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analysis of character structure of the 1970’s korean historical film

1970년대 사극영화의 인물구조분석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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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e korean film falls into a serious crisis in the 1970s. For strengthening of film censorship and the 4th amendment of film, studios are restructuring. To focus public attention on TV movies also are the cause of the korean film crisis. To overcome these external pressures and to construct self-identity, the korean film attempt to secure. Korean film in the 1970s can be regarded as two respects. First, because of censorship and control, this film ranks as dark shrunken. In fact, the number of films in the 1970s is relatively small compared to the 1960s. Moderated by established film-makers need reporting to the licensing conditions to the shift was much more difficult. In addition, the strengthening of censorship because the film productions has been the loss of enthusiasm. Second, the state wants to make films are evaluated as time. Film industry to foster competition has attracted various countries. Corresponding to the regime’s policy stance on the film was only the massive support. Therefore, it was made a lot of anti-Communisim movies and Saemaeul movies. Who revolt against authority of the national policy makes teenager-movies and hostess movies. In both cases, the cause of the stagnation of the 1970s films looking for outside. But we look to know that there are internal factors. There is always been censorship. But the korean film will not surrender to these external problems, through internalizing and the Korean satire kept its own identity and has been developing pay. Since announcement of the Yoosin constitutional law, other genres in the way of the culture and arts direct or indirect way, has created a logical response. But the film genre seems only conformist attitude, or to escape from the fundamental cause of the problems. Through analysis of the internal structure of the 1970s film, the problems of the 1970s film could be examined.


    70년대로 들어서면서 한국의 영화산업은 심각한 위기에 빠진다. 박정희 정권의 검열강화와 제4차 개정영화법으로 인한 영화사들의 구조 개편 그리고 TV로 집중되는 대중들의 선호매체의 변화는 영화산업을 외적으로 압박하는 요인이었다. 이러한 외부적 압력을 극복하고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한국의 영화계는 새로운 시도를 해야만 했다. 70년대 한국영화에 대한 평가는 대략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정권의 심한 검열과 통제로 인해 영화제작이 위축된 암흑기로 판단하는 경우이다. 실제로 70년대 영화 작품 수는 60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 한국영화가 침체가 된 것은 영화제작사 설립이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바뀌면서 허가조건이 훨씬 까다로워졌고 또한 시나리오의 사전 검열과 공연 취체가 강화되어 작품제작 의욕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또 다른 하나는 박정희 정권이 영화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각종 시상대회를 유치하거나 신설하고 정권의 정책기조에 일치하는 영화제작에 대해서만 대대적인 지원을 함으로써 반공영화나 새마을영화와 같은 국가홍보영화가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보는 경우이다. 이러한 정책에 반하는 이들은 소위 하이틴 영화나 호스티스 영화와 같은 새로운 장르적 모색을 돌파구로 삼았다. 두 가지 경우 모두 70년대 한국영화의 침체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 있다. 박정희 정권의 강압과 통제 그리고 외화수입권을 따내려는 국내영화사들의 어쩔 수 없이 국책영화 제작에 참여해야 하는 영화산업의 구조를 원인으로 삼는다. 그러나 작품을 잘 살펴보면 단순히 외부적 요인으로 치부해버릴 수 없는 내적요인들이 존재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를 위협하는 대중매체의 변화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검열과 취체를 통한 압박과 통제 역시 처음 영화가 우리나라에 수용된 이후 지속적으로 존재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문제에도 굴하지 않고 한국영화는 특유의 내면화와 풍자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고 발전시켜 왔다. 유신헌법발표이후 여타 문화예술 장르들이 때로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또는 간접적 방식으로 대응논리를 만들어내고 이를 운동의 차원으로 이끌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장르만은 정권에 순응적 태도만을 보이거나 문제의 본원으로부터 도피하는 행태를 보인다. 1970년대 사극영화의 내적 구조분석을 통해 당시 영화가 지니고 있던 내적모순을 살펴보고자 한다.

  • KEYWORD

    the 1970s , Korean historical film , Korean film identity , the film industry , national policy film

  • 1. 시작하는 말

    박정희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해주기 위해 노력하던 60년대 사극영화는 70년대 들어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면서 크게 변모한다. 60년대 사극영화는 왕의 나약함을 부각시켜 낡은 권력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가하려했고, 다른 한편으로 여성과 자녀의 역할을 강조함으로 가정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를 부각시키려했다. 70년대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은 낡은 정권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정권의 정당성이 어느 정도 확보되었다는 판단 하에 영화를 비롯한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통제의 수위를 한층 강화한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영화사들은 자사의 존립과 수익을 위해 정권의 요구에 부합하는 과도한 행동을 취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태도는 1972년 유신헌법이 발효되면서 그 정도를 더해간다. 70년대 사극영화는 남성중심의 가족주의를 강화시키면서 여성과 자녀들의 가장에 대한 충실한 조력을 시대적 미덕으로 표방하기 시작한다.

    유신헌법의 공식적인 선언1)은 1972년 10월 17일이지만, 이미 70년도 초반부터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 구도는 구체적으로 구상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기운을 감지한 영화계는 빠르게 정권의 입맛에 맞는 작품들을 구상하고 제작하기 시작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이 그리고 있는 절대적 권력구상에 맞추어 적합한 역사적인 인물을 선별하기 시작한다. 조선시대 왕의 이미지가 박정희와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영화계는 사극영화제작에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그러나 60년대 후반부터 안방을 점령해온 새로운 문화매체인 TV로 인해 영화는 점차 외면되기 시작하고 영화계의 위기감은 증대된다.

    70년대로 들어서면서 영화산업은 심각한 위기에 빠진다. 박정희 정권의 검열강화와 제4차 개정영화법으로 인한 영화사들의 구조 개편 그리고 TV로 집중되는 대중들의 선호매체의 변화는 영화산업을 외적으로 압박하는 요인이었다. 이러한 외부적 압력을 극복하고 한국영화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영화계는 새로운 시도를 해야만 했다.

    70년대 한국영화에 대한 평가는 대략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정권의 심한 검열과 통제로 인해 영화제작이 위축된 암흑기로 판단하는 경우이다. 실제로 70년대 영화 작품 수는 60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 한국영화가 침체가 된 것은 영화제작사 설립이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바뀌면서 허가조건이 훨씬 까다로워졌고 또한 시나리오의 사전 검열과 공연 취체가 강화되어 작품제작 의욕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또 다른 하나는 박정희 정권이 영화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각종 시상대회를 유치하거나 신설하고 정권의 정책기조에 일치하는 영화제작에 대해서만 대대적인 지원을 함으로써 반공영화나 새마을영화와 같은 국가홍보영화가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보는 경우이다. 이러한 정책에 반하는 이들은 소위 하이틴 영화나 호스티스 영화와 같은 새로운 장르적 모색을 돌파구로 삼았다.

    위의 두 가지 경우 모두 70년대 한국영화의 침체 원인2)을 외부에서 찾고 있다. 박정희 정권의 강압과 통제 그리고 외화수입권을 따내려는 국내영화사들의 어쩔 수 없이 국책영화 제작에 참여해야 하는 영화산업의 구조를 원인으로 삼는다. 그러나 작품을 잘 살펴보면 단순히 외부적 요인으로 치부해버릴 수 없는 내적 요인들이 존재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본 연구는 70년대 한국영화의 침체요인을 내적구조에서 찾아보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영화를 위협하는 대중매체의 변화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검열과 취체를 통한 압박과 통제 역시 처음 영화가 우리나라에 수용된 이후 지속적으로 존재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문제에도 굴하지 않고 한국영화는 특유의 내면화와 풍자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고 발전시켜 왔다. 또한 문학이나 연극 등의 타 예술장르와 비교해볼 때, 한국영화의 침체원인을 외부로만 돌리는 것은 비겁하고 옹색한 변명일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든다. 연극을 예로들면, 70년대 연극은 이순신을 다루면서 박정희 정권의 요구를 전적으로 따르는 〈성웅 이순신〉이 등장했는가 하면, 동일한 소재로 대항담론3)을 형성하기위해 〈구리 이순신〉을 발표하면서 연극의 새로운 운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유신헌법 발표이후 여타 문화예술 장르들이 때로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또는 간접적 방식으로 대응논리를 만들어내고 이를 운동의 차원으로 이끌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장르만은 정권에 순응적 태도만을 보이거나 문제의 본원으로부터 도피하는 행태를 보인다.

    타협과 순응 그리고 정체성과 미학 사이에서 70년대를 서둘러 지나온 영화감독들에게 유신헌법과 제4차 개정영화법은 수치심과 갈등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도 있다. 70년대 한국영화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거나 대충 지나치기를 원했던 이들에게 박정희 정권의 통제와 압박이라는 카드는 한국영화 침체에 대한 원죄를 일괄적으로 사면시키는 효과까지 지니고 있다. 이것은 마치 3,40년대 한국영화 영화의 모순을 일본제국주의 정권에게 모두 뒤집어씌우는 것과 동일한 방식이다. 해방이 되자 모든 이들이 하루아침에 민족주의자나 독립투사로 변신한 것은 90년대로 넘어서자 모두가 마치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나 독재항거자로 위장하는 태도와 유사한 행태이다. 군부독재 하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변명은 그 시기에 저항논리와 대항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희생했던 이들의 수고를 모독하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70년대 한국영화의 구조적 모순과 한계에 관하여 황혜진4)은 ‘공식적 담론과 비공식적 담론’으로 풀어간다. 또한 권은선5)은 ‘박정희 정권의 지배담론과 이에 배제되는 생명의 대립구도’ 속에서 70년대 한국영화를 전개한다. 그러나 정중헌은 그의 논문6)에서 1,341편의 영화가 제작된 것을 볼 때, 70년대를 한국영화의 침체기로만 볼 수 없다는 관점에서 논의를 전개한다. 정중헌은 연구를 통해 70년대 한국영화의 침체는 정책에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식부재와 역량의 미숙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김남석7)은 문예영화의 시나리오 분석을 통해 형식미학의 발전과 작가의식의 한계를 연구했다. 이것은 1960년대 문예영화 시나리오 분석8)에 이은 연구로 한국영화의 시대적 모순과 한계를 외부에서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살펴보려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6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사극영화9)와 비교하기 위해 70년대 사극영화10)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려 한다. 대부분의 사극영화는 인물의 캐릭터와 인물상호간의 갈등구도가 명확하다. 표현하려는 주제에 대한 작가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등장하는 인물 역시 캐릭터가 선명한 편이다. 문제는 역사적 인물이 실명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반영한다는 점이다. 때때로 사극영화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투영하기도 한다.

    따라서 70년대 사극영화를 분석하기 위해 시대적 배경과 인물을 분명하게 명시한 작품을 연구대상으로 한정한다. 시대를 간접적으로 반영하는 작품11)들은 정사(正史)보다는 주로 야사(野史)를 기초 자료로 사용한다. 따라서 인물의 캐릭터가 명료하지 않고 당시 시대적 상황을 먼 배경[遠景]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는 60년대 사극영화가 지녔던 특성 중의 하나인 풍자와 해학을 직설적으로 반영시킬 수 있다. 그러나 70년대 상황에서 실명이 거론되고 분명한 역사적 캐릭터를 지니고 있는 인물을 내세울 경우 후손들이나 정권으로부터 비판과 제재를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해학성을 가미하기가 쉽지 않다.

    정권의 욕구를 반영한 회유와 검열 그리고 사극장르가 지니고 있는 미학적 특성과 해학성이 적나라하게 교차하는 정사를 소재로 한 사극영화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려 한다. 어떤 장르보다 작가의 고민과 한계가 보다 명확하게 담겨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70년대 흥행했던 ‘세조’, ‘세종’, ‘이율곡’,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12)에 연구범위를 한정하려 한다.

    1)박정희는 민족의 지상과제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뒷받침하기 위해 낡은 정치체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유신헌법의 당위성을 피력한다. 동시에 국가긴급권을 발동하여 국회를 해산시키고 모든 정치활동과 집회를 금지하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  2)70년대 한국영화의 침체 요인에 관하여, 강소원, 「70년대 한국영화라는 전장에서, 하길종」, 『관점21』 8권, 2001, 164-167쪽에 잘 정리되어 있다.  3)윤진현, 「1970년대 역사 소재극에 나타난 담론투쟁 양상」, 『민족문학사연구』 26집, 2004 참조.  4)황혜진, 「1970년대 유신체제기의 한국영화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3.  5)권은선, 「1970년대 한국영화 연구–생체정치, 질병, 히스테리를 중심으로」,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6)정중헌, 「1970년대 한국영화사 연구–유신체제기를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7)김남석, 「1970년대 문예영화 시나리오 형식 미학 연구」, 『한국문학연구』 3호, 2002.  8)김남석, 「1960년대 문예영화 시나리오의 각색 과정과 영상 미학 연구」, 『민족문화연구』 37호, 2002.  9)이정배, 「1960년대 영화의 검열 내면화 연구」, 「드라마 연구」 32집, 2010 참조.  10)이를 위해 이현경, 「1970, 80년대 한국 사극영화의 정치학」, 『국제어문』 43집, 2008, 361-388쪽과 유지나, 「영화와 국가, 중층적 의미작용에 관한 고찰–70년대 사극과 한국영화 르네상스시대 대중영화들을 통과하며」, 『영화연구』 22호, 2003, 176-186쪽을 참조. 이들 논문도 70년대 영화의 침체의 원인을 전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문화정책에 돌리고 있다.  11)야사를 중심으로 한 영화는〈향전〉(1972),〈열궁녀〉(1973),〈내시의 아내〉(1975) 등과 같은 가부장제에 대한 거부를 주제로 삼거나, 〈신검마검〉(1970), 〈홍길동〉(1976), 〈사문의승객〉 (1979) 등과 같은 무협장르로 선회한다. 이들은 70년대 후반과 80년대의 소위 호스티스 영화와 통속영화 전개의 단초가 된다.  12)주요영화는 〈세조대왕〉(1970), 〈세종대왕〉(1978), 〈율곡과 신사임당〉(1978), 〈성웅이순신〉(1971)이다. 그 외에 단종을 주제로 한 〈나를 버리시나이까〉(1971)와 이순신을 주제로 한 〈난중일기〉(1977)를 참조하였다.

    2. 왕의 재현구조

       2.1. 왕의 긍정적 이미지 구축

    일반적으로 사극영화에서 주인공은 전형성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사극영화에서 주인공은 반대자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큰 어려움을 당한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억울함과 부당함 속에서도 주인공은 숭고한 본성을 거스르지 않고 끝까지 대의를 견지한다. 때로는 대의를 위해 기꺼이 또는 어쩔 수 없이 희생을 감내한다. 여기에 탄생설화가 첨부되거나 영웅적 사건이 부연되면 영웅서사가 이루어진다.

    위대한 탄생과 무고한 모함과 고난 그리고 위대한 인물의 만남과 시련의 위대한 극복을 통해 영웅이 탄생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전형적인 영웅서사를 사극영화가 답습한다. 특히 위대한 역사적인 인물을 다룰 때 영웅서사의 구조를 성실하게 차용하곤 한다. 그러나 70년대 사극영화의 주인공은 일반적 영웅서사와는 다른 특수한 서사구조를 지니고 있다.

    서사구조를 밝혀내기 위해 먼저 사극영화에 등장하는 왕의 이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60년대 사극영화에서 왕은 구세대의 표상이었다. 때로 나약하거나 부정적인 모습을 그려지기도 했다. 필연적으로 새로운 왕의 출현을 기다리게 했다. 60년대 사극영화의 이러한 구도는 5.16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위한 논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70년대 사극영화에서 왕은 긍정적 이미지만을 보여준다. 조선 역대왕들 중에서 대표적으로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세조(世祖, 1417~1468)에 대한 묘사에서도 부정성이나 잔혹성은 사라지고 그 시대를 대표하는 긍정적인 인물로 변모하고 있다.

    우선 영화 제목을 <세조대왕>으로 삼은 것부터 저의가 의심스럽다. 세조에게 ‘대왕’이란 호칭을 덧붙여 부르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일반적으로 계유정란과 왕위 찬탈, 사육신의 처형과 단종(端宗, 1441~1457)의 죽음을 이유로 세조를 연산군(燕山君, 1476~1506)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부정적 왕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70년대 사극영화들을 살펴보면, 세조를 세종과 동일한 대왕의 반열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세조는 쿠데타의 주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죽인 것에 대해 괴로워한다. 세조는 추종자들의 권면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한다. 동시에 반대파를 숙청하는 일은 개인적으로 마음이 괴롭지만 정치적으로는 정당한 일이었다고 타인의 입을 통해 강변하고 있다.

    또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세조에게 가장 비판적 인물이었던 김시습(金時習, 1435~1493)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시킴으로 세조의 이미지를 재구성한다.

    영화는 세조에 대해 가장 큰 반감을 펼쳤던 김시습을 등장시켜 세조를 긍정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영화 〈세조대왕〉은 여러 차례 세조와 김시습의 조우를 언급하고 있다. 결국 단종과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 그리고 사육신을 비롯한 180인을 위한 초혼제 법사로 김시습을 지명하고 이에 김시습이 응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극영화에서 왕은 대립된 양쪽 의견을 모두 포괄하는 위대한 인물로 묘사된다. 60년대의 사극 주인공의 이미지가 반대자에 맞서서 자신의 길을 걸었던 꿋꿋한 모습이었다면,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반대자조차 머리 숙이는 절대적 존재자로 묘사된다.

    이러한 세조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는 영화 〈세종대왕〉에서도 동일하게 구축된다.

    70년대 사극영화들은 당시 신하들이 파당을 짓고 당파의 이해득실을 위해 상대를 공격하느라 임금의 훌륭한 뜻이나 백성들의 생활에는 무관심하고 있음을 부각시킨다. 공부를 해야 하는 성균관 유생들이나 학자들까지 나서 왕을 반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한편 세종(世宗, 1397~1450) 때 주요 인물이었던 황희(黃喜, 1363~1452)나 김종서(金宗瑞, 1383~1453)의 반대를 부각시키면서 이후 계유정란을 비롯한 일련의 세조 행태에 정당성을 부과한다. 영화 〈성웅 이순신〉이나 〈율곡과 신사임당〉에서도 치욕스러운 왕으로 대표되는 선조를 긍정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신하들의 파당과 분쟁을 부각시킨다. 따라서 국가의 변란은 당쟁과 논쟁을 일삼는 신하들의 태도에 기인한다고 역설한다.

    영화는 국가의 변란이 찬반 의견을 넘어서는 왕의 넓고 깊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신하들 때문에 일어나게 되었다고 강변한다. 영화가 이러한 신하들의대립구조를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들을 포월(抱越)하고 있는 왕의 이미지는 현격하게 부각되기 마련이다.

       2.2. 평화스러운 권력이양

    70년대 사극영화가 선왕에게서 현재의 왕에게 권력이 이양되는 과정을 묘사 할 때, 한결 같이 평화스럽게 권력이 이양되는 선양(禪讓)으로 표현하고 있다. 왕권이양 과정을 묘사함에 있어 60년대 사극영화가 종종 무력에 의한 찬탈을 보여주면서 혁명의 정당성을 구사하는 것에 주력했다면, 70년대 사극영화는 무력적인 충돌 없이 민심과 하늘의 뜻에 따라 자연스럽게 권력이 이양되고 있음을 부각시킨다.

    영화는 태종(太宗, 1367~1422)이 세종에게 권력을 이양한 것은 태종에 의해 “친히” 이루어진 일이며, 이것은 역사에 길이 남을 “유신(維新)의 경사”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권력의 이동은 백성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선왕의 허락에 의해 가능해진 구도로 만든다. 영화는 세조가 왕권을 획득한 것 역시 단종의 허락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피력한다. 이러한 모습은 율곡(李珥, 1536~1584)과 같은 학자에게 관직을 내려 새롭게 권력이 주어지거나 이순신(李舜臣, 1545~1598)과 같은 무인에게 군사를 통제하는 권력이 주어질 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왕이 아닌 율곡과 이순신의 경우에는 벼슬에 뜻이 없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요구와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게 되는 상황으로 이끈다. 심지어 주인공이 왕이 아닌 경우에도 영화 속의 왕은 권력이양을 허락하는 절대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혁명의 당위성에 초점을 맞추던 60년대 사극영화와 달리 70년대 사극영화는 정권이양이 평화스러운 선양사업이었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60년대 사극영화가 쿠데타의 정당 논리 확보에 주력한 반면, 70년대 사극영화는 정권의 흐름이 당연한 귀결이었음을 강조하는데 주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신헌법에 기반을 둔 제4공화국 역시 당연한 귀결이었음을 역설하고 있다. 유신헌법에 대한 많은 반대가 있지만 그것은 다음 세대에 처벌받아 마땅한 대역죄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경고하고 있다.

    13)대영영화주식회사, 〈세조대왕〉 오리지널 시나리오, 1970. 이하 〈세조대왕〉으로 표기함.  14)우성사, 〈세종대왕〉오리지널 시나리오, 1978. 이하 〈세종대왕〉으로 표기함.  15)각본을 쓴 ‘신봉승’이 처음부터 이 단어를 사용했는지, 검열과정에서 첨부된 것인지 또는 감독인 ‘최인현’에 의해 삽입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주목할 것은 대사에 ‘유신’이란 단어가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70년대 사극영화의 모순과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16)연방영화, 〈성웅 이순신〉 오리지널시나리오, 1971. 이하 〈성웅 이순신〉으로 표기함.  17)우진필름, 〈율곡과 신사임당〉오리지널시나리오, 1978. 이하 〈율곡과 신사임당〉으로 표기함

    3. 여성의 역할과 구도

       3.1. 정치적 무관심

    70년대 들어 사극영화에서 여성의 이미지와 역할이 크게 급부상한다. 60년대 사극영화에서 여성이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를 변모시키기 위한 대응기재로 작용했다면, 70년대 사극영화에서 여성은 남성 주인공의 역할을 도와주는 핵심 조력자로 부각된다. 왕을 주인공으로 하는 사극영화의 경우에 왕비는 왕을 보필하는 절대적 인물로 등장하고, 주인공이 왕이 아닌 일반인일 경우 부인은 주인공을 대신해서 가정의 모든 문제를 도맡아 해결하는 배후인물로 등장한다. 여성은 특히 남자 주인공을 대신하여 부모를 모시고 섬기는 일을 불평 없이 잘수행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따라서 여성 인물은 남자 주인공이 효자라는 명성을 얻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철저하게 내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정치문제 있어서만큼은 주인공의 부인이 철저하게 관여하지 않는다. 간혹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의 부족한 면에 대해서도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기보다는 묵묵히 지켜보거나 기다리는 태도를 견지한다.

    역사적 사료에 근거하여 볼 때, ‘정희왕후 윤비(貞熹王后, 1418~1483)’는 김종서를 제거하도록 세조를 독려했으며 세조가 물러난 후에 신숙주(申叔舟, 1417~1475), 한명회(韓明澮, 1415~1487)와 더불어 예종(睿宗, 1450~1469)과 성종(成宗, 1457~1494)시기 동안 섭정을 펼쳤던 대단히 정치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사극영화에 반영된 그녀의 이미지는 감히 세조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조용히 눈물 흘리며 기다리는 조신한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다. 오히려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된,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 송비(定順王后, 1440~1521)’를 강하고 당찬 여성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에서 ‘송비’는 수양대군에게 선위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신하들을 향해 지금 역적모의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는 태도를 보인다.

    영화 속에서 송비의 강한 어조는 윤비의 부드러운 어조와 대조를 이룬다. 외강내유의 송비에 비하여 윤비는 세조의 변화를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외유내강의 이미지를 끝까지 지켜낸다. 윤비의 관심은 정치보다는 오직 자녀들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어 전형적인 현모양처의 이미지를 구사한다.

    70년대 사극영화는 정치에 개입하여 자신의 목소리 높이는 진보적인 여성들과 정치에 무관심하지만 남편을 잘 보필하고 자녀를 잘 키우는 온건한 여성들을 정면으로 대립시켜 당시 여성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한다. 이것은 한국영화가 스스로 정치적 무관심을 표명한 것과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다. 70년대 영화는 정치지도자를 보필하면서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조국과 민족을 위한 중대한 문화적 사명으로 생각했다. 당시 영화는 정치문제를 다루는 것을 철저하게 금기시하였다. 이것은 그 후로 상당 기간 동안 지속되어 온 한국영화의 암묵적인 행태였다. 70년대로 접어들어 문학이나 연극과 같은 여타 장르의 예술과 문화가 정치문제에 개입하여 새로운 모색을 시도할 때, 한국영화는 정치적 문제에 철저하게 침묵하거나 회피하고 있었다.

       3.2. 백성의 표상으로서 여성

    70년대 사극영화에 등장하는 여성의 시선은 오로지 자녀와 남편에 머물러 있다. 경제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굳건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자녀와 남편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현모양처(賢母良妻)의 이미지를 표방하고 있다.

    율곡은 일찍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을 여의고 계모 ‘권 씨’의 손에서 자랐다. 영화 〈율곡과 신사임당〉에서 율곡은 결혼 후에도 계모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가장 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율곡의 아내인 ‘노 씨’였다. 계모의 압박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노 씨’는 묵묵히 자녀를 키워낸다. 이러한 이미지는 율곡의 어머니인 신사임당과 묘한 중첩효과를 일으킨다. “대장부는 남을 용서할지언정 용서를 비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18)며 매를 들어 율곡을 쳤던 신사임당과 달리 ‘노 씨’는 신의 어려움을 감내하며 율곡을 보필하는 헌신적인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여성의 모습은 이순신의 아내인 ‘방 씨’의 경우, 더욱 섬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없는 절대적으로 가난한 살림과 가족들을 돌보기에 턱없이 부족한 녹봉 그리고 노모와 자녀를 돌보아야하는 삼중의 어려움을 꿋꿋하게 버텨내고 있는 ‘방 씨’의 모습은 영화 곳곳에 선명하게 부각된다. 영화는 나랏일을 해야 하는 남편을 성가시게 하지 않는 것이 아내의 주된 도리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여성상은 영화〈세종대왕〉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 심비’는 70년대 정권이 요구하는 여성의 전형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 소헌왕후는 남편이 하고 있는 일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충차대한 일임을 언급하면서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어 오히려 마음에 걸린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녀의 고백에 대해 세종은 자녀를 잘 키우고 가정의 대소사를 잘 다스리고 있다고 응대한다. 남편을 보필하는 일이 곧 국가와 백성을 위하는 일이며 존경받을 일이라고 한다.

    이것은 외형적으로 군사력이 강한 국가를 만들고 내적으로 경제발전을 이루겠다는 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지향하려던 목표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국가의 지도자인 대통령이 남성적인 강한 구심력을 발휘할 때, 국민은 상대적으로 여성적인 태도를 취함으로 지도자에게 힘을 더해주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지도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태도이고 민족의 열망을 거역하는 부도덕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 70년대 국민의 표상으로 등장하는 신사임당과 당시 대통령의 부인인 육영수가 중첩되어 연상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18)〈율곡과 신사임당〉, #14.

    4. 백성의 지지 기반구축

       4.1. 굶주림을 해결해주는 지도자

    영화 속에서 주인공의 행동에 반대하는 계층의 존재에 대해 무시해도 될 만큼 강력하게 주인공을 지지해주는 여성 외에 또 다른 인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백성들이다. 신하들 모두가 주인공을 비난해도 사극영화 속의 백성들은 주인공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주인공을 둘러싼 여성과 자녀가 직간접적으로 주인공을 지지해주고 있다면, 백성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주인공을 지지해준다. 그러나 백성들의 지지 근거가 배고픔의 해결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지도자의 절대성은 단 하나의 오류도 발생하지 않을 때 획득된다. 영화는 세종대왕이 완벽하게 백성을 가뭄으로부터 구제했다고 기술한다. 이러한 주인공의 완벽성은 70년대 사극영화가 보여주는 공통점 중의 하나이다. 60년대 사극영화가 주로 주인공의 실수나 잘못을 일정부분 묘사하여 실수를 해결해가는 과정을 묘사하는데 주력했다면, 70년대 사극영화는 주인공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절대적 인물로 묘사하기에 이른다.

    영화는 이순신이 통제사로 있는 좌수영에는 많은 백성들이 몰려들지만, 반대로 원균(元均, 1540~1597)이 다스리고 있는 우수영은 그렇지 못하다는 간접적 표현을 통해 이순신이 백성의 지지를 절대적으로 받고 있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지지는 백의종군하는 이순신에게 보낸 백성들의 태도와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선조(宣祖, 1552~1608)의 입을 빌어서도 재현된다. 여기서 백성들의 지지의 강력한 기반은 백성들의 굶주림을 해결해주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영화는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 중에서 백성의 가난을 구제하는 것이 핵심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박정희의 리더십의 근거가 가난구제였다는 논리를 이끌어낸다.

       4.2. 백성과 지도자의 일체감

    70년대 사극영화에서 백성과 지도자의 긴밀성은 두드러진다. 지도자는 백성의 어려움을 세밀하게 헤아려 적합한 조치를 취한다. 여기서 신하들은 백성들의 고통을 무시하는 자세를 취고 있어 대립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영화를 통해 백성들의 원망은 왕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중간 계층인 군신들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70년대 사극영화의 주인공은 언제나 백성을 중심에 두고 모든 일을 행한다. 백성들의 약간의 오해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곧 문제의 근원지가 주인공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밝힌다. 나아가 주인공은 백성들의 아픔을 해소시켜주는 구원자의 모습으로 부각된다.

    70년대 사극영화에서 백성들은 왕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지 않는다. 백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 것은 군신들의 조언에 의한 것뿐이고 왕의 결정이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영화 속의 왕은 백성을 위해 늘 바르게 판단하고 있지만, 군신들의 잘못으로 인해 난처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피력한다. 영화 〈성웅 이순신〉과 〈율곡과 신사임당〉에 등장하는 선조에 경우를 보면, 왕은 율곡과 더불어 전쟁을 미리 예측하고 준비하려고 했지만 군신들의 반대가 극심하여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왜군을 피하여 수도를 등지고 북으로 간 것 역시 군신들의 권유에 의한 것이며, 이 과정에서 선조는 어쩔 수 없이 백성을 버리고 떠나야 했다고 설명한다.

    영화는 백성의 입을 통해 선조에 대한 지지가 언제나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왕은 어버이며 백성은 자식이라는 논리를 전개하면서 둘의 관계가 어떤 인간관계보다 친밀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독재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통치자와 국민의 관계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아니라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승화된다면, 정치체제가 독재냐 민주냐에 대한 논란은 사라질 것이 당시 정권의 논리였다. 70년대 사극영화는 그러한 의도에 부합되는 내적 구조와 긍정적인 지도자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생성시켜주었다.

       4.3. 백성의 뜻을 묻는 예언자적 지도자

    백성의 뜻을 일일이 헤아리는 지도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 독재자일 수 없다. 백성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만을 관철시키고 시행하는 자가 독재자이다. 70년대 사극영화를 보면 독재자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왕은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왕이 아닌 주인공도 자신의 뜻을 함부로 내두르지 않는다. 주인공은 단지 대의를 거스르는 일부 신하들에 대해서만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일어나는 비난이나 공격은 오히려 그릇된 이들을 징계하는 정당한 일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영화에 비춰지는 세종의 위대함 중의 하나는 백성들의 의견을 묻는다는 것이다. 특히 중대한 법률적인 부분에 있어 백성의 뜻을 묻고 시행을 결정하는 태도이다. 영화는 개국공신이자 청백리로 명망이 높은 허조(許稠, 1369~1439)의 입을 빌어 “수많은 백성들의 뜻을 묻는다면 개개인의 이해에 따라 이견이 속출”하기 때문에 “백해무익”하다는 의견을 개진하지만, 왕의 의도는 민본정치를 위해 “백성의 뜻을 물어 시행”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미 많은 업적을 쌓았고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세종이지만, 새로운 법을 시행하기 위해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로부터 낮은 백성들에게까지 의견을 묻고 시행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유비는 세종대왕과 박정희 그리고 유신헌법과 민본정치를 상호 중첩시키는 효과를 보인다.

    영화는 율곡의 입을 빌어 농업과 정치를 유비시킨다. 이러한 유비는 군사력 증강과 이를 통한 평화구축의 논리를 설명하고 있다. 나아가 자신 혼자만의 목소리로 관철시킬 수 없음을 피력하며 백성들의 적극적인 지지만이 가능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70년대 사극영화는 백성들과 왕의 증언을 빌어 주인공에게 절대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여타의 인물들을 연약하거나 반국가적 또는 반민족적 인물로 치부해버리고 오직 주인공만을 부각시키려 애쓴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예언자가 아님을 스스로 언급하지만 백성들이 판단하기에는 예언자적 지도자임을 강조하고 있다.

    영화는 1972년 유신헌법제정의 가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91.9%의 투표율과 91.5%의 찬성률이라는 놀라운 지지를 얻어낸 것과 관련하여 박정희가 절대적이고 유일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여당 내부에서도 반대가 있었지만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에 의해 지도자의 생각이 정당했음을 간접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5. 정리하는 말

    “작가의 이념에 부합하는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작가의 이념을 전달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손쉬운 방법”19)이라는 측면에서 영화내의 인물구조를 분석하는 것은 작품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익하다. 인물들은 개개인의 개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호관계에 의해 갈등을 발생시키며 이렇게 생성된 갈등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구체성을 확보하게 되면 사건으로 변모하게 된다. 사건은 전체 이야기의 흐름을 형성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작품에 몰입하게 하는 기재로 작용한다.

    70년대 사극영화의 인물들은 정형화되어 있다. 정형화된 이들 인물의 관계 역시 일정한 패턴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도식화하여 다음 표와 같은 모양으로 요약될 수 있다.

    위의 인물구조를 보면, 주인공을 중심으로 어떤 갈등구조도 생겨나지 않는다. 갈등은 이야기의 긴장감을 유발시켜 독자들로 하여금 몰입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다. 인물간의 갈등구조가 선명하지 않기 때문에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 단지 신하A와 B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왕의 관대함에 의해 곧 모두 매몰되고 만다. 신하A와 B는 당파를 의미하는데 왕은 당파에 의해 의견이 나뉘고 상대를 해하려는 태도는 민족과 백성들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임을 잘 알아 늘 중재자의 입장을 고수한다. 백성과 신하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 역시 왕의 전적인 개입으로 금방 평정되고만다. 모든 사극영화 속 인물들은 왕에게 초점을 두고 있으며, 영화는 왕이 그들의 전적인 지지를 받아 높은 단계로 점차 승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토록 단순화되고 집중화된 인물구도는 지루함을 낳는다. 따라서 이야기 구조를 통해서 이러한 지루함을 극복했어야 했다.

    70년대 영화의 쇠퇴는 몇 가지 내적 문제에 원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영화 내에 갈등구조가 심화되지 못했다. 주인공은 절대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몰두하면서 조연들은 주인공 1인을 철저하게 보조하는 인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영화에서 제거되거나 부각되지 않은 이들은 나약하거나 반국가적 인물들로 묘사하고 있다. 이들은 주인공과의 대립구조도 형성하지 못하고 주인공의 정신을 세워주는 보조적 역할에 충실했다.

    또한 백성을 여성으로 등치시키고 나서 여성의 표상으로 한 인물을 설정해 놓고 있다. 백성들은 왕이나 주인공에 대해지지 역할만 했다. 영화 속에는 객관적으로 영화의 긴장을 유도하거나 전체의 구조를 관찰하는 역할을 맡은 이가 없었다. 영화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거나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철저하게 배제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도 하에 영화는 주인공에 대한 과도한 신화화를 시도했다. 주인공은 종교의 후광을 받고 새로운 존재로 점차 승화되었다. 이러한 인물구도와 이야기 구도에 관객이 쉽게 설득되지 않았던 것이 70년대 사극영화 쇠퇴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인물구도를 바탕에 두고, 작품을 큰 몇 개의 시퀀스로 나누어 이야기구조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표로 정리될 수 있다.

    시퀀스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 사극영화의 서사는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진행된다. 그것은 “1) 비주류 계층 출신(서자, 몰락한 양반계급) 2) 백성의 지지로 지도자가 되다(혁명적 사건) 3) 역적들의 모함 4) 주인공의 백의종군 5) 백성의 지지에 힘입어 권위회복 6) 위대한 죽음(순교) 7) 죽음을 극복한 위대한 부활”이다.

    우리 고전의 영웅서사20)는 일정한 패턴을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전통성은 60년대 사극영화에까지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70년대 들어서면서 이러한 서사구조는 새롭게 변모하는데, 여기에는 박정희의 전기서사가 큰 기재로 작용한다. 박정희의 서사는 “1) 농민의 막내아들로 출생 2) 선양에 의한 지도자위임 3) 거역하는 자들(구세대 세력)의 출현 4) 국가를 위해 겸허한 자세로 일하다 5)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얻는 지도자 6) 국가를 위한 순교에 가까운 자기희생 7)부활처럼 얻은 영원한 생명”이다.

    박정희 전기서사와 70년대 사극영화의 서사구조를 비교하여보면, 상당부분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70년대 사극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박정희의 은유임을 입증한다. 이런 서사구조의 사극이라면 TV를 통해 보는 것이 재미라는 측면에서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TV드라마는 연속극형태를 이루어서 단절을 통한 기대심리를 자극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TV가 지닌 매체적 특성 때문에 영화가 밀려났다고 단순하게 평가할 수 없다. 이는 TV드라마의 서사구조가 영화의 서사구조보다 관객의 심리를 포섭하는데 성공적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70년대 사극영화는 검열에 대해 내면화도 하지 못하였다. 대사는 검열에 직접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작가의 의식이나 비판을 담을 수 없다. 그러나 시나리오의 내적 구조를 통해 어느 정도의 저항이 가능하다. 따라서 외부적 요인에 의해 부득불 정권에 동조하는 작품을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는 설득력을 잃는다. 70년대 사극영화의 구조를 살펴보면, 이들 작품은 정권의 행태를 적극적으로 지지할 뿐 아니라, 국민들을 호도하고 박정희 정권의 논리를 구축해주면서 나아가 정권을 신성화하는 작업에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70년대 사극영화의 영화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에 대한 비평적 연구가 별로 없다. 현재 생존하고 있어 곳곳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70년대의 사극영화에 집중했던 영화인들이 조금의 반성도 하지 않는 데에 있다. 70년대 정권옹호에 앞장섰던 감독과 작가를 독재에 항거했던 민주투사로 기술하는가 하면, 당시 자신의 작품 속에 내면화시켰다는 억지 논리를 여전히 펴고 있다. 70년대 사극영화를 살펴보면서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는 변명으로 면죄될 수 없는 심각성이 영화에 내재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19)양승국, 「한국 근대 역사극의 몇 가지 유형」, 『한국극예술연구』 제1집, 1991, 70쪽.  20)고전적인 영웅서사는 “1) 위대한 혈통(출생의 비밀) 2) 어린 시절 비범한 능력 3) 어린 시절버림받음 4) 생명 은인의 도움 5) 적대자들과의 싸움 6) 위대한 승리 7) 왕 또는 영웅으로 추대”라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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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 1] 인물구조
    인물구조
  • [표 2] 서사구조
    서사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