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률 감독의 <풍경>에 대해 논의하기 전에 이태리의 좌파감독 질로 폰테코르보의 <카포>에 대한 자크 리베트의 짧은 리뷰를 언급하고자 한다. 나치수용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한 유대인 소녀에 관한 이야기인 <카포>에 대해 자크 리베트는 단 하나의 용어로 규정한 다. ‘천함’(abjection). 그는 영화의 단 한 장면 때문에 이 영화가 ‘천하다’고 규정하는데 그것은 수용소에 수감된 여성 리바가 스스로 전기 철조망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순간을 카메라가 트래블링-인으로 재현한 장면이다. 철조망을 손으로 움켜쥐고 죽은 리바의 몸을 보여주기 위해 앙각으로 올려다보던 카메라는 안간힘을 쓰면서 트래블링-인하여 기어코 관객에게 이 죽음의 장면을 보여주고 만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든 죽음의 스펙터클을 잡아내기 위해 카메라의 움직임을 지시하던 현장에서의 폰테코르보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영화가 무엇을 보여주는가 못지않게 어떤 방식과 관점으로 보여주 는가를 중시했던 당시의 급진적 비평 풍토에서 자크 리베트에게 죽음은 오직 불안과 동요의 감각으로만 접근될 수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 였다. 그는 “이처럼 신비로운 것을 찍는 순간에 어떻게 스스로 사기꾼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말하면서 “이 순간, 마지막 프레임의 앵글에 정확하게 시체를 잡기위해 앙각의 트래블 링-인을 하기로 결심한 이 사람은 가장 깊은 경멸만을 받을 수 있을 뿐”이라고 단언한다. 1) 세르주 다네는 자크 리베트의 1961년 글에 대해 [<카포>의 트래블링’](1992)이라는 글로 화답한다. 자크 리베트의글 덕분에 <카포>는 보지 못했음에도 본 것과 같은 영화가 되었다면서 이렇게 단순한 카메라의 움직임 하나가 결코 행해서는 안되는 움직임이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카포>의 트래블링, 그것은 실행하면 명백하게 ‘천해지지 않을 수 없는 움직임’의 대명사였다. 다네에게 <카포>의 트래블링은 논란의 여지 없는 공리, 모든 토론의 한계지점이 되었으며 <카포>의 트래블링의 천함을 즉각 느끼지 못하는 사람과는 결단코 아무 것도 나눌 수 없다고까지 주장하게 된다. 2)
물론 지금은 비평적 엄격함이 살아있던 그때와는 다른 시대다. 단하나의 컷을 두고 이미지의 순수성에 대해 그토록 치열하게 논쟁하던 시대는 과거가 되었고 영화를 비롯한 매체들이 관점도, 목적도 제각각인 지구상의 모든 이미지들을 뒤죽박죽 섞어서 상품이라는 거대한 형상으로 만들어버리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하나의 카메라 움직임을 놓고 몇 시간이고 토론하는 비평의 엄격함이 필요한 것은 그것이 부패한 이미지가 만연한 시대에 이미지의 독성에 대한 최소한의 방부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단 하나의 컷에 대해 몇 시간을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란 실제 존재하는 사람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는 작업 이다. 장률의 <풍경>을 보면서 자크 리베트와 세르주 다네가 수십 년전에 했던 이야기를 떠올린 이유는 결국 그것이 창작과 비평의 윤리에 관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그 어느 장르보다 촬영대상(피사체)과 촬영주체(카메라), 관객의 관계에 대해 깊이 질문한다. <풍경>을 보면서 영화에 대한 지지와 비판 사이에서 하나의 비평적 입장을 정하기 어려운 모호함을 경험한 것은 이 영화가 취하고 있는 대상과의 거리, 그리고 그 거리의 재현방식에 대해 좀 더 숙고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자신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민으로서 이주 노동자들과 타자로서의 동질감을 공유하지만, 대학교수이자 감독이라는 문화자본의 소유자인 그가 블루칼라 이주 노동자들과 전적으로 같을 수는 없다.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다루려는 대상 과의 관계를 반영한다. 그 동일성과 차이의 자리에서 장률이 카메라를 들었을 때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 그 거리와 감정을 보여주는가? 이글은 그에 대한 분석이다.
1)자크 리베트, 「천함에 대하여」, 이윤영(편역), 『사유 속의 영화』, 문학과 지성사. 2011 2)세르주 다네, 「<카포>의 트래블링」, 이윤영(편역), 위의 책.
<풍경>은 장률감독의 6번째 영화이자 첫 번째 다큐멘터리이다. 3) 이영화에 대해서는 다큐멘터리로서는 이례적으로 한국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평론가들에 의해 상당 분량의 비평이 제출되었다. 4) 구체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필자마다 입장이 조금씩 다르지만, 이들은 장률 감독이 영화의 등장인물인 이주 노동자들과 디아스포라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하면서도, 그들과의 계급적인 ‘차이’를 의식하는 가운데 자신의 위치를 잡았다는 것에 대체로 동의한다. 실제로 장률은 <풍경>이 “서울에서 못보던 이방인들의 풍경을 보기 시작하면서 나와 사는 방식이 다른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자꾸 눈길이 가서” 5) 만든 영화라고 밝힌 바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이방인들의 풍경’이라는 표현이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풍경’은 이 영화의 출발점에 대한 매우 솔직한 고백이다. 그는 이주 노동자들에게서 동질성과 이질성을 동시에 보았다. 연변 출신 이주민이라는 정체성은 그가 이주 노동자들의 정서를 이해하는데 자연스러운 조건이 되었지만 상당한 문화자본을 소유한 그가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온 육체노동자들의 삶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단순히 몸에 각인된 이주민의 정서를 공유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충실히 담아내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에 들어가 함께 하며 관찰, 공감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는 그만큼의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다. 촉박한 일정으로 들어온 작업 의뢰는 그에게 열악하고 차별적인 노동의 고통이나 삶의 애환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고 잡아낼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한 조건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자신과 그들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만큼의 ‘거리’를 두고 그들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것이었다. 여기서 ‘차이’는 ‘모름’으로 바꿔도 무방하겠다. 그는 처음부터 그 점을 인정하고 들어 간다. 자신과 ‘같으면서도 다른’ 대상을 찍을 때 카메라는 그들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가?
‘풍경’은 대상에 대해 감독 자신이 두고 있는 거리를 의미하는 제목 이기도 하다. 풍경이란 대상과 적당한 거리를 두었을 때 조망할 수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설정된 거리는 과장하거나 위선적인 공감을 표명하지 않으면서 대상에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을 제공한다. 장률은 심지어 그들의 몸, 말, 생활까지도 풍경으로 간주한다. “사람들 사이의 모든 거리는 계산이예요. 나는 실제 거리를 찾았어요. 그런 거리 속에서 나와 저 사람의 감정이 흐를 수 있는 딱 그 만큼의 거리. 거기서 더 들어가면 용기인데 나에게 그런 건 없었어요.”라는 그의 말은 그가 찾은 거리가 이 영화의 윤리와 직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질로 폰테코르보에 대한 자크 리베트의 언사를 잠시 빌려 보면, 그는 “사기꾼이 되지 않기 위해”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만큼의 거리를 두고 대상에 접근하려 했다. 그것이 그가 선택한 창작의 윤리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가 택한 거리와 그 거리를 재현하는 방식이 최선인지 혹은 정당한 것인지를 따져 묻는 작업일 것이다. 6)
3)정확히 말하면 <풍경>은 장률의 5½번째 영화다. 5편의 극영화를 만들고나서 전주국제 영화제 ‘디지털 3인3색’ 가운데 한편에 대해 제작 의뢰를 받고 40분짜리 중편으로 만들 었다. 영화제가 끝난 뒤에 이 40분짜리 중편을 장편으로 확대한 것이 이 글에서 논하는 장편 <풍경>이다. 그러니 중편과 장편을 각자 독립된 작품으로 본다면 장편 <풍경> 은 그의 6번째 작품이지만 둘을 연결된 작업으로 본다면 중편의 보충물로서 5½번째 영화가 된다. 지면에서 논의되는 <풍경>은 대부분 장편버전을 의미한다. 4)<풍경>을 2013년 한국영화 베스트3에 선정하기도 한 영화주간지 ≪씨네21≫은 자사 기자 및 평론가들의 글을 지속적으로 실으면서 <풍경>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풍 경>에 대한 리뷰는 다음과 같다. -변성찬, 「다가가기 위해 물러섬」,≪씨네21≫. no.939. 2014.1.-남다은, 「장률의 마음이 선 자리」,≪씨네21≫. no.934. 2013.12. -장병원, 「충돌하는 꿈」,≪씨네21≫. no. 934. 2013.12. -정한석, 「풍경,꿈,거리」,≪씨네21≫. no.937. 2014.1. 5)강조는 필자에 의한 것임 6)장률, 정성일, 「정성일, 이주 노동자들에게 꿈을 묻고 다니던 장률에게 꿈을 묻다 -안개 속 풍경」, ≪씨네21≫. no.933. 2013.12.10.-12.17, 이 글에서 직접 인용하는 장률의 말은 모두 이 인터뷰에서 인용한 것임.
전주국제영화제의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로 시작된 이 영화에 주어진 제작 기한은 매우 촉박했다. 최소한의 시간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업에 들어갈 때 특정한 인물(사회적 배우로서의 등장인물) 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감독은 ‘시간’이라는 변수를 제거하고 최대한 다양한 사람들과 공간을 찾아내서 그들의 말과 삶의 공간 이미지들을 붙여보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니까 <풍경>은 시간을 압축하고 공간을 확장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과를 극대화한 영리한 영화인 셈이다. 인천공항, 안개 낀 강변북로, 사진관, 마장동 도살장, 제주도, 농장, 금속을 제련하는 불꽃이 번쩍이는 철공 장, 염색 공장 등 영화가 담아낸 공간은 실로 다양하며 이들은 영화 속에서 상당한 스펙터클로 기능한다. 가급적 다양한 노동 현장을 보여 주는 인물군이라는 큰 틀에서 섭외된 14명의 이주노동자들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삭제되지 않고 모두 영화 속에 등장한다.
카메라 앞에 정물처럼 세워진 인물들을 향해 감독이 요청한 것은 단 한가지다. 그들이 한국에서 꾼 꿈에 대해서 들려달라는 것이었다. 인물들이 증명사진을 찍듯이 카메라 앞에서 자신들의 꿈에 대해 이야 기하면 카메라는 이들의 말을 조용히 기록한다. 그들의 내면 속 깊이 다가갈 수 없다면 어설프게 개입하느니 차라리 조용히 경청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듯이 감독은 단 한 번도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감독은 한국에서 꾼 꿈에 대해 질문한 이유에 대해, 이들에게 다른 질문을 하면 다 거절하는데 한국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꿈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는 긴장감이 풀어지며 진실하게 대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작 다른 질문을 할 때 불가 능하던 소통이 꿈처럼 내밀한 이야기를 물을 때 오히려 가능하더라며 이러한 소통방식을 찾은 것에 대한 행복감을 표시한다. 그런데 난처한 것은 감독의 느낌과 달리 이들이 들려주는 꿈이 정작 관객에게는 그다지 새롭거나 흥미롭지 않다는 것이다. 때로 인물들이 들려주는 꿈이야기는 당혹스러우리만큼 상투적으로 들린다. 7) 변성찬은 이 질문이 ‘텅 빈 질문’에 가까우며 그것은 “묻는 자가 아니라 대답하는 자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 질문”이라 말하는데 그의 주장에는 어딘지 상투적인 대답을 유발하는 질문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태도가 엿보인다. 장률감독과 직접 인터뷰를 한 정성일의 글에서도 꿈의 상투성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러한 ‘상투성’은 필자만의 주관적인 느낌은 아닌 것 같다.
정작 이 영화에서 무미건조한 인터뷰에 특정한 인상을 보충하고 독특한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인터뷰 앞뒤에 보여지는 공간 속에서 카메라가 움직이는 방식이다. <풍경>에서 카메라는 인물들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인터뷰어들이 정물처럼 부동의 자세로 인터뷰하는 것과 달리 카메라는 뛰거나 걷고 때로는 한숨을 쉬고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하면서 숨김없이 감정을 발산한 다. 때로는 인물들과 붙어있기도 하고 때로는 인물들과 분리되어 빈공간을 저 혼자 돌아다니면서 카메라는 독립된 인격체의 시선으로 활보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카메라의 주관적인 시점, 움직임이 특정 인물이나 감독에게 전적으로 귀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때로 카메라는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와리우라 브우아이야(방글라데시)가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제주도에 대해 낭만적인 꿈을 이야기할 때 카메라는 아예 제주도로 날아가 그곳의 풍경을 보여준다. 말 그대로 그의 꿈을 실현시켜 주는 것이다. 때로는 이주 노동자들의 노동을 우두 커니 지켜보다가 방 안쪽에 있는 인물을 방 바깥에서 좌우로 움직이며 지켜보기도 하고, 밤거리 시장 골목을 구경꾼처럼 통과해 가기도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아예 헐떡거리며 급한 호흡으로 달리다가 급기야 땅에 털퍽 주저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기까지 한다. 도대체 이 다양한 감정을 연기하는 시점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물론 이러한 질문은 현명하지 않다. 이미 관객은 그것이 특정한 주체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객관성 /주관성의 이분법을 벗어난다. 카메라가 거리를 둔 채 대상을 지켜본다고 해서 객관적으로 관찰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사실성의 논리를 벗어던진 카메라는 전적으로 감독의 직관적인 리듬과 호흡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다.
이러한 움직임은 어느 순간 마치 유령이 출몰하는 듯한 주관성과 환영적인 느낌을 영화에 불어넣는데, 감독의 연출이 노골적으로 개입한 장면들에서 이러한 느낌은 더욱 두드러진다. 나무에 매달린 그네가저 혼자 흔들리는 장면이나 공장의 조립건물 마당에서 사람이 타지 않은 세발자전거가 저 혼자 움직이는 모습, 혹은 지하철 플랫폼 벤치에 앉아있던 두 명의 이주 노동자가 지하철이 지나가고 난 뒤에 홀연히 사라지는 장면들을 기억해 보라. 이 초현실적인 장면들은 어떤 식으로든 지금-여기에 뿌리박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이주 노동자들의 존재 양상을 표현한다. 이 장면들이 감독이 노골적으로 개입한 장면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감독의 시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자가 운전하던 자전거가 마당에 패인 홈에 가로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멈춰 설 때 그것은 이들의 움직임을 억누르는 보이지 않는 힘의 형상화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영화 전반에 감도는 유령 같은 분위기는 정물처럼 움직이지 않고 인터뷰하는 노동자들마저도 현실적 존재감 없는 유령적인 존재로 만드는 듯하다. 영화는 이주노동자들의 인터뷰를 뼈대로 구조를 짜나가지만 그것은 대한민국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이라기보 다는 그들의 부박한 삶, 언제든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는 위태로운 존재 방식, 그들을 증발시키는 이 나라 이 도시의 압력에 대한 감각 적인 재현에 가깝다. 이제 영화는 점점 더 주관적인 에세이가 되어 간다. 이러한 느낌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더욱 강화된다. 그러니까 이영화는 다큐메터리적 객관성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풍경>은 14명의 사회적 배우들의 말보다 그들이 말하는 환경과 주변의 분위기가 훨씬 중요한 영화다. <풍경>은 사회현실의 표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매끄러운 현실의 표면 아래 접혀있는 주름과 얼룩을 보여주려는 영화다. 안으로 접혀있는 주름은 외관의 표면을 열심히 모사(模寫)한다고 해서 드러나지 않는 다. 주름을 보기 위해서는 표면을 뚫고 들어가서 접힌 부분을 펴야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주관적 에세이라는 형식을 택했고 카메라 역시 외형적 풍경을 넘어 내면의 풍경까지 넘나드는 시점을 택했다. <풍경>은 꽉 짜인 구조 속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상징계의 표면에 숭숭 뚫린 구멍에 대해 눈길을 준다. 상징계의 구멍을 뚫고 불현듯 출몰하는 실재계(the Real)의 얼룩처럼 혹은 유령처럼 출몰하는 환영적 존재 로서 이주민을 이미지화, 혹은 풍경화(風景化)하는 영화다. 이주 노동 자들의 인터뷰가 그다지 생기가 없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을 한들 그 서툰 말들은 의미화되지 못하고 풍경의 일부로 남는다. 그것이 장률이라는 연변 출신의 이산민, 지금은 한국에 정주하는 한 지식인 감독의 눈에 비친 이주민과 한국사회의 풍경인 것이다.
7)낯선 외국에 와서 고향의 가족을 위해 고된 노동을 반복하는 이들이 꾸는 꿈은 어떤 식으로든 엇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좋은 꿈이라면 가족을 그리워하거나 꿈에서나마 가족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것이고 나쁜 꿈이라면 그들이 처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공포로 형상화되는 악몽이다. 좋은 꿈이거나 나쁜 꿈이거나 그것은 결국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그들의 도피 욕구를 반영한다.
장률은 <풍경>을 만들면서 전형적인 다큐멘터리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객관적인 사실의 전달보다는 인물들과 감독 자신의 내면 풍경을 포착하는데 주안점을 두었고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적 규정이 그러한 방향에 장애가 된다면 굳이 ‘다큐멘터리’라는 용어를 고수할 필요도 없다고 보았다. 노골적인 연출의 개입을 주저하지 않은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이게 다큐인가? 다큐가 아니어도 좋다. 극영화인가? 극영화가 아니어도 좋다. 연출이 없는 다큐는 없다. 그렇다면 열어놓고 해보 자. 다 진짜로 찍긴 하지만 모두 다 연출이다. 최소한 그것보단 내가 정직하지 않았나, 노골적으로.” 이렇듯 그의 카메라는 외관상의 ‘사실’ 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내면의 풍경에 집중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인물과 공간들 사이를 점핑하는 이 영화의 시적 논리, 자유연상 기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초울 칸피아루(캄보디아)의 악몽에 관한 인터뷰가 끝나고 열 번째 인터뷰 대상자인 세크할 마문(방글라데시)의 인터뷰가 시작되기 전이다. 카메라는 한국인들에게 목공 일을 가르치는 마문의 작업장 안에 들어와 있다. 통상적인 핸드헬드와 달리 책꽂이와 책걸상 사이로 좌우로 흔들리며 프레임 후경을 향해 들어가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어딘지 귀기(鬼氣)어린 느낌을 준다. 카메라가 당도해 응시하는 것은 실내 안쪽 붉은 벽에 걸린 도시의 야경 사진이다(내가 도시의 야경이라 느낀 이사진은 실은 세크할이 예전에 일했던 마석가구단지 사진이라고 한다). 마문은 그 사진이 붙어있는 벽 앞에서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준다. 7,8년이 지나도록 5번이나 반복되는 꿈은 한국에서 겪은 불쾌하고 서글픈 경험이 그에게 트라우마로 고착되었음을 보여준다. 의아한 것은 다음 쇼트이다. 마문의 인터뷰 쇼트 뒤에 코끼리 한 마리가 풀숏으로 등장하는데, 이 장면에서 코끼리가 등장하는 이유가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코끼리가 나뭇잎 뜯어먹는 모습을 한참 보고난 뒤에야 코끼리가 그려진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안쪽에서 목공 일을 배우는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때서야 관객은 코끼리가 작업장 유리창 무늬에서 자유 연상된 이미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쇼트 배열은 이장면들이 사건의 인과율이 아닌 자유연상에 의한 시적 논리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감독의 눈길 닿는대로, 그 순간 떠오르는 인상과 주관에 따라 시공간의 논리를 초월해 자유롭게 움직이는 카메라는 이렇듯 서사적 연결이라는 논리에서 한참 벗어난다. 제주도에 가보고 싶다는 노동자의 인터뷰 뒤에 직접 제주도로 날아가 그곳의 풍경을 보여줄 때, 영화는 어디론가 가고 싶은 인터뷰어들의 꿈을 빌어 감독 스스로 여행하는 여행기 travelogue가 된다.
그런데 이 제주도 장면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이물감이 구체적인 의심으로, 영화에 대한 질문으로 바뀌기 시작하는 것이 이 지점부터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이 장면에 대해 “이 사람의 꿈 속 풍경과 진짜 제주도의 풍경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어떤 분위기인지 너무 가보고 싶어졌다”고 말한다. 물론 감독은 노동자의 꿈에 등장하는 제주와 ‘실제’ 제주도로 날아가 찍어온 풍경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보여준 이미지에 대한 독해는 전적으로 관객에게 맡겨져 있는 셈이다. 나는 그가 보여준 제주의 풍경이 알리우라 브후아이야의 꿈처럼 환상 적이지는 않지만 그 나름대로 충분히 시적인 감흥을 자아낸다고 생각한다. 근접 거리에서 잡은 조랑말, 항구의 갈매기 소리, 포구에 정박된 배, 바닷가. 이 장면들은 분명 알리우라의 꿈이나 네팔 출신 여성 노동자의 방에 붙은 제주 사진의 비현실적인 낭만성보다는 덜하지만 나름대로 조형성에 공을 들여 아름답게 찍어낸 이미지이다. 이러한 풍경은 알리우라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카메라가 보여준 농촌의 그림 같은 풍경을 다시 한 번 떠오르게 한다. 노을을 배경으로 한 비닐하 우스와 움직이는 구름 쇼트에 이어 비닐하우스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모습이 등장한다. 초록의 일렁임과 바람소리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목가적 풍경이다. 카메라에 담긴 노동자는 진심으로 정성스럽게 일하고 있고 그를 둘러싼 풍경은 지나치게 아름답다. 나는 지금 반복해서 아름답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 풍경은 왜 이렇게 아름다운가? 농촌 풍경은 후반부에 다시 한 번 등장하는데 이 장면 역시 더없이 아름답고 시적이다. 처음에는 한 사람, 다음에는 두 사람, 그 다음에는 세사람,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다섯 사람이 나란히 일하는 비닐하우스 안풍경은 점층법의 리듬을 타고 미감(美感)을 발산한다. 비닐하우스 안에 4명의 노동자가 들어와 농작물을 덮은 비닐을 걷어낼 때 서서히 드러나는 초록의 물결과 함께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듯한 장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시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그런데 이러한 아름다운 풍경이 편하지 않다. 질문을 던진다. 고달프게 땀 흘리는 노동 현장을 이렇게 더없이 아름답게 보여주어도 괜찮은가?
홍상수 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 가급적 예쁜 컷은 찍지 않는다고 했다. 예쁘게 보여주려 하는 컷은 종종 삶의 진실을 덮어버리는 나쁜 컷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종종 예쁜 이미지에 대한 욕망은 지나치게 순진하거나 뻔뻔하기 마련이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면 가장 먼저 예쁘고 먹음직스럽게 보이도록 사진을 찍어서 블로그나 SNS에 올리는 네티즌들의 행위는 그 사진의 미감이 부여하는 자기 삶의 윤택함에 대한 알리바이가 된다. 그것은 과시이거나 실제에 대한 과대 포장이다. 그러한 과시를 위한 음식 촬영은 어떤 면에서 포르노 제작 메커니즘과도 유사한 면이 있다. 물론 장률 감독이 보여준 아름다운 이미지가 뻔뻔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감독은 실제로 그 곳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움과 따뜻함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 따뜻함을 의심하면 자신이 진짜 나쁜 놈이라고 했다. 그것은 장률의 진심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내면에도 장률이 발견한 것과 동일한 풍경이 그려지고 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그 이미지의 앞뒤로 붙어있는 노동자들의 꿈에서 우리는 그가 발견한 아름다운 풍경과 그들의 내면 풍경 사이에 어느 정도 온도차가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장률 감독이 이것을 모르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력한 이미지는 한치 앞도안 보이는 안개로 자욱한 풍경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헐떡거리듯 숨가쁘게 내달리다 땅바닥에 철퍽 주저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시점숏은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향한 감독의 공개적인 제안이었다. 말할 수없이 숨가쁘고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하늘을 보자고. 그래도 저 위에숨 쉴 수 있는 하늘이 있지 않느냐고. 그것은 장률이 그들에게 건네는 실날 같은 희망의 제안이었다. 그 삶이 아름다울 수 없음을 장률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그들의 삭막한 풍경 옆에 자꾸만 아름다운 이미지를 붙이려 하는 것일까? 미래가 불투명한 고된 노동에 지친 사람들에게 당신의 노동은 이토록 아름답다고 증거사진을 내밀고 아무리 힘들어도 견디자고 이야기하는 것. 이것은 대상에 대한 공감인 가? 아니면 연민인가? 그 애매한 차이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타인의 고통을 재현함에 있어 엄격함을 요구한 미국 문화평론가 수잔 손택은 “연민은 쉽사리 우리의 무능력 뿐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우리가저지른 일이 아니다”)까지 증명해주는 알리바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두는 것, 이것이 야말로 우리의 과제다.”라고 말한 바 있다. 8)
감독의 순수한 마음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주 노동자들을 대하는 감정의 요체가 연민이라면, 그러한 감정은 대상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다. 때로는 순수한 의도도 악이 될 수 있다. 다시 한 번, 그들에 대한 감독의 감정이 궁금해진다. 그것은 연민인가? 의문은 이아름다운 농촌 이미지와 나란히 붙어있는 다른 공간의 이미지를 보면서 강화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참혹하고 추악한 이미지는 마장동 도살장 풍경이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듯한 도살장에서 중국에서 온 노동자 쉬첸밍은 고통을 호소한다. 꿈마저도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그를 둘러싼 도살장의 인서트컷들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도살장은 이 영화에서 가장 추(醜)한 이미지이다. 이 황량한 이미지를 보여 주고 난 뒤에 카메라는 숨이 막히는 듯 다시 한 번 밖으로 나가 안개낀 도로를 달린다. 영화 초반 인천공항을 통해 고국 동티모르로 돌아 가는 아우구스티노를 인터뷰한 뒤에 보여준 안개 낀 도로와 동일한 풍경이다. 그들을 삼켜버리는 이 안개 낀 풍경은 장률의 심상에 들어 있는 핵심적인 이미지이다. 이 끔찍한 이미지 뒤에 이 영화에서 가장 시적이고 아름다운 풍경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염색공장과 농촌의 비닐하우스 풍경이다. 도살장 이미지 직후에 등장하는 우즈베키스탄 노동자 셰르조드 아크바로브의 염색 노동은 예술가의 작업만큼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천에 염색된 각종 문양은 화폭에 담긴 추상화 같다. 그리고 이 염색공장 뒤에 이 영화에서 가장 시적인 풍경이라 할 수 있는 농촌의 비닐하우스 풍경이 등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했다. 이렇게 가장 추한 것과 가장 아름다운 것을 나란히 붙여놓는 편집의 논리, 욕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미로써 추를정화하려는 의지인가? 추하고 고통스런 노동의 이미지를 본질적으로 동일한 노동의 아름다운 이미지로 정화하려는 욕망은 정당한가? 사실 이러한 질문이야말로 이 영화를 본 순간,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내내 나의 마음속에 있던 남아있던 의심이었다. 추한 것을 보았으되 견디지 못하고 다른 것으로 씻어내려는 욕망은 대상에 대한 공감보다는 연민의 감정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한 책임감과 연대의식이 빠진 연민은 싸구려 감상이 되기 십상이다. 추한 이미지를본 후에 입가심하듯이 아름다운 이미지로 ‘정화’하려는 욕망, 어쩌면 그것은 창작자 장률과 이주 노동자들 사이에 놓여있는 거리를 드러내는 게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8)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재원 옮김, 이후, 2009.
몇 년 사이에 장률 감독에게는 신상의 변화가 있었다. 그는 한국의 명문 사립대 교수가 되었고 이제 서울의 정주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마침 그에게 영화를 만들자는 제안이 들어 왔고 몇 년간 영화 작업을 하지 못했던 그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풍경>은 그가 다루고 싶은 테마가 내면에서 완전히 숙성되기 전에, 촉박하게 주어진 조건에 반응 하면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식과 대상을 찾은 결과물이다. 그는 그러한 점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재현하려는 대상은 자신과 공유하는 부분이 있고 다른 부분도 있다. <풍경>은 그러한 ‘같음과 다름’의 조건 속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고자 했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그의 극영화들과는 달라진 영화적 풍경을 제시한다. 나는 그가 더 많은 시간을 갖고 동일한 주제로 재작업한다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궁금하다. 그때, 단순히 시간적 제약 때문이 아니라 근래 일어난 그의 정체성 변화가 어떤 식으로든 영화에 각인된 것은 아닌지, 혹은 대상과 관계 맺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닌지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감지한 어떤 의심 혹은 의문은 아직 해소되지 않았 다. 장률 감독의 다음 작품에서는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차기 작이 기다려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