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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테네시 윌리엄즈 극에 나타난 남성성 연구: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를 중심으로 A Study of Masculinity in Tennessee Williams’ Cat on a Hot Tin Roof
ABSTRACT
테네시 윌리엄즈 극에 나타난 남성성 연구: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를 중심으로

This paper examines how Tennessee Williams shows male characters in the South during the 1950s troubled with the absurdities of American masculinity and the conservatism of the family ideology through the play Cat on a Hot Tin Roof. As a homosexual who was excluded from society his whole life, Williams resisted the confinements of masculinity and projected his antagonism through his plays as an attempt to deconstruct binary gender roles of men and women. Brick Pollitt in Cat on a Hot Tin Roof, a latent homosexual, is homophobic. Brick’s fear of social prejudice drives his friend Skipper to suicide. At the same time, his unacceptable masculinity makes him flee into enervation and refuse any relationship with his wife Maggie. His strict and absolute father, Big Daddy, embodies the consummate patriarch, but Big Daddy’s expected death from cancer depicts a price for hypocrisy, repression of family members, and misogyny, or a sacrifice for his performance as a strong man. In addition, Brick and Big Daddy’s changed character and happy ending in the Hollywood film version of this play show the difficulty of homosexuality and its inevitable compromise with the society. Based on this paper’s examination of the play’s male characters, Cat on a Hot Tin Roof can be interpreted as the writer’s social critique of American masculinity in the South during the 1950s, questioning concepts of masculinity itself, describing the gender role as no more than a masquerade forced by the society.

KEYWORD
masculinity , patriarch , gender role , homosexual , family ideology , Tennessee Williams
  • I. 들어가며

    흔히 정전에 속하는 문학 작품에서 남성 인물들은 각기 다른 그들의 특수한 상황이나 성향은 간과되고 마치 모든 남성 혹은 양성을 대변하는, 인간의 보편적 경험을 인식하고 구현할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제시되고 평가되어 왔다. 즉 오랜 역사를 거쳐 거의 모든 이야기 속에서 남성의 목소리에 부여되어온 보편성 때문에, 남성 인물들은 젠더 관계로부터 자유로운 것으로 여겨져 그들에 대한 젠더 역학(gender dynamics)의 구체적인 면은 고려되지 않아온 것이다. 그래서 “젠더 관계를 연구하는 여성 학자들은 사소한 부분에 있어서까지 의심해보는 반면 남성 학자들은 자신이 남성이라는 사실이 본인의 지적 작업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걱정을 하지 않는” 성향을 보이며, “남성의 심리 혹은 남성의 역사에 대해서는 명확히 연구하지 않는”(Flax 45) 경향이 형성되어왔다. 제인 플랙스의 표현에 의하면 적어도 “세 가지 역사 - 남성의 것, 여성의 것, 그리고 우리들의 것”(45)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학자들이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 들어서의 일이다.

    특히 미국 연극에서 젠더에 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은 페미니즘 이론과 남성학(Men’s Studies)의 증대에 따른 결과이다. 우선 남성학 자체의 탄생에도 많은 영향을 준 페미니즘 이론과 운동의 힘이 컸다고 볼 수 있는데, 그 가장 기본이 되는 전제는 바로 사회적 성으로서의 젠더, 즉 태어나는 (born)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become) 것으로서의 젠더이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주장처럼 젠더가 생물학적 성과 다른 개념이고 “구축된 것(construct)이고 그 유래를 감추는 것”(273)이라면, 이는 비단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해당된다.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소개하며 남성학자 조정문은 페미니즘 이론이 여성을 위한 주장만이 아니라 남성들도 가부장제 문화의 피해자라는 주장, 즉 현대 사회가 여성에게는 여성성을, 남성에게는 남성성을 강요하는 엄격한 역할 분리의 성별 이원 체계를 강제함으로써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자신의 고유한 개성의 실현을 억압한다는 주장을 펴고, 그 해결을 위해 새로운 여성상과 남성상을 요구함으로써 남성학의 태동에 힘을 주었다고 설명한다(16-17).

    남성학은 남성, 남성다움(manhood), 남성성(masculinity)과 같이 남성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아 젠더 정체성과 젠더 역할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1950년대에 출현한 히피족은 남성들이 오랜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짊어져온 가족 부양의 의무를 최초로 거부한 집단으로서 남성학 시작의 계기가 되었고, 1960년대 이후 미국 남성들은 이제까지 사회적으로 강요되어 온 남성다움의 관념 중 일부를 거부하며 내면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기 시작했고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하여 몸을 장식하기도 했다. 이러한 움직임이 1970년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미국에서 최초로 일정한 형태를 갖춘 남성해방운동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정채기, 『남성학과 남성운동』, 125). 이들 논의의 전제는 앞서 말한 대로 남성 또한 사회 내에서 젠더의 지배 하에 있고 남성성이라는 개념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구축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페미니즘 이론에서 주장하는 여성성이 단지 가장(masquerade)에 불과하다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남성성의 발휘 또한 사회가 규정한 남성성 역할의 수행(performance)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유진 오닐(Eugene O’Neill)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정전에 속하는 미국 희곡에서의 남성성을 연구한 칼라 맥도나(Carla McDonough)는, 여성이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자라나는 것이라면 남성 또한 남성성의 쟁취와 성취를 통해 자신이 남성임을 입증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12). 즉 실생활 혹은 연극적 상황 속에서 남자들이 하는 행위들은 남성다움을 규정하는 사회의 대본에 따라 수행하는 남성들의 연기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주지하듯이 개인의 정체성 자체를 제한하게 되므로 문제적인 성향을 띤다.

    따라서 남성학은 이렇게 ‘사회적으로 용인 가능한 자아’의 규칙이 남성성을 강제로 수행하는 남성들에게 얼마나 큰 대가와 희생을 치르게 하는지, 어떻게 자기 고유의 능력이나 가치를 찾는 것조차 포기해야 하는지를 드러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남성에 대한 신화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계속 변형되므로 남성성 개념은 역사와 문화가 변화함에 따라 달라지는 남성의 역할, 욕구, 가치, 행동, 문제들을 반영하는데, 특히 현대사회에서는 많은 남성들이 가부장적 남성성이라는 보이지 않는 억압 속에 살고 있으므로 이 시점의 남성학에서는 그 가부장적 남성성이 가하는 억압과 이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피터 머피(Peter Murphy)는 남성다움에 대한 문학적 재현은 남성성에 대한 지배적인 문화적 전제들에 의존해왔고 이러한 전제들의 불안정성을 폭로해왔다고 설명한다(6). 이처럼 지배적 문화의 전제에 의해 사회적으로 강요되어온 남성성은 미국의 여러 대표적 극작가들이 작품 속에서 남성 이미지를 창출하는 데 큰 영향을 준다. 미국 문화에서 전통적으로 진정한 남성의 이미지는 미국 남성들에게 일체감을 갖게 하는 환상의 이미지를 제공하면서 극작가들이나 여타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등장 인물들을 창조하게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미국 초기 역사와 뿌리를 같이 하는 서부 개척시대 영웅의 이미지이다. 이른바 “프론티어 남성”(Frontier Male)이라 불리는 이러한 이미지는 서부 개척지의 광활하고 장엄한 자연 속에서 총 한 자루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공동사회의 안락하고 전통적인 삶의 속박을 거부한 채 고독하게 삶을 개척해가는, 19세기 초반 제임스 쿠퍼(James F. Cooper)의 『라스트 모히칸』(The Last of the Mohicans)에 등장하는 내티범포(Natty Bumppo)와 같은 인물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강인하고 진취적이며 정의를 위해서 목숨도 아끼지 않는 서부 영화 속의 영웅적인 보안관이나 정의의 총잡이와 같은 전통적 개념의 남자다운 남성으로 이후에도 미국 문화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순환하며 발전했다. “미국적 아담”(American Adam)의 모습인 이러한 이미지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핏츠제랄드(F. Scott Fitzgerald),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작품들과 하드 보일드 소설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변형되면서 재생되었다. 또한 산업화를 거치고 자본주의 강대국으로 성장함에 따라 개인적 남성의 삶을 공적, 국가적 운명과 연결시키게 되면서 미국 남성성은 가족과 지역사회를 넘어 미국이라는 위대한 나라의 국가적 정체성과도 동일시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대본에 따라 규정되고 수행되는 것에 불과한 남성성은 그 개념 자체가 불안정하고 취약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로버트 블라이(Robert Bly)는 미국 남성 모델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50년대의 남자들은 성실히 일하고 가족을 부양했으며. . . 공격적이고, 미국을 지지하며, 남자가 누구이고 남자의 책임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외곬이고 일방적이었기 때문에 위험했다”(제퍼드 16에서 재인용)고 말하고 있다. 이어 그는 1960-70년대 남성은 베트남 전쟁과 여성운동의 영향으로 다소 부드럽고 여성적인 면이 있는 남자들이 되었지만 반면 자유를 잃었고, 이러한 시대적 경향이 1980년대 전형적 마초 대통령인 레이건(Ronald Reagan)과 같은 영웅상을 찾게 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맥도나 또한 몇몇 남성학자들의 주장을 인 용하면서, 미국은 페미니즘과 국가 자체의 남성에 대한 불안한 감정으로 인해 남성성의 위기를 겪어왔으며 남북전쟁 이전에는 정치적 차원에서의 남성성에 대한 일종의 ‘테스트’인 여러 전쟁들, 또 그 이후에는 보이 스카웃, 프로 스포츠 팀등의 활성화를 통해 남자다운 남성들을 양성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왔음을 언급한다(11).

    이처럼 미국 역사에서 남성다움이란 시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그 원형을 바로잡고 강한 남자, 아버지, 미국 국민으로서 국가가 부과하고 또 개인들이 인정하는 남성성의 개념은 매우 완고한 편이다. 따라서 남성 인물들은 강하고 용감하고 결단력 있는 남성적 행동을 기대하는 사회의 통념에 부응해 역할 수행을 해야 하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연약하고 부드럽고 감수성 풍부한 남성들은 남자로서 부적절한 존재로, 강인하고 건강한 미국 사회를 구축하는 데 배제되어야 하는 존재로 냉대받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남성성의 재현이란 이분법적인 대립 속에 드러나는 일체의 비남성적 요소들을 회피하고 부정하고 억압하는 “차별화의 과정”(바뎅테 138)을 통해 수행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미국에서 남성답다는 것은 “여성, 동성애자, 흑인 혹은 다른 민족이 아님”(McDonough 8)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한 문화의 지배적인 남성성의 코드는 작가의 창작 뿐 아니라 비평의 영역과 기준에도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전통 비평에서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극에 등장하는 남성 인물들은 특정 성에 얽매이지 않고 양성을 포용하는 보편적 인간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으로 읽혀 왔지만, 젠더에 대한 사회적 영향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 인물들 또한 젠더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한 남성으로서 가정과 사회에서 겪는 위기와 방황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유진 오닐과 테네시 윌리엄즈(Tennessee Williams)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이 작가들이 창조한 남성 인물들은 그 남성성에 미치는 미국의 역사적, 문화적 요인들을 시대별로 살펴볼 수 있게 하며 그로 인해 형성되고 수행되며 혼란을 겪는 남성성의 모습들을 볼 수 있게 한다.

    본 논문에서는 이들 중 젠더 정체성과 젠더 역할의 재현에 있어 가장 교묘하고 흥미로운 경계지점에 서있다고 판단되는 테네시 윌리엄즈(1911~1983)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남성성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흔히 이야기 구조보다는 시적 사실주의(poetic realism)와 같은 새로운 연극적 기법의 창시자로서 높이 평가되어 왔던 그는 주제에 대한 비평 또한 어느 한 곳에도 온전히 소속되지 못하고 방황하는 도피자들(the Fugitive Kind)에 대한 것으로만 함축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들에 대한 젠더 역할과 관계를 비롯한 남성성에 관한 연구는 다소 미약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블랑쉬 뒤보아(Blanche Dubois), 앨마 위너뮐러(Alma Winemuller), 고양이 매기(Maggie the Cat) 등 그의 강렬한 이미지의 인물들은 주로 여성이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 해석은 주로 여성 인물들의 성격이나 과거에 집중되어 왔다. ‘여성적’이라는 평가 외에도 그는 정치적, 사회 비판적 메시지의 측면에서는 다소 약한 위치를 점해 왔는데, 그 이유는 아마 미국을 대표하는 극작가인 밀러나 오닐의 작품에 비해 그의 작품들이 가정이나 사회에 대한 가시적 비판보다 개인의 심리적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고 또한 평생을 방랑하는 예술가로 살았던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성격을 짙게 반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회고록』(Memoirs)에서 자기 자신을 패배자이며 도피자라고 말한 바 있는 윌리엄즈는 한편 당시 사회적 지탄을 받던 동성애자라는 ‘일탈한’ 존재로 살아간 작가이기도 하다. 남성성 혹은 여성성에 대한 편견의 역사를 거부하고, 동성애자로서 그 어떤 작가보다도 젠더 문제를 몸소 체험하고 작품에 반영했다는 점은 그가 당시 당연시 되던 성 역할에 대해 전복적인 시각을 가진 작가였다는 사실과 함께 그에게 무시할 수 없는 사회 비평적 기능을 부여한다. 더글라스 아렐(Douglas Arrell)은 1950년대 이후 밀러보다 평가에서 뒤졌던 윌리엄즈가 1990년대 들어 밀러보다 더 많은 관심과 평가를 받고 있다면서, 그 이유는 윌리엄즈의 작품이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헤게모니 구조를 해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60). 뉴욕 타임즈 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내부에 숨어있는 여성적인 측면에 대해 “양성적인 측면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나의 성적 측면은 한 방향으로 주축을 이룰 수 있겠지만 사실상 내 본성 속에는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존재한다. 나는 한 여성으로서 나의 생을 마감할 수 있을지 의심해보게 된다”라고 말했다(Stanton 3). 일생을 미국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성에 부응할 수 없었고 부응하고자 하지도 않았던 윌리엄즈의 입장에서, 남성성이라는 개념은 자신을 주류로부터 철저히 소외시키는 트로마(trauma)이자 그 근본에서부터 회의와 경멸을 느끼게 하는 악습이었을 것이다. 데이빗 사브란(David Savran)은 그가 1940년대와 50년대 젠더 구축에 중심이 되었던 이분법에 반기를 들었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후 미국 사회에 팽배했던 보수적인 가족 중심주의와 이성애 중심주의는 윌리엄즈의 그러한 사회 비평의 계기를 더욱 확고하게 해주었을 법하다. 네일 캠벨은 “1945년 이후 미국에서는 가정 이데올로기가 새롭게 분출했고, 여성의 자리에 대한 전통적인 이상들이 활발하게 재유행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작업장에서도 여성들에 대한 요구가 증가되고 있었다. . . . 이러한 ‘분열된 성격’의 의미는 남성들이 자신들의 남성성이 위협 받고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이었다”(391)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당시 대중적으로 육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베이비붐 세대 부모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벤자민 스포크(Benjamin Spock)의 『아기와 육아』(Baby and Child Care, 1944)가 여성들에게 집에 남아 남자아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이상적 어머니’가 되도록 충고한 것을 인용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아이들이 혼란스럽지 않도록 강력한 남편이 가정에서 경제적, 성적 통제권과 가정의 권위를 떠맡을 필요가 있었다고 분석한다(393). 즉 남성성이 위험에 처해있을 때 전통적인 영웅적 기질을 고집하는 방법은 가정 이데올로기를 다시 불러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남자 동성애자들과 레즈비언들이 가부장제가 제공하는 개념 규정의 틀 밖에 있는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질서가 회복될 수 있기 위해 제거되어야 했음은 물론이다. “50년대 중반 . . . 인간이 알고 있는 극악무도한 3대 범죄는 공산주의, 마약 복용, 동성애이다”(캠벨 407에서 재인용)라는 에드먼드 화이트(Edmund White)의 소설 속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동성애가 국가 안보의 문제와 연결되어 ‘반미국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을 정도로 당시 미국 사회는 보수적이었다. 동시대의 밀러와 같은 작가가 현실적인 미국 남성성에 부합하는 남성, 그렇지 못한 남성을 구현하고 후자의 부적응과 방황, 파멸을 그림으로써 역으로 강인한 미국적 남성다움을 강조했다면, 윌리엄즈는 전자와 후자 모두에게서 비극성을 발굴해냄으로써 오히려 그렇게 이분법적이고 엄격한 남성성 개념 자체의 허구와 부재를 드러내려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뜨거운 양철지붕 위 의 고양이』 (Cat on a Hot Tin Roof, 1955)를 분석함으로써 윌리엄즈가 남성 인물들 속에서 남성성을 어떻게 구현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이 극은 주로 고양이 매기를 비평의 핵심으로 삼아 주체적이고 현실적이며 발전된 여성 인물이 등장하는 극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텍스트 면면을 살펴볼 때 알 수 있듯이 매기의 주체성은 전적으로 실상 남편 브릭(Brick)과 시아버지 빅 대디(Big Daddy)의 남성성에 의존적이고, 극을 지배하는 그 둘의 대립적 남성성을 넘어서는 결말을 제시하지도 못한다. 잠재적 동성애자이자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영위하지 않는 브릭은 왜 이상적 남성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무기력한 인물로 그려지는지와 반면 빅 대디는 이상적인 가장이자 아버지이지만 실상은 어떻게 위선적이고 건전치 못한 인물로 구현되는지 살펴보겠다. 이렇게 윌리엄즈 극에 나타난 남성 인물들을 살펴봄으로써 그가 보는 당시 가부장적 남성성이라는 보이지 않는 억압 때문에 남성들이 치루어야 하는 희생, 그 강압된 남성성의 허구성, 그리고 그것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문화에 대한 회의를 드러내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경직된 사회 속에서 개개인의 고귀함과 개성을 제한하는 젠더 역할의 이분법을 타파하고, 있는 그대로의 양성적인 모습들을 포용하고자 하는 그의 인간적인 노력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II. 브릭 : 도피하는 동성애자

    윌리엄즈의 다른 극들도 그렇지만 특히 이 극은 공연에 따라 여러 번의 획기적인 변신을 거쳤다. 원형은 1952년에 발표된 “Three P layers o f a Summer Game”이라는 단편이고 단편이 희곡으로 개작되는 과정에서 남게 된 등장인물은 한때 유명한 운동선수였으나 이제는 알코올중독에 걸려 있는 브릭 폴리트(Brick Pollitt)와 그의 아내 매기이다. 1955년에 있었던 뉴욕 공연 이후로 이 극 텍스트의 출판본에는 두 가지 다른 형태의 3막이 실리게 되고 그 중간에 작가의 설명이 붙는다. 첫번째 판은 윌리엄즈가 원래 썼던 3막이고 두번째 판인 개작된 3막은 극의 연출자였던 엘리아 카잔(Elia Kazan)의 제안을 받아들여 윌리엄즈가 변화를 주어서 만든 것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큰 수정이 가해졌는데, 원작에서 빅 대디가 2막을 끝으로 사라지는 것과 달리 개작에서는 3막에 빅 대디가 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원작에서는 브릭이 매기가 메이(Mae), 구퍼(Gooper) 부부와 투쟁을 벌일 때 냉소적이고 무관심한 상태로 일관하지만 개작에서는 그가 매기의 편을 들며 자신들이 잠자리를 같이 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는 메이와 구퍼가 떠난 후 매기가 그녀의 계획을 이야기할 때도 좀 더 부드러운 태도로 들어준다. 그리고 원작에서는 매기가 빅 대디가 없는 상태에서 임신했다는 거짓말을 하지만, 개작에서는 빅 대디의 면전에 대고 결정적인 거짓말을 하며 빅 대디는 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1974년에 있었던 아메리칸 셰익스피어 극단의 공연을 위해 윌리엄즈는 3막을 다시 쓰고 극 전체에도 수정을 가했는데, 이 판은 빅 대디를 다시 등장하게 하고 매기를 더 동정적으로 그리고 있으나 브릭의 성격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는 오히려 원래의 성격 묘사로 되돌아가고 있다. 윌리엄즈는 그 이유를 들어 “나는 브릭의 도덕적 마비 상태가 그의 비극의 뿌리라고 생각한다. . . . 그리고 그의 성격에 있어서 극적인 진전을 보여주는 것은 그의 비극의 의미를 흐리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 . 브릭처럼 정신적으로 황폐한 상태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나 행동에 즉각적인 변화가 초래되기는 어렵다고 믿었다”(Cat 107)고 밝히고 있다. 윌리엄즈가 그토록 큰 정신적 상처를 안고 있는 인물로 그리는 브릭은 어떠한 남성인가?

    브릭과 매기, 브릭과 빅 대디의 대화를 통해서 드러나는 과거사에 의하면 브릭은 이성애적 결혼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잠재적인 동성애자이다. 현재 파탄을 겪고 있는 브릭과 매기의 결혼생활은 처음에는 행복하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브릭과 그의 친구 스키퍼(Skipper)가 프로 풋볼 팀을 만들었을 때 그들의 관계가 심상치 않음을 매기가 발견하면서부터 위기가 시작된다. 매기는 스키퍼를 찾아가 그들의 동성애적 관계를 자백하라고 강요하고 스키퍼는 그 비난이 거짓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녀와 육체관계를―매기의 암시에 의하면― 가지며, 그 후부터 술과 마약에 탐닉하다가 죽게 된다. 그리고 빅 대디가 스키퍼가 죽은 후부터 브릭이 술을 마시기 시작한 사실을 지적하고 추궁하자 브릭은 자신이 스키퍼로부터 장거리 전화를 받았으며 그가 술 취한 상태에서 하는 고백을 듣지 않으려고 전화를 끊었음을 인정한다. 브릭은 진실을 직면하기를 거부하고 스키퍼가 자신을 필요로 할 때 저버림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그를 죽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브릭은, 매기는 물론 빅 대디에게도 끊임없이 자신과 스키퍼와의 관계는 깨끗했음을 항변한다. 그와 스키퍼의 관계를 “희랍 신화에나 나 올 만한 일종의 아름다운 이상,” “고결한 것,” “깨끗한 것”(42)이라고 말하 며 이해한다고 말하는 매기에게, 브릭은 흥분해 그녀를 계속 목발로 치려 하면서 외친다.

    즉 브릭의 무기력한 심리의 핵심은 일차적으로 친구 스키퍼의 자살에 대한 죄책감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내 매기에게 부인하고 있듯이 그 자신과 스키퍼에게도 동성애의 실상을 진실로 인정하지 못하고 부인했던 것, 즉 그러한 포용력과 용기를 가지지 못했던 것에 대한 자괴감이다. 그가 부호인 아버지를 배경으로 둔 풋볼 스타이자 장래가 촉망되는 영웅이었던 것임을 생각해 볼 때, 그는 자신이 남들이 보기에 “더러운” 동성애자임을 밝힘으로써 그 지위를 박탈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서론에서 밝혔듯 미국에서 남성이 된다는 것은 여성, 동성애자, 비백인이 아님을 의미하므로 이 비남성적 요소들을 억압해야만 가족과 사회가 기대하는 진정한 남성으로 인정 받을 수 있다. 브릭은 빅 대디의 “구퍼와 메이가 비추길 너와 스키퍼 사이에 뭔가 옳다고 볼 수 없는 일이 있었다던데. . . 그러니까 너희들 우정에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는 짓 말이야”(75)하고 운을 떼자 그때까지 냉담하던 태도에서 돌변하여 “그런 암시를 하는 사람이 또 누구죠, 아버지인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키퍼와 내가”(75)“아버지도 아들이 변태라고 생각하는군요”(76) “스키퍼와 내가 그 더러운 한 쌍의 노인네 같다는 말이죠? . . . 피해 다니는 동성애자들? 변태들?”(77)라고 말하며 흥분하는 모습을 보인다. 윌리엄즈는 무대 지시문을 통해서도 이 장면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들이 이야기하는 문제가 “스키퍼가 목숨까지 잃으면서 부인했던 그 ‘용인되지 않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윌리엄즈는 “내가 이 작품을 통해 얻으려 하는 것은 한 개인의 심리적 문제 해결이 아니다. 나는 한 집단에 속한 인간들이 겪는 경험―살아 있는 사람들이 먹구름 같은 동일한 위기를 만나 서로 주고 받는 불투명하고 불규칙하고 단명하지만 강력하게 격정적인 행동―의 진정한 속성을 포착하려고 한다”(75)고 덧붙임으로써 브릭의 동성애 문제가 결코 한 개인 남성의 문제가 아니며 동성애자로 분류되는 집단과 사회 전반에 깊이 맞물려 있는 문제임을 암시하고 있다. 더불어 그는 브릭이 “두 남자 간의 참되고 깊은 우정이 왜 존중 받지 못하고 호모 취급을 받느냐”(78)는 대사를 할 때의 지시문을 통해서도 남성 동성애가 사회로부터 지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임에 대한 깊고 안타까운 공감을 드러내고자 한다.

    맥도나는 전통적 남성성이 여성의 몸이나 여성성과의 투쟁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면, 최근에는 그러한 남성성이 수행되는 데 어려움을 겪음에 따라 여성에 덧붙여 동성애 공포증에 의해 남성의 젠더 역할이 유지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처럼 브릭도 자신의 남성성에 치명타가 될 사안이 분명한 스키퍼와의 동성애적 관계를 참된 우정이라고 명명함으로써 자신에게 또 남들에게 끊임없이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마리안 프라이스(Marian Price)는 브릭의 분노는 동성애 주제를 무겁게 압박하는 연극과 영화계에 대한 윌리엄즈 자신의 분노로 보여질 수 있으며, 브릭의 죄책감 또한 그 압박에 맞설 능력이 없는 윌리엄즈 자 신의 죄책감일 수 있다고 말한다(327). 벤자민 넬슨(Benjamin Nelson)은 “브릭의 죄는 동성애 관계가 아니며, 사실 동성애가 그의 파멸의 주된 논쟁점도 아니다. 그의 죄는 자신과 스키퍼와의 관계를 너무나도 순수한 ‘하나의 고결하고 진실한 것’으로 이상화시키는 데 있다”(193)고 주장한다. 그의 스키퍼에 대한 무모했던 집착은 사실 현실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고 자신조차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이상적인 판타지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으며, 스키퍼의 죽음을 계기로 그 환상을 소멸시켜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브릭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음과 죄책감과 방어심리에 의해 알코올중독과 무기력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발목 부상으로 목발을 짚고 있는 것 역시 홀로 서서 인생을 직시하기를 거부하는 그의 태도를 상 징한다. 브릭은 여러 면에서 역시 동성애자이자 도피자인 윌리엄즈 자신과 동일시되는데, 그는 이 극에서 브릭에게 자신의 부적절한 성 정체성, 또 여성적인 속성과 남성적인 속성을 모두 부여하면서 자신이 현실에서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을 보상하기 위해서 그를 아버지로부터 사랑 받는 아들로 그린다. 또한 브릭의 알코올중독증과 귀족적인 태생, 동성애를 인정하는 포용력을 발휘하지 못했기에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잃는 경험을 한 것 등은 윌리엄즈 스스로 “내가 그녀”라고 밝힌 바 있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랑쉬 뒤보아와도 밀접히 연결된다.

    브릭의 현실 도피의 특징적인 또 다른 행태는 아내 매기에 대한 성적인 거부이다. 매기는 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윌리엄즈의 극에 등장하는 다른 도피자적 여성 인물들과 판이하게 다른, 가장 주체적이고 현실적이며 발전적인 여성상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넬슨은 그녀를 “삶에 대한 힘을 상징하는, 이 극에서 가장 긍정적인 인물”(45)이라고 말하며, 루이즈 블랙웰(Louise Blackwell) 또한 “현대극에서 가장 결단력 있는 여성 인물 중 하나”(104)라고 평한다. 윌리엄즈 자신도 “그녀의 성격 묘사를 하는 과정에서 고양이 매기는 끊임없이 나를 더욱 매료시켰다”(Cat 107)고 말함으로써 그녀의 긍정적 성격을 인정한 바 있다. 매기의 현실 문제를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의지와 성공에 대한 강한 집념은, 자신에 대한 브릭의 모욕적 태도와 구퍼 메이 부부의 온갖 계략에도 불구하고 부부관계를 회복하고 상속 재산을 받아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그녀의 브릭에 대한 성관계의 종용은, 아이를 낳아 상속을 받아야 한다는 현실성과도 연관이 있지만 못지 않게 그에 대한 그녀의 변함없이 열성적인 사랑과 부부관계의 회복에의 갈망에서도 크게 연유한다는 점에서 관객의 동정심을 산다. 그는 브릭이 완강하게 거부하고 사회가 금기시하는 스키퍼와의 동성애 관계에 관해서도 깊은 동정심을 보인다. “그렇게 당신이 타고났으니 어쩔 수도 없는 그 애정이 만족스럽게 지속될 수도 없고 심지어는 터놓고 얘기할 수도 없으니, 정말 슬프고 끔찍한 일이었지. . . . 난 그것 다 이해해! 고결한 것이었다고 생각해!”(42)에서 볼 수 있듯이 그녀는 나약한 남편의 미래를 책임지기 위한 아내로서의 의무감과 애정 뿐 아니라 상처를 보듬는 포용력도 가지고 있다. 로저 복실(Roger Boxill)은 브릭을 “어른들의 세계에 사는 어린아이로서 . . . 모성적이고 보호해주는 젊은 여성과 방을 함께 쓰고 있다”(117)고 말함으로써 브릭과 매기의 관계를 모자관계로 표현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브릭은 그렇게 절대적으로 충실한 아내를 성적으로 거부함으로써 동시에 그녀를 성적으로 지배하고 제어한다. 남성이 성관계를 통해 여성을 지배하려고 한다는 속성을 상기시켜 본다면 그의 성적 회피도 결국 매기를 유일하게 지배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이 성적 단절은 그의 과거에 대한 속죄의 의미도 있고 그 일에 하나의 단초를 제공했던 매기에 대한 형벌의 의미도 있지만, 또한 정치적이고 승리욕이 강한 여성인 매기에게 지배 받기를 두려워하여 나타나는 하나의 자의적인 방어기제로 볼 수도 있다. “나는 내가 원치 않는 걸 할 이유가 없어. 당신은 무슨 조건으로 내가 당신과 계속 사는 것에 동의했었는지 잊고 있군”(28)에서 알 수 있듯이 조건부로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그는 비록 자신이 무기력하고 파괴적인 삶을 영위하고는 있으나 아내에게 통제 받거나 자신의 영역을 간섭 받지는 않으려 노력한다. 무기력한 남성인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젊은 날의 이상적인 남성적 유형과 갈등하고 있다. 성공, 권력, 제압, 그리고 힘의 신화적 기준에 자신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남성들은 자신을 괴롭히는 강압적인 남성성의 포로가 된다. 그리고 이 강박관념적인 남성성은 진실을 드러내려고 애쓰는 모든 것에 대항하는 자기파괴와 공격성의 원인이 되며, 언제나 긴장과 갈등의 원인이 된다(바뎅테 160-61). 브릭의 알코올중독과 무기력, 매기에 대한 거부 또한 이러한 양상을 띠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밝혔듯이 이 극의 결말은 매기의 영웅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브릭이 겪은 정신적 상처와 상실감이 치유될 수 없다는 암시를 남긴다. 그를 침대로 끌고 가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매기에게 브릭은 “그게 사실이라면 묘한 일 아닐까?”(105)라며 슬픈 미소를 짓는다. 이는 개작에서 브릭이 매기에게 “당신 참 대단해”(132)라고 말하고 매기가 브릭을 어루만짐으로써 둘의 동침 혹은 화해를 암시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프라이스는 윌리엄즈가 이 극의 개작을 공공연히 비판하는 이유 중 하나는, 브릭이 죽은 스키퍼를 잊고 매기를 선택하는 쪽으로 기우는 개작의 결말이 윌리엄즈가 작가로서의 현실적인 성공을 추구하느라 자신의 동성애 연인인 프랭크 멀로(Frank Merlo)를 배반하는 것 같은 죄의식을 갖도록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325). 매기가 현실적인 성공을 대변하는 반면 스키퍼는 동성애적 사랑 혹은 우정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윌리엄즈가 개작의 결말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전반적인 이유는, 브릭의 동성애 문제, 즉 윌리엄즈 자신도 경험해왔고 한 집단의 문제라고까지 여기고 있는 그 문제의 상처와 좌절감이 얼마나 크고 회복하기 힘든지를, 당시 시대적 상황 및 자신의 상업적 문제와 맞물려 정직하게 다룰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III. 빅 대디 : 권위적 가부장의 전형

    흔히 윌리엄즈가 자신의 아버지를 형상화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 빅 대디는 이 극에서 브릭은 물론이고 아내 빅 마마와 모든 가족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려 하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아버지/남편상이다. 마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위력적인 남성 스탠리 코왈스키(Stanley Kowalski)처럼, 그는 왕성한 식욕, 험하고 유창한 말솜씨와 권위로 부인의 존경을 받고 있고 주위 사람들의 위선을 신랄한 현실주의로 타파한다. 가난한 남부 출신인 그는 두 동성애자인 잭 스트로(Jack Straw)와 피터 오켈로(Peter Ochello)에게서 인수한 28,000에이커의 방대한 농장의 소유주로서 큰 돈과 권력을 쥐고 있는 대부호이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이 극의 인물들에게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는, 전통적인 남성적 지배의 상징인 그는 장남인 변호사 구퍼의 교활함에 기만 당하지 않고 차남 브릭을 자신의 상속자로 결정할 정도로 단호한 판단력을 가진 인물이다. 또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가족들 앞에서도 불편한 심기를 거침없이 드러낼 정도로 자기 본위의 마초적 성향을 가진 아버지의 이미지이다.

    그는 자신의 지배와 힘에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 전형적인 가부장으로서 가족을 통제하고 있으며 그 절대적인 지위를 환기시키기 위해 폭언과 욕설도 서슴지 않는다. 내면으로부터 남성을 규정짓는 타고난 원형들인 남신들(gods) 개념을 만든 진 시노다 볼린(Jean Shinoda Bolen)의 이론에 적용시켜본다면 그는 최고 권력과 권위, 그리고 일정 영역에 대한 통치권을 가진 신 중의 신 제우스(Zeus)의 원형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고 권력을 지닌 남신이자 가부장제 가치 기준이 되는 제우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남들에게 자기 의지를 강요할 수 있다는 것(64)이며, 아들이 자기 자리를 빼앗을까봐 두려워하고 아들을 애초부터 경쟁자로 봄으로써 자신에 대한 도전을 봉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남성은 자식들의 근본을 뒤흔들어 놓아 적절한 후계자를 갖지 못할 수도 있으며 어쩌면 죽어서도 유산을 통제하려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부양자 아버지라는 본성과 왕조(가문)의 필요성에 의해 자극받은 제우스는 자식들이 자신의 의지를 계승하여 실행에 옮기도록 애쓴다(73). 그러한 점에서 제우스적 통치력을 보이는 빅 대디가 브릭에게 자신의 권력을 세습하고자 하는 욕구를 나타내며 또한 그가 가족 중 어느 누구와도 나누지 않는 마음의 교류를 원한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겠다.

    그리고 브릭과 대화하며 “난 아직도 여자 생각이 난단다. 오늘이 내 예순 다섯번 째 생일인데도 말야”(63)라고 실토하는 그의 관능적인 생명력은 성적으로 폐쇄된 브릭과 상반되는 모습을 보인다. 아내 빅 마마(Big Mama)에게 자신의 정력을 너무 허비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며 양심과 인습 때문에 욕구를 즐길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후회하는 그의 모습에서 영원히 성적으로 자유로우며 지배적이고 싶어하는 남성의 내면을 읽을 수 있다.

    여성을 유혹하고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은 바로 남성의 성공 그리고 자신감과 연결된다. 브릭이 아들을 낳지 못함으로써 남성성에 대한 의심을 사는 것과 대조적으로 빅 대디는 이미 두 아들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성과의 관계에 대한 자부심과 기대, 욕망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남성성을 추켜세울 수 있다.

    또한 이브 세지윅(Eve Sedgwick)이 제시한 남성 간의 동성사회적(homosocial) 관계라는 개념에 의하면, 남성은 “우정, 후원, 경쟁관계, 제도적 복종, 동성애적 성관계, 경제적 교환을 포함해 남성들 사이에 맺어지는 유대관계의 모든 범위”(Gayle Austin 60에서 재인용)로서의 다른 남성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는데, 이 관계 설정의 수단으로 대상화된 여성을 사용한다. 미국 연극의 많은 남성 인물들이 다른 남성과의 관계에서 복수를 하든지(오닐의 『느릅나무 밑의 욕망)에서의 에벤) 경쟁자를 이기든지(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에서의 비프와 해피) 최소한 서로의 공통의 기반을 확인하고 그들만의 유대를 구축하기 위해서 여성과의 성관계를 매개체로 이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여기서도 빅 대디는 빅 마마와 매기를 대상화된 여성으로써 대화에 등장시켜 브릭과의 유대 형성에 사용하고 있다. 빅 마마는 가부장적 위계질서에 순응하며 살아온 전통적이고 순종적인 아내이자 어머니의 전형이다. 그녀는 남편의 거칠고 난폭한 언동에도 “당신을 너무 사랑했어요! 심지어는 당신이 미워하고 심하게 대하는 것조차도 사랑했어요, 여보!”(55)라며 거 의 피학적인 애정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애정은 남편의 원초적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방적 애정이기에 그들 부부의 의사소통의 단절을 초래하고 빅 마마의 철저한 종속과 소외를 낳는다. 또한 빅 마마의 소외는 부권제 통치에서 가장 결정적인 부분인 여성의 경제적 피지배관계에서 야기되기도 하는데, 빅 대디는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가부장적 통치권을 재차 확인한다. “난 실험이고 수술이고 모조리 다 받았소―이 곳 주인이 당신일지 나일지 알아보려고 말이 오! 그런데 결과를 보니 당신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더군”(54)에서 보여지듯이 그는 자신이 경제 뿐 아닌 다른 모든 것까지 포함하는 지배자이며 주인임을 확실히 하여 아내를 침묵시킨다. 그는 “네 어머니하고 5년 전까지 같이 잤지만… 그녀가 좋았던 적은 한번도 없었어!”(64)라는 고백에서 볼 수 있듯이 빅 마마와의 성관계에 대한 혐오를 갖고 있는데, 브릭과 매기의 성관계에 대해서도 “너는 그녀[매기]와 함께 자지 않는다던데… 매기가 맘에 안 들면 내쫓아버려!”(58)라며 아내가 싫다면 과감히 관계를 청산할 것을 종용한다. 즉 브릭의 불행한 결혼생활의 원인을 즉각 매기에게로 돌리며 관계의 단절을 주장하는 그의 모습에서 여성에 대한 대상화와 성적 우위를 욕망하는 남성의 심리를 읽을 수 있다. 이는 가부장적 권력은 남성들이 여성과의 성관계에 있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실행되고 유지되어올 수 있었던 것이라는 주장(모리스 36)과도 연결된다.

    이처럼 가족 위의 군림을 통해, 아들/후계자에 대한 경쟁심과 두려움을 통해, 여성에 대한 성적이고 또한 경제적인 지배욕을 통해 빅 대디는 사회와 가정이 요구해온 전형적이고 이상적인 남성상과 강력하고 생계를 짊어질 능력이 있는 “부양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가족을 모두 이끌고 미국이라는 새 땅 혹은 서부 개척지로 떠나는 남성에게 있어서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은 남자로서 매우 중요한 의무였고 강한 아버지/남편으로서 자존심을 결정짓는 일이었다. 가정이 위기를 맞이할 때 가장은 가족을 부양하는 자신의 능력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주장함으로써 남성성을 옹호한다. 그리고 서론에서 밝혔듯이 여성성과 마찬가지로 남성성 또한 문화적인 콘텍스트 속에서 권장되는 역할 모델에 부응하기 위하여 구성되는 것이므로, 빅 대디처럼 강한 남성성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이분법적인 대조를 통해 일차적으로 “여성이 아님”을 수행하게 된다. 따라서 강인한 남성 인물은 자신의 내부에 숨어 있는 여성적인 요소를 억압하거나 다른 남성에게서 발견되는 여성성을 비난하고 폄하하거나, 혹은 여성을 억압하고 무시함으로써 자신의 남성성을 입증하고자 한다. 그리고 “남성을 낳는 것은 남성이다”(바뎅테 84)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남성다움의 쟁취는 여성이 아닌 다른 남성들로부터의 인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맥도나는 지극히 연약한 속성을 지닌 남성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남성들 앞에서 강하게 보이는 연기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빅 대디가 다른 가족과의 관계는 철저히 위선과 증오로 가득한 관계로 여기면서 유독 브릭에게만은 대화의 문을 열고자 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도, 아버지로서 또 강한 남성으로서 아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이상적 남성성이란 현실세계에서 실패하지 않기 위해 필연적으로 획득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므로 실상은 커다란 희생을 요구한다. 윌리엄즈는 현실에 적합치 못한 무기력한 남성 브릭을 상처에서 쉽사리 회복되지 못한 채 이상세계에 그대로 갇혀 있도록 설정하는 것과 병치시켜, 현실적이고 강인한 남성 빅 대디는 암에 걸려 자신의 생일날 죽음을 선고 받아야만 하는 비운의 인물로 설정하고 있다. 원작에서의 빅 대디는 2막의 끝부분에서 브릭에게 그 사실을 듣고 화를 내며 퇴장한 후 3막에서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으며 오직 무대 뒤에서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모습으로만 나타난다. 3막에서의 그의 부재하는 모습은 2막에서의 자신감 넘치고 위풍당당하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며, 특히 구퍼와 메이가 상속에 대한 기대가 지나치게 큰 나머지 빅 대디의 병의 절망적인 상태를 즐기는 듯한 탐욕스럽고 추한 모습을 내보임에 따라 더욱 초라해지는 인상을 준다. 윌리엄즈는 이상적인 남성성을 구현하지만 동시에 억압적이고 가부장적인 독재자이기도 한 빅 대디에게 그 남성성의 강요된 퍼포먼스에 대한 희생으로, 혹은 가족들을 통제한 대가로, 죽음이라는 결과물을 준다. 빅 대디는 자신의 생각 속에서만 “이 집의 왕”이었을 뿐 사실은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늙은이임이 드러난다. 마치 『세일즈맨의 죽음』의 초라한 아버지 윌리처럼 그는 더 이상 두 아들에게 아버지의 권위를 행사하거나 입증하지 못하며 두 아들 또한 그러한 현실을 잘 인식하고 있다.

    IV. 개작의 의미

    이 극에서 윌리엄즈가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바를 알기는 사실 모호한데, 그 이유 중 하나는 3막이 원작과 브로드웨이용 개작으로 두 가지가 공존하고 있고 각기 매우 다른 결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브로드웨이 판의 차이는 3막에서 다시 빅 대디가 등장하고 매기가 임신 사실을 그에게 알리는 데 있다. 빅 대디는 그것이 거짓말인 줄을 알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메이와 구퍼의 항의를 묵살한다. 또 다른 차이는 앞에서 밝혔듯이 브 릭의 성격 묘사에서 나타난다. 즉 브릭의 매기에 대한 태도가 괄목할 만한 변화를 보여 매기에게 호응하면서 끝이 나는 브로드웨이 판은 브릭과 빅 대디를 위시한 가족 모두에게 긍정적인 변화와 화해의 가능성을 내비치는 것으로 결말을 맺음으로써 원작의 회의적이고 미해결 상태로 남는 공간을 없애고 빅 대디에게도 죽음 선고가 내리는 초라함이 아닌 위대한 인간적 모습을 선사한다. 윌리엄즈는 자신은 원작을 진실에 가까운 것, 즉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선호하며 개작은 연출가 카잔의 영향력 때문에 마지못해 그 제안에 따른 것이라고 해명한다(Memoirs 169, Cat 106-107). 이 말이 과연 그의 진심인지에 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고 하지만, 사실 이 극의 개작된 3막이 여러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앞에서 밝힌 대로 브릭의 상처가 결코 쉽게 치유될 수 없는데도 공연의 효과를 위해 브릭으로 하여금 매기의 거짓말에 동조하게 함으로써 극 전체 내용의 통일성에 손상을 끼치기 때문일 것이다. 윌리엄즈는 카잔의 기분에 맞추기 위해 3막을 개조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인생을 망쳤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유는 앞서 밝혔듯 그렇게 함으로써 동성애에 관한 주제를 솔직하게 다룰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1958년에 리처드 브룩스(Richard Brooks) 감독에 의해 만들어지고 폴 뉴먼(Paul Newman)과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 그리고 벌 아이비스(Burl Ives)가 각각 브릭과 매기, 빅 대디를 맡아 연기했던 헐리우드 판 영화에서의 결말은 더더욱 파격적이다. 원작에서 빅 대디가 자신의 병을 알고 퇴장해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 것과 대조적으로 헐리우드 판에서 빅 대디는 브릭으로부터 병을 듣고 난 후 오히려 브릭과 더욱 깊은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옛 아버지를 회상하기까지 한다. 브릭은 빅 대디에게 빅 대디의 아버지가 그에게 남긴 것이 사랑임을 밝히고, 자신과 어머니 빅 마마도 돈이 아닌 사랑을 원하고 있음을 말한다. 둘은 깊은 교감 후 서로 도와 계단을 올라가고, 빅 대디는 냉대했던 빅 마마에게 다정한 모습을 보여 둘은 팔짱을 끼고 퇴장한다. 매기에게 “당신 참 대단해”라는 감탄사를 던지며 브릭은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여 영화는 둘의 키스로 끝을 맺는다.

    팔머(R. B. Palmer)는 대표적인 모더니즘 연극이었던 이 극의 동성애 주제가 카잔의 연출 과정에서 많이 흐려지고, 브룩스가 영화로 각색, 감독하면서 동성애 문제를 모조리 없애 이 극이 통속극(melodrama)화되었다고 지적한다(5). 맥카시즘(McCathyism)의 파동이 휩쓸고 지나간 1955년에 동성애 문제를 무대 위에 올리는 것은-카잔의 각색을 거쳤다 해도-위험한 일이었을 것이며, 불과 3년 후의 할리우드 영화에서 동성애 관련 대사가 거의 모두 삭제된 것도 이와 유사한 이유였을 것이다. 완벽한 해피 엔딩으로 변화한 헐리우드 판은 이 극의 원작이 당시 관객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성과 가족 이데올로기의 잣대에 의해 얼마나 많이 수정이 가해졌어야만 하는지를 암시한다.1) 그가 말하고자 했던 바가 결코 대중의 취향에 부응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었음이 주지의 사실이기에 이 극의 원작이 남기는 회의와 모호함이 그가 그리고자 했던 남성성에 대한 의문 그 자체일 것이다. 빅 대디는 강력하긴 하지만 위선적, 억압적이고 따라서 병에 걸려 죽어가며, 브릭은 순수하고 이상주의적인 동성애자이긴 하지만 따라서 무기력하고 상처에서 회복되지 못한다. 부여된 남성성의 짐이란 이렇게도 그의 상반된 유형의 남성 인물들 모두를 비극적 인물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1)윌리엄즈는 이 각색을 무척 싫어하여 줄을 서 기다리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산업을 50년쯤 퇴행시킬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www.imdb.com/title/tt0051459/trivia

    V. 나가며

    맥도나는 제임스 클리포드(James Clifford)의 말을 인용하여, 진정하고 현실적인 남성성에 대한 생각의 엄격성(rigidity) 자체가 남성이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겪는 문제점들의 원인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경직된 남성성을 좇는 것은 불운한 일이라 할 수 있는데, 남성성이라는 것이 인간 경험의 유동성을 다루는 데 적합하지 못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맥도나는 융통성만이 문화를 살아있게 하는 주된 것이고, 융통성과 다양성을 찾을 모델이 많이 있는데 왜 우리는 그토록 정체성의 개념에 있어 억지스럽고 완고한 행동들을 고집해야 하는지 묻는다(15). 서론에서도 밝혔듯이 미국이라는 나라는 끊임없이 자신을 재창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엄격한 남성성의 개념에 묶여져 왔다. 문학, 연극, 영화를 통해 남성적인 영웅을 그려오는 데 집중해온 미국 문화에 의해 오히려 전통적인 남성성은 의문과 논쟁을 야기하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 문제적이 되고 있다. 윌리엄즈는 동성애자이자 평생 정상적인 가족제도에 편입되지 않음으로써 이분법적인 젠더 역할의 외부에 존재했던 남성으로서, 그러한 남성성과 젠더 역할의 잠재적인 문제성을 일찌감치 발견하고 객관적으로 접근하며 극에서 이를 형상화하고자 한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가장 이성애적인 사람이라도, 동성애의 요소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완벽히 남자이거나 여자이지는 않다. . . . 내 경험에서는”(Savran 82)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처음으로 밝히는 인터뷰에서 한 이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남성, 여성을 구분하지 않고 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사고력은 1940-50년대 성행했던 젠더 구축의 이분법을 파기하는 데 하나의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뜨거운 양철지붕 위 의 고양이』의 브릭은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여성적 남성으로서, 외부의 압력을 의식하는 동성애 공포증을 갖고 있기에 친구 스키퍼를 죽게 만들고 현재의 자신도 무기력하고 비생산적인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빅 대디는 그와 대조되는 지배적이고 남자다운 아버지/남편이지만, 그 이른바 이상적 남성성은 비인간성과 위선을 동반하고 있기에 곧 죽음을 가져다 줄 병과 아들들의 유산 상속 싸움으로 스러져가게 된다. 주로 자신을 이입한 여성 인물들의 상처와 고통을 그리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남성 인물들이 강요받는 혹은 부재하는 남성성으로 인해 좌절하거나 무자비해지는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윌리엄즈는 남성성의 제물로 희생되는 남성들은 물론 젠더 역할이라는 부담스러운 게임에 참여해야만 하는 남녀 모두에게 동정적인 시선을 보낸다. 여기서 남성이면 남성적, 여성이면 여성적이어야 한다는, 개인의 한 성으로서의 완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문화에 대한 회의, 나아가 경직된 사회 속에서 젠더의 이분법을 타파하고 인간 내면의 본연적인 양성성을 포용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젠더 역할에 있어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해묵은 역할 분담의 개념을 깨고 ‘새롭고 조화로운 이원성’으로서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상정하는 일임을 일찍이 인식했던 듯하다. 이렇게 가장 사적이고 서정적인 극을 쓰면서도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임을 몸소 드러내는 그의 극들은 사브란의 표현대로 일면 “혁명적”(79)인 극들임에 틀림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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