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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The Country and the City: A Socio-Historical Reading of “Michael”* 도시와 시골―워즈워드의「마이클」의 경우*
  • 비영리 CC BY-NC
ABSTRACT
The Country and the City: A Socio-Historical Reading of “Michael”*
KEYWORD
the country and the city , the war paradigm , financial revolution , the debt guarantee contract , the letter from a London relative , the sheepfold
  • I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1770-1850)가『서정담시집』(Lyrical Ballards) 2판(1800)의 마지막을 장식할 작품으로 1800년 12월에 작시를 마친 「마이클」“( Michael”)은, 일견 간단하다고 느껴지는 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중요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재산과 자식사랑, 양우리, “목가시”라고 붙은 부제 등의 문제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들이 모두 쉽게 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데 이 시의 어려움과 매력이 동시에 존재한다.

    특히 땅과 자식 사이에서 선택하게 되는 주인공 마이클에게 있어서 이것들의 우선순위의 문제는 비평가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어 왔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조상에게 물려받았다고 하는 마이클의 땅과 그의 아들 루크(Luke)를 같은 선상  의 저울에 올려놓고 이 중 어느 것이 마이클에게 더 중요한 가치로 작용하는지를 질문하고 답한다. 마이클에게 경제적 위기가 닥쳐왔을 때 땅을 매각하는 대 신 돈벌이를 시킬 목적으로 루크를 런던으로 보낸 사실을 중심으로 한 플롯전개  를 염두에 두고 그 답이 땅이라고 한다면, 마이클은 실용적인 경제적 인간이 되든지, 아니면 21세기의 생태주의자들의“대지의 윤리”를 앞서 실천한 생태적 자연인이 된다. 양 극단의 논리가 부담스러운 학자들도 동일한 스펙트럼의 양극은 피하고 그 사이의 한 지점을 선택함으로써 부담을 덜려고 할 뿐 이러한 설명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1

    이 시의 중심에 혹은 마이클의 삶의 중심에 조상에게 물려받은 땅과 아들 루크가 존재한다고 보는 독자들과 비평가들은 흔히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2 루크를 도시로 보냈어야만 했는가? 왜 땅을 팔지 않은 것인가? “마이클은 왜, 루크를 보내는 대신에, 자신이 비슷한 장애물을 만났을 때 행한 것처럼 (루크로 하여금) 땅을 일굼으로써 땅을 지키게 하지 않은 것인가?”(Lea 61) “마이클은 양농사(sheepfarming)를 수익을 창출하는(자본집약적인) 기업으로 전환함으로써 빚을 갚을 수도 있었다”(Levinson 716) 등의 반응이다. ‘마이클에게는 루크와 땅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위에 거론된 질문은 이러한 반응 후에 으레 던져지게 되는 또 하나의 질문인 것이다.

    이런 유형의 반응 혹은 질문은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며 또한 작품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 가는 길목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시가 생산된 시대적 배경과 워즈워드의 작시의도에 관해 충분히 고민하지 않은 데서 오는  결과라고 여겨진다. 경제적 위기에 직면한 한 인간이 어떠한 경제적 안목 혹은 능력을 통하여 그 위기를 극복하는가, 혹은 좌절하는가? 마이클은 경제중심적인 가치관을 지닌 인간인가 아니면 인간중심적 가치관을 지닌 인간인가? 마이클은 본능적인 생태주의자인가? 이런 유형의 질문들은, 21세기의 인문학자들의 관심거리는 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마이클」이 쓰여진 1800년 후반부에는 시인 워즈워드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비교적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미 나름대로는 고민했음에 틀림없고 그렇기 때문에 진부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아직도 이 시에 대한 이해가 미진하다고 느껴지는 현 상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 좀 더 철저히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마이클」을 쓰던 당시 워즈워드의 관심사는 무엇이었는가? 특히, 「마이클」이라는 작품의 구성 혹은 플롯전개를 지배했던 패러다임은 어떤 것이었는가?

    본 논문에서는 땅과 루크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마이클, 그리고 마이클의가치관이라고 하는 논쟁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본 논문에서는 19세기 초 영국의 정치, 사회, 경제적 현실과 시인 워즈워드 개인의 현실을 바라보며, 「마이클」에 실재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들을 다 함께 고려하여, 즉「마이클」의 스토리와 히스토리를 동시에 고려하여, 사회역사적 해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마이클」이 도시와 농촌의 전쟁이라는 모티프를 기본 패러다임으로 사용하며 도시가 승리한다는 결론이 난 상태에서 그 플롯이 구상된 시임을 주목한다. 본 논의에서는「마이클」은 철저히 시대를 반영하는 시로서 19세기 초 영국의 산업화, 도시화, 금융화의 현상이 마이클의 시골살림뿐만 아니라 마이클을 비롯한 시골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잠식했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결과적으로, 마이클은 워즈워드의 또 다른 자아(alter-ego)이지만 또 한편으로 워즈워드가 비판적 거리를 두고 있는 당대의 시골사람의 한 유형이기도 함을 주장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인천대학교 2009년 특별과제연구비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것임.   1마이클에게 있어서 땅이라고 하는 것은“물질적/재화적 가치뿐만 아니라 정신적 가치를 표방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비평가들이 있다. 이들은 마이클과 같은 독립자영농들이 소유한 소규모의 땅은“매일 순수한 애정을 공급하는, 사회적 인간의 본성에 적합한 샘”이라고 한 워즈워드의 말에 주목하며, 땅은 곧 독립가정이라고 하는 사회의 기본단위를 가능케 함으로써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애정을 먹고사는 인간을 지켜주는 생명의 샘임을 주장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들을 떠나보내면서까지 땅을 지키고자 했던 마이클은 곧 생명의 근원인 땅과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보는 이쪽 캠프에 속한 학자들은“마이클이 곧 자연이다”(Bate 104) 라는 궁극의 주장까지도 불사한다(최동호 참조)(. 마이클은 실용적인 경제인간이다라는 식의 주장을 펼치는 대표적 비평가로 마조리 레빈슨(Majorie Levinson)이 있다. 그는 해당 작품의“이야기 부분(narrative section)”에서는 마이클이 철저히“미래지향적”혹은 물질지향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아들 루크에 대한 마이클의 태도에서도 이러한 미래지향적 혹은 물질지향적인 면모를 확연히 엿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레빈슨은 궁극적으로는 절충적인 입장을 취한다. 워즈워드의“논쟁가로서의 면모”와“시인으로서의 면모”를 함께 보여주겠다고 하는 자신이 설정한 목적에 충실하게 레빈슨은, 이 이야기의“틀(액자)을 이루는 부분”에서는 마이클이 물질에 관한 집착을 초월함으로써“아파티아”의 경지에 이른 모습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 시는 또한 영적가치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마크 존스(Mark Jones)는“이야기 부분”에서도 물질적 태도와 영적인태도가 공존한다고 주장하며 레빈슨에게 반기를 드는 것 같지만 사실은 레빈슨과 크게 다른 입장을 취한다기보다는 세밀한 부분에 있어서 약간의 수정을 하겠다는 입장일 뿐이다.   2이러한 견해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어서 재고의 가치조차 없는 듯하다. 사실상, 마이클의 땅과 아들 루크는 주인공 마이클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서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외적으로 보아도, 1801년 4월에 토마스 풀(Thomas Poole)에게 보낸 워즈워드의 편지가 이를 지지하는 듯하다. “인간에게 가장 강력한 두 가지 애정, 자식에 대한 애정과 (토지)재산에 대한 애착(상속, 가정, 개인과 가족의 독립에 대한 느낌을 포함함)에 의해 흔들리는 강인한 정신과 활발한 감수성을 지닌 한 남성의 그림”이라고 워즈워드가 이 시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Early Letters 266).

    II

    수잔 아일랜버그(Susan Eilenberg)는「마이클」에서 시인 워즈워드의 이야기 전개 방식은“이야기 전개의 의무를 회피하는”방식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210).“ 전개해야 할 사건들에 관해서 자주 불편해 할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최소한만 말하고 그것도 마지막에 가서 겨우 말하는 식의 이야기 전개 스타일”이라는 것이다(210). 이러한 지적은, 이 시의 여러 부분에 적용되는 것이지만, 특히 루크와 관련한 시인의 전개방식에서 기원한다. 루크가 긴박하게 집을 떠나 런던으로 가게 되지만“그 이유는 여전히 막연하고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210). 시인은 또한“루크가 눈앞에서 사라지자마자”거의“내용이 없는”“불과 6행의 공간을 사용하여”“그를 약식으로 제거해버린다”는 것이다(210).

    아일랜버그가 지적하는 문제점은 사실상 많은 독자들과 비평가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루크에 관한 더 상세한 스토리를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서 서둘러 잘라버렸다는 느낌이다. 어쩌면 이런 느낌 때문에 독자나  비평가의 입장에서 루크에 대한 언급이 필요이상으로 많아지게 되고, 그로 인해 이 작품에서 그의 중요성이 과도할 정도로 크게 느껴진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시인이 의도했던 자리로 루크를 되돌려놓고 또한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의 중심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마이클」은 18-19세기 영국의 경제/사회적 현실에서 시골의 독립가정을 지키는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진 시이다. 시인 자신도 그와 같은 의도를 밝힌 바 있지만3, 해당 시의 내적 구조를 정밀히 검토해 보아도 역시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역사적으로 개인주의의 발달이 개인의 경제적 성장 혹은 자립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것처럼, 18-19세기 영국의 농촌에서 독립가정을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땅이다. 특히 이 시에서 워즈워드의 관심대상이 되고 있다고 하는 잉글랜드의 자유보유권자(freeholder) 혹은 북잉글랜드의 소지주(statesman)의 경우는,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소규모의 땅으로 인해 자유보유권자라고 하는 사회적 지위가 유지되는 것이며 그를 바탕으로 독립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작으나마 물려받은 땅이 없다면 사회적 지위도 가정도 없어진 채정처 없는 떠돌이 신세 혹은 도시의 품팔이 노동자 신세로 전락할 운명이다.

    마이클의 땅은 농지일 수도 있고 양을 방목시키는 초지일 수도 있고, 어쩌면 작으나마 둘 다 일수도 있다. 그 용도가 무엇이든 바로 이 땅의 소유권에 문제가 생긴 것이고 그 문제의 근원은 도시에서 촉발된다. 1694년 런던에 설립된 영  란 은행(The Bank of England)은 영국경제사에서 소위‘금융혁명’(financial revolution)이라고 칭하는 각종 금융현상이 시작된다는 하나의 중요한 신호탄이었다. 산업혁명이 성공함에 따라 런던에 무역업 및 각종 상업이 성행하게 되고 이와 병행하여 화폐자산의 운용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현금보유계층’ (moneyed interest)이 등장하게 된다. 영국의 금융혁명의 기저에는 영란은행의 설립과 국채(national bond)발행, 1697년의 화폐 재 주조와 사실상의 금본위제도라고 하는 국가차원의 대사건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현금운용을 통해 이윤을 노리는 현금보유계층을 위해서 혹은 상업의 발달을 위해서 도입된 금융상의 새로운 제도와 방식들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런던중심가(City of London)의 전문적인 상업은행의 발전과 함께, “환어음(bill of exchange)의 이용증가, 주식 거래, 해상 및 화재보험의 발전”은 물론이고“담보융자시장”역시 크게 성장하였다고 한다(이영석 207-08).

    이 시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때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는 구조적 문제점은 친척의 빚이며 자신의 땅으로 그를 보증한 마이클의 보증행위이다. 아일랜버그는 “신용”(credit) 혹은 빚의 문제는“명백히 워즈워드류의 문제가 아니다”고 단정하고(211), 레빈슨은 마이클의 보증행위라고 하는 것이“이상할 정도로 (역사적)구체성을 지닌다”고 불평한다(715).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워즈워드의 다른 시들, 즉「떠돌이 여인」“( The Female Vagrant”)이나「형제」“(The Brothers”), 그리고『워즈워드의 숨겨진 면모』(The Hidden Wordsworth)라고 하는 케네스 존스톤(Kenneth R. Johnston)의 비교적 최근의 연구내용 등을 볼 때, 신용 혹은 빚의 문제가 워즈워드에게 결코 낯선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형제」에 등장하는 늙은 월터(old Walter)는 시골의 목자 겸 농부이며 물려받은 땅에 지워진 빚과 투쟁한다는 점에서 마이클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는데, 이 경우 월터의 경제상황은 보다 자세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급격히 산업화되어가는 외부세계와는 대조적으로 대대로 옹색한 농촌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월터와 그의 조상의 상황을 묘사한다.

    위와 같은 배경진술에 이어, 특히“해를 거듭하며 . . . 채권과 이자와 모기지와 싸우는”(Year after year, . . . buffeted with bond, / Interest, and mortgages)(213-15) 늙은 월터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워즈워드는 도시의 현금  보유계층의 이해관계의 희생양이 되는 시골사람 혹은 시골살림의 운명을 가감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처럼, 도시의 금융기제 즉“본드, 이자, 모기지”와 싸우다 지쳐 때 이르게 죽은 목자며 농부인 월터의 이야기로 보아 18세기에 이루어진 잉글랜드의 금융혁명이 시골의 땅과 양을 잡아먹는 스토리가 워즈워드의 시세계에서 결코 낯선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신용 혹은 빚의 문제는 워즈워드의 초기 시세계의 특유의 문제점이라고 인정되는“전쟁으로 손상된 경제,”“공유지 종획운동”(the enclosure of a commons) 등의 문제(Eilenberg 211)와 연계된 것으로서, 워즈워드가 인식했던 18세기와 19세기 초의 잉글랜드의 경제 문제의 일환이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특히 담보융자라고 하는 도시인들의 현금운용방식의 일환으로 체결된 마이클의 보증계약은 도시와 농촌이 함께 얽혀 먹고 먹히던 당시 잉글랜드의 역사적 현실을 표현한 것이고, 그것은 또한 현실을 넘어 하나의 상징으로서 마이클로 대변되는 북잉글랜드 자유보유권자들의 실존의 딜레마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마이클이 보증을 서 준 조카라고 하는 사람도 이 당시 도시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전형으로 그려지고 있다. “많은 재산을 가진, 근면한 사람”(212) 으로서“예측하지 않은 불운”(213)으로 인해 빚을 갚을 수 없었다는 내용은, 커다란 이익을 목표로 주변의 각종 출처로부터 돈을 모아 무역상선을 준비시켜 출발시켰다가 자연재해 등의 사고를 당하여 끌어들인 돈을 갚을 수 없게 되는 당시 잉글랜드의 불운한 무역상인을 즉각적으로 상기시키는 디테일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현금보유계층(무역상인 포함)의 이해관계의 표적이 된 것은 물론 마이클의 땅이다. 이 시는 마이클과 땅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특히 마이클의 땅이 도시의 금전계층의 이해관계의 표적이 된 이후 이를 막고자 하나 현실적으로 막을 방도를 가지지 못한 마이클의 허무한 패배의 스토리를 그리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마이클의 땅과 아들 루크가 이 시의 중심에 나란히 서서 마이클에게 어느 쪽이 더 중요한 존재인가를 입증하기 위해 겨루고 있는 상황이 아니다. 루크는 물론 마이클에게 희망이고 미래인 사랑하는 아들일 뿐만 아니라 위기에 처한 마이클이 내세우는 경제적 해법이다. 게다가 루크가 무너짐으로써 마이클이 무너지는 것 같은 외양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마이클의 삶과 궁극적인 좌절을 다루는 이 시에서 루크가 대단히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누구나 하게 마련이다. 관록 있는 비평가들조차도 마이클의 땅과 루크의 존재의 무게를 평행선상에서 저울질함으로써 루크가 지나치게 중요하게 부각되어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마이클과 루크의 관계는 이 시에서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중요성만을 지닌다고 보아야 한다. 이 시는 마이클과 땅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보아야 하며, 그렇게 하였을 때 비로소 이 시와 관련된 답변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대체로 하나의 패러다임 안에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먼저, 이 시를 위해 워즈워드가 염두에 둔 가치체계는 땅, 마이클, 루크를 중 심으로 하는 마이클의 가족 순으로 짜여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즉, 땅이 마이클을 받치고 마이클이 그의 가족을 받치는 피라미드 형국의 경제라는 뜻이  다. 이러한 시적 경제체제 내에서도 물론 땅은 수단이고 인간은 목적이다. 즉, 땅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수단으로서의 땅이 그 본래의 목적을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의 도움, 심지어는 희생이 필요하다. 마이클의  땅이 마이클과 그의 가족을 떠받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마이클의 땅이어야 한다는 대전제가 성립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이클」에서 땅을 매각하는 대신루크를 런던으로 보낸다는 마이클의 결정은, 땅이 인간(루크)보다 우선하는 가치임을 시사하는 디테일이 아니라, 소유권상 문제가 생긴 땅에 대해 소유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인간의 서비스의 필요를 시사할 뿐이다. 이 서비스의 궁극의 목적은 인간에 대한 땅의 서비스가 충일하게 실현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것인만큼, 이것이 결코 인간 위에 땅이 존재한다든가 혹은 인간과 땅이 동일한 가치로 나란히 존재한다는 식의 휴머니즘적 가치의 전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존재의 순위(hierarchy)에서 루크는 땅에 우선하지만, 해당 시의 시적 체제 내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이클의 땅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마이클과 그의 땅의 관계가 마이클과 루크의 관계보다 앞선다는 말이  다. 이를 입증하는 디테일은 이 시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사실은, 「마이클」에서 마이클이 무너지는 순간은 도시로 간 루크가 악의 길로 빠지는 순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땅의 소유권에 이상이 생겼음을 아는 순간이 곧 그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오래전에 이루어졌던 조카의 빚보증으로 인해 그가 많은 세월의 서비스를 통해 완전한 소유권을 확보했던 땅의 소유와 관련해 문제가 생겼다는 뜻밖의 소식에 봉착한 마이클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린다. 아내에게 대책을 말하려던 원래의 목적도 잊고 횡설수설하는 마이클의 모습은 더 이상“수많은 안개가 스쳐지나가는 산봉우리 위에서 안개 속에 홀로 서 있던”(58-60) 평범치 않은, “실제모습보다 거대한,”거의 영웅적인 목자의 모습이 아니다.5

    양우리 장면에서 루크에게 주는 마이클의 마지막 말도 그를 도시로 보내는 것이“미래지향적”인 진취적 행보라기보다는 존재의 기반에 이상이 생긴 인간이 의지하고자 하나 결코 의지가 되어주지 못할 취약한 보루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짙게 풍긴다. 루크를 도시로 보내는 일에 대하여 마이클 스스로 역력히 자신없어하고 불안에 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루크를 도시로 보낸다는 생각 자체가 마이클이 무너졌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이는 목가적인 삶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전형적인 농부/목자가 도시경제를 탐하는 일탈을 꿈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정이“미래지향적인”것이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마이클의 오류 많은 의식의 작용일 뿐이다. 마이클의 똑똑한 무의식이 꿈을 통해 그의 결정에 오류가 있음을 알리며, 이러한 사실을 마이클의 아내 이사벨(Isabel)이 주목하고, 시인화자는 그 사실을 우리 독자에게 알린다.

    이처럼 루크를 도시로 보낸다는 마이클의 결정은 땅의 기반이 흔들림으로 인해 파멸의 환상에 시달리는 심약한 인간의 심약한 결정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시인 워즈워드는 사건 발생 이전부터 명백히 짚어주고 있다.

    땅이 마이클을 떠받치는 시적 경제체제 안에서 땅에 이상이 온 시점이 마이클 이 무너지는 시점이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루크가 도시에서 악의 길로 접어든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문제해결책으로 도시경제를 선택한 마이클의 잘못된 선택의 당연한(궁극의) 귀결일 뿐이다. 도시로 간 루크의 행보는 시인 워즈워드에게는 플롯전개를 위해 필요한 최소의 디테일일 뿐임이 명백히 드러난다. 땅의 소유에 이상이 올 수 있음을 안 이후의 마이클의 행보에 비한다면 그 취급의 분량이나 속도 면에서 비교도 되지 않는다. 불과 몇 줄도 안되는 분량으로 간단히 처리해버리는 시인의 편집전략에서 이는 예정된 수순에 지나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진하게 묻어나온다. 이 시가 처음부터 끝까지 땅과 마이클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가 이야기전개의 의무를 피하려고 하며 특히“루크의 취급이 매끄럽지 않다”는 아일랜버그의 지적은(210) 그럴싸하지만 사실은 마이클의 땅의 전선에 이상이 왔을 때 마이클이 무너지고 마이클이 무너질 때 그의 가정이 무너지는 연쇄도산의 문제를 다룬다고 하는 시인의 편집전략상 불가피한 결과인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은 왜 루크를 도시로 보내기로 한 것인가? 왜 시인 워즈워드는 마이클로 하여금 그러한 결정을 하도록 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이 시에 내재되어 있다. 런던에서 온 친척의 편지가 바로 그것이다. 조카를 위해  서준 빚보증이 잘못되어“조상에게 물려받은 땅의 일부”를 팔아야 하는 위기에 직면한 마이클은, 런던에서“상업으로 번성하는”“또 다른 친척”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가진다. 이 친척에게 루크를 보내어 상업기술을 배우게 하고 돈을 벌도록 한다는 것이다. 시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마이클이 자신이 처한 상황과 이러한 목적을 도시의 친척에게 알렸음에 틀림없다. 아내이사벨에게도 그의 뜻을 전달했고, 이사벨의 동의하에 적어도 마이클 가족의 입장에서는 루크를 도시로 보낸다는 결정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루크의 런던행을 위해 이사벨이“5일 동안, 밤낮없이 준비에 여념이 없는 동안”(284-85) 위에 논의된 꿈의 사건이 발생한다. 이 꿈으로 인해 루크를 도시로 보낸다는 결정이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직감한 마이클의 가족은 이내 그러한 결정을 취소했고 그로 인해 이 가족은“이후 일주일 내내 봄철의 뒷동산처럼 명랑해 보  였다”(305-06)고 한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마침내 루크의 복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확언과 함께, 루크를 자신에게 즉시 보내달라는 요청 또한 첨언된 기다리던 친척의 편지가 왔다”(306-11). 루크를 보내지 않는다는 결정을 하고 직전까지도 즐거워했다는 가족들이 이 편지를 보자마자 단번에 변하는 모습은 거의 생경하기까지 하다. 그 효과가 지대하다는 점에서 작품 전체에 걸쳐 이 편지만큼 흥미로운 디테일도 별반 없다고 느껴진다.

    하루 종일 집에 머무르며 쉴 새 없이 집안일과 물레질만 할 것 같던 이사벨이 편지를 자랑하기 위해 동네마실을 나간다는 사실도 놀랍고, “당시 잉글랜드 땅에서 루크보다 더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도 놀랍다. 이사벨이 동네마실에서 돌아왔을 때“루크를 내일 보내겠다”고 하는 마이클의 선언은 과감함 그 자체이다. “루크의 런던 행에 대한 마이클의 반응이 빠르게 교차하는 썰물과 밀물을 닮았다”고 한 시드니 리(Sydney Lea)의 관찰은(63) 땅의 소유권에 이상이 올 수 있음을 안 이후의 마이클의 행동패턴에 대한 정확한 관찰이다. 불과 일주일 전 동일한 결정을 하고서“마이클의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고 했는데 이제“루크를 내일 보내겠다”고 하는 마이클에게서‘과감함’을 넘어 거의 조울증에 가까운‘오르내림’의 심리상태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사벨도 예외는 아니다. 불과 일주일 전 마이클이 꿈속에서 괴로워한다고 하며 루크의 런던행을 말리던 이사벨에 비하면 지금의 모습은 확실히 천양지차 달라진 모습이다.

    마이클 가족들의 이러한 반응은 텍스트 상의 심각한 균열이 느껴질 정도로 갑작스러운 태도의 변화이다. 마크 존스(Mark Jones)는 특별히 루크만이 시골 특히 시골의 노동에서“탈출하고 싶어 하는 열망”을 지닌 것으로 주장하지만,6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도시 친척의 편지를 받자마자 드러나는 마이클 가족들의 일치된 태도의 변화에는 단순히 노동으로 점철된 시골의 삶이 싫다고 하는 젊은이들의 전형적인 태도와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고 느껴진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마이클 가족의 이러한 갑작스러운 태도의 변화에 대해 시인 워즈워드가 변명조차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출판된 후 약 20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이 시를 대하는 필자의 느낌과는 달리 워즈워드에게는 이것은 설명도 변명도 필요 없는 19세기 초 잉글랜드의 시골사람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태도의 변화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루크와 이사벨은 물론이고 마이클의 심리에도 이미 도시라고 하는 실체가 긍정적인 모습으로 잠식해 들어와 있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사실임을 알려주는 명백한 단서가 해당 텍스트에 내재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이클이 이사벨에게 루크를 도시로 보내 돈을 벌게 하겠다는 생각을 처음 발설했을 때, 이사벨은 마을의 고아였으나 런던으로 가 상인인 주인의 신임을 받아“경이적으로 부유해진”“리처드 베이트만(Richard Bateman)”이라는 신화적 존재를 생각한다. 그는 너무도 부유해진 나머지“바닥을 대리석으로 깐 교회당”을 지어 고향에 헌납한 사람이라고 한다. 도시로 나가 이처럼 대단한 경제적성공을 이룬 사람이 리쳐드 베이트만 한 사람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화자가 이어, “이러한 생각들, 그리고 같은 종류의 많은 다른 생각들이 이사벨의 마음을 재빨리 스쳐갔고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271-73)고 루크의 런던 행에 관한 마이클의 계획을 말없이 듣고 있는 이사벨의 마음의 움직임과 표정을 우리에게 보고하기 때문이다.

    리처드 베이트만이라는 신화적 존재는 그 자체 내에‘도시는 성공이다(London is success)’라는 방정식을 함유한다. 도시의 성공한 친척에게 비즈니스를 배우러 간다는 사실 앞에서 불과 18세의 루크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한다는  사실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디테일이다.7 루크가 런던으로 떠나는 날 아침, 루크와 마을사람들의 행동 또한 참으로 흥미롭다.

    단순히 먼 길을 떠나는 동네청년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배웅이라고 하기에는 그 열기가 과하다고 느껴진다. 또 한명의 미래의 리처드 베이트만에 대한 동네사람들의 예우라고 말하는 편이 차라리 정확하다는 느낌이다. “과감한 얼굴”을 하고 마을사람들을 지나가는 루크 역시 앞으로 자신이 쓸 성공신화를 십분 의식 하는 듯하다.

    이처럼 일견 안정적이고 견고한 듯 했던 시골의 삶이 상업에서 성공했다는 런던친척의 편지 한 장으로 근본까지 흔들리는 형국이다. 얼핏 작은 디테일로 치부하고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이 편지 부분이 사실은 이 시의 중심에 놓인 갈  등의 구조, 즉 도시와 시골의 갈등구조를 드러내는 셈이다. 이 갈등의 씨앗은 사실상 이 시의 배태기에 친척의 빛을 보증한다는 형태로 이미 뿌려져 있었던 것이고, 빚보증이라는 이 모티프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사실은 다름 아닌 마이클  의 심리상태 혹은 경제행태이다. 이사벨과 루크 그리고 동네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이클의 마음 또한 시골과 도시로 갈라져있었다는 사실이다. 런던에 잘나가는 상인친척이 있음을 이사벨에게 알리는 마이클의 자랑스러워하는 듯한 태도  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도 조카의 빚보증을 서주었다고 하는 사실이 마이클의 심리상태 및 경제적 태도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조카의 빚을 대신 갚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마이클이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문맥상 자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빚보증제도에 대한 무지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치워버리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빚을 진다고 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마이클은 땅을 담보로 하여 돈을 빌려 쓴 조상들의 후손으로서 바로 그 땅의 담보상태를 벗기기 위해서 40세가 될때까지 허리가 휘어질 만큼 일하며 산 사람이고, 결국은 조상들이 빌려 쓴 돈을  대신 갚음으로써 진정한 경제적 독립을 이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상들이 땅을 담보로 하여 돈을 빌려 썼고 마이클이 그 빚을 대신 갚았다는 사실은, 조카가 마이클의 땅을 담보로 하여 돈을 빌려 썼고 그 사실에 동의한 죄로(즉, 빚보  증을 서준 죄로) 마이클이 그 빚을 대신 갚아야 한다는 사실과 불과 한 걸음의 차이밖에 없는 거의 대동소이한 사실이다. 상황이 이러하느니 만큼, 마이클이 목자의 일과 농사일 외에 다른 것은 다 모른다고 해도 최소한 (은행)빚 및 그와  관련된 보증제도에 대해서는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이클은 왜 빚보증을 서준 것인가? 여러 가지 답변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작품에 드러난 사실들로 미루어 크게 두 가지 답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하나는 미래의 이해관계와 관련하여 도시친척들과 좋은 관계를 구축하고 싶  어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고, 또 하나는 도시상인의 경제력과 지속적 번영이라고 하는 점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런던친척의 편지로 인한 마이클과 그의 가족들의 태도의 변화로 볼 때, 그리고 아들 루크를 즉시  런던으로 보낸 점으로 볼 때, 특히 두 번째 답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정답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엎사이드(upwards)만 있고 다운사이드(downwards)는 없는 것이 도시상인의 경제세계라고 마이클은 믿은 것이다. 마이클의 이러한 믿음  은 당시 영국의 사회적 분위기 및 영국인들의 심리적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18세기 초 런던은 해외무역의 성장과 함께 상인층의 분화가 가속화되고 있었다. 무역상인도 지역과 상품에 따라 전문화되었고, 또 무역거래와 관련된 다양한 금융업종이 새롭게 나타났다. 무역상인과 직접 거래하는 도매상도 상품별로 특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 . 18세기 초 런던의 인구가 급증한 것은 자연증가보다는 다른 지역 사람들의 유입에 따른 결과였다. 외부 사람들이 런던으로 몰려든 것은 무엇보다도 런던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소년과 젊은이들은 견습생활을 하기 위해 런던에 들어왔다. 런던은 여러 직종과 영업에서 도제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곳, 말하자면 야망을 품고 도시로 몰려든 젊은이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다 . . . 16세기만 하더라도 이 젊은이들 가운데 부모가 시골의 농민인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점차 줄어들었고, 시골출신이라 하더라도 부농yeoman이나 젠트리, 그리고 도시출신은 전문직 종사자나 상인을 부모로 둔 젊은이가 대다수였다. 이것은 런던 상인직종의 견습료가 만만치 않게 올랐던 데서 비롯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승은 바로 상업에 대한 동시대 사람들의 평가가 높아졌음을 반영한다. (이영석 211)

    “루크가 시골에 머문다면,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모두가 가난한 곳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252-54)라는 마이클의 질문의 이면에는, 런던은 부가 누적되어 있는 곳이며 야망을 품은 젊은이들의 기회의 땅이라고 하는 동시대사람들의 생각이 존재한다. 도시에 대한 동시대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을 공유했기때문에 마이클은 번영의 길로 들어섰다고 판단되는 조카의 빚을 보증했던 것이고, 돈이 필요했을 때 자신의 아들 루크를 런던으로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마이클처럼 자기가 처한 현실을 긍정하며 열심히 살아간다고 해서 전혀 다른 또 다른 생활에 대해 반드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이클은 오히려 시골에서의 목자와 농부의 삶에 충실하면서도 도시와의 연계도 소홀  히 하지 않는 경제적으로 열린 생활의 자세를 유지해 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어쩌면 시골에서의 생산의 규모를 키워“시티”에 물자를 공급한다는 꿈을 키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8 그러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시티에서 상업활동을 하는 친척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고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에 빚보증을 해달라고 하는 도시친척의 청을 수락했을 수도 있다. 사실상 이 작품의 시대적배경이 되고 있는 18세기 후반에는“런던 상인직종의 견습료”가 만만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먹자마자 거의 즉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아들 루크를 런던 상인의 도제로 보낼 수 있다고 하는 사실 자체가 마이클의 경제적으로 열린 생활의 자세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런던상인이라고 하는 친척으로부터 편지가 날아왔을 때 마이클 가족과 마을사람들이 보여준 행동은 이 시에 재현된 가장 다이내믹한 사람 사는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이사벨, 루크, 마이클, 그리고 마을사람들까지 모두 하나같이 런던 혹은 도시라는 현실에 접하자마자 즉각적으로 도시를 경외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도시와 농촌의 전쟁이라고 하는 이 시의 중심 갈등은 이처럼 도시의 탐욕과 시골의 저항이라고 하는 단순한 대립구조가 아니라 도시의 탐욕  과 도시의 경제적 가능성에 대한 시골의 환상이라고 하는 묘한 연대관계의 외양을 견지한다.

    그러나 시인 워즈워드는, 런던 상인계급의 번영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리처드베이트만이라는 신화적 인물의 역사적 실재에도 불구하고, 시골사람들이 도시에 대해 가지는 환상은 환상일 뿐임을 확인해준다. 무엇보다도, 런던에 도착한  루크의 행적을 단 몇 줄로 요약된 실패의 스토리로 처리해 버린다. 이 경우 루크의 실패는 곧 마이클의 실패이며 마이클의 실패는 도시와 시골의 싸움에서 시골이 일방적으로 패배했음을 시사한다. 어이없을 만큼 쉬웠던 마이클의 삶의 혹  은 전원의 삶의 패배의 스토리의 전 과정을 통해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마이클 스스로가 최소한 경제심리적 측면에서 이중의 가치관을 지녔었다는 사실이며 그로 인해 그가 더욱 쉽게 패배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영국의 산업화, 도시화, 상업화, 금융화로 인해 시골의 전원의 삶이 잠식되는 문제는 시인 워즈워드에게 중요한 문제였지 마이클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워즈워드에게는 영국의 산업화, 도시화 등의 문제  가 저지해야 할 악의 현상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마이클을 비롯한 그의 가족 그리고 동네사람들에게는 닿을 수 없음을 알기에 아예 꿈도 꾸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망의 대상인 꿈의 기회인 것이다. 루크가 부재하는  상황에서“시인이 마이클의 진정한 상속인이다”라고 하는 제프리 하트만(Geoffrey Hartman)의 주장은(262) 자칫 독자들을 오도하여 시인과 마이클 사이에 비판적 거리가 없다는 식의 잘못된 해석을 하게 할 수 있다. 워즈워드가 마이클에게“자아투자(ego-investment)”를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과 마이클 사이에는 사안에 따라 미묘하지만 나름의 비판적 거리가 유지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시인화자가 애초에 목자들(마이클포함)을 언급하며 그들을 사랑한 것은“그들 때문이기(for their own sake) 보다는 그들의 직업과 거주지가 있는 들판과 언덕 때문”(24-26)이라고 구태여 단서를 붙인 것이 반드시 이러한 연유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해도, 시인 워즈워드와 목자 마이클 사이에 어느 정도의 거리를 상정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으로 이 시와 관련해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경제 관련 핵심 사안에 대한 해설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이슈 중 에 양우리의 문제가 있다. 이 시에서 양우리의 역할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  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만은 부인하기 힘들다. 이 시의 시작과 끝에 양우리 혹은 양우리의 흔적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루크가 도시로 떠나기 직전 마이클과 루크 사이의 긴 대화도 바로 이 양우리터에서 이  루어지기 때문이다. 도로시 워즈워드(Dorothy Wordsworth)의『그라스미어 일기』(Grasmere Journal) 중에서 이 시의 탄생과 관련된 1800년대 후반의 기록을 보아도 그린헤드계곡 옆의 양우리라고 하는 것이 이 시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알 수 있다.

    양우리라고 하는 문학적 기제는 그 성격상 풍부한 기독교적 해석의 가능성을 약속하는 것이긴 하지만, 레빈슨이 말하는“아케다(The Akedah)”라고 하는 기독교의 모티프는 마이클과 루크의 경우에는 잘 적용되지 않는 듯하다. 물론 마이클과 루크의 이야기에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the“sacrifice of Isaac” story) 즉 아케다를 떠올리는 면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717). 그러나 레빈슨의 지나치게 복잡한 논리 자체가 사실상 두 이야기 사이에 비슷한 면 보다는 그렇지 않은 면이 훨씬 더 많음을 시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양우리라는 이 문학적 기제에서 구태여 기독교적 의미를 찾아본다고 한다면, “아케다”보다는 오히려 목자와 어린 양을 연상시키는 것으로서 그 상황 속에 진한 아이러니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마이클은, 목자라는 직업으로 보아도, 아버지라는 위치로 보아도, 늑대와 하이에나로 가득한 위험한 세상으로부터 어린 양 루크를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존재하지도 않는 양우리에 대한 약속만으로 그를 가정 밖으로 내몰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마이클이 처한 역사적 현실과 신체적 현실(그는 이미 84세 라는 고령의 나이이다)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의사결정이었다고 할지라도, 루크가 아직은 목자/아버지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연약한 영혼임을 부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양우리라고 하는 이 문학적 기제는 경제적 기회의 땅이라고 하는 도시(런던)의 신화에 영합하여 위험하기 짝이 없는 빚보증을 서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시점에 이르러 다시 비슷한 오류(돈벌이의 목적으로 아들을 도시로 보냄)를 범하는 주인공 마이클에 대한 워즈워드식의 일침인 셈이다.

    이 양우리가 끝까지 미완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이클」이라는 시적 텍스트에서 양우리는 애시 당초 존재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 원인이 루크의 약속불이행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사실은 19세기 영국의 역사적 현실로도, 워즈워드의 작품구상의 방향으로도, 그 어느 면으로 보아도 마이클의 개인 양우리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약속만 있을 뿐 실현되지 않는 명목상의 존재일 뿐인 이 양우리라는 문학적 기제를 통해 시인은 우리에게 현실이 허락하지 않는 이상의 아픔과 허무함을 전달한다. 마치, “목가시”라는 부제에 함의된 전원의 이상향에 대한 약속이 약속일 뿐 실현되지 않음으로써 우리 독자의 마음속을 떠나지 않는 실재(haunting reality) 특유의 갈망을 남기는 것처럼, 마이클의 양우리도 실현될 수 없는 약속으로서 마이클에게도 마을사람들 에게도 그리고 독자에게도 사라져가는 영국의 전원의 삶에 대한 깊은 갈망을 남긴다. 시인이 19세기 영국의 경제사회적 현실에서 산업화, 도시화, 상업화, 금융화라는 거대한 흐름을 느꼈고 그 흐름을 저지하고 싶었다고 한다면, 또 한편으로 그는 그러한 자신의 열망이 실현될 수 없는 이상임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이 작품에서 표출하고 있는 인물이나 사건의 동향을 통해 느낄 수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마이클」이후 워즈워드는 점진적으로 잉글랜드의 경제/사회의 현황이라고 하는 당면한 문제에서 벗어나 보다 심미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를 다루는 쪽으로 방향전환 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 볼 수 있다.9

    3이와 관련하여, 1801년에 당대의 위대한 진보주의적 정치가라고 하는 찰스 폭스(Charles Fox)에게 보낸 워즈워드의 편지와 이 시와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Majorie Levinson, Susan Eilenberg, 등이 다룬 바 있다.   4이후 인용되는 워즈워드의 시구는 모두 동일한 책에서 인용한 것이며, 인용문 뒤에 해당 행의 숫자만 기록할 것임.   5마크 존스는, “워즈워드가 이 시에서 일하는 능력을 항상 과장한다”고 하며“마이클 에게는 평범한 것이 전혀 없다. 마이클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루크는 제외함)은 실제보다 크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1101).   6워즈워드가 이 시에서“노동을 감상적으로 다룬다”고 하는 패터슨(Annabel Patterson)의 주장을 문제 삼는 존스는 이 시가 노동을 다루는 모습 속에는 아이러니와 휴머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존스는 루크가 노동으로만 일관된 시골의 삶을 떠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든다(1102).   7이후 감상적이며 거의 비장하기까지 한 양우리의 장면에서도 마이클은“지난 2주 동안 너의 가슴은 많은 희망으로 벅차게 뛰었다”(397-98)고 말하며 도시라는 희망에 부푼 아들의 모습을 잠시 주목한다.   818세기 전반에 잉글랜드 전역을 둘러 본 경험을 기록한『영국기행』(A Tour Through the Whole Island of Great Britain)에서 다니엘 드포(Daniel Defoe)는 잉글랜드라고 하는 왕국 전체가 시티에 물자를 공급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며 이 경우 물자란“곡물, 육류, 어류, 버터, 치즈, 소금, 목재, 의류 등이다”고 밝힌다(41). 마이클의 경우, 최소한 곡물과 육류와 치즈 그리고 양모 정도는 공급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III

    워드를 닮았다고 말할 수 있는 마이클 같은 인물조차도 영국의 산업화, 도시화의 물결에 휩쓸려 런던 쪽으로 일부나마 마음이 쏠려 있다고 하는 것이, 워즈워드가 본 19세기 초의 영국 농촌의 현실일 수 있다. 워즈워드의 초기 시 중에서  「마이클」이 특별히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심리적 통찰 때문이다. 마이클은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수준의 경제/사회적 변화의 시기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영국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믿고 고수하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당대의 경제/사회적 변화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선망하는 또 다른 심리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인차원에서 노정되는 이러한 복합적 심리현상이 이 시를 특별히 흥미로운 문학텍스트로 만들어주고 있으며, 워즈워드가 거시적인 사회의 흐름뿐만 아니라 인간심리의 흐름 또한 정교하게 포착해내는 능력을 지닌 시인이었음을 드러낸다. 특별히 이러한 부분을 중시하여 표출한 것이 아니고 도시와 농촌의 갈등이라고 하는 큰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잠시 들어간것이라고 하더라도, 마이클과 그의 가족 그리고 마을사람들의 행동양식의 표출은 인간의 심리적 현실을 보다 전체적으로 그리고 완성도 있게 그려낸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마이클이라는 인물이 우리 독자들에게 특별히 더 호소력 있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위에서 지적한 바 있듯이 마이클과 워즈워드가 그 가치관이나 심리적 동향에 있어서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이클이라는 인물에 투영  된 워즈워드의 중요한 갈망이 있다고 본다. 폭스에게 보낸 편지는 물론이고 도로시의『그라스미어 일기』나 워즈워드의 시「그라스미어의 우리집」“( Home at Grasmere”), 그리고 워즈워드 전기 등을 통해서도, “독립가정의 가족애”라고 하는 것은 워즈워드나 도로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10 도로시와 함께 소위 독립가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이루었을 때 워즈워드가 비로소 안정을 찾았고 그의 창조적 에너지가 발현된 사실을 보아도 독립가정이라고 하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지녔는지 알 수 있다.

    가족애를 동반하는 독립가정의 가능성은 또한 경제적 방편이 뒷받침되었을때에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하는 것은 워즈워드의 전기를 통해 여실히 드러나는 사실이다. 1795년의 레이슬리 캘버트(Raisley Calvert)의 유산 덕에 워즈워드가 비로소 경제적으로 독립한 사람이 되며, 1803년 8월에 조지 보몽(George Beaumont)으로부터 땅을 선물 받음으로써 자유보유권자가 되어“선거권을 부여받는다(enfranchised)”(Heizelman 581). 특별히 캘버트의 유산은 일찍 부모를 여읜 워즈워드와 도로시에게 거의 생애 최초로 독립가정이라고 하는 것을 꿈꿔보게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후, 더브 오두막(Dove Cottage), 라이덜 마운트(Rydal Mount) 등에서의 워즈워드와 그의 가족의 삶은 나름대로 경제적 안정을 이룬 영국전원에서의 낭만적 독립가정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연유로, 워즈워드가 특별히 맹렬하게 긍정의 에너지를 발산하며, 자유보유권자라고 하는 사회적 지위를 가진 마이클이 자신의 가정을 경제적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모습과 가족들을 사랑하는 전원에서의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고 여겨진 다. 즉, 독립가정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보유권자 마이클의 경제적 관념이나 행태 그리고 가족애라는 점에 있어서, 마이클은 워즈워드의 분신(alterego)이다.

    19세기 초 영국사회에서 경제적 기반이 없는 독립가정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라는 의미에서, 마이클의 경제적 기반 혹은 땅은 곧 마이클의 가정을 의미한다. 마이클의 땅의 소유권에 이상이 왔다는 사실은 마이클의 가정에 이상이 왔음을  뜻한다. 루크를 도시로 보내 돈을 벌게 하겠다는 마이클의 계획은 적어도 워즈워드의 입장에서는 미래지향적 계획이 아니라 삶의 기반이 흔들림으로 인해 심약해진 인간의 병적 징후이다. 이런 의미에서, 루크의 탈선은 마이클 가정의 파  탄의 원인이 아니라 마이클 가정의 파탄의 결과이다. 루크를 도시로 보내는 시점에서 부재하는 양우리를 실재하도록 만들겠다는 마이클의 제안은 무엇보다도 이미 파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마이클 가정의 재건을 상징한다. 또한, 이제  곧 가정이라는 구체적 안식처를 상실하게 될 루크의 입장에서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안식처를 가지도록 하자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워즈워드는 이 양우리가 실재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 그린헤드계곡 옆에는 사실상 양우리가 있었다  고 하며 이 양우리가 마이클의 실재하지 않는 양우리의 역사적 모델이 되고 있기 때문에『( 그라스미어 일기』10월 11일, 10월 21일, 11월 9일, 11월 11일 분 참조), 마이클의 양우리를 건축하지 않기로 한 워즈워드의 작품 기획은 더욱 의미있게 다가오는 듯하다. 워즈워드가 느끼기에도 마이클 식의 목가적 삶은, 고전 목가시에 재현된 목자들의 이상적인 삶만큼이나, 죽어가는 장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인 천 대>

    9잉글랜드 경제/사회의 문제를 시의 소재로 다루며 이 분야의 변화를 추구하던 워즈워드의 초기시가 1800년을 분기점으로 하여 사회비판적 성향을 벗어난다는 점에 대해서는 비평가들이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듯하다.   10폭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독립가정의 가족애”라고 하는 개념이 당시 영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워즈워드의 비판의 핵심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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