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mpire, and Nation

문화, 제국,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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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is essay examines Edward Said’s Culture and Imperialism focusing on the concepts of ‘culture,’ ‘empire,’ and ‘nation’. The approach is critical, theoretical, and historical rather than explicatory. Consequently, the range of the essay is not limited to Said’s own explanation and argument about Western imperialism and its culture presented in the book. In doing this, this essay finally purposes to be a discursive resistance to the current global empire, the United States, via a critical reading of Said’s work. Said’s notion of culture is set upon to disclose the function of culture as an apparatus of ideological consent of the dominated to the dominant. When applied to imperial practice, Western culture functions to subject the colonized to the colonizer. Said’s geographical approach to imperialism complements the historical understanding of imperialism. Imperialism is not only the practice of Western-centered historicism but also the spatially mutual interaction between the West and the rest of the world. Along with European imperialism, Said poses the current global empire of the United States as his main target of criticism. Said’s problem is that he takes the United States as a nation-state. When examined, the United States is not a nation-state, but today’s empire. The empire in the appearance of the nation-state United States does not work for the interest of the American nation, that is, the American people. The empire is the transnational and postnational political and economic institution that works for the interest of global capital. In order to resist the current global empire, this essay suggests that the building or restoration of nation-states with its basic principle of people’s sovereignty is in need.


  • KEYWORD

    Edward Said , Raymond Williams , Antonio Gramsci , Michael Hardt , Antonio Negri , Culture and Imperialism , culture , empire , imperialism , nationalism , colonialism , nation , nation-state , capital

  • 많은 사람들이 현 시대를 민족과 국가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세계가 하나로 되어 가고 있는 지구촌 시대라 한다. 또한 상업적 대중 문학의 범람과 전자 매체의 출현으로 인한 인쇄 문화의 상대적 축소로 소위 진지한 문학이 위상을 잃어가고 있다는 말도 흔히 듣게 된다. 이런 시대에 문학으로 대표되는 서사 문화물에 작용하는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여러 양상을 다루는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의『문화와 제국주의』(Culture and Imperialism)를 논의하려는 이 글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현 시대는 세계화로 위장한 제국주의 또는 제국의 시대이며 문학 고유의, 특히 소설에 잘 나타나는, 서사성은 영화, 텔레비전 연속극, 텔레비전 광고등으로 어느 때보다도 더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문학의 영역은 종말을 맞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달리하여 더욱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현시대의 제국은 제국주의 시대라고 말해지던 19세기의 제국과는 다르다. 19세기의 제국이 자국의 패권을 확보하려는 침략적 민족주의의 구현으로서의 제국이었다면 현시대의 제국은 민족-국가의 경계를 초월하는 초민족 초국가적 자본의 지배를 확립하는 제국이기 때문이다. 현시대의 문학이나 문화 역시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의 문학이나 문화와는 다르다. 19세기의 문화가 특정 민족어를 매개로한 문학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면 현시대의 문화는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는 이미지를 매개로 한 영상문화가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19세기부터 본격화되어 20세기 중엽까지 계속된 된 제국주의 시대의 문학을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의 경쟁의 장으로 파악하고 있는 에드워드 사이드의『문화와 제국주의』의 중심 주제인 문화, 제국, 그리고 문화와 제국의 상관관계를 이론적으로 점검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빌 애쉬크라프트(Bill Ashcroft)와 팰 알우왈리아(Pal Ahluwalia)가 같이 쓴『에드워드 사이드—정체성의 역설』(Edward Said: the Paradox of Identity)이나 밸러더 케네디(Valedire Kennedy)가 쓴『에드워드 사이드—비평 입문』(Edward Said: A Critical Introduction)에서와 같이 사이드의『문화와 제국주의』에서 개진된 중요 논지를 사이드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해설하려 하지 않는다.1 이 글은『문화와 제국주의』전체를 아우르는 핵심 개념인‘문화’, ‘소설’, 그리고‘제국주의’ (또는 제국)를 이론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필자는 사이드의 논의를 일정 정도 전유하면서도 이를 비판하고 보강하면서 넘어서려는 시도를 하려 한다. 따라서 이 글은『오리엔탈리즘』을 시발로 탈식민 담론의 장을 연 사이드를 의식하면서 현재의 탈식민 담론의 장이 어떤 방향을 가질 수 있는 지를 논의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탈식민 담론이 과거의 식민주의나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시의성을 가지려면 현재의 제국의 양상에 대한 점검 역시 필요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필자는 이 글에서 사이드의 문제틀을 일정 정도 공유하지만 필자의 더 큰 관심은 사이드의 문제틀을 경유하여 현재의 제국을 비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의 본론은 이 저서의 핵심 개념인 문화와 제국 그리고 이 둘의 관계를 다루고 결론에서는 현재의 제국을 다룬다. 본론의 앞 부분에 논의할 문화의 개념이 사이드가 말하는 문화적 저항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라면 본론의 뒷부분에 있는 제국과 소설의 개념은 사이드가 이 저서에서 다루는 소설로서의 문화물이 어떻게 서구 제국주의의 건설에 이바지하였는지 또는 이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사이드의 이 저서에서 별 관심을 갖지 않는 민족(민족‘주의’가 아니다—사이드는 이 저서에서 긍정적인 민족주의와 부정적인 민족주의를 논의하지만 민족 자체를 논의하지는 않는다)의 개념을 중심으로 사이드의 소설을 통한 제국주의 읽기를 다시 읽는다. 이는 사이드가 이 저서에서 다루는 19세기 이래 현재까지의 세계 역사가 제국주의 시대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서구 제국주의는 서구 민족의 형성과 확대의 변형된 형태라는 필자의 판단 때문이다. 비서구 세계의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역시 비서구 세계의 민족의 형성과정이었음을 생각하면 민족의 개념은 사이드의 이 저서를 포함하여 19세기 이래 현재까지의 세계 체제나 역사를 논의할 때 필수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결론 부분에서는 필자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현재의 초민족적 초국가적 제국에 대한 저항은 역사적으로 완성된 적이 없는 민족국가가 그 원칙에 근거하여 복원하고 완성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1이 두 저서는 각각 한 장씩 할애해서『문화와 제국주의』에 나오는‘대위법적 읽기’ ‘지리’‘세속적 저항과 해방’등의 중요 개념이나 사이드가 다루는『맨스필드파크』『이방인』등의 문학작품이나 오페라「아이다」등을 선별해서 사이드의 입장에서 해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손꼽을만한 해설서이다. 사이드의『문화와 제국주의』의 주제를 각자의 방식으로 전유하여 문화와 제국주의의 문제를 다루는 책으로 피어슨(Pearson) 등이 편집한『제국주의의 문화적 독해: 에드워드 사이드 그리고 역사의 무게』(Cultural Readings of Imperialism: Edward Said and the Gravity of History)가 있다. 사이드의 작업을 중요 개념 중심으로 분석하는 저서로는 후세인(Hussein)의『에드워드 사이드: 비평과 사회』(Edward Said: Criticism and Society)가 있다. 이 저서는 사이드의 거의 모든 저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이드의 여러 논점을 발전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지적 전기라고 할 수 있다. 개념 중심으로 사이드의 작업을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논문의 논의 방식은 이 저서의 논의 방식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저서에서『문화와 제국주의』를 직접 거론할 때는 대위법 등에 치중되어 있으며 제국이나 문화, 또는 민족의 개념을 중심으로 논의하지는 않는다. 탈식민주의 이론에서 사이드 그리고 사이드의『문화와 제국주의』가 갖는 위상을 고려하면 이 저서를 특정해서  다루는 학술적 논의가 많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러하지 않다. 물론『문화와 제국주의』에대해 중요한 학술적 논의이지만‘Project Muse’‘ProQuest,’‘MLA International Bibliography’와 같은 대표적인 학술서나 학술논문 검색 엔진으로 검색되지 않는 논의가 있을 수는 있다. 한국에서 나온 학술논문으로 사이드의 이 저서를 특정해서 논의하는 글로는 사이드의『맨스필드 파크』읽기를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태혜숙의「사이드와 페미니즘의 정치」를 꼽을 수 있다. 그 외에『문화와 제국주의』의 번역자들(김성곤, 정정호, 박홍규)이 역자 해설이나 사이드와의 대담과 같은 방식으로『문화와 제국주의』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I. 지배의 문화와 저항의 문화

    사이드는 『문화와 제국주의』의 서론에서 자신이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을 출판한 이후 문화와 제국의 관계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고 진술한다. 『오리엔탈리즘』은 미셀 푸코(Michel Foucault)의 담론 이론, 안토니오그람시(Antonio Gramsci)의 헤게모니 이론,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의 도시와 시골의 이분법에 대한 논의에 근거하여2 서구제국주의가 동양과 서양이 인식론적 존재론적으로 다르다는 서구의 동양 담론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었다. 그러나『오리엔탈리즘』이 서구의 동양 담론을 이론적인 그리고 문헌학적 고증을 통한 분석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에 문학작품을 비롯한 구체적인 서구 문화가 제국주의적 실천과 어떻게 구체적으로 관련되는 지에 대한 논의는 충분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19세기 서양문학 전공자인 사이드로서는『오리엔탈리즘』에서 개진한 서구의 동양담론 분석 이론을 구체적인 문학 작품에 적용하는 시도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이드는『문화와 제국주의』가『오리엔탈리즘』의 후속 작업임을 이 저서가“근대의 식민모국인 서구와 그 서구의 해외 영토 사이의 좀 더 일반적인 관계의 유형을 서술하기 위하여『오리엔탈리즘』의 논점을 확장”(xi)한 것이라고 진술함으로써 이를 확인하고 있다.

    비서구 출신 서구의 지식인으로서 사이드가 2003년 작고할 때까지 지속하였던 작업은 서구 제국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이었다. 서구 제국주의 체제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저항은 서구 지배 체제에 대한 무장 투쟁일 것이다. 그러나 사이드는 문화적 저항(cultural resistance)을 무장 투쟁 못지않게 그리고 무장 투쟁과 병행해야할 저항이라고 진술한다(Culture and Imperialism xii). 『오리엔탈리즘』이나『문화와 제국주의』뿐 아니라『팔레스타인 문제』(The Question of Palestine), 『이슬람 다루기』(Covering Islam), 『박탈의 정치학』(The Politics of Dispossession),『 오슬로에서 이라크까지』(From Oslo to Iraq) 등 수많은 저작을 내면서 과거와 현재의 제국주의 문제를 논의하고 있던 사이드의 지적 문화적 작업은 그가 말하는 문화적 저항(cultural resistance)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문화와 제국주의』는 이런 문화적 저항의 이론이면서 19세기와 20세기의 서구문화와 그에 대응하는 비서구 문화에서 찾을 수 있는 문화적 지배와 저항의 실천을 분석하는 작업이다. 사이드는 제국주의의 문화적 지배와 이에 대응하는 저항을 논의하기 위하여 문화의 개념을『문화와 제국주의』의 앞부분에서 먼저 제시한다.

    사이드가 생각하는 첫 번째 문화의 개념은 기록으로서의 문화이다.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여기에서 사이드가 규정하는 첫째 의미의 문화는 현실 자체와는 구분되는 현실의 기록이나 표상으로서의 문화이다. 언어가 없다면 현실 자체가 인식될 수 없다는 인식론의 기본을 일단 접어서 생각하더라도 경제, 사회, 정치 현상을 포함하여 어떤 사건이나 상황은 언어와 같은 매체를 통하여 전달된다. 매체의 개입은 실제 발생한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해 수용자가 인지하는 사건 사이에 차이가 생기게 한다. 상대적으로 그 차이가 적은 것이 사실 그대로를 기술한다는 기록이고 그 차이가 큰 것이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이드가 말하는 문화는 예술작품 뿐만 아니라 기록도 포함한다. 따라서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문화가 기록인 경우는 언어나 이미지 등의 매개를 통하여 전달되는 기록 이전의 현실 자체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되며 그 문화가 예술 작품인 경우는 그 예술품이 원재료인 현실이 어떻게 그리고 왜 특정의 예술적 형태로 변화되는 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된다. 이 두 경우 기록자나 예술가는 의미를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지며 독해자로서의 의미 수신자는 의미를 전달 받는다. 그러나 전달 매체의 개입은 발신자가 전하려는 의미가 수신자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문화 수신자가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기록이나 예술작품에 들어있는 발신 의미 자체를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발신자가 전한다고 가정하는 의미를 수신자가 재구성한다는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문화물을 통하여 전달되는 의미는 발신자가 전하는 의미가 아니라 발신자가 생산한 기록물이나 예술품을 매개로 수신자 자신의 인식틀에 근거하여 새로이 구성하는 수신자의 의미이다.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문화 독해자가 소극적으로든 적극적으로든 문화물에 개입하여 의미를 생산하는 행위가 된다. 이렇게 생산된 의미는 의미화 과정의 출발인 현실 자체로 다시 회귀된다. 문화 분석을 통하여 현실자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독해자의 입장이 드러나는 것이다.문화 발신자가 전하려는 의미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신자는 발신자와 유사한 입장에 있게 되며 문화 발신자가 전하는 의미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하여 다른 의미를 구성하는 수신자는 발신자와 다르거나 도전하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사이드가 서구 문화를 수용하는 방식은 후자의 방식, 즉 서구 지배 문화에 대해 저항적 독해를 함으로써 수용자의 문화를 재구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있다.

    사이드는 문화의 두 번째 의미로 정제된 인간 정신을 제시한다. 사이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사이드가 말하는 두 번째 의미의 문화는 지고지선의 정신을 뜻한다.3 산업화가 진행되던 19세기 중엽 이후에 있었던 영국 사회의 정신 상태를 진단하면서 아널드는 전통적 귀족 계급의 야만성, 중산계급의 속물성, 그리고 노동계급의 우중성이 영국 사회를 정신적 사회적 혼란 상태에 빠뜨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물질만능주의에 근거한 계급적 정파성을 초월하는 최고의 정신 상태로의 문화 즉 교양만이 이 혼란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고 설파한다. 아널드에 의하면 정신적 지고지선을 뜻하는 문화 즉 교양은 중산 계급의 가치에서 유래하지만 중산 계급의 물질적 속물성을 극복한 보편적 가치이다. 이러한 가치가 전 사회에 파급되었을 때 질서 있는 사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널드의 문화 또는 교양 개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고지선의 정신적 가치는 사실상 그러한 가치를 이룩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갖추지 못한, 말하자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가는 하층민들에게는 기본적으로 불가능한 이상이다. 따라서 아널드가 말하는 지고지선의 문화는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특수집단의 가치이다. 즉 정신 활동을 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갖추고 있으면서 동시에 중산 계급의 일상적 속물성에서도 벗어나고 귀족 계급의 야만적 나태함에서도 벗어나서 정신적 교양을 추구하는 문화 엘리트 계급의 가치가 아널드가 말하는 지고지선의 문화가 된다. 결국 사이드가 해석하는 아널드의 문화는 노동계급과 귀족계급의 가치에 공세적 입장을 취하는 중산계급의 가치이며 이 중산계급의 지배적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정치적 시도인 것이다. 이렇게 특수 집단의 가치가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널드가 말하는 교양으로서의 문화이며 이러한 아널드의 문화의 개념을 사이드는 정치적으로 해석하여 지배 집단의 가치 또는 정체성을 문화의 두 번째 의미로 제시하고 있다.

    사이드가 말하는 두 번째 문화의 의미를 그가 말하는 첫 번째의 문화의 의미와 함께, 즉 인간 활동의 기록으로서의 문화와 지고지선의 정신적 상태로서의 문화를 통일시켜 다시 진술해보면, 사이드가 말하는 문화는 지고지선의 정신 상태를 기록한 것이 된다. 이러한 지고지선의 정신 상태를 기록한 것이 문화물이며 이러한 문화물을 읽거나 이해한다는 것은 그러한 지고지선의 정신 상태의 작용 방식을 드러내 밝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이드가『문화와 제국주의』에서 행하는 작업은 보편성으로 위장하지만 특수한 집단의 가치를 대변하는 이러한 지고지선의 정신 상태로서의 문화가 타 집단을 어떻게 지배하고 억압하는 가를 분석하는 일이다.4

    문화의 억압적 작용을 살피기 위해서 우리는 사이드의 문화론이 의지하고 있는 윌리엄스의 문화론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사이드 스스로가 자신의 문화론을 개진하면서 윌리엄스의 문화론을 원용할 뿐 아니라 1993년에 출판된『문화와 제국주의』의 이면에는 1950년대 이후 윌리엄스를 비롯하여 리처드 호가트 (Richard Hoggart), E. P. 톰슨(E.P. Thompson) 등이 주도한 고급문화에 대한 비판적 학문으로서의 문화연구(cultural studies)의 흐름이 있기 때문이다.

    『장구한 혁명』(The Long Revolution)에서 윌리엄스는 문화 분석을 위하여 문화의 세 가지 의미 층위를 설정한다. 그가 말하는 문화의 첫 번째 범주는 인간의 완성상태 또는 그러한 완성상태를 지향하는‘이상’(ideal)이다(57). 이 경우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러한 인간의 완성상태를 이루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윌리엄스가 말하는 문화의 두 번째 범주는 인간행위의 기록물로서의 문화이다(57). 문학비평이나 문화비평 작업이 일반적으로 다루는 대상이 이러한 두 번째 범주의 문화이다. 윌리엄스가 말하는 첫 번째 범주와 두 번째 범주의 문화는 직접적으로 사이드가 정의하는 문화의 개념과 일치한다. 윌리엄스가 말하는 세 번째 범주의 문화는 문화를 사회적 관계로서 이해하는 것으로서 특정 삶의 방식으로서의 문화이다(57). 세 번째 범주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기록물로서의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을 이해하는 것일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제도를 이해하는 것 역시 포함한다. 사이드는 윌리엄스의 세 번째 범주의 문화를 문화의 정의에서는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사실상『문화와 제국주의』를 관통하여 윌리엄스가 말하는 이 세 번째 범주의 문화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이드는 결국 기록물로서의 문화물을 다루면서 그러한 기록물이 지고지선의 정신적 가치를 담고 있다고 전제하는 사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이드의『문화와 제국주의』에서 다루는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윌리엄스가 말하는 이 세 번째 범주의 문화 개념에 특히 주목하여야 한다.

    문화가 개인이나 집단의 모든 기록물을 의미하거나 그러한 개인이나 집단의 모든 정신적 가치 그리고 그들의 모든 행위를 의미한다면 문화는 가치중립적이고 보편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문화라고 규정되는 물적 정신적 대상은 모든 인간의 모든 행위가 아니다. 모든 인간의 행위가 기록되지도 않고 또 기록된 모든 행위가 문화로서의 위상을 획득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위가 기록되어 문화물로 존재하거나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사회적 행위가 그 개인이나 집단의 문화로 규정된다는 것은 일정한 선택의 결과이다. 윌리엄스가『장구한 혁명』에서 현재 우리가 인지하는 1840년대 영문학이 계속되는 선택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진다는 설명을 되새겨보면 문화의 규정은 일정한 선택의 기준을 작동시키는 행위이며 그러한 행위의 결과가 문화임을 알 수 있다. 윌리엄스는 이러한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정서의 구조’(the structure of feeling)라고 부른다.

    정서의 구조란 특정 시기와 장소에 있는 사람들이 사회와 문화의 가치를 설정하는 유형을 말한다(66). 문화물에 대해 정서의 구조가 작동하여 그 대상 문화물 중 일부만이 선택될 때 그 선택된 문화물은 해당 시기와 장소에서 보편성이나 필연성을 획득하여 이상적 문화로 자리매김 된다. 그러나 이 선택의 과정에 모든 문화행위자가 참여하지는 않는다. 문화물이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이라면 문학비평가나 예술비평가가 그 선택의 과정을 주도하며 시대사조나 사상사라면 철학자나 사상가가 주도한다. 이런 선택을 주도하는 비평가나 사상가는 해당 사회의 정치 경제적 지배집단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해당 사회의 지배적 가치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그 선택의 과정을 주도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헤게모니 개념이 문화의 형성에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람시에 의하면 지배계급은 그들의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한편으로는 직접적인 폭력을 사용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피지배계급의 동의를 얻는다. 그람시는 폭력보다는 피지배계급의 지배계급에 대한 자발적인 동의가 지배체제 구축에 더 효과적이라고 하며 이 자발적인 동의를 헤게모니라고 명명한다(Prison Notebooks 12-13). 헤게모니를 구성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가치이며 이는 교육이나 문화 행위를 통하여 구축된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윌리엄스의 문화론을 경유한 사이드의 문화의 개념에 다시 적용하면 왜 인간 행위의 기록으로서의 문화가 이상으로서의 문화로 전환되는 지를 규명할 수 있다. 그람시의 이론으로 아널드와 윌리엄스의 문화의개념을 다시 규정하면 문화는 모든 인간행위의 기록이 아니라 헤게모니의 작용을 거쳐 선택된 해당 집단의 정신적 사회적 행위의 기록이다. 매슈 아널드의 문화(교양)가 지고지선의 인간 사고의 기록이라고 규정되는 것은 그러한 이상적 정신 상태를 내세우지 못하는 인간 집단은 덜 완성된 인간 집단이며 그러한 이상적 정신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사이드가『문화와 제국주의』에서 다루는 문화가 서구 제국주의를 주도하는 집단의 문화라는 것을 그람시가 말한 방식으로 다시 진술하면 서구 제국주의 집단의 문화는 이상적 문화라고 설정한 서구 사회 지배 집단의 문화이며 그 문화가 담지하고 있는 가치에 피식민 집단의 자발적인 동의가 이루어지도록 서구 문화를 작동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화의 분석이란 그런 헤게모니의 작용을 밝히는 것이다.『문화와 제국주의』에서 사이드가 하는 작업은 서구의 대표적인 문학 작품을 분석함으로써 비서구인을 제국주의의 지배 체제에 종속시키려는 과정을 드러내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피식민 집단의 문화를 분석할 때에는 비서구 피식민 집단이 서구 문화의 헤게모니에 맞서 저항하는 과정을 규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화에 대한 일반론을『문화와 제국주의』의 서론에서 제시하고 있다면 이 책의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하는 본론에서 사이드는 서구 제국주의의 문화와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았던 제3세계의 문화를 분석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사이드가 분석 대상으로 삼는 문화는 그가 문화를 정의할 때 진술하였던 심미적 기록 뿐아니라 다양한 지식 체계 더 나아가 대중들의 속설까지도 포함하는 문화는 아니다. 그는 주로 문학 작품을, 문학 작품 중에서도 정전으로 인정되는 고급 문학작품을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이드의 문화 분석이 문학 작품 자체의 속성을 분석하는 자세히 읽기를 옹호하는 신비평적 문학 비평은 아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분석 작업에서 텍스트 자체의 숨겨진 의미를 읽어 내려는 세밀한 독해와 더불어 그는 거의 백과사전과 같은 방대한 지식을 동원하면서 거시적 안목으로 문학 작품을 읽고 있기도 하다. ‘창조적 상상력,’‘작가의 비전,’ 또는‘당시의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와 같은 말로 흔히 나타나는 그의 정전 작가나 그런 작품에 대한 신뢰는 그가 마르크스주의의 사회 분석론이나 탈구조주의의 이론을 끌어 올 때의 이런 이론들에 내재된 반휴머니즘적 속성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심지어는 고급문화와는 거리가 먼 지식 담론이나 정치 영역에서도 사이드는 줄곧 통합적 비전을 주는 보편적 휴머니즘을 현재에 취하여야 할 대안적 입장으로 제시한다. 사이드의 문학성이나 예술성에 기반을 둔 휴머니즘에 대한 신뢰를 러더커리슈난(Radhakrishnan)은 사이드의‘문학적 휴머니즘’(literary humanism)이라고 평가한 바도 있다.

    따라서 사이드는 제국주의 시대에 쓰인 서구 문학에 대해 거의 항상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다. 문학작품을 통해서 서구 제국주의의 비서구 세계에 대한 지배구조를 밝히는 사회 역사적 분석을 시도할 때는 서구의 정전 문학이 비서구 세계를 열등한 타자로 설정함으로써 그리고 그런 비서구 세계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지배함으로써 비서구 세계가 서구 제국주의 체제의 물적 정신적 토대가 되고 있음을 밝힌다. 문학 또는 문화의 이론가나 비평가로서의 사이드가 수행하는 서구 체제에 대한 문화적 저항이 잘 드러나는 부분은 서구의 정전 문학 작품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서구의 가치를 옹호하고 서구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명제를 서구 문학 작품의 이면을 깊이 있게 읽음으로써 드러낼 때이다. 그러나 사이드가 그런 서구 문학 작품을 쓴 작가의 태도에 대해 진술할 때는 작가가 제국주의 체제에 대한 단순한 동조자가 아님을, 작가의 혜안으로, 비록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제국주의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런 문제점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한다. 예를들어『문화와 제국주의』의 한 장인「『어둠의 속』에 있는 두 개의 비전」“( Two Visions in Heart of Darkness”)에서 사이드는 콘래드가 이 소설에서 우월한 서구인의 시각으로 아프리카인의 야만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소설이 갖는 순환적 서사 구조는 독자들에게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경영의 문제점을 성찰하도록 유도한다고 주장한다. 서구의 작가가 어떻게 당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인 제국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에 대한 근본적 성찰 없이(그는 작가의 창조적 상상력이나 작가 개인의 독특한 경험 등을 언급하지만 이런 상상력이나 경험이 사회의 지배적 가치에서 어떻게 벗어나게 해 주는 지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은 현재의 지식체계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서구 정전 문학 작품이나 작가의 위대함을 말하는 것은 사이드가 말하는 문화적 저항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사이드의 서구의 정전 문학에 대한 신뢰는 그가 수행한다고 주장하는 문화적 저항이 약화되거나 근본에서부터 흔들릴 위험이 있다.

    사이드가 식민 체제의 지배를 받았던 제3세계의 문화를 논의할 때 그는 제3세계가 그리고 그 문화가 이미 제국주의의 지배의 결과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식민 지배가 시작되기 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 원주민의 고유한 삶의 방식은 이미 제국주의에 의해 없어졌거나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제3세계의 문화적 저항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첫째는 제국주의 지배 이전에는 비서구 세계가 그들 나름대로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가진 집단이었기에 서구 제국과는 다른 정체성을 갖는 민족으로 복원하는것이다. 그는 제3세계 민족의 복원에서 언어가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며 그런 언어를 통한 구체적인 문화 실천행위로서 시, 소설 등의 문학을 비롯하여 노예의 체험담, 자서전, 옥중 회고록 등을 망라한다. 이런 민족 언어로 수행되는 문화행위는 제3세계 민족 구성원 간의 연대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제국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에 대하여 대안의 역사를 제시하는 것이다. 제국주의 문화에 대한‘되받아 쓰기’‘( writing back’)라고 일컬어지는 이 대안의 글쓰기는 제국주의의 서사가 갖는 권위에 대한 교란과 전복임과 동시에 제3세계 출신 작가들이 제국의 중심에 개입해서 새로운 역사와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을 뜻한다. 셋째는 배타적인 자기 집단 중심의 민족주의에 벗어나서 인류 공동체와 인간의 해방을 위한 통합의 안목을 갖추는 것이다. 사이드는 제3세계의 민족주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서구 민족주의 이론가들의 견해를 반박하며 해방 운동으로서의 제3세계 민족주의는 제3세계 집단의 가치를 옹호하면서도 동시에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옹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제3세계의 민족주의는 서구에서 유입된 민족주의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인류의 역사가 항상 교류의 역사였듯이 서구의 가치인 민족주의도 제3세계에 유용하며 마찬가지로 제3세계의 민족주의 가치도 서구인을 포함한 인류의 보편적 해방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215-19). 사이드는 이렇게 세 가지 방식으로 제3세계의 문화적 저항의 양상을 설명하면서도 식민주의나 제국주의를 벗어나는 과정은 상이한 역사, 지형, 문화 현상들이 겹쳐지고 엉켜있는 복잡한 과정임을 지적한다.

    사이드는 저항의 문화가 식민 역사에서 출발하지만 궁극적으로 보편적 인간 해방을 목적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사이드가 저항의 문화를 통하여 말하려 하는 것은 근대 이후의 세계 역사가 서구 식민주의 내지 제국주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면 저항의 문화에 의해 주도될 앞으로서의 역사는 제3세계가 주도하는 역사가 된다는 것이다. 사이드의 이러한 주장은 제국주의 체제로 인해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이라면 환호를 보낼 수도 있는 진술이다. 사이드는 앞으로 나타날 역사에서는 주인과 종의 위치가 바뀌며 과거의 종이 주도하는 역사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이바지하는 역사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을 사이드 자신에게 적용한다면 사이드의 주장은 일정한 정도 설득력이 있다.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피식민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사이드가 서구 체제 내에서 행하고 있었던 지적 문화적 정치적 작업은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되받아 쓰기이면서 동시에 팔레스타인이나 미국인만이 아닌 모든 인류에게 인간적 가치를 가져올 휴머니즘을 설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향력 있는 학자, 비평가, 지식인이었던 사이드의 위상을 생각하면 사이드가 말하는 저항의 문화가 사이드와 유사한 수많은 지식인들에 의해 수행된다면 앞으로의 세계는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이드가 말하는 저항의 문화가 과거 제국주의의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이 주도하는 저항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물론 사이드는 노예, 수감자, 계약 노동자 등 이름 없는 사람들 즉 제국주의 체제에서 가장 억압받았던 사람들을 언급하기는 한다. 그러나 사이드는 문자로서의 기록을 남기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기록을 남기더라도 고전 문학의 반열에 들어가지 못하는 기록물을 남긴 사람들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지나가는 정도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가 관심을 갖고 조명하는 저항의 문화는 예이츠(W. B. Yeats), 조이스(James Joyce), 은구기(Ngugi Wa Thiongo), 루쉬디(Salman Rushdie) 등 서구 문학 세계에서도 고전적 작가의 반열에 들어가는 작가들의 문학작품을통하여 읽을 수 있는 문화적 저항이다. 이런 작가들의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제국의 되받아 쓰기나 대안적 역사나 사회의 중요성을 폄하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작가들의 작품이 제3세계의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삶의 방식이나 가치를 재현하고 있는 지는 의심스럽다. 조이스나 루쉬디의 읽기 어려운 소설을 제3세계의 보통 사람들, 더구나 경제적 문화적 요인으로 정상적인 교육조차 받지 못하는 보통 이하의 사람들이 읽고 그 작품이 재현하는 제3세계적 가치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말하자면 사이드가 말하는 저항의 문화란 상당한 정도 서구식 고급 교육을 받고 서구식 고급문화의 소양을 갖고 있는 문화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저항의 문화이지 일상에서 일어나고 일어나야하는 문화적 저항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비서구 세계에 속하면서 일상의 삶으로든 담론으로든 더 나아가 거시적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 체제의 면에서든 서구 제국주의가 종식되었다는 경험을 하기 어려운, 종식되기는커녕 사실은 새로운 방식으로 더욱 정교한 서구 제국의 질서가 구축되고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는 사람이라면 사이드가 말하는 문화적 저항은 서구 체제 내부의 제3세계 출신 엘리트 지식인들의 문제이지 우리의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2『오리엔탈리즘』이 푸코의 담론이론과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고 사이드 역시 이 저서에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오리엔탈리즘』이 분석대상으로 삼고 있는 동양과 서양의 차이 담론이 1973년에 발행된 윌리엄스의『시골과 도시』(The Country and the City)에서 개진된 근대화 과정에 있던 영국의 도시 문제가 이상적 전원으로 재현되는 시골 담론에 의해 상상적으로 해소된다는 윌리엄스의 논의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3사이드가 말하는 두 번 째 의미의 문화, 즉 지고지선의 정신으로서의 문화는 글을 깨우친다는 뜻인 문화(文化)보다는 정신의 성숙을 뜻하는 교양(敎養)에 가까울 것이다. 레이먼드 윌리엄스의『문화와 사회 용어사전』(Keywords: A Vocabulary of Culture and Society)에 따르면 culture란 말은 원래 농경에서 사용되던 말로서 재배나 배양을 뜻했지만 16세기 이후 사람에게도 적용되기 시작하여 정신 상태가 좋은 사람을 키워내는 뜻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뜻이 음악이나 미술품과 같이 구체적인 대상에 적용될 때는 정신을 고양시키는 사물이란 뜻으로서의 문화가 된다. 따라서‘culture’에 해당하는 한국어 선택은 문화와 교양(재배나 배양이란 말까지 포함하여) 중 맥락에 따라 적절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용어의 통일을 위하여 문화란 말을 주로 쓰겠다.  4필자의 이런 진술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사이드는 이와 같은 단정적 진술을 별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이드는『문화와 제국주의』에서 작가들이 당대의 사회와 역사에 의해 형성되고 또 이를 형성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이데올로기나 계급 등에 의해 도식적으로 결정되지는 않으며 창조적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는 진술도 동시에 덧붙인다(xii). 『문화와 제국주의』를 포함하여 사이드의 저서를 읽을 때 나타나는 어려움은 사이드가 논지의 일관성을 유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문학을 논의하는 경우에는 작가에 대한 신뢰와 비판이 거의 항상 공존한다. 이는 사이드가 프랑스의 현대 이론이 본격적으로 미국에 도입되지 않은 1960대 이전에 학부와 대학원  교육을 받으면서 전통적 휴머니즘에 기반을 둔 문학관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있다. 프랑스 현대 이론의 영향을 받고 집필한『시작: 의도와 방법』(Beginnings:Intention and Method)(1974), 『오리엔탈리즘』, 『세계, 텍스트, 그리고 비평가』(The World,the Text, and the Critic) 등의 이론서에는 그 이론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현대 이론과 양립할 수 없는 경험주의적 문학론이나 휴머니즘이 공존한다. 예를들어『오리엔탈리즘』의 이론틀은 푸코의 담론 이론이 지배적으로 작용하지만 이 저서의 결론은 휴머니즘을 배격하는 푸코의 뜻과는 어긋나게 보편적 휴머니즘을 주장한다. 사이드의 문학과 휴머니즘에 대한 신뢰는 좋게 보면 사이드의 유연성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볼 수도 있으나 나쁘게 보면 이론적 치밀함이나 일관성이 부족함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사이드는 말년에 이르러서는 프랑스의 이론에서 거의 벗어나서 노골 적으로 휴머니즘을 옹호한다. 유고작이 되어 버린『휴머니즘과 민주적 비평』(Humanism and Democratic Criticism)(2004)에서 사이드는 새로운 휴머니즘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이 저서에는 이론으로 통칭되는 탈구조주의적 사고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백과사전과 같은 다양한 지식을 내세우면서 글을 쓰는 그의 스타일 역시 하나의 글에 일관성 있는 하나의 논지를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불편함을 준다.

    II. 제국과 제국주의

    사이드의 저서『문화와 제국주의』의 제목에 있는 핵심 개념어인‘문화’가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보편적 이상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구의 문화 헤게모니를 뜻한다면 또 다른 핵심 개념어인‘제국주의’는 직접적으로 비서구 세계에 대한 서구의 침략과 지배를 드러내는 말이다. 사이드가 이 저서의 제목으로‘문화와 제국주의’를 내세우기에 이 저서의 독자는‘문화’의 개념에 대한 규정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고 또 사이드는 이런 기대를 어느 정도는 충족시킨다. 마찬가지로 독자는‘제국주의’의 개념에 대해서도 사이드의 설명을 기대하게 되지만 이 개념에 대한 설명은 없다. 사이드는 제국주의를 논의했던 카우츠키(Kautsky), 힐퍼딩(Hilferding), 룩셈부르크(Luxemburg), 홉슨(Hobson) 등 여러 이론가들의 이름을 언급하지만 이들이 제국주의에 대해 어떤 논의를 했고 자신이 어떤 논점을 수용하는지를 밝히지도 않고 있다. 물론 사이드는 제국주의에 대한 사전적 의미라고 할 수 있는“다른 사람들이 살았고 그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먼 지역의 영토에 대해 사고하고 정착하고 통제하는 행위”(7)를 제국주의라고 정의하고는 있다. 또한 사이드는 기존의 제국주의 이론과는 달리 자신은 제국주의를 지리학(geography)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제국주의에 대한 이러한 기본 개념에 근거하여 제국주의를 바로 지리학으로 전이시키는 논의로는 세계의 근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는 서구 제국주의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사이드는 제국주의 자체를 논의하는 대신 자신의 작업이 기존의 제국주의 논의가 관심을 갖지 않았던“근대 제국주의의 실현에서 있었던 문화의 특권적 역할”(5)을 조명하는 데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사이드의 말대로 제국주의 실현에서의 문화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제국주의 자체에 대한 역사적 이데올로기적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문화와 제국주의의 관계를 모색하기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사이드가 말하는 제국주의에서의 문화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국주의와 이에 관련되는 개념인 식민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에 대한 개괄이 우선 필요하다.

    제국주의(imperialism)의 사전적 정의는‘이주, 군사력 또는 그 외의 수단으로 한 나라의 권력과 영향력을 확대하는 정책’(Oxford English Dictionary)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역사적 현실의 관점에서는 식민주의(colonialism)나 민족주의(nationalism)와 구별되지 않는다. 식민주의 역시 무력으로 다른 지역을 점령하는 행위이며 민족주의 역시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다른 민족을 침략하기 때문이다. 사이드가『문화와 제국주의』에서 분석대상으로 삼고 있는 문화가 주로 19세기에서 20세기 초기에 이르는 서구의 문화임을 염두에 두면 사이드가 이 저서에서 말하는 제국주의는 이 시기의 서구 제국주의를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전반기의 서구 제국주의와 19세기 후반기 내지 20세기 초기의 서구 제국주의는 제국주의라는 같은 용어를 쓰더라도 그 양상은 다르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서구 제국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구 민족주의의 전개 양상을 같이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사이드가 이 저서에서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맨스필드퍄크』(Mansfield Park)에 나타난 19세기 초기의 제국주의와 조셉 콘래드(Josheph Conrad)의『어둠의 속』(Heart of Darkness)에서 나타나는 19세기 말의 서구 제국주의는 공통점이 있는 것 역시 사실이지만 세계사적 관점으로 볼 때는 분명히 구별된다.

    영어로 imperialism(제국주의)은 empire(제국)의 형용사형‘imperial’에 원칙이나 이에 근거한 실천을 뜻하는 ?ism이 덧붙여 만들어진 말이다. 또한 empire(제국)는‘지배’, ‘명령’을 뜻하는 라틴어 imperium에서 온 말이기도 하다. 제국의 지배자인 황제를 뜻하는 영어의 emperor의 라틴어는 imperator이며 이는 명령을 내리는 자 즉 지배자를 뜻한다. 제국의 원형인 로마제국(the Roman Empire)에서는 제국의 지배자를 황제(emperor)라고 불렀다, 그러나 로마제국과 그 로마제국을 계승했다는 신성로마제국의 몰락 이후 지배자를 황제라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군주(monarch)나 왕(king)이 지배하는 왕국(kingdom)이 서구 세계의 일반적인 정치 체제였기 때문이다. 로마제국 이후 가장 큰 지배 영역을 구축한 영국의 경우도 17세기부터 대영제국(the British Empire)이란 말을 쓰기는 하였지만 이 체제의 지배자를 황제(emperor 또는 empress)라고 칭한 것은 영국의 가장 큰 식민지인 인도를 영국정부가 공식적으로 지배한 지 20여년이 지난 1877년인 19세기 후반부터이다. 반면 영국보다 먼저 식민지를 개척하고 있던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서는 제국을 구축하고 이를 경영하고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제국과 제국주의라는 말이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은 그 이전의 식민지 개척이나 지배는 제국을 경영한다는 의식이 없이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이와 같이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라는 말은 대개 혼용되고 있지만 서구 제국주의의 역사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구분되어야 한다.

    14세기 중엽 이후 신항로의 개척과 더불어 시작된 서구의 비서구 지배 역사는 크게 보아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와 그 이전의 식민주의 시대로 구분될 수 있다. 19세기 중엽 서구 유럽 국가인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이 세계 곳곳에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기 시작하기 이전의 유럽의 식민지 지배와 경영은 특정 국가나 민족에 의하여 분화된 형태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이탈리아 출신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포르투갈 왕, 잉글랜드 왕, 그리고 스페인의 왕에게 신항로 개척을 위한 지원을 구하였고 그가 결국 스페인 왕의 지원을 받고 신항로를 개척한 결과 아메리카 대륙을 스페인이 지배하는 세계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15세기경에는 포르투갈, 영국, 스페인 등이 민족국가(nation-states)로서 구별되는 체제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유럽은 기독교 세계로서 하나의 보편적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18세기 초기에 쓰인 디포(Daniel Defoe)의『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와 19세기 말에 쓰인『어둠의 속』에 나타나는 여러 나라  사람들에 대한 묘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로빈슨 크루소』에서 영국인 로빈슨 크루소가 브라질로 가는 항해 도중 배가 난파되었을 때 그를 구해준 사람은 포르투갈인이다. 『로빈슨 크루소』에는 여러 유럽 지역 출신의 사람들이 언급되고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지만 이들 모두는 유럽인 즉 백인이라는 의식을 공유하며 서로 도움을 준다. 이들과 차별화되는 사람은 흑인인 프라이데이(Friday)다. 그러나『어둠의 속』에서 영국인 말로우(Marlowe)가 벨기에의 식민지 콩고에서 만나는 유럽인들은 서로에게 적대적이다. 말로우는 프랑스 군함의 함포 사  격을 미친 짓이라고, 덴마크 출신 선장이 원주민에게 난동을 부린 것을 절제력의 부족으로, 커츠(Kurtz)의 추종자인 러시아 출신 젊은이를 바보라고 폄하한다. 이는 초기 식민지 개척 시대부터 18세기까지의 유럽인의 정서와 그 이후의 유럽인의 정서 사이에는 큰 변화가 있음을 보여준다.

    서구의 비서구 세계 지배 역사에 대한 무수한 연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논의는 15세기 이후 현재까지의 식민 지배의 역사에서 19세기에 특징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식민 지배의 변화 양상을 주목하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저서『187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 기획, 미신, 실체』(Nations and Nationalism Since 1780: ,Programme, Myth, Reality)에서는 유럽에서의 민족주의의 발흥과 이 서구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나타난 비서구세계의 민족주의의 형성을 다루고 있지만 서구의 민족주의가 제국주의체제로 변하는 양상을 주목하지는 않는다. 그의 또 다른 저서『제국의 시대: 1875~1914』(The Age of Empire: 1875~1914)에서 역시 서구 제국의 형성과 민족주의의 발전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주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서구 체제 내의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관계에 대한 주목할 만한 논의는 제국주의의 극성기인 1902년에 발행된 존 홉슨(John A. Hobson)의『제국주의 연구』(Imperialism: A Study)에 실린「민족주의와 제국주의」“( Nationalism and Imperialism”)라는 글이다.

    홉슨은 19세기 유럽의 정치, 사회, 문화의 변화 양상을 논의하면서 제국(empire)과 민족주의(nationalism), 그리고 제국주의(imperialism)를 구분한다. 그는 고대의 로마제국 시대부터 그 로마제국을 계승한다고 주장했던 신성로마 제국이 명목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던 18세기말까지의 유럽 세계는 국가연합체의 성격을 갖는 정치 체제였으며 이때 유럽인들은 각 지역의 고유한 지역성이나 민족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편적 인간성에 근거하여 모든 유럽인은 하나라는 정서를 가지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는 보편 세계로서의 유럽이 1789년의 프랑  스 혁명에 의해 해체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10). 프랑스 혁명에 의해 최초로 민족국가를 수립한 프랑스는 프랑스인들에게만 고유하게 특화된 국가체제를 갖게 되었고 이 모델을 다른 유럽 국가들이 모방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을 통하여 민족국가 형성의 흐름을 촉발한 프랑스를 선두로 유럽의 각 지역에서는 국가체제가 왕권국가에서 해당지역의 민족이 주체가 되는 민족국가로 변화된다. 민족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민족(nation)은 특정 지역에서 고유한 언어, 문화, 역사 등을 공유하는 인민 집단이라는 개념이기에 그 해당 지역 밖에는 다른 민족이 존재함을 전제한다. 따라서 민족은 원칙적으로 복수의 속성을 갖게 되며 그러한 민족이 주체가 되어 이룩한 민족국가 역시 다른 민족국가를 전제하기 때문에 민족국가라는 국가 체제는 기본적으로 복수와 공존의 속성을 갖는다.5 그러나 이러한 민족국가의 원리는 역사 현실에서 곧 왜곡되기 시작한다. 민족국가의 형성과 운영의 주도자들은 해당 지역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언어, 문화, 인종 집단에 대하여 이러한 다양성을 민족국가의 기치 아래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시키기 위하여 표준화된 민족적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민족적 가치를 고양시키는 실천으로서의 민족주의는 다른 민족 그리고 민족국가와의 평등과 공존을 강조하지 않고 다른 민족에 대하여 자기 민족의 우월적 가치를 강조한다. 자신들의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고 그  민족적 가치의 우월성에 근거하여 그 민족적 가치의 이상적 보편성을 주장하면 그 민족은 다른 민족을 정복하여 자신들의 민족으로 개편하거나 그 민족을 지배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민족이 자신들의 민족적 가치가 다른 민족의 가치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더 이상 복수로 존재해야 하는 원칙으로서의 민족국가의 원칙에 어긋난다. 그러나 19세기의 서구는 민족국가의 기본 원칙을 벗어난 민족주의, 즉 팽창적, 패권적 민족주의가 지배하던 시대이다. 이때 민족국가는 더 이상 민족국가가 아니라 제국이 된다. 19세기말의 민족주의의 시대가 곧 홉스봄의 저서 제목이 말해주는‘제국의 시대’가 되어 버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제국의 시대는 곧 제국의 가치를 실천하고 있다는 점에서 침략적 제국주의의 시대이기도 하다. 19세기말의 여러 유럽국가는 과거의 이름이었던 왕국과는 달리 대영제국(the British Empire)이나 독일 제국(Deutsches Kaiserreich), 프랑스 제국(당시 프랑스는 국가 이름을 ‘제국’으로 변화시키지는 않았지만 통상적으로는 프랑스 제국이라고 불리었다)으로 변한다. 19세기말 20세기 초의 당시의 현실로는 유럽 내부에서 다른 민족  국가를 침략하여 영토를 확장하거나 지배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그러한 민족국가에 근거하지만 제국주의를 실천하고 있던 국가들의 경쟁은 유럽 외부에서 식민지를 더 크게 확보하려는 식민지 쟁탈전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사이드가『문화와 제국주의』에서 다루는 19세기의 제국주의와 그 시대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침략적 민족주의로서의 서구 제국주의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제국주의를 서구 체제의 역사적 변화로만 이해하는 것은 타 민족에 대한 침략과 지배로서의 제국주의 구조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사이드가 개진하는 논의로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제국주의를 공간적 구조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논의를 위하여 그람시가「남부 문제의 몇 가지 양상」“( Some Aspects of the Southern Question”)에서 이탈리아의 남부 문제를 논의했던 틀을 가져온다. 그람시는 이 글에서 하나의 민족국가인 이탈리아 내부의 남북문제를 분석하면서 북부의 부르주아지가 낙후  된 농업지역인 남부를 산업화된 북부에 종속시키기 위하여 남부의 발전을 억제하고 있었고 이는 또한 북부 산업 지역의 노동자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북부의 노동 계급의 문제와 남부의 소작농 계급의 문제는 분리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 그람시의 분석이다. 따라서 북부의 노동 계급과 남부의 소작농 계급은 각각 부르주아지와 지주 계급의 억압을 타파하기 위해서 서로의 연대가 필요하며 이 연대를 추동하는 집단이 지식인 계층이라고 그람시는 주장한다(441-62).

    이탈리아의 남부 문제에 대한 그람시의 이러한 분석은 서구 유럽의 제국 경영방식에 확대하여 적용할 수 있다. 우선 이탈리아의 남부와 북부를 구분하는 이분법은 서구 제국과 서구 제국의 지배 체제 아래에 있는 비서구를 구분하는 이분법과 병행된다. 사이드가『오리엔탈리즘』에서 자세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는 식민지 지배 집단으로서의 서구와 피지배 집단으로서의 비서구는 우등 집단으로서의 서구, 열등 집단으로서의 비서구로 설정되며 이러한 이분법적 구조는 역사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존재론적 차이로 규정된다. 이렇게 설정된 존재론적 차이가 역사 과정에 개입하여 비서구 세계에 대한 서구의 침략과 지배가 정당화된다는 것이『오리엔탈리즘』의 논점이다. 서구와 비서구 세계를 나누는 이러한 이분법은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론적, 공간적 개념이다. 사이드는『문화와 제국주의』에서 이러한 공간적 개념으로서의 제국주의를 이해하려는 시도를“역사적 경험에 대한 지리학적 탐구”(7)라고 명명한다. 사이드가 말하는 제국주의의 지리학은『오리엔탈리즘』에서 강조하던 서구와 비서구 사이에 작용하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이분법을 극복하고 있다.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서구 제국주의의 각 세력은 그 자체 내에서도 단일화 시킬 수 없는 다양한, 그리고 자본주의의 발전단계에서 보더라도 각각 상이한 심급을 갖고 있는 체제이다. 서구 제국주의 체제는 서구의 우월적 가치를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유사성을 그러나 역사적 발전 단계의 심급에서는 변별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제체였다. 이는 비서구 식민 지역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중앙집권적 또는 봉건적 국가체제를 갖고 있었던 아시아 지역과 아직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로 정비되지 않은 아메리카 지역과 아프리카 지역은 서구의 침략과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역사적 발전 단계, 따라서 서구 제국주의 체제에 대한 대응의 방식은 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사이드가 말하는 지리학적 제국주의 분석은 역사성과 공간성을 동시에 고려하는 분석이다. 또한 그람시가 이탈리아의 남부 문제를 논의하면서 강조하던 지식인의 역할은『문화와 제국주의』에서는 사이드 자신이 제국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식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비서구 세계 출신으로서 비서구 문제를 극복하려는 사이드의 시도는 그람시가 말했던 노동계급이나 소작농 계급 출신 지식인이 노동 계급 문제나 소작농 계급 문제를 해결하는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는 유기적 지식인론을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5필자는“근본적으로 제한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주권을 갖는 상상의 정치적 공동체”(15)로 민족을 규정하는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의 민족의 개념을 염두에 두고 민족을 논의하고 있다. 민족이 제한된 공동체라는 뜻은 어떤 민족의 외부에는 다른 민족이 있어야 하며 이 제한된 경계를 넘어서 다른 민족을 그 민족에 포함하려 하면 그 자체의 민족성은 훼손된다는 뜻이다. 앤더슨의『상상의 공동체들: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이 민족 이론에 기여한 바는 민족주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이전의 민족에 관한 논의와는 달리 민족의 형성 그 자체를 이론화 했다는 점이다.

    III. 소설과 제국주의

    『문화와 제국주의』의 제목에서 사이드는 이 책의 주제어로‘제국주의’와 더불어‘문화’를 제시하고 있지만 그가 여기에서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문화물은 대부분 서구 소설이다. 예이츠의 시나 베르디의 오페라 역시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는 있지만 이 저서의 큰 흐름으로 볼 때는 예외에 속한다. 사이드는 이 저서에서‘소설’(novel)6을‘문화’와 거의 같거나 대표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 진술하였듯이 인간의 모든 행위 또는 그러한 행위의 기록물을 문화라고 규정한다면 소설은 문화의 한 부분에 불과하기에 소설과 문화는 상  호 대체 가능한 개념은 아니다. 더구나 문학을 비롯한 고급문화를 비판적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문화 분석의 대상을 주로 대중문화로 설정하고 있는 근래의 문화연구의 큰 흐름을 염두에 둔다면 문화의 이름으로 소설을 설정하는 것은 더욱더 문제가 된다. 그러나 이 저서에서 분석 대상이 되고 있는 서구 소설은 전통적인 문학연구가 주로 관심을 갖고 있던 보편적 인간관이나 세계관 또는 문학고유의 특성을 드러내기 위한 텍스트가 아니다. 사이드가 오스틴의『맨스필드파크』나 콘래드의『어둠의 속』등의 서구 소설을 분석하면서 밝히려고 하는 것은 서구 제국주의가 어떻게 소설을 통하여 재현되는 지 그리고 소설이 어떻게 서구 제국주의에 기여하고 있는 가와 같은 소설의 정치성이다. 문화연구가 문화의 정치성을 논의하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저서에서 사이드가 하는 작업은 문화연구의 흐름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이 점에서 서구의 소설 분석을 통하여 제국주의의 작용을 논의하는 사이드가 이 저서의 제목을  ‘문화와 제국주의’라고 설정한 것은 정당하다.

    사실 기존의 소설 이론이, 특히 소설의 발생 이론이, 소설이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7 그러나 소설 발생기의 서구 사회가 제국주의 사회였음을 주목하여 소설과 제국주의의 관계를 논의하는 소설론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이드는 소설의 서사구조에 나타나는 시간과 공간이 사회 영역과 유사하다는 점 그리고 소설의 발생과 발전 시기가 제국주의 시대와 일치한다는 점에 주목하여“제국이 없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은 서구 소설은 없었을 것임을, 그리고 소설의 발생  요인을 검토해보면 소설을 구성하는 주요 서사 유형이 제국주의에 내재되어 있는 복합적인 이데올로기적 여러 양태와 필연적으로 접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69-70)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사이드는 서구 문학이, 특히 소설이, 갖고있는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제국의 건설과 유지에 기여하고 있었음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이드는 소설과 제국주의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사이드가 문화와 제국주의의 관계를 논의하기 위하여 소설을 내세우는 이유는 소설이 특정 사회의 공간성과 시간성을 담보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춘 문화물 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소설은 특정 언어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의 서로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 지를, 즉 특정사회의 공시성과 더불어 통시성을 보여주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서사로서의 소설은 사회 구조와 유비 관계에 있다. 소설이 재현하는 세계는 가상이지만 구조상 현실 사회와 유사하다. 현실 사회와 소설의 세계가 다른 점은 현실사회가 이미 주어진 것이라면 소설의 세계는 작가가 문학적 관습이나 작가가 취하는 입장에 따라 소설의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소설의 구성적 특성(예를 들어 플롯)으로 인하여 현실 세계에서는 해소가 불가능한 모순이 소설 안에서는 허구 효과8를 통하여 해소가 가능하게 제시된다. 또한 소설의 진행이 현실 사회의 역사적 진행과 유사성을 갖는다는 의미에서는 현실 역사를 분석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소설의 전개를 분석할 수도 있다. 소설 속에 제시되는 인물과 사회의 변천은 현실 사회가 변하는 것과 같은 시간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소설의 공간성과 시간성은 현실 사회의 구조 그리고 그 변화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문화물로서의 소설을 분석할 때 현실 사회를 정치 역사 사회적으로 분석할 때와 유사한 방식을 취할 수 있다.

    사이드가『문화와 제국주의』에서 서구 소설을 논의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이유는 서구의 소설이 서구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문화 형식이기 때문이다. 서구소설의 발생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있지만9『문화와 제국주의』에서 사이드가 주로 다루는 영국소설을 특히 염두에 둔다면 현대적 의미의 소설 발생 시기는 디포의『로빈슨 크루소』(1719), 헨리 필딩(Henry Fielding)의『톰 존스』(Tom Jones) (1749) 등이 쓰인 18세기 초기이다. 서구에서 18세기를 전후한 시기는 소설의 기원에 관한 고전적 논자인 이안 와트(Ian Watt)가 설명하듯이 독서 시장이 형성되던 시기이다. 독서 시장을 소설의 발생의 배경으로 설명하면서도 소설을 개인주의적 경험의 관점에서 논의하는 와트로서는 주목하기 어려웠겠지만 소설 발생 시기에 형성된 독서 시장은 당시 서구 세계의 보편적 문어였던 라틴어 독서 시장이 아니라 영어, 불어, 독어 등 특정 지역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민족어 독서 시장이었다. 영어로 쓰인『로빈슨 크루소』가 독서 상품으로 성공한 이유는 유럽의 보편적 언어인 라틴어로 쓰인 인쇄물보다 더 많은 독자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까지의 유럽에서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집단은 유럽 보편 언어인 라틴어를 읽고 쓸 수 있는 성직자, 학자 등 소수 집단을 의미하였으나 18세기경의 유럽에서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은 영어 불어 등의 민족어를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렇게 민족 언어를 읽고 쓸 수 있는 집단은 18세기 전후로 급속하게 팽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발생은 이러한 역사 문화적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소설의 독자층은 일정 정도 큰 규모이지만 제한되어 있다. 영어로 쓰인『로빈슨 크루소』가 독서시장에서 상품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모의 독자가 있어야 하지만 그 독자는 영어 사용자에 제한되어 있다. 이 말은『로빈슨 크루소』가 전제하는 독자층으로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권의 독자는 제외되어 있다는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를 비롯한 영어 소설은 영어를 쓰는 영국 독자만을 위한 것이며 이들 독자들은 영어 독자공동체를 이룬다.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상상의 공동체들』(Imagined Communities)에서 인쇄  자본주의의 발달이 민족 형성의 문화적 기반이었다고 주장할 때 이 인쇄자본주의를 이끌었던 문화 상품은 신문과 더불어 소설이었다. 사실 인쇄자본주의가 발달하던 17세기나 18세기 당시에는 신문과 소설이 엄격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었다. 신문은 소문을 듣고 사건을 재구성해야 했고 소설은 꾸며낸 이야기를 사실인 것 같이 포장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영어 신문과 더불어 영어 소설10이 재현하는 세계가 영어를 쓰는 사람들의 세계라는 점에서 이러한 소설이 재현하는 세계는 영어를 쓰는 사람들의 세계이기도 하다. 또한 영어 소설의 독자 역시 영 어를 통하여 영어 소설의 세계와 교류한다는 점에서 영어 소설의 세계와 영어독자의 세계는 영어를 매개로 하나의 공동체로 규합된다. 이 공동체가 영어 민족 공동체11이다. 따라서 영어 소설의 세계는 곧 영어 민족의 세계가 되며 이런 소설이 옹호하는 가치는 다시 그런 소설의 작가와 독자들의 가치인 영어 민족의 가치가 된다.

    18세기 초 소설인『로빈슨 크루소』는 이 소설이 영어로 쓰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 소설에 나오는 크루소가 잉글랜드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이 소설의 세계는 잉글랜드인의 세계이다. 이 소설의 세계가 잉글랜드인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이 소설의 역사적 상황이 아직 팽창적 침략적 민족주의로서의 서구 제국주의가 본격화되기 전이어서 이 소설의 인물들이 유럽인으로서 서로 교류하고 있다는 점을 본다면 이 소설의 세계는 유럽 내의 타 민족에 대한 배척보다는 그들과의 공존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예를 들어 크루소가 아프리카의 무어인들에게서 탈출하였을 때 그를 구해주고 브라질로 가게 해주는 사람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포르투갈 사람이다. 18세기 초의 소설인『로빈슨 크루소』와는 달리 19세기 초기 소설인 오스틴의『맨스필드 파크』에는 영국을 함축적으로 재현하는 맨스필드 파크에 프랑스의 연극『연인들의 맹세』가 개입함으로써 무질서가 초래된다. 이 소설에서 프랑스의 가치는 무질서이다. 이 소설에서 영국의 권위를 상징하는 버트램은 이 연극 공연을 금지함으로써 프랑스의 문화적 가치라고 상정되는 무질서를 축출하고 맨스필드 파크의 질서를 회복한다. 이 소설에서는『로빈슨 크루소』에서와는 달리 영국인과 프랑스인은 다르며 프랑스의 가치에 비하여 영국의 가치가 더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민족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민족주의가 발흥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사이드가 수행하는 문학 비평의 대표적 예로 흔히 언급되는 그의『맨스필드 파크』분석은 이 소설 텍스트 자체에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앤티거(Antigua)를 비롯한 영국의 해외 식민지의 정복과 통제가 영국이라는 제국의 질서를 어떻게 형성하고 구현하고 있는 지를 밝힘으로써 영국 제국이 해외 식민지를 통해서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이드는 무질서를 질서로 바꾸어 놓는 버트램경의 앤티거 식민지 농장 경영 방식이 맨스필드 파크에 적용되었을 때, 더 나아가 상징적으로는 영국 제국 자체에 적용되었을 때, 무질서의 세계가 질서의 세계로 회복된다는 영국의 제국 경영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지만 맨스필드 파크에 무질서를 가져오는『연인들의 맹세』라는 연극이 프랑스 연극이라는 사실은 주목하지 않는다(80-97). 19세기의 서구의 제국주의를 단지 질서로서의 서구가 무질서로서의 비서구 세계에 대한 정복과 경영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면『맨스필드 파크』에서 무질서를 상징하는『연인들의 맹세』는 서구세계의 일부인 프랑스의 연극이 아니라 앤티구어와 같은 비서구 세계의 속성을 갖는 연극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이드가 이 저서의 핵심 논제인 19세기의 서구 제국주의가 서구 내부의 민족주의의 경쟁 체제이기도 한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면 그의『맨스필드 파크』분석은 상당한 정도 달라졌을 것이다. 19세기의  서구 자체 그리고 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구 제국주의가 비서구 세계의 정복과 경영뿐 아니라 서구 세계 내에 복수로 존재하는 민족, 그리고 이런 민족이 국가 체제를 갖추면서 패권적 경쟁체제가 되었고 이런 경쟁 체제가 19세기 서구 제국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났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0세기 초에 나온 러드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의『킴』(Kim)은 서구의 민족국가가 제국주의 국가로 확대되면서 제국주의 국가 간의 쟁탈전의 양상을 보여준다. 『킴』의 정치 역사적 배경은 세포이의 항쟁(1857~1858)의 결과로 당시의 영국의 왕이었던 빅토리아가 공식적으로‘대브리튼과 아일랜드 통합왕국 군주 겸 인도 제국 황제’(Queen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and Empress of India)의 칭호를 갖는 데서 확인되듯이 제국주주의 국가로 변한 이후의 대영 제국이다. 이 칭호에는 제국의 관할지로 인도만이 언급  되어 있으나 황제로서의 빅토리아가 지배하고 있던 지역은『맨스필드 파크』에나오는 앤티거와 자메이카 등 서인도 제도, 아편전쟁 이후 쟁취한 아시아의 홍콩, 남태평양의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등을 망라한다. 『킴』에 나오는 첩보전은 제국으로서의 영국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러시아의 남진을 제어하려는 정책의 산물이다. 소설『킴』에서 주인공 킴은 인도에서 태어난 아일랜드 혈통의 영국인이라는 점에서 인도인이기도 하고 아일랜드인이기도 하며 동시에 영국인이기도 하다. 대영 제국의 피식민 신민이면서 동시에 제국의 지배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킴은 이런 면에서 식민지인 인도와 아일랜드, 그리고 식민 모국인 잉글랜드를 아우르는 대영 제국의 대표자가 된다. 러시아에 대항한 첩보전에서 킴의 활약으로 위기를 겪는 인도가 안정을 되찾는다는 소설의 내용은 인도가 대영 제국 체제에 편입되어 제국 경영자의 보호를 받는 것이 인도를 위해서 바람직하다는 가치를 인도인에게 주입한다. 즉 인도인들의 대영 제국 체제에 대한 적극적인 동의와 참여를 이 소설은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사이드의 소설『킴』분석은 이 소설이 세포이의 항쟁 이래 반식민주의 정서가 형성된 인도에서 인도인을 보호하는 영국의 제국주의 체제, 그리고 그런 제국주의 체제 아래에서 평화롭고 유쾌하게 살아가는 인도인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도를 지배하는 대영 제국이 인도인에게 바람직한 체제임을 주입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146). 그러나 사이드는『킴』을 분석하는「제국주의의 즐거움」(“The Pleasure of Imperialism”)이라는 장의 앞부분에 당시의 전 세계적 시대 상황이 여러 제국이 경쟁하는 제국주의 시대임을 밝히고는 있으나 이 소설에 내재되어 있는 제국주의 체제의 쟁탈전이나 영국 제국주의의 지배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인도 민족주의를 주목하지는 않고 있다. 이 소설이 제시하는 행복한 인도인들과 유능하면서도 위엄 있는 대영 제국의 모습과는 달리 당시의 현실 역사에서는 영국제국이 위기를 겪고 있었다. 대영 제국은 한편으로는 식민지 내부에서의 민족주의의 발흥으로 말미암아 식민지 경영 자체가 위기를 맞고 있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선발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에 뒤이어 프랑스, 러시아 등이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으로 말미암아 인도를 비롯하여 세계 각 지역에서 영국은 이들 신흥 제국주의 국가와 계속 충돌하고 있었다. 현실 역사에서는 이런 식민 모순과 제국의 모순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현실 역사에 있었던 이러한 모순을 소설『킴』은 피식민인과 식민 지배자가 자발적 동의에 근거한 모순 없는 동일체임을 상상적으로 재현함으로써 해소하고 있다. 『킴』을 통한 이러한 상상적 해결이 실제적으로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는지를 입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킴』을 비롯하여 인도 식민지를 다룬 키플링의 여러 문학 작품이 영국인 독자뿐 아니라 인도인  독자도 상당히 확보하고 있었으며 이를 인정받아 노벨상을 수상하고 또 영국의 계관시인이 되었다는 것은 인도를 비롯한 영국의 식민지 독자에게 문학의 상상적 해소 효과를 충분히 행사하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6여기에서 말하는 소설은 새로운 이야기를 뜻하는 이탈리아어의 novella에서 유래한 영어나 스페인어의 novel에 해당하는 서구의 근현대 소설이다. 불어나 독어의 roman 역시 소설을 뜻하나 이 말은 고대나 중세의 로맨스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사이드가 말하는 소설에 대응되지는 않는다.  7소설의 발생에 대한 주목할 만한 논의로 Ian Watt, The Rise of the Novel(Berkeley: U of California P, 1957), Lennard Davis, Factual Fiction Before Richardson (London: Oxford UP, 1969), Michael McKeon, The Origin of the English Novel, 1600-1740 (Baltimore: Johns Hopkins UP, 1987)을 꼽을 수 있다.  8여기에서 말하는 소설의 허구 효과는 현실 사회에서 해소될 수 없는 계급 모순을 상상을 통하여 해소 가능한 것 같이 제시하는 문학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말한다(Étienne Baliabar and Pierre Macherey,“ On Literature as an Ideological Form”참조). 발리바르와 마슈레가 말하는 계급 모순은 특정 문학 작품이 다루는 주제에 따라 인종 모순이나 성 모순 등 다른 모순 구조로 바꾸어 이해할 수도 있다.  9예를 들어 중세 로만스 문학에 대한 풍자적 극복을 서구 소설의 기원으로 본다면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Don Quixote)(1605년)가 쓰인 17세기 초기가 서구소설이 시작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10여기의 영어 소설은 통상적으로는 영국 소설을 의미한다. 필자가 영국 소설이란 말을 쓰지 않는 이유는『로빈슨 크루소』같은 영어로 쓰인 소설이 영국이란 말에 포함되어 있는 특정‘국가’에 속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여기에서 말하는 영어 소설은 미국소설, 호주소설, 나이지리아 소설 등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11여기의‘영어 민족’이란 어색한 말은 영어를 매개로 구성되는 민족 집단을 지칭하기 위하여 쓰고 있다. 영어 민족이란 개념은 사실 어색할 뿐 아니라 엄밀하게 말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개념도 아니다. 영국으로 통칭되는 지역은 지리적으로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시 브리튼 섬에는 과거에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웨일즈 왕국이 있었다. 웨일즈는 16세기 중엽에, 그리고 스코틀랜드는 18세기 초에 잉글랜드와 통합되어 통합왕국(United Kingdom—공식 명칭은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 되었다. 현재 한국에서 영국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통합왕국은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그리고 북아일랜드로 구성된다. 통합왕국의 신민(subject—형식적으로는 왕이 있기에 영국인은 British subjects라고 불리기도 한다)은 브리튼 사람들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갖고 있으며 근현대의 일반화된 국가체제인 민족국가의 관점으로는 브리튼 민족이 된다. 그러나 이 통합왕국 안에서도 현재까지 일정 정도 각각의 지역에 웨일즈 민족주의, 스코틀랜드 민족주의, 아일랜드 민족주의와 같은 민족 정서가 있으며 이들 각각 지역 사람들은 스스로를 브리튼 사람이 아니라 웨일즈인, 스코틀랜드인, 아일랜드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기도 하다. 웨일즈 민족, 스  코틀랜드 민족, 아일랜드 민족이라는 각각의 민족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통합왕국의 주민은 세계인, 유럽인, 브리튼인, 그리고 웨일즈나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나 잉글랜드 사람으로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는 사람들로 혼합되어 있다. 물론 다중 정체성을 의식하는 사람도 많다. 여기에서 브리튼인의 정체성은 통합왕국의 주민으로서의 정체성뿐 아니라 영어를 공통으로 쓰고 있다는 의미에서 동일 언어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다. 브리튼인들은 영어라는 동일 언어 집단에 속한다는 의미의 공통의 정체성을 갖고 있으며 이 정체성이 영어민족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IV. 제국의 해체와 제3세계 민족의 형성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서구제국은 해체되기 시작한다. 2차 세계대전과 직접관련은 없지만 700년 이상 영국의 지배를 받아왔던 아일랜드가 1921년 부분적으로 독립하였고 2차 대전 후인 1947년에 인도가 독립하였다. 1962년에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였던 트리니다드가 독립하였다. 그러나 2차 대전을 전후로 서구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여러 지역이 서구로부터 독립하였다는 말이 곧 그 시기를 전후로 서구 제국이 제국주의 정책을 포기하기 시작하였다는 뜻은 아니다.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지역이 독립의 과정을 거쳐  민족국가를 수립한 것은 서구 제국의 해체와 맞물려 있다. 서구 제국의 해체는 한편으로는 서구 제국주의 체제 내의 모순이 파열된 결과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피식민인들이 제국주의 모순의 틈을 비집고 그들의 민족성을 주장하며 제국의 체제에 저항한 결과이다.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는 지역의 원주민이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으로 우선 두 가지 방식을 고려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식민체제에 협조하면서 그 식민체제가 종식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폭풍』(The Tempest)에 나오는 애리얼(Ariel)의 방식이 그것이다. 애리얼은 식민 지배자라고 볼 수 있는 프로스페로(Prospero)의 언어를 익혀서 그의 협력자가 되며 궁극적으로 프로스페로가 떠났을 때 해방이 되어 자신의 삶을 확보한다. 둘째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식민 체제를 거부하면서 식민체제 이전부터 있었던 원주민 고유의 정체성  을 유지하는 것이다. 『폭풍』의 캘리번(Caliban)은 외부에서 온 지배자인 프로스페로가 강요하는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자신의 원래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인도에서의 간디의 민족운동이나 아프리카의 네그리튜드 운동과 같이 반식민 투쟁의 과정에서 순수 원주민의 모습이 유지되었던 원래의 과거로 돌아가자는 기치 아래 모인 독립운동이 캘리번이 취하는 방식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애리얼의 방식이 피식민인의 정치적 정서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할 수 있지만 역사 현실에서는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이다. 식민지배 체제가 종식된 이후인 탈식민 시대에 정치권력을 장악한 지배계층은 그들이 민족해방전사였다고 주장하나 사실상 식민 시대에 일정 정도 식민주의 권력에 협조적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인도 건국의 아버지라고 추앙받는 네루 역시 2차 대전 당시 연합국에 협조한 대가로 독립의 과정에서 독립 후의 권력을 보장받았었다.

    사이드는『문화와 제국주의』에서 식민세계에서 바람직한 민족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을 논의할 때 애리얼의 유형은 우선 배격한다. 사이드는 식민체제를 극복하고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은 캘리번이 되는 것 뿐 아니라 캘리번과 비슷해지는 것(like Caliban)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214). 캘리번과 비슷해진다는 것은 캘리번 자체가 되는 것과는 다르다. 캘리번 자체가 된다는 것은 식민 시대 이전의 원주민의 모습을 그대로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캘리번과 비슷해진다는 것은 과거의 정체성을 의식하면서도 미래에 있게 될 변화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사이드는 캘리번과 비슷하게 되는 예로 서구식 교육을 받았지만 식민체제에 저항하여 민족주의를 주장하였던 인디아의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미국에서 범아프리카주의를 주장하였던 두 보이즈(W. E. B. Du Bois) 등을 예로 든다. 사이드는 이들이 서구식 교육을 받아 서구의 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서구의 지배적 문화에 되받아 쓰기(write back)가 가능했다고 한다.

    사이드는 여기에서 과거 식민체제의 지배를 받았던 지역에서 민족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이 제국주의에 저항하면서 민족을 복원함으로써 근대적 민족국가를 수립하였다는, 흔히 저항적 민족주의라고 일컬어지는, 일반론을 사실상 따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식민 체제하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았지만 그런 식민체제에 저항하였던 선구적 지식인이 주도하였던 민족주의가 제3세계의 민족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는 파르타 차터지(Partha Chatterjee)의 주장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차터지를 포함하여 엘리트 민족주의 역사관을 비판하는 하층민연구  모임(Sublaltern Studies Group)의 이론가들은 인도를 비롯한 서구 식민지배를 받았던 지역에서 엘리트 민족주의자들이 반제국주의 운동을 주도하였다는 엘리트 민족주의 역사관은 식민시대 이후의 민족국가 형성 과정에서 하층민들의 식민 체제에 대한 저항의 역할을 축소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한 하층민연구모임의 이론가들은 엘리트 민족주의가 식민 시대 이후의 새로운 민족국가 체제에서 경제 사회적 불평등을 문제 삼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했다고도 주장한다. 사이드 자신은 제3세계 민족주의가 자기 성찰적 비판을 소홀히 하지 않기에 서구의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면서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던 제3세계 민족주의자들의 기여를 폄하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219). 물론 사이드는 현재의 비서구 세계의 민족주의에, 특히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민족을 볼모로 삼아 독재 체제를 유지하는 사담 후세인의 통치 방식과 같은 아랍 근본주의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사이드의 지적 정치적 작업의 전 과정을 통하여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사이드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독립 과정에서의 제3세계의 민족주의 역시 서구식 교육을 받은 엘리트 지식인이 주도하면서 민족을 이루는 대다수의 하층민은 민족의 형성 과정에서 상당한 정도 배제되어 왔음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식민체제가 공식적으로 종식되면서 과거 서구 식민 지배를 받았던 대부분의 지역에는 현재 민족국가가 수립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지역의 민족국가는 아직 미완성 상태이다. 서구의 민족국가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제3세계의 민족국가는 민족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의미하는 민족의 총의에 의한 국가가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식민시대 이후 국가 권력을 장악한 부르주아 지배 계층은 식민 시대에 일정한 정도 식민 체제에 협조한 대가로 지배 권력을 이양 받았기에 이들 권력 집단에서 배제된 노동자 농민계층이나 여성들은 국가 체제 경영의 주역이 될 수 없었다. 즉 민족을 이루는 다수의 구성원이 소수 엘리트 계층의 지배를 받는다는 현재의 정치 사회 구조는 식민시대에 소수 식민 지배 계층과 다수의 원주민 피식민 지배 계층이라는 이원적 구조에서 근본적으로 탈피되지 않은 것이다. 프란츠 파농이 반식민 투쟁의 과정에서 경계하고 있던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매판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가 현실로 되어 있으며 탈식민의 해방 공간에는 모든 인간의 인간성이 완성된 상태로서의 새로운 휴머니즘이 구현 되어야 한다는 파농의 꿈은 아직 요원한 상태로 남아 있다.

    V. 맺는 말―자본 제국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민족의 완성

    『문화와 제국주의』의 마지막 장「지배로부터 해방된 미래」“( Freedom from Domination in the Future”)에서 사이드는 20세기 중반 이후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세계 지배, 그러한 미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제3세계 민족주의, 미국 내부의 권위적 지배에 맞서는 여러 지적, 대중적 흐름, 그리고 국경을 넘는 정보와 인간의 유동 등으로 나타난 새로운 세계 질서를 논의하고 있다. 사이드는 우선 대영제국이나 일본제국이 2차 대전 이후에 해체되었다고 해도“제국주의는 끝나지 않았다”(282)고 진단한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는 공식적으로는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났지만 정치 경제 문화의 여러 면에서 여전히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런 신식민 관계는 과거의 식민 모국과 식민 지배지 사이에 현존하는 일반적 관계라고 사이드는 설명한다.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의 결과물인 식민 체제는 현재에도 신식민주의 형태로 그 양상을 달리하여 유지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이 과거 영국이 가졌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 사이드가 제시하는 명제이다. 현재의 제국으로서의 미국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제국 경영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지배한다고 사이드는『문화와 제국주의』의 결론 부분에서 설명한다.

    20세기 중반 이후‘자유’‘평화’‘세계 질서’등의 명분을 걸고 진행되는 세계의 여러 지역에 대한 미국의 정치 군사적 개입을 사이드는 미국이 본래 가지고 있던 미국적 전통의 발현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미국이 건국 초기부터 20세기초까지 미국 대륙 내에서 유지하여 왔던 영토 확장 전통이 현재는 전 세계로 확대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미국의 세계 지배는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에 대한 식민 모국의 직접 통치와는 달리 세계 각 지역에 미국에 친화적인 정부를 수립하게 함으로써 그 정부를 이용하여  미국의 세계 지배를 공공하게 하는 간접 통치 방식이다. 사이드는 이러한 미국의 간접 통치로서의 세계 지배가 미국적 가치의 실현이라고 주장한다. 사이드는 이에 대해“미국의 확대정책이 기본적으로 경제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는 여전히 대중 영역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미국 자체에 대한 문화적 사상과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들과 나란히 진행 된다”(289)고 진술한다. 미국의 세계 지배는 미국적 가치가 전 세계로 확대되고 있음을 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미국적 가치가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미국만의 가치라  고 이해한다면 이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프랑스나 한국과 같이 하나의 구별되는 민족국가이며 이 미국이라는 민족국가의 가치가 세계로 확대된 것이 현재 진행되는 미국의 세계지배라는 뜻이 된다. 결국 미국의 세계 지배는 19세기이후 20세기 초까지 진행되었던 제국주의 시대의 유럽의 각 제국이 세계를 지배했던 양상과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고 사이드는 주장하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20세기 중반 이후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미국의 세계 지배가 미국이라는 민족국가의 가치가 구현된 형태가 아님을 인식하여야 한다. 군사력의 우위를 앞세운 미국의 세계 지배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가치가 세계로 확대되면서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초민족적 초국가적 자본 권력이 미국이라는 국가 체제를 전면에 내세운 결과임을 인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미국의 확대정책이 기본적으로 경제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라는 사이드의 유보적 진술에서 확인되는 것은 경제적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국의 세계 지배가 초민족적 초국가적 자본의 세계 지배라는 사실이다. 즉 현재의 세계 질서를 사이드는 경제적 관점에서는 초민족 초국가적 자본의 세계 지배로 그리고 문화와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는 민족국가로서의 미국의 세계 지배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이드의 논지에 따르면 초민족국가적 자본의 패권과 민족국가로서의 미국의 이데올로기적 문화 패권이 병행하거나 공존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세계 질서다.

    표면적인 현상으로 본다면 초민족국가적 자본의 세계 지배와 민족국가로서의 미국의 이데올로기적 세계 지배가 공존하고 있다는 사이드의 관찰은 옳다고 볼 수 있다. 국적을 초월하는 금융 자본이 세계 시장으로 확대되고 있는 현실과 미국적 가치라고 주장하는 민주주의와 자유의 이름으로 미국이 세계의 여러 국가를 침공하고 지배하는 현실은 전 세계적으로 일반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의 세계 질서를 이론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본과 국가가 내재적 모순관계에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식하여야 한다. 자본은 일정 기간 민족국가의 보호를 받지만 궁극적으로는 민족국가를 쇠퇴시키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M-C-M(Money(돈)-Commodity(상품)-Money(돈))의 순환 모형으로 제시한 자본의 속성은 끊임없이 자본 그 자체를 확대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은 한 민족국가 체제 내에서 확대 재생산이 불가능해지는 지점이 올 때 민족국가 영역을 넘어선다. 19세기에 민족국가가 제국주의 체제로 변화하면서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진 것은 이러한 자본의 확대 과정에 의해 자본이 해외 시장을 개척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고 자본이 민족국가 체제의 보호와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국가의 관점에서는 이런 민족국가 영역을 넘어  선 해외 시장 개척, 그리고 이런 해외 시장 개척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른 민족국가와의 충돌은 민족국가의 구성 원칙에 모순을 일으킨다. 민족국가는 원칙적으로 특정 지역 내에서 그 민족 구성원 간에 공유되는 주권을 기반으로 형성된 정치 체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자본은 민족국가와 내재적 모순관계에 있으며 자본의 확대 재생산은 민족국가 체제를 쇠퇴 시킨다.

    자본과 민족국가 간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현재 표면적으로는 민족국가로서의 미국이 전 세계적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미국은 민족국가로서의 미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미자유무역협정(Korea-U.S. Free Trade Agreement)이 나 북 미 자 유 무 역 협 정 (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 등의 국가 간 협정에서 협정의 당사자인 미국은 민족국가를 대표하는 미국 정부라고 볼 수 없다. 자유무역협정의 당사자인 미국 정부는 초민족적 초국적 자본을 대표한다. 시장 개방과 관세 인하 또는 폐지를 목적으로 하는 자유무역협정은 민족국가가 보호하고 통제하는 영역을 해체한다는 점에서 민족국가를 대표하는 정부라면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시장개방에 소극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자유무역과 시장 개방은 민족국가 대다수 구성원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시장 개방은 중소 규모의 자국산업을 경쟁의 위험에 노출시키며 생산에 필요한 노동을 해외에서 확보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자국의 노동 시장을 위축시킨다. 자유무역협정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WTO) 등의 국제기구 역  시 초국적 자본의 확대 재생산을 보장하는 장치이다. 이들 국제기구들은 초국적 자본이 전 세계적 확대에 방해되는 장애를 제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의미의 미국의 패권은 사실상 민족국가로서의 미국이 아니라 초국적 자본의 전 세계적 패권이다.

    문화와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의 미국의 세계 지배 역시 사이드가 말하듯이 민족국가로서의 미국의 세계 지배로 이해하여야 할 것 같지만 사실은 이들 영역 역시 초국적 자본의 세계 지배로 이해하여야 한다. 미국에서 생산되어 전 세계에 유통되는 미국의 문화와 이데올로기가 민족국가로서의‘미국’의 가치라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현대의 미국 문화를 대표한다는 할리우드 영화는 문화물로 위장한 산업이다. 할리우드 영화 산업은 특정의 문화적 국가적 가치를 옹호하지 않는다. 영화 <람보>나 <터미네이터> 시리이즈는 구원자로서의 미국의 역  할을 옹호하지만 같은 할리우드 산업 영화인 <아메리칸 뷰티>는 오히려 전통적인 미국적 가치인 화목한 중산층 가족의 이데올로기를 희화한다. 심지어 <킹콩>에서는 자본의 이익을 위하여 비문명 세계의 질서를 유린하고 파괴하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실천을 비판의 대상으로 설정하기도 한다. 할리우드 영화 산업은 자본의 질서에 복무할 뿐이며 설사 할리우드 영화에서 미국적 가치가 재현되더라도 그 가치는 옹호될 수도 있지만 부정되기도 한다.

    이제 우리는 미국의 전 세계적 헤게모니를 민족주의의 변형된 형태인 제국주의가 아니라는 관점을 취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주목할 만한 논의로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가 같이 쓴『제국』(Empire)을 들 수 있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 저서에서 전 세계적 주권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이 민족국가의 기획을 넘어서는 전지구적 제국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에 의하면 미국의 헌법적 구성 원리는“네트워크 속에 서로 연결된 권력의 민주적 상호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다중(multitude)의 내적인 배치”(161)라고 한  다. 생체 와 같이 작동하는 다중의 권력은 역동적으로 팽창하는 속성을 갖고 있으며 이 팽창의 원리에 의해 건국 이후 20세기 초까지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 내에서 끝없이 확대되었으며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전 세계로 팽창하고 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이들에 의하면 미국은 제국주의 시대의 유럽의 민족국가와는 태생적으로 다른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미국이 고대 로마와 같은 위상을 갖는 현대의 제국이라고 설명한다. 미국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탈영토성과 개방성, 국경을 넘어서는 자본과 노동력의 유동성, 초민족국가적 기업 네트워크 등으로 대표되는 현 시대의 정치, 군사, 경제적 문화적 상황은 제국으로서의 미국의 완성 과정을 보여주는 여러 징후 들인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제국이 민족국가의 영토를 와해하고 생산 네트워크를 전 지구적으로 확대하면서 정보기술혁명을 통하여 통제사회를 전 세계로 확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런 제국이 다중의 힘에 의해 구성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에 대한 저항 역시 다중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중은 중심 없이 곳곳에 편재함으로써 제국과 마찬가지로 탈영토화 되어 있으며 이로 인하여 주권을 갖는 중심 권력의 통제가 용이하지 않다는 특성을 갖는다. 북미자유무역협정에 대항하여 1994년에 시작된 멕시코의 자파티  스타 반란, 1989년의 중국의 천안문 사태,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 운동, 1992년의 LA 봉기, 1996년의 한국의 대규모 파업 등에서 보이듯이 다중의 저항은 국지적이어서 다른 지역의 다중과의 연계망을 갖지 않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이런 저항의 초민족적, 초국가적, 탈주적, 리좀적 특징으로 인하여 제국 자체에“전 지구적 수준에서 수직적으로 도약하고 직접적으로 접촉‘(55)하면서 제국에 충격을 준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네그리와 하트가 주장하듯이 미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가고 있는 현재의 전 세계적 제국의 질서는 19세기의 제국주의의 질서와는 다르다. 그러나 사이드는『문화와 제국주의』에서 현재의 미국을 과거의 영국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의 패권을 이어받는다는 식으로 설명함으로써 과거의 전통적 민족국가의 관점에서 세계 체제를 설명하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현재의 초민족적 초 국가적 제국의 지배와 그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서 사이드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기도 하지만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에 대한 저항과는 다른 제국에 대한 저항을 제시하고자 한다. 네그리와 하트가 말하는 다중의 저항은 이들이 갖는 순간적, 비연계적, 비체계적, 국지적인 특성으로 인하여 제국의 질서에 교란을 가져오기는 하지만 현 지배 체계를 변화시킬 만큼의 추동력을 갖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론의 진화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퇴행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필자는 민족국가 체제를 와해시키면서 자본의 세계 지배를 공고히 하는 현재의 초민족적 자본 제국에 저항할 수 있는 체제는 정상적인 민족국가의 복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정상적인 민족국가는  역사 이래로 완성되어 본 적이 없다. 프랑스 혁명을 통하여 현대 민족국가의 전형이 형성되었지만 민족국가로서의 프랑스가 지향했던 프랑스의 모든 사람들의, 즉 프랑스 민족의, 총의에 의한 프랑스 국가는 항상 미완성 상태였다.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프랑스의 부르주아 계급은 프랑스의 민족국가를 완성하기 위하여 프랑스 영토 안의 모든 인민을 프랑스 민족으로 재구성하려 하였지만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프랑스의 농민 계층은 20세기 초까지도 프랑스인으로서의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Connor 154). 그 이후에도 프랑스에 이주한 알  제리아인들은 상당 정도 프랑스인이라는 의식보다는 알제리아인이라는 의식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 민족 자체가 완성되지 못했다는 사실 말고도 프랑스 민족국가는 그 출발부터가 프랑스의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국가 체제였기에 민족국가가 원칙으로 내세우는 모든 프랑스인을 위한, 모든 프랑스인에 의한, 모든 프랑스인의 프랑스 민족국가는 되지 않았다. 민족에 의한 국가 체제라는 민족국가는 프랑스의 경우에도 민족과 국가가 긴장이나 모순 관계에 놓여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민족국가를 완성하지 못하는 프랑스의 예는 다른 민족국가에도 적용될 수 있다.

    현재까지 민족국가가 지향하는 민족의 총의에 의해 그 민족 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실현하는 국가 체제는 없다. 그러나 민족 국가는 적어도 원칙으로는 민족의 이익을 구현하는 국가 체제임을 표방한다. 현재의 초민족적 자본의 이익을 실현하는 제국 체제는 민족의 이익을 위한 국가 체제라는 민족국가 체제를 근본적으로 교란한다. 초민족적 자본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조직체인 국제통화기금이나 세계무역기구 등은 전지구적 이익을 위하여 민족국가라는 국지적 이익이 보류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이런 초민족적 자본을 중심으로 구축된 국제기구는 민족국가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국가 체제를 자본의 도구로 전락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복지, 자국민의 보호, 경제적 문화적 자원의 분배와 같은 민족국가의 공적 기능은 작동하지 않는다.

    초민족적 자본 권력에 의해 민족국가 체제가 교란되고 있음에도 민족국가는 원칙적으로 민족구성원이 그 체제의 운영에 참여가 가능한 국가체제이다. 민족국가 체제가 일반화되어 있는 현재 세계의 모든 국가는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한다. 이 말은 민족구성원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그들 모두의 이익, 적어도 주권을 갖는 다수 민족구성원의 이익을, 실현하는 방식으로 국가 체제를 운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이를 현실화하는 것이 요원한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민족국가의 원칙과 그 원칙에 근거한 국가 운영을 모색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 역시 아니다. 근래의 큰 이론적 흐름이 되어 있는 초민족, 초국가 담론은 민족의 총의에 의한 민족국가의 완성과 운영 가능성을 호도하는 경향이 크다. 이를 거부하면서 정상적 민족국가를 완성시키려는 노력을 담지할 수 있는 담론 생산이 현재의 제국 체제에 저항하는 담론의 장이 될 것이다. 문화가 모든 인간 활동의 기록임을 환기해보면 모든 담론 행위는 문화 행위  이며 현재를 지배하는 초민족적 자본의 패권에 저항하여 인간성을 확보하는 담론 행위야말로 인간성의 고양이라는 문화의 이념을 실현하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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