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ly, the cinema industry faced a crisis on the rise of various media platforms such as Netflix, Amazon Prime, IPTV, and Kakao Page. The rate of film release in the theater has become ever shorter, and the secondary consumption of film through IPTV, tablet, PC, or mobile has seen a drastic increase. In the midst of this new media-geography, the most significant change in recent years would be the rise of the ‘fantasy film’ genre. This paper explores the conditions and characteristics of fantasy films in the way in which the genre has been constituted, and delves into particular aspects that its contents contain. This is an attempt to understand the sociology of the birth of a new genre.
In this process, this paper will ask two frequently raised questions in regard to this genre. The first is to ask whether we can discern fantasy from reality, and the second is to examine whether the fantasy genre implicates certain social subversion. These two questions aim to discover how fantasy forms a relationship with reality and what this means. To do so, this paper will trace the genealogy of the fantasy film genre in Korea and analyze recent big hits such as the <Along with the Gods> series as the model case of digital fantasy film. Through this exploration, this paper will be able to provide a new sociology of the fantasy film production and consumption in the 21st century Korea.
2019년 넷플릭스를 통해 배급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신작 <로마>가 오스카상의 3개 부분을 석권하자, 할리우드 영화의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는 넷플릭스와 같은 모바일 플랫폼을 통해 배급되는 영화는 영화 발전을 저해한다고 발언하여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실제로 영화를 둘러싼 미디어 환경은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극장을 통한 1차 소비의 속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매우 빨라졌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는 1990년대 중반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만들기 시작한 르네상스기를 거쳐 2010년대 이후부터는 줄곧 자국 영화의 시장점유율이 50%이상을 차지하며 탄탄한 문화산업으로 자리 잡아 왔다.
영화 장르적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흥미롭게도 한국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띠는 변화는 단연 판타스틱 장르 영화의 성장이다. 2006년 <괴물>의 천만 관객 돌파 이후 가능성을 열었던 판타스틱 장르는 2013년을 기점으로 양적으로 급증하였다.
애초에 영화는 문학과 달리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자율적 형식들 하”에 “영화적 환영”을 만들어낸다는 특수한 매체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김소영은 2000년대 초반 필름 영화에서 디지털 영화로 변화하는 시기의 시각테크놀로지에서 “특수효과가 ‘현실’의 지시적 기호를 점차 지워냄과 동시에 역사의 시간화와 공간화에 필요한 재현의 물직적 요소 자체를 소멸”시키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이 글의 가장 큰 관심사는 첫째는 판타지 영화의 계보를 추적하여 판타지 영화들이 그려온 ‘판타지’의 기호들이 생성된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에 논문의 앞부분에서는 판타지 영화가 사회, 문화, 경제적 현실과 맺고 있는 관계를 계보적으로 살펴보면서, 판타지 영화와 한국 사회의 관계 속에서 판타지 장르를 이해할 것이다. 이는 판타지 영화 혹은 리얼리즘 영화라는 장르 구분이 가로막을 수 있는 해석의 난점을 넘어서기 위함이다. 다음으로는, 최근에 개봉하여 가장 큰 성공을 거둔 판타지 영화
일반적으로 ‘판타지’ 장르란 무엇인가를 논의함에 있어서 가장 빈번하게 전제되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판타지를 ‘리얼리즘’의 대척점에 놓고 구분하는 것이다. 츠베탕 토도로프는 ‘환상적인 것’을 인간의 체험을 성실하게 옮기는 ‘리얼리티’의 세계를 의도적으로 벗어난 것이며, 따라서 ‘리얼리티’적 문법을 벗어나 독자와 캐릭터의 ‘망설임’이 나타나는 문학을 환상 문학의 특징으로 파악한다.
영화의 경우 문학보다 논의가 좀 더 필요하다. 영사판에 이미지로 존재하는 물질이자 비물질인 영화는 로즈마리 잭슨이 언급했듯이 “카메라 렌즈와 대상 사이의 공간에 만들어지는 환영적인 것”의 그림자이고 따라서 그 자체로 환영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미학적 관점에서 다룰 때에는 문학과 마찬가지로 영화 매체가 가지고 있는 ‘환영성’과는 별개로 멜리아스적 ‘환상’ 전통과 뤼미에르적 ‘사실’ 전통은 매우 다른 것으로 담론화 되어왔다. 잘 알려진 대로, 뤼미에르는 카메라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든다는 측면에서 영화의 리얼즘적 측면을 중시하였다면, 멜리아스는 최초의 SF영화로 알려진 <달나라 여행>을 통해 영화 카메라의 조작적 측면, 그리고 이를 통해 판타지를 가시화하였다. 그러나 뤼미에르의 사실적 영상도 완벽한 ‘사실’을 재현한 것은 아니며, 특정한 순간을 담아낸 이미지를 편집하여 영화적 핍진성을 구성한다는 점에서는 멜리아스가 만들어낸 조작적 환영과 마찬가지의 환상성을 내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도로프와 잭슨이 환상 문학의 카테고리를 설정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판타지장르로서의 멜리아스적 전통은 리얼리즘 전통과 분리되어 이해되어 왔다.
더구나 판타스틱 영화는 ‘상상하는 것’을 구체적 대상물로 시각화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구체화 된다. 예를 들어 영화의 서브장르로서의 공포, SF, 판타지는 모두 ‘환상성 (the fantastic)’을 가지고 있으나 영화의 형식적 측면에서는 매우 다른 장르로 여겨진다. 그리고 각각의 서브장르가 독특한 시각 관습을 구축한다. 즉, 귀신이나 퇴마가 나오는 것은 공포영화, 과학의 발전과 사이보그와 미래를 나타내는 것은 SF, 시공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1차세계와 2차세계를 구분 짓고 괴물이나 정령이 나오는 것은 판타지 영화라고 그 외형적 틀에 의해 암묵적으로 구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과 같은 영화는 SF영화의 관습을,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과 같은 좀비 영화의 관습을, <반지의 제왕> 같은 영화는 판타지 영화의 형식을 시각적으로 명확히 보여준다. 따라서 영화에서의 ‘판타지’의 외연은 ‘판타스틱 영화’보다는 좁은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영화의 경우 이런 좁은 개념으로서의 판타지 영화의 역사는 서구보다 더 짧다. 김소영은 폴 윌먼을 인용하여 합리적 근대라는 개념이 존재할 때 이의 대립쌍으로서의 ‘판타스틱’ 영화가 가능하고, 이런 면에서 판타지 영화는 ‘합리적 근대’에 태어난 장르임을 주장한다. 따라서 김소영은 한국의 경우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추동되었던 196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기가 되어야 판타스틱 한국영화가 나타났다고 지적한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현재 우리가 지칭하는 1, 2차세계를 넘나드는 ‘판타지 장르’는 1990년대까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로는 한국영화가 리얼리즘 미학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정전화 혹은 역사화 되었다는 점과 국가의 정책에 따라 선호되는 장르를 만들 수밖에 없는 여건이 있었다. 196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지나 1970-80년대 한국 영화의 암흑기에는 직접적인 ‘환상’이 가시화된 장르 영화들은 영화 미학 담론의 완벽한 외부에 위치해 왔다.
위와 같은 편파적 장르의 형성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먼저, 한국의 근대가 식민지-전쟁-분단-냉전 등의 “환상성이 살아남기에는 너무나도 척박한”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가 창조하는 2차 세계의 현실감, 즉 판타스틱한 세계의 핍진성이 일정한 산업적 조건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말하자면 영화적 판타지 재현에 필요한 핍진성을 구성하는 데에는 이를 가능하게 할 기술이 필요하고, 그 기술을 갖추지 못한 3세계의 영화의 판타지는 그 핍진성의 조야함 자체가 조롱의 대상이 된다. 1967년 작 <대괴수 용가리> 제작 당시 이러한 공상과학영화를 만들 수 있는 한국의 기술력을 지속적으로 자랑한다거나 일본과의 합작이 강조되었던 것
이런 의미에서 영화 제작의 디지털적 전환, 즉 이진법 체계를 통해 탈부착이 용이한 디지털 기술은 영화의 후반작업을 통해 셀룰로이드로는 부가할 수 없었던 새로운 재현의 방식을 만들며 새로운 영화 기호들을 탄생시켰다. 기존의 셀룰로이이드에 대한 물리적 조작으로 구현해왔던 “합의된 리얼리티”의 경계는 넓어졌고 새로운 재현의 기호들이 왕성하게 탄생하게 되었다. 전세계적으로도 1993년 <쥐라기 공원>의 성공 이후로 대형 판타지 영화가 쏟아져 나왔다. 압도적인 디지털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영화들이 2000년대 초반부터 판타지 영화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매트릭스>(1999), <해리포터>(2001), <반지의 제왕>(2001), <아바타>(2009), <인터스텔라>(2014) 등의 영화는 한국에서도 대흥행했으며, 2000년대 후반부터 전 세계를 압도하기 시작한 마블영화의 슈퍼히어로 시리즈는 이른바 디지털 문화 시대가 낳은 압도적인 판타지 장르 영화의 시대를 주도했다.
한국 사회에도 1980년대 후반부터 디지털 기계장치를 도입할 수 있는 요건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조야하기는 하지만 1980년대 후반 김청기 감독의 <우뢰매>시리즈는 이러한 시각 조작을 통해 만들어낸 아동용 판타스틱 장르의 예이다. 물론 본격적으로 디지털 기술이 쓰인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인데, 흔히 DI(digital intermediation)으로 불리는 기술을 통해 새로운 장르영화의 세계를 열 수 있었다.
한국에 이런 조건이 상당히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반 이후라고 볼 수 있다. 2006년 <괴물>의 천만 돌파와 2007년의 <디워>는 판타지 장르의 확실한 분기점을 만들었다. <괴물>은 해외영화사와의 기술합작을 통해 국제화의 추세를 선도했고, <디워>도 해외 동시개봉을 추진할 정도로 디지털 기술을 통한 장르영화의 가능성을 넓혔다. 국내 기술팀들도 막 성장세를 타고 있던 중국의 판타지나 무예영화의 CG기술을 합작하는 데에 큰 성과를 보였다. 대표적으로 천카이거의 <투게더>(2002)와 <무극>(2005)과 같은 영화가 디지털 기술의 합작의 예이다.
그러므로 2016년
3. 디지털 판타지 영화의 어떤 표본: <신과 함께>의 경우
이제 최근의 판타지 영화가 기획, 제작되는 과정과 플랫폼이 가져온 변화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대내적으로는 한국의 최근 10년간 역대 박스오피스 순위를 보더라도 디지털화 된 판타지, SF 혹은 재난물 등 판타스틱 영화가 1000만 관객 시대를 열며 흥행의 주도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또한 한국 영화 시장과 미국 시장이 국내, 국외 마켓에서 경쟁하는 상황도, 영화를 대형화하며 화려한 기술을 선보이는 판타지 영화를 제작하는데 몰두하게 한다. 일례로 마블영화로 흥행을 주도하는 미국영화에 대항하기 위해 한국영화도 이에 맞설 만한 판타지 영화의 제작을 감행하게 되고, 이는 시장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방편으로 여겨진다. <신과 함께>나
여러 문화 콘텐츠 중에서도 웹툰은 영화에 가장 많이 이용된 모바일 콘텐츠이다. 웹툰은 짧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빠르게 소비하는 가장 대중적인 스낵컬쳐로 꼽힌다.
영화화 된 웹툰으로는 2005년 강풀의 <아파트>, <바보>를 시작으로, <순정만화>(2008), <이끼> (2010), <은밀하게 위대하게> (2013), <내부자들> (2015), <강철비> (2015), <신과함께> (
현 상황에 대하여 <신과 함께>의 공동 제작자인 원동연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앞으로는 극장에서 봐야 할 콘텐츠와 그렇지 않은 콘텐츠가 완벽하게 구분될 것이다. 지금 내가 콘텐츠를 픽업할 때 가장 먼저 고민하는 질문은 ‘이 아이템이 꼭 극장에서 봐야 하는 건가’다”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하여 조형래는 <신과 함께>의 짧게 편집된 동영상이 광고나 짧은 동영상 짤로 퍼져 나갔던 상황을 지적하며, 관객의 소비패턴에 조응하는 방식을 택하였던 것이 <신과 함께> 돌풍의 원인으로 파악했다.
여기에 더하여 <신과 함께>가 판타지 영화로서의 2차세계를 성공적으로 구현한 것과 영화를 게임적으로 재구성한 측면도 모바일로 이미 콘텐츠를 접한 관객에게 어필하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영화에 구현된 이미지는 2차원의 평평한 상상에 머물렀던 웹툰을 3차원의 공간으로 인도한다. CG를 통한 2차 세계의 구현은 특히 저승을 여행하는 장면에서 웅대하게 구성되며 실사로는 촬영할 수 없는 CG의 게임적 움직임에 의해 속도감과 긴박감이 더해진다. 미국의 경우 <쥐라기 공원>이후, 한국의 경우 <괴물>이후 “디지털 크리쳐”가 등장하여 액팅을 한다는 점은 판타지 장르의 큰 특징이 되었다.
그러나 <괴물>이나 <옥자>가 현실에 잠입한 가상의 생물로서의 모습을 디지털 적으로 구축해낸 것이라면, <신과 함께>는 현실의 인간들이 ‘디지털 공간’으로 이동한다는 측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다시 말해, 괴물과 슈퍼돼지가 인간의 현실 세계를 방문한 것과 달리, <신과 함께>의 주인공들은 ‘디지털 공간’으로 이동한다. CG 작업을 통해 구현된 저승을 주인공이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디지털 크리쳐들과 이를 물리치는 저승사자들의 대결이 생동감을 더하며 <신과 함께>는 명실상부한 판타지 영화로서의 2차세계를, 입체적으로 구현하며, 마치 관객들이 놀이공원의 테마 파크에 직접 입성한 듯한 느낌마저 갖게 한다.
조형래 또한 게임적 CG와 영화적 CG가 이제는 큰 차이가 없음을 지적하였는데,
다시 말해, 관객은 영화 관람자로서 김자홍과 김수홍의 억울한 죽음에 얽힌 이야기를 접하는 한편, 저승으로 들어가는 시점에는 마치 RPG게임의 플레이어와 같은 방식으로 비매개 되어 (im-mediate) 되어 게임적 판타지 안으로 관람자 자신이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신과 함께>에서는 웹툰에서는 세 명의 성주신에게 주어졌던 역할이 마동석이라는 CG가 필요 없는 근육질 액션 히어로 캐릭터에 집약된다. 즉 마블에 버금가는 히어로 인물을 이승의 내러티브에 삽입하여, 마동석을 마블영화의 슈퍼히어로적 성격을 지닌 캐릭터로 만들었다. 물론 여기에서 마동석은 인간을 해칠 수 없는 힘없는 히어로로 설정이 되었지만, 마동석 신체 자체는 압도적 육체성이 뿜어내며 히어로적 포스를 과시한다. 조형래도 <신과 함께>가 보여주는 방식이 마블스튜디오의 슈퍼히어로물의 시각화 방식을 차용한 시각적 스타일에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마동석이 새로운 마블 시리즈 <이터널스>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것도
이렇게 영화와 게임 플레이가 교차되는 구성 때문에, 사실은 매우 지루하고 ‘아시아적인’ 살인, 나태, 거짓, 불의, 배신, 폭력, 천륜에 관한 7가지 교훈 서사가 관객을 훈계하면서도, 관객들이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제작자 원동연이 밝혔듯이 “아시아를 관통할 수 있는 보편서사”
4. 판타지는 전복하는가? ‘이생망’의 자본주의적 판타지
이제 디지털 판타지 영화의 구축을 통해 그려진 판타지의 내용을 점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토도로프가 문학 텍스트의 내부에 존재하는 ‘환상성’에 집중하여 판타지 양식의 구조주의적 분석을 시도하였다면, 이러한 양식으로서의 판타지의 특징을 사회,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일정한 ‘전복의 정치’가 가능하게 하는 문학으로 대별한 것은 로즈마리 잭슨이다. 로즈마리 잭슨은 문학의 내부와 외부에 대한 정치한 분석을 통해, 환상적인 것이 근본적으로는 당대의 현실에 대한 전복적 가능성을 내포한 것으로 본다.
외피만 살펴본다면 <신과 함께>는 1차 세계와 2차 세계를 오가는 중간 지점, 즉 인간에게는 ‘환영’이라고 불릴 수 있는 공간을 가시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이 판타지’에 속하는 듯하다. 죽음의 상태에 처한 주인공들이 과거로 다시 한 번 회귀하여 지난 생을 복기한다는 설정 자체는 흄이 지적하였듯이 현실에서 “의도적 탈출”을 그린다는 점에서 판타지적이다. <신과 함께>에서 판타지를 겪게 되는 주인공들은 이 세상에서 망한 사람들, “이생망”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영혼의 회귀를 통해 저승에서나마 원한을 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형래가 지적했듯이 <신과 함께>의 주인공들은 젊은 나이에 억울함을 품고 죽거나 비정규직과 같은 사회적 약자의 모습으로 재현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러한 지점에서 <신과 함께>가 ‘헬조선’을 살아가는 한국의 관객들의 “죽음의 충동”을 투사한 것이라 지적한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판타지 영화에서 “의도적 탈출”이 사실은 현실에서 겪은 재난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 그리고 다시 현실을 조망하는 기제가 된다는 점에서 <신과 함께>는 판타지 영화라기보다 개인의 재난상황을 전지적 시점에서 조망하는 현실에 관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수잔 손탁은 대표적인 판타스틱 영화인 냉전기 SF영화들을 과학을 표면에 둔 “재난의 영화”이며 냉전이 처한 현실의 사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암시하는 영화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상적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상황의 논리와 과정을 살펴본다면, 과연 이 판타지가 진정한 ‘전복’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예를 들어, <신과 함께>는 2차 세계를 드러내는 환영적 이미지로 가득하지만, 이들이 통과하는 7개의 관문은 억울한 죽음을 ‘기소’하고 ‘변론’한다는 이성적, 법적 작동방식으로만 움직인다. 다시 말해, 영화가 2차 세계를 다루는 방식이 현세의 법집행 방식을 따르고 있다. 물론 사자들이 현세와 내세를 오가는 것은 초자연적인 일이지만, 그들이 망자를 변론하는 방식은 억울한 부분을 추론하고, 조사하여, 마침내 이성적 변론을 한다는 점에서 ‘이성적 합리성’의 승리를 보여준다. 이는 ‘이성적 합리성’이라는 근대적 가치가 현실 세계를 구축하고 ‘판타스틱’한 것이 그에 대항한다는 ‘판타지’의 ‘전복성’의 일반적 해석에 완벽히 균열을 낸다. 관객은 이미 ‘이성적 합리성’이라는 근대적 가치가 전복된 ‘재난 상황’이 팽배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다 역설적으로 ‘합리성’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에 대한 상상이 ‘비합리적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판타지가 되는 셈이다. 즉,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합리성’을 찾는 것이 역설적으로 ‘판타지’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신과 함께>는 웹소설의 인기 장르인 ‘회귀물’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회귀물’이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이 과거의 시간대로 돌아가서 자신의 인생을 다시 사는 스토리를 가진 웹소설의 장르를 지칭한다. 안상원이 밝혔듯이 회귀물의 특징은 “미래의 정신이 현재(과거)의 몸을 지배하는 것” 이며, “회귀 모티프의 서사는 주인공이 현재의 유의미한 관계/권력 등을 상실한 데서 시작하며, 회귀 사실을 안 뒤 자신의 삶을 회복하고자 지식을 활용한다는 점, 더 나아가 회귀 시점 이후의 미래를 긍정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그것이 판타지임과 동시에 이미 한번 살아본 인생의 현실 원리를 체득한 주인공이 남들보다 우월하게 수행한다는 점이다. ‘이생망’했던 현실과 달리, 이미 ‘이성적 판단’을 통해 현실에서 해답 카드를 가진 자들은 다시 비합리와 재난이 그대로 남아있는 현실에서의 승리를 꿈꾼다.
주인공들은 삶을 회귀하고 드디어 ‘이상적인 죽음’에 이르지만, 그들이 살던 1차 세계의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철거반이 들이닥쳐 언제라도 자신이 살고 있는 터전을 밀어버릴 수 있는 상황에 처한 비참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 전해지는 것은 “나쁜 사람은 없어. 상황이 나쁠 뿐이지”라는 착한 메시지이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간직한 자에게 자본주의적 ‘상’인 펀드 상승이 이루어진다. 펀드가가 상승하면서 비참한 현실이 뒤집힐 것으로 마무리되는 영화의 끝은 어쩌면 영화를 통틀어 가장 ‘비전복적’이다.
다시 말해, ‘이성적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는 변화가 없지만, “나쁜 상황은 로또로 극복된다”와 같은 서사는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적 판타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판타지적 존재가 해결하지 못하는 현실의 삶, 그러니 상황이 나쁠 뿐이니 유순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라는 성주신의 메시지는, “이생망”이더라도 착하게 삶을 받아들이라고, 다음 생을 기다리라는 훈육을 남긴다. 이렇게 <신과 함께>는 1차 세계와 2차 세계를 넘나드는 판타지보다 더 환상적인 자본주의적 판타지를 화려한 디지털 기술을 동원한 영화를 통하여 제공하는 것이다. 이렇듯 망한 현실을 다시 되풀이하여 자본주의적 승리를 쟁취한다는 욕망의 투사는, 판타지 안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신자유주의적 삶의 위력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 논문에서는 한국의 판타지 영화의 계보를 살펴보면서, 현재 가장 왕성하게 생산되고 있는 판타지 영화가 2000년대 초반부터 디지털화된 기술 속에서 자라난 장르였음을 밝혔다. 또한 기술적으로 완성도 높은 영화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문화자본주의의 성장 속에서, 판타지 영화는 급속하게 변화하는 플랫폼 환경에 발맞추어 그 형식과 언어를 교차시키며 새로운 21세기 한국 영화의 강자로 자리 잡아가고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 속에서 제작된 판타지 영화는 판타지 영화가 고전적으로 전제하고 있었던 사회전복적 요소를 탈색시키고, 오히려 자본주의적 환상을 그리고 있음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그 비전복성의 배경에는 신자유주의가 압도하는 ‘이생망’의 현실과 그 현실을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욕망, 그리고 이러한 욕망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적 훈육의 메시지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서동진은 최근 몇 년 동안 우리가 쉽사리 접할 수 있는 천만 관객의 주체가 누구인지 질문하면서, 포스트-시네마 시대의 관객의 주체성을 참여하는 주체로 상정할 수 없는 상태에 달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많은 영화가 “노골적으로 비디오게임과 같은 대중오락에 빠진 젊은 관객층”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9년 가장 흥행한 영화로 꼽히는 <엑시트>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탈출구가 없는 상황에서도 나보다 타자를 먼저 생각해야한다는 윤리 하나로 재난을 버텨내는 젊은이들의 이야기에는 감동이 존재한다. 하나의 대의와 윤리가 지배할 수 없는 구조화된 사회에서, 비록 약자의 자리에 있지만, ‘회귀’가 아니라, 이 사회를 버티며 관통하겠다는 의지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재난은 ‘판타지’가 아닌 현실의 작은 실천에서 극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엑시트>와 같은 서사 혹은 현실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