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emy Rifkin prognostizierte 1995 in seinem Buch
Es gibt aber viele Hindernisse, die für die Einführung überwunden werden sollen. Dazu gehört insbesondere die fixe Idee, dass die Arbeit eine heilige Pflicht des Menschen sei. Deswegen fühlt man Hemmungen, ohne Arbeit Einkommen zu bekommen. Wenn man aber Arbeit mit der Erwerbstätigkeit nicht gleichsetzt, sondern das Wesen der Arbeit darin sieht, unabhängig von der Entlöhnung sich zu verwirklichen, kann man ganz anderes Leben führen. Um die fixe Idee der Arbeit zu brechen, ist es nötig, die Faulheit, die in den philosophischen und literarischen Werken ständig gelobt wurde, neu zu entdecken und zu rehabilitieren. Wenn man nur 4 Stunden am Tag arbeitet und übrige Zeit für das menschliche Leben verbringen könnte, könnten wir die Probleme des globalen Kapitalismus radikal überwinden und eine völlig andere alternative Gesellschaft gründen.
지난 20년간 무한경쟁의 기치를 높이 내건 신자유주의의 거센 바람이 전세계를 강타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삶이 더욱 팍팍해졌다. 효율성과 이윤창출을 최선의 가치로 삼는 신자유주의 원칙에 따른 구조조정으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대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폭 늘어났다. 많은 시간을 일해도 형편없는 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일하는 가난뱅이”가 되었고, 노동시장에 진입할 기회를 얻지 못한 실업자들은 “잉여인간”취급을 받게 되었다. 정규직 노동자들도 무한경쟁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을 남김없이 소진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이 된 것은 우리가 노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 노동이 점차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제 노동의 위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한국의 전체 실업률은 2.9%로 유럽국가에 비해 그리 높지는 않지만, 청년실업률의 경우 2014년 6월 현재 9.5%에 달한다. 100만 명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실업자로 살아가고 있으며, 여기에 더해 아르바이트나 시간제로 생활하는 이른바‘프리터’족이 93만 명,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고 있는‘니트’족이 72만 여 명에 달해 이를 합치면 젊은이의 25% 이상이 제대로 된 직업을 갖고 있지 못하다.1) 더 나아가서 전체 임금노동자의 30%가 넘는 800만 명이 비정규직 노동자로 불안정한 취업 상태에 있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 사회가 노동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노동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 노동의 위기는 삶의 위기를 불러온다. 노동에서 배제되거나 불안정한 취업 상태에 있다는 것은 생존권의 위협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재감 상실, 모든 관계의 단절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앞으로 이러한 상황이 점점 더 심해질 것이라는 데 있다. 급속한 기술 발달로 인해 인간의 노동을 기계가 대체하게 된다면 노동의 위기를 넘어서서 노동의 종말이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인 1995년에 이미 제러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에서 기술혁신과 기계화, 정보화로 대표되는 제3차 산업혁명으로 21 세기에는“기계가 급속한 속도로 인간을 대체”(리프킨, 47)하여 산업 생산에서“인간이 거의 필요 없는 문명의 세계”(47)가 될 것이라 예견한 바 있다. 노동은 인간이 출현하여 무리를 짓고 살기 시작한 구석기 시대부터 생존을 위한 인간 활동의 핵심 영역이었는데, 21세기에는 그 노동이 바야흐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는 진단이다. 그는“인간의 노동은 현재 처음으로 생산 과정으로부터 체계적으로 제거되고”있으며, 앞으로“1세기 이내에 시장 부문의 대량 노동은 사실상 세계의 모든 산업 국가들에서 사라져갈 것”(59)이라 말한다. 2004년에 낸 개정판에서 리프킨은 다양한 자료를 근거로 자신이 9년 전에 예견했던 방향대로 노동의 종말이 실현되고 있다고 말한다. 2000년대 들어서 미국의 제조업, 소매업, 서비스업 등 모든 분야에서 일자리가 대량으로 사라지고 있는 사실은 미국을 비롯해 대부분의 산업국가들에서 이미 노동의 위기가 심각한 수준에 와 있음을 말해준다고 주장한다. 컴퓨터, 로봇, 생명공학 등과 같은 “지능적 기계”들이 사람의 노동력을 대신하고“반복적인 단순 업무에서부터 고도로 개념적인 전문 업무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많은 육체적, 정신적 노동이 값싸고 보다 효율적인 기계에 의해 이루어지게 될”(21) 21세 기에는 노동의 본질이 바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2050년 쯤이면 전통적인 산업 부문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데 전체 성인 인구의 5퍼센트 정도밖에 필요하지 않게”(21) 된다고 한다. 모든 나라에서“노동 자가 거의 필요치 않는 농장, 공장 및 사무실이 일반화될 것”(21)이기 때문이다.
현재 제1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높은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공식적인 실업률이란 말 그대로 직장을 잃은 실업자거나 일자리를 구하려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에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의 비율을 말해주지 못한다. 여기에 어린이와 청소년, 구직을 포기한 사람들, 전업주부, 연금수령자 등 노동을 통해 임금을 받지 않는 이들을 포함시킨다면 노동하지 않는 인구는 현재의 모든 국가에서도 임금노동자의 숫자를 훨씬 상회한다. OECD 국가 중 최저의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는 우리 나라의 경우도 취업해 임금을 받는 근로자 수가 1,824만 명으로 전체 인구 5,100만 여 명의 35%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노동하는 사람보다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이다. 실업률이 높은 사회는 그 비중이 더 높다. 지금도 이러한 상황인데 리프킨의 전망대로 컴퓨터나 로봇 같은 지능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가 도래한 다면 국민의 절대 다수가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로 이루어질 것이다.2) 그렇다면 문제는“점진적으로 자동화되는 세계 경제 속에서 쓰임이 적거나 아니면 전혀 쓸모가 없는 수백만의 젊은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22)이다. 더 나아가 노동하지 않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실업자, 낙오 자, 기생인간이라는 열등감과 열패감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도록 언제까지 방치해야 하는가이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 노동의 본질과 노동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앞으로 다가올 노동의 위기, 노동의 종말은 리프킨이 말하듯 우리에게 노동에 대해 그리고 노동이 사라진 사회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대안을 탐색하도록 만든다. 지금 우리는 그 기로에 서있다.
리프킨의 대안은 노동에서 해방된 사람들을 시민사회라 일컬어지는 “제3의 부문”, 즉“사회, 문화적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공식적 비공식적인 비영리적 활동”(33)으로 대거 흡수하는 것이다.“사회 서비스에서부터 건강, 교육, 연구, 예술, 스포츠, 여가 활동, 종교, 사회 참여 활동에 이르는 영역”에 사람들이 참여함으로써 사회적 자산을 만들어 내는 일에 기여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리프킨은 22세기에 이르면“대부분의 사람은 문화적 영역에 속하는 직업을 가지기 위해 교육과 훈련”을 받게 될 것이고“사람들은 내재적 가치를 창출하고 공유된 사회 공동체 의식을 재활성화하기 위해 해방”될 것이라 예상한다. 그 결과“사람들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됨으로써 다가오는 세기에 인류를 위한 위대한 도약을 꿈꾸고 있는 시민사회에서 사회적 자산을 만들어 내기 위한 중요한 공헌”(45)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리프킨의 생각이다.
리프킨이 말하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생태사회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바탕이 될 수 있다. 더 크고, 더 많고, 더 좋은 것을 추구하며 물질적 가치를 최고로 여기는 자본주의를 넘어 서서 안빈낙도와 소박함, 자족, 모든 생명과의 연대, 돌봄, 정신적 가치를 바탕으로 한 생태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임금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생태사회는 지금의 사회와는 모든 면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한다. 그렇기에 노동 개념이나 노동의 본질 그리고 노동에 대한 우리의 생각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그래야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사회구조의 창출이 가능하다. 리프킨은 노동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어떤 새로운 활동을 해야 할 것인가를 현재의 자본주의적 질서의 틀 안에서 제시하고 있기에 그의 대안은 자본주의의 틀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노동의 종말이 실현된 사회에서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획기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보다 근본적이고 전방위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요즘 많이 논의되고 있는 <기본소득>이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
1)KBS 시사기획 창, <청년실업, 신 주경야독에서 길을 찾다>, 2014년 7월 29일. 2)10억 원어치 물건을 만드는 데 몇 사람이 필요한가를 나타내는 지표가 ‘취업계수’이다. 1980년 우리나라 제조업 취업계수는 10.31이었는데, 2010년엔 1.27로 줄었다. 기술발전으로 인해 일자리가 줄어드는 추세는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좌담: 모두에게 존엄과 자유를 ― 기본소득, 왜 필요한가」, 『녹색 평론』 2013년 7-8월, 131호, 18쪽 참조.
<기본소득>3)의 개념은 간단하다.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일자리가 있건 없건, 부유하건 가난하건 상관없이 무조건 일정한 액수의 금액을 지불하여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출발점도 리프킨의 진단처럼 노동의 위기 상황이다. 일본의 기본소득 주창자인 세키 히로노 역시“현대는 산업의 자동화가 극한으로까지 진행되고 있는 시대이며, 설사 경제위기가 없어도 현대인의 대부분은 잠재적인 실업자라고 할 수 있다.”4)고 말한다.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이“잠재적 실업자”이고 앞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노동으로부터 배제될 것이기에“고용과 소득을 분리하여, 사람들에게 고용에 좌우 되지 않는 소득을 분배”할 것을 그는 주장한다. 기본소득의 핵심은 고용과 소득의 분리, 즉 노동이나 일자리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기본적인 소득을 보장한다는 데 있다. 이를 잘 정리한 것이 2010년의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기본소득 서울선언>이다.
서울선언이 말하듯 기본소득이 전면적으로 도입된다면 우리 사회는 그야 말로 혁명적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노동의 의무로부터 해방되어 각자 자신이 원하는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자리가 없는 사람은 소득이 없어 생존문제에 직면해 있고, 일자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그 일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일하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이고, 생존을 위해 여러 개의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미 1976년에 암스테르담 자유대학 사회의학과 교수인 J. P. 퀴퍼는“다른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쇠약해지고 있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과도한 노동으로 몸을 혹사” 하는 것에 충격을 받아“유급 고용의 비인간적 본성에 대처하는 방법의 하나로 고용과 소득의 고리를 끊을 것”을 제안했다.6)
하지만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자신이 정말 원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거나, 일을 하지 않더라도 떳떳하게 시민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고용과 소득이 결합되어 있고, 노동이 중심이 된 현재의 사회에서 실업자나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일을 그만둔 여성, 전업 주부, 고령자, 학생 등은 비생산인력으로 사회에 기여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민의 당연한 권리로서 모두가 기본 소득을 받게 된다면 우리는 이러한 편견과 임금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일을 하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김종철은 그런 의미에서 기본소득을“새로운 형태의 복지 프로그램으로 간주할 게 아니라 사회구성원 전원이 당연히 가져야 할‘권리’”(김종철, 52)라고 설명한다.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지불해야 하는 이유는“사회 구성원이 모두 사회적 부를 창출하는 데 기여했다”, 즉“우리가 각자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이 사회적 부를 창출하는 데 기여한다고 인정”하고“일부의 경제적 부를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돌아가게 하려는”(밀롱도, 35) 것이다. 김종철은 이를 좀 더 풀어서 설명한다.
밀롱도 역시 이런 관점에서 기본소득을“사회적 부를 창출하는 것에 대한 보수 즉,‘평생월급’”(밀롱도, 35)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기본소득은 국민배당, 시민수당, 시민소득, 시민보조금, 사회소득, 평생월급 등 여러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노동과 상관없이 소득을 보장 하는 기본소득은 최근에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지만 그 아이디어는 오랜 역사를 지닌다. 기본소득 운동의 범세계적 기구인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에 따르면“조건 없는 기본소득에 관한 아이디어는 세 가지의 역사적 기원을 갖고 있다. 최소 소득에 관한 아이디어는 16세기 초에, 조건 없는 일회적 급부에 대한 아이디어는 18세기 말에 최초로 등장했다. 그리고 이 둘은 19세기 중엽 무렵 조건 없는 기본소득에 관한 아이디어가 형성되면서 최초로 결합되었다”7)고 한다. 1516년에 출판된 『유토피아』에서 토마스 모어는 도둑들에게 사형이라는“끔찍한 처벌을 가하는 대신에, 모든 사람에게 약간의 생계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하다고 말하며 최소 소득 보장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하였다. 이어 루도비쿠스 비베스는 1526년 브뤼주 시장에게 보낸‘빈민 원조에 대하여’ 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정의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요청되는 구호의 보다 효과적인 집행을 위해서 지방 정부가 모든 거주자들에 대해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제안했다.”최소 소득 보장은 이후 사회보험에 대한 제안으로 이어지고 19세기에 이르러 조건 없는 기본소득의 이념으로 발전된다. 프랑스 작가 샤를 푸리에는 『잘못된 산업』(1836)에서“문명화된 질서가 인간에게서 최초의 권리를 이루고 있는 네 종류의 자연적인 생계 수단, 즉 수렵, 어업, 채집, 방목 등을 박탈했다고 한다면, 토지를 빼앗아간 계급은 빼앗긴 계급에게 아홉 번째 권리(풍족한 생계)에 근거해서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본소득 이념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의 주장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어 푸리에주의라는 사조를 만들어냈다. 20세기 들어서 기본소득에 대한 제안은 영국에서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러셀의“일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간에 필수품을 위해 충분한, 한정된 적은 소득이 모두에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데니스 밀너의 모든 사람이 생계 수단에 대한 도덕적 권리를 갖기 때문에 영국의 모든 시민들 에게 조건 없이 매주 1인당 GDP의 20%에 해당하는“국가 보너스”를 지급하자는 주장이 1918년에 나왔다. 이를 발전시켜 1차 대전이 끝난 후 1924년에 더글라스는 모든 가구에 매달“국가 배당”을 지급하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후 기본소득 논의는 영국의 경제학자와 사회학자를 중심으로 논의되다가 1960년대 후반에 미국에서 다시 주목을 받게 된다. 경제 학자인 밀턴 프리드만이 『자본주의와 자유』에서“부의 소득세”도입을 제안하였고, 의회에 제출된“소득 보장과 지원 체계를 도입할 것”을 호소하는 청원에 제임스 토빈, 폴 사무엘슨,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 로버트 램프만, 해롤드 와츠 그리고 천 명이 넘는 많은 경제학자들이 지지를 표명하였다. 이에 당시의 닉슨 대통령은 1969년에 가족지원제도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였지만 하원 통과 후 상원에서 부결되어 불발되고 말았다. 이아이디어는 1974년에 닉슨이 워터케이트 사건으로 사임하면서 유야무야 되었다. 그러나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1970년대 말에 네덜란드, 덴마크에서 다시 시작되었고, 1980년대에는 영국과 독일 그리고 프랑스에서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러다 1986년 9월 벨기에에서 조건 없는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모인 첫 번째 회의가 열리고 여기서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 를 출범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2004년 9월 바로셀로나에서 개최된 10차 총회에서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가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 로 확장되어 전지구적 모임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2009년에 <기본소득한 국네트워크>가 결성되어 미래의 대안사회의 근간으로서 기본소득에 대한 활발한 논의를 펼치고 있고 그 결과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총회가 2016년에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서울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모든 국민에게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보장해 주자는 주장은 일견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적 공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미 몇 몇 국가나 지역에서 기본소득 정책이 성공적으로 시행된 바 있다. 1970년대 중반 알래스카에서는 프러드 만(灣)의 원유채굴로 얻은 부의 일부를 주민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알래스카영구기금(APF)을 설치하여 그 수익으로 1982년부터 매년 주민들 모두에게 일정한 금액의 배당금을 지급하고 있다. 2000년에는 1인당 연간 2,000달러 정도를 그리고 2008년에는 2,069달러를 영구기금으로 지급함으로써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 이밖에 다른 나라에서도 기본소득이 부분적으로 시행된 경우가 많다. 1970년대에 미국과 캐나다의 일부 지역에서 실험적으로 도입되었고, 브라질에서는 빈곤가구와 극빈 가구에 기본급여를 지급하는 부분기 본소득을 실시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나미비아와 인도에서 파일럿 프로 그램으로 기본소득 실험이 이루어졌다.8) 인도의 경우 캐나다에서 열린 2014년의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총회에서 그 결과가 발표되어 주목을 받았다. 인도 여성자영협회(SEWA)가 2010~2013년 사이에 두 차례에 걸쳐 “유니세프(UNICEF), 뉴델리시, 유엔디피(UNDP)의 기금을 받아 총 8개의 마을에서 어른 200루피(1인달 생계비 30%에 해당), 아동 100루피를 1년 동안 매달 현금으로 지급한 결과 가정경제와 지역경제가 활성화된 것은 물론 교육 참여도가 높아지고 빈곤계층과 여성의 자율성이 강화되는 매우 큰 변화가 일어난 것”9)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실험 결과“전반적으로 주민들의 영양과 건강 상태가 개선됐고, 학교 출석률과 학습 능력이 높아졌으며, 경제활동 증가, 부채 감소 및 저축 증대 등의 효과가 나타났다. 특히 장애인이 이 프로그램에서 큰 혜택을 받았다”(박이은실)고 한다. 경제활동 역시 증가하여“현금 지급이 개인들의 능동성과 자발성을 끌어낸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10)주었고, 이는“기본소득이 한낱 몽상이 아니라 현실적 기획임을 증명해주는 성과”(박이은실)로 평가되었다.
기본소득의 실현을 위해 중요한 발걸음은 스위스에서 모든 성인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국민발의법안이 의회에 제출된 것이다. 스위스 시민사회가 12만6천명의 서명을 받아 스위스 연방의회에 제출한 것으로 모든 국민에게 한 달 2천500 스위스 프랑(약 297만 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법안이다. 2016년에 국민투표에 부쳐질 예정이다.11)
전세계적으로 많은 이들이 기본소득을 연구하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는 기본소득이 신자유주의 위기와 생태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기업의 이윤이 늘어나도 고용은 감소하고 그 결과 실업자와 사회복지 수급자 양산으로 이어지는‘고용 없는 성장’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는 데 있다. 이러한 상황은 신자유주의로 인해 후퇴한 복지국가를 재건하는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복지국가 모델의 근간은 완전고용을 전제로 한 일종의 노동복지(workfare)이다.“자본주의가 경제 체제로서 자리를 잡은 이래 모든 사람들은 임금노동자나 자본가로서 살아가는 삶만을 상상해왔고, 국가는 이것과 다른 예외적 상황에 놓인 개인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복지제도를 운용”(박이은실)해왔기 때문이다. 복지국가는 그러나“경제 호황과 대중 소비, 완전고용과 강력한 노동조합을 배경 으로 등장”한 모델로 완전고용의 신화가 깨지고, 고도성장이 불가능해진 오늘날의 현실에서 복지국가를 다시금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안효상) 20세기의 대안이었던 스웨덴의 복지국가 모델 역시 높은 경제성장률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공동창립자인 가이 스탠딩 런던대 교수의 말처럼 21세기에는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
결국, 노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이들에게 상당한 수준의 소득을 보장하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본소득이 비인간적인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할 유일한 대안으로 주목 받고 있는 것이다.
기본소득의 도입은 노동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도록 만든다. 밀롱도는 성장을 지향하는 현대 사회는“노동에 대한 강요, 과도하게 일해야 할 의무, 더 일하라는 부추김”이라는 세 가지를 동력으로 삼고 있다고 분석 한다.“노동에 대한 강요는 배고픔이라는 날카로운 기억에서 태동하고, 과도하게 일해야 할 의무는 현대사회가 일을 너무 과대평가해 꼭 일자 리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시민들 어깨에 지운 데서 비롯되었다. 또한 더 많이 일하라 부추기는 것은 언제나 더 많은 소비를 원하는 우리 사회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밀롱도, 59)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이념이 현대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과도한 노동, 노동의 신성화, 황금만능주의, 과소비의 조장, 생태계 파괴 등과 같은 현대 사회의 근본 문제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현대 사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도 기본소득 도입이 필요하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사람들이 노동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진정한 일을 할 수 있다. 각 개인이“각자 생각하는 좋은 삶을 실현”하고“각자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 가게 하는 것”. 즉“존재 그 자체를 위한 소득”이 바로 기본소득이기 때문이다. (밀롱도, 43) 그렇게 하여 기본소득은 현재의 물질문명과 무한경 쟁의 사회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이를 김종철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기본소득제야말로 신자유주의의 비인간적인 사회를 자유롭고 여유로운 대안사회로 만들 수 있는 초석이며 정책적으로 바로 실현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본소득의 도입이나 전면적 시행을 가로 막는 세 개의 걸림돌이 존재한다. 첫째는 기본소득 지급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현재 국내외의 많은 경제 학자들이 부유한 나라이건 가난한 나라이건 기본소득을 당장 시행할 수 있으며,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재원을 어디에서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 대해 서 구체적이고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현재, 기존의 재원을 재분배하는 안(사회보장을 위해 지출하는 유사한 예산들과 선별적 사회보장제를 운영하는 데 들어 가는 행정비용을 없애 모은 재원을 재분배하는 것), 국가가 직접 화폐를 발행하는 방안 및 금융시스템의 공유화, 토빈세, 탄소세(환경세), 부유세 등의 새로운 세제안 도입, 소득세 체계의 개편, 부가가치세를 인상하여 마련하는 방안, 주요 기업의 국유화를 통한 재원마련 등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13) 한국에서도 강남훈 교수가 전 국민에게 연간 550만 원씩 지급하는“높은 기본소득 모델”과 300만원씩 지급하는“낮은 기본소득 모델”을 도입할 경우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계산한 연구를 발표하였다. 그의 결론은“우리나라의 경제력으로 볼 때 높은 기본소득도 얼마든지 제공할 수”있음은 물론, 그를 위한 총 조세부담 률(국민부담률)은 40% 정도로 북유럽 국가들의 총 조세부담률(50%)보다 낮은 수준으로 기본소득을 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강남훈, 322) 이처럼 많은 경제학자와 사회학자들이 기본소득 도입이 정책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완전히 실현 가능하다는 연구결과를 속속 내놓고 있다.
두 번째 걸림돌은 최소 생활이 보장되는 기본소득이 모두에게 지급된 다면 사람들이 하던 일을 그만둘 것이기에 산업 자체가 붕괴될 것이라는 우려이다. 사람들이 일을 안 하면 경제적 생산물이 절반 이하로 줄고, 그렇게 되면 기본소득의 재원도 고갈되니까 지속성이 없다는 주장이 다. 그런 주장은“임금노동이라는 것이 대체로 비인간적이고 소모적인 노역”(녹색평론 좌담, 29)이며“일은 행복한 것이기 보다는 고통스러운 것”(밀롱도, 121)이라는 생각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렇기에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에 지친 사람들이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당장 일을 그만 둘 것이 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일이 즐겁고 보람되며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기본소득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노동의 의무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동시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 주는 것이므로 사람들은 이제 자기계발과 성취를 위해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기본소득을 시험적으로 시행한 미국과 캐나다의 예를 보면 기본소득이 지급되어도 노동 양의 감소 현상은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14) 기본소득을 통해 임금노동만이 일이 아니라“지금까지 은폐되고 그늘에 가려져왔던 일들”, 즉 가사노동이나 사회봉사, 예술 활동 등이 모두 정당한 일로 대접받게 된다면 일이 오히려 늘어날 것이다. 나아가“사람마다 지닌 독특한 개성적인 재능들이 여태까지 우리가 몰랐던 다양한 일의 형태로 표현될”(녹색평론 좌담, 29)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기본소득제의 실현에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산업혁명 이래 사람들이 품어온 노동에 대한 고정관념”(세키, 48)이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따라 일하지 않고 돈을 받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 게다가‘일하지 않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한 성경구절도 일하지 않고 돈을 받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일’이란 돈 받고 일하는“자본주의적 임금노동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가사노동, 사회봉사, 예술활동, 돌봄 등도 모두 포함한 개념이다.(녹색평론 좌담, 27) 그러니까“노동은 생존하고자 하는 인간에게 부과된 필연적인 것이며, 소득은 고된 노동을 견뎌낸 것에 대한 보답이라는 사고방식”(세키, 48)은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관념인 것이다. 예전의 왕족이나 귀족, 지주, 성직자들은 스스로 아무런 노동도 하지 않고 상당한 소득을 얻으며 풍족한 삶을 영위해왔다. 이를 비판하며 시민계급이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통해 노동의 신성화를 강조하였는데 이것이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우리에게 족쇄가 된 것이다. 이 족쇄, 즉 자본주의가 만든 노동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트릴 수 있다면 과거처럼 몇 몇 소수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자유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은 노동개념을 완전히 새롭게 재정립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노동 또는 일이란 그것을 통해 금전적 이익을 얻는 활동이 아니라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고 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자신은 물론 이웃과 사회에 기여하는 즐거운 행위라는 인식이 자리하면 노동의 개념은 바뀔 것이다. 그렇게 되면“사람들은 인격적 요구, 인간적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일을 하게 될 것이고“생활은 노동, 휴식, 유희, 여가 따위로 분단되지 않고, 인간은 무엇을 하든 늘 그 인격적인 삶에 의해 존재하게 될 것이다.”(세키, 49) 이를 위해서는 사람은 일을 해야 소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존재한 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자유롭게 생을 영위할 권리와 자격이 있다는 생각으로의 근본적인 사고전환이 필요하다. 노동의 개념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작업은 정신적 차원이므로 인문학에서 담당해야 할 부분이다. 노동의 개념뿐만 아니라 직업에 대한 관념, 삶의 의미와 목표,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바꾸는 데 인문학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노동을 강조하고, 일과 직업을 삶의 중요한 목표로 여기는 오늘날의 문제를 바꾸려면 그와는 정반대 개념인 게으름의 재발견이 필요하다.
3)영어와 독일어로는 basic income, basic income guarantee, citizen’s income, Grundeinkommen, Bürgergeld 등으로 표기한다. 4)세키 히로노, 사회신용론과 기본소득, 녹색평론 제111호, 2010년 3-4월호. 여기서는 녹색평론 홈페이지 기본소득 자료실에서 인용. (http://www.greenreview.co.kr) 5)임경석, 「인권 실현의 토대로서의 글로컬 기본소득에 대한 단상」, 강남훈, 곽노완 등 지음, 『기본소득의 쟁점과 대안사회』, 박종철출판사 2014, 109-110쪽에서 재인용. 6)기본소득에 대한 아이디어와 이념이 어떠한 변천을 거쳐왔는지에 대한 소개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의 홈페이지에 자세히 나와있다. (http://www.basicincome.org/bien/aboutbasicincome.html#history) 이글의 한국어 번역판은 최광은이 <기본소득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블로그에 소개하고 있다. (http://gwangeun.net/130044965135) 여기서는 최광은의 번역본을 인용한다. 7)최광은, <기본소득의 역사>. (http://gwangeun.net/130044965135) 8)이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서정희, 조광자, 「보편적 복지제도로서의 기본소득」, 강남훈, 곽노완 등 지음, 『기본소득의 쟁점과 대안사회』, 박종철출판사 2014, 134-136쪽에 나와 있다. 9)박이은실, “기본소득, 불안정노동시대 위기 극복할 최선의 대안”, 한겨레, 2014.7.6. 10)안효상, ‘기본소득운동’ 다음 행선지는 서울, 한겨레21, 2014.7.14. 11)경기신문, 월요논단, 2014.7.20. 12)손제민 특파원, “고성장 없이 지속 불가능한 스웨덴 복지모델, 한국에 해답 아니다”, 경향신문, 2014.7.2. 13)여러 종류의 재원조달 방안에 대해서는 밀롱도의 책 『조건 없이 기본소득』 141-152쪽과 녹색평론 좌담에 자세히 나와 있다. 14)1970년대에 뉴저지 주와 펜실베니아 주의 6개 도시의 1400가구에 4년 동안 마이너스 소득세를 지급하는 실험과 아이오와 주와 노스캐롤라이나 주 시골에 사는 흑인 가구, 덴버와 시애틀에 사는 5000가구에 마이너스 소득세를 지급하는 실험을 하였다. 이 실험 전체를 분석한 경제학자 마이클 킬리는 “전체 노동시간에서 평균 7-9퍼센트가 줄었다고 결론”을 냈다. 고용문제 전문가인 로버트 홀은 그에 대해 대개 여러 개의 일을 하던 사람들이 아르바이트를 줄이거나, 아이를 돌보는 여성, 학업을 마치지 않은 성인들이 노동시간을 줄인 것으로 평가했다. 밀롱도, 앞의 책, 126쪽 참조.
노동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우선 일하지 않거나 일을 느리게 하는 것, 즉 게으름의 지위를 회복시켜야 한다. 휴식이나 무위, 게으름은 아주 오래전부터 악덕이나 죄로 평가되어 왔다. 노동이나 활동, 일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경계하거나 타파해야할 나쁜 행위로 인식 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게으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주류를 이루다보니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거나 빈둥댈 때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죄책감에 빠진다. 따라서 일하지 않는 상태를 부정적으로 여기거나 게으름을 죄악이라 생각하는 관념을 바꾸어야 많은 사람들이 기본소득제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고 그래야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게으름에 대한 비난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게으름을 경계하는 이야기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에 나온 이솝우화의 <개미와 베짱이>이다. 일과 즐거움,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대비시켜 게으름을 경계하는 교훈적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도 <소가 된 게으름뱅이>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인도에도 한 둥지에 사는 두 마리 게으른 새가 겨울이 와서 둥지에 난 구멍에서 찬바람이 들어오는데도 그걸 메꾸는 일을 서로에게 미루다가 결국은 게으름 때문에 얼어죽었다는 설화가 있다.(이옥순, 17) 또한 성경에도‘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경고라든지,“너 게으름뱅이야, 언제까지 누워만 있으려느냐? 언제나 잠에서 깨어나려느냐?‘조금만 더 자자, 조금만 더 눈을 붙이자. 손을 놓고 조금만더 누워 있자!’하면 간난이 부랑자처럼, 빈곤이 무장한 군사처럼 너에게 들이닥친다.”(잠언 6장)는 말이 나온다. 이들 이야기는 모두 일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면 불행에 이를 것이라는 준엄한 경고와 부지런히 열심히 일을 하면 부와 행복을 얻으리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으니 게으름에 대해 부정적 인식과 죄책감을 지니는 것은 당연하다.
게으름에 대한 단죄와 비판은 이후 종교개혁을 통해 프로테스탄트가 등장하면서 더 심해졌다. 루터는“노동이 사람을 죽이는 경우는 없다. 빈둥거리며 지내는 것은 신체와 생명을 망친다. 새가 날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인간은 노동을 위해 태어났다.”고 말하며 게으름을 단죄하였고, 칼뱅도 게으름을“가장 위험한 악”으로 여겼다.(이옥순, 50) 근면과 노동을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는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키웠고 산업화와 함께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 임금 노동자들과 직업이 생겨나면서 노동이 더욱 신성시 되었다. 산업화를 통해 대규모 임금 노동자가 고용되고 이들의 생산성이 중요해지자 게으름을 피우거나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더욱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자본가와 지식인들이 게으름을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담론을 유포시켰고, 성직자들이 이를 종교적으로 뒷받침하였다. 그리하여 시간은 금이며, 일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라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개념이 완성되었다. 나치시대에는 거지, 유랑자, 집시를 게으르며‘일을 기피하는 분자들’이라 낙인찍어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냈고 급기야는 아우슈비츠에서 학살을 감행하였다. 이를 주도한 히믈러는“일을 기피하는 것을 일종의 전염병”이라 보고“그 병원균이 국가라는 유기체를 좀먹고, 나아가 나치가 꿈꾸는 완벽한 세계를 내부에서부터 파괴”(호지킨슨, 54)시키지 못하도록 이들을 사회에서 제거한 것이다. 그 결과 근면과 노동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않고 쉬거나, 낮잠을 자거나, 생각에 잠겨있는 것조차도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노동은 생존하고자 하는 인간에게 부과된 필연적인 것이며, 소득은 고된 노동을 견뎌낸 것에 대한 보답이라는 사고방식”은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자본주의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관념”이다. 예전의 왕족이나 귀족, 지주, 성직자, 거지들은 스스로 아무런 노동도 하지 않고 상당한 소득을 얻으며 풍족한 삶을 영위해 왔다. 이를 비판하며 시민계급이 자본주의와 청교도적 윤리를 통해 노동의 신성화를 강조하였는데 이것이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우리에게 족쇄가 된 것이다. 이 족쇄, 즉 자본주의가 만든 노동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트려야만 모두가 함께 자유를 누리는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일의 노예, 시간의 노예가 되어 허덕이며 살 수밖에 없다. 니체는 이미 1882년에 이러한 현상을 명확하게 지적하였다.
니체가 간파한“아무것도 안 하느니 차라리 무슨 일이라도 한다”는 현대 사회의 노동 원칙은 신자유주의의 도입과 함께 오늘날 더욱 첨예화 되었다. 사람들은 바쁘다 바빠를 입에 달며 더 정신없이 산다. 시간에 매이지 않은 예술가마저도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늘 무언가에 분주하다.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는 소설가마저도 바쁘다 바빠를 외치며 살게 만든다. 소설가 백가흠은 2011년에 쓴 몽골 기행문을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몇 년 동안이나 미루었던 여행을 몽골로 왔습니다. 지난 시간 아무런 여유가 없었던 셈이지요. 서울에서의 생활이라는 것은 바쁘다는 핑계를 입에 달고 살던 시간은 아니었던 걸까요. 바쁘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고,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이 무너뜨린 여유에 대해 생각합니다.”그런데 그가 몽골에서 발견한 것은 서울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삶이었다.
몽골 초원에서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이나 물질적 풍요를 위한 삶은 낯선 개념이다. 이 사실은 처음부터 돈과 노동이 결합되어 있었거나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는 것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근대화나 산업화 이전의 사람들은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위해서 필요한 만큼만 일을 하였다. 필요한 만큼의 양식을 마련할 수 있으면 그 이상으로는 일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것을 엥겔스는 「영국 노동 계급의 조건」에서“직조공들은 대개 자기 의지대로 일하는 시간을 조절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여가 시간에는 땅을 조금 빌려서 농사를 지었다. 물론 그 여가 시간도 자기가 선택한 만큼 취할 수 있었다. (.....) 그들은 과로할 필요가 없었다. 즉 자기들이 선택한 정도 이상으로는 일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필요로 하는 만큼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호지킨슨, 32쪽에서 재인용)고 설명한 바 있다. 영국에서는 <성 월요일 Saint Monday>, 즉 안식일을 월요일까지 연장하는 제도화된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제화공, 직조공들은 월요일에도 일을 하지 않고 술을 마시거나 맨손 격투와 투계를 구경했다는 것이다. (호지킨슨, 66) 이 관습은 18세기 내내 지속되다가 19세기에 들어서 산업화와 함께 사라졌다. 오래 지속되 었던 이유는“이 관습을 실천했던 사람들이 오늘날처럼 재산축적에 열망을 품지 않았”고 무엇보다도“생존에 필요한 만큼 이상으로는 돈 벌 필요를 느끼지 않았”(호지킨슨, 66)기 때문이었다.
과도한 노동이나 더 많이 벌기 위해 일하는 것에 대한 비판은 근면과 노동의 의무에 대한 강조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다. 이미 로마시대에 키케로는 『의무론』에서“사람들이 자신의 수고와 근면성을 팔아넘기는 행태를 우리는 천박하고도 혐오스러운 것으로 판단해야 한다. 누구에게든 돈 때문에 자신의 수고를 제공하는 것은, 자신을 파는 것이요 자신을 노예로 전락시키는 일이다.”(호지킨슨, 334) 라고 지적한 바 있고, 그리스 철학자들도 노동이 사고를 떨어뜨리는 천한 것이라 여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게으름을 우주의 원리라 여기고“완벽한 시민은 미덕을 키우고 정치적 행동을 하기 위해 여유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이옥순, 43)
다른 연구에 따르면“원시 시대의 여성들은 평균적으로 주당 15시간에서 20시간 일하고, 남성은 15시간 일했”는데,“쟁기를 끄는 동물들을 먹이고 돌봐야 하는 농경문화로의 전환은 남자들이 주당 25시간에서 30시간 일을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레빈, 37) 그렇지만 고대와 중세에는 여전히 일하는 날보다 일하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핌로트 Pimlott는 『영국인의 휴일』에서 고대 이집트에서는“1년에 5분의 1은 일하는 걸 금지 했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1년에 축제일이 50-60일이나 되었고, 그리스의 도시 국가 타렌툼은 전성기 때 축제일이 근무일 수보다도 많았다. 고대 로마력을 보면 명목상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재판이나 공공 업무가 시행되지 않는 날이 108일이나 되었”(호지킨슨, 312)다는 것이다. 중세에도 마찬가지로 쉬는 날이 1년에 평균 115일 가량 돼서 사람들이 현대의 우리보다 훨씬 많은 여가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레빈, 34) 현대에 들어와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1920년대 농가의 가정 주부들은 온갖 신식 기기를 갖고 교외에 사는 현재의 가정주부들보다 눈에 띌 만큼 적은 시간을 가사일에 사용”했다는 것이다.(레빈, 34) 레빈의 지적처럼“시간을 절약해주는 온갖 발명품을 갖고도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자기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레빈, 34쪽)이 현대의 상황이다.
생태사회를 위해서도 기본소득제의 도입을 위해서도 우리는 노동의 의무와 능률 숭배로부터의 해방이 필요하다. 노동에 대한 개념을 바꿔야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산업사회와 신자유주의는 인간이 인간다운 위엄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본조건을 갈수록 망가뜨리고 있다. 우리가‘일하는 기계’ 또는‘기계의 노예’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산업화와 자본주의에 의해 변방으로 밀려난 여가와 무위, 즉 게으름의 긍정적 측면을 재발견하고 복권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동서양의 역사를 보면 무위와 게으름을 강조하는 많은 예들을 찾을수 있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과 마음 가는 대로 유유자적하게 살아 가라는 장자의 소요유, 인도의 요가와 명상 모두 번잡한 노동이나 더 많은 것을 위해 아등바등 일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순수한 게으름을 전제로 한다. 서양에서도 그리스 시대의 견유학파와 18세기의 루소, 19세기 말의 대안운동, 1960년대의 히피운동 그리고 오늘날 생태주의로 이어지는 반문명 전통에서 게으름을 강조하였다. 견유주의(犬儒主義/Cynicism/Kynismus)는 그리스시대에 욕심을 버리고 세속의 부귀영화를 탐하지 말며 자연의 상태로 회귀해야한다고 주장한 철학유파이다. 견유주의는 서양사상사에서“문명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가장 강력한 철학적 반항” (송유례, 102)으로 평가된다. 그들이 비판한 문명은“물신주의, 쾌락주의와 이기주의, 허례허식, 성적-인종적-사회적 편견과 차별, 종족주의와 군사주의 그리고 노예제도”(송유레, 102)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 견유 주의자들은 이에 맞서“인간이 만든 허위적 세상에 대한 반기를 들고 인간 본성과 그 본성이 내속된 대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라고 주장”하며 재산, 지위, 명망, 허례허식을 모두 버리고“최소주의적 생활방식”을 실천 하였다.(송유레, 103-104) 디오게네스는 걸인처럼 구걸하며 통속에서 생활하였고, 상류층 출신의 부유한 토지소유자였던 크라테스는 재산을 모두 처분해 이웃에게 나누어준 후 거리에서 생활하는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였다. 디오게네스는 문명의 문제가 자꾸만 더 가지려는 탐욕에 있다고 보고“진정한 기쁨은 영혼이 편안하고 즐거운 상태에 있을 때 가능하다”(Koch, 85)고 가르치며“자기만족”(86)을 대안가치로 제시하였다. 그는 “부자와 권력자가‘점점 더 많이’라는 증가의 논리에 빠져있어서 영혼의 평온을 상실하였기”에 오히려 삶의“진정한 패배자”(85)라고 선언하며 스스로를“병든 사회의 의사”로 자처하였다. 디오게네스의 치유의 목적은 “대도시인들을 다시금 좀 더 느리고 평화로우며 소박한 삶으로 되돌아 가게 만들어 좀 더 큰 영혼의 평안을 찾을 수 있게 하는 것”(91)이었다.
견유주의의 저항담론은 루소를 거쳐 젊은 괴테로 이어진다. 괴테는 『젊은 베르터의 고뇌』에서 능률, 부지런함, 일, 직업적 활동, 사회적 인정과 같은 시민계급의 지배담론에 맞서‘무위’,‘산책’,‘독서’,‘자연과의 합일’, ‘소박한 노동과 삶’,‘자기실현 및 자기완성’,‘자족’의 대항담론을 내세운다.16) 안빈낙도와 게으름 그리고 무위와 자연적 삶에 대한 찬양은 이후 많은 이들에 의해 산업사회와 기술문명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이들은 근대이후 노동에 부여한 중요성을 파기하고 노동은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범위로 한정시킬 것을 제안한다. 그럴 경우 나머지 시간을 자기계발과 자기완성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1883년에는 프랑스의 의사이자 사회운동가인 폴 라파르그가“‘일할 권리’에 대한 반박”으로서‘게으를 권리’를 주장하였다. 그는 노동에 대한 맹목적이고 도착적이며 살인적인 열정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해방시켰던 기계가 자유로운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도구로 바뀌었다”(라파르그, 27)고 말한다.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의“일하라. 사회의 부를 증대시키기 위해”라는 주장에 따라 노동자들이“노동이라는 악덕에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다”(20-21) 바치고“기계의 일부가 되어 휴식도, 대가도 없이 일만”(8)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게으를 권리’를 선언해야 한다는 것이 라파르그의 주장이다.
“노동은 게으름이라는 즐거움에 추가되는 양념에 불과한 것”이므로 “하루에 최대 3시간이라는 제약이 가해져야만 노동이 인간이라는 유기 체에 이로운 몸놀림”이 된다고 라파르그는 역설한다.(26) 베르터처럼 라파르그 역시 노동의 시대에 노동의 신성화를 부정하고 게으름을 찬양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후 20세기에 들어와 버트란트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과 쟈끄 러끌레르끄의 『게으름의 찬양』으로 이어졌다. 1935년에 발표한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러셀은“세상에는 너무나 일이 많으며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에 의해 엄청난 해악이 발생한다”(러셀, 15)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노동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바꿀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근로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며 현대 세계는 노예 제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20)며 자본주의의 노동윤리를 비판한다. 또한 사람들이 모든 일이란 늘“다른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이익을 가져오는 것만이 바람직한 행위라는 관념”에 빠져“모든 것을 뒤바꿔 버렸다”(29)고 말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그 자체를 목적으로 일하는 법이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여가가 필요하다는 것이 러셀의 주장이다. 러셀은 현대인들에게‘행복하려면 게을러지라’는 처방을 내리며 하루에 4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을 빈둥거리고 어슬렁거려야 더 창의적인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당시 수준으로도 사람들이 하루 4시 간씩만 일해도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자원을 충분히 생산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노동시간을 4시간으로 줄이면 나머지 시간은 자신에게 알맞은 활동에 쓸 수 있다. 과학적 호기심이 있는 사람이면 그 호기심을 맘껏 탐닉할 수 있을 것이고, 작품성을 추구하는 화가도 굶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예술가들이 먹고살기 위해 자신들의 역량과 개성을 잃을 일도 없을 것이다. 일반 사람들도“보다 친절해지고, 서로 덜 괴롭힐 것이고, 타인을 의심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일도 줄어들 것”이라는 게 러셀의 진단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러셀과 거의 비슷한 시기인 1936년에 러끌레르끄는 벨기에 자유학술원 회원 취임연설인 「게으름의 찬양」에서 마찬가지로 게으름을 역설하였다. 신부이자 이후 루뱅대학 철학 교수가 된 러끌레르끄는 자기 시대의 상징이“경쟁”이며“온갖 발명 역시 .... 속도의 발명”이라고 정의한 후, 사람들이 이러한“치열한 생활”을 자랑하는데“치열한 생활이란 실상 소동의 생활에 지나지”않는다고 비판한다.(17) 왜냐하면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런 생활로 지쳐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러끌레르끄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삶은 한가하고 게으른 삶이다. 그래야“아름다움이 아름다움으로 보이”기 때문이다.“고독, 정적, 한가로움이 있고서야 탄생”(36), 즉 새로운 창조가 가능하다.
이를 바탕으로 러끌레르끄는 이제“게으름의 찬양을 노래하여 마땅할 시절이 돌아”왔음을 선포한다.(17) 실제로 그는 자신의 친구가 장관이 되었다는 소식들 듣고 그에게 충고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편지의 내용인즉“내각 전원이 매주 하루씩은 종일 들에 나가서 지내도록 강력히 제언하라는 것”이었다. 장관들 모두가 일주일에 하루는 들에 나가서 “스테이크와 감자튀김으로 푸짐한 점심을 하고 크레프로 후식까지 하고 나서 우리나라 독주도 한잔씩 들고는 푸른 잔디밭에 모두 드러누워 조상님네 땅의 영원한 슬기가 몸으로 스며오르는 소리를 조용히 듣도록 하라는 것”(37)이 그의 충고였다.
동서양의 많은 문학가, 사상가, 학자들이 주창한 노동시간을 줄이고 여가시간을 많이 갖자는 제안은 기본소득제 논의로 인하여 새롭게 부각 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이 삶의 원천이고, 노동이 사회적 안정을 가져다주는 기반이라고 생각하기에 노동하지 않은 자는 당연히 사회에서 낙오한 자로 취급되었다. 그렇기에 실업자들은 단순히 일자리만이 아니라 사회적 기반과 사회적 관계까지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기본소득 도입으로 시민이면 누구나 기초생활비를 받을 수 있다면 자연히 노동에 대한 인간의 관계 역시 혁명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거나 몰락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해방되어 여유롭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일자리가 없어도, 노동을 하지 않아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삶의 충만함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각자가 자신의 활동을 통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삶을 즐기고 자신의 관심과 능력을 일깨우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새로운 사회가 열릴 것이다. <시민수당>을 제안한 독일의 사회학자 엥글러는 인터뷰에서“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시간을 보내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연출할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할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면, 활동이 중요한 거지요, 노동이 아닌 활동 말입니다.”17)라고 말한다.
이렇듯 완전히 새로운 노동개념을 통해 노동 없이도 인간적인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사회나 라파르그나 러셀 그리고 칼렌바크와 박민규18)가 꿈꾸는 하루 3-4시간만 일하고 나머지는 모두 인간적 삶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역시 재정립되어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러한 사회는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나가야 할 미래의 유토피아이기도 하지만 인류가 한때 이미 이룩하고 달성했거나 현재도 지구촌 한 구석에서는 현실로 존재하고 있는 사회이기도 하다. 원시 수렵 채취 경제를 유지하고 있는“파푸아의 카파우쿠 족은 이틀 계속해서 일하는 것은 존재하는 않는다고 생각” 하고“쿵 부시맨 족은 하루에 여섯 시간씩 이틀 반을 일하”며“샌드위치 섬의 남자들은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레빈, 36) 그런 세상이 전지구적으로 도래하지는 않았지만 인문학은 그러한 에코토피아를 우리의 눈앞에 그려보여 줌으로써 우리들의 가슴에 동경과 희망을 불러일으켜 줄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에코토피아에 대한 꿈을 동시에 꾼다면 그것은 한낱 꿈이 아니라 마침내 현실이 될 수 있다. 생태사회는 개인의 의식과 태도뿐 아니라 모든 사회제도를 생태주의적으로 바꿔야하기 때문에 다양한 분야에서의 근본적 변혁이 필요하다. 그 변혁의 기본 전제조건이 바로 우리의 의식이 혁명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개념, 직업과 일에 대한 관념, 휴식과 게으름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우리 삶의 의미와 목표를 재정립할 때 비로소 새로운 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
인간이 지구생태계와 공존할 수 있을지 아니면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지는 앞으로 우리가 생태사회를 이룰 수 있을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생태사회를 이루는데 문학생태학 역시 커다란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15)백가흠, 「다 주는 대초원⋯ '나를 내려놓는 법' 배웁니다」, 『조선일보』 2011.7.19. 16)베르터의 대항담론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김용민의 논문,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본 『젊은 베르터의 고뇌』, 『유럽사회문화』 제7집(2013) 참조. 17)“Vielleicht geht es im Osten" Interview mit Wolfgang Engler, in: taz, 2.10.2002. 18)칼렌바크의 소설 『에코토피아』에는 미국에서 독립해 생태국가를 만든 에코토피아 사회의 여러 제도가 그려진다. 특히 법정 노동시간을 주당 20시간으로 제한함으로써 일과 여가 그리고 삶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혁명적으로 바뀌었는가를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노동시간이 줄자 “국민총생산의 급격한 감소”가 일어나고 이는 오히려 근본적으로 새로운 생활방식과 사회체제를 도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펜클럽』에서도 주인공은 자본주의 세계가 요구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기로 작정하고 “일밖에 몰랐던 인간”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찾는 인간, 자유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는 “충분히 잠을 자고, 산책을 하며 하늘을 보고, 캐치볼을 하고” 쉰다. 그의 친구 역시 “하루 3시간만 일하고, 굶어죽지 않고, 나머지 21시간은 내 것이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