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모노노케 히메>와 <아바타>에 나타난 이데올로기 연구*

A Study on Ideology in <Princess Mononoke> and <Ava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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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is paper focuses on the ideology of a film that has been one of sensitive and disputatious issues. I would like to concentrate on two cases to elaborate my argument: one is Princess Mononoke (もののけ姬, 1997) directed by Hayao Miyazaki(宮崎駿), and the other is Avatar (2009) directed by James Cameron. Both of two films follow a narrative structure that nature has a conflict with a developed material civilization, but the former wins the latter in the end. For that reason, these films seems to criticize facilities of civilization which have tried to dominate nature.

    However, if we make a further investigation into the point, we can find out another aspects. In that respect, I would argue that Princess Mononoke comes from militaristic aesthetics based on Shinto(神道) thought and Avatar is possessed with the White Messiah. In conclusion, each of films contains Japanese chauvinism or white racism behind the scenes, even though two films have a critical mind about modern civilization. As I mentioned above, there are a lot of cases that ideologies in a film were revealed in secret.

  • KEYWORD

    Ideology , Civilization , Nature , Princess Mononoke(もののけ姬) , Avatar , Shinto(神道) , the White Messiah , Post-colonialism

  • 1. 신화로서의 이데올로기 연구

    영화는 오락이다. 이 명제는 영화 탄생에서부터 산업에 이른 오늘 날까지도 마땅히 인정되어야 한다. 수많은 관객들이 영화가 주는 쾌감을 찾아 극장을 드나든다. 그런데 영화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다. 그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자라고 배운 환경과 지식 안에서 은연 중에 영향을 받은 이데올로기를 그가 만든 영화 속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주입하게 된다. 특정 상황을 재현(representation)하면서 이데올로기를 주입할 수도 있고, 장면 장면을 만들어가면서 미장센(mise en scene) 속에서 복원할 수도 있고, 심지어 몽타주(montage)를 통해 노골적으로 이데올로기를 표현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영화의 이데올로 기는 참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영화 속에 녹아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데올로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영화도 있다. 가령 미국 중심의 이데올로기로 가득한 <인디펜던스데이 Independence Day>(롤랜드 에머리히, 1996) 같은 영화가 있는가 하면, 남성 이데올로기로 넘치는 <친구>(곽경택, 2001) 같은 영화도 있다. 그 유명한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 The Battleship Potemkin>(1925)도 두 편의 영화와는 다르지만, 직접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런 영화들보다더 깊이 연구되어야 할 것은 인류보편적인 영화 내용 속에 숨어있듯이 이데올로기가 존재하는 영화들이다. 이런 이데올로기가 위험한 것은 단순히 흥미를 위해 만든 영화에서, 그러니까 관객들이 ‘의식의 정지’ 상태에서 영화를 보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본고에서 다루려는 이데올로기는 신화와 연관된 이데올로기이다. 부연하자면, 신화를 재현하거나 신화적 사고를 그리고 있는 영화를 분석해 그 영화 속에 그려진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고자 한다. 신화와 파시즘의 관계를 연구했던 카시러(Ernst Cassirer)는 신화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먼저 신화의 순기능과 관련하여 카시러는 원시인들의 신화적 세계관에 들어있는 상모적(physiognomic) 지각방식을 대단히 강조하고 이를 높게 평가한다. 상모적 지각방식이란 카시러 문화철학에 등장하는 핵심 용어로서, 나 자신이 얼굴을 지니고 있듯이, 타인도 얼굴을 하고 있고, 자연 대상물들도 모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하는 지각방식이다. 내가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내가 감정을 갖고 있는 존재며, 이는 곧 생명을 지닌 존재라는 뜻이다. 내가 생명을 지닌 존재이듯, 타인도 생명을 가지고 있고, 동물, 식물, 바위, 나무, 등등 이 세상의 모든 존재자들도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말하자면, 나 자신이 타인을 대하건, 동식물을 대하건, 자연대상물들을 대하건 간에, 내가 대하는 모든 대상들을 생명을 지닌 존재자로서 인식하고 지각하는 태도가 바로 상모적 지각방식이다.”1)카시러는 인간과 자연이 동등한 존재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신화의 긍정적인 면이라고 했다. 이를 통해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된다.

    “신화의 역기능과 관련하여, 신화는 세상에 대한 사변적 해석이 아니라, 실제 생활 형식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특히 위기 상황, 그리고 결과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카시러는 말한다. 신화는 공동체에 형식을 제공하며, 엄청난 위기 상황이 벌어졌을 때는 신화가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그래서 신화는 각 개인에게 무조건적으로 집단과의 일체감을 심어준다. 카시러는 이것을 신화의 정치철학으로의 침투라고 말한다. 카시러는 서구의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두려웠던 양상은 바로 신화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세력의 출현이라고 말하면서, 20세기의 대표적인 정치적 신화로서 칼라일(Thomas Carlyle)의 ‘영웅숭배론’, 고비노(Joseph-Arthur Gobineau) 의 ‘인종불평등론’, 슈펭글러(Oswald Spengler)의 ‘숙명론’을 꼽고, 이들의 사상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악용되었는지를 규명하였다.”2)

    카시러의 의견을 종합하면 신화는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종주의나 영웅숭배를 통해 파시즘을 드러낼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신화는 양면의 검이다. 때문에 신화적 내용이나 신화적 토대를 다루고 있는 영화 역시 이런 양면의 검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본고는 카시러의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모노노케 히메もののけ姬>(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1997)와 <아바타 Avatar>(제임스 카메론 James Cameron, 2009)에 나타난 이데올로기로서의 신화를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이데올로기는 쉽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때문에 이데올로기를 밝히려면 텍스트 표면보다는 이면을 집중적으로 살펴야 한다. 두 영화 모두 표면에 드러난 내러티브보다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나, 그 근저에 깔려있는 정서나 사상을 찾으려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두 영화를 선택한 이유를 밝혀야 한다. 두 영화의 내용이나 이야기 전개 방식이 어떻게 같은지 분석할 것이다. 그런 다음 두 편의 영화를 신화로서의 이데올로기라는 관점에서 세심히 분석할 것이다. <모노노케 히메>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꾸준히 다루었던 자연과 문명의 이항대립 구조에 어떻게 일본의 신화가 개입되고 있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밀히 분석할 것이다. <아바타>에 드러난 자연적이고 평화적인 메시지와 달리 영화는 어떻게 백인 남성 중심의 사상을 드러내고 있는지 탈식민주의의 방법으로 분석할 것이다.

    1)신응철,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신칸트학파의 문화분석(연구) 방법론- 문화철학과 문화비 평의 상관성의 관점에서」, ≪大同哲學≫, Vol.24, 2004, 265쪽.  2)신응철,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신칸트학파의 문화분석(연구) 방법론- 문화철학과 문화비평의 상관성의 관점에서」, ≪大同哲學≫, Vol.24, 2004, 265∼266쪽.

    2. 쌍둥이처럼 닮은 두 영화

    본고에서 텍스트로 삼은 <모노노케 히메>와 <아바타>는 일본과 미국에서 각각 만들었지만, 동서양의 차이를 넘어 유사한 점이 많다. 먼저 큰 흥행을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떤 영화가 흥행을 했다는 것은 그 영화를 본 이들과 많은 교감을 나누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영화는 일본과 미국이라는 그 영화를 만든 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했다. 영화의 내용이나 주제도 비슷하다. 두 편 모두 문명과 자연의 대결 구도에서 문명의 폭력을 비판하면서 자연의 큰품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두 영화가 애니메이션과 극영화라는 차이점이 있지만, 3D 영화인 <아바타>의 많은 부분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렸다는 것을 고려하면, 두 영화는 그리 멀지 않은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림으로 재현했다는 점 때문인지 공중에 떠 있는 섬 같은 부분은 제임스 카메론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지 의심될 만큼 비슷하다. 실제 제임스 카메론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노노케 히메>를 인지하고 있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고,3) 재패니메이션의 팬이라고도 했다.4) 결국 <아바타>는 실사 같은 애니메이션이 되면서 두 영화의 접점은 깊어졌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두 영화의 중심 사상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아니,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을 개발하고 파괴하는 세력에 맞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아름다움과 공동체의 질서를 두 영화에서는 공감 있게 그리고 있다. 자연이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그 자연 속에도 각각의 정령이 있어 그들과 함께 공유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정신이 두 영화에는 뿌리 깊게 각인되어 있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시시가미를 중심으로 한 숲은 여러 정령들이 모여 살아가는 공간이다. 인간이 함부로 파괴할 수 없는 그윽한 정신이 있는 곳이다. <아바타>의 판도라는 나비족과 여러 동식물이 서로 공감을 나누며 살아가는 곳이다. 그야말로 두 영화에는 자연을 존중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정신이 살아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성서학자가 저술한 책, 그 가운데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서술한 부분인데, 이 부분이 두 영화의 핵심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오래된 나무나 집 뒷산에 있는 커다란 바위조차도 거기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 함부로 나무 한 그루 돌 하나 베거나 쪼개지 않았다”라는 부분은 <모노노케 히메>의 한 장면을 그대로 떠올리게 하고, “아메리칸 원주민들은 들소 한 마리를 잡아먹을 때 식량을 위해 너를 죽이게 되어 참 미안하다는 의미의 의식을 올리고서야 그 들소를 죽였다”라는 부분은 <아바타>의 한 부분을 그대로 떠올리게 만든다.

    자연을 존중하는 두 영화의 의식은 나무를 대하는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살아난다. 고대로부터 나무는 지하와 땅과 하늘이라는 3개의 우주영역을 서로 교차하는 신비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이렇게 3개의 우주영역을 교차하는 나무이기 때문에 세계의 기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무들 가운데 신적인 상징을 지니고 있는 나무는 세계의 중심 역할을 한다. 즉, 우주나무(Cosmic Tree)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종교 학자 엘리아데(Mircea Eliade)가 이런 나무를 성스러운 나무, 소우주로 서의 나무, 신의 거처로서의 나무, 우주나무로 분류해 설명한 것도 이런 개념의 발로이다. 엘리아데는 종교에서 나무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런 우주나무이기 때문에 원시인들은 그 나무를 신령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나무를 중심으로 해서 세계가 구성되니 당연히 종교의 대상이 되었다. <아바타>에서 홈트리는 우주나무이다. 그들의 생활터전이고 보금자리이며 정신적 안식처이다. 바로 이런 곳을 떠나라고 하니 나비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고, 이곳을 파괴하니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다. 신령의 나무가 중요하다는 것도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곳은 정신적 영감의 대상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깊은 원시림 같은 공간과 그것에 있는 시시가미와 그를 둘러싼 나무 역시 신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영화에서는 시시가미가 우주나무가 된다. 목을 길게 해서 달을 향해 뻗어가는 모습은 그대로 우주나무의 이미지이다. 그런 우주나무가 인간의 손에 죽으니 고다마들도 같이 죽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보면 두 영화는 에코페미니즘과 닿아있다. 대지와 자연의 풍성한 품성을 여성의 품성과 동일시하는 에코페미니즘과 일차적으로 공통점을 지니지만, 그런 것보다는 자연과 여성이 과학과 문명, 인간-정확하게는 백인 남성-, 가부장적 자본주의에서의 권력 등에 의하여 억압 받고 착취당해오는 양상이 매우 흡사하고 긴밀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동일시된다. 이를 여성이 이런 자연 문제에 있어서 먼저 발벗고 나서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파괴된 환경으로 인한 피해가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욱 치명적이거나 더 밀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에코페미니즘에서는 착취당하는 대상은 자연, 여성, 동양, 제3세계, 남대륙, 소규모 공동체, 자급적 노동 등으로 보고 있으며 착취하는 주체는 과학, 기계적 진보, 남성, 서양, 북대륙, 자본주의, 글로벌 기업 등으로 본다.7) 결국 두 영화는 남성 중심의 서구 개발주의자에 맞서는 자연과 대지의 모성성을 강조하는 영화이다.

    3)http://en.wikipedia.org/wiki/Avatar_(2009_film)  4)http://www.imdb.com/name/nm0000116/bio  5)이상성, 『벌거벗은 성서』, 인물과사상사, 2008, 195쪽.  6)M. 엘리아데, 이은봉 역, 『종교형태론』, 한길사, 1996, 358쪽.  7)전혜정, 「에코페미니즘 관점에서의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세계」, ≪애니메이션 연구≫, Vol.4 No.1, 2008, 94∼95쪽.

    3. <모노노케 히메>, 신도 사상의 이중성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를 보고 나면 평안함을 느낀다. 그것은 대지와 하늘이라는, 인간에게 가장 평안한 배경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파란 하늘과 푸른 자연이 눈부시게 아름답게 등장한다. 그런 공간에서 하늘을 날고 대지를 거니는 인물들을 보면 평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단지 대지와 창공을 셀 속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대지와 창공이 인간과 하나를 이루는 세상을 그리고 있다. 인간이 세상의 주체인 것이 아니라 인간도 자연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배경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세상을 끊임없이 애니메이션에 재현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소재는 그의 영화 속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숲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숲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의 모습일 것이 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모여 숲을 이루듯 숲에 살아가는 구성원은 한 명 한 명의 개성과 직업을 존중하며 질서를 이루고 있다. 각자의 분업을 통해 협동체를 꾸려가는 원시공동체의 모습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한때 맑스(Karl Marx)에 경도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공동체의 모습이 고스란히 그의 영화에 살아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風の谷のナウシカ>(1984), <미래소년 코난 未來少年 コナン>(1978), <모노노케 히메> 등에 나타난 숲은 전형적이라고 할 만하다. <이웃의 토토로 となりのトトロ>(1988)에도 협업하는 마을 공동체의 모습은 아니지만, 순박하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숲과 함께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다.

    이런 마을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 기계문명을 신뢰하며 자연을 파괴하고 개발하는 무리들이다. 그러니까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에는 한편에는 숲을 중심으로 조화롭게 살아가는 공동체가 있고, 한 편에서는 기계 문명을 바탕으로 지구를 정복하거나 지구를 파괴하려는 세력이 존재한다. 당연히 마을공동체는 개발주의자와 대립하고 갈등하고 충돌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불이다. 불은 곧 무기를 의미하고 무기는 다시 전쟁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마을공동체는 숲을 둘러싼 물과 바다를 배경으로 평온한 일상을 구사한다. 결국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는 ‘물과 불’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

    미야자키가 이상향을 숲을 중심으로 한 마을 공동체에 두고 있는 것을 두고 어떤 연구자는 “자연과 인간을 동일시하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여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을 중심으로 동양적 자연관을 구현하였다.”8)라고 평가했다. 이 말은 그의 영화에는 자연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정령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공경하고 동반자로 여기는 사상이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을 다르게 하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인의 고유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신도(神道) 사상을 영화 속에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도는 일본의 고유한 종교이자 자연관이며 사상이다. 일본인들이 대부분 지니고 있는 것. 자연에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정령이 있다는 세계관. 해서 정령을 지니고 있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상생(相生)의 타자론’이 바로 신도인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가운데 이런 사상을 가장 충실하면서도 기초부터 그리고 있는 영화가 <모노노케 히메>이다. <모노노케 히메> 이전의 그의 영화는 <이웃의 토토로>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영화가 유럽이나 무국적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의 영화를 보고 일본적인 느낌을 받기는 쉽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일본 내에서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를 의식해서인지 미야자키 하야오는 <모노노케 히메>에서 일본의 아득한 과거로 돌아가 그들의 사상을 이루고 있는 밑바탕을 묻는 영화를 만들었다. 다음 작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千と千尋の神隱し>(2001)도 마찬가지다. 그는 왜 이런 영화를 만든 것일까? 특정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일본의 고유한 전통문화를 영화로 만들어 영화 세계에 신선한 설득력을 부여하겠다는 그의 의도의 발로였다. 그리고 적어도 일본 내에서는 그 의도가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모노노케 히메>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두 편 모두 어마어마한 흥행을 기록했고 엄청난 각광을 받았다. 특히 <모노노케 히메>는 환경론자인 그의 입장을 대변하는 영화라고 칭송받았다. 인간에게 혼이 있듯이 자연에게도 정령이 있으니 함부로 개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더불어, 일본의 고유한 사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며 대의명분과 전통의 발굴까지 완수한 작품이 되었다.

    이미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모노노케 히메>도 문명과 자연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산은 인간 공동체의 우두머리인 에보시와 대결한다. 단순하게 유추하면, 산은 자연을 대표하고 에보시는 문명을 대표한다. 이런 대결 구도는 타타리 신의 저주를 치료하고자 서쪽으로 온 아시타카에 의해 끊임없이 조율된다. 그러나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재앙신이 되어 출몰하고 저주를 내려도 개발을 진행하는 에보시의 전략 때문에 거대한 전쟁을 치러야만 한다.

    여기서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영화 제목에서 나타난 원령이라는 용어이다. 이것은 일본의 고유한 사상의 한 부분이다. 중세 이래 일본에서는 생전에 원한을 품고 죽은 귀족이나 왕족이 사후에 탈이나 재앙을 일으키는 걸 막기 위해 사령을 신으로 모시는 관습이 있었다. 이를 통상 어령(御靈)신앙 또는 원령신앙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이는 정치적 분란이나 전란, 사고, 자연재해, 역병 등으로 생전에 한을 품고 죽거나 비명사한 자의 원령이 산 사람을 괴롭히고 여러 재앙을 불러온다 하여 두려워한 민간신앙이다. 이런 원령신앙의 흔적은 지금까지도 일본 사회에 진하게 남아 있다. 이를테면 원령신앙은 현대 일본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기타노(北野) 신사, 노(能)라든가 가부키(歌舞伎)와 같은 전통 예능, 야스쿠니 신사 등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10)

    다시 말하면, 원령신앙은 일본인의 주 사상 가운데 하나인데, 억울하게 죽은 이가 산 사람을 괴롭히기 때문에 이들을 달래야 한다는 것이다. 신사에 모시기도 하고, 그들의 한을 연극 형태로 재현해 해원해 주기도 한다. 아시타카는 재앙신의 저주를 받아 서쪽으로 떠나야만 했다. 그 저주를 풀려면 왜 그가 재앙신이 되었는지 알아야 하고, 그 원인을 알아야 해원을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른 장도에서 그는 두 여성을 만난다. 산은 어릴 적 인간이 버린 아이인데, 늑대가 그녀를 키웠다. 해서 그녀는 자신을 늑대와 동일시하면서 인간을 절대적으로 증오한다. 에보시는 보기 힘든 여성 지도자이다. 적재적소에 인간을 고용할 줄 알고 나병 환자도 돌볼 줄 아는 지도자이다. 이 두 여성은 필연적으로 싸우게 된다. 에보시는 철을 확보하기 위해 자연을 개발해야 하고, 산은 그 개발을 막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모노노케 히메>는 여성 대 여성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 미야자키는 하필 고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 에서 여성을 주인공과 적대자로 설정한 것일까? 다분히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이 영화에서 여성이 리더가 된 것은 이유가 있다.

    이렇게 보면 미야자키 영화에서 여성이 주인공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전근대적이면서 여성이기 때문에 버림 받았던 존재, 근대화 이전의 영화이기 때문에 <모노노케 히메>에서 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사실 미야자키 영화에는 근대화 이후에도 여성이 자주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근대화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마녀 키키>나 <이웃의 토토로>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근대화의 파괴 이후 세상을 그리기 때문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 <천공의 성 라퓨타> 등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미야자키는 <모노노케 히메>에서는 산과 에보시라는 두 여성의 대결을 통해 “인간의 삶이 자연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 가능할까라는”12) 질문을 한다. 다른 영화에는 대부분 여성의 상대 역으로 남성이 등장해 지구를 지배하려 하거나 파괴하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다르다. 자연과 문명을 대표하는 사람이 모두 여성이다. 그래서 미야자키는 자연을 대표 하는 산과 문명을 대표하는 에보시의 대결에서 산의 편을 드는 것 같지만, 에보시 역시 악인으로 그리지만은 않았다. 여성이 정당한 일을 하게 만들고, 공동체를 효율적으로 이끌고 있는 에보시를 등장시킨 것이다. 이 설정을 통해 인간이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자연을 파괴해야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인지 묻는다.

    그렇다면 <모노노케 히메>는 미야자키의 자연친화적이고 여성 친화적인 세계관이 일본의 뿌리 깊은 신도 신앙과 행복하게 만나기만 하는 것일까? 다시 말해, <모노노케 히메>는 정치적으로 올바르기만 한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앞에서 원령신앙이 야스쿠니 신사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는 지적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제국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에게 이 영화가 그렇게 자연친화적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일본이 제국주의로 나갈 때 바탕이 된 것이 신도사상을 토대로한 천황제 중심의 군국주의였는데, 이것이 영화의 바탕을 이루고 있으니 군국주의 미의식과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

    시시가미가 목을 잃고 괴물로 변할 때 수많은 고다마들은 마치 사쿠라처럼 진다. 가미가제 특공대원들은 출격하기 직전 반드시 사쿠라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것은 “짧은 기간 동안만 피었다가 지고 마는 벚꽃보다 더 사무라이의 삶을 잘 표현하는 상징물도 없었”14)기 때문이다. 그렇게 죽은 이들의 위패를 야스쿠니 신사에 모셨다. 야스쿠니 신사는 처음에는 죽은 자의 초혼과 위령의 장소로 출발했지만, 천황을 위해 죽은 병사들의 위패를 안치한 곳으로 변해갔다. 천황을 위해 죽은 병사들의 모습이 흩날리는 사쿠라꽃으로 상징화된 것이다. 전몰병사의 초혼에서 충혼 신사로의 명칭 변경과 함께 사쿠라꽃이 ‘천황 즉 국가를 위한 희생’의 미화에 이용된 것이다.15) 이 영화의 고다마들은 정확히 시시가미라는 천황을 위해 지는 사쿠라를 연상시킨다. 아니, 그렇게 시각적으로 그려져 있다. 게다가 맹목적인 오코토누시를 따라 장엄하게 죽는 멧돼지를 보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진으로 뛰어드는 자살특공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영화에서는 제국주의 일본이 내세웠던 동양 대 서양의 대결 구도를 은연 중에 배치하고 있다.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루고 살던 아시타카의 마을은 동쪽에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재앙이 닥쳐 아시타카는 그것을 풀기 위해 서쪽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자연을 파괴하고 정령신을 파괴하는 개발주의자들을 만나게 된다. 이것은 군국주의 일본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양과 맞서 싸울 때 내세웠던 상황과 너무도 비슷하다. 조용하게 살고 있는 동양을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쳐들어와 식민지로 만들었으니 싸워야 한다거나, 서구의 개발주의와 파괴에 맞서 동양적 정신을 바탕으로 한 대동아공영권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구호와 미묘하게 겹친다.

    물론 이를 두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맹목적 집단주의자들이나 자기 성찰을 잊은 사람들을 돼지로 표현”해, “분노를 이기지 못해 집단 자살 공격을 감행하는 성난 멧돼지 떼가 결국 몰살을 당하는 에피소드”16)로 그렸다며, 어리석은 인간이 돼지로 형상화될 뿐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여전히 미야자키는 환경론자이고, 자연주의자이며 공동체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단편적인 평가로 보인다. 멧돼지가 자살 공격을 하는 맹목적인 모습은 미련하게 보이지 않고, 무섭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미련한 돼지가 아니라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가미가제 돼지’이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에서 이상화된 ‘원시’는 어디까지나 일본의 신도적 이상에 기초한 것으로서 일본의 특수성(‘일본은 다르다!’는 강한 자의식)의 미묘한 베일로 드리워져 있다. 그러니까 ‘숲의 사상이 인류를 구한다’는 발상이 결국은 ‘신도의 사상이 인류를 구한다’는 일본주의적 주장을 은폐하고 있”17)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 오의 애니메이션이 마냥 평안하고 귀엽지만은 않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언제 다시 군국주의 미의식으로 발전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식민지를 경험했던 우리에게는 남아있기 때문에 불편한 것이다.

    8)김종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애니메이션에 나타난 자연과 인간」, ≪한국문예비평연구≫, Vol.32, 2010, 364쪽.  9)박규태, 「일본의 문화콘텐츠와 종교 -미야자키 하야오를 중심으로-」, ≪종교연구≫, Vol.44, 2006, 27쪽.  10)박규태,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 -종교로 읽는 일본인의 마음』, 책세상, 2001, 169쪽.  11)수전 J. 네피어, 임경희ㆍ김진용 역, 『아니메』, 루비박스, 2005, 303쪽.  12)김용민, 「생태영화의 가능성 -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원령공주』-」, ≪문학과 환경≫, Vol.8 No.1, 2009, 198쪽.  13)김윤아, 『미야자키 하야오』, 살림출판사, 2005, 30쪽.  14)니토베 이나조, 양경미ㆍ권만규 역, 『일본의 무사도』, 생각의나무, 2005, 29쪽.  15)오오누키 에미코, 이향철 역,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 미의식과 군국주의』, 모멘토, 2004, 205쪽.  16)박수미, 「청공(靑空)과 대지를 향한 영원한 노스텔지어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론(論)」, ≪일본사상≫, Vol.40, 2008, 244쪽.  17)박규태, 「일본의 문화콘텐츠와 종교 -미야자키 하야오를 중심으로-」, ≪종교연구≫, Vol.44, 2006, 47쪽.

    4. <아바타>, 원시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백인주의의 이중성18)

    많은 이들은 제임스 카메론을 단지 대중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카메론은 결코 그런 감독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영화에는 매우 복잡한 상황이 녹아있다. <아바타> 이전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흥행을 기록한 그의 전작 <타이타닉 Titanic>(1997)은 단순히 거대한 배가 침몰하는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그 안에는 기계문명에 대한 무한한 근대의 믿음이 만들어낸 타이타닉호의 침몰이라는 철학적인 사고와,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생겨난 계급 문제를 배 안의 구조로 재현한 사회적 사고가 녹아있다. 인간과 컴퓨터의 대결이라는 미래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는 미래의 시간이 현재의 원인이 되는 SF적 시간관을 그럴듯하게 재현해서 기존의 시간관을 바꾸어 버린다. 카메론의 영화에서는 남성에게 순종적인 연약한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 다. 남성보다 더 남성 같은 전사 이미지의 여성이 등장해 지구를 구한다. 이렇게 몇 가지만 살펴봐도 카메론의 영화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바타> 역시 결코 쉬운 영화는 아니다. <아바타>는 전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했는데, 그런 흥행을 가능하게 한 원인을 찾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영화의 시각적 효과에 비해 이야기는 지루하거나 식상하다고 평가하곤 한다. 특히 기존 영화와 유사점이 많다고 평가한다. 문명의 서구인이 원주민과 연을 맺어 함께 살아가는 것은 <늑대와 춤을 Dances with Wolves>(케빈 코스트너, 1990)과, 그의 배필이 족장의 딸이라는 설정은 <포카혼타스 Pocahontas>(마이크 가브리엘, 에릭 골드버그, 1995)>와,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과 맞서 싸운다는 설정은 <모노노케 히메>와 비슷하다는 것이다.19) 충분히 일리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아바타>가 위의 영화들과 비슷하다고만 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서구의 문명인이 원주민과 함께 살며 자연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내용은 위의 영화 외에도 다른 영화에도 등장한다. 그런데 <아바타>를 보면, 단지 이런 설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원주민들이 지니고 있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원시공동체에 대한 생각들이 너무도 섬세하고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현대 문명의 시각에서 보면 원주민들의 생활이 단순히 원시적인 모습으로 보이지만, 나비족의 생활에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면(또는 되므로) 평화로우면서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신화적 사고’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2150년 경이다. 지구의 에너지가 모두 고갈되어 행성 ‘판도라’에 새로운 자원을 착취하려 간다. 그곳은 지구와 달리 독가스가 있고 원주민인 나비들이 살고 있다. 지구인들은 나비와 인간의 DNA를 결합해 새로운 생명체 ‘아바타’를 만들어 링크 머신을 통해 원격조종한다. 지구인들이 원격조종하는 아바타의 목적은 단순하다. 나비족을 설득해서 그들이 살고 있는 홈트리를 떠나게 해, 그 밑에 있는 무한한 양의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홈트리를 신처럼 섬기고, 자연과, 다른 동물들과도 깊은 교감을 나누는 나비족은 홈트리를 떠날 수 없다. 이제 무력으로 나비족을 점령하기 시작하면서 전면전이 발생한다.

    이 영화에서 놀라운 것은 원시적 공동체에 대한 감독의 애정 깊은 시선이다.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마치 무한한 애정을 지닌 인류학자가 원시공동체를 묘사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마치 거대한 신화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홈트리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자연의 원리에 자신들의 생의 리듬을 맞추어 가는 삶이다. 인간의 시선으로 보면 지극히 원시적으로 보이지만 그들에게는 더없이 풍족하고 안락한 삶이다. 그들에게 자연과 동물은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의 대상이다. 아니, 경외의 대상이다. 자연의 각 구성원에게 모두 정령이 있으니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자세. 식량을 위해 사냥을 하더라도 필요한 만큼만 사냥하고 나머지는 자연에 돌려준다. 이런 시각은 자연을 신으로 섬기던 고대의 모습이며 동양의 사고이다.

    바로 이런 의식(意識)이 영화에 경건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먹이를 위해 동물을 죽일 때에는 진정으로 미안한 마음을 지녀 최대한 아픔을 적게 한다. 그리고 감사한다. 사람이 죽었을 때에도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경건하게 흙으로 돌려보는 제의를 지낸다. 새와 동물을 탈 것으로 부릴 때에도 나비족의 꼬리와 새, 동물의 꼬리를 통해 서로 공감대를 형성한 후 이용한다. 이런 소통이 없으면 이용할 수 없는 것이다. 나비족이 모두 모여 신의 나무 앞에서 자연과 대지와 소통을 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壯觀)이다. 말 그대로 자연과 나비족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물질을 우선시 해서 자연을 함부로 파괴하는 인간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성한 원시공동체를 이 영화는 생생하게 그리는데, 이런 의식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홈트리이다. 그들이 모여 살고 있는 홈트리라는 거대한 나무는 우주나무(cosmic tree)를 연상시킨다. 신의 신령스런 기운이 있는 나무, 그래서 그 나무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종족은 쉽게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영화 속의 홈트리는 주위의 그 어떤 나무보다도 거대하다. 그 나무에 모여서 살아가는 이들은 지하에서 자상으로 올라가는 나무의 기운을 받으며 그곳을 집이자 안식처로 삼고 살고 있다. 말 그대로 홈트리인 셈이다. 주위의 그 어떤 나무보다 거대한 홈트리는 단지 자원을 위해 파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나비족에게 홈트리는 집이자 정신적 안식처이며 지하/땅/하늘을 연결해주는 기둥이자, 우주의 대상이며 신성의 공간이다. 이런 공간을 지구인들은 최신의 무기로 단숨에 파괴해 버린다. 홈트리가 무너질 때 마치 9.11 당시 쌍둥이빌딩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나비족에게 이 공간이 지니는 의미가 미국인들에게 쌍둥이빌딩의 의미와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아바타> 역시 <모노노케 히메>와 마찬가지로 자원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과, 이에 대항하는 원시의 대결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확장하면 인디언의 문화를 파괴하고 학살한 아메리카의 청교도를 떠올릴 수도 있고, 발달된 무기와 의술을 통해 제 3세계의 자원을 함부로 약탈한 서양 제국주의를 기억할 수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를 만든, 미국을 위시한 서구의, 자연에 대한 전형적인 시각이 개발 논리라는 점이다. 이제까지 자연에 대한 서구의 입장은 개발해서 이익을 취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신의 피조물인 자연을 지배하라는 기독교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서구를 제외한 대상은 타자로 규정해서 지배하고 개발해 서구의 발전에 이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동양의 사고는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세계관이었으며, 그 바탕에는 노장사상이 있었다. 서구 출신의 감독이 만든 이 영화에서 서구의 사고방식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아바타>를 장르적으로 규정하면 SF이지만, 실상 속내를 보면 서부 영화의 컨벤션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계화되고 문명화된 백인과,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인디언의 대결을 판도라라는 우주 공간으로 옮겨놓았을 따름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제임스 카메론은 서부극 전성 시대의 서부극 컨벤션을 가져오지 않고, 오히려 자기반영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는 <늑대와 춤을>의 컨벤션을 재현하고 있다. 그래서 백인이 어떻게 인디언의 문화를 파괴했는지 고발한 것처럼, 나비족의 문화가 얼마나 자연친화적이고 아름다운지 증명한다. 심지어 제임스 카메론은 나비족의 언어를 USC 언어학과 학부장인 폴 프로머 Paul Froemer에게 의뢰해서 만들기도 했다.20)

    뒤돌아보면 “홈트리를 지키려는 나비족의 노력은 곧 그들이 야만족이 아니라 역사와 전통을 지키려는 문명적인 존재임을 암시한다.”21)타자의 문명을 전혀 존중하지 않고 물질에만 눈이 어두워 폭력으로 파괴하려는 백인이야말로 야만족이다. “지구인은 나비족이 열등하고 야만적이며 미개하다고 여기지만, 나비족은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비족에게 하늘 사람들은 탐욕으로 가득 차있어서 무언가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그래서 가르치기 어려운 야만적 존재들로 비춰진다(“우리는 다른 지구 사람들을 가르치려 노력했어. 이미 가득찬 잔을 채우려 하기란 어려운 일이지”)”22). 누가 누구를 야만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지 묻게 만든다.

    이렇게 원시공동체의 문화와 신화적 세계관을 영화 속에 꼼꼼하게 재현해 놓은 <아바타>는 기존의 서구적 세계관을 반성하는 영화의 측면이 있다. 그러나 <아바타>를 이런 시각만으로 보기에는 불편한 지점이 있다. 먼저 이 영화에는 백인 중심주의가 들어있다. 다르게 보며 백인 메시아주의가 녹아있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속에 그려진 원주민은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적인 시선으로 그려졌다. 서구인이 바라본 동양인은 미개하거나 이상한 영감을 주는 대상에 그치는데, 이 영화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원주민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백인 이어야 하는데, 이 영화 역시 그러하다.

    먼저 영화 속에 나비족이 등장하는 방식을 보자. 나비족은 제이크가 링크를 통해 들어가야만 존재할 수 있고, 그가 링크에서 벗어나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존재이다. 링크와 결합해야만 제이크와 함께 할 수 있고, 링크를 벗어나면 그들의 삶은 스크린에서 완전히 지워진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는 텅 빈 정체성, 나비족은 배제되기 위해 일시적으로 포함되는 정치적으로 헐벗은 존재”23)가 된다. 나비족은 제이크라는 백인의 성공을 위한 하나의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나비족을 대하는 백인들의 언어에서도 이런 문제의식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바타>에서 군사작전을 총지휘하는 마일즈 쿼리치 대령이 판도라 원주민인 나비족을 가리켜 ‘벌레’로 부른다든지, 주둔지 ‘헬게이트’의 책임자인 라일 웨인플릿 상병이 그들을 ‘파란 원숭이’로 부르는 데서 확연히 드러난다. 반면 나비족은 지구인을 ‘하늘 사람’(Sky people)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온 인류의 구원자로 내려왔다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구원관을 연상케 한다.”24) 이런 언어 사용을 통해 이미 <아바타>에서 원주민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백인이라는 것을, 즉 백인 메시아주의가 드러난다.

    나비족과 백인들이 나누는 대화에서도 백인 우월주의는 잘 살아있다. 제이크가 판도라에서 네이티리25)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 영어를 사용한다. 이 영화에서 백인과 나비족을 그리는 방식은 식민지 지배자와 식민지 피지배자의 모습을 구현하는 것이다. 미개한 식민지에온 식민지 지배자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자신들의 언어를 미개한 식민지 피지배자에게 가르친다. 우월한 식민지 지배자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피지배자들은 식민지 지배자들에게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때문에 식민지 지배자들은 자신의 언어를 통해 식민지 피지배자를 교화시킬 수 있다. 이런 시각은 영화 속 파커가 그레이스 박사에게 하는 말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지구인은 원주민들에게 학교를 세워주고 영어를 가르쳤다. 물론 몇은 나비족의 언어를 배우기도 했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지배를 위한 것이었고, 그마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들은 함께 살려고 온 것이 아니라 자원을 착취하러 왔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다시 언어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 영화를 보면 영어는 지구를 대표하는 언어가 된것 같다. 그리고 곧 우주를 대표하는 언어가 될 것 같다. 과연 이것이 원시 공동체를 그리는 영화에 타당한 언어 구사인가? 아프리카의 언어를 모두 없애고 서구의 언어로 통일했던 서구 제국주의의 시각이 이 영화에도 고스란히 살아있다.

    일방향적인 제국주의의 시각은 이 영화 내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 밖에도 존재한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이 영화는 막대한 물량을 앞세워 전세계 스크린을 장악했다. 이런 배급 방식에 자국의 영화는 설 자리를 잃는다. 이것은 마치 엄청난 무기로 판도라를 침공한 백인들 앞에서 활로 맞서는 나비족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신자유주의 라는 미명 하에 <아바타> 같은 영화가 모든 극장을 쓸어버리는 현상이 오히려 영화의 내용보다 더 무섭고 두려울 수 있다. 영화에는 그나마 원주민의 신화적 사고와 공동체 문화가 살아있거나 그들이 승리하지만, 영화 밖 배급에서는 절대 승리할 수 없는 구조로 이미 개편되어 있다.

    18)<아바타>에 구현된 원시공동체에 대한 부분은 강성률의 「<아바타>, ‘최신’의 테크놀로지로 복원한 ‘최고(最古)’의 원시공동체」, ≪공연과 리뷰≫ 68호, 2010년 봄호를 참조했다.  19)김형래, 「<아바타>의 흥행신화와 그 이면」, ≪외국문학연구≫ 제38호, 2010년, 150쪽 -153쪽.  20)Jensen, Jeff. "James Cameron talks Avatar". Entertainment Weekly. January 15, 2007. http://www.ew.com/ew/article/0,,20007998,00.html.  21)서성식,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진화 관점에서 본 영화 아바타」, ≪영상영어교육 (STEM journal≫, Vol.11 No.2, 2010, 109쪽.  22)정연희, 「영화 [아바타]의 생태적 상상력과 신화적 전통의 재구성」, ≪現代文學理論硏究≫, Vol.47. 2011, 310쪽.  23)권유리아, 「<아바타>에 나타난 정치와 적에 관한 인식 문제」, ≪영화≫, Vol.4 No.1, 2011, 44쪽.  24)구미정, 「<아바타>에 나타난 생태적 가치」, ≪현상과인식≫, Vol.35 No.1ㆍ2, 2011, 130쪽.  25)‘네이티리’라는 이름도 native라는 원주민을 연상시킨다.

    5. 결론을 대신하며

    미국영화, 아니 전 세계 영화의 흥행기록을 다시 썼던 <아바타>는 매우 단순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이면을 보면 다양한 이데올로기가 들어 있다. 오랫동안 서구가 해 왔던 개발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있는가 하면, 백인이 지도자가 되어 미개인을 구한다는, 탈식민주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위험한 이데올로기도 산재해 있다. 일본 ‘영화의 마법사’라 불리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연출한 <모노노케 히메> 역시 전 세계적으로 흥행을 기록한 영화로서, <아바타>와 비슷한 이야기, 즉 개발 중심의 세력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지만, 그 이면을 보면 일본의 고유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신도 사상을 바탕으로 한, 일본의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와 만나게 된다.

    이렇게 대중영화는 올바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도 조금 더 파고 들어가면 다른 이데올로기를 만나게 된다. 이미 고정된 신화의 세계관을 스크린에 재현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 신화가 특정 사회에 소통된다는 것은 신화에 스며있는 이데올로기도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 연구에서는 무심코 접하는 할리우드 영화나 일본 영화에 그들만의 이데올로기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통해 영화에서의 이데올로기의 무서움을 파악하고자 했고, 이데올로기를 분석할 때, 드러나는 표면의 이야기와는 다른 이면의 정서를 통해 이데올로기의 내재 방식을 분석하려고도 했으며, 텍스트로 삼은 두 영화를 분석함으로써 두 편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생각들과 그 범위도 알아보고자 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두 편은 우리나라에서도 큰 흥행을 기록했다.

    이제 논문의 한계에 대해 논해야 한다. 영화에 드러난 이데올로기 연구는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왜냐하면 의식적 비판 없이, 자명한 것 혹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상태에서 이미지로 포장된 영화를 보기 때문이다. 본고 초반에 짧게 논의한 것처럼 영화 속에 이데올로기가 어떤 방식으로 녹아들어 가는지에 대해서도 좀더 세밀하고 촘촘한 연구가 필요하고, 영화 속 이데올로기를 바라보는 관객에 대해서도 세심하고 통계적인 연구도 필요하다. 또한 이 논문에서는 영화 내용에서만 이데올로기를 분석했지 영화 형식에 드러난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못했다. 함의된 이데올로기를 찾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어떻게’란 부분에 대해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단지 이 논문은 신화로서의 이데올로기가 영화 속에 어떻게 녹아있는지 개략적으로 서술하는 데 그쳤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좀더 깊이 있고 꼼꼼한 방법론으로 이데올로기 연구를 수행해야 한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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