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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Multiculturality of Paradjanov's Works 파라자노프 영화의 다문화성*
  • 비영리 CC BY-NC
ABSTRACT
Multiculturality of Paradjanov's Works
KEYWORD
Paradjanov , Kavkaz , Armenia , Color of Pomegranates , Sayat-Nova , culture , ethinc , collage
  • 1. 들어가는 말

    세르게이 파라자노프(Сергей Параджанов) 는 1960년대 소비에트 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대표하는 감독의 한 명이다.1) 1960년대 소비에트 사회에서는 스탈린 사후 해빙의 분위기와 함께 창조적 기운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과거의 도그마에 대한 미학 논쟁이 성행하였는데, 이는 진보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고무시키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예술가들의 연합이 형성되었고 새로운 문학과 예술 잡지들이 발간되었다. 시와 소설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고 연극이 활성화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영화에도 적용되었다. 영화 제작에 있어 클리세는 소멸되었다. 영화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표현하였고 영화예술은 새로운 표현 형식을 제공하였다. 이 시기 소비에트 영화사에는 에이젠슈타인, 도브젠코, 푸도프킨, 베르토프 등 초기 영화 시학을 주도했던 감독들을 계승하는 새로운 영화 작가들이 등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감독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Андрей Тарковский), 미할코프-콘찰로프스키(Михалков-Кончаловский), 그리고 파라자노프이다.

    파라자노프는 다른 예술에 비해 하위로 취급되었던 영화의 개념을 바꾸어 놓을 만큼 뛰어난 작품을 창조했다. 파라자노프의 재능은 카프카스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에 잘 나타나있다. 초기작 <잊혀진 선조들의 그림자>(Тени забытых предков, 1964)에서 우크라이나의 후출족(Гуцул)의 풍속이 현기증 나는 카메라 워킹으로 재현되었다면, 다음 작품인 <석류의 빛깔(Цвет граната, 1968)에는 아르메니아의 민속 문화가 세심하게 구성되어 나타났고, <수람 요새의 전설>(Легенда о Сурамской крепости, 1984)은 그루지야 민족의 구비 문학을 재현하고 있으며, <아식 케립>(Ашик Кериб, 1988)은 중앙아시아 터키계 민족의 이야기이다. 이에 스테픈(J. Steffen)은, 세계 영화사에서 “이렇게 독특하고 금방 식별이 되는 스타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말했다.2)

    본 논문에서는 파라자노프 감독의 창작의 특징과 그의 조국 아르메니아를 시각화한 <석류의 빛깔>(Цвет граната, 1968)을 고찰하고자 한다. <석류의 빛깔>은 파라자노프의 작품 중에서도 그 미학적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작품이다. 본 논문에서는 <석류의 빛깔>에 나타난 아르메니아 지역의 종교와 문화, 민속적 요소들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파라자노프 창작에 나타난 다문화성의 특징을 규명할 것이다.

    1)1960년대는 전세계적으로 새로운 문화 창조의 시대였다. 1960년대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체제의 헤게모니 경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제3세계’가 새롭게 대두되던 때였다. 새로운 세계 질서는 대중적인 담화와 문화에 뚜렷하게 반영되었고, 1960년대 세계 문화는 정치적 유동성과 문화적 다양성, 그리고 상위 문화에 대한 대중문화의 도전으로 특징지어지는데,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논의되는 ‘세계화’(globalization)와 유사한 맥락에서 고찰할 수 있다.  2)J. Steffen, A cardiogram of the time: Sergei Parajanov and the politics of nationality and aesthetics in the Soviet Union, Ph.D., Advisor David A. Cook, Emory University, 2005, p.1.

    2. 파라자노프의 창작 개관

    파라자노프는 1924년 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당시 티플리스Тиф лис)의 아르메니아인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인 요시프 파라자노프는 숙련된 골동품 중개인이었는데 파라자노프의 예술가로서의 미학적 안목은 그의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파라자노프는 고미술품에 대한 뛰어난 지식과 세련된 심미학적 감성을 획득할 수 있었고 이는 그의 창작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아르메니아인 중산계층에 속해 있던 파라자노프의 가족은 트빌리시에서 번화한 상업지구 므타츠민다 지역에 살고 있었다. 파라자노프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도시 트빌리시의 다문화적 분위기와 독특한 문화적 배경은 파라자노프의 예술적 정체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도시 트빌리시의 다문화적 환경이 파라자노프의 창작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면, 파라자노프에 대한 모노그래프를 작성한 칼란타르(Карен Калантар)는 ‘올드 트빌리시’의 문화적 분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묘사했다:

    뛰어난 관찰력과 예술적 재능을 지닌 어린 파라자노프에게 트빌리시의 도시 문화는 광대하고 매력적인 세계였다. 다양한 색깔, 냄새, 소리, 사람들과 사물들은 놀라운 것이었고 파라자노프는 호기심을 갖고 이 진기한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상점과 작업실의 세계가 드러나서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개방하는 것, 마치 무대처럼 정면 벽을 제거한 것, 지나가는 사람이나 고객에게 얼굴을 돌리는 것, 스스로를 존중하는 수공업자와 상인의 온화한 모습, 입구에 쌓여있는 물건들 가운데 그들의 움직임이 그에게는 영화 프레임처럼 보였다. 이 모든 것은 마치 삶이라는 독창적인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여기서 파라자노프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었고 그의 어린 시절은 이렇게 흘러갔던 것이다.5)

    파라자노프는 1952년 소련국립영화학교(ВГИК)를 졸업하고 1954년 키예프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시작한다. 처음에 조연출로 일하던 그는 1958년 첫 번째 장편 영화 <첫번째 남자>(Первый парень)를 찍게 된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당시 많은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소비에트 농부의 풍요로운 삶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파라자노프는 여기에 독창적인 아이러니를 부과하여 농부의 아내가 하얀 손수건으로 해바라기를 닦거나 콜호즈 들판을 통과하는 트랙터의 행진에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배경으로 삽입하기도 하였다. 다행히도 이 영화는 검열을 통과하고 파라자노프는 다른 영화를 찍게 되었는데, 그것은 <우크라이나의 랩소디>(Украинская рапсодия, 1961)와 <돌 위에 꽃>(Цветок на камень, 1962)이다. 이 두 영화 역시 동시대 소비에트 영화처럼 반 자본적 반 종교적 클리세로 가득 차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랩소디>에는 파라자노프의 재능을 엿볼 수 있는 몇몇 프레임이 등장한다. 그것은 초현실주의 벼룩시장, 폭격으로 폐허가 된 극장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회화, 조각, 흙건축, 혹은 하얀 그랜드 피아노로 베토벤을 연주하는 병사 등으로 나타난다.6)

    그 다음 제작한 영화가 바로 파라자노프의 카프카스 연작 텍스트의 하나인 <잊혀진 선조들의 그림자>였다. 이 영화는 우크라이나 작가 미하일 코츄빈스키(Михаил Коуюбинский, 1864-1913) 탄생 백주년 기념으로 키예프 도브젠코 스튜디오의 감독들이 파라자노프에게 의뢰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기치 않게 소비에트 영화의 전혀 새로운 학파의 탄생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이는 ‘회화 학파’(pictorial school), ‘시학파’(poetic school), 혹은 단순히 ‘키예프 학파’(Kiev school)라 불리게 되었다.7) <잊혀진 선조들의 그림자>는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산악 민족의 풍습을 재현한 영화로서 화가이자 조각가이며 그래픽 아티스트이자 아트 콜렉터인 파라자노프의 재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잊혀진 선조들의 그림자>에 재현된 우크라이나의 민속적 양식들은 ‘험준한 지세와 다채로운 생활양식, 의복, 전설을 보유한 나라로서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발견’으로서 훗날 영화에 있어 민속 문화의 창조적 재현이라는 파라자노프의 작품을 관통하는 테마의 단초가 되었다.8)

    <잊혀진 선조들의 그림자> 이후 파라자노프 창작의 테마는 다양한 민족 문화에 대한 예술적 창작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전개된다. 초기작 <잊혀진 선조들의 그림자>가 진정한 우크라이나의 영화라면, 그 다음에 제작된 <석류의 빛깔>은 아르메니아의 영혼과 종교에 대한 개념의 구현체로 나타나고, <수람 요새의 전설>은 그루지야 고대의 시와 함께 구비문학과 풍광, 프레스코의 우아한 기법을 선택한 순수히 그루지야적인 영화이다. 그리고 <아식 케립>은 중앙아시아 터키계 민족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들에서 파라자노프는 카프카스 지방의 모든 문화적 요소를 함께 뒤섞어 놓는 방법으로 인종적 미학적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뜨리고 있다.9)

    한편 파라자노프의 창작 이력을 개관하면서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소비에트 당국에 의해 체포된 사실이다. 파라자노프는 소비에트에서 가혹한 대우를 받은 것으로 유명한 감독으로, 전쟁 이후 세 번 이상 체포되었다. 그는 1947년 동성연애 혐의로 몇 개월 동안 감금되었고, 1973년에는 동일한 혐의가 인정되어 5년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마지막으로 1982년 뇌물수수혐의로 체포되어 몇 개월 동안 감금되었다가 재판 받기 전에 사면되었다.10) 마지막 두 번의 체포는 정치적 동기가 분명한 것으로 간주된다.11) 이런 저런 문제의 결과 그는 1969년부터 1982년까지는 영화를 만들 수 없었고 그의 경력에서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거부당했다. 이런 가운데 그는 시나리오 작업을 계속하였는데, <고백>(Исповедь, 1972), <악마> (Демон, 1972), <아름다운 아라>(Ара прекрасный, 1972), <오덴스의 기적>(Чудо в Оденсе, 1973)이 그것이다.

    파라자노프의 창작의 특징을 고찰하면서 중요한 사실은 그가 각 지역의 다양한 민족 문화를 스크린에 재현하면서 항상 의식(rituals)에 주목했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들 중에서 특히 <잊혀진 선조들의 그림자>와 <석류의 빛깔>은 특히 지역학적(ethnographic)인 것으로 간주된다. 우크라이나의 후출족 역시 그들의 예식과 잔치를 묘사하는 파라자노프를 칭찬했는데 영화에 나오는 많은 장면들이 그들에게는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후출족은 그 신빙성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것을 그들 역사의 잃어버린 어떤 시기로 생각했다. 그들은 파라자노프가 그들 조상의 잊혀진 의식을 스크린에서 부활시켰다고 결론지었던 것이다.

    이렇게 파라자노프는 카프카스 텍스트를 창작하면서 다양한 민족의 의식을 일종의 재료로 간주할 뿐 그 신빙성이나 역사적 리얼리티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파라자노프는 “의식을 자신의 영화를 빚는 점토로 사용할 뿐 이런 저런 재현의 양상들이 역사적 리얼리티에 상응하는 것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12) 다양한 민족의 문화를 재현하면서 그 역사적 리얼리티에 관여하지 않았다면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파라자노프 영화에서 보다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것은 문화이다. 지역의 문화를 전면에 내세운 파라자노프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각각의 고유한 민속 문화와 예술로 둘러싸인 것으로 재현된다. 이런 맥락에서 파라자노프에 대한 모노그래프를 작성한 칼란타르(Карен Калантар)는 파라자노프를 일컬어 다른 민족 예술의 모범을 보인 작가라고 평했다:

    <석류의 빛깔>은 이에 등장하는 모든 장식적 요소들이 아르메니아 박물관의 예술 작품들로 꾸며진 박물관 작품으로 나타난다. <석류의 빛깔>에서 사야트-노바가 우유를 흘리는 은잔은 에치미아진 성당에 소속된 박물관에서 가져온 것이고, 총주교의 지팡이와 의식용 도구는 모두 진짜이고 박물관 전시장에서 가져온 것이다. <석류의 빛깔> 촬영 시 파라자노프와 함께 작업했던 인류학자 르봉 아브라하미안(Levon Hm. Abrahamian)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지역학적으로 세밀하게 고증된 ‘의사-지역학적’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신화이다.15) 파라자노프의 창작은 역사적 리얼리티를 초월한 독창적인 신화의 영역에서 감지된다. 그 신화의 테마는 기오르기 그바하리아(Giorgi Gvakharia)에 따르면, ‘역사 이전’(prehistoric)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파라자노프는 자신의 영화에서 다양한 지역문화를 실증적으로 재현하는 한편 그 역사적 리얼리티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파라자노프는 자신의 작품에서 독창적인 예술 형식을 사용했다. 그것은 회화 기법의 하나인 ‘콜라주’이다. 콜라주가‘시선의 탈중심화와 다중심화’를 통해 ‘합리적이며 보편적이 영상에 길들여진’ 시선의 ‘질서를 해체하고 부정’하는 것이라면,17) 이러한 콜라주 기법이 각 지역의 다문화적 특성을 스크린에 재현하는 가장 적절한 형식으로 나타난다:

    파라자노프의 영화 예술은 콜라주의 원칙에 근거한다고 할 때, 이것은 특히 <석류의 빛깔>에 있어 그러하다. 여기서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고 영화의 모든 장면들은 각각 일종의 그림이 된다. 그리고 관객은 뛰어난 그림들을 관람하는 목격자가 된다. 아브라하미안은 콜라주로 구성된 파라자노프의 화면들을 ‘만화경’(kaleidoscope)에 비유했다:

    콜라주는 역사적으로 비잔틴 회화와 관련되어 있다. 비잔틴의 영향에 대하여 파라자노프 자신이 영화 예술의 근간의 하나라고 인정하는데,19) 그의 영화에 나타나는 비잔틴 회화의 영향은 ‘정면성’의 기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파라자노프의 ‘정면성’은 19세기 중반에 등장했던 트빌리시회화 학파의 기법과도 과 관련되어 있다. 19세기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이민자들이 트빌리시로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특히 많았다. 이 시기에 발전했던 유일한 회화 장르가 바로 ‘초상화’인데, 정적이고 때로 얼어붙은 듯한 구도와 신체의 평면적 묘사가 특징적인 회화 기법으로 나타난다. 이 시기 회화는 특히 인물의 얼굴과 액세서리 등을 조명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는 일종의 콜라주와 같은 효과를 창출했던 것이다.21) 이 시기의 대표적인 초상화 화가는 아르메니아인 하콥 호브나타니안(Hakob Hovnatanyan)이었다. 파라자노프는 이러한 회화 기법과 그림들을 좋아했고 이를 사야트-노바의 이미지에 적용하였다는 것이다.

    3)Steffen, pp.7-8.  4)К. Калантар, Очерки о Параджанове, Ереван: “Гитутюн” НАН РА, 1998, сс.11-12.  5)Там же.  6)G. Ackerman, Introduction, Sergei Paradjanov, Seven Visions, Trans. by Guy Bennett(from French), Køве n havn: Los Angeles, Green Integer, 1998, pp.9-10.  7)Ibid., p.10.  8)N. Zorkaya, The Illustrated History of Soviet Cinema, New York: Hippocrene Books, 1989, p.293. <잊혀진 선조들의 그림자>에서 파라자노프는 전통적인 영화 기법과는 다른 테크닉을 구사했다. 이는 다양한 색채와 이미지, 우크라이나 민속 음악 등 기존의 영화 언어와는 다른 시각적 청각적 언어의 사용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잊혀진 선조들의 그림자>에는 캠프파이어의 화려한 불꽃, 눈 위의 붉은 피, 전통적인 주홍색 양모카펫, 그 밖의 전통적인 결혼 축가에서부터 예술가가 만든 민속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부 우크라이나의 민속이 반영되어 있었다. 한편 파라자노프의 색채와 직물의 발견은 파리의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 파리에서 최신유행의 숙녀복을 만들어내는 고급 의상점)에 강한 인상을 주었는데, 이곳에서 서부 우크라이나의 자수와 다른 민속적 모티프들을 소개하고 차용하였다(Ibid.).  9)옥스퍼드 세계 영화사, 제프리 노웰-스미스 책임 편집, 서울: 열린책들, 2005, p.773.  10)후에 그는 르몽드(Le Monde)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스탈린,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치하에서 모두 체포된 소비에트 유일의 영화감독이다”라고 말했다(Ackerman, p.8).  11)Steffen, p.2. “그의 ‘진정한’ 죄는 기인이고 트러블메이커라는 것이다”(J.Rosenbaum, “Paradjanov's Films on Soviet Folklore,” CINEASTE, Summer. 2002: 43).  12)L. Abrahamian, “Toward a Poetics of Parajanov's Cinema,” Trans. Harsha Ram, Armenian Review, Vols. 47-48, Nos. 3-4/1-2, 2001/2, p.74.  13)Калантар, с.101.  14)Abrahamian, p.74.  15)스테푼은, 데이빗 쿡(David Cook)의 <잊혀진 선조들의 그림자>에 대한 1984년 논문이 영화의 공간 구성이 어떻게 관객으로 하여금 이를 신화의 영역으로 감지하게 하였는지를 고찰한 것이라면, 유리 로트만(Юрий Лотман)은 예술어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영화와 파라자노프의 작품 일반에 적용했다고 지적했다. 로트만은 영화의 고대적인 성격은 역설적으로 그 예술적 혁신의 근원으로 간주하며 이를 신화의 영역으로 감지하게 하는 것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Steffen, p.11). 다음을 참조하라: David A.Cook, “Shadows of Forgotten Ancestors: Film as Religious Art”, Post Script 3, No.3(1984): pp.16-23; Юрий Лотман, “Новизна Легенды, Искусство кино”, No.5(1987): pp.63-67.  16)G. Gvakharia, “Sergei Paradjanov's Ecumenical Vision”, Armenian Review, Vols. 47-48, p.99. 그바하리아 역시 파라자노프의 미학을 트빌리시의 ‘코스모폴리탄’ 문화 속에 위치시킨다. 카프카스 지역은 항상 여러 문화들의 경계선 역할을 하였다. 이때 다른 예술가들이 이를 표현함에 있어 각각 다른 방식들을 결합하려 하였다면 파라자노프는 서로 다른 표현 양식들이 맨 처음 접촉하게 된 순간에 주목하였다는 것이 그바하리아의 설명이다.  17)이명희,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영화의 이단적 형식과 전통 문화의 상관성」, 『프랑스문화예술연구』 제22집, 2007, p.17.  18)Abrahamian, p.85.  19)“나의 영화 예술의 근간은 르네상스에서 유래한 구성과 빛이다. 나의 예술의 총체적인 근간은 페르시아 세밀화와 비잔틴의 에나멜 세공품으로서, 이는 매우 소박하고 단순하지만 깊이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Anne Williamson, Prisoner: The Essential Paradjanov, Film Comment, May 1989: 25, 3, p.61).  20)이명희, p.15. 이러한 인물들의 정면성은 관객의 영화적 관음주의를 파괴하고, 배우와 관객의 소통은 이콘의 성상과 성상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소통과 유사하는 경험을 유도한다. 즉, 비잔틴 이콘이 ‘성스러운 사건에 관찰자가 동참’할 수 있는 심리적 효과를 주고 이콘의 ‘미학적 동기’가 ‘성스러운 진경(珍景)의 세계를 그리고자 했던 심미성의 원칙인 것처럼, 파라자노프의 영화에서 배우의 정면성은 ‘현전’(現前)의 느낌을 창조하는 것이다(위의 논문, p.16).  21)Gvakharia, p.96.

    3. <석류의 빛깔>과 아르메니아

    <석류의 빛깔>은 17세기 아르메니아의 민족시인 사야트-노바의 생애에 대한 영화이다. 사야트-노바(아루틴 사야쟌Арутин Саядян)는 그루지야 트빌리시에서 태어났다. 그가 살았던 아블라바르(Авлабар)지역은 오래 전부터 아르메니아의 장인들과 수공업자들이 살고 있던 곳이다. 사야트-노바는 젊은 시절 인디아와 이디오피아를 방문하는 등 당시에는 쉽지 않았던 세계 여행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는 고대 아르메니아어를 포함하여 수개국어를 구사했다. 성년이 된 사야트-노바는 그루지야 이라클리 황제의 궁정시인이 되었다. 이후 사야트-노바는 아흐파트 수도원에 은둔하였는데, 성직에 종사하면서도 창작을 계속하여 시인의 정체성을 보존했다.22) 사야트-노바의 사후 거의 200여년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카프카스 민족들에게 추앙되는 시인으로 남아있다. 오늘날에도 사야트-노바의 시와 노래는 클래식 연주장에서뿐 아니라 일상적인 연회에서도 들을 수 있다.

    감독 파라자노프는 시인 사야트-노바에 비교된다. 사야트-노바는 남부 카프카스 지역의 주요 세 언어로 쓴 시가 있는데, 그 시들은 파라자노프에게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에서 고도의 시적인 영화를 촬영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었다. 사야트-노바는 세 언어를 알고 있었고, 비록 영화 언어는 단일하지만, 파라자노프 또한 세 언어를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에서 출생하고 그루지야에서 성장한 파라자노프는 동양을 꿈꾸었다. 그는 가슴에 페르시아의 문화를 담고 있었는데, 아제르바이잔은 페르시아의 유산을 그들 고유문화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야트-노바의 시를 스크린의 언어로 번역하려는 파라자노프의 야망과 노력을 고찰한다면, 이 두 예술가의 깊은 내적인 연관성을파악할 수 있다.23)

       1) 기독교의 테마

    아르메니아 국가와 민족의 집단적 동질성을 규정하는 첫 번째 요소는 무엇보다도 종교로 간주될 수 있다. 아르메니아는 전세계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첫 번째 나라로서 현재 인구의 90%이며 이상이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교인으로 나타나는 대표적인 기독교 국가이다.24) 이렇게 기독교의 전통이 강한 아르메니아의 역사와 결부되어 <석류의 빛깔>의 맨 처음 장면은 명백히 기독교적 표상을 나타낸다. 영화의 시작은 성서의 모티프에서 비롯된다. 첫 번째 장면에는 펼쳐진 책이 등장하고 이후 정물화와 번갈아 가면서 반복되어 등장한다. 정물화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등장한다. 1. 석류 열매의 즙이 흘러 하얀 아마포에 피같이 붉은 흔적을 남긴다; 2. 단검이 똑같은 천위에서 똑같은 흔적을 남긴다; 3. 비명이 새겨진 비석과 포도송이가 보이고 한 남자의 맨발이 그 위를 밟는다. 그리고 빵 두 조각과 그 사이에 있는 생선 한 마리, 그 다음에는 생선 세 마리. 이 시퀀스에 기독교적 상징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빵, 물고기, 가시덤불 등, 이들이 기독교를 암시하는 직접적인 표상이라면, 석류, 단검, 포도송이에서 흐르는 피처럼 붉은 색은 고난과 희생을 암시하는 메타포로 나타난다.

    <석류의 빛깔>의 처음 장면에 등장하는 종교를 표상하는 다층적인 이미지는 사야트 노바 시의 모티프들로서 시인의 삶의 메타포이기도 하다. 이 장면에는 사야트-노바의 유명한 시구가 동반된다: “나는 삶과 영혼이 고통 받는 사람이다”(I am the man who's life and soul are torture).25) 이 시구는 네 번 반복되면서 순교자가 맞이해야 할 시련과 고통의 삶의 은유로서 시인의 삶 자체를 암시한다.26)

    <석류의 빛깔>에서 기독교적 모티프로 재현되는 시인의 삶은 그 다음 시퀀스에서 더욱 명확하게 나타난다. 먼저 화면에 사야트-노바가 등장한다. 그는 줄무늬 상의와 하늘색 바지를 말쑥하게 차려 입었다. 그는 웅크린 모습으로 오른손을 땅에 괴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 다음 화면에는 사원의 건축을 장식하는 장식품, 조각된 부조, 기둥머리 장식들이 계속해서 보인다. 이러한 시각적 형상에는 천둥소리가 동반되며, 화면은 번갯불에 번쩍이거나 어둠 속에 잠기는 등 명암이 반복된다. 그리고 앞의 목소리와는 다른 목소리로 구약 성서에서 신의 천지 창조에 비견되는 텍스트가 낭독된다:

    천둥소리와 번갯불에 의한 명암 효과가 지속되는 가운데 화면에는 빗줄기가 등장한다. 수도원 벽에 비가 흘러내리고, 비석이 물에 젖어 있다. 서고에 있는 아르메니아의 고대 필사본은 빗줄기에 흠뻑 젖었다. 이 화면에는 마찬가지로 신의 인간 창조와 관련된 텍스트가 동반된다:

    다시 천둥이 치고 사야트-노바의 모습이 재등장하는데, 이때 소년은 똑같이 웅크린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사야트-노바의 모습으로 시작하여 신의 인간 창조라는 성서적 모티프가 재현되어 다시 사야트-노바의 모습으로 끝나는 이 시퀀스는 동심원적 구조로 나타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사야트-노바의 탄생은 신의 인간 창조에 비견되고 ‘시인’은 최초의 인간 아담에 비유하게 된다. 이제 시인 사야트-노바는 에덴동산의 동식물에 이름을 붙였던 최초의 인간 아담처럼 시를 통해 세상의 모든 사물을 새롭게 명명할 것이다.

       2) 풍속과 제의

    사야트-노바의 수도원 생활이 끝나면 아르메니아인의 생활과 연관된 풍속의 에피소드가 전개된다. 이는 고립되고 엄격한 수도원이 아닌 사람이 북적이고 색채로 가득 찬 도시 트빌리시에서 전개된다. <석류의 빛깔>에서 시인 사야트-노바가 ‘색깔과 향기’(colors and aromas)로 비유되는 인간 세상에 등장하고 이는 다음과 같은 자막으로 예고된다:

    이윽고 은발찌로 장식한 여인의 발로 펼쳐진 양탄자를 밝으며 세탁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때 여인은 한 명이 아니고 여러 명이고 서로 돌아가면서 양탄자를 발로 닦는다. 이들이 물을 뿌리면서 번갈아 움직이는 가운데 울려 퍼지는 경쾌한 캬만차 소리는 이들이 마치 군무(群舞)를 추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이로써 양탄자 세탁이 마치 일상생활과 관련된 노동이 아니라 일종의 오락이나 유희처럼 여겨지게 한다. 이렇게 파라자노프는 양탄자로 발로 밟아 세탁하는 아르메니아의 오래된 양식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이 장면은 지역학적 신빙성이 감독의 상상력과 결합하여 특별히 아름다운 화면으로 탄생한 좋은 예가 된다.

    다음 에피소드 역시 사야트-노바의 전기적 사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야트-노바는 어린 시절 방직 기술을 배웠다고 알려져 있는데, <석류의 빛깔>에는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첫 번째 장면에는 흰색과 붉은색 실타래가 위에 걸려 있고 그 아래 붉은 옷을 입은 어린 사야트-노바가 십자 모양으로 팔을 벌리고 서있다. 이때 시계추처럼 나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다음 화면에서는 이러한 소리에 맞춰 벽에 걸린 양탄자가 좌우로 흔들거리고, 무대의 왼쪽 앞, 두 여인이 오른쪽 뒤에 배치되어 각각 실을 잣고 있다. 어린 사야트-노바는 검은 실타래를 들고 왼쪽의 여인에게 갔다가 다시 앞으로 와서 정면을 향해 앉아 있는다. 아브라하미안은 <석류의 빛깔>이란 제목이 붙은 이 영화에서 파라자노프는 색채의 유희를 계속하는데, 이때 검은색, 붉은색, 하얀색의 세 가지 색깔의 안정된 결합으로써 ‘색채의 우주’를 다루고 있다고 지적했다.

    화면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재현되는데, 그것은 바로 실을 염색하는 장면이다. 파라자노프의 유년 시절과 관련된 이 장면은 염료 관련 문화가 발달된 아르메니아의 민속 문화를 예증하는 동시에 민중 문화 애호가로서의 파라자노프의 취향을 반영하는 중요한 장면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세 개의 실타래를 문양이 새겨진 동판 위에 하나씩 차례로 던져진다. 그 다음 장면에서는 세 명의 염색공과 세 개의 가마가 나란히 늘어서 있고 염색공은 긴 막대를 이용하여 역시 세 개의 끓는 가마에서 염색된 실타래를 꺼낸다. 염색과 관련이 이 장면은, 사야트-노바의 전기적 사실과 파라자노프의 어린 시절의 경험이 모두 투영된, 아마 이 영화에서 가장 지역적 특성이 두드러진 장면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대기는 연기로 가득 차고, 어린 사야트-노바는 이를 바라본다: “대기는 다양한 색깔의 연기로 채색되었다. 몇몇 장면에는 세 가지 색깔의 연기가 등장했다. 끓는 솥이 일렬로 늘어서있고 그 위로 푸른색, 붉은색, 하얀색, 붉은색, 푸른색, 하얀색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 주위에는 염색공이 도구를 끓는 색소를 휘저으면서 염색된 실을 쟁반에 내던지는 것이 화면의 전면에 나타난다. 인상적인 장면이 아닌가!”27)

    염료 염색과 관련된 아르메니아의 지역적 풍속이 재현된 다음 선연한 빛깔이 관객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그것은 가마 속에 있는 붉은 염료를 손에 묻혀 하얀 수탉의 몸에 붉게 칠하는 것이다. 화면에는 흰색 수탉과 붉은 염료가 선명한 대비를 형성한다. 스테픈은 여기서 붉은 염료를 칠하는 닭의 모티프는 앞에서 등장한 붉게 물든 천의 모티프와 함께 구조적인 연관성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즉 붉은 염료는 피와 등가 관계를 형성하는데, 이때 피는 시인의 희생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성당의 종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소년의 아버지는 목이 잘린 닭의 피를 소년의 이마에 바르며 십자가 표시를 하는데, 소년은 이를 장난스럽게 훔쳐낸다. 이렇게 어린 사야트-노바가 희생된 닭의 피를 날카로운 손동작으로 닦아내는 제스처는 시인이 죽기 전에도 똑같이 반복된다. 이러한 비일상적인 행위는 어떤 ‘상징적-제의적’ 성격을 부여받는다. 이때 “희생이 되어 퍼덕이는 닭은 ‘예술’의 이미지로 연결된다.”28)

    22)사야트-노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현악기에 줄들이 온전히 있는 한, 나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수도승이 되기 위해 머리를 깎을 때에도 내 주머니 속에는 이현들이 들어있었다. 나는 그렇게 신성한 악기를 연주했다.” 사야트-노바는 마호메트-한(Аг-Махомет-хан)이 교회에 침입했을 때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다. 그리고 개종을 거부하고 죽음을 택한다.  23)Abrahamian, p.67.  24)아르메니아 교회의 역사는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그리스도의 두 제자인 다대오(Thadaeus)와 바돌로메(Brtholomew)에 의해 창시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AD 40-60년 아르메니아에서 기독교를 설파했는데, 이로 인해 아르메니아 교회의 공식 명칭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Armenian Apostolic Church)로 불리게 된다.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는 동방 정교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의식을 중요시하고 보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또한 아르메니아가 위치한 고지대(Highland)는 대홍수 이후 노아의 방주가 정착했다는 전설(창세기 8:4)이 있는 신비의 영산(靈山)인 아라라트(Ararat)에 둘러싸여 있다.  25)S. Paradjanov. The Color of Pomegranates. Armenia 1969. 88min. DVD. Kino Video, 2001. 본 논문에서는 2001년 뉴욕에서 제작된 DVD를 텍스트로 하며, 아르메니아어로 제작된 <석류의 빛깔>의 인용에 있어서도 상기 DVD판 자막으로 제시된 영어 텍스트를 사용하였다.  26)이때 이 장면에서는 이러한 시각적 묘사와 함께 카프카스 민족의 목관악기인 두둑의 소리가 청각적으로 동반되는데, 이는 사야트-노바가 아르메니아 민속 음악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전기적 사실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27)Калантар, c.106.  28)Abrahamian, p.80.

    4. 결 론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파라자노프의 <석류의 빛깔>에 나타난 창작의 특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문화이다. <석류의 빛깔>에는 여러 민족들의 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의 예술적 창조라는 파라자노프 창작의 특징이 잘 나타나있다. 파라자노프가 성장했던 중세 도시 트빌리시의 코스모폴리탄적 분위기는 <석류의 빛깔>에서 아르메니아의 문화로 변주되어 제시되고, 이 영화에는 아르메니아의 세밀화, 공예 장식, 아르메니아 장인이 제작한 수공업 제품들, 중세 건축물 등 아르메니아의 전통 문화와 예술이 전면에 등장한다. <석류의 빛깔>에 나타난 지역 문화적 요소들은 파라자노프의 조국인 아르메니아의 메타포로 수렴되는데, 기독교 수용, 필사본과 세밀화, 염료와 관련된 에피소드 등 종교와 문화, 풍속을 아우르는 아르메니아의 지역학적 사실들은 아르메니아 민족의 고유한 생활양식과 결부된 것이다.

    둘째, 콜라주이다. 콜라주는 탈중심화과 다중심화을 구현하는 예술 기법으로서 다문화를 재현하는데 효과적인 장치로 간주된다. 이에 파라자노프는 아르메니아 지역의 문화를 스크린에 실증적으로 재현하면서 콜라주 기법을 사용하여 그 다문화성의 테마를 부각시킨다. 이러한 콜라주 기법은 비잔틴 문화의 정면성과 연관되어 이콘의 성상과 관찰자의 관계처럼 배우와 관객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한편 관객으로 하여금‘현전’의 느낌을 갖게 한다. 또한 콜라주는 감독의 전기적 사실과도 관련되어 있는데, 파라자노프의 고향인 트빌리시 회화 학파의 초상화 기법과도 연관되어 그의 예술적 성향을 반영하여 준다.

    셋째, 예술이다. 이 영화는 진리를 추구하는 시인의 운명에 대한 서사인 동시에 예술이라는 영원한 테마에 대한 작가의 독특한 의미화이다. <석류의 빛깔>에는 아르메니아의 문화적 양상들이 제의의 형식을 띠고 나타나는데, 이때 영화에 등장하는 강도 높은 암호들이 아르메니아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고, 스크린에 재현된 제의의 양상은 이를 재현하는 예술을 내포한다. 이러한 제의의 희생이 되는 것은 바로 예술인 것이다. 이렇게 파라자노프는 아르메니아의 문화를 스크린에 재현하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여 자신의 조국 아르메니아에 ‘가장 아름다운 선물’(실비 달레)을 하는 동시에 세계 영화사에 있어 고유의 지역 문화를 영화 예술로 재현하는 훌륭한 모범을 제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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