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article examines how the Congress for Cultural Freedom developed discourses on democracies and intellectuals in Asia how the social perception of intellectuals and what relationship does
1960년대는 현대 한국 사회의 문화적 기원을 되돌아보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시대이다. 이 시대는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이라는 강렬한 분기점을 통해 그 이전의 전후 체제와 구별되는 시대이며, 한편으로는 전후 재건의 국면을 넘어 사회구조 재편이 모색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승만 정권의 반지성주의적 반공주의와 배타적 반일 정서의 (적어도 국가 정책 상에서의) 퇴조, 미국발 원조 경제의 종료로 말미암은 사회·경제 구조 개편, 한일 관계를 포함한 대외 관계의 변화, 그리고 이에 수반하여 이루어진 문화·학술·교육 제도 상의 변화들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한국 사회 및 한국 지식인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쳤다. 이 변화는 지식인 개개인의 처세만이 아니라 지식인의 정체성, 지향점, 당위에 대한 의식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1960년대를 경유하던 한국 지식인들 당사자들에게는 이 시대가 어떤 시대로 받아들여졌는가. 이 연구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문화냉전기구 문화자유회의(Congress for Cultural Freedom)와 아시아 지식인의 관계, 그리고 한국 지식인과의 관계에 대해 대해 검토한다.
이 원고의 주 연구 대상인 문화자유회의는 1950년 6월, 냉전의 최전선 중 하나인 서베를린에서 전세계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의 결속 강화와 지성의 자유, 사상의 자유, 문화의 자유 등을 포함한 정신적 자유 일체의 확립을 주창하며 창립되었던 단체로, 1950, 60년대 당시에는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국제 지식인 네트워크였기도 하다. 이 단체의 창립 과정 및 자금 운용에 미국 CIA가 깊게 관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지금에 와서는 다소 평가가 분분하기는 하지만, 문화자유회의가 전세계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세미나와 학술대회, 그리고 문예지·학술지 등의 존재는 1950, 60년대 문화사 및 지성사를 지역적·초국가적 맥락 속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연구자들에게는 여전히 중요한 연구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학계에서 문화자유회의는 그리 높은 관심을 받는 대상이 아니었다. 문화자유회의에 대한 학술적 접근 자체는 문화자유회의와
다만 선행연구의 검토에도 불구하고 문화자유회의과 한국 지식인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온전히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존재한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문화자유회의의 가장 가시적인 특징 중 하나가 ‘국제 지식인 네트워크’라 한다면, 국제 지식인 네트워크로서의 문화자유회의가 그 한국인 파트너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가의 문제가 해명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2. 문화자유회의, 근대화론, 그리고 신생국가 지식인론
문화자유회의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전세계 지식인들에게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확산되는 한편 미국의 국제적 위상이―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연합군 진영에 대한 기여로 인하여 미국 정부가 기대했던바에 비하면―충분히 높아지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위기감에서 출발했다. CIA는 공산 진영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대응하여 자유주의 지식인들 간의 네트워크로 구축된 이념적 방파제를 만드는 한편, 이 방파제를 통해 중간 진영 및 온건파 사회주의자 지식인들을 자유진영으로 끌어오고자 했다고 알려져 있다.
문화자유회의가 1950년 6월 베를린 창립총회에서 발표했던 헌장인 「자유인선언(Declaration of Cultural Freedom)」은 인간 지성의 자유를 “자신의 의견, 특히 자기의 통치자의 것과 상이한 의견을 가질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권리”로 규정하면서,
이런 맥락에서 문화자유회의가 특히 중시했던 사업적 목표는 ‘문화자유회의’라는 기구를 초국가적인 지식인 네트워크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문화자유회의는 세계 각국에 설치된 현지 지식인들로 구성된 지역위원회(local committee)들을 설립하여 이 지역위원회의 문화·학술 활동을 지원했다. 이러한 지역위원회들의 활동을 총괄했던 파리사무국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각 지역위원회가 각자의 기관지나 문화·학술행사를 통해 지적 성과물을 생산하게 하는 한편, 그 기관지들이나 다양한 주제의 국제 학술 대회 등을 통해 문화자유회의 내 지식인들이 일종의 국제 지식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다만 이러한 구상의 실현이 그리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문화자유회의의 이러한 구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문화자유회의에 소속된 지식인들, 특히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자유주의자 지식인들이 타국 지식인들과의 교류, 특히 비서구 지식인들과의 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문화자유회의에 관여했던 유럽 지식인들 중에서 비서구 지식인들과의 교류에 열의를 기울이는 이는 많지 않았다. 사실 문화자유회의에 가입했던 유럽 지식인들의 관심사는 국제 교류보다는 자국 내에서의 활동에 기울어져 있었다. 때문에 유럽 지식인들은 문화자유회의의 지원을 받아 간행되는 잡지들에 국제 사회의 문화적 동향에 대한 기사나 소식을 더 많이 실어달라는 파리사무국 측의―때로는 직접적이었고 때로는 간접적이었던―요청을 탐탁지 않아 했다.
그럼에도 파리사무국은 문화자유회의를 통해 서구 지식인과 비서구 지식인 간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 많은 공을 기울였다. 특히 인도나 일본과 같이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에 대해 호의적이거나 상대적으로 유화적이었던 지역, 또는 중립주의 노선을 표방함으로써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하려 했던 지역들은 파리사무국이 일찍부터 관심을 보였던 대상이었다. 다만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문화자유회의 내부에서도 반공주의적 수사의 네거티브 전략을 자각함에 따라, 아시아 지역에 대해 새로운 각도로 접근하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요컨대 공산주의 국가의 ‘현실’을 ‘폭로’하는 식의 네거티브 전략을 통해 공산주의자나 중립주의자들이 현실 공산주의에 부정적인 입장을 갖게끔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유주의 진영 고유의 가치와 비전을 담은 아젠다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자유주의 진영에 ‘자발적으로’ 관심을 갖게 할 필요가 있었다. 비서구 지식인들과의 문화적 교류에 소극적이었던 유럽 지식인들을 대신하여 그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미국발 근대화론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미국에서 태동하여 1950년대에 발전한 이른바 ‘근대화론’이 1950, 60년대 미국의 문화냉전 수행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논자가 지적한 바 있다. 경제학, 사회학, 사학, 지역학 등 분과학문별로 접근 방식은 다소 상이하지만, 근대화론의 기본 얼개는 ‘전통’과 ‘근대’의 이분법에 근거해 세계사의 ‘발전단계’를 선형적으로 구성하는 데 있다. 근대화론자들은 이로써 세계 각지의 다양한 사회 양상 및 문화적 현상들을 발전단계 내에서 서열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발상은 공산주의를 포함한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자유주의 체제의 우위를 입증하고자 한 것으로, ―소련까지 포함하는―‘비서구사회’에 공산주의적 근대화가 아닌 자본주의적·자유주의적 근대화를 사회적 목표로 제시하고자 하는데 그 궁극적인 목표가 있었다.
이러한 근대화론은 본래 미국의 소비에트 학계에서 소비에트 연구 차원에서 내놓은 결과물 중 하나였지만,
엄밀히 말하면 근대화론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대대적인 탈식민화 국면 속에서 서구 사회가 비서구 사회의 정체성(停滯性)을 환기시킴으로써 그들에 대한 문화적 ‘우위’를 지속시키기 위해 개발한 담론이었다. 그럼에도 근대화 담론이 1950, 60년대 비서구 지식인들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이 담론이 ‘근대화’라는 목표의 주체이자 동력으로 ‘지식인’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근대화론에 따르면 학자, 문인, 언론인, 법조인, 예술가 등에서부터 넓게는 학생, 군인등 식자층 전반에 이르는 넓은 의미에서의 지식인은 후진국 내지 신생국가를 근대화시킬 수 있는 주체이자 동력이었다. 근대화론 속에서 신생국가 지식인은 탈식민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과제가 완수된 이후에도 여전히 자기 사회에 대한 ‘앞선 자’로서의 ‘책임’을 갖는 존재로 이해된다. 비서구 신생국가의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근대화론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정체성(停滯性)에 대한 담론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서구 지식인 자신의 정체성(正體性)과 사회적 역할에 대한 담론이기도 했다.
근대화론적인 지식인 담론은 문화자유회의에 가입한 아시아 지식인들에게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예를 들어 문화자유회의가 1955년 4월 버마(현재의 미얀마) 랑궁에서 개최했던 연례 총회에 참석했던 인도네시아 작가 수단 딱디르 알리샤바나(Sutan Takdir Alisjahbana)는 본인의 발제에서 현대 아시아 사회는 각자의 후진적 문화를 현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아시아 각국의 지식인들은 “우리나라와 우리 사회를 건설하고 우리네 국민의 물질적 정신적 수준을 현대의 수준까지 올리는데 협력하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다만 문화자유회의가 아시아 지식인에게 확산하고자 했던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와 근대화론이 아시아 지식인들의 내면에서 충돌 없이 조화를 이루었던 것은 아니다. 쉴즈 등의 제안과 노력으로 아시아 지역에서 개최되었거나 신생국가에 대한 논제로 진행되었던 문화자유회의 연차 총회에 참석했던 아시아 지식인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에 대한 기대와 우려를 표하곤 했다. 이들은 대체로 자유민주주의의 이상, 이를테면 개인의 문화적·정치적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 등에는 십분 공감했지만 그러한 이상이 비서구 사회에서도 지금 당장 그대로 실현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비관적이었다.
랑궁 총회에 집결했던 아시아 지식인들이 개개인의 정치적·문화적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자유민주주의의 이상, 그리고 대의제 민주주의 제도를 부정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1950년대 중반의 아시아 지식인들은 대부분의 아시아 탈식민 신생국가들이 극심한 빈곤, 대의제 민주주의 경험의 부족, 권위주의적인 문화전통 등의 한계를 겪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는 서구의 ‘선진국’들에서 시행되고 있는 수준의 대의제 민주주의가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그대로 실현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특히 우려했던 것은 ‘아시아적’ 정치풍토로 말미암아 서구식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전체주의적 요소나 권위주의적 요소가 가미된 민주주의, 말하자면 ‘아시아식 민주주의’ 따위가 정착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문화자유회의의 총회에 참석했던 서구 지식인들은 아시아 지식인들의 이러한 고민들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을까. 랑궁 총회와 같은해인 1955년 하반기에 밀라노에서 개최된 문화자유회의 총회에 참석했던 미국 언론인 드와이트 맥도널드는 이 총회에서 본인이 목도한 서구 지식인 대 아시아 지식인의 관계에 대해 인상적인 촌평을 남겼다.
서구 대표단과 아시아 대표단의 차이는 현저히 두드러지지만, 예견 가능했던 것이다. (…중략…) 한마디로 말해, 서구 대표들은 추상적인 철학 원리로서의 자유나 사회학·정치이론 등 학문상의 문제로서의 자유, 또는 유럽·영미권의 역사·문화의 한 측면으로서의 자유에 대해 논의하기 위하여 밀라노에 왔다. 아시아 대표들은 백인들에게 있어서 ‘자유’가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기 위하여, 그리고 그들의 현 주인이나 옛 주인들의 문화적 대표들에게 불평불만 목록을 건네러 왔는데 말이다.
이 총회에는 다니엘 벨, 세이모어 마틴 립셋, 한나 아렌트 등 지식인들이 다수 발제자로서 참석했었지만, 미국인인 맥도널드가 보기에도 서구 지식인들의 발제문들은 비서구 지역 출신 지식인들에게 특별한 감흥을 주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맥도널드가 부연한 바, 서구 지식인들의 발제문에서 세련되게 정리된 ‘자유’ 개념은, 민주주의와 (변형된 민주주의를 표방한) 독재라는 두 길 사이의 기로에 서 있던 아시아 지식인들의 고민을 해결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아시아의 정치 현실에 대한 아시아 지식인들의 우려들은 랑궁 총회로부터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인도네시아의 ‘교도민주주의(Guided democracy)’, 파키스탄의 ‘기본민주주의(Basic democracy)’ 등 민주주의를 표방한 권위주의 체제가 성립됨에 따라 현실화되었다. 미국 정보기관 및 서구 지식인들이 ‘자유주의’의 적으로 설정했던 것은 전체주의의 이름으로 표상된 공산주의, 보다 구체적으로는 소련과 중공을 위시한 공산주의 국가들이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 이후 비서구 사회의 자유주의자 지식인들이 처한 현실은 미국 전략가들의 구상보다는 더 복잡했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국가와 국민의 영역 ‘외부’에 있는 공산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국가권력 자체가 자유주의의 적으로 부상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문화자유회의가 표방하고 있던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는 실존적 현실에 처한 비서구 지식인들에게 매우 제한적인 감흥밖에 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1961년 이후―1970년대에 등장할 ‘한국적 민주주의’의 전초 단계로서의―‘민족적 민주주의’의 출현을 목도한 한국 지식인들에게도 반복되었다.
문화자유회의와 한국 지식인의 공식적인 제휴 관계는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된다. 4·19혁명 1주년을 맞이하던 1961년 4월, 문화자유회의 한국위원회가 출범한 것이다. 다만 통상적인 사례에 비춰본다면 문화자유회의 한국위원회가 운영되는 방식은 상당히 독특했다. 일반적으로는 현지의 특정 지식인 모임이 해당 지역의 지역위원회를 결성하고 그 기관지를 발행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지만, 한국에서는 한국위원회와 한국어 매체의 운영 주체가 완전히 이원화되었던 것이다. 이는 문화자유회의가 1960년 들어 거의 동시에 서로 다른 한국 지식인 집단과 접촉한데서 기인한다. 파리사무국은 언론인 김용구, 오종식, 그리고 시인 조지훈 등을 중심으로 하여 결성된 지식인 모임인 ‘춘추회(春秋會)’에 한국위원회의 자격을 부여하되, ‘문화자유회의의 한국어 매체’는 별도의 루트로 파리사무국에 연락해왔던
이렇듯 한국위원회의 설립이 독특하게 진행된 것은 1960년이라는 시기의 특수성과 무관하지 않다. 아니, 한국위원회의 설립 자체가 그러하다. 앞서 언급했듯 1950년대 후반은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국가들에서 점점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가 밀려나고 권위주의적인 정치체제가 들어서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에 반해 한국에서는 이승만 대통령 중심의 권위주의 체제가 민주 혁명으로 붕괴하고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선 상황이었으므로, 파리사무국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을 것이다. 실제로 파리사무국은 1960년 4월 이후 한국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재개하면서 이승만 정권이 문화자유회의 한국위원회 설립의 걸림돌이었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특히 파리사무국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이 교섭했던 한국 지식인들(즉 춘추회 계열 및
하지만 파리사무국이 기대했던 시너지 효과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파리사무국의 예상과 달리 양측간의 갈등이 심각해 공조 자체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61년 4월에 있었던 춘추회의 창립 기념 심포지엄의 자료집인 다소 늦은 1962년 9월, 사상계사를 통해 출간된 것이 사실상 거의 마지막 협업이라 할 수 있다.
1960년 말에 처음 한국위원회 설립이 논의되던 당시만 하더라도 춘추회와
특히 춘추회와
오종식의
맑스도 언젠가 ‘공업이 발달된 나라는 저개발국가에게 미래의 그림만 보여준다’고 말한 바 있다. 다시 말해서 도리안 그레이적인 것이 없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선진국의 화려하게 미소하는 얼굴은 누구나 볼 수 있고 찬미할 수 있지만 오늘날의 발전을 이룩하기까지 그들이 걸어온 험준한 자취를 캐어 들어보려는 사람은 극히 적다. 발전의 과정은 언제나 역사의 부분에게 무시되게 마련이다. 미래의 이메이지에만 몰두하는 것은 저개발국의 특색으로 일종의 자기 도취증인 것이다. 정치적 논의는 따라서 비현실적인 방향으로 흐르며 각자는 복지사회를 약속하고 그 약속의 실패를 야기하고서도 잔인한 공격의 화살을 서로 퍼붓는다. 또한 국민에게 조속한 혜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납득시킬수 있는가 하는 것이 후진국 경제개발 계획을 제시하는 정당의 가장 큰 관심꺼리다, 실제로 장기개발계획이 올바른 것이라면 조속한 혜택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국민의 환심을 얻기 위한 정당에서는 경제개발에 중요한 중간단계와 과정의 이해가 소홀히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기대가 크면 클수록 그 기대의 불만족에서 오는 좌절감 역시 더욱 커지게 된다. 이와 동시에 민주세력은 부식되고 반민주주의 독재세력만 늘어나게 된다.
비록 오종식의 세대사 발행인 취임 기간은 1년 반 정도에 불과했지만, 오종식이
현존하는 자료로만 파악한다면, 파리사무국은―적어도 김용구, 김준엽 등 한국 지식인들과의 서면 대화에서는―박정희 정권에 대해 이렇다 할 입장을 표명한 적이 없었던 듯 보인다. 다만 1965년 5월 파리사무국의 아시아 담당자였던 이반 캇츠(Ivan Kats)가 일본위원회 사무국장이자 『자유』 편집장인 이시하라 호키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 외, 파리사무국이 박정희 정권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었는지를 입증할 만한 자료는 현재로서는 그리 많지 않다. 파리사무국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이 상대편의 한국 지식인, 또는 한국 정부의 검열관들에게 미칠 영향을 의식했던 걸까? 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적 성격, 그리고 박정희 정권과
이는 비단
파리사무국이 이렇듯 한국 지식인에 대한 한국 정부의 탄압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를 대변해야 한다는 파리사무국의 숨은 입장 때문일 수도 있다. 또는, 한국 정부가 지식인 탄압 정책을 펴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상황이 다른 비서구 지역에 비하면 여전히 유화적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사실 파리사무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은 공식적인 위원회가 설치되어 합법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거의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보다 더 여건이 나은 나라였다.
파리사무국이 1964년 2월 정리했던 아시아 프로그램 보고서에 따르면 인도, 일본, 호주 정도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에서는 문화자유회의 관련 지식인들이 한국 지식인들보다 훨씬 열악하고 가혹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1950년대 중후반 이후 아시아 곳곳에서 출범했던 권위주의 정권들이 국제 기구들의 자국 내 활동에 대해 매우 배타적이고 예민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문화자유회의가 1955년 랑궁 총회를 개최했던 버마만 하더라도 모든 외국계 문화단체들의 활동을 금지한 상태였다. 때문에 인도네시아, 실론, 버마 등지에서는 공식적인 위원회 없이 현지 특파원을 통해 소규모의 비공식적인 세미나를 조직하게 하거나 문화자유회의 간행물을 배포하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현지 정부의 탄압이나 간섭이 심하면 특파원들이 비밀결사처럼 움직이거나(인도네시아의 경우), 특파원 활동마저 중단시켜야 했다(남베트남의 경우). 한국에서도 5·16군사정변 직후 1년간 춘추회의 활동이 정지되기는 했지만, 적어도 다른 아시아 지식인들의 상황에 비하면 춘추회나
물론 제3공화국 출범 이후 결코 쉽지 않은 시절을 보내고 있던 한국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파리사무국의 암묵적인 비개입주의 정책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문화자유회의는 중국-인도 국경분쟁(1962),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정권의 언론인 목타르 루비스(Mochtar Lubis) 투옥, 스페인 프랑코 정권의 수차례에 걸친 지식인 탄압 등이 일어났을 때 한국위원회에 이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작성해달라고 요구했고, 춘추회는 이에 응했다.
이러한 상황은 문화자유회의가 표방한 자유민주주의 이상에 기대를 걸었던 한국 지식인들이 조금씩 파리사무국을 위시한 서구 지식인과의 교류에 대한 선망에서 벗어나게 했다. 사실 춘추회건
하지만 제3공화국이 출범한 이후, 그리고 특히 한일협정이 체결된 이후가 되면 상황은 다르다. 종래에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이념은 주로 중공이나 북한과 같은 공산주의 세력과의 대타 관계 속에서 설정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서면 ‘민족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박정희 정권이 출현했다. 또한 1963년 대선이나 한일협정 반대투쟁 등의 중요 국면은 ‘민족적 민주주의’가 실상은 여타 아시아국가들에서 등장했던 교도민주주의, 기본민주주의 등 민주주의에 관제 민족주의를 결합시킨 권위주의 이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하고 있었다. 그런 이상 자유민주주의는 더 이상 추상적인 철학적 설명이나 공산주의에 대한 대타의식만으로는 설정될 수 없었다. 자유민주주의자 지식인들이 표방하는 민주주의는 권위주의 정부의 민주주의와 어떤 점이 다른가, 그리고 무엇보다 민주주의 지식인들이 말하는 민족주의는 박정희 정권의 관제 민족주의와 무엇이 다른가를 설명해야 했다. 그것은 1950년대 문화자유회의 총회들에서 아시아 지식인들이 확인한 바 있듯이, 서구의 역사적 경험에 기반한 민주주의 관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1964, 1965년 전후의 경험은 ‘친정부적’인 춘추회든 ‘반정부적’인
춘추회가 1964년 10월 이후 해외 지식인들과의 교류보다는 한국 지식인들간의 교류 및 제휴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도 인상적이지만,
1. 개발도상국의 사회 개혁 및 경제 재건의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의 위치
2. 공산 정권 하 민족주의
3. 탈식민국가들의 민족주의 경향
4. 다인종 국가의 소수자 그룹의 민족주의
5. 오도된 민족주의(mis-guided nationalism)의 문제
6.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7. 서구 국가들의 아시아 민족주의 이해
8. 아시아 내 분쟁과 민족주의
결과적으로 보면 김준엽의 동남아 관련 프로젝트들은 파리사무국과 일본위원회의 소극적인 반응으로 인하여, 그리고 좀 더 결정적으로는 1966년 4월부터 미국 언론들이 문화자유회의에 대한 CIA의 재정 지원을 폭로함에 따라 문화자유회의의 운영 자체가 위태로워지면서 무산되었다. 다만 이 제안서를 통해서나마 김준엽을 중심으로 한
문화자유회의 네트워크에 접속한 아시아 지식인들이 랑궁, 밀라노 등에서 서구인과 비서구인의 ‘자유’에 대한 현격한 인식차를 확인하고 있던 1950년대 중반은
한일협정 이후
문화자유회의를 넘겨받은 포드재단은 인수 직후 문화자유회의에 대한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그 결과 한국을 포함한 여러 비서구 지역위원회들 및 관련 프로젝트들에 대한 재정적·행정적 지원은 거의 끊기게 되었다. 1966년 말에는 파리사무국의 아시아 담당자였던 이반 캇츠가 동남아 관련 사업을 지속할 수 있는 기관을 찾아 예일대로 이직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문화자유회의 네트워크가 붕괴했다고 하여 김준엽의 동남아 연구 구상 자체가 무산되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김준엽은 아연 소장에 취임(1969.9)한 직후인 1969년 11월 동남아연구실을 신설하는 한편, 포드재단으로부터 확보한 연구비로 동남아 연구 지원에 나섰다.
다만 만약 1960, 70년대의 아연이 동남아 연구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하더라도, 그것을 김준엽이 문화자유회의 내에서 제시했던 아시아 지식인 네트워크 구상을 보다 온전히 이어받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김준엽이 문화자유회의 내에서 입안했던 구상은 단순히 한국 내 지역학 연구의 발전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칭 ‘아시아 민족주의’ 포럼의 구상에서 확인되듯이 문화자유회의 내 아시아 지식인들과의 관계에 대한 김준엽의 구상은 단순히 한국 지식인들에게 미비한 지식을 흡수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탈식민-반권위주의-자유주의-민주주의자 지식인으로서의 경험을 공유할 동지들을 구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아시아 지식인 네트워크에 대한 김준엽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