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흑인 오르페>에 나타난 신화 주제의 현대적 재해석

Reinterpretation moderne du mythe d'Orphee dans le film Orphee neg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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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Le mythe d'Orphée est un des mythes qui ont inspiré les artistes le plus profondément. De grands maîtres d'art de tous les genres ont traité de ce mythe : Monteverdi, Gluck, Openbach, Nerval, Tennesy Williams, Séon, Boubré, Moreau, etc. Orphée apparaît aussi dans les films. La trilogie d'Orphée de Jean Cocteau, et Orphée nègre de Marcel Camus sont les plus connus.

    Orphée est souvent considéré comme l'ancêtre des poètes. Au premier abord, c'est pour cette raison que son histoire a été tant aimé par les artistes. Mais l'influence constante de ce mythe ne vient pas seulement de ses sujets charmants, comme <amour profond qui surmonte la mort>, ou <le pouvoir du langage poétique qui ébranle la mort>. Le mythe d'Orphée suscite une attitude spécifique envers la vie, sur le plan beaucoup plus élargi. Ce mythe est lié à un changement radicale dans l'histoire de culture. Ce mythe est l'histoire qui a apporté à l'humanité, pour la première fois, la conscience de l'âme(psyché) individuelle. Avant Orphée, dans l'époque homérienne de la religion olympienne, l'âme humaine n'était qu'un être fantomatique privé de sens. Grâce au mythe d'Orphée, l'humanité pouvait être debout devant dieu en tant qu'un être qui a une âme immortelle. Cette pensée était révolutionnaire, si l'on considère le contexte culturel de l'époque.

    Mais pour être plus exact, on doit dire que cette pensée n'est pas un élément du mythe d'Orphée même, mais la spécificité du mouvement mentale appelé 'orphisme‘ commencé vers 6e siècle av. J.C., inspiré par le mythe d'Orphée. Ce mouvement contient une sorte de tentative du 'révolte lyrique', ou du 'révolte philosophique'.

    Marcel Camus, le réalisateur d'Orphée nègre, semble remonter à l'origine d'orphisme pour suivre des orphiques qui ont réflechi tout différemment sur l'âme humaine à travers le mythe d'Orphée. Cette fois-ci, il s'agit de la vie sociale des nègres brésilens, les alienés du système du capitalisme occidental, au lieu de l'âme humaine. Il comprend parfaitement le sens du révolte impliqué dans l'acte audacieux d'Orphée, qui est descendu dans l'enfer pour sauver l'âme d'Euridyce, avec une seule arme faible qu'est la poésie. Camus a réussi de faire vivre le sens moderne du mythe d'Orphée, tout en restant fidèle à la structure originale du mythe. Nous pouvons dire que ce film est différent des autres oeuvres traitant du mythème d'Orphée, dans le fait qu'il met au premier plans le sens du révolte de ce mythe.

    Le sens du révolte est déjà claire dans le titre même : Orphée nègre. Avant cet Orphée, Orphée était toujours un blanc, et n'était jamais un noir. Les héros du films sont tous les noirs africains, qui habitent dans le favela(bidonville) brésilien, <une inauthenticité totale>, selon Jean Luc Godard, un endroit où se condense des contradictions du capitalisme occidental. La tentative du réalisateur est claire : il décomposera le mythe d'Orphée pour le recomposer par le regard de la classe aliénée. Le résultat : un grand succès. Orphée nègre est toujours aimé par le public du monde, même après un demi-siècle de la production. Et la musique bossa nova, qui est devenue célèbre grâce à ce film, résonne toujours dans les rues du monde.

  • KEYWORD

    Orphee negre , mythe d'Orphee , orphisme , concept de l'ame , reinterpretation du mythe

  • 1. 머리말

    오르페우스 신화는 그리스 신화 중에서 예술가들에게 가장 많은 영감을 제공한 신화 중 하나이다. 이 신화는 여러 시대에 걸쳐 오페라, 소설, 시, 회화 등으로 형상화되었는데, 모두 뛰어난 예술적 성취를 보인다. 잘 알려져 있는 것만 꼽아 보아도 몬테베르디와 글룩, 그리고 오펜바흐의 오페라, 네르발과 테네시 윌리암스의 소설, 릴케와 발레리의 시, 세옹, 부브레, 모로와 샤갈의 회화 등, 기라성같은 예술가들이 오르페우스 신화를 직간접적으로 다루어 걸작들을 만들어냈다. 영화로도 여러 차례 제작되었다. 장 콕토의 오르페우스 삼부작(<시인의 피>, <오르페>, <오르페의 유언>)과 마르셀 카뮈의 <흑인 오르페>가 특히 유명하다. 오르페우스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끊임없이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 같다.

    오르페우스는 흔히 시인들의 조상이라고 여겨진다. 그가 뛰어난 노래의 힘으로 지옥을 여행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르페우스 신화가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유는 이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흔히 주목하는 ‘죽음을 넘어선 애절한 사랑’이나, ‘죽음을 극복한 시적 언어의 힘’이라는 주제 때문만은 아니다.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더 넓은 지평에서 삶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촉발시켰다. 이 신화는 문화사적으로 매우 근본적인 변화와 이어져 있다. 그것은 개인의 영혼에 대한 자각을 인류에게 처음으로 가져다 준 이야기이다. 오르페우스 이전에 그리스 사회에서 영혼은 전혀 의미없는 유령과 같은 존재였다. 오르페우스는 인류에게 영혼의 자각을 가져다 준 깊은 이야기를 제공했다. 오르페우스 이야기 덕택에 인류는 비로소 영혼을 가진 존재로 신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르페우스 신화에서 영감을 받아 형성된 오르페우스주의는 인간 영혼이 신의 영혼과 같은 기원을 가진다고 주장함으로써, 당대의 맥락에서는 거의 혁명적인 발상을 구체화시켰다. 이 이야기는 아름다운 줄거리 안에 근원적인 저항의 요소를 품고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오르페우스 신화 자체에 포함되어 있는 요소라기보다는 이 신화로부터 영감을 얻어 BC 6세기 경부터 형성된, 일반적으로 ‘오르페우스주의orphisme’라고 불리는 정신적 흐름에서 연원된 특징으로서, 일종의 ‘서정적 저항révolte lyrique’ 또는 ‘철학적 저항’의 태도를 품고 있다.

    오르페우스 신화를 다루고 있는 모든 작품들이 오르페우스주의가 포함하고 있는 이러한 저항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실패한 영웅이 프로메테우스와 다른 의미에서 불가능에 도전한 영웅으로 받아들여졌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인간의 것인 노래의 힘, 서정성의 힘으로 신들의 영역을 뒤흔들어 죽음을 돌파하려고 했다. 프로메테우스의 저항이 행위의 저항이라면, 오르페우스의 저항은 인식의 저항이며, 영적인 저항이며, 개인의 이름으로 존재를 재구성하는 서정적 저항이다.

    예술가들을 매혹한 것은 아무런 근육의 힘도 가지고 있지 못한 이 유약한 서정성의 영웅이, 무기가 아니라 정서의 힘으로, 비록 죽은 아내에우리디케를 다시 살려내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신들이 세워놓은 삶과 죽음의 강고한 울타리를 흔드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오르페우스에 대한 경의는 성취에 대한 경의가 아니라, 저항에 대한 경의이다. 세옹이나 부브레, 모로 등의 그림에서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것은 에우리디케를 두 번째로 잃고 비탄에 잠긴 오르페우스이다.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영웅이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실패했기 때문에 더욱더 깊은 울림을 준다. 오르페우스는 감히 인간의 것으로 신들의 체제를 뒤흔들어놓은 자, 그리고 비참하게 찢겨 죽은 뒤에도 노래를, 서정적 저항의 시도를 멈추지 않은 자이다.

    아폴리네르가 “회화의 전통과 관행을 ‘위반’하는 화가들의 그림에 오르피즘이라는 용어를 적용”1)하면서 “‘파격’, ‘위반’” 등의 의미로 사용할 때, 그는 오르페우스주의에 내재된 서정적 저항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 우리가 분석 대상으로 택한 <흑인 오르페>는 프랑스, 이탈리아, 브라질 3개국 합작영화이다. 프랑스 감독 마르셀 카뮈Marcel Camus가 비니시우스 데 모라에스Vinicius De Moraes의 연극 Orfeu da Conceiçao를 영화로 각색한 작품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1959), 오스카 최고외국영화상(1960) 등 다양한 상을 수상했다. 예술적 성공과 상업적 성공을 동시에 거둔 영화로 여겨지고 있으며2)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든 영화이다. <흑인 오르페>의 감독은 오르페우스주의의 근원으로 거슬러올라가 이 신화를 통해 인간조건에 대해 전혀 다르게 사유했던 오르페우스주의자들의 행보를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번에는 영혼이 아니라 흑인들의 사회적 삶이 새로운 사유의 대상이 된다. 감독은 오르페우스 신화를 사유했던 고대인들처럼 오르페우스의 ‘지옥으로의 하강’이 내포하고 있는 저항의 의미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오르페우스 신화를 현대 사회의 맥락에 재배치하여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그 현대적 의미를 잘 살려내고 있다. 이 영화가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다룬 다른 예술작품들과 차별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 신화의 그러한 특성을 전면에 부각시켰다는 데 있다.

    전통적으로 백인으로 형상화되어 왔던 오르페우스를 흑인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미 이 영화의 저항성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저항적 메시지 때문에 이 영화는 1959년 칸 영화제에 브라질 국적으로 출품되지 못했다. 파리의 브라질 대사관이 이 작품이 브라질 대표작으로 영화제에 출품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영화는 프랑스어 자막도 없이 포르투갈어로 상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작품으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김미성은 “브라질의 빈민가를 배경으로 ‘검은 피부’의 배우들만이 출연하는 이 영화가 외교적 입장에서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3)이었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1959년 당시 브라질의 극심한 빈부격차가 만들어낸 대도시 주변의 빈민가 파벨라favela4)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흑인 빈민 오르페우스의 이야기가 브라질 정부 당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영화의 제목이 명백하게 암시하는 것처럼, 영화는 그것이 ‘흑인’으로 상징되는 소외된 자의 입장에서 재해석된 신화를 다룰 것이라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다. 그 의도는 영상편집을 통해서도 제시된다. 영화의 첫번째 쇼트에서 카메라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조각되어 있는 고대 그리스의 프리즈를 비춘다. 이윽고 프리즈는 산산이 부서지고, 삼바춤을 추는 흑인들이 나타난다. 엔딩 쇼트에서는 미래의 오르페우스와에우리디케인 소년과 소녀가 삼바춤을 추는 장면이 나타난 뒤, 복구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프리즈가 다시 나타난다. 이 구성의 의미는 명확하다. 영화는 고대 그리스의 오르페우스 신화를 해체한 뒤, 흑인들의 시각으로 재구성하겠다는 것이다. 그 시도는 멋지게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제작된 지 반 세기가 지났으나, <흑인 오르페우스>는 이 영화 덕택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새로운 삼바 음악인 보사노바 리듬과 함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는 <흑인 오르페>에 나타난 오르페우스 신화의 새로운 해석을 조명해 봄으로써 이 영화가 어떻게 고대신화의 의미를 현대사회 안에서 연장시키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1)이진성, 『그리스 신화의 이해』, 아카넷, 2004, p.219  2)김종기, 「영화 <흑인 오르페Orfeu Negro>에 나타난 신화적 상징 해석」, 『프랑스문화연구』 13집, 한국프랑스문화학회, 2006, p.65.  3)김미성, 「흑인 오르페우스Orfeu Negroㅡ오르페우스 신화의 카니발적 변용」, 『프랑스문화예술연구』 30집, 프랑스문화예술학회, 2009, p.91.  4)ibid., p.101.

    2. 오르페우스주의의 영혼관

    <흑인 오르페>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오르페우스 신화에서 영감을 받은 오르페우스주의자들이 고대사회에 가져온 새로운 영혼개념을 충실하게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2-1 올림포스교의 영혼관

    오늘날 “영혼”, “âme”, “soul”, “Seele”등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프쉬케psyche는 고대 그리스에서 전혀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psyche는 ‘바람이 불다’ 또는 ‘숨쉬다’와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5)로 ‘나비’ 또는 ‘나방’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데, 주로 생명체의 생명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인 생명원리로 여겨졌다. 오르페우스주의자들 이전의 그리스인들에게 “영혼은 생명이 있는 것empsychon과 생명이 없는 것apsychon을 구별해주는” 원리에 불과했다.6)

    주로 호메로스 서사시를 통해 전해지는 초기 올림포스교 교의에서 “영혼은 죽은 뒤에도 살아남기는 하나, 단순히 숨 또는 생명력 자체”7)에 불과하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지하세계에 내려간 오디세우스는 죽은 자들의 영혼을 만나게 되는데, 그 혼들은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한다. 희생제물의“검은 피”를 마신 뒤에야 겨우 생전에 친분이 있었던 오디세우스를 알아보는데(Odysseia, 11.152ff), 그것은 피 속에 영혼이 들어있다는 그리스인들의 믿음을 반영한다.8) 영혼이 생명현상과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호메로스 서사시에서 살아있는 생명체와 연관된 영혼은 좀체로 언급되지 않는다. 영혼은 그것이 들어있던 육체의 생명이 끊어진 뒤에야 비로소 언급된다. 즉 호메로스의 영혼은 사령(死靈) 또는 망령(亡靈)에 불과하다. 그것은 어둡고 칙칙하며 불길하고 어떤 존재의 위엄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단지 그림자처럼 존재할 뿐인 맹목적인 생명의 관성일 따름이다. 장영란은 “호메로스 시대의 영혼은 허상eidolon, 또는 환영pasma”9)일 뿐이라고 정리한다.

    브레머Bremmer가 정리한 호메로스의 영혼관의 특질은 ① 신체의 명확하지 않은 불특정한 위치에 존재한다. ② 육체가 활동하고 있을 때는 비활동적이며 언급되지 않는다. ③ 기절하고 있는 동안에는 육체를 떠난다. ④ 어떤 신체적인 또는 심리적인 연관성도 없다. ⑤ 생명지속을 위한 전제조건 ⑥ 죽음 이후의 개인을 나타낸다.10)

    이후 그리스 초기 철학자들인 자연철학자들에게서 영혼 개념은 좀 더 정교해지지만, 영혼을 생명의 물리적 원리로 보는 관점에는 큰 변화가 없다.11) 따라서 영혼불멸설이라든가 사후의 처벌과 보상이라든가 하는 영혼을 둘러싼 논의들도 기대할 수 없었다. 영혼을 둘러싼 논의는 영혼의 비물질성과 인격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플라톤이 『파이돈』에서 애써 논증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 두 가지 문제였다.12) 영혼이 불멸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육체와는 달리 소멸되지 않는 비물질적인 것이어야 하며, 사후의 심판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영혼이 그것이 깃들어있었던 육체와 연관된 개인적 인격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영혼을 둘러싼 이 논의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현실과 아무 관계도 없는 형이상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존재의 위엄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삶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불멸하는 비물질적인 영혼만으로 이루어진 올림포스 신들, 그들은 그 존재 조건 하나만으로 저절로 절대적인 존재의미를 확보하고 있었다.

       2-2. 오르페우스주의의 영혼관

    플라톤의 영혼관은 인간의 영혼은 원래 이데아의 세계에 속한 것이 었으나, 잘못을 저질러 육체의 감옥에 갇혔지만, 끊임없는 정화의 노력을 통해 다시 신들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서구사회에 널리 받아들여진 플라톤의 영혼관이 피타고라스학파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피타고라스학파의 대부분의 교의는 오르페우스주의에서 직접 유래한 것들이다. 철학자를 최고의 인간으로 여겼던 플라톤은 자신을 최초로 “지혜를 사랑하는 자philosophos”라고 불렀던 피타고라스13)에 대한 경의는 숨기지 않지만,14) 『향연』에서 오르페우스를 사랑에 있어서 용감하지 못한 유약한 겁쟁이로 폄하한다. 15) 오르페우스주의자들이 디오니소스적 신비의식인 ‘오모파기아’ 의식을 수행했고,16) “소농계층과 하층민에 기반을 두고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밀교집단”17)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이 이 철저한 아폴론적 귀족주의자18)에게 불편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르페우스신화로부터 영감을 받은 오르페우스주의가 가져온 영혼에 대한 새로운 관념은 닐슨을 위시한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처럼 “호메로스 전통을 거부한 종교혁명”19)으로, 이후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철학이 로고스로서 뮈토스로부터 분리되기 이전의 원시적 철학의 특징을 가진다. 플라톤의 정교한 영혼론은 민중이 새롭게 발견한 영혼의 위엄이라는 씨앗으로부터 자라난 나무이다. 오르페우스교는 “자아 발견과 자아의식을 확산시켜주는 철학적 사유의 자극을 초래한 혁신적 운동”20)이었다.

    BC 6세기 경부터 고졸기 그리스를 배경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오르페우스주의는 실상 그 강령이나 제의 등이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오늘날 알려져 있는 오르페우스주의의 내용들은 후대 작가들의 인용문을 통해 파편적으로 전해진 것을 종합한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사상적 경향이 일종의 비밀스러운 밀교 형식으로 존재했다는 것과, 그 기본적인 주장이 전통적인 올림포스의 귀족주의적 세계관과 상충하는 것으로, 인간 영혼의 불멸성과 영혼의 윤회, 그리고 구원에 이르기 위한 영혼의 정화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오르페우스주의자들이 제도화된 종교체제를 갖추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오르페우스교라는 명칭 대신, 오르페우스주의로 부르는 학자들도 많이 있지만, 헤로도토스의 『역사』7권의 기록을 보면, 아테네에 오르페우스교가 존재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21)

    문혜경에 따르면, 오르페우스주의의 새로운 영혼관은 그리스 사회의 변화를 그 배경으로 가지고 있는데, BC7세기 경부터 흑해지방과 교류가 증진되었고, BC 6세기에 참주의 등장으로 귀족들에게 편중되었던 정치권력과 부가 대중에게 확산됨으로써 정신과 가치관에 큰 변화가 생겨난 일과 관계되어 있다. 22) 도즈는 윤리적 측면에서 오르페우스교의 영혼관을 설명한다. “개인이 가족이라는 낡은 유대를 벗어나 법적 개인으로서 각자의 권리가 증대함에 따라”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는” 주체로서 새롭게 인식되었고, 그것이 새로운 영혼관을 가져오게 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23)

    원인이 무엇이든, 오르페우스주의가 인간 영혼에 대한 전혀 다른 개념을 가져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르페우스주의의 영혼관 이후에야 비로소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 구분되는 신적 기원을 가지는 비물질적 실체로서 인격성을 부여받고, 윤회의 바퀴를 벗어날 때까지 생전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위엄있는 인격체로서 행위와 인식의 주체로서 새로운 위상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오르페우스주의는 올림포스 천지창조와 다른 천지창조론을 가지고 있었고, 신통계보도 다르며, 무엇보다 다른 인간기원론을 가지고 있었다. 오르페우스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복합적인 존재이다. 티탄들이 어린 디오니소스를 죽여서 잡아먹었기 때문에 분노한 제우스가 벼락을 쳐서 티탄들을 죽였는데, 인간은 그 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은 디오니소스의 선한 신적인 요소(영혼)와 티탄의 악하고 악마적인 요소(육체)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인류기원론은 훗날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해 아름답게 다듬어져서 신을 만날 때까지 고통을 겪으며 헤매어 다녀야 하는 소마-세마soma-sema(감옥인 육체)에 갇혀있는 신의 불꽃인 영혼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게 된다.

    이진성은 오르페우스주의 영혼관의 혁명성이 “신과 인간의 근원적 이질성을 믿는 당대의 종교적 관행에 대한 이의 제기”24)에 있다고 보면서, 오르페우스주의 신앙 체계를 네 가지로 정리한다.

    이진성은 “[올림포스교의]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는 신과 인간의 극복할 수 없는 거리를 전제로 한다. 이 계보에서 인간은 제례를 ‘올리고’, 신은 ‘받는’ 것으로 굳어져, 통치자들의 시민 지배에 활용되었다”26)고 말한다. 올림포스교의 교의에 따르면, 신과 인간은 절대로 만날 수 없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열등한 존재로서, 세상에 태어나 살다가 죽어간다. 그뿐이다. 신들은 신들의 자리에, 인간은 인간의 자리에 있다.

    반면에 오르페우스 신앙에서 인간의 영혼은 본래 신으로부터 온 비물질적 실체로서, 원죄에 의해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으나, 금욕을 통한 자기 정화를 통해 신성을 회복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 오르페우스교는 ‘구원’이라는 개념을 가져온 최초의 종교들 중 하나로 꼽힌다. 오르페우스교가 기독교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실제로 초기 기독교 도상에는 예수가 있어야 할 자리를 오르페우스가 종종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초기기독교도들은 오르페우스에게서 자연스럽게 예수의 모습을 보아냈다. 오르페우스-예수 도상은 AD 6세기까지 발견된다.27) 오르페우스주의는 인간의 구원이라는 새로운 종교적 개념을 가져옴으로써 고대종교와 기독교를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마르셀 카뮈가 <흑인 오르페>에서 오르페우스 신화를 기독교적으로 연장하고 싶어하는 것은 전혀 엉뚱한 시도가 아니다.

    5)손영일, 『플라톤 중기 대화편의 영혼의 개념』, 연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2012년 석사학위 논문, p.6.  6)ibid., p.1  7)Rohde, E., Psyche : The Cult of Souls and Belief in Immortality among the Greeks, Harper Torchbooks, 1966. p.31. 장영란, 「오르페우스교와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혼윤회설」, 『철학과 현상학 연구』 26집, 한국현상학회, 2005, p.132에서 재인용.  8)장영란, 「기억과 상기의 신화와 철학」, 『철학과 현상학 연구』, Vol.45 No.-, 한국현상학회, 2010, p.155.  9)장영란, 「오르페우스교와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혼윤회설」, op., cit., p.132  10)Bremmer, J.N., The Early Greek Concept of the Soul. New Jersey, Princeton Univ. Press, 1983, p.21, 손영일, op., cit., p.8에서 재인용.  11)손영일, op., cit., pp.8-10 참조.  12)ibid., pp.21-36 참조.  13)장영란, 「오르페우스교와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혼윤회설」, op., cit., p.146 참조, 피타고라스는 “철학자”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전의 철학자들은 자신들을 sophos라고 불렀다.  14)손영일, op, cit. p.21 참조. 플라톤이 영혼론을 본격적으로 개진하는 『파이돈』은 피타고라스 공동체에 헌정된 것. 파이돈이 피타고라스학 파 일원인 에케크라테스에게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전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15)플라톤, 『향연』, 최명관 옮김, 을유문화사, 1994, pp.41-42.  16)문혜경, 「오르페우스 종교의 특징과 사상적 전승」, 『서양고대사연구』, 34집,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2013, p.189.  17)ibid., p.202.  18)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인간영혼이 신적 본질을 가지는 단일체라고 주장하지만, 『국가』에서 영혼의 삼분론(三分論)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영혼의 삼분은 통치자/보조자/시민의 사회 세 계급과 연관되어 있다. 그는 인간이성의 본질적 우월성을 믿는 아폴론주의자였고, 시인들의 대중적이며 정서적인 호소력을 위험한 요소로 경멸했다.  19)Nilsson, M. P., Early Orphism and Kindred Religious Movements, Harvard Theological Review, 28, 1935, p.185. 문혜경, op., cit., p.185에서 재인용.  20)ibid., p.203.  21)문혜경, op., cit., p.187 참조.  22)ibid., p.183.  23)도즈, E. R, 『그리스인들과 비이성적인 것』, 주은영, 양호영 옮김, 2002, p.125.  24)이진성, op., cit., p.106.  25)이진성, op., cit., pp.110-111.  26)ibid., p.125.  27)박소미, 「초기 기독교 미술에 나타난 오르페우스 도상」,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9집, 서양미술사학회, 1997.

    3. <흑인 오르페>와 오르페우스 신화

       3-1. 등장인물 분석

    <흑인 오르페>는 오르페우스 신화의 원래 줄거리를 충실하게 반영하면서도 그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신화의 현대적 의미를 탐색하고 있다. 우리는 등장인물의 분석을 통해 그 재해석 방식을 따라가 보려고 한다. 이 영화에서 바로 등장인물의 특성과 역할을 통해 신화의 재해석 방식이 가장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김종기는 신화 원전의 등장인물과 영화의 등장인물을 표로 만들어 비교하고 있다.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매우 효율적인 비교표이기 때문에 그대로 인용하기로 한다.28)

    1) 오르페오(오르페우스)

    영화에서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의 딸인 무사이 칼리오페와 아폴론(때로는 트라키아의 강의 신 오이아그로스) 사이에서 태어난 오르페우스의 신화적 출생에 관해서는 정보가 주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주인공 오르페오의 오르페우스적 성격은 뚜렷하다. 그는 노래를 잘 부르며, 신화 속의 오르페우스처럼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고, 유리디스(에우리디케)를 마음깊이 사랑하며, 동물들과 함께 정답게 살아간다. 신화 속의 오르페우스가 노래를 부르면 산천초목과 동물들까지 감동시켰다고 하는 내용을 반영한 설정이다.

    몇 개의 대사는 그가 고대의 오르페우스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암시한다. 오르페오의 기타에는 “오르페오는 거장이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으며, 오르페오는 “이전에도 오르페오가 있었고, 이후에도 다른 오르페오가 있을 거야. 그러나 지금의 오르페오는 바로 나야”라고 말한다. 즉 이 영화의 오르페오는 시간을 뛰어넘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이울어가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일상적인 현대의 오르페우스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르페오의 오르페우스적 성격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은 그가 카니발에서 바빌로니아 무용단을 이끄는 무용단장이라는 사실이다. 김미성은 이 카니발을 가난한 리오 데 자네이로의 흑인들이 “일상의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되는 순간”30)이라고 해석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이 영화에서 카니발은 그보다 더 훨씬 더 진지한 의미를 가진다. 오르페오가 아폴론의 복장과 상징물을 들고 디오니소스적 카니발을 이끌 때, 그는 정확하게 오르페우스종교의 신비의식을 집전하는 사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감독은 오르페우스주의가 디오니소스적인 광란을 아폴론적 절제로 순화시킨 자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이 영화의 카니발은 오르페우스교의 오모파기아 의식에 정확하게 겹쳐진다. 그것은 신비의식을 통한 신과의 직접접촉(디오니소스적 신비주의)과 일정한 깨달음(아폴론적 이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낮과 밤의 종합이다. 축제는 낮에 시작되어 밤 사이 진행되며, 그 사이에 유리디스에 대한 사랑에 머뭇거리던 오르페오는 그가 진실로 유리디스를 사랑하며, 결국 유리디스를 죽게 만든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오르페오가 태양신 아폴론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여러 차례에 걸쳐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노래를 불러 태양이 떠오르게 할 수 있으며, 카니발에 사용되는 거대한 태양 모형은 그의 집에서 만들어져 축제장소로 옮겨지며, 바빌로니아 마을의 무용단원들은 춤출 때 태양의 문장이 달린 막대를 들고 있다. 축제 때 그가 입었던 황금빛 의상은 그가 태양과 연관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낸다.

    영화 앞부분에서 바빌로니아 마을에서 제카가 태양연을 날리는데, 처음에 잘 떠오르던 연은 결국 아래로 떨어져 버리고 만다. 그 연이 걸린 장소에 나중에 오르페오와 유리디스의 시신이 걸리게 된다. 두 사람의 운명이 죽음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오르페오가 전차 운전기사라는 사실도, 그가 바빌로니아 마을 사람 전체의 어떤 심리적 변환과 발달(전차-이동의 수단)을 주도하는 사제라는 것을 상징한다. 전차역은 운명(움직이는 것, 변하는 것, 변전, 역(易))의 정거장이다. 유리디스가 전차 역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유리디스(에우리디케)

    유리디스는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이웃마을에서 그녀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남자(해골 가면)를 피해 바빌로니아에 살고 있는 사촌 세라피나를 찾아온다. 카니발을 앞둔 소란스러운 도시의 풍경에 그녀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른다. 그녀는 세속적인 풍경에 익숙하지 않은 순결한 존재이다. 감독은 긴 시퀀스를 이용해서 어리둥절해 하는 그녀를 오랫동안 보여주고 난 다음, 카메라를 높이 띄워 거대한 도시와 유리디스를 대조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유리디스가 헌병(체제의 감시자)에게 길을 묻는 순간, 카메라는 근접 쇼트로 쇠창살을 훑는데, 그 쇠창살 끝에는 새장에 갇힌 새들이 있다. 그리고 동시에 오른쪽(체제의 방향)으로 사이렌을 울리며 자동차가 빠르게 지나간다. 이 장면은 유리디스가 결국 도시 안에 정착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녀가 도시에서 처음 만난 바람개비를 파는 아저씨31)는 그녀를 “떨고 있는새”에 비유한다. 그가 유리디스에게 노란색 종이 화환을 준 것은, 유리디스 역시 태양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타고 온 배는 왼쪽방향으로 움직이며, 배의 연기도 왼쪽 방향으로 움직인다. 유리디스는 오른쪽의 존재가 아니라, 왼쪽의 존재, 체제안의 존재가 아니라, 체제 밖의 존재이다. 또는 왼쪽은 <죽음의 방향>이기도 하다(오르페오가 운전하는 전차가 지나가는 다리 아래로 노란색 차(낮, 태양, 삶)는 왼쪽으로, 검은 차(밤, 달, 죽음)은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생의 변전, 생과사의 교차. 또한 죽은 유리디스를 실은 앰뷸런스는 왼쪽 방향으로 움직이다가 붉은 빛이 명멸하는 죽음의 터널 속으로 들어간다).

    유리디스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은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다. 그녀는 하늘색 장식이 되어 있는 흰 원피스를 입고 흰 구두를 신고 있다. 이 색깔은 그녀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녀가 “강을 건너왔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녀는 강 저쪽, 즉 저승의 피안(彼岸)au- delà에서 강 이쪽, 이승의 차안(此岸)ici-bas으로 온 여자이다. 그녀는 하늘에서 온 여자인 것이다. 그녀가 이야기를 할 때, 카메라가 아주 종종 하늘을 보여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유리디스의 흰색/파란색 스카프에는 “하늘의 집”(점성술의 황도 12궁)이 그려져 있는데, 그녀는 “작은 양”과 함께 그곳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작은 양은 “어린 양”으로도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양”은 가난한 소년 베네디토와 연관되어 있는데, 우선은 황도 12궁의 “산양좌”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3) 미라(마이나스)

    미라는 오르페오의 약혼녀이다. 그녀는 관능적이며, 돈을 좋아한다. 오르페오가 월급을 탔다고 하자, 반지를 사달라고 하고, 오르페오가 돈이 없다고 하자, 자기가 빌려주겠다고 한다. 영화는 유난히 글래머러스한 그녀의 몸을 자주 확인시켜준다. 그녀는 유리디스의 정반대편에 있는 여자라고 할 수 있다. 유리디스와 미라는 오르페우스주의의 인간 존재의 복합성의 관념을 각기 상징하고 있다. 유리디스는 영혼이며, 미라는 육체를 상징한다. 미라는 몸에 꼭 끼는 보라색 옷을 입고 있는데, 이 색채는 병적인 관능을 나타내는 색깔이다. 그녀는 순수한 육체적 관능을 나타낸다. 그녀가 카니발에서 젖가슴에 꽂은 장미는 관능적 욕망과 동시에 물질적 욕망을 환기시킨다. 그녀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욕망의 대리인으로 오르페오를 붙잡고 있다.

    음악의 대가 오르페오의 음악적 소질이 이 영화에서 돈(자본주의)의 정반대편에 있는 가치라는 사실은 돈이 없어서 전당포에 담보로 잡혀있는 기타로 분명히 드러난다. 미라는 반지 값으로 오르페오에게 1100달러를 요구하는데, 이 숫자의 의미는 나중에 오르페오가 유리디스를 찾으러 가는 12층(3x4)의 의미에 대비된다. 11은 오르페오의 진정한 사랑의 의미에 미치지 못하는 숫자, 즉 1과 1이 혼융되지 못하고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상황을 드러내는 가짜 사랑의 숫자(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오르페오(1)와 미라(1))이다.

    오르페오가 사랑하지도 않는 미라와 ‘약혼’이라는 굴레로 매여, 질질 끌려다니는 것을 김미성은 여자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오르페오의 우유부단함으로 분석한다.32) 그러나 이 설정은 더욱 심층적인 의미를 감추고 있다. 감독이 신화 원전에 없는 오르페우스의 약혼을 설정한 까닭은, 현대적인 상황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현대인들은 원하지 않는데도 어쩔 수 없이 일정 부분 자본주의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 미라가 바빌로니아 마을에 살고 있는 가난하고 순박한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은, 우선 그녀가 바빌로니아 산동네 빈민가에 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외모가 다른 사람들(토속적인 흑인들)과는 달리 서양인과의 혼혈이라는 사실, 그리고 카니발에서 베르사이유 풍의 옷을 입고 서양인의 가발을 쓰고 있다는 사실로 분명해진다. 그녀는 서구적 자본주의에 완전히 투항한 현대인을 상징한다. 따라서 그녀가 입고 있는 몸에 꼭 끼는 황금색 옷은 물질만능주의에 자신을 예속시킨 현대인의 모습을 상징한다.

    신화와의 관계에서 그녀는 에우리디케를 사랑하는 오르페우스를 질투해서 찢어 죽인 마이나데스이지만, 이 영화의 다른 층위에서 그녀는 순결한 영혼들을 죽이는 서구적 자본주의의 대행자이다.

    4) 베네디토

    이 가난한(제카보다도 더 가난하다) 소년은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기독교적 상징성을 드러낸다. 이 이름은 “축복”이라는 뜻이다. 감독이 원전 신화에 없는 이 소년을 끼워넣은 것은 이 신화를 기독교적으로 연장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따라서 베네디토가 “작은(어린) 양”과 연관되어 있는 것은 단순히 점성술의 문제가 아니다. “어린 양”은 예수에게 붙여지는 별칭 중 하나이다. 감독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미묘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이 소년은 유리디스를 처음보았을 때부터 걱정스러워 어쩔 줄 모르며, 유리디스에게 그녀를 지켜줄 부적을 준다. 즉 그는 영혼의 보호자인 예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 부적은 경찰(체제)의 발에 밟혀 두 조각으로 갈라진다.

    기독교 전통에서 “악마”는 “불화시키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악마는 사람들을 가르는 존재이다. 따라서, 둘로 갈라진 베네디토의 부적은 예수의 가치가 부서졌음을 암시한다. 그가 카니발에서 유니콘(하나의 뿔)으로 분장하는 것은 이 소년이 예수의 상징성을 지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이다. 예수는 상징 전통에서 아주 자주 유니콘으로 등장한다. 그는 “가르는 자”가 아니라 “통일시키는 자”이며, 원초적인 순결한 단일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 가난한 자들의 신 예수는 끝까지 꾀죄죄한 모습으로 나온다. 가난한 흑인들마저 화려한 카니발 의상으로 갈아입을 때조차, 새로운 오르페오로 임명된 제카가 부활한 오르페오를 상징하듯 깨끗한 흰 옷을 입을 때조차, 그는 더러운 누더기를 걸친 모습을 고수한다. 예수는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 고통당하는 자의 신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소년은 계속 상황을 주도한다. 오르페오에게 태양이 떠오르도록 노래를 부르게 하고, 제카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명령하는가 하면, 오르페오가 죽고 난 뒤, 제카를 새로운 오르페오로 임명한다.

    이 소년이 기독교적인 상징성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은 영매의 집(신화의 하데스) 입구에서 사나운 개 케르베(케르베로스)에게 저지당한다는 사실로 다시 한번 더 분명해진다. 그 집에서 벌어지는 일은 기독교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매우 이교적이고 원시적인 마쿰바 의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네디토는 그 이교의 사원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비록, 그 장소가 기독교와 원시 종교의 어떤 종합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5) 헤르메스(헤르메스)

    영화에서 헤르메스는 여행자들을 안내하는 길의 신의 역할을 한다. 그는 운명의 안내자로서 길을 찾는 유리디스에게 길을 가리켜 준다. 바빌로니아에 도착해서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유리디스에게 오르페오는 “이 아저씨가 길을 잘 찾아줄 거야”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지혜로운 조언자이며, 나중에 오르페오가 유리디스의 시신을 찾아오도록 서류를 만들어 준다. 자본주의의 대행자(시체 안치소의 백인)에게는 단지 물건에 불과한 유리디스의 시신은 그 서류로 인해서 사랑하는 연인의 육체로 복권되는 것이다.

    6) 병원청소부(카론)

    12층에 있는 실종자 서류 보관소 직원은 그리스 신화의 카론 역할을 하고 있다. 실종자 서류보관소는 결국 저승의 입구이다. 그가 들고 있는 빗자루는 저승의 배를 젓는 카론의 노의 상징적 대체물이다. 그의 빗자루에 쓸려나가는 것은 죽은 자들의 영혼이다. 그는 깊고 깊은 저승으로 오르페오를 안내한다.

    오르페오가 3층을 지나(카메라는 3층과 4층이라는 표지를 관객이 알아차리도록 명백하게 비춘다), 4층에 이르자, 실신한 여자가 나타난다. 그것은 3(남성적 세계-백인들의 세계-기독교의 삼위일체)을 극복하는 4(여성적 세계-흑인들의 세계-토속종교-성모의 신위가 포함된 4위일체)의 가치가 위기에 빠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실종자들의 서류는 12층(3x4)에 보관되어 있다. 감독은 3과 4라는 숫자를 결합시킴으로써 세계를 지배하는 강자의 세계관에 약자의 가치를 통합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르페오가 영매의 집(하데스)으로 들어갈 때, 땅바닥에 놓인 3개의 촛불을 지나가는 장면을 카메라는 클로즈업으로 정확하게 잡는다. 에우리디케를 구하는 일은 3으로 상징되는 체제 밖으로 나가야만 가능해진다. 영매의 집에는 기독교 성상처럼 보이는 성상들과 명백하게 토속적인 신들로 보이는 신상들이 한데 어울려 있으며, 기독교 신부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토속종교의 사제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함께 죽은자들을 불러내는 제의를 집행하고 있다.

    “바빌로니아”마을로 가는 전차가 49번이라는 것도 우연한 선택이 아니다. 그 숫자는 12가 드러내 보이는 통합의 열망을 드러낸다(4 그리고 3의 배수인 9의 통합).

    7) 세라피나(세라핌)

    유리디스의 명랑한 사촌의 이 이름은 『창세기』에 나오는 불의 검을 든 천사 케루빔(세라핌)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명명을 통해서 감독은 그리스 신화를 기독교적으로 연장시키고 싶어하는 의도를 다시 드러낸다. 세라피나는 결국 유리디스이다. 그녀가 미라를 따돌린다는 점은 유리디스의 무의식적 욕망의 표현으로 읽을 수 있고, 유리디스가 카니발에서 세라피나의 옷(황금색-태양/하늘색,흰색, 분홍색 베일-새벽녘과 저녁무렵 하늘의 빛깔)을 입는다는 것은 그녀가 바로 세라피나라는 것을 나타낸다. 세라피나는 적당한 수준에서 자본주의 체제와 타협하는 태도(카니발이 열리는 날, 유리디스를 군중 사이로 보내며 그녀는 하늘색 블라우스와 보라색 스커트를 입고 있는데, 그것은 그녀가 유리디스(하늘색)와 미라(보라색)의 중간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다)를 상징한다. 낮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미라의 맞은편에 있는 그녀는 밤의 여왕이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그녀가 부를 소유하고 있는 백인 혼혈 흑인인 미라와 달리, 체제로 부터 완전히 소외된 가난한 순수혈통 흑인이라는 것을 지칭한다. 감독은 ‘세라피나-세라핌’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현실적인 힘을 지칭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애교를 부려 상인에게서 필요한 물건을 외상으로 얻어내는 수완의 소유자이다. 약자인 그녀의 중요한 수단은 강자를 속이는 것, 강자가 원하는 해결책(돈의 지불)을 가능한 한 지연시키는 것(외상)이다. 그녀는 이 체제 안에서는 죽어갈 수 밖에 없는 유리디스와는 달리 살아남는 방식을 터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임수(유리디스가 아닌 척하기)는 미라라는 체제의 충실한 대행자에게 들통이 난다. 미라는 세라피나 = 유리디스라는 사실을 알고 유리디스를 죽이려고 달려든다. 그 순간, 죽음은 유리디스에게 종이테이프를 던져 그녀를 칭칭 감는다.

       3-2. <흑인 오르페>와 오르페우스주의의 영혼관

    <흑인 오르페>의 심층에는 우리가 앞서 살펴본 오르페우스주의의 ‘영혼’에 관한 사유가 깔려있다. 플라톤은 오르페우스주의와 피타고라스 학파로부터 영감을 얻어 영혼의 이미지를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에게 인간의 영혼은 원래는 신의 세계(이데아)에 속해 있었으나, 어떤 연유로 인해 이 땅으로 유배오게 된 가엾은 존재이다. 그러나 영혼은 이데아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으며, 상기의 방법을 통해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유리디스가 노래 부르는 오르페오를 향해 “나는 당신의 노랫말을 기억하고 있어요”라고 말할 때, 그 기억은 일상적인 기억이 아니라, 그녀가 떠나온 하늘에 대한 기억이다.

    <흑인 오르페>에서 유리디스는 지상에 유배된 영혼이다. 카메라는 리오 데 자네이로로 들어가는 유리디스를 조안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어마어마한 자본주의 도시 안에서 조그만 개미처럼 보인다. 김종기는 카메라가 패닝쇼트로 쇠창살을 훑어가다가 잠깐 정지되면서 동일 쇼트안에 유리디스와 새장이 중첩되는 미디엄 클로즈업 쇼트에 대해 언급하면서, 결국 카메라는 “하늘의 존재였던 그녀가 땅에 갇힌다는 은유”33)를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녀가 바빌로니아라고 불리는 마을에 왔다는 것도 분명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바빌론”은 서구 상징 전통에서 기독교적인 “천상의 예루살렘”의 맞은편에 있는 “세속의 도시”를 상징한다. 부와 영광의 도시, 그러나 정신의 결핍으로 멸망한 도시. “하늘의 집”이 그려져 있는 그녀의 스카프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으며, 그녀가 하늘에 관해 이야기할 때, 한없는 그리움의 눈물을 흘린다는 것, 그리고 그 순간 카메라가 하늘의 모습을 오래 보여준다는 것은 그녀가 고향인 하늘을 떠나 낯선 땅으로 유배 온 영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카니발로 상징되는 소란스러운 세상에서 살 수 없다. 세속적 존재인 미라가 유리디스의 하늘색 스카프를 찢을 때, 유리디스의 죽음은 확실해진다.

    그러나 죽음은 처음부터 예고되어 있었다. 그녀가 리오 데 자네이로로 들어올 때, 오른쪽(체제)으로 달려가는 자동차는 유리디스 앞에서 이미 사이렌을 울렸었다. 그 사이렌은 유리디스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

       3-3. 융합의 열망 - 디오니소스와 오르페우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흑인 오르페>는 오르페우스 신화를 충실히 반영하면서도 그 현대적인 의미를 잘 살려내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의 탁월함은 신화적 장치를 단지 형이상학적이거나 철학적인 탐구의 방식을 위해서만 동원하지 않고, 현대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으로도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본질적인 층위에서 분석해도, 영화는 완벽하게 해석된다. 그러나 다른 사회학적 의미가 본질적 층위에 중층적으로 겹쳐져 있다.

    이런 방식으로 해석하면, 유리디스-영혼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자아의 순결을 지켜내려는 원초적 열망(아프리카인으로 상징되는)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게 읽으면 왜 하필 감독이 리오 데 자네이로의 빈민가를 현대의 오르페우스의 활동 무대로 정했는지, 그리고 영화 전반에 걸쳐 보사노바 리듬을 계속 사용하고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영화의 무대가 되고 있는 바빌로니아 마을은 사탕수수 농장 노동력으로 브라질에 유입된 아프리카 흑인들이 1888년 노예 해방과 더불어 대도시 주변에 형성하게 된 파벨라라고 불리는 빈민가 중의 하나이다.34) 프랑스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는 파벨라를 가리켜 “전적인 비진정성une inauthenticité totale”35)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만큼 충격적인 가난의 풍경이었던 것 같다.

    이들은 삼바음악을 기본으로 하는 거리 축제를 형성했는데, “흑인을 중심으로 한 삼바스쿨이 대로에서 벌어지는 행렬에 참가하도록 허락받은 것은 1939년에 이르러서였다”36)고 한다. <흑인 오르페>에 나오는 새로운 삼바음악인 보사노바는 이 영화 덕택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감독이 흑인을 오르페우스로 설정하고, 열외로 여겨졌던 주변적인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데에는 분명히 사회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가 오르페우스주의 형성 당시의 저항성을 인지했건 그렇지 않건, 영화는 감독의 진지한 태도에 의해 저절로 오르페우스주의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체제로부터 완전히 밀려난 흑인들은 “바빌로니아”라고 불리는, 가짜 영광의 도시에 살고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화려한 외양이 거짓으로 선전하는 가짜 행복의 희생자들로 그려진다. “바빌로니아”는 자본주의의 신기루가 지배하는 곳이다. 영화는 그곳에 유배된 한 천상적 존재를 보여준다. 그녀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 그녀가 죽는 장면은 여러 겹의 상징성을 가진다. 우선 역이라는 장소는 상징적으로 존재의 정거장이라는 의미를 가지지만, 동시에 현대문명의 대명사이기도 한 전기로 움직이는 전차가 머무는 장소이다. 그녀는 전차 꼭대기로 도망친다. 즉, 체제의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것이다. 오르페오가 어두운 전차 종점에서 그녀를 ‘보기’ 위해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그녀는 감전되어 죽는다. 그 죽음은 신화 속에서 에우리디케를 ‘보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다시 하데스로 떨어져 버린 에우리디케의 운명과 완전히 맞아 떨어지는 설정이지만, 유리디스가 ‘전기’라는 문명의 도구에 희생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유리디스는 전기라는 문명적 방식, 체제적 방식으로는 구할 수 없는 여자인 것이다.

    유리디스를 죽인 직접적인 원인은 죽음의 사자나 미라의 추격이 아니라, 오르페오의 실수였다. 이 점이 신화와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그리스 신화를 심리학적 방식으로 깊게 읽어내는 폴 디엘은 에우리디케는 결국 오르페우스의 영혼이라고 잘라 말한다.37) 죽은 것은 유리디스가 아니라, 오르페오의 영혼이다. 자본주의의 물질만능주의의 덫에 걸려 신음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 세계 안에서 흑인의 표지를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보다 아름다운 것을 꿈꾸지만, 나날의 욕망에 쫓겨 스스로 내면의 순결함을 조금씩 죽여가고 있는 우리 자신이다. 감독의 마지막 질문은 그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유리디스-영혼을 죽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미라가 던진 돌에 맞아 오르페오는 유리디스의 시신과 함께 가파른 절벽을 따라 굴러 떨어진다. 그 절벽 아래로 성공적인 자본주의 도시 리오 데 자네이로의 장관이 보인다. 거의 90도 각도로 서있는 이 가파른 절벽은 오르페오-유리디스가 추구하는 삶이 자본주의와 얼만큼 불화하는지 극적으로 보여준다. 두 사람의 시신은 절벽 중간에 있는 풀밭에 걸린다. 식물이 다시 살아나듯이, 이 순결한 젊은이들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 사회적 해석은 순수한 신화적 해석과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놀라운 점은 바로 그것이다. 신화의 구조는 도서관의 낡은 책속에 있지 않다는 것, 우리의 나날이 신화 구조의 또다른 변형이라는 것을 이만큼 잘 보여주는 영화는 많지 않다. 신화 구조는 일상의 구조와 완전히 융합된다.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오르페우스적 융합은 우리를 다시 오르페우스주의의 태동기로 데리고 간다. 오르페우스교는 디오니소스적 열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오르페우스주의자들의 종교가 디오니소스적인 광적 신비체험을 아폴론적으로 개혁한 것으로 본다.38) 심지어 마이나데스들에게 찢겨 죽었다는 오르페우스의 죽음에 대해 디오니소스교를 개혁하려다가 디오니소스교 광신도들에게 순교당한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39)

    오르페우스주의가 디오니소스적 열광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것은 오르페우스주의가 명백한 민중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근엄한 올림포스 종교에 지친 민중은 열광을 통해 직접적으로 신과 접촉하는 해방의 체험을 추구했다. 오르페우스주의는 그 광란의 디오니소스적 경험을 아폴론적으로 순화시키면서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확보한다. 오르페우스는 아폴론적이면서 동시에 디오니소스적인 인물이다. 그는 정서와 앎을 융합한다. 오르페우스 제의인 오모파기아는 디오니소스적 신비체험을 배제하지 않지만, 훨씬 더 정제된 형태였다고 한다.40) 육체로 체험하는 디오니소스적 열광을 아폴론의 이성적 앎으로 정제하려는 열망, 그것이 오르페우스주의의 기본적인 정신이다.41)

    이 융합에 대한 열망은 <흑인 오르페>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오르페오는 아폴론의 사제로 디오니소스적 카니발을 이끈다. 오르페오 역을 맡은 브라질의 유명한 축구선수 브르노 멜로의 탄탄한 디오니소스적 몸매는 아폴론의 황금띠 장식 사이사이로 삐져나온다. 미친듯한 삼바 리듬은 오르페오의 고요한 노래와 함께 있다.

    그리고 그 열망은 기독교와 원시종교의 융합으로도 나타난다. 우리는 앞에서 감독이 그리스 신화에 없는 세라피나와 베네디토를 덧붙인 것은 신화를 기독교적으로 연장하고 싶어하는 의도를 반영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지배자와 피지배자, 중심의 존재와 주변의 존재의 융합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이미 지배자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꾀죄죄한 베네디토, 기독교 본래의 순결함을 회복한 ‘어린양’이 새로운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스의 삼바춤을 주재할 때, 카메라는 스치듯, 십자가 모양으로 세워져 있는 나무를 훑고 지나간다. 흥미로운 것은 새로운 오르페오와 새로운 유리디스가 순수한 아프리카 흑인이었던 죽은 오르페오와 유리디스와는 달리 혼혈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혼혈은 마이나스-미라의 혼혈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28)김종기, op., cit., p.75,  29)*는 감독이 덧붙인 원전에 없는 인물로 일정한 의미가 있다.  30)김미성, op., cit., p.95.  31)바람개비 : 바람 = 변화 = 운명. 그가 장님이라는 사실을 눈여겨볼 것. 장님은 아주 많은 경우 예언자에게 붙여지는 속성. 진정으로 아는 자는 육체의 눈으로 보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왕에게 그의 운명을 예언했던 테레시아스는 장님이었으며, 시인 호메로스도 장님이라고 전해진다.  32)김미성, op., cit., p.97.  33)김종기, op., cit., p.70.  34)김미성, op., cit., p.103.  35)ibid., p.113  36)ibid.  37)디엘, P., 『그리스 신화의 상징성』, 안용철 옮김, 현대미학사, 2000, p.177. <흑인 오르페>에서 이 해석은, 영화의 끝부분에서 새로운 오르페우스인 소년이 ‘제카’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새로운 유리디스인 소녀는 달리 이름이 없다는 사실로도 확인된다. 그녀는 영원히 인간 내면에 있는 존재이다. 소녀는 여전히 유리디스이다.  38)스티픈 앨 해리스, 글로리아 플래츠너, 『신화의 미로찾기』1, 이영순 옮김, 동인, 1995, pp.296-297  39)문혜경, op.,cit., p.186  40)J.E. Harrison, Prolegomena to the Study of Greek Religion, pp.237-238  41)이 융합에 대한 열망은 여성에 대한 배려로도 나타난다. 그것은 디오니소스에게서도 나타나는 특징인데, 오르페우스와 디오니소스는 여성을 구하기 위해 하데스로 내려갔던 그리스 신화의 유일한 두 영웅이다. 오르페우스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디오니소스는 어머니 세멜레를 구하려 했다. 오르페우스는 실패했고, 디오니소스는 성공했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여성을 구하려는 태도는 다른 그리스 영웅들에게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초기 영웅인 페르우스의 안드로메다 구출은 약간 맥락이 다르다). 디오니소스는 어린시절에 여자의 옷을 입고 성장했고, 프리기아에서 퀴벨레 여신의 신비에 입문한 뒤, 진정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두 영웅의 여성과의 친연성은 이 영웅들과 여성 인식의 포괄성과의 관계를 암시하면서 동시에 반체제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두 영웅 모두 양성적 특징을 보인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4. 결론

    신화는 죽은 담론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돌아온다. 특히 이성중심주의가 물러가고 인간의 상상력이 다시 중요한 인간 능력으로 각광받고 있는 시대에 신화는 매우 중요한 문화적 원천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영화 분야는 신화적 상상력을 즐겨 다룬다. CG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전에는 특수촬영으로도 구체화시킬 수 없었던 비현실적 장면들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재현해 낸다. 기술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만한 영화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많은 경우, 신화 해석의 빈약함 때문에 화려한 볼거리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예술 형식으로 육화된 영화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흑인 오르페>는 그러한 점에서 견고한 인문학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진지한 신화해석이 어떻게 신화의 기본 정신을 살려내면서도 동시에 현대적 의미를 획득하는가를 힘차게 보여주는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신화를 성공적인 방법으로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고전으로 오래 남을 영화라고 생각된다.

    진정한 신화적 상상력은 현실을 떠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 층위에서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의거하여 현실을 재구성하게 만들어 준다. 폴 디엘은 신화가 일종의 심리학적 예측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고 말한다.42) 즉, 신화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의 상태를 드러내어 문제를 대면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김미성은 “<흑인 오르페>는 프랑스인의 시각으로 그려진 브라질에 대한 영화”이며 “자국민이 느끼는 진정한 브라질이라기보다는 이국 문화에 매혹된 이방인에 의해 관찰된 브라질”로서 “빈민가에 사는 흑인들의 삶을 낭만적 문화로 묘사함으로써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43)라고 비판한다. 이 지적에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표층적 구조만 살펴본다면 일견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흑인 오르페>는 현실 고발이나,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는 영화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적 층위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사회적 층위에 겹쳐놓고 질문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 영화이다.

    신화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성공한 퀘스트의 경우에도, 신화의 방점은 제기된 질문에 찍힌다. 신화는 존재의 깊은 층위에서 근원적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진다. 영웅은 질문을 던지는 자이다. 성배전설의 영웅 퍼시발은 성배 행렬을 보고도 질문을 던지지 않아 퀘스트에 실패한다. 그의 빼어난 무술 실력도 아무 소용이 없다. 질문을 던지지 않는 영웅은 아무도 아니다. 프랑스의 사랑스러운 애니메이션 <키리쿠와 마녀>에서 엄지동자 키리쿠는 마녀라고 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해 아무 질문도 던지지 않는 마을 사람들과는 달리 “왜 마녀는 그렇게 못됐죠? Pourquoi la sorcière est-elle si méchante?”라고 끊임없이 질문을 퍼부어댄다. 그 질문의 힘으로 키리쿠는 마을을 구원하는 데 성공한다. <흑인 오르페>는 신화를 통해 문제를 제기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문제를 ‘다시’‘새롭게’ 제기한다. 영화는 올림포스 신들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던 비참한 인간 영혼의 의미에 대해 질문했던 오르페우스주의자들 처럼, 가짜 영광의 도시 바빌로니아 파벨라에 처박혀 있는 순결한 흑인처녀 유리디스에 대해 질문한다. 당신은 그녀가 체제의 덫에 걸려 죽어가고 있을 때 무엇을 할 것인가? 라고.

    오르페우스주의자들은 영혼에 관한 새로운 개념을 가져옴으로써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은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는 채로 지옥으로 아내를 찾아 나선 오르페우스라는 한 서정적 영웅의 비통한 실패로부터 던져진 질문이다. <흑인 오르페>의 오르페오는 죽는다. 그가 자신의 영혼인 유리디스를 죽였기 때문이다. 질문은 계속 던져진다. 다시 죽을 것인가? 아니면 유리디스를 구하고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 대답은 각자의 몫이다.

    42)디엘, P., op., cit., pp.17-27.  43)김미성, op., cit.,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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