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전체 메뉴
PDF
맨 위로
OA 학술지
일제강점기 태봉국 철원성 조사와 봉선사지 A Survey on the Cheolwon Castle of Taebong-guk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 비영리 CC BY-NC
ABSTRACT
일제강점기 태봉국 철원성 조사와 봉선사지
Abstract

Recent changes in inter-Korean relations have encouraged South Korean archaeologists’ interest in northern cultural heritage and their desire to conduct research. However, it is doubtful how much the South Korea really knows about the cultural ruins in North Korea and the cultural ruins to be found in the DMZ.

In Korea, research data o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s scattered amongst national institutions and it is not possible to to collect, identify and document the data available in each institution.

Typically, the data of Keiichi Ogawa(小川敬吉) is difficult to understand in its printed from. In addition, Ogawa has collected data from several national government agencies, and work is underway to collect architectural data and construct digital archives. This situation will not occur if we publish the data collected so far in digital form.

Therefore, there is an urgent need to fully disclose the data related to Cheolwon which is owned by national institutions. If this data is analyzed, sufficient archaeological information can be obtained without excavation.

On the other hand, one must wonder if the whole landscape of Cheolwon castle of Taebongguk cand be understood by investigating the interior of Cheolwon castle. This effort should be preceded by a survey on the ruins and the remains of the southern part of the southern boundary line. Rapid development and large-scale arrangement of cultivated land are likely to make it difficult to restore the external landscape related to the tillage demand that is required by the current situation. In the process of restoration of the actual Gyeongwon Line, it has been confirmed that serious irregularity has caused damage and the landscape has been transformed.

In order to minimize these risks, it is urgent that we investigate the relics scattered in the southern part of the country, and not devote ourselves to the investigation of Cheolwon.

In this regard, how much military, roads, excavation and archaeologists are prepared, centered on Cheolwon and scenery is an important question. I am curious as to how much preparation is provided to the Chulwon-gun and Gangwon-do in terms of administrative assistance, and how much archaeologists and excavation agencies are aware of the archaeological information of the inside and the southern part of the DMZ. Furthermore, how long have people been aware of the archaeological remains on the North Korean side?

In order for da iscussion on Cheolwon and scenery to progress, it is necessary to carry out a precise investigation and accumulation of data on the remains in South Korea.

KEYWORD
태봉국 , 철원성 , 일제강점기 , 봉선사 , 석등
  • Ⅰ. 머리말

    남북 분단 이후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 : DMZ)에 위치하는 태봉국 철원성은 이재 (재)국방문화재연구원장(당시 육군사관학교 교수)의 주도로 그 실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는 남북 분단 상황에서 구체적인 양상을 파악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이후 이재 원장과 국립춘천박물관이 진행한 공동 조사를 통해 비무장지대 내 철원성 내성과 외성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그 후 수차례의 세미나와 토론을 거쳐 단행본으로 출간되기도 하였으며 자료집으로 작성되기도 하였다. 그 중에 궁예와 태봉에 관한 대표적인 개설서로 『궁예의 나라 태봉』이 간행(김용선 엮음 2008)되었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은 일제강점기의 자료와 2008년 현지 조사 자료 등을 종합하여 자료집(국립중앙박물관 역사부 2009)을 간행(이하 국박 내부자료)하였다.

    이후 대부분 세미나와 간담회에서는 국박 내부자료를 (비)공식적으로 소개하는 형식으로 논의되어왔다. 때문에 태봉 철원성에 대한 더 이상의 구체적인 논의는 진행되지 않고 국박 내부자료에 언급된 사실만 되풀이하여 소개하는 상황만 전개되었다. 이러한 원인은 현지 조사가 불가능하다는 현실적인 어려움에 기인한 것이다. 그렇지만 국립중앙박물관과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각종 공문서와 유리 건판 자료, 조선고적도보, 소천경길조사문화재자료(小川敬吉調査文化財資料)를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용되지 않은 측면이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일제강점기 공문서와 유리 건판,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유리 건판, 조선고적도보, 오가와 케이키치(小川敬吉)의 자료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궁예 철원성 석등 2기의 구체적인 위치와 사명(寺名)에 대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아울러 철원성에 관심이 집중되는 사이에 남방한계선 이남에 분포하고 있는 태봉국 도성의 경관을 보여주는 여러 유적에 대한 조사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Ⅱ. 태봉 철원성 석등 2기 위치와 사명(寺名)

    지금까지 (근세)오만분지일지형도에 궁예도성지(弓裔都城址)로 표시된 부분에는 2기의 석등이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나는 궁성지 남쪽에 표시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남대문지(南大門址)로 인쇄된 부분 아래 궁예시대석탑(弓裔時代石塔)으로 표시된 부분 오른쪽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체적으로 궁성지 아래에 표시된 것은 석등이 위치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으며 남대문지 아래에 표시된 것은 이견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석등의 위치에 대하여는 정성권(2011)이 구체적으로 논증한 바 있으며 그에 따르면 석탑으로 표시된 부분도 석등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필자도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2기의 존재는 일제강점기에 어떻게 인식 되었을까?

    일제강점기 철원성은 도리이 류죠(鳥居龍藏),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오가와 케이키치(小川敬吉), 조선사편수회가 조사한 것으로 보인다.

    도리이 류죠(鳥居龍藏)의 조사는 자료의 출간 연대로 보면 현재까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 중에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그림 5). 도리이는 사료조사라는 명목으로 수차례 진행하였다. 철원성은 1914년에 실시되었으며 제5회 사료조사 관련 문서가 국립중앙박물관 누리집 일제강점기 공문서 자료에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세키노 다다시의 조사 내용(그림 2)과 비교해보면 도리이의 조사는 세키노의 조사 이후에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도리이는 사료조사라는 미명하에 한반도 일원에 대한 조사를 지속적으로 실시하였으나 자세한 내용은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철원 지역에 대한 제5회 사료조사 결과물은 그 당시에 촬영한 유리 건판 사진[‘弓裔土城(月井里土城)’, ‘同城壁斷面」’, ‘同 城址內 寺蹟’, ‘同 城址內 石燈(楓川原石燈)’, ‘同 城址內 石燈(南方)’]이 알려져 있다.1 그리고 이때 수집한 유물 목록도 파악된다.

    제5회 사료조사 결과는 지금까지 진행된 철원성의 구조와 석등의 위치 비정에 사용되는 기본 자료가 되고 있다.

    반면에 세끼노 다다시의 조사 시기는 공문서를 통하여 확인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만 실물 자료는 아직 확인하지 못하였다. 다만 『조선고전도보(朝鮮古蹟圖譜)』 간행 작업을 주관하였다는 점에서 이 작업 과정에서 촬영된 사진이 실렸을 것으로 판단된다.2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 이외에 또 다른 유리 건판 사진이 있는데 국립중앙박물관 누리집을 통한 검색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오가와 케이키치(小川敬吉)의 조사 내용(그림 3)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간한 책자를 통하여 파악3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에 촬영한 것인지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주변에 흩어진 석재 등이 소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도리이의 조사가 진행되기 전에 촬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오가와가 일제강점기 주요 유적의 조사와 사찰의 수리 작업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정비과정에서 촬영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선사편수회 작업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리 건판 사진(그림 4)을 소장하고 있다.

    연대순으로 보면 『조선고적도보』 4에 실린 사진이 가장 빠른 것으로 보이며 세카노 다다시의 기록을 참고하면 강원 지역 조사를 실시한 1912년에 촬영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나 그의 정확한 행적은 확인할 수 없다.

    이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철원성에 대한 조사는 적어도 세 차례이며 이와 관련 자료가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적조사 과정에서 확인한 현장에 대하여 정비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조선고적도보』 4에 보이는 봉상리 석등을 제5회 사료조사에서 촬영된 사진과 비교해보면 석등 하대석이 정비되어 있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석등 하대석 2점이 확인되지만 구체적인 정비 내용은 파악하기 어렵다. 정비 작업과 함께 석등 주변에 보호책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4 그러나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건판 사진을 통해서는 정비 전·후 어느 시기에 해당하는지는 파악할 수 없다.5

    유리 건판 사진을 통하여 소위 궁성 앞에 존재하던 석등의 위치는 확인할 수 있다. 『조선고적도보』 4에는 ‘고궐리석등’으로 명명되어 있고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건판 사진에서는 석등은 ‘궁예도성지 석등’으로, 귀부는 ‘궁예도성지 외성 귀부’로 각각 명명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리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구별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도리이 류죠는 ‘궁예토성 석등(於楓川原石燈 249)’과 ‘궁예토성 석등(南方 250)’으로 확실하게 구별하고 있다.

    그러면 또 하나의 석등(궁예토성 석등 남방) 위치가 문제된다. 이 석등의 위치는 대부분이 외성 남대문 앞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어왔다. 이 석등은 『조선고적도보』와 오가와 게이키치의 조사 자료에 세부 사진이 촬영되어 소개되고 있으며 대략적인 위치가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사진에서 확인된다. 사진명은 ‘궁예도성지 외성 남대문 원경’으로 되어 있으며 중앙부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친 부분에 이 석등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아마 이 사진의 촬영 지점은 현 월정리역 부근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오가와 케이키치의 사진은 ‘봉선사지’로 소개되어 있다. 즉 오가와 케이키치는 남대문 앞에 있는 석등을 사찰과 관련하여 파악하고 있었으며 사명을 ‘봉선사(奉先寺)’로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주목되는 것은 도리이 류죠의 사료조사 과정에서 수습한 유물의 존재이다. 유물은 선문기와편 2점, 일휘문 수막새 1점, 전돌편 2점이다. ‘월정리토성내 채집유물’이라고 명기되어 있어 구체적인 위치를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석등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에서 수습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고 궁전지나 다른 특수 용도의 건물지에서 수습하였다면 해당 지점에 대한 사진이 있었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적어도 철원성과 관련하여 석등은 2개소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구체적인 위치까지 비정할 수 있게 되었다. 즉 고궐동에 위치하고 있는 석등은 선학들이 비정한 것과 동일하게 궁성지 앞에 위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보물고적천연기념물지정통지공(寶物古蹟天然記念物指定通知控)6의 내용으로 보면 지번과 점유자까지 확인되고 있어 더욱 이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리고 외성 남대문 앞에 위치 하고 있는 석등은 봉상리 소재 석등, 즉 봉선사지 석등으로 보인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궁성지 앞에 석등 1기, 남대문 앞에 석등 1기가 존재하였음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자는 ‘풍천원석등’, ‘궁예도성지 석등’으로 보아야 하며7 후자는 봉상리에 존재하였던 봉선사 석등일 가능성이 높다.

    봉상리에 있는 석등이 위치한 지점은 도성 체계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철원성은 고대 도성 체계를 설명할 수 있는 양호한 자료로 인식 되어왔다. 그런데 남대문이라 불리는 부분 앞에 별도의 사찰 성격을 갖는 건축군이 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적어도 이 건물지에는 석등과 귀부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물론 일제강점기 지도에는 석탑이 존재하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견해는 석등을 오기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도 종별(種別)에는 석등으로 되어 있고 내용에는 탑으로 인쇄되었지만 기술 내용에 높이가 약 2.1m에 이르고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다고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석등의 오자(誤字)로 판단된다. 아울러 여러 건판 사진 내용으로 볼 때 석등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국립문화재연구소 자료를 보면 오가와 케이키치는 봉선사(奉先寺)로 특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오가와가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근무(1916~1944)하며 세키노 등의 고적조사에 동행하면서 관련 정보를 파악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오가와가 봉선사로 특정한 연유에 대해서는 파악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 ‘봉선사’ 사명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도유호에 의하여 확인(도유호 1950)되었다. 도유호는 1950년 5월 강원도 화천 방면에 있다는 고분을 조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풍천원 고도지를 방문한다. 도유호는 풍천원에 석등 2기가 존재하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는데 그 위치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도유호는 그 중 월정리역 앞에서 철로 동편으로 약 1.5㎞ 떨어진 곳에 있는 석등을 조사하였다. 현지 조사 결과 목조 대건물이 남겨놓은 초석이 널려 있고 이 외에 귀부(龜趺)가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도유호는 귀부가 남아 있는 곳에서 약 50m 떨어진 지역을 지표 조사한 결과 ‘봉선사(奉先寺)’, ‘인봉선사(寅奉先寺)’ 명문이 있는 암기와, ‘임인(壬寅)’ 명문이 있는 수키와를 수습하였다. 이 사실은 지금까지 외성 남대문 앞에 있던 문제의 석등이 ‘봉선사’와 관련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오가와 케이키치가 문서상으로 남겨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봉선사의 위치가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도유호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왕건의 구저(舊邸)가 개성과 철원에 있었고 후에 개성에는 광명사(廣明寺), 철원에는 봉선사(奉先寺)를 창건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임인’명 기와를 근거로 고려 태조 25년에 봉선사가 존재하였는데 이 기와가 창건 연대인지 개수 연대에 해당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이상의 사실은 외성 남대문 남쪽에 존재하는 석등이 봉선사 경내에 있는 것이고 왕건의 사저와 관련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Ⅲ. 태봉국 철원성 남쪽 경관

    현 비무장지대 안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 유적은 철원성, 봉선사지, 중어성 등이 있다.

    철원성을 중심으로 남쪽 지역에는 여러 연구자가 언급한 관방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관방유적에 대한 고고학적인 조사는 전무한 상태이다.

    주변의 관방유적을 예로 들어보자.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철원성을 중심으로 주변에 분포하는 관방유적이 소개되어왔다. 그러나 이 유적에 대하여 고고학적 조사 방법을 통하여 태봉국 시대의 주변 경관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진행된 적은 없다.

    철원지역 관방유적 중에 일부는 태봉국 시대에 사용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초축 연대나 고려 건국 이후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에 대한 논의는 전혀 진행되지 않은 상황이다.

    예를 들어 성모루토성을 보면 도로 개설 과정 중에 체성(體城)이 파괴된 것을 확인(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1996)하였지만 그 이후 아무런 추가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사실상 방치된 상황이다. 마을에서는 토성 축조에 사용된 진흙이 모판에 좋은 재료이기 때문에 과거에 모내기용 모를 키우는 모판용 점토 채취가 이루어 지기도 하였다.

    또한 성제산성은 군사시설 안에 위치(육군사관학교육군박물관 1996)하고 있어 적어도 주요 내부 시설은 훼손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로 과거 조사 당시 체성벽이 군사 도로로 절개된 것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외에 여러 산성은 궁예와 관련된 전설이 회자되고 있는 상황이고 지역에서는 실제 역사적인 사실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산성에 대한 구체적인 고고학적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와 더불어 1993년 12월 우루과이라운드(제8차 GATT 다자간협정 : Uruguay Round, UK) 타결 이후에 철원 지역은 대구획 경지정리가 집중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대구획 경지정리는 과거 소규모의 경지정리가 진행된 지역 또는 진행되지 않은 지역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대규모의 현상 변경을 수반하는 사업이다. 현재는 남방한계선까지 이런 대구획 정리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선사시대, 역사시대 유적이 최소한의 조사 또는 발굴 유예되고 있는 상황(강원고고문화연구원 2011·2012a·2012b; 국강고고학연구소 2013·2015; 한림대학교박물관 2014)이다. 백마고지 남방에서 진행된 대구획 정리 사업에 따라 진행된 지표조사와 표본·시굴조사 결과 구석기시대 뗀석기가 집중적으로 확인된 지점이 있으나 정밀 발굴조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아울러 대구획 정리 사업 이전에 진행된 경지정리 사업 과정에서 어떠한 종류의 매장문화재가 멸실되었는지도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즉, 현상황에서는 과거 철원성과 관련한 고고학적 자료의 유무는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구체적으로 더 이야기한다면 구 월정리역 동쪽에 철원 평화광장을 조성하기 위한 철원 평화·문화광장 시굴조사에서 구석기시대 뗀석기가 확인(예맥문화재연구원 2009)되었고 추가로 일제강점기 마을이 형성되면서 개교가 된 월정심상소학교(月井尋常小學校)가 위치(강원도 2005; 鐵原郡誌 增補編纂委員會 1992)하였던 지역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월정리역에서 소학교를 연결하던 교각의 교대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평화광장이라는 명칭은 있지만 과거에 어떤 경관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한편 경원선 철도 복원 사업과 관련하여 백마고지~월정리 구간에서 조선시대 생활유적이 확인된 바 있다(한국고고환경연구소 2017). 보고서 내용을 살펴보면 이 노선은 앞으로 비무장지대 쪽으로 연장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노선은 앞에서 검토한 ‘봉선사’의 사역과 철원성 동벽 및 남벽이 만나는 부분을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 과연 철도 복원 사업에서 과거의 태봉 철원성 경관과 관련하여 다각적인 검토가 이루어졌는지 궁금하다. 철원성 이남에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2015년에 이루어진 지표조사(국강고고학연구소 2015)에서는 태봉국 철원성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처럼 비무장지대에 존재하는 철원성에 대한 논의가 집중되는 반면에 도성 주변 경관에 대한 논의가 심도 깊게 진행되지 않는다면 향후 철원성의 경관을 제대로 밝힐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이러한 논의의 부재 현상에 따른 폐해는 언론 매체를 통하여 집중적으로 조명되고 있는 화살머리고지 남북공동유해발굴지역에서 확인된다. 화살머리고지 접근로에는 중어성(中禦城)으로 알려진 성이 위치하고 있다(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1996).8 유해발굴을 위해서 중어성이 있는 지역을 포함하여 폭 12m의 도로가 개설될 예정이다. 중어성은 태봉 시기와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자세한 조사는 비무장지대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 중어성의 차단성으로서의 기능 여부에 대한 고고학적인 조사가 시급한 실정이다.

    봉선사지의 경우도 그렇다. 만약 도유호의 조사 기록이 없었다면 철원 구 향교지가 유력한 왕건 사저로 인식(유재춘 2005a·2005b; 강원대학교 중앙박물관 2008)되었을 것이다. 구 향교지에 대한 발굴조사 내용을 살펴보면 왕건 사저로 볼 만한 적극적인 증거물은 보이지 않는다.

    남북 분단 이후에 옛 철원 지역은 폐허가 된 상태에서 주변 지역은 군부대시설, 농업시설 등으로 변모되어왔다. 그리고 2018년 국방부의 군사시설 보호구역 해제 조치는 지금까지 정밀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여서 적절한 보호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다.9

    때문에 설령 철원성의 내부 조사가 이루어진다고 하여도 태봉국의 도성과 주변의 경관을 복원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Ⅳ. 맺음말

    최근 남북관계의 변화에 따라 북한 문화유적에 대한 남한 고고학자들의 관심과 조사 열망이 고무되고 있다. 하지만 북한에 있는 문화유적, 비무장지대 안에 분포하고 있는 문화유적에 대하여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국내에는 일제강점기 조사 자료가 국가기관을 중심으로 산재해 있다. 그런데 각 기관에 소장된 자료를 파악하여 자료화하기에는 어지간한 인내심을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대표적으로 오가와 케이키치(小川敬吉)의 자료는 인쇄물을 제외한 방법 외에는 접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현재 복수의 국책기관이 오가와 자료를 소장하고 있고 최근 건축자료 수집 및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작업이 진행 중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구축된 자료를 디지털 형태로 공개만 한다면 이러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자료를 종합해 본 결과 궁성 남쪽에 석등 1기, 외성 남벽 동쪽에 치우친 부분에 고려 태조가 창건한 봉선사와 관련된 석등 1기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 석등의 구체적인 위치 비정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어떠한 과정을 거쳐 보호책이 시설되었는지, 그리고 일본제국주의의 패망기에 봉선사지 석등이 퇴락(田保橋 潔 1941) 한 원인에 대해서는 파악하기 어렵다.

    따라서 국가기관이 소장한 철원성 관련 자료의 완전한 공개가 시급한 실정이다. 적어도 이 자료만을 분석한다면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충분한 고고학적 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

    한편 철원성의 내부를 조사한다고 해서 태봉국 철원성의 전체 경관을 파악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적어도 남방한계선 이남에 분포하고 있는 관방유적, 생활유적에 대한 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급속한 개발과 경작지에 대한 대구획정리로 철원성과 도성 방어 체제에 대한 외부경관은 복원되기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 실제 경원선이 복원되는 과정에서 철원성의 심각한 훼손과 경관이 변형될 가능성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위험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철원성 조사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남쪽 지역에 산재하고 있는 관련 유적에 대한 조사가 시급하다.

    이러한 면에서 철원성과 경관을 복원하기 위하여 철원군, 강원도, 발굴전문기관, 고고학 종사자들은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행정적으로 도움을 줄 철원군, 강원도는 준비가 얼마나 되어 있고 고고학자와 발굴 전문기관은 정세 변화 속에서 비무장지대 내부, 이남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정보를 과연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더 나아가 북한 지역에 존재하고 있는 고고유적에 대한 파악은 얼마나 이루어었는지도 궁금하다.

    철원성과 경관에 대한 논의가 진전되기 위해서는 실효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남한 지역 문화유적에 대한 정밀 조사와 자료 축적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림 4]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유리 건판.

    label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유리 건판.

참고문헌
  • 1. 2011 철원 대마지구 대구획경지정리사업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 google
  • 2. 2012a 철원 대마지구(2공구) 대구획경지정리사업 문화재 지표조사 약식보고서 google
  • 3. 2012b 대마지구 대구획경지정리사업 문화재 표본조사 약식보고서 google
  • 4. 2008 (舊)鐵原鄕校址 試·發掘調査報告書 google
  • 5. 2005 江原道誌 P.912 google
  • 6. 2016 철원 산명리·유정리 구석기 유적 -철원 대마3지구 대구획경지정리사업 문화재 발굴(시굴) 및 표본조사 보고서- google
  • 7. 2013 철원 대마2지구 대구획경지정리사업 부지 내 문화재 표본조사 결과서 google
  • 8. 2015 철원 경원선 남측 구간(백마고지~월정리) 철도복원 건설공사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 google
  • 9. 1997 북한문화재해설집Ⅰ google
  • 10. 2009 철원 태봉국도성 조사 자료집 google
  • 11. 1988 (近世)韓國五萬分之一地形圖 google
  • 12. 2008 궁예의 나라 태봉 google
  • 13. 1965 韓國史前遺蹟遺物地名表 google
  • 14. 1950 奉先寺址考 [문화유물] Vol.제2집 google
  • 15. 1977 文化遺蹟總覽(上) google
  • 16. 1994 小川敬吉調査文化財資料 google
  • 17. 2009 철원 평화·문화광장 조성사업 부지 내 유적 시굴조사보고서 google
  • 18. 2005a 철원 월하리 유적의 조사 결과와 성격 검토 P.161-183 google
  • 19. 2005b 철원의 高麗太祖 王建 舊宅址說에 대한 검토 [江原文化史硏究] Vol.第10輯 P.5-18 google
  • 20. 1996 江原道 鐵原郡 軍事遺蹟 地表調査 報告書 google
  • 21. 1941 弓裔とその都城址 [京城帝大 史學會誌] Vol.第17號 google
  • 22. 大正 五年(1916) 朝鮮古蹟圖譜 4 google
  • 23. 昭和 十七年(1942)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 google
  • 24. 2011 泰封國都城(弓裔都城) 내 풍천원 석등 연구 [한국고대사탐구] Vol.7 P.167-211 google
  • 25. 1992 鐵原郡誌 google
  • 26. 2017 철원 강산리 유적 google
  • 27. 2014 대마3지구 대구획정리사업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 google
  • 28. 국립중앙박물관 누리집 google
  • 29. 국사편찬위원회 누리집 google
이미지 / 테이블
  • [ 그림 1 ]  (近世)韓國五萬分之一地形圖 철원성(경인문화사 1988).
    (近世)韓國五萬分之一地形圖 철원성(경인문화사 1988).
  • [ 그림 2 ]  『朝鮮古蹟圖譜』 4에 실린 유리 건판.
    『朝鮮古蹟圖譜』 4에 실린 유리 건판.
  • [ 그림 3 ]  小川敬吉 조사 자료(文化財管理局 文化財硏究所 2004).
    小川敬吉 조사 자료(文化財管理局 文化財硏究所 2004).
  • [ 그림 4 ]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유리 건판.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유리 건판.
  • [ 그림 5 ]  鳥居龍藏의 第5回 史料調査에서 촬영한 유리 건판.
    鳥居龍藏의 第5回 史料調査에서 촬영한 유리 건판.
  • [ 그림 6 ]  철원 강산리 유적과 奉先寺·철원성 동남벽 모서리(한국고고환경연구소 2017 수정).
    철원 강산리 유적과 奉先寺·철원성 동남벽 모서리(한국고고환경연구소 2017 수정).
(우)06579 서울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Tel. 02-537-6389 | Fax. 02-590-0571 | 문의 : oak2014@korea.kr
Copyright(c) National Library of Kore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