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terary Representation of the Holocaust in Martin Amis’s Time’s Arrow

홀로코스트 문학의 재현방식―마틴 에이미스의『시간의 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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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Holocaust fiction has always raised the moral and aesthetic questions about the nature of mimesis and the literary representation of atrocity. The Holocaust, defying any representation of it, has been considered as unspeakable, unknowable, and incomprehensible. This essay aims to explore Martin Amis’s narrative strategies in Time’s Arrow to conduct the difficult tasks of re-creating the primal scene and of discovering a moral reality behind the Holocaust. One of the major narrative experiments in Time’s Arrow is the time reversal: the story moves from the present of phony innocence to the past of unrelieved horror. Reversing the temporal order of events reverses causality and generates the revision of the morality, ultimately creating the epistemological and ontological uncertainties. Amis’s novel is also narrated from the perspective of a double persona of the protagonist who, as a Nazi doctor, participated in the massacre in Auschwitz and then fled to the United States following the war. As almost a self-conscious storyteller, the narrator shares a sense of retrospective guilt with the reader who finally realizes that the Holocaust was a world turned upside down morally. Amis’s postmodern narrative strategies are unusual enough to warrant a new way of representing the Holocaust.


  • KEYWORD

    Holocaust , Martin Amis , Time’s Arrow , time reversal , persona

  • I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일은 야만적”(Adorno 34)이라는 아도르노의 선언은 홀로코스트 문학이 짊어진 어려움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아우슈비츠의 홀로코스트는 서구문명에서 지워질 수 없는 역사적 상흔이며 트라우마로 문학의 중요한 소재이지만, 한편으로는 이 사건이 지닌 엄청난 파괴력에 의해 문학에서 다루기에 극히 어려운 소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설은 유대인 대량 학살 사건이 인간성의 본질에 대해 천착할 수 있는 성찰의 좋은 기회를 제공하면서도, 죽음으로 내몰린 유대인 희생자의 처참한 실제 고통을 문학이라는 미학적 담론으로 재구성하기에는 양자 간에 분명히 존재하는 간극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이 역사적 사건을 통해 인간성의 근본적 성찰을 한다고 하지만, 인간성의 말살을 보여준 잔혹한 죽음의 참상 앞에서 인간성의 의미 자체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며 희생자의 고통을 언어로 재현하는 것이 오히려 문학의 사치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도르노는 홀로코스트 이후 문학이 할 역할은 침묵 밖에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아도르노의 선언은 홀로코스트가 서구인에게 준 정신적 충격을 한 마디로 대변해주지만, 그것은 동시에 홀로코스트의 재현 가능성에 본격적으로 물음을 던진 시발점이기도 하다. 홀로코스트의 재현가능 문제와 관련하여 홀로코스트는 한 작가의 지적처럼“현대의 메두사 머리”(Rosenbaum 493)로 비유될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악의 화신 괴물 메두사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자는 돌로 변하듯이, 홀로코스트의 핵심에 놓여있는 인간성의 비극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여 재현하기에는 형이상학적 공포가 너무나 버거울 수 있다. 그 공포의 세계는 소위“말로 표현될 수 없는”영역이 되기 때문에 아도르노 식의 침묵으로 잠겨 들게 된다. 물론 이때의 침묵은 단순한 진실 회피가 아니라, 문학의 구성, 문체, 언어적 비유 등 문학적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모든 미학적 형식들이 이 비극적 사건의 핵심에 놓여 있는 형이상학적 공포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의 진지한 표시이다.

    그러나 한편 홀로코스트의 진실이“말로 표현될 수 없는”영역이라 해도 무참히 죽어간 희생자들의 인간 가치를 다시 회복시켜주는 것이 이후 세대의 윤리적의무이기에 침묵할 수 없는 당위성이 존재한다. 그것은 죽은 희생자들의 침묵을 그냥 침묵으로 남겨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이 겪은 고난의 참상과 가해자가 행사한 폭력의 비윤리성을 낱낱이 밝혀가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비록 우리들의 일상 언어가 불완전할지라도 일상적일 수 없는 종족 대량 학살의 진실을 밝히고 그 죄악상의 원인을 밝혀내는 홀로코스트의 기록이 이후 세대가 행하여야 할 임무가 된다. 실제로 전후에 쏟아져 나온 무수한 생존자들의 증언부터 희생자 또는 생존자들의 일기, 기록, 인터뷰 등은 이런 노력의 산물이다. 또한 이 막대한 기록들은 역사가, 다큐 영상 제작자, 역사박물관을 비롯하여 예술가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재현된다. 이런 자료를 바탕으로 문학에서도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작품들은 현재까지 꾸준히 지속되면서 홀로코스트 문학이라는 독자적 장르까지 형성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근본적으로 홀로코스트 역사를 재현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홀로코스트 역사의 재현 노력은 일차적으로 홀로코스트 참상의 현장에 가능한 한 가장 가까이 접근하여 실상을 증언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한다. 그렇지만 이런 현장 재현 시도는 그 현장의 실체가 시간의 흐름 속에 유지될 수 없는 불가피한 한계상황에 부딪치게 됨으로써 다시금 재현의 어려움에 부딪친다. 더구나 홀로코스트의 경험은 참상을 겪으며 죽어간 희생자들의 고통을 재현해가야 하지만, 죽은 희생자들의 경험은 침묵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다. 또한 생 존자들의 증언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현장의 경험을 일부 잊어버렸거나 자신들의 현재 상황에 따라 과거의 기억들을 변형시키는 경우가 종종 생겨나기 마련이다. 아니면 생존자들의 경험이 트라우마로 변해 실제 그대로 재현되지 못하고 전치된 경우도 생긴다. 이제 현장의 진실이란“알 수 없는”영역이란 문제가 야기된다.

    홀로코스트에 관한 증언에 있어 개인의 기억과 역사적 사실 간에 존재하는 간극은 근본적으로 역사서술에 관한 역사학계의 논쟁과 일치된다. 바로 이것이 포스트모던 역사관에서 집중적으로 제기하는 역사서술의 담론화 문제이다. 즉, 홀로코스트의 진실을 파헤치어 기록하는 작업은 역사서술의 담론화를 문제 삼는 역사의 재현가능성이란 근원적 논쟁으로 이어진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현재의 시점으로 환원시키는 역사서술은 서술상의 구조를 갖기 때문에, 언제나 서술 자의 입김이 개입된다. 그것이 의도적인 개입이건 아니면 무의식적인 간섭이건간에 역사가가 사건을 언어로 재현하는 데에는 필연적으로 재구성의 과정을 겪어야만 하고, 그런 과정으로 인해 있는 그대로의 과거사건 재현은 불가능해진 다. 그렇다면 홀로코스트의 역사의 재현에서도 생존자들의 증언이 허구성의 담론화 과정을 극복하고 그 진실성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홀로코스트의 수많은 증언이 허구로 전락하고 홀로코스트 역사 재현의 불가능성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홀로코스트 문학의 잠재력이 부각된다. 왜냐하면 홀로코스트의 역사 사건이“말로 표현될 수 없는”또는“알 수 없는”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를 되짚어 보아야만 하는 윤리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서술에 있어 기억의 정확성은 중요한 출발점이 되지만, 홀로코스트의 기억은 분명 인간성에 대한 막대한 침탈의 기억이라는 면에서 정확성 외에 윤리성이 개입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의 기억에 부족함이 있다고 해서 서술을 정지하고 망각의 길로 나갈 수는 없다. 오히려 홀로코스트의 역사 서술은 망각을 일깨우는 기능을 갖아야만 한다. “홀로코스트 기억은 내면의 눈을 결코 감을 수 없는 불면의 기능”(Kushner 285)을 갖는다는 한 역사가의 지적은 이 사건이 침묵이나 망각으로 사라질 수 없는 역사의 윤리성을 짊어지고 있다는 걸강조하는 말이다.

    이런 윤리적 정당성을 전제로 할 때, 홀로코스트의 기록과 재현은 정확성을 넘어 오히려 예술적 상상력의 자유를 필요로 한다. 홀로코스트 문학의 작가들은 대부분이 그렇듯이 유대인 대량학살의 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날것 그대로의 정보나 정서적 자료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들은“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나“알 수 없는 것”의 차원을 넘어“상상할 수 있는”예술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앞에서 인용했던“메두사 머리”의 비유를 다시 빌리면,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벤 방식은 그 모습이 방패에 비치도록 하는 간접 방식이었다. 홀로코스트의 과거사를 그대로 들여다볼 수가 없다면 상상력의 잠재력을 통해 우회적으로 접근해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자유로운 상상력은 단순한 허구가 되지는 않는다. “홀로코스트 문학은 특별한 형태의 증언”(Rosembaum 494)이라는 지적처럼, 홀로코스트 문학은 홀로코스트 역사가 요구하는 역사 증언의 기능을 항상 짊어지고 있어야 역사의 윤리성을 담게 된다.

    홀로코스트 문학의 한 유형으로 본 논문에서 다룰 마틴 에이미스(Martin Amis)의『시간의 화살』(Time’s Arrow, 1991)은 위에서 논의한 홀로코스트 역사의 재현가능성과 윤리성을 집중적으로 문제 삼고 있다. 주로 동시대 사회상을 포착하는데 주력했던 에이미스의 작품세계와는 달리『시간의 화살』은 현재가 아닌 과거의 역사로 돌아가 홀로코스트를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이 홀로코스트의일반 소설과 다른 특이점은, 첫째로 서술진행과 서술방식이 주인공의 현재 죽음에서 과거의 탄생까지 연차적으로 되돌아가는 시간 역전의 방식을 취하면서 리얼리즘의 재현방식과 세계인식을 뒤엎는 방법이며, 둘째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나 생존자가 아닌 가해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의 경험을 다루면서도 그주인공의 또 다른 자아를 설정하여 희생자 또는 이성적 독자의 윤리적 관점을 병행시키는 것이다. 이런 실험적 서술 방식을 통해 에이미스는 전통적인 재현방식에서 철저히 벗어나며 동시에 홀로코스트의 윤리성을 집요하게 파헤쳐간다. 본 논문의 초점은 그의 실험적 방식이 이 두 가지 측면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다루어가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II

    50·60년대 영국의 유명한 소설가 킹슬리 에이미스(Kingsley Amis)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마틴 에이미스는 24살의 젊은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한 이래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동시대 작가 중에 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신랄한 재치와 독창적이며 재치 있는 언어적 활기로 소비문화에 중독된 천박한 동시대 사회를 희극적으로 풍자하면서 도덕성을 상실한 시대의 어두운 단면을 그려나갔다. 주로 풍요로운 소비문화의 물질주의에 영혼이 메말라가는 시대정신을 투영한 그의 작품은 사회적 리얼리즘의 성격을 지니지만, 언어 및 문체와 서술 형식의 새로움은 언제나 그의 작품을 설명할 때마다 따라붙는 수식어이다. 그만큼 에이미스는 포스트모던적인 문체 실험으로 포스트모던 사회의 천박성을 비판해갔다.

    동시대 사회상을 포착하는데 몰두했던 에이미스의 80년대 대표작들과는 달리 1991년에 발표한『시간의 화살』은 현재가 아닌 과거의 역사로 돌아가 20세기 역사의 핵심적 사건인 홀로코스트를 다룬다. 부커상 후보에도 올랐던 이 소설은 80년대 보여줬던 에이미스의 특색이 가장 적게 드러난 작품이라는 평가도 받지만(Rennison 10), 소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체와 형식의 실험성은 이 작품에 서도 꾸준히 이어진다. 더군다나 홀로코스트의 대참극 이야기로 집중되는 이 소설의 중심 주제는 에이미스의 작품세계가 언제나 보여주는 인간성의 몰락이라는 묵시록의 느낌을 더욱 강렬하게 전달한다.

    현재에서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되돌리며 한 의사의 도덕적 마비를 진단해가는『시간의 화살』은 재현의 본질과 잔악 행위를 문학적으로 재현하는데서 발생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에 대한 물음을 집중적으로 제기한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역사적 사건의 재현 불가능성을 극복하기 위해“시간 역전”이란 독특한 방식을 선택한다. “시간의 허구적 해체”(Lehman 15)라는 논평을 받은 에이미스의 시간 역전 방식은 우리의 일상적인 시간 개념을 정반대로 뒤집는다. 즉, 우리가 보통 인식하는 시간의 흐름은 과거에서 현재와 미래를 향해 일직선으로 흘러가는 것이지만, 이 소설의 진행은 현재에서 시작하여 과거의 방향으로 시간을 거꾸로 되돌아간다. 서술 진행상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로 되돌아가 과거 사건을 되짚어 보는 회상 방식은 일반 소설에서도 흔히 사용된다. 그렇지만『시간의 화살』은 단순히 기억 회상의 방식이 아니라 서술 전체가 첫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시간을 거슬러가는 독특한 서사 역전의 방식을 취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의 시간 역전은 시간의 연대기적 흐름으로 파악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인식 방식을 전면적으로 해체시킨다.

    시간의 역순을 따라 서술되는『시간의 화살』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독자는 미국 북동쪽에 위치한 웰포트라는 허구의 마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주인공 토드 프렌들리(Tod Friendly)를 처음 만나게 된다. 이 마을은 뉴욕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대서양 연안에 위치하는데, 이곳에서 의사로 일하며 평안하게 터를 잡고 살아가는 그의 모습이 이후 전개된다. 그러나 그는 얼마 있지 않아 뉴욕시로 옮겨가 이름을 존 영으로 바꾸고 살아간다. 장면은 다시 바뀌어 그는 더 나이가 어린 젊은이로 변해 1948년 여름에 유럽을 향해 떠난다. 그의 첫 번째 기착지는 포르투갈이며, 이때 그 젊은이의 이름은 다시 바뀌어 해밀턴 드 수자가 된다. 그 후에 그는 로마로 향하고, 마지막으로는 아우슈비츠에 도달하여 몇 주간 계속되던 혼란스럽고도 은밀했던 그의 여행은 끝이 난다. 아우슈비츠에서 그는 오딜로 운베르도르벤(Odilo Unverdorven)이라는 이름으로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일에 참여한다. 그의 일은 보통 가스실에서 가스를 빼내거나 또는 벤젠과 같은 여러 물질을 사람들의 사체에서 추출하는 일이지만 나치의 관점으로는 순수한 독일민족을 창조하는 역사적 사명으로 지칭된다. 그때 유대인 수용캠프의 규모가 점차 작아진다. 오딜로의 아내 헤르타는 그를 여러 번 방문하게 되고, 전쟁 중에 맡고 있는 남편의 역할에 대해 공개적으로 거부감과 적의를 표명하다가, 점차 믿을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하고, 나중에는 중립적이거나 궁금해 하는 입장으로 변한다. 오딜로와 헤르타의 딸이 세상에 태어나지만, 곧 아내의 자궁으로 사라진다. 오딜로는 오스트리아에서 의학을 공부하는데, 그곳에서 신체 장애인과 정신 장애인의“창조”에 참여한다. 그는 곧 의학 대학에 등록하여 청년 기구에 가입한다. 그는 부모와 함께 생활을 시작하다가, 아기가 되고, 마침내는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어간다.

    결국 이 소설의 이야기는 오딜로라는 독일 의사의 일생을 다룬 일종의 전기이지만, 일반 전기와는 달리 시간 역전의 전개방식에 의한“거꾸로 된 전기”(Menke 959)가 된다. 이 특이한 전개를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상적인 시간 순서에 따라 되풀어보면, 주인공 오딜로 운베르도르벤은 독일의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의학도가 되고, 젊은 시절 의사로서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대학살에 적극 참여한다. 전쟁이 끝난 후 범죄자가 된 그는 이름을 변경하고 신분을 감춘 다음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도망 온다. 미국에서도 처음 뉴욕의 대도시에 정착하였지만, 신분이 미국 이민국에 탄로가 날 위험에 처하자 그는 또 다시 도망쳐 미국의 한적한 소도시에서 토드 프렌들리라는 이름으로 의사 일을 해나간다. 그는 여러 여자와 사귀며 평온한 삶을 즐기는 것 같지만, 때로는 악몽에 시달린다. 그러던 중 자동차 사고로 그는 병원에 옮겨져 죽음을 맞이한다.

    정상적인 연대기적 시간 순서에 따라 이 소설의 스토리를 풀어가 보면 우리는 이 스토리가 홀로코스트의 범죄에 참여했던 한 독일 나치 의사의 생애를 기록한것임을 손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스토리의 핵심은“범죄의 본질”이라는 소설의 부제에서 보듯이 이 독일 의사가 저질렀던 홀로코스트에서의 끔찍한 행위에 집중되고 있음을 쉽사리 파악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에이미스가『시간의 화살』에서 시간 역전으로 전개하는 서술 양상은 각 장면마다 구체적인 상황 묘사대신 축약된 사유 중심의 기술로 진행되어 전반적으로 매우 모호하며 추상적이어서 독자가 그 상황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리얼리즘 소설의 가장 근간이 되는 세밀한 상황 묘사가 생략된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시간 역전의 서술방식에 있다. 우선 사건 진행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시간 역전 서술의 실제사례부터 살펴보자.

    위의 인용문은 음식을 먹는 식사 행위를 기술하고 있다. 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며 독해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이 단락의 아래 문장으로부터 읽어나가야 한다. 접시의 음식을 나이프와 스푼으로 조각품을 다듬듯이 잘게 썰어 입으로 가져가면, 혀와 이빨로 마무리를 하고 꿀꺽 삼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먹다 남은 음식은 쓰레기 통으로 쓸어 넣는다. 이런 음식 먹는 과정이 시간의 역순으로 이루어지는 이 소설에서는 정반대의 순서로 기술된다. 여기서 서술의 순서가 어떻든 간에 음식 먹는 식사 장면 자체는 전혀 세밀한 묘사를 잃고 있는데, 그것은 이 장면이 사실성의 섬세함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말해준다. 그 대신 비록 개념 위주로 간결하게 제시되었지만 식사 행위의 순서가 역으로 서술되었을 때에 독자가 느끼는 생소한 반응에 서술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장면을 시간 역순에 따라 리얼리즘 식으로 세밀하게 서술된다고 가정하면, 독자의 이해력을 뛰어넘는 난해한 기술이 되고 말 것이다. 이처럼 에이미스의 시간 역전 서술이 지닌 특이성은 상황에 대한 전혀 낯선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있다.

    마찬가지로 쇼핑의 묘사도 시간을 거꾸로 가는 행위로 이루어진다. “나는 즉시 그리고 마음씨 좋게 내 고통에 변상을 한다. 그런 다음 당신은 카트를 밀거나 바구니를 든 채 통로를 따라 천천히 따라 가며, 캔이나 봉지를 올바른 장소로 되돌려놓는다.”(I am promptly and generously reimbursed for my pains. Then you tool down the aisles, with trolley or basket, returning each can and packet to its rightful place.)(11). 마트에서 카트나 바구니를 들고 선반에 서 캔이나 봉지를 담으며 쇼핑을 보고난 후 이것을 계산대로 가져가 계산하는 과정이 완전히 뒤바뀌어 서술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 역전 방식으로 서술하다보니 계산대에서 금액을 지불하는 일이“내 고통에 변상”을 하는 일로 뒤바뀐다. 시간 역전이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까지 뒤바꾸게 만든 셈이다. 또 한 가지 예로 테니스를 치는 장면 묘사에 있어서도 역순으로 서술되다 보면 우스꽝스런 장면이 연출된다. “테니스는 정말 멍청한 게임임을 나는 발견한다. 보풀거리는 볼이 코트 뒤쪽의 네트로부터 또는 닭장 같은 망으로부터 툭 튀어 오른다. 우리 네 명은 그 공을 쳐서 공을 서브한 사람의 호수머니로—내게는 아주 제멋대로처럼 보이는데—들어간다.”(Tennis is a pretty dumb game, I’m finding:the fuzzy ball jumps out of the net, or out of the chicken wire at the back of the court, and the four of us bat it around until it is pocked—quite arbitrarily, it seems to me—by the server.)(13). 호주머니의 공을 빼내어 테니스를 치는 과정이 뒤바뀌어 시간 역전의 서술에서는 라켓으로 친 공이 서브한 사람의 호주머니로 들어가 버린다. 그야말로 테니스는 화자의 지적처럼“멍청한 게임”이 되고 만다. 이런 식의 독특한 서술은 독자의 웃음을 자아내는 코믹한 상황을 만들어내는데, 때로는 낯설은 서술방식으로 독자에게 문맥 파악에 어려움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사물에 대해 전혀 색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시간 역전의 서술 방식이 연대기적 시간을 전복시킨다고 해서 서술을 구성하는 정상적인 어휘, 문장 구조, 문법 체계를 무시할 수 없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최소한 이것들이 유지되어야 텍스트가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화살』에서도 당연히 이런 법칙들이 지켜지고 있지만, 한 비평가의 지적처럼 에이미스는 단 한 곳에서 예외의 경우를 실험해본다(Glaz 107). 그 예외의 경우는 소설의 초반에 이뤄지는 대화의 묘사 장면이다.

    축약된 사투리 식의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하게 되면 말도 되지 않는 우스꽝스런 상태가 되고 마는데, 위의 대화 문장을 정상적인 시간 순서대로 풀어보면 아래와 같은 인사말로 추측해낼 수 있다.

    『시간의 화살』의 원문에서는 대화내용이 시간 역전에 따라 발음되는 음소조차도 역순으로 서술되고 있다. 또한 각 문장의 위와 아래가 시간의 역순에 따라서로 뒤바뀌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표현은 독자들이 읽어나가는 어려움 때문에 작가는 이 한 곳에서만 철저히 시간 역전의 규칙을 따르고 있으며, 그 다음부터 표기의 역순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질문과 응답의 대화는 여전히 시간 순서가 역전되어 응답과 질문의 순으로 서술된다. 사소하고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건과 상황이 역순으로 서술되다보니 전통적인 재현 방식에 대전환이 시작된 셈이다.

    전통적인 재현 방식은 과거에서 현재로 연대기적 서술이라는 시간의 순차성을 기저에 깔고 있다. 그리고 발생하는 모든 사건들의 인과관계 논리는 이 시간의 순차성에 따라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이처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겪는 경험세계는 시간의 순차성에 따른 인과관계에 익숙해져 있으며 우리의 세계 인식도 자연히 이러한 인과관계로 구성된다. 그러나 시간 역전의 서술은 앞의 예에서 보듯이 인과관계 논리가 역전되면서 사건에 대한 전혀 색다르고 낯설은 관점을 산출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평가들은『시간의 화살』의 시간 역전 서술방식을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가 쉬클롭스키(Victor Sklovsky)의“낯설게 하기”개념으로 설명한다(McCarthy 296). 쉬클롭스키의 주장에 따르면, 문학의 목적은 세계를 모방 또는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낯설게 하여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무감각해진 사물 인식을 다시 회복시켜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12-13). 그러고 보면 세계에 대한 낯설은 사물인식은 전통적인 재현에서 형성되는 것이아니라 오히려 그런 재현을 방해할 때 가능해진다. 우리의 일상적인 사물 인식이 인과관계로 이루어질 때 합리성을 갖게 되지만, 낯설게 하기는 일상적인 인과관계의 합리성을 전복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결국 에이미스의 시간 역전 방식은 재현의 방식을 뒤집어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의 인식을 전도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시간의 화살』에서 에이미스의 시간 역순 서술은 언제나 우리의 상식적인 세계인식을 뒤엎는다. 예를 들어, 사회에서 학대받는 여성들이 찾아오는“위기 센터”의 상황 묘사는 대표적 예가 된다.

    남성에게 강간당하고 구타당한 여성들이 사회적 도움을 얻기 위해 찾아오는 곳이“위기 센터”이다. 시간 역전의 방식으로 서술된 위의 내용을 우리의 일상적인 방식으로 되돌리면, 처음에 행복하게 살던 여성들은 갑자기 남성들에게서 강간을 당하고 공원이나 지하실에 버려진다. 이중에는 심한 경우 전문적인 병원치료를 받게 되고 치료의 과정에서 점차 상처가 약화된다. 그렇지만 이들 여성들이 위기 센터로 찾아오는 과정을 에이미스 식으로 시간 역전 방식을 사용하여 서술되면, 그 서술의 끝은 여성들의 강간과 구타로 끝나고, 강간과 구타를 받은 여성들은 만사가 다 해결되어 다시 행복해진다. 우리의 일상적인 인식과 시간역전의 서술내용은 전혀 상반되고 상식을 뒤엎는다. 이 양자 간에 발생하는 괴리는 논리의 전복에서 생기는 역설이고 아이러니다. 시간의 역순으로 서술된 세계는 상식적인 독자에게 언제나 비논리적인 세계로 다가온다. “세상이 타당하게 진행되지 않는 것 같다”라고 이 소설의 화자는 소설 속에서 자꾸 반복하는데, 이것은 소설 속에서 전개되는 세계가 비논리적인 역설로 구성되어 있음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는 목적임을 알 수 있다.

    일상적인 시간의 흐름 의식을 뒤바꿀 때 우리의 세계는 전도된 세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에이미스의 놀라운 상상력은 집요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특히 이 소설의 주인공 의사 토드 프렌들리 (나치 의사일 때의 본래 이름은 오딜로 운베르도르벤)의 전도된 시선으로 볼 때 더욱 두드러진다. 그의 전도된 시선으로 보면 창조와 파괴의 개념은 일반 인간의 상식적인 개념과는 정반대이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전도된 개념은 시간 역전의 서술을 통해 그대로 노출된다.  그 대표적인 예는 토드가 미국에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집을 이사할 때정원을 둘러보는 장면의 경우이다.

    토드는 이사를 오자마자 꽃과 나무를 사서 정성을 기울이며 정원을 키웠다.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사를 가게 되자 자신의 정원에서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그 과정이 여기에서 시간 역순으로 서술되면서 이 서술의 맨 끝에서 꽃과 나무를 심기 위해 땅을 파고 잡초를 제거하는 과정이 혼돈의 세계를 만드는 것으로 묘사된다. 정원을 매개로 창조와 파괴의 과정이 시간이 역전된 세계에서는 거꾸로 전복된다. 시간 역순의 세계에서는 창조적 과정이 파괴적 과정이 된다. 더구나 역전된 시간 세계 속에서 창조는 어려움 없이 손쉽게 빨리 이뤄지지만, 파괴는 어렵고 느린 과정을 겪는다. 명제와 같이 반복되는 화자의 이런 논평은 독자들의 일상적인 상식과 배치된다. 독자들의 상식적인 세계에서는, 파괴는 너무나 쉽게 일순간 일어날 수 있지만 창조는 어려운 일이며 긴 과정을 통해생겨나기 때문이다.

    창조와 파괴 개념의 역전은 세계 인식의 전복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런 세계인식의 전복이 일어날 때 이 소설의 초점이 되는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졌던 유대인 대량학살의 참극을 설명할 논리적 실마리가 생긴다. 에이미스의 말을 빌리 면, “시간의 화살을 되돌리면, 어느 행동이든 또는 행위이든 거의 모두 다 그것의 도덕성을 역전시키게 된다”(재인용 DeCurtis 146). 자신의 시간 역전 서술의 의미성을 언급하는 에이미스의 이 말은 시간이 도덕성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어, 시간을 역전시켜 인간 행위를 풀어보면 도덕성의 인과관계가 역전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시간의 화살』에서 시간 역전의 서술은 궁극적으로 독일의사 오딜로가 아우슈비츠에서 행했던 유대인 집단학살의 장면으로 집중된다.

    기발하다고 할 수 있는 에이미스의 시간 역전 서술은 사실상 그의 독창적인상상력은 아니다. 『시간의 화살』후기에서 언급된 것처럼 그의 시간 역전 서술은 커트 보네거트(Kurt Vonnegut)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보네거트의 소설『제5도살장』에서 제2차 대전에 미국 군인으로 참전했다가 독일군 포로가 되어 드레스덴 폭격의 참상을 목격했던 주인공은 전쟁이 끝난 뉴욕의 한 거실에서 비디오로 훗날 미국 비행기의 독일 폭격장면 필름을 거꾸로 되돌려본다. 그 비디오에서는, 사상병과 구멍투성이의 미국 폭격기들이 영국 비행장을 이륙하여 프랑스 상공에 도달하자 독일 폭격기들의 공격을 받고 일부는 땅에 추락한다. 편대를 이룬 미국 폭격기들이 독일 상공에서 불타오르는 도시의 불길을 빨아들이고 무수한 폭탄이 폭격기들의 폭탄 격실로 흡수된다. 마찬가지로 지상에서는 독일군의 긴 철강 튜브가 폭격기로 향하는 폭탄을 빨아들인다. 미국 폭격기에 여전히 사상자가 있다. 다시 프랑스 상공에서 독일 폭격기와 부딪친 다음 모든게 정상으로 돌아간다. 미국 폭격기들은 미국 비행장에서 폭탄을 지하저장고로 운반되어 정렬된다(Vonnegut 63-64). 이 비디오의 상황을 정상적인 시간 순서로 설명하면, 미국의 비행장을 이륙한 폭격기들이 독일의 시가지를 폭격하고 난 후 돌아가다가 프랑스 상공에서 독일군 폭격기에 공격을 받아 피해를 입고 영국비행장에 도착하는 과정이 되겠다. 이처럼 보네거트의 방식은 단순히 사건의 논리적 관계를 역전시키지만, 에이미스는 시간 역전 서술방식에다 이러한 논리의 역전 외에 도덕성의 논리까지 역전되는 상상력을 덧붙인다.

    도덕성의 역전과 같은 세계관의 전복은 단순히 문학적 상상력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허구는 아니다. 그것은 물리학의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해서도 충분히 설명되는 자연 현상이기도 하다.2 물질계에서 유용하지 않은 에너지 총량을 엔트로피라고 하는데,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자연현상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엔트로피가 항상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일어난다. 즉, 엔트로피는 유용하지 않은 에너지의 양이기 때문에 무질서의 척도를 뜻하고, 엔트로피의 증가는 무질서의 증가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고립계에서 뜨거운 물체와 차가운 물체를 접촉시키면 열에너지는 뜨거운 물체에서 차가운 물체로 전도될 뿐 그 반대의 경우는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차가운 물체로 흘러간 열에너지는 그 반대의 경우가 생길 수 없음으로 더 이상 유용한 에너지가 아니어서 결과적으로 엔트로피가 증가되고 무질서가 강화된다. 이때 열에너지가 전도(사용)되는 자연현상에는 언제나 시간의 일방향성( “시간의 화살”)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시간의 일방향성은 필연적으로 엔트로피의 증가(무질서)를 수반한다. 그러나 열역학 제2법칙을 정반대로 뒤집어 임의적으로 시간을 역전시키면 자연현상을 뒤집는 격이 되어 엔트로피와 무질서가 축소된다. 『시간의 화살』에서“필름을 거꾸로 되돌리는”(8) 시간역전 서술은 바로 이러한 개념을 이용한다. 비평가 멘키(Richard Menke)는 이를 가리켜, 『시간의 화살』은 홀로코스트 역사를 통해“역사의 음울한 열역학적본질”(961)을 불러일으킨다고 지적한다.

    앞의 예에서 보듯이『시간의 화살』에서 시간 역전 서술에 의해 창조와 파괴의 인과관계는 역전된다. 이 소설에서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학살에 참여한 독일 의사 오딜로의 작업은 그에게 무의미한 또는 무질서의 존재로 여겨지는 유대인들을 몰살하여 독일 게르만 족의 순수한 혈통을 정화시키는 작업에 몰입한다. 그에게 이런 작업은 무질서에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엔트로피의 축소 작업으로 자연현상에 어긋나는“초자연적”행위가 된다.

    에이미스는 나치 의사 오딜로가 수행하는 작업을 창세기의 인간 창조와 비유한다. “자연의 요소”(weather)로 인간을 창조하는 오딜로의“초자연적 ”작업은 “가스와 전기, 그리고 똥과 불”로 유대인을 대학살하는 일이며, 독일 게르만 족의 위대성이라는 나치 이데올로기의 환상을 품고“한 민족의 꿈을 실현”하는 일이다. 그에게 창조와 파괴의 개념은 서로 뒤바뀌어 유대인을 대학살하는 파괴행위가 독일인을 창조하는 행위와 동일화된다. 따라서 그의 창조는 성경의 창세기와 배치되는 정반대의 역설을 담고 있다.

    유대인 인종을 대청소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오딜로의 작업이 결국 실패로 끝나는 모순을 낳았음은 그가 러시아군에 쫓겨 아우슈비츠에서 도망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잘 보여준다. 물론 그가 도망가는 장면은 시간 역전으로 서술되는『시간의 화살』에서는 그가 아우슈비츠에 오토바이를 타고“여성 병원”에 도착하는 장면처럼 기술된다.

    원래 오딜로가 꿈꾸던 것은“인간의 뼈에 똥을 싸는”(106) 일이었고, 지금 러시아군에 쫓겨 도망치는 막바지의 순간 병원의 안팎 모두 똥으로 더렵혀진 것은 “인간 생명체가 온통 찢기고 갈라졌음”(116)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딜로는 다른 독일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아우슈비츠를“세계의 항문”(124)이라 부르며, “그것[아우슈비츠의 세계]은 똥으로 만들어졌다”(123)고 말한다. 한 비평가의 분석처럼, 이 소설에서 에이미스는 18세기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 식으로“분변학적 아이러니”를 끈질기게 사용하여“종말론적”세계비전을 암시한다((McCarthy 298, 299).

    이처럼『시간의 화살』은 시간 역전의 서술방식으로 전통적인 재현방식을 정면으로 무너뜨려 우리의 상식적인 인과관계에 의존한 세계인식을 뒤바꾸는 역설을 제시한다. 세계를 경험해가는 우리의 인식은 시간적 차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뒤바꿀 때, 우리의 세계인식 논리가 전도되도록 에이미스의 포스트모던 서술방식은 유도한다. 전통적인 재현방식이나 에이미스의 시간 역전 서술방식 모두 시간적 차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지만, 시간의 순차성이 뒤바뀌면 합리성과 논리성이 뒤바뀌는 것이다. 이런 역설을 이용하여 에이미스는 이성적 사유와 논리로 설명하기가 어려운 홀로코스트의 범죄행위를 논리적으로 파헤쳐갔다. 에이미스의 허구 세계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인위적 논리가 홀로코스트에서 자행된 나치의 이데올로기였음을 그는 분석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나치 가해자의 비윤리성을 폭로하였다. 에이미스의 시간 역전 서술은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당한 자들의 고통에 독자들의 감정이입을 유도하지 않고 아이러니를 통해 거리를 냉철하게 유지시키면서도 윤리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 수 있었던 새로운 실험이었다.

    1Martin Amis, Time’s Arrow or The Nature of the Offense (Vintage Books, 1992), 11. 앞으로 이 책의 인용은 본문에 면 수만 표기하기로 한다.  2열역학 제2법칙과 Time’s Arrow의 연관성에 관해서는 Menke 969-76. Glaz 108-10 를 참조,

    III

    『시간의 화살』은 시간 역전 서술방식 외에도 전통적으로 홀로코스트를 재현하던 방식과 차별성을 갖는 또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은 동일 인물에게 두 개의 페르소나를 부여하는 방식에 있다. 이 소설의 전반적인 서술 특징은 각 사건에 대한 자세한 세밀한 묘사 대신 그 사건에 대한 화자의 논평과 해석이 많이 섞여드는 점이다. 이때 논평과 해석을 담당하는 일인칭 화자는 개별적 존재성을 지닌 채 삼인칭 주인공 토드의 분신으로 등장함으로써 한 인물에 두 페르소나가 존재하는 격이 된다. 이 분신 화자는 토드의 야만적이고 진부한 삶의 역사에 대항하여 그 역사를 윤리적으로 재해석하는 임무를 맡는다. 결국 이 소설의 특이성은 독특하게 존재하며 특별한 역할을 맡고 있는 특이한 화자 설정에 있다.

    『시간의 화살』을 이끌어가는 일인칭 화자는 주인공 토드의 분신으로 등장한다. 화자의 첫 등장은 토드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육체에서 깨어나는“내부의 목소리”또는“양심”이거나“영혼”의 존재로 시작된다(Glaz 111).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죽음으로 육체를 비롯한 모든 것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에서는 육체가 죽음을 맞는 순간 육체에서 튀어나와 목소리를 내면서 이 소설의 화자가 되기 때문에 영혼과 같은“내부의 목소리”로 상정을 하는 것이다. 또한 이 화자는 이야기가 진전되면서 토드의 삶의 방식에 언제나 도덕적인 논평을 던지고 있어, 이 화자는“영혼”이나“양심”의 존재로 추정될 수 있다. 이 소설의 진행은 토드의 죽음에서 출발하여 그의 탄생까지 시간이 역전되어 흘러가는데, 토드의 영혼처럼 기능하는 화자는 늘 토드의 육체 안에 거주한다. 그러고 보면이 영혼 화자는 토드의 육체적 탄생과 함께 동시에 출생한 셈이어서“내부의 목소리”또는“인간 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화자의 역할은 인간 의식중에서도 윤리성의 논평을 맡고 있는 점에서 포괄적 영역인 인간 의식보다는 한정된 영역인“양심”이라고 판단하는 게 더 정확하다고 하겠다.

    이 소설에서 화자와 주인공 토드는 육체가 하나이면서 토드의 꿈을 공유하지만, 화자는 토드의 전생(前生)에 대한 기억은 전혀 갖고 있지 않다. 또한 화자는토드를 가리킬 때 항상 3인칭을 사용하며 토드의 행위에 대해 독자적으로 판단해가고 논평을 기술한다. 따라서 화자는 일종의 데카르트의 인식론 식으로 육체와 분리된 정신의 존재이지만, 데카르트의 인식론과는 정반대로 이 소설에서는 육체가 정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즉 양심 화자는 토드의 육체를 따라다니며 그에게 발생하는 사건들을 관찰할 뿐이고, 어느 사건에서 어떤 행동으로 반응하도록 육체 또는 토드에게 명령을 내리지 못한다. 단지 화자는 감정을 느낄수 있는 독자적 존재이어서 어떤 사건에 대한 자신의 감정적 반응을 독자에게 말해줌으로써 토드의 육체가 감지하지 못하는 윤리적 판단을 내려준다. “토드, 그렇게 하지 마,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양심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속삭이듯 말한다. 아무도 그걸 듣지 못한다”(47). 토드가 그의 여자 애인과 다툴 때, “양심의 목소리”인 화자는 이렇게 충고를 속삭이지만 토드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토드는 화자의 존재 및 화자가 자신의 몸 안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화자는“홀로 고독”(29)을 느낄 뿐이다. 이처럼 토드와 화자 간에는 어떤 소통도 있지 않기 때문에 토드의 아내와 나중에 사귄 여자 애인은 모두 그에게 영혼이 없는 사람이라고 그를 비난한다.

    토드에게 영혼이 없다는 것 또는 토드의 영혼은 그의 몸체와 구분되어 (반)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장차 홀로코스트의 가해자가 될 사람이라는 걸미리 암시한다. 즉, 독일 의사 토드는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의 집단학살에 직접 개입한 가해자이고, 그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영혼은 그와 거리를 두고 그의 추악한 행위를 비판하는 양심 화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양심 화자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에이미스는『시간의 화살』에서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고통에 독자들이 감정이입 되도록 이끄는 전통적 홀로코스트 문학의 방식에 빠져들지 않는다. 에이미스는 주인공 토드에게서 두 개의 페르소나를 설정하여, 가해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페르소나의 진면목을 화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또 다른 페르소나가 냉철하게 해부해가도록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가해자의 행위를 지켜보는 화자의 목소리에서 아이러니를 쉽게 감지해낼 수 있다.

    독자적인 페르소나이자 분신으로 의사 토드의 양심 역할을 하는 화자는 처음에 주변에서 들리는 새의“불쌍한 울음소리”(7)를 듣고 생경하게 느끼지만, 곧 그 울음소리가“인간의 언어”(7)임을 파악하게 되면서 시간이 거꾸로 진행되는 인간 세계에 익숙해진다.

    시간의 흐름을 우리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화자는 시간이 역으로 흘러가는 것을“반(反)직관적”으로 인식한다. 화자가 반직관적으로 인식하는 세상은 일반 사람이나 토드가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정반대가 되기 때문에, 앞에서 시간 역전의 서술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화자와 토드의 인식 간에는 정반대의 괴리가 생겨난다. 이런 괴리로 인해 화자는 자신이 세상을 이해하는 능력이 빈약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난 전체적으로 이해력이 느린 편이라고 결론지었다. 아마도 정신박약아거나 약간 자폐증이 있는지도 모르겠다”(29). 이런 이해력의 부족으로 화자는 토드의 모든 행위가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가 없어“세상이 타당하게 진행되지 않는 것”(29) 같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화자는 처음부터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논리를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화자는 거꾸로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 토드와 관련된“어느 끔찍한 비밀을 향해 끔찍한 여행”(5)을 떠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지만, 그 끔찍한 비밀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화자가 토드의 전생(前生)에 대한 기억을 알 수 없기 때문인데, 동시에 토드 자신이 끔직한 비밀이 담긴 자신의 과거를 잊고 현재 망각의 삶을 살고 있음을 뜻한다. 그렇지만 망각하려는 비밀이 가끔씩 악몽으로 떠올라 화자의 혼란을 더욱 부추긴다. 따라서 시간 역전의 서사는 독자들이 화자와 함께“최악의 순간 최악의 장소에서 최악의 사람”(5)으로 존재했던 토드의 망각 내용을 되짚어 복원하는 재경험의 과정이 된다.

    토드가 의지적으로 망각하려는 그의 비밀 과거를 되짚어가는 과정에서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분신 화자는 토드와 세계 인식 차이를 드러낸다. 그리고 매 사건마다 양자 간의 세계 인식 차이 또는 대립에서 끈질기게“역설의 아이러니”가창출된다. 예를 들어, 양심 화자는 의사 토드의 의료행위를 토드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바라본다.

    본래 화자는 의사를“삶의 파수꾼”(4)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의사 토드가 환자를 치료하는 행위는 점차로 화자에게 일종의 폭력으로 생각된다. 상처를 치료하고 수술하는 치료 행위는 시간의 역순으로 보면 치료가 아니라 악화시키는 폭력행위가 된다. 이 폭력 행위를 몸체 안에서 지켜보는 화자는 구역질을 하며 눈을 돌리려고 한다. 그렇지만 토드의 신체는 아무런 느낌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화자가 보기에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문을 쓰레기통에 처넣은 토드, 즉 그의 신체는 무감각한 마비의 상태로 보이게 되고, 화자는 그런 토드의 의료행위가 폭력을 담고 있는 비인간적인 것으로 판단한다.

    위의 서술은 의사 토드가 집안에서 비밀리에 낙태 시술을 해주는 장면을 보며 화자가 토로하는 내용이다. 낙태 시술의 끔찍한 폭력을 지켜보며 화자는 의료 행위에 내포된 비윤리성을 지적할 뿐만 아니라, 토드의 몸이 폭력을 저지르는 행위를 지켜만 봐야 하는 양심 화자는 스스로의 의지를 실행시킬 자기만의 몸을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토드는 양심 화자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는 무감각한 마비의 상태인 점에서 오히려 한 몸 속에 동거하는 두 존재의 차이를 극대화시킨다. 그저 관찰만 할 뿐이지 행동의 주체로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이 결핍된 화자가 토드의 육체와 공존한다는 것은 토드라는 한 인격체가 사실상“정신분열증 상태”(Glaz 112)임을 말해 준다.

    화자를 주인공 의사와 구분되는“더블”로 설정한 배경에는『시간의 화살』이로버트 제이 리프턴(Robert Jay Lifton)의 책『나치 의사들』에게서 얻은 영감이 크게 작용하였음을 에이미스는 소설의 후기에서 밝히고 있다. 『나치 의사들』은 아우슈비츠의 의사들이 이성적 합리성에 의한 상식적 판단과는 정반대의 비인간적 학살에 직접 참여할 수 있었던 행동을 정신병리학적으로 분석하였다. 리프턴에 의하면, 아우슈비츠의 독일 의사들은 나치의 이데올로기에 세뇌당해 스스로 자아 폐기의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다(Harris 490). 즉, 나치 의사들은 단일한 페르소나를 갖지 못하고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자아 분리를 겪는 것이다. 자아의 분열을 겪은 나치 의사들은 한 쪽 자아를 마비시키고 다른 한 쪽 자아를 마치 온전한 하나인 것처럼 작동시켜 아우슈비츠의 인종 대량 학살을 수행하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리프턴의 자아 분열 개념을 이어받아 에이미스는 아우슈비츠의 장면에서 이를 적극 활용한다. 흥미롭게도『시간의 화살』에서 주인공의 자아 분리는 토드의 임종마당에서 시작되는데, 자아 분열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토드가 나치 의사로 활동할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더구나 분리된 자아가 양심이라고 한다면, 나치 의사의 시절 토드(본래 이름은 오딜로 운베르도르벤)가 양심을 마비시키며 자아 분열을 겪는 과정이 이 소설의 초점이 된다. 아우슈비츠의 장면이 시작되는 제5장의 첫 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일인칭“나”는 화자이고 삼인칭“그”는 의사였지만, 아우슈비츠 장면이 시작되는 첫 문장은 흥미롭게도 화자와 주인공 의사가 합일된“나, 오딜로 운베르도르벤”으로 출발한다. 오토바이로 아우슈비츠에 도착하는 화자는 이제 오딜로의 비밀“동반자 또는 겨우살이”(8)가 아니라 그와“완전한 한 몸”이 되었다는 뜻이다. 화자가 오딜로와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오딜로의 자아가 분열되었다는 것을 독자에게 확인시키는 것이다. 즉, 오딜로(시간적으로 토드)의 행동에 언제나 논평을 가하던 양심의 존재인 화자가 이제 아우슈비츠에서는 오딜로의 행동에 침묵을 지키고 오딜로의 목소리를 그냥 대변하는 마비된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오딜로의 자아가 분열되었다는증거가 된다.

    여기서 독일 나치 제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오딜로는 권력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그의 꿈속에 반복해서 등장했던“검은 장화, 흰 외투”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로 등장한 나치 권력의 상징임이 증명되었다. 또한 그의“육중한 기계”오토바이는 그가 기계처럼, 그리고“명석한 로봇처럼”(118), “초자연적 목적”을 수행해나갈 것임을 암시한다. 물론 이때 그의“초자연적 목적”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유대인을 학살하여 게르만 민족만의 정통성을 창조하는 일이다. 실제로 유대인을 가스실과 소각로로 보내 그 열기로 저녁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오딜로의 학살 작업은 기계의 작동을 지켜만 보는 일이다

    처음에는 기계의 기구들이 나열되지만 가스실에서 통풍구로 치클론 베가 나오는 순간 생명체들은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치며 죽어간다. “치클론 베”는 독일에서 처음 만들어진 시안화계 화합물로서, 원래 살충제로 쓰였으나 나중에 독가스로 사용되게 된 물질이다. 이 물질을 오딜로는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 대학살에 직접 사용하도록 약사들에게 지시하였다. 여기서 화자는“의사”외에“우리”라는 복수인칭을 갑작스럽게 도입한다. 이미 앞에서 화자가 오딜로와“완전한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양자를 합쳐“나, 오딜로 운베르도르벤”이라는 일인칭으로 쓰고 있었는데, 여기서의 새삼스럽게“우리”라는 복수인칭이 사용되고 오딜로를 지칭하는“의사”는 마치 화자와 분리된 존재처럼 쓰이고 있다.

    이런 인칭 변화는 아마도“나, 운베르도르벤”이 치클론 베를 투입하고 난 후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자들을 냉정하게 지켜보면서 나(화자)와 의사 오딜로 모두“(우리”)에게 가학적인 몸부림이 저절로 생겨나게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죽어가는 자들의 마지막 몸부림에 기계 부속품 같던 나와 오딜로의 몸도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무감각해질 수는 없는 모양이다. 비록 일시적이지만 가해자와 희생자 간에 감정의 동일화가 생겨난 것 같으며, 한 몸으로 작동하지만 나와 “의사” 오딜로 간에 잠시 간극이 벌어진 것 같다.

    나와 오딜로 간에 간극이 벌어진다는 것은 양심 화자의 소생을 뜻한다. 그것은 두 존재가 동일체가 되었지만 희생자의 몸부림을 지켜보면서 마비되었던 양심이 다시 꿈틀거린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나의 토로는 아우슈비츠에서의 비윤리적 나치 행위에 대해 회의감을 표시하는 양심 화자의 존재를 다시 느끼게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잔혹함의 껍질이 담겨 있다. 강렬한 잔혹함의 녹에 덮여 창조가 거의 타락하는 것이다”(122). 여기서“거기”란 죽음의 가스실로 들어가는 여성들의 맨몸을 건드리는 남성 감시원들의 못된 행동을 뜻한다. 죽음의 목전에서 반항하던 여성은 그 남성 감시원들의 손길에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리고 정신이 나가 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남성 감시원의 부드러운 손길은 잔혹할 뿐이며, 가스실을 통한 새로운 나치제국 창조 시도는 인간성의“부패”라고 화자는 비판한다.

    독일 의사들이 나치의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자아 마비의 상태에 빠졌다는 리프턴의 지적은 오딜로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치클론 베를 인간 학살에 사용하는 의사 오딜로는 나치 민족사회주의의 하수인으로“생물학적 보병”(150)이라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아우슈비츠의 승리는 근본적으로 조직단체에 의한 산물이었다고 흔히들 말한다. 우리는 인간 심장에 숨어있는 신성한 불길을 발견하였지만 또한 그곳 심장을 지나가는 고속도로를 세운 것이다”(123). 이와 유사한 문구를 에이미스는 이 소설의 후기에서도 반복하는데, 오딜로는 나치 민족주의의 열정에 빠져 이를 시행하는 꼭두각시의 노릇을 하면서 효율성에 매몰되어 인간성에 눈을 감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아우슈비츠 장면을 넘어 시간을 거슬러가면 오딜로의 의학생 시절로, 그리고 거기서 더 과거로 시간 역전을 지속하면 그의 어린 시절과 출생으로 들어선다. 물론 이때 오딜로는 나치의 민족사회주의에 물들기 이전의 시기라서 오딜로는 다시 나와 분리된 존재가 되어 그로 명명된다.

    오딜로의 어린 시절 모습은 그저 다른 학생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평범한 아이였고, 천성적으로도 악한 아이는 전혀 아니었다. 그의 독일어 이름 운베르도르벤(Unverdorben)이“오염되지 않은, 타락하지 않은”이라는 뜻은 그가 특별히 도덕적으로 예외적인 인물이 아님을 말해준다. 그리고 사실상 그는 젊은 시절 유대인에 대해서도 혐오감은커녕 그들 인종의 이국풍을 좋아했다. “유대인에 대한 나의 입장은 언제나 모호성이 없었다. 나는 그들을 좋아한다. 나의 천성은 유대인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특히 경탄하는 점은 그들의 눈이다. 반짝거리고 열기에 찬 눈초리. 누가 알랴마는 초월자를 향하고 있는 듯한 이국적 풍모?”(152). 여기에서 보듯 유대인은 서구에 이국적인 타자의 이미지이다. 이런 유대인의 타자성은 사회가 건강하고 건전할 때는 큰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겠지만, 사회가 위기의 순간에는 갈등을 노정시킨다.

    실제로 독일은 유대인의 이민에 관대하였지만, 점차 유대인에 의해 독일인의 취업이 어려워지자 반이민법이 제정되고 유대인 거부감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 독일인의 민족 우월성을 내세우며 국가와 민족의 단일성을 주장하면서 유대인 학대가 시작되었다. 오딜로 역시 이런 잘못된 나치이데올로기에 빠져 우생학적 논리에 입각한 독일민족 신화를 창조하려는 데에서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아우슈비츠의 독일인 클럽에서는 독일 민족의 우월성에 대해 과학의 이름으로 공공연하게 떠돌고 있다. 이와 반대로 유대인들을 비롯한 타민족은 진화론에 입각하여 멸시된다. 나치 독일은 진보를 표방하고 나섰지만 역설적이게도 고대의 신화를 민족적 재생의 이름으로 다시 부활시키려는 퇴영의 길을 선택했다. 그것은 나치 의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치 의사들은 강제 수용소의 유대인에게 끔찍스런 실험을 가해 의료상의 진보를 가져온다는 믿음을 가졌다. 그것은 군사주의와 의학이 결합되어 의사들에게 역설적인 행동을 낳았다. 환자를 돌보는 의사의 전통적인 역할은 군사적인 목적을 위해 변경되었다. “나는 아픈 자들을 도와줄 것이며 의도적인 모든 나쁜 행위와 해로운 행위를 하지 않겠습니다”(25)라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쓰레기통으로 폐기 처분되었다. 순박한 인물이었던 오딜로는 이러한 나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휩쓸리어 전혀 죄의식도 없이 그가 말하는 독일 민족 창조 작업에 몰두하였다. “결국 이것이 우리의 임무였다. 독일을 하나로 만들자. 독일의 상처를 치유하고 하나로 통합하자”(141). 나치 의사 오딜로에게 독일을 하나로 통합하는 민족 창조 작업은 그 역으로 유대인을 학살하는 파괴 작업이었고, 그는 마비된 죄의식으로 유대인에게 페놀 주사를 투여하는 살인범이었다. 이처럼 에이미스는 홀로코스트 가해자의 자아분열과정을 추적하기 위해 가해자의 분신을 창조하여 망각으로 사라질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독자들과 함께 재경험하도록 독특한 장치를 마련하였다.

    IV

    “홀로코스트는 우리의 지적 세계 지형을 변화시켰다”(Eaglestone 346)는 지적처럼 홀로코스트는 서구인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방식의 중요한 일부분이 되었다. 인간 소멸을 순식간에 대량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던 나치의 조직적인 인종학살 이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 속에서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또한 그런 연구에도 불구하고 홀로코스트 사건이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는 홀로코스트가 서구의 지적 지형에 끼친 충격 때문이다. 그 충격의 여파가 엄청난 만큼 인간의 이성적 사고와 상상력을 넘어서는 영역에서 벌어졌던 이 인간성의재난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는 판단이 깔려있는 것이다. 『시간의 화살』에서도 화자는“언제쯤 이 세상이 올바로 이해되기 시작할 수 있을까?”라고 반복해서 자문하는데, 이런 물음의 핵심에는 홀로코스트의 사건 앞에서 부딪치는 인간성의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당혹감에 있었다.

    홀로코스트 세계의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부조리성은 종종“말로 표현될 수 없는”그리고“알 수 없는”것이란 재현불가능성의 근원적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런 홀로코스트 역사의 근원적 물음을 풀기 위해 에이미스는『시간의 화살』에서 리얼리즘의 전통적 재현방식을 철저히 버리고 시간 역전의 서술과 자아분열을 통한 두 페르소나 설정이란 실험적 수법을 채택하였다. 그의 실험은 정상적인 이성 논리를 거부하는 아우슈비츠의 전도된 세계를 풀기 위한 것이었으며, 또한 망각으로 지워질 수 없는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윤리적 성찰이었다.『시간의 화살』의 특이한 서술은“낯설게 하기”의 수법처럼 낯설은 세계인식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로테스크한 인간성의 세계를 생성해주었다는 인상까지 풍겨주었다. 궁극적으로 에이미스의 시도는 정상적인 서술로는 접근 불가능한 홀로코스트의 역사 현장에 접근하기 위한, 그리고 그 역사의 진실한 의미를 파헤치기 위한 포스트모던 홀로코스트 문학의 새로운 실험이었다.

    어느 면에서 보면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인종 학살의 원인과 성격에 대해『시간의 화살』에서의 분석내용은 이제까지 홀로코스트 역사 연구자들이 규명했던 내용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다. 최근의 홀로코스트 역사가들의 연구가 말해주듯이, 홀로코스트를 수행했던 나치들의 전범행위는 반유대주의와 게르만 민족의 우월주의 물결을 이용하여 발전해가는 첨단 기술과 더욱 면밀하게 조직화되어가는 관료제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한 현대화의 전형적 양상이었다.3『시간의 화살』에서도 홀로코스트 가해자인 독일 의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왜곡된 이념에 몰입되어 나치의 기계부속품처럼 가스실의 유태인에게 치클론 베를 투입해나간 과정을 기술해나갔다.

    그렇지만 에이미스가 이 소설에서 보여준 문학적 상상력의 독창성은 나치 가해자들의 왜곡된 이념에 내포된 역설적 아이러니와 그 파괴적 이념이 현재까지 연속되고 있다는 시선에 있다. 에이미스의 독특한 관점은 나치의 전도된 이데올로기에 담긴 창조와 파괴의 전도된 역설을 적나라하게 해부하면서, 이런 전도된 역설적 세계관이 얼마나 그로테스크한 미래사회의 전망을 보여주는지를 제기하는 날카로움에 있다. 『시간의 화살』에서 시간의 역으로 진행되는 홀로코스트 가해자 주인공의 일생은 진화와 발전이 아니라 후퇴와 퇴영의 과정이고, 과거 역사의 악몽을 망각하려는 그 미래는 유토피아의 세계와는 정반대의 디스토피아의 지형도임을 지적한다.

    시간 역전의 서술방식을 포스트모던 시대의 문화사적 특징으로 파악하는 비평가의 흥미로운 주장도 있다. 그 분석에 따르면 현대의 미디어 대중문화의 급속한 발전으로 비선형적 서사 진행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디오테이프는 축구 경기에서 반칙이나 골 넣는 장면 등의 핵심 장면을 마음대로 되돌려볼 수도 있고 앞으로 빨리 보여줄 수도 있으며 정지시킬 수도 있다. 또한 꽃이 씨앗에서 싹이 트고 꽃을 피우며 씨앗을 퍼뜨리다가 죽어가는 과정을 기록한 다큐 카메라는 오랜 기간의 전 과정을 고속으로 순식간에 단축시키며 보여준다. 이처럼 과거, 현재, 미래의 일직선적으로 연속되는 서사 진행을 파괴하는 것은 미디어에서만이 아니라 텍스트의 시공간적 리얼리티를 비현실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하이퍼 현재”로, “연대기적 진보의 단절, 시그니파이어의 현란한 물질성”에 따라 의미의 해체를 가져온다(Goh 64). 이러한“하이퍼 현재”는 방향상실과 선형성의 역전, 인과관계 서사의 다양성으로 나타나는“시공간적 정신분열증”(64)의 전형적 양상이며 동시에 이런 양상이 보편화되어가는 포스트모던 사회의“문화적 정신분열증”(64)을 나타낸다는 지적이다.

    『시간의 화살』에서도 두 페르소나를 설정하여 주인공의 분신 화자가 서술을 주도해가는 방식은 시간 역전의 서술과 함께“문화적 정신분열증”을 설명해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시간 역전 방식이 연대기적 인과관계를 역전시켜 윤리의 전도된 세계를 보여주었다면, 주인공의 분신으로 등장하는 화자는 망각속에 회피하려는 주인공의 윤리적 양심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홀로코스트의 참상에 대한 기록은 그 참상이 야기하는 감정적 충격으로 인해 독자로 하여금 희생자에 대한 독자의 감정이입을 유도하게 되고 단일한 결말로 응집시키려는 욕망에 빠지게 된다. 그렇지만『시간의 화살』은 희생자의 고통 장면에서 거리를 두고 가해자의 심리분석에 치중하며 냉정한 거리를 유지하였다. 이런 서술상의 거리감은 분신 화자에게 별개의 페르소나를 부여했기에 가능했다. 분신화자의 차분한 분석적 목소리는 언제나 감정이입 대신 아이러니를 표출하며 윤리성을 진지하게 천착하도록 만들었다. 에이미스의『시간의 화살』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홀로코스트 문학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재현가능성과 윤리성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풀어가려는 진지한 작업이었다고 하겠다.

    3홀로코스트에 대한 최근의 역사 연구에 대해서는 Dominick LaCapra, Representing the Holocaust: History, Theory, Trauma의 제3장“Historicizing the Holocaust”와 Robert Eaglestone, The Holocaust and the Postmodern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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