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예술과 몸의 개입*― 마크 핸슨의 이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중심으로

Digital Art and B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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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디지털 예술의 새로움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특징 중의 하나가 상호작용이며, 이와 더불어 몸의 중요성이 항상 거론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논의는 전통적인 예술에 비해 디지털 예술에서 상호작용의 특성이 강화되며 몸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다는 식의 결론으로 귀결될 뿐이다. 이러한 논의는 디지털 예술이 근본적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명확하게 해명하지 못한다. 이 글에서 언급한 미술이론가 크라우스나 철학자 들뢰즈의 경우 사진이나 영화의 이미지가 지닌 독특한 특성을 분석하고 있다. 이들의 견해는 디지털 예술의 특성을 설명하는데 유효한 통찰을 제공하지만 디지털 예술만이 지닌 새로움을 설명하는 데는 분명히 한계가 존재한다. 이에 반해서 핸슨의 논의는 기존의 예술과 달리 디지털 예술은 몸이 프레임의 작용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는 근본적인 특성을 제시한다. 더불어 이 논의의 밑바닥에는 베르그송 철학에서 ‘정념’과 ‘지각’의 관계에 대한 들뢰즈 입장과 명확한 차이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는 들뢰즈와 달리 정념이 지각의 한 형태가 아닌 지각의 밑바닥에서 지각을 추동하는 근원임을 밝힌다. 핸슨에 따르면 디지털 예술이야말로 베르그송이 제시한 이러한 정념의 기제를 충실하게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을 제시한다. 그 기반의 핵심은 ‘절대적 프레임’으로서의 몸이다. 핸슨의 논의는 분명 앞선 논의와 달리 디지털 예술이 기존의 예술과 다른 새로운 특성을 설명하는데 유효하다. 그러나 절대적 프레임으로서의 몸에 대한 핸슨의 논의는 그것이 디지털 예술의 나타내는 특성을 제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현실의 제약을 벗어나서 인간의 몸 자체가 임의적으로 상황, 즉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관념론적 특성도 동시에 지닌다.


    We can’t discuss about the newness of the digital art without mentioning the terms of ‘interactivity’ and ‘the importance of body’. But most discussions focus just on the tendency that the interactive character and the importance are more emphasized in the digital art than in the traditional art. These discussions were impotent to make it clear what change the digital art bring abouts. We should pay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 theorists such as Rosalind Krauss and Gilles Deleuze made considerable analyses on the unique characters which the images in the pgotography and movie carry. But their theories expose some fatal weak points nevertheless of giving some valuable inspirations about the essential character of the digital art. Comparing with them, Mark Hansen gave some important clues for the explanation of the newness of the digital art.

  • KEYWORD

    디지털 예술 , 몸 , 크라우스 , 들뢰즈 , 마크 핸슨 , 디지털 이미지 , 상호작용

  • 1. 문제제기

    디터 다니엘스(Dieter Daniels)는 20세기 모더니즘 예술의 라이트모티프(Leitmotif)를 ‘참여’로 규정한다.1) 그는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이러한 경향을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레디메이드는 원래 어떤 예술적 의도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은 기성품이므로 이것이 예술적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관객에게 새로운 맥락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객의 참여가 없이 레디메이드가 예술품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경향은 단지 레디메이드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닌 20세기 모더니즘 예술의 일반적인 경향으로 확장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가 말하는 ‘정보’(information)의 개념을 적용하면 이를 훨씬 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예술작품이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예술작품의 언명에 포함된 ‘개연성’(probability)의 정도가 낮아야 한다고 본다.2) 가령 ‘8월 4일인 내일 눈이 오지 않는다.’는 언명과 ‘8월 4일인 내일 눈이 온다.’는 언명이 있다고 치자. 전자는 그다지 큰 정보를 주지 않는다. 한 여름인 8월 4일에 눈이 오는 것을 경험한 일이 거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눈이 오지 않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이에 반해서 한여름인 내일 눈이 온다는 언명은 매우 큰 정보의 가치가 존재한다. 개연성이 거의 0에 가깝기 때문이다. 만약 8월 3일에 다음날 눈이 온다는 사실을 안다면 사람들은 그 정보에 대해서 매우 흥분하게 될 것이다.

    이는 예술작품에도 그래도 적용될 수 있다. 가령 20세기의 회화를 보면 명료함이 떨어지며 이와 비례하여 그것이 묘사하는 상황에 대한 개연성도 떨어진다. 심지어 추상표현주의 회화의 경우에는 어떤 구체적인 상황 자체에 대한 묘사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 것이라면 무의미한 것이며 예술작품도 아닐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예술작품이 제공하는 정보는 현실적 개연성이 0에 가깝다. 예술작품이 지닌 정보는 전적으로 관객의 수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예술작품은 ‘열린 예술작품’(open artwork)이 되는 것이고, 이때 ‘열린’이라는 수식어가 갖는 의미는 다니엘스가 말하는 관객의 ‘참여’와 상통한다. 이러한 상황은 비단 회화뿐만 아니라 음악이나 공연 예술에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그런데 다니엘스에 따르면 이러한 레디메이드나 전통적인 열린 예술작품은 모더니즘 예술의 라이트모티프를 충실하게 실현할 수가 없다. 레디메이드나 추상표현주의 예술작품의 경우 관객의 참여는 어디까지 미리 만들어진 작품을 자신의 마음대로 해석하는 수동적인 역할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참여란 ‘상호작용’(Interaction)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단순히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플럭서스의 예술가들이 완성된 예술작품의 창작을 거부하고 ‘퍼포먼스’를 추구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1950년대에 존 케이지의 ‘해프닝’ 음악은 이러한 상호작용의 효시를 이루며, 이후 1960년대에서 70년대에 활동하던 백남준, 피터 캠퍼스, 브루스 나우만, 댄그래엄 등의 초기 미디어 아티스트는 이를 계승한다.3) TV나 비디오 카메라 혹은 폐쇄회로 카메라와 같은 당시 뉴미디어를 활용한 미디어아티스트들의 목적은 보다 확장된 예술적 표현을 위해서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전통적인 예술의 매체로서는 불가능하였던 예술작품과 관객의 상호작용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말하자면 이들의 관심은 예술작품이 인간의 소통을 위한 매개, 즉 상호작용의 매체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디터 다니엘스에 따르면 인간과 인간의 상호작용의 매개로서 매체예술은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점차 기술 자체에 의존한다. 1980년대 인공지능이나 이후 가상현실의 기술은 모든 것을 데이터화하고 통제하여 관객의 행동을 미리 예측한 후 이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프로그램화한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미디어아트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 대 인간의 상호작용을 위한 매개라는 진정한 의미를 상실하고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으로 변질되는 경향을 보인다. 다니엘스가 보기에 1990년대 이후 오늘날 미디어 아트의 시급한 과제는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이라는 왜곡된 흐름으로부터 인간과 인간의 상호작용이라는 올바른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4)

    그는 1960년대 행해졌던 여성 예술가 발리 엑스포(Valie Export)의 파격적인 작업과 같은 관객과 직접 소통하는 퍼포먼스 행위를 디지털 예술이 지닌 한계를 보완할 모델로 은근히 제시한다. 1968년 엑스포는 구멍을 낸 상자를 자신의 상체에 뒤집어쓰고 행인들에게 상자에 손을 넣어 자신의 가슴을 직접 만지게 하였다. 이 퍼포먼스 속에는 인간과 인간의 상호작용이란 바로 몸에 의한 접촉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있으며, 나아가 다니엘스가 보기에 이 메시지는 디지털 기술이 그 특성상 신체적 세계가 결여될 수 있다는 암시를 주는 것이다.

    디지털 매체가 엄격한 데이터의 통제에 의해서 만들어지므로 인간적 교감 혹은 물질적 신체성을 결여할 수 있다는 이러한 견해는 매우 상식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 견해는 디지털 기술 및 디지털 예술이 지닌 특성에 대한 오해를 낳을 뿐만 아니라 디지털 예술이 지닌 ‘새로움’에 대해서 본질적인 통찰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는 마치 디지털 기술과 인간의 몸이 원래 대립적이므로 그러한 대립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디지털 예술이 디지털 기술 이전의 순순한 신체적 접촉을 회복해야 한다는 편견을 낳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입견에 반하여 마크 핸슨(Mark Hansen)은 디지털 예술이 지닌 ‘새로움’이란 전통적인 예술에서 결여된 몸의 직접적인 개입이 가능하다는 점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물론 예술에서 몸이나 신체성은 이미 예술이론에서 많은 이론가들에게 의해서 강조되었던 쟁점이었다. 가령 그린버그 이후의 미술이론가 크라우스는 20세기 미술의 핵심을 몸에서 찾았으며, 들뢰즈 역시 베르그송의 지각이론에 바탕을 두고 영화에서의 지각을 단순히 시지각이 아닌 몸 전체에서 느끼는 정서적 차원으로 확장하였다. 이들이 분석하는 이미지의 특성들은 분명 디지털 이미지에서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들이 분석한 이미지의 특성들은 디지털 예술만의 고유한 특성으로 확장하는데 한계가 있다. 이에 반하여 마크 핸슨의 이론은 크라우스나 들뢰즈의 이론과는 명백한 차이를 지닌다. 이 글은 핸슨이 말하는 디지털 예술의 새로움이 무엇인지를 기존의 논의와 비교하면서 살펴볼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핸슨의 논의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도 더불어 살펴보게 될 것이다.

    1)Dieter Daniels, Vom Readymade zum Cyberspace, Kunst/Medien Interferenzen, Hatje Cantz Verlag, 2006, 58쪽.  2)움베르트 에코, 조형준 옮김, 『열린예술작품』, 새물결, 2006, 113쪽 참조.  3)Dieter Daniels, op. cit. 60쪽, 64쪽 참조.  4)Ibid, 79쪽.

    2. 인덱스 이론의 디지털 예술론으로의 확장?크라우스 이론의 한계

    크게 주목받지는 않았으나 예술의 분야와 관련하여 디지털 기술이 지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특성 중의 하나는 ‘컨버전스’(convergence) 기술 및 미디어의 등장이다. 볼터와 그루신은 이미 디지털 기술에 바탕을 둔 뉴미디어의 특성 중 하나가 과거의 개별 미디어들을 끊임없이 재매개(remediation)하면서도 하나의 미디어로 통합되어 가는 컨버전스 현상을 언급하였다. 이러한 컨버전스 기술이 가능한 것은 전적으로 디지털 기술의 등장과 관련이 있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스마트폰은 이러한 현상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스마트폰은 전화이자 동시에 오디오 기기이며 또한 영상기기이자 동시에 책이기도 하다. 현재 스마트폰은 기존의 개별 미디어를 하나로 통합한 컨버전스 기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컨버전스 기술이 가능한 것은 전적으로 디지털 기술의 덕택이다. 디지털 기술은 말 그대로 모든 입력을 디지트 단위의 데이터로 수량화한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서 컴퓨터는 하드디스크에 동일한 형태로 쓰인 데이터를 어떤 프로그램을 구동시키는가에 따라서 영상으로 재생하기도 하며 소리로 재현하거나 혹은 텍스트의 형태로 나타낸다. 과거 아날로그 미디어의 경우 영상이나 이미지, 텍스트나 음성을 재생하기 위해서 별도의 개별적인 미디어가 필요하다. 음성, 텍스트, 영상 등 각각의 데이터가 서로 호환될 수 없는 고유한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디지털 미디어의 경우에는 영상, 이미지, 텍스트, 음성 등이 모두 동일한 형태의 데이터(즉, 디지트)로만 들어지므로 그것을 읽을 수 있는 프로그램(소프트웨어)만 있다면 얼마든지 하나의 기기로 재현이 가능한 것이다.

    영상과 소리, 그리고 텍스트를 통합한 디지털 미디어의 출현은 중요한 예술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20세기 이후 음악, 미술, 공연예술, 문학 등 모든 예술 분야가 추구하는 지향성 중의 하나가 장르의 통합 혹은 단일한 감각을 위한 것이 아닌 공감각적인 예술이다. 이러한 통합적 예술의 선구적 개념은 바그너(Richard Wagner)가 제시한 ‘총체예술작품’(Gesamtkunstwerk) 에서 발견되는데, 주지하다시피 그는 오페라를 음악이 아닌 회화와 음악, 그리고 문학이 하나의 장르로 융합된 통합적인 예술을 지향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디지털 미디어를 활용한 뉴미디어 아트가 바그너의 ‘총체예술작품’ 을 구현한다고 보는 것도 과장된 주장은 아닌 듯 보인다.5)

    미술 이론가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 역시 오늘날 뉴미디어의 특성이 과거와 달리 특정한 미디어가 지닌 고유한 물질적 특성이 소멸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녀는 미디어는 각각의 고유한 특성을 지니며 이러한 ‘미디어의 고유한 특성’(medium specificity)에 충실한 미술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미술이라는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의 모더니즘 이론이 이미 시효를 상실하였음을 강조한다.6) 그린버그는 회화란 캔버스라는 평면 미디어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3차원적인 공간을 재현하기보다는 캔버스의 특성인 평면성을 충실하게 나타내는 추상표현주의나 몬드리안의 그림을 진정한 모더니즘의 예술로 간주하였다. 오늘날 미디어 환경은 그린버그의 생각과 정반대로 하나의 미디어가 다른 미디어와 차별성을 상실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텔레비전이 오디오나 전화의 기능을 하며, 전화가 텔레비전이나 오디오의 기능을 하는 미디어 통합(컨버전스)의 환경에서 특정 미디어의 고유한 특성을 논하는 것은 점차 더 불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그녀에 따르면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에 앞서 ‘사진’과 관련한 벤야민의 논의 속에는 미디어 자체의 특성과 미디어의 고유성 상실이라는 두 가지 모순된 관점이 동시에 발견된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벤야민은 사진을 언급하면서 이를 하나의 특수한 미디어로 간주하기보다는 기술 복제미디어의 하나로 간주한다. 이에 반해서 「사진의 작은 역사」에서는 사진이라는 미디어 자체 내에서 아우라가 쇠퇴하는 사진이라는 미디어의 고유한 현상을 분석 한다.7) 그녀는 벤야민이 보여주는 사진에 대한 이러한 모순된 이중적 태도가 오늘날 미디어 상황을 대변하는 것으로 본다. 예를 들어 사진은 이미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생산에 기여하는 복제기술로 일반화되었지만, 초현실주의자들처럼 세계의 새로운 질서를 보여주는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비디오 아티스트 크리스챤 마클레이(Christian Marrclay)의 미디어 아트 작품인 <비디오 4중주>(Video Quartet, 2002)는 그녀가 들고 있는 하나의 사례이다. 이 작품은 4개의 멀티채널, 즉 4개의 화면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대형 벽에 걸린 4개의 스크린에는 기존의 상업영화에서 따온 네 개의 장면이 반복적으로 상연 되는데, 네 개의 장면은 모두 음악 연주나 소리와 관련된 것들이다. 이 작품에서 각각의 스크린은 수직적으로 하나의 서사를 이루지만 네 개의 스크린은 단지 각각의 스크린에 담긴 장면에서 나오는 소리에 의해서 연결된다. 마클레이의 이 작품은 상업영화를 반복하지만 동시에 네 개의 이미지가 사운드에 의해서 결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는 곧 이미지 트랙과 사운드 트랙이 결합되는 유성영화라는 미디어가 가지고 온 미디어 자체의 새로운 가능성을 재발견해 내는 것이다.8) 여기서 크라우스는 새로운 미디어가 자본주의의 상품논리에 획일적으로 순응하는 무차별적인 미디어인 동시에 미디어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에 대해서 숙고하는 자기성찰적인 가능성을 지닌 것으로 본다.9)

    그러나 지금까지 미디어의 새로운 환경과 관련된 크라우스의 논의는 영상, 소리, 텍스트 등의 모든 감각적 요소들을 총괄한 통합적 미디어로서의 디지털 미디어가 제공하는 예술작품의 근본적 변화를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다. 바그너의 ‘총체예술작품’이라는 개념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시각, 청각, 촉각 등의 감각적 요소들을 섞어놓은 것이 아니다. 예술작품은 눈 혹은 귀라는 개별적 감각기관이 아닌 그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활동하는 ‘몸’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개념은 시각이나 청각, 촉각 등의 감각 자체가 이미 서로 분리 될 수 없으며 회화는 시각, 음악은 청각을 위한 예술이라는 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와 상충한다.

    20세기 이후 개별 감각은 고립된 감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과학적 으로도 일반화되었다. 가령 시각 활동의 경우, 우리가 어떤 시각자료를 정보화 하는 것은 이미 우리 몸에 축적된 장기기억 체계에 의해서 가능하다.10) 이러한 장기기억 체계는 공간감, 촉각, 청각, 시각, 후각 등 모든 감각이 얽혀서 만들어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어떤 것을 시각적으로 감각한다는 것은 눈이 아닌 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 관한 크라우스의 논의에서 몸이 중심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크라우스는 현대미술을 사진이라는 미디어의 근본적인 특성과 관련짓는 가운데서 이미지에 대한 몸의 개입을 암시적으로 나타낸다. 크라우스는 사진의 특성을 기호학적으로 ‘인덱스’(index, 지표)로 설명한다. 인덱스라는 용어는 퍼스(Charles Sanders Peirce)가 창안한 기호학적 개념으로서, 그는 인덱스 외에도 도상(icon)과 상징(symbol)으로 기호를 구분한다. 이 세 가지 기호는 그 기호가 나타내는 대상과의 관련성에 따라 구분된다. 먼저 도상은 기호가 나타내는 대상과 유사성의 관계를 띠는데 전통적으로 회화가 이에 해당 된다. 한편 상징은 언어처럼 대상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이 이루어지는 자율적인 체계로서 관습적인 것이다. 소쉬르의 지적처럼 ‘자동차’, ‘사과’ 등의 언어 기호는 그 대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이 만들어진 자의적인 기호일 뿐이다. 한편 인덱스는 대상과 인과적인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가령 풍향계는 바람 자체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바람이 실제로 불고있다는 인과적 흔적을 담고 있으며, 모래밭에 새겨진 발자국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진은 필연적으로 그 촬영대상과 직접적인 인과관계, 즉 대상의 흔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인덱스에 해당된다.11)

    물론 사진은 회화와 마찬가지로 대상과 유사한 이미지의 특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도상 기호의 특성을 지니지만 이미 롤랑 바르트가 통찰한 바와 같이 인과적인 흔적으로서 인덱스의 특성을 강하게 지닌다. 크라우스는 바르트의 견해를 이어서 사진의 본질을 인덱스의 특성에서 찾고자 한다. 이미 벤야민이 밝혔듯이 회화와 사진은 확연하게 구분된다. 회화는 반드시 작가의 의도가 개입되어 코드화되지만, 이에 반해서 사진은 작가가 아무리 모든 것을 통제하고 코드화하려 해도 셔터를 누르는 순간 자신의 통제바깥에 놓이게 되기 때문에 현실 자체를 인과적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12)

    기호학적으로 볼 때 현실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기호란 언제나 약호체계를 전제하는데, 현실 자체에는 어떠한 약호체계(코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은 그것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느냐, 즉 어떠한 방식으로 코드화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기호화될 것이다. 현실 자체는 기호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진이 현실과 너무 밀접하게 닿을 경우 그것은 기호가 아니다. 사진이 회화와 달리 현실의 흔적을 인과적으로 담는 인덱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하게 이것이다.13) 현실 자체는 의미론적으로 볼 때 비어있으며, 약호체계에 의해서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현실을 굳이 기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의미를 결여한 기호’, 즉 ‘비어있는 기호’일 것이다. 크라우스는 이렇게 비어있는 기호를 ‘전환사’(shifter)라고 부른다. ‘전환사’란 그 자체로서는 비어있는 기호로서 언제든지 맥락에 따라서 다른 의미로 전환될 수 있다. 가령 ‘이것’ 혹은 ‘지금’은 어떤 것을 지시하는가 혹은 어떤 순간을 지시하는가에 따라서 그 의미가 전환된다. 따라서 비어있는 기호인 사진에 의미는 전적으로 그것을 보는 사람의 개입에 의해서 발생한다.

    할 포스터(Hal Foster)가 들고 있는 게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사진 한 장은 사진의 이러한 특성을 잘 보여준다.14) <루디 삼촌>는 작가 자신의 삼촌을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에는 게슈타포였던 삼촌의 모습이 담겨있다. 리히터의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사진에서도 삼촌의 모습은 마치 초점이 맞지 않은 것처럼 빗겨지고 긁힌 것처럼 보인다. 얼핏 보면 이 사진은 삼촌의 초상 이라는 도상으로 보일 수도 있고 혹은 게슈타포라는 전범의 상징으로 보일 수 도 있다. 하지만 이 사진은 도상이나 상징이 아닌 현실의 인덱스이다. 리히터는 개인적으로 자상한 삼촌이지만 게슈타포라는 끔찍한 인격체이기도 한 루디 삼촌의 흔적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사진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은 자상한 삼촌도 끔찍한 게슈타포도 아닌 애증, 혹은 라캉의 표현을 빌자면 대상에 대한 히스테리적 관계를 나타낼 뿐이다. 이 애증의 대상은 관객에 따라서 부모님, 연인, 형제, 친구 등 어느 누구가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이 사진은 일종의 전환사인 셈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크라우스의 논의는 사진이라는 미디어의 인덱스적 특성을 현대회화의 일반적인 특성으로 확장 시킨다. 이렇게 확장된 크라우스의 견해는 오늘날 디지털 예술의 특성에 훨씬 더 잘 부합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롭게 이미지의 변형이 가능한 디지털 예술의 경우 애초에 어떤 고정된 형상을 지니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관객의 실질적인 개입이 없이는 예술작품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미지는 원래 빈 기호일 뿐이며 기호의 의미를 채우는 것은 관객의 실질적인 경험이라는 크라우스의 논의는 디지털 예술의 특성을 설명하는데 잘 부합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크라우스의 논의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한다. 그녀의 이론은 디지털 예술이 관객의 참여에 의해서 예술작품의 의미가 발생한다는 현대예술의 흐름을 계승하고 있다는 측면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디지털 예술이 이전의 현대예술과는 어떻게 다른 새로움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히지 못한다. 앞서 언급하였던 에코의 용어를 빌자면 디지털 예술이 20세기 예술처럼 ‘열린 예술작품’의 특성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디지털 예술이 그 이전의 예술과는 어떻게 구분되는지에 대해서 명백하게 밝히는 데에는 무력하다.

    5)랜털 패커, 켄 조던 지음, 『멀티미디어 – 바그너에서 가상현실까지』, 나비프레스, 2004. 저자 ‘서문’ 참조.  6)Rosalind Krauss, “Two Moments form the Post-Medium Condition”, October, Vol. 116, Spring, 2006, 56쪽.  7)Rosalind Krauss, “Reinventing the Medium”, Critical Inquiry, Vol. 25, No. 2, Winter, 1999, 292쪽.  8)Rosalind Krauss, “Two Moments form the Post-Medium Condition”, 58쪽.  9)이런 점에서 크라우스는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을 완전하게 비판하였다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모더니즘을 확장하였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10)Robert L. Solso, 신현정, 유상욱 옮김, 『시각심리학』, 시그마프레스, 2000, 123쪽.  11)Rosalind Krauss, 최봉림 옮김, 『사진, 인덱스, 현대미술』, 궁리, 2003, 33쪽.  12)벤야민은 아제의 사진을 다루면서 사진의 특이성이 모든 현실을 공허하게 만든다는 점을 강조한다.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사진의 작은 역사」,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외』, 도서출판 길, 2008, 185쪽.  13)사진의 이미지를 공허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프레임을 통하여 화면을 체계적으로 잘 구성해야 할 것이다. 이 경우 사진의 이미지는 프레임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조직되었다기 보다는 인위적으로 프레임화되지 않고 그 자체로 완결된 이미지로 보이게, 즉 프레임을 감추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크라우스는 만레이의 사진에서 나타나듯이 사진에서는 프레임 자체가 항상 이미지 속에 포함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Rosalind Krauss, 앞의책, 187쪽.  14)할 포스터, 이영욱, 조주연, 최연희 옮김, 『실재의 귀환』,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3, 206쪽.

    3. 들뢰즈의 지각이론에 대한 핸슨의 비판과 한계

    크라우스와 달리 들뢰즈의 예술론은 디지털 예술에서 몸의 개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 훨씬 더 명료한 견해를 나타낸다. 들뢰즈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회화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감각’(sensation)이란 단일한 감각기관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닌 몸 전체의 반응임을 명시하고 있다. 가령 베이컨의 <교황 이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은 교황의 전율적인 모습이 아닌 전율 자체를 표현하고 있다. 전율적인 교황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것과 전율 자체의 묘사는 다르다. 전율이란 시각적인 것이 아닌 몸 전체에서 느껴지는 떨림이기 때문이다. 만약 교황의 모습을 매우 전율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시각적인 체계에 의해서 전율적인 모습이라고 판단하게 될 것이다. 이는 매우 지적인 작업이며 순수한 의미에서 감각의 활동이라고 할 수 없다. 전율은 오히려 이러한 지성적인 코드화의 과정에서 어긋날 때 감각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베이컨의 그림은 전율과 같은 감각적 경험을 서사적으로 코드화시키기보다는 서사로부터 이탈함으로써 감각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감각은 지성적인 시각적 코드화가 아닌 몸 자체의 반응인 것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서사의 파괴로부터 비롯되는 이러한 감각적 반응은 영화라는 기술 미디어에서는 훨씬 더 용이하고 포괄적으로 발생한다. 들뢰즈가 보기에 영화에서의 ‘클로즈업’은 관객의 몸에 직접 정서적 반응을 유발시키는 가장 일반적인 기제이다. 들뢰즈는 클로즈업을 ‘얼굴’과 서로 호환할 수 있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가 들고 있는 시계의 클로즈업은 그의 의도를 집약적으로 나타낸다. 가령 어떤 영화에서 갑자기 시계의 클로즈업 장면이 삽입되었다고 치자. 이는 두 가지의 기능을 갖는다. 하나는 강도의 계열의 기능이다.15) 시계의 클로즈업은 시간이 어떤 결정적인 순간으로 다가가고 있음을 극적으로 알려준다. 이는 서사의 극적인 흐름을 배가시킨다. 이에 반해서 시계의 클로즈업이 지닌 또 다른 기능은 ‘얼굴’ 혹은 ‘반영하고 반영되는 통일성’이다.16) 예컨대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시계의 바늘이 움직이는 것을 클로즈업할 경우 관객은 오히려 서사에 몰입하기보다는 그러한 서사로부터 일탈하여 어떤 긴장감이나 초조함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초조함이나 긴장감은 서사 속에 통합된 것 이라기보다는 정반대로 안정된 서사로부터 벗어날 때 발생하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가 의도치 않게 상대방의 얼굴이 마치 클로즈업되듯이 자세히 보이고 그 사람의 표정을 세밀하게 드러날 때 대화의 맥락에서 벗어나 왠지 모를 정서적 반응이 발생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정서적 반응을 베르그송의 용어를 빌어 ‘정념’(affection)이라고 부른다. 정념이란 베이컨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몸의 전율과 같은 신체적 반응을 의미한다. 들뢰즈의 설명에 따르면 이러한 클로즈업은 대상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이미지를 서사에 통합시키기보다는 “공간-시간 좌표를 제거한다.”17) 이는 앞서 언급한 베이컨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전율과 유사한 것이다. 베이컨의 그림에서 전율의 감각은 서사적인 시각적 체계로부터 이탈된 것에서 발생하였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클로즈업은 서사로부터의 일탈을 의미하고 이러한 일탈로부터 어떤 정서적인 감정, 즉 정념이 발생한다.

    이는 크라우스가 말하는 사진의 인덱스적 특성과도 연관이 있다. 사진의 인덱스적 특성은 그것이 원초적으로 어떠한 의미도 결여한 비어있는 현실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클로즈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매우 당당하고 활기찬 인물을 클로즈업할 경우 엉뚱하게도 그의 얼굴에 어두운 표정이 드러난다. 이는 그가 지닌 서사로부터 벗어난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냉정한 현실 자체의 반영인 셈이다. 이러한 모습은 오히려 서사를 방해하며 시간이 정지되고 영화의 서사 자체가 허구임을 노출시킨다. 말하자면 클로즈업은 영화에서 서사의 연결을 방해하는 정지와 ‘간격’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간격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간격은 서사의 단절을 의미하는데, 현실에서 서사란 우리의 관습에 의해서 임의로 만들어진 익숙한 체계에 불과하다. 서사의 단절은 관습적 인식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문에 달린 손잡이를 문을 열기 위해서 손으로 잡는 문의 일부분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손잡이를 잡을 때 문을 열고 내가 나가게 될 것이라는 서사를 전제한다. 이 경우 어떠한 정감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손잡이를 잡았는데 차가운 쇠의 질감이 느껴졌다고 치자. 이때 문을 열리고 내가 나갈 것이라는 서사는 순간적으로 파괴되고 무엇인가 특이한 느낌이 든다. 말하자면 어떤 정서적 감정이 발생하는 것이다. 정념이란 곧 우리 몸에 익은 익숙함의 단절에서 비롯된다. 이는 곧 내 머릿속에 있는 서사와 현실의 간극(혹은 간격)을 나타낸다. 이러한 간극은 내가 지닌 서사에 대한 회의를 유발한다. 세상을 익숙한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보게 만드는 것이 간극의 역할이다. 이러한 간극으로부터 발생하는 정서적 반응인 정념은 기존의 서사로부터의 일탈을 의미하므로 새로운 서사를 촉발하는 생산적 기능을 지닌다. 들뢰즈에게 영화에서 발생하는 정념은 곧 철학적인 문제제기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들뢰즈가 간격을 중요시하는 것은 초기 러시아 영화에서 푸도프킨이나 에이젠슈타인과 같은 몽타주 이론가들보다 구성주의자인 베르토프의 입장을 더 옹호하는데서 분명하게 나타난다.18) 푸도프킨이나 에이젠슈타인과 같이 몽타주 영화에 치중하는 사람들은 쇼트의 연결 시에 서사적인 흐름을 절대시하며 이를 극대화하려 한다. 이에 반해서 베르토프는 쇼트들 간에 암전이나 간격을 둠으로써 자연스러운 서사연결을 방해한다. 이는 관객이 서사에 매몰되지 않고 객관적이고도 냉정한 시선을 갖게 하고자 한 베르토프의 구성주의 원칙에서 비롯된 것이다. 베르토프는 영화의 시선은 인간의 시선과 달리 이데올로기적 서사로부터 거리를 취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영화는 이러한 객관적 시선을 극대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들뢰즈가 영화라는 새로운 미디어에서 기대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인간의 지각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정되어 있다. 이는 이른바 신체의 ‘정박성’으로 표현될 수 있다. 기계는 이러한 정박성을 상대적으로 극복할 수 있게 만든다. 영화라는 새로운 미디어는 사람들이 종래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사고방식을 유발하는 것이다. 들뢰즈의 영화에 관한 견해는 영화를 근본적으로 사진이라는 미디어의 특성에서 찾는 바쟁(Andrè Bazin)의 관점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19) 영화의 미덕은 사진이라는 기계적 특성이 그러하듯이 인간과 다른 지각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인간의 일상적인 지각이 불가능한 기계적인 시선을 통해서 인간의 새로운 지각과 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

    디지털 미디어와 관련하여 들뢰즈의 이론이 지니는 강점 역시 여기에 있다. 디지털 기계는 영화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새로운 지각을 유발할 것이다. 특히 들뢰즈의 가상성(virtuelité) 개념은 디지털 미디어가 지닌 특성을 설명하는데 매우 유효하다. 들뢰즈는 ‘가상성’의 개념을 현실과 대립되는 허구적인 특성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고, 현실이 지닌 무한한 특성 중 우리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은 잠재적 가능성, 즉 ‘잠재성’의 의미로 사용한다. 피에르 레비(Pierre Lévy)가 말한 대로 디지털 미디어의 근본적 특성은 바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현실의 잠재성을 무한히 확장하여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디지털 미디어는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현실을 유동적인 상태로 만들어서 새로운 잠재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레비는 디지털 기술의 이러한 특성을 ‘현실의 가상화’라고 부른다.

    그런데 마크 핸슨(Mark Hansen)은 이러한 들뢰즈의 이론이 디지털 미디어 혹은 디지털 예술에 적용될 경우 치명적인 난점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 치명적인 난점이란 들뢰즈의 이론이 궁극적으로 ‘몸’의 역할을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 보았듯이 들뢰즈에게 영화가 지닌 미덕은 인간의 몸이 지닌 한계, 즉 정박성을 벗어나는데 있다. 가령 인간의 시선은 새처럼 공중에서 내려다 볼 수 없다. 심지어 머이브릿지의 연속촬영 기법이 발견되기 전까지 인간은 말이 달릴 때 네 발이 땅에서 다 떨어지는지 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빠른 속도의 운동을 명확하게 볼 수 없는 인간의 신체적 한계 때문이다.

    핸슨이 보기에 디지털 기기가 이러한 신체적 정박성을 벗어나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새로운 지각을 발생시킨다는 들뢰즈의 관점은 몸의 중요성을 나타내기보다는 오히려 몸의 개입을 위축시키는 것이다.20) 들뢰즈는 몸의 개입이 간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때 간격이란 서사적 자연스러운 전개가 중단됨을 의미하며 이러한 중단은 몸의 정서적 반응, 즉 정념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들뢰즈의 이러한 생각은 들뢰즈가 차용하고 있는 베르그송의 이론을 왜곡하고 있으며 몸의 역할을 왜곡하고 있음을 핸슨은 강조한다. 들뢰즈의 이론에 따르면 디지털 미디어가 제공하는 새로운 지각은 인간 몸의 정박성을 벗어나는 정도와 동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몸이 지닌 신체적 정박성으로부터 해방될수록 새로운 지각이 출현하게 된다는 것이다.21) 핸슨은 들뢰즈의 이러한 견해가 근본적으로 베르그송의 ‘정념’(affection)과 ‘지각’(perception)의 관계를 왜곡시키는데서 비롯된다고 본다. 베르그송에게 정념은 지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22) 인간이 어떤 것을 지각한다는 것에는 항상 정념이 개입한다.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베르그송의 지각이론을 간단하게나마 고찰할 필요가 있다. 베르그송은 물질을 ‘이미지들의 총체’(l’ensemble des images)라고 정의한다.23) 이때 이미지란 어떤 물체에 대한 주관적인 심상을 뜻하기보다는 사물을 형성하고 있는 성질들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소금이라는 물질은 흰색, 입방체, 짠맛, 물에 용해되는 성질, 나트륨 등의 무수히 많은 성질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성질들을 이미지라고 부른다면 소금이라는 물질은 이 이미지들을 제외하고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물질이 지닌 무한한 이미지들 중 극히 제한된 일부만이 인간에게 알려져 있을 뿐이다. 나아가 이러한 이미지를 지각하는 인간의 몸 또한 베르그송에게 이미지일 뿐이다.

    그런데 베르그송에게서 인간의 몸이라는 이미지는 다른 외부 물질의 이미지와는 달리 어떤 특권적 지위를 갖는다. 그 특권적 지위란 내 몸이 주변의 이미지들에 가한 변형성(modifications)에서 비롯된다.24) 인간이 사물을 바라볼 때 인간의 몸이 취하는 각도나 거리 혹은 정서적인 상태에 따라 사물의 이미지는 변형된다. 한 사물을 가까이서 보다가 멀리 가서 보면 적게 보인다. 사물의 이미지가 변형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물은 그러한 능력을 지니지 못한다. 사물에서 우리가 점차 멀리 떨어져도 사물 자체는 우리의 몸에 대한 이미지를 변형시키지 못한다. 따라서 베르그송에게 지각의 작용이란 인간이 사물과 만나서 표상(la représentation)을 만들어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25) 간단히 말하자면 내 앞에 있는 물질에 대해서 나에게 알려진 이미지들을 조합하여 하나의 단일한 상으로 만들어낸 것이 사물의 표상이며, 이 행위가 지각작용인 것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사실은 사물의 표상이 인간의 몸에 의해서 그저 자의적으로 만들어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령 소금을 자의적으로 설탕으로 표상할 수는 없다. 소금과 설탕은 각각 무수한 이미지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서로 다른 독립적인 물질이다. 베르그송은 이렇게 사물들이 각각의 고유한 독립성을 지니면서도 무수한 성질을 지닌 상태를 ‘비결성의 지대’(la zone del’indétermination)라고 부른다. 이 비결성의 지대는 사물 속에 내재된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지대로서 인간이 현실적으로 지각하고 있지는 않지만 지각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 영역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인간의 지각이 풍부해진다는 것은 곧 비결정성의 정도가 증대함을 뜻한다.26)

    지각의 풍부함은 비결성의 지대의 증가라는 등식이야말로 들뢰즈가 베르그송에게서 주목하는 핵심이다. 인간의 몸에 비해서 영화나 디지털 기계는 사물의 비결성을 증대시켜 풍부한 지각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결정성은 지각을 협소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피부에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시각이 이미 피부라는 관심으로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지각할 때 그 사람의 피부만 집중적으로 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미리 관점이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어떤 대상이 지닌 다른 풍부한 이미지에 주목하지 못하게 만드는 지각의 협소화를 유발한다. 결정성은 지각의 제약을 의미하며 협소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들뢰즈는 자연스럽게 영화나 디지털 기술이 비결성의 지대를 증가시켜 지각을 확장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핸슨은 들뢰즈의 해석이 베르그송의 지각이론이 제시하는 또 다른 핵심을 놓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지각은 몸의 작용, 즉 행위에서 비롯된다는 베르그송의 원칙은 몸의 정서적인 영역인 정념이 애초에 지각활동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우리가 무한한 이미지를 지닌 비결성의 물질을 하나의 이미지로 표상함으로써 지각이 발생한다면 이때 사물이 지닌 무한한 이미지들 중 일부를 걸러내어서 하나의 표상으로 만드는 작업을 필터링이라고 할 수 있다. 지각 활동은 이 필터링의 활동을 반드시 전제한다. 베르그송의 이론에서 이러한 필터링의 행위가 ‘정념’의 활동이며, 이 정념의 활동은 전적으로 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들뢰즈에게 정념은 자연스러운 서사의 연결고리가 끊기는 간격에서 발생하는 정서적인 반응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들뢰즈가 영화에서 정념 또한 지각의 이미지 중 한 형태로 간주하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들뢰즈에게 정념은 지각을 발생시키는 몸의 매커니즘이 아닌 영화라는 매체가 제공하는 신선한 충격적 효과일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들뢰즈의 매체론은 크라우스의 이미지론을 넘어서지 못한다. 크라우스는 사진을 비롯한 현대미술의 이미지가 개별감각이 아닌 몸의 정서적 반응을 유발하는 빈기호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들뢰즈에게서도 영화의 이미지는 이러한 정서적 반응을 유발하고 인간의 새로운 지각을 유발함으로써 새로운 이론을 자극하는 역할을 할 뿐 몸 자체가 이미지를 창출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는 이미지가 이미 프레임화된 이미지라는 미디어의 한계를 전제하는 것이다. 결국 들뢰즈나 크라우스는 디지털 이미지의 새로움이 무엇인지를 해명하는데 무력하다.

    핸슨에 의하면 베르그송의 지각이론이 함축하는 바는 몸이 프레임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무한한 비결성의 지대에서 일정한 이미지를 선택하여 표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마치 사진이나 회화가 현실의 일부분을 선택하여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 듯이 프레임화하는 것이다. 지각작용이란 결국 무한한 이미지들 중 일부를 선택하는 과정인데 이 선택의 과정인 프레임 활동을 인간의 몸이 담당한다. 이 프레임의 활동을 구동하는 몸의 기제가 바로 정념이다. 우리는 현실세계를 지각한다는 것은 무한한 이미지의 일부를 걸러내어 프레임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크라우스나 들뢰즈의 경우에 우리의 몸은 그러한 작용을 하지 않는다. 크라우스나 들뢰즈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미 기계에 의해서 프레임화 된 이미지가 단일한 감각기관이 아닌 몸에 수용되는 방식이다. 이들이 보기에 디지털 예술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디지털 미디어에 의해서 프레임화 된 이미지를 몸으로 수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기존의 미디어에 비해서 디지털 미디어가 갖는 장점은 기존의 미디어가 할 수 없었던 프레임을 제공한다는 것뿐이다. 말하자면 아날로그 영화보다는 디지털 예술의 이미지가 훨씬 더 파격적인 이미지를 구현할 수 있을 뿐 디지털 이미지와 아날로그 이미지의 근본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27)

    그러나 핸슨은 이러한 견해가 결코 디지털 예술이 지닌 근본적인 ‘새로움’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핸슨에 따르면 디지털 예술이 과거의 예술과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과거의 미디어에서는 미디어 자체가 프레임의 역할을 하였다면 디지털 미디어의 경우에는 미디어가 아닌 몸 자체가 프레임의 역할을 한다.28) 이는 기존의 미디어인 사진과 영화가 디지털 기술에 바탕을 둔 가상현실의 예술과 어떻게 근본적으로 구별되는지를 살피면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호주 출신의 미디어 아티스트 사이먼 페니(Simon Penny)의 작품 <도망자>(Fugitive, 1995)는 전통적인 비디오 이미지와 디지털 기술이 동시에 사용된 가상현실(VR, Virtual Reality) 작품이다. 원형으로 이루어진 방에 관객이 들어서면 깜깜한 벽면에 마치 스크린에 이미지가 투사되듯이 비디오 이미지가 투사된다. 그런데 이 이미지는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투사되거나 다른 이미지로 교차한다. 관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움직이거나 장소를 바꾸어가면서 달아나는 이미지를 쫒는다. 핸슨은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몸과 이미지가 하나의 쌍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29) 관객은 벽(스크린)에 투사된 이미지와의 감정적 교호작용을 통해서 이를 쫒거나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 이러한 몸짓에 따라 이미지 자체가 변경된다. 그리하여 여기서 몸은 투사된 이미지를 수용하는 수용체가 아닌 이미지 자체를 선택하거나 결정짓는 프레임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나타나듯이 관객의 정서적 반응(정념)과 지각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30) 몸의 움직임(정념)이 어떠한 이미지를 지각하는지 결정하며 이는 서로 인과적인 관계에 있다기보다는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이는 들뢰즈가 정념을 또 하나의 지각형태로 본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정념은 이미지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지각 형태가 아니라 이미지의 지각활동에 개입하는 근원적인 몸의 활동인 것이다. 사이먼 페니의 작품에서 몸은 프레임된 이미지를 수용하는 기관이 아니라 이미지를 프레임하는 능동적인 주체인 것이다.

    핸슨은 이렇게 몸이 구현하는 프레임 활동을 ‘절대적인 프레임’(absolute frame)이라고 부른다.31) 절대적인 프레임이라는 말은 사실상 어떠한 프레임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와 동일하다. 가령 현실세계에서 우리가 사물을 지각할 때 세상의 모든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세계의 일부를 도려내서 표상을 만든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때 우리 몸의 정념이 프레임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이 경우 현실 자체는 프레임이 없으며 우리의 몸이 프레임의 역할을 한다. 이것이 절대적 프레임의 의미이다. 이에 반해서 전통적인 회화나 사진 혹은 영화의 경우에는 이미 미디어라는 프레임에 의해서 이미지가 이미 만들어져 있다. 이때 우리의 몸은 프레임하는 주체가 아닌 프레임된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수용체에 불과하다.

    미디어 아트의 고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제프리 쇼(Jeffrey Shaw)의 <레저블 시티>(The Legible City, 1990)만 하더라도 많은 이론가들이 주목하는 것은 스크린에 비친 이미지와 인터페이스인 자전거 위에 탄 관객의 상호작용성이다. 물론 이 작품에서 상호작용의 위상을 제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많은 미디어 아트 이론가들이 항상 거론하는 상호작용은 보다 근본적인 심층적인 영역의 표면이자 현상일 뿐 상호작용 자체가 디지털 예술의 본질은 아니다. 페터 바이벨(Peter Weibel)이 이 작품에서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이미지보다는 이 작품이 구현하고 있는 공간이나 공간적 구축을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핸슨이 거듭 강조한 것처럼 디지털 공간은 미디어에 의해서 프레임화 되는 공간이 아닌 몸 자체가 프레임의 역할을 하는 공간을 창출할 수 있다. 제프리 쇼의 작품이 추구하는 것도 결국은 자전거에 앉아 있는 관객의 몸 자체가 프레임이 되는 공간, 즉 절대적인 프레임의 공간인 것이다.32)

    핸슨은 제프리 쇼의 작품을 초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 발전사의 과정을 쫒아 추적하면서 쇼의 작품 활동에서 궁극적으로 디지털 기술의 사용이 우연적인 것이 아닌 필연적인 요소임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는 제프리 쇼의 작품을 세 시기로 나누어 각 시기의 작품들을이 나타내는 특징을 도식화한다. 초기의 작품 는 반투명한 돔 위에 전통적인 영화필름을 투사한 방식으로서 관객의 정서적 반응을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중기의 작품인 , 등의 작품은 조이스틱을 사용하거나 실제 공간에 3D이미지를 투사함으로써 실제 공간과 가상공간의 혼재를 시도한다. 조이스틱은 관객이 실제로 이미지를 선택하게 하는 인터페이스의 역할을 한다. 후기 작품인 에서는 관객이 머리에 디지털 안경인 HMD를 착용하며 신체의 움직임에 따라서 이미지 자체가 변화한다. 제프리 쇼의 작업 발전사는 초기의 작업이 추구하던 이미지와 관객의 진정한 상호작용이 몸의 절대적 프레임을 가능하게 하는 디지털 기술에 와서 실현됨을 보여준다.33)

    여러 디지털 예술가들의 작업을 소개하고 있지만 특히 제프리 쇼의 작업이 지닌 발전과정을 통해서 핸슨은 디지털 예술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절대적 프레임’으로서의 몸이 지닌 필연성을 도출하고 있다. 절대적 프레임으로서의 몸은 분명 이미 프레임화된 이미지보다는 몸의 개입이 적극적으로 발생한다는 특성을 지닌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절대적 프레임’으로서의 몸이 디지털 예술의 절대적인 조건이며 이러한 조건이 없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상호작용이 불가능한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디지털 이미지는 정보화된 이미지이므로 프로그램을 통해서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하기 때문에 관객의 신체적 반응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다. 이러한 변형가능성 덕분에 이미 작가에 의해서 프레임화된 기존의 회화나 혹은 영화와 달리 관객의 몸 자체가 이미지를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프레임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이렇게 임의적으로 선택가능서의 바닥에는 인간의 정서적 반응, 즉 정념이 개입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있다.

    분명히 디지털 이미지가 지닌 변형가능성은 기존의 예술과 달리 디지털 예술이 가져온 하나의 미덕임에 틀림없으며 디지털 예술의 새로움을 보여주는 특성이지만 이것이 디지털 예술 일반의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는 없다. 현실 자체는 프레임이 없으며 인간의 몸 자체가 프레임이 된다는 점에서 이미 프레임이 만들어진 기존의 예술과 달리 디지털 이미지는 현실성을 갖는다는 핸슨의 생각 또한 디지털 예술의 새로움을 설명하는데 유용하다. 그러나 핸슨의 이론이 지닌 위험성도 존재한다. 그는 암암리에 현실이 결코 변형불가능한 어떤 한계를 지니고 있는데 반해서 디지털 이미지는 그러한 한계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인간은 자신의 환경에 대해서 분명히 정서적으로 반응하며 이를 통해서 환경이 자신에게 다른 모습으로 틀지워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반응에 따라서 세상의 환경 자체가 물리적으로 변형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반해서 절대적 프레임으로서의 몸은 자신의 정서적 반응에 따라서 이미지 자체, 즉 환경 자체가 변한다. 그렇기 때문에 핸슨의 절대적 프레임으로서의 몸은 자칫 유아론의 특성을 지닐 수 있다.

    가령 핸슨은 들뢰즈의 ‘얼굴’론을 비판하면서 디지털 얼굴 이미지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들뢰즈의 영화론에서 얼굴은 곧 클로즈업을 의미하며, 클로즈업은 인간에게 정서적 반응, 즉 정념의 이미지를 발생시킨다. 이는 사진에서의 인덱스와 같은 것이므로 관객의 정서에 의해서 그 의미가 채워지며 서사로부터 어긋난다. 그런데 핸슨에 따르면 클로즈업은 정념의 이미지를 촉발할 뿐 정념 자체의 기제를 창출하지는 못한다. 핸슨에 따르면 이러한 한계는 기술적 제약에서 비롯되며 들뢰즈의 이론은 디지털 기술이 아닌 기존의 아날로그 기술에 바탕을 둔 영화이론이므로 이러한 제약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는 가이슬러(Kristen Geisler)의 라는 작품을 예로 들어 이른바 기존의 얼굴 이미지와 다른 ‘디지털 얼굴 이미지’(Digital facial image)를 설명한다.34) 이 작품에서 디지털 얼굴 이미지가 의미하는 바는 관객의 반응에 따라 얼굴 이미지 자체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화면에 나타난 디지털 이미지는 기존의 영화 이미지와 달리 관객의 정서적 반응에 따라 변형된다는 점에서 관객과 이미지가 상호작용하는 하나의 공간을 창출하며, 그 공간의 주체는 그 공간을 프레임화하는 관객의 몸이 된다.

    그러나 절대적 프레임으로서의 몸에 의해 창출된 공간은 자칫 현실공간과 다른 무제약적 공간으로 확장될 가능성을 지닌다. 핸슨에게 디지털 공간은 곧 이러한 무제약적 공간을 의미하는 듯하다. 가령 그는 디지털 공간을 기하학적 공간과 다른 ‘변형된 공간’(warped space)이라는 특성으로 규정짓는데, 이때 ‘변형된 공간’이란 데카르트적인 기하학적 좌표를 벗어난 정념적 공간을 의미한다. 핸슨은 이러한 변형된 공간을 잘 반영한 예술작품의 사례로서 라차리니(Robert Lazzarini)의 을 들고 있다. 라차리니는 실제의 해골을 스캔하여 디지털 이미지로 만든 다음 이 이미지를 디지털 프로그램으로 변형시켜 네 개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는 레진이라는 소재를 사용하여 이 네 개의 디지털 이미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조각 작품을 만들어 전시장의 네 벽면에 전시하였다. 핸슨은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디지털 예술의 절대적 공간임을 강조한다. 이 작품이 전시된 공간에 들어선 관객은 우리가 현실 공간이라고 믿는 기하학적 공간의 관점을 고수하는 이상 이 전시 공간은 비현실적인 공간일 수 밖에 없다. 오히려 이 순간 관객은 좌절감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이 좌절감은 바로 우리가 공간을 구성하는 재현체계, 즉 현실공간이라고 믿는 기하학적 공간에 대한 좌절감을 나타낸다. 핸슨에 따르면 이러한 좌절감은 정념의 출현을 의미하며 디지털 공간이 지닌 ‘변형된 공간’의 출현을 암시한다.35) 여기서 우리는 핸슨이 제시하는 디지털 공간이 현실적 제약성을 넘어서 자칫 관객의 정념에 의해서 가변적으로 구성되는 관념적 공간으로 확장될 수 있는 위험성을 발견하게 된다.

    15)Gilles Deuleuze, tr. by Hugh Tomlinson, Cinema 1, The Movement-Image,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6, 87쪽.  16)Ibid, 87쪽.  17)Ibid, 96쪽.  18)이에 대해서는 박성수, 『들뢰즈와 영화』, 문화과학사, 1998, 210-13쪽 참조.  19)바쟁은 영화란 근본적으로 사진이며 “사진의 객관성을 시간 속에서 완성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앙드레 바쟁, 박상규 옮김, 『영화란 무엇인가?』, 시각과 언어, 2001, 20쪽.  20)Mark B. N. Hansen, New Philosophy for New Media, The MIT Press, 2004, 5쪽.  21)이러한 들뢰즈의 견해가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난 것이 영화에서의 ‘시간-이미지’이다. 들뢰즈는 ‘시간-이미지’를 어떤 주관적인 서사적 시간도 배제된 순수한 시간-이미지로 간주하며 이는 전적으로 몸의 정박에서 완전히 벗어난 기계적인 지각으로 가능한 것이다. 핸슨은 시간이란 현재를 미래에 대한 ‘예지’(protention)와 과거에 대한 ‘파지’(retention)에 의해서 발생하는 현상학적 과정으로 이해하며, 인간의 지각은 이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핸슨이 보기에 디지털 예술은 들뢰즈가 말하는 시간-이미지가 아닌 현상학적 시간에 바탕을 둔 ‘지각’을 구현한다. Ibid, 246-9 참조.  22)Ibid, 100쪽.  23)Henri Bergson, Matière et Mémoire,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65, 12쪽.  24)Ibid, 14쪽.  25)Ibid, 13쪽.  26)Ibid, 29쪽.  27)핸슨은 디지털 이미지에 관한 들뢰즈의 견해는 단지 영화의 가장 발전된 형태이자 재탄생으로 귀결될 뿐이라고 본다. Ibid, 74쪽 참조.  28)Ibid, 22쪽.  29)Ibid, 167쪽.  30)Ibid, 170쪽.  31)Ibid, 171쪽.  32)Ibid, 53쪽.  33)제프리 쇼의 작업 발전 과정에 대해서는 Ibid, 52-70쪽 참조. 핸슨은 제프리 쇼의 이러한 변화를 초기의 이미지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이미지와 관객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공간으로의 변화라고 설명한다.  34)Ibid, 128쪽 참조.  35)Ibid. 200쪽.

    4. 결론

    디지털 예술의 새로움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특징 중의 하나가 상호작용이며, 이와 더불어 몸의 중요성이 항상 거론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논의는 전통적인 예술에 비해 디지털 예술에서 상호작용의 특성이 강화되며 몸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다는 식의 결론으로 귀결될 뿐이다. 이러한 논의는 디지털 예술이 근본적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명확하게 해명하지 못한다. 이 글에서 언급한 미술이론가 크라우스나 철학자 들뢰즈의 경우 사진이나 영화의 이미지가 지닌 독특한 특성을 분석하고 있다. 이들의 견해는 디지털 예술의 특성을 설명하는데 유효한 통찰을 제공하지만 디지털 예술만이 지닌 새로움을 설명하는 데는 분명히 한계가 존재한다. 이에 반해서 핸슨의 논의는 기존의 예술과 달리 디지털 예술은 몸이 프레임의 작용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는 근본적인 특성을 제시한다. 더불어 이 논의의 밑바닥에는 베르그송 철학에서 ‘정념’과 ‘지각’의 관계에 대한 들뢰즈 입장과 명확한 차이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는 들뢰즈와 달리 정념이 지각의 한 형태가 아닌 지각의 밑바닥에서 지각을 추동하는 근원임을 밝힌다. 핸슨에 따르면 디지털 예술이야말로 베르그송이 제시한 이러한 정념의 기제를 충실하게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을 제시한다. 그 기반의 핵심은 ‘절대적 프레임’으로서의 몸이다. 핸슨의 논의는 분명 앞선 논의와 달리 디지털 예술이 기존의 예술과 다른 새로운 특성을 설명하는데 유효하다. 그러나 절대적 프레임으로서의 몸에 대한 핸슨의 논의는 그것이 디지털 예술의 나타내는 특성을 제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현실의 제약을 벗어나서 인간의 몸 자체가 임의적으로 상황, 즉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관념론적 특성도 동시에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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