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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자유의 언덕>의 전략적 모호성에 대하여 On The strategic vagueness in Hill of Freedom by Sang Soo Hong
  • 비영리 CC BY-NC
홍상수 <자유의 언덕>의 전략적 모호성에 대하여

One of these words to describe Hill of Freedom may be vagueness. There, however, it is necessary for us to know differences between uncertainty and vagueness. When it comes to pragmatic linguistics, uncertainty is a continuance of ambiguity. When this phenomenon has more than two interpretations as Rubin’s vase does, you can then say that the phenomenon is ambiguous. On the other hand, vagueness refers to this discourse that does not have anything to actually judge it from others. For instance, predicates such as “One is pretty” or “One is bad” are said to be vague because those predicates do not have any objective indicators as “One is pretty” or “One is bad” is only some subjective description but nothing else.

One of the greatest features to discriminate films by Sang Soo Hong from others is how Hong is willing to go for narrative explorations. What is important there is, those narrative explorations are not tried simply for pursuing entertaining pleasure but for investigating humans’ abysses as well as their contradictions. As Charles Tesson, a French film scholar, has said, “what makes Sang Soo Hong unique is how he wants his delicate, formal experiments and everything from dual structures to circular structures and time-cross to focus on every character in his films” When Sang Soo Hong works on the narrative experiments, Hong does not let figures, in other words, characters, get sacrificed. Instead, such narrative confusion increases audiences’ curiosity and doubts in relation to the characters which eventually leads the audiences to have this particular interest in the figures in Hong’s films. The interest there is what the audiences have never had when it comes to these conventional characters.

As for the vagueness of Hill of Freedom, its responsibilities do not differ from these of other vagueness. In Hill of Freedom, audiences find it difficult to understand narrative arrangements as they have hard time reconstructing a plot and keeping up with inconsistency of the characters. In short, it is impossible for the audiences to 100% understand Hill of Freedom through conventional narrations. Despite that, such vagueness does not halve how people get attracted by the film but invites them to realize these abysses of their lives which could be revealed through a media called film. That is why the vagueness constantly observed in Hill of Freedom by Sang Soo Hong is regarded not as a coincidence but as an outcome of strategic planning.

In terms of the first strategy in relation to the vagueness, Hong intentionally violated narrative reconstructions. What Hong wanted to violate was these traditional, conventional models of narrative structures which were, in other words, good plots. Good plots basically lead the audiences to get themselves really immersed in stories which makes them to have these senses of fear and sympathy and in the end, the audiences get satisfied with a fact that they are living in a safe place outside a stage, a fictional world. That is what defines the use of conventional plots, as Aristotle had said. Again, what has been discussed so far is another reason for why the narrative violation of Hill of Freedom is understood as an overturn of the traditional narrations which have been always seeking empathy or sympathy. Hill of Freedom looks for a fictional narration that does never get assimilated.

Such pursuit of the film gets intensified even more greatly through a strategy called sticking to narrations and objective points of view which is why Hong chooses English as a main tool for communication. The key responsibility of a mother tongue lies in how it makes it easy for one who speaks the language to communicate with others. When everyone speaks in a foreign language, absences of communication make it hard for one to get immersed in or get assimilated into.

In the end, the vagueness of Hill of Freedom is considered a strategic choice to make an automated life feel unfamiliar. By making such choice, we break automation of our daily lives and come to realize how new the lives could feel. The lives there have been so familiar that we have been the least sensitive about them. By disturbing and distracting customs and orders, the audiences find discomforts in their everyday lives, and that is what definitely separates the narrations of the film from commercial narrations which have been continuously demanding assimilation and empathy. Not simply selling hallucinations but reminding the audiences of uncomfortable senses. Giving the audiences chances to wake up but not to get immersed in. They are what, this study believes, is aesthetic value of the vagueness of Hill of Freedom by Sang Soo Hong.

모호성 , 서사적 전략 , 시점 , 나레이션 , 외국어 , 동일시 , 플롯 , 허구적 재구성
  • 1. 홍상수 영화의 모호성

    <자유의 언덕>은 모호하다. 여기서 모호함과 애매함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화용적 언어학에 있어 애매함은 중의성(ambiguity)과 맥락을 같이 한다. 루빈의 술잔처럼 하나의 표상이 두 개 이상으로 해석 가능할 때, 그것이 바로 애매한 것이다. 반면, 모호한 것(vagueness)은 판단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언술을 지칭한다. 가령, 누구는 예쁘다, 나쁘다와 같은 서술어와 같은 경우를 들 수 있다. 예쁘다나 나쁘다는 주관적인 서술이기 때문에 객관적 지표를 기준으로 내세울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홍상수의 영화 세계는 모호했다기보다 애매했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오! 수정>에서 서로 모순되는 진술이 두 개의 서사를 구성한다거나 환상과 사실 사이에서 메인 플롯과 서브 플롯이 긴장할 때, 그것은 서로 반대되는 의미소로 서로 길항했다. 그리고 그 긴장의 힘이 곧 홍상수 영화의 새로움이자 지적자극이기도 했다. 역방향 플롯(backwards plot), 반복되는 플롯(repeated action plot)과 같은 홍상수 영화의 서사구조에 대한 명명들도 이를 잘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러한 명명들은 관습적으로 질서라고 여기는 선형적 플롯 질서에 대한 대안 플롯(alternative plot)으로 해석되어 왔던 셈이다.

    대안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이는 전형적 플롯의 반대편에 놓인 제안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자유의 언덕>의 서사는 단순히 대안 플롯 혹은 역방향 플롯, 반복되는 플롯과 같은 기존의 서사용어로 도저히 해석되지 않는 잉여를 가지고 있다. <자유의 언덕>이 애매한 영화라기 보다 모호한 영화로 분류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즉, 두가지 정도의 가능한 해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마다 각기 다른 해석을 한다 해도 그것을 틀렸다고 말할 객관적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자유의 언덕>은 최소한의 객관성을 추구하는 작품이다. 알랭 바디우의 표현을 따르자면, <자유의 언덕>엔 진리는 없고 의견만이 가능하다.1)

    홍상수 영화를 동시대의 다른 영화들과 구분케 하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서사적 탐험 정신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서사적 탐험이 오락적 즐거움을 위한 단순한 조작이 아니라 인간의 심연과 그 심연의 모순을 탐구하는 과정으로 도입된 조작이라는 점이다. 프랑스 영화학자 샤를 테송이 말하듯, “홍상수를 유니크하게 만드는 것은 이중 구조나 원형 구조, 시간의 교차 등 정교한 형식적 실험 등이 모두 캐릭터의 탐구에 복무하는 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2) 홍상수의 서사 실험에서 인물 즉 캐릭터는 희생되지 않는다. 오히려 서사적 혼돈은 인물에 대한 호기심과 의아함을 증폭시켜 전형적 인물에게 허용될 수 없는 관심을 부여한다.

    <자유의 언덕>이 지닌 모호함의 역할도 마찬가지이다. <자유의 언덕>은 서사적 배치나 줄거리의 재구성이 어렵고 인물의 일관성도 찾기 힘들다. 즉, 관습적인 서사를 통해서 <자유의 언덕>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호함은 영화에 대한 매혹을 반감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밝혀질 수 있는 삶의 어떤 심연을 가리킨다. 홍상수의 <자유의 언덕>을 가로지르는 모호성을 우연이 아닌 전략적 기획의 결과로 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에 본 고는 홍상수 <자유의 언덕>의 모호성의 전략적 기법과 차원을 분석하고 그것의 의미와 의의를 찾아보고자 한다.

    1)알랭 바디우, 장태순 역, 『비미학』, 이학사, 2010.  2)Charles Tesson, ‘DecouvrirHong Sang Soo’, Cahiers du Cinema No.536, 1999, p.15. (장병원, 『홍상수 내러티브의 ‘비조화 패턴’ 연구』,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박사논문, 2012,에서 재인용)

    2. 서사 관습을 전복하는 서사적 전략

       1) 허구적 재구성의 불가능성과 위반

    여러 편의 영화 리뷰에서 언급되었듯이, <자유의 언덕>을 서사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3) 어딘가 먼 곳으로의 요양에서 돌아온 권영화(서영화)가 자신이 근무하던 어학원에 맡겨진 편지를 찾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편지는 한동안 어학원에서 함께 일했던 일본인 모리가 써놓고 맡겨둔 것이다. 학원 입구 대기석에 잠시 앉아 영화는 겉봉의 메모와 첫 번 째 편지를 읽는다. “당신에게 쓴 편지라 보냅니다. 괜찮나요?”라는 메모가 붙어 있는 편지지 속에서 꺼낸 첫번 째 편지에는 모리라는 이름의 남자가 공항 활주로에 내려, 휴안이라는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게 된 것 그리고 영화가 좋아하던 일본식 이름의 카페 ‘자유의 언덕’에 들렀다는 내용이 담백하게 서술되어 있다.

    문제는 바로 그 다음 장면, 영화가 편지 뭉치를 놓쳐버리면서 그만 편지가 뒤죽박죽 섞이고 만다는 것이다. 모리는 쓴 편지들을 나란히 모아 봉투에 담았지만 이미 떨어져 버린 편지를 주었기에 본래의 순서에서 어긋날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으로 편지 중 한 장은 이내 영화의 손에 들어가지 않는다. 카메라는 이 ‘잃어버린 편지’를 디졸브해서 잠시 주목한다.

    이후의 이야기는 크게 두 개의 서사로 진행된다. 하나는 영화가 카페 자유의 언덕에 들러 모리의 편지를 읽는 서사적 현재의 서사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현재의 서사를 액자로 삼아 품어진 편지 속 이야기들, 즉 모리가 편지에 써놓은 이야기들이다. 영화가 한 장 한 장 읽어 나갈 때, 편지 속의 서사 즉 과거는 서사적 현재로 재현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서사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의 순서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의 순서 즉 스토리의 순서와 결부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관습적으로 선후관계를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즉, 먼저 본 장면은 먼저 일어난 일, 나중에 본 장면은 나중에 일어난 일임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다. 영선이 모리를 살갑게 대하는 것을 영선의 독특한 성격으로 보았던 관객들은 그것이 모리가 영선의 강아지 꾸미를 찾아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임을 뒤늦게서야 알게 된다. 그러다보니,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은 눈으로 보는 장면의 순서를 실제 일이 일어난 스토리의 선후관계에 맞춰 재구성하려는 욕구에 시달린다. 문제적인 것은 애초에, 홍상수 감독이 선후관계를 무너뜨릴 의도로 편집했다는 점이다. 서사의 필연성, 그것을 의도적으로 훼손한 것이다. 선후관계를 뒤섞어 놓았을 때 인과론에 익숙해진 관객들이 그 필연성(necessity)을 찾기 위해 노력할 것임을 예측하고 일부러 순서를 위배했던 셈이다.4)

    관객들이 찾고 있는 ‘필연성’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 개연성부터 강조된 서사의 인과율의 법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서사는 “개연성 또는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여러 가지 삽화들이 상호간에 개연적 또는 필연적 관계도 없이 잇달아 일어나는” 플롯을 졸렬하다고 비판한다. 그는 “한 사건이 다른 사건으로 ‘인하여’ 발생해야지, ‘이어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5) 여기서 말하는 ‘인하여’는 단순한 선후관계 정도가 아니라 앞선 장면과 뒤에 이어 나오는 장면 사이의 서사적 필연성에 의해 자리매김된 서사적 질서를 의미한다. 즉, 전체라는 커다란 서사적 기획 아래 앞, 중간, 뒤의 순서가 고정적으로 자리 잡아야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고전적 서사학에서는 심지어 어떤 사건을 하나라도 옮기거나 바꾸면 전체가 일그러지거나 망가져야만 한다. 그래서 이러한 전통적 서사 구조에서는 처음과 중간 끝이 분명하게 나뉘어야 한다. 서구의 서사적 일관성을 합리적 질서이자 규칙으로 여겨온 관객들에게 일관성과 필연성은 서사의 주요한 구성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홍상수는 의도적으로 편지를 흐트러뜨려 서사적 일관성과 필연성의 재구성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6) <자유의 언덕>에서는 서사가 진행될수록 재현은 불가능해지고 재현의 리얼리즘 위에 구축되었던 전통적 서사학의 질서는 희박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이러한 훼방의 의도는 무엇일까? 이는 극중 모리가 영선에게 하는 대사를 통해 암시된다. 모리는 늘 손에 책 한권을 끼고 다니는데, 영선이 그 책이 무엇이냐고 묻자 모리는 『시간』이라는 제목의 책이라고 대답해준다. 그리고, 그 책의 내용을 이야기하며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관념의 틀이라는 게 과연 절대적인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이 가능해진다. 서사의 욕망 한 가운데에는 인과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인공적 질서로 재구축하려는 바람이 놓여 있다. 즉,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허구적 세계에서는 개연성이나 필연성에 따라 사건이 발생하지만 실제의 삶 속에서 개연성은 우습게 무시된다. 보르헤스의 소설이나 사자 성어들이 말하는 세계의 원리도 유사하다.7) 오히려 실제의 삶에 인과성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허구적 세계에서라도 그 인과성을 구축함으로써 불가해한 세상을 이해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홍상수는 인공적 세계의 인과관계가 결국 삶이라는 실재 앞에서 허망한 환상일 뿐임을 보여준다. 서사 자체가 허구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부분이다. 이미 홍상수는 전작들에서 개연성이나 필연성으로 이해 불가능한 세계의 모습을 여러 번 보여준 바 있다. 동일한 사건들이 반복을 거듭함에 따라 변질되기도 하고, 서로 모순되기도 하면서(이를테면, <오!수정>에서 엇갈린 기억에 대한 묘사들) 완고한 세계의 규칙성에 대해 의문을 제시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유의 언덕>에서는 이 개연성과 필연성에 대한 의구심을 선후관계의 불가능성으로까지 심화한다. 인과관계가 이성적 재구성이자 합리화면 선후관계는 말 그대로 시간의 순서에 따른 재배치이다. 과거 홍상수의 영화가 이 불합리한 세계를 인과적으로 재구성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증상이었다면 이제, 아예 선후관계 조차 모호한 세계로 그 심연이 깊어진 것이다. 홍상수는 인과관계는 커녕 선후관계의 재구성조차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선언은 대개의 대중적 상업 영화들이 지향하는 환상의 제공과 정반대편에 놓인 홍상수 영화의 현재적 가치와 연관된다. 대중 영화들은 현실에 불가능한 초월적 영웅이나 합리적 해결, 정의로운 결말을 영화가 제공할 있는 달콤한 환상으로 준비하곤 한다. 허구적으로 재현된 서사 안에서 현실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명예회복이나 인생의 전환이 장면으로 제시된다. 영화가 줄 수 있는 소박한 행복이라는 이름의 이 환상을 홍상수의 영화는 거짓 환상으로 규정한다. 영화를 통한 허구적 재현의 공간에서 진짜 삶에 없는 진실이 구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전복하고 있는 것이다.

       2) 객관적 시점과 주관적 나레이션의 아이러니

    인물이 시점자가 될 때 그래서 그의 시선이 곧 카메라의 시선과 동일시 될 때 우리는 주관적 시점이라고 부른다. 겉으로 보아 시점의 주인이 곧 인물의 눈으로 병치되지 않는다하더라도 그가 보는 것을 관객이 보게 되고, 한편 그의 의식을 카메라가 쫓아갈 때 이는 넓은 의미의 주관적 시점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와 반대로 인물이 카메라 앞에 그 내면이나 의식을 보여주지 않은 채 중계될 때 즉 카메라 뒤에 있는 누군가의 시점에 의해 보여질 때, 그 눈은 객관적 시점의 시선으로 여겨진다. 시점은 시네아스트가 특별한 의도를 갖고 선택한 것이며, 특별한 목적을 위해 계산되고 구성된 시선의 지점이다. 즉, 시점은 어떤 특정한 각도로 대상, 풍경, 현실의 일부 등을 바라보는 것이고, 관객으로 하여금 그 특정한 각도로 동일한 것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8)

    <자유의 언덕>은 시점으로만 보자면 제3의 시선에 의해 모리와 그가 만난 사람들을 보게 하는 철저한 객관적 시점을 견지하고 있다. 모리는 휴안이라는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고, 카페에 들르며,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 여자와 그녀의 조카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신다. 이전의 홍상수 영화들이 내적초점화에 의해서 인물의 내면을 정신적 주관성으로 중계하는 정신적 주관시점을 쓰곤 했던 것과 달리, 모리는 철저히 객관적 피조물로서 장면 속에 등장한다. 그의 내면이나 정서, 주관이 여과될 만한 시점의 몫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 언덕>을 모리의 내면과 주관의 서사로 읽는 것은 바로 나레이션 때문이다. 이것 역시 사뭇 역설적인데,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영화의 나레이터는 편지를 읽고 있는 영화이다. 모리가 남기고간 편지를 영화가 읽고 스토리는 영화가 읽는 그 편지의 내용 그대로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귀에 들리는 목소리는 분명 모리의 것이지만 그것은 실상 묵독하고 있는 ‘영화’의 내면 독자 목소리라고 할 수 있다.

    영화적으로 현재로 체험되는 모리의 서사는 모두 과거이다. 즉, 변경되거나 변형 불가능한 것이다. 관객들은 영화가 읽고 있는 편지의 독서 체험 순서에 따라 모리의 경험을 시각적으로 체험한다. 여기서, 왜 모리가 체험하고 있는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이나 정서, 갈등과 고민을 짐작할 수 없는 객관적 시점의 대상인지가 드러난다. 그것은 일주일의 시차를 두고 모리의 체험기를 읽는 영화의 시점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모리가 체험한 이야기 바깥의 서사적 차원에 존재한다. 액자 구성 안에서 액자의 내부에 모리의 체험이 있다면 그 바깥에 영화가 존재하며 그리고 그 외부에 <자유의 언덕>을 구성하는 제 3의 시점이 존재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나레이션의 개입이다. 모리가 쓴 편지를 읽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편지의 목소리는 모리의 나레이션을 통해 전달된다. 편지의 내용은 모리가 영화에게 사랑과 존경, 기다림과 그 어려움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편지는 편지라기 보다는 일기에 더 가깝다. 일기라는 글쓰기의 특성상 모리의 글은 고백의 성격을 띠게 된다. 게다가 그 내용이 모리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됨에 따라 고백은 편지글의 양식적 특성을 벗어나 나레이션의 성격으로 확장된다. 즉, 모리의 나레이션은 영화를 향한 고백의 목소리가 되는 것이다.

    고백이란 내면을 전제로 한 발화행위이다. 고백이란 진실이라는 것을 가정할 때 그것을 전달하는 특수한 행위와 서술을 지칭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이 때 편지 속의 화자는 모리가 된다. 즉 문자-서술의 측면에서 모리는 내적초점화자로 등장한다. 관객은 편지의 청자가 되어 모리라는 화자가 전달하는 내용만을 듣게 된다. 즉, 편지의 서사 안에서 관객은 외적초점화서술자가 말하는 내용만을 수동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는 청자 역할을 요구받는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내화의 경험이 객관적 시점자를 통해 시각적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청자로서는 모리의 목소리를 따라가야만 하지만 그 서사 바깥에서 관객들은 그의 행동을 통해 판단하는 정신적 주관적 시점자로서 모리를 인식한다. 이러한 이중의 과정을 거쳐, 모리의 행동은 겹겹이 싸인 액자 안에 갇히게 된다.

    고백이 객관적으로 서술됨에 따라 고백을 통해 가능한 공감과 연민은 형식적으로 차단된다. 모리는 고백하고 있는 주체이지만 도무지 그 내면이나 심리에 대해 공감할 만한 단서가 제공되지 않는다. 쓰인 내용 그대로를 읽는 영화에 의해 중계되고 있기에 모리가 써놓은 문자적 사실과 그가 했다는 명확한 행동만이 그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된다. 그가 어떤 것을 어떤 관점에서 보았는지 짐작할 수 없고,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유추할 수 없다. 마치 맥락을 잃은 채 행동만은 연기하는 배우처럼 모리는 영화의 독서 체험의 순간을 재현하는 꼭두각시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그는 취하고, 자고, 밥먹고, 걷고, 기다리고, 영선의 강아지를 찾아주고, 영선과 동침을 하고, 영선의 화장실에 갇힌다.

    당연히 고백의 주체라면 왜 취했고, 걸을 때 무엇을 어떤 심경으로 보았으며, 왜 영선과 잠자리를 가졌으며 그 망설임이나 자책감은 무엇인지 드러내야 한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이입하게 되는 인물은 대개 시점자인 경우가 많다. 심지어 객관적 시점일때조차도 그 시점은 인물이 바라보는 것을 함께 봐줌으로써 인물의 내면을 관객이 유추할 수 있도록 중계한다. 가령, <강원도의 힘>에 등장하는 장면만 해도 그렇다. 교수임용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상권은 자신의 증명사진을 들여다본다. 영화 화면에서는 증명사진을 들고 있는 손만 보이지만 관객들은 상권이 그 사진을 어떤 심정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지 맥락 가운데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9) 발화되거나 표현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아마도 모욕과 자멸이 서린 표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의 언덕>에서는 모리가 어떤 것을 보는 시점자로 절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가 보는 것을 함께 봄으로써 관객이 공감하고 그 맥락을 유추할 수 있는 감정적 근거가 전무하다. 모리는 형식상으로는 말을 하는 나레이션의 주체로 등장하지만 서사 속에서 가장 무능하다. 그는 스토리에 던져진 하나의 필수요소 정도로 전락한다. 이는 한편, 홍상수의 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전까지 홍상수의 카메라는 인물들의 내면적 관점을 보여주기 위해 시선이나 표정에 머물곤 했다. 따라서 심지어 홍상수의 영화에서 유일무이한 시점자 그리고 서술자는 작가, 홍상수 밖에 없다고 말해지기도 했다.10) <자유의 언덕>이 지닌 가장 모호한 지점 역시 늘 과잉으로 흘러넘치던 홍상수의 자의식이나 서술자로서의 언급, 시점자로서의 관점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홍상수 자신이 객관적 시점을 연출하듯이 모리의 행동과 말을 그 자체로 건조하게 옮기려 한다. 그는 홍상수의 제유적 자아가 아니라 그 조차도 해석해야만 하는 어떤 대상으로 그려진다.

    액자구성, 나레이션, 시점을 통한 모호성의 전략은 마지막 장면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영화는 갑작스럽게 모리가 묵고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가고 두 사람은 반갑게 재회한다. 그리고 마치 이야기가 모두 끝나듯이 두 사람이 튼튼한 딸 아이 하나와 아들 아이 하나를 낳고 잘 살았다고 결말을 짓는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장면에서 모리는 잠에서 깨어나고 전날 함께 술을 마셨던 영선이 모리의 방에서 일어난다. 술을 마시고 난 다음 영선이 취하자 자신의 방에서 재우고 자신은 마당의 탁상에 기댄 채 잠이 들었던 것이다. 이에, 영화와 모리의 해피엔딩은 사실인지 아니면 환상인지 그것도 아니면 모리의 꿈인지가 불분명해진다. 이는 서사적 층위에 대한 의구심이기도 하다.

    해피엔딩이 가능한 서사적 층위는 액자의 바깥 즉, 편지 서사의 외부이다. 이는 두 가지 경우의 수에서 가능해진다. 하나는 편지를 읽는 영화의 상상이 서사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관객이 듣는 목소리는 비록 모리이지만 그것을 읽는 진짜 목소리는 영화의 내면 목소리이다. 즉, 바깥 액자의 서술자는 영화인 셈이다. 그러므로 영화와 모리의 해피엔딩은 편지를 읽고 있는 영화의 상상일 수 있다. 다른 한 가지 가능한 서사적 층위는 바로 제 3의 서술자, 즉, 영화의 서사 바깥에 놓인 객관적 시점자가 목격한 사실의 층위이다. 고전적 인과론으로 보자면 이 장면은 맨 마지막에 놓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애당초 홍상수는 이 인과론을 거부하기 위해 순서를 흐트러뜨렸다. 이는 그 장면이 어떤 것으로 해석되어도 무방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3)“아마도 그 사라진 한 장에 담긴 내용은 이 영화의 에필로그일 것으로 저는 추측합니다(이동진 블로그),”, “다소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갑자기 해피엔딩으로 귀결되는 클라이맥스 장면의 혼란도 비슷한 감상을 준다. (김영진,「현실인가 꿈인가 환상인가」, 씨네21, 974호.)” 등 <자유의 언덕>에 대해 혼란과 모호성을 말하는 비평문들이 많다.  4)<자유의 언덕> 홍상수 감독 인터뷰, 씨네21 970호.  5)아리스토텔레스, 천병희 역, 『시학』, 문예출판사, 1999. pp.62-65.  6)“첫날 촬영으로 계단에서 편지 떨어뜨리는 신까지 찍고 나서, 일단 순서대로 영화 전체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뭘 뒤섞으려고 해도 뭐가 먼저 있어야지, 존재도 하지 않은 것들을 상상해서 그것을 또다시 뒤섞는다는 게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순서대로 찍었는데, 찍을 때는 ‘흐트러질 순서’란 의도를 최대한 생각 안하고 찍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게 암암리에 영향을 준 거 같습니다. 다 찍고 나서 보는데, 어떤 신들은 순서대로 가는 영화였으면 좀 다르게 찍었을 거 같고, 어떤 데는 중간에 있어야 할 신을 아예 안 찍은 거 같았습니다.”(<자유의 언덕> 홍상수 감독 인터뷰)  7)보르헤스, 황병하 역, 「허버트 쾌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 『픽션들』, 민음사, 1994.  8)조엘마니, 김호영 역, 『시점』,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pp.32-33.  9)이충직, 마아림, 「홍상수 감독의 영화적 형식 변화에 대한 연구: 시점을 중심으로」, 『영상예술연구』 제 142 집, 영상예술학회. 2009,p.171.  10)김소연, 「‘무능력한 주인’의 응시를 위한 알리바이-<강원도의 힘>의 리얼리티 효광 관하여」, 『강원도의 힘』, 삼인, 2003, p.124.

    3. 모호함의 문체적 전략

       1) 제 2 외국어와 소통의 간극

    홍상수의 영화에 외국인이 등장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아예 한국어를 아예 모르는 여인, 이자벨 위페르를 주인공으로 영어로 의사소통을 수단으로 사용한바 있다. 외국인의 등장이나 외국어라는 표지가 외재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하더라도 소통불가능은 언제나 홍상수 영화에서 중요한 문제의식 중 하나였다.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는 두 연인이라거나 술에 취해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인물들, 그리고 각자의 말을 할 뿐 전혀 의미에 도달하지 못하는 대화들은 홍상수 영화의 특징적 스타일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유의 언덕>에서 영어는 제2의 언어가 아니라 제 1의 언어로 사용된다. 배경이 외국이거나 등장인물들이 모두 외국인이어서가 아니다. 주인물인 모리는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일본인이다. 그는 비교적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데 따라서 그의 대화는 모두 영어로 이루어져 있다. 게다가, 그의 편지가 낭독되는 것이 서사의 주요 부분인 바 영화에게 전달하는 모리의 편지 역시 영어로 쓰여 있다.

    중요한 것은 모리에게도 그리고 그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에게도 영어가 모두 모국어나 주요 언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모리의 모국어는 일본어이고 나머지 등장인물들의 모국어는 한국어이다. 그들은 모두 영어라는 외국어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그것을 기록하고, 대화를 나눈다. 이는 같은 제1 언어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통 불능에 처하고 말았던 이전의 상황과는 구별된다.

    모두 외국어로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에 서로 한계를 느끼게 되고, 오묘한 심리적 국면이나 사소한 차이, 섬세한 속 이야기를 건내는 것은 불가능해진다.11) 그 대화는 마치 시나리오나 희곡 속의 액션 대사들과 유사한데, 정확하게 전달하려 할수록 오히려 언어가 소박해지고 대화가 빈약해지기 때문에 섬세한 맥락을 사라지고 행동만이 분명해진다. 술을 마시자, 밥을 먹자처럼 동사들은 분명하지만 형용사나 부사를 사용해서 설명해야 하는 심리나 내면의 영역은 말을 한다 해도 허술해지고 만다. 가령, 모리가 읽고 있는 책 『시간』에 대해 모리가 영선에게 설명하는 장면은 이를 잘 보여준다.

    영선과 모리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모리가 늘 들고 다니는 책에 대해 묻는다. 그건 의외로 꽤나 관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었는데, 모리는 제법 분명하게 책의 요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이미 꽤 취해있는데다 영어로 주고 받는 대화이기에 영선은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재미있다고 응수하지만 그의 말에 대해 아무런 질문이 없고 자신의 견해가 없다는 것은 제대로 듣지 않았음을 오히려 보여준다.

    이어지지 않는 대화는 대화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다음 질문에서 모리는 영선의 남자 친구에 대해 묻고, 이는 대화다운 대화로 이어진다.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 그리고 내면을 담고 있는 불분명한 이야기들은 외국어를 통한 대화의 행간 사이로 사라진다. 그들은 사실을 진술하듯 그렇게 구체적이고 명확한 명사와 동사로 대화를 나눈다. 등장하는 인물이 내면을 가진 그러므로 이입 가능한 인물들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이며 그들의 행동이 돌발적이며 모호해서 이해하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2) 잉여와 과잉의 틈입

    홍상수의 작품에서 ‘꿈’은 느닷없이 등장하기 일쑤다. 게다가 현실과 꿈의 경계는 언제나 모호하게 처리된다. 그래서 때로는 그것이 꿈인지 아니면 환상인지 분명치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자유의 언덕>에서 꿈과 현실, 환상과 실제의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할뿐만 아니라 근본적 서사의 차원에서 발생한다. 액자 서사의 경계 부근에 꿈 혹은 현실을 배치함으로써 의도적으로 해석의 맹점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자유의 언덕>에는 최소 한 개 최대 두 개의 꿈 장면이 등장한다. 하나는 모리가 나레이션으로 고백하는 창경궁 빨래터에 갔던 꿈의 내용이다. 모리는 그 꿈이 너무 독특하고 이상해서 깨고 나서도 기분이 이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두 번 째는 과연 꿈인지 환상인지 아니면 편지를 읽고 있는 영화의 상상인지 불분명한 장면이다. 바로 갑작스럽게 끝나는 엔딩의 바로 앞에 배치된 장면인데, 영화가 모리를 찾아와 두 사람이 함께 살며 아이 둘을 낳게 되었다는 서술 부분이다. 바로 다음 장면 모리가 잠에서 깨어남으로써 애초에 단일한 해석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이는 의도적으로 여러 가지의 해석을 유도한 장면으로 서, 결국 여러 가지의 해석이란 해석을 부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알랭 바디우의 말처럼 이 장면에 관한한 진리는 없고 다양한 의견만이 있을 뿐이다.

    게스트 하우스 주인의 조카 상우와 말다툼을 벌이는 젊은 여자의 등장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서사적 맥락 가운데 어디에 위치해도 말이 되고 또 말이 안 되기도 한다. 그녀가 지나가는 것을 힐끗 쳐다보는 모리의 장면까지 보태지면 두 개밖에 안 되는 장면이지만 과연 어느 것이 먼저이고 나중의 일인지 구분할 근거조차 없다. 말하자면, 젊은 여자는 모리와 직접 대화를 나눈다거나 어떤 연관을 전혀 맺지 않는다. 따라서 모리를 주인물로 서사를 재구성한다고 할 때 그녀의 서사는 언제나 과잉이 될 수밖에 없다. 혼돈의 유인자처럼 그 여성이 존재함으로써 맥락의 질서는 더욱 불가능해진다. 근간화소에서 벗어난 이러한 자유화소들은 <자유의 언덕>이 지닌 모호성의 전략을 더욱 상세화하는 장치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서사적 맥락을 구성하는 데에는 방해가 되지만 모호성을 실현하는 데에는 더 없이 중요한 장치들이기 때문이다.

    11)카세 료의 캐스팅 과정에 대해 말하면서 홍상수는 그와 영어로 인터뷰를 했던 기억을 이야기한다. “영어로 하니깐 서로 한계가 있었지만, 자기가 느낀 걸 정확히 표현하려고 굉장히 애를 썼습니다.”(홍상수 인터뷰, 앞의 책)

    4. 이입의 금지, 동일시의 부재-전략적 모호성의 의의

    영화를 보는 체험은 관객과 주인공의 동일화를 유도한다. 관객들은 시선의 주체 즉 카메라의 시선에 동일화를 경험한다. 이러한 체험을 일차적 동일화라고 한다면 주요 인물이 등장해 카메라의 이동을 유도할 때 관객들은 허구 세계를 이끄는 그 인물에 동화되기 마련이다. 그의 심리적 상황이나 행위에 적극적으로 이입해 옹호하고 또 그를 이해하고자 애쓰게 되는 것이다. 12) <자유의 언덕>이 지닌 모호성의 최종적 반응은 바로 이입의 어려움으로 수렴된다.

    모호성의 첫 번째 전략인 서사적 재구성에 대한 의도적 위반을 봐도 그렇다. 위반의 대상은 전통적이며 관습적인 서사 구조의 모형, 즉 좋은 플롯의 전형이다. 그 전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비극의 모델에서 찾을 수 있는데, 결국 좋은 플롯이 지향하는 최종적 지점에는 공포와 연민을 거친 카타르시스가 놓여 있다. 좋은 플롯은 관객으로 하여금 깊은 몰입감을 유도해 공포와 연민을 갖게 함으로써 결국 실제의 관객은 안전한 무대 바깥 즉 허구 바깥의 삶에 살고 있다는 충족감을 얻게 한다. 그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고전적인 플롯의 효용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지한 드라마 이론, 비극이론을 가장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는 것은 의외로 헐리우드이다. 감정의 이입을 통한 연민과 공포가 다만 주인공에 대한 동일화로 바뀌었을 뿐 카타르시스는 환상을 통한 현실적 결핍의 보충이라는 형태로 실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유의 언덕>의 서사적 위반이 이입이나 공감을 지향하는 전통적 서사의 전복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유의 언덕>은 철저하게 동화할 수 없는 허구적 서사를 추구한다.

    이 추구는 나레이션과 객관적 시점의 고수라는 전략을 통해 한층 더 강화된다. 외국어로서의 영어를 주요 의사소통 수단으로 선택한 이유도 같은 맥락 속에 있다. 모국어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의사 표현의 수월성에 있다. 외국어가 유발하는 의사소통의 빈 곳, 빈 틈은 곧 이입이나 동화의 어려움을 유발한다. 이입의 어려움은 등장인물들 간에 발생할 뿐만아니라 대개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관객들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모국어로 영어를 쓰는 사람들에게도 이입보다는 이질감을 줄만한 ‘외국어로서의 영어’임을 부인할 수 없다. 즉, <자유의 언덕>에서 그들이 쓰는 공통의 언어는 이야기하면 할수록 이해에서 멀어지고, 공감력이 떨어지는 아이러닉한 상황을 연출해 낸다. 관객들 역시 한국인의 영어를 들으며 한국어 자막을 읽는 기이한 체험을 통해 이입이 아닌 낯섦을 체험한다.

    결국, <자유의 언덕>의 모호성은 자동화된 삶을 낯설게 만드는 전략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선택을 통해 우리는 일상의 기계성을 타파하고, 너무 익숙해서 감각이 둔해진 삶을 낯설게 체험하게 된다. 관습과 질서를 무너뜨리고, 흐트러뜨림으로서 관객들은 일상에 대한 불편함을 되찾는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끊임없이 동화와 이입을 요구하는 상업적인 서사와 구분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한 환각을 파는 것이 아니라 불편한 감각을 돌려주는 것, 그래서 한 번쯤 몰입이 아닌 각성의 시간을 갖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홍상수 <자유의 언덕>이 지닌 모호성의 미학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12)조엘 마니, 앞의 책,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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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 장 병원 2012 『홍상수 내러티브의 ‘비조화 패턴’ 연구』 google
  • 8. 김 영진 「현실인가 꿈인가 환상인가」 [씨네21] 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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