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전체 메뉴
PDF
맨 위로
OA 학술지
기록으로 본 조선시대 울산의 로컬리티: 울산항을 중심으로 Record-Based Locality of Ulsan during the Joseon Dynasty: Focused on Ulsan Port
ABSTRACT
기록으로 본 조선시대 울산의 로컬리티: 울산항을 중심으로
ABSTRACT

This study investigated Ulsan locality during Joseon by searching and analyzing various records related to the Ulsan port including old literature, documents, and maps, and oral records relating to traditional knowledge, as well as extracting keywords arranged by the time series and space to reenact Ulsan Port and Ulsan during Joseon. The study examined the characteristics of Yeompo, which served defense and trade functions through Waegwan in the former half of Joseon, Gaewoonpo, Seosaengpo, and Dosanseong, which underwent damage during Imjinwaeran and other wars in middle Joseon, and Bangeojin, which operated state-owned ranches and defense facilities including signal fires through to the latter half of Joseon, Jangsaengpo, which played the role of a whaling zone, and neahwang-naru, iron mine of Dalcheon, trying to reproduce the trajectory of the Ulsan during Joseon. Research on the locality transfiguration process of the port will help establish the locality of the entire Ulsan.

KEYWORD
울산 , 울산항 , 로컬리티 , 염포 , 서생포 , 방어진
  • 1. 서 론

       1.1 연구배경 및 연구목적

    울산은 현재 대한민국의 산업수도를 표방하는 중요한 경제 축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불과 60년 전만 하더라도 중소도시였던 울산이 인구 110만의 대도시로 성장한 것에는 1963년 무역항으로 개항했던 울산항이 한 몫 했다. 경제개발5개년사업으로 울산항은 울산의 중공업 발전을 견인하며 대한민국 1위·세계 4위의 액체물류항으로 성장하였다.

    울산과 함께 성장하고 변모해왔던 울산항은, 울산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울산항은 신라시대에는 공무역 거점으로 왜와 당을 잇는 국제무역항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사람이 살지 않을 정도로 황폐했었다. 조선시대에는 국방도시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대표적인 어항이자 포경기지로 경제 수탈의 현장이었고, 현대에는 울산 산업을 이끌고 있는 울산의 관문(關門)이다. 이처럼 울산항은 울산이 지닌 로컬리티의 변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공간이다.

    본 연구에서는 울산의 로컬리티 변모과정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공간으로 울산항을 설정하고, 울산항에서 벌어진 사건·머물렀던 인물이나 단체·향유했던 문화를 담은 기록을 분석하고자 한다. 연구범위를 조선시대로 설정한 이유는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보다 상대적으로 관련 기록이 많이 남아있어 기록학적인 접근이 가능하고, 근현대로컬리티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울산을 대표하는 인물인 이예(李藝), 삼포개항(三浦開港)의 장소인 염포(鹽浦), 임진왜란(壬辰倭亂) 등 조선시대 울산항과 관련된 인물과 사건·장소를 살펴 로컬리티를 재현함으로써, 일제강점기·현대 울산과 울산항의 로컬리티 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와 현대 울산의 로컬리티에 대한 연구는 후속연구로 하고자 한다.

    조선시대 울산의 로컬리티를 재현하기 위해 먼저 당시 울산항과 관련된 고문서·문집·구술기록 등 다양한 형태의 기록을 수집하고, 그 중에서 로컬리티를 담고 있는 구성요소와 주요 키워드를 추출하였다. 그 후 구성요소 간의 관계를 분석하여 공간별·시계열 순으로 조선시대 울산항의 변모양상을 살펴보았다. 울산항의 발자취를 더듬고 울산항이 담고 있는 로컬리티를 밝히는 작업은 울산의 정체성, 나아가 한국이 걸어온 퍼즐의 한 부분을 복원하는 일이다. 구술 역사가 Linda Shopes(1984)가 “지역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조사하고 구체화하는 것은, 동 시대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뿌리를 이해하고 미래에 다가올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기도 하다.”(설문원, 2015, p. 157)라고 말한 것처럼 울산항의 모습을 순차적으로 복원하고 구체화하는 작업에 한 발 내딛음으로써, 울산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인식하고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단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2 선행연구 및 연구방법

    조선시대 울산의 역사를 다룬 연구는 꾸준히 있어왔다. 조선시대 울산에서 생산된 호적·『울산부선생안(蔚山府先生案)』 등 인명기록을 해석하여 울산 내 신분구조의 변동과 지역 향임 구성을 분석한 연구(이지은, 2004: 이종서, 2010)를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같은 특정사건이나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달천철장(達川鐵場) 등 특수 시설의 연혁과 역사적 의의에 대한 연구(이창언, 2018; 이철영, 2015; 제장명, 2018) 등이 있다. 조선시대 울산항에 대한 연구로는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각 시대 순으로 울산항의 역사적·문화적인 변화를 풍부하게 풀어낸 역사서(이종서, 허영란, 2015)와. 지방자치단체와 역사학자가 중심이 되어 방어진항을 포함한 울산 동구의 역사를 기술하였다(울산광역시 동구청, 2011). 한편 공간을 중심으로 로컬리티 기록화 모형을 제안하거나(설문원, 2012; 현문수, 2015), 실제 지역기록을 활용하여 로컬리티를 형성한 사례 연구(송정숙, 2011: 2015: 2016) 등 로컬리티를 기반으로 한 기록관리 연구성과는 상당히 진척되어 있으나, 울산과 울산항을 로컬리티 기록학의 관점으로 연구한 사례는 없다.

    본고에서는 송정숙·설문원·현문수의 로컬리티 기록학 연구에서 제시된 로컬리티 구성요소, 기록화 모형을 분석하여 로컬리티가 무엇인지, 로컬리티를 재현하기 위해 필요한 구성요소는 무엇이 있는지 재정의하였다. 아울러 울산과 울산항의 정체성을 잘 나타낼 수 있는 키워드를 도출하기 위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와 문집, 고문헌과 고지도, 『울산민폐소(蔚山民弊疎)』를 위시한 상소문 등 다양한 고문서에 대한 문헌조사를 실시하였다. 기록의 생산자와 소장처를 확인하기 위해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가기록원, 울산도서관, 울산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자료도 함께 조사하였다. 아울러 구술·공연예술기록 등의 형태로 남아있는 관련 설화·민요·민속놀이 자료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구비문학대계·울산디지털문화대전 등을 참고하였다. 이 중 울산항과 관련된 키워드를 추출하여 관련 기록을 분석하고, 분석 결과물은 로컬리티 기록 요소와 매칭한 후 역사적 결락을 보완해나가는 방식으로 조선시대 울산과 울산항의 로컬리티를 복원코자 하였다.

    현대 울산항은 울산만 일대에 조성되어 있는 무역항인 울산본항, 장생포항, 방어진항, 온산항, 미포항, 울산신항을 통틀어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다. 그러나 이종서와 허영란은 울산항을 ‘울산 연안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각 시기에 따라 이질적이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항구를 모두 울산항이라는 이름으로 포괄’하여 정의하였다. 시대의 조건과 요구에 따라 중심 항구의 위치와 역할이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종서, 허영란, 2015, p. 10). 본 연구에서는 울산항의 범위를 조선시대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울산부에서 정의하는 현재의 정자·강동·주전·남목·방어진·화암·염포·장생포·용연·개운포·온산·간절곶·서생포를 포함한 울산만 지역1)으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달천철장 등 울산항 로컬리티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건·인물·기관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 울산만과 접해있는 태화강(太和江) 하류·태화강 지류인 동천(東川)까지 공간적으로 확장하여 언급하였다. 현재 부산광역시에 속해 있는 기장현(機張縣), 동래현(東萊縣)은 조선 전기까지 울주(蔚州)에 편입되어 있었으나, 명종 2년(1547) 동래부로 승격·독립하여 현재까지 부산의 로컬리티 영역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본 연구에서는 제외하였다.2)

    2. 로컬리티의 개념과 조선시대 울산항의 기록

       2.1 로컬과 로컬리티

    로컬(local)이 가지고 있는 첫번째 사전적 의미는 ‘지역의, 현지의’라는 개념이다. 로컬은 주로 국가·중앙과 대비되는 지역으로서의 ‘장소’를 의미하지만 현재 사회과학에서는 지역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과 사람, 행동 매커니즘을 포괄하는 로컬리티(locality)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문재원은 로컬이 지닌 가치 또는 속성을 로컬리티라고 전제하고, 로컬리티는 “삶의 터로서의 로컬(공간)과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역사적 경험(시간)을 통해 만들어가는 다양한 관계성의 총체이며, 이는 매우 유동적이고 중층적이며, 권력적이고 가치지향적인 것”으로 정의하였다(문재원, 2016, p. 308). 그렇다면 우리는 왜 로컬리티에 주목해야 하며, 로컬리티가 지닌 특수성은 무엇인가?

    로컬리티는 중앙중심적인, 또는 전체주의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동으로 지역과 지역을 구성하는 다양성에 주목한다. 국가가 형성되고 중앙집권화가 진행되면서 지역의 특성도 일부 평준화되었지만, 로컬리티를 지니고 있는 공간에는 생활방식의 특수성 또한 존재하며 이러한 특수성이 중앙 정책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송정숙은 로컬리티와 아이덴티티라는 개념을 접목하여 로컬리티의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확고한 정체성, 즉 아이덴티티를 지닌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다른 개별성, 총체성, 계속성을 경험하게 되듯이, 확고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지역은 다른 지역과 다른, 독특하고 특별하다는 개별성, 그 지역 사람만이 지닌 욕구·태도·행동양식 등의 총체성, 시간이 경과하여도 변하지 않는 그 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계속성을 경험하게 된다(송정숙, 2015, p. 206).

    로컬리티에 주목하면 그 지역의 아이덴티티에 실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지역의 인물들이 ‘공간’에 머무르며 엮어내는 경험과 기억은 복잡하게 엉키고, 시간이 지나면서 켜켜이 쌓여 나이테처럼 견고한 결을 만든다. 그 ‘결’ 이 로컬리티이며, 지역의 정체성인 것이다.

       2.2 로컬리티의 구성요소

    과거 특정 지역의 로컬리티를 재구성하기 위해 기록학계에서는 Richard J. Cox의 도큐멘테이션 방법론을 시작으로 다양한 로컬리티 기반의 기록관리 전략 개발과 응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Cox는 『Documenting Localities』에서 미국 뉴욕을 대상으로 한 로컬리티 기록화 사례연구를 소개하였다. Cox는 1900년대 이전·20세기·현재로 시기를 구분하고, 인간의 활동을 12분야의 광범위한 토픽3)으로 나누어 각 분야의 활동을 담은 기록물을 수집하고자 노력했다. Cox의 기록화 사례연구는 로컬리티의 개념을 기록관리 전략에 접목하여 한 지역에 대한 다양한 모습을 담아내고자 노력한 유의미한 시도라고 볼 수 있지만, 설문원의 지적처럼 지역사의 모든 영역을 기록화 대상으로 설정하고 계획을 그려 나간다면 실행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설문원은 로컬리티가 특정 공간이나 지역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개념인 만큼, 공간이나 장소를 중심으로 기록화 대상을 설정한 후 인물이나 사건 등으로 확산시켜 나가는 전략이 유효하다고 제안하였다(설문원, 2015, pp. 440-441).

    그 지역의 로컬리티를 재현하기 위해 어떠한 분야의 기록, 자료를 획득해야 하는가? 설문원은 로컬리티 기반의 기록화를 위하여 공간·사건·인물을 구성요소로 설정하고, 이 세가지의 관계성을 추가한 기록모형을 제시하였다. 현문수는 설문원의 공간 기반 기록화 모형과 ISO 23081이 정의한 기록 및 맥락 개체(행위주체, 업무, 법규)에 공간이라는 개체를 추가한 기록 모형을 제안하였다. 앞선 모형은 공통적으로 특정 ‘공간’, 또는 ‘장소’를 필수적인 요소로 설정하고, 연관되어 있는 사람 또는 단체(인물·단체), 활동한 결과(사건·시설·법규 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공간, 인물·단체, 사건 외에 로컬리티를 재현하는데 영향을 주는 다른 요인은 없을까?

    류지석은 인문학의 관점에서 로컬리티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자연적인 공간·장소성을 일컫는 ‘기층적 로컬리티’, 법률 및 제도 등 사회적 공간을 포함한 ‘위계적 로컬리티’, ‘인식과 가치의 로컬리티’라는 세 가지의 관점을 설정하고, 여기에 비가역적인 시간성을 적용하여 3차원적인 개념으로 도식화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로컬리티 담론을 형성하기 위한 인문학적 접근방식의 하나이지만, 로컬리티가 인간 존재성의 본질적 가치와 연결되어 있고 그 지역에서 생성되고 변화하는 ‘인식과 가치’가 로컬리티를 생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되새기게 한다(류지석, 2015, pp. 142-148 참조). 로컬리티에서 인식과 가치가 반영되어 있는 대표적인 분야 중 하나가 ‘지역의 전통지식’이라 할 수 있다. 전통지식은 ‘자연과 더불어서 대대로 생활해온 사람들에 의해 구축된 지식체이며 생태학적, 사회경제적, 문화적 환경에 관련’되는 것이다(농촌진흥청, 2009, p. 52). 박성용은 전통지식을 ‘어느 정도의 문화적 경계를 형성하고 있는 지역민들이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관념과 경험을 통해 전승․영속한 앎의 체계적 논리’라고 얘기하면서 이러한 지식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민속의례와 종교, 연희, 의료생활, 세시풍속, 물질문화, 구비전승 등에 농축된다고 하였다(박성용, 2010, pp. 36-37). 전통지식은 생성적·기능적·형태적으로 시간의 연속성 및 토착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특성을 지닌다. 전통지식은 인간중심적이고 역동적이고 실천적이며, 한 세대에서 다음세대로 전수되면서 문화적 가치를 가진다. 이와 함께 전통지식은 다양성을 촉진시키며, 지역자원에 가치를 부여하여 지역자원을 재생산시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안윤수, 김미희, 안옥선, 2006, p. 17; 정명철, 안옥선, 이현경, 2019, p. 283, 재인용). 전통지식이 가지는 ‘시간의 연속성’와 ‘토착성’은 현재와 시간적인 틈이 존재하는 ‘조선시대’, ‘울산’이라는 지역과도 맞물리며, 그 지역의 인식과 가치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자원 중 하나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그림 1>과 같이 로컬리티의 구성요소로 공간과 인물·단체, 사건이라는 요인 외에 또 하나의 구성요소로 ‘인식과 가치’를 설정하고, 인식과 가치를 담고 있는 대표적 사례로 지역 전통지식을 담고 있는 기록을 정하였다. 전통지식 중에서도 ‘창조적 기술 분야’의 기록을 조사하였는데, 창조적 기술에는 건축 등의 ‘유형 창조물’, 음악/노래·전래풍속·민담/설화·예능/오락 등의 ‘전승 표현물’, 명칭/지리적 표시인 ‘언어적표시’, 민간신앙 등 ‘공동체 활동’, 관혼상제 등이 포함되어 있다(특허청, 2014). 창조적 기술분야에 속하는 전통지식은 로컬리티의 구성요소인 ‘공간·사건·인물/단체’가 모두 관여하여 형성되므로 다른 분야보다 로컬리티 양상이 고르게 투영되어 있다.

    <그림 1>과 같이 특정 공간에서 인물 또는 단체가 사회적 관습이나 제도에 영향을 받으면서 외부와 소통·충돌하며 일어나는 사건의 과정에서 다양한 기록이 생산될 수 있다. 혹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간·인물/단체·사건의 변동양상이 다시 인식 및 가치 형성에 영향을 주어 전통지식의 변화를 끌어내고, 이런 과정이 설화·민요과 같은 전승표현물의 형태로 남겨진다. 이렇게 공간-사건-인물·단체-인식과 가치라는 구성요소 간 상호작용의 결과물로 생산된 다양한 유형의 자료와 기록을 조사하고 분석함으로써 조선시대 울산과 울산항의 로컬리티를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2.3 조선 이전의 울산항

    울산항이 자리한 울산만은 선사시대부터 거주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기록이 바로 반구대 암각화이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배와 작살, 부구, 그물을 이용하여 고래를 사냥하는 매우 사실적인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과거 울산 태화강과 울산만 주변에 뛰어난 해양어로 문화를 가진 포경집단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그림이다(울산 암각화박물관, 2019). 반구대 암각화는 약 7000년에서 3500년 전 사이 신석기 시대에 제작되어, 이때부터 바닷가에서 포경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울산항은 6세기부터 역사서에 여러 이름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라의 국력이 강해지면서 일본과 중국과 교류가 빈번해졌고, 울산만을 출발하여 왜에 이르는 항로가 사용되었다. 『구당서(舊唐書)』, 『일본서기(日本書紀)』,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 등 국내외 고서와, 울산에서 경주 사이의 교통로이자 일본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관문성(城)의 존재, 대일본 공무역 물품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은 울산만이 7세기 중엽부터 국제항의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보여준다. 울산만은 대량의 화물과 사절단을 실은 선단이 정박하고 출항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고, 경주까지 이어진 길에 고개가 없어 교통이 편리했으며, 파도가 약하고 수심이 깊어 큰 배가 드나들기에 적합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장점들을 기반으로 국제무역항으로 울산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이종서, 허영란, 2015, p. 23). 이를 뒷받침해주는 대표적인 기록으로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가 있다. 이는 752년 6월 15일부터 7월 8일 사이 김태렴을 대사로 하는 신라사절단이 가져온 외래품을 사기 위해 일본왕족과 귀족들이 담당관청에 제출한 목록 및 구입신청서로, 그 당시 대일무역을 증명하는 귀한 기록물이다. 일본 귀족들은 신라에서 생산한 염료, 생활용품, 기물, 문화용품, 약제류 외에도 동남아시아, 인도, 아라비아, 중국 등에서 생산된 고가의 향료나 안료를 신라를 통해 구입했음을 알 수 있다(이병로, 2013). 이러한 공무역은 9세기 공무역이 쇠퇴하기 전까지 번성하였다.

    신라 하대에 접어들면 중국에서 안사의 난(755∼763)이 일어나 당의 중앙집권체계가 무너지고, 일본에서도 직접 무역선을 중국으로 보내면서 울산항은 국제무역항으로서의 면모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10세기 후반 울산에서는 현재 학성을 기반으로 한 호족 박윤웅이 등장하였다.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고려 때 고을 사람 박윤웅이 태조를 도와 고려를 흥하게 했다. 조정에서 그 공으로 동진현, 하곡현, 동안현, 우풍현과 임관군을 합해 흥려부라는 이름을 내렸으니, 고려를 흥하게 했다는 말이다. 성종 때인 순화 2년(991)에 공화현으로 낮추었다가, 곧바로 공신 박윤웅의 고을이라 하여 흥려부로 회복시켰다.”고 한다. 또 동천강과 태화강 하류에 접한 반구동 일대에서 1991년, 2006년~2008년 두 차례 발굴을 실시한 결과 신라중기의 항만유적과 박윤웅이 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계변성 하부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신라 중반에 중앙정부의 직할지로 공무역의 중심역할을 했던 울산항이, 고려시대에 접어들어 ‘울주’라는 행정지역으로 편입되면서 무역항의 기능을 상실하였음을 알 수 있다(이종서, 허영란, 2015, p. 56).

    고려 말로 접어들면서 국력이 쇠퇴하자 울산항은 왜구의 침입으로 백성이 살지 않는 버려진 땅이 되기도 했다. 고려 말 충정왕 2년(1350)부터 공양왕 3년(1391)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40년 동안 왜구는 빈번하게 고려의 해안마을을 노렸고, 울산도 12번이나 왜구의 침입을 당했기 때문이다(울산광역시 동구청, 2011, p. 17). 울산항이 국제무역항의 기능이 상실되고 지역 항구로 위축된 기조는 조선시대 전기까지 이어졌다.

       2.4 조선시대 울산항 관련 기록과 로컬리티

    조선 세종 조에 조사된 경상도의 인구현황을 보면 울산의 인구는 1,058호에 4,161명으로 경주와 밀양에 이어서 경상도 전체에서 세 번째로 거주민이 많은 고을이었다(울산·울주향토사편찬위원회 편, 1978, p. 323). 또 동남쪽 변방에 위치하여 일본과 유구 등 외부세력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 경상좌도수군절도사와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편제되어 있었고, 삼포개항으로 왜관(倭館)을 두는 등 조선정부의 영향력이 상당했던 행정구역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울산부여지도 신편읍지(蔚山府輿地圖 新編邑誌)』 등 관(官)이 주도한 고문헌·고지도에는 울산군과 언양현에 대한 자료가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있다. 이와 함께 성곽과 봉수, 국영목장 등 다양한 공적 시설을 관리하기 위해 관리(官吏)를 임명하는 차정첩(差定帖)과 전령(傳令), 신숙주가 편찬한 일본 외교에 관한 저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수록된 「울산염포지도」, 관리가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 각종 지계 및 서계 등이 남아있다. 또 울산항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왜적을 막기 위해 일어난 의병과 관련된 문집·유서 등도 남아있어 전쟁이 일어난 당시 울산항의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표 1>은 조선시기 울산항의 모습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편찬서·공문서와 이를 소장하고 있는 소장처를 생산연도별로 정리한 목록이다.

    [<표 1>] 조선시기 울산항 관련 기록 목록

    label

    조선시기 울산항 관련 기록 목록

    <표 1>과 같이 고문서의 경우 조선의 집권층인 양반·관료의 시각을 담은 기록이 대부분이다. 당시 울산은 구강서원을 사액한 울산 박씨, 달천철장을 소유하고 있는 이의립의 후손 등 지방 사림계층이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그 외는 이 지역 지식인들의 시문을 모은 문집이 대부분이었다. 본 연구에서는 지배계급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울산항을 터전으로 삼았던 민중들의 모습을 담기 위해 울산의 대표적인 전통지식을 조사하였다. 울산만 연안에서 행해졌거나, 울산항 교역과 관련이 있는 민속놀이·연희·세시풍속·구비전승을 알아보고, 구술 채록이 이루어졌거나 시청각 형태로 공연예술자료가 생산된 기록을 <표 2>와 같이 정리하였다. 설화와 민요를 채록한 구술기록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구비문학대계 웹사이트에서 서비스하는 자료를 인용하였음을 밝힌다.

    [<표 2>] 조선시기 울산항 관련 전통지식 현황

    label

    조선시기 울산항 관련 전통지식 현황

    울산연안에는 생선, 조개, 해초와 고래 등이 풍부하게 서식하는 좋은 어장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미역세를 납부할 만큼 최고의 미역밭이 있었고(울산광역시 동구청, 2011, p. 60), 『정조실록』9)을 보면 왕에게 진상할 만큼 좋은 품질의 전복도 울산 앞바다에서 나왔다. 바다와 접해 있는 달천에서는 품질이 좋은 철이 나와 신라시대에는 달천 철이 일본과 교역품목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뒷받침하듯 민간에서도 곽암(미역바위)에 얽힌 민간설화와 어업과 관련된 <뱃노래>, <멸치 후리는 노래>, 달천철장과 대장간에서 불렸던 <불매노래>· <쇠부리소리> 등이 전해 내려오며, 풍어와 안녕을 기원하는 별신굿과 같은 종교제의도 잘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다. 특히 동해안 별신굿은 200년 이상 계승되어 동구 일산동에서는 일산동 별신굿으로, 장생포에서는 고래잡이의 만선을 기원하는 당제와 풍어제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편 군사문화가 반영이 된 전통지식 기록도 있는데, 방어진 목장이 있던 남목(南牧)과 얽힌 지명설화인 ‘남목사람 잘록이’, 수군 만호가 있던 개운포의 처용암 관련 설화와, <병영서낭치기>와 같은 민속놀이가 전해 내려온다.

    <표 3>은 <표 1>의 분석결과와, <표 2>의 내용을 울산항 로컬리티 구성요소별로 배치한 표이며, <표 3>에서 울산항의 로컬리티를 담고 있는 공간을 지도로 표시하면 <그림 2>와 같다.

    [<표 3>] 조선시대 울산항과 로컬리티 구성요소

    label

    조선시대 울산항과 로컬리티 구성요소

    <표 3>에서 조선 전기 울산항은 경상좌도수군절도사가 주둔하는 국방의 요지이면서도, 일본을 대상으로 외교와 교역의 역할을 수행하는 관문의 역할을 겸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해동제국기』에서는 울산항과 대마도를 오가며 대일 외교에 힘쓴 이예 등 울산의 대표인물에 대한 발자취와, 삼포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왜관의 역할을 수행했던 염포의 모습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중기에 접어들면 삼포왜란이 일어나 염포 왜관이 폐쇄되면서 울산항의 대외교역 기능은 축소되었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큰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자 왜적의 침입로에 위치한 울산항은 왜적과 조명연합군의 격전지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울산의병이 올린 상소문인 『임란창의 소지』나 임응춘 의병이 아들에게 남긴 유서, 의병 문집, 왜군이 임진왜란에 대하여 남긴 『조선물어』, <울산 도산성 전투도 병풍>에는 당시 울산항에서 벌어진 치열했던 전쟁의 상흔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울산항은 중앙정부에서 부여한 국방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방어진목장과 봉수대 등 국방지원시설 관리에 대한 기능을 강화하였다. 허목의 『목장지도』와 봉수대 관리 문서, 울산부사 박명부가 중앙정부에 올린 『울산민폐소』에는 군마(軍馬)의 수와 봉수체계, 울산항 주민들이 져야 했던 군역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국방에 대한 민중의 기억은 방어진 남목에 얽힌 지명설화, 울산 병영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서낭치기 등 전통지식 기록에 투영되어 있다.

    울산항이 꼭 국방의 역할만 수행한 것은 아니다. 각종 읍지와 지리지에는 울산을 설명하는 공통적인 특징으로 청어와 고등어가 많이 잡히는 풍부한 어장을 꼽는다. 또 『세종실록』에는 당시 상당한 규모의 철을 채굴하던 달천 철장이 울산항 가까이에 있었으며, 『구강서원 고왕록(鷗江書院 考往錄)』에는 구강서원을 사액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염포와 태화강 하류 사이에 위치한 ‘내황나루’에서 함경도 상선 등과 교역을 한 내역이 기록되어 있다. ‘염포’에 살던 어부들의 <멸치 후리는 노래>나 달천의 <쇠부리소리>, 이의립의 달천철장 발견에 얽힌 설화를 통해 당시 조선시대 울산의 경제활동 중 많은 부분이 울산항과 울산항 주변 장소에서 이루어졌으며, 울산항이 국내교역의 기능도 겸하였음을 보여준다. 조선후기에는 서구열강과 일본이 ‘포경’의 근거지로 장생포를 주목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러시아의 불법포경을 보고한 『동래항첩보』에서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장생포는 일제강점기와 1980년대 포경금지협약 전까지 한국 포경을 대표하는 항구라는 로컬리티를 형성한다.

    울산항과 관련된 공문서와 문집·구술 기록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 조선시대 전반을 관통하는 울산항의 키워드는 ‘국방’과 ‘국방지원시설 운영’이었다. 조선 동남부 끄트머리에 위치한 지리적인 위치때문에 울산은 중앙정부가 하달한 ‘국방도시’라는 미션에 충실해야 했다. 울산항은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을 개운포에 둠으로써 국방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이행하였으며, 이를 지원하기 위한 방어진 목장과 봉수체계 등 시설도 울산항에 집중되어 있었다. 자연히 울산항에 주둔하는 수군의 역할이 중요했으며, 울산연안에 머물던 거주민들은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과도한 군역에 시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울산항의 로컬리티를 단순히 ‘국방’으로 정의할 수 없다. 조선 중기까지 존재했던 왜관의 존재, 내황나루와 달천철장, 천혜의 어장을 가진 방어진과 고래가 출연했던 장생포는 울산항이 국방의 역할에서 벗어나 조선시대 울산의 외교와 경제를 책임졌던 공간, 서구 열강이 넘보았던 대표적인 어항(漁港)이라는 로컬리티를 보여주는 것이다. 울산과 울산항의 로컬리티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울산사람의 성정에 대해 ‘무예를 숭상하고 장사하기를 좋아한다[尙武藝 好商賈]’라고 평가한 구절로 빗댈 수 있을 것이다.

    제3장에서는 조선 전기 삼포개항 중 하나로 중앙정부로부터 대일본 외교창구라는 역할을 부여받은 염포, 조선중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격전지였던 서생포와 개운포-학성(울산왜성), 국방 지원 시설이 존재했던 남목과 방어진, 대외교역이 쇠퇴한 이후 국내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내황나루와 교역품을 생산하던 달천철장의 존재, 조선 후기 서구 열강세력이 진출했던 장생포를 각각 조명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 울산항은 어떤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울산의 로컬리티 변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았다.

    3. 조선시대 울산항과 로컬리티

       3.1 교린외교의 축, 염포(鹽浦)

    울산은 한국을 대표하는 공업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전근대사회의 울산은 일반적인 연안 고을과 군사도시의 성격을 아울러 갖춘 고을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동남쪽 변방을 방어하기 위해 경상좌도수군절도사와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울산에 함께 주둔하였는데, 일본과 가깝다는 지리적 입지는 ‘염포’를 대일교역을 위한 항구로 개방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염포는 현재 울산광역시 북구 염포동에 소재한 포구로 울산만에 면해 있다. 신라 때는 하곡현(河曲縣), 고려때는 지울주군사(知蔚州郡事), 조선시대에는 울산군(蔚山郡)의 관할 하에 있었으며, 예로부터 소금밭이 많아 ‘소금 나는 갯가’라 하여 염포(鹽浦)라 붙여졌다고 한다.11)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다음과 같이 염포영을 언급한다.

     

    “고을 동쪽 23리에 있다. 돌로 쌓았다. 둘레 1,039척, 높이 15척이다. 성안에 우물 3곳이 있다. 항거왜호(恒居倭戶, 조선에 상주하던 왜인)가 있었는데, 정덕 경오년(1510)에 제포의 변을 듣고 모두 본도로 들어갔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염포’가 직접적으로 언급된 기사는 총 72건으로 울산항과 관련된 키워드12) 중 임진왜란 이전까지 제일 빈번히 등장한다. <표 4>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염포가 등장한 기사 중 울산항에 유의미한 영향을 준 주요사건을 다뤘던 기사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표 4>] 조선왕조실록의 염포관련 주요 기사13)

    label

    조선왕조실록의 염포관련 주요 기사13)

    염포를 언급하기에 앞서, 『조선왕조실록』에 울산항이 처음 등장한 것은 태조 6년(1397)이다.

     

    “왜구(倭寇)의 괴수 상전(相田)·어중(於中) 등이 그의 도당을 거느리고 울주포(蔚州浦)로 들어온 것을 지주사(知州事) 이은(李殷)이 식량을 주고 후히 접대하였더니, 상전 등은 도리어 꾀어서 함몰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이은(李殷)과 반인(伴人) 박청(朴靑), 기관(記官) 이예(李藝) 등을 잡아 가지고 도망해 돌아갔다.”14)

     

    당시 ‘울주포’에서 왜구에게 울산 지주사 이은과 기관 이예가 납치된 사건이 벌어졌는데, 조선 초 왜구의 침입에 시달리는 울산을 비롯한 변방의 현실이 투영된 것이다.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왜구의 침입은 조선 정부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조선정부는 태종 15년(1415) 울산에 진을 설치하고, 태종 17년(1417)에는 경상좌도 도절제사 군영을 울산으로 옮기고 염포에 만호를 설치하는 등 울산항에 방어를 굳건히 하였다. 한편으로는 조선에 남아있는 항거왜인을 포섭하고, 일본, 유구 등 인접 국가에서 왕래하는 사신들이 머물 숙소로 객관을 설치하는 교린외교정책을 펼쳤다. 부산포, 내이포, 염포 등의 포소(浦所)에는 일본사신을 위한 포소왜관(浦所倭館)이 설치되었다(한문종, 2012, p. 250). 다음의 기사를 볼 때 염포에는 태조 18년(1418)에 왜관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병조에서 경상도 수군 도절제사(慶尙道水軍都節制使)의 첩정(牒呈)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부산포(富山浦)에 와서 거주하는 왜인(倭人)이 혹은 상고(商賈)라 칭하고 혹은 유녀(遊女)라 칭하면서 (중략) 폐단을 일으킵니다. 빌건대, 좌도(左道) 염포(鹽浦)와 우도(右道) 가배량(加背梁)에다 각각 왜관(倭館)을 설치하여 항거(恒居) 왜인(倭人)을 쇄출(刷出)하여 나누어 안치(安置)하여 거주하면서 살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명하였다. (후략)15)

     

    세종 8년(1426) 내이포와 부산포 이외에 염포에서도 대일무역을 허가하였고, 세종25년(1443)에는 대마도주(對馬島主)와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하여 삼포에서의 교역방법을 상세히 정해 운영하였다. 이후 중종 10년(1510) 삼포왜란이 일어나기까지 삼포개항의 시대가 열렸으며, 염포 또한 왜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신숙주가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찬진한 『해동제국기』의 울산염포지도에도 방어진목장 옆에 왜관이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동제국기』에는 일본사신이 조선에 도착하였을 때 사절의 등급에 따라 연향의 종류와 횟수를 달리하여 개최하는 모습을 정리하여 기록하였는데, 삼포에 도착하였을 때는 삼포연(三浦宴)을 열어 주는 장소로 왜관을 사용하였다. 염포 왜관에 도착한 일본 사신(使臣)은 울산-경주-안동-영천-단양-충주-여흥(驪興)16)-양근(楊根)17)-평구(平丘)18)를 거쳐 서울로 상경하였다.19)

    이 당시 울산과 울산항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예가 있다. 이예는 울산군의 아전이었는데, 앞서 일본으로 납치를 당했다 돌아온 후 이은을 돌본 덕을 인정하여 아전의 역(役)을 면제시키고 벼슬을 주었다. 태종 6년(1406) 일본에 포로로 잡혔던 남녀 70여 명을 데리고 와 조정의 눈에 들었으며,20) 세종 25년(1443) 종2품인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까지 올라 73세의 나이에 숨을 거두기까지 40여 차례 일본을 왕래하며 600여명의 포로를 되찾아 오는 등 외교사절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였다.21) 이예는 울산 출신으로 왜구의 침입으로 피폐한 고향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고, 한편으로 왜구와 직접 접촉한 경험이 많아 일본 사정 또한 알고 있었기에 강경책만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조선정부가 유인책과 강경책을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이종무(李從茂)를 도와 대마도정벌(對馬島征伐)에 참여하면서도, 공물로 대마도주를 달래는 등 교린외교를 적극적으로 실천했다.

    한편, 조선정부의 다양한 왜구대책 실시와 일본 국내정세의 안정으로 15세기 초 왜구의 침입은 급격히 감소한 반면에 일본 각 지역으로부터 조선에 도항하는 ‘통교자(通交者)’는 점차 증가하였다.

    그러나 통교왜인(通交倭人)이 조선의 해안지방을 마음대로 왕래하면서 무역을 하거나 항왜(降倭)들과 접촉하여 군사상의 비밀을 정탐하는 등 치안상의 폐단이 나타났다. 또한 조선에 도항하는 통교왜인은 외교사행(外交使行)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도항해서 귀환할 때까지의 접대비용을 조선정부가 모두 부담하는 등 조선정부가 재정적 부담을 지게 되었다(한문종, 2012, p. 253). 염포는 세종 8년(1426) 개항장 중 마지막으로 편입 되어 부산포와 제포에 비해 항거왜인의 수가 많지 않았지만, 세종 초에 10여 호였던 왜인의 숫자가 성종 25년(1494)이 되면 51호로 70년 사이에 5배로 증가한 것을 볼 수 있다.22) 호구 수가 증가했다는 사실은, 이들이 점유하는 토지도 늘어났다는 뜻이다. 성종 25년(1494)에는 항거왜인이 경작하는 토지에 대한 세금을 매기거나, 거주하는 정수 이상의 왜인을 본국으로 쇄환할 것을 명하기도 하는 등 비교적 항거왜인에 대한 관리가 잘 이루어졌다. 그러나 연산군 시기로 접어들면 만호의 병폐가 만연하고, 왜인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중종 4년(1509) 3월 16일에는 가덕도 왜변이 일어났고, 중종 5년(1510) 4월 10일에는 삼포왜란의 여파로 염포에 정박했던 선박들이 불에 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삼포는 폐쇄되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부산포에는 왜관이 다시 설치 되었으나 내이포와 염포의 왜관은 끝내 폐쇄되었다. 내이포와 염포의 왜관이 폐쇄되면서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실록』 내 염포에 대한 언급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대외교역을 수행하던 염포의 기능이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앙정부가 염포에 요구한 대외교역 기능이 줄어든 것이지 국내 교역으로서 항구의 역할은 유지되었다. 조선후기까지 울산과 다른 지역 간 교역이 이루어진 ‘내황나루’는 태화강 하류와 염포 사이에 존재하였으며, 염포에서 난 소금은 주요 교역품으로 거래되었다. 염포 어부들이 부르던 <멸치 후리는 노래>는 1963년 염포가 무역항으로 편입되어 어항의 기능을 상실한 이후에도 구전으로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다.

    삼포왜란 이후, 중종 39년(1544)에 개운포 수영을 동래 해운보에 이설하고 난 후 중앙의 기록에서 울산항과 관련된 언급은 뜸해지다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경상도가 초토화되면서 다시 등장한다.

       3.2 수군의 격전지, 서생포(西生浦)와 개운포(開雲浦)

    울산항에 주둔했던 수군은 조선시대 울산의 로컬리티를 나타내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 세종 1년(1419)에 왜구의 침입이 계속되자 그들의 근거지인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였고, 세조 5년(1459)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동래현 부산포에 있던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경상좌수영]을 울산부 개운포로 옮기면서 울산항이 경상좌도 수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경국대전』에도 <표 5>와 같이 개운포, 서생포, 염포가 수군기지로 기록되어 있다.

    [<표 5>] 경국대전에 실린 경상도 수군의 편제(이철영, 2015, p. 129)

    label

    경국대전에 실린 경상도 수군의 편제(이철영, 2015, p. 129)

    좌수영이 있는 개운포에는 15척의 크고 작은 병선이 배치되어 수군을 태우고 항시 바다 위에 떠서 경계를 하고 있었고, 비상시를 대비하여 마련해 둔 작은 병선 2척이 더 배치되어 있었다. 염포에는 10척의 크고 작은 병선과 비상시용 작은 병선 2척이, 서생포에는 6척의 병선과 비상시용 병선 1척이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 염포만호는 중종 39년(1544)에 철수하였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 서생포와 개운포는 고종 12년(1875)에도 왜인의 감찰을 위한 장소로 언급되어 있어 울산항이 조선 후기까지 왜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국방항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서생포의 경우 임진왜란 시기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가 축조한 서생포왜성을 동첨절제사영(同僉節制使營)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직전 시기의 경상좌수영은 울산군과 기장현의 2개 고을이 읍 수군으로, 주진인 해운포를 비롯하여 부산포, 다대포, 서생포, 포이포, 두모포, 개운포, 서평포, 감포, 칠포, 축산포 등 11개 진포수군이 편성되어 임진왜란을 맞닥뜨리게 되었다(제장명, 2018, p. 287). 『울산부여지도 신편읍지(蔚山府輿地圖 新編邑誌)』에 실린 <임진왜변사적(壬辰倭變事蹟)>과 <선유동경장사(宣諭東京壯士)>에서는 임진왜란 당시의 울산의 모습과 사적이 기록 되어 있다. 아래는 <임진왜변사적>의 글 일부를 발췌하였다.

     

    “만력 임진년(1592) 4월 13일에 왜적이 부산을 침범하였다. 병사 이각이 군수 이언함을 좌위장으로 정하고 고을의 군대를 거느리고 동래로 갔으나 부산은 이미 함락되었고 동래부도 함락되었다. 군수 이언함은 달아나 돌아왔다. 왜적이 길을 셋으로 나누어 한꺼번에 진격함에 여러 고을들이 무너져 막아내거나 토벌하지 못하였다. 우리 고을도 왜적에게 점령당하는 바가 되었는데, 고을 사람 서몽호와 서인충 등이 의병을 일으켜 진격하였다. (하략)”

     

    <임진왜변사적>에서 볼 수 있듯이 임진왜란 초기 울산은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부산과 함께 함락을 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상좌수영은 와해되고 일부는 육군에 편제되어 파편적으로 활동하는 등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그러다 1593년 울산 군수 김태허가 군사 300명을 모아 부산과 동래, 기장을 방어하고 울산에 있는 왜적과 싸워 50여 명의 수급을 거두기도 하였다.23) 이와 함께 서몽호, 서인충, 김응택, 이응춘 등 의병이 활발히 진격하고, 경상좌수사 이수일이 경상좌병사 권응수와 함께 울산 서문 밖에 포진하고 있던 왜적과 싸워 이기는 등 경상좌수군이 어느 정도 전과를 거두기 시작하자 조선정부에서는 군선을 만들어 지원하는 등 경상좌수군의 전력 증강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울산에 주둔하던 경상좌수영은 임진왜란 시기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군량을 공급하고, 전투를 지원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제장명, 2018, p. 308).

    일본은 전쟁이 장기화될 것을 대비하여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서생포왜성은 선조 26년(1593) 4월 일본이 서생포를 함락한 이후 가토 기요마사가 축조하기 시작하여 1594년 7월 사명당 유정이 왜성에서 강화회담을 위해 들어가기 전에 완성되었으리라 추정한다. 서생포 왜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서생포첨사영(西生浦僉使營)으로 조선 후기까지 국방시설로 사용하였으며, 현재도 비교적 형태가 온전히 남아있다.

    고종 9년(1872) 제작된 울산서생진지도( <그림 4> 참고)에는 전선(戰船)을 관리하는 선창과 민가가 보이는데 평소에는 농민으로, 유사시에는 전투에 참여하는 진하 주민들이 살던 거주지로 추정된다. 서생포왜성은 왜적의 주둔을 돕고 수송로를 확보하기 위한 방책으로 축조하여 임진왜란 내내 조명 연합군을 괴롭혔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사이의 강화시기에도 서생포와 개운포 등지에는 국지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울산 군수 김태허는 당시의 상황을 중앙정부에 보고하였다. “서생포의 적은 전보다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고 금년부터는 온 들판에 개간하고 있으며 양식을 운반하는 배들도 전보다 배나 많이 출입할 뿐 아니라, 성도 날마다 더 올려 쌓고 전에 배설(排設)한 해자(垓子)도 다시 파고 그 안쪽에는 소나무를 책목(柵木)처럼 심으면서 ... (후략)”24)라고 보고하며 포수(砲手)와 살수(殺手)를 요청하는 치계를 올렸고, 이응춘은 선조 27년(1594) 전사하기 전 아들에게 “며칠 전에 진영(陣營)을 개운포로 옮겼다. 어제는 많은 적군이 갑자기 이르러, 종일 세 번이나 싸워 물리쳤다. 그런데, 큰 배가 또 수없이 와 닿으니, 힘은 다해 지치고 구원이 없어 형세가 버티기 어렵게 되었구나. (후략)”25)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개운포와 임진왜란에 얽힌 설화를 담은 구술기록에는26) 김태허가 이끄는 의병이 개운포에 주둔할 당시 대용암(처용암)에서 용신에게 제사를 지내 왜적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담겨있는데, 당시 의병과 왜적 사이에 치열했던 전투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선조 29년(1596) 9월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가 결렬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선조 30년(1597) 2월 부산, 가덕, 죽도, 서생 등에 있는 왜성의 방비를 강화하고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이후 도요토미는 조명연합군의 반격에 대비하여 남해안 일대로 전 군사를 철수시키고 새로운 축성 계획을 세웠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울산왜성의 축조이다(울산박물관, 2016, p. 110). 울산왜성은 근처의 울산읍성과 병영성의 돌을 사용하여 현재의 울산 중구 반구동 일대에 축조하였다. 선조 30년(1597) 9월 천안의 직산전투(稷山戰鬪)와 진도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남쪽으로 내려와 왜성에서 방어태세에 돌입하였다. 조명연합군은 울산왜성[도산성]을 되찾기 위해 2번에 걸쳐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서생포에 주둔하던 왜군과 서남방에 있던 왜군의 반격으로 끝내 함락하지 못하였고, 선조 30년(1598)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비로소 물러가게 되었다. 이때의 전투모습은 <울산 도산성 전투도 병풍>에 그려져 있으며, 1924년 울산성지보존회에서 만든 『울산성지개설』이라는 기록에도 드러난다. 울산성지보존회는 울산왜성을 복원하고 공원화하는 사업을 위해 일제강점기에 조직된 관변단체로, 임진왜란 때 조명연합군이 함락하지 못한 울산왜성을 일제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학성지(鶴城誌)』에서 “인조 2년(1624) 전선(戰船)을 새로 설치하여 도산 아래에 정박하게 하였으나 효종 갑오년(1654)에 개운포로 옮겼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울산왜성은 종전 이후 30년 동안 조선 수군의 선착장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정유재란 당시 울산왜성의 규모와 축성 상황을 기록한 것으로 일본 장수가 지은 『울산지어성출래사목록(蔚山之御城出來仕目錄)』과 『조선물어(朝鮮物語』가 있는데,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하여 지은 울산왜성의 구조·높이·시설 등을 꼼꼼히 기록해놓아 당시 울산왜성의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울산박물관, 2016, p. 110).

    울산은 일본과 가깝다는 입지적 조건으로 임진왜란 때 먼저 함락을 당했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었다. 전란 당시의 처참한 상황에도 물러서지 않은 울산 백성들을 치하하여 선조 32년(1599) 울산을 도호부사로 승격시켰다. 이에 대해서는 제찰사 이덕형이 임진왜란 때 고을 사람들이 충의를 떨쳐 적을 토벌하여 전공이 가장 많다고 장계를 올렸기 때문이다. 조선 조정은 울산에 언양현을 더하여 병영에 합치고 도호부사를 겸하게 하였다.27)

       3.3 국방 지원시설로 무장한 방어진(方魚津)

    『조선왕조실록』에서 방어진은 말 ‘목장(牧場)’이 있는 지역으로 등장한다. 각종 지리지에 수록된 고지도에서는 동구의 방어진과 울주군 간절곶, 북구의 강동지역에 설치된 군사용 말을 사육하는 국영 목장을 볼 수 있다. 말은 국가 교통의 핵심수단이었으며, 기병이 군사력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보아도 국가의 안위와 곧바로 연결되는 중요한 군사물자에 속하였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국가 중요 정책의 하나인 마정(馬政)을 원활하게 지원하고 필요한 말의 번식과 생산을 위해 전국 고을에서 수초(水草)가 좋은 곳에 목장을 설치하였다. 현종 4년(1663) 허목(許穆)이 지은 <목장지도>에 의하면 각 도별로 총 128개의 목장이 있었으며, 그 중 울산에는 방어진, 방암산, 이길곶 세곳에 마성(馬城)이 설치되었다. 이 중 두 곳은 폐지되고 방어진목장이 조선 후기까지 운영되었다. 현재 방어진 목장은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8호(1998. 10. 19 지정)인 남목마성(南木馬城)으로 지정되었으며, 성벽 유구가 남아있어 당시 모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성종실록』에는 “사복시 제조가 방어진을 포함하여 각지에서 기르는 마소의 원래 숫자와 현재 잃어버린 숫자를 아뢰다: 울산의 방어진에는 본래 방목한 말이 3백 60두였는데 고실(故失)이 57두, 유실(遺失)이 11두, 범이 잡아먹은 것이 67두이며...”28)라고 되어 있어, 15세기 방어진 목장의 현황을 알 수 있다. 위에서 보듯이 울산목장에서 사육하던 말의 숫자는 성종 1년(1470)에 360필이었고 이후 점차 증가하여 철종 12년(1861)에는 남목 감목관이 관할하던 울산과 포항 장기곶 목장 말 숫자가 모두 1,450여필이었는데, 이 중 울산목장에 최대 1,000필의 말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울산광역시 동구청, 2011, p. 50). 조선 전기부터 고종 34년(1897) 폐지되기 전까지 약 400년간 운영되어 오던 방어진 목장은 관련 설화도 전한다. 남목 동대산에 홍수가 나자 남목에 사는 사람들이 방어진 목관(牧官)에 요청하여 이를 보수케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방어진은 울산에서도 동남단에 위치하고 있어 왜구로부터 동해안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중요한 군사적 시설로 봉수가 만들어졌다. 부산과 경주 사이의 동해안 연안에 위치한 남목·천내·가리·하산·이길 봉수는 조선 초기에 설치되어 봉수제가 철폐된 고종 32년(1895)까지 지속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이철영, 2018). 철종 11년(1860) 울산 도호부사가 박명대를 남목봉수별장(南木烽燧別將)에 임명하는 임명장과, 고종 13년(1876) 봉수를 지키는 별장(別將)과 인근 동수(洞首)에게 근무를 철저히 하라는 내용을 담은 전령(울산박물관, 2018, pp. 30-31)은 조선후기까지 봉수제를 유지한 증거로 볼 수 있다.

    방어진의 사례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울산항은 각종 군사시설이 집결한 곳으로 국방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개운포의 좌수영에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가, 병영성에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자리했으며 왜적의 침입로에 위치하여 임진왜란·정유재란으로 피해를 많이 받은 곳이기도 했다. 국방시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주민들이 져야 하는 부역도 많다는 뜻이다. 박명부가 울산 도호부사로 재직하던 때 저술한 『울산민폐소(蔚山民弊疎)(1630)』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30년 후인 인조 8년(1630) 울산과 울산 주민이 직면했던 어려움을 읽어낼 수 있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丁卯胡亂)이 끝나고 급증한 세와 역은 호구 수가 감소한 울산 주민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고, 박명부는 이를 개선하고자 군대·토지·전선(戰船)·관속(官屬)·목장에 대한 5가지 폐단을 지적하였다. 군대는 주민 숫자에 비해 군액이 과다하게 책정된 폐단을, 토지는 허결에 수세하는 폐단을, 전선은 해충이 많고 수심이 깊은 울산연안에서 전함을 건조하고 수군 훈련에 참여해야 하는 폐단을, 관속은 소수의 관속이 과중한 책임을 부담하는 폐단을 서술하였다. 목장의 경우 관리자인 목자의 수가 적으면 자연스레 관리가 소홀해지고, 이렇게 유실된 말은 과도한 포(布)로 배상하도록 요구하여 목자의 수가 적어지는 악순환을 소상히 기술하였다(이종서, 2009, p. 233). 울산은 염포 왜관이 폐쇄되고, 지리적 입지와 전란으로 중앙정부로부터 상대적으로 국방에 대한 부담이 과도하였다.

       3.4 국내교역의 기능을 담당한 내황나루

    삼포왜란 이후 염포의 대외교역 기능은 축소되었으나 국내교역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태화강 하류와 동천강, 울산만이 만나는 지점인 내황(內隍)의 내황나루 근처에는 울산의 사림세력이 건립한 구강서원(鷗江書院)이 자리하고 있었다. 구강서원은 1694년 울산 최초로 사액(賜額)을 받은 서원으로, 서원의 설립과 사액받기까지의 과정을 기술한 『구강서원 고왕록』에는 내황나루에서 다른 지역과 교역한 품목이 기록되어 있다. 1659년~1697년 사이 내황나루에서는 강원도와 함경도의 상선이 북어를 싣고 와서 곡식과 소금을 매입해갔고 황해도와 평안도 등 서해의 상선은 고등어와 새우젓 등 남해와 서해의 어물을 싣고 와서 곡식을 매입했다. 염포에서는 소금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지예망 방식의 고기잡이가 성행하였는데, <멸치 후리는 노래>가 지금까지 구전될 정도로 멸치가 많이 잡혔다. 내황나루와 염포는 지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에 염포에서 잡은 다양한 해산물도 교역의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를 보아 울산항은 조선 후기까지 국내교역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수환, 1995, p. 49; 이종서, 허영란, 2015, p. 61 참조).

    한편 내황나루에서 동천강 지류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달천철장(達川鐵場)이 나온다. 『세종실록』29)에는 달천철장에 대하여 “철장(鐵場)이 군의 북쪽 달천리(達川里)에 있는데, 백동(白銅), 철(鐵), 수철, 생철(生鐵)(해마다 생철12,500근을 바친다)을 생산한다.”고 언급하고 있어 조선 전기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달천철장은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0호로, 2008년 울산문화재연구원에서 유적의 일부를 발굴한 결과 삼한시대, 조선시대, 일재강점기 때의 채광유구 및 채광관련 부속유구들이 다수 확인되었다. 수혈 중에는 일본 야요이토기 및 낙랑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당시 달천철장의 철이 삼한시기 일본 및 낙랑, 그리고 주변지역으로도 수출이 되었다는 단서가 되었다(김광수, 2017, p. 2). 달천철장은 채굴장과 제철장을 함께 두었고, 바다와 가까운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어 삼한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관영체계로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중에는 문을 닫았다가, 현종 8년(1667) 울산에 터를 둔 문신(文臣) 이의립(李義立)에 의해 발견되어 민간체계로 변환한 후 다시 채굴되기 시작하였다. 달천철장을 발견한 연유와 규모, 채굴량과 납속규모는『구충당선생문집』과 『승정원일기』30)에 기록되어 있으며,(서성호, 2015, pp. 200-201) <쇠부리소리>의 가사에도 잘 나타나 있다(홍장표, 2004, pp. 160-161).

     

    우리조선 현종때에 / 구충당에 이릴선생31)

    십년세월 쇠를찾어 /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헤매다가 찾았다네 / 찾고보니 달래꼴 (후략)

     

    <쇠부리놀이>는 쇠부리꾼이 쇠를 뽑아내는 제련 작업의 과정을 춤과 노래로 꾸미는 민속놀이로, 오늘날까지 공연·재현 등의 형태로 전승하는 곳은 울산시와 제주시가 유이할 만큼(양영진, 2018, p. 159) 조선시대 달천철장의 존재가 울산지역의 민중생활에 깊이 뿌리내렸음을 알 수 있다.

       3.5 포경산업의 거점이 된 장생포(長生浦)

    울산은 예부터 해산물이 풍부하였고, 특히 청어가 많이 잡히는 어장(魚腸)을 보유하고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각종 지리지에서도 토산품으로 황어·연어·청어·고등어 등이 언급되어 해산물이 생산품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보아, 울산항이 어항(漁港)으로서 기능을 수행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울산의 로컬리티을 대표했던 고래는 조선 중기까지는 관련 기록을 찾기 힘들다. 고래에 잡아먹힌 장생포 어부가 사투 끝에 살아남아 고래를 판 돈으로 논마지기를 구입하여 부자가 되었다는 <고래논> 설화 내용이나, 1933년 펴낸 『울산군 향토지』에 ‘울산 연안에는 큰 풍랑이 불 때마다 고래가 떠내려 오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울산대곡박물관, 2016, p. 180).’라고 기술한 것을 보아 조선 후기까지도 적극적인 포경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추측된다. 한석근은 1877~1880년 쓰여진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의 저서를 인용하여 당시 한국에서 고래사냥은 연안 가까이 온 고래를 산발적으로 사냥하거나 얕은 곳으로 몰아넣어 좌초시키는 재래식 사냥법을 쓴 것으로 추측하였다(한석근, 2017, p. 226).

    선사시대부터 울산만에 출몰한 고래와 풍부한 해산자원은 서구 열강과 일본의 눈에 들기에 충분했다. 1890년대 동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러시아의 태평양포경회사는 1898년 3월 30일자 『동래항보첩』에 처음 등장한다. 러시아의 케이제를링은 불법으로 장생포 앞바다에서 고래를 잡았으나, 뭍에 정박하여 고래를 해체하기 위해 1899년 당시 대한제국과 「포경약사」를 체결하였다. 러시아의 포경선점은 당시 「강화도조약」, 1883년 「조일통상장정」을 맺으면서 조선 자본을 잠식해나가던 일본을 자극하여 장생포에서 포경산업 선점에 대한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였다(이종서, 허영란, 2015, pp. 94-99 참조). 장생포가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포경산업의 거점이 되면서 장생포 마을 사람들의 주 수입원도 고래잡이로 바뀌게 되었다. 장생포 마을 사람들은 고래를 잡으러 바다로 떠나기 전, 무탈하게 고래를 많이 잡을 수 있게 마을의 조상신이나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출항의식인 ‘당산제’와 고래를 잡고 장생포로 돌아 왔을 때 치르는 입항의식인 ‘풍경제’를 지냈다(울산남구도시관리공단, 2020). 장생포는 조선말기부터 1986년 상업포경 금지를 결정한 국제포경위원회(IWC)의 의견을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수용하여 고래잡이가 금지되기 전까지 포경기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조선후기 포경기지의 기능을 수행한 장생포는 일제 강점기 울산에서 일제자본의 강제 이식을 가속화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4. 결 론

    본 연구에서는 조선시대 울산의 아이덴티티를 가장 잘 나타내는 공간으로 울산항을 정하고, 조선시대 울산항이 변모해가는 과정을 밝혀 울산의 로컬리티를 재현했다. 먼저 공간·사건·인물이라는 기존의 로컬리티 구성요소에 ‘인식과 가치’를 더하고, 요소 간의 관계를 설정하여 별도의 로컬리티 관계도를 도출하였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 울산항과 관련된 고문헌·외교문서·고지도와, 민간설화·민요와 같은 전통지식을 채록 등의 형식으로 남긴 구술·시청각 기록 등 다양한 기록물을 찾아 로컬리티의 구성요소와 매칭한 후 키워드를 추출하였다. 그 결과 조선시대 울산과 울산항을 관통하는 로컬리티의 핵심 키워드는 ‘국방’이었으나, 여기에 수군 주둔·국방 지원시설인 말 목장 운영·대외교역·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대응·국내교역·포경까지 다양한 로컬리티가 도출되었다. 울산항 내에서 울산의 로컬리티를 잘 나타내는 장소를 시계열 순으로 살펴보자면 삼포개항 중 하나로 정부로부터 대일본 외교라는 역할을 부여받은 염포, 조선 중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격전지였던 서생포와 개운포-학성(울산왜성), 국영목장과 봉수체계 등 국방 지원 시설이 존재했던 방어진(남목), 대외교역이 쇠퇴한 이후 국내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내황나루와 교역품을 생산하던 달천의 존재, 조선 말기 서구 열강세력이 진출했던 장생포가 있다.

    울산은 조선 초 울산지주사가 납치될 정도로 왜적의 침입이 빈번하였다. 그러나 세종 8년(1426) 염포 만호를 설치하여 방어를 굳건히 하고, 한편으로는 조선에 남아있는 항거왜인을 포섭하고 주변국가의 사신을 대접하는 객잔을 설치하는 교린 외교정책을 펼쳤다. 태종 18년(1418) 염포에도 왜관을 설치하고, 세종 25년(1443)에는 대마도주와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삼포개항의 시대가 도래 했다. 왜관은 통교왜인의 숙박과 접대의 장소로, 공물을 사고파는 교역의 장소로, 외교 교섭의 장소로, 왜인을 통제하고 감독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조선 전기 울산을 대표하는 인물인 이예는 울산항과 일본을 오가며 교린외교의 중심에서 활약하였다. 염포는 부산포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항거왜인의 수는 적었으나 삼포왜란 직전인 성종 25년(1494)에 이르러서는 그 수가 51호 152구에 이르렀다. 삼포 개항 초기에는 비교적 항거왜인에 대한 관리가 잘 이루어졌으나, 연산군 때 만호의 병폐가 만연하고, 왜인에 대한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다가 중종 5년(1510) 삼포왜란이 일어나 염포도 선박이 불타는 등 피해를 입었다. 이후 부산포는 다시 개항되었으나 염포는 왜관이 영구 폐쇄되었고 울산항의 대외교역 기능이 축소되었다.

    조선시대 울산이 국방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수군의 역할이 중요했다. 수군은 태종 17년(1417)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이 울산부 개운포로 이설되면서 본격적으로 주둔하기 시작했다. 울산은 개운포·서생포·염포가 수군기지로 운영이 되었으며, 중종 39년(1544) 염포 만호가 철수되고 나서도 개운포와 서생포는 조선 후기까지 국방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울산은 부산과 함께 가장 먼저 왜적에게 함락 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상좌수영은 와해되고 일부는 육군에 편제되어 파편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 서몽호·서인충·김응택·이응춘 등 의병활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김태허가 울산 군수로 임명되어 전열을 가다듬고 나서는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군량을 공급하고 전투에 간접적으로 참여하여 지원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일본은 전쟁이 장기화될 것을 대비하여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축조하였다. 울산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서생포와 도산성에 서생포왜성과 울산왜성을 쌓았고, 서생포왜성은 사명당 유정이 참여한 4차례에 걸친 강화회담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정유재란 마지막까지 치열한 전투의 장이 된 울산은 이후 선조32년(1599) 울산 도호부로 승격하게 된다.

    삼포왜란 이후 교역의 기능이 축소되고 두 번의 전쟁을 겪으면서 국방의 기능이 강화된 울산항은 조선 후기인 고종 32년(1895)까지 수군 운용, 목장과 봉수 관리를 동시에 맡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 인적·물적으로 손실이 큰데다 군역까지 더해져 울산 주민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한편 울산은 해산물이 풍부하고 달천철장이 존재하여 울산만과 접한 내황나루에서 국내 교역이 이루어졌다. 17세기에 함경도와 강원도, 서해안의 상선이 드나들었던 내역이 구강서원 기록에 존재하는 것을 보아 조선 후기까지 국내 교역 기능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장생포 앞바다에는 고래가 빈번히 출현하여 서구 열강과 일본의 눈에 들기에 충분하였다. 1880년대 이후에는 러시아와 일본 어민의 진출이 활발해져 일제강점기 포경의 거점으로서 일본 자본이 울산의 경제에 잠식해나가는 데 영향을 주었다.

    지금까지 조선시대 울산항의 변모과정을 살펴보고 로컬리티를 담은 구성요소를 도출하여 조선시대 울산의 궤적을 재현해보았다. 울산항은 울산이 중앙정부로부터 이양 받은 국방의 역할을 수군기지 운영을 통해 적극적으로 이행하였고, 말 목장 등 국방 지원시설을 운영하여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국방의 최전선 역할뿐만 아니라 대일 외교의 방편으로 염포에 왜관을 설치하여 교역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였고, 천혜의 어장과 달천철장을 보유하여 삼포왜란으로 왜관이 철수된 후에도 조선 말기까지 국내 교역이 이어져 울산 주민의 경제활동의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연구를 수행함에 있어 수집한 기록의 성격이 실록·지리지 등 중앙 정부가 주도한 공공기록에 치우쳐 있고, 상대적으로 조선시대 울산의 인식과 가치가 녹아있는 전통지식에 관한 기록에는 한정적으로 접근하여 울산의 로컬리티를 도출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전통지식의 정의가 광범위하고 지역의 ‘인식과 가치’가 잘 녹아있는 전통지식 기록을 수집하는 기준이 부재하여, 전통지식 기록에 대한 체계적인 수집모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에서는 울산항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본 조선시대 울산의 로컬리티만 다루었으나, 차후에는 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이후의 울산 로컬리티를 연구하고 변화양상을 서로 비교하는 작업이 이어져, 울산의 로컬리티에 대한 명확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참고문헌
  • 1. (2017) 울산 달천유적을 통해 본 대외관계 [울산사학] Vol.21 P.1-23 google
  • 2. (2018) 울산 일산동 별신굿의 연행구조와 변화양상 [무형유산학] Vol.3 P.7-46 google
  • 3. (2009) 전통지식과 지식재산권 google
  • 4. (2015) 로컬리톨리지를 위한 시론 [한국민족문화] Vol.33 P.135-158 google
  • 5. (2016) 로컬리티 연구의 쟁점: 로컬리티 개념을 둘러싼 고민들 [로컬리티 인문학] Vol.15 P.305-314 google cross ref
  • 6. (2010) 지역전통지식의 의미구성과 실천전략 [민속학연구] Vol.26 P.33-55 google cross ref
  • 7. (2015) 기록으로 본 울산 달천 광산 [울산사학] Vol.19 P.179-209 google
  • 8. (2012) 공간 중심의 로컬리티 기록화 모형의 설계 [한국비블리아학회지] Vol.23 P.437-455 google cross ref
  • 9. (2015) 로컬리티와 지방기록관리 [한국기록관리학회지] Vol.15 P.151-171 google cross ref
  • 10. (2014) 역주 울산지리지 google
  • 11. (2011) 개항장으로서의 부산항과 기록 [한국기록관리학회지] Vol.11 P.273-298 google cross ref
  • 12. (2015) 지역 기록을 활용한 로컬리티의 형성과 재구성 [한국도서관ㆍ정보학회지] Vol.46 P.203-225 google cross ref
  • 13. (2016) 기록으로 본 부산의 산업변동과 로컬리티 [한국기록관리학회지] Vol.16 P.143-172 google cross ref
  • 14. (2006) 전통지식의 개념과 한국전통지식자원 분류도구 개발 [한국지역사회생활과학회지] Vol.17 P.15-27 google
  • 15. (2018) 울산쇠부리소리의 전승 양상 [공연문화연구] Vol.37 P.157-186 google cross ref
  • 16. (1978) 울산?울주향토사 google
  • 17. (2011) 이야기 동구 100년 google
  • 18. (2016) 1933년 울산군 향토지 google
  • 19. (2016) 역사의 길목을 지키다 울산의 성곽 google
  • 20. (2018) 파도와 바람이 들려주는 삶의 노래 방어진 google
  • 21. (1995) 울산 구강서원의 설립과 사액과정 [대구사학] Vol.49 P.43-73 google
  • 22. (2009) 박명부의 울산민폐소 [울산사학] Vol.14 P.213-234 google
  • 23. (2010) 蔚山府先生案의 체제와 성격 [고문서연구] Vol.36 P.165-186 google cross ref
  • 24. (2015) 시민과 함께 읽는 울산항의 역사 개정판 google
  • 25. (2004) 18세기 울산 범서면의 신분구조와 그 변화 google
  • 26. (2018) 울산 서생포첨사영의 진하마을에 관한 역사민속학적 연구 [실천민속학연구] Vol.31 P.205-235 google
  • 27. (2015) 울산의 성곽과 봉수 P.112-159 google
  • 28. (2019) 한국전통지식자원분류(kTKRC)체계 재설정에 관한 연구 [지식재산연구] Vol.14 P.275-314 google cross ref
  • 29. (2018) 임진왜란 시기 경상좌수군의 위상과 활동 [군사] Vol.109 P.281-319 google cross ref
  • 30. (2012) 조선전기 왜관의 설치와 기능 [인문과학연구] Vol.32 P.249-273 google
  • 31. (2017) 조선시대 말기의 고래사냥 [수필시대] Vol.12 P.224-226 google
  • 32. (2015) CIDOC-CRM을 이용한 지역기록의 공간 기반 구조화 - 부산항을 사례로 [한국기록관리학회지] Vol.15 P.83-101 google cross ref
  • 33. (2004) 울주(울산)지역 민요 연구 [국악교육] Vol.22 P.137-213 google
  • 34. (1984) Beyond Trivia and Nostalgia: Collaborating in the Construction of a Local History [international Journal of Oral History] Vol.5 google
  • 35. (1996) Documenting Localities: A Practical Model for American Archivists and Manuscripts Curators google
이미지 / 테이블
  • [ <그림 1> ]  로컬리티의 구성요소와 관계
    로컬리티의 구성요소와 관계
  • [ <표 1> ]  조선시기 울산항 관련 기록 목록
    조선시기 울산항 관련 기록 목록
  • [ <표 2> ]  조선시기 울산항 관련 전통지식 현황
    조선시기 울산항 관련 전통지식 현황
  • [ <표 3> ]  조선시대 울산항과 로컬리티 구성요소
    조선시대 울산항과 로컬리티 구성요소
  • [ <그림 2> ]  조선시기 울산항 관련 로컬리티 공간10)
    조선시기 울산항 관련 로컬리티 공간10)
  • [ <표 4> ]  조선왕조실록의 염포관련 주요 기사13)
    조선왕조실록의 염포관련 주요 기사13)
  • [ <그림 3> ]  『해동제국기』 울산염포지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해동제국기』 울산염포지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 <표 5> ]  경국대전에 실린 경상도 수군의 편제(이철영, 2015, p. 129)
    경국대전에 실린 경상도 수군의 편제(이철영, 2015, p. 129)
  • [ <그림 4> ]  울산서생진지도(경상도지도 내 발췌, 1872)> <사진 1> 울산 울주 서생포성 동북면 (유리건판, 국1936년, 국립중앙박물관)
    울산서생진지도(경상도지도 내 발췌, 1872)> <사진 1> 울산 울주 서생포성 동북면 (유리건판, 국1936년, 국립중앙박물관)
  • [ <그림 5> ]  울산민폐소(1630, 울산박물관 소장)
    울산민폐소(1630, 울산박물관 소장)
(우)06579 서울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Tel. 02-537-6389 | Fax. 02-590-0571 | 문의 : oak2014@korea.kr
Copyright(c) National Library of Kore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