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emories of the Korean War and the Theatrical Representation

전쟁 기억과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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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study on the memories of the Korean War and Theatrical Representation that is focusing on the Korean Theater Festival first period(1977~1986). The historical plays in Korea in 1970s and 1980s were showed a clear quantitative expansion. There are a lot of theater plays, of which materials is 6․25 after the Korean War. The Korean War is both trauma to us and treasure resource in theater plays ironically. The contents of these theater plays and aspects of memory are so various. It treats a miserable life during the war, an individual or family’s trauma, separated families, confrontation of ideology and dissolution, and the division of Korea etc, through the experience or an idea, directly or indirectly. For example, <Trial of Abellman> which material is a war crimes trial, <A modest monument> which material is anti-communist commemoration, <Too far too long tunnel> which material is a genocide, <Red & White> which material is prisoners of war, <Bicycle> which material is an individual or family’s trauma, <Han’s chronicle> which material is the division of Korea, separated families and so on. These theater plays usually displayed the tendency of epic theater which was remarkable in the Korean Theater Festival. They not only destructed dramatic fantasy by making various use of the narrative form but also tried to clearly deliver a writer’s point of view.


    본 연구는 한국전쟁의 기억과 재현 양상을 대한민국연극제 제1기(1977~1986)에 공연된 희곡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1970~80년대는 강력한 통치이데올로기를 배포하기 위해 기획된 국립극단의 ‘위로부터의 역사극’과 민중사관에 영향을 받은 재야 단체들의 ‘아래로부터의 역사극’이 생성 배포된 한국역사극의 융성기였다. ‘국가’와 ‘민중’이라는 거대담론이 경합하던 이때에 대한민국연극제 한국전쟁 소재극은 역사극 담론의 층위를 한층 두텁게 해주고 있다. 연극제 출품된 한국전쟁 희곡들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이 전쟁의 종결과 함께 정지되어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들의 다양한 기억들 가운데 어떤기억은 용인되고 다른 기억은 가공되고 변형되면서, 때로는 공식기억에 편입되기도 하고 망각되거나 소멸되고 있음을 드러냈다. 한국전쟁이라는 방대한 소재는 <아벨만의 재판>의 전범 재판, <비목>의 무명용사 추모, 반공 기념, 실향민, <멀고 긴 터널>의 국가 폭력, 집단 학살, <적과 백>의 전쟁포로 <자전거>의 전쟁 외상장애, <한씨연대기>의 이산가족, 분단 극복 등의 다양한 기억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재현 양식에 있어서는 사실주의 양식에서 벗어난 서사 방식이 주조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연극 외적으로 정치․사회 현실의 첨예한 대립이 존재하였으며 내적으로는 새로운 극양식과 기법을 탐색하였던 이 시기에 서사극은 지배 담론에 대한 극작가들의 비판적 시선을 담아내기에 가장 편리한 방법적 차용이었다. 그러나 서사적 화자를 통해 작의를 직접적으로 제시해 주는 방식은 오히려 관객의 이성적 판단을 이끌어내는데 역효과를 자아냈다. 비판인식의 증대라는 부분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극작술 미숙으로 채택된 서사 방식은 미학적 측면에서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국가 만들기 프로젝트에 동원된 국립극단의 반공담론 역사극과 달리 대한민국연극제에서 공연된 한국전쟁 역사극은 새로운 인식주체, 즉 공식기억에서 잊혀진 주변부의 기억을 재현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이는 전쟁피해자들의 ‘억압된 앎’을 집약하여 ‘공식화된 앎’에 도전함과 동시에, 전쟁에 대한 연극적 재해석을 통해 역사 다시쓰기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역사극은 과거에 대한 공통된 기억을 재구성함으로써 현재적 공통 감각을 만들어내고, 역사적 향수를 기초로 한 사회의식(rituals)의 국가적 작동을 가능케해준다. 이는 대한민국연극제 출범 무렵인 권위주의 시대에 창작된 전쟁소재극의 기능에서도 확인된다. 국가가 반공주의, 애국심을 조성하고 사회 통합 및 정권 합법화의 효과를 위해 역사극을 적극 활용코자 한 것은 이러한 효용성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역사극들은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성향 및 언어적 표현에서 벗어나 다양한 사회적 담론을 표출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전체주의적 동질성을 강화함으로써 국가 권력의 작동 매체로서 기능하게 했던 종래의 역사극에서 벗어나 사회 내부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수용하고 있는, 새로운 역사극을 창조해가는 시대의 문턱으로 들어서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KEYWORD

    Korean War , historical play , Korean Theater Festival , aspects of memory , a war crimes trial , anti-communist commemoration , genocide , prisoners of war , separated families , the division of Korea , epic theater

  • 1. 들어서며

    이 논문은 대한민국연극제 한국전쟁1) 소재극을 중심으로 전쟁 기억과 재현양상을 고찰하고, 이 시기 한국역사극의 역사성을 규명하기 위해 마련한 시론이다. 그 동안 학계에서는 1970~80년대 역사극 연구에서 6‧25 전쟁을 극화한 작품을 배제해 왔다.2) 플레이시먼(Fleishman)의 견해3)에 입각해, 두 세대 이전의 과거사를 다룬 작품을 연대기적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대의 역사담론이 역사극으로 인정한 작품만으로 역사극의 지형도를 그린다면 오늘의 관점에서 한국 역사극의 역사를 조망하는 인식지도를 그릴 수 없다는 문제의식으로, 본고에서는 한국전쟁 소재극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6‧25전쟁을 극화한 작품은 당대에는 시사성 짙은 현실 소재극으로 재현되고 수용되었지만 오늘의 관객에게는 역사 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한국 연극사에서 한국전쟁을 소재로 삼은 작품들은 1950년대 초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전쟁의 참상을 리얼하게 재현한 희곡에서부터 전쟁을 인간 삶에 내재한 폭력성의 메타포로 설정하고 존재의 허무와 부조리, 정신적 외상을 형상화한 작품들까지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한국전쟁을 체험한 민족진영 작가들의 작품은 반공이데올로기를 강화하려는 목적극 성격의 전쟁물이 압도적이다. 예컨대 김진수의 <불더미 속에서>, 유치진의 <통곡>‧<푸른 성인>‧<자매>‧<청춘은 조국과 더불어>, 김영수의 <운명>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 희곡은 대부분 사실주의 표현 양식을 빌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작가의 계몽적 안보관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희곡에 재현된 구체적인 기억의 내용은 한국군과 유엔군의 전쟁 행위의 정당성과 피해상황을 정전론(正戰論)의 입장에서 선별한 기억임을 알 수 있다.

    1960~1970년대에 국립극단에서도 일련의 한국전쟁 소재극을 공연하였다. 차범석 <산불>‧<학살의 숲>, 김은국 <순교자>, 노경식 <달집>, 이재현 <포로들> 등이 있다. 관제연극의 성격을 띤 국립극단의 작품들은 대부분 정권이 공표했던 반공담론에 기반을 두고 한국전쟁을 재생산해 그 문화적 기억이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임을 보여준다. 이 가운데 1962년에 공연된 차범석의 <산불>은 전쟁의 폭압성과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인간애에 초점을 맞춰 재현한 극으로 앞의 희곡들과 일정부분 변별점을 갖는다. 감정적 대응논리를 넘어 타자의 시선을 통해 전쟁 이데올로기의 맹목성을 이성적 관점에서 객관화하려는 노력은 1950년대와 1960년대 희곡의 동향을 구별하게 만든 성과이기도 하다.

    한편 196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극작가의 역사의식이 진실 규명의 의지로 기울면서 점차 서사극 양식을 수용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재판극 형식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객관적으로 규명하려는 일련의 희곡이 그것이다. 국가의 공식 기억과는 다른 억압당하고 은폐됐던 기억들을 들춰내 국가 폭력을 공개 심문하는 희곡이 등장한 것이다. 신명순의 <증인>을 꼽을 수 있다.

    1970~80년대에 이르면 한국 현대희곡의 이러한 역사 쓰기 방식은 더욱 강화된다. 이재현의 <멀고 긴 터널>, <적과 백> 등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만들어진 역사에 대한 알레고리적 글쓰기 방식도 등장한다. 이근삼의 <아벨만의 재판>이 이에 해당한다. 한편 1980년대 중반에는 실향민과 이산가족의 애환을 담은 희곡도 다수 등장하고 있으며 집단의 기억에 의해 망각된 개인의 기억이조명되어 주목을 끈다. 황석영의 <한씨연대기>가 대표적이다. 오태석의 <자전거>에 이르면 전쟁의 상처는 한층 억압된 정신적 트라우마로 재구성된다.

    이 논문에서는 한국전쟁에 관한 연극적 재현과 기억의 양상을 대한민국연극제 제1기(1977~1986)4)에 공연된 희곡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이 시기는 ‘대한민국연극제’가 1987년 ‘서울연극제’로 명칭을 변경하고 민간주도형으로 바뀌기 전까지 ‘관주도형’으로 운영되던 때이다. 1970년대 후반까지 정권의 지배담론을 유포하기 위해 국책극적 공연이 압도적이던 국립극단의 ‘위로부터의 역사극’과는 달리 대한민국연극제에서 공연된 역사극은 새로운 인식주체, 즉 공식 기억에서 잊혀진 주변부의 기억을 재현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또한 이 시기는 정권의 국가 만들기 프로젝트에 동원된 주류 역사극에 맞서 민중사관의 영향을 받은 재야 단체들에 의해 ‘아래로부터의 역사극’이 생성되던 때이다. 따라서 ‘국가’와 ‘민중’이라는 거대담론이 경합하던 이 시기의 대한민국연극제 전쟁 소재 역사극의 특성을 규명하는 일은 한국 역사극의 스펙트럼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보다 폭넓은 연구관점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

    이 논문에서는 연극이라는 기억 전달의 매체가 기억의 내용을 전달하는 방법이 어떠한지를 살펴보기 위해 문화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하려 한다. 극작가들은 역사적 사실을 재현할 때 특정한 관점에서 선별된 기억을 재현하고 전달하려 한다. 아스만(Assmann)은 이러한 기억을 실제 역사적 사건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경험적 기억과 구분하여 문화적 기억이라고 부른다.5) 문화적 기억은 경험기억과 달리 인공적으로 만들어진다. 대한민국연극제에 출품된작품들의 한국전쟁 기억이 사회문화적인 것이라면, 그 기억의 내용은 문예제도와 극작가의 기억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즉, 연극제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선택하고, 극작가가 어떤 방식으로 전쟁을 기억하고 재현했는가를 살펴본다면, 그것을 통해 대한민국연극제 한국전쟁 소재극의 역사성을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1)김동춘, 『전쟁과 사회』, 돌베개, 2006. 65~66쪽 참조. 한국전쟁을 북측은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불러온 데 반해, 남한에서는 ‘6‧25사변’, ‘6‧25동란’ 혹은 ‘6‧25전쟁’ 등으로 불러 왔다. 외국의 모든 공식 문서나 학술논문에서는 이 전쟁을 ‘한국전쟁korean war’이라 부르고 있는데, 전쟁 당사자인 남북 코리언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전쟁을 타자화시키는 용어이기 때문에 사실 다소 거부감이 든다. 남북 양측이 화해와 통일로 나아가는 길에 또 한 번 논란이 되겠지만, 여기서는 더 적절하고 객관적 용어가 만들어지기까지 우선 ‘한국전쟁’이라는 용어를 수용하기로 하되, 더러는 ‘6‧25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중립적인 입장임을 밝혀둔다.  2)백소연,「1970~80년대 역사극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18쪽 참조. 백소연은 1970~80년대 한국연극에서 6‧25를 소재로 하는 경우, 반공주의가 전면으로 노골화 되면서 창작자의 체험으로도, 미학적으로도 거리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간주하고, 해방 전 사건을 소재로 하는 작품들로 역사극 연구범위를 한정하고 있다.  3)Fleishman, Avrom, The English Historical Novel, Baltimore: The John Hopkins Univ. Press, 1972. p.3.  4)김성희,「서울연극제의 역사와 운영방식」,『한국연극연구』 제7호, 한국연극사학회, 2004. 218쪽. 김성희는 연극제 운영방식과 특성을 근거하여 서울연극제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시기 구분하고 있다. 제1기 (1977~1986) : 대한민국연극제, 관주도형, 창작극 발굴 제2기 (1987~1990) : 서울연극제로 명칭 변경, 민간주도형, 공연심사작 포함 제3기 (1991~1996) : 축제성격 강화, 자유참가작 및 관객 지원제도(사랑티켓) 신설 제4기 (1997~2000) : 국제연극제, 축제방식공백기 (2001~2003) : 공연예술제로 통합, 경연과 축제 병행 제5기 (2004~) : 서울연극제로 분리  5)알라이다 아스만, 『기억의 공간』, 변학수‧채연숙 옮김, 그린비, 2011. 13~15쪽 참조.

    2. 문예제도로서의 연극제와 정치?사회 환경

    1910년대 근대극이 시작된 이래로 한국연극은 줄곧 ‘민족’과 ‘제국’ 양 진영간의 계몽 담론에 종속되어 있었기에 예술적 성취 면에서 낙후성을 면치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한국연극사에서 연극제와 관련된 과거의 연극 행사를 일별해보아도 알 수 있다. 1942년 9월 총독부의 후원으로 개최된 ‘국민연극경연대회’는 그 취지에서 밝힌 것처럼 국민극 육성에 있었다. 출품작의 내용은 지원병제도 실시나 생산증강과 관련된 친일목적극이었다.6) 1946년 조선연극동맹과 서울신문사 공동주최로 개막된 ‘3‧1절 기념 연극대회’는 좌익 계열 연극인들이 3‧1운동을 기념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전유하고자 기획했던 좌파성향의 연극제였다.7) 그리고 1948년 문교부 주최로 열린 ‘전국연극경연대회’는 좌파연극에 대한 안티테제로 민족진영에서 실시한 연극 행사였다.8) 이들 연극제는 모두 이데올로기적 구성물로써 연극을 생산하는데 공식적인 목적을 두었다. 이렇듯 근대 한국연극은 예술성의 추구보다는 선전과 홍보용으로 도구화된 탓에 단명했고, 이후 창작극 기근의 깊은 골을 번역극이 대신 메워 온 것이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연극계의 실상이었다.9)

    한국연극은 자생적인 기반을 채 마련하기도 전에 내적으로는 번역극의 무분별한 수용, 외적으로는 정치‧사회적 격변기라는 혼란한 상황에서 현대극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1973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발족되었고, 1977년 문공부가 ‘대한민국연극제’를 시행하여 창작극 발전의 도약대를 마련하였다. 창작극의 발굴 및 활성화를 위해 경연형식으로 시작된 대한민국연극제는 처음 상연되는 창작극만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창작극의 산실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제10회 대한민국연극제까지 초연된 창작극만 해도 모두 81편이다.10)

    대한민국연극제는 창작극의 지원과 발전이라는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출발한 제도이다. 따라서 다른 장르의 예술제와 마찬가지로 그 내용이 되는 작품들을 통해 행사의 성격이나 특징이 규정된다. 또한 개별 작품은 작가를 비롯한 연극 주변의 제도적, 사회적 영향을 통해 형성되고 그 안에서 의미를 갖게 된다. 물론 대한민국연극제 출품작이 반드시 한국사회의 정치, 사회, 문화적 변화과정을 기계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연극이 사회 환경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그러한 관련성과 아울러 개별 작품에 대한 제도적, 사회적 영향이 연극제 무대에 반영되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제도적 측면의 중심 요소는 극단‧극작가‧참가작 선정위원 등 인적 구성원을 들 수 있는데, 대한민국연극제를 일부 극단과 작가가 거의 독점하다시피 해왔다는 사실은 제도적 한계를 드러낸 것이었다. 이는 그만큼 역량 있는 작가와 극단이 많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부 극단과 작가들이 연극제의 특성에 부합하는 작품 경향을 파악하고 창작에 임했다는 사실을 시사해주는 것이기도 하다.11)

    연극제의 인적 편향성은 참가작 선정위원들의 분포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제15회 연극제까지 총 8회에 걸쳐 참가작 심사에 참여한 차범석(극작가), 여석기(평론가)를 비롯해 5회에 걸쳐 참가한 선정위원들까지 총 6명이 전체 심사 횟수의 40%에 육박하는 비율을 보이고 있다.12) 이러한 현상은 연극제 참가작이 일반적으로 ‘극단의 참가신청-심사위원의 참가작품 선정-공연’이라는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일종의 관례를 성립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 작동했다. 때문에 선정위원들은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이 신청되었을 때, 새 형식에 대해 배타적이었고 특정 양식을 매도했다. 예컨대 연극제 시행 10년을 경과하면서 작품 선정의 가치 기준이 권위적으로 굳어져 마당극적 요소를 배제한 사실이 그것이다.13)

    한편 연극제에 미친 사회적 요소 면에서 살펴보면 관주도형으로 개최되었 1977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의 정치‧사회‧문화적 환경은 상당한 범위의 변화를 겪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대한민국연극제가 시작된 1977년은 박정희의 유신정권 말기였고, 1980년 5월에 광주항쟁을 겪었으며, 서울연극제로 명칭변경을 하기 직전인 1986년까지가 제5공화국 시대였다.

    유신정권 하에서 창작 및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했던 연극계가 비상의 몸부림을 시작한 것은 1980년 광주의 봄을 맞이하면서부터였다. 연극인들은 그 동안 터부시되었던 정치‧사회 문제들을 극화해 풍자, 고발의 무대를 조심스럽게 시도했다. 그러나 5공화국의 문화예술정책의 고삐는 제3공화국에 비해 조금도 늦추어지지 않았다. 공연중지, 정지사례가 빈번해지고 사전심의를 둘러싼충돌이 잦았다. 1981년 12월 <에비타>가 이유 없이 공연금지 당했고, 1984년 7월 공해문제 마당극 <나의 살던 고향은>이 대사를 개작 공연했다는 이유로 6개월간 공연정지 처분을 받았다.14) 연우무대의 제8회 대한민국연극제 출품작 <한씨연대기>가 당시 미공연된 이유는 바로 극단 연우무대의 공연정지 처분 때문이었다.15) 근대극이 시작된 이래 일제에 의해 강행된 극장취체와 대본 검열제도가 제6공화국이 들어서기까지 지속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였다.

    1983~1984년도 연극제 출품작에 전쟁 소재가 급증한 이유는 1983년 이산가족 찾기 운동의 여파로 인해 한국전쟁의 후유증이 정치‧사회적 이슈로 표면화된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현상으로 해석된다. 이재현의 <적과백>(1983)과 오태석의 <자전거>(1983), 황석영의 <한씨연대기>(1984) 등이 그것이다. 이들 작품들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삼되 이데올로기 갈등을 노골화하기도 하고 개인의 삶에 미친 전쟁의 폐해를 폭로하는 등 주제나 표현양식 면에서 다양성 보여준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갈등의 요인은 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어 그 초점이 반공이데올로기 자체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 시기의 작품과 구별된다.

    1987년 6‧29선언과 함께 연극무대에도 표현자유의 물결이 일었다. 정치‧사회 상황의 코페르니쿠스적 일대 전환이 문화예술계에도 투영되어 표현자유 및 영역의 확대 바람이 일었고 연극계에 가장 두드러진 변화를 가져왔다. 1982년 희곡 발표 이후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 심의에서 5번이나 반려되었던 <불가불가>가 서울연극제에 참가하는가 하면 1980년대를 대표하는 광주문제를 비롯해 정치비리, 사회부조리, 고문 등을 소재로 한 희곡들이 공윤의 심의를 통과해 속속 무대에 올려졌다. 극단 세실의 제11회 서울연극제 출품작 <불가불가>는 표현자유 확대의 대표적인 무대였다. 작가 이현화가 1981년 탈고한 후에 1986년까지 해마다 공연을 기획했으나 매년 이런 저런 이유로 심의에서 반려되어 연출가 채윤일이 연극을 그만두려고까지 했던 작품이다. 1988년 이른바 <매춘> 파동으로 공윤의 공연예술 검열이 대폭 완화되었고, 드디어 1989년부터 대본심의를 받지 않고 공연할 수 있도록 공연법 시행규칙이 개정되었다.16) 이렇듯 문화해금을 계기로 연극규제가 풀리고 있을 즈음에 대한민국연극제는 서울연극제로 명칭을 변경하고 민간주도형 축제로 전환하였다.

    대한민국연극제는 창작극 육성과 발전을 위한 정부 시책으로 1977년부터 시행된 제도이자 행사였다. 애초 창작극의 진흥과 지원이라는 취지를 살리면서 10년간 지속되어온 대한민국연극제에서 한국전쟁을 극화한 역사극은 사회적 매체로서의 연극이 정치‧사회적, 제도적 변화에 영향을 받으면서 역사를 선별, 재생산, 배포해 가는 담론 구성방식의 역사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해방정국 이래 최대의 격동기를 맞았던 시대적 급류 속에서 이산가족 찾기와 같은 사회적 파장이 연극계에 충격파를 던졌고,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분열 양상을 직‧간접으로 체험한 작가들은 각기 다양한 기억 경험과 표현양식을 통해 한국전쟁을 재현하고 있다.

    6)이두현, 『한국신극사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6. 278~282쪽 참조.  7)「연극동맹의 다채한 행사」, 『중앙신문』, 1946.2.18.  8)이두현, 앞의 책, 284쪽 참조.  9)송애경‧박정영, 「지난 70년대와 80년대 그리고 90년대를 통해 우리 연극은 양적, 질적 변화와 성장을 해왔다」, 『문화예술』 1999. 8, 29쪽 참조. 이에 따르면, 창작극과 번역극 공연편수는 1976년 46:89편, 1977년 29:96편, 78년 38:87편, 79년 68:93편으로 줄곧 번역극의 양적 우세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987년에 이르면 창작극과 번역극 공연편수의 비율이 역전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당시 국제무역법인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서 저작권법이 발효되어 해외번역극에 대해 막대한 저작료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다.  10)염창선, 「<서울연극제> 출품작들의 작품 성향 연구」, 동국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2. 4쪽.  11)한준서, 「문예제도로서의 서울연극제에 관한 일고찰」, 서강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1. 37쪽. 1회~15회까지 연극제에 참여했던 극작가와 극단을 대략 살펴보면, 극작가의 경우 윤조병이 11편으로 가장 많은 작품을 양산했고 그 뒤를 이어 이재현, 오태석이 9편, 차범석, 이강백이 각각 8편을 기록하고 있다. 극단별 참가횟수도 일부극단에 의한 집중현상이 드러나고 있는데, 민예와 성좌가 10회로 가장 많은 참가경력을 가지고 있고, 현대와 여인이 9회, 실험과 민중이 각각 8회와 7회에 걸쳐 참가하였다.  12)한준서, 위의 논문, 41~42쪽 참조.  13)구히서‧이상일, 「대한민국연극제 10년 결산 좌담회: 제도적 한계의 극복」, 『한국연극』 1986.11. 55~56쪽 참조.  14)김승옥, 「전환기 한국연극의 갈등과 모색」, 『예술현장』, 문예총서 14, 문예진흥원, 1990. 35쪽.  15)≪제8회 대한민국연극제 희곡집≫,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85, 427쪽 참조. 황석영 작‧김석만 연출 <한씨연대기>는 84.9.7~9.12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예정이었으나 극단 사정으로 공연이 미뤄졌고, 1985년 4월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연되어 동아연극상 작품상, 백상예술대상 신인 연출상 및 연기상을 수상했다.  16)김승옥, 앞의 글, 36~37쪽.

    3. 한국전쟁의 기억과 연극적 재현 양상

       3.1. 만들어진 역사의 알레고리적 재현

    이근삼의 <아벨만의 재판>(1975)은 문화적 기억이 단순히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타협을 하고, 매개되고 적응되는 과정임을 파헤친 희곡이다. 즉, 문화적 기억이 특정한 권력담론에 종속되어 있음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작가는 이를 전범 재판을 소재삼아 알레고리 수법으로 재현하고 있다. 알레고리는 확대된 메타포로서, 작가와 수용자 사이에 명시적 선행 관념이 존재할 때에 의미를 획득한다. 작가와 관객 사이에 공유하는 관념이 없다면 알레고리는 비유로서의 힘을 상실한다. 작가의 말을 살펴보자.

    작가의 변백에도 불구하고 <아벨만의 재판>은 한국전쟁과 당시 정치현실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유신정권 체제아래 집필된 이 희곡은 작가 스스로 몇 차례 개작을 거듭할 수밖에 없을 만큼 자기 검열을 요구했던 어두웠던 정치‧사회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푸코는 전쟁관계가 권력관계의 기초라고 보면서 전쟁이란 법적인 관계의 단절, 즉 강자의 약자에 대한 무조건적 지배라고 말한다.18) <아벨만의 재판>은 이러한 전쟁의 폭력 지배구조를 여실히 드러낸다. 해방군 사령부 연락관이 전범자 처리 문제에 협조해 줄 것을 당부하자 주민대표들은 압력에 굴복해 타협점을 찾는다. 살아남기 위해 없는 전범자를 만들어 희생양으로 삼자는 것이다. 결국 적군 점령 하에서 전쟁고아들을 돌본 청년 아벨만이 제물로 선택된다.

    등장인물들은 정치적 위기에 처한 인간의 다양한 반응 양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벨만을 희생양으로 처단한 뒤에 스스로 국민의 하수인임을 자처하는 재정관, 모호하게 중립을 부르짖는 지식인 작가, 판결 조작에 가담한 마을유지들은 결국 살아남기 위해 약자배제의 지배체제에 동조한다. 이는 독재의 논리가 힘의 논리이고, 이를 따르는 주변의 인물도 그 선택과 행동방식에 있어서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적군이 쳐들어오면 도망가고, 전범을 찾아 내라면 없는 전범도 만들고, 누군가가 귀찮은 존재를 없애주길 기다리고, 여기에는 의지적 행동이 없다. 유예와 방치, 불안 속에서 편의주의적 흐름을 타다가 어디선가 약한 곳에서 파열음을 낸다. <아벨만의 재판>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역사’의 이야기다.19)

    작가는 전범재판에서 희생된 무고한 약자의 이야기를 알레고리 기법으로 그려내면서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를 날카롭게 풍자한다. 권력의 압력에 못 이겨 죄 없는 인간을 전범으로 몰아 희생시키는 이야기 자체가 새로울 것은 없지만 <아벨만의 재판>에서는 인간 잔악성의 메커니즘이 잘 표현되어 있다.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에서 서로 다른 이익집단과 계층 간의 이해가 상충되고 불화하면서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사회구조적 악이 가감 없이 들춰지고 있는 것이다. 알레고리의 성공으로 이 극은 한국전쟁 이후 전범재판이 벌어진 특수상황을 환기케 하며, 구조적 악이 자행되고 있는 사회의 힘의 논리를 문제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3.2. 무명용사 추모와 실향민의 애상

    이재현의 <비목(碑木)>(1977)은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무명용사들을 추모하고 있다. 이들 무명 전몰 용사에 대한 기억을 실향민의 애환과 세대 갈등을 통해 부각시킨다. 인간은 과거의 경험과 사건에 대해 기억과 망각을 되풀이 한다. 그러한 반추 과정에서 특별한 경우에는 그것을 기념하고자 한다. 국가는 전쟁이나 혁명 등 국가가 형성‧유지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기념하면서, 국민통합과 질서유지의 효과를 함께 얻는다. 그러나 이런 기념은 그 자체가 갈등의 장이기도 하다. 공동 지식의 특정한 토대가 사라지게 되면, 시대와 세대 간의 의사소통이 단절되기 때문이다.

    서사극 양식인 이 극의 도입부는 6‧25전투 현장의 참혹한 모습과 국립묘지의 묘비들이 투사되고, 진혼곡이 울리면서 전몰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어 현실 공간인 화석정 주민들의 삶이 펼쳐지는데, 지역민들이 민통선을 넘어 출입 영농을 하고 있는 동파리는 전쟁 이후 여러 해 동안 망향의 땅이었으나 1971년 정부의 접적 지역 개발 계획에 따라 실향민들에게 개방된 지역이다.

    주인공 윤구노인에게 고향땅인 동파리는 집단적 망각의 단계를 넘어 기억을 확인하고 보존할 수 있는 장소이다. 윤구노인이 이곳에 집착하는 근본 이유는 동파리 전투에서 전사한 차남 창윤의 묘비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과거는 소실되어 찾아볼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베일에 싸인 아들의 흔적은 장소의 고증을 통해 확인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고증의 기능을 하는 유적이 바로 ‘비목’이다. 비목은 망각의 심연을 넘어 과거 전쟁의 경험을 현재와 연결시켜 주는 가교의 역할을 하게 된다. 가곡 ‘비목’20)을 즐겨 부르는 고교생 상옥은 겨레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삼촌 창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상옥의 모친 봉순은 20여년 전 동파리에서 나눈 창윤과의 애절한 사랑을 회상한다.

    전쟁의 기념 방식 중 가장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방식이 기념비를 건립하는 것이다.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을 기념하는 것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전몰용사를 추모함으로써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국가를 위한 헌신을 자기정체성의 일부로 수용하도록 만드는 효과를 가져 온다. 이 과정에서 기념비는 집단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정치적 효과를 얻는다. 즉. 기념물은 특정 기억을 정형화시키고 기념 대상을 더욱 신비롭고 성스럽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이재현은 <비목>에서 무명용사의 죽음의 의미를 국가를 위한 희생으로 기념하려 한다. 윤구노인이 창윤의 죽음을 기념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제한된 가족의 작은 기억 공간을 시간적으로 제한되지 않은 큰 집단의 기억 공간으로 확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에 기술된 작가의 말을 살펴보자.

    작가는 ‘오늘의 젊은 관객, 적어도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들에게 가장 가까운 우리의 현실을 극화하여 진정한 전쟁의 의미를 전달하려는데’ 있다고 집필 목적을 역설하고 있다. 전후 한국 사회는 전통적 규제력이 약화되는 과정을 통해 개별화된 사회성원들을 국민으로 호명하는 새로운 국민통합 과정을 필요로 하였다. 이 과정에는 반공주의, 자유민주주의, 친미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기제와 국민개병제도 및 의무교육제도와 같은 사회적 기제들이 동원되었다.22) 이러한 국민통합 이데올로기 및 사회적 기제의 근저에는 무엇보다도 전쟁 경험과 경험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비목>은 전쟁의 참혹한 체험과 기억을 조국을 위한 고귀한 희생으로 전유하며, 국민통합을 도모하려는 시도를 실향민의 애환과 세대 간의 화해로 표출시키고 있다. 그러나 전쟁을 둘러싼 기억과 망각의 세대 갈등을 가족 간의 화합으로 안일하게 봉합시키고 있는 결말은 관객의 이성적 판단을 이끌어내는데 역효과를 불러내고 있다. 다음은 극의 마지막 부분이다.

    작가는 해설자의 입을 빌어 전몰용사의 희생을 상기시키는 한편, 전쟁을 낭만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후세들의 전쟁관에 우려를 표명한다. 나아가 안일한 안보의식을 경계하며 현재 대한민국은 휴전 상황임을 거듭 환기시킨다. 그런데 민족 수난의 유물인 ‘비목’의 사연을 여인의 한으로 포장해 애상성을 극대화하고 메시지의 호소력을 높이려는 전략은 극 형식과의 불화를 드러내고 있다. 미학적 성취 면에서 작가의 계몽적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서사 방식과 감상성이 충돌하면서 역사의식을 퇴색시키고 있는 것이다.24)

       3.3. 전쟁 포로의 기억과 수용소

    이재현의 <멀고 긴 터널>(1978)은 해주형무소 집단 학살 사건을 소재로 삼아 북한군 중위 출신포로 윤석진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국가 폭력의 실상을 폭로하고 있다. 해주 형무소 사건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직후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형무소에 수감된 사상범 수백 명을 열차에 태운 뒤 터널 안에서 집단 학살한 사건이다. 집단 학살은 전쟁의 비인간성과 비극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준다.25)

    이재현은 전쟁의 희생자에 불과한 윤석진을 심판대 위에 끌어내고, 수사극의 형식을 통해 역사적 사건의 진상을 객관적으로 조명하려 한다. 극한 상황에 봉착한 윤석진의 두려움, 그가 공포에 휩싸여 저지른 우발적 행동은 전쟁의 극한 공포 속에서 연약한 인간이 보여준 행동방식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극은 핵심은 한 개인에게 그러한 행동에 책임을 묻고 대가를 요구한 국가 폭력과 집단적 대응 논리를 폭로하는데 있다. <멀고 긴 터널>은 개인을 역사의 희생물로 삼고 폭력적 심판을 자행해온 과거사에 대한 재평가를 요청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다음은 주범 규명을 놓고 공방을 벌이는 장면이다.

    <멀고 긴 터널>은 집단학살 문제를 전면에 배치하고 그것을 주도한 국가폭력과 비인간적 인권침해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조사과장 박대위는 최초의 사격이 도화선이 되어 학살이 자행되었기 때문에 전범자는 바로 윤석진이라고 주장하고, 김중위는 전쟁의 책임을 개인에게 묻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으며, 그러기에 그 전쟁에 참여한 모두가 차라리 전범자라고 강변한다. 이렇듯 주범 규명을 놓고 날선 공방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결정적인 증인이 나타남으로써 사태가 급선회한다. 사건 화물열차의 기관사였던 현창우가 장수산 터널학살사건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고 모든 것이 상부의 지시대로 진행됐다고 증언한 것이다. 이로 인해 윤석진은 학살의 책임을 면하게 되지만 집단학살 현장의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수많은 인명이 죽어간 전쟁의 후유증은 한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윤석진의 내면에 깊은 회의와 죄의식을 심어주었고 그는 정신적 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살한다. <멀고 긴 터널>의 윤석진은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모르는’,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철망’ 속에 갇힌, ‘설 땅이 없는’ 개인의 비극을 부각시켜 보여준다. 그러나 인물창조를 통해 극적 긴장감을 높이기보다는 기록극 수법으로 진행시키고 있는 극에서 내레이션의 의존도가 높아 구성면에서 느슨한 한계를 보여준다. 이에 반하여 <적과 백>에서는 인물창조에 역점을 두고 극의 액션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재현은 <포로들>(1972), <멀고 긴 터널>(1978)에 이어서 <적과 백>(1983)을 마지막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 3부작을 완성한다.27) 국립극장에서 공연된 <포로들>에서 작가는 김영철이라는 민초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무고한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간 전쟁의 폭압성과 공산이데올로기의 잔혹성을 폭로 고발하는데 주력했다면, <적과 백>에서는 작품의 후경에 있던 투항 포로장교 이학구를 전경에 내세워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개인의 비극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를 위해 작가는 남북 양측 모두의 모순과 불합리를 고발하면서 이데올로기가 아닌 인도주의적 피해자의 입장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한국전쟁 포로문제에 대한 이재현의 접근은 한국 희곡사에서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대체로 전쟁 포로문제는 종전 후 모두 송환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체제 아래 일어났던 한국전쟁에서는 매우 복잡했다. 유엔군과 공산 측은 휴전협상이 지연되고 있는 가운데 공산포로 중 송환거부 포로문제를 통해 각각 이념적 우세를 실현하려고 했다. 1951년 7월 휴전협상이 시작되면서 양측은 38선에 교착된 전선에서 소모전을 치루면서 한편으로는 거제로 포로수용소에서 또 다른 전쟁을 수행했다. 포로문제가 장기화된 것은 유엔군 측의 자원송환원칙과 공산 측의 강제송환원칙이 서로 대립했기 때문이었다.28) <적과 백>의 주인공 이학구는 이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희생된 인물이다.

    북한군 포로장교 이학구는 이제 고인이 되어 자신의 입장과 처지에 대해 해명할 길이 없지만, 연극을 통해 지나간 역사를 호출하고 역사의 심판대 위에 다시 선 자신을 후대들이 올바르게 판단해줄 것을 요청한다.

    이재현은 <적과 백>에서 이학구의 삶을 그 자신의 관점에서 재현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있다. 신기자라는 인물을 이야기의 기록자로 설정하고 그를 매개로 이학구의 이야기를 구성한다. 극중 신기자는 객관적 사실의 전달자로서 설정되어 있지만, 그의 입장은 선험적으로 우익의 입장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적과 백>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남북 양측 모두의 모순과 불합리 고발하고, 이데올로기가 아닌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역사의 책무를 묻고 있다는 점에서 한층 진보한 관점을 보여준다.

    <적과 백>이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닌 인간애를 부각시키고 있다는 것은 북한군 장교출신 이학구가 유엔 측에 의해 정치적으로 동원되어 수용소 대변인으로 투입되고 결국 희생양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이학구는 국군에게 투항한 이후 유엔군 측의 포로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이용된다. 이는 인간 이학구가 아니라 정치적 표상으로 이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반공포로는 한국전쟁 공식 내러티브에서 남한의 정당성 내지 우월성을 옹호하는 주요한 근거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이들은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것은 반공포로가 대한민국의 적이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반공포로가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갱생’의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이는 이학구에게 포로수용소 내의 대변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존재증명을 통해 반공포로의 반공투쟁신화는 완성되고 그는 대한민국의 국민이 된다.30) 그러나 이학구는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 이학구의 불안정한 위치는 양측으로부터 ‘배신자’, ‘변절자’라는 압박을 받게 만든다.

    공산 포로수용소 내의 최고책임자 이인철은 이학구의 환영행사에 앞서 제국주의를 찬양한 반동인사를 가혹하게 처형하는 ‘용광로 재판’ 현장을 보여주면서 그를 공포로 몰아간다. 용광로 재판에서 드러나는 것은 공산 포로들의 잔혹한 살상 행위이다. 그들은 용광로 재판을 통해 투항전력이 있는 이학구를 심리적으로 옥죈다. 이로써 수용소에 걸린 ‘우리는 이학구총좌의 입소를 환영한다.’는 플랜카드는 이학구를 유인하기 위한 공산포로들의 전략이었음이 드러난다. 참모들은 이학구의 투항 전력을 소상히 밝히며 사형에 해당하는 이학구가 목숨을 부지하려면 인민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하라고 협박한다. 이렇듯 양측으로 부터 이중의 시선을 받은 이학구는 절망을 내면화하며 냉정하게 대처한다.

    이학구는 제네바협정 포로조항이 평지풍파를 일으켰다며 유엔군 측에 제도적 문제점을 강도 높게 성토한다. 그리고 이후 생명과 생활에 대해 포로들이 아무것도 보장받을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을 좇아 투항 포로가 된 부하들의 안위를 걱정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학구는 인간의 만든 제도의 허점에 맞서 싸웠던 인물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자신을 희생해, 남은 자들을 살리는 길을 선택한다. 그는 양측 모두의 이데올로기 시선과 맞서 싸우면서 나름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실천한 인물인 것이다.

    <적과 백>이 고발하는 것은 이데올로기 대립의 모순이며 그 폭로 속에 내재된 세계관은 전쟁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다. 인간성을 말살하고 생명을 경시하며, 삶을 파괴하는 전쟁의 메커니즘의 허구성을 들춰보여 준다. 극중 이학구는 이데올로기와 제도, 편의주의의 틈바구니 속에서 무화된 존재로 포획된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 무대 위에서 사라져 간 자신을 불러내 새로운 심판을 요청한다. 연극적 재현을 통해 자신이 결코 무화된 존재가 아니며, 이 사회의 역사를 함께 써나간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적과 백>은 한국전쟁을 소재적 차원의 재현 대상으로 보지 않고 비판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1950년대 전쟁소재극의 재현 단계보다 진일보한 의식수준을 보여준다.

       3.4. 집단학살의 경험과 정신적 외상

    오태석의 <자전거>(1983)는 한국전쟁을 겪은 등장인물들의 정신적 트라우마31)에 초점을 맞추고 근대사의 동족 상흔을 파헤치고 있다. 인물들의 정신적 외상은 주인공 윤서기와 그의 당숙, 그리고 6‧25 때 집단학살을 경험한 마을주민 모두에게서 표출된다. 따라서 전쟁 경험으로 인한 인물들의 정신적 외상장애가 극중 갈등과 긴장 조성의 원인으로 포진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윤서기의 내면탐색 과정이 극의 서사가 된다.

    오태석은 ‘길가에 암장된 처녀가 야밤에 길가는 사람 불러잡는 바람에 졸도, 이후 경기로 눕게 되어 42일간 출근이 불가하였기로 결근계를 제출’하게 된 면사무소 직원 윤서기의 이상 체험을 계기로 서사를 풀어간다. 동료직원 구서기가 결근계에 담긴 황당한 내용을 읽고 난 후 자초지종을 묻자, 윤서기는 기억재생을 위해 42일 전 사고발생 당일로 거슬러 올라가며 추체험한다.

    윤서기가 기절하던 당일은 아버지의 기일이자 마을 전체의 제삿날이다. 즉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의해 학살된 마을 사람들을 추도해 제사를 올리는 애도일이다. 여기서 제삿날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은 윤서기, 그의 당숙은 물론 마을 사람들이 과거의 정신적 외상을 재경험하는 기억 매체로 작동된다. 해마다 반복 경험되는 마을의 제삿날은 유예된 상처 회복의 시간적 재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면사무소라는 공간적 배경은 과거 사건이 발생한 체험의 공간이며, 윤서기가 졸도한 산길은 억압된 정신적 외상이 분출한 무의식의 공간이 된다.

    윤서기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단편적인 모습은 어머니의 구술 회상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다. 게다가 윤서기의 모친은 남편 윤정태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모르고 있다. 은폐된 진상 때문에 그녀는 남편을 죽게 한 시동생 윤정목을 남편 보듯 바라보고, 윤서기 또한 그를 부친 보듯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오태석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 해결할 수도 없고 해결되지도 않을 역사의 비극을 친족 살해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과 망각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

    등기소 방화 사건은 윤서기가 돌을 막 지날 무렵에 일어난 일로 그의 기억경험 속에는 저장되어 있지 않다. 윤서기에게 있어서 한국전쟁의 참화는 해마다 제삿날이 돌아오면 이상행동을 보이는 당숙을 통해 현재의 상처로 각인될 뿐이다. 윤서기의 당숙은 인민군의 강요에 의해서긴 하지만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등기소에 불을 질러 백여 명이 넘는 마을 사람들을 죽게 한 장본인이다. 한 세대가 지난 지금, 마을에서는 인공 때에 희생된 사자(死者)들을 애도하고 기념하기 위해 추모비를 건립하고 정신적 외상을 치유하려 한다.

    그러나 당숙 개인으로서는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깊은 상처로 남아 자책을 거듭하는 행동으로 돌출된다.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애도 의식은 정신적 외상 장애를 겪는 사람들의 치유를 위해 가장 중요하면서도 고통스러운 과정이다.32) 당숙이 사금파리로 이마를 자해하며 자신의 죄를 고해하고 스스로를 처단하는 행위가 그것이다. 당숙에게 있어서 한국전쟁의 기억은 언제 현상될지 알 수 없는 음화와 같은 것이다.

    오태석은 <자전거>에서 한국전쟁 당시 윤서기의 당숙이 저지른 등기소 방화사건을 문둥이 부모를 둔 처녀의 방화사건과 중첩시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형님을 죽이고 살아남은 당숙의 천형은, 끊을 내야 끊을 수 없는 혈육이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 부모를 부인해야 하는 문둥이 자식의 업보로 재현된다. 한국전쟁이 남긴 이 후유증은 마치 천형을 앓고 있는 문둥이처럼 치유될 수 없는 상처임을 보여준다.33) 다음은 극의 마지막 장면이다.

    정신적 외상을 지닌 사람은 자신이 겪은 충격적 체험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그가 받은 외상은 정상적 인식 체계를 손상시킬 만큼 파괴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파편화된 흔적으로 남아있게 된다. 따라서 정신적 외상 장애를 겪는 사람들은 당시의 경험을 처음과 끝을 갖춘 이야기로 서사화하고 납득할 수 있는 기억의 형태로 재구성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게 된다.35) 그런데 극의 결말에서 제출된 결근계의 내용은 윤서기의 정신적 외상이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채로 억압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극 도입부에서 보여준 황당한 내용의 초안과 비교해 볼 때 사실적 근거들을 구비해 작성된 듯 보이지만, 그가 추체험한 기억의 진상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결말은 한국전쟁의 비극이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과거의 경험과 사건을 기념하는 행위 가운데서 가장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방식이 기념물을 건립하는 것이다. 오태석의 <자전거>에서 마을 사람들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해 학살된 마을 유지들을 기념하고 애도하기 위해 추도비를 세우려고 한다. 그러나 <자전거>는 이러한 공적 기념 의지를 부각시키려는 희곡이 아니다. 개인의 억압된 기억에 주목하고 그 억압을 정신기제로 풀어내려 한다. 때문에 추모비 건립을 둘러싼 지배 이데올로기와 대항이데올로기 사이의 갈등 여부는 아예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한 개인의 통합과정에서 일어난 상처를 극대화하고 이를 역사 앞에 던져놓고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3.5. 이산가족과 분단 극복의 과제

    황석영의 <한씨연대기>(1984)는 전쟁의 시련과 이산의 고통을 피난민 의사 한영덕의 삶을 통해 조명하면서 분단 극복의 과제를 성찰케 하는 작품이다.

    한국사회의 이산가족은 한국전쟁으로 급증해, 1950년 12월과 이듬해 1월 초, 1‧4후퇴 직전에 남하한 피난민의 수만도 100만에 이른다. 이산가족 문제가 중요시되는 이유는 한국전쟁이 가족공동체의 삶을 파괴하고 수많은 가족의 연대성을 죽음과 생이별로 해체‧단절시켰다는 점 때문이다. 이는 KBS가 1983년 6월말부터 7월 12일까지 접수한 이산가족 찾기 신청자 10만여 명 중 약 70%가 한국전쟁 중에 헤어졌다는 응답에서도 재확인된다.36) <한씨연대기>의 주인공 한영덕이 겪는 전쟁과 분단의 고통은 한국근대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체감케 한다.

    한영덕의 개인 서사, 즉 ‘한씨일대기’는 한국전쟁을 전후로 양분되는 양상을 보인다. 무엇보다도 한국전쟁과 관련된 체험들은 그의 인생을 뒤바꿔놓는다. 김일성대학 의학부 교수였던 그가 전쟁발발 직후 중앙인민병원 배치되고 당의 명령 위반, 동료교수 서학준의 도피방조 등의 죄목으로 반동분자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은 일, 처형장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뒤 가족과 헤어져 단신 월남한 후 아들 창빈을 찾기 위해 포로수용소 부근을 배회하다 적성분자로 오인되어 감시받은 일, 무면허 의사 박가 일행과 동업하다 불법 낙태수술자로 누명을 쓰고 직업을 뺏긴 일, 간첩으로 체포되어 혹독하게 고문당하고 무고하게 빨갱이로 내몰린 일 등은 한국전쟁 이후 그가 남북한 사회에서 겪은 적대와 모멸이다. 한국전쟁의 후유증은 그를 보통 사람들과 변별된 존재로 소외시킨다.

    한영덕은 남북한 사회 모두에게서 폭력과 처벌을 경험한다. 그런데 극이 재현하고 있는 현실은 분단 이후 남한 사회에서 경험한 일상이다. 북한을 탈출해 월남한 그는 반공이데올로기에 의해 경직된, 제도화된 감시체계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박탈당한다. 제도적 감시와 타인의 부정적 시선으로 인해 한영덕은 한국사회에서 침묵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로 도태된다. 더욱이 한영덕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념이나 경향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다.37) 때문에 이념 편향의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고 경계선 밖으로 밀려나는 존재가 된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은 6.25 이전 북한에 거주하던 사람들에게는 월남으로 공식화되었으며, 서울 등지에 거주하던 사람들에게는 공산주의를 피하기 위한 행동으로 정식화되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또 하나의 건국신화를 만들어 낸 피난은 ‘국민의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는 중요한 징표이자, 공산주의의 접촉으로부터 이념적 순결을 지키게 해준 성스러운 엑소더스의 기억이었다.38) 전쟁미망인이 된 여동생 한영숙은 남한에서 자리 잡은 서학준을 찾아가 ‘빨갱이’로 몰린 오빠의 억울함을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당시 ‘빨갱이’의 낙인을 받은 사람은 사이비 한인(韓人) 혹은 비국민의 취급을 당했다.40) 즉 ‘빨갱이’라는 명명은 그대로 한 개인을 매장시킬 수 있는 폭력이었다.41) 결국 한영덕은 전쟁 이후 차례로 겪은 적대, 모멸, 좌절의 기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실로부터 유폐된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타인과의 관계 및 집단 내의 역할 규정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정체성을 확립한다. 하지만 한영덕은 한국사회에서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였으며, 심지어는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조차 빼앗긴다. 분단과 이산의 슬픔은 고향과 혈족이라는 원초적 관계를 강제로 박탈당했다는 심리적 타격에서 더 나아가, 사회생활에서 지연과 혈연이라는 기반 없이 그러한 기반을 가진 사람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 악조건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42) 때문에 그는 훌륭한 의술을 지닌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뜨내기 장의사 염사로 전전하다 잠적해 역사의 기억으로부터 망각되어 간다.

    <한씨연대기>의 서사구조는 한영덕의 장례를 극은 도입부에 배치하고, 각 장면마다 역사의 흔적들을 추적해 분단의 현실과 직면케 하며, 그 죽음의 의미를 사유케 하는 방식이다. 극의 전제로 제시된 한영덕의 죽음을 통해 한국근대사의 비극을 파헤치고 역사 앞에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 질문은 한영덕의 유일한 혈육 한혜자에 의해 제기된다.

    전보를 받고 한영덕의 장례식에 찾아온 딸 한혜자는 지난 세대가 겪은 일들의 전말을 알 수가 없는 세대이다. 이리저리 전전하며 가족과의 대면을 기피하고 잠적한 아버지 한영덕, 전쟁미망인이 된 후 한영덕과 재혼했다 헤어져 또다시 재혼한 어머니 윤미경, 이들이 한혜자 가족사의 배경이다. 따라서 갓 스물인 혜자는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다음은 한영덕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1장의 마지막 장면이다.

    한영덕의 죽음을 통해 모든 것이 다 ‘끝’난 일로 묵과하려는 기성세대를 향해 한혜자는 자신은 ‘시작’도 모른다고 항변한다. 자신의 입장에서 무엇을 애도해야 할는지 알 수가 없다고 저항한다. 아버지 한영덕은 한국사회의 특수한 사회‧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긴 시간 침묵하고 그림자로 여겨졌던 인물이다. 일방적으로 거절당하고 유폐되어버린 한영덕의 삶이 ‘한씨’ 개인 혹은 가계의 몰락으로 역사의 공식 기억에서 망각되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애도하기를 거부한다. 이는 아버지 한영덕의 죽음을 통해 한국근대사와 대면한 한혜자가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나 자신을 위한 정체성으로서 개인적 정체성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정체성으로서 사회적 정체성은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다. 다음 세대인 한혜자의 정체성은 다양한 삶의 관련성 속에서 즉, 상대자들과의 만남과 반영, 협상의 과정을 통해 창출된다.44) 이 과정에서 창조되는 것이 ‘공유된 역사’이다. 따라서 한혜자가 던지는 질문은 자신과 사회의 공유된 역사를 창조해 나가는 몸부림이라 할 수 있다.

    <한씨연대기>는 한 개인의 비극을 통해 민족 전체의 비극을 조망하고 통일의 역사적 과제를 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한국전쟁의 피해를 단순히 한 개인의 비극으로 재현하지 않고 현재 시점에서 우리가 풀어야 할 역사의 과업으로 열어놓고 있다는 점에서 열린 전망을 보여준다.

    17)이근삼, 작가의 말, ≪제1회 대한민국연극제 희곡집≫,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8. 181쪽.  18)미셀 푸코, 박정자 옮김,『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동문선, 1997. 85쪽.  19)이승규, 연출가의 말, ≪제1회 대한민국연극제 희곡집≫,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8. 182쪽.  20)희곡 <비목>은 가곡 ‘비목’에서 비롯되었다. 이재현은 작사자 한명희와 서울대학교 동기동창으로 그에게서 ‘비목’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명희는 ROTC장교로서 화천 북방 백암산에서 복무하며 비목의 현장을 목격했다. 산목련이 만발한 민통선 북방지역, 김일성고지와 마주하고 있는 그곳은 인적이 끊긴 지 20여년이 지나 무성한 잡초만이 자라는 외지고 쓸쓸한 곳이었다. 이곳에 방치된 ‘비목’의 사연이 이재현에게 큰 공감을 줬기 때문에 곧 집필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재현, ≪제1회 대한민국연극제 희곡집≫, 321쪽 참조.  21)이재현, 위의 책, 321쪽.  22)강인철, 「한국전쟁과 사회의식 및 문화의 변화」, 『한국전쟁과 사회구조의 변화』, 백산서당, 2002, 204~205쪽.  23)이재현, 앞의 책, 377쪽.  24)제1회 대한민국연극제를 관극한 연극평론가 이상일은 ‘비목의 현장이 연극으로는 신파조가 되어 비감스럽기보다는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준다,’고 피력하고 있다. 「연극 속에 새겨진 6‧25의 흔적」, 『한국연극의 문화형성력』, 눈빛, 2000, 79쪽.  25)김동춘, 앞의 책, 284쪽.  26)이재현, <멀고 긴 터널>, ≪제2회 대한민국연극제 희곡집≫,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9, 38쪽.  27)이재현, 작가의 말, ≪제7회 대한민국연극제 희곡집≫,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84. 229쪽.  28)조성훈, 『한국전쟁과 포로』, 선인, 2010, 15~17쪽.  29)이재현, <적과 백>, 앞의 책, 179쪽.  30)이동헌, 「한국전쟁 후 ‘반공포로’에 대한 기억과 기념」, 『한국학논집』제40집,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6, 195쪽.  31)알라이다 아스만, 앞의 책, 24쪽. 몸속에 저장된 기억이 의식에 의해 전적으로 단절되었을 경우, 이를 트라우마라 한다. 트라우마란 몸으로 캡슐화된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증상으로 표현되고 회상기억을 차단한다.  32)Judith Herman, M.D., Trauma and Recovery, New York: Basic Books, 1992, p.188.  33)서연호 인터뷰, 「오태석의 창작활동」, ≪오태석 희곡집 4≫, 평민사, 1994, 334쪽.  34)오태석, <자전거>, ≪제7회 대한민국연극제 희곡집≫,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84, 120쪽.  35)Jenny Edkins, Trauma and the Memory of Politics,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40~43.  36)정성호,「한국전쟁과 인구사회학적 변화」,『한국전쟁과 사회구조의 변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편, 백산서당, 2002, 30쪽.  37)월남 이후 한영덕은 아들 창빈이 인민군 포로로 수용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수용소 부근을 배회하다가 적성용의자로 조사를 받는다. 심문관은 한영덕이 김일성대학 의학부 교수였다는 이유로 공작첩자 혐의를 두면서, 의심을 불식시키려면 자유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군의관으로 입대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하지만 한영덕은 전쟁을 돕는 일을 하지 않겠다며 거절하고, 요시찰 인물로 분류되어 민간 경찰에 이첩된다.  38)김동춘, 앞의 책, 119쪽.  39)황석영, <한씨연대기>, ≪제8회 대한민국연극제 희곡집≫,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85, 205쪽.  40)오제도 편,『赤禍三朔 九人集』, 국제보도연맹, 1951. 11쪽, 김동춘, 앞의 책, 374쪽 재인용.  41)같은 책, 374쪽.  42)조형‧박명선, 「북한출신 월남인의 정착과정을 통해서 본 남북한 사회구조 비교」,『분단시대와 한국사회』, 까치, 1985, 145쪽.  43)황석영, 앞의 책, 181쪽.  44)가브리엘레 루치우스 회네 , 박용익 옮김, 『이야기 분석』, 역락, 2006, 70쪽.

    4. 나오며

    본고에서는 한국전쟁의 기억과 재현 양상을 대한민국연극제 제1기(1977~1986)에 공연된 희곡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 시기는 정권의 강력한 통치이데올로기를 배포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기획된 국립극단의 ‘위로부터의 역사극’과 주류 연극에 맞서 민중사관에 영향을 받은 재야 단체들이 ‘아래로부터의 역사극’을 생산하는 등 해방 이후 다시 맞게 된 한국역사극의 융성기였다. ‘국가’와 ‘민중’이라는 거대담론이 경합하던 이때에 대한민국연극제 한국전쟁 소재극은 역사극 담론의 층위를 한층 두텁게 해주고 있다.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에 의하면 역사극은 일종의 ‘언어적 담론’ 행위의 소산이며 필연적으로 해석이라는 작업이 텍스트에 개입된다.45) 때문에 텍스트 해석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주관성이 개입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연극제출품된 한국전쟁 희곡들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이 전쟁의 종결과 함께 정지되어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들의 다양한 기억들 가운데 어떤 기억은 용인되고, 다른 기억은 가공되고 변형되면서 때로는 공식기억에 편입되기도 하고 망각되거나 소멸되고 있음을 드러냈다.

    <아벨만의 재판>은 문화적 기억이 특정한 권력담론에 종속되어 있음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이근삼은 전범재판에서 희생된 무고한 약자의 이야기를 알레고리 기법으로 그려내면서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를 이중으로 풍자하는 탁월성을 표출한다. 이는 멀게는 한국전쟁 이후 이데올로기의 재배치 과정에서 드러난 권력의 메커니즘을 폭로하는 것이며, 가깝게는 유신정권 아래에서 작가에게 자기 검열을 요구했던 어두웠던 정치‧사회 상황에 대한 환유이기도 하다.

    국난 극복의 희생적 발자취를 추모하고 있는 이재현의 희곡 <비목>은 반공안보의 가치관에 입각해 선별된 기억을 재현한다. 즉, 무명용사 추모를 통해 전쟁의 참혹한 체험과 기억을 조국을 위한 고귀한 헌신으로 전유하며, 국민통합을 도모하려 한다. 그러나 만성적 안보 위기 아래에서 작가의 계몽적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서사 방식과 감상성이 충돌하면서 역사의식을 퇴색시키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멀고 긴 터널>은 한국전쟁 당시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개인의 경험 기억을 망각된 기억으로 보고, 강요된 망각의 흔적을 추적해 역사의 진실을 새롭게 구축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집단 학살과 인권 침해를 문제 삼은 극에서 이 재현은 정치적으로 도그마화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도주의적 피해자 중심의 전쟁 기억을 재현한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수법의 기록극은 내레이션의 의존도가 높은 탓에 구성이 느슨하고, 인물의 심리 창조보다는 상황의 의존도가 높아 학살의 비인간성을 조명하려는 의도를 희석시키고 있는 약점을 드러냈다.

    전쟁포로 문제를 부각시킨 <적과 백>은 남북 모두의 모순과 불합리 고발하고, 이데올로기가 아닌 생명의 존엄성과 인권에 대한 역사의 책무를 묻고 있다는 점에서 한층 진보한 관점을 보여준다. 남북 양측에서 정치적 표상으로 이용된 인물의 비극을 그리되, 인간이 만든 제도의 허점에 맞서 싸웠던 개인을 통해 한국사회의 역사를 함께 써나간 소수자의 기억을 무대화하고 있는 점이 그러하다.

    <자전거>에서는 전쟁 당시 집단 학살의 경험이 남긴 정신적 트라우마를 보통 사람들의 기억 경험을 통해 전달한다. 한국전쟁의 공식 기억을 둘러싼 지배이데올로기와 대항 이데올로기 사이의 갈등 여부를 문제 삼지 않고 한 개인의 통합과정에서 일어난 상처를 극대화해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는 민족의 상흔을 조명한다. 오태석은 현대 한국 정치‧사회를 재생산해 온 원형으로서 6‧25전쟁의 해석에 있어서 정치적 담론을 배제하고 작가의 상상적 재현을 통해 민족의 통한을 극대화하고 있다.

    <한씨연대기>는 한 개인의 비극을 통해 민족 전체의 비극을 조망하고 통일의 역사적 과제를 반성적으로 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한국전쟁의 피해를 단순히 한 개인의 몰락으로 재현하지 않고 현재 시점에서 우리가 풀어야 할 ‘공유된 역사’ 창조의 과업으로 열어놓고 있다는 점에서 열린 전망을 보여준다. 황석영은 사회 내부에서 억압되고 잊혀진 주변부의 망각된 기억을 복원해냄으로써, 역사극이 소수의 존재를 의미 있게 확인하는 글쓰기의 실천적 무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 만들기 프로젝트에 동원된 국립극단의 반공 담론 역사극과 달리 대한 민국연극제에서 공연된 한국전쟁 역사극은 새로운 인식주체, 즉 공식 기억에서 잊혀진 주변부의 기억을 재현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이는 전쟁 피해자들의 ‘억압된 앎’을 집약하여 공식화된 ‘앎’에 도전함과 동시에, 전쟁에 대한 연극적 재해석을 통해 현재의 역사를 다시 읽자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들 작품의 재현 기법은 사실주의 양식에서 벗어난 서사 방식이 주조를 이루고 있음이 확인된다. 연극 외적으로 정치‧사회 현실의 첨예한 대립이 존재하였으며 내적으로는 새로운 극양식과 기법을 탐색하였던 이 시기에 서사극은 지배 담론에 대한 극작가들의 비판적 시선을 담아내기에 가장 편리한 방법적 차용이었다. 그러나 서사적 화자를 통해 작의를 직접적으로 제시해 주는 방식은 오히려 관객의 이성적 판단을 이끌어내는 데 역효과를 낳았다. 객관적 인식의 증대로 사회현실을 고발하고 개선하려는 서사극의 본질에 비추어 볼 때, 사실(fact)의 객관적 담지라는 부분적인 성취에도 불구하고 미학적 측면에서 극작술 미숙으로 채택된 서사 방식은 극복해야 할 한계로 남아 있다.

    때때로 역사극은 과거에 대한 공통된 기억을 재구성함으로써 현재적 공통 감각을 만들어내고, 역사적 향수를 기초로 한 사회의식(rituals)의 국가적 작동을 가능케 해준다. 이는 대한민국연극제 출범 무렵인 권위주의 시대에 창작된 전쟁소재극의 기능에서도 확인된다. 국가가 반공주의, 애국심을 조성하고 사회 통합 및 정권 합법화의 효과를 위해 역사극을 적극 활용코자 한 것은 이러한 효용성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역사극들은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성향 및 언어적 표현에서 벗어나 다양한 사회적 담론을 표출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전체주의적 동질성을 강화함으로써 국가 권력의 작동 매체로서 기능하게 했던 이전 시기의 역사극에서 벗어나 사회내부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수용하고 있는, 새로운 역사극을 창조해가는 문턱으로 들어서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5)김종환,「Stephen Greenblatt의 신역사주의(New Historicism) 비평」, 『셰익스피어 비평』제23권, 한국셰익스피어학회, 1993, 194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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