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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정진우 ‘향토영화’의 공간이미지 연구 Study on Spatial Image in Chung Jin Woo’s ‘Local Colored Movies’
  • 비영리 CC BY-NC
ABSTRACT
정진우 ‘향토영화’의 공간이미지 연구

This study is to understand how the spatial image the movie director Chung Jin woo has created on his does function to shape his thematic consciousness and world view in the movies. The definite concepts of “local colored movie” and “local color” were defined firstly for this purpose, and how such concepts were reflected with the spatial image in the movies were studied.

One of typical spaces in local colored movies is the great nature or rural area in terms of place, and the non-urban area such farming village, fishing village, or mountain village in terms of area. Such a space is a physical.

substance and, at the same time, an imaginary space that is summoned as the object of memory and homesickness. This is the reason why the meaning of lost hometown used to be colored with a retrogressive sentimentality.

The space/place in his local colored movies was an island in the movie <Oyster Village(Seoghwachon)>, a mountain village in <Wild Ginseng> and <Does Cuckoo Cry at Night?>, a countryside in <The Ma-Nim>. The spaces were the isolated areas bounded by sea, mountain, or valley. Shamanism, mystery, primitive instinct and eroticism are also manifested at the spaces. The spaces were intended and expressed with his idea that a primitive instinct might by restored by keeping a distance from urban space and modern reason. Therefore, the local colored space is a paradise to him.

Director Chung Jin Woo expressed the life in the deep mountains and the great nature with a healthy eroticism, and his spaces were displayed like a paradise by adding a primitive feeling of vitality. His characters look like Adam and Eve in the Garden of Eden. They are expelled of their will (‘greed’) or against their will(‘greed’, ‘lust’, ‘authority’, and ‘order’), and their expulsion from the paradise leads to a tragedy.

KEYWORD
향토 , 향토영화 , 향토물 , 향토성 , 토속성 , 공간이미지 , 하이마트 , 에로티시즘
  • 1. 들어가는 말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의 주인공은 정진우 감독이다. 정진우는 영화감독이자 우진필름의 대표로서 영화제작과 수입⋅배급에도 관여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복합상영관인 씨네하우스를 운영하던 극장주였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 영화진흥공사의 설립과 운영, 한국필름보관소(한국영상자료원의 전신)의 창설에 참여하였고, 그 후 (사)한국영화인협회, (재)영화인복지재단, 영화감독협회 등 영화단체의 일을 도맡다시피 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보여준 바 있다. 이 지칠 줄 모르는 영화인의 ‘전방위적’ 면모와 행적에 대해 부산국제영화제는 ‘영원한 영화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주었는데, 상투적인 작명이기는 하나 내용적으로는 들어맞는 명명이기도 하다.

    정진우 감독의 ‘전방위적’ 활동은 오히려 영화감독으로서의 평가에 있어서는 부정적 요소로 작용한 측면이 더 크다. 사실 영화감독으로서 원숙해진 1980년대 중반 이후 그는 <사랑과 죽음의 메아리>(1991)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1995) 단 두 편의 작품밖에 만들지 못했다. 물론 임권택 감독 외에는 당대 활동했던 감독들 대부분이 1980년대 중반 이후 작품을 내놓지 못한 것이 현실이었지만, 정진우 감독은 제작비와 기술과 연출력을 갖추고 있던 터이므로 본인이 영화연출에 집중했더라면 의미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은 그 누구 보다 컸다할 것이다. 아울러 40억 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개봉 이틀만에 상영이 중단되고 정진우 감독이 문예진흥기금 문제로 수배되면서 그의 영화감독으로서의 활동은 막을 내리 기에 이른다. 이에 대해 정진우 감독은 “어쩌면 나 스스로 내 영화인 생을 종결시킨 거”1) 라는 말로 소회를 대신한다.

    또한 영화단체장으로서의 활동 역시 그로 하여금 소모적 논쟁에 휘말려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가 정치사회적 이슈에 대해 영화계 보수진영을 대표하는 목소리를 낼 때마다 이념적⋅세대간 논쟁이 촉발되곤 하였는데, 여기에는 그의 격한 성정과 거침없는 발언들이 자초한 측면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은 정진우 감독을 영화적으로 평가하는 데 있어서 다소 부정적으로 작용케 한 측면이 있다. 작품 그 자체로 정진우 감독을 평가하거나, 그의 작품세계를 연구한 글들이 많지 않은2) 것은 그 방증이다. 사실 정진우 감독은 1963년 <외아들>로 데뷔하여 1994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까지 52편의 영화를 감독하였고, 영화진흥공사가 기획 편찬한 『한국영화 70년 대표작 200선』(1989)3)에 9 편4) 의 작품을 올린 바 있다. 이는 유현목(17편), 신상옥(15편), 임권택(14편), 김수용(13편)에 이어 5번째로 많은 편수이다. 작품 선정수로 순위를 산정한 것이 평가의 절대적 기준은 될 수 없으나, 적어도 그가 한국영화사에서 평가받을 만한 위치에 있다는 객관적 지표로서의 의미는 상당하다할 것이다.

    정진우 감독은 <국경 아닌 국경선>(1964), <초우>(1966), <석화촌> (1972),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0), <자녀목>(1984) 등 1960∼1980년대 한국영화사에서 주목할 만하거나 성과로서 여겨질 만한 영화를 만들었다. 또한 최초로 극영화에서의 동시녹음을 시도하는 등 영화기술의 선진화에 있어 기여한 바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연구와 재평가는 한국영화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담론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분명 의미 있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정진우 감독의 이른바 ‘향토영화’5) 라고 불리는 작품을 대상으로 그 영화들에 나타난 공간이미지를 살펴볼 것이다. 대상작품은 <석화촌>, <심봤다>(1979),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0), <백구야 훨훨 날지마라>(1982), <자녀목>(1984) 등 다섯 작품이다. 공간은 일정한 활동이나 사물들 또는 환경을 가지는 위치들 간의 연장으로서 추상적이고 물리적인 범위와 관련된다.6) 그러므로 영화에서의 공간은 영화의 사건이나 행위 등 스토리를 구현하고 주제의식을 시각적으로 형상화 하며 영화적 정서를 함축함은 물론 관객의 특정 기억과 영화의 이데올로기 기반을 제공하는 데 있어서도 의미 있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정진우 영화의 공간이미지가 그의 영화적 주제의 식과 세계를 형상화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선 ‘향토영화’의 개념을 정리하며, <석화촌>을 비롯한 일련의 작품들이 ‘향토영화’ 범주에 들어가는지를 연구하고자 한다.

    1)김형석, <인터뷰: 파란만장한 영화인의 초상, 정진우 감독>, 『영원한 영화인 정진우』, 2014, 170쪽.  2)개별 작품에 대한 리뷰나 평론은 더러 남아 있지만, 작가론적 관점에서 서술되거나 본격적인 연구서의 성격을 띠는 것은 김수남의 『한국영화감독론2』(지식산업사, 2003)와 부산국제영화제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기획 발간한 『영원한 영화인 정진우』(2014) 두 종에 불과하다.  3)한국영화 70년을 맞아 기획된 것으로서, <의리적 구토>가 만들어진 1919년부터 1989년 2월까지 제작된 작품을 대상으로 하여 대표작 200편을 선정하였다. 선정위원은 김종원, 변인식, 안병섭, 이승구, 이영일, 임영, 정일몽, 최일수, 허창, 호현찬 등 10인이다.  4)<초연>(1966), <초우>(1966), <동춘>(1970), <석화촌>(1972), <섬개구리 만세>(1972), <심봤다>(1979),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0),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1982), <자녀목>(1984).  5)향토물, 향토물 영화 등으로 혼재되어 사용되는데, 이 글에서는 향토영화라는 용어로 통일할 것이다. 문학에서 향토문학이라는 장르가 통용되고 있는 것에 비추어, 일본식 어법인 ‘향토물’이나 반복어법인 ‘향토물 영화’보다는 향토영화라는 표현이 더 어법에 맞고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6)문재원, 「문화전략으로서의 장소와 장소성-요산 문학에 나타난 장소성을 중심으로-」, 『장소성의 형성과 재현』(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편), 2010, 21쪽.

    2. 향토, 향토성, 향토영화

    ‘향토영화’란 말은 엄정한 정의를 바탕으로 사용되는 용어는 아니다. 다시 말해서 ‘향토영화’란 용어는 학술적 기반 위에서 다루어지기보다 대체로 언론 리뷰나 소략한 평문에서 배경과 소재, 인상적인 공간 정서를 바탕으로 작명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문학에서는 ‘향토문 학’이 장르적으로 존재하고, 이를 학술적으로 연구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근대적 시각과 사유의 산물로서의 ‘향토’ 개념은 포스트모던의 흐름 속에서 ‘로컬’ 혹은 ‘지역’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된 측면이 강하 다. 이에 대해 ‘향토’가 불러일으키는 특유의 감정적 환기로 인해 향토는 ‘지방(local)’이나 ‘지역(region)’과 같은 용어와는 달리 객관적 학술 용어로 사용되기엔 부적합하다고 여겨지기 때문”7) 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럼에도 중국에서는 향토문학이 중국문화 혹은 문학연구에서 중요 하게 다뤄지고 있으며,8) 한국에서도 주로 일제강점기 문화현상에서 향토가 중층적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이하에서는 먼저 향토와 향토성의 의미를 살펴보고 이를 통하여 향토영화의 개념을 정리하고자 한다.

    향토(鄕土)란 한자 어의대로 고향 땅 혹은 시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향토 개념은 근대 이전과 이후가 다르게 적용된다. 특히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이 떠나온 공간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향토의 발견이란 기본적으로 이농에서 기반”9)한다는 지적 역시 향토의 개념을 정리하는 데 있어 시사점이 크다 하겠다.

    이러한 측면에서 근대 이후의 향토 개념에는 ‘땅’이라는 지리적 토대에 근원, 지역적 속성이나 습속, 이상향, 향수, 상실, 원형적 기억 등 복합적이고 다의적인 의미와 정서들이 함축되었다. 향토성은 바로 이러한 다의성을 함축하여 일컫는 명명으로서, 특히 이 개념은 민족주 의의 영향으로 외래문화 혹은 이민족의 지배와 같은 상황의 대척점에서 민족이나 지역민의 집단적 기억 혹은 망딸리떼(mentalité)를 구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는 종족과 고향을 독일적인 것의 본질로 규정하면서 독일 농민의 삶 속에서 독일 문화와 문학의 뿌리를 찾는 데 활용된 독일의 하이마트(Heimat), 그리고 이를 번역하여 균일하고 동질적인 기억을 창출함으로써 국가의식을 강화하는 데 사용10)한 일본의 향토 개념에 적용되는 것이기도 했다.

    한국에서의 향토 개념은 일제 강점기라는 역사적 상황에 의해서 좀 더 복합적으로 전개된다. 중국의 향토문학을 연구한 이윤희는 중국과 한국의 경우를 비교하는 글에서 이 시기 한국에서 전개된 향토개념을 두 가지 층위로 구분한다. 하나는 식민통치자가 식민통치를 강화하고 태평양전쟁에 조선을 효과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주도한 통치이데올로기 맥락에서 전개된 ‘향토’와, 다른 하나는 피지배자였던 조선인의 입장에서 구성하고 상상했으며 빼앗긴 조국을 상징하는 메타포로 표현된 ‘향토’이다. 전자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국가 개념이 삭제된 채 일본의 일개 지방으로서의 조선과 조선의 지방이라는 이중적 함의로 구성되었으며, 정책적으로 지방색으로서의 ‘조선색’이 강조되었다. 후자의 경우에는 국가를 상상하는 것이 금지된 조선인들에 의해 국토의 은유이자 민족애11)의 상징으로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향토 개념은 해방 이후 도시화와 산업화에 대한 소극적 저항의 의미로 전이되었다. 서울이라는 중심부의 대척점으로서의 시골, 농촌이라는 지역/주변의 의미에 ‘태(胎)로서의 영원한 고향’이라는 정서적 의미가 보태어졌다.

    영화에도 이러한 개념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향토영화는 산업화의 대척점에 서있거나 전통적 습속이 강하게 남아있는 지역이 주요한 공간이 되는 영화로서 도시보다는 농어촌이나 산골 등 ‘지역/지방’을 주요 배경으로 하며, ‘토속성’12) 혹은 ‘향토성’이라 칭하는 성질과 정서를 함유하고 있는 영화들을 일컫는다. 명료하게 정의한 것은 아니지만, 김수남은 ‘향토적 서정성을 바탕으로 인간사의 번민과 탐욕을 묘사하고 있는’13) 영화를 향토물이라 부른다. 또한 배상준은 재독 감독 조성형의 <풀 메탈 빌리지>(Full Metal Village, 2007)에 대한 연구에서 향토영화(Heimatfilm)를 “시골의 대자연을 배경으로 소박한 삶의 이야기를 해학적으로 표현한 독일의 극영화”14)로 정의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전원에서의 목가적인 삶을 보여주는 독일의 향토영화는 주로 현실도피와 과거에 대한 향수를 담아”내며 특히 “고향의 부재를 경험하고 있던 1950년대의 독일인들에게 유토피아적 결말을 암시하는 픽션을 제시하였는데, 전쟁의 상처를 치유 받고 싶어 하는 독일인들의 무의식적 소망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국민의 대통합이라는 독일의 사회적 과제가 조화롭게 녹아들어가 있었”15)다고 진단한다.

    이런 관점에서 향토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는 ①지역, 그중에서도 농어촌이나 산촌 등 비(非)도시나 전원을 공간적 배경으로 할 것 ②‘향토’라는 지리적 차원에 그 지역민들의 삶의 방식과 정서, 흔적이 체화된 향토성이 내포되어 있을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여기에 정진우 감독은 한국의 토속적 문화나 습속을 종종 끼워 넣어 한국적인 특성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의 영화에서 사당패, 산신제나 풍어제 등의 제사양식, 심마니의 생활, 숯막, 성황당 등이 종종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정진우 감독의 영화 <석화촌>, <심봤다>,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자녀목> 등은 지역 및 향토성의 측면에서 향토영화의 범주에 들어가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7)이윤희, 「1920년대 중국 향토문학 연구」, 서울대 박사논문, 2013, 24쪽.  8)중국에서 향토문학은 작가 루쉰(魯迅)에 의해 처음 사용된 것으로, 1920년대 향토문학을 지칭하는 용어로 통용된다. 그러나 넓게는 향토를 제재로 창작된 문학작품을 보편적으로 이르는 용어로도 쓰인다. 위의 논문, 8쪽.  9)한만수, 「1930년대 ‘향토’의 발견과 검열우회」,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30집, 2006, 389쪽.  10)이윤희, 앞의 논문, 19-21쪽.  11)이윤희, 앞의 논문, 21-24쪽.  12)토속성과 향토성을 유사한 의미로 중첩하여 사용하고 있으나, 엄밀히 말해서 토속성은 보다 민속학적, 인류학적 함의를 가지고 있는 데 비해, 향토성은 지방성, 지방색의 의미가 더 강하다.  13)김수남, 앞의 책, 388쪽.  14)배상준, 「향토영화 또는 다큐멘터리 경계의 확장-<풀 메탈 빌리지>(조성형, 2007)」, 『영화연구』, 52호, 한국영화학회, 2012, 176쪽.  15)위의 논문, 180쪽.

    3. 정진우 향토영화의 공간이미지

    향토영화에서의 대표적 공간은 대자연이나 전원, 지역으로서의 비도시, 예컨대 농촌, 어촌, 산촌, 그리고 장소16)로서의 선창, 계곡, 숯막 등이 해당된다. 이 공간들은 물리적인 실체이면서 동시에 상상적 공간, 기억과 향수의 대상으로서 소환된다. 그래서 종종 향토영화에서 잃어버린 고향의 의미는 퇴행적 감상성으로 포장되곤 한다.

    향토영화를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는 지역/장소와 향토성 혹은 토속성이다. 정진우의 향토영화에서 지역/장소는 섬(<석화촌>,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산골(<심봤다>,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지방(<자녀 목>) 등이며, 바다와 산, 숲이나 계곡, 강 등으로 경계지운 고립된 공간이다. 또한 무속과 신비, 원시적 생명력과 에로티시즘이 발현되는 공간이다. 이는 도시공간이나 근대적 이성과 스스로 거리두기를 함으로써 원시적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감독의 의도가 공간을 통하여 표출된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향토는 일종의 파라다이스17)이다. 정진우 감독은 심산유곡, 대자연 속에서의 삶을 건강한 에로티시즘으로 표현하고, 원초적 생명감을 이입하면서 마치 낙원처럼 묘사하고 있다.

       1) <석화촌>의 섬-바다, 배

    <석화촌>은 굴(석화)을 따는 어촌의 일상과 바다에 대한 관점, 무속과 전설이 지배하는 그들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바닷가에서 석화를 채취하는 어촌 아낙들에 대한 스케치와 풍어제 및 진혼굿 등 제사의식은 이 영화의 향토성을 강화하고, 이는 이 영화가 민족지학(ethnography)적으로도 유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별례(윤정희)라는 여성과 그를 사랑하는 남자 거무(김희라)와 이식(윤일봉) 그리고 무당(윤인자)과 강주사(이예춘)를 중심에 두고 섬을 둘러싼 전설과 바다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와 강박증을 건드린다. 이 섬사람들이 믿는 전설이 있다. 그것은 바다에 나가 사람이 빠져 죽으면 다음 사람이 죽을 때까지 승천하지 못하고 원혼으로 떠돈다는 내용이다. 별례는 아버지가 고기잡이 나가 죽고 아버지의 혼을 승천시키기 위해 어머니가 바다에 뛰어들자 전설에 대한 강박증에 사로잡힌 다. 별례는 자신을 부르며 구해달라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환청으로 듣게 되고, 급기야 어머니를 위해 죽을 사람을 마련할 테니 폐병환자인 자신의 아들 이식과 혼인하라는 강주사와 무당의 말에 따른다. 그러나 어머니의 목소리는 계속 들리고, 어머니를 위해 죽을 사람이 바다에 빠지기 전에 이미 숨을 거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별례는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그녀는 마지막 길에 사랑하는 거무를 동반하고, 섬에서는 이식의 익사체가 발견된다.

    이 영화의 공간은 크게 섬과 바다, 배로 구분할 수 있다. 섬은 산자의 공간이다. 석화밭과 굿당은 섬을 대표하는 공간이다. 석화밭은 어촌 사람들의 생활공간이자 갈등이 분출하는 공간이다. 온갖 소문이 모여들고 전파되는 공간이자, 그들의 삶의 애환이 스며드는 공간이다. 바다에 남편을 빼앗긴 섬 아낙들의 유대와 욕망과 속내가 원색적으로 드러나고 부딪치는 공간이다. 굿당은 해원과 억압의 공간이다. 본디 무당은 신을 섬기며 산 자와 죽은 자를 매개하는 역할로서, 신의 힘은 무당의 후광이 된다. 이 영화에서 무당은 ‘죽음의 메신저’ 역할을 한다. 늦은 밤 천둥 번개와 함께 별례 앞에 나타나 강주사 아들과 혼인하기를 강요하는 무당의 이미지는 귀신 혹은 ‘저승사자’ 이미지를 투영한다. 용신이 노하면 마을이 ‘불살’을 맞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무당의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이에 비해 바다는 망자의 공간이며, 배는 삶 혹은 죽음으로 가는 통로이다. 섬은 무속(무당)과 돈(강주사)이 지배하고, 바다는 유령(혼령)이 지배한다. 섬과 바다에는 ‘결계’가 쳐 있다. 산 자는 결계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산 자가 나갈 수 있는 때는 그가 죽거나 혹은 죽어야 할 때뿐이다. 그 때조차 그를 데려갈 수 있는 수단은 배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섬과 바다라는 공간은 삶과 죽음을 표상하고 상징하는 공간으로 작용하며, 배는 삶의 수단이자(어선) 죽음으로 가는 통로(원혼을 달래기 위해 죽으러 가는 노인을 태운 배, 별례가 거무와 함께 죽기 위해 바닥에 구멍을 낸 배)가 된다.

    <석화촌>은 섬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운명과 이를 증폭시키는 무속의 신이(神異)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극부감 쇼트(extreme high angle shot)와 표현주의적 촬영 및 사운드효과를 이용한다. 바다에 둘러싸인 섬의 지형을 보여주는 극부감 쇼트가 설정(establishing shot)이나 인서트쇼트로 등장하고, 표현주의적 촬영과 사운드효과를 통해 비바람이 몰아치고 천둥과 번개가 치는 밤의 공포와 환청이 자아내는 괴이한 분위기를 부각시킨다. 또한 이는 낮/일상/삶과는 대비되는 밤/신비/죽 음의 이미지로 치환된다.

    정진우 감독의 영화에서는 원초적인 본능과 성적 에너지가 종종 발현되는데, <석화촌>에서도 별례와 거무의 애무와 배 안에서의 정사, 강주사와 무당의 욕정이 발산되는 장면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에로틱하게 처리된 것은 이식의 화실장면. 이식이 별례를 그리는 장면에서 그녀의 어깨가 노출된 것이나 일렁이는 세숫대야 물에 비친 별례의 얼굴은 이식이 별례와 섹스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녀를 탐하는 이식의 욕망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식은 자신의 욕망을 떨쳐내면서(별례로 하여금 떠나게 하고 이를 용머리산에서 내려다본다) 비로소 죽음을 선택한다.

       2) <심봤다>의 숲과 동굴

    <심봤다>의 오프닝 쇼트는 정진우 향토영화의 건강한 에로티시즘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시각적으로 압축한다. 온보(이대근)가 아름드리나무를 끌어안고 힘을 쓰며 어린애처럼 즐거워하는 모습 그리고 깊은 산을 훑어가는 카메라 워크는 대자연(산)과 합일된 인간의 충만한 생명력을 전달한다.

    이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심마니들과 관련된 영화임을 드러낸다. 산삼을 캐러 나서는 심마니들의 습속과 그들의 마을 공동체에 관한 묘사는 이 영화를 생태학이나 민족지학적 관점에서 보아도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게 한다. 아낙들의 월경날짜를 피해 산삼 찾아 떠나는 날을 잡고, 가기 전에 올리는 산제, 산에서 떠들면 부정 탄다는 속설, 까마귀가 달(산삼의 꽃)을 따먹고 여기저기 날면서 똥을 뿌려주면 그곳에서 산삼이 나므로 까마귀를 길조라 여기는 그들의 생각, 백사를 찾아 나선 땅꾼과 겹치는 이동경로 등은 이 영화가 지닌 향토성과 토속적 습속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부분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들은 <심봤다>의 중심서사와 무관하게 보아도 자못 흥미롭다.

    이 영화에서 산은 인간이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위엄을 지닌 공간이다. 이 공간은 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지닌 자에게는 길을 열어주고, 자신의 내밀한 속살(산삼)을 보여주지만, 탐욕으로 오염된 자에게는 소망(산삼) 아닌 변초(변이풀)를 내어준다. 부정한 이가 변초를 보면 처음에는 영락없는 산삼이나 곧 변이풀로 변한다는 그것이다. 그러나 탐욕으로 오염된 온보에게 산은 위험한 공간이 된다. 그는 굴러 떨어지고, 산삼을 빼앗으려는 무리들에게 쫓기고 생명의 위협을 당하며 동료와 선배 심마니 등 마을 공동체 구성원들로부터 외면당한다. 그는 집을 떠나 대처로 나가고자 하지만 마을 어귀를 지키고 있는 무리들로 해서 폭포 뒤편 동굴에 숨어 지낸다. 동굴은 어둡고 음습하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공간으로서, 온보의 폭력적 내면을 시각화한다. 이전에 온보에게 산은 안락하고 정겨운 생활의 터전이었지만, 이제 산은 그를 변질시키고 그와 가족을 분리시키며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공간이 되었다. 특히 금슬 좋기로 소문난 온보와 그의 아내(유지인)는 이로써 결정적으로 불화하게 되는데, 아들이 아파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도 산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숨어 있던 동굴에서 나가지 않으려 하고, 가족들에게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 온보를 아내는 이해할 수도, 두고 볼 수도 없었던 것이다.

    산삼으로 인한 사건 이후 산은 늘 어둡고 축축하게 나타난다. 계속 비가 오고 구름에 가려 있어 오프닝이나 도입부에서 보여주었던 밝은 햇살과 청명한 산의 기운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산은 축축하고 음습한 ‘동굴’로 변한 것이다. 그곳은 더 이상 건강한 생명력이 발현되는 공간이 아니라 탐욕과 부정과 폭력으로 얼룩진 공간이다. 산삼이 변이풀로 변한 것처럼. 온보가 제 정신을 차리는 것은 산삼을 손에서 놓았을 때(물에서 놓쳤을 때)이다. 그를 오염시켜 변질되게 만든 것은 탐욕이 다. 욕심이 없는 이에게는 ‘그깟 풀뿌리’에 불과한 산삼이지만 욕심에 눈이 먼 온보에게 있어 산삼은 그의 탐욕을 부추긴 매개체인 것이다.

    그러나 온보가 결정적으로 파멸하지 않는 것은 그의 탐욕의 근원이 바로 그의 ‘꿈’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바다로 가고 싶어 한다. 태풍에 배가 잠기고, 아버지, 형, 장인의 시체가 아직도 떠다니는 그 바다가 지긋지긋해 산으로 들어왔지만, 산삼으로 발동선 사서 아버지, 형, 장인의 시체 건지고 고향에서 보란 듯이 살기 위해 산삼을 욕심냈던 것이다. 오프닝에서 아름드리나무를 부둥켜안았던 온보의 행위가 사실은 큰 배를 만들 수 있는 나무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모습이며, 온보의 아들이 계곡물을 따라 하얀 돛단배를 띄우고 쫓아가던 인서트쇼트의 의미도 바로 그 것이다. 병이 나은 온보 아들이 또 다시 돛단배를 띄우고 쫓아가는 라스트에서는 오프닝과는 달리 돛단배가 뒤집힐듯하다가 꿋꿋이 떠내려간다. 이는 온보의 꿈과 행복이 아직 유효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3)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의 숯막과 장터

    이 영화는 배우 정윤희라는 이름을 독보적으로 만들어주었다. 자칫 제목에서부터 1980년대 ‘에로영화’의 작명법이 연상되면서 뭔지 ‘야 할’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작용하지만, 기실 영화는 자연과 문명의 대비를 통해 건강한 에로티시즘을 부각한다. 정윤희는 소년(소녀가 아닌) 과도 같은 천진함으로 꾸밈없이 자신의 몸을 드러내고 이는 도착적 쾌락이 아닌 ‘건강한 관능’으로 다가온다.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에서 현보(이대근)와 순이(정윤희)가 거주하는 공간은 첩첩산중 오두막이다. 이곳에서 현보는 나무를 베어 숯을 굽고, 장에 팔아 생활한다. <심봤다>에서 아름드리나무와 씨름하던 이대근은 역시 이 영화에서도 ‘힘밖에’ 쓸 수 없을 것 같은 특유의 단순함과 순박함으로 숯쟁이 현보를 체화한다. 현보와 순이는 숯을 구며 이글거리는 불의 열기를 흠씬 쬐곤 시원한 계곡물에 멱을 감아 더위를 쫓는다. 이곳은 그들의 낙원. 벌거벗은 몸이 부끄럽지 않은 그들의 파라다이스다. 물장난 치고 벌거벗은 순이를 업고 가는 현보의 모습이 이곳이 그들만의 낙원임을 그 어떤 말보다 명료하게 보여준다. 이곳에 현보의 친구 칠성(윤양하)과 산림주사 김주사(최봉)가 찾아들면서 낙원의 평온함은 깨진다. 칠성은 순이를 탐하는 마음을 슬쩍슬쩍 흘리고, 김주사는 노골적으로 순이에 대한 욕정을 드러낸다. 김주사의 농간에 의해 현보가 산림법 위반으로 잡혀 들어가자 김주사는 순이를 겁탈하기 위해 찾아온다. 칠성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지만, 결국 순이는 다시 찾아온 김주사를 끌어안고 숯막의 불가마 속으로 뛰어든다.

    이 영화에서 숯막은 삶과 죽음, 에로티시즘이 체화된 공간이다. 현보와 순이의 삶을 지탱해주는 최소한의 재화를 생산하는 곳이자, 김주사를 죽음으로 끌어들이는 공간이고, 순이가 수치스런 삶이 아닌 죽음의 안식을 찾는 공간이며, 삶의 에너지로서의 건강한 에로티시즘이 발현되는 공간이다. 현보와 순이가 숯가마 앞에서 섹스하는 신에서 두 사람의 모습은 빨갛게 타오르는 불의 이미지와 함께 포착되는데, 이는 열정과 생명의 비유이다.

    이에 비해 장터는 현보와 순이의 평화를 깨뜨리는 공간으로 작용한 다. 특히 장터는 순이를 유혹하는 공간이다. 산 속에서만 살던 순이에게 도회의 공기를 잔뜩 품은 장터의 물건들은 그녀 내면의 욕망을 일깨우는 매개체가 된다. 옥가락지와 화장품 등 산 바깥의 물건들은 그녀를 흔들고, 현보와 순이의 평온했던 삶에 선명한 균열을 내기 시작 한다. 김주사가 가져다 준 박하분을 하얗게 바르고 나선 순이의 얼굴은 언뜻 유령처럼 보이는데, 이는 산 바깥 공기에 의해 오염된 순이는 더 이상 ‘산 사람’이 아님을 암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보가 그러하듯이 순이도 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다. 김주사가 순이를 겁탈하려 할 때 칠성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 순이는 도시로 가자는 칠성을 따라나서지만 이내 숯막으로 돌아간다. 그곳(도 시)은 ‘산이 없는 곳’이고 ‘사람 많고 기와집 많은 곳’이며 ‘도라지 두릅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영화의 오프닝에서 자연의 모습, 산과 구름, 고목 위의 나리꽃, 불이 피어오르는 숯가마 등을 카메라가 훑어가면서, 또한 인서트쇼트로 나무, 산, 물, 새, 암석, 풀 등 자연의 묘사에 공을 들인 이 영화의 의도를 뒷받침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산 바깥에 파라다이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현보가 지금은 없지만, 그를 기다리며 언젠가 다시 그들의 낙원을 만들 기대마저 버리고 싶지 않은 순이였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돌아간 숯막에 김주사가 찾아왔을 때 순이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던 것이다.

       4)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의 섬- 파시와 선창, 갯벌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에는 흑산도, 위도 연평도 등 파시가 서는 섬을 배경으로 술집 작부로 전전하는 은주(나영희)와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 두진(하재영)이 등장한다. ‘흑산도의 스타’에서 생선 한 마리에 몸을 팔아야 할 만큼 그 세계에서도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은주의 삶은 가혹하기 그지없다. 영화는 파시가 서는 선창의 모습, 주변의 술집과 작부들의 생활을 리얼하게 담아낸다. 불 밝힌 어선들과 배를 수리 하는 뱃사람들의 강건하지만 생활에 찌든 신체를 클로즈업하고, 섬으로 팔려간 여자들이 뱃사람들과 희롱하며 수작을 붙이거나, 모여앉아 신세 한탄을 하고 노랫가락을 뽑아내는 모습을 통해 삶의 비루함과 고됨, 체념과 허무를 담아낸다.

    작부로 살아가는 여인들에게 섬은 하나의 거대한 감옥이자 ‘귀양지’ 이다. 바다에 의해 육지와 고립/분리된 공간에서 그들은 ‘갇혀’ 있다. 이 영화에는 또 하나의 ‘갇힌’ 존재가 등장하는데, 바로 연평도의 이산가족 할머니이다. 그는 휴전선에 막혀 고향땅에 갈 수 없지만, ‘참고 기다리노라면 언젠가는 올 통일’을 고대한다.

    영화의 라스트에 은주를 찾아 헤매던 두진이 연평도로 와 그녀와 재회한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은주는 두진을 피하여 달아나고 그 뒤를 두진이 쫓아간다. 바닷가 뻘밭에 이른 두 사람은 갯벌에서 넘어지고 뒹군다. 뻘을 잔뜩 묻힌 은주가 바다에 뛰어들어 죽겠다고 발버둥치자 두진은 그녀가 필요하다고 고백한다. 카메라는 이를 거리를 두고 지켜본다.

    이 장면은 은주와 두진의 해피엔딩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두진의 고백에도 카메라는 그들에게 접근하지 않는다. 정진우 영화의 인물들, 특히 여성인물들은 대부분 죽거나 불행한 결말로 처리 된다. 물론 <석화촌>에서 별례와 거무가 죽었는지 혹은 연락선에 의해 구조되어 뭍으로 갔는지를 관객의 상상에 맡기는 열린 결말로 마감한 적도 있다. 그러나 <백구야 ->의 경우 모호한 카메라 시선으로 인하여 해피엔딩의 느낌은 매우 약화되었다. 라스트쇼트의 이 모호한 느낌은 사실 마지막 장면이 검열에서 삭제된 탓이다. 정진우 감독에 의하면 삭제된 장면은 은주와 두진이 완전히 진흙범벅이 되어 갯벌에 주저앉아서 사회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이런 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다”와 같은 대사들이 있었는데 그 신이 검열에 의해 다 잘리고 스틸로만 남아 있다18)는 것이다.

    <백구야 ->의 파시와 선창은 삶의 역동성과 함께 삶에 치이고 지친 여성들의 애환과 퇴폐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가장 치열하고 리얼하면서 또한 가장 퇴폐적이고 허무한 공간으로 기능한다.

       5) <자녀목>의 계곡과 동굴, 자녀목 언덕

    <자녀목>은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여인들에게 온갖 굴욕을 안겨주고 혹은 성적으로 수탈했던 조선조 어느 시대의 ‘여인 잔혹사’이다. ‘대를 잇는’ 것이 지상명제인 어느 양반가문에 남사당 출신의 씨받이 여인 사월(원미경)이 등장한다. 사월은 집안의 주인나리와 동침하게 되는데, 사실 사월이 동침한 대상은 주인나리가 아니라 그 집 머슴 성삼 (김희라)이였다. 사월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자 주인나리의 핏줄이라 알고 있는 노마님(박정자)은 아이를 데려가고 사월을 내쫓는다. 그러나 제가 낳은 아이를 품고 싶은 사월은 노마님의 며느리 연지(김용선)의 도움으로 성삼과 함께 아이를 데리고 도망친다. 연지는 성삼이 떠나기 전 그와 관계하여 집안의 대를 이으려 하지만, 연지를 연모하던 의원의 고자질로 연지의 행각이 드러나자 스스로 자녀목에 목을 맨다.

    이 영화에서 주요한 공간은 집이지만, 영화의 주제와 분위기를 전달하는 공간은 계곡과 동굴 그리고 자녀목이 서있는 언덕이다. 영화의 오프닝은 언덕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보여준다. 자녀목이다. 오프닝은 이 나무의 기괴한 아우라와 불길함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하고 있다. 마치 여인의 거대한 음부와도 같은 형상의 이 나무에 자녀목(恣女木)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음행을 저지른 여자들의 코를 베고 그들을 나무에 매달아 처단했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영화는 자녀목을 한껏 음산하고 기괴하게 보여줌으로써 이 나무가 영화의 실질적 주인공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실제 영화의 엔딩을 장식하는 것도 바로 자녀목이고, 자녀목이 ‘여인잔혹사’의 상징이라는 측면에서도 개연성은 있다고 본다.

    <자녀목>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수태를 위한 고행을 묘사하는 부분 이다. 계곡의 남근석에 매단 실을 여인의 음부에 연결하고 이 실을 통하여 계곡의 물이 흘러들게 하는 방식으로 수태를 하기 위한 강한 자궁으로 단련시키는 모습은 꽤나 흥미롭다. 또 동굴에서도 치성을 드리는 여인의 벗은 몸 위에 스님이 붓으로 글을 써내려가고 붓끝이 몸에 닿을 때마다 움찔하며 세포 하나하나를 일깨우는 듯한 모습도 인상적이다. 이러한 묘사들은 여인의 벗은 몸과 선정적 자세를 통하여 관객의 관음증을 자극하려 한다는 의도가 충분히 읽힘에도 인류학적 관점에서 볼 만한 풍경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나무(자녀목), 남근석이 자리 잡은 계곡, 동굴 등 주요 공간은 여성에 대한 약호와 상징으로 기능하고, 영화의 주제를 강화하며 시각화 시키는 공간이다.

    16)에드워드 랠프는 장소는 행위와 의도의 중심이며, 우리가 실존의 의미 있는 사건들을 경험하게 되는 초점이라고 지적한다. 에드워드 랠프, 『장소와 장소상실』, 논형, 2005 102쪽, 문재원, 21쪽 재인용. 또한 장소는 실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거처이자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 곳이다.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엮음, 『장소경험과 로컬 정체성』, 소명출판, 2013, 3쪽.  17)<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에서 산 너머 수련과 문이 밀회하는 공간을 정진우는 ‘자신들만의 파라다이스’라고 표현한다. 이는 ‘원치 않게 세 번이나 잡혀 들어간’ 그의 처지와 심경이 투영된 어투로 보인다. 김형석, 앞의 글, 159쪽.  18)김형석, 앞의 글, 160쪽.

    4. 불균질한 공간/장소 이미지의 결

    정진우 감독은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이고 한국영화 기술혁신과 도입에 적극적인 테크니션이다. 그는 영화 <율곡과 신사임당>(1978)에서부터 동시녹음을 시도하였고, <가시를 삼킨 장미>(1979), <심봤다>(1979),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0),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1981) 등 동시 녹음영화를 거듭 완성, 사운드와 음향효과에 대한 관심을 실천하였다. 또한 1989년 한국 최초의 복합상영관 시네하우스를 개관하고 S. 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템킨>(1925)을 비롯한 고전영화들을 상영하면서 영화 교과서에서나 보았던 세계 명화에 대한 시네필(cinephile)의 갈증을 덜어주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가 한국 영화 회고전의 주인공으로 정진우 감독을 선정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회고전 책자 『영원한 영화인 정진우』의 뒷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

    위의 글에서처럼 정진우 감독에 대한 관심은 그간 그의 작품에 대한 온전한 연구나 다양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점에서 출발한 다. 그래서 이 연구에서는 정진우 감독의 영화들이 한국영화라는 지평 에서 어떤 위상과 의미로 존재할 것인지를 살펴보는 작업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작업에 활용한 키워드는 바로 ‘향토영화’라는 용어였다.

    향토영화, 향토물, 토속물, 토속영화, 토속에로티시즘 등 정진우의 향토영화를 가리키는 여러 용어들이 있으나, 정치한 정의를 바탕으로 명명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거의 유사한 개념으로 적용되는 용어들을 향토영화로 수렴하고, 향토영화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향토영화는 산업화의 대척점에 서있거나 전통적 습속이 강하게 남아 있는 지역이 주요한 공간이 되는 영화로서 도시보다는 농어촌이나 산골 등 ‘지역/지방’을 주요 배경으로 하며, ‘향토성’이라 칭하는 특성과 정서를 함유하고 있는 영화들을 일컫는다. 그리고 향토영화의 구성요소로서 ①지역, 그중에서도 농어촌이나 산촌 등 비도시나 전원을 공간적 배경으로 할 것 ②‘향토’라는 지리적 차원에 그 지역민들의 삶의 방식과 정서, 흔적이 체화된 향토성이 내포되어 있을 것, 그리고 부가적으로 토속적 문화나 습속 등이 잔존해 있을 것 등으로 정리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정진우 감독의 영화 <석화촌>, <심봤다>,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자녀목> 등은 향토영화로 분류할 만하였다.

    <석화촌>은 정진우 감독 향토영화에 있어서 하나의 징후였다. 인간의 삶에 드리운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와,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과, 이를 공간/장소에 대한 ‘상상적 결계’로 접근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정진우 영화의 인물들은 거의 예상치 않던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심봤다>에서는 ‘소망’(산삼)을 발견한 온보(이대근)와 그의 가족이,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에서는 현보와 순이가, <자녀목>에서는 연지 아씨가 그들이다. 이들을 둘러싼 운명의 소용돌이는 누군가의 목숨을 거둬야만 비로소 멈추게 된다. <석화촌>의 별례와 거무,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의 순이, <자녀목>의 연지가 목숨을 내놓았고, <심봤다>의 온보와 그의 처는 아들의 목숨이 경각에 이르는 위기를 겪어야 했으며,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의 현보는 산림을 훼손했다는 명목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것이다.

    또한 정진우 영화의 인물들은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혹은 벗어나지 않는다. <석화촌>에서 거무가 별례와 함께 떠나고자 하지만 별례가 몰래 배에 구멍을 내 거무와 함께 죽음을 택함으로써 바다를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온보가 자식들을 위해 대처로 나가고자 했으나 산삼을 노리고 그들을 막아서는 이들과 온보의 욕망이 얼마나 저열하고 허무한 것인지를 절감하는 아내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한 것처럼(<심봤다>), 순이는 칠성을 따라 집을 떠나지만 결국 되돌아와 김주사를 껴안고 숯가마 속으로 뛰어든다. 은주는 두진의 도움으로 섬을 탈출하는데 성공하지만 다시 붙잡혀 또 다른 섬에 팔려감으로써 결과적으로 섬을 벗어나지 못한다(<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연지 역시 대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로 온갖 수모를 주고 심지어 열녀문을 위하여 죽음을 강요하는 시집에서 결국 떠나지 못하고 자녀 목에 목을 맨다(<자녀목>). 이와 같이 정진우 영화의 인물들은 자신의 공간/장소에 속박되어 있거나, 벗어나려 해도 거듭 귀환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이 공간/장소 주변에 ‘상상적 결계’라도 쳐 있는 것처럼.

    그러나 이들 공간/장소의 결은 균질하지 않다. <심봤다>, <뻐꾸기-> 에서는 행복과 안식의 공간이지만, <석화촌>과 <백구야 ->, <자녀목>에서는 불행과 억압의 공간으로 작용한다. 또한 속세와 완전히 동떨어진 산을 이상향의 공간으로, 바닷가 어촌은 철저히 자본주의의 영향 아래 놓인 ‘거래’의 공간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20)

    공간의 의미와 함께 정진우 영화에 나타나는 향토성/토속성은 감독이 가지고 있는 한국적 정체성과 맞닿아 있다. 무속, 전통습속이나 비방, 사당패나 심마니, 숯막, 파시 등 한국인의 전통 속에 새겨진 습속과 문화, 생활양식은 인물의 고난을 보여주는 형태로 제시되지만 그의 영화의 톤은 이를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향수’로서 환기하는 측면이 크다.

    정진우 영화의 향토성은 로컬리티에 대한 의미 있는 접근이기 보다는 한국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수단으로서 한국적 정체성을 활용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1970∼80년대 한국적인 것이 곧 세계적인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가운데, 한국적인 것을 전통문화와 습속에서 찾으려는 경향들이 나타났고, 이를 반영하여 한국적인 소재를 취한 시대극이나 향토물들이 등장했다. 정진우의 향토영화도 이러한 맥락 위에 서있다.

    19)부산국제영화제, 앞의 책, 뒷표지.  20)주성철, <죽음으로 내몰린 신여성들을 위한 장송곡>, 『영원한 영화인 정진우』, 2014, 112-113쪽.

    5. 맺는 말

    정진우의 향토영화가 자연과 문명의 대비 속에서 원시적 열정과 생명력을 형상화하고 있지만, 종종 그의 영화는 ‘토속에로티시즘’이라는 말로 더 통용되곤 한다. 이때 토속성은 에로티시즘을 강화하기 위한 소재적 측면에서 작용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정진우 향토영화의 에로티시즘은 본능적이고 건강한 성과 관련되어 있다. 그럼에도 ‘야한 영화’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것은 그의 영화에 나타난 여성에 대한 관음적 시선 때문일 것이다. 이 시선은 여성에 대한 대상적 시선으로서, 여성의 신체에 대한 관음증을 내포하고 있다. 정진우 감독 역시 정윤 희, 원미경, 윤정희, 유지인 등 당대의 스타배우들을 기용, 대중의 호기심과 관음증을 일정 부분 만족시키고 있는 게 사실이다. 특히 정윤희의 경우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에서 과감하고 도발적이며 동시에 천진하고 순진무구한 성적 매력을 보여준 것이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고, 이러한 부분이 이 영화들에 대한 평가를 왜곡시키는 측면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진우 감독의 시선이 대상으로서의 여성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여성을 나약한 희생자로서의 위치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오히려 행동하는 여성으로 표상하면서, 정진우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만들기도 한다. <석화촌>의 별례는 무속이나 인습의 희생제물이기는 하나, 어머니를 진혼하기 위한 그 스스로의 결단을 실행하고, 사랑하는 거무와 죽음조차 같이 하고 싶다는 생각을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옮긴다. <심봤다>에서 온보의 아내는 남편의 잘못된 결정에 저항하고 아들을 살리기 위하여 숨어 있던 곳에서 뛰쳐나갈 만큼 기개가 있으며, <뻐꾸기->의 순이는 자신을 탐내고 결국 불행으로 몰아넣은 김주사를 안고 불 속에 뛰어드는 결단을 보인다. <자녀목>의 연지는 씨받이의 모성과 안위를 헤아려 머슴과 도망가게 해주며, 양반으로서의 체모를 버리더라도 자신의 핏줄로 대를 잇겠다는 능동성을 드러내고, 이러한 일들이 발각되었을 때 처단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그래서 그녀의 행위는 대를 잇기 위해 비인간적 행위를 강요하는 잘못된 전통과 인습에 순응하고, 희생자의 길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소극적일망정 저항으로 읽혀질 개연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정진우 감독은 대중영화로서의 통속성을 굳이 감추지 않지만, 그의 주제의식과 스타일이 보태져 향토영화와 같은 개성적인 영화들이 나오게 되었다. 앞으로 그의 영화에 대한 더욱 다양하고 심도 있는 분석과 연구가 나오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 1. 김 수남 2003 『한국영화감독론2』 google
  • 2. 2014 『영원한 영화인 정진우』 google
  • 3. 2013 『장소경험과 로컬 정체성』 google
  • 4. 2010 『장소성의 형성과 재현』 google
  • 5. 1996 『한국영화 70년 대표작 200선』 google
  • 6. 배 상준 2012 「향토영화 또는 다큐멘터리 경계의 확장:<풀 메탈 빌리지(조성형, 2007)」 [『영화 연구』] google
  • 7. 이 윤희 2013 「1920년대 중국 향토문학 연구」 google
  • 8. 한 만수 2006 「1930년대 ‘향토’의 발견과 검열 우회」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Vol.30 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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