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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타블로(tableau)의 영화미학 The film-aesthetic of Tableau
  • 비영리 CC BY-NC
ABSTRACT
타블로(tableau)의 영화미학

There are images, which emphasize the frontality of the two-dimensional closed frame and induce with it particular distance to the reality. This images express openly the theatricality in connection with the acting and the pictoriality in connecting with the silent-art and by so doing suggest irrational character as film images. This paper concentrates on this film images and defines it as filmic tableau (vivant).

The tableau in the theory of theater is an important structural element for the pictorial dramaturgy, which focuses on the gesture and physiognomy of actors. The result of such tableau expresses the intense impressions, which appeal to the mind of audience. The tableau in the sculpture shows as an independent performance the reviviscence through the invest of spirit. Therefore, it is regarded as a frozen happening, which is constituted pictorial or theatrical. The concept of the filmic tableau (vivant) expresses the strange stopped situation and the gesture with the physiognomy, which show mute actors, and performs the function to disjunct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oncrete physicality and the abstract conception. The tableau in here can be considered as place for the perception in the narrative of film and as a reflective attitude of the director at the same time.

The films of Rainer Werner Fassbinder and Aki Kaurismaki provide proper examples for the aesthetic of the filmic tableau. Fassbinder made the best use of the filmic tableau for the realization of his film-philosophy to integrate the art into the life. Likewise, Kaurismakis filmic handwriting is composed characteristically of the filmic tableau, which reproduces the gloomy reality of Finland with the unique melancholy. Also, this article aims to study the tableau as a film-aesthetic apparatus and analyze on the basis of this definition the films of the above-mentioned two directors.

KEYWORD
tableau , tableau vivant , tableau , Rainer Werner Fassbinder , Aki Kaurismaki , film aesthetic , erkennungsstelle , guckkasten , montrage
  • 1. 들어가는 말

    영화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최고의 감응은, 들뢰즈(G. Deleuze)의 주장에 따르면, 영화가 ‘영화적’일 때 가장 잘 드러난다. 여기서 ‘영화적인 것(the cinematic)’이란 현실의 조직화된 삶의 구조로부터 해방된 (운동/시간-)이미지들을 다른 관점으로, 즉 감독의 시점으로 설득력 있게 재조직하고, 이를 통해 관객에게 새로운 지각작용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들뢰즈는 현실의 재조직에 있어서 특히 운동- 및 시간-이미 지들에 집중한다. 우리는 보통 운동성으로부터 시간의 개념을 이해하려는 경향, 즉 시간을 다양한 행위점들을 연결시키는 것으로 이해하 고, 이를 통해 시간을 공간화하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영화 속의 시간개념은 균형 잡힌 시퀀스들 속에서 앞으로 진행할 뿐만 아니라, 시간이라는 것 자체가 본래 미래를 향한 모든 가능성들 또는 항상 개입의 여지가 존재하는 과거를 잠재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영화의 힘은 운동으로부터 파생된 시간의 개념뿐만이 아닌, 시간 그 자체에 대한 직/간접적인 이미지들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다양한 시간-/운동-이미지들의 흐름을 창의적 전체로 연결(몽타주)시킴으로서 개념적 조직의 이해관계가 얽힌 관습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이다. 콜브룩(C. Colebrook)은 들뢰즈의 이러한 영화개념을 감독의 관점을 통한 “구체화된 봄(seeing)”1)이라 규정하고, 따라서 영화의 관람은 감독의 “보기(seeing=시선)’를 본다”2)는 것으로 이해한다. 결국 영화를 대하는 관객은 감독의 상상하는 능력 그 자체를 보는 것이다.

    하지만 콜브룩은 감독의 이러한 창의적인 ‘구체화된 봄’에서도 “잠재성과 현실성이 분리된 이미지”가 존재할 수 있음을 지적하며, 이를 “비합리적인 컷들(cuts)”3)이라고 칭한다. 본 연구는 이러한 ‘비합리적인 컷들’을 주시하고자 한다. 바로 타블로(tableau)의 개념이다. 대부분의 영화들은 현실의 3차원적 세계를 카메라에 담아 2차원의 스크린에 투영시켰을 때 그 모습이 다시 3차원성을 강조할 수 있어야 비로소 그 프레임 구성을 높이 평가받는다. 하지만 어떤 영화들에는 2차원적으로 닫힌 프레임의 정면성을 강조하며 현실성과의 거리를 의도적으로 유도하는 장면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특히 (배우의 연기라는 측면에서) 연극성과 (무언의 예술이라는 측면에서) 회화성을 공공연히 드러내며 비영화적인, 그러니까 영화 이미지로서 비합리적인 특성을 제시한다. 타블로를 통한 이미지가 바로 그러한데, 낯설게 정지된 상황 및 무언(無言)의 캐릭터가 제시하는 표정과 몸짓(제스처)을 담아내는 타블로는 구체적이고 육체적인 것과 추상적이고 구상적인것 사이의 분리된 관계성을 드러내는 영화적 장치로 기능한다. 여기서 타블로는 줄거리로부터 유도되는 것을 초월하는, 육체적인 움직임과 동시에 성찰적 태도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시각적 이미지의 상대적 배열의 분석에 있어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파스빈더(R. W. Fassbinder)와 카우리스마키(A. Kaurismaki)의 영화들은 영화적 장치로서의 타블로 개념을 위한 훌륭한 예를 제시한다. 짧은 생애 동안 누구도 모방하기 힘든 창의력을 선보였던 독일의 파스빈더 감독은 삶과 예술을 통합하고자 했던 자신의 영화철학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타블로의 영화미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특히 비관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신의 (성적)정체성의 발견을 위한 성찰적 영화작업에 집중하면서 양식화되고 도발적인 이미지들을 창작했다.4) 파스빈더와 마찬가지로 영화아카데미에 지원했다가 고배를 마신 경험이 있는 카우리스마키도5) 영화창작 기법을 스스로 익히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필체를 만들어갔는데, 그 중심에는 바로 타블로 장치가 있다. 핀란드의 암울한 현실을 특유의 멜랑콜리를 바탕으로 재현하는 그의 영화들이 프랑스를 주축으로 하는 중부유럽의 예술영화 관객(Arthouse-audience)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두터운 관객층을 보유하고 있는 데는 타블로의 영화미학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본 연구는 이들의 영화에서 발견되는 타블로 장치들을 살펴보고, 영화 속 내러티브의 콘텍스트에서 그 이미지들이 제시하는 의미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이에 앞서 영화 미학적 장치로서의 타블로 개념의 정의와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는 과정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클레어 콜브룩, 백민정 역. 『질 들뢰즈』, 태학사, 2004, 56쪽.  2)위의 책, 58쪽.  3)위의 책, 60쪽.  4)배상준, 「파스빈더와 영화의 자기 반영성」, 『문학과 영상』 11권 1호, 51-52쪽 참고.  5)Sand, Riikka, Das Land des filmemachers Aki Kaurismäki. Zum Finnland-Bild in Kaurismäkis Der Mann ohne Vergangenheit. AV Akademikerverlag, Saarbrücken, 2011, 29쪽 참고.

    2. 타블로(tableau)의 개념

    타블로는 본래 살아 있는 배우의 움직임이 마치 회화에서처럼 정지된 혹은 경직된 상태의 모습을 뜻하는 용어로서, 이 개념의 시초는 중세시대의 연극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때의 타블로는 한 장면의 마지막에 효과적인 결말을 제시하는 형식으로 제시되며, 따라서 흔히‘장’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특히 타블로는 공연의 마지막 장면에서 “개인이나 영웅을 숭고한 영역으로 찬미한다는 의미에서의 신격화”6)에 주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타블로는 또한 “한 막 도중에 일어나는 모든 무대장치(décor)의 변화에 의해 발생되는 새로운 장면”7)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며, 따라서 연극무대 이미지의 총체를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개념은 종교적 예술과 교회의 연극 그리고 민속학적 행진이나 행렬 등 다양한 곳에서 그 사용흔적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단일한 근원을 찾아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블로 개념의 핵심적 공통분모를 지적할 수 있는데, 이는 정지된 회화에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려는 시도, 또는 이미지나 장면을 실제 인물을 통한 물질적인 3차원성으로 변환시키고자 하는 아이디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타블로는 주로 살아있는 인물을 통한 이미지의 무언의 배치 그리고 부동(不動)의 나열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러한 개념 정의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에 시작되었다고 알려진다.8) 또한 이 타블로의 개념은 ‘살아있는 그림’이라는 의미의 ‘타블로 비방(tableau vivant; 활인화(活人畵))’, 즉 19세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유럽의 사교적인 모임이나 귀족적 연회 또는 서민적 살롱 등에서 분장한 사람들이 저명한 연극의 장면이나 회화를 무언의 정지된 그림으로 연출하는 일종의 ‘놀이’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1) 타블로 비방(tableau vivant)

    바르크(J. Barck)는 타블로 비방에 관한 연구서에서 그 정의를 ‘육체화를 통해 생명력을 부여받은 회화’로 규정하는데, 이 개념을 편의상 줄여서 일반적으로 타블로라 칭한다고 설명하고 있다.9) 타블로 비방 에서는 움직임의 부재(不在)와 무언, 장면구성에서의 디테일, 조명처리와 질감 그리고 회화에 의해 주어진 관찰시점의 재구성 등을 관찰할 수 있으며, 이 모든 요소는 모방의 성공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바르크가 생각하는 타블로 비방의 가장 근본적인 핵심은 마치 그림처럼 여겨지지만, 동시에 - 그 그림의 모방에 있어서 - 살아있는 육체를 사용한다는 사실에 있다. 즉 타블로 비방의 미학은 자연의 모방에서 예술의 모방으로의 이동변수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타블로 비방을 대하는 관람자는 이미지에 생명력을 부여하고자 하는 소망에서 증가하는 생명의 인위성으로의 치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생생함과 인조성, 타블로 비방이 토대로 삼고 있는 이 두가지의 명제는 일종의 형용모순이다. 타블로 비방의 개념은 ‘움직임이 없는 살아있음’ 또는 ‘말이 없는 생명력의 부여’라는 역설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역설은 연극과 조형미술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연극공연에 있어서 타블로 비방은 살아 있는 배우들의 말과 움직임의 - 물론 관객이 극적 흐름을 놓치지 않을 정도의 짧은 - 멈춤에 의해 그 인위성을 표현하고, 조형미술에서의 타블로 비방은 그림의 내용을 사람의 동작으로 모방함으로서 회화에 영혼을 부여하고 이를 통해 소생이라는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타블로 비방은 따라서 살아 있는 배우가 그림으로 변환되거나 또는 회화가 살아있는 유형물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타블로 비방은 회화를 지시하면서 동시에 실제로 살아있는 것이다. 이로써 타블로 비방은 삶과 인위성의 완벽한 조화라는 예술의 핵심논제를 실현하는 듯 보인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크는 타블로 비방을 연극적 표현방법과 조형미술의 사이에 위치하는 하나의 독립적인 “퍼포먼스 예술(performancekunst)”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10)

       2) 연극의 타블로 - 회화적 극작술(pictorial dramaturgy)

    연극에서의 타블로 개념은 디드로(D. Diderot)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그의 연극이론에서 타블로는 공연의 중요한 구조적 요소로 여겨진다. 여기서 타블로는 막(幕) 대신 드라마투르기적 기능의 수행이라는, 연극적 표현방법에 있어서 전적으로 새로운 과제를 실현하는 것이다. 김용수는 디드로의 18세기 연극이론의 핵심이 타블로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설명하는데, 그의 “회화적 극작술(pictorial dramaturgy)”은 강렬한 감정이 농축된 극적상황을 대사의 도움 없이 회화적으로 처리하는 “따블로(tableau)의 미학”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11) 디드로에게 있어서 타블로란 “무언의 장면(mimed scene)”으로서 대사 없이도 극적 상황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무대광경을 말하며, 이는 또한 “극의 진행을 잠시 멈춘 상태에서 세심한 인물배치와 표현력 있는 제스처로 정서적 상황을 시각적으로 요약”하는 것을 의미한다.12) 이렇게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극작술에서 탈피한 “회화적 연극(pictorial drama)”13)과 이를 완성시키는 타블로의 미학은 극적 진행에 있어서의 주요 순간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하며, 주제적 통일성을 시각적으로 형성한다. 따라서 줄거리 영역에 따라 구분되는 막과는 달리 스스로 닫힌, 그러므로 다음에 오는 장면으로부터 명확하게 분리되는 타블로는 극적 진행에 있어서 긍정적인 휴지기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렇게 장면의 ‘프리징(freezing)’을 통한 휴지기는 관객의 주의력을 극적 전개의 시간적 연속성에서 탈피시키고, 대신 경이로움의 순간과 놀라움의 센세이션으로 돌리게 되는 것이다.

    타블로를 활용한 회화적 연극은 대사를 통해 관객의 귀에 의존하는 (신)고전주의적 연출에서 벗어나며, 대신에 관객의 눈에 호소하며 보는 즐거움을 배가시킬 수 있다고 디드로는 주장한다. 훌륭한 회화적 무대는 대사라는 언어적 수단이 가진 표현가능성을 능가하는 강렬한 열정을 지녔으며, 이때 타블로 이미지들은 보다 많은 생각을 함축적으로 전달함으로서 관객을 공연에 더 집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사학적 수단보다는 회화적 측면을 강조하는 타블로는 때에 따라 “상황(situation)”14)이란 용어로 대체되기도 한다. 여기서 ‘상황’이란 연극의 회화적 효과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드라마투르기의 주요순간들이 시각적으로 구현됨을 의미한다. 한 눈에 극적 맥락이 전체적으로 드러나는 이 ‘상황’은 사건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축적으로 담겨있는, 그야말로 “충만한 순간(pregnant moment)”15)인 것이다.

    타블로의 회화적 배치에서 언어를 대치하는 가장 결정적인 것은 바로 배우의 제스처(gesture)이다. 제스처는 강렬한 감정의 전달수단일 뿐만 아니라 영혼의 상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자연언어이며 동시에 시각적 기호이다. 타블로에서의 배우들은 얼굴(=인상 physiognomy)과 더불어 육체를, 즉 보다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표현의 징표인 몸동작을 강조함으로서 정서적인 리얼리티를 외형적으로 표출하게 된다. 따라서 관객은 배우들의 제스처를 통해 그들의 정서와 사고를 포착하게 되는 것이다. 타블로에서의 제스처를 통한 장면구성은 마치 영화의 스톱모션(stop motion)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주제의 충만함을 양식화하여 극화하는 타블로만의 의미전달 방식이다. 충만함의 그림으로서 타블로는 특히 멜로드라마에서 효과적으로 쓰이는 장치가 될 수있다. 왜냐하면 멜로드라마는, 디드로의 주장에 따르면, 스토리 진행의 주요 순간순간마다 설정되어 있는 감정의 타블로로 이루어진 회화적인 연극이며, 그 결과는 관객의 뇌리에 남는 양식화된 그림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멜로드라마에서 사용되는 타블로는 따라서 “극의 정서적 효과를 극대화”하게 되고 그 결과물은 당연히 “‘가슴에 호소’하는 강렬한 ‘인상들(impressions)’”16)인 것이다. 따라서 디드로가 생각하는 완벽한 회화적 연극은 인상적인 타블로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는, 즉 마치 무성영화처럼 “눈으로 들을 수 있는”17) 연극인 것이다. 타블로를 통해 ‘눈으로 들 수 있는’ 연극은 결국 영화적 타블로로의 발전에 기여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연극에서의 타블로의 의미와 목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변해왔는데, 바르트(R. Barthes)는 ‘디드로와 브레히트(B. Brecht) 그리고 에이젠슈테인(S. Einstein)’에 관한 글에서 변모된 타블로의 개념을 언급한다. 바르트는 연극에서의 타블로가 논박의 여지가 없는, 모든 부수적인 요소들을 무의 영역으로 밀쳐 내버리는 “명확한 테두리를 가진 깨끗한 단면”이라고 규정한다.18) 이러한 타블로의 이해는 디드로의 연극이론의 총체적인 미학, 즉 연극은 회화이미지와의 동일시에 의해 관객의 눈에 호소하며 보는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타블로의 연속이라는 이론에 전적으로 부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정돈되어 꾸며진 신(scene)으로서 타블로는 매우 단면적이고, 전적으로 시각적이며 그리고 관념적인 의미의 생산을 공시하고자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브레히트의 서사극, 에이젠슈테인의 쇼트들은 바로 타블로”19)인 것이다.

    하지만 바르트는 디드로의 연극적 타블로의 개념이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epitsches Theater)에 이르러 변형된 점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디드로는 타블로를 통해서 드라마적 압축과 줄거리의 조화로운 종합의 제시를 구현하고자 했지만, 브레히트는 의미의 지배자 또는 통치권의 소유자로서의 배우가 ‘거리두기’를 실현하기 위해 정지된 그림인 타블로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디드로에게 있어서 ‘극의 정서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관객의 ‘가슴에 호소’하기 위한 타블로가 브레히트에게는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어떤 것”20)을 말하려 하는, 그러므로 결국은 “관객에게 비판받아야 하는”21) 타블로로 변모된 것이다. 따라서 디드로의 타블로가 ‘인상적’이라면, 브레히트의 “타블로는 지적이다.”22) 브레히트에게 있어서 타블로는 관객의 비판적인 관점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서사기법의 미완적 파편화인 것이다.

       3) 조형미술의 타블로 - 타블로 조각(tableau sculpture)

    ‘육체화를 통해 생명력을 부여받은 회화’라는 타블로의 개념정의에 있어서 조형미술과의 밀접한 관계성은 이미 언급되었으며, 또한 타블로는 삶과 인위성의 완벽한 조화라는 예술의 핵심논제를 실현하는 듯 하다고 설명한 바 있다. 조형미술, 특히 조각에 있어서의 타블로는 이렇게 연극과 회화 사이에 위치하는 독립적인 퍼포먼스로서 영혼의 부여를 통한 소생이라는 특성을 명확히 드러낸다. 주경란은 “타블로 조각(tableau sculpture)”23)에 관한 연구에서 타블로를 무대 위에 인물과 사물을 배치하여 얻어지는 극적행동의 동결행위라고 정의 내린다. 따라서 ‘타블로 조각’이란 “무대미술처럼 전체적인 장면을 연출해 내는 조각”24)을 일컫는 말로서, 살아 있는 인체로부터 직접 주조한 석고인물을 “‘회화적’ 또는 ‘연극적’으로 구성시킨, 즉 ‘동결된 해프닝(frozen happening)’”25)이라 할 수 있다.

    드라마틱한 순간을 시간적 틀 속으로 동결하여 묘사하는 의미에서의 타블로 조각은 이미 1960-70년대에 앗상블라주(assemblage)나 팝아트(pop art)와 같이 예술과 삶의 경계를 허무는 혼합매체예술의 등장에 힘입어 그 태생의 환경이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술, 특히 미술 속으로 삶을 끌어들여 실재를 추구하는, 또는 생활의 오브제가 예술영역에 영입되는 이러한 실험들은 바로 예술의 관람환경이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타블로 조각이 배치된 공간 안에서 관람자는 연출된 조명과 구성물들 사이를 오가며 연극적 공간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타블로 조각은 살아 있는 배우를 배제하기 때문에 연극은 아니지만, 타블로 조각의 구성환경을 경험하기 위해 관람자가 직접 무대 공간 안으로 들어가서 시간을 두고 경험하기에 ‘연극적’이다. 타블로 조각은 관객의 능동적인 시공간 구조의 경험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타블로 조각이라는 조형미술에서의 새로운 시도는 전통적으로 정적인 관람환경을 파괴하고, 시공간적 구성요소의 경험적 배열이라는 원칙을 통해 참여미학을 강조하게 된다. 이를 통해 새로운 경험의 예술, 즉 “관람자의 시간경험이라는 과정예술”26)의 차원에서 타블로 조각은 회화적이면서도 동시에 연극적이고, 평면적이면서도 곧 3차원적 작품을 의미한다.

    6)Brauneck, Manfred / Schneilin, Gerard, Theaterlexikon. Begriffe und Epochen, Bühnen und Ensembles. rowohlts enzyklopädie, Reinbeck bei Hamburg, 1992, 903쪽.  7)송기형, 「조르주 멜리에스의 영화 <달나라 여행>과 쥘 베른의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 비교연구: 원작 논란을 중심으로」, 『한국프랑스학논집』 55집, 2006, 398쪽에서 재인용.  8)Barck, Joanna, Hin zum Film, Zurück zu den Bildern. Tableaux Vivants: Lebende Bilder in Filmen von Antamoro, Korda, Visconti und Pasolini, Bielefeld, 2008, 19쪽 참고.  9)Ibid, 21쪽 참고.  10)Ibid, 19쪽.  11)김용수, 「회화적 극작술 (Pictorial Dramaturgy)의 태동 - 디드로의 연극이론과 19세기 멜로드라마를 중심으로」, 『한국연극학』 21호, 2003, 258쪽.  12)위의 논문, 259쪽.  13)위의 논문, 258쪽.  14)위의 논문, 261쪽.  15)김용수, 앞의 논문 260쪽에서 재인용.  16)위의 논문, 264쪽.  17)위의 논문, 274쪽.  18)Barthes, Roland, ‘Diderot, Brecht, Eisenstein’, Filmkritik, 1974, 497쪽.  19)Ibid, 497쪽.  20)Ibid, 같은 쪽.  21)Ibid, 500쪽.  22)Ibid, 497쪽.  23)주경란, 「조지 시걸의 ‘타블로 조각’연구: 해프닝과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현대미술사 연구』 9, 1999.  24)위의 논문, 58쪽.  25)위의 논문, 같은 쪽.  26)위의 논문, 같은 쪽.

    3. 영화적 타블로 - ‘지각의 위치’

    주지하다시피 영화사의 초기에는 연극용어가 많이 차용되었다. 타블로라는 개념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뤼미에르 형제(A. & L. Lumiere)와 멜리에스(G. Melies)의 초기작품들에서부터 하나의 영화용어로 사용되었다. 이 당시의, 즉 영화언어로서의 편집이 탄생하기 이전의 영화들은 철저히 고정된 카메라에 의해 기록되는 형식이었으며, 따라서 각 신들은 회화나 연극처럼 정적인 프레임을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장면을 타블로라고 일컬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쇼트와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타블로는 단순히 영화의 기술적 미완성성을 모면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뿐만 아니라, 영화연출을 위한 장치로도 여겨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송기형은 타블로를 “연출의 개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초기 프랑스 영화에서 극영화라는 명칭 대신에 “film à tableaux”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27) 실제로 멜리에스는 자신의 영화들을 타블로로 구분하고, 각 타블로마다 간략한 해설을 추가했는데, 예를 들어 <달나라 여행>(Le Voyage dans la lune, 1902)의 경우는 ‘30개의 타블로로 이루어진 위대한 스펙터클에 대한 작품’(“pièce à grand spectacle en 30 tableaux”)28)이라고 소개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멜리에스에게 타블로는 극적 전개에 있어서 시공간의 각 단계를 연속적으로 재현하는 영화연출을 위한 수단이다.

    피넬(V. Pinel)도 마찬가지로 타블로를 영화적 연출을 위한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몽타주가 부재했던 시기의 영화들은 “광경(vue)과 타블로(tableau)”29)라는 두 가지 재현원리를 통해 이루어져있다고 설명한다. 그가 주장하는 ‘광경’과 ‘타블로’의 구분기준은 이미지가 제시하는 시공간의 시각화에 있다. ‘광경’이 그야말로 생생한 삶의 포착을 위한 다큐멘터리적 재현이었다면, 타블로는 영화적 이미지, 즉 움직이는 쇼트들의 시각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창기의 극영화들은 극적 전개의 한 단계를 제시하는 타블로들의 연속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며, 이때의 타블로는 인물의 중앙배치라는 무대장면의 엄격한 규범을 따르는 원시적 재현방식을 넘어서는 연출의 기능을 했다는 것이다. 타블로의 연속은 무대설치와 연기지도를 포함하는 연극적 관점에서 관객의 시점을 취할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한 순간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공간과 시간의 자율적인 한 단위까지 재현하기 마련이다. 결국 타블로는 일관성 있는 영화적 재현의 한 방법이 되었고, 독립적인 표현기법으로 제시됨으로서 자립성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현대의 극영화에서 사용되는 타블로를 바르크는 “회화적인 (piktorale)”인 것과 “동화된 영화적(assimilierte filmische)”인 것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그는 이 두 가지 기본유형이 서로 혼용되고 또 다양하게 변형되며 등장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30) 여기서 ‘회화적인 타블로’는 정적인 것으로, 그리고 ‘동화된 영화적인 타블로’는 유동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전자는 경직된 모방 또는 우리가 흔히 프리즈 프레임(freeze frame)이라고 칭하는 형태로서 회화와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드러낸다. 이는 앞서 살펴본 ‘육체화를 통해 생명력을 부여받은 회화’로서의 ‘타블로 비방’의 개념과 일맥상통하며, ‘동결된 해프닝’으로서의 타블로 조각과도 그 핵심을 공유하고 있다. 반면에 후자는 캐릭터의 고정된 회화적 구성과 장면의 배치가 영화적 미장센에 의해 동화되어 움직이는 이미지(들)로의 유동적인 변환을 취한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유동적인 변환이라는 것은 회화와 영화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의미하는데, 따라서 영화적 타블로는 디테일에 부합하는 모방이 아니라 시공간의 경험이라는 모티브까지 함께 제시하는 속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타블로의 고정된 회화라는 단독적 위치가 무너지고, 동시에 영화 캐릭터의 연기와 함께 조화를 이루면서 일종의 “삼투적인 과정”31)을 통해 영화적 이미지로 변환되는 것이다. 이 ‘동화된 영화적 타블로’는 위에서 디드로가 연극의 타블로에서 주장했던 사건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축적으로 담아내는 ‘충만한 순간’으로서의 타블로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특히 관객의 관심을 사건의 연속성에서 탈피시켜 경이로운 센세이션으로 돌리게 하고, 가슴에 호소하는 강렬한 인상으로 극의 정서적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연극적 타블로의 본질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회화적으로 고정된 프레임이면서 동시에 시공간의 경험을 제시하는 이미지 그리고 이 둘 간의 ‘삼투적인 과정’을 통한 이 영화적 타블로의 개념은 서론에서 언급한 들뢰즈의 육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사이의 관계로서 시각적 기호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들이 공유하는 의미는 들뢰즈가 운동-이미지를 설명하면서 제시하는 “감화-이미지(Image-affection)”32)를 통해 구체화될 수 있다. ‘감화-이미지’란 외적인 움직임을 제시하는 것과 내적으로 반응하는 것 사이의 틈새를 제시하는 이미지로서, - 특히 에이젠슈테인의 - 클로즈업(close-up)이 이에 해당된다. 클로즈업은 근접화면이면서 동시에 얼굴(physiognomy)이고, 따라서 특정한 유형의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모든 이미지들의 구성요소이며, 결국 표층이면서 동시에 그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열정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감화-이미지는 “철학과 회화를 동시에 가로지르는 열정”33)으로서 전체 영화에 대한 감동적인 독해를 제시하며, 결국 감독의 성찰적 자세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타블로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 미학적 장치로서 타블로는 각 배우와 소품을 프레임 속에 배치시키고, ‘감화’나 ‘열정’ 또는 ‘경이로운 순간’ 등과 같이 특수한 시각적 표현을 목적으로 하는 장면구성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이때 회화의 수직적 축은 관객의 관점을 향하게 되고, 이는 중립적인, 즉 거리를 두는 시선을 자아낸다. 이 시선은 제한된 공간이해를 특징으로 하는 연극의 전통적 상황극과 더욱더 밀접한 관계를 드러내게 된다. 이렇게 영화 속의 고유한 행동공간에 두드러짐을 부여함으로서 타블로는 이미지-지시라는 특수한 수용방식을 제시하고, 하나의 특수한 시청각적 집중력을 획득한 영화적 타블로는 결국 관객에게 이미지 해석을 요구하게 된다. 바르크는 영화적 타블로의 이러한 기능을 “일종의 지각의 위치(Erkennungsstelle)”34)로 이해하고 있다. 지각의 위치로서의 영화적 타블로는 연극적 타블로의 - 그것이 ‘인상적(디드로)’이던 ‘지적(브레히트)’이던 혹은 ‘감화적’(들뢰즈)이던 간에 - ‘충만한 순간’이나 또는 회화에서의 타블로가 의미하는 ‘동결된 해프닝’의 의미 역시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영화적 타블로가 제시하는 지각의 위치는 운동-이미지(들)의 연속성 속에서 하나의 방해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사적인 측면에서 타블로는 영화의 내러티브 모델을 확장시키는데, 즉 문화적으로 다르게 코드화된, 따라서 인상적이고도 반영적인, 감정적이면서도 지적인 이미지가 새로운 서사운반체로서 자리매김 한다는 것이다. 타블로는 따라서 영화가 관객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이며, 이는 곧 의미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입문서적인 자체를 취하는 것이다.

    영화적 타블로는 영화 이전의 구성미, 즉 키네마토그래프적 움직임의 저편인 회화성과 연극성(theatricality)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시공간성을 영화 속으로 운반하는 다른 이미지의 공존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영화적 타블로는 의미변수를 발생시키는 해석의 함정일 수도 있으며, 영화이미지가 제시하는 명쾌함과 확고한 의미부여를 부정할 수도 있다. 특히 영화적 타블로가 회화처럼 모든 것들을 이미지 속에 형상화하려는 지나친 욕심을 낼 때 더욱 그러하다. 모든 타블로에 해당되는 관념적인 의미는 최종적인 의미가 아닐 수 있으며, 이를 통해서 꿈과 현실 또는 상상과 사실이라는 절대적 개념들의 결합이 더 이상 구별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영화적 타블로는 오래된 회화적 구성의 단순한 이미지 인용으로 기능하는, 따라서 단지 새로운 클리셰의 탄생을 초래하는 메타포는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적 타블로가 타블로가 회화와 연극 그리고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충분히 유동적인 상태로 유지함으로서 클리셰 형성에 필요한 자기명료를 거부한다면 그러한 의문을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27)송기형, 앞의 논문, 398쪽.  28)위의 논문, 398쪽에서 재인용.  29)벵상 피넬, 심은진 역, 『몽타주: 영화의 시간과 공간』,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8, 17쪽.  30)Barck, op. cit, 59쪽.  31)Ibid, 같은 쪽.  32)질 들뢰즈, 유진상 역, 『시네마 I. 운동-이미지』, 시각과 언어, 2002, 168쪽.  33)위의 책, 170쪽.  34)Barck, op. cit, 67쪽.

    4. 파스빈더와 카우리스마키

       1) 파스빈더의 타블로

    타블로는 파스빈더의 작품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독창적인 영화필체에서 핵심을 차지하는데, 특히 자신의 연극을 실험적으로 영화한 초기작 <카첼마허>(Katzelmacher, 1969)에서 두드러진다. 전후 독일의 청년 사회에 만연해 있는 주체성의 상실과 이에 따른 소통의 부재를 비판적 시각으로 제시하는 이 영화에서 그 주제의식을 형상화하는 결정적인 장치가 바로 타블로인 것이다. 한 무리의 청년이 집 앞의 난간에 기대어 전혀 대화를 나누지 않은 채 서 있는 모습을 담아내는 장면들은 전형적인 영화적 타블로로서, 커뮤니케이션의 불가능성을 고정된 회화처럼 구성하고 있다.(그림 1, 2) 이렇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일종의 “머그숏(mug-shot)”과 유사한 이미지만을 제시해주는 장면들을 보드웰(D. Bordwell)은 “건달들의 타블로”35)라 지칭한다. 여기서 보드 웰의 타블로에 대한 이해는 디드로가 설명한 정서적 상황을 시각적으로 요약하는 ‘무언의 장면’과 의미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이 타블로는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라는 극적진행의 주요순간을 한 눈에 드러내는 함축적인 순간인 것이다.

    정적인 카메라를 통해 이차원적으로 동결된 타블로의 미학은 전후의 실업세대의 좌절감과 욕구불만이 결국 공격적인 성향을 낳기 마련이라는 사실 역시 여과 없이 드러내는데, 이는 외국인 노동자와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있는 독일 청년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림 3) 외국인 노동자가 독일사회로 편입되면서 자국의 청년들은 적대감이 가득 찬 무리로 발전하는데, 이 무언의 타블로는 출구 없는 궁지로 몰린 이들은 폭력과 착취의 메커니즘을 발동시킬 수밖에 없다는 독일 사회의 ‘상황’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렇게 타블로는 사회 현실의 시대적 상황을 강조하는 ‘충만한 순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립과 반목으로 점철된 사회는 감정의 자본주의를 부추기게 되는데, 금전적 대가로 친구들끼리 몸을 사고파는 모습이 타블로를 통해 강조되고 있다.(그림 4) 이러한 감정착취의 메커니즘은 인간의 소외현상을 동반하는데, 이 또한 집단따돌림 당하는 개개인을 강조하는 타블로 장치들을 통해 명시되고 있다. (그림 5) 이 타블로들은 소통의 부재에 따른 청년세대의 외로움이라는 극의 정서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이로 인한 인간관계 내의 가해자-희생자라는 메커니즘을 ‘가슴에 호소’하는, ‘강렬한 인상들’인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김용수의 주장처럼, 인간정신의 실체는 신체의 동작에 반영되고 이를 전달하는 데는 구두 언어보다 외적인 기호, 특히 제스처가 더 적합하다. 제스처, 즉 “강렬한 감정의 전달수단이며 동시에 인간영혼의 상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시각적 기호”36)는 강렬한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표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타블로의 핵심을 구성한다. 외적으로 구체화된 표현으로서의 타블로, 이것은 강렬한 자연언어 중 하나인 제스처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프라이부르크(Anne-Marie Freybourg)도 “추상적인 타블로”를 언급하는데, 파스빈더는 <카첼마허>에서 타블로를 통한 “의도적인 안티-할리우드의 태도”를 취하며 독일의 청년사회를 국카스텐(guckkasten)의 무대로 변형시키고 있다는 것이다.37) 전후 문화적 주체성의 상실과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독일인의 가치관의 혼란이라는 이슈들이 대두되기 시작했던 1960년대 후반은 파스빈더가 영화감독으로 활동을 시작했던 시기이며, 따라서 이러한 시대정신에 입각한 다양한 문화예술적인 노력들이 그의 작품세계에 그대로 녹아들어가 있다. 즉 그의 영화들은 독일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문제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장치는 바로 타블로인 것이다.

    가치관의 혼란과 그에 따른 소통의 부재라는 청년사회의 한 단면을 형상화하는 파스빈더의 타블로는 <사계절의 상인>(Der Händler der vier Jahreszeiten, 1971)에서도 이어진다.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의 내러티브 구조 위에서 독일의 전형적인 소시민 사회 내에서 기능하는 인간관계의 억압적 메커니즘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는데, 특히 관습적인 남성-여성의 역할구도의 모순과 그 치부들을 사회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최대한의 감정이입을 추구하는 전통적 멜로드라마의 양식에서 탈피하고, 대신 반심리적 양식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안티-멜로드라마(anti-melodrama)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반정서화의 표출을 위해 파스빈더가 사용하는 영화적 장치가 바로 타블로다.

    집안의 억압적 메커니즘에 굴복해 기술자로서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한스는 과일장수로 살아간다. 어느 날 한스는 우연히 첫사랑과 재회하게 되고, 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한 한스의 부인 이름가르트는 질투심과 소외감에 빠져 절망한다. 이때 그녀의 심리 상태는 딸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는 이차원적 타블로에 의해 형상화된다.(그림 6) 이 타블로는 극의 진행이 잠시 멈춰진 상태에서 세심한 인물배치와 캐릭터의 제스처는 정서적 상황을 시각적으로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허무함을 술로 달래며 살아가는 한스를 찾아 술집에 온 이름가르트를 반기는 것은 다름 아닌 남편친구들의 따가운 눈길, 즉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적 시선이다. 스톱 모션과도 같이 정지된 상태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의도적으로 프레임의 곳곳에 정확히 배치된 무언의 남성들의 모습은 마치 무성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 타블로를 통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그림 7)

    심근경색을 앓게 된 후 한스는 전우(戰友)였던 하리와 동업을 시작하는데, 그는 한스의 자리를 대체하며 가정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온다.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한스가 음주와 폭력으로 빠져들어가자, 이를 피해 이름가르트는 친정으로 돌아간다. 부인을 찾아 처가에 온 한스를 앞에 두고 이름가르트는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이혼하겠다고 소리치고, 한스는 천가의 온 가족들과 몸싸움을 펼치며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린다. 이때 부인의 식구들이 한스를 쳐다보는 모습, 즉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듯 경직된 제스처와 표정연기는 일종의 연극적으로 ‘동결된 헤프닝’으로서 놀라움의 센세이션을 제시 하는 전형적인 타블로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한스를 억압하는 온 가족의 시선은 프리즈 프레임이 제시하는 휴지기를 통해 안티-멜로드라마 속의 의미심장한 ‘지각의 위치’를 제시하는 것이다.(그림 8)

    예술의 핵심적 기능을 감흥으로 파악하는 디드로에 의지하여 김용수가 타블로의 극작술이란 회화적 센세이션을 통해 감정적 효과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따라서 영화예술의 타블로는 회화적 센세이널리즘을 대사가 아닌 연기를 통해, 특히 본능적이고 동물적 삶의 지표인 제스처를 통해 실현한다. 결국 타블로는 모든 사람들이 눈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이며, 마치 무성영화처럼 눈으로 들을 수 있는 연기인 것이다. 파스빈더의 멜로드라마는 영화적 관습보다 더 큰 제스처로 내적인 감정과 영혼을 외적으로 드러내기에 극도로 과장된 연기양식을 취했는데, 이때 사용되는 것이 바로 타블로의 미학이다. 사회적 메커니즘의 억압에 대한 저항을 표출하는데 있어서 대사는 부차적이다. 무언의 제스처가 실제의 삶에서는 감히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을 과감하게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파스빈더는 비전문 배우들을 선호하는데, 그들의 카툰(cartoon) 캐릭터와 유사한 제스처와 광대와도 같은 어색한 연기방식은 일종의 역할론을 상기시킨다. 특히 감정이입을 통한 심리적 동화를 배제하고 인용하는 듯한 제스처는 브레히트의 소외이론을 연상시킨다. 물론 타블로의 제스처가 브레히트의 유산이기는 하지만, 거리두기를 통한 지적인 비판이 아닌 정서적 효과의 극대화를 위한 인상적 시각화에 그 목표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 차이점이 있음을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따라서 파스빈더의 타블로가 제시하는 연기는 서사극의 교훈적 이데올로기에 부합한다기보다는 “보여지고자 하는 욕망”38)에 사로잡혀 있다고 볼 수 있다. 타블로의 연기는 결국 사회적으로 상호작용하는 틀 안에서 관찰되고, 정서적으로 충만함이 인지되길 바라는 하나의 의도적인 행위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지각의 위치’를 제시하는 기능을 하는 파스빈더의 타블로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Angst essen Seele auf, 1973)에서 보다 핵심적인 영화장치로 부각된다. 이 영화는 모로코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 알리와 그보다 25살 정도 많은 독일 부인 에미간의 사랑 그리고 이들을 억압하는 사회의 위선적인 시선이라는 다문화 시대의 사회문제를 다룬 전형적인 파스빈더식 안티-멜로드라마다. 여기서 사랑이란 개인 간에 작용하는 감정착취의 수단이며 동시에 억압과 종속이라는 부작용을 달고 다니는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이라는 주제를 구체적으로 시각화하는 장치가 바로 동결된 순간의 타블로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타블로로 장식되어 있다. 늦은 밤 에미가 비를 피해 들어간 곳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술집인데, 그녀를 반기는 것은 동결된 타블로를 통한 그들의 따가운 시선이다. 이는 외국인을 대하는 독일인의 적대적 태도가 역전된 상황으로, 외국인 고유의 영토 공간인 이곳에서 자국인 에미는 역전된 사회적 시선을 통해 억압받고 있다. 프레임의 적재적소에 배치된 외국인 노동자들은 적대적 제스처를 취하며 동결되어 있고, 따라서 육체화를 통해 생명력을 부여받은 회화처럼 억압적 사회의 시선을 명료하게 형상화하고 있다.(그림 9) 에미가 알리와의 결혼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자식들을 불러 모은 상황 역시 타블로 장치로 시각화된다. 집의 거실에서 어머니의 새 남편을 소개받은 자식들은 말 그대로 ‘무언의 장면’으로 빠져든다. 프레임의 왼쪽에 전경화 되어있는 알리의 팔과 손가락의 반지 뒤로 말을 잃은 자식들의 제스처와 시선이 후경을 가득 채우며 무언의 타블로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이 커플을 향한 그들의 적대적인 눈초리는 수 초간 동결된다. 일종의 가족사진처럼 구성된 이 타블로는 다문화 가정을 향한 사회적 편견을 가족 구성원의 적대적 시선으로 축소시켜 ‘충만한 순간’으로 시각화하고 있는 것이다.(그림 10)

    자식들을 포함하는 주위의 억압적 환경에 따른 고통을 못 이겨 에미는 감정폭발을 일으키는데, 한 야외식당에서 알리의 손을 잡고 격정적으로 고통을 토로하고 만다. 전경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 뒤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후경을 구성하는데, 이들은 또 다시 에미와 알리를 향한 적대적인 사회적 시선을 시각화하고 있다.(그림 11) 다음 컷에서 후경의 인물들이 확대되는데, 에미/알리 커플을 주시하고 있는 이들은 프레임의 전반에 걸쳐 배치되어 굳은 자세로 동결된 타블로를 구성하며 정서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카첼마허>의 - 난간에 기대어 있던 청년들의 - 타블로를 연상케 하는 이 모습은 다문화 가정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불관용에 대한 ‘지각의 위치’ 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그림 12)

    단순한 이분법적 구성에 공허한 파토스로 치장된 관습적 멜로드라마나 감정이 절제된 거리두기만을 강조하는 서사극과는 달리, 명시적으로 강조된 캐릭터의 구성과 동시에 정확히 관객의 심리를 파고드는 파스빈더의 타블로는 그의 멜로드라마 안티-멜로드라마로 특징짓는다. 즉 파스빈더의 안티-멜로드라마는 가진 것 없고 약한 자들의 일방적인 상황묘사를 지양하고, 소시민적 가족 구성원 개개인들 사이의 내적 관점과 이들을 구속하는 독일 사회의 강압적인 외적관점 사이의 동적인 역학관계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이 때 소시민적 가정은 바로 독일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치르는 공적인 장소로서, 전후 독일사회의 다문화가정에 대한 적대적 시선을 직접적이고도 과감하게 비판하는 공간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한 지각을 일깨우는 것이 바로 강렬한 감정이 농축된 극적 상황을 대사의 도움 없이 회화적으로 처리하는 타블로의 미학이다.

       2) 카우리스마키의 타블로

    카우리스마키는 특유의 영상미와 냉소적인 유머를 통해 핀란드 사회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며, 이를 통해 그들의 전형적인 집단적 사고방식을 표현하는 감독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노동자 생활을 바탕으로 한 ‘노동자-삼부작’(Proletariat-trilogy)39)에서 핀란드의 프롤레타리아 사회의 암울한 현실을 묘사한 바 있는데, 이는 그의 전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표제어라 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현실이라는 주제는 ‘핀란드-삼부작’(Finnland-trilogy)에서도 이어지며 자국의 사회문화적으로 아픈 현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 분석의 대상 중 하나인 <과거가 없는 남자>(The man without a past, 2002)는 ‘핀란드-삼부작’ 중의 2편으로서, 앞선 1부 <어둠은 걷히고>(Drifting clouds, 1996)에서 한 실업자가 현실에서 겪는 아픔에 대한 시적 서사가 제시되고, 마지막 3부 <황혼의 빛>(Lights in the dusk, 2006)이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고독과 황량에 대한 묘사를 완성시켰다면, 이 작품은 기억을 상실한 노숙자의 삶을 통해 이 두 테마를 이어주는 접점의 역할을 한다. 수많은 영화제 수상40)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과거가 없는 남자>는 과거를 상실한 채 극단적인 빈곤으로 내몰린 한 남자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연대의식을 발견하고 품위 있는 삶을 재건한다는, 자비로움의 순간을 체험케 해주는 영화이다. 또한 이 영화는 한 개인의 부활을 그리고 한공동체의 생성을 상징화하는데 있어서 카우리스마키만의 독창적인 영화미학을 완성시키는 타블로 장치가 적극적으로 사용된 작품이기도 하다.

    <과거가 없는 남자>는 첫 장면부터 무언의 타블로로 시작된다. 야간열차를 타고 헬싱키에 도착한 주인공은 첫날 밤 공원에서 강도를 만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사고를 당하는데, 심한 폭행을 당해 기억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기억상실과 함께 과거도, 정체성도 사라진 남자의 운명은 강도들이 여행 가방으로 그의 육체를 그리고 용접마스크로 얼굴을 가려버린 타블로 이미지를 통해 드러난다.(그림 13) 주인공의 정체성의 부재는 이어지는 장면에서도 타블로를 통해 형상화된다. 병원으로 실려 간 그는 온몸이 붕대에 휘감겨진 채 사망 선고를 받는데, 의사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기적처럼 의식을 회복한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과거의 그가 아니다. 이름도 과거도 모른 채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재탄생 한 것이다.(그림 14) 이 타블로 들은 얼굴과 육체를 가린 남자가 정체성이 실종된 일종의 ‘백지상태(tabula rasa)’의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 ‘과거가 없는 남자’는 과거가 없음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삶의 모든 고난을 앞에 두고 있는 상황을 충만하게 시각화 하고 있다.

    신분증 하나 없는 맨몸으로 무작정 병원에서 도망쳐 나온 그는 인적 드문 길가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데, 그를 거두어 따뜻한 보살핌을 제공하는 사람은 컨테이너 집단촌에 살고 있는 부랑자 가족이다. 그는 적지만 가진 것을 나눠주는, 사회의 여백에서 자비로움을 내뿜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원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한다. 이 단순하고 작은 인간들이 발산하는 은혜의 빛은 구세군의 무료 식사를 하는 타블로를 통해 드러난다. 그를 구해준 가정의 가장과 함께하는 말없는 점심식사의 모습은 이차원적인 카메라에 의해 정면으로 강조되고 있으며, 파스빈더의 프레임을 연상시키는 이 무언의 타블로는 가난한 이들의 조건 없는 동료애와 자본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박애를 시각화하며 정서적 효과를 극대화한다.(그림 15) 카우리스마키의 연극적인 타블로가 형상화하는 것은 라이트모티브로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이 자비로움과 인간의 존엄성이다. 한 인간이 사회적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면, 남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뿐이다. 현실을 직시하며 항상 겸허히 살아가는 캐릭터들로 동결된 타블로는 관객들에게서 인간에 대한 존경을 일깨운다.

    카우리스마키 특유의 영화미학을 완성시키는 주요 요소로 알려진 것은 유머와 위트가 가득한 언어이다. 그의 영화들의 지배적인 분위기는 비록 침울하지만, 그 캐릭터들이 사용하는 간결한 언어와 건조한 대화는 지속적으로 반짝인다. 카우리스마키의 대사는 의도적으로 “시 적이면서도 관용어가 풍부하고 형식적인 표준어”41)로 구성되는데, 이 단조롭고 짤막하지만 시적인 대사는 배우들의 유보된 행동과 대비를 이루며 우스꽝스러운 효과를 자아낸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노동자들이 완벽하게 다듬어진 표준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은 불합리함과 그 이면의 우스꽝스러움 사이에서 부유하며 그들을 매우 호감가고 흥미로운 캐릭터로 변모시키기 때문이다. 카우리스마키의 시적언어의 또 다른 영역은 유머라는 사실은 그의 영화가 지닌 아름다움의 핵심적인 부분인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과거를 되찾기 보다는 현재의 생활에서 소박한 것에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주인공이 구세군의 여인 이루마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이 두 사람이 처음 대면했을 때는 짧은 대화가 오간다.42)

    그러나 이들 간의 호감이 사랑으로 결실을 맺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말이 없다. 카우리스마키의 캐릭터들 사이에는 일종의 “무언의 관계”43)가 존재하며, 따라서 그들은 서로 부차적인 말없이 서로를 이해한다. 간결하고 짧은 주문장으로 이루어진 웅얼대는 대사들은 최소한의 것들만 담아내고 있으며, 그 이외의 것들은 침묵과 그 속의 (얼굴) 표정을 통해서 전달된다. 상실된 대화에도 민망한 침묵은 흐르지 않으며, 내러티브는 말보다는 극적행동의 동결행위를 통해 치장된다. 단순히 서로를 향한 동결된 시선만으로 인간애를 표현하는 이 회화적 이미지는 수많은 감정의 교차를, 그야말로 감정의 충만한 순간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그림 16, 17) ‘말하지 않는 것을 통한 말하기’를, 즉 침묵을 통한 이야기전달을 가능케 하는 장치가 바로 ‘동결된 해프닝’으로서의 타블로다. 시간을 정시시킨 것 같은 이 타블로는 그 어떠한 영화적 장치보다 깊고 시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 기능하며, 따라서 영화 속에서 숙고를 위한 순간을 관객 각자에게 허락한다. 이렇게 카우리스마키가 사용하는 언어의 시적인 분위기를 완성하는 것은 바로 타블로 장치인 것이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대화뿐만 아니라 영화음악의 사용에서도 마찬가지로 매우 절제되어 있다. 그 이유를 감독은 영화의 “음악이 이미지를 그늘지게 하는 것을 원치 않아”44)서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의 영화에서 간헐적으로 사용되는 음악은 대화의 역할을 대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언어로 표현하기 부족한 부분, 즉 과거에 대한 동경이나 노스탤지어 또는 말로 설명하기 곤란한 감정들이 음악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과거가 없는 남자>에서도 영화음악이 배제되어 있는데, 이를 대신하는 것은 구세군 음악대가 들려주는 찬송가와 로큰롤이다. 즉 외재음악(off-screen music)으로서의 영화음악을 그 음악의 소스가 장면 내에서 가시적인 내재음악(on-screen music)이 대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운드 영역에서의 내재음악을 이미지 영역에서 동반하는 것은 바로 회화적 타블로이다. 남자는 구세군 음악대에게 로큰롤이라는 새로운 음악을 선보이고, 이를 지켜보는 음악대의 모습은 무언의 타블로로 시각화되어 있다.(그림 18) 박진감 있는 로큰롤과 부동의 타블로가 불합리한 조합을 이루어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연출하고 이 장면은 고타분한 구세군의 이미지를 보다 현실적이고 적극적으로 변모시키고자 노력하는 주인공의 노력이 성과를 드러내고 있음을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우연히 은행 강도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서에서 증인 조사를 받는다. 하지만 신분증은커녕, 자신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는 불법노동자로 오해받고 만다. 구치소에 수감되기 직전 그는 머그샷을 찍는데, 이 이미지는 카우리스마키의 타블로 미학의 특성을 전형적으로 반영한다.(그림 19) 여기서 ‘과거가 없는 남자’의 - 무표정하지만그 시선에서 베어나는 - 독특한 멜랑콜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래서 들을 수 없는 그의 정서적 상황을 시각화하고 있다. 디드로의 연극이론에 따른 회화적 극작술로서의 타블로, 즉 대사 없이도 극적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무언의 장면’이 그리고 얼굴의 클로즈업을 통한 감화-이미지가 실현되고 있다. 이차원적 카메라 앞에서 생략을 통한 간결함과 무표정에서 묻어나는 멜랑콜리를 추구하는 카우리스마키의 연기법은 프리징을 통한 경이로움의 순간과 센세이션의 시각화라는 타블로 장치의 본질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카우리스마키가 추구하는 영화미학, 즉 작품 전반에 걸친 정적인 영상의 느린 전개와 그 이미지의 미니멀리즘에서 회화적 연기를 통한 타블로는 주제를 형상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카우리스마키의 타블로는 2011년 칸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하며 평단의 지지와 찬사를 한 몸에 받았던 최근작 <르 아브르>에서 보다 완숙된 영화 미학적 장치로 기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카우리스마키는 현재 프랑스 서북부의 작은 항구도시 르 아브르를 필두로 스페인, 독일로 이어지는 “항구도시 삼부작”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45) <르 아브르>가 개봉하기 전 공개된 포스터를 두고 “회화적인 이미지의 독특한 미장센을 통해, 이 한 장의 스틸 컷만으로도 바로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46)는 평가를 받은 것은 그 특유의 타블로 이미지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젊은 시절 자유로운 보헤미안이었던 주인공 마르셀은 프랑스 서북부의 작은 항구도시에 정착하여 구두닦이를 하며 아내 아를레티와 함께 풍족하지 않지만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의 구두닦이 생활은 영화의 시작부터 무언의 타블로를 통해 시각화되는데, 그의 옆에 말없이 서있는, 가짜 신분증을 위조해 살아가는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은 현대의 다문화 사회의 문제라는 영화의 주제를 시각적으로 요약하고 있다.(그림 20) 캐릭터의 무표정한 얼굴과 몸짓언어는 많은 이들이 잠시 정착했다 떠나는 항구라는 빛바랜 공간 설정과 맞물리면서 가슴에 호소하는 강렬한 멜랑콜리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주제는 한 무리의 아프리카 난민들이 영국 런던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이 항구도시에 불시착 하면서 본격적으로 시각화된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고국으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한 이 불법 이민자들의 운명은 다시금 정적인 타블로를 통해 드러난다. 수많은 얼굴 표정의 머그샷으로 이어지는 몽타주는 곧 타블로의 나열이며, 이는 전체 영화를 관통하며 불편한 진실을 향한 직설적 시선으로 그려진다.(그림 21, 22, 23) 세심한 인물배치와 표현력 강한 얼굴 표정들은 컨테이너 속의 전체적으로 빛바랜 조명과 조화를 이뤄내며 국가에서 필요한 것은 법보다는 휴머니즘의 온열주의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감화-이미지다. 따라서 이 장면이야말로 시종일관 시각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수단을 강조하며 ‘가슴에 호소하는 강렬한 인상들’을 통해 ‘진정한 사유(the true idea)’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때 타블로는 성공적이라는 디드로의 논의를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이 불법 이주민들 중에서 한 흑인 소년이 탈출에 성공하여 항구 도시로 잠입하는데, 주인공 마르셸이 이 이드리사라는 소년을 숨겨주면서 경찰과의 숨바꼭질이 시작된다. 마르셸이 이 소년의 할아버지를 찾아 불법 이주민 수용소를 방문하는 장면에서 이방인들의 적대적인 시선을 형상화하는 특유의 타블로가 다시 등장한다.(그림 24, 25)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서 볼 수 있었던 타블로와 유사한이 정지화면은 배우들의 움직임과 동선, 감정의 리액션 등을 모두 마치 액자 속에 가두어진 한 편의 그림처럼 재현하고 있다. 모네 경감이 마르셸을 비롯한 서민들이 주로 드나드는 술집에 들어오자 이를 주시하는 노동자들의 적대적인 시선 역시 같은 형태의 타블로로 시각화되어 있다.(그림 26) 기묘하게 가라앉은 원색의 배경아래 희로애락이 느껴지지 않는 동결된 제스처와 무표정한 얼굴의 캐릭터들은 “반 박자씩 느린” 또는 “하는 듯 마는 듯한 연기”47)를 한다는 평가받는데, 이는 주제의 충만함을 양식화하여 극화하는 타블로만의 의미전달 방식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마르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여 이드리사를 끝까지 런던으로 밀입국시키는데 성공하는데, 그의 인간애와 올곧음은 바이러스처럼 동네 주민들을 감염시킨다. 냉소적인 웃음기를 띤 경감 모네마저 눈감아주며 이드리사의 밀입국을 실행에 옮기는 모습을 통해 카우리스마키는 사회적 강자와 약자가 어떻게 공존해야만 하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전작 <과거가 없는 남자>에서 자본주의 사회 특유의 착취와 억압의 암울함에 긍정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던 카우리스마키는 <르 아르브>에 이르러 자본과 계층의 문제를 비틀며 냉혹한 다문화 사회에 온열을 가한다. 이 모든 것을 그 어떠한 신파도, 설교도 배제 하며 시각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카우리스마키 특유의 영화 미학적 타블로에 기인한다.

    35)Bordwell, David, On the History of Film Style. Cambridge, Massachusetts, 1997, 262쪽.  36)김용수, 위의 논문, 270쪽.  37)Freybourg, Anne Marie, Bilder lesen. Visionen von Liebe und Politik bei Godard und Fassbinder, Wien, 1996, 82쪽.  38)Elsaesser, Thomas, Rainer Werner Fassbinder, Berlin, 2001, 99쪽.  39)‘노동자-삼부작’은 <천국의 그림자>(Shadows in paradise, 1986), <아리엘>(Ariel, 1988), <성냥공장 소녀>(The match factory girl, 1989)로 구성되어 있다.  40)<과거가 없는 남자>는 칸 영화제 대상(2002), 함부르크 영화제에서 더글라스 서크 상(Douglas Sirk-Preis, 2002) 그리고 베를린 예술상 (Kunstpreis Berlin) 등을 수상하였다. 이 영화는 핀란드 영화사상 유일하게 아카데미 시상의 결선(2003)에 진출하기도 하였는데, 카우리스마키는 당시 미국의 이라크-정책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오스카 수상을 거부했다.  41)Sand, op. cit, 32쪽.  42)이들의 대화: 남자: 수프가 싱거웠습니다.이루마: 빗물이 들어갔나 보죠. 그래도 양배추하고 감자가 들었잖아요. 고기라도 넣어요? 남자: 아닙니다. 이름이 뭐죠? 이루마: 수프 더 달라는 속셈인가요? 차림새가 왜 그래요?  43)Sand, op. cit, 33쪽.  44)Ibid, 같은 쪽.  45)백승찬, [리뷰] 영화 ‘르 아브르’, 경향신문 2011.12.07.(http://news.khan.co.kr)  46)김지현, 영화 ‘르 아브르’, 따듯한 감독 시선 돋보이는 포스터 공개. 티브이데일리 2011.11.03.(http://tvdaily.mk.co.kr)  47)송광호, <새영화> 밀입국 다룬 동화 ‘르 아브르’. 연합뉴스 2011.11.30.(http://www.yonhapnews.co.kr)

    5. 마치는 말

    지금까지 타블로 개념을 영화 미학적 장치로 이해하고, 그 ‘지각의 위치’를 제시하는 기능을 파스빈더와 카우리스마키의 작품들을 통해서 분석하였다. 영화적 타블로는 관객에게 시공간의 경험을 보장하는 다른 쇼트들과의 구조적 관계성으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타블로는 현실의 재현이라는 여타 이미지들로부터 탈피하는 독립적인 이미지의 리얼리티를 보장하며, 새로운 인지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렇게 독립적인 개별 이미지도 시간성을 내포할 수 있으며, 특히 몽타주와의 기생관계에서 독립함으로서 스스로의 의미작용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이미지를 현대영화의 새로운 기능인 - 몽타주가 아닌 - “‘몽트라주montrage’, 즉 보여주기”48)라 칭한다. 이는 타블로의 영화미학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양식적인 측면에서 타블로는 부동적 육체와 강렬한 표현력의 접합을 통해 감화(-이미지)를 유발하는 장치이기에 그 주관적인 형식의 구조를 공공연히 드러낸다. 또한 타블로 속에서의 배우는 보여주기를 위한 의도적인 연기에 의해 미완성의 느낌을 선사한다. 그리고 타블로는 이미지의 ‘무엇’보다는 ‘어떻게’에 강조를 두기 때문에 대량생산의 장르영화에서는 감지하기 힘든 감독의 - 작가론적 의미에서 - 수(手)작업의 기운을 내뿜는다. 결국 타블로는 영화가 영화임을 자인하는 자기 반영성의 모습까지 숨기지 않으며, 이는 결국 관객의 적극적인 관람태도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영화 미학적 타블로의 특성을 바르크는 구체적으로 “아우라적 영향”49)이라 칭한다.

    파스빈더의 영화들에서 타블로는 우리로 하여금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동결된 프레임을 통해 지각하는 방법을 터득하게끔 한다. 파스빈더의 타블로는 참된 것을 전적으로 인위적인 것에서 찾게끔 한다는 것인데, 말하지 않은 것을 통해 감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킴으로서 표면에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것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의 타블로는 또한 진정한 동경의 핵심이 멜로드라마의 클리셰에 잠재되어 있음을 정확히 지적하며, 이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진실로 위대한 것들이 단순한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으로 타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끔 한다. 이렇게 독일의 다문화 사회에 대한 시선을 형상화하는 파스빈더의 타블로는 오늘날 주류와 비주류로 양분화 되어 있는 한국 사회의 다문화 가정을 비추는 일종의 거울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카우리스마키의 타블로 역시 관객으로 하여금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문제와 그들의 인권에 대한 관념을 무언의 부감(俯瞰)을 통해 바라보게 한다. 그의 타블로는 복합적인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는데, 노동자 캐릭터가 처한 상황이 슬프면 슬플수록 그들의 동료애는 더욱 더 아름답고 품위 있게 그려내며, 마찬가지로 어둡고 습하며 황량한 영화적 공간을 더 따스하게 재탄생 시킨다. 빛과 영화 음악이 통제된 연출의 미니멀리즘은 배우의 개인기가 아닌, 입을 다문 캐릭터의 표정과 몸짓언어 그리고 주위환경 사이의 거친 대비에 집중한다. 핀란드 고유의 사회문화가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흥미롭게 한다기보다는, 그만의 고유한 아이디어와 이를 형상화하는 타블로의 미학의 핀란드에 대한 영화를 신비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타블로의 개념은 현재는 연극/영화예술의 분야 이외에도 다양하게 활용되는데, 예를 들어 어린 학생들의 교육적인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최선영의 연구는 ‘동화지도를 위한 단계별 활동’의 일환으로 타블 로를 이용한 즉흥극을 제안한다.50) 여기서 타블로는 마임과 같은 즉흥극을 위한 표현활동인데, 아이들이 이해한 동화의 내용을 제스처와 얼굴표정을 통해 표현함으로서 문학작품을 보다 구체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때 타블로는 “몸을 이용한 활동 중 정지 동작”을 말하는 데, 동화의 내용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정지 동작으로 나타내고, 이에 대한 설명을 깃들이면서 표현력과 상상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활동에서 타블로를 “몸조각” 또는 “얼음조작”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51) 타블로 놀이를 통한 활동은 어린 학생들의 표현력과 자신감을 키우는 단계로 활용되는데, 이때 사람뿐 아니라 식물이나 동물, 더 나아가 생명력이 없는 물체까지도 몸으로 표현함으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까지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갈 수 있다. 이는 학습자가 주체가 되어 감상 활동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학습자 중심의 활동이라는 긍정적인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48)질 들뢰즈, 이정하 역, 『시네마 II. 시간-이미지』, 시각과 언어. 2005, 90쪽.  49)Barck, op. cit, 80쪽.  50)최선영, 「즉흥극을 활용한 동화지도 연구」, 부산교육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51)위의 논문,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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