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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Cross-boundary Writing 탈경계적 글쓰기
  • 비영리 CC BY-NC
ABSTRACT
Cross-boundary Writing

90년대 이후 확산되고 있는 포스트모던 퍼포먼스나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그것이 기존의 드라마 중심의 연극 보다 실재(reality)를 포착하는 데에 있어 더욱 용이하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지금·이곳의 사건으로서 퍼포먼스 연극은 종래의 드라마 형식을 거부하거나 그 한계에 도전하던지 또는 전복시킴으로써 탐색되어 왔다. 무대는 공공연히 ‘작가의 죽음’을 선포하며 연출가의 실험과 도전의 영역으로 전용되었던 것이다. 이 경우, 문제는 이미지의 복제와 유희에 치우치거나 기존의 재현의 한계에 도전하여 시청각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에 몰두함으로써 현실의 문제를 외면한다는 데서 파생한다. 또한 작가의 진지한 글쓰기가 억압되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구성이 간과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를 통찰하며, 나아가 동시대의 공연 양식에 적합한 글쓰기 방식을 계발함으로써 문제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연출가와 실천가들이 임의적으로 만든 공연 텍스트가 작가의 진지한 글쓰기를 통해 완성된 문학적 텍스트를 억압하고 있다면, 그 대안은 무엇인가? 보들리야리가 주장하듯이 가상현실이 실재를 주장하는 상황에서 ‘드라마적 문학과 예술을 통합’하면서 새로운 매체를 수용한 글쓰기란 가능한가? 탈경계적 글쓰기는 글쓰기의 범주를 교란하고 끝없이 확장해가며 경계를 이탈하는 데서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탈경계적 글쓰기란 언어의 의미가 함축하듯이 범주와 형태를 규정할 수 없음으로 해서 공허한 개념으로 머무를 가능성이 다분하다. 때문에 하나의 전례를 택해 그 글쓰기의 방식을 살펴보는 것은 탈경계적 글쓰기의 실천적 사례를 통해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법하다. 다만, 하나의 텍스트에 내재하는 글쓰기의 가능성은 제한된 것이기에 포괄적인 대안으로 볼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이 글은 크림프의 <그녀의 삶에 대한 시도들>을 통해 그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서사의 방식과 구성 방식이 텔레비주얼 이미지를 내재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는 데에 착안하여 시네마토그라픽적 글쓰기의 실천 사례로 파악하였다. 분석 결과, 콜라주처럼 분절된 서사의 몽타주가 다중 장면을 구성하는 표현 가능성, 등장인물 대신 화자가 관객과 대면하여 등장인물을 구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 동시에 분열된 다중적 자아와 변신을 통한 인물 구성의 가능성, 텍스트와 무대의 분리로 인한 퍼포먼스의 표현 가능성, 인식 주체로서의 관객의 위치와 현실 문제의 내장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KEYWORD
Cross-boundary Writing , Cenematograhpic Writing , Postdramatic Theatre , Performance , Narriative , Attempts on her Life
  • 1. 유럽의 ‘새로운 글쓰기’와 마틴 크림프

    글쓰기는 현실과 그에 대한 인식을 담아내는 용기로 개인 행위에 속하지만, 그 행위는 사회와 시대에 따른 변화에 반응하여 왔다. 즉, 글쓰기는 개인 삶과 관계된 극히 개인적인 영역이나 또한 사회와 시대를 환경으로 삼아 그것에 반응하기에 자아의 정체성과 현실과의 사이에서 변증법적 관계를 형성한다. 글쓰기를 자아의 현실 인식과 그에 대한 도구로 파악할 때 서구에서 전개되어 온 글쓰기의 과정은 거칠게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글쓰기를 하나의 기법으로 본격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시기는 19세기 말로 사실주의 작가들은 근대적 세계관으로부터 각성된 개인의 정체성을 확신하였으며, 이를 글쓰기를 통해 탐색했다. 그들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겼으며, 글쓰기를 통해 이를 실천하였다. 둘째, 1, 2차 대전은 현실과 그에 대한 기존 인식의 전복적 전환을 초래한 역사적 사건으로, 개인들은 인식 가능한 총체로서의 현실을 회의하고 부정하기 시작한다. 변화해버린 현실에 대해 도전하며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를 시도한 것은 모더니즘 계열에 속한 극작가들이다. 특히 부조리 작가들은 과거로부터 떨어져 나와 변화해버린 현실에 대한 분열된 인식을 글씨기를 통해 추구하였으며, 이를 통해 형식과 내용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셋째, 1960년대 시작되어 80년대 들어 예술 일반에까지 확산되어 정착하게 된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 속에서 극작가들 역시 글쓰기의 방식을 실험한다. 정전의 해체와 패러디를 통해 그들은 텍스트의 요소를 새롭게 주목하며 텍스트를 재구성한다. 바르트, 데리다, 크리스테바의 이론에 기대어 몸성을 활성화하는 대신에 문학성을 억압하는 것도 하나의 특징적 현상이다.

    이 글이 주목하고자 하는 글쓰기의 형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을 맺으며 90년대라는 시대·사회·문화적 맥락에서 탄생한 ‘새로운 글쓰기’이다. 90년대 유럽은 구소련의 붕괴와 독일의 통독 이후 경제적 협력을 기본 방침으로 유럽통합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이 중 영국은 12년 동안 장기집권을 했던 대처수상의 신자유주의 방침 이후 노동당의 당수에서 수상에 오른 토니 블레어의 정책에 따라 연극을 시장 경제의 부분으로 포함시킨다.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젊은 작가들이 이데올로기의 붕괴를 목격하며 무력감에 빠진 것은 7, 80년대 작가들이 정치를 소재로 글을 썼던 것과는 분명히 다른 90년대의 문화의 새로운 현상이다. 대신 그들은 미시적 서사에 천착하며, 기존의 정치극의 모델을 거부하고, 세계화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에 반응한다.1) 소비 자본주의와 세계화 현상에 대해 반대하는 목청을 드높이며 연극 무대는 다시 활기를 찾았으며, 아방가르드로서 젊은 작가들은 맹렬하게 사회적 불평등, 소비주의 사회, 성차별, 폭력, 전쟁 등의 사회적 문제에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목덜미를 쥐어틀고 메시지가 나올 때까지 흔들어댄다’는 의미의 ‘도발적 연극’(in-yer-face theatre)으로 통칭되는 이들의 서사 방식은 언어와 재현의 메커니즘을 한계까지 몰아가 공공연히 합의된 사항에 도전한다. 관객의 충격을 도발하기 위해 이들이 미학적 기준으로 삼은 것은 잔혹함이다. 연출가가 아닌 작가가 공연의 권위를 지니나, 텍스트가 발현되는 현장은 공연, 특히 공연 중 퍼포먼스의 요소를 활성화시킨 순간이다.2) 언어의 수행성을 강화하며 타부를 도발해내는 점에서 ‘새로운 글쓰기’는 대중문화와 결합하는 순간에도 아방가르드적 면모를 잃지 않는다.

    헨케(Henke)와 미데케(Middeke)는 새로운 글쓰기의 가능성을 90년대 이후의 희곡 텍스트에서 발견한다. 즉, 새로운 극작가들과 실천가들은 글쓰기를 통해 “인식론적 불확실함을 반영하는 자기반조적(self-reflexive)이고 메타극적인 양식에 대한 매혹, 모호함과 여백, 파편화된 구조로 나타나는 총체성에 대한 불신, 콜라주, 생략된 형태, 패러독스, 패스티쉬, 패러디와 같이 의미를 분산시키는 기호 등의 포스트모던 예술의 특징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3) 그리고 이 가운데 “희곡의 범주를 무한정 확장시키면서 제시할 수 없는, 극도로 절망적인,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누구도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야심을 드러낸다.”4) 헨케와 미데케는 90년대 영국에서 시작되어 유럽에 확산된 ‘새로운 글쓰기’(new writing)의 핵심적 전략을 “퍼포먼스와 수행성을 찬양함으로써 기존의 관점, 관습, 경계를 초월하는5)” 것으로 파악한다. 수행성과 퍼포먼스적 요소를 활성화하기 위해 “파편적이고, 파열적이며, 본능적인, 그리하여 감각적이고 종종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효과를 선호함으로써 의미, 이해, 감정 이입, 카타르시스가 봉합되는 것을 방지”6)하는 것이 헨케와 미데케가 포착한 이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즉, 90년대 젊은 작가들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동을 일으키기 위해 서사의 수행성을 활성화시킴으로써 퍼포먼스에 가까운 이벤트를 통해 관객의 인식에 도전한다. 그 점에서 90년대 작가들이 ‘새로운 글쓰기’를 실천하여 성취한 것은 관습적 형식과 구조를 해체하고 파기함으로써 얻게 된 형식적 실험만이 아니다. 그동안 터부시되고 억압되어 온 소수와 그 주변부 현실에 대한 문제가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지에라(Sugiera)는 90년대 작가들의 실험적 글쓰기를 좀 더 세밀하게 구분한다. 즉, 그녀는 케인(Sarah Kane), 래븐힐(Mark Ravenhill), 맥도나(Martin Macdonagh)의 일련의 ‘도발적 연극’의 희곡들과 독일어권에서 90년대 후반 등장한 괴츠(Rainald Goetz), 로어(Dea Loher), 쉼멜페니히(Roland Schimmelpfennig), 옐리네크(Elfriede Jelinek) 등의 ‘포스트드라마 연극’ 계열의 희곡 사이에 명백한 경계를 긋는다. 전자가 자연주의 양식의 토대에서 수행성을 활성화함으로써 퍼포먼스적 요소를 강화했다면, 후자는 1970년대 해프닝과 퍼포먼스 아트를 계승하여 현장의 체험을 중요시 한다. 케인의 <폭파>(Blasted), <패드라의 사랑>(Phaedra's Love), 래븐힐의 <쇼핑하고 뻑킹하기>(Shopping and Fucking) 이후 <물이 (없는) 풀장>(Pool (no) Water) 사이의 그의 모든 희곡 텍스트들, 그리고 맥도나와 해로우어(Daivid Harrower)의 텍스트들은 ‘도발적 연극’의 전형에 속한다. 이들 ‘도발적 연극’의 텍스트들에서 희곡의 관습은 유지된다. 언어는 인물들의 말과 행위를 구성하며 사건을 전개한다. 반면 후자의 경우, 전통적인 희곡의 관습은 해체된 상태이다. 대신 “세상은 발화된 말에 의해 생겨나며, 말의 힘에 의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세상은 무대 위에 존재하지 않으나, 무대에서 들리며 두 번의 울음 소리와 병을 깨부수는 소음과 함께 세상은 끝난다.”7) 전자의 경우, 대사, 인물, 사건 등의 구조적인 요소들이 재현이라는 전통적 연극의 목적에 봉헌하며 동시에 수행성을 활성화하여 극적 이벤트를 만들어낸다면, 후자의 경우에는 재현을 위한 목적에서 벗어남으로써 그 같은 요소들은 그 자체로 관극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재현의 목적을 벗어버림으로써 이들 요소들은 스스로를 전시하며 관객과 직접 대면하게 된다. 드라마의 형식을 매개하지 않고 관객과 직접 대면함으로써 강화되는 것은 지금, 이곳이라는 현장성이다. 드라마를 통해 언어가 ‘지금·이곳’의 리얼리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하기에, 대사, 인물, 사건은 영화나 텔레비전, 비디오를 통해 가상현실을 만들어 내거나 조형물과 조합하여 그 영역을 확장할 수도 있다. 나아가 관객과의 상호 작용을 도발할 수도 있다. 리얼리티를 궁극적으로 인지하는 주체는 관객이기 때문이다.

    본고가 ‘새로운 글쓰기’의 작가들 중 한 예로 살펴보려는 크림프(1956-)는 80년대 ‘대처의 아이들’(Thatcher's children)로 성장하여 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류에 진입함으로써 장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90년대 중엽 이후 형성된 영국 연극의 동시대적 지형도 속에서 크림프는 다소 이질적인 존재임이 드러난다. 드롬굴(Dromgoole)은 크림프를 90년대 ‘도발적 연극’의 범주에 포함시키기 보다는 유럽 취향에 가까운 작가로 분류하며, 형식에 대해 냉정하게 자각하면서, 형식에 대해 냉정하게 자각하면서 고독과 수수께끼로 가득 찬 인물들이 살고 있는 ‘크림프랜드’(Crimpland)라는 영토를 일궈냈다고 평한다.8) 스스로도 ‘도발적 연극’의 작가로서 호명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처럼, 그의 작품 세계는 90년대에 등장한 일련의 젊은 작가들의 성향과는 차이가 있다. 20대 안팎의 젊은 작가들이 섹스, 폭력, 강간, 동성애 등의 소재를 파격적일 정도의 노골적인 언어와 행위에 담아 공공연하게 관객을 도발한다면, 그의 시선은 보다 정제되어 있고 정교한 언어의 리듬과 음악성을 탐색하면서 형식의 실험에 초점을 맞춘다. 작가로서의 경력이 20여 년에 이르고, <그녀의 삶에 관한 시도들>이 20여 개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은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씨에즈(Sierz)는 그 이유를 난해하다는 데서 찾는다. “그는 유쾌한 코미디나 소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우울한 연극, 혹은 여자와 남자에 관한 극을 쓰지 않는다. 그는 연속극이나 웨스트 엔드에서 히트를 칠만한 작품도, 대중 뮤지컬의 가사도 쓰지 않는다. 그의 극은 어렵기 그지없다. 그의 작품들은 실험적인 형식에 모호한 내용을 담고 있다.”9) 즉, 그는 코미디, ‘도발적 연극’, 연속극, 매력적인 드라마, 뮤지컬로 구성된 90년대 영국 연극의 지형도에 편입되기에는 이질적이다. 그의 연극은 낯선 실험적 형식을 지녔으며, 우울하고 모호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작가의 메시지를 명료하게 전달해 주지도 않는다.

    씨에즈는 그의 경력을 3기로 분류하며, 여기에 1996년 몰리에르로부터 시작하여 쥬네, 이오네스코, 콜테스로 이어진 프랑스 희곡의 번역과 개작 활동을 또 하나의 영역으로 살핀다. 1기는 프린지에 위치한 ‘오렌지 트리'(Orange Tree) 극장을 터전 삼아 베케트의 영향을 짙게 보여준 일련의 소품들이 발표된 시기이다. 2기는 1990년 창작극의 산실인 ‘로얄 코트’(Royal Court)에 입성하여 신진 작가로서 입지를 마련한 시기이다. <아무도 비디오를 보지 않는다>(No One Sees the Video, 1990), <관심 끌기>(Getting Attention, 1991), <처우>(The Treatment, 1993)에서는 사실주의 양식에 기대어 90년대 ‘도발적 연극’의 특징인 ‘부정, 난폭함, 인간성에 대한 혼돈’을 보여주기도 한다. 3기는 1997년 발표한 <그녀의 삶에 대시도들>로 작가로서 정점에 오른 시기인데,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아래서 <그녀의 삶에 대한 시도들>, <벽을 향하기>(Face to the Wall, 2002), <한결 뜸해진 위기상황>(Fewer Emergencies, 2005)로 형식의 실험을 추구하던 시기이다. 이상에서처럼 크림프는 1990년 로얄 코트에 진입하면서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고, 90년대 초반에 중반 이후 명료하게 드러난 ‘도발적 연극’의 흐름을 선행하여 특히 케인과 래븐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특히 3기에 이르러 그는 포스트모더니즘, 지구촌화, 소비주의 문화, 신자유주의 속에서 부식되어가는 개인의 정체성의 문제에 천착하며 이를 형식의 실험과 결합하고 있다는 데서 관심을 모은다. 그의 많은 작품이 90년대 본격화된 소비자 문화와 함께 미디어 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그의 작품들을 연출한 맥버니(Simon Mcburney)와 미첼(Katie Mitchell)과 같은 연출가들이 비디오, 영화, 텔레비전의 영상을 무대 미학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이 글은 크림프의 가장 실험적인 작품으로 알려진 <그녀의 삶에 대한 시도들>을 택해 글쓰기의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려고 한다. 크림프는 이후 2005년에 유사한 양식으로 단막극인 <온통 푸른 하늘>(Whole Blue Sky), <벽을 향하다>, <한결 뜸해진 위기상황>을 하나의 연작 형식으로 발표한 바 있다. 크림프의 2기의 작품들이 케인과 래븐힐 등의 ‘도발적 연극’의 젊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처럼, 이 작품은 ‘도발적 연극’의 흐름에서 벗어난 케인의 <갈망하다>(Crave, 1998)와 <4.48 싸이코시스>(4.48 Psychosis, 1999)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래븐힐의 최근 작품인 <물이 (없는) 풀장>(2006)에서도 그 흔적이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소위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글쓰기를 시도한 독일의 괴츠, 로어, 쉼멜페니히, 옐리네크 등과도 매우 유사한 특성을 공유한다.10) 요컨대, 크림프는 ‘도발적 연극’과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특성을 공유함으로써 영국과 유럽의 ‘새로운 글쓰기’의 맥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본고는 <그녀의 삶에 대한 시도들>에서의 양식을 그의 전 작품을 통해 발견되는 미디어와의 혼재된 의식이 하나의 형식으로 완결되었다고 보고 이를 ‘시네마토그라피적 글쓰기’로 파악하여 이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시네마토그라피적 글쓰기’의 특성을 최근 연극 현상과 관련하여 살펴보고 나서, 몇몇 장면을 통해 ‘시네마토그라피적 글쓰기’의 특성을 분석하여 볼 것이다.

    1)Graham Saunders, “Cool Britanica?” Cool Britanica? London: Plagrave, 2007. pp.3-5.  2)Aleks Sierz, “The Politics of In-yer-face Theatre,” Cool Britannia? Eds. Rebecca D'monte and Graham Saunders, London: Palgrave, 2008. pp.29-30. p.35.  3)Christoph Henke and Martin Middeke, “Introduction: Drama and/after Postmodernism,” Contemporary Drama in English 14 (2007). p.13.  4)앞의 글, p.14.  5)위의 글, p.15.  6)위의 글, pp.16~17.  7)Malgorazata Sugiera, “Beyond Drama: Writing for Postdramatic Theatre,” Theatre Research International 39:1 (2004). p.19.  8)Dominic Dromgoole, The Full Room, London: Methuen, 2002. p.62.  9)Aleks Sierz, The Theatre of Martin Crimp, London: Methuen, 2010. p.2.  10)이 작품에 대한 논의의 물꼬를 튼 것은 레만의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다. 이 책을 영어로 번역한 먼비(Jürs-Munby)는 번역자의 서문에서 뮬러, 옐리네크, 케인, 로리-팍스(Suzan Lori-Parks)의 일부 희곡과 함께 크림프의 <그녀의 삶에 대한 시도들>에서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글쓰기가 실천되었다고 본다. Karen Jürs-Munby, “Introduction”, Postdramatic Theatre, p.6.

    2. 크림프의 <그녀의 삶에 대한 시도들>에서 본 ‘시네마토그라피적 글쓰기’

       2.1. 문학/퍼포먼스/매체 혼성의 탈경계적 글쓰기

    90년대 이후 더욱 가속화된 사회, 문화, 기술의 발전은 인간 의식의 확장과 더불어 의사소통의 방식과 형태, 경계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정보 통신의 개발과 지식 생산에 몰두하던 후기 산업 사회가 테크놀로지의 혁신적인 발달에 힘입어 지구촌이라는 거대 사회로 이행됨에 따라 개인의 삶의 양상 역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이제 개인들은 지구촌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영화, 텔레비전, 컴퓨터, 모바일 폰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자신들의 일상에서 세계와 소통하며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공연 예술 역시 이 같은 상황에 반응하며 기존의 형태와는 다른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의 제반 상황 속에서 실천가들은 사회, 문화, 기술의 발전과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전통적인 드라마 텍스트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한편, 다양한 매체를 혼성함으로써 새로운 공연 형태를 모색하였다. 드라마에 종속되던 음악, 무용, 영상, 조형 미술, 의상, 조명 등은 테크놀로지의 현란한 운용에 따라 활성화된 반면, 기존의 언어 중심의 텍스트는 공연의 부분적인 요소로 편입되었다. 동시에 각기 독립적인 장르에 속하던 연극, 무용, 비디오 아트, 시각 예술, 음악, 퍼포먼스의 탈경계적 혼종화가 촉진되는 경향을 보인다. 동시대 퍼포먼스 연극은 그 같은 혼종화와 혼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 같은 맥락에서 독일의 연극학자 레만(Hans-Thies Lehmann)은 1999년 자신의 저서 『포스트드라마 연극』을 통해 퍼포먼스, 퍼포먼스 아트, 설치 미술 등으로 거론되어온 동시대 공연 예술의 담론과 현황을 미학적 측면에서 통합하여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라는 관점에서 정리하고 있다. 이 책이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킨 이유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과 연결되어 진부하게 논의되어 온 동시대 공연 예술에 대한 관점을 명료하게 범주화하여 일목요연하게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11) 우선 레만은 동시대 공연 예술에서는 ‘상황’이 극적 행위를 대체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기호학 이론을 차용하여, 시간의 진행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는 피노-텍스트(pheno-text)와 달리 서사가 배경으로 물러나거나 배제된 채, ‘되기’의 역동적 움직임의 과정이 관객의 시야에 펼쳐지는 미학적인 형상화를 게노-텍스트(geno-text)로 포착한다.12) 그리고 그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란 “상황과 스펙터클로 역동적인 형상화가 이루어지는 연극13)으로 “드라마적 행위가 제의(ceremony)로 대체”14)된다고 정의한다. 부언하여, 제의란 “지칭하는 것 없이 고도의 정확함으로 보여지는 움직임과 과정 자체의 스펙트럼, 통일성을 이루는 독특하게 양식화된 이벤트, 발전을 이루는 음악적 리듬 혹은 시각적인 구상, 몸과 실재(presence)로 이루어지는 제의와 유사 제의 형태들, 단호하거나 무지막지할 정도로 강조된 제시(presentation)의 형태”15)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러한 관점을 칸토르(Tateusz Kantor), 윌슨(Robert Wilson), 그뤼버(Klaus-Michael Gruber)를 통해 논증하고 있다.

    푹스(Fuchs)가 지적하듯이 레만은 앞서 ‘포스트드라마 연극’을 유포 확산시켰던 비르트(Andrezei Wirth)의 제자로 그의 이론을 전수받았다.16) 그 밖에 레만의 이론에는 20세기 초 역사적 아방가르드부터 70년대의 네오 아방가르드의 실천가들의 주장이 상당부분 혼재되어 있을 뿐 아니라, 바르트(Roland Barthe 1915-1980),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1941-)를 비롯한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의 담론과 90년대 초반 발표된 버링거(Johannes Birringer)와 가이스(Deborah R. Geis), 케이(Nick Kaye) 외 많은 연극 학자들이 전개한 포스트모던 연극 담론들과 대동소이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드라마 연극』을 통해 그가 전개한 논의의 효율성은 ‘드라마’를 거부하거나 배경으로 축소시키면서 선택하고 있는 공연 텍스트의 개념에서 충분히 설득력을 지닌다. 레만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요소를 ‘텍스트’, ‘공간’, ‘시간’, ‘몸’,‘미디어’로 규정하면서 각 요소들을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맥락에서 재구성하였다. 그는 기존의 드라마 중심의 텍스트 개념을 거부하고 퍼포먼스 연극의 텍스트 개념을 재구성함으로써 기존 공연에 대한 분석에서 나아가 퍼포먼스 텍스트 구성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 효용성에 대한 답은 작가이자 연출가인 훈카(George Hunka)가 ‘포스트드라마 연극’에 대해 제기한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기존의 드라마적 텍스트는 글쓰기에서나 공연에서 하나의 구성 행위에 불과한가?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실천가들이 구성한 텍스트는 미적 경화증에 걸릴 위험은 없는가?17) 기존의 드라마 텍스트는 ‘포스트 드라마 연극’ 공연에서 하나의 구성 요소로 축소된다. 동시에 연출가들이 구성한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세계화 시장에 개방되며, 테크놀로지의 조합과 분열을 통해 복제되거나 균질화됨으로써 미적 경화증에 걸릴 수 있다. 훈카의 문제 제기는 파비스(Patrice Pavis)의 글을 통해 하나의 대안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파비스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을 향한 미혹에 찬 논의의 확산에 대해 동조하는 시선을 감추지 않는다. 파비스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 텍스트의 주도권이 ‘무대 작가’인 연출가에게 종속되는 한편, 레만이 풀어 놓은 “새로운 규범들과 억견(doxa)들로 인해서 오늘날 드라마투르그와 글쓰기의 발전이 지체되었다”18)고 본다. 그리고 “포스트드라마, ‘구상 연극’(devised theatre), 무대 위의 글쓰기라는 세 가지 유형의 경험들은 거의 언제나 고전주의 작품들의 재구성에 기대고 있는 연출가의 텍스트들이며, 그러한 관습에서 파생되는 문제가 간과되고 있다”고 비판한다.19) 파비스의 주장은 그동안 ‘포스트드라마 연극’ 유형의 공연들이 새로운 창작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보다는 기존의 텍스트를 자료로 연출가나 실천가들의 미학적 형상화에만 천착하고 있는 데서 야기되는 문제점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포스트드라마연극의 존속이나 소멸은 드라마적인 것의 귀환에도, 신고전주의적 극작법에도 놓여있지 않으며, 오히려 드라마적 문학과 예술을 묶고 있는 밧줄들을 아직 완전히 끊어버리지 않은 어떤 글쓰기의 강화에 놓여있다”고 본다.20) 파비스가 레만의 ‘포스트드라마 연극’에 대해 던지는 의심의 눈초리는 그동안 연출가 중심의 연극에서 발견되는 공연 텍스트의 제 문제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가 우려하는 것은 드라마를 거부한 채 연출가와 실천가들이 임의적으로 만든 공연 텍스트가 작가의 진지한 글쓰기를 통해 완성된 문학적 텍스트를 억압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제안하는 ‘드라마적 문학과 예술을 묶고 있는 밧줄들을 아직 완전히 끊어버리지 않은 어떤 글쓰기의 강화’란 무엇인가? 그는 이에 대한 대답은 들려주지 않고 있다.21)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비스의 주장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에 대한 논의가 찬반으로 갈려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 현상이 ‘미적 경화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글쓰기의 문제를 통해 그에 대한 대안과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한편, 수지에라는 레만의 『포스트드라마 연극』이 공연 텍스트에 관한 미학적 분석에 치중하고 있는 데 반해, 포스트드마라 연극을 위한 텍스트 구성의 방법론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수지에라는 관객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각하고 인지하도록 구조화된 텍스트의 구성 방법을 포스트드라마 연극을 위한 글쓰기의 방법으로 제시한다. 수지에라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을 구성하는 글쓰기의 필요성에 직면하게 된다. 이 경우, 언어를 다르게 변형시키고 종종 의식의 형태를 구현할 수 있는 글쓰기의 방법론과 더불어 언어를 대신할 또 다른 매개체를 글쓰기에 수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고려해 볼만하다. 크레스(Kress)가 지적하듯이

    크레스의 지적처럼 ‘새로운 미디어 시대의 글쓰기’는 적극적인 매체 혼성을 통해 그 한계를 극복하고 그 무한한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도발적 연극’에서처럼 언어의 수행성을 활성화하여 퍼포먼스적 요소를 언어와 결합하는 한편, 언어 외의 다른 미디어를 빌려와 교직함으로써 멀티모드의 텍스트를 구성하여 경계를 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이러한 글쓰기는 파비스가 제안하는 ‘문학과 예술을 통합하는 글쓰기’에서 나아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투영해내는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낸 다양한 매체마저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판크라츠(Pankratz)가 주장하듯이, 가상현실이라는 또 하나의 영역을 탐색하게 된다. 가상현실은 보들리야르가 갈파한 것처럼 현대 문화의 전반적인 특성으로 “기호가 실재를 대체”한 상황을 의미한다.24) 다양한 미디어가 실재를 구성하고 여과해내는 상황에서 글쓰기 역시 가상현실과 관련을 맺는다. 즉, “연극적 코드와 문화적 코드의 관계의 변화와 연극적 코드와 메시지의 변증법적 관계의 변화에 따라 확장된 연극적 코드는 이제 동시대 문화의 중심 패러다임의 하나인 가상현실의 지배와 밀접하게 연관된다.”25) 이제 작가는 언어, 인물, 행위를 텍스트의 자료로 삼아 장르와 장르의 경계를 넘거나, 하위 장르를 증식시키거나, 경계를 노골적으로 전면에 드러내면서 영역을 확장하는 도전 앞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가상현실은 새로운 글쓰기가 대상으로 삼아야 할 또 하나의 현실이 된다. 그 형태는 프리만이 주장하듯이, “대사 없이도 가능한, 퍼포먼스로 완성되는, 스크린에 쓰였거나 책에서 낭독되는, 문단마다 인물의 이름이 주어지고 허구적 장소와 시간으로 각 장이 시작되는, 변호사나 뉴스 기자의 보도와 같이 다른 곳에서 가져와 전유하고 재구성되어 난처하게 만드는, 공연과 함께 무엇을 할지를 고민하게 하는”26) 텍스트로, ‘문학과 예술을 통합하며’, 연극 너머의 경계를 확장하는 새로운 대안과 전략을 마련해준다.

       2.2. <그녀의 삶에 대한 시도들>에서 본 시네마토그라피적 글쓰기

    1997년 크림프가 발표한 <그녀의 삶에 관한 시도들>의 초연 공연에 대해 관객 및 평론가들은 전통적인 희곡의 형식을 전복시킨 극의 실험적 면모에 긍정적인 평가를 하면서도 모호한 의미에 당혹감을 감추지 않았다. 드라마 형식을 부정한 텍스트는 인물, 공간, 시간이 명시되지 않았을 뿐 아니 사건조차 없다. 서사는 의도적으로 메시지를 차단하려는 듯 다양한 소재의 이야기로 분절되고 각기 다른 이질적인 수사 양식이 뒤섞여 있다. 희곡의 부제인 “연극을 위한 17개의 시나리오”가 암시하듯이 서사는 영화의 카메라가 대상을 포착하듯이 언어를 통해 가상현실을 구성한다. 시나리오를 연극 텍스트로 구성한 흔적은 작가가 희곡에 앞서 책의 속지에 명기한 것처럼 “그런 사건들의 실제 이유를 누구도 경험하지는 않을 것이나, 그것들의 이미지들은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보들리야르를 인용한 구절에서도 암시된다. <그녀의 삶에 관한 시도들>은 등장인물 대신 가상 인물을, 사건 대신 이미지를, 대화 대신 내레이션과 인용 그리고 노래를, 특정 공간과 시간 대신 무한한 가상현실을 통해 시공을 넘나든다. 텍스트를 구성하는 17개의 장면들은 내레이션, 논평, 이야기, 대화, 인용, 노래, 광고 문구, 재판에서의 진술, 비행기에서의 스튜어디스의 안내 방송 등 카메라의 편집을 통해 구성한 콜라주에 가깝다. 플루서(Flusser)가 제기한 것처럼, 무감각하게 마취시키는 문자 언어를 뚫고 ‘지각하고 감각시키기 위해 글쓰기는 구텐베르그 시대로부터 전자기적 시대로 넘어오기 위해 텍스트를 둥글게 마는 전략을 택한다.27) 17개의 시나리오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상의 17개의 장면은 재현을 의도한 기존의 드라마 형식과는 거리가 멀다. ‘연극을 위한 시나리오’라는 부제를 통해 작가가 암시하는 바는 희곡이 시작되기 전 17개의 장면은 몽타주처럼 구성하는 ‘극장 너머 세상을 비추는’ 하나의 파노라마이다. 푹스(Fuchs)가 주장하듯이 ‘새로운 포스트 형이상학의 세계를 그리기 위해 글쓰기의 혼란과 경계 이탈은 필수불가결 하다. 연극은 세상의 모델일 뿐 아니라 세상으로 이행하는 전이점이 된다. 이때 연극은 시노-드라마(sceno-drama)로 실재의 사라짐을 위장하기 위해 실재를 모방한다.’28) 17개의 장면은 화자들 사이의 이야기로 진행되며, 언어를 통해 장면이 묘사된다. 17개의 파편적인 이야기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것은 각 장면마다 언급되는 그러나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 앤(Anne), 아냐(Anya), 애니(Annie), 에누즈카(Annushka), 애니(Anny)라고 불리는 여성 인물이다. 부재하는 존재로서의 여성은 화자의 이야기속에서 옆집 소녀, 킬러, 제3세계 여성, 자동차, 자살한 페미니스트 예술가, 봉투에 담긴 사채, 17세 포르노 배우 등으로 변신한다. 6장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그녀는 “스스로를 실재 인물이 아니라고, 텔레비전이나 책에서 당신이 얻는 것과 같은 실재 인물이 아닌, 인물의 부재”라고 말한다.29) 서사는 언어가 투명하게 현실을 재현할 수 없다는 포스트모던 인식을 전경화한다. “단절과 파기, 표면과 가장, 대상이 없는 아이러니, 명시되지 않음, 기묘한 합성어는 음흉한 인용문들, 대중문화에 대한 수많은 언급들로 미학을 구성하며”30), 이에 따라 현실을 재현해 온 드라마의 기능 역시 거부되고 불신된다. 기존의 드라마에서 보여준 인물의 갈등과 위기는 익명의 권력, 미디어, 지역과 지구촌의 불균형한 이해관계, 자본과 시장 등에 의해 형성된다. 개인의 인식은 활자나 이야기가 아닌 미디어에 의해 침식된다. 언어와 행위가 재현하는 공간 대신 이미지가 주도하는 상황이 리얼리티를 포착할 수 있는 보다 적합한 수단으로 간주되고 있다. 2007년 미첼(Katie Mitchell)이 영국 ‘국립극장’에서 연출한 공연 역시 배우들이 이야기하는 장면을 카메라가 포착하여 무대 위에 다중의 영상을 투사함으로써 언어가 구성하는 가상현실의 가능성을 전경화하였다.

    17개의 시나리오로 구성된 <그녀의 삶에 대한 시도들>은 ‘드라마적 문학과 예술을 통합하는 글쓰기’로서 가능성을 잠재하며 나아가 매체의 수용 가능성마저 탐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짐머만(Zimmermann)은 드라마의 형태가 변화되는 이유를 리얼리티와 예술 사이의 변모된 관계에서 찾는다.

    각 시대마다 등장한 매체는 개인의 의식과 삶을 매개하는 수단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매체는 인간의 의식과 삶의 형태를 반영하여 왔다. 매체는 그 안에 삶의 형태와 삶에 대한 인식, 그것의 맥락을 내포해 온 것이다. 그러나 매체와 매체가 혼합되고 만나는 것은, 맥루언의 주장처럼, ‘새로운 형식이 탄생하는 진리와 계시의 순간을 선사한다. 두 미디어의 혼재는 우리를 그 경계선에 밀어 넣고 그 경계선 위에서 우리는 나르시스적 감각의 마비 상태에서 깨어난다’.32) 그러므로 하나의 매체는 또 다른 매체를 수용함으로써 기존 매체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매체가 내포하는 상황과 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탐색함으로써 표현 영역을 확장해 왔다. 전통적인 형식으로는 현실을 포착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자 연극은 퍼포먼스에서 영화와 영상의 시각적 이미지를 포섭하며 자신의 경계를 넘는 중이다. 11장은 탈경계의 역사적 맥락을 은유한 장면으로 볼 수 있다.

    11장(‘무제 100개의 단어들’)에서 익명의 화자들은 미술관에 전시된 퍼포먼스 작품에 대해 논평한다. 먼저 화자들은 미술관에 전시된 약병, 입원 기록들, 여자가 무방비 상태로 성관계를 가졌던 몇 명의 에이즈 양성 보균자인 남자들의 폴라로이드 사진들, 깨진 유리 조각들, 그녀의 자살 시도들을 담은 비디오를 둘러본다. 전시 작품을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100개의 단어를 읽으며 화자들은 작품에 대해 각기 다른 관점을 주장한다. 한 화자는 전시된 작품을 혁명적인 작품이라고 호평한다. 다른 화자는 단순한 나르시시즘이라고 혹평한다.

    1960년대 조명되기 시작한 포스트모던 퍼포먼스는 형식 안에 의미를 완결시키는 자기 충족적인 모더니즘 예술에 대해 회의를 제기하며 전개된다. 1950년대초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와 같은 실천가들은 이미 다양한 이질적인 오브제로 구성된 콜라주를 던져 놓고 관객에게 의미를 해석하도록 강요하기 시작한다. 형식을 해체하고, 작품의 의미 구성을 관객에게 맡겨 놓음으로써 의미는 완결되지 않은 채 개인의 해석에 맡겨지는 것이다. 7, 80년대 페미니스트 실천가들은 퍼포먼스 아트의 양식을 적극 수용하며 나아가 사회적 억압에 항변하여 가학적으로 몸을 억압함으로써 남성 중심의 억압 구조에 대해 항변하였다. 화자들의 논쟁은 의미를 스스로 구성하는 작품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화자들의 논쟁의 방식은 퍼포먼스에 대한 의의를 발견하거나 판단하는 것에 있지 않다. 화자들이 이야기 하는 방식은 짐머만(Zimmermann)이 지적하듯이, 영화에서 카메라 렌즈가 대상을 포착하듯이 전개된다. “서사적 문장들은 카메라가 보는 것을 묘사한다. 서사와 다이얼로그의 파편과 묘사적이고 논쟁적인 텍스트의 파편들의 몽타주는 어떤 연대표도 확정짓지 않는다. 그것은 시각 예술의 몽타주처럼 공간을 병치시키고 있다는 인상만을 준다. 구성의 원칙은 우연성이지 인과성은 아니다.34)” 대사나 극중 인물과 같은 관습 대신 오브제를 구성하여 관객의 반응을 유도했던 7, 80년대의 퍼포먼스 아트 역시 관습에 젖어 있다. 페미니스트 퍼포먼스 아티스트의 자살은 퍼포먼스의 한계를 은유한다. 예술가가 자신의 몸을 자료로 삼아 리얼리티를 극대화하는 퍼포먼스는 막다른 골목에 직면해 있다. 화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미지를 구상하는 방식은 크림프가 제시하는 대안으로 볼 수 있다.

    크림프는 오브제 대신 영상 이미지를 글쓰기에 수용함으로써 재현의 한계를 극복하고 텍스트의 성격을 새롭게 정의하며 그 영역을 확장한다. 언어의 의미에 선행하는 것은 소리의 운율, 장단, 고조, 음질과 같은 물질성이다. 언어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구성할 뿐이며 담화의 순간 독자나 관객의 수용을 통해 발현된다. 그리고 그 전략은 읽거나 듣는 자의 마음에 몽타주를 만들어내듯이 시청각적 이미저리로 상황을 묘사함으로써 수행성을 활성화한다. 즉, 시네마토그라피적 글쓰기는 공간에 대한 글쓰기이며 풍경을 구성하기 위해 시청각적 드라마투르그로 전개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저리를 불러내기 위해 영상의 서사 방식을 혼용함으로써 재현의 한계를 극복하는 동시에 재현 불가능하던 것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즉 판크라츠의 주장대로 연극과 영상 문화 코드의 혼용은 현대 문화 패러다임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데,

    즉, 기존의 연극 언어는 지금·이곳의 발화를 위해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네마토그라피적 글쓰기는 언어 기호에 영상 기호를 혼용함으로써 기존의 외연을 확장하게 되는데, 과거와 현재, 무대 안팎, 인물의 내면을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시공의 한계를 초월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글쓰기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매개자로서 배우의 연기 역시 사실주의 연기와는 다른 재현의 경계를 넘어서게 된다. 배우는 역할을 연기하는 자(actor)라기보다 행동을 수행하는 행위자(performer)가 된다. 결과로 이를 지켜보는 관객은 배우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받는 것이 아닌 스스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응시하는 주체가 된다. 이와 동시에 현재의 문화코드가 가상현실로 구성된 것처럼 가상현실의 코드를 글쓰기에 수용한다는 것은 현재 미디어 문화에 대한 비평적 기능마저 담당하게 된다.

    <그녀의 삶에 관한 시도들>의 2장(‘사랑과 이데올로기의 비극’)에서 작가는 시네마토그라피적 글쓰기를 통해 유럽 도시를 롱 테이크 샷으로 포착하여 서사적 관점에서 조망하면서 한 아파트의 침실을 클로즈업해 들어가 남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익명의 화자들은 ‘유럽’, ‘강’, ‘강가의 풍경,’ ‘연인’이라는 대상을 화제로 삼는다. 그리고 이들 대상들을 호명하고 불러내어 이미지를 구성한다. 먼저 한 화자가 하나의 이미지를 호명하듯 언급하면, 다른 화자는 먼저 화자의 이야기에 호응하며 또 다른 요소를 보탬으로써 각인되듯이 이미지는 명료해진다. “이것들은 기본적인 요소들이야”나 “이게 잘못이란 걸 알아.”와 같이 화자의 의견과 관점이 개입되기도 한다. 이미지들이 구성하는 풍경은 현대 유럽 문화를 은유하는 하나의 파노라마이다. 그러나 그 파노라마는 역사를 통해 환기되는 것이 아니다. 화자들의 대화를 통해 구성된 풍경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통해 보아 온 이미지에 근접해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화자들의 대화는 카메라의 렌즈가 열중하여 대상을 쫓듯이 대상을 향해 클로즈업해 들어간다. 시네마토그라피적 글쓰기는 ‘우리 문화에 근본적으로 내재된 텔레비주얼한 요소를 공연에 활성화’하는 장치와 다르지 않다.36) 이를 통해 서사는 관객의 시선을 ‘구상’(framing)하며, 대상에 대한 ‘인접성’(proximity)과 ‘친밀성’(intimacy)을 통해 생동감을 성취해낸다. 지금·이곳의 살아 있는 체험을 재현해 온 기존의 서사 방식과 달리 이러한 서사 양식은 공간의 이동과 더불어 대상의 표면을 세밀하게 포착하는 동시에 내면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하얗게 된 손마디’나 ‘눈에 고인 눈물’은 카메라의 렌즈가 대상을 클로즈업하듯이 접근하여 포착해 낸 모습이다.

    시간이 지나며 서사는 방의 분위기를 농밀하게 담아낸다. 먼저 서사는 ‘늦은 밤 도시의 불빛’을 쫓다 점프 컷의 방식으로 방안의 정경을 잠시 훑는다. 그리고 막 잠에서 깨어난 앤의 모습과 벽에 걸린 시계의 모습을 몽타주로 연결한다. 이제 서사는 잠시 멈춰선 카메라 렌즈와 같이 앤과 남자의 대화 장면을 담아내더니 이내 비약한다. 앤과 남자의 대화는 화자에 의해 3인칭의 관점에서 묘사됨으로써 관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화자에 의해 장면이 묘사되고 인물의 움직임이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은 기존의 등장인물의 위치를 수정하는 하나의 장치이다. 화자는 앤의 모습을 관객에게 직접 전달함으로써 앤의 실재를 보증하게 된다. 남자의 전화가 누구인지를 알아챈 앤의 반응에 대한 화자들의 논평은 서사의 흐름으로부터 벗어나 정치적 의도를 함축한다.

    이상에서처럼 시네마토그라피적 글쓰기는 카메라의 렌즈와 같이 응시의 대상을 이동시키며 글쓰기에 다양한 관점을 내재시킴으로써 기존의 기승전결의 단순한 재현 방식을 해체시킨다. 이 과정에서 서사는 시청각적 이미지로 상황을 구성하며 관객의 응시와 감각적 체험을 독려하게 된다. 화자는 도시의 야경, 방안의 정경, 방안에서 전화를 하는 남자의 모습, 잠을 깬 앤의 모습, 앤과 남자의 대화 모습을 순차적으로 묘사하다가 비약하더니 전화의 목소리인 ‘정치적 주인’에 대해 논의한다. 기존의 드라마에서 등장인물은 심리적 동기를 지니며 인물들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갈등과 행위를 통해 플롯을 진행시켰다. 반면,<그녀의 삶에 대한 시도들>에서 등장인물은 익명의 화자로 상황을 묘사할 뿐이다. 레만은 이러한 글쓰기의 방식을 미디어에 의해 지각이 형성되는 현 세계에 대한 반응으로 간파하며, 이 같은 상황을 사진술로서나 포착되는 포스트드라마적인 상황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37) 포스트드라마적 상황에서 그가 주목하고 있는 현상은 텍스트와 무대의 유리된 관계이다. 레만은 “텍스트가 드라마의 역할 뒤로 사라져버리지 않고 관객에게 전시되며, 감지할 수 있고, 밀착되어 텍스트 자체의 리얼리티를 드러낸다”38)는 데에 주목한다. 관객은 매개되지 않은 텍스트와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기존의 절대적이던 텍스트와 배우의 통합으로부터 해체된 “배우와 텍스트의 자율적인 관계가 무대와 관객의 직접적인 소통을 열어놓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퍼포먼스에 근접하게 된다”39)고 본다. <그녀의 삶에 대한 시도들>에서 화자는 자신이 말하는 이야기의 주체가 아니다. 화자는 배우인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텍스트의 경계에서 관객과 대면하는 자이다. 한편, 배우와 등장인물의 분리, 텍스트와 무대의 분리는 퍼포먼스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장치이기도 하다. 텍스트와 등장인물의 분리는 서사가 등장인물에 종속되는 것을 해방시키는 동시에 작가의 비평적 사유를 내재시키는 계기가 된다. 요컨대, 장면 묘사를 멈추고 톤을 바꾸어 ‘정치적 지도자’에 대해 논평하는 화자의 행위는 재현의 한계와 시각적 영역의 경계 넘기에 탐닉해 온 종래의 퍼포먼스 연극에 대한 또 하나의 경계 넘기에 해당한다. 이 순간 관객은 관음증적 응시의 주체에서 인식의 주제로서 변모하게 된다. 이때의 관객의 인식은 푹스가 주장하듯이 ‘소격 효과’(alienation effect)가 아닌 ‘동화 효과’(familiarization effect)를 통해서 달성된다. ‘동화 효과’는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객관적 관점을 지니도록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관객을 신체적으로 행위를 하도록 밀어 넣음으로써 스스로 지각하도록 유도한다.40) 관객은 화자의 서사가 구성하는 이미지를 지각함으로써 자신 안에서 경험을 얻는다.

    7장의 ‘새로운 애니’ 장면은 등장인물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해체시면서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는 또 하나의 공간이다. 화자가 아프리카나 동유럽의 언어로 문장을 선창하고 나면, 또 다른 화자가 먼저 화자의 말을 영어로 번역한다. 두 문화권의 언어는 극장 안의 공간이 밀폐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와 연결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먼저 화자는 자동차로 변신한 새로운 애니의 모습을 제시하며 관객의 참여를 독려하면서 이미지를 구성한다. 화자는 지중해 유럽의 전형적인 풍광과 함께 자동차의 모습을 포착하듯이 묘사한다.: “차는 지중해 도로를 따라 꼬불꼬불 달린다./ 그것은 그림 같은 언덕 마을 사이의 커브 길을 껴안는다.(37)” 그리고 나서 화자는 시각적 이미지로 애니의 변신을 완성한다: “태양은 공기역학적으로 만들어진 몸체 위에서 반짝인다. 새로운 애니의 공기역학적인 몸체. ⋯⋯빠른/ 날렵한/ 자유로운/ 이제 우리는 애니가자동 창문을 기본 사양으로 출시되었다는 것을 안다/ 이제 우리는 애니가 운전석과 탑승석의 에어백을 기본 사양으로 출시된 것을 알게 된다(37-8).” 사물로 변한 애니의 모습은 재현 불가능한 언어적 구상물이다. 애니는 “할로겐 불빛이 비치는 신발 가게 밖에 주차하듯이 아주 쉽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하얀 빛깔의 해변가를 누비기도 하며, 브룩클린 다리를 건너고, 사하라 사막을 황단하며, 보르도의 포도 농원과 새벽녘 북아프리카를 쏜살같이 달린다(39).” 애니의 모습은 자동차에 경도된 현 사회의 소비문화의 측면을 전경화하는 한편으로 보들리야르식의 시뮬라크르의 무한 복제의 시스템을 함축하기도 한다. 이러한 애니의 모습은 무대에서 재현되기가 불가능하며 따라서 무대와 텍스트의 분리가 불가피해진다. 블라테스(Blattès)에 따르면 이러한 현상은 포스트모던 연극의 현상으로 상호텍스트성을 통해 한계가 극복된다. 즉, “상호텍스트성은 다른 화자, 다른 컨텍스트, 다른 출처를 도입함으로써 고의적으로 대사를 하는 인물이 누구인지의 문제를 배제시키며 대신 자기 반영적 속성을 강화한다.”41) 무대와 텍스트의 분리는 다른 출처 혹은 다른 컨텍스트와의 혼성을 용인함으로써 탈경계적 글쓰기의 실천을 강화하며 연극이라는 인위적 양식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화자는 애니의 모습을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의 화면에서 보았을 법한 시각적 이미저리와 더불어 상투적인 자동차 판매 광고 문구, 누구에게나 있었을 법한 자동차와 관련된 행복한 기억 혹은 그러한 영상 이미저리를 콜라주로 구성한다. 그리고 불쑥 뉴스의 사건을 애니의 모습에 중첩시킴으로써 연극과 현실의 경계를 지워버린다.

    초연에서 영어와 함께 사용된 동유럽의 언어가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언어라는 사실은 초연 당시 내전 중이던 세르비아-크로아티아의 전시 상황에서 서사가 시각적 묘사에만 탐닉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즉, 위의 화자의 논평처럼 시네마토그라피적 글쓰기는 카메라 렌즈와 같이 대상을 포착하여 시각적 이미저리로 상황을 구성하지만, 상호텍스트성을 통해 다른 컨텍스트와 출처를 도입함으로써 정치적 관점을 내재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2장에서의 화자의 ‘정치적 지도자’에 대한 논평이나, 7장의 애니의 낙관적인 모습에 중첩되는 파시즘적인 인종차별의 폭력적 언사와 세르비아-크로아티아 내전 중 자행된 폭력 행위들에 대한 암시는 카메라의 인서트 컷과 같이 서사에 끼어들어 관객에게 현실의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즉, ‘폭발물’, ‘강간’, ‘폭도’, ‘정액’, ‘침’, ‘녹아내린 초콜릿’은 이전에 애니에 대해 언급된 ‘빠른’, ‘날렵한’, ‘자유로운’, ‘행복한’, ‘안전한’, ‘통제된’ 이미지들과는 상반된 음울함을 불러일으킨다. 관객은 이전에 언급된 애니에 대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이미지들을 기억하며 음울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통해 애니가 속해 있는 세계와는 다른 과거의 역사와 전쟁의 참상이 훑고 있는 또 다른 현실 세계를 환기하게 된다.

    이상의 맥락에서 수지에라는 비로소 공연 텍스트의 요소로서의 언어의 본질적 기능을 확인한다. 이 경우 언어는 이야기의 재현이 아닌 관객의 인식과 인지의 과정을 위해 기능한다. “관객은 스스로를 인식하고, 의식하며, 진실을 자각하는 자기 행위의 주체적 인물이 된다”42)는 것이다. 연극성 역시 예술적 양식이라기보다는 “관객이 부분적으로 인식의 대상을 만들어내고, 지식을 얻으며, 인식하는 주체로서 스스로를 관찰하도록 유도하는 수단으로서 활용된다”43)고 본다. 관객의 인식을 독려하는 방법으로서의 글쓰기 양식에 대한 고찰은 글쓰기의 과정에 관객의 존재를 포함시키는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시네마토그라피적 글쓰기의 기능은 언어의 재현 기능보다는 시청각적인 이미지를 활성화함으로써 관객의 인식을 독려하는데서 확인된다. 관객의 의식은 분절되고 파편화된 서사의 콜라주가 만들어내는 혼종의 이미지에 대해 감각하는 기관으로서 확장되며, 동시에 그러한 형태의 의도와 그것이 암시하는 비밀스런 담론을 스스로 구성함으로써 지각하는 주체로 자리하게 된다. 지각하는 주체로서 관객은 이 텍스트가 미디어에 의해 전유되고, 후기 산업 사회의 구조에서 소비되는 여성 이미지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라는 판단에 머물러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러한 은유적 관점이 제기되는 문제야말로 관객이 읽어낸 바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감각을 확장하여 지각하며, 기억하고, 비교함으로써 극장 밖의 세상과 무대 위의 서사가 결탁하여 만들어내는 은밀한 담론에 참여하는 것이다.

    11)레만 이전에 영어권에서 출판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과 연극을 본격적으로 논의한 저서로는 1991년 버링거(Johannes Birringer)가 쓴 『연극, 이론, 포스트모더니즘』(Theatre, Theory, Postmodernism, Indiana Up, 1991)과 가이스(Deborah R. Geis)가 쓴 『포스트모던 연극술』(Postmodern Theatric(k)s, Michigan Up, 1993), 케이(Nick Kaye)가 쓴 『포스트모더니즘과 퍼포먼스』(Postmodernism and Performance, New York: St. Martin, 1994)이 있다.  12)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전통적인 언어학이 사회적 규약에 속하지 못한 욕망, 유희, 쾌락을 다루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며(26), 발화하는 주체는 서술적 총합의 기저를 이루는 역사, 무의식, 몸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다고 본다(27). 그녀는 전통적인 피노-텍스트의 대안으로 새로운 게노-텍스트를 제안하는데, 게노-텍스트는 본능적 충동, 외적 규약, 진술 상황의 요소, 표현 방식 등을 포함한다. Julia Kristeva, Kristeva Reader, Ed. Toril Moi, Columbia Up, 1986. pp.26~27, p.120.  13)Hans-Thies Lehmann, Postdramatic Theatre, London: Routledge, 2006. p.68.  14)Hans-Thies Lehmann, 같은 책, p.69.  15)같은 책, 깥은 쪽.  16)Elinor Fuchs, “Postdramatic Theatre”, TDR 52:2 (Summer 2008). p.180. 비르트는 1970년대 중반뉴욕 시립대에서 ‘포스트드라며 연극’에 대한 이론을 강의하였고, 레만에 앞서 비르트의 제자로 그의 이론을 접한 푹스는 이후 비르트에게서 배운 관점을 발전시켜 『등장인물의 죽음: 모더니즘 이후의 연극에 관한 시각』(Death of Character: Perspectives on Theatre after Modernism 1996)을 출판하였다. 2008년 『드라마 리뷰』(The Drama Review)의 여름호와 겨울호를 통해 푹스와 레만 사이에 오간 설전은 기실 ‘포스트드라마란 용어’를 통해 레만이 기존의 논의를 자신의 이론 안에서 통합시킴으로써 전유하고 있다는데 대한 불편한 심기라고 해석할 수 있다. 포스트모던 퍼포먼스 이론 혹은 퍼포먼스 아트 연구의 범주로 지칭되어 온 기존의 논의에 대해 레만이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라는 시각을 제기한 것은 충분히 파장을 일으킬만하다. 자신의 책에 대한 영어권 학자들의 반발이 번역 과정에서 원본과 달리 축소되어 자신의 심화된 연구의 결과물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항변한다.  17)George Hunka, “Charting the Postdramatic,” PAJ 30:2, May 2008. pp.125-6.  18)Patrice Pavis, 「포스트드라마연극에 관한 고찰들」,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미학』, 서울: 푸른 사상, 2010. 309쪽.  19)위의 글, 310쪽.  20)앞의 글, 311쪽.  21)2011년 5월 31일 한국을 방문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오싱젠(Gao Xingian)은 <삶과 죽음 사이>의 낭독 공연 후 열린 작가와의 대화 시간에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되도록 많은 시간을 극장에서 머무르며 공연을 보라”는 말로 ‘공연 현장에 밀착한 글쓰기’를 역설하였다. 또한 텍스트 안에 배우의 움직임을 내재시킨 글쓰기를 제안하였다. 가오싱젠의 이야기를 파비스가 설파한 ‘드라마적 문학과 예술을 묶고 있는 밧줄들을 아직 완전히 끊어버리지 않은 어떤 글쓰기’의 한 예로 해석하여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22)Sugiera, Malgorazata, “Beyond Drama: Writing for Postdramatic Theatre,” Theatre Research International 29:1, 2004, p.26.  23)Kress, Gunther, Literacy in the New Media Age, New York: Routledge, 2003. p.21.  24)Jean Baudrillard, 『시뮬라시옹』, 하태환 역, 민음사, 1991. 17~18쪽.  25)Annette Pankratz, “Signifying Nothing and Everything: The Extension of the Code and Hyperreal Simulations,” Contemporary Drama in English 11, 2004, p.63.  26)John Freeman, New Performance /New Writing,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07. pp.14~15.  27)Vilem Flusser,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 윤종석 역, 문예, 1998. 87쪽.  28)Elinor Fuchs, Death of the Character: Perspectives on Theatre after Modernism, Bloomington: Indianna Up, 1996. p.151.  29)Martin Crimp, Attempts on her Life, London: Faber and Faber, 1997. p.31.  30)Elinor Fuchs, 위의 책, pp.6-7.  31)Heiner Zimmermann, “Images of Woman in Martin Crimp's Attempts on her Life,” European Journal of English Studies 7:1, 2003, p.74.  32)마샬 맥루언, 『미디어의 이해』, 김성기, 이한우 역, 민음사, 2002. 97쪽.  33)Martin Crimp, Attempts on her Life, London: Faber and Faber, 1997. 이하 본문의 모든 인용은 이 책에서 하고 쪽수만 표시하기로 한다.  34)Heiner Zimmermann, “Martin Crimp, Attempts on her Life: Postdramatic, Postmodern, Satiric?” Contemporary Drama in English 9, 2002, p.115.  35)Annette Pankratz, 앞의 글, p.64.  36)Philip Auslander, Live Performance in a Mediatized Culture, London & New York: Routledge, 2008. p.35.  37)Hans-Thies Lehmann, “Word and Stage in Postdramatic Theatre,” Contemporary Drama in English: Drama and/after Postmodernism 14, 2007, pp.43-.44.  38)위의 글, p.49.  39)앞의 글, p.49.  40)Elinor Fuchs, 앞의 책, p.139.  41)Susan Blattès, “Is the Concept of 'Character' Still Relevant in Contemporary Drama?” Contemporary Drama in English: Drama and/after Postmodernism 14, 2007, p.73.  42)Sugiera, 앞의 글, p.26.  43)같은 글, 같은 쪽.

    3. 탈경계적 글쓰기의 가능성

    90년대 이후 확산되고 있는 포스트모던 퍼포먼스나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가능성은 그것이 실재(reality)를 포착하고 있다는 데서 긍정적으로 모색되어왔다. 지금·이곳의 사건으로서 공연 방식은 전래의 드라마 형식을 거부하거나 전복시킴으로써 전개되었다. 이 경우, 작가를 대신해 연출가가 무대를 주도하면서, 그리고 그 방식이 고전을 해체하거나 재구성한 미학적 표현 양식의 계발로 경도되면서 문제가 야기된다. 버링거(Birringer)가 지적한 것처럼, 이러한 경우의 문제는 자기반영적 속성에 반응하며 현실과 유리된 채 기존의 재현의 한계에 도전하여 시청각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에 몰두하고 있다는 점에서 발견된다.44) 이는 파비스가 제기한 것처럼 작가들의 진지한 글쓰기를 억압할 소지가 다분하다. 이에 대해 작가들은 파비스가 제안하듯이 문학성과 연극 매체를 결합한 글쓰기를 강화하는 것으로 대안을 찾을 수 있다. 그 같은 글쓰기는 기존의 재현의 한계를 극복하고, 연출가의 글쓰기나 텍스트 구성이 간과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를 통찰할 수 있는 관점을 내재시키며, 나아가 그 같은 공연 양식에 적합한 글쓰기 방식을 실현하는 데서 성취될 수 있다. 동시에 퍼포먼스 연극의 특성인 혼종된 공연 양식, 특히 새로운 미디어를 수용한 인터미디어 퍼포먼스 연극을 위한 글쓰기 역시 탐색할만한 또 하나의 과제이다. 드라마를 거부한 채 연출가와 실천가들이 임의적으로 만든 공연 텍스트가 작가의 진지한 글쓰기를 통해 완성된 문학적 텍스트를 억압하고 있다면, 그 대안은 ‘드라마적 문학과 예술을 통합’하면서 새로운 매체를 수용하는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탈경계적 글쓰기는 글쓰기의 범주를 교란하고 끝없이 확장해가며 경계를 이탈하는 데서 버링거나 파비스가 언급한 대안적 글쓰기로 간주할 수 있다. 90년도 영국을 중심으로 확산된 ‘도발적 연극’은 글쓰기를 통해 수행성을 활성화시키면서 전통적 희곡 텍스트에 퍼포먼스적 요소를 내재한 경우이다. 등장인물의 극적 행위를 강화한 지문, 언어의 간격, 침묵, 포즈는 배우의 연기를 재현적 기능에서 벗어나 제시적인 영역으로 이끈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드라마를 거부한 채 ‘반위계적인 병렬구성(Parataxis/non-hierarchy), 동시 발생(Simultaneity), 기호의 밀도와의 유희(Play with the density of signs), 과잉(Plethora), 음악화(musicalization), 시노그라피-시각적 드라마터지(Scenography-visual dramaturgy) 온기와 냉기(Warmth and coldness), 육체성(Physicality), 실재의 난입(Irruption of the real), 사건과 상황(Event and situation)’을 통해 퍼포먼스에 더욱 다가선다. 탈경계적 글쓰기는 ‘도발적 연극’의 특성과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특성을 수용하며 나아가 매체를 혼성을 텍스트에 내재시키면서 경계를 넘어 끝없는 탈주를 감행한다. 그러나 탈경계적 글쓰기란 언어의 의미가 함축하듯이 범주와 형태를 규정할 수 없음으로 해서 공허한 개념으로 머무를 공산이 다분하다. 때문에 하나의 전례를 택해 그 글쓰기의 방식을 살펴보는 것은 탈경계적 글쓰기의 실천적 사례를 통해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법하다. 다만, 하나의 텍스트가 내재하는 글쓰기의 가능성은 제한된 것이기에 포괄적인 대안으로 볼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이 글은 크림프의 <그녀의 삶에 대한 시도들>을 택해 그의 글쓰기 방식을 시네마토그라피적 글쓰기의 전범으로 삼아 탈경계적 글쓰기의 가능성을 살펴 보고자 했다. <그녀의 삶에 대한 시도들>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글쓰기의 방식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었다.

    이상에서처럼 시네마토그라피적 글쓰기를 초점으로 <그녀의 삶에 대한 시도들>을 통해 살펴 본 탈경계적 글쓰기는 현실을 지각하고 수용하는 실천 행위로 이를 위해 표현의 영역을 확장하며 경계를 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44)Johanes Birringer, Theatre, Theory, Postmodernism, Indiana UP, 1991.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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