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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The rules of motion picture censorship and changes of Chosun film industry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의 검열수수료 문제와 조선영화산업의 변화*
  • 비영리 CC BY-NC
ABSTRACT
The rules of motion picture censorship and changes of Chosun film industry
KEYWORD
censorship , Chosun film industry , movie theater , distribution
  • 1. 들어가며

    조선영화의 검열수난은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의 제정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전통적인 한국영화사의 시각이었다.1) 1926년 8월 1일 시행된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으로 인해 검열이 강화되었고 조선영화인의 창작의 자유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이야말로 조선영화계의 악법이자 조선영화를 견제하려는 식민지 지배기관의 폭압적인 장치라는 것이다.2) 이러한 관점은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 이전에 더욱 심각한 형태의 검열과 단속이 있었다는 점과 각 도에서 발령하여 시행하고 있던 흥행관련 규정 등의 존재를 간과하게 만든다.

    그 당시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의 시행이 일부 조선영화인들에게는 부정적이기만 하지는 않았다. 아래의 기사는 단성사(團成社)의 지배인으로 많은 수의 조선영화를 제작하는데 관여했던 박정현(朴晶鉉)이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의 시행에 대해 ≪每日申報≫와 인터뷰한 것이다.

    박정현은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이 시행되기 이전에도 검열은 존재했으며, 단 체계화 되지 않았기에 각지에서 자의적이고, 즉흥적인 검열이 이루어졌음을 증언하고 있다.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지, 영화가 상영되는 공간에서의 영화 상영을 중지시키는 폭력적인 형태의 검열은 언제나 존재했다. 영화업자의 입장에서 검열의 제도화는 미비한 제도로 인해 발생할지 모를 피해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단성사의 지배인 박정현의 입장은 조선인 흥행업자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활동사진검열규칙」의 제정이 조선영화인들에게 피해의 기억으로 남았을까? 조선에서는 1923년부터 본격적인 영화제작이 시작되었다. 초기 조선영화의 대부분은 <춘향전(春香傳)>(1923), <장화홍련전(薔花紅蓮傳)>(1924)과 같은 고전소설을 각색하거나 <장한몽(長恨夢)>(1925), <쌍옥루(雙玉淚)>(1925), <농중조(籠中鳥)>(1926)와 같은 일본신파극을 번안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특별히 검열에 문제될 만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1926년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이 제정되고 때마침 <아리랑>(1926)을 시작으로 조선의 현실을 묘사하는 영화들이 등장함으로써 조선영화의 상영은 검열에 의해 규제될 수밖에 없었다. 현실사회를 묘사하려고 하는 조선영화의 성격변화는 1920년대 중반부터 조선에 큰 영향을 끼친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 받은 것이었다. 실제 영화제작에 카프를 비롯한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참여하면서 이전의 영화제작과는 사뭇 복잡한 양상이 전개되었다.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이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도 다른 방법으로의 검열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이 규칙이 조선영화의 제작을 위협했다는 전통적인 주장은 영화검열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연구를 통해 수정, 보완될 필요가 있다. 다행이 최근의 일제강점기 영화검열에 관한 논의는 검열의 다양한 측면들을 고찰하는 식으로 확대되었다. 대표적으로 식민지 권력이 할리우드 영화의 조선 진출을 돕고 그 수수료를 챙겼으며, 이는 조선영화산업의 발전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는 브라이언 이시스의 연구4)와 이화진 등의 보다 세밀한 연구는 영화검열에 관한 다양한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5)

    제도의 변화는 영화산업에 변화를 줄 뿐 아니라 내용에도 영향을 미친다. 본고에서는 검열의 제도화에 따른 산업의 변화에 주목하고자 한다. 1920년대 조선영화산업의 변화를 이끈 균열의 시작은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의 시행에 따른 검열수수료의 과다한 부담에 대한 영화인들의 저항이었다. 이 글에서는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의 시행과 영화인들의 반응, 이에 따른 산업의 재편을 살펴 볼 것이다. 이를 통해 검열의 시행과 검열수수료라는 균열을 통해 1920년대 후반 조선영화산업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알아 볼 것이다.

    1)일제강점기 영화사연구는 2005년을 기점으로 이전, 이후로 나눌 수 있다. 2003년 이후 이영일의 원로영화인들 녹취록이 공개되어 생생한 증언들이 날 것 그대로 공개 되었고, 2005년 영상자료원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영화를 발굴 공개한 것이 일제강점기 한국영화 연구의 기폭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전통적인 영화사 연구’는 이러한 새로운 자료들의 도움을 받지 않은 2005년 이전에 생성된 연구물들을 지칭한다.  2)원로 영화인들과 녹취자 이영일 사이의 검열에 관한 의견은 박정희정권 시기 횡행했던 검열에 대한 이영일의 강박관념을 의심케 한다.(이순진,「식민지시기 영화검열의 쟁점들」,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식민지시대의 영화검열』, 한국영상자료원, 2009, 각주 64, 67쪽.) 어쩌면 검열의 문제는 연평균 200편이 넘는 영화가 만들어지던 60-70년대의 영화인들이 딛고 있는 당대의 상황과 관련되었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영화는 연평균 10편 미만일 뿐이었고, 식민지 지배 권력의 입장에서 검열은 창작을 제한하기 보다는 상영을 제한하는 쪽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3)「映畵藝術의 眞價와 관대한 검열을 긔대」, ≪每日申報≫, 1926년 7월 7일자.  4)브라이언 이시즈의 논문은 검열에 관한 다양한 시각이 존재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하지만 논문에 보이는 여러 실증적 오류는 많은 수정을 필요로 한다. 가장 큰 실증적 오류는 “한국에서 검열 받는 것이 일본 본토에서 검열받는것 보다 50-60% 낮은 검열비를 부과했”으며, 이에 따라 “할리우드 영화들을 한국시장으로 몰려들게 하는 상당한 경제적 인센티브로 작용했다.”(브라이언 이시즈, 「식민지 조선에서 좋은 사업이었던 영화검열」, 『한국문학연구』30호, 한국문학연구소, 2006, 217쪽)는 주장이다. 이시즈의 주장과는 달리 조선총독부의 검열수수료는 일본 내무성의 검열수수료보다 낮았던 적이 없었다. 또한 이 논문을 인용한 다른 글들에서는 모호한 표현으로 인해 전혀 다른 결론이 도출되기도 한다. 이시즈의 논문에서 외화 중 90% 이상이 할리우드 영화였다는 주장(위의 논문, 207쪽)을 조흡은 일본영화까지를 포함한 수치로 이해하여 “왜 일본 영화 대신 할리우드 영화를 그렇게 많이 한국에 들여올 수 있게 허가했는지 의문”이라며 “할리우드 영화가 일본영화보다 더 정치적으로 효과적이”었다는 전혀 엉뚱한 결론을 제시하기도 했다.(조흡, 『영화가 정치다』, 인물과사상사, 2008, 168∼169쪽.)  5)최근의 검열관련 주요 연구물들은 다음과 같다. 복환모, 「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의 시행과 “경찰적 견해”의 이중검열에 관한 고찰」, 『현대영화연구』9호, 현대영화연구소, 2010. 브라이언 이시즈, 「식민지 조선에서 좋은 사업이었던 영화검열」, 『한국문학연구』30호, 한국문학연구소, 2006. 이순진, 「식민지시대 영화 검열의 쟁점들」,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식민지시대의 영화 검열』, 한국영상자료원, 2009. 이화진, 「식민지기 영화 검열의 전개와 지향」, 『한국문학연구』 35호, 한국문학연구소, 2008. 조준형, 「일제강점기 영화정책(1903-1945)」, 『한국영화정책사』, 나남출판, 2005. 최성희, 「조선총독부 영화검열 정책과 ‘조선영화’의 상관성」,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2.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의 시행과 검열료 인하 투쟁

    제1차세계대전기 동안 호황을 맞았던 일본 경제는 1920년대 들어서면서 장기적인 경제침체에 들어서게 된다. 특히 다이쇼(大正)에서 쇼와(昭和)로 넘어가는 1926년 말에서 1927년에 이르는 기간은 쇼와공황(昭和恐慌)이라고 불리는 경제침체의 중심에 해당했다.6)

    일본 내의 경제적 상황은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이 공포되었던 1926년 7월의 상황은 그 정도가 심했다. 7월초부터 시작된 장마는 7월말까지 3주간 이어져 1925년 여름에 있었던 을축년 대홍수와 맞먹는 피해가 발생했다. 이로 인한 상업의 침체는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극장업도 마찬가지였다. 아래의 ≪每日申報≫ 기사는 장마로 인한 극장업의 타격을 잘 묘사하고 있다.

    관객이 누워 볼 정도로 한산한 극장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위의 기사에서처럼 여름철 비수기에 수해까지 겹친 활동사진관은 불황 그 자체였다.

    활동사진업의 불황을 이끈 또 하나의 원인은 경성의 활동사진관 수 증가이다. 1920년 경성의 활동사진관은 일본인측 3개관(대정관[大正館], 황금관[黃金館], 희락관[喜樂館]), 조선인측 2개관(단성사, 우미관[優美館]) 뿐이었다. 그러나 활동사진업의 호황에 힘입어 일본인측으로 경룡관(京龍館, 1921년), 중앙관(中央館, 1922년)이 새로 만들어졌고, 조선인측으로 조선극장(朝鮮劇場, 1922)이 새로 개관했다. 이에 따라 변사들을 비롯한 활동사진관 직원들의 급료가 인상되었고, 관객을 어들이기 위한 홍보경쟁 가열, 가격경쟁 심화 등으로 전체 관객 수는 늘었으나 이익이 줄어드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3미터 당 5전씩의 검열수수료를 물게 하는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의 시행은 영화업자들의 큰 반발을 살수밖에 없었다.

    영화업자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이미 일본에서 3미터 당 5전씩의 검열수수료를 부과한 작품에 대해 또 다시 조선에서 그와 같은 금액을 받는 다는 것은 난폭한 것이며, 1개월에 320원∼400원의 검열수수료를 지불하는 것은 불경기에 경영을 지속할 수 없이 곤란한 것이며, 내지의 경우 영화제작사나 배급업자들이 검열수수료를 지불하여 수천개소의 극장에서 상영하나 이와는 달리 불과 19개소의 상설관8)만 존재하는 조선에서는 경성의 상설관에서 검열수수료를 대부분 부담할수밖에 없기 때문에 불합리하다는 주장이었다.9) 영화업자들은 검열수수료의 징수로 수년 내 각 상설관 마다 1만원∼2,3만원의 손실을 끼칠 것으로 예상했다.10)

    1926년 7월 5일 조선총독부령 제59호로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이 포되자 영화업자들의 반발이 시작되었다. 특히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의 경우 검열수수료 감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검열수수료에 대한 저항은 거셌다. 시행일인 8월 1일이 다가오자 영화업자들의 초조감은 극에 달해, 각 상설관 운영자와 영화배급업자들을 중심으로 집단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검열료 인하 운동은 실제 검열료 인하가 이루어지는 1928년 9월까지 3차례의 진정으로 이어졌다.

       1) 1차 검열수수료 감하 운동

    1차 검열료 감하 운동은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이 시행되기 직전인 1926년 7월에 이루어졌다. 상설관대표와 배급업자로 구성된 영화업자들은 7월 16일 요릿집 화월식당(花月食堂)에 모여 검열수수료 감하운동을 위한 위원을 선출하고 진정서를 작성했다. 이날 모임에서 위원장으로는 1913년부터 조선에서 활동사진업에 종사한바 있는 활동사진업계의 중진이자 당시 황금관과 조선극장을 경영하던 하야가와 고슈(早川孤舟)가 선임되었고, 위원으로는 희락관 지배인 마쓰다(松田正雄), 대정관 지배인 나카미즈(中水友之助), 중앙관 지배인 후지모토(藤本省三) 단성사 운영주 박승필(朴承弼), 우미관 운영주 시바타(紫田三代治), 영화배급업자인 폭스영화배급소의 아라이(荒木), 앵정상회(櫻庭商會, 사쿠라바상회)의 아이자와(相澤), 만선활동(滿鮮活動)의 미야가와 소노우스케(宮川早之助) 등 주요 영화업자들이 선출되었다.11) 이들은 다음과 같은 삼개항의 내용을 결의하고 총독부 도서과에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7월 19일 오전 11시 반, 위 결의안을 가지고 위원을 대표하여 마쓰다, 후지모토, 나카미즈, 아이자와, 이(李)13)가 총독부의 곤도(近藤) 도서과장을 방문하여 오후 12시 40분까지 면담했다. 영화업자 대표들은 검열수수료가 없는 것이 좋지만, 당국의 정책상 어쩔 수 없다면 3미터당 1전씩으로 감하해 달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실무책임자인 곤도 도서과장은 상설관의 경영난은 경영방법을 바꾸어서 극복해야 하며, 경영난과 검열수수료와 관련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영화업자들의 진정을 거절했다.14)

    곤도 도서과장의 태도에 당황한 영화업자들은 다음날인 7월 20일 오전 10시 대책을 논의하고자 경성상업회의소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영화업자들은 닛카츠(日活)와 쇼치쿠(松竹) 기타 영화회사에서 검열을 마친 필름의 복사본을 원판인 양 검열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내지의 연장으로써 검열요금 면제를 위한 아래의 5개항으로 된 결의서를 작성했다.15) 결의서에는 검열료 감하를 위한 운동에서 일치된 활동을 위한 행동규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의서 작성에 이어 영화업자들은 탄원서 작성에 들어갔다. 하야가와 위원장이 초안한 원안을 심의하여 아래와 같은 탄원서를 작성했고, 바로 인쇄하여 각 언론기관과 사회기관에 배포했다.

    영화업자들의 결의와 탄원에도 불구하고 당국에서는 정확한 영업 상태를 조사하기 전까지 어떠한 변동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1차 검열수수료 감하운동은 성과 없이 끝을 맺었다. 영화업자들 중 일부는 검열수수료 인하 때까지 휴관하던가 아니면 검열수수료 인하 때까지 재상영 영화만을 상영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상설관주와 배급사 간의 입장차이 때문에 이 논의조차 합의될 수 없었다.18)

    영화업자들은 다시 경영곤란으로 폐관할 지경이라며 검열수수료를 인하해 달라고 읍소하는 식으로 진정운동의 방법을 바꾸었으나, 당국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19) 예정대로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은 시행되었고 영화업자들은 당국의 조치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1차 진정운동 과정에서 검열수수료 감하운동 중에 발생한 상설관주와 영화배급업자 사이의 미묘한 갈등은 검열수수료를 누가 지불할 것인가에 대한 반목으로 확대되었다.

       2) 2차 검열수수료 감하 운동

    검열수수료 문제는 비단 조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일본 내의 영화업자들도 불황에 3미터당 5전씩의 검열료를 부과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청원서를 1926년 10월 22일 내무대신에게 제출했다.20) 일본 내 영화업자들의 움직임에 조선영화업자들도 다시 검열수수료 감하운동에 돌입했다. 그러나 누가 검열수수료를 지불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상설관 운영주와 배급업자 사이의 반목은 여전했다.

    1927년 초의 2차 검열수수료 감하 운동은 상설관 운영자들이 주도했다. 상설관 운영자들은 검열수수료 감하와 더불어 경영상태 회복을 위하여 몇 가지 조치를 요구했다. 경성부에 대해서는 영업세 부과율의 감하, 경성전기회사에 대해서는 전기료를 보통요금에서 동력요금으로 감하해달라고 요구했고, 총독부 보안과에 대해서는 상영권수를 현재 20권에서 25권으로 증가해달라고 했다. 이러한 요구에 대해 경성전기 회사측 만이 요구를 받아드렸고 나머지는 성과를 얻지 못했다.21)

    2차 검열료 감하 운동을 이끌던 하야가와는 곤도 도서과장과의 수 차례의 면담에서 성과를 얻지 못하자 1927년 2월 16일 아사리(淺利) 경무국장과의 담판을 시도하게 된다. 경성의 상설관주들과의 면담에서 아사리 경무국장은 상설관주들이 겪고 있는 경영난을 이해하며 이 문제에 대해 고려해 보겠다는 입장을 표명한다. 상설관주들은 긍정적인 신호로 이를 이해했다.

    상설관 운영자들의 검열료 인하 움직임에 대해 배급업자측도 1927년 2월 22일 오후 4시, 욱정의 요릿집 미도리에서 경성의 12개 주요 배급소 업자들이 모여 배급업자조합을 결성했다. 이 자리에서 검열료 감하 운동에 대해서는 상설관주와 행동을 같이 하는 대신, 배급업자들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단체 행동은 계속 유지하기로 한다. 이를 위해 자체 결의안을 만들었다.22)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설관주와 영화배급업자들의 이러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총독부의 검열료 인하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검열료 인하가 불가했던 가장 큰 이유는 검열수수료 수입 때문이었다. 총독부에서는 검열수수료를 가지고 활동사진을 이용한 사업을 추진하는데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상설관주와 배급업자들 간의 이해차이에서 발생하는 영화업자들의 단결력 부족도 원인이었다. 1927년 2월 18일 있었던 상설관주와 배급업자들간의 모임에서 검열료 인하문제와 더불어 논의되던 경성도시계획연구회(京城都市計劃硏究會)의 활동사진관 무제한 허가에 관한 건에 대해 상설관주와 배급업자들의 입장은 명확히 달랐다. 배급업자들은 장래에 경성의 활동사진관 수가 늘어나길 바랐고, 상설관주는 이에 대해 부정적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영화업자 사이의 이해차이에 따라 모든 논의가 유야무야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명했다.24)

       3) 3차 검열수수료 감하 운동

    1928년 8월 1일부로 일본과 대만의 활동사진 검열료가 일제히 인하되자 3차 검열료 감하 운동이 시작되었다. 기신양행(紀新洋行)을 운영하던 유지영(柳志永)이 언급했듯이 ‘2차 검열료 감하 운동 당시 검열료 인하문제에 대하여 총독부 당국자가 고려해보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각지에 검열원을 파송하여 실지 조사도 시행’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에서는 일본과 대만에서 검열료의 인하가 단행될 때까지 1년 반이나 지나도록 검열료 문제에 대해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25) 상설관주와 배급업자들은 그간의 반목을 청산하고 활동사진업자조합(活動寫眞業者組合)을 조직하여 함께 검열료 인하운동을 벌이기로 한다.

    영화업자들의 움직임과는 별도로 총독부 경무국에서는 내무성의 검열료 인하 방침과 맞물려 검열료 인하를 추진한다. 수수료 수입이 종래에 약 3만원에 달했기 때문에 수수료 인하는 총독부 재무국과 협의가 필요했지만,26) 다행이 예정되었던 1928년 10월 1일보다 이른 9월 19일자로 검열료 인하가 단행되었다. 수수료 규정은 기존의 3미터 당 5전에서 1미터당 1전으로, 3미터 또는 그 단수마다 2전에서 1미터 또는 그 단수마다 5리로 개정되었다.27)

    조선총독부의 검열료 인하 과정에서 살펴보았듯이 검열료 정책은 영화업자들의 반발과는 상관없이 내지의 내무성 정책과 연동하여 실시됐다. 조선과 같이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대만의 검열료 정책과도 달랐다. 이는 검열료 문제가 검열수수료를 통해 활동사진사업을 추진했던 조선총독부의 정책적 의지와 맞물려 있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내지의 검열료가 인하된 상태에서 고율의 검열료를 징수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판단으로 불가했기에 총독부에서는 다른 재원을 찾을 수밖에 없었고, 검열료를 인하하게 된 것이다.

    6)쇼와 공황은 1923년 발생한 관동대지진의 경제적 피해를 일본정부가 구제해주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지진피해지역에서 발행한 어음은 결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소유하고 있는 은행은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정부에서는 부실 어음을 재할인해줌으로써 은행의 부실을 덜어주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1927년 3월 제국의회에서 이 어음의 처리방식이 스즈키상점(鈴木商店)을 비롯한 일부 자본가의 구제책이라는 이유로 공격 당하게 된다. 그러자 어음을 소지하고 있던 은행에 대규모 인출사건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도쿄와 중소도시의 은행이 휴업에 들어가게 된다. 4월에는 스즈키상점(鈴木商店)에 거액의 대출을 했던 대만의 중앙은행인 대만은행이 파산했으며,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제1차 와카쓰키(若槻) 내각이 사퇴하고, 다나카(田中) 내각이 들어서는 등 경제적 정치적 혼란은 가중되었다. 새로 들어선 다나카 내각에서는 4월 22일 3주간 은행의 지급중지를 명령하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했으며, 이 기간 일본정부에서는 거액의 대출을 각 은행에 지원해주면서 공황을 수습해 나갔다. 이렇듯 1927년 3월∼5월의 쇼와공황은 1920년대 일본의 경제 불황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今井淸一, 『日本近代史 Ⅱ』, 東京:岩波書店, 2007, 284-285쪽.)  7)「京城의 霖雨로 悲境에 든 商界」, ≪每日申報≫ 1926년 7월 31일자.  8)1926년 7월 현재 조선의 상설관은 경성 8개소(일본인 5, 조선인 3), 신의주 1개소, 평양 2개소, 부산 3개소, 대구 3개소, 목포 1개소, 군산 1개소의 총 19개소이다. 「減下不能說에 首相, 總督에 陳情」, ≪每日申報≫ 1926년 7월 21일자.  9)松本輝華, 「映畵春秋」, ≪朝鮮公論≫, 1926년. 8월호, 90∼91쪽.  10)위의 글, 93쪽.  11)「映畵檢閱手料撤廢 영화관계자가 위원지 선정」, ≪時代日報≫, 1926년 7월 19일자 ; 「映畵當局者協議 부당검렬료금문뎨로」, ≪東亞日報≫, 1926년 7월 20일자. 신문기사에 대정관의 中丸, 中江은 中水, 우미관의 脇田은 紫田의 오기로 보인다.  12)「不平놉흔 新檢閱制 당국에 진정」, ≪每日申報≫, 1926년 7월 19일자.  13)단성사 운영자 박승필을 대신하여 일본어에 능숙한 이(李)씨 성의 직원이 대리인으로 참여했다. 1930년 당시 단성사 지배인이던 이봉익(李鳳翼)으로 추정된다.(市川彩, 『日本映畵事業總覽』,國際映畵通信社, 1930, 599쪽.)  14)「映畵檢閱料は絶對まからぬ 常設館側の陳情に近藤圖書課長の吐」, ≪京城日報≫, 1926년 7월 20일자.  15)「二重の課稅は聞えませぬ 映畵檢閱料問題で經營者が先後協議」, ≪京城日報≫, 1926년 7월 21일자.  16)松本輝華, 앞의 글, 92쪽.  17)위의 글, 92∼93쪽.  18)「値下まで休館か映畵檢閱料問題で經營者がまた協議」, ≪京城日報≫, 1926년 7월 29일자.  19)「新映畵では算盤が取れぬ」, ≪京城日報≫, 1926년 7월 30일자.  20)「檢閱料減額及地方廳檢閱制度延期を全日本映畵業組合が內務大臣に請願書提出」, ≪キネマ旬報≫1926년 11월 11일자, 21쪽.  21)「映畵檢閱料問題再燃과 營業稅賦課率減下運動」, ≪東亞日報≫, 1927년 1월 19일자.  22)「映畵檢閱料는 絶對負擔不能」, ≪每日申報≫, 1927년 2월 24일자.  23)「檢閱料의 負擔拒絶, 映畵配給業者組合 決議」, ≪東亞日報≫, 1927년 2월 25일자.  24)「常設館主らの打合せ會」, ≪京城日報≫, 1927년 2월 19일자.  25)「第三回로 運動 [柳志永氏 談]」, ≪東亞日報≫, 1928년 8월 23일자. ; 「너모빗싸 經營難 죠션이 제일 빗싸다 柳志永氏 談」, ≪每日申報≫, 1928년 8월 24일자.  26)「活動필림의 檢閱料 減下」, ≪每日申報≫, 1928년 9월 16일자.  27)「檢閱料引下施行」, ≪每日申報≫, 1928년 9월 19일자.

    3. 조선영화산업의 변화

    검열수수료 징수는 영화업자들에게 재정적인 피해보다도 심리적인 면에 있어서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영화업자들의 심리적 공황상태는 영화업에 변화를 주었다. 그 틈은 경영 상태를 회복하려던 영화인들의 자구책에서 시작되었다.

    상설관 측은 첫째, 관람료 인하를 통한 가격 경쟁력 확보, 둘째, 할리우드 신작영화의 확보, 셋째, 조선영화 제작이라는 방안을 가지고 경영 회복에 나섰다. 우미관이 추진했던 가격경쟁력 확보 방법은 경영상태가 극도로 나빠 더 이상 활동사진관의 시설, 설비, 인력에 투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경영자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할리우드 신작 영화의 상영권 획득은 한정된 관객을 몇 개의 상설관이 분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경쟁 상설관이 확보하지 못한 신작영화의 상영을 통해 관객을 확보하는 전략이었다. 조선영화의 제작은 비슷한 프로그램이 경쟁하는 가운데 조선영화라는 특별한 프로그램을 공급하여 프로그램의 차별화를 가져오기 위한 방안이었다.

    배급업자 측은 거액을 들여 할리우드 영화의 대리점 계약을 따냈고, 상설관의 경쟁을 부추겼으며, 필름을 상영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상설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영화자본이 거대화 되는 계기로 산업의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 상설관의 경쟁 심화

    단성사, 우미관, 조선극장 등 경성의 조선인 상설관은 1924년부터 경찰당국의 주선으로 협정을 맺어 가격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활동사진검열규칙」이 시행되자 경영상태가 부진한 우미관에서는 경찰당국과 협의하고 단성사와 조선극장 측의 양해를 얻어 전석 10전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인하를 단행했다.28) 관객들이 우미관으로 몰려들자 단성사와 조선극장도 입장료를 일제히 반으로 내렸다. 그 결과 조선인 상설관 입장료는 절반 이상 하락하여 대부분의 관람료가 10∼30전으로 내려갔다.29)

    검열료 징수로 입장료가 오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경영난에 시달리던 우미관에서 시작한 박리다매 전략은 상설관 사이의 가격인하 경쟁을 부추겼다. 그 결과 상설관 운영은 더 어려워졌고, 1910년대 초반부터 활동하던 조선영화계의 베테랑들이 퇴진하게 된다. 조선극장과 황금관을 함께 운영하던 하야가와는 가격경쟁이 시작되자 1926년 8월 하순부터 조선극장의 운영을 포기했다.30) 하야가와는 1928년 황금관의 운영권마져 신문계 출신의 신진 영화업자 도쿠나가 구마이치로(德永熊一郞)에게 넘기면서 조선에서의 10여 년간의 흥행업 경력을 마감했다. 하야가와와 함께 조선의 활동사진업을 장악했던 닛다 고이치(新田耕市)는 희락관과 대정관을 소유하긴 했지만 부동산업자이자 주식 중매인으로 활약할 뿐 더 이상 활동사진 흥행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우미관을 소유, 경영하던 시바다 미요지(紫田三代次)는 우미관의 영향력이 1910년대 후반 이후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에 영화흥행에 있어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입장료 인하 경쟁에서 시작된 상설관 사이의 관객 유치 경쟁은 신작영화 유치 경쟁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몇 차례의 상영권 파동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사건은 더글라스 페어뱅크스(Douglas Fairbanks) 주연의<해적(The Black Pirate)>(1926)31)과 존 베리무어(John Barrymore) 주연의 <내가 왕이었으면(The Beloved Rogue)>(1927)32)을 두고 일어난 상영권 다툼이다. <해적>의 상영권 파동은 이중계약으로 인해 발생했다. 희락관 영업주임 마쓰다(松田正雄)가 황금관 주임변사 오카다(岡田天城)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내지의 영화를 수입해 왔는데, 마쓰다는 <해적>을 조선극장에 1주일 흥행을 조건으로 800원에 계약했으나 이와 별도로 우미관은 오카다와 1주일 흥행에 700원에 이중 계약을 한 것이다. 조선극장과 우미관이 이 영화의 홍보를 시작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우미관의 시바다가 조선극장을 운영하고 있던 김조성(金肇盛), 이필우(李弼雨)를 상대로 종로서에 설유원(說諭願)을 제출했다. 이 문제는 경찰의 손으로 넘어갔다.33) 종로경찰서 보안계 주임 다케노쿠마 (竹之熊)는 이 영화를 시차를 두고 두 곳에서 동시 상영하도록 주선하고 제비뽑기로 선후를 정했다. 하지만 동일한 날짜에 같은 영화를 상영하는 것은 수익을 둘로 쪼개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미관과 조선극장 양측이 이 영화의 상영을 함께 포기하기로 한다.34) 결국 이 영화는 1,200원의 가격에 단성사에서 상영 되었다.35)

    두 번째 상영권 파동은 존 베리무어(John Barrymore) 주연의 <내가 왕이었으면(The Beloved Rogue)>(1927)을 두고 우미관과 조선극장 사이에 벌어졌다. 기신양행에서 수입한 이 영화는 1927년 6월 15일 조선인상설관인 우미관과 일본인상설관 희락관에서 상영하기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조선인상설관인 조선극장에서 거액을 지불하겠다고 나서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기신양행은 우미관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상영권을 조선극장에 넘겼다. 이에 거액의 선전비용을 지출한 우미관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등 분쟁이 일어났다.36)

    이와 같은 상설관의 신작경쟁에서 보듯이 <해적>의 경우 미국개봉에서 조선개봉까지 8개월 정도가 걸렸으나 <내가 왕이었으면>의 경우 불과 3개월이 걸렸다. 할리우드 영화의 조선 내 상영 속도는 영화업자들 사이의 경쟁으로 인해 더욱 빨라졌음을 알 수 있다.

       2) 거대화되어 가는 영화자본

    검열수수료 인하운동 과정에서 일어난 상설관주와 배급업자들의 갈등은 흥행업에 있어서 힘의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검열료 징수로 인해 예상되던 것 중 하나는 이미 검열을 받아 상영된 바 있는 구작들이 재상영되어 프로그램의 질이 저하될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그러나 막상 검열규칙이 시행되자 이와는 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창고에 쌓여 있는 구작 대신 할리우드의 신작 영화를 상영하기 위한 상설관들의 각축전이 치열하게 전개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흥행업의 중심에 있었던 상설관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고 대신 배급업자들의 영향력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흥행업의 역학 변화는 1926년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활동사진관수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926년 8월, 19개관에 불과하던 전선 상설관의 수는 1930년 36개관으로 큰 폭의 증가가 있었다.37) 상설관의 수가 10여개 관에 불가했을 시에는 영화상영에 있어 상설관주가 유리한 위치에 있을 수 있었으나 경쟁관들이 늘어나면서 좋은 필름을 가진 배급업자들이 유리해졌다. 일본의 메이저 영화회사들이 직영 혹은 공영, 특약 등의 상태로 조선의 일본인 상설관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상황에서 서양영화만을 상영했던 조선인 상설관측이 흥행업의 변화와 관련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 변화는 평양 대지주 김진모(金鎭模)의 장남으로 동경미술학교 출신의 서양화가이기도 했던 김찬영(金瓚永)이 세운 영화배급사 기신양행(紀新洋行)이 주도했다.38) 1927년 5월 설립된 기신양행은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영화업에 뛰어든 송지영(宋志永)을 앞세워 할리우드 메이저 배급사인 MGM사와 특약을 맺고 조선의 흥행권을 장악한 후 1927년 파라마운트사의 조선 내 흥행권까지 획득하면서 MGM과 파라마운트 기타 소규모 배급사의 배급권 마저 획득하여 조선 내 외화배급을 주도하게 된다.

    기신양행이라는 거대 자본의 서양영화 배급사가 등장하면서 조선에서 할리우드 신작들이 경쟁적으로 공개되고, 이와 더불어 신작들을 구매하기위한 각 상설관의 경쟁 역시 치열해졌다. 기신양행은 할리우드 신작영화들을 신문을 통해 선전하고, 경쟁 입찰을 통해 각 상설관 사이에 신작 상영 쟁탈전을 부추겼다. 자연스럽게 필름 대여 가격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1928년 9월에는 인천의 애관극장 운영권을 사드려 직영하게 된다.39) 애관극장의 직영으로 기신양행에서는 자사에서 배급하는 할리우드 영화의 안정된 상영 처를 얻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영은 합리적인 결정이었는데, 배급과 상영을 일치시킴으로써 혹여 있을 수 있는 상설관들 사이의 담합행위까지 무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신양행을 설립했던 김찬영은 1934년 조선극장의 운영권까지 인수하게 된다.40) 그는 한때 조선극장을 운영했던 조선흥행주식회사(朝鮮興行株式會社)에도 관여한바 있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조선극장을 중심으로 한 흥행회사였다. 1920년대 내내 단성사가 운영자의 변화 없이 꾸준한 경영을 이어간 반면 하야가와가 경영에서 물러난 후 조선극장은 수차례 운영자가 바뀌면서 폐관과 개관을 반복했다.41) 1929년 9월 안봉호(安奉鎬), 신용희(申鎔熙)가 조선극장의 운영을 맡게 되면서 비로소 조선극장의 운영은 안정되기 시작했다.42) 안정을 찾은 조선극장측은 자본을 확충하여 1930년 7월, 안봉호에게서 조선극장의 운영권을 1만원에 매수한 정현국(鄭鉉國)이 공칭자본금 8만원에 1회 불입금 2만원의 조선흥행주식회사(朝鮮興行株式會社)를 조직했고, 감사역을 김찬영이 맡았다.43) 그러나 사장 정현국과 지배인 신용희 사이의 갈등이 발생했고,44) 결국 조선극장은 기신양행의 김찬영이 운영하게 된다.

    기신양행으로 대표되는 흥행자본의 공격적인 활동에 전통적으로 조선인 흥행자본을 대표하던 단성사 측에서도 방계 영화회사인 고려영화제작소를 통해 배급업에 나섰다. 1927년 8월 고베(神戶)에 위치한 프랑스 파테사 대리점을 통해 프랑스 본사와 특약을 맺은 고려영화제작소는 파테사의 조선 내 배급권을 획득했다.45) 그러나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력이 큰 조선에서 파테영화의 영향은 미미했다. 단성사의 영향력은 1930년대 들어 현저히 저하되었다.

    니카츠와 쇼치쿠가 일찌감치 자리잡은 경성의 일본인 측에서는 영화배급업자인 도쿠나가가 새롭게 탄생한 영화제작회사인 도아키네마의 영화배급권을 가지고 영화배급과 상영에 나섰다. 도쿠나가는 황금관을 인수하여 배급과 상영의 안정을 꾀했고, 영화도 제작했다. 또한 부산에서는 사쿠라바상회(櫻庭商會)를 이끌던 사쿠라바 미키오(櫻庭幹夫)가 행관을 중심으로 마키노, 도아, 데이코쿠의 영화를 배급 상영하면서 활동했다.46) 도쿠나가와 사쿠라바의 등장과 활약은 세대교체의 의미 외에도 극장, 배급업, 제작업을 망라한 본격적인 흥행자본 중심으로 영화산업이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3) 조선영화의 제작

    경무국 영화검열계의 조사에 의하면 1927년 검열을 맡은 작품 중 조선영화는 오락극 39본, 선전극 70본, 실사 297본 총 406본이 검열을 맡았다. 이를 권수 환산하면 820권, 길이로는 18만4천378미터에 달했다. 물론 이 작품들 속에는 「활동사진검열규칙」 시행 이전에 제작되었던 작품들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이 모두가 1927년 제작된 영화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전보다 많은 수의 조선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이례적인 상황으로 검열수수료 문제로 촉발된 상설관업자들의 경쟁은 조선인 관객들이 유독 좋아하는 순조선극영화의 상영을 원했고 그 이유로 영화제작사가 족출하게 된 것이었다.47)

    매년 수백편의 영화가 상영되던 상설관에서 조선영화는 불과 몇 편 밖에 상영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영화가 상영될 시에는 의례 관람료를 올려 받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영화를 보러 온 관객으로 활동사진관은 가득 찼다. 특히 1926년 10월 단성사에서 상영된 <아리랑>의 성공은 영화업자들의 영화창작을 자극했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는 나운규 연출, 주연으로 <풍운아>, <금붕어>, <들쥐> 등을 계속 제작했다. 1927년 덕영활동사진상회(德永活動寫眞商會)를 세운 도쿠나가는 촬영부인 덕영프로덕션을 만들어 만선활동사진상회(滿鮮活動寫眞商會)의 미야가와와 함께 <반도의 기초(半島の礎)>, <불망곡(不忘曲)>, <홍련비련(紅戀悲戀)>과 같은 교육영화를 제작했다.48) 1928년에는 교육영화 <순정은 신과 같다(純情神の如し)>(光永紫潮 연출)를 포함하여 6편의 제작 계획을 세웠다.49)

    영화배급 위주로 영화계가 재편되고 있는 가운데 고려영화배급소의 실패로 인해 산업 내 영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단성사 역시 조선인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방법으로 조선영화를 제작하거나 제작을 지원했다. 다시 말해 인기 있는 서양영화의 상영권을 획득할 수 는 상황에서 소규모 제작회사들이 제작하는 조선영화를 후원하고 그 배급권을 획득해 관객을 동원하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1927년 단성사는 방계 영화회사인 고려영화제작소를 통해 <혈마>를 제작했다. 이외에도 극동키네마에서 제작한 <괴인의 정체>, <낙원을 찾는 무리들>과 서광키네마와 금강키네마가 함께 제작한 <세동무>, <약혼> 등에 제작 자금을 투입했다.

    이 뿐만 아니라 조선영화의 주요 인물인 나운규와 이경손이 자신의 이름을 딴 프로덕션을 세울 수 있게 재정적인 후원을 했다. 1927년 선키네마프로덕션의 나운규는 단성사의 자금지원으로 독립하여 나운규프로덕션을 만들었다. 그러나 나운규가 <사랑을 찾아서>를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요도 도라조(淀虎藏)의 자금으로 제작하여 조선극장에서 개봉하자,50) 1929년에는 나운규를 직접 관리하기 위해 원방각사를 만들어 운영했다. 1928년에는 이경손프로덕션의 설립에 자금을 지원하여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 등의 영화를 제작토록 했다.51) 이처럼 1926년에서 1930년대 초반 사이에 일었던 조선영화 제작 붐은 일제강점기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그 중심에는 영화산업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려는 상설관의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다.

    조선영화의 제작 붐은 이 시기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아 영화의 내용에도 영향을 주었다. 흥미로운 점은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영화제작에 참여한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극동키네마의 김태희(金台熙), 황운(黃雲), 조선키네마프로덕션 출신의 주인규(朱仁奎), 남궁운(南宮雲), 이규설(李圭卨) 등과 후에 카프로 수렴되는 조선영화예술협회 회원들의 활약이 그것이다.

    아나키스트였던 김태희는 1919년 밀양폭탄사건의 주동인물로 7년 형기를 마치고 1926년 출옥 후 극동키네마에 입사했다.52) 그곳에서 영화 <괴인의 정체>에 김극(金克)이라는 예명으로 출연했다. 영화 출연 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노동운동관련 일로 구속된 후 석방되었지만,53) 1930년 후계공산당 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었다가 출소 후 1933년 사망했다.54) 김태희가 근무했던 극동키네마에서는 <괴인의 정체>에 이어 1927년 <낙원을 찾는 무리들>을 제작했다. 해직된 노동자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로 황운이 연출을 맡았고, 주인규, 남궁운, 이규설 등이 출연했다. 이 영화의 촬영을 맡은 이필우는 검열로 인해 총 8권 분량의 길이가 4권 분량으로 삭제되었다고 증언했다. 검열관은 “공산주의 아니냐? 불온하다”는 이유로 영화의 절반을 잘라냈다고 한다.55) 남궁운, 이규설 등은 카프에 가입하여 활동한 바 있다.

    <낙원을 찾는 무리들>에 관계했던 인물 중 황운과 주인규는 1932년 함흥에 길안든 영화사를 세우고 대량해고를 당한 사람들을 소재로 한 <딱한 사람들>이라는 영화를 제작했으나 촬영도중 주인규가 제2차태평양노조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내용이 크게 바뀌었다.56)

    1927년 안종화(安鍾和), 이경손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조선영화예술협회에 카프의 주요성원들인 윤기정(尹基鼎), 임화(林和), 등이 가입하여 김유영(金幽影), 서광제(徐光霽), 추민(秋民), 강호(姜湖) 등을 포섭하고 안종화를 몰아내버린 사건도 있었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카프영화부의 주축이 형성되었다. 카프에서는 총5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대부분 검열로 삭제되는 피해를 입었다.

    28)「恐慌中에 잇는 京城의 映畵界 경쟁중에 관객만 득리 三館條約도 結局破壞」, ≪每日申報≫, 1926년 8월 11일자.  29)「民衆娛樂 向上을 爲해 映畵料金 減下는 不可」, ≪每日申報≫, 1926년 8월 13일자.  30)「朝鮮劇場開館」, ≪東亞日報≫, 1926년 9월 10일자.  31)알버트 파커(Albert Parker)연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배급으로 1926년 3월 8일 미국에서 개봉되었다.  32)알란 크로스랜드(Alan Crosland) 연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사 배급으로 미국에서 1927년 3월 12일 개봉되었고 기신양행을 통해 조선에서 6월 개봉되었다.  33)「鮮劇,優美 兩館 名畵爭奪戰 크라쓰 주연의 해적으로 인하야 싸홈질」, ≪每日申報≫, 1926년 10월 26일자.  34)「問題의 名畵는 結局 團成社에 上映」, ≪每日申報≫, 1926년 11월 2일자.  35)「今年 最高人氣映畵와 各 常設館 爭奪戰」, ≪東亞日報≫, 1927년 6월 16일자.  36)「경쟁까지 부른 <내가 왕이 었더면>, 우미관과 조선극장의 싸움, 우미관측에선 고소」, ≪中外日報≫, 1927년 6월 15일자 ; 「今年 最高 人氣映畵와 各常設館 爭奪戰」, ≪東亞日報≫, 1927년 6월 16일자.  37)市川彩, 앞의 책, 161쪽.  38)「斯界의曙光 外國映畵 速輸入」, ≪每日申報≫, 1927년 5월 14일자.  39)「仁川映畵常設 愛館經營變更」, ≪每日申報≫, 1928년 9월 1일자.  40)≪東亞日報≫, 1934년 1월 20일자.  41)조선극장은 개관이후 경영부진으로 경영주가 10여 차례나 바뀌었다. 특히 1926년 8월 하야가와 고슈가 경영권을 포기한 이후에는 운영자가 김조성,이필우(1926.9)-차영호(1926.12)-차영호,,현철,김영식(1926.6)-김조성(1927.9)-안봉호(1929.9)로 계속 바뀌었다. 그 이유는 조선극장의 소유와 경영 모두 동경건물회사가 가지고 있었던데 있다. 동경건물회사에서는 극장을 운영하고 싶은 사람에게 극장 운영권을 양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관형식으로 빌려줬기 때문에 극장을 대관한 측에서는 극장을 제대로 운영할 수 없었다.  42)「朝劇의 新陣容 映畵 外 레비유」 ≪中外日報≫, 1929년 9월 11일자.  43)「朝鮮劇場이 株式會社로」, ≪東亞日報≫, 1931년 7월 5일자.  44)「토키映畵의 殿堂 朝鮮劇場의 紛糾」, ≪每日申報≫, 1932년 11월 28일자.  45)「高麗映畵製作所에서 歐洲映畵 配給을 開始」, ≪中外日報≫, 1927년 8월 21일자.  46)1930년 현재 사쿠라바 미키오는 부산의 행관과 제2행관 2개소의 활동사진관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가 운영하던 사쿠라바상회는 마키노프로덕션의 조선대리점이었고, 기타 일본영화수입 및 흥행 배급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市川彩, 앞의 책, 475, 478, 483, 600쪽.  47)筑紫次郞生, 「キネマ 狂時代か」, ≪朝鮮公論≫, 1928년 3월호, 3の19쪽.  48)白銀幕夫, 「映畵街漫步」, ≪朝鮮公論≫, 1928년 4월호, 3の10.  49)筑紫次郞生, 앞의 글, 3の20.  50)한국예술연구소 편,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윤봉춘편』, 소도, 2004, 131쪽.  51)당시 영화광고 중 단성사 지배인 박정현이 총지휘(프로듀서)로 등장하는 영화는 단성사의 자금지원을 받아 제작된 영화였다. 이 당시 고려영화제작소, 극동키네마, 금강키네마, 서광키네마, 나운규프로덕션, 이경손프로덕션 등에서 제작된 영화들의 대부분은 박정현이 총지휘를 맡았다.  52)『왜정인물』 1권,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im_101_03860(accessed 2011. 03. 21)  53)「金台熙氏 釋放」, ≪中外日報≫, 1928년 1월 19일자.  54)「金泰熙氏 病死, 사직동 자택에서」, ≪朝鮮中央日報≫, 1933년 4월 7일자.  55)한국예술연구소 편,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이필우편』, 소도, 2003, 216쪽.  56)한상언, 「주인규와 적색노조영화운동」 『현대영화연구』3호, 현대영화연구소, 2007, 215쪽.

    4. 나오며

    제도의 변화는 산업의 변화를 이끈다. 이 논문에서는 1926년 8월 시행된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을 중심으로 영화제도의 변화가 영화산업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아보았다.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 1920년대 후반, 모라토리움을 선언할 정도의 경제적 공황으로 조선의 흥행업은 현저하게 위축되었다. 여기에 「활동사진필름취체규칙」의 시행에 따른 검열수수료 징수 문제는 경성의 각 활동사진관과 배급업자 측에 경제적인 타격 이전에 심리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에 따라 조선 내 영화업자들은 3차에 걸친 검열료 인하 투쟁에 돌입했으며, 이와 별개로 영화업자들은 불황타개와 관객유치를 위한 자구책을 강구했다. 이렇게 시작된 검열수수료 인하 문제는 산업의 재편이 이루어지는 계기로 작용했다.

    조선의 영화산업은 이전과는 다른 큰 변화가 있었다. 우선 관객유치를 위해 각 상설관들은 입장료 인하조치를 단행했다. 치열한 경쟁으로 경영이 어려워진 상설관은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신작영화를 상영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해졌는데 이 결과 영화산업은 영화상영에서 영화배급으로 그 중심이 바뀌었다. 기신양행으로 대표되는 신작영화의 배급권을 지닌 대형 배급사가 등장하면서 배급사의 힘이 설관의 힘을 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상설관의 흥행수익을 통해 흥행자본이 축적되었던 기존의 흥행업의 모습이 거대 자본으로 배급권을 획득한 배급사에서 상설관을 경영하는 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는 상설관의 수가 급격히 확대되는 시점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에 따라 단성사로 대표되는 조선인 상설관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흥행자본의 영향력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이를 만회해 보고자 단성사에서는 조선인 관객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조선영화의 제작을 지원하고 배급권을 획득하는 전략을 통해 관객을 유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결과 소규모 프로덕션에서 여러 편의 조선영화가 제작되는 이례적인 상황이 발생했고, 당시 조선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던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운동가들이 참여한 많은 수의 조선영화는 검열의 수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1920년대 후반, 조선영화산업이 큰 변화를 겪게 된 데에는 제도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영화인들의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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