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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1980년대 성애영화 재평가를 위한 소고(小考) A Study on Korean Erotic Films in the 1980’s
  • 비영리 CC BY-NC
ABSTRACT

Korean erotic film was the most popular film genre in 1980s. Starting with <Madam Ae-ma>, erotic film genre was produced briskly. However in the Korean film history, 80s’ erotic films have been treated academically as unimportant. Because these erotic films were thought as an anesthetic to appease the public’s political criticism as part of ‘3S(sex, screen, sports) policy’ by authoritarian regime. Furthermore People generally recognize as the same as 80s’ erotic films and 90s’ erotic video movies. But 80s’ erotic films are different from 90s’ erotic video movies distinctly. The 80s erotic film is one of the important cultural code to understand era of 80’s. The reason is that the erotic film can be read as cultural code understanding the process of democratization of Korea society and the collapse of authoritarian regime. Although the erotic film genre was the result of the relaxation of sexual expression, there were a lot of interesting points that relief of sexual expression brought in social changes. And 80s’ korean erotic films dealt with female sexuality, futhermore these films show liberation of sex. Sexuality, especially female sexuality can be read as a political allegory in the background authoritarian society. <Eo u-dong> is a typical example. Above all, 80s erotic films are closely related to the The May 18 Democratization Uprising. Eventually the 3S policy was intended to hide the May 18. However, on the contrary to intention of the government, 80s erotic film exposed the The May 18 Democratization Uprising and contributed to the democratization of society. Therefor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assess the 1980s erotic films, and to understand how these films could to change Korean society. So as a part of the cultural history, this study attempt to figure out the social meaning and value of 80s erotic films.

KEYWORD
erotic films , ero movies , , , 80s’ Korean films , sexuality & politics , 3S policy , The May 18 Democratization Uprising
  • 1. 들어가며 : 80년대 성애영화에 대한 평가

    82년 2월 6일 자정, <애마부인>의 개봉은 80년대 성애영화의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성애영화는 80년대를 통틀어 가장 많이 제작된 영화 장르이며 그만큼 대중적인 관심과 인기도 많았다.1) 그러나 그 평가가 그리 우호적이지 않은 이유는 80년대 성애영화가 신군부의 ‘3S 정책’의 일환으로 국민을 탈정치적 방향으로 내몰았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80년대 한국영화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은 영화와 관객 모두가 극심한 자기 분열을 경험한 시기3)이며 “각성과 환각의 시대”4)라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에는 80년대 한국영화가 현실을 직시하는 리얼리즘의 태동과 80년대 후반 코리안 뉴웨이브로 이어지는 동시성과 시대정신의 회복이란 긍정적 흐름, 그리고 ‘에로영화’의 전성기로 집약되는 현실 도피적인 부정적 흐름이 공존함을 전제로 한다. 다음의 인터뷰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역시 에로영화라는 용어에는 다분히 경멸적인 평가가 그 기저에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80년대 에로영화라 지칭되는 영화에 대한 부정적 평가 뒤에는 흥미롭게도 ‘정치적 금기’와 ‘성적 금기’의 동시적 공존을 두 텍스트 모두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한부인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은밀한 욕망이 심야상영 극장의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꿈틀거렸으며, 한편으로는 가부장적 질서에 위배되는 유한부인의 성적 일탈이 80년대 정치적 억압에 대한 저항과도 묘하게 일맥상통하는 쾌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빌헬름 라이히는 자유에 대한 의지를 억압하는 성적 도덕뿐만 아니라 권위주의적 이해에 순응하는 힘 역시 성을 규제하고 억압하는데 있다고 보았다.6) 성애영화 속 주인공의 성적 일탈은 권위주의적 제도와 질서에 대한 위반인 동시에 도전을, 심야극장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은 불온한 공모의 쾌락과 나아가 현실사회의 억압에 대한 정치적 저항의 태도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성애영화는 격변의 시기인 80년대를 대표하는 문화코드 중 하나이다. 성애영화가 중요한 이유는 권위주의 정권이 붕괴되고 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로 전환되는 과정을 이해하는데 성애영화가 핵심적인 문화코드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성적 표현의 완화가 가져온 1980년대 한국 영화와 사회의 변화상에는 흥미로운 점들이 많다. 본 연구는 80년대 성애영화를 재평가하기 위해 문화사로서 영화연구의 일환으로 성애영화가 제작되고 소구되는 80년대를 살펴보고자 한다. 1980년대 영화가 만들어지고 이해되는 재현 조건을 통해 당대의 문화적 결과로서 영화를 해독하고 영화를 통해 전달되는 가치나 분위기로서 문화를 읽어내는 과정에서 80년대 성애영화를 성격과 의의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이 90년대 에로영화(에로비디오영화)와 구별을 그 출발점으로 삼지만 90년대 에로영화와 비교는 논외로 한다. 본 연구의 목적이 80년대 성애영화의 성격 규명이므로 오히려 사회적 환경과 정책적 토대의 연장선상에 있는 70년대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와의 비교가 80년대 성애영화를 파악하는데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또한 80년대 성애영화와 소프트포르노의 성격이 강한 90년대 에로영화는 그 성격이 크게 다르므로 직접적 비교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1)강소원, 「1980년대 한국영화」, 『한국영화사공부 1980∼1997』, 이채, 2005, 57쪽.  2)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사 : 開化期에서 開花期까지』, 커뮤니케니션북스, 2006, 266쪽.  3)강소원, 위의 책(2005), 10쪽.  4)영화진흥위원회, 위의 책, 265쪽.  5)≪씨네21≫, “심산의 충무로 작가열전 13 : 이문웅-<애마부인>의 아버지”, 2001년 296호.  6)빌헬름 라이히, 황선길 역, 『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2006, 66쪽.

    2. 성애영화란 무엇인가

    서정남은 에로영화를 포르노그래피의 대체재로써 ‘성욕을 자극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로 포괄적으로 정의 내렸다.7) 비록 비디오 출시를 목적으로 한 에로비디오 영화와 구분하였으나 제작방식의 변모의 차이일 뿐, <애마부인>을 90년대 에로영화를 하나의 장르로 본격화하도록 한 직접적인 영화로 평가하며 80년대 성애영화와 에로비디 오영화를 동일선상에 놓고 있다. 김보경 역시 80년대 성애 표현을 다룬 영화들을 특정한 용어로 정의 내리진 않았으나 소프트포르노의 성격으로 규정하고 있다.8) 성애영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글조차도 16mm 비디오 영화인 에로영화를 점잖게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9)

    그러나 80년대 성애영화는 88년 이후 비디오 시장이 확대되면서 VHS용으로 제작된 성인용 영화와는 엄연히 다르다. 강소원은 에로영화를 “1) B급 영화의 제작조건에서 2) 포르노그래피의 대체물로서 3) 관습적인 서사 구조 속에서 4) 성적 에피소드를 나열해 놓은 5) 비역사적이고 비사회적인 관점으로 6) 사적 영역을 다룬 영화”를 가리키며 “의 식적으로 성을 소재로 상업적으로 성을 소비하는 영화”로 규정했다.10) 일반적으로 에로영화는 영화의 주요 관객과 제작되는 환경과 조건 그리고 목적을 기준으로 성인 남성을 주요 대상으로 단기간에 저예산으로 제작한 16mm 혹은 비디오 영화로 그 목적이 성행위나 여성의 신체를 전시하는 영화를 지칭한다.

    이러한 차이에도 80년대 <애마부인>으로 대변되는 성애영화는 90년대 <젖소부인> 시리즈의 에로영화와 같은 범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80년대와 90년대를 대표하는 두 영화 제목의 상징적 유사성만큼이나, 에로영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80년대 성적 표현의 완화이며 그 상징적 시발점이 <애마부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애마부인> 성공 이후 영화의 완성도 보다는 자극적인 노출을 앞세운 아류작의 범람이 80년대 성애영화와 90년대 에로영화의 구별을 희미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80년대 성애영화가 90년대 에로영화와 구별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80년대 성을 주제로 한 일련의 영화들이 활발하게 제작되었음에도 학술적‧영화사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연구가 미미한 채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본적인 장르의 성격과 범주의 기준, 용어 정리 및 정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80년대 성애영화들의 장르 구분 또한 대부분은 ‘성인 멜로(에로)’11) 혹은 멜로드라마와 함께 통속극의 범주에 들어가거나12) ‘에로 사극’, ‘향토적 에로물’이란 용어로 묶여 시대물로 범주화되는13) 등 제 각각이다. 성애영화는 성을 다루는 특성상 남녀 간의 애정 문제가 주요 내러티브로 작동하므로 멜로드라마의 범주에 대부분 속하거나 <뽕>, <변강쇠>, <어우동> 등은 과거를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사극이나 시대물의 범주로 구분되었던 것이다.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과 표현방식과는 무관하게 영화가 성(性)을 다루는 모든 영화가 ‘에로물’이란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이다. 80년대에 제작된 영화의 약 65%가 에로물이라는 분석은 이러한 편의주의적 발상에 기인한 것이다. 종합해보면, 여성 신체의 노출과 성행위를 포함한 80년대 영화를 포괄적으로 에로영화로 지칭하고 있으며 장르가 아닌 스타일의 성격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다보니 88년 이후 에로비디오 영화와의 구별이 사라지면서 80년대 성애물들이 모두 저급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여기에는 80년대 영화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무분별하게 에로영화라는 용어로 규정한 언론 및 연구자들의 책임 역시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뭉뚱그려 에로영화라고 불리는 80년대 영화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양한 색깔의 영화는 물론이고 보수적인 사회분위기와 달리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때로는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성격의 영화들도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성을 다룬 영화들을 지칭하고 구분할 마땅한 용어가 없어 무분별하게 에로영화로 지칭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은교>와 <후궁>, <돈의 맛> 등이 연이어 개봉한 2012년 한 언론은 이들 영화를 소개하면서 ‘부활한 에로’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14) 물론 과거의 ‘에로영화’와 다르다는 것을 언급했지만 에로영화라는 용어가 가진 경멸적 함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인용의 저급한 에로비디오영화와 구별되지 않는 문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대상을 지칭하는 용어에는 개념을 포함해야 한다. 멜로드라마나 사극은 성을 주제로 한 영화들의 성격, 개념을 명확하게 담아내지 못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에로영화라는 명칭이 성을 주제로한 영화들의 특성을 잘 보여주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결국 에로영화라는 용어의 경멸적인 함의에서 벗어나 성을 주제로 한 영화들을 규정할 새로운 용어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본고는 성의 표현의 문제가 아닌 성을 주제로 한, 즉 성이 주요 모티프로 작용하여 사건의 발단과 해결의 핵심이 되는 영화들을 성애영화라는 장르로 범주화할 것을 제안한다. 성애영화는 말 그대로 성애(性愛), 즉 에로티시즘(eroticism)을 주제로 한 영화를 지칭한다. 물론 성애영화가 에로티시즘(eroticism) 영화의 번안어이며 에로영화가 에로티시즘 영화의 한국적 표현에 불구할지라도 강소원은 에로영화라는 용어가 가진 경멸적인 함의에서 벗어나고자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뚜렷이 제기하는 80년대 영화들을 성애영화로 규정하며 에로영화와 구분하고자 했다.15) 본 연구 역시 이러한 시도에 동의하며 비디오용 성인영화인 에로영화와 구별하기 위해 성을 주제로 한 영화를 성애영화라는 용어로 규정하고자 한다.

    7)서정남, 「한국에로영화 이미지의 미학적 고찰」, 영상예술학회 『영상예술연구』 8호, 2006, 156쪽.  8)김보경, 『한국영화에 나타난 성애표현의 연구-1981∼1989년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2.  9)김종원‧정중헌, 『우리영화100년』, 현암사, 2003, 373쪽.  10)강소원, 『1980년대 한국 ‘성애영화’의 섹슈얼리티와 젠더 재현』,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 학권 박사학위 논문, 2007, 22쪽.  11)송효정, 「1980년대 대중 멜로의 사회사」,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1 멜로드라마』, 이론과 실천, 2007, 293쪽.  12)유지나, 「여성 몸의 장르 : 근대화의 상처 -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한국영화 섹슈얼리티를 만나다』, 생각의 나무, 2004, 78쪽.  13)김윤아, 「80년대 한국 영화의 장르 추세연구」, 한국영화학회 『영화연구』 17호, 2001, 209쪽.  14)≪머니투데이 스타뉴스≫, ‘에로를 품은 영화가 몰려온다, 19금 열풍 왜?’, 2012년 3월 29일 인터넷 기사.  15)강소원, 위의 글(2007), 23쪽.

    3. 억압과 금기에의 도전

    80년대는 거대한 쇼의 연속이었다. 광주학살이라는 만행을 저지른 전두환 정권은 피로 얼룩진 정권 이미지에 부드러운 가면을 씌우고 국민의 정치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각종 화려한 이벤트와 조치를 양산해냈다.16) 국풍81을 시작으로 88년 서울올림픽과 86년 아시안게임 유치, 82년 프로야구 출범과 세계 방송사상 유례가 없는 장장 138일간 지속된 83년 이산가족찾기운동, 86년 평화의 댐 모금과 아시안게임 그리고 결정적으로 88년 서울올림픽까지 화려한 볼거리와 이벤트의 연속이었다. 또한 컬러TV방송이 1980년 12월에 시작되면서 한국영화는 또 한 번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국영화는 TV와의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해 대형영화제작을 시도하는 한편, 표현 수위의 완화를 요구했다. 영화 외적으로 화려한 볼거리와 거대한 이벤트가 넘쳐나는 시대, 영화 역시 그러한 시류에 부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80년대 성애영화의 전형을 제시한 <애마부인>은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애마부인>의 여주인공 안소영은 거대한 가슴을 스크린에 드러냈으며 관객들은 그녀의 큰 가슴에 열광했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부터 <애마부인>에 대한 기사는 여배우의 신체와 노출에 관한 것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 중 82년 1월 6일자 ≪경향신문≫은 “글래머 안소영 전라 출연”이란 제목으로 알몸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여배우의 사진과 함께 “우리나라 여배우 중 가슴이 가장 크고 육감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17) <애마부인>을 다루는 다른 기사들 역시 여배우의 풍만한 가슴을 부각시킨 사진을 전면에 게재하며 “육감적”, “글래머”, “풍만한”, “가슴이 가장 크”고와 같은 자극적 단어를 사용하였다. <애마부인>은 성을 주제로 다루는 만큼 그리고 TV와의 차별화를 위해서라도 ‘여성 신체’의 볼거리를 파격적으로 강조하였다. 현실 세계가 이미 거대한 쇼였기 때문에 영화는 더욱 크기와 스펙터클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 영화에서 여성의 가슴 노출이 본격적으로 가능해진 것은 <애마부인>의 성공 이후이다.18) 따라서 <애마부인>은 80년대 성적 표현의 수위를 본격적으로 넓힌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애마부인>은 한국영화사 최초로 여성의 가슴을 스크린에 드러내며 성적 금기를 깬다. 비록 알몸으로 말을 탄 모습을 멀리서 잡는 장면과 비에 젖어 속이 훤히 비치는 잠옷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었지만 금기를 깼다는 점에서는 분명 의미가 있다. 금기에의 도전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성적 욕망에 충실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음에도 비극적 결말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아이를 내팽겨 두고 외간 남자와 동거하면서도 또 다른 남자 무용수의 육체에 매혹당하는 <미몽>(1936)의 애순은 결국 자살로 속죄하고 춤바람이 난 1956년 <자유부인>은 눈물로 죄를 뉘우치고 가정으로 돌아갔다. 애인의 동생을 유혹하던 <지옥화>(1958)의 양공주 소냐와 신분상승의 욕망을 불태웠던 <하녀>(1960)는 단죄 받았다. 성불구인 상이용사 남편을 뒤로 젊은 기자와 사랑에 빠진 <귀로>(1967)의 부인 역시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성적 쾌락에 눈 뜬 <벽속의 여자>(1969)는 혼자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시기적으로 연장선상에 있는 70년대 말의 호스티스물과 비교하면 80년대 성애영화의 파격성은 더욱 뚜렷하게 확인 가능해진다. <영자의 전성시대>(1975)의 영자는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몸을 파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그녀에게 욕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처럼 <애마부인> 이전 영화 속 여성의 욕망의 분출과 탈선은, 몇몇 예외가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자살이나 지탄의 대상이 되는 등 단죄를 받으며 비극적 결말로 치닫거나, 최소한 그럴 수밖에 없는 당위성과 함께 도덕적 면죄부가 쥐어질 경우에는 욕망이 없어야만 했다. 그러나 <애마부인>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드러냈으나 처벌 받지 않았다. <애마부인>을 기점으로 여성의 성적 욕망은 더 이상 단죄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아가 <땡볕>(1984), <뽕>(1985), <화녀촌>(1985), <태>(1986) 등은 생존의지와 성적 욕구를 등치시킨다. 표현 형식도 70년대는 감추는 방향이었지만 80년대는 드러내는 방향이었다. 두 시기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욕망의 분출이다.

    80년대 성애영화는 70년대 호스티스 멜로물에 그 기원을 두며 계통적 친연성을 지니기에 직접적인 비교대상이 된다. 우선 두 시기의 영화가 외형적으로 동질성을 갖는 것은 시기적 근접성과 더불어 영화정책과 산업적 환경이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80년대 성애 영화는 여성이 성적 욕망의 대상이었던 70년대 호스티스물과 달리 여성의 성적 욕망을 전면에 드러내며 확연하게 다른 성격을 보여준다. 70년대 호스티스 멜로물은 산업화와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빠르게 변동해 가는 한국사회에서 일상화된 젠더 억압과 계급, 나이 등 여러 차원의 억압과 그에 따른 콤플렉스를 은닉하고 있다.19) 70년대 호스티스물의 여성들이 갖는 비극성은 산업화에서 밀려난 이들 여성들이 술집이나 집창촌을 전전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갖는데서 극대화된다. 반면 80년대 성애영화는 유한여성의 성적 일탈을 그리며 그녀를 둘러싼 가부장적 억압을 폭로하고 나아가 탈피하려는 ‘몸부림’을 보여준다. 그리고 남성의 재현은 부재하거나(<애마부인>, <뽕>)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애마부인>, <빨간앵두>, <어우동> 등) 묘사되면서 성의 주체가 동등해지거나 여성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호스티스 물의 여성이 욕망의 대상이었다면, 80년대 성애영화 속 여성은 욕망의 주체였다. 아내이며 어머니로서 애마는 정숙한 여성이지만 자신도 욕망이 있는 주체라며 남편의 외도에 “당신과 똑같이 하겠어요”라고 선언한다. 1986년 <변강쇠>의 등장으로 다시 남성성이 부각되긴 했으나 <변강쇠>의 옹녀 역시 욕망의 주체였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렇듯 80년대 성애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여성의 욕망이었다. 그리고 그 욕망은 가부장적 질서를 위배하는 동시에 때로는 압도하기도 했다. 이중에서도 <어우동>은 가부장적 질서의 희생자이면서도 자신의 성적 매력을 발휘하며 남성 중심의 사회를 조롱하고 지배하는 도발적인 인물이다.

    이렇듯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며 남성과 동등해지기를 바라는 여성의 등장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일반적으로 80년대 성애 영화의 등장은 82년 2월 심야상영 허용과 81년 성적 표현 완화로 설명된다. 그리고 심야상영의 첫 번째 영화가 바로 <애마부인>이었다는점 역시 이러한 설명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 두 요소는 80년대 성애영화의 등장은 설명할 순 있지만 급격한 성격 변화, 즉 능동적인 성적 주체로서의 여성상을 설명하진 못한다.

    70년대와 80년대는 모두 헌정질서를 파괴한 권위주의적 정권이 공포정치를 실시했다는 공통점을 갖지만 두 정권 사이에는 극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단적으로 70년대 두발단속과 미니스커트 규제는 국가가 개인의 신체까지 강제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70년대 유신체제는 성을 비롯한 사회 모든 영역에서 일관되게 감시와 통제가 이뤄졌다. 그리고 이것이 유지될 수 있었던 데에는 억압뿐만 아니라 대중의 합의 역시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야간통행금지가 상징적인 이유는 바로 개인의 의지에 대한 억압과 합의의 사회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1945년 미군정에 의해 실시된 통행금지가 뚜렷한 근거법령 없이(1954년 4월 ‘경범죄처벌법’이 제정됐으나 야간통행금지 위반에 대한 처벌 규정만 있음) 1982년 1월 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휴전선을 사이에 둔 준 전시상태라는 국민의 암묵적 동의가 뒤따랐기에 그에 따른 억압도 수용했던 것이다.20) 같은 이유로 70년대 성적 표현 역시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규제의 대상이었는데 전통적으로 유교사상이 뿌리 깊은 한국사회에서 개인의 성과 신체 역시 규제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권위주의적 정부의 억압은 강력했고 국민의 암묵적 동의 역시 뒤따랐다. 비교해서 80년대는 개인의 영역에서 규제가 상대적으로 느슨해졌다. 80년대 통금해제와 교복 및 두발자유화는 비록 부분적이긴 했지만 개인에 대한 국가의 강제가 철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70년대 한국영화에 가해진 이중검열은 성적 표현(외설법)을 정치성과 함께 철저하게 검열을 실시했으나 80년대는 심야상영 허용과 더불어 성적 표현이 완화되었다. 이 차이는 대단한 결과로 이어졌다. 70년대 호스티스 멜로물의 성적 표현은 언제나 지속되지 못하고 의도적으로 중단되었다. 즉 스크린 속 성적 욕망은 늘 억제된 상태이며 신체의 노출 역시 보일 듯 말 듯 제한되었다. 반면 80년대 성애영화는 성적 표현이 허용되면서 스크린 속에서 욕망은 분출되고 신체를 가리는 방해물이 사라지면서 과감해졌다.

    70년대와 80년대의 사회의 핵심적인 차이는 바로 ‘성(性)’의 규제 여부다. 개인 신체에 대한 국가의 규제와 마찬가지로 성에 대한 국가의 규제는 사적인 영역을 공적인 영역에서 강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두 시기에 나타난 영화의 성격변화 및 차이는 규제 완화의 문제만이 아니라 바로 ‘성’에 대한 표현의 허용을 완화한 것이 핵심이다. 빌헬름 라이히는 개인의 성을 억제하고 억압하는 문화는 권위주의적 가부장제와 계급의 분화로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성욕에 대한 도덕적 억압의 목적은 고통과 모욕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적 질서에 적응하고 그것을 참아내는 말 잘 듣는 노예 같은 인간을 만드는데 있으며 가족은 권위적인 소규모 국가이며 인간의 권위적 구조화는 근본적으로 성적인 억압의 고착화와 성적인 충동의 생동적인 본질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생기게 된다고 보았다.21) 즉, 성을 부정한 것으로 치부함으로써 그것을 도덕의 범주에 가둬넣고, 억제하고 억압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억제와 억압의 주체를 부모에서 제도로 확대시켰다. 부모에서 교회, 결혼이란 사회 제도로 확장되는 이러한 구조는 결국 권위에 따른 규제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의지를 억압하며 나아가 권위주의적 이해에 순응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즉, 모든 억압은 성적 억압에서 비롯되며 신체규제 그리고 성적 욕망의 억제는 억압의 내면화의 시발점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성적 금기에 대한 도전은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이며 성해방은 자유를 의미한다. 진정한 자유는 빌헬름 라이히에 의하면, 성해방에서 비롯되고 그 시작은 신체 자유와 욕망의 분출이다. 이런 의미에서 80년대 성애영화에서 주목할 점은 유부녀의 귀환이다. <미몽>과 <자유부인>의 유부녀가 <지옥화>의 양공주를 거쳐, <하녀>의 식모 그리고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와 식모부터 버스차장과 호스티스로 이어지는 과정을 거친 <영자의 전성시대>의 지난 후에 다시 <애무부인>의 유부녀로 되돌아 온 것이다. 유부녀는 결혼을 한 여성으로 정숙함을 요구받는 여성, 즉 어머니이자 부인이다. 이전까지 한국영화에서 여성은 어머니와 아내, 즉 성이 제거된 존재였다. 그러나 <애마부인>, <여자가 두 번 화장할 때>(1984), <길고 깊은 입맞춤>(1985), <뽕>과 <어우동> 등은 가정과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무성(無性)의 존재가 아닌 욕망의 주체로서 여성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가부장제 질서에 대한 도발적 위반이며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이었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은 집권 초기 강력하게 정치‧사회를 장악했다. ‘12‧12 쿠데타’ 직후 정치풍토쇄신법을 만들어 국회와 정당을 비롯한 기존 정치를 해체시켰으며 대통령 우위의 간접선거에 의한 대통령제를 주축으로 하는 법률을 개폐하는 동시에 군부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여당인 민주정의당을 창당, 국가안정기회부를 통해 야당인 민주한국당과 국민당의 결성을 배후에서 지원하였다.22) 뿐만 아니라 국가보안법 강화와 삼청교육대 등을 통해 시민사회를 억압하고 언론사 통폐합 단행과 문화 분야에서 대한 정치적 표현에 대한 검열을 강화하여 사회 통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전두환 정권의 성격을 상기해 볼 때, 영화에서 성적표현의 완화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아마도 문학과 예술에서 성이 정치의 알레고리로 환치될 수 있음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성적표현의 완화가 뜻하지 않게 이후 많은 것들을 붕괴시키는 단초를 제공했음 역시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애마부인>을 보기 위해 장사진을 친 82년의 풍경은 그 자체로 일탈이며 금기에 대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성에 대해 보수적인 당대 분위기를 떠올리면, 벌거벗은 애마를 보기 위해 거리를 따라 길게 줄을 선 연인과 혹은 친구들의 모습은 당시로서는 과감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6)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 2권, 인물과사상사, 2011, 48쪽.  17)≪경향신문≫, ‘글래머 안소영 전라 출연’, 1982년 1월 6일.  18)김화, “‘공윤’심의는 시대상황의 종속변수인가?”, ≪영화≫, 1994.11, 『한국영화정책사』 498쪽에서 재인용.  19)유지나, 위의 책, 95쪽.  20)손정목, 「5공 정권의 3S정책」, 『도시문제』 39권 423호, 2004, 115쪽.  21)빌헬름 라이히, 위의 책, 67쪽.  22)전재호, 「5‧18의 정치 : 정치변동과 담론의 변화」, 5‧18기념재단 『5‧18민중항쟁과 정치‧역사‧사회』5, 심미안, 2006, 278쪽.

    4. 성과 정치의 알레고리

    60년대 후반부터 봇물처럼 터져 나왔던 일련의 영화들은 성을 정치의 문제로 알레고리화 했다. 이들 영화들은 성에 대한 억압을 정치적 억압으로, 성해방을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탈피 혹은 자유와 등치시켰다. 대표적으로 듀샹 마카베예프의 (1971),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1975),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1976) 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문학과 예술에서 성은 단순한 성행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 70년대 까지 철저하게 통제의 대상이었던 성이 80년대 들어 완화되었다는 것은 문학과 예술에서 은유적으로 성을 표현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82년 1월 5일, 37년 만에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강준만은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자 국민들은 해방감을 맛보았지만 그것이 민주화쪽으로 나아기진 않았다고 분석하고 있다.23) 그러나 작은 변화처럼 보인 야간통행금지와 성적 표현의 완화는 사실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개인의 신체와 성에 대한 규제의 완화는 정치적 자유의 시발점이 된다. 직접적으로 야간통행금지 해제와 성적 표현의 완화가 민주화로 이어지지는 않았겠지만 최소한 개인의 신체 자유와 성해방이 자유에의 열망으로, 성적 금기에 대한 도전은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졌다고는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해방’은 사전적 의미로 ‘구속이나 억압, 속박을 풀어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자유에의 열망’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1982년 1월 16일자 ≪동아일보≫는 <애마부인>을 다루며 ‘복종적 性 모럴에 조심스런 「반란」’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이 기사에는 <애마부인>에 대해 며 “여성해방의 기류”라고 평가하고 있다. ‘반란’과 ‘해방’이란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사는 <애마부인>의 의미와 미칠 영향에 대한 ‘상황’을 말하고 있지만 군부독재 시대라는 ‘문맥’은 ‘반란’과 ‘해방’이란 표현에서 다른 의미를 끄집어 내기에 충분한 토대를 제공한다.25)

    <애마부인>의 바뀐 제목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애마부인>이 ‘愛馬’에서 ‘愛麻’로 바뀐 이유는 ‘愛馬’가 선정적이기 때문이다. 말(馬)은 ‘색마’, ‘종마’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남성적인 섹슈얼리티를 상징하며 그 중에서도 성적인 것, 그것도 성적 본능의 은유로 사용된다. 제목을 변경한 것이 무색하게도 <애마부인>의 포스터는 말을 탄 벌거벗은 여성의 이미지를 사용하였다. 그 말 위에 타고 있는 여성의 이미지는 성적 본능에 충실하면서도 도발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다. 비록 재현하는 방식에서 한계를 보이기는 했지만, 여성의 욕망을 내세웠던 80년대 성애영화들은 성적인 도발성에 있어서 전복성을 지녔다.26) 권위주의적 군사정권의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질서 아래서 여성의 도발은 분명 기성 사회의 가치관과 질서를 위협하는 불온한 것이다. 이처럼 80년대 성애영화는 그 자체로 기존의 가치관을 위협하거나 프레임을 구축하기도 했다.

    프레임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방식 혹은 판단을 결정하는 생각의 틀을 의미한다.27) 인간이 정보를 받아들이거나 판단을 할 때 이 프레임을 통해 결정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기보다는 이 프레임에 따르는데 프레임이 견고할수록 프레임에 의해 사고하게 된다. 전두환 정권의 영화 심의는 정치적 내용에 대해서는 엄격했지만 성적 표현의 영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성적 억압이 사라진 스크린은 성을 은유로 다양한 표현들이 가능해졌다. <무릎과 무릎 사이>와 <어우동> 등은 에로티시즘과 희미한 정치성을 조화시킨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어우동>과 <변강쇠>는 제도에 도전하는 발칙함을, <서울무지개>는 직접적으로 상류사회의 부도덕을 고발하는 등으로 표현의 정도가 확장되고 발전해 나갔다. <바보선언>과 <성공시대>는 성을 주요한 알레고리로 사용하는 블랙코미디로 사회의 부조리를 풍자로 풀어낸다. 영화시책으로 대변되는 70년대, 국가가 제시한 강력한 프레임에 갇혀 그 프레임의 언어로만 표현하는 것이 가능했던 한국영화는 80년대 성애영화의 등장으로 비로소 스스로의 프레임을 구축할 수 있게 됐던 것이다. 또한 80년대 들어 국책영화 제작이 사실상 사라지면서 주제 선택이 자유로워졌다. 결국 성적 표현의 완화는 권위를 약화시켰고 선택의 폭이 넓어지면서 국가가 제시한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도 다양한 표현이 가능해지게 된 것이다.

    성적 표현의 프레임이 정치적 알레고리로 환치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1985년 <어우동>의 상영중단 사건이었다. <어우동>이 운동권의 민중사관에 의한 의식화된 관점을 갖고 있으며 조선의 왕을 대통령에 비유하여 불온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투서가 접수되어 영화는 상영중단되고 검열을 다시 거쳐 대폭 편집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공윤위원장이 경질되기도 했다.28) 영화속 왕, 아버지, 남편 등 권력을 가지고 있는 남성을 국가정체성과 등치시키는 은유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수잔 제퍼드가 『하드 바디』에서 언급했듯이 국가 정체성은 주로 남성성으로 표출된다.29) 권위주의 정권은 공통적으로 성을 도덕적인 잣대로 제단하고 규제했는데 그 이유는 ‘국가=아버지’이며 곧 ‘억압과 통제=훈육과 안정’이라는 은유체계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성을 부정하거나 남성과 여성의 지위가 뒤바뀌는 것은 기존 사회에 대한 이의제기 혹은 전복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에서 <애마부인>의 동성애 암시는 역시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지배적으로 섹슈얼리티는 이성애를 전제로 이해되었기에 애마와 그녀의 이혼녀 친구 에리카의 동성애는 권위주의적 지배질서에 당연히 위배되는 것이었다. 또한 남편의 외도로 집을 나온 애마에게 “시위를 할거면 화끈하게 해야지”라며 외박을 종용하고 급기야 이혼을 부추기며 “제발 그런 봉건적인 사상 좀 버려”라고 일갈하는 에리카는 남성중심의 지배사회에 이의를 제기하는 불온한 여성이었다.

    또한 80년대 성애영화들은 바로 이 영역, 권력을 가진 남성들인 아버지와 왕, 남편을 부재하거나 정상적으로 재현하지 않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애마부인>의 남편은 범법자로 감옥에 갇혀 있으며 <뽕>의 안협댁의 남편은 큰 일을 도모하고자 영화 내내 집을 비운다. <빨간앵두>의 남편은 성적으로 불구이고 <어우동>은 자식을 못 낳아 소박을 맞는데, 불임의 문제는 남편에게 있다는 어우동의 항변에서 그녀의 남편 역시 성불구임을 암시한다. 또한 어우동의 남편은 정상적인 성행위를 하지 않는 변태로 그려지기도 한다. 한편 성적으로 남성을 압도하는 여성도 이 시기에 등장한다.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변강쇠>의 옹녀와 동침하는 남자는 복상사로 죽으며, <어우동>은 시종일관 남성을 압도한다. 어우동의 발치에서 애걸하듯 몸을 타고 흐르는 술을 핥아먹는 성종의 모습과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어우동의 도발적인 눈빛은 파격을 넘어 전복에 가까운 불온함의 기운마저 보여준다. 그녀가 기존의 권위에 전면적으로 반항하고 희생당하는 숭고형 인물이 아니라, 기존의 권위를 희롱하고 그 권위와 더불어 게임을 하려는 유희적 인간이라는 점에서 더 위협적이다.30) 지배구조에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어우동>은 혁명가이며 여전사의 이미지에 가깝다. 반면 그녀의 발밑에서 허우적대는 양반과 임금은 추락한 국가정체성이다. 80년대 성애영화는 단지 여성의 몸을 전시하는 영화가 아니라 가부장제로 대변되는 권위적인 정권에 대한 저항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애마부인>의 성적 일탈과 전복성은 의도치 않게 당대 정치와 결부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성과 정치를 연결시켜 당대의 사회를 비판적 관점으로 바라보려는 영화적 시도 역시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이장호 감독의 80년대 영화들이 그렇다. “회칠한 무덤 같은 권위주의를 향한 예리한 투창”31)이 되고자 한 ‘영상시대’의 동인으로 새로운 영화, 영화 예술을 추구한 이장호 감독은 1976년 대파초 파동으로 4년의 공백기를 가졌다. 1980년 <바람 불어 좋은 날>로 복귀한 이장호 감독은 본격적인 사회파 감독으로 자리매김하며 작품성과 흥행을 모두 놓치지 않는 80년대 문제작들을 연이어 내놓는다. <어둠의 자식들>(1981), <바보선언>(1983), <무릎과 무릎 사이>(1984), <어우동> 등이 그것인데 공통적으로 성 문제가 영화의 중심을 이루고있다. 날카로운 리얼리즘의 화법으로 사회를 반영하기도 했던 이장호 감독은 <어둠의 자식들>로 당국으로부터 불온한 감독으로 인식되면서 검열을 피하면서도 비판의 칼날을 누그려트리지 않기 위해 ‘영상시대’가 추구했던 대안적 형식의 모더니즘 영화의 화법을 끌어안았다. 관습을 파괴한 형식을 통한 성의 정치적 알레고리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 중 <어우동>은 성을 정치의 알레고리로 활용한 대표적인 영화이며 80년대 성애영화를 통틀어서도 섹슈얼리티 면에서 가장 파격적이며 그 내용 또한 급진적이다. 영화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현저히 낮았던 조선시대, 그 중에서도 재가금지법을 시행한 성종 시대 자신이 처한 상황에 순응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항한 어우동을 그린다. 양갓집 규수로 태어나 왕가의 종친과 혼인했으나 아이를 낳지 못해 쫓겨나는 어우동은 당대 사회모순을 온 몸으로 체현한 역사적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는 어우동 암살이 내러티브의 중요한 축을 담당한다. 그리고 그녀를 암살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아버지와 남편이다. 영의정 가문과 친척이 되는 어우동이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키자 딸을 암살하려는 아버지와 역시 왕가 종친의 명예를 실추시킨 자신의 부인에게 자살을 강요하는 태산군, 마지막으로 어우동을 비밀리에 보호해왔던 좌의정은 정쟁(政爭)의 수단으로 음행을 문제 삼아 어우동을 제거하려 한다. 어우동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문과 정치적 명분에 때문에 희생을 강요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우동은 자신을 옥죄던 성(性)을, 반대로 남성사회를 조롱하는 칼날로 삼는다. 정조(貞操)를 지켜야 하는 사대부 여성에서 성을 파는 기생으로 급격한 신분변화를 택한 어우동은 영의정 가문인 그녀의 아버지와 왕가 종친인 남편에겐 그야말로 가문의 모욕이며 정치적 위협이었고 유교적 질서가 지배하던 사회에 대한 반란이었다. 기생이 된 어우동은 계급제도와 남녀불평 등에 대한 분노를 원동력으로 삼아 자신의 성을 무기로 지배 계금의 남성을 자신의 치마 아래에 굴복시키고 조롱을 넘어 희롱한다. <어우동>의 섹슈얼리티가 정치적 영역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는 것은 바로 당대 제도의 최정점에 위치한 왕, 재가금지법을 시행한 당사자인 성종을 희롱하는 장면이다. <어우동>은 왕으로 대변되는 국가의 정체성에 도전하고 그 체제와 대결하는 한편 그 권위를 희롱하며 부조리함에 저항한다. 이장호 감독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 현실을 우회했던 것이다.

    한편, 영화 속 범법자이거나 성적으로 무능한 남성은 도덕적인 문제를 갖고 그로 인해 무너져가는 권위 위에서 발버둥 치는 권력자와 묘한 대구를 이룬다. 감옥에서 자신의 외도를 반성하며 애마를 붙잡으려는 <애마부인>의 남편은 출옥 후 다시 외박을 하고, “산보다 성 안에 짐승이 더 득실거린다.”는 <어우동> 아버지의 넋두리나 “어떤 권문세도도 천심을 거역하지 못한다는 말인가!”라는 포도부장의 의미심장한 일갈 그리고 본인은 문란하지만 여성을 억압하는 정책을 만들고 질서를 바로잡으려는 성종의 모습에서 80년대 현실사회의 부조리한 단면을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다소 비약하자면, 성적으로 무능하거나 부도덕한 남성은 광주학살로 무너져가는 정권을, 부인의 일탈 혹은 자유의지는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추구하는 국민의 염원이란 알레 고리로 읽힐 수 있다. 관객은 애마와 어우동을 억압에 대항하고 자유를 염원하는 은유로 그리고 정치적 억압에 저항하는 환유로, 추락하는 남성의 은유를 흔들리는 국가권력의 환유로 개념적 혼성(conceptual blending)의 과정을 거쳐 이해한다.32) <어우동>에 대한 투서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80년대 성애영화들은 정치적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하다.

    또한 80년대 성애영화 속에 꿈과 환상 등의 말하기 방식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캐서린 흄이 말했듯, 환상은 사실적이고 정상적인 것들이 갖는 제약에 대한 의도적인 일탈이다.33) 환상은 비현실적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현실을 더욱 잘 드러내는 재현방식이기도 하다. <애마부인>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욕망 혹은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환상과 꿈을 통해 표출하는데, 특히 말을 타고 달리는 꿈은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달뜬 표정과 동작을 통해 애마의 욕구불만을 강하게 보여준다. 애마가 자신의 욕망을 드러냈지만 현실사회에서 처벌받지 않았던 데에는 그 성적 욕망을 현실이 아닌 환상을 통해 이루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애마는 욕망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절제하는 정숙한 여인이다. 그리고 이것이 <애마부인>이 깨트린 금기와 저항의 평가를 모호하게 만든다. 반대로 이 모호함이 의도치 않은 일탈을 보호하는 한편 저항의 의미가 출발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모호성은 환상의 또 다른 특성이기도 하다. ‘환상적 fantastic’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본질적인 모호성을 지시한다.34) 환상의 모호성은 불확실성을, 불확실성은 불신을 의미하며 ‘실재적인 것’의 일반적 규정에 대한 완강한 거부이다.35) 80년대 성애영화에서의 모호성은 현실을 벗어난 상황으로 나타난다. 한국이 아닌 다른 곳(<깊고 푸른 밤의>의 미국, <파리애마>의 파리 등) 80년대가 아닌 시기(<어우동>, <변강쇠>, <뽕>, <사방지> 등)를 통해 80년대 성애영화가 완강히 거부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사회문제에 대해 직접 언급할 수 없었던 정치 상황 하에서 영화의 배경이 ‘이곳’이 아닌 곳이나, ‘지금’이 아닌 때를 상정하여 민감한 문제를 피해가고 현실 정치에 대한 환멸을 모호한 지점으로 바꾸어놓음으로써 인간의 보편적 문제로 접근할 수 있었다.36) 결국 현실사회의 제약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식이 환상이란 점에서 <애마부인>의 성적 판타지 역시 그렇지 못하는 현실세계에 대한 강력한 문제제기이다. <어우동>이 정치적 의미로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 알수 있듯이 80년대 성애영화의 모호성은 현실에 대해 직접 언급할 수 없는 제약에 대한 의도적 일탈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80년대 성애영화들이 다른 정사장면과는 달리 만족-희열을 느끼는 장면만 유독 환상적으로 표현된다는 점은 반대로 현실세계에서 억눌린 욕망의 강력한 염원의 표출인 것이다. 환상성은 현실세계의 지배적인 것들을 공격하며 ‘실재적인 것’의 본질과 그 고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일으킴으로써 기존의 것을 대체할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문화적 요구이기 때문이다.

    금기에 도전하는 성적 환상은 현실세계에 대한 불만과 불신 그리고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거부이며 새로운 정체성의 요구이다. 80년대 성애영화의 판타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권위주의 정부를 직설적으로 공격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호성을 통해 우회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며 ‘성’의 모호한 상징성은 80년대 성애영화 속 여성의 판타지로 표출되어 정치적 은유로 읽을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마련해 놓았다고는 할 수 있다.

    23)강준만, 위의 책, 87쪽.  24)≪동아일보≫, ‘TV‧영화 여성해방 기류’, 1982년 1월 16일.  25)상황은 ‘반란’과 ‘해방’과 같은 단어들 간의 상호작용으로, 독자는 이 단어가 포함된 문장을 읽고 상황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배경, 가령 지식이나 문화 등에 의해 문장을 인지적 표상으로 구성하여 의미를 부여한다. 이 때 상황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배경을 문맥이라 한다.(프리드리히 웅거러‧한스 요르그 슈미트, 임지룡‧김동환 역, 『인지 언어학개론』, 태학사, 2010, 18∼20쪽).  26)송효정, 위의 책, 310쪽.  27)조지 레이코프, 유나영 옮김,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삼인, 2012, 17쪽.  28)김동호 외, 『한국영화정책사』, 나남출판, 2005, 497쪽.  29)수잔 제퍼드, 이형식 역, 『하드바디』, 동문선, 2002, 24쪽.  30)송효정, 위의 책, 306쪽.  31)≪씨네21≫, ‘70∼90년대 한국의 시네마테크/70년대-유럽고전에 탐닉한 문화원세대‘, 1998년 제164호(http://www.hani.co.kr/c21/data/L980803/1q4e8301.html).  32)프리드리히 웅거러‧한스 요르그 슈미트, 위의 책, 355∼361쪽.  33)캐서린 흄, 한창엽 역, 『환상과 미메시스』, 푸른나무, 2000, 20쪽.  34)로즈메리 잭슨, 서강여성문학연구회 역, 『환상성-전복의 문학』, 문학동네, 2001, 32쪽.  35)위의 책, 24쪽.  36)송효정, 위의 책, 312쪽.

    5. 80년대 성애영화의 자기분열

    <애마부인>의 시나리오 작가 이문웅의 표현처럼 80년대는 극심한 자기분열의 시대였다. 대중은 5월 광주와 삼청교육대로 대변되는 전두환 정권의 폭압성과 함께 학원자율화와 프로스포츠, 영화의 성적 표현의 완화 그리고 올림픽이라는 국가적 행사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자유를 맛보았다. 시대적 분열은 이 시기 성애영화에서 내용과 표현방식의 충돌의 형태로 발견된다. 영화는 여성을 주체로 상정하고 여성의 욕망을 전면에 내세웠으면서도 다루는 방식은 다분히 남성 중심적이었다. 여성의 신체를 파편화한 화면은 남성의 관음증적 시선이, 성애장면은 여성의 욕망 대신 남성의 판타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김보경은 80년대 성애영화가 유독 남녀의 교감을 나타내는 키스와 전희(前戱)가 생략되고 삽입성교 중심의 성애표현이 강조되는 이유를 여성역할을 수동적인 것으로 제한하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이데올로 기를 표방한 것이라고 분석했다.37) 이러한 영화의 자기분열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성적 욕망을 인정하는 사회적 공감대와 무관하게 영화의 잠재적 관객을 남성으로 가정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성애영화의 자기분열은 의외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측가능하고 한계가 명확한 것이었다. 거대담론에 헌신하는 80년대, 여성의 사적 영역에 대한 논의는 진척되지 못했던 것이다. 80년대 민주화 세력은 거대 담론, 즉 민족과 통일 그리고 민주화에 대한 요구는 치열했지만 성과 개인적 가치에 대해서는 무감각했다. 거대담론 속에서 개인의 쾌락 또한 죄악시했고 정치적 금욕주의가 개인의 일상을 억압했다. 반면 대의를 위해 개인의 희생은 숭고한 것으로 적극 독려되었다. 부패한 권력에 대한 도전 속에서도 가부장적인 가치관은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공적 담론이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누락시켰던 개인의 내밀한 영역을 다룬 성애영화가 흥행을 선도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여성의 욕망을 통해 금기에 도전하고 있지만 80년대 성애영화가 이율배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영화의 자기분열은 70년대부터 시작되어 80년대에 급격하게 팽창한다. 70∼80년대 한국영화는 위로부터의 담론, 즉 국가정체성과 아래로부터의 생산물이 극심한 불일치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우선 두 시기 모두 동일한 방향의 국가정체성을 확립하려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70∼80년대 정부의 지배담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빈민촌의 형성과 철거다. 박정희 정권은 거리의 부랑아를 구제의 명목으로 가뒀고 전두환은 그런 빈민촌을 올림픽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철거했다. 두 정권 모두 그들의 국가정체성에 위배되는 ‘비체’ 혹은 ‘혐오스러움’을 배제하려는 속성이 있다. 이는 영화정책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박정희 정권이 다양한 방법으로 영화계를 통제한 이유는 ‘건전한 영화’를 육성하려는 시도로38) “사회정화에의 강박증”적 지배문화의 일환이었다.39) 그러나 70년대 중후반 등장한 호스티스 멜로물은 건전한 영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편 80년대 역시 건전문화에 대한 강박증은 비슷하지만 상황은 조금 달랐다. 제5공화국 헌법은 “유구한 민족사, 빛나는 문화”로 시작하여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하며40) 건전한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려 시도했다. 공적 문화 영역인 방송에서 <전원일기>, <고교생일기>, <호랑이 선생님> 등 미풍양속을 지키는 건전드 라마와 건전가요가 넘쳐났으며 1983년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138일 동안 총 방송시간 453시간 45분, 일일 최대 편성시간 12시간으로41) 영화를 압도하는 규모와 스펙터클과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80 년대 한국영화는 70년대와 달리 성적 표현에서만큼은 상대적으로 관대했다. 따라서 80년대 성애영화는 국가주도의 건전문화와 거리는 멀었으나 배제의 대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점차 태동하기 시작하는 비판적 리얼리즘 영화들이 전두환 정권의 국가정체성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아브젝시옹(abjection)은 주체가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자아를 위협하는 혐오스럽거나 비천한 것들(abject-비체)을 끊임없이 출몰시켜 자아의 안정된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필수적 심리 기제이다. 이 때 자아의 경계를 무너뜨릴 만큼 위협하는 비체에 대한 양가적 감정, 혐오와 매혹을 동시에 갖게 된다. 그러나 아브젝트가 되는 것은, 부적절 하거나 건강하지 않은 것이라기보다는 동일성이나 체계와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에 더 가깝다.42) 70∼80년대 한국영화는 성(性)이라는 매혹적이면서도 금기의 영역을 건듦으로써 국가가 제시한 정체성에 반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70년대와 80년대의 성격은 다르다. 70년대 한국영화는 강력한 통제와 감시 아래서 주어진 프레임 안에서만 표현이 가능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70년대 호스티스 멜로드라마는 스스로 사회의 비천한 영역을 드러냄으로써 국가정체성을 위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들 영화의 도덕적 결말은 사회정체성을 안정화시키는 이중의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다. 즉 장르적으로 호스티스 멜로물은 주인공의 비극성을 강조함으로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진보성을 보이지만 반대로 국가가 강제한 강력한 프레임에 갇혀 안정의 영역으로 되돌아가는 보수성이 더욱 커진 것이다. 70년대 한국영화가 보수적이고 순응적인 이유다. 70년대 호스티스 멜로드라마는 안정과 통합이란 사회 정체성의 회귀를 촉구하는 그 자체로 정화작용으로서 아브젝시옹이었다. 저항과 합의가 여기에서도 작동했던 것이다.

    반면 80년대의 분열은 다른 양상이다. 80년대 역시 건전문화를 지향하는 국가정체성과 달리 건전을 위협하는 성애물을 제작함으로써 국가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은 같다. 그러나 성적 표현의 자유를 획득한 80년대 한국영화는 도덕적인 응징의 보수적 결말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에(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기 때문에) 사회 안정화에는 기여하지 않는다. 즉, 성애영화는 비체이지만 자신만의 프레임을 갖춘 자아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전두환 정권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진짜 비체는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5‧18’이다. 전두환 정권은 그들의 비체인 ‘5‧18’을 끊임없이 밀어내기 위해 거대한 쇼를 계속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근본적인 비체를 숨기기 위해 완화시켰던 사소한 비체, 즉 성의 경계가 자신들이 구축하려던 권위주의적 정체성을 무너뜨리는지 조차 몰랐던 것이다. 성적 표현의 완화가 가져온 작은 변화는 80년대 성애영화라는 아브젝시옹으로서 전두환 정권을 공격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80년대 후반 코리안 뉴웨이브는 건전을 강요한 국가정체성을 위협하는 사소한 비체, 즉 성애영화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아브젝시옹은 종교나 법‧도덕의 폭력 행사나 필연성을 가장한 부조리함을 입증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43)

    80년대 성애영화가 내용과 표현의 분열을 보이는 한계를 갖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성애 장면을 보여주는 <어우동>의 독특한 수사학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우동>이 같은 시기 다른 성애영화와 다른 것은, 비록 부분적이긴 하지만 여성의 신체를 파편화시키지 않으며 나아가 남성중심적인 시선을 폭로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우동>에는 총 다섯 차례의 정사장면이 등장하는데 그 중 어우동 스스로가 원한 마지막 정사를 제외한 나머지 네 번의 성애 장면에는 어우동을 감시하는 시선이 존재한다. 관객은 감시하는 자의 시선을 통해 어우동의 정사를 ‘훔쳐보는’ 한편 감시하는 자를 동시에 바라보는 시선의 분열을 경험하며 몰입을 방해받는다. 이 네 번의 성애 장면에서 어우동은 관음의 대상이며 기생으로써 남성에게 성을 제공하는 위치에 놓여있다. 그러나 남성을 성적으로 주도하는 어우동의 도발적인 행동은 여성의 신체를 전시하는 엿보기의 쾌감, 남성중심적인 시각을 배신한다. 여성의 얼굴이 제외된 가슴과 클로즈업 된 붉은 입술, 게슴츠레한 눈 그리고 남자의 얼굴을 회피하는 구도 대신 <어우동>은 파편화되지 않은 여성의 얼굴을 담아내고 남자의 표정을 포착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여성의 신체를 전시하는 남성의 시각을 비꼬기라도 하듯 첫 번째 성애 장면에서 어우동은 자신을 강간하려는 남자를 오히려 희롱하고 남자는 마치 ‘강간을 당한 여성’처럼 수치심을 느끼며 얼굴을 가리는 장면을 보여준다. 기방에서 양반과의 성애장면 역시 굴욕적인 남성의 표정을 보여주는 발칙함을 보여주더니 왕과의 성애장면에서 왕은 어우동의 발치에 위치하며 어우동이 왕을 내려다보는 구도를 취한다. 성애장면에서 수치심을 느끼는 남성의 표정이나 쾌락을 갈구하는 남성의 표정은 낯선 것이며, 특히 남성 관객은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유일하게 감시하는 시선이 없는 마지막 정사는, 그러나 상대가 거세된 자라는 점에서 그리고 이중인화된 화면은 두 사람의 성애장면을 온전하게 볼 수 없도록 방해한다. <어우동>은 여성의 신체를 관음하면서도 그 시선이 감시하는 자의 것임을 폭로하고, 일반적인 성애영화와 다른 남성과 여성의 관계 역전의 수사학을 통해 관객의 기대를 배신하고 스스로 균열을 냄으로써 자기분열의 시대를 조롱했던 것이다. <어우동>은 정치적 불온함과 더불어 성애영화의 자기분열적 한계를 극복하려 한 시도로 볼 수 있다.

    37)김보경, 위의 글, 18∼19쪽.  38)박승현, 「대중매체의 정치적 기계화-한국영화와 건전성 고양(1966∼1979)」(주창규, 「충무로 로드무비 장르연구」, 『영화연구』 34호, 2007, 380쪽에서 재인용).  39)이상록, 「박정희 체제의 ‘사회정화’ 담론과 청년문화」(주창규, 「충무로 로드무비 장르연구」, 『영화연구』 34호, 2007, 380쪽에서 재인용).  40)손정목, 위의 글, 114쪽.  41)최창봉‧강현두, 『우리방송100년』, 현암사, 2001, 290쪽.  42)줄리아 크리스테바, 서민원 역, 『공포의 권력』, 동문선, 2001, 25쪽.  43)줄리아 크리스테바, 위의 책, 43쪽.

    6. 나가며 : 권위주의 붕괴의 쐐기, 성애영화

    <애마부인>을 연출한 정인엽 감독은 CBS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애마부인>은 에로영화가 아니라 성을 주제로 한 에로티시즘이라고 반박했다.44) 에로영화의 상징 같은 영화로 각인된 <변강쇠>의 주인공 이대근 역시 KBS의 한 토크쇼에 출연하여 <변강쇠>와 <뽕>에 대한 일반적인 시선, 에로영화라는 잘못된 인식에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대근에 따르면 <변강쇠>는 당시의 불평등한 시대 제도를 다룬 것으로 기존 질서에 대한 반항과 조롱이 담겨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영화를 연출한 감독 엄종선은 안기부에 끌려가기도 하는 등의 우곡골절 끝에 영화의 1/3이 편집되는 고초를 겪었다.45) 역시 이대근 주연의 <뽕>은 나도향의 동명소설을 이두용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1986년 최우수 작품상과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항변한다. 80년대 성애영화의 대부분이 원작 소설을 존재한다는 점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분명 신군부가 성적 표현에 대해 규제를 완화한 목적은 일종의 회유책이며 탈정치화를 위한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자신들의 아킬레스건인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숨기기 위해 거대한 쇼를 계획하고 실행했던 것이다. 성애영화는 3S 정책의 일환의 결과였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독재에 대한 항거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자 민심 수습 차원에서 사회적 분위기를 일소할 구실과 명분을 성애영화에서 찾기도 했다.46) 1985년 초, 안소영, 오수비, 유지인 등 10여명의 한국 여배우들이 일본의 주간지 <헤이본 판치>에 반라의 포즈로 사진이 게재되자 그동안 구경만 하던 정권이 마치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듯 ‘음란과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공연윤리위원회가 영화, 비디오, 연극 등에 대한 사전심의를 강화하고 선정적인 극장 간판들이 철거되었다. 부부간의 성적 갈등을 다루며 비슷한 제목과 내용을 보이던 성애영화가 시대극의 형식을 빌려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부터였으며 <어우동> 투서 사건 역시 같은 해에 일어났다. 그리고 그해 5월 서울 미문화원점거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5‧18 광주민주 화운동이 공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숨죽여있던 학내외 민주화운동의 불씨를 당겼으며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공교롭게도 ‘성적 금기’와 ‘정치적 금기’가 다시 공존하며 사회를 뜨겁게 불태웠다.

    성을 주제로 했다는 점에서 <애마부인>과 80년대 성애영화를 성과 정치를 알레고리화한 와 같은 60∼70년대 영화들과 동등하게 위치시킬 수는 없다. 완성도나 주제의식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주어진 환경과 한계 안에서 80년대 성애영화는 60∼70년대 서구의 성애영화 못지 않게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바로 개인의 성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주체로서 국가가 그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은 결과물이 80년대 한국의 성애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번 불기 시작한 자유화의 바람은 꺾이지 않고 거세졌다. 성애영화의 등장과 흥행 그리고 연이어 83년 학원자율화 조치의 일환으로 대학 내 서클 조직 규정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완화되면서 영화 동아리의 결성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들 대학 영화 동아리는 영화를 민중문화의 표현매체로 인식하고 사회비판적인 단편영화 제작하고 발표하면서 대학영화운동의 시상을 실천하고자 했다.47) 영화계에서는 85년 제 5차 영화법개정으로 영화업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었으며 독립영화제작제도가 도입되어 영화제작업자로 등록하지 않고도 영화를 제작할 수 있게 되면서 다양한 영화가 제작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결정적으로 87 년 9월 1일 영화 시나리오 사전심의제가 폐지되면서 독립영화진영을 중심으로 영화제작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48) 아이러니하게도 3S정책이 대중문화의 ‘향락화‧퇴폐화’를 가져오면서 저항적인 대안문화 역시 태동했다.49) 민주화를 요구하는 저항세력은 이러한 정책에 맞서, 정권의 아브젝트인 광주를 반대로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받아들 이며 저항의식을 다잡았던 것이다. 성적 금기를 깨고 도전하듯 정치적 금기인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수면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영화화가 87년 <칸트씨의 발표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 5월 광주에서 시선을 돌려놓기 위한 유화조치인 성적 표현의 자유가, ‘향락화‧퇴폐화’의 대명사로 인식되던 80년대 성애영화가 오히려 5월 광주를 전면에 드러내게 만든 단초를 제공한 셈이었다.

    <애마부인>이라는 나비의 날개짓은 한국영화의 금기를 점차 깨트리더니 잃어버린 자신의 언어를 되찾고 스스로의 프레임을 구축하며 성을 매개로 기성사회를 공격했다. “내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하겠다”라는 애마부인의 자유선언은 금기와 제약을 벗어난 정치적 자유를 갈구하는 시대의 풍경과 적절하게 겹친다.50) 5‧18을 숨기기 위한 모든 통제와 억압이 일순간에 무너지며 거침없이 자유화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등 이미 사회가 규제완화와 민주화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또한 80년대 성애영화의 핵심은 성적 표현의 문제가 아니다. 정확하게는 성애영화가 부각시킨 사적 영역으로서의 성이다. 국가중심의 안정과 통합을 추구하던 정권과 그에 저항하는 민주화 진영 모두 거대담론에 헌신하는 동안 성애영화는 사적 영역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개인의 가치가 중요시되는 것이 결국 민주주의의 핵심이란 측면에서 그간 공적 담론에서 배제된 개인의 성, 그 중에서도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다룬 성애영화는 분명 매우 큰 의의를 지닌다. 결국 다양한 사회‧문화적 층위와 더불어 80년대 한국영화가 시대정신을 회복하고 동시성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이어지는 데에 80년대 성애영화가 그 시발점이며 큰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 성애영화를 에로영화와 구분 해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44)≪노컷뉴스≫, ‘<애마부인> 정인엽 감독 “한국영화 거품을 걷어내야”’, 2007년 7월 4일자 인터넷 기사.  45)≪뉴스엔≫, ‘이대근 “<변강쇠>가 에로영화? 하층민 대표 인권영화” 해명’, 2011년 12월 27일자 인터넷 기사.  46)서정남, 위의 글, 164쪽.  47)서울영상집단, 『변방에서 중심으로』, 시각과언어, 1996, 68쪽.  48)이현진, 『5‧18영화의 전개와 재현양상 연구』, 한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9, 43쪽.  49)정길화‧김환균 외, 『우리들의 현대침묵사』, 해냄, 2006, 85쪽.  50)≪CNB저널≫, ‘금기 넘은 자유-애마부인의 발자국 따라’, 2011년 제 216호 인터넷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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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 전 재호 2006 「5?18의 정치 : 정치변동과 담론의 변화」, 5?18기념재단 [『5?18민중항쟁과 정치?역사?사회』] Vol.5 google
  • 28. 심 산 2001 “심산의 충무로 작가열전 13 : 이문웅-<애마부인>의 아버지” [≪씨네21≫] google
  • 29. 1982 ‘글래머 안소영 전라 출연’ [≪경향신문≫] google
  • 30. 1982 ‘TV?영화 여성해방 기류’ [≪동아일보≫] google
  • 31. 1998 ‘70∼90년대 한국의 시네마테크/70년대-유럽고전에 탐닉한 문화원세대’ [≪씨네21≫] google
  • 32. 2011 ‘금기 넘은 자유-애마부인의 발자국 따라’ [≪CNB저널≫] google
  • 33. 2011 ‘이대근 “<변강쇠>가 에로영화? 하층민 대표 인권영화” 해명’ [≪뉴스엔≫] google
  • 34. 2007 ‘<애마부인> 정인엽 감독 “한국영화 거품을 걷어내야”’ [≪노컷뉴스≫] 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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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어우동>의 지면 광고에서 ‘그녀의 남성 편력은 여성의 반란인가, 혁명인가?’라는 카피 문구가 인상적이다.
    <어우동>의 지면 광고에서 ‘그녀의 남성 편력은 여성의 반란인가, 혁명인가?’라는 카피 문구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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