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lin File> directed by Ryu Seung-wan is a metaphor for the anxiety on the Korean Peninsula. This film is set in Berlin, which was the symbolic place of the Sunshine Policy, that was damaged by the Lee Myung-bak administration. This intelligence war shown as the reticular issue on Korean Peninsula. it’s not a only inter-Korean issue. This narrative which is a story about the spies made expendable by a power struggle is an allegory of a labor struggle fired by capital. And also it warns misdeeds which made by the spies’ act that was slipped into profession. This film has meaning that is described the North Korean regime of stereoscopic view more than another movies based on North Korea. But this film reflects the trend which is visualized and exaggerated the fear.
해방이후 분단과 전쟁으로 치달았던 비극의 역사는 북한에 대한 증오와 적의(敵意)를 고취시키는 촉매였다. 이를 바탕으로 많은 수의 반공, 방첩, 전쟁영화가 제작되었다.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된 1960년대 들어서면 영화 외에도 반공, 방첩을 소재로 한 텔레비전드라마가 더해 졌다. 1) 매주 새롭게 제공되는 프로그램과 잊을만하면 발생하는 간첩단 사건으로 인해 남한에서 간첩은 일상화된 공포였다. 이러한 공포는 독재정권을 유지시키는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했다.
1990년대를 지나며 공포를 바탕으로 권력을 유지했던 군사정권이 물러가고 세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공산권이 붕괴하면서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더 이상 의미 없어 보이게 되었다. 비로소 남한에는 반공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과 전쟁에 대한 반성이 시작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남한영화에서 북한에 대한 시선과 남파간첩에 대한 묘사 역시 변화하게 된다.
남북이 화해, 협력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2000년을 전후하여 그간 무시무시한 존재로만 그려지던 남파간첩들이 보다 친근한 이미지로 재현되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쉬 리>(1998)에서는 인간무기로 길러진 남파여간첩 이방희가 사랑스런 애인으로, <간첩 리철진>(1999)에서는 무시무시한 외모의 남파간첩 리철진이 도시에 적응하지 못하는 어리숙한 농촌총각의 이미지로 파격적인 변화를 보였다. 2) 이러한 극적 변화는 간첩이라는 이름으로 고통 받던 비전향 장기수 노인들을 기록한 <송환>(2003)에서 정점을 찍었 다. <송환>에서 그들은 오랫동안 자신의 신념을 지킨 올곧은 선비와 같이 그려졌다.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북한을 다룬 영화들 역시 다시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간 듯 했다. <태 극기 휘날리며>(2004)의 남북으로 엇갈린 형제처럼 애틋한 통일의 상대 북한은, 끝나지 않은 전쟁에서 결국은 서로 총부리를 겨눌 수밖에 없는 <고지전>(2011)의 병사들처럼 묘사되었다. 또한 <의형제>(2010), <간첩>(2012),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 <용의자>(2013), <동창생>(2013)과 같은 한동안 남한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남파간첩들을 소재로 한 영화들의 재등장은, 존재하되 눈에 보이지 않는 북한의 위협을 시각화하고 있다.
간첩영화의 재등장에 맞춰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한반도의 분단상황을 배경으로 한 첩보영화에 등장하는 남파간첩들은 무엇을 위해 남한에 침투하여 목숨을 걸고 활동하고 있는 것인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활동 배후에는 통일에 대한 집념이 도사리고 있다. 예를 들면 북한에서는 남한을 미제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시켜 민족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간첩을 침투시켜 도발을 감행한다. 북한의 위협에 대항하는 남한의 주인공들 역시 북한의 위협을 막아내고 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활약한다. 3) 이처럼 한반도를 배경으로 한 첩보영화에서 드라마를 만드는 주요 동인(動因)은 통일이며, 이는 이데올로기와 같은 거대 담론 들로 포장된 불안이다.
재미있게도 류승완이 연출한 <베를린>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북한 (스파이)을 소재로 한 영화들과 유의미한 차이를 보여준다. 4) 통일에 대한 신념이 사라진 듯, 분단과 통일이라는 한반도의 상황을 배제하고 북한을 바라본다. 5) 이를 위해 여타의 스파이영화들과는 달리 남한사 회에 침투한 간첩이 아닌 해외에서 활약하는 첩보원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남북의 스파이들은 더 이상 상대를 변화시키거나 파괴시키기 위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는다. 또한 이 영화에서는 통일이라는 거대명 분을 대신해 생존이라는 보다 실존적인 문제들이 불안의 모습으로 제시된다. 이는 불안이 만성화한 한국사회를 묘사하고 있다. 6) 그런 의미 에서 2013년 개봉작 <베를린>은 통일에 대한 신념이 사라진 한반도에서 첩보영화가 무엇을 반영하는지를 보여주는 유의미한 텍스트이다.
1)1964년 11월 KBS에서 방영되기 시작한 <실화극장>은 대표적인 반공, 방첩 드라마로 처음 단막극형태로 시작되었으나 1965년 6월 이후 연속극 형태로 바뀌어 다양한 제목 으로 1983년까지 방영되었다. <人氣 長壽프로 巡禮 (6) 實話劇場 KBS—TV>≪동아일보≫ 1970.9.5. 2)김영준과 김승경은 남한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남파간첩들은 결국 자살하거나 암살당 하는 식으로 남한사회에서 퇴출당한다고 지적한다.(김영준⋅김승경, 「최근 한국 첩보영 화에 대한 연구」 『다문화콘텐츠연구』제15집, 2013, 255쪽) 이는 햇볕정책으로 일상적인 공포였던 간첩이 더 이상 공포로써 역할하지 못함을 은유한다고 볼 수 있다. 3)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했듯이 이 영화는 ‘분단’이라는 소위 역사적 트라우마가 부재하기에 여타의 영화와 차별성을 갖는다. 통일에 대한 집착은 분단이라는 트라우마의 병리적 증상이기도 하다. 4)권은선은 탈냉전시대에 살면서 냉전을 경험하고 있는 한반도의 모순적이고 역동적인 구조를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가 명명한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라는 용어를 빌려와 ‘탈냉전과 냉전의 비동시적 동시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권은선, 「한국형 블록버 스터에서 변화된 민족과 국가의 의미화에 대한 연구」 『영화연구』56호, 2013, 9쪽. 5)<베를린>은 기획단계에서 남한이 배제된 채 이야기가 구상되었으나 투자진행 단계에서 북한이 등장하는 영화에 남한이 사라져버리게 된 상황에 대한 우려로 수정되었다고 한다. <마지막 액션, 사자와 호랑이가 맞붙은 것처럼>≪씨네21≫, 580호, 2013.1.29, 72쪽. 6)정하제는 표종수가 IMF이후 정리해고로 쫓겨난 수많은 직장인들과 같다며 이 영화를 IMF이후 불안한 한국사회로 치환하여 해석한다. 정하제, 「‘스파이 영화’와 불안한 사회」, 『공연과 리뷰』 80호, 2013.3, 148∼149쪽.
2000년 3월 9일 남한의 대통령 김대중은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독일통일의 교훈과 한반도 문제>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그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실천과 비전을 담은 <베를린 선언>을 발표 한다. 이것은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을 돕고, 한반도의 냉전종식과 평화정착을 위한 남북 사이의 직접적인 대화를 제의한 것이었다. 동서로 분단되었다가 통일된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또 다른 분단국의 대통 령이 통일을 위한 비전을 세계에 공포한 것은 통일을 향한 상징적인 제스처 이상의 결과를 가져왔다.
‘따뜻한 햇볕이 두터운 외투를 벗긴다.’는 우화에서 가져온 ‘햇볕정책’은 김대중의 통일정책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단어로 남한이 북한의 경제개발을 도와 통일에 한 발 더 다가서겠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에서 오는 불쾌함과 더불어 남한의 대화제의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던 북한은 베를린 선언을 계기로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베를린선언이 있은 지 3개월여 만에 남북의 정상이 만나 통일에 대해 논의를 하는 자리가 마련되기에 이른다.
2000년과 2007년 7) 두 차례 개최된 남북정상회담은 분단과 전쟁을 겪으며 불신과 적의만 있었던 남북이 상호 신뢰를 쌓기 위해 펼친 노력이었다. 이 만남은 냉전이 마지막으로 숨 쉬던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이 돌기 시작했음과 분단 이후 처음으로 한반도 문제에 대해 남북이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임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었다.
민주정부 10년 동안 지속된 남북화해와 경제협력을 위한 노력은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명박 정권은 남북관계보다는 한미관계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북강 경책을 고수하던 미국의 부시행정부와 보조를 같이 했다. 남한 정부가 바람막이가 되어 국제사회의 언급을 자제시켰던 탈북자 문제 등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한 남한정부의 비판은 그 동안 지속된 남북 간의 신뢰에 찬물을 끼얹었다. 또한 실향민 출신의 기업인 정주영이 소떼를 몰고 방북하는 ‘세기의 퍼포먼스’를 통해 얻어낸 금강산관광은 관광객 피살사건을 계기로 중단되었다. 여기에 2009년 북한의 2차핵실험은 1990년대부터 국제사회의 골칫거리였던 북한핵문제를 더욱 악화시켰 으며 천안함사건(2010)과 연평도포격사건(2010)은 남북관계를 파탄지 경으로 몰고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정일의 갑작스런 죽음과 30세 초반의 젊은 지도자 김정은의 등장은 남북관계를 시야를 확보 할 수없을 정도의 불확실한 상황으로 만들었다. 한반도는 다시 냉전의 한가 운데에 서 있게 되었으며 남북은 스스로 통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잃고 말았다.
이러한 한반도의 우울한 상황을 연출자 류승완은 베를린이라는 공간을 통해 보여준다. 8) 신냉전시대 한반도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 안에서 보수정권에 의해 폐기된 햇볕정책을 되돌아보기에는 그 상징적 장소인 베를린이야 말로 가장 알맞은 장소이다. 9)
영화는 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 감찰요원 표종성(하정우 분)이 러시아의 무기중개상을 통해 중동에 북한미사일을 판매하는 것에서 시작 한다. 북한의 미사일이 거래되는 현장을 남한의 정보기관 국정원 요원 들이 감시하고 있다. 그러나 거래가 성사되기 직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요원들이 무기 거래 현장을 급습, 총격전이 벌어진다. 국정원 요원 정진수(한석규 분)는 사태를 주시하다 영화감독처럼 액션, 컷을 외치며 사건에 뛰어들지만 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남들이 만들어 놓은 상황 안에서 배우처럼 움직일 수밖에 없다. 상황을 지배하는 줄알았던 그가 도리어 상황에 지배당하고 만 것이다.
이 장면은 한반도의 문제가 남북의 문제만이 아닌 복잡 미묘하게 얽혀 있는 국제적인 문제임과 동시에 남한 스스로 해결(연출)할 수 있는 상황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준다. 한반도의 문제는 베를린 선언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간 것이다.
베를린에 온 청와대 조사관(곽도원 분)은 꼬여버린 사건으로 난처해진 정부의 입장 때문에 베를린 팀을 닦달한다. 이 때 팀장(최무성 분) 은 사건을 현장에서 지휘하고 있던 정진수가 알지 못하는 내용들을 보고한다. 정진수가 알지 못하는 내용을 보고하는 팀장이나 그 보고를 듣는 조사관이나 국가의 안보와 통일의 염원과 같은 거대한 신념 따위는 없다. 팀장에게는 베를린에서 성과를 올려 미국으로 영전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이자 성공의 보답일 뿐이다.
이 영화에서 스파이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위험에 뛰어드는 이유를 연출자 류승완은 그들의 직업이기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다. 베를린 주재 북한대사로 정세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리학수(이경영 분)는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이 개입하여 미사일거래에 실패하고 북한에서 새로운 감찰요원 동명수(류승범 분)가 파견된다는 사실을 들어 자신과 표종수 모두 위험에 빠졌음을 직감한다. 리학수가 자신의 생각을 표종성에게 전하는 장면에서 “표종성”이라 부르는 대신 평소와 다르게 “종성”이라는 사적인 관계에서 부르는 호칭을 사용 한다. 하지만 표종성은 “대사 동지”라는 공식직함으로 리학수를 대하며 자신의 직업이 뭔지 잊었냐며 질타한다. 표종수의 말처럼 이들은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시를 따르는 사람일 뿐이며 신념을 대신해 직업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남한의 국정원 요원 정진수도 마찬가지이다. 동명수에게 쫓기기 시작한 표종성이 납치된 아내 련정희(전지현 분)를 구하려 하자 국정원 요원 정진수가 표종수를 돕기로 한다. 표종성은 정진수에게 왜 자신을 돕냐고 묻자 정진수는 그게 일이니까 그렇다고 말한다. 민족의 통일이나 이데올로기의 우월성을 몸으로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 아닌 단지 그것이 그들이 부여받은 임무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인물들의 행동은 부여받은 임무에 의해 결정될 뿐 특별히 정의롭거나 태생적으로 악한 성품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베를린>의 표종수, 정진수는 <예루살렘의 아이히 만>과 조우하게 된다. 나찌 시절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했던 아이히만은 전쟁이 끝난 한참 후 체포되어 예루살렘의 재판정에 서게 된다. 아이히만의 재판을 한나 아랜트가 참관하여 조사한 그 관찰 보고서를 미국의 교양지 『뉴요커』에 기고했는데 이것이 “악의 평범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이 보고서는 후일 출판 되었는데 그 책의 후기에서 아랜트는 임무를 수행하는 인물이 사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자가 쉽게 저지르는 악행이 된다고 경고했다. 10) 마치 대통령선 거를 앞두고 일어난 <국정원댓글사건>과 <서울시공무원간첩사건> 등에서 드러났듯이, 부정한 사건을 위해 첩보행위가 이루어지고 그것을 수행하는 첩보원들이 이성적인 사고와 윤리적인 판단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때 성품이나 근면성과는 무관하게 악행을 저지른다는 것이다.
지적 성찰을 바탕으로 한 행동이 아닌 지시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스파이는 결국 거대한 기계의 소모용 부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남들이 만들어 놓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닌 자기 스스로 성찰하고 행동해야 한다. 영화에서 베를린의 소동은 북한을 지나는 가스관사업을 북한이 받아드리고 그 대가로 남한이 표동성을 북한으로 소환하기로 합의하며 봉합된다. 좌회전도 안한다는 빨갱이 혐오자 정진수는 스파이로서의 임무와 북한으로 소환될 표동성의 운명 사이에서 고민한다. 그는 임무를 포기하는 대신 표종수를 풀어주 기로 결정한다.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선택한 것이다.
7)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김대중 대통령, 2007년 남북정상회담은 노무현 대통령이 남한을 대표하여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했다. 8)2011년 MBC 창사 5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타임>의 <간첩>편을 연출한 바 있는 류승 완은 간첩을 소재로 한 영화제작을 위해(<베를린>의 프리프로덕션이었을 것이다.) 많은 수의 고정간첩이 암약한다는 남한에서, 사람 찾는 데는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는 시사인 기자 주진우와 함께 간첩들을 만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결국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프로그램을 마쳤다. 그래서인지 남북의 첩보원들이 활약하는 이 영화의 촬영지로 서울이나 평양이 아닌 보다 그럴싸한 유럽의 베를린이 선택된 듯하다. 베를린은 박정희정 권시절 최대의 간첩단 사건이던 <동백림사건>의 무대로 간첩이 활약하기에 적절한 장소로 설득력을 갖는다고 보았을 것이다. 9)벤야민은 “폐허와 함께 역사는 감각화되어 무대 속으로 이동해” 가며 역사극 속의 폐허는 아름다운 완전한 형체가 사라진 파편화된 조각으로, 이 파편을 통한 사유는 아름 다움을 넘어선 알레고리를 들어낸다고 했다. (발터 벤야민(김유동, 최성만 옮김), 『독일 비애극의 원천』, 한길사, 2009, 264쪽.) 벤야민의 주장을 원용하면 베를린이라는 영화 속 배경은 폐기된 햇볕정책의 파편이며 그 베를린을 통해 햇볕정책이라고 불린 대북정 책의 역사에 대해 되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10)한나 아렌트(김선욱 옮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391쪽.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이 영화가 “시작과 끝이 서로 다른”, “순진하고 감상적인 결말”을 가졌음을 지적한다. 11) 남북의 스파이들이 펼치는 전형적인 스파이 영화의 길을 따라가는 듯 보이는 이 영화는 어느 순간 삐그덕 거리며 다른 길로 방향을 바꿨다. 왜 이 영화는 스파이 영화의 제대로 된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한 것일까? 영화에서 보이는 부정교합은 혹시 이 영화가 알레고리적인 텍스트임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12)
영화의 처음은 다급하게 집에 들어온 표종수가 총을 분해해 숨기고 몸에 난 상처를 치료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곧이어 화면은 3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표종수의 몸에 상처가 생기게 된 이유를 알려준다.
비밀요원의 활동은 어디에든 그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클로즈업 된 상처는 그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났고 임무에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상처는 아물더라도 흔적을 남긴다. 세상에 흔적을 남겨 존재가 드러난 비밀요원은 더 이상 비밀요원으로써 역할을 수행할 수없다. 사라지는 것이 그의 주어진 운명이다.
쓸모가 없어진 비밀요원은 낡은 부품과 같다. 더 이상 그의 역할은 없다. 새로운 요원이 그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하지만 부품과는 달리 인간은 교체가 그리 수월치 않다. 표종수를 대신할 새로운 감찰요 원으로 동명수(류승범 분)가 베를린으로 파견되어 표종수보다 더 잔인 하게 일을 처리한다. 공화국영웅이라는 칭호가 의미하듯 표종수는 인간부품으로 길러졌고, 동명수의 등장에 인간부품으로서의 주어진 운명을 받아드린다. 절친한 후배이자 자신을 밀어낼 동명수의 지시를 따라 아내 련정희가 서방으로 망명하려고 한다는 의심을 한다. 그러나 망명을 위해 미국대사관으로 향하는 줄로만 알았던 아내가 사실은 임신진 단을 위해 병원을 찾은 것임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자신이 음모에 빠졌음을 깨닫는다.
몸에 생긴 상흔은 몸에 새긴 기록이며 이는 곧 개인의 역사이다. 스파이는 역사에 이름을 남겨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그러나 아내의 몸에는 그가 존재했었음을 증명하는 아이가 자라고 있다. 아내의 뱃속에 든 아이는 표종수가 스파이로서의 운명을 거스르게 하는 계기이다. 표종수는 자신의 역사이자 미래와도 같은 존재를 지키고자 발버둥 친다. 이것은 본능이다. 13)
더 이상 비밀요원일수 없는 비밀요원이 자신의 가족을 지키고자 새로운 비밀요원과 사투를 벌이기 시작한다. 이로써 전형적인 스파이영화로 시작했던 <베를린>은 스파이로써의 운명과 그 운명을 거스르는 본능이 싸움을 벌이는 변형된 스파이영화이자 가족을 지키려는 가장의 사투를 그린 감상적인 드라마가 된다. 국가의 부속품인 스파이가 국가나 이데올로기 혹은 자본과 같은 거대한 시스템이 무리 없이 굴러가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는 것이 아닌 시스템을 멈추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스파이의 아이러니는 <설국열차>(2013)의 열차를 세우려는 탑승객처럼 의미심장해 보인다.
<본 시리즈> 14) 와 같은 할리우드 첩보영화에서처럼 <베를린>의 서사는 스파이와 스파이에게 임무를 준 기관 사이의 갈등으로 바뀌었다. 정통적인 장르의 특성을 비틀어서 장르를 새롭게 구현한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IMF이후 본격적으로 자리 잡게 된 신자유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일상적인 불안을 알레고리한다.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본이 강력한 힘을 발휘한 다. 15) 자본이 큰 힘을 발휘할수록 인간은 도구화 된다. 역설적이게도 도구화에 저항할수록 사회는 전체주의적으로 바뀐다.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는 개인을 억압하기 위한 시스템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자본과 자본의 후견인인 국가는 방송과 신문을 장악하고 인터넷을 통제하여 자본과 국가에 불리한 정보는 차단한다. 사회의 갈등은 자본에 대한 복종을 강화는 시스템을 새로 만들어 봉합한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사회이지만 한 겹만 벗겨보아도 사회는 메스를 대서 터트려야 할 정도로 심각하게 곪아 있다.
이 영화에서는 특히 표종수가 가족을 지키기로 마음먹기 시작하며 불화가 시작된다. 표종성의 불안은 노동유연화라는 시스템으로 인해 언제 해고를 당할지 모르는 개인과 신자유주의 사회의 불화를 알레고리한 것이다. 자본에 의해 해고가 자유로워지면서 개인은 생존을 위협 받는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한다. 자유로운 해고는 곧 가정의 붕괴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가정의 붕괴를 막기 위해 개인은 시스템의 통제에 따르거나 아니면 이에 저항한다. <베를린>에서는 국가의 명령을 거부하고 탈주를 감행하는 식의 저항을 펼친다. 저항의 모습은 아내가 납치되고 납치된 아내와 뱃속의 아이를 구출하기 위해 표종성이 분투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갈대숲이 무성한 외딴 곳에서 벌어지는 총격전에서 아내가 총에 맞아 죽고 아내의 죽음과 함께 뱃속의 아이도 죽고 만다. 자본에 의해 저당 잡힌 미래는 결국 파국으로 끝난 것이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의 자유로운 해고는 단란했을 가정의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할 뿐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은 도구화된 인간의 모습은 표종성의 아내 이자 북한대사관 통역 연정희가 국가를 위해 접대를 나가는 장면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아내가 서방으로 망명할 것이라 의심하는 표종성 에게 련정희는 “그럼...어캅니까? 접대도 명령인데..”라고 자신이 명령에 의해 접대에 나갔음을 고백한다.
사회가 전체주의화 될 때 개인의 존엄은 사라지고 오직 지시와 명령, 이에 따른 복종만 남게 된다. 가정을 이루고 있는 련정희가 접대에 나서는 상황은 언론사 사주와 방송국PD, 대기업 임원 등이 연루된 <장자연 사건>을 연상시킨다. <장자연 사건>은 캐스팅, 스폰서, 협찬 등 사회적 관계를 이유로 젊은 여배우를 성적노리개로 이용한 사건이다. 연예권력이 성접대를 강요할 때 연예계의 위태로운 위치에 서 있던 여배 우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불합리한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불합리한 상황을 고발하고자 장자연은 유서를 쓰고 자살했다. 인간답게 대우받기를 원하며 죽음을 택한 여배우의 염원과는 달리 사회적 강자들은 어떠한 피해 없이 여전히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 16)
자본에 의해 지배당하는 우울한 사회에서 자본에 대한 저항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불합리한 상황에 저항했던 고통 받는 약자인 련정희는 총격전으로 사망하는 것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다. 사회에서 거세될 위치의 표종성 역시 가정과 미래를 빼앗기게 된다. 이렇게 <베를린>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불안을 알레고리하고 있는 것이다.
11)정성일, <나는 정말 스파이 영화를 본 것일까>,≪경향신문≫, 2013.2.3. 12)사물은 알레고리를 구사하는 주관적인 작가의 손을 거치면서 “다른 것”이 된다. 이는 “좁은 의미로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 넓은 의미로는 형상과 의미의 불일치라 부른다.”(최문규, 『파편과 형세』, 서강대학교출판부, 2012, 205쪽.) <베를린>에서는 스파이영화 장르의 관습과 어긋나기 시작하며 관객이 스파이영화가 아닌 다른 모습의 영화를 상상 토록 한다. 13)김영준과 김승경은 “1960년대 첩보영화에서 가족은 영화적 반전을 위한 멜로적 장치였 다면 최근의 첩보영화에서 가족은 스파이로 살아가는 근본적 이유”라는 말로 최근 첩보영화에서 국가를 대신한 것이 다름 아닌 가족임을 지적한다. 김영준⋅김승경, 위의 논문, 259쪽. 14)본 시리즈는 로버트 러들럼(Robert Ludlum)의 소설 속 주인공 제이슨 본을 주인공으로한 <본 아이덴티티>(2002), <본 슈프리머시>(2004), <본 얼티메이텀>(2007)을 말한다. 15)권은선은 기존의 한국형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자본과 국가라는 이질적인 경계를 민족이 라는 상상이 매개했으나 <베를린>에서는 그 어떠한 매개 없이 이것이 이어지고 있음을 지적하며 신자유주의체제의 자본은 어떠한 경계에서도 자유롭다는 점을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권은선, 위의 논문, 14∼16쪽. 16)동명호(명계남 분)가 류승완의 전작 <부당거래>의 앤딩처럼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위기를 벗어나는 것을 국가기구와 동체화된 권력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윤광은, <베를린, 이데올로기라는 아버지의 죽음>, ≪미디어스≫, 2013.2.8.) 이러한 지적처럼 이 영화는 <부당거래>와 짝을 짓고 있는 영화로 볼 수 있다.
2013년 12월, 김정은 체제에서 실세로 인정받던 장성택이 숙청되었 다는 뉴스는 북한 내부에 권력암투가 있었고 그것이 정리되었음을 보여준다.
김정일 사후 북한정권을 승계한 김정은은 김정일의 아들이라는 점이외에 내세울 것이 없었다. 17) 할아버지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경력을 바탕으로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올랐고, 아버지 김정일은 권력을 이어받기 오래전부터 능력을 발휘한 바 있다. 그런 면에서 김정은으로의 권력이전이 순조롭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전망은 설득력을 가졌다.
김정은 체제를 지지해줄 수 있는 인물로 김정일의 유일한 혈육인 김경희의 남편이자 김정일의 최측근이던 장성택이 꼽혔다. 그러나 장성택이 숙청됨으로써 김정은은 더 이상 후견인이 필요 없는 상태임을 대내외에 선포하게 되었다.
<장성택의 숙청>에서 보듯 북한의 권력투쟁은 복잡하고 드라마틱한 전개과정을 보여준다. 하지만 남파공작원들을 다룬 남한영화들은 북한 권력의 내부를 피상적으로 그릴 뿐이다. <은밀하게 위대하게>처럼 간첩을 내려 보내지만 그들에게 제대로 된 임무를 부여하지 않고 불가능한 임무를 부여하는 비상식적인 행동의 근원으로 북한 내부가 묘사 되기 일쑤이다. 이러한 단순한 설정과 묘사와는 달리 <베를린>은 북한 내부의 권력투쟁을 해외비자금과 연관 지어 보여줌으로써 영화의 안타고니스트인 북한 내부를 단순하지 않은 존재로 그려낸다. 그런 면에서 <베를린>은 세련된 첩보영화이자 <장성택 숙청>이라는 북한 권력투쟁의 징후를 예견한 영화로 평가 받을 만하다.
최근 <베를린>이외에도 북한 관련 영화들이 유행이라 할 정도로 넘친다. 통일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북한은 남한영화의 주요한 소재라는 점은 흥미롭다. 북한 소재영화의 범람은 6.25전쟁 발발 60년, 휴전 60년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념 외에도 다른 정치적 목적들이 내포해 있다. 민주정부 기간에는 <남남북 녀>(2003), <만남의 광장>(2007) 등 평화를 과장한 코미디영화나 <태 극기 휘날리며>의 국민보도연맹사건, <실미도>(2003)의 북파공작원문제 등 독재정권시기에 언급할 수 없었던 민감한 역사적 문제들에 대한 이의제기 성격이 강한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반면 최근에 만들어지는 영화들은 무겁지 않은 톤으로 남파공작원을 출연시켜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고 시각화하는데 주력한다.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고 긴장을 과장하는 것은 남북의 대결을 부추기는, 과거 냉전시대와 같은 문제가 아니기에 더욱 문제적이다. 북한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언급은 그것이 향하는 최종 목적지가 북한 정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북한과 화해 협력을 주장했던 남한의 정치 세력에 있기 때문에 결국은 남남문제일수밖에 없다.
북한 문제에 대한 발언은 남한의 민감한 정치문제를 희석시키기 위해 집권세력이 야당세력을 공격하기 위한 정쟁의 도구로 손쉽게 이용 된다. <이석기 의원 간첩사건>, <진보당 해산청구 심판> 등에서 볼수 있듯이 북한과 관련한 사건들이 발생하고 이것이 언론에 의해 확대되면 정권에 부담이 되는 <대선부정>이나 <국정원 댓글 파동> 등각종 의혹사건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북한 문제야 말로 현 집권세력에겐 정국전환에 가장 잘 듣는 특효약인 샘이다.
과거 군부독재 시절도 비슷했다. 독재세력은 북한의 위협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북한의 위협을 강조할수록 강력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야당에게 정권을 맡길 수 없다는 인식이 퍼져 자연스럽게 군출신의 대통령이 정권을 맡아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이러한 논리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와 같은 군출신 대통령들이며, 가장 큰 희생양은 평화통일을 주장한 김대 중이었다. 김대중은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대통령후보로 나와 대북위협을 근거로 이루어지고 있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고 <향토예비군제도폐지>, <4대국한반도평화보장론>, <3단계평화통일 방안> 등 파격적인 방안들을 공약으로 내놓았다. 대통령 선거 이후 그에게는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만다. 박정희 사후 쿠테타로 정권을 잡으려는 전두환 세력은 이러한 김대중의 낙인을 이용하여 광주민 주화운동의 배후로 그를 지목하여 정권장악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시대가 바뀌어 빨갱이로 낙인찍혔던 김대중이 대통령에 선출되어 햇볕정책이라는 남북경제협력과 긴장완화 정책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민주정부 10년을 지나 보수 세력이 집권한 후 햇볕정책은 폐기되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북한에 대한 비난과 이에 따른 갈등, 긴장이 고조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북한에 대한 비판은 그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김대중으로 대표되는 통일세력을 비판하기 위한 수사로 사용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남한에서 만들어지는 북한관련 소재 영화는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고 평화를 무의미하게 바라보기에 우려스러울 따름이다.
<베를린>이 아무리 한국사회의 불안을 알레고리 했다고 해도 외양은 베를린에서 바라본 북한 내부의 권력투쟁을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이 영화가 햇볕정책이 종막을 고하고 나타난 비판적인 북한 소재영화의 리스트 안에 들어갈 것임은 물론이다. 여러 가지 장점을 지녔음에도 반공방첩영화의 맥락에서 바라보는 일각의 시선에 대해서도 귀를기울일 필요가 있다. 18) 남한정부의 숨겨놓은 비자금을 둘러싼 암투를 그린 영화를 북한에서 제작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 시각으로 만들어진 영화에 대해 남한의 어느 누구도 대남선전영화 이상도 이하도 아닌 영화라 혹평할 것이 뻔 하지 않겠는가?
17)김일성의 직계가족이라는 소위 백두혈통의 강조는 북한이 혈연을 통해 권력을 세습하는 왕조국가임을 보여준다. 그런 측면에서 김정은이 김일성의 손자이자 김정일의 아들 이라는 점은 권력의 가장 큰 원천이다. 18)권은선은 <베를린>이 ‘해외를 배경으로 삼았다는 점, 액션, 첩보 행위에 몸이 스펙타클의 요소로 사용된다는 점들을 들어 70년대 만들어진 <70홍콩황금작전>과 같은 ‘반공방첩 영화’들의 계보에 놓일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권은선, 위의 논문, 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