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Qualitative Research on the Cognition of the Initiation of Diseases of North Korean Refugees in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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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Objectives: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the cognition of the initiation of diseases of North Korean refugees in South Korea.

    Methods:

    9 North Korean refugees hospitalized in Oriental Neuropsychiatry of National Medical Center participated in the interview. The statements were analyzed by using the phenomenological research methodology and Giorgi's analytical method, in particular, was applied.

    Results:

    A total of 4 categories and 15 sub categories were derived from the participants' descriptions. North Korean refugees who thought their diseases have begun while living in North Korea coming to South Korea, have fire disease because of the strict social system, limitations imposed on their actions, and the violence of their husbands. And who thought during escaping from North Korea, have anxiety about being killed, found and transferred to North Korea. They also suffered from a sense of guilt towards their family who were left behind as well as from depression. Consequently, they thought their skeletal diseases have begun during this period. Who thought during their period in Korea, their diseases like fire disease and depression have been worsen because of unfamiliar circumstances and doctors who said their problems had been caused by psychiatric disorder. Nevertheless, they did their jobs, felt happy and had a will to be cured thingking possibilities of overcoming diseases.

    Conclusions:

    These results suggest that various factors during different periods in the life of North Korean refugees could have an effect on their present diseases.


  • KEYWORD

    North Korean refugees , Qualitative study , Cognition of initiation of diseases.

  • I. 서론

       1. 연구의 필요성

    북한이탈주민은 1993년 이전까지는 한해 10명 이내였던 규모가 1994년 1월 김일성 사망 이후 꾸준히 증가하여 2006년 후에는 한해에 2,000명 이상씩 입국하여 현재 남한내 북한이탈주민은 2만 5천명을 넘어섰다1).

    국립중앙의료원(이하 ‘본원’)에서도 진료를 받는 북한이탈주민의 수가 해마다 증가하여 ‘북한이탈주민진료팀’이 출범한 2006년 1,631명이었던 환자수가 점점 증가하여 2012년에 총 25,649명으로 조사되었다2). 본원 한방신경정신과에서도 많은 북한이탈주민들이 진료를 받고 있는데, 많은 수가 탈북이라는 큰 스트레스로 인한 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나 그에 따른 신체화 장애와 관련하여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탈북 과정에서 겪은 스트레스보다 남한에서 적응하는 과정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더 크다는 보고3)도 있었고, 북한이탈주민들이 호소하는 증상과 관련하여 상담을 해 보면, 이들이 인식하는 병증발생시기는 남한 환자들과는 다른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에서 살아온 특수한 배경과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어 본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2. 연구목적

    북한이탈주민들의 ‘탈북’이라는 특성 외에도 개별적인상황들, 예를 들면 가정환경이라든지 성장과정, 결혼 생활, 탈북 과정에서의 가족 동반 여부 등에 따라서 자아정체성 및 자존감, 삶에 대한 의지뿐만 아니라 화병, 우울증과 같은 심리적 병증의 정도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북한이탈주민들에 대한 개별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의 목적은 북한이탈주민들의 병증발생시기 인식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 현재 병증에 대한 북한이탈주민들의 인식 교정에 도움이 되는 이론을 개발하고자 함이다. 따라서 이 연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연구 질문은 “북한이탈주민들이 인식하는 병증발생시기는 언제 인가?”이다.

    II. 연구방법

       1. 연구 대상

    2012년 3월~2013년 3월 본원 한방신경정신과에 입원한 북한이탈주민들 중 협조적이고 의식이 명료하며 자신의 성장과정 및 탈북과정에 대해 명확히 기억하고 있는 북한이탈주민 9명을 인터뷰하였다. 연구자는 대상자에게 면담 시작 전 비밀 보장, 녹음할 것과 중도에 중지 가능함을 설명하였다.

    연구 대상인 북한이탈주민의 사회인구학적 특이 사항은 Table 1과 같으며, 이들이 호소하는 주 증상은 Table 2와 같다.

       2. 자료 수집

    평균 입원 기간 14일 동안 1차 60~90분간 면담을 시행하고 그 후 2~4차례 더 추가 질문을 하며 자료를 수집하였다. 자료 수집 장소는 1차에는 연구자와 대상자 둘만 있는 병원 내 상담실에서 이루어졌고 추가적 면담은 환자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서 이루어졌다. 질문은 연구자가 미리 준비 한 반구조적이고 개방적인 질문으로 이루어졌고 참여자의 표현을 빠짐없이 기록하기 위해 동의하에 녹음을 진행하였다. 메모를 하면서 참여자의 비언어적 태도와 느낌 등을 기록하였다. 면담 직후에 컴퓨터를 이용하여 기록하였다.

       3. 자료 분석

    본 연구는 북한이탈주민들이 인식하는 병증발생시기를 이해하고 이에 따른 치료의 이론 개발을 위한 질적 연구방법 중 하나인 현상학적 연구 방법(Phenomenological Research)을 따랐다. 현상학적 연구는 하나의 개념이나 현상에 대한 여러 개인들의 체험적 의미를 기술하며, 여기에 참여자들이 현 상을 경험하면서 공통적으로 갖게 된 것을 기술하는데 중점을 둔다4). 그 중 의식 속에 드러나는 것에서 현상의 본질을 기술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Giorgi의 현상학적 연구 방법을 따랐다.

    현상학적 질적 연구의 핵심은 인간의 경험에 대한 본질적 의미를 탐구하는 데 있다5). 특히 심리학자인 Giorgi는 현상학의 주요한 목적은 철저하게 지식의 기초를 세우는 것이며, 일상의 삶 속의 생생한 상황을 명확히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상황 맥락 속에서 그 경험되는 가장 근접한 방식을 얻어 내는 것이라고 하였다6). 따라서 그의 현상학적 경험연구의 절차를 따라 연구 설계를 하면 다음과 같다.

    Giorgi가 제시한 4단계는 첫째, 원자료(Raw Data) 전체의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 기술 전체를 읽고, 최대한 개방성을 확보하기 위해 획득된 일반적 의미를 명시화하거나 질문하지 않고 읽는다. 연구자가 이전에 가진 선 경험들이 영향을 미치지 않게 괄호치기(Bracket)를 하고 전체 스토리를 파악하여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둘째, 보고자 하는 현상에 초점을 맞추어 의미단위(Meaning Unit)를 구분한다. 전체 의미를 조사한 후, 각 기술로 돌아가 현상학적인 학문적 환원의 틀과 조사한 구체적 현상 안에서 문장들을 의미단위들로 구분한다. 셋째, 보고자 하는 현상을 강조하여 참가자 의 일상적 표현들을 연구자가 속한 학문적 언어로 전환한다. 의미단위들의 윤곽을 잡고 단위들을 학문에 가장 적합한 표현으로 의미단위들을 전환한다. 이 때 원자료의 적극적 변형이 일어나며 연구자는 의미단위들을 전환하기 위해 자유변경의 방법을 활용한다(Method of Free Imaginative Variation). 넷째, 전환된 의미단위들을 구조의 일관성 있는 진술로 통합하여 체험의 구조 조성을 완성한다. 여기에서는 구성요소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현상의 구조를 기술하게 된다7).

    III. 연구결과

    북한이탈주민들은 탈북시기를 막론하고 북한에서의 생활에 대해 비교적 뚜렷하게 기억하는 편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성향, 가정환경, 형제관계, 학창 시절, 사회생활 및 결혼과정까지 몇 년도에 일어난 일인지, 그 때 어떠한 심정이었는지 대부분 기억하였다. 북한에서의 사회 계층은 상(上)에서 하(下)까지 다양했는데, 수준의 기준은 내담자들이 ‘먹고 살기 힘들었다’, ‘생활이 어려웠다’라고 표현하는 경우 하, ‘굶지는 않았다’면 중, ‘형편이 괜찮았다’, ‘어렵지 않았다’면 상으로 평가하였다.

    Giorgi의 현상학적 방법으로 북한이탈주민들의 병증발생시기 인식에 대해 분석한 결과를 의미단위로 구분하였다. 구조는 연구 참여자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획득된 다양한 현상들

    중에서 가장 공통된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8). 그 결과 연구 참여자들이 유사하게 인식했던 병증발생시기를 북한에서의 불행했던 생활, 고된탈북 과정, 남한에서의 낯설고 서러운 생활 및 남한에서의 필사적인 적응과정 이렇게 4가지 과정으로 분류하였고, 각 내담자들이 진술하는 의미들을 일관성 있게 통합하는 절차에 따라 15개의 하위구성요소를 구성하였다. 이상의 북한이탈주민의 병증발생인식 시기는 Table 3과 같다.

       1. 북한에서의 불행했던 생활

    북한에서부터 병증이 있는 자신을 기억하는 북한이탈주민들은 북한의 경직된 사회체제와 그에 따른 남성성ㆍ여성성의 확실한 구분, 출신 성분에 대한 사회적 활동의 제한으로 인한 억울감과 체념의 정서가 많았다. 또한 생활고로 경제활동 전선에 뛰어들었을 때에도 건강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무리해서 일을 많이 했다고 이야기하였다.

    1) 어려웠던 가정환경으로 인한 힘든 유년 시절

    북한이탈주민들은 당원이나 고위 간부일 경우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농사나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중하위 계층이 많았고 특히 남한 출신인 경우 성분이 좋지 않다하며 차별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을 경우 여성임에도 대학교까지 나온 경우가 많았지만, 그 렇지 않을 경우 일찍 결혼을 하거나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바로 생활 전선에 뛰어든 경우가 많았다.

    부모님께서 농사일을 해도 성분이 안 좋아서(경북 경주에서 온 것) 힘이 없고, 생활이 어려웠단 말입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일 시작했어요. -연구 참여자 F

    부모님 다 공무원이어서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었어요. 막내딸이라 귀여움도 많이 받았고. 나도 대학교에서 경제학 전공해서 공부 마치고 상업관리소에서 일했죠. -연구 참여자 E

    공무원 등 비교적 북한에서 좋은 직업군에 속한 북한 여성들도 회사 내에서의 무시, 차별 대우, 성희롱 및 임금 착취등을 수 차례 당하기도 하면서 그러한 남성 중심의 사회적 분위기에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형편이 좋지 않았던 여성들은 체념하지 않고 장사를 시작하는 등 적극적으로 생활을 타개해 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시기를 회상하면서 ‘그 때 너무 고생해서 아픈 것 같다’‘하고 싶은것 하면서 살고 싶었다’라고 이야기 하는 등 삶을 위해 처절하게 살아왔던 지난 날과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해 자조하는 모습 보였다.

    2) 원치 않은 결혼생활로 인한 고통

    북한에서 남성을 우대하고 여성은 가정에서 현모양처의 역할을 강조하는 분위기는 근대국가 이후의 국가가 지닌 가부장적 특성에 유교식 통치이념이 혼합된 결과이다. 또한 북한 남성들은 만 18세부터 27세까지 10년이라는 군사복무를 해야 하고 경제난 이후에는 제대 군인에게도 국가에서 배급을 제대로 주지 않아 경제적 능력이 없기 때문에 결혼을 꺼리게 된다9). 이러한 가부장적인 사회적 분위기 안에서 10년이란 긴 시간을 군대에서 보낸 남자는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남성성을 학습하게 되어 북한 여성은 폭력과 외도 등으로 고통 받는다.

    동네에서 남편이 여자를 만난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남편은 인물도 좋고 돈도 많고 차려입은 것도 잘 차려 입어서 같은 기업소에 다니는 혼자 사는 여자들이 줄줄 따라다녔어요. 내가 벌어놓은 돈들은 저축소에 맡기지 못하니까 농 밑에 뒀었는데 그 돈을 빼다가 남편이 밖에서 쓰고 다닌 거지. 너무 화가 났지만 남편이 사과하니까 참고 살았는데 나중엔 자기가 더 기가 세지더라구. -연구참여자 I

    (남편은) 술에 찌들어 살았죠. 원래 바다사람들이 일하면서 술을 많이 마셨는데 남편은 집에 와서도 밥도 안 먹고 날마다 술만 먹었어요. 틈만 나면 술 가져오라 하고 칼을 들고 죽인다고 하고. 내가 도망가서 다른 집에 숨어있으면 찾아와서 막 때려 부수고 혼자 술 먹다 술이 떨어지면 밤에 남의 집 문 두드려서 술 달라 하기도 하고. 동네 창피해서 남의 집에 숨지도 못하고 우리 집 마루밑에 숨은 적도 있어요. -연구 참여자 G

    이렇게 외도와 폭력을 일삼는 남편을 보면서도 아이 때문에, 이웃 보기 부끄러워서, 경제적ㆍ구조적 문제로 이혼하기 힘들어서 그냥 참고 살아야 했던 결혼 생활에서 가슴 답답함 및 열감이 오르는 화병 증상이 발생한 것 같다고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았다.

    3) 화폐개혁에 따른 경제적 가치의 변동에 대한 혼란과 분노

    북한의 화폐개혁은 1947년부터 2009년까지 5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표면적인 배경으로 비정상적 통화팽창을 조절하고 공식 상품 유통망을 강화하며 시장 역할을 축소하는 의의를 내걸고 있지만 실제로 시장통제를 더욱 강화하고 시장 세력에게 큰 타격을 주게 되었다. 특히 2009년 화폐개혁은 1, 3, 4차의 구ㆍ신권 교환비율이었던 1:1과 달리 100:1이었고, 6일의 교환기간, 30만원의 교환한도액 등의 조건으로 당시 자영업을 하던 상인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10).

    이렇게 교환의 조건이 터무니없었고 물가는 그대로이지만 화폐의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에 많은 혼란과 분노, 억울함을 느꼈고, 이것이 탈북의 계기가 된 경우도 있었다.

    내가 왜 넘어 온 줄 알어요? 화폐개혁 되면서. 내가 가진 돈이 전부 종이장이 되면서 너무 화가 난거야. 그래서 친구 언니 집에 가서 내 울면서 이야기했지. 죽고 싶다고. 그 언니가 그랬어. ‘너는 이제까지 남자도 없이 이뤄놓은 것도 없이 뭘했니? 한국이나 가서 인생 펴라’하길래 하루 만에 브로커한테 전화 했어요 내가. -연구참여자 I

    북한에서 화폐개혁을 했는데. 50만원을 천원으로 바꿔주고, 50만원 이상 되는 돈은 나라에서 다 가져갔어요. 물가는 그대로인데... 진짜 물건을 구할 수도 없고,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중국에 있는 오빠한테 내 전화해서 나 좀 도와 달라 이야기했죠. 오빠가 ○○아 중국으로 와라해서 무작정 두만강 건너서 갔단 말입니다.-연구 참여자 F

    4) 경제적 어려움으로 생계활동 시작

    북한에서는 80년대 말부터 경제 사정이 조금씩 어려워지면서 지역적으로 배급을 줄여나갔다. 90년대 들어 이러한 현상이 확대되었고 94년 김일성의 사망 이후 95년 고난의 행군시기가 시작된다. 이렇게 공장가동이 중단되고 식량배급이 원활하지 않게 되자 그동안 직장에 있던 여성들이 가 정으로 돌려보내졌다. 따라서 직장에서 가정으로 돌려보내진 북한 여성들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남자들은 10년 간의 군복무를 마치면 대부분 음주에 빠져서 지내고 실질적으로 가장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경우가 많았다. 생계를 위해 수요가 많은 중국이나 국경 근 처로 가서 장사를 시작했고 고난도 많이 겪었다.

    또한 동국대 북한일상생활연구센터에서는 북한이탈주민 여성들 225명을 대상으로 북한에서 여성들의 생계담당 참여정도를 조사한 결과 약 44.4%가 혼자 책임을 졌다라고 대답하였고 남편이 책임졌다는 응답은 4.4%에 그쳤다11).

    2002년일 거에요 아마. 아는 아저씨가 중국 훙륭강성으로 와서 장사를 하라고 했어요. 식당을 했었는데 다 망했어요. 재개발 되면서 부도 나가지구. 그래 가지구 꼬치 팔면서 세 식구가 장사 했어요. 강제철거도 많이 당하고 칼바람에 아기 꽁꽁 싸매고 장사 했어요. 나중에는 한국인 보모로 들어가서 한국 음식도 배우고...저는 공장에서 식당일 하고 남편은 대리했어요.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한국에 가야지 했지요. -연구 참여자 B

    오빠들이 간부였거든.. 중국에 몰래몰래 드나들 수 있었는데 그때 제빵사, 아이스크림 만드는 기술 배웠어. 오빠들한테 기본 자금도 받고.... 이제 죽어도 이거 하다 죽자 싶었어. 나는 항상 아들들한테도 말했어요. ‘뭐든 마음만 강하게 먹으면 못할 일이 없다’ 근데 진짜 그렇게 됐어. 남편은 기술이 좋아서 일본사람 집에 놀러가서 빵 만드는 기계 보고 스케치를 해왔는데 그대로 만들어서 가게냈어요. 장사? 잘 되었지. 수익 80프로는 나라에 바쳐야 되는데 일부러 적게 써서 내고 간부들한테 뒷돈도 주면서 장사하는 법을 배웠지... 싸우기도 많이 싸웠어. 영업정지 시키면 간부들 있는데도 내가 책상을 이렇게 꽝 내리치면서 싸우고. 또 영업 정지시킨 사람부르라 내가 중앙부까지 가겠다 하면서 배짱 좋게 싸웠지. 지금은 그러라 해도 못해. 한..8년동안 죽도록 일만 한 거 같애. -연구 참여자 I

    이러한 경제활동을 통해 화병이나 우울증과 같은 심리적 문제보다는 실질적인 노동으로 인한 요통, 슬통, 견통 등 근골격계 질환이 많이 발생하였다.

       2. 고된 탈북과정

    탈북을 결심하여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생명의 위협 및 발각되어 북송되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컸다. 이때 겪은 심리적인 불안과 공포가 현재의 불안 증상으로 이어진 것 같다고 진술한 사람이 많았다. 또한 탈북 후 북한에 남겨진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을 호소하거나 의도하지 않고 탈북한 북한이탈주민들은 우울 증상을 호소하였다.

    1) 북한에서의 불만족스런 생활에 따른 탈북 결심

    북한의 사회주의는 사상적으로 경직되어 있고 보수성, 배타성이 강하다. 그러던 와중에 친구, 친척 등 지인들을 통해 중국과 한국의 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자기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문화를 보며 희열을 느낀다. 무슨 일이든 조합을 통하여 공동 책임, 공동 역할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자신이 자유롭게 노동하여 번 돈에 대한 소유권이 전적으로 자신한테 있는 자본주의를 접하게 되면서 현재 북한의 경직된 사회주의에 대해 반발심을 갖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탈북을 결심하게 된 경우도 있었다.

    북한이 협동조합이나 생활조합처럼 다 같이 모여서 회의하고 일하고 그러는 게 너무 많아서 그게 답답했지. 그래서 자유로운 중국으로 가야 겠다 했어요. 오니까 너무 좋은 거야. 혼자서 결정할 수 있고 그런게. -연구 참여자 G

    북한 정부에서... 내가 학교에서 정치경제 강의를 했거든. 자꾸 나한테 관심을 갖는 거야. 오늘은 어디서 뭐하냐 어디 가냐 자꾸 귀찮게 하고.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나 혼자 중국 가버렸지. -연구참여자 C

    탈북을 결심한 후에는 브로커를 통해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제 3국을 통해 넘어가거나 직접 압록강을 건너는 경우도 있었다. 자칫 발각되었다가는 그 자리에서 총살 당하거나 강제 북송되어질 위험을 무릅쓰는 과정에서 엄청난 불안감과 긴장, 스트레스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7년인가? 중국에서 TV를 보는데, 한국 드라마가 나오는거야. 너무 좋아 보이고, 열심히 벌면 한국서 잘 살 수 있겠다 했지요. 여기서는 답답하고 굶고, 이것보다 더 좋게 살아보자 해서 혼자 탈북 했지. 근데 두만강 건너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거야. 여기서 걸리면 죽는데, 입 꼭 다물고 추워도 꼭 참고. 아이고,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파들파들 떨립니다. -연구 참여자 D

    2) 의도하지 않은 탈북

    국경에서 삶의 의욕 없이 멍하니 있다 얼떨결에 넘어온 경우, 우연히 장사를 위하여 또는 자식을 찾으러 중국에 왔다가 북한에 다시 못 돌아간 경우 등 다양하였다.

    (결혼) 상대자를 놔두고 집 나와서 어머니가 계신 길주로 가자니 나이 들어 엄마에게 기대고 싶지 않았어요. 기차도 타지 못하고 역전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브로커가 있었어요 거기. 내 나이 30살이었는데, 나를 중국이 보이는 강으로 데리고 가서 저 강 건너를 보아라 얼마나 살기 좋은지, 사람들이 얼마나 잘 먹고 사는지 저렇게 좋은 나라로 시집가면 어머니도 모시고 와 살 수 있다 했어요. 그래서 그 말만 믿고 바로 배를 타고 강을 건넜죠. 근데 그게 속은 것이었어요. 그 후로 언니, 남동생, 엄마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라요. -연구 참여자 B

    내 딸이 21살이었을 때. 이뻤어요. 근데 두만강 경비대원이 내딸을 마음에 품구서 욕심을 낸거야. 얼굴도 잘생기고 부모도 집안도 괜찮았는데, 술만 먹으면 막 팬대. 주변에서도 다들 결혼시키지 말라고 말렸어요. 나도 계속 반대 하고 딸도 싫다고 했는데 그 놈이 내가 출장 가거나 해서 집 비우면 딸 찾아와서 칼 들고 같이 죽자고, 죽어서라도 같이 하자고 협박을 했어. 그 놈 때문에 딸이 정신 잃고 쓰러지고 그랬단 말입니다. 신고를 해도 집안이 좋아서 경비대에서만 쫓겨나고 풀어주고, 그럼 또 찾아오고 그랬어. 근데 내가 먼 데 출장 간 사이 딸이 편지 써 놓고 중국으로 간 거야. 도망 간 거야. 내가 공무원이니까 나라한테 가서 도와달라고 했지. 여권 받고 직접 딸 데려오려고 했는데 딸이 ‘어머니는 돌아가시오. 난 이제 도망 나온 역적이오’하면서 안 가겠다는 거야. 딸 버리고 어떻게 가. 눈 앞이 캄캄했지. -연구 참여자 E

    경제적, 복지적인 목적을 가지고 탈북한 북한이탈주민들보다 이렇게 의도치 않게 탈북하게 된 북한이탈주민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탈북 한 게 잘 한 것 같아요?”라는 질문에 “후회 한다”, “여기 와서 너무 고생을 한다” 등 후회하는 대답을 많이 하는 모습 보였다. 남한을 동경하여 또는 북한의 체제에 큰 불만을 품고 탈북 결심을 한 경우가 아닌 경우는 탈북이라는 선택 자체에 회의를 가진 적이 많았다고 한다.

    3) 제 3국에서의 고된 시간

    탈북자들은 중국을 거쳐 오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 태국,라오스가 그 다음이었다. 제 3국을 거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신분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숨어 살아야 하고 언제 발각되어서 강제 북송되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탈북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 중국인과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고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모두 헤어졌다고 하였다. 이유는 남편 또는 남편의 가족들의 폭력이 너무 심하고 자신을 하녀 취급하며 오히려 자신을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는 등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폭력이 있었지만 자신 의 신변을 위해 참고 살아야 했고 그 때문에 화병 또는 폭력으로 인한 두통 등 2차적 외상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발각에 대한 불안감으로 심계 증상이 발생하였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에서 중국교포 도우미를 했어요. 거기 주인이 조카를 소개해 줬는데, 원래 한국 왔다 갔다 했었어요. 근데 선 본지 두 달만에 한국으로 가버렸어요. 1년 동안 그 사람 어머니, 아들 내가 다 모셨어요. 근데 그 사람 누나 아들이란 사람이 미용사였는대 괴팍하고 다혈질이었어. 완전 또라이 기질이 있었어. 나는 그래도 성격이 많이 이해하려는 편이고 남한테 나쁘게 하지는 않아요. 남편이 아들 교육 비용으로 돈을 보내주는데 글쎄, 나를 가족으로 생각하는지 어쩐지 도우미 월급은 주지도 않고 먹고살 정도만 보내 주는거야. 근데 내가 혼인신고를 안 하니까 신분증이 없잖아? 은행에서 돈 찾기 힘들지 그러니까 그 조카한테 돈 좀 찾아다 주라 한거에요. 근데 그 조카는 내가 북한사람이니까 돈 갖고 튈 것이다 오해를 한 거에요. 그러면서, 돈을 다 안주고 환율이 오르면 준다 했어요. 나는 가족이라 생각하고 이렇게 돌봐주는데 속으로 섭섭하다 했어요. 그래서 내가 ‘너가 오해하는 거 같다. 돈 밖에 모르는 그런 사람 아니야. 너가 그러니까 엄마한테 욕 먹는 거야. 내가 북한에 있을 때도 신랑이 나 많이 때렸는데 헤어지지 못한 거는 가족이 있기 때문이야. 가족끼리 서로 이해하자.’ 이야기를 했더니 내 얼굴이 세 보여서 그런지 싸우러 온 줄 알고 조카가 나를 향해 댐벼 들었어. ‘개 같은 간나’라 하면서 불 같이 손찌검을 하고, 미용실 의자, 사발 다 집어던지고 벽에 밀어붙이고 머리를 막 찧고...-연구 참여자 H

    중국에서 지금 남편 만나서 살았어요. 중국에서 처음 한 3년은 농사 짓고 했는데, 고생 많이 했지. 그 후에 둘째 딸이 집 얻고 같이 살면서 외손주도 보고, 노인협회도 다니면서 잘 지내도, 늘 마음이 안 좋았어. 언제(북한에) 잡혀갈지 모르니까 늘 불안한 거야. 몇 년 지나서 노인협회에서 빨리 오라고 해서 걸어가는데 숨 차고, 심장이 막 쪼이매 숨을 못 쉬었단 말입니다. -연구 참여자 C

    중국에서는 1979년 1월 1일부터 1인 1자녀 정책인 ‘계획생육법(family planning laws)’ 및 남아선호사상으로 남녀성비가 14:1로 부자연스럽게 높다(북한과 인접한 랴오닝(邊寧), 지린(吉林), 헤이룽장(黑龍江) 성 기준). 따라서 독신남, 노총각들이 넘쳐나게 되어 교제나 성 파트너, 집안일 도움이 절실하다. 이촌향도 현상으로 중국 여성들은 도시로 빠져나가면서 탈북 여성들을 중국 남성에게 팔아넘기는 인신매매단이 활개를 치게 되었다. 탈북 여성들은 결혼 후에도 남편의 제안을 거절하거나 거부할 시 가혹한 학대와 폭력을 당하고 있다12).

       4) 대사관에서의 고난

    일반적으로 탈북을 하게 되면 제 3국을 통해 심사를 거쳐 보통 6개월에서 1년간 수감 생활 후 대사관에 보내진다. 남한 입국을 위하여 기다리는 과정에서 북한이탈주민들 간의 갈등이 많다고 한다. 또한 대사관에서 심사를 받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재심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긴장과 불안 감이 심하다고 한다. 따라서 사람들 간의 갈등과 기약 없는 기다림으로 불안 증상, 화병 등을 호소하였다.

    대사님이 북한에서 있었던 일을 쓰라 해서 쓰는데, 오빠가 죽긴 죽었는데 언제 죽었는지 모르지 부모님 당증(黨證)번호 쓰라 하는데 그것도 모르지. 모를 수밖에 없어요. 당증은 죽을 때까지 몸에 가지고 다니니까 볼 일이 없어요. 그러니까 자꾸 내가 수상하다며 심사에서 떨어뜨리고 떨어뜨리고 한국에 안 보내주는 거야. 대사님만 보면 온몸에서 열이 나고 심장이 쪼그라들고 땀이 흘러내리고 머리도 아프고... 지금 이렇게 머리 아프고 그런 것도 다 그 때부터인 것 같아요. -연구 참여자 B

    한국으로 오는데 같은 조 사람들은 중국에도 오래 살고, 물정도 많이 알고 그랬어요. 근데 나는 북한 사람치고 세련되고 어려보이고 그러니까 시기ㆍ질투가 많았지요. 내가 돈 한푼도 없는데, 국제난민인정재판을 받으려고 40만원인가를 조에서 같이 내야 하는데 날 떨구려고 모함을 했어요. 라오스 대사관에서 난 다 조사 받고 나왔는데, 조사받으면서 (내가) 간첩이라고 모함하고 도둑질 했다고 몰아갔어요. 다시 조사 받으면서 욕하고 수치스런 말도 듣고, 도둑이라고 하니까 몸 수색한다고 내 옷을 다 벗기고 그랬어요. 난 아니다라고 변명을 했는데 그러면 집단으로 와서 때리는 거야. 나는 그러면 한국에 안 간다 했어요. -연구 참여자 F

    5) 남은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

    북한이탈주민들은 혼자 탈북 하여 어느 정도 돈을 모으면 브로커를 통해 나머지 가족들을 데리고 오는 식으로 가족탈북을 하게 된다. 가족끼리 탈북에 대한 합의를 얻지 못하는 경우 혼자 탈북하기도 하며 나머지 가족들은 북한 당국에 탈북 사실을 숨겨야 안전을 보장 받는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감시를 받거나 감옥에 끌려가게 된다.

    먼저 중국으로 갔는데 2년인가 후에 아들이 혼자 넘어 왔어요. 근데 아들 말이 남편이..가족들이 넘어가고 하니까 나라에서 많이 괴롭혔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스트레스 받아 중풍으로 한 번 쓰러지고. 그래도 난 꼼짝도 안 했어요. 나중에 한국 넘어오면서 남편이 죽었다는 얘길 들었는데, 그래도 아이들 아버지인데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아 죄스러운 거에요. 몇 달 계속 아무것도 못하다가 한국 와서는... 동사무소에서 쓰레기 줍는데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운 거에요. 일 그만두고 쉬는데도 원래 아팠던 머리도 쏘는게 더 심해지고..병원 다녀도 일 없었어요. 이건 마음의 병인 것 같아. -연구 참여자 A

    내가 빨리 아들을 장가보내고 재산 정리해서 떠나자 해서 기계, 원자재 다 팔아서 정리했어요. 그래가지고 아들들한테 ‘너네한테 바친 내 인생 내가 살다 죽겠다’ 했어요. 남편한테도 나 3년만 중국 갔다 올게. 당신도 나 없이 살아봐 하고 나왔더니, 남편은 웃었어요. 이제까지 죽도록 자식하고 일만 보다 살았는데 당연히 못하겠거니 했을 거야. 중국 가서 일하면서 살고 있는데 3년 후에 남편이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고혈압으로. 하늘이 무너지고 밥도 못 먹고 일도 못하고 그랬어요. 자식들한테도 너무 미안하고... -연구 참여자 I

    2010년 딸이 탈북 하다가 북한에 잡혀갔어요. 내 무신 소리니 그랬어요. 그러고 그 때 돈을 보냈으면 빼올 수 있었는데 하면서 울고불고 정신 못 차렸어요. 근데 딸이 감옥에서 죽었다는 거야...나도 죽으려고 했어. 한 달간 정신 못 차리고 잠을 아예 못 잤어요. 1년 넘게 매일 울었어요. 이때부터 일도 못하고 여기저기 아프고..-연구 참여자 D

    이렇게 남은 가족이 고통 받거나 사망했을 시 엄청난 충격과 함께 죄책감을 가지게 되며,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요구할 시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탈북과정에서 가족이 붙잡혀 죽음을 당하는 경우 그 충격은 더 생생하고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따라서 가족에 대한 죄책감, 그리움 등으로 우울증이 오는 경우가 많았고, 북에 남은 가족을 브로커를 통해 데려오기 위해 현재 남한에서 하는 경제 생활의 가장 큰 동기부여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3. 남한에서의 낯설고 서러운 생활

    제 3국을 거쳐 남한에 들어오게 되면 국정원에 들어가 일반적으로 신분검사라는 것을 받는다고 한다. 조사가 끝나고 하나원으로 가서 생활하다 남한 각 지역에 배정되어 각자 남한 생활에 적응하게 된다.

    1) 국정원과 하나원에서 고난을 겪음

    국정원에서는 북한의 어느 지역 어느 동네에 살았으며 누구와 친했고 어떤 일을 하였는지 등을 적어서 내고 보통 1개월에서 길게는 3개월까지 조사 받다가 하나원으로 보내진다. 하나원에서는 북한과 다른 남한의 언어, 사회 분위기, 경제 활동 등을 배운다고 하였다. 하나원에서 교육이 끝나면 남한에서 거주하고 싶은 지역을 신청하고 신청자가 많을시 무작위로 배정이 된다. 국정원에서의 생활이 답답하고 힘들다고 한 내담자는 한 명으로 대부분 여기에서의 생활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또한 하나원에서 같은 북한이탈주민 사이에서도 무리를 형성하는 사람들이 있어 소외 되었을 시 힘들었다는 진술도 있었고 이 시기에 갑작스럽게 두통과 열감 등이 발생하여 진료를 받기도 하였다.

    하나원에 들어가면서 잠도 안 오고 머리 뒤로 막 후끈후끈하매 땀 나고... 혈압이 올라가서 혈압약을 먹었는데 듣지를 않는거야. 수면제를 타 먹기 시작하니 좀 괜찮아도 계속 그랬어요 -연구 참여자 I

    한국 와서 국정원 조사도 간첩에 대한 취조처럼 계속됐어요. 거짓말 탐지기도 여러 번 하고. 국정원 조사는요 보통 일주일 걸리고, 특별한 경우에 길어지는데 나는 일주일 조사를 받고 나왔어요. 그러니까 주위 모든 사람들이 간첩인데 나왔다고 수군 거렸어요. (나를 모함한 사람들이) 벌써 주변 사람들한테 나에 대한 안 좋은 얘기를 다 퍼트려 놓은 거에요. 하나원에서도 나는 독방 쓰면서 사람들하고 어울리지 못했어요. 같은 동포니까 나를 이해하겠지 했는데, 오히려 더 배척하고 그러니 더 힘들었지요. 전부 다 죽이고 싶었어요. 내가 상금 탄 일이 있었는데, 또 나를 시기하고 질투 하고 그러니까 혈압이 올라가는 거에요. 토하기도 하고, 잠도 못자고 몽유병처럼 돌아다니고 일어났다 앉았다 하면서 이상해지기 시작한거에요. -연구 참여자 F

    2) 남한에서의 차별 대우

    남한에서의 생활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북한에서 전문기술을 배운 적이 없는 여성들은 대부분 아르바이트 형태로 식당, 간병인, 단순 공장일 등에 종사하고, 전문 기술을 배우고 고위교육과정을 받은 여성들은 능력을 살려 남한에서도 그와 관계된 일에 종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현실 적으로 좌절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제때 임금을 받지 못하거나 특유의 북한 말씨 때문에 무시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 때 우울증이 심화되기도 하고, 개인적인 적응 능력이 뛰어난 경우에는 삶의 의지를 더욱 다지기도 했다.

    잠도 거의 안 자면서 악착같이 일했어요 그 땐. 공부도 열심히 해서 자격증도 5개나 땄어요. 회사 사장네가 처음에는 잘해주었어요. 일 잘한다고 돈도 남들보다 더 주고, 잘 못 챙겨 먹으니까 음식도 챙겨주고, 생일도 챙겨주고 따로 많이 챙겨주었어요. 나는 또 그만큼 열심히 일하고.. 너무 좋았죠 배운 거 다 배우고 돈도 벌고 하니까. 그런데 사장네가 점점 도에 지나친 거지요. 집안일까지 시키면서 나를 막 부려 먹었어요. 5일 동안 무리하니까 고열로 쓰러져서 충주 건국대 병원엘 갔어요. 과로로 신장이 부었다 하더라구요. 사장은 자기가 치료해줄테니까 나오라 해서 5일 만에 퇴원했는데, 그동안 내가 할 일이 그대로 있는 거에요. 더 못 참고 그만둔다 하니 내가 일한 만큼 돈도 안주고, 2달치 밀린 월급도 안주더라구요. 주겠다고 말만하고 안주면서 거짓말만 하고, 지금은 핸드폰 번호도 바꾸고 연락도 안 되요. 복수하고, 다 죽이고 싶어요. 휘발유를 한통 가져가서 회사에 불 지르고 법원에 사유서 써서 보내고 나도 같이 죽겠다고 계획도 세웠었어요. 믿었던 사람들한테 자꾸 배신 당하니까 충격도 많이 받고 정신적로도 힘들어요. -연구 참여자 F

    3) 남한의 의료서비스에 대한 불만

    북한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국민 모두에게 평등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국가주도형 사회주의 보건의료체계를 발전시켜왔다. 아울러 ‘사회주의 보건제도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 ‘무상치료제’와 ‘예방의학’을 중심으로 하는 보건의료정책을 추진해 왔다. 하지만 1960 년대 중공업 우선 발전정책 및 군사비 확대로 의약품 생산이 어려워지자 ‘정신적 자극’을 우선하고 ‘예방의학’을 강조하였다. 즉, 정신적 자극으로 물적 토대의 약화를 보완하고 예방의학으로 의약품의 수요를 억제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보건의료가 산업화되면서 더 많은 수입을 얻으 려는 제약독점업체들에 의하여 약물만능주의가 선전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릴 것을 바라며 병을 장려한다고 보았다13). 이러한 영향 때문인지 오히려 불필요한 검사와 약을 권유함으로써 돈을 벌려는 속셈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픈 곳은 점점 많아짐에 따라 진료를 보는 과(科 가)가 점점 늘고 복용하는 약의 용량이 많아지는데도 병의호전이 없거나 더 심해지는 등 진료의 횟수가 병증의 호전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병원과 의사들에 대한 불신으로 자가 치료를 하거나 더 나은 병원을위해 전전하였다.

    또한 북한이탈주민들은 그들이 호소하는 증상들이 MRI, CT, X-ray 등 검사 상 이상 소견이 없을 때 의사들이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 등 정신과적 증상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 때문에 불필요한 검사를 자꾸 권하고 복용하는 약이 증량되어 가는 것에 큰 불만과 스트레스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의료진에 대한 불신 및 불만으로 진료를 받을수록 더 증상이 심해지거나 다른 병이 생기는 것같다고 인식하였다.

    정신과에 입원해서 내 치료를 많이 받았어요. 치료를 받고 있으니까 자꾸 여러 과에서 벌떼같이 달려 들어가지고 내가 원치도 않는데도 검사를 계속 하면서 여러 가지 병명이 생기는 거에요. 나는 병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원하지도 않는데 이과 저과 옮겨가면서 검사 하고 온갖 병을 다 만들어 내는 것 같단 말입니다. 약도 많이 먹다보니 위장도 안 좋아진 것 같고. 그래서 화도 많이 나고, 점점 병원에 대해 믿음, 믿음이 사라져요. 자꾸 여기저기 아프고, 여기 저기서 병을 만들어 내다보니까 내 살 수 있을까 하고 의심이 갑니다. -연구 참여자 D

    1월에 어깨가 막 쏘니까 일을 그만두고, 정형외과에 치료 받고 퇴원했는데, 집에 가는 길에 심장 통증이 생기면서 까무라쳤어요. 다시 입원해서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심장 검사 받고, 수술도 한번 더 받아도 검사에는 이상이 없다하는데 아픈 건 그대로에요. 그래서 정신과에 가보라고 해서 가니까, 정신과 과장이 하는 말이, 심장 근육의 문제로 스트레스와 연관이 있다고 했어요. 입원치료 받는데 자꾸 구역질이 나고, 밥을 못 먹어서 검사를 또 받았어요. 검사를 받을수록 자꾸 병이 생기니... -연구 참여자 C

       4. 남한에서의 필사적인 적응과정

    북한에서의 생활, 탈북 과정 및 남한에 들어오기까지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며 병이 생긴 북한이탈주민들은 낯설고 냉정한 남환의 환경, 불필요한 검사를 권하며 기질적인 문제가 없을시 정신과적인 문제로만 간주하는 병원 분위기, 현실적으로 좋지 못한 취업 환경 등에 좌절하고 체념한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병증도 잊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치료에의 의지를 다졌다.

    1) 구직 등 경제적 활동을 위해 노력함

    북한이탈주민들은 한국의 자본주의 경제적 환경에서 양가감정을 가진 듯하다. 재산의 자기 소유가 가능하고 돈이 있으면 자신의 출신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의료서비스 등을 돈을 지불하고 받아야 하는 시스템에 불만이 있지만, 북한에서보다 양질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는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가 만족되지 못할시 불신과 분노, 불안감은 더 커진다.

    남한에서 우리를 도와주고 혜택을 준다는 얘길 들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근데 막상 와보니 실제로 많은 도움을 주어서 참 감사하지요. 북한에서처럼 무상으로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더 좋은 치료를 해주니 좋지. 그러니까 북한 사람들이 와서 돈을 열심히 벌려고 해. 근데 안 나으면 더 화나지. 돈 주고 치료받았는데 고려약보다 못하면. -연구 참여자 E

    또한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것이 북한 이탈주민들의 경제적 활동의 큰 동기부여 중 하나이다. 그러나 최근 중국 정부가 탈북자 브로커 조사를 강화한다고 한다. 탈북자들을 집에 재워주었거나 도와준 적이 있는 사람들은 5천 위안(한화 약 87만원)에서 2만 위안(한화 약347 만원) 상당의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고 한다14). 따라서 브로커들은 이러한 위험성을 내세우며 대략 200만원에서 많게는 600만원까지도 요구한다고 한다. 요구하는 액수가 커짐에 따라 북한이탈주민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돈을 벌기 바쁘다. 큰 돈을 지불하고 브로커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가족의 무사 귀순을 기다리는 과정 자체가 큰 스트레스이지만 가족의 안전과 함께 모여 산다는 안정감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의지가 있었다. 따라서 북한에 잔류가족이 있는 북한이탈주민이 그렇지 않은 북한이탈주민보다 사회적ㆍ경제적으로 더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고 병에 대한 극복의지도 컸다.

    중국에 있던 딸 둘이 북한에 잡혀 갔어. 펑펑 울다가 딸 친구한테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브로커를 통해 한국으로 왔지. 그 때 몇 백만원 줬을끼야. 정신 좀 차리고 북한에 잡혀간 딸들을 데려오기 위해 하나원에서 나와 아파트 청소일 하며 열심히 돈을 모았지. 심장 수술 해도 쉬지도 않고 일했어. 저 옆방에 아저씨 있지? 여자 데려오려고 600 모아야 된대. 지난 번 돈 준 브로커가 누가 신고해서 잡혀갔거든. -연구 내담자 C

    2) 새로운 일에 대한 즐거움

    한 연구에 따르면 남한에서 취업교육이나 정규교육을 받은 북한이탈주민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소득 수준이 증가한다고 한다15). 북한이탈주민들은 영어, 컴퓨터, 운전, 요양보호사 등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갖고 교육을 받거나 자격증을 취득하는 경우가 많았다. 북한에서는 여성의 직업이나 사회활동이 출신성분 또는 여성이라는 성(性) 때문에 제한이 많았다. 하지만 남한에서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하고 이 또한 자존감, 자부심 및 경제적 소득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이 자신의 신체적ㆍ정신적 아픔을 달랠 수 있는 수단이라 생각하였다.

    자꾸 신장이 안 좋아서 그런가 오줌에 문제가 있어서 요실금 수술하고 바로 요양보호사 따려고 공부 열심히 했지요. 재밌어요. 배우는 게. 아픈 것도 잊을 수 있고 돈도 벌고. 요샌 대학원도 알아보고 있어요. -연구 참여자 F

    남편은 양주에서 고주파 일 하면서 주말 부부하고 아들은 여기서 내가 핸드폰 케이스 회사 다니면서 키우고. 몸이 힘들어도 일을 해야 스트레스도 풀리고 아픈게 잊혀지니까... 여기서 내가 제일 일 잘한다고 사장님이 그래요. 우리 아기가 엄마 대단하다 하면 좋겠어요. -연구 참여자 B

    3) 아픈 자신에 대한 수용 및 치료에의 의지

    북한이탈주민들은 모든 의사들은 사상정신의 도덕적 풍모의 표현인 ‘정성’으로 환자를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주요 증상 외에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신체 증상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편이며 이것을 의사들이 정성으로 경청해 주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상황상 진료 시간이 짧았다거나 자신의 증상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하거나 정신과적인 문제로만 간주할 경우 강한 불만을 가지며, 이러한 점이 병의 호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하지만 북한이탈주민들은 남한의 의료 제도적 특성상 예약 환자들을 정해진 시간 안에 봐야하는 시간적 제약과 PTSD로 인한 정신적 충격의 문제를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을 인지하고는 있었다. 따라서 신체적인 증상뿐만 아니라 탈북이라는 일생의 엄청난 사건을 경험함에 따라 심리적인 안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였고 앞으로 치료를 위해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머리 아플 때 마다 진통제 먹고, 그러면 다시 속 쓰리고 변비가 생기고 변비약을 먹으면 또 냉이 흘러서 병원에 가면 신경성 이라 하면서 염증약을 주고, 허리가 아파서 진통제를 맞으면 이틀 있다 다시 재발해서 잠은 못 자고. 그래서 약을 일부러 끊어봤는데 안되겠더라구요. 병원 가면 다 정신문제라 하고. 다른 병원에 자꾸 저를 넘기려고 하는 거 같아요. 근데 내가 고생을 많이 하긴 했어요.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일하면 조금 잊혀지는 거 같고. 이젠 좀 쉬면서 치료 받아봐야겠어요. 선생님 말따라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와서... -연구 참여자 B

    IV. 결론 및 논의

       1. 결론

    본 연구는 북한이탈주민들의 병증발생시기 인식에 대하여 북한에서 생활할 때부터 탈북과정, 남한에 적응하는 과정까지 시기별로 알아본 연구이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 자체는 경험하고 있는 참여자의 기술에 대한 심층 분석을 통해 살아있는 의미를 밝혀낸다는 관점을 가진 Giorgi의 현상학적 연구 방법을 택하였다.

    2012년 3월~2013년 3월 본원 한방신경정신과에 입원한 북한이탈주민들 중 협조적이고 의식이 명료하며 자신의 성장과정 및 탈북과정에 대해 명확히 기억하고 있는 북한이탈주민 9명 대상으로 인터뷰 하였다. 평균 입원 기간 14일 동안 1차 60~90분간 면담을 시행하고 그 후 2~4차례 더 추가 질문을 하며 자료를 수집하여 현상학적 연구 단계를 거쳐 4개의 구성요소 및 15개의 하위구성요소가 도출되었다.

    첫째, 불행했던 북한 생활부터 병증발생시기를 인식하는 북한이탈주민들은 북한의 경직된 사회 체제 및 출신 성분에 대한 활동의 제한으로 억울감과 체념의 정서가 많았다. 또한 남성성ㆍ여성성의 확실한 구분으로 폭력에 시달렸으나 참으며 살면서 화병 발생이 많았고, 생활고로 경제활동 전선에 뛰어들었을 때에도 무리해서 일을 하며 근골격계 통증발생이 많았다.

    둘째, 탈북을 결심하여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병증발생 시기를 인식하는 북한이탈주민들은 생명의 위협 및 발각되어 북송되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컸다. 또한 제 3국의 대사관에서도 심사에서 탈락하여 남한 입국이 지연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대사관 내 사람들끼리의 갈등으로 인한 화병 증상이 현재로 이어졌다. 또한 탈북 후 북한에 남겨진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을 호소하거나 의도치 않게 탈북한 북한이탈주민들은 우울 증상을 호소하였다.

    셋째, 남한에 들어와 고된 생활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병증발생시기를 인식하는 북한이탈주민들은 낯설고 냉정한 남한의 환경, 불필요한 검사를 권하며 기질적인 문제가 없을시 자신의 병을 정신과적인 문제로만 간주하는 병원 분위기, 현실적으로 좋지 못한 취업 환경 등에 좌절하고 체념하며 화병이나 우울증상이 더 심화된다. 넷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병증도 잊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치료에의 의지를 다진다.

       2. 논의 및 제한점

    본 연구는 북한이탈주민들의 병증을 탈북과정에서 발생한 PTSD나 신체화 장애로 인식하려는 선입견을 깨고 북한에서의 생활에서부터 탈북 과정, 남한에서의 적응과정 전 생애에 걸쳐 병증발생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북한이탈주민들을 대상으로 탈북과정에서의 PTSD 나 신체화 장애, 우울증과 관련한 연구들은 많았지만 이들이 북한에서 겪은 정치적ㆍ경제적 환경으로 인한 고통, 남한에서 적응과정에서 오는 스트레스, 남한 의료에 대한 불만과 불신에 대해 다루는 연구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 북한이탈주민들과 상담 했을 때 이들이 북한에서 제 3국을 거쳐 남한에서 경험하고 겪고 있는 고통과 혼란을 이해하고 지지해주면서 치료할 때 더욱 높은 치료효과와 만족도를 거둘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현재 병증에 집착하거나 남한 의사들에 대한 불신으로 닥터 쇼핑(doctor shopping)을 하기 보다는, 직업을 갖거나 새로운 일을 배우며 자신이 가지 고 있는 능력과 가능성을 발휘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자신감과 성취감이 자신의 병증을 완화시킬 수 있는 원천임을 재 인식시켜주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마음을 열고 다가가면 소통 가능하다는 등의 보편적인 인간의 성질, 집단주의, 언어가 통하는 등의 익숙함과 동질감16)에 대한 것 등 병증의 완화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연구들도 있어 병증발생 뿐만 아니라 병증완화에 관련된 질적 연구도 시행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기본적 개인적인 연구대상자가 평균 중년이상의 여성 북한이탈주민이라는 점에서 일반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연령별, 성별에 따른 질적 연구도 이루어질 필요가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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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able 1.] The Social Demographic Characteristics of North Korean Refugees in Research
    The Social Demographic Characteristics of North Korean Refugees in Research
  • [Table 2.] The Chief Complain of North Korean Refugees in Research
    The Chief Complain of North Korean Refugees in Research
  • [Table 3.] The Categories of the Cognition about Initiation of Diseases of North Korean Refugees in Research
    The Categories of the Cognition about Initiation of Diseases of North Korean Refugees in Rese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