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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2000년대 이후 한국 아동?청소년 과학소설의 디스토피아 연구 A Study on the Dystopia of Korean Juvenile Science Fiction Since the 2000s
ABSTRACT
2000년대 이후 한국 아동?청소년 과학소설의 디스토피아 연구
Abstract

By analyzing the characteristics and meaning of dystopia in Korean juvenile science fiction, this study aims to search for the principles of juvenile literature responding to the contradictions of scientific technologism in collusion with state capitalism, and to consider its limitations and significance.

This study focuses on the juvenile science fiction in which children or teenagers fight against system dystopia functioning as a setting of the story. System dystopia consists of ‘fake utopia’ and ‘concentration camps’ holding those excluded from this ‘fake utopia’. Young people whose right to life are violated under the system dystopia escape from concentration camps and fight against political power. We don’t have many novels that have focused on environmental dystopia, but a nomadic subject is found in works set on Earth after environmental pollution or nuclear explosion.

In short, juvenile dystopia science fiction deepens the contradictions of the hierarchical society based on scientific technologism, criticizing the repressive, material-oriented and differential educational realities of our society. They hope that children or teenagers will act as a resistance that sees through the deception and hypocrisy of the social system. These works are significant in that they expose the biopolitics strategy of political power in collusion with industrial capitalism and induce us to reflect on it. However, it seems to be the limit of humanism to equate human life with nature and to warn of dangers of technology, machinery, and material civilization as the counterpart.

This paper has the significance of taking a general survey of juvenile dystopia science fiction since the 2000s, and revealing the writers’ perception of scientific technologism and its limitations.

KEYWORD
한국 아동?청소년 과학소설 , 체제 디스토피아 , 수용소 , 가짜 유토피아 , 저항주체 , 환경 디스토피아 , 환경오염 , 핵폭발 , 유목적 주체 , 생명정치
  • 1. 서론

    한국 과학소설사와 아동‧청소년문학사에서 아동‧청소년 과학소설은 여러 시사점을 준다. 먼저 아동‧청소년 과학소설은 한국 과학소설사에서 선구적 의의를 지닌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아동‧청소년 잡지에 활발히 발표된 아동‧청소년 과학소설은 안정적인 독자층을 기반으로 전문 작가군이 형성되어 『한국과학소설전집』 등을 출간하며 한국 과학소설을 개척했다. 한편 아동‧청소년 과학소설은 해방 이전까지 리얼리즘에 경도되었던 아동‧청소년문학의 영역을 확장한 의의가 있다. 물론 우주시대의 미‧소 경쟁을 반영하면서 한국전쟁 후 국가 재건사업과 관련된 과학소설은 여전히 목적성과 이념성이 강하다. 하지만 장르문학으로서 아동‧청소년들에게 보다 다양한 재미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면 독자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한낙원과 같은 작가가 디스토피아 과학소설을 창작하여 독재 권력을 비판하고 과학주의 유토피아를 경계한 점은 한국 아동‧청소년 과학소설의 의의를 더한다. 국가 정책에 상응하는 상업주의 과학소설이 지배적인 상황에서도 작가의 개성과 전망을 드러내는 작품이 존재했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시드에 따르면 디스토피아란 유토피아의 기제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는 사회로 유토피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1) 주지하는 바와 같이,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기원한 ‘유토피아’는 근대 과학기술 신화와 결합하여 SF에서 과학문명이 초래할 이상적인 미래 사회로 구현되었다. 하지만 20세기의 정치‧사회적 격변은 과학기술이 생명을 통제하고 살해하는 생명정치2)의 수단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고, 21세기 환경오염은 지구 생태계를 위협하며 아포칼립스적인 상상과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

    요컨대 디스토피아 서사는 근대 과학기술과 생명정치가 초래할 사회 혼란 및 공포를 그려 현실의 사회모순과 억압을 드러내고 그 대안을 고민하게 한다. 하지만 디스토피아 공간은 죽음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성장의 시간을 전제로 한 아동‧청소년 문학의 본령과 모순된다. 아동‧청소년들에게 디스토피아 서사는 충격과 상처, 세계에 대한 불신을 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2000년대 이후, 약진하는 아동‧청소년 과학소설이 거의 디스토피아 서사라는 점은 문제적이다. 그것은 한국의 산업구조와 과학주의의 양상이 변화하고 그에 따른 사회적 문제도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2000년대 이후 한국 아동‧청소년 과학소설에 제시된 디스토피아의 특징과 의미를 분석하여 21세기 국가산업자본주의와 결탁한 과학주의의 모순에 대응하는 아동‧청소년 문학의 원리를 탐구하고 그 의의와 한계를 고찰하고자 한다.

    한국 아동‧청소년 과학소설에 대한 연구는 크게 1960~1970년대 창작소설과 2000년대 창작소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전자로 이지용,3) 손진원,4) 조계숙,5) 최애순6) 등의 연구가 있다. 이들은 한국 과학소설사에서 아동‧청소년 과학소설의 존재와 가치를 밝힌 의의가 있으나 대부분 『학생과학』 및 『과학소설전집』만 참고하여 과학계몽주의 유토피아에 대한 연구에 머물고 있다. 이 시기 아동‧청소년 과학소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 글은 최배은의 「한국 아동‧청소년 과학소설에 재현된 공포의 상상력-『새벗』, 『학원』, 『학생과학』(1950년대부터 1970년대)을 중심으로」7)가 있다. 여기선 『새벗』, 『학원』에 실린 소설도 함께 대상으로 삼았기에 디스토피아 소설도 몇 편 발견된다. 하지만 그 글은 디스토피아를 본격적으로 다룬 건 아니다.

    2000년대 이후 소설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김유진,8) 박정임,9) 오혜림10)의 연구가 있다. 김유진은 2010년대 이후 활발히 창작된 SF 아동‧청소년소설이 엇비슷한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되풀이한다고 비판하며 여성주의 비평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박정임과 오혜림은 본고의 주제인 디스토피아를 연구하고 있다. 하지만 박정임은 디스토피아를 소재적 차원에서 분석하는 데 그쳐 디스토피아 소설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키지 못하고 있다. 오혜림은 앙리 르페브르의 사회적 공간화 개념을 활용하여 디스토피아 공간을 분류하고, 인물의 디스토피아 인식과 실천 양상을 분석하여 소설의 의미를 고찰한다. 디스토피아 공간 연구에 새로운 방법을 모색한 의의가 있으나 이론화된 공간 분석에 머물 뿐 사회문화적 맥락은 간과되고 있어서 디스토피아 소설에 대한 일반론에 머물고 있다.

    권혁준11)은 초창기(1950년대~1960년대)와 최근 SF 아동소설을 대상으로 시공간의 양상과 의미를 연구하고 있다. 이 연구는 전체를 아우르려는 시도와 시공간에 주목한 점에 의의가 있지만, 대상 작품이 협소하고 시공간 분석이 피상적이다. 무엇보다 연구 결과에서 아동‧청소년 SF가 장르문학을 넘어 본격문학의 일원이 되어야 함을 주장하여 대상 장르의 특성을 부정하는 모순이 있다.

    이러한 선행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본고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2000년대 이후에 발표된 아동‧청소년 디스토피아 과학소설12)을 연구 대상으로 삼되, 그 특징이 두드러진 작품―『꿈꾸는 행성』 『밀레니얼 칠드런』 『몬스터 바이러스 도시』 『가면생활자』 『원통 안의 소녀』 『프로젝트 원』―을 뽑아 논할 것이다. 이 연구 초점에서 대상 작품의 통시적 차이가 크지 않으므로 공시적으로 논한다. 동화와 청소년소설의 질적 차이도 크지 않으므로 구분하지 않고 함께 논한다.

    대상 작품들에선 주로 생명정치의 모순을 탐구하고 있다. 그런데 주된 관심이 ‘체제’인가 ‘환경’인가에 따라 인물의 대응 방식이 달라진다. 따라서 디스토피아 공간을 ‘체제 디스토피아’와 ‘환경 디스토피아’로 나누어, 생명정치의 메커니즘과 그에 대응하는 인물의 특징을 분석하겠다. 작품 해석과 용어는 주로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13)를 참고하되, ‘수용소’ 개념은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사케르: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14)을 따른다.

    2. 체제 디스토피아와 저항하는 아동?청소년

    근대의 고유한 권력 행사 방식으로 생명정치를 연구한 푸코에 따르면, 군주의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권력과 달리, 생명정치란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다.15) 그 대상은 “신체로 파악된 인간이 아니라 생명에 고유한 과정 전체, 탄생‧죽음‧출산‧질병 등으로서의 과정에 영향을 받는 거대한 대중을 형성하는 인간”16)이다. 그래서 권력의 기술도 개별 신체에 집중하는 ‘제도에 의한 유기적 규율’에서 인구에 관여하는 ‘국가에 의한 생명 조절’로 변화한다. 하지만 규율적인 것과 조절적인 것은 서로 절합이 가능하여, 신체의 규율적 차원을 통제하는 동시에 생물학적 다양체의 우발적 사건을 통제할 수 있게 해주는 규범이 형성된다.

    이 글에서 정의한 ‘체제 디스토피아’는 푸코의 생명정치 기제가 작동되는 공간으로서, 정치권력이나 그와 결탁한 자본가들이 체제 유지를 위해 과학기술을 활용한 고도의 통치전략으로 인간의 생명과 자유를 통제, 조절하는 사회이다. 한국 아동‧청소년 과학소설에서 체제 디스토피아는 ‘가짜 유토피아’와 거기서 배제된 사람들의 집단인 ‘수용소’17)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 구조는 사람들을 체제가 요구하는 신분이나 능력을 기준으로 차등화하고, 그 등급에 따라 보상을 달리하여 유지된다. 즉 사람들은 배제되지 않기 위하여 폭력적인 규율을 따르고, 가짜 유토피아에서 제시된 행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한다. 아동‧청소년 과학소설은 체제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하여 그에 저항하는 아동‧청소년 서사의 비중이 높다. 중심사건이 전개되는 공간의 성격에 따라 저항 방식이 다르므로 그에 따라 살펴보겠다.

       2-1. 수용소에서의 탈출과 투쟁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들18)의 공동체를 수용소라고 했다. 이 수용소는 푸코가 말한 감옥의 개념을 넘어선다. 감옥은 체제의 규율이 적용되는 체제 내부의 공간이지만, 수용소는 체제 외부에 존재하여 예외상태로 규정됨으로써 체제에 포함되는 공간이다. 그러한 대표 작품으로 동화 『꿈꾸는 행성』과 청소년소설 『밀레니얼 칠드런』을 들 수 있다.

    『꿈꾸는 행성』에서 디스토피아는 ‘행성E-5’이다. E-5는 티탄제국의 다섯 번째 식민지로서 지구로부터 추방당한 ‘D유전장애인(몽상이나 상상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절하지 못하는 1급 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별이다. 티탄제국에선 태어난 지 백일 이내의 사람에게 ‘호기심 제거 백신’을 주사하여 유전물질 DNA에 변화를 준다. 하지만 주사를 맞아도 꿈의 지수가 높아지는 사람들이 생기자, 그들을 장애인으로 구분 짓고 일반 사람들과 격리시켜 E-5에서 관리한다.

    이곳에선 ‘꿈의 억제제’라는 약물로써 사고를 억제하고, 반복되는 단순노동과 운동으로 신체를 규율하며, 위성정찰기와 센서로 몸과 정신 상태를 수시로 감시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감으로 스스로 생각을 조절케 한다. E-5의 주민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전략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의 ‘결핍’이다. 물은 하루치밖에 공급이 안 되고, 먹을 수 있는 것도 말린 빵 한 조각뿐이며, 비타민 음료와 영양제로 최소한의 건강을 유지시킨다. 무엇보다 병원과 약이 없어서19) E-5의 주민들은 죽게 내버려진 존재가 된다. 부모들은 자녀가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하루라도 빨리 지구로 돌아가려고 아이들의 생각을 감시하고 통제한다.

    이와 같이 티탄제국의 궁극적 목적은 신체와 의식의 차원에서 E-5 주민들의 사고력을 철저히 말살하고 기계화하는 것이다.

     

      “티탄 제국이 지구와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돈과 군대 때문이 아니야. 바로 기억을 지배하고 있어서야.”20)

     

    위의 말은 자본이나 무력에 의한 물질적 지배보다 정신적 지배가 강력하고 위험한 수단임을 나타낸다. 초등학교 5‧6학년 이상을 대상으로 한 이 동화는 무거운 주제 의식을 전하고 있다. 책과 동화가 사라지고 동영상과 음성으로 실용적인 정보만 배우는 티탄제국은 작가가 우려하는 우리의 미래이다. 작가가 묘사한 티탄제국의 학교는 창의력 있는 아이를 문제아로 배제시키는 우리의 교육 현실에 대한 극단적 풍자이며, 그 결과 지식과 정보를 독점한 자들이 지배할 디스토피아의 도래를 경고한다.

    『밀레니얼 칠드런』에선 근미래 ‘학교’가 디스토피아이다. 각국 정부는 의료 기술의 발달로 사망률이 낮아지고 인구가 증가하자 ‘자식세’를 신설하여 인구 통제 정책을 실시한다. 부모는 자식이 만 20세가 될 때까지 매월 자식세를 납부해야 한다. 만일 몰래 아이를 낳고 기르다 발각되면 부모는 처벌을 받고 아이는 성인이 될 때까지 국립보육시설이나 학교에서 집단으로 관리된다. 여기서 ‘학교’는 정부에 허가받지 않고 태어난 아이들을 집단으로 수용하고 교육하는 국가기관이다. 이 학교의 아이들은 그야말로 탄생부터 법 밖에 위치한 ‘벌거벗은 생명’이다.

     

      “네가 죄수씩이나 되는 줄 아냐? 아니지, 넌 걔네만도 못해. 왜냐? 걔들도 성인권은 있거든. 성인이니까 인권 찾을 수 있고, 출소하면 섹스도 할 수 있고, 술 담배도 맘대로야, 알아?”21)

     

    위의 교사 말처럼 학교의 아이들은 죄수보다 못한, 인권의 밖에 위치한 인간이다. 학교는 아이들을 법 안으로 들이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배제된 자로서 체제에 포섭되는 규율을 익히게 하는 곳이다. 그래서 학교의 교육은 학교 밖 아이들과 전혀 다르게 이루어진다.

    학교는 아이들을 성적에 따라 1등급부터 9등급으로 나누고 등급에 따라 숙소, 식사, 청소 등 모든 생활 영역에서 차별한다. 한 달에 한 번 시험을 치르고 그 결과를 전교 1등부터 꼴등까지 서열화하여 전교생에게 공개한다. 평가 내용은 교과서 지식으로 단순 암기 능력이 요구된다. 따라서 수업 방식도 교사의 감시 아래 컴퓨터로 출력되는 지식을 자습하는 것이며, 질문이나 토론이 금지된다. 이런 지식은 학교 밖에선 전혀 쓸모가 없다. 필요한 지식과 정보는 언제든 검색하면 되기 때문이다. 또 주로 우수한 유전자들의 인공수정으로 태어나는 학교 밖 아이들은 한 번 접한 정보는 잘 기억하기 때문에 단순 암기 능력으로 평가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여기서 배우는 지식은 그 자체로 아무 쓸모가 없으며 학교 아이들이 졸업 후 하층민의 삶에 순종하고 다른 가능성을 체념하게 만드는 구조의 일부일 뿐이다. 물론 전교 1등 한 명만은 성인권을 획득하여 일반 사회에 편입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기회라기보다 학교의 존재 이유를 감추고 아이들끼리 헛된 경쟁에 사로잡혀 학교 규율에 복종케 하려는 고도의 전략이다.

    이 소설에서 ‘학교’는 우리 사회의 학교를 풍자하며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무엇보다 학교의 개념을 배제된 자들의 수용소로 전복시켜 학교의 목적과 기능을 비판적으로 성찰케 한다. 하지만 아감벤이 말했듯이 수용소는 언제든 대항공간으로 바뀔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곳이다. 생명권을 침해하는 수용소에서 아동‧청소년들은 저항주체로 성장한다.

    『꿈꾸는 행성』에서 디스토피아와 대비되는 성장 공간은 비밀기지이다. 주인공 모하는 그곳에서 신분, 성(性), 나이가 다른 친구들과 함께 탈출을 준비하면서 자존감을 회복하고 용감해진다. 그곳은 E-5에서 유일한 생명체인 둠의 서식지이자 왕족 오리온의 피신지로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곳이다. 그들은 감시 센서를 속일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하여 자유로운 시간을 확보하고 타임머신 보키니 1호의 작동 암호를 풀어 21세기 과거로 탈출한다.

    여기서 탈출을 가능케 한 것은 기성세대의 ‘유산’과 ‘희생’이다. 비밀기지와 보키니 1호는 E-5에 최초로 끌려와 이곳을 개발했던 1세대 D유전장애인들이 만든 것이다. 그들은 지구로 돌아와 체제에 순응하며 살았지만, 자녀로 인해 다시 벌거벗은 생명의 처지에 놓인다. 이러한 장면은 인구적, 유전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정치의 속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개인의 규율화된 신체로 자녀의 D유전장애를 예방할 수 없었던 1세대는 이제 자녀의 탈출을 위해 체제에 맞서 싸우다 죽는다.

    『학교』에선 등록아동이었던 문도새벽이 비인간적인 학교 체제와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저항주체로 성장한다. 이때 저항의 방식은 ‘연대’와 ‘폭로’이다. 새벽은 악어와 연대하여 교장실로 잠입해 학교의 비리 정보를 확보한 뒤, 외부 언론과 학교 아이들에게 폭로한다. 여기서 새벽과 악어의 투쟁 방식은 차이를 보인다.

     

      “세상이 우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정하게 만들어 주겠어. 내놓지 않겠다면 다 부숴 버리고서 빼앗겠어. 늙은이들이 안 죽어서 우리 몫이 없는 거라면.”

      “어른들을 전부 적으로 돌려서 어떻게 이기겠다는 거야? 힘으로 부딪치면 우리가 일방적으로 깨질 거야. 폭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폭력은 안 된다고? 사람을 죽여선 안 된다고?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진 정신이 미성숙해서 어른이 아니라고? 스무 살 경계에 줄이라도 쳐놨냐? 누가 정했지? 그런 규칙을 도대체 누가 정했는데? 가진 놈들이야. 다 어른들이 정한 거라고.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모든 걸 차지하고, 자기 몫을 안 빼앗기려고 온갖 법을 만들고, 그걸 지키라고 우릴 세뇌한 건…….”22)

     

    악어는 새벽과 달리, 학교 밖 권력을 신뢰하지 않는다. 모두 한통속이니 악어는 학생들의 폭력으로 학교에서 선생들을 몰아내고, 학교를 해방구로 만들고자 한다. 새벽의 목표가 예외상태의 해소라면, 악어의 목표는 학교의 권력자 교체에 있다. 학교의 아이들은 기성세대와의 관계가 적대적이고, 사회와 단절되어 있다. 따라서 친구들 사이의 우정과 연대가 유일한 희망이다. 작품은 투쟁의 최고조 장면에서 끝나며 서술의 초점이 새벽의 심리로 이동한다. 새벽은 자기 때문에 전교 1등을 놓쳐 자살한 이오에 대한 죄책감으로 투쟁의 희생양이 되려고 한다. 하지만 악어와 창우가 옥상에서 투신한 새벽의 팔을 잡고 이오의 죽음이 새벽 때문이 아니라고 말해 주어서 새벽은 우정과 생명을 회복한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수용소의 지배 방식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들을 결핍시키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명권을 침해당한 아동‧청소년들은 수용소에서 탈출하거나 투쟁하며 저항주체로 성장한다.

       2-2. 가짜 유토피아에 대한 각성과 구원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를 가장하고 사람들을 현혹하여 행복해지기 위한 선택이 생명을 위협하는 모순에 빠지게 한다. 가짜 유토피아는 주로 산업자본주의와 결탁한 행정 권력에 의해 조성, 유지된다. 가짜 유토피아에서 생명권력은 교묘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겨 자발적으로 생활환경을 바꾸고 자기 생명 과정을 조절하도록 한다. 수용소에서 과학기술이 주로 신체의 감시와 통제 수단으로 쓰였다면, 가짜 유토피아에선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쾌감을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수용소보다 생명정치의 모순을 알기 어렵고 그에 저항하기 힘들기 때문에 선각자가 조력자로 등장한다. 동화 『몬스터 바이러스 도시』와 청소년소설 『가면생활자』를 중심으로 살피겠다.

    『몬스터 바이러스 도시』에서 가짜 유토피아는 빛의 도시, 녹슨시이다. 녹슨시는 녹슨이 개발하고 건설한 계획도시이다. 녹슨을 존경하는 아이가 들려주는 그의 전기는 다음과 같다.

     

      “녹슨은 기스카누 마을 중심에서 태어났어요. 그러니까 삼십여 년 전, 자급자족 형태였던 영세 농업 환경을 대량 생산 구조로 산업화시키고 공장을 세우고 공장에서 축적된 자본으로 도시를 개발했어요. 또 장학생 제도를 만들어 교육에 힘을 쏟았어요. 그래서 기스카누 마을 변두리의 가난한 아이들을 데려와 공짜로 교육을 시켰고, ‘낡은 것은 버리고 새것을 세우자’는 운동을 벌였어요. 그래서 …(중략)… 도시 개발위원회를 소집했어요. 최고 속도, 최대 효율을 바탕으로 초고층 건물로 이뤄진 도시의 시안을 만들었어요. 사 년 뒤에 백 층의 초고층 도시를 세웠고 창안자 녹슨의 이름을 빌려 녹슨시 1호라 불렀어요. 다시 사 년 뒤 녹슨시 2호가 탄생했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녹슨은 녹슨시 3호를 세우던 중 지병으로 세상을 떴어요.”23)

     

    위의 설명과 같이, 녹슨은 산업자본가로 자수성가하여 속도와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초고층 녹슨시를 건설했다. 녹슨시는 특성화도시로서 1호는 정치와 언론, 2호는 학문과 기업, 3호는 농산물 공장, 4호는 실버 세대를 위한 휴양지, 5호는 젊은 부부들의 소비, 여가, 주거의 복합공간으로 개발되었다. 100층의 공간에 주거, 관공서, 상점, 병원, 정원 등 온갖 시설을 갖춘 꿈의 도시지만 부자들만 살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최고의 교육을 실시하는 녹슨시 2호에서 난쟁이증 몬스터 바이러스(NMV)가 발병한다. 이 병에 걸리면 몸의 모든 수분이 말라버린 듯 수축하고 비틀린다. 원인도 모르고 치료제도 개발하지 못해서 성장촉진주사만 투여한다. 당국은 환자들을 녹슨시 1호 지하의 보안실에 격리하고 사건을 왜곡, 축소한다.

    아이들만 걸리는 이 병은 녹슨시가 가짜 유토피아임이 드러나는 계기가 된다. 녹슨시 시민은 이 도시에서 살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노동하며 보낸다. 아이들도 진학 경쟁을 하며 정해진 시간표대로 공부한다. 그렇게 규율화된 신체로 살아가는 아이들이 성장을 멈추고 쪼그라드는 병이 NMV다. 여기서 그 병을 고치고 마을을 구하는 주체는 기스카누 마을의 레아이다. 13세 소녀 레아는 할머니 모슬을 이은 신녀로서 NMV에 걸린 버드를 카멜의 은신처에서 보살피며 규율화된 신체를 자연 상태로 회복시킨다. 모슬의 공간인 바람산, 카멜의 공간인 지하집은 녹슨시의 100층 건물과 대비되는 치유의 공간이다. 바람산은 자연이고, 지하집은 녹슨시 1호의 쓰레기장에 흰개미 집을 본 따 설계된 곳이다. 즉 작가는 자연과 그에 순응하는 삶이 생명을 살리고, 녹슨시처럼 인공적이고 기계화된 삶은 생명의 시간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녹슨시를 통해 산업자본주의의 효율성, 물질중심주의의 위험을 경고하는 이 동화는 자연성과 정신성의 회복을 추구하다 원시성과 주술성의 세계를 이상화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초상으로 핍진성을 얻던 녹슨시의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은 환상적이다.

     

      레아는 꿈을 꾸고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에 레아는 갇혀 있었다. 발끝에서부터 아픔이 느껴지더니 발바닥에서 뿌리가 돋아났다. 몸은 점점 부풀어 거대한 나무줄기로 변해갔다 레아의 팔은 수십 개로 갈라져 굵은 나뭇가지가 되었다.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뻗어 가느다란 가지가 되었다. 뿌리는 땅속을 파고들어 물을 빨아들였다. 묵직한 기운이 위로 솟구쳤다. 가지마다 새잎이 돋았다. 레아는 눈을 감았다. 얼굴이 초록 이파리로 뒤덮였다. 레아는 어둠 속에서 거대한 나무로 변해 있었다. 그때 멀리서 노란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지저귀는 새소리가 잎사귀 사이로 퍼져 나갔다.24)

     

    위의 인용은 레아가 신녀로서 자신의 시간을 각성케 하는 꿈이다. 신녀의 표식이자 능력의 조건으로 레아는 시력을 잃는다. 그 과정에서 레아는 나무가 되는 꿈을 꾸며 나무처럼 자기 품에 날아든 새, 버드의 생명을 구한다. ‘모슬-수로-레아’로 이어지는 자연성은 삭막해진 인간의 영혼을 울리며 인간과 세계를 구원하지만, 산업자본주의 체제의 구원자로서 신녀들을 배치함으로써 과학소설은 신화가 된다.

    『가면생활자』에선 과학기술을 이용해 사람들을 유혹하는 산업자본주의 전략이 보다 잘 드러난다. 여기서 가짜 유토피아는 가면생활자들의 전용 쉼터인 ‘정원’이다. 아이마스크사에서 개발한 가면은 사람들의 얼굴에 밀착되어 결점을 보완해 주는 도구이다. 가면의 기능은 사람들의 미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안티마스키드가 밝힌 것처럼 “가면은 있는 자와 없는 자, 보호받는 자와 보호받지 못하는 자, 행복한 자와 불행한 자를 가른다.”25) 시간적 배경이 명시되지 않은 이 소설에서 세계는 빈부격차가 심하여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이 많아진다. 각 지역엔 구역별로 그 아이들의 수용소인 ‘기숙사’가 있다. 그곳은 『밀레니얼 칠드런』의 ‘학교’와 유사한 공간이지만 덜 폭력적이고 더 개방적이다. 기숙사 아이들은 직업교육을 받고 졸업 후 노동자가 된다. 그들에게 가면과 정원은 소유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기에 더 절박한 욕망의 대상이다. 아이마스크사는 그 욕망을 미끼로 기숙사 아이들을 모르모트로 이용한다. 베타테스터를 뽑아 신제품을 한 달 동안 무료로 대여하여 임상 실험을 해 보는 것이다. 베타테스터는 정원도 이용할 수 있기에 기숙사 아이들은 복권을 사는 마음으로 베타테스터에 지원한다.

     

      하늘을 향해 우아하게 가지를 뻗은 나무들과 색색가지 꽃송이들, 그림 같이 서 있는 가로등,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벤치, 아름다운 호수와 세련되고 멋진 건물, 그리고 은은하게 깔리는 음악. 진진이 사는 73구역 기숙사와는 너무나 다른 광경이었다. 누추한 변두리의 칙칙한 건물들 사이에 삐죽이 들어선 기숙사는 좁은 대지 위에 건물 세 개가 빽빽이 들어서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손바닥만 한 화단이 있고 그 속에 나무 한두 그루와 관목들이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그에 비하면 이곳은 마치 신이 만든 숲을 통째로 옮겨 놓은 듯했다.26)

     

    정원은 가면 판매를 위해 가면생활자들의 특권 의식과 허영심을 부추기는 수단이지만, 기숙사 베타테스터 진진에겐 “신이 만든 숲을 통째로 옮겨 놓은 듯”한 곳이다. 정원사들의 시중을 받으며 즐길 거리로 가득한 아름답고 쾌적한 정원은 진진에게 유토피아이다. 그곳이 가짜 유토피아임을 각성케 되는 계기는 진진이 가짜 가면생활자임이 들통 나면서부터다. 진진의 가면이 자기가 반품했던 제품임을 알아본 리아가 그 사실을 아이마스크사에 항의하자 진진에게 정원은 금지된다.27) 하지만 가면과 정원이 주는 쾌감을 포기할 수 없었던 진진은 이번엔 더 위험한 선택을 한다. 가면에 약물을 삽입해 행복감을 높이는 신제품 베타테스터가 된 것이다. 가면과 정원만으로 사람들의 행복감이 오래가지 않자, 아이마스크사는 사람들의 감정을 조작하는 가면을 만든다. 하지만 그 부작용이 심각해 신제품을 사용한 사람들은 우울증에 걸리고 급기야 정원에서 자살자가 생기며 정원 유토피아의 민낯이 드러난다.

    여기서 선각자이자 구원자는 개인이 아니라 ‘안티마스키드’라는 조직이다. 그것은 아이마스크사의 위선과 위험을 간파한 사람들이 만든 자발적 조직이다. 그리고 내부고발자 유령과 그를 구한 동생 오타가 있다. 오타는 진진과 함께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진진과 같은 기숙사 아이가 안티마스키드와 연대하여 용감하게 형을 구하고 진진을 구한다. 물론 그들의 싸움은 이제 시작이다. 아이마스크사의 반격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유령이 인터뷰를 준비하는 장면에서 맺는 결말은 생기로 가득 차 있다. 유령과 함께 제품 연구에 참여했던 연구원도 협력을 약속했고, 무엇보다 아이마스크사의 신제품으로 생명이 위험했던 진진이 안티마스키드와 함께 새 삶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가짜 유토피아의 지배 방식은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물질을 과잉 공급하고 쾌감에 길들여 생명을 병들게 한다. 이때 아동‧청소년은 선각자들의 도움으로 각성하고 생명의 구원자 역할을 한다.

    3. 환경 디스토피아와 경계를 넘는 아동?청소년

    환경 디스토피아는 과학기술의 부산물로 지구 환경이 오염되어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거나 핵폭발 이후 인간이 살 수 없는 세계이다. 체제 디스토피아도 환경 디스토피아를 전제한 경우가 많지만, 서사의 초점에 따라 인물과 주제가 달라진다. 대상 작품에서 환경 디스토피아를 중점적으로 탐구한 것은 많지 않다. 아직 한국 아동‧청소년 과학소설에서는 환경의 문제를 인간중심주의로 해결하려는 시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들에서 사이보그, 클론, 동물, 로봇 등이 새로운 주체로 등장한다. 반인간주의와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을 주장하는 로지 브라이도티는 그러한 주체를 ‘유목적 주체’28)라고 했다. 환경 파괴의 정도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지므로 그에 따라 살피겠다.

       3-1. 환경오염과 사이보그?클론

    청소년소설 『원통 안의 소녀』에서 주인공 지유는 대기 오염과 지구 온난화를 위해 개발된 에어로이드 이상 면역 반응 환자이다. 에어로이드는 분진형 나노봇으로서 인체에 무해하다는 결론이 난 뒤, 대기오염 및 태풍, 홍수 등의 재난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널리 활용된다. 즉 나노봇에 작은 탐침을 부착해서 대기오염 물질과 온실 기체를 제거하는 프로젝트가 가동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유를 비롯한 극소수의 사람들이 에어로이드에 대한 이상 면역 반응을 보인다. 에어로이드가 돌아가는 곳에 있으면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호흡기 질환이 생기고 온몸에 두드러기가 난다. 그래서 지유는 에어로이드를 걸러주는 방독면이나 프로텍터를 타야 외출할 수 있다. ‘방독면을 쓴 소녀’로 유명해진 지유는 신기술의 부작용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대가로 프로텍터를 선물받는다. 프로텍터는 에어로이드를 완벽하게 걸러내는 필터 기기가 내장된 소형 차량이다. 프로텍터 없이 생활할 수 없는 지유는 본의 아니게 사이보그가 되어 이 세계의 이방인이 된다.

     

      지유를 위해 설계되지 않은 도시. 평생을 이곳에 살았지만 지유는 여전히 이곳의 여행자였다. 그러니까 노아는 지유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노아는 늘 도시의 사람들과 도시의 일들을 지켜보았지만 그 장면 안에 스며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때로는 노아 역시 이 도시를 스쳐가는 여행자처럼 느껴졌고, 지유는 그 목소리를 점점 더 좋아하게 되었다.29)

     

    위의 예문과 같이, 사이보그 지유는 클론 노아를 만나 그의 유목적 시선에 동질감을 느낀다. 그것은 노아도 과학기술의 불완전함 때문에 소외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그 존재들 사이의 우정과 연대를 그리며 인간중심주의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인간의 장기 기증을 위해 만들어진 노아는 생산과정에서 오류가 생긴(두뇌 능력이 발달한) 클론이다. 노아의 신체는 인큐베이터 안에 보관된 채, 뇌가 가상세계에 접속되어 존재한다. 지유는 노아를 인큐베이터에서 탈출시키고 노아는 지유에게 비를 선사한다. 비에 녹아내리는 에어로이드 분자 덕분에 비는 지유에게 원통 없이 다닐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넌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거야.”라는 노아의 마지막 인사는 지유에게 도시 밖 세상을 꿈꾸게 하고, 지유도 노아처럼 자기를 가둔 세상을 박차고 나올 것임을 암시한다.

    지유와 노아가 체제 디스토피아의 벌거벗은 생명과 다른 점은 그들의 인식이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점이다. 그들은 기대하거나 분노하지 않으며 다른 세계로 탈주할 뿐이다. 이러한 심리는 그들의 특이성에 기인한다. 인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들은 인간의 한계에서 자유롭기에 어디든 존재할 수 있다. 지유는 아직 인간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만, 노아의 탈출을 도우며 그 경계가 허물어지는 체험을 한다.

     

      복도 전체에 로봇과 인간을 구분하는 스캐너가 달려 있었다. …(중략)… 스캐너는 내부의 에어로이드를 스캔해 생채 반응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검사를 했다. 로봇들은 호흡을 하지 않으므로 기계 내부의 에어로이드 농도가 아주 낮아서 사람과는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 (중략)… 노아는 지난 몇 번의 탈출 시도에서 그 복도를 통과하지 못했다. 인큐베이터 안에만 있었으니 에어로이드를 들이마시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클론을 보관하는 액체 자체에 의료용 에어로이드가 함유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유라면 복도의 보안을 통과할 수 있었다. 지유는 인간이면서 인간으로 분류되지 않는 유일한 예외인 셈이었다.30)

     

    환경오염으로 사이보그가 된 지유는 인간이면서 로봇으로 분류된다. 이 소설에서 그에 대한 사유는 더 깊이 나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노아와의 우정을 통해 로봇이어서 다행이었던 체험이 지유에게 사유의 원통을 벗어나게 한 것은 분명하다.

       3-2. 핵폭발 후 비인간

    동화 『프로젝트 원』은 대상 작품 가운데 가장 새롭고 파격적이다. 핵폭발 후 멸망한 지구를 중심공간으로 삼아 인간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원’은 핵폭발을 예견한 인간들 일부가 달기지로 가서 지구를 인간이 다시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복원시키는 계획이다. 달기지 인간들은 인공위성으로 지구를 덮고 있는 핵구름을 걷어낸 뒤, 바이오 연구소의 로봇들을 통해 식물들과 동물들을 복제한 뒤, 방사능 환경에 적응하는 생명 현상을 관찰한다. 핵폭발 후 100년이 지나자 기형동물들이 급증한다. 그에 위협을 느낀 달기지 인간들은 지구의 바이오 연구소에 기형 동물들을 소탕하는 작전을 지시한다. 마누는 그에 필요한 생명공학지식을 갖고 있는 인공지능이다. 하지만 인간만이 그를 깨울 수 있어서 달기지에선 급하게 오미크론 시리즈를 보낸다. 오미크론은 부족한 자원으로 만들어졌기에 복제인간보다 못한 일회성 인간이다. 그들은 신체가 자라지도 않고 아기를 낳을 수 없으며 지능도 떨어진다. 다른 오미크론은 실패하지만 오미크론07은 마누를 찾아 깨우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오미크론07은 마누를 만나 ‘하나’로서 새 삶을 시작한다.

    마누는 바이오 연구소에 가야 한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하나와 함께 연구소를 향해 떠난다. 그 모험의 길에 슈퍼카 ‘떠버리’와 기형 동물 ‘별’을 만나서 그들은 우정을 나누며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한다. 마누와 떠버리는 하나에게 언어를 가르치고, 동물로 살아가기 위한 활동 — 물 먹기, 고기 먹기 등 — 도 가르친다. 별은 하나에게 생명의 온기를 느끼게 해주며 하나가 위급한 상황에서 목숨을 바쳐 하나를 구한다. 그 여정에서 하나는 일곱 번째 오미크론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생명체로 성장한다. 물론 하나는 세월이 흘러도 몸이 자라지 않고 수명이 보장된 생명이 아니지만, 마음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할 만큼 성장한다. 그래서 연구소에 도착하여 마누와 이오가 기형동물을 죽이는 작전에 돌입하자 하나는 결사적으로 방해한다. 결국 마누, 떠버리도 달기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하나의 뜻에 동참한다. 모험의 여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마누, 떠버리도 변한 것이다. 그들은 인간 주인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던 습관에서 벗어나 인간과 로봇, 로봇과 로봇, 로봇과 동물 등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나 특별해 싫어. 마누, 떠버리, 별, 다 같이 짝해.”31)

     

    인간의 특별함과 주인된 지위에 대한 마누와 떠버리의 설명에 하나는 모두가 짝이라고 한다. 떠버리는 처음에 납득하지 못했지만 그것이 마누와 자기가 동급이라는 사실로 여겨져 좋아한다. 마누는 달기지 인간에게 복종하는 이오가 떠나자 새로운 ‘프로젝트 원’ 제1원칙을 세운다.

     

      “모든 생명은 동등하고 소중하다.”

      ‘어쩌면 생명이 아닌 것까지도…….’32)

     

    위의 원칙은 핵폭발 후 디스토피아 세계에 대한 인간중심적 상상을 넘어선 것이라서 의미심장하다. 핵폭발 후 지구가 멸망하면 우리는 그 다음을 상상하기 어렵다. 인간이 살 수 없고 살지 않는 세계를 의미 없다고 치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동화는 인간이 사라져도 로봇이나 다른 생물들이 존재할 수 있고, 그 모든 존재가 새로운 세계의 건설주체임을 보인다. 달기지 인간들 관점에서 하나, 마누, 떠버리, 기형동식물이 만들어가는 지구는 인간의 기획이 실패한 땅이다. 그래서 인간이 없는 지구는 오히려 여러 존재들이 평화롭게 새 삶을 이루어가는 터전이 된다.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환경 디스토피아는 과학기술의 실패와 폐해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며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한다. 그에 따라 구현하는 생명정치의 초점이 달라져서 인간의 생명권 침해를 다룬 체제 디스토피아와 달리, 환경 디스토피아에선 비인간의 생명권 침해를 다루고 있다.

    4. 결론

    아동‧청소년 문학을 대상으로 한 연구의 아이러니는 그 자체로 당대 아동‧청소년의 욕망이나 독자반응을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것은 별도의 연구 방법을 요한다. 우리가 텍스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점은 작가의 사상과 욕망, 아동‧청소년 상, 아동‧청소년에게 짐 지운 과제 등이다. 한 가지 중요한 요소를 더하자면, 그 작품을 심사하고 추천한 심사자와 출판사 등 문학 장의 경향도 엿볼 수 있다.33) 그런 측면에서 이 논문은 2000년대 이후, 아동‧청소년 디스토피아 과학소설의 양상을 개관하여 산업자본주의와 결탁한 과학주의의 모순에 대응하는 아동‧청소년문학의 원리를 탐구하였다.

    아동‧청소년 디스토피아 과학소설은 과학기술주의 계급사회의 모순을 심화시켜 우리 사회의 억압적, 물질중심적, 차등적 교육현실을 비판한다. 그리고 아동‧청소년들이 그 체제의 기만과 위선을 간파하여 저항주체로 행동하기 바란다. 이러한 경향은 1990년대 이후 아동‧청소년문학을 지배했던 리얼리즘의 연장이자, 작가들의 현실에 대한 분노를 반영한다. 작가들이 현실의 사회문제에 대한 즉각적 응답으로 과학소설을 창작한 예는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들이 작가의 말에서 창작 동기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지엠오 아이』는 2005년, 유전자 조작 농산물 문제와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우려로 창작되었고,34) 『밀레니얼 칠드런』은 교도소 같은 학교 이미지와 2014년 세월호 사고에 대한 분노로 창작되었다.35) 그리고 두 작품 모두 출판사 공모전 수상작이다.36)

    현실과 밀착된 이 작품들은 산업자본주의와 결탁한 정치권력의 생명정치 전략을 폭로하고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지만 근대의 이분법적 사고와 휴머니즘의 한계가 보인다. 디스토피아 과학소설에서 비판하는 현실은 인간답지 못하거나 인간성을 말살하는 사회이고, 이때의 인간성은 자연성과 정신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계성, 물질성, 인공성을 그 대척점에 놓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비현실적 전망을 내세우게 된다. 도나 해러웨이가 말했듯이 지금 우리가 마주한 사회는 더 이상 인간과 자연, 인간과 기계의 이분법적인 구분이 불가능하다.37) 그리고 차별의 양상도 ‘노동자/자본가’의 계급 대립으로 단순히 환원되지 않는다. 환경 디스토피아 과학소설에서 포스트 휴머니즘의 가능성이 보인다. 거기에 등장하는 사이보그, 클론, 로봇, 기형생물은 서로 동등하게 여기고 배려한다. 그리고 인간이 파괴한 환경을 인간의 기획을 넘어서 살리는 주체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이미 아동‧청소년은 새로운 인류의 탄생이 예견될 만큼 인간에 대한 고전적 이해를 넘어서고 있다. 아동‧청소년 과학소설이 과학기술의 변화가 가져오는 아동‧청소년 상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이 가지는 문화사회적 의의는 더 커질 것으로 기대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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