마에 열광한다. 혹은 과거에 갖었던 가치 내면에 자리 잡은 사랑을 한국의 드라마에서 찾고 대리만족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경제부흥을 위해 지체할 수 없이 바쁜 분이 그들에게 인정의 말을 건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리고 가장 훌륭한 친구의 아이들이 너희라니 기쁘다고 한다. 이 말을 듣기 위해 무역의 길로 나서던 대형 선박도 멈춘다. 즉 이 문제는 소년이나 소녀만의 문제가 아니고 모두가 함께 확인해야할 국가적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 이상의 의심도 질문도 할 필요가 없이 시간을 멈추게 하는 권위자가 그들에게 아주 단호하고 쉽고 선명하게 설명해준다. 사진의 세 사람 중한 사람은 자신이고, 다른 한 사람은 소년의 아버지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소녀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죽지 말고 살아남자 오래 살자고 굳게 다짐하며 찍은 사진이었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결론에 이른다. 한국전쟁 때 전사한 동료의 아이(남자주인공)를 여자주인공의 아버지가 집으로 데려갔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자 지금의 남자주인공의 아버지에게 데려다 주고 키웠다는 것이다. 너무 간단하다. 그냥 한국전쟁의 상황만이 존재한다. ‘겨울연가’처럼 엄마의 이기심이나 상처와 아들의 상처가 부딪칠 구석도 전혀 없다. 그저 ‘한국전쟁’이 문제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다. 여기에는 프로이트도 라캉도 없고 있다면 융의 집단적 무의식이 작용할 뿐 이다.

    그들은 남매가 아니라서 홀가분해졌고 이제 사랑하기만 하면 되며 부모의 가치도 손상됨이 없이 결론을 내린다. 특히 아버지는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희생자이자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는, 그리고 지금도 자신을 상징적으로 꿈에서 역사에서 무의식에서 찾아오는 도덕과 윤리와 전통의 상징으로 자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매일 뻔해서도 그렇게 갈등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소녀의 모습이 극의 마지막이다. 아버지를 상징하는 깃발을 올리는 일은 아버지를 위해 사는 모습이다. 아버지에게 보이기 위해 사는 삶이다. 집단, 공동체의 권위에 복종하는 삶이다.

    그들은 첫사랑으로도 간절해 보이지 않는다. 첫사랑에 필요한 결핍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여자주인공은 위대한 가장이며 부양자이고, 남자주인공은 동아리의 핵심 책임자이며 지도자이다. 전통을 파괴하려는 무분별한 다수파 아이들을 설득하여 전통의 가치를 복원한 책임자, 그리고 그것을 돕고 거드는 여자주인공의 협력이 아름답다. 그들에게 사랑은 ‘근대적’ 계몽이데올로기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랑의 에피소드는 낭만적 수준에 그친다. 그들이 정말 서로 좋아하는지 조차 분명하지 않을 정도이다. 소녀가 카레에 넣을 고기를 사러 부랴부랴 시장을 가는데(자신의 일 수행 중) 소년이 나타나서 자전거를 태워 언덕 아래 시장에 데려다준다(자신의 과업을 수행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둘의 에피소드는 과부족이다).

    시장은 멀고, 소년의 집은 더 멀다. 소년에게 집은 멀리 있는 존재라면 소녀의 집은 높이 있는 존재일 것이다. 소년은 아버지를 찾아야 하기에 집은 먼 곳에 있으며 소녀는 아버지가 자신을 바라본다고 믿고 아버지로부터 인생이 시작된다고 믿기에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다. 위기의 순간에 사랑이 싹트는 법, 이 작품에서 소녀의 최대 위기는 저녁메뉴로 만들 카레라이스의 재료인 고기라 떨어져서 황급히 시장에 다녀와야 하는 사건이다. 이 사건을 맞이하여 도움을 준 사람이 소년이다. 늘 침착하던 그녀가 당황하여 언덕을 내려갈 때 소년이 그 길을 지나간 것이다. 늘 이웃의 도움을 뿌리치고 혼자 내려가던 소녀는 소년의 호의를 받아들인다. 사명수행에 위기가 왔기 때문이다. 동시에 소녀는 가까운 거리에서 소년에게 확인하고 싶었다. 교내신문에 시를 쓴 것이 소년인지, 즉 날마다 깃발을 올리는 소녀를 바라봐주는 사람이 소년인지 아버지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고기 한 번 쯤 빼고 카레라이스를 만들어도 될 텐데, 소녀에게는 위기의 상황으로 충분한 장면이며 자신을 구원해줄 남자를 만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소년은 배가 고파 쓰러질 지경이라면서 코로케를 사서 소녀에게도 나눠준다. 소년은 집으로 가기 전에 배를 채워야한다. 소녀는 누군가가 집으로 돌아와서 배가 고프기 전에 밥을 준비해야 한다. 소녀는 소년을 챙겨주고싶은 마음이 생기고, 소년은 소녀에게 자신의 몫을 나눠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만남 전 소년은 허기의 결핍을 갖은 존재로, 소녀는 결핍을 채워주는 존재였다. 그러나 소년이 코로케를 건넬 때 소녀는 소년에게서만큼은 ‘받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큰 전진을 보이지 않는다. 남매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안 남자주인공이 이후로 냉정하게 시선도 주지 않는 모습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하지만 결국 사랑으로 치닫는 비극으로 가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사랑은 이들에게는 두 번째 문제인 것이다. 이들에게는 어느 저녁 날의 짧은 시간이 유일한 단둘만의 시간이었다. 더욱이 집이 먼 소년은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리고 소녀는 혼자 집으로 돌아온다. 손을 잡는다든지, 집이 아닌 공간(우리의 회상형 드라마에서 나오는 빵집, 다방, 극장, 학교 강당, 소각장 등)은 나오지 않는다. 즉 같이 사수해야 하는 카르티에라탱에서 집단적으로 존재하거나 집단의 일을 수행할 때 나란히 존재할 뿐이다. 소녀(들)의 청소를 돕는 일, 소년의 모범답안지 만들기를 돕는 일에서 첫사랑은 싹튼다. 첫사랑이라기보다 교정의 추억에 가깝다. 즉 개인적인 공간과 욕망보다는 집단의식이 앞선다.

    일본 사회는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일어난 사실이나 지난 과거에 대해선 집착하지 않는다. 하잘 것 없는 일도 천직으로 알고 정성을 다한다. 고대 일본사회는 씨족사회여서 혈연의존도와 신뢰도가 강한 편이다. 대승불교가 전해져 보은정신이 스며들어 서로 의존하는 연대감이 싹트게 되었고, 종군은 주군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경향이 강하며 직장을 자기실현의 장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4)

    이와 같은 일본인의 의식을 설명한다면 한류드라마에 일본여성들이 마음을 뺏긴 것은 무엇일까. 가족과 부모보다는 연애와 성장, 무엇보다도 사랑이었으며 비극적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극복해나가는 플롯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가장 큰 이유는 부드럽고 온화하며 사랑을 표현하는 일에 목숨을 거는 한국 남성의 발견이었을 것이다.

    최혜실은 한류드라마의 스토리텔링 연구에서 이 사랑지상주의를 “겨울과 아이러니의 뮈토스, 비극적 아이러니의 뮈토스”5)라고 하였다. 대표적 한류드라마 <겨울연가>는 멜로드라마로서의 전형성과 비극적 아이러니가 갖은 보편성으로 갈등을 계속 이어가며 그 안에서 운명과 싸워 이기려는 영웅이 존재하였다. <겨울연가>의 ‘준상’(배용준)은 죽어도 사랑하고, 사랑하지만 떠나고, 떠났지만 그녀의 ‘집’을 지어준다. 영웅적인 비극의 주인공에게 우리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특히 그가 지어주는 여성의 환상인 ‘불가능한 집’은 여성이 현실을 살아내는 집도 아니고 노스탤지어를 가진 남성들이 복원하려는 과거의 집도 아니다. 준상은 사랑하는 여인이 설계한 ‘불가능한 집’을 즉 꿈을 현실로 가져와 사랑을 완성한다. 드라마는 사랑을 최고로 묘사하며 그려 간다.

    그에 비해 일본의 대표적 애니메이션 지브리의 최근의 작품인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일찍이 누린 신화적 세계를 시대가 변화한 지금에도 차세대감독들에 의해서 당위적으로 복원하려는 혹은 느리게 진화하는 경향으로 읽힌다. 이것이 지브리의 최근작이 아니라 새로운 후속 작이 나와서 이 글을 번복하기를 기대하며 기다리게 된다.

    3)로이스 타이슨, 윤동구 역, 『비평이론의 모든 것, 앨피』, 2012, 447-519쪽에서 요약.  4)윤상인, 박전열, 황달기 외 「일본을 강하게 만든 문화코드16」, 나무와 숲, 2010, 285-286쪽.  5)최혜실, 『한류드라마와 스토리텔링』, 새문사, 2010, 55쪽

    4. 소녀의 ‘아버지 기다리기’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주인공이 ‘소녀’인 경우가 많고 큰 사명을 수행해내므로 그를 페미니스트로 그의 작품을 페미니즘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상징계’로 대변되는 문명사회의 모순과 실패에 직면하여 그 대안으로 자연적, 모성적 세상으로 회귀함을 주제로 한 점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우선 주인공 ‘소녀’에 대한 규정부터 해봐야 할 것이다. 우선 ‘소녀’가 현실적 혹은 현실 가능한 인물인지, 아니면 작가나 대중의 욕망이 투사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지이다. 즉 규격화된 일본사회, 경제부흥으로 시작된 전쟁 이후의 발전 지향적 삶에서 숨을 쉬기 원하는 남자관객의 돌파구가 소녀였으며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연약한 존재이지만 자유로운 방식으로 힘을 발휘하는 소녀를 사용하였다는 주장도 있어왔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유년시절과 사춘기 시절 어머니는 척추 병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가 부재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살림살이를 하는 재미, 가내수공업 식의 공장을 운영하는 집에서 배운 공동체의식, 그리고 실제로 어머니가 부재해도 살아내는 것을 익혀오면서 갖게 된 ‘돌봄’과 ‘살림’의 습성은 그러나 여기에서 그친다. 오히려 연약한 소녀가 이루어내는 판타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자면, 나이가 들어서도 기대고 싶은 일본 남성의 로망이라는 점에서 오타쿠 영화들과도 멀지 않다. 그동안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 에게 있어서 여자주인공의 역할은 작가 본인의 체험과 바람이 작용하고 있다. 부모세대의 존재는 모호하거나 문제적이고 부모역할을 못한다. 이때 소녀는 대리부모의 역할까지도 감당한다. 그리고 공동체의 구원자의 역할까지 나아간다.

    그런데,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소녀의 특징에는 좀 더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 눈여겨 보이는 점은 ‘딸-아버지’의 관계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메르의 꿈속에서 어머니는 늘 존재했던 어머니였고, 메르는 아버지를 보고 반가운 사랑의 눈물을 흘리며 안긴다. 즉 여자 아이는 어머니가 부재한 현실에서 어머니 대리 역할을 하며 아버지를 기다렸고, 그 아버지는 소녀에겐 사진에 남겨진 젊은 청년의 모습, 연인 같은 모습이다. 혼돈의 시작이다. 하지만 여기까지이다. 새로운 연인을 찾아 나서는 소녀의 욕망이 보이지 않는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보아온 소녀에게는 주요한 특징이 있다. 그녀는 부모님들처럼 식탐도 없고(‘센과 치이로의 행방불명’), 일도 열심히 하고 지혜도 발휘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며, 자연과 신화의 세계(‘마녀배달부 키키’, ‘이웃집 토토로’)를 읽을 줄 알 뿐만 아니라 초월적인 능력도 담지하게 되고 발휘한다. 그들은 이미 소녀가 아니다. 그들은 상징계가 파괴하는 상상계의 주인공일 수도 있지만, 상징계를 초월하여 신화적 세계를 지향하는 실재계 즉 판타지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즉 그녀는 소녀이자 ‘여신’이고 ‘여전사’인 것이다. 경제부흥의 시대에서는 환경파괴의 주범이 아닌 다른 대안, 즉 자연과 환경의 친화적인 능력으로 경제부흥의 시대에 ‘일꾼’으로도 일조한다.

    영웅이지만 시대를 초월하기 보다는 시대의식을 구현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페미니스트로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세웠다고 하기 보다는 작가의 기대와 바람을 투사시켜 만들어낸 작가의 자웅동체로서의 인물인 것이다. 즉 소녀는 자연스러운 소녀가 아닌 것이다. 작가나 관객 즉 시대의식이 바라는 영웅적 환상으로서 소녀이고 소년이며 마음 약한 어른이며 어머니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으나 환상에서만 추구하는 남자들의 바램이다. 게다가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딸-아버지’ 관계는 무의식적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표현하며 그 단계에 머물러 있는 유아를 보여준다.

    그동안 보여준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는 상상계로의 후퇴라기보다는 상징계를 찢고 뛰어넘어 실재계로 도달하는 신화적 세계, 스크린의 세계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작가는 주인공 소녀를 통해 자신의 욕망과 지향을 실현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즉, 상징계로의 입사의 사춘기 시절을 보면, 똑똑한 어머니, 강한 어머니를 두었던 그에게 이미 상징계는 남자들의 세계만이 아닌, 여자로서 남자의 세계를 보유한 세계였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에게는 딸이라기보다는 덜 자란 어머니를 배우고자 하였을 것이다. 즉, 그의 세계를 이해해본다면, 그에게는 병원에 있지만 강인한 어머니는 상징계를 포함하고 있었고, 부양자인 아버지를 대신해서 돌보는 역할, 즉, 경제호황시대에 생겨난 ‘주부’의 역할(남자는 돈을 벌어오고 여자는 소비하기만 하여도 살 수 있는 경제력)로 자신을 자리매김 해야 했다. 먹이고 돌보는 역할, 즉 어머니와 자식 간의 상황, 상상계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상상계에서도 어머니, 상징계에서도 어머니를 경험한다. 그리고 자신이 초월하고자 하는 세계에서는 어머니로서 이 모든 것을 능가하는 신적인 존재인 소녀로 탄생한다.

    거칠게 말한다면 그의 작품 속의 소녀들은 어머니 노릇 뿐 아니라 세상으로 나가서 남자들(혹은 남자들이 이루어낸 오염된 세상)과도 경쟁하여 이겨내는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가 부재한 살림과 아버지의 군수 가내 산업은 아버지와 형제들이 마을 사람과 함께 일하며 행복을 알아가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특수성과 일본인의 자기천직에 만족하며 공동체를 돌보며 자기자리를 지키는 것이 결합하여 이 모성적 세계에서 답을 찾으려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세계를 구원하는 것은 소녀이며 여신인 것이다.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판타지를 제거한 일상의 이야기, 그리고 하야오가 실재 소년(‘소녀가 아니고’) 이었던 시대 1960년대 초반을 보여주기에 그 거리가 좁혀져서 이 이야기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욕망으로 보인다. 즉 주인공은 고로 감독이 무의식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작가 아버지의 자웅동체이다.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1960년대 초반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으로 2011년 개봉된 지브리의 최근작이다. 1960년대의 일본과 현재의 일본은 특히 여성들의 의식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1960년대 초반 부흥기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므로 ‘주부’라는 이름의 현모양처와 동시에 전문지식을 가진 슈퍼우먼을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현재 일본에서 달라진 점이라면 여성들이 반드시 가정을 돌보는 것을 자신의 자아실현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주인공 소녀의 하루일과는 보통 주부나 여성들과도 또한 특별하다. 우선 여름날이라면 새벽에 다섯 시 경에는 일어나야 할 것이다(영화의 계절은 여름이다). 학원을 가거나 보충수업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의 아침일상은 콩쥐 같은 일상이지만 그러나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고 자신이 주인이고 하숙집 총 책임자이자 심지어 경영자이니 고될 것은 없다. 그래서 영화의 첫 장면은 경쾌하기 그지없는 노래가 깔린다. 아침에 일어나 깃발을 올린다. 바다를 바라본다. 멀리 나가는 배들이 춤을 춘다. 누군가 이 깃발을 바라보겠지. 이젠 앞치마를 입고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채소를 썰고 새우를 튀기고 도시락 반찬을 만들어 이제 다 되었다고 소리치면 하나둘 와서 아침 식사를 한다. 이 장면이 경쾌할 것 같지만은 않은데 매우 경쾌한 노래가 오프닝의 기분을 상승시킨다. 여자들로 이루어진 하숙집엔 의대생, 미대생, 오피스걸, 여동생이 있고 아침식사가 시작된다. 혼자 정통일본의 복장을 한 할머니는 아침은 단식인지 차 한 잔 놓고 중앙에 앉는다. 이 모습이 다른 가정과 다른 하숙집의 풍경이다. 여자는 밥 먹고 가라는 엄마의 잔소리에도 늦잠을 자느라 지각한 원망을 하면서 집밖을 뛰어나가는 예의 여학생과는 다른 모습이다. 제시간에 내려와서 먹을 정신이 아닌 언니들과 덤벙대는 여동생, 그리고 고상한 자태가 한 치도 흐트럼이 없는 외할머니까지 소녀가 섬기는 일원이며 한편으로는 이 집의 가치창출자 소녀의 소비자들이다. 즉 서비스정신을 발휘하는 주인공은 여동생은 물론 외할머니까지 봉양한다. 즉 소녀는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어머니이자, 하숙집 주인이자 동생을 챙겨주는 언니이자, 노인을 봉양하는 며느리 같은 역할까지 한다.

    뿐만이 아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가계부를 점검받고 결제 받는 이 ‘소녀’는 이 집안의 경제권을 대리하는 대리 경영자이자 한편으로는 할머니의 경제권 아래 귀속된 노동자이다. 소녀의 노동으로 창출되는 하숙비의 수입과 소녀를 도우라고 고용된 아주머니의 임금만을 대신 지급하는 자본가인 할머니(혹은 곳간 열쇠를 쥔) 덕택으로 ‘집’은 운영된다. 잠깐씩 일하러 오는 아줌마의 돈을 할머니가 내어주시지 않으면 수지타산을 못 맞춘다며 감사하다고 진정으로 인사를 표하는 소녀에게 할머니는 걱정을 해준다. 괜찮니, 진짜 괜찮은 거야?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우미에게 새로운 사람이 생겨서 네가 깃발을 올리지 않기를 바란다. 이 이야기는 얼핏 손녀에게 아빠가 생기기를 즉 새아빠가 생기기를 기원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손녀에게 아빠를 대신할 연인, 애인, 남자가 생겼으면 한다는 말이다. 손녀가 남자가 생기면 저 깃발이 대신 상징하는 남자의 권위가 현실로 존재하기에 손녀가 그 일은 다시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즉 이 당시만 해도 집의 주인은 남자이다. 집의 여자는 아무리 그 집을 운영하는 경영자이며 제일의 노동자라 할지라도 주인을 섬기는 자리를 분명히 한다.

    지브리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와 오랫동안 작업해온 프로듀서가 작품에 여자아이들이 너무 철이 들었다고 하였더니, 미야자키 하야오가 버럭 화를 내면서 “그 아이가 나”라고 했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는 실제로 어린 시절 어머니가 오랜 투병생활로 입원을 하거나 집을 비우면 파출부가 왔고 파출부가 오지 않을 때면 돌아가면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여성의 삶의 공간을 친숙하게 여기며 어머니 대신에 밥도 짓고 청소도 하며 어머니 역할을 했다. 어머니는 비록 누워있었지만 아버지와 비교해서 대단히 강하고 지적 인물이었다.

    일본은 자신의 직업을 몇 대에 걸쳐 이어받는다. 이를 장인정신이라 평가받기도 하나, 실은 막부시대 직업선택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제한한 데서 기인한 유습이다. 폐쇄적 사회구조는 자기 운명에 대한 체념의 정서를 이루게 했다. 때문에 그들은 같은 부류의 결속력이 매우 강하다.8)

    일본의 개인은 저마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며 특히 가업을 잇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매너의 나라이고 자신의 개인감정을 노출하지 않는다. 한류드라마 <겨울연가>를 보면서 그들이 열광했던 것은 한국 사람들은 스킨십을 비롯해 사랑의 직설적인 대사가 오고가고 가족끼리도 허물없이 지내는 것이 충격에 이를 정도로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라는 식의 분석도 나왔었다. 일본의 공동체 문화의 형성은 자연 풍토가 일본인에게 미친 영향이다. 일본의 농촌사회 같이 하나의 고립된 자급자족형 소집단을 이루는 곳에서 혼자 자유로울 수 없다. 가족은 더 ‘큰’ 가족에 종사해야 한다. 혹은 가족 중심으로 더 ‘큰’ 가족을 형성해간다. 모두 ‘가족’ 인 것이다.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시험지 답안 전통, 교가 한마음 되어 부르기, 집안 보존하기 등을 통해 동조성을 짙게 보여준다. 집단의 한사람이라는 의식으로 생각, 이상, 행동을 집단의 그것과 일치시키려한다. 영화의 주인공에게는 개인의 학업보다 가정의 가업과 하숙집 단체생활과 공동가정에 대한 것이 우선이다. 또한 여자주인공과는 다르게 사회적 ‘집’인 동아리 활동에 주력하는 남자 주인공 역시 전통을 복원하는 투쟁에서 자신의 목숨도 버릴 수 있다고 투신까지 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학생들은 선후배, 그리고 대대로 내려온 시험문제 등을 존중하며, 한 여학생의 청소를 하자는 생각에 모두가 동참하여 집단적으로 함께 청소하고 복원하며 질서정연하게 일을 배분하여 닦고 쓸고 먼지 털고 정리하고 분류하는 일을 한다. 그들에게는 전체 속의 개인이 있어 안심하는 문화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주종으로서 위치 짓고 순종을 이끌면서 사회는 가정의 주인을 아버지로 하려는 기대가 그 중심에 있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갖는 상징, 그리고 그 존재를 표현하는 방식과 언어, 거기에 내재하고 있는 집단의식과 작품의 주제를 살펴보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이 작품에서 읽어야 할 핵심일 것이다.

    그렇다면 ‘코쿠리코 언덕에서’를 신화적 비평의 원형분석으로 바라 볼 때 지브리 스튜디오의 최근작의 변화와 관련된 주요한 발견을 할 수 있다. 소녀의 ‘아버지 기다리기’는 그동안 미야자키 하야오, 즉 지브리 스튜디오의 대표작들에서 보여진 여성적 세상, 여성적 기호(‘비’ 기호), 자연, 모성으로의 회귀 혹은 신화로의 탈출과 상상력이라는 중 심서사와는 오히려 반대되는 서사라고도 할 수 있다. 즉 그동안의 페 미니즘이나 여성성의 서사라고도 보여진 작품들과는 정반대로 ‘아버지’의 세상, 기호, 상징의 세계, 문자와 직선의 상징이 그려진다. 즉 판타지가 걷어진 일상의 작품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본질적인 것은 상상과 여성적 기호, 즉 문자 이전의 삶을 그려왔던 작품들과는 반대로 문자와 경제, 건축, 대형선박 등 남성적 상징이 원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날마다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이면 제일 먼저 올려지는 ‘깃발’은 ‘아버지’를 상징하며, 통신부호는 상상의 세계라기보다 문자와 상징의 세계로의 지향점을 나타내고 있다. 집단 내에서 ‘아버지’의 원형을 복구하고자 하는 노력인 것이다.

    6)신문희, 「미야자키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 나타난 ‘소녀’이미지」-전통적 ‘소녀’이미지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석사학위논문 전북대학교 대학원, 2007.  7)구견서, 『일본애니메이션과 사상』, 제이앤씨. 2011, 426쪽.  8)김시우, 『이것이 일본영화다』, 아선미디어, 1998. 13쪽.  9)윤호병, 『비교문학』, 민음사, 1994. 154쪽.

    5. 결론

    신화와 원형은 전 세계적으로 전 인류적으로 공통적이다. 그러나 그 사용에 있어서는 집단무의식을 반영한 특수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즉 모두의 이야기이지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복원과 회고의 서사는 서로 다른 추억과 공감 안에서는 동질감을 획득하기 힘들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특히 지브리 스튜디오의 차세대 감독의 작가성향이 짙은 작품이라고 생각할 때 더욱 중요한 지점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 작품은 앞에서도 밝혔듯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은퇴를 선언했지만 이번에는 극본과 기획을 맡았고 지브리의 차세대 감독인 그의 아들인 미야자키 고로가 연출한 작품이라는 것에 주목하였다.

    즉 미야자키 하야오 는 전쟁을 겪어오면서 그 이전 마을의 평화를 체득한 어린 시절을 애니메이션에 담아온 작가 감독이다. 그리고 그동안 일본 외에 해외에서도 큰 흥행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그의 작품은 이상향에 대한 개인적 추구이며 유토피아였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일본인의 정서와 욕망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양대 산맥이었던 다카하타 감독의 영화 ‘반딧불의 묘’와 ‘추억은 방울 방울’은 특히 일본현실을 다루었다. 전자는 전쟁피해자인 고아들의 이야기를 그려 감동을 자아냈지만 정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고, 후자는 이혼과 독신여성이 대부분이라고 할 정도의 일본사회의 한 대도시의 오피스 걸이 초등학교 5학년 때 기억인 농촌으로 찾아가 결국 정착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환상과 유토피아 그리고 개인의 이상향은 어느 순간 퇴행의 발걸음이 되거나 느린 걸음이 될 수도 있다. 다카하타 감독과 미야자키 감독이 완전히 다른 노선이라고 볼 수만은 없으며 차세대 감독들의 성향에서 다시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사상을 찾아보게 된다. 특히 판타지를 걷어낸 현실동화는 직접적으로 그들의 사고와 정서를 읽어내게 된다.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감독 미야자키 고로는 1967년생이다. 젊지는 않지만, 늙지도 않았다. 오히려 일본에서는 ‘젊은’ 감독이 잘해낼까 하는 시선으로 기대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그런데 작품은 절대 ‘젊지’가 않다. 무엇 때문일까.

    영화를 보면서 출발했던 의문과 사고과정은 그리하여 작품의 보편적 서사의 구조를 분석해보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일본의 집단의식에 대한 언급이 수반되었으며 덧붙여 한국의 대중서사로 일본과 한국에서 공히 히트했던 드라마 <겨울연가>와도 비교분석하였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를 선언했다 다시 복귀하여 만든 작품, 판타지 애니메이션 ‘게드 전기’에 이어 두 번째 연출 작품이었던 미야자키 고로의 작품은 그리하여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특히 한국이나 일본 공히 흥행하지 못하고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원인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 분석한 것은 필자의 제안적 발언이지만 대중서사와 상징에 대한 논의와 그 구조에 숨은 집단의식을 분석하는 일, 그리고 그것이 한류로 앞서나갔던 한국의 대중서사와 그것의 소비지였던 일본의 서사와의 비교는 앞으로도 중요한 과제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특히 페미니스트, 페미니즘으로도 읽혔던 지브리 스튜디오의 생태주의와 여성주인공의 등장은 시대의식 속에서 조심스럽게 읽혀야 한다는 점도 그렇다.

    잘 만들어진 작품이었고, 음악도 현대적인 재즈와 일본의 가요를 혼용하여 사용하여 마치 뮤지컬 같은 리듬을 담고 있는 청소년이 읽는 순수동화같은 애니메이션이었다. 하지만 전통의 복원, 아버지에 대한 승인을 강하게 주장하는 애니메이션이 그간의 지브리 스튜디오의 전통에 대해 전반적인 회의를 갖게 하거나 혹은 잘 쌓은 전통에 못 미치는 낡은 이야기로 다가오게 되었다면 이 글의 분석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10)박혜란,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의 주제의식 고찰」, 석사학위논문 경상대학교 대학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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