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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경주지역 적석목곽분 형성에 미친 자연환경의 영향 Influences of natural environments on construction of stone-complied wooden chamber tombs in the Gyeongju area
  • 비영리 CC BY-NC
ABSTRACT
경주지역 적석목곽분 형성에 미친 자연환경의 영향

Stone-compiled wooden chamber tombs at the Royal District in Gyeongju-si are restrictedly distributed at Noseo-, Nodong-, Hwangnam-, Hwango-, Inwang- and Gyo-dong. This area is slightly higher than the neighboring area, but also includes flood plain. The tomb has ground, sedmi-underground and underground types, and sizes of mound and compiled stone and wood in the underground type are much smaller than those in the ground stone mound. These may relate to change in groundwater level and cost to construct the tomb. Humus-rich soil in the tomb bottom indicates a black color, suggesting that the bottom was influenced by groundwater when the level rose. Construction of the ground type is evitable in the Gyeongju alluvial plain with a high groundwater level. Construction of the tomb in the Gyeongju alluvial fan is the most suitable way to natural environments in this area as well as is an achievement of an essential goal to build large tomb. All the tomb in the Yeongnam area are younger than and was influenced by those in the Gyeongju area. However, the tomb was not generally used in the Yeongnam area, because people could make a desired tomb with existing tombs such as wooden chamber tomb and stone-lined tomb. Although people and culture from Central Asia migrated and spread to the sou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the stone-compiled wooden chamber tomb in the Gyeongju area can be regarded as a product of topographical characteristics in this area.

KEYWORD
왕경지역 , 적석목곽분 , 경주의 자연환경 , 경주선상지 , 지하수위 변화
  • I.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

    금관을 비롯한 적석목곽분의 다양하고 풍부한 부장품은 신라의 독특한 문화를 대외적으로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며, 신라사회 주도세력의 기원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리고 거대한 봉분은 약 1,000년 동안 유지된 고대도시로서 경주의 경관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므로 연구자들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사자(死者)에 대한 의식은 외부의 충격으로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묘제의 선택은 인간의 문화 활동 가운데 가장 보수적이다. 적석목곽분은 경주지역 외에 경산 임당, 영덕, 창녕 교동 등에서 약간씩 확인되었을 뿐 주로 경주의 왕경지역과 건천 금척리에 분포하는 독특한 묘제이다. 조영(造營)시기에 대해 논의의 여지는 남아있으나, 대략 2~3C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견해(강인구, 2000), 4C 경을 전후로 한 시기(최병현, 1992), 그리고 AD 400년 고구려군의 남정을 계기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견해(최종규, 1983; 신경철, 1985)도 있다. 이와 같은 주장들을 종합하면, 적석목곽분은 대략 3C 경부터 경주지역에서 조영되기 시작하여 6C 경까지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적석목곽분의 조성 시기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가 있으므로, 앞으로 지속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보다 정확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경주 적석목곽분의 원형에 대하여 고고학자 및 고대사학자들은 현재까지 다양한 논의를 진행하여 왔다. 그 기원에 관련하여서는 경주 지역의 기존 묘제로부터 자생적으로 발생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고구려 ‘적석총’의 특징과 한사군의 목곽이 결합되어 형성된 묘제라는 견해, 몽골과 중앙아시아의 적석목곽분의 전통이 계승된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최병현, 1992), 이전에 경주에 있었던 수혈식 목곽묘(竪穴式 木槨墓)와 고구려의 적석이 결합되었다는 주장 등이 있다. 그리고 이 묘제의 전파경로, 조성시기, 어떤 요인에 의해 조영(造營)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몇 가지 추정과 가설이 제시되었으나 여전히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선사, 고대 인간 활동의 산물들은 외부의 자극이나 전파에 의한 영향으로 형성되기도 했지만, 자신들이 살고 있던 공간의 자연환경과 조화되어 그 지역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발전된 경우도 있다. 중앙아시아에 분포하는 적석목곽분들도 묘제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는 유사하지만 세부적인 구조에 있어서는 지상식, 지하식 등 다양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다양성은 각 지역의 독특한 자연환경의 영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적석을 가미한 거대한 봉분으로 된 이 묘제가 이전시기에 비해 한반도의 다른 지역과 교류가 왕성했던 신라 전기 동안 영남의 다른 지역, 더 나아가 한반도의 다른 지방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지 못하고 경주분지에 국한하여 분포하는 이유는 아직 명확하게 규명되지 못하였다. 아울러 지표면을 파고 시신이 든 목관이나 목곽을 묻는 일반적인 방법과는 달리 지표면 위에 안치시키는 독특한 방식을 외부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보고, 동일한 양식의 묘제를 아시아 대륙에서 추적하여 경주 적석목곽분과의 관련성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이 두 지역 사이 문화전파에 대하여 보다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

    본 연구에서는 현재까지 논의된 적이 없는 경주분지의 지형 특성과 적석목곽분의 입지 및 구조 특성과의 상호관계를 검토하여 경주분지에서 이 묘제가 성립되는데 미친 자연환경의 영향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영남 지방의 적석목곽묘와 적석목곽분이 문화 전파나 유목민의 이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경주 지역 자연환경의 특성에서 비롯된 이 지역의 독특한 문화 현상임을 논의하였다.

    II. 적석목곽분에 대한 기존 연구

    경주의 적석목곽분에 대해 가장 먼저 논의한 것은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1932)인데, 목곽은 낙랑군 시대의 목실(곽)분에서 기원하였고 적석은 대구시내의 지석묘(대구 대봉동 지석묘를 지칭)와 같은 적석식 지석묘에서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적석목곽분은 이들 두 개의 묘제를 합친 일종의 복합 문화로 보았다.

    강인구(1981)는 대형 적석목곽분을 구성하는 4개 구조를 목곽부, 적석부, 봉토부, 호석부로 나누었다. 이들 가운데 기원을 따질 수 있는 목곽부와 적석부에 대하여, 전자는 세형동검이 부장된 토광묘(土壙墓)와 전한경(前漢鏡)과 흑도(黑陶)가 출토되는 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에 설치된 목곽에서 유래되었고, 후자는 형상과 규모가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적석총과 매우 유사하므로 고구려 적석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경주 적석목곽분의 개시는 2C 경으로 소급될 수 있으며, 초기에는 봉토가 없는 방형 또는 장방형 적석총이었으나 원형봉토석실분의 영향으로 5C 경부터 원형봉토가 씌워진 것으로 보았다.

    고구려 적석총 기원론은 최종규와 신경철에 의해서도 제시되었다. 최종규(1983; 1999)는 황남동 109호 3·4곽을 5C 1/4분기 끝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남부지방의 4C 대 목곽묘와 5C 대 적석총 사이에 구조적으로 큰 차이가 없고, 목곽묘에 목곽을 보호하기 위하여 적석을 첨가한 것이 적석총이며, 5C 초를 기점으로 고구려계 문물이 대량 이입되는 현상을 보이고 묘제에서도 고구려의 영향이 상정되므로, 경주의 적석총이 4C 대 목곽묘의 전통에 고구려 적석총의 적석 아이디어를 채용하여 만들었다는 것이다. 신경철(1985)은 강인구의 생각을 높게 평가하고, 경주에서 적석목곽분의 출현은 돌연적이며, 눌지마립간 19년(AD 435년) 기록에 이 묘제의 개시를 알리는 ‘신장제시행령(新葬制施行令)’과 같이 신라 적석목곽분은 435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AD 400년 고구려군의 남정으로 적석목곽분에 매장된 많은 유물들이 이입된 것으로 보았다.

    후지이 가즈오(藤井和夫, 1990)는 강인구의 고구려 적석총 기원설을 비판하였다. 4C 고구려 적석총은 하천자갈이 아닌 판석(板石)을 계단상으로 축조한 것으로 5C에는 거의 봉토분이므로, 적석목곽분의 적석을 고구려 적석총에 단락적(短絡的)으로 관계지우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적석목곽분은 4C 후반부터 국력이 성장된 신라가 광개토왕의 남정을 이용하여 고구려 군사력을 배경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 창출된 새로운 묘제로 해석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강인구(2000)는 4C 경 고구려적석총이 모두 판석(板石)으로 조영되었다는 주장은 무리라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적석목곽분의 출현을 4C로 한정한 일은 없으며 다만 2C로 추측하였고, 이것을 광개토왕 남정 시 고구려 군사력을 배경으로 신라의 국력이 성장하는 과정 중에 출현한 묘제로 보지 않는다고 반박하였다.

    최병현(1992)은 ‘시베리아 기원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신라 적석목곽분 기원 고찰의 기준을 황남대총 남분으로 파악하고 황남대총 북분, 천마총과 같은 초기 대형분과 공통적인 구조적 특징을 검토하였다. 기원 고찰에 있어서 목곽, 적석, 원형 호석(圓形 護石), 원형 고대봉토(圓形 高大封土)라는 구조를 하나의 셋트로 보고 이의 계통을 추적한 다음 나머지 부수적인 문제들을 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상에 축조한 목곽, 목곽 주위와 위에 쌓은 적석부, 호석이 둘러진 원형의 고대봉토와 같은 특징은 카자흐스탄 Besshatyr, Issyr, Chirikta 등 중앙아시아에서 확인되며, 황남대총 남분 구조 가운데 적석부 위 봉토 중의 가구물(架構物)과 적석부의 환목조골격(丸木造骨格)틀은 Kostromskaya Kurgan, Pazyryk Kurgan의 구조와 관계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내곽과 외곽 사이를 잔자갈을 채운 구조도 Pazyryk 대형분에서, 투조금박(透彫金箔) 무늬 장식목관도 Pazyryk와 Noin-Ula에서 확인되므로 신라 적석목곽분 가운데 대형분의 조형(祖型)을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이들 가운데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한편 가장 먼저 조영된 것으로 믿어지는 황남동 109호분 3·4곽에는 풍소불묘등자(馮素弗墓鐙子)를 비롯한 고구려 금공품이 이입되어 있는데, 일본학자들이 이 등자가 광개토왕 남정으로 한반도 남부에 확산되었으므로 이 분묘는 AD 400년 이전에는 조영되지 못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적석목곽분은 고구려 적석총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이 유력하다는 설이 지지를 받는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최병현(1992)은 풍소불묘등자에 대하여 공반유물을 종합적으로 보지 않고 유물 하나하나를 개별적으로 형식 편년하는 일본식 특유의 형식학과 한국 고분문화를 일본고분 시대의 체계에 맞추어서만 해석하려는 의도가 범한 오류로 파악하였다. 풍소불묘등자는 단병계(短柄系) 등자의 발전형식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뿐 결코 동아시아 등자의 최고식(最古式)이 아니며, 황남동 109호분 단병등자, 황남대총남분의 장병등자가 오히려 풍소불묘등자보다 앞서는 고식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동아시아에서 등자는 북방 호족계통의 장병계 등자와 강남 한족계통의 단병계 등자가 4C 전반기부터 6C 초까지 시종 공존하고 있었으며, 풍소불묘등자는 5C 초에 속하는 단병계 등자의 한 발전형식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아울러 황남대총에 출토된 청동용기의 조합상과 집안 칠성산 고구려 적석묘 출토유물을 비교하고 동아시아 등자에 대한 고찰에서 황남대총 남분의 연대를 4세기 중반 내지 후반기 초로 설정하였으며, 이를 근거로 이보다 앞선 시기에 조영된 황남동 109호분 3·4곽을 4C 전반기 중반 경으로 편년하였다. 그리고 적석목곽분은 6C 전반기까지 유지되었으나, 이후 율령반포(법흥왕 520년)와 불교공인(법흥왕 527년) 등에 수반되어 최고 지배층의 묘제에 혁명적 전환이 있었다고 보았다.

    김원룡(1972)은 북방원류설을 주장하고, 경주 적석목곽분은 시베리아 스텝지역 목곽분의 동단 마지막 형식으로 판단하였으며, 350년경부터 600년경까지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였다. 이은창도 원류는 시베리아 분묘 구조에 있으며, 스키타이(Skythai)인의 분묘인 Altai Pazyrik 고분, Shibe 고분과 연계되는 것으로 보았다(최병현, 1992).

    적석목곽분의 북방원류설에 대해 강인구(1981)는 두 지역의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중간지점에 경로를 밝혀 줄 흔적이 없으며, 두 지역 유적의 축조 연대 차이가 지나치게 크다는 점을 들어 경주 적석목곽분의 시베리아 기원에 대한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최병현(1992)은 북방아시아의 목곽분 문화는 기본적으로 흔적을 남기지 않고도 단시간 내에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급속한 이동력을 갖춘 기마민족들의 문화였고, 4C 전반기가 북방의 기마민족들이 중원으로 남하를 개시하던 시기 직후라는 점에서 시간적인 차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강봉원(2004)은 기마민족이 급속하게 경주로 왔다면 그들이 사용한 금 제품이나 마구류들이 동일한 재질의 동일한 물품으로 경주에서 발굴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출토가 보고된 바 없으므로 신라 적석목곽분과 기마민족 이동 연계는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적석목곽분이 조성되기 시작한 시기에 대해서 고고학계와 고대사학계에서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는데, 이것은 이 묘제의 성립배경과 맞물려 앞으로도 계속 논의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적석목곽분의 소멸 시기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다. 23대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하면서 평지를 벗어난 산지에 횡혈식 석실분으로 만들어졌다. 가장 나중에 축조된 것은 산지에 있는 적석목곽분인 보문동 부부총의 부묘(夫墓)로서, 적석목곽분에서 횡혈식 석실묘로 가는 점이적인 특징을 보인다. 이 시기는 대체로 6C 중반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III. 경주지역의 자연환경

       1. 경주분지의 지형특성

    적석목곽분은 대부분 현재 경주 시내인 왕경지역에 분포한다. 그러므로 적석목곽분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윤순옥·황상일(2004)의 연구결과를 중심으로 경주 분지의 지형을 살펴보았다.

    (그림 1)은 경주분지의 지형분류도이다. 경주시 암곡동에서 발원하여 남남서류하는 덕동천이 추령에서 발원하여 서북서류하는 북천과 덕동호 부근에서 만나 보문을 지나면서 규모가 큰 하안단구성 선상지를 만들고 다시 명활산 북쪽의 협곡을 빠져나와 부채를 펼친 형태의 전형적인 선상지를 형성하였다. 이 선상지는 단일 지형면으로는 면적이 우리나라 최대이다. 경주선상지는 선정부터 선단까지 거리는 4.5km인데 비고차가 40m에 지나지 않아 지형면의 구배는 약 9/1,000, 지형면의 경사는 0.5° 정도로서 우리나라 선상지 가운데 가장 완만하다.

    고위면은 중류부와 하류부 사이의 협곡에 하안단구 형태로 분포하고, 지형면 규모는 매우 작다. 중위면은 안압지 남쪽과 현재 국립박물관이 있는 인왕동 일대와 명활산성과 남산 사이의 보문동에서 다소 넓게 나타난다. 경주선상지의 대부분은 저위면이다. 인왕동 일대 중위면과 황룡사 일대 저위면 사이의 비고차는 2m 정도로 작고 경사도 완만하지만, 중위면 남쪽 말단부와 범람원 사이에는 경사가 급한 애면이 형성되어 있어 두 지형면 사이의 경계를 설정할 수 있다. 중위면의 서쪽은 남천에 의해 경계된다. 저위면을 이루는 역층의 두께는 북천의 북쪽에서 20~30m에 이르고, 북천 남쪽에 해당하는 g지점에서는 기반암이 지표부근까지 나타나 전체적으로 북천 북쪽보다 역층 두께가 훨씬 얇은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선상지에서 저위면은 최종빙기 퇴적물인 황등색(7.5YR 7/8) 역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랫동안 대기에 노출되어 산화작용을 받았다. 이 층준에는 boulder급과 cobble급 원력 및 아원력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하부역층의 매트릭스(matrix)는 pebble과 granule급 자갈을 포함하는 모래(sand)가 대단히 치밀하게 퇴적되어 있다. 황룡사지 동쪽 왕경지역에서 확인된 신라시대 주거지와 도로 유구는 최종빙기 선상지 퇴적물인 황등색 역층의 표층부에 조성되었다. 월성 북쪽 해자 발굴지에서도 최종빙기 선상지 퇴적물인 황등색 역층 표면에 청동기시대부터 신라시대 유구가 함께 나타난다. 경주 왕경지역에서 고대 동안 인간 활동은 선상지 퇴적물인 황등색 내지 황갈색 역층 위에서 이루어졌으며 적석목곽분도 이 층준에 조성되었다.

    최종빙기 선상지 퇴적층을 피복하는 Holocene 퇴적물은 유기질이 많아서 암회색을 띠고 있으며, pebble급의 원력∼아원력이 포함된 fine sand 층이다. 이것의 두께는 50~80cm인데, 토기편과 기와편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2. 경주 선상지의 수문 특성

    (그림 2)는 20C 초 조선총독부에서 작성한 1:10,000 지형도에서 북천 남쪽, 그리고 분황사와 인왕동을 연결하는 선 서쪽의 왕경지역을 나타낸 것이다.

    경주선상지를 남동에서 북서 방향으로 관통하며 왕경지역의 북쪽 경계가 되는 북천은 천정천이다. 그러므로 북천에서부터 역층으로 침투한 지하수가 왕경지역 전역으로 공급된다. 일반적으로 선상지 선단부에 지하수가 지표면으로 흘러나오는 용천이 분포하지만, 선상지를 형성한 주 하천이 천정천이면 선상지 지형면의 가장자리 뿐 아니라, 지형면에 형성된 미기복 가운데 낮은 부분에서 지하수위가 높아져 용천이 형성된다. 경주선상지는 용천에서 발원하는 소하천인 용천천(湧泉川)이 여러 개 분포한다. 이들은 주변의 큰 하천인 남천과 형산강으로 연결되거나 또는 연결되지 못하고 충적층 아래로 침투한다. 집중호우 시에 지하수위가 상승하는 때에는 유량이 많아져 유로를 따라 토양 침식현상이 나타날 수 있으며, 이때 역층의 매트릭스가 제거될 수 있다. 제거된 토양은 흐름이 느려지는 곳에 퇴적된다. 소하천이 흐르는 얕고 낮은 곳에는 대체로 선정구(扇頂溝)에 해당하는 개석곡이 존재한다. 지하수가 면상으로 흘러나오는 곳에는 연중 토양의 수분수지가 높으므로 습지가 형성되어 유기물이 많이 포함된 환원토양이 퇴적된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안압지에서 흘러나와 첨성대와 월성 사이를 지나 계림을 통과하여 월성 서쪽 가장자리에서 남천에 합류하는 소하천의 개석곡이다. 그리고 황남동 115호 쌍분 북쪽에서 소하천의 형태를 취하여 황남동 고분군 사이를 지나 서류하여 형산강으로 유입하는 용천천이 있다. 이 두 개의 소하천은 교동이 입지한 선상지 중위면이 만드는 분수계에 의해서 서로 분리된다. 이 소하천들의 유로가 개석곡을 형성한다. 이보다 북쪽에는 노동동고분군 북쪽에서 발원하여 약 500m 서류하다가 논에서 사라지는 소하천이 있으며, 가장 북쪽에는 조선시대 경주읍성의 해자에서 발원하여 각각 서류, 북서류하여 형산강에 합류하는 소하천들이 있다.

    토지이용의 형태는 지형면의 특징을 반영한다. 특히 양수기나 대규모 관개시설과 같은 인위적인 장치를 통해 토지이용 가능성을 급격하게 변화시키기 이전에는 지형면의 독특한 성격이 토지이용에 잘 반영되어진다. 경주선상지의 토지이용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지도(그림 2)에 나타나 있는데, 20C 초 북천 이남 왕경지역은 논, 밭, 취락, 황무지들로 이용되었다.

    취락이 입지한 곳은 조선시대 읍성이 있었던 곳과 그 서쪽에 선상지 말단부인 성건동, 현재도 취락들이 분포하고 있는 교동 부근, 대릉원 부근의 고총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 황룡사지 일대, 남천이 북천에 합류하는 곳의 남천의 자연제방, 선상지 중위면 말단부인 인왕동 등이다. 이들 지역은 왕경지역에서 해발고도가 높거나 주위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도가 높은 곳들이다. 한편 안압지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천으로 유입하는 소하천의 하류부인 월성과 교동 사이, 교동 바로 북서쪽의 저지에도 취락이 입지하였다. 이곳은 주위에 비해 상대적으로 해발고도가 낮다. 취락은 물을 구하기 쉬우면서도 범람에 의한 피해를 받지 않는 곳에 자리 잡는다. 물은 지하수가 지표로 흘러나오는 용천에서 얻을 수 있으나, 인구가 많아지면 이것으로 부족하므로 우물을 파서 용수를 얻는다. 이때 지하수위가 지표로부터 상당히 낮다면 우물을 깊게 파야하므로 비용이 많이 들 뿐 아니라 유지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지하수위의 변화가 심하다면 용수를 안정적으로 얻을 수 없으므로 취락이 입지할 수 없다. 따라서 경주선상지에서 취락이 입지하는 곳은 우물을 용이하게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지하수위 변화가 적어 용수를 안정적으로 얻을 수 있는 곳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밭이 분포하는 곳은 북천을 연하여 상대적으로 해발고도가 높은 곳, 읍성과 고총고분군이 분포하는 곳, 월성과 교동일대, 그리고 남천의 자연제방에 해당하는 사정동 등이다. 이러한 지역은 대체로 취락 분포지와 일치한다. 특히 선단부에서 밭의 면적이 논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넓다.

    논은 선앙에 해당하는 분황사, 황룡사, 안압지 일대와 중위면으로 구분되는 인왕동 일대에 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월성 북쪽, 교동 서쪽의 개석곡, 그리고 선단부에서는 소하천의 주위에 나타난다. 선단부의 소하천은 상대적으로 지하수위가 높아 논농사가 가능하지만, 선앙부의 논은 일반적인 선상지의 토지이용 형태와는 상당히 다르다. 북천 북쪽에서는 논이 소금강산과 북천 사이의 야주(yazoo stream) 형태의 소하천을 따라 분포한다. 인왕동 부근의 선상지 중위면을 제외하면, 논 분포지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낮은 곳으로 취락은 거의 입지하지 않는다. 이것은 논으로 이용되는 곳이 주거지로는 적합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현재도 이들 지역은 대규모 관개시설 없이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소하천이 흐르고 있다. 이들 소하천은 지하수가 용출하여 하천수를 구성하므로 지하수 수위가 대단히 높고, 토양이 습윤하다. 이와 같은 토지이용의 특징은 경주선상지 내의 미세한 기복의 차이, 특히 지하수위와 관계된 토양수분수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3. 왕경지역 우물에서 확인되는 지하수위의 특성

    일반적으로 선상지 위를 흐르는 하천은 갈수기에 건천이 된다. 이것은 선상지를 형성하는 퇴적물이 주로 자갈과 모래와 같은 조립 물질이므로 토양입자들 사이의 공극이 크고 토양수의 침투가 매우 용이하여 지하 수위까지 하방이동하기 때문이다.

    북천은 건기인 겨울에도 대단히 적지만 하천수가 유지된다. 이것은 북천의 유역분지가 넓어서 하천으로 많은 유량이 공급되기도 하지만, 선상지 지형면의 경사가 매우 완만하고, 형산강과 남천이 북천의 지하수위를 조절하기 때문이다. 인구가 많았던 통일신라시대에도 하천수가 연중 유지되었는지에 대해 자료를 제시하기 어렵지만, 덕동호와 보문호에 막대한 양을 저수하고도 현재 북천의 하천수가 연중 유지되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고대 동안 특히 고대 전기에는 현재보다 유량이 더 많았을 것이다. 따라서 적석목곽분이 조영된 왕경 남서쪽은 신라 전기동안 지하수위가 현재보다 더 높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남천, 형산강이 왕경의 남쪽과 서쪽 지역의 지하수 함양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므로, 왕경 지역에서는 지하수량이 풍부하였고 지하수위가 상당히 높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통일신라시대 동안 왕경지역에는 인구가 밀집하여 도시가 조성되었다. 경주선상지 전체를 발굴하지 않아 모든 양상을 속단하기는 어려우나 황룡사지 동쪽 지역의 발굴결과(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2)에 의하면 왕경지역 대부분에 취락이 조성되었고, 가옥 내에는 우물들이 1개 이상 만들어져 있었으므로 우물의 밀도가 매우 높았다. 적석목곽분 분포지의 북쪽 중앙에 해당하는 황오동 330번지에서 지표면에서 우물바닥까지 거력을 쌓아 만든 우물벽의 높이가 1.1∼1.7m, 북동쪽인 황오동 381번지에서는 1.7m이다. 일반적으로 우물은 연중 충분한 용수를 공급 받을 수 있는 깊이까지 파고 둘레에 돌을 쌓아 만든다. 많은 인구가 지속적으로 거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물 깊이가 지표로부터 2m 이내인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갈수기에도 우물을 이용하는데 지장이 없어야 하는 것을 감안하면 평상시 우물의 수위는 지표 1m 아래 도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대릉원 서쪽 담장 주변의 민가 및 동쪽 쪽샘 지역의 민가에서 우물을 확인할 수 있는데, 연중 수위변화가 크지 않고, 평상시 우물의 수위는 지표면 아래 1m 정도에 있다.

    지하수위는 홍수기와 갈수기의 수위가 대조적이다. 갈수기에는 우물과 같이 공기 중에 드러난 곳의 지하수위가 토양층의 그것보다 높지만, 홍수기에는 토양층의 지하수위가 하천이나 우물의 수위보다 오히려 높다. 왕경지역의 경우 하계에 강수가 있으면 우물의 지하수위는 약간 높아지지만 토양층의 지하수위는 크게 높아져 거의 지표 부근까지 상승할 것이다. 따라서 적석목곽분이 분포하는 지역에서 지하수위는 국지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로 지표면과 지표 아래 1m 사이 범위에서 변동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IV. 적석목곽분의 구조적 특성

    적석목곽분을 구성하는 요소는 토광, 목곽, 적석, 봉토이다. 이들은 모두 연계되어 있는 하나의 체계이므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현재까지 조사된 적석목곽분들의 구조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점은 시신을 넣은 묘곽의 위치, 적석의 존재, 적석부 위를 덮은 봉토의 유무이다.

    경주에 분포하는 적석목곽분에 대한 보고를 검토한 자료들에 의하면, 묘곽의 위치는 다양한데 지표면 아래 수혈식 토광(竪穴式 土壙)을 파고 거기에 설치한 것, 지상(地上)인 것, 이들의 중간적인 것으로 세분된다. 적석과 봉토는 적석부 위에 봉토를 쌓은 것, 봉토의 존재 여부 자체가 의심스러운 것으로 나누어진다. 따라서 발굴자에 따라서는 적석목곽분이라고 하지 않고 적석총, 적석식고분 등 단순화되고 포괄적인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최병현(1992)은 적석목곽분을 묘곽이 목곽이거나 또는 곽벽은 나무가 아니더라도 목개(木蓋)로 덮고 그 위에 적석을 쌓은 것, 고분이 축조된 지 얼마 뒤에 적석이 함몰되어 발굴 당시 묘곽 위에 중심부가 함몰된 적석부가 있는 것, 묘곽 내부가 함몰된 적석으로 채워져 있는 것으로 정리하였다.

       1. 묘곽의 위치

    적석목곽분 가운데 지하식은 당시 지표면에서부터 목곽 바닥에 해당하는 부분까지의 묘광 깊이가 1.5m 이상이므로 목곽의 높이가 1.5m라 하더라도 시신의 위치는 지하에 있는 셈이다. 금령총, 식리총, 호우총, 은령총은 봉분의 규모가 큰 편에 속하는데, 특히 금령총과 식리총은 묘광 깊이가 2.5m 이상이다(표 1).

    [<표 1>] 구조 특성 분석 대상 적석목곽분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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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조 특성 분석 대상 적석목곽분 목록

    반지하식은 묘광 깊이 1.4m 미만이지만 황남동 82 호분 서총은 보고서에 반지하식으로 기재되어 있으므로 여기에 포함하였다(표 1). 지상식은 황남대총, 서봉총, 천마총, 금관총과 같이 분묘를 조영할 당시의 지표면에서부터 묘광바닥까지의 길이가 0.6m 이하이거나, 발굴보고서에 지상식으로 기재된 것을 포함하였다(표 1).

       2. 적석과 봉토

    왕경지역 적석목곽분의 목곽을 덮고 있거나 가장자리를 채우고 있는 자갈은 주로 하상이나 하천퇴적층에 포함되어 있는 boulder급이나 cobble급 원력이다. 시신을 넣은 묘곽은 흙으로 덮기도 하지만, 지석묘와 같이 하나의 큰 돌을 얹는 경우도 있다. 고구려의 적석총은 자연석과 인위적으로 다듬은 인공석으로 모서리와 가장자리를 반듯하게 정리한다. 적석목곽분은 이와 같이 다양한 양식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다만 경주의 적석목곽분에 사용된 적석의 양은 모든 분묘에서 동일하지 않고 큰 차이가 있다. 적석목곽분의 규모가 적석부의 규모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목곽을 덮은 적석의 양이 왜 차이가 나는가에 대해서 논의한 보고는 없다. 이것은 경주의 적석목곽분 가운데 일부만 발굴되었으며, 발굴된 무덤이 누구의 것인지에 대해서 판단이 어렵고, 사용된 적석의 양과 무덤 주인의 계급, 시기적 순서의 상관관계를 논의하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국가가 엄격한 신분사회이고 신라의 경우 골품제까지 적용되었으므로 신분이나 골품에 따라 봉분의 규모가 제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울러 봉분을 만드는데 드는 비용도 무덤의 규모와 관계있다. 이 묘제를 조성하는데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부분은 목곽에 넣는 부장품과 적석부를 구성하는 자갈과 그 위를 덮는 흙을 운반하는 운송비일 것이다. 왕경지역의 적석목곽분이 입지하는 지역에서 적석에 사용되는 돌은 주변의 지표면을 구성하고 있는 선상지의 표층이나 북천의 하상에서 채취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cobble급 자갈은 형산강의 하상에서 운반해올 수 있다. 봉토를 만드는데 사용된 흙은 주변의 선상지 표층을 파고 가져올 수 없었을 것이다. 왕경지역의 지하수위가 높으므로 삭평하여 지표면의 토양층을 제거하면 토양층에 수분 함유량이 증가하여 토지이용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봉토에 사용된 토양은 남천이나 형산강 하안, 남천 건너 남산 기슭이나 형산강 건너 산지 산록부, 낭산이나 소금강산에서 채취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같은 양의 자갈을 채취하는 비용과 토양을 채취하는 비용이 거의 비슷하였을 것이다. 오히려 운송거리로 본다면 자갈이 더 저렴하였을 것이다. 결국 적석과 봉토를 운반하는데 많은 비용이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봉분을 만든데 대해 의문이 생긴다. 이와 같은 분묘 구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요인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조성 당시 적석 위에 봉토를 덮었는가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쟁점이다. 이 분묘가 조영된 지 1,500년 정도 경과하여 봉토가 크게 변형되었으므로 조영 당시부터 봉토가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 만약 최초에 봉토가 있었다면 발굴하는 과정에 적석 사이에 토양이 어떻게 채워져 있는가를 상세하게 검토하면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후대에 봉토를 덮었을 수도 있으므로 최초의 상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최병현(1992)은 신라 적석목곽분의 봉토 표면은 원래 점토로 덮여 있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표면의 점토층이 풍우에 씻겨 내려갔던 것으로 판단한 반면, 강인구(1981)는 경주에 조영된 적석목곽분이 처음에는 모두 봉토없이 만들어진 순수 적석총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논의에 대해서는 봉토를 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비교하여 논의한다면 추정이 가능하다. 몽골의 카라코룸 부근 현무암 용암대지에 조영된 적석목곽분에는 적석 위에 봉토가 없다. 그러나 노인울라를 비롯한 다른 지역에는 봉토가 있어서 지역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이것은 현무암 용암대지에서는 토양을 채취할 수 없으므로 봉토를 하지 않았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토양을 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경주의 적석목곽분 조성 당시 봉토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된다.

    V. 토 론

       1. 적석목곽분의 입지 특성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분묘인 지석묘는 대부분 취락 및 경작지와 인접한 곳에 입지한다. 진주 대평의 경우 청동기시대 분묘는 거의 취락과 경작지 사이에 분묘가 분포한다. 초기철기시대와 삼한시대에도 이와 같은 경향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경향은 고대에도 계속되었을 것이다. 즉, 고대인은 삶과 죽음의 세계를 전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삶이 사후 세계에도 그대로 연속되는 것으로 인식하였으므로 분묘공간을 주거지와 인접한 곳에 조성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 경주 일원의 토광묘들의 입지는 토광목관묘 단계와 토광목곽묘 단계에 약간 차이가 있는데, 토광목관묘 단계는 입실리유적부터 조양동유적까지 모두 평야와 접하는 구릉 경사면의 끝부분에 위치한다. 이 단계에 와서 경주지역의 토광묘 입지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첫째, 조양동유적에서처럼 평야에 접하는 구릉경사면의 끝부분에 집단적으로 분포하며, 둘째로는 선상지인 경주시내 평지와 건천금척리에서도 확인되고, 셋째 구정동 유적과 같이 산의 정상부에서부터 능선을 따라 입지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토광묘를 만든 사람들은 그들의 주거지 가까이 묘지를 조성한 것이다(최병현, 1992).

    경주시 왕경지역에서 적석목곽분은 일정한 지역에 한정되어 분포한다. 대부분 노서동, 노동동, 황남동, 황오동, 인왕동, 교동에 나타난다(그림 3). 적석목곽분이 분포하는 곳들 가운데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곳은 노서동과 노동동 고분군 지역이다. 이곳보다 북쪽에는 용천에서 발원하여 약 500m 흐르다가 다시 지표면 아래로 스며들어가는 소하천이 있는데, 고분군 구역보다 해발고도가 1~2m 더 낮다. 황남동고분군(미추왕릉 지역)과 그의 동쪽에 있는 황오동고분군은 주변에 비해 2~3m 더 높다. 다만 이 고분군의 북쪽 가장자리에 있는 분묘지역에는 소하천이 분포하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해발고도가 낮다. 이들의 동쪽에 있는 인왕동고분군은 남쪽의 소하천보다 1~2m 더 높은 곳에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황오동과 인왕동 고분군 가운데를 북동-남서 방향으로 지나는 남고루를 연하여 해발고도는 상대적으로 낮다. 이곳에는 현재 하수도가 지나간다. 첨성대 남서쪽의 교동고분군과 이보다 서쪽에 있는 놋점들의 황남동고분군은 선상지 저위면을 개석한 개석곡 및 그의 주변 범람원에 해당한다. 다만 첨성대와 교동을 연결하는 저평한 분수계에도 적석목곽분이 분포하는데, 안압지를 지나 월성의 서쪽으로 돌아 남천에 합류하는 소하천과 대릉원 입구 남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형산강에 합류하는 소하천 사이에 상대적으로 높은 곳이다.

    왕경지역에서 적석목곽분 분포지는 주변에 비해 전체적으로 약간 높지만, 범람원에 해당하는 곳도 포함된다. 범람원은 강수량이 많은 하계에는 지하수위가 지표면 부근까지 상승하므로 지표면을 파서 조성하는 분묘의 입지로는 좋은 장소가 아니다. 더욱이 소하천이 통과하는 곳은 입지조건이 더욱 열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주선상지에서 선단부에 해당하는 왕경지역 남서쪽을 분묘구역으로 정한 것은 이보다 환경이 양호한 곳에는 이미 취락이 조성되어 있었음을 암시한다.

    아울러 적석목곽분에 사용된 거력(boulder)은 북천하상에 퇴적되어 있으므로 북천에 인접할수록 운송비가 적게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포 구역은 오히려 북천에서 떨어져 있다. 이것은 북천을 연하여 이미 주거지가 입지하여 분묘를 조성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왕경지역 남서쪽과 건천선상지의 선단부에 해당하는 금척고분군지역에는 적석목곽분이 조영되기 전에 토광목곽묘가 이미 입지하였다. 이렇게 볼 때, 초기 신라시대 동안 경주 왕경지역에서는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하여 분묘의 형태가 변한 것이지 묘지의 입지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경주선상지 적석목곽분 분포지역 가운데 상대적으로 주변지역과의 비고차가 큰 노동동과 노서동 고분군에는 서봉총, 금관총과 같은 지상식과 금령총, 식리총, 호우총, 은령총과 같은 지하식이 함께 조영되어 있다. 지하식은 봉분 및 적석의 규모가 지상식에 비해 훨씬 작다(그림 4, 5). 이것은 지하식이 지상식에 비해 돌을 적게 투여하여도 무덤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석목곽분을 만드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들지만, 지하식으로 조영한다면 적석의 규모를 줄일 수 있으므로 경제적인 부담이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식으로 조영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왕경지역에 필요한 용수는 거의 지하수로부터 얻어졌다. 초기에는 경주 선상지에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었으므로 지하수에서부터 얻는 용수 수요가 적어 지하수위가 높았다. 따라서 시신을 지상에 둘 수밖에 없으므로 지상식으로 분묘를 만들었고 적석의 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왕경지역에 인구가 증가하고 취락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지하수를 많이 사용하여 수문환경에 변화가 발생하였으며 지하수위는 낮아지게 되었다. 따라서 분묘를 지하식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으며, 적석부의 규모를 축소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고 본다.

    한편 지상식을 만들면서 지표면까지 토양이 지하수로 포화된 개석곡에도 적석목곽분을 조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방법은 분묘의 입지로 불리한 장소까지 활용할 수 있으므로 용지난을 해결하는 방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지하수위가 높을 때 분묘로 사용하는데 불리한 공간은 상대적으로 나중에 이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적석목곽분이 조영된 곳은 신라 주도세력이 신성한 장소로 생각한 계림과 권력의 중심이 있었던 월성에 인접하여 있었으므로 용지 부족은 생각보다 일찍 제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경의 남서쪽에 있는 개석곡에 조영된 143호, 124호, 118호, 115호와 119호분 주위는 현재 토양의 표층까지 수분에 포화되어 있다. 이곳은 분묘를 조성하는데 대단히 열악한 장소이므로 가장 나중에 적석목곽분들이 조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6C 중엽 법흥왕대에 사회 변화로 분묘가 왕경지역을 벗어나 산지로 옮겨간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을 일반적으로 불교의 공인에 따라 죽음에 대한 신라인들의 사고체계 변화에서 찾는다. 주거지와 인접하여 있던 분묘를 산지에 조영하고 부장품을 크게 줄인 것은 이와 같은 추정을 뒷받침한다. 산지로 옮겨간 분묘에는 구조적인 변화도 나타난다. 이것은 적석목곽분과 전혀 다른 형태인데, 구릉지에서는 적석목곽분과 같은 형태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이와 같은 분묘의 공간 이동에는 왕경지역의 용지난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6C 경에 왕경지역 남서쪽 분묘구역이 포화되었으며, 이 구역의 주위에는 도시화가 진행되어 인구밀집지역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같은 추정의 근거는 고대 경주의 도시구획에서 가로망을 보면 분묘구역을 제외한 지역은 격자상으로 되어 있는데 이 구역만은 예외적으로 불규칙한 가로구조를 하고 있다. 방리제는 자 비왕 12년(469년)에 왕경을 중심으로 채택되었는데 이때 이미 분묘구역이 정하여 졌고, 주변은 도시로 개발되었을 것이다.

       2. 적석목곽분의 구조에 미친 자연환경의 영향

    적석목곽분 가운데 일반에게 공개되는 천마총을 비롯한 지상식 대형분의 경우 유물이 확인되는 목곽 바닥 토양은 검은색이다. 이것은 토양에 유기질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유기물들은 대부분 형체를 파악할 수 없으나, 박테리아에 의해 완전히 분해되어 버린 것이 아니었다. 지하수위가 상승하여 목곽 바닥까지 토양수분이 풍부한 환경이 지속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지표면 위에 봉분을 높이 쌓았으므로 시간이 경과한 후에는 모세관 현상으로 원래 지표면 보다 위쪽까지 지하수위가 상승하였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신을 매장하는 지역은 토양 미생물 활동으로 잘 시신이 잘 분해되어 토양화되기 용이하다. 고온다습한 환경에서는 시신이 부패하여 흉한 모습으로 변하거나 전염병 등 위생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화장한다. 한편 영구동토층이 있는 한랭 건조한 지역에서는 땅을 깊게 팔 수 없을 뿐 아니라 토양 온도가 낮아서 시신이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기 어려우므로 설치류 등에 의해 훼손되기 쉽다. 따라서 독수리와 같은 맹금류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는 조장(鳥葬)을 한다. 우리나라와 같이 계절변화가 뚜렷하며 비교적 온난한 중위도에서는 대부분 매장하여 박테리아와 같은 분해자가 시신을 토양화한다. 이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은 시신이 매장된 장소에서 사람이나 동물에 의해 대기중에 노출되어 훼손되거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도 시신이 제대로 분해되지 못하는 것이다.

    진시황릉과 같은 거대한 봉분을 하거나, 흉노의 왕 아틸라의 무덤과 같이 큰 하천의 하상을 파고 매장한다든가 하는 것은 더욱 근본적인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권력자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도 하지만 약탈자나 정치적인 반대자에 의해 시신이 훼손되거나 부장품이 망실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또는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무덤의 위치를 숨기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부장품의 양이 많은 왕을 비롯한 지배계급의 분묘일수록 봉분의 규모를 크게 하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2001년 발굴된 시베리아의 투바공화국 아르잔 2호 Kurgan은 직경 80m에 달하는데, 무덤의 중심부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중심부에서 14m 떨어진 곳의 지하식 목곽에서 5,700점의 황금 유물을 비롯한 기타 수 천점의 유물과 두 구의 시신이 발굴되었다. 발굴자들은 이와 같은 목곽 배치가 도굴꾼들이 항상 중앙부부터 판다는 사실을 당시 사람들이 알고 도굴을 회피하기 위한 방안인 것으로 추정하였다(마이크 에드워즈, 2003).

    경주분지에 적석목곽분을 조성한 것은 이것이 거대한 분묘를 만드는 기본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동시에 이 지역의 자연환경에 가장 적합한 양식이었기 때문이다. 초기 국가의 기틀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왕권을 대내외에 과시하여야 하는 시기에 시신과 금을 비롯한 많은 부장품이 들어간 거대한 분묘를 조성하여, 권력자로서의 권위를 높이고 사후 삶터인 무덤의 훼손위험을 최소화하면서 가장 경제적으로 분묘를 조성하는 방안을 고안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왕경지역의 지하수위가 높은 것은 당시 경주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시신의 위치를 지표면보다 크게 낮출 수 없으므로, 곽이나 관을 지상에 얹거나 지표면을 약간 파고 거기에 안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시신을 지하수위보다 높은 위치에 두었으나, 결과적으로 거대한 봉분을 조성하면서 모세관현상이 생겨나 분묘의 지하수위가 주변의 평지보다 높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황남대총에서 인골이 분해되지 않고 발굴된 것이 이러한 사실을 지지한다.

    지표면에 설치된 목곽은 시간이 경과되어 봉분이 낮아지면 시신과 부장품들이 노출될 가능성이 커진다. 매장주체부를 지상식으로 조성할 수밖에 없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적석이 아닌 토양으로 봉분을 만든다면 중력에 의한 토양 이동(mass movement) 속도가 상대적으로 빨라서 시간이 경과하면 지상에 설치된 곽이나 관이 노출될 가능성이 커진다. 봉분을 토양으로 조성하여 발생하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봉분의 사면경사가 매우 완만하여야 하므로 봉분이 차지하는 면적은 대단히 넓어진다. 진시황릉과 같이 판축을 할 경우에도 봉토의 높이에 비해 장경이 매우 크다. 아울러 여기에 대단히 많은 양의 토양이 소요되는데, 경주선상지내에서 막대한 토양을 파내면 왕경지역은 상대적으로 높아진 지하수위 때문에 토지이용에 제약을 받는다. 그렇지 않으면 토양을 주변 산지에서 운반해야 하는데, 이 경우는 적석을 하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한정된 공간에 많은 분묘를 조영하고 권력자로서 권위를 나타내고 훼손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는 거력을 두껍게 쌓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 이것은 좁은 공간에 수 백기의 분묘가 조성되었으며 조성된 이후 거의 1,600년 동안 경주의 적석목곽분들이 상대적으로 훼손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적석목곽분에 필요한 재료들 가운데 거력들은 선상지로 된 왕경지역의 표층과 북천에서 얼마든지 조달할 수 있었다.

    적석목곽분 구조에 있어서 또 하나의 쟁점은 봉토다. 강인구(1981)는 경주의 적석목곽분이 고구려 방형적석총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방형 또는 장방형의 형태인 적석 위에 봉토가 없었으며, 후대에 봉토가 덧씌워졌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의에는 보다 엄밀하게 검토하여야 할 사항들이 있다. 신라의 적석목곽분에서 봉토를 하지 않았다면 적석으로 사용된 거력의 하상력들이 만드는 커다란 공극으로 강수가 그대로 침투하며, 더욱이 지표수가 거력들 사이로 흘러 들어와 분묘의 가장 중요한 시신과 부장품을 물로 포화시켰을 것이다. 분묘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적석목곽분이 조성되기 시작한 때부터 봉토는 존재했을 수밖에 없다.

    적석목곽분의 구조에서 봉분의 규모도 논의의 대상이다. 이것은 적석목곽분에서도 후기에 조성된 것일수록 지하식이 많고 이전의 묘제가 토광묘인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 (그림 4)와 (그림 5)는 봉토와 적석 규모의 상관관계를 나타낸 것이다. 지상식인 황남대총 남분과 북분은 봉토 저부의 직경이 각각 80m, 천마총 47m, 금관총 45m(추정) 서봉총 36m(추정)인데 비해 지하식인 금령총 18m, 은령총 20m, 호우총 16m, 식리총은 30m이다. 지상식은 직경이 36m 이상인데 비해, 지하식은 30m 이하이다. 황남대총은 적석목곽분 가운데 이른 시기에 조영된 것으로 봉분이 대단히 크며 다른 지상식 분묘들도 마찬가지이다.

    적석목곽분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최고 수준의 초기대형분인 황남대총 남분, 황남대총 북분, 천마총, 금령총인데, 이들을 비교하면 시기가 내려올수록 간략, 축소, 생략되어 간다. 이것을 마립간기 왕권의 안정과 사회의 내실화로 장자세습이 정착된 결과로 보고 있다. 한편 이와 같은 변화는 자연환경의 미세한 변화와 관련되고, 묻혀있는 이의 사회적 신분을 나타낼 뿐 아니라, 무덤의 훼손 가능성 및 분묘를 만드는데 드는 비용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지하수위의 하강이 이러한 수혈식 적석목곽분의 조영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상식 적석목곽분은 봉분의 규모가 커지므로 권위를 세울 수 있으나 비용이 대단히 많이 소요된다. 따라서 용지난을 피하고 묘지 조성에 드는 비용을 줄일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에도 가능한 지표면을 파고 목곽을 지표면 아래에 넣고 적석으로 봉분을 만들려는 경향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적석의 규모를 축소하여도 봉분이 훼손되어 목곽이 공기 중에 드러나는 위험이 휠씬 줄어든다. 만약 그러한 생각이 없었다면 즉, 경제적인 고려를 하지 않았다면 황남대총과 같은 거대한 봉분들이 지속적으로 조영되어야 하며, 굳이 지하식으로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주위보다 해발고도가 1~2m 더 높은 노서동고분군에는 지상식인 서봉총과 함께 지하식인 금령총, 식리총(飾履塚), 호우총, 은령총이 군집을 이루고 분포한다. 봉분 규모는 서봉총이 나머지보다 크다. 이들의 적석목곽분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거의 같았으나 세부적인 특징은 차이가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 묘제가 어떤 정형화된 형식에 구속되어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 죽음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을 가지고 시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하는 일관된 자세를 견지하면서 분묘가 조성된 국지적 장소의 자연환경 특징을 반영하여 기본적인 원칙 내에서 융통성 있게 분묘를 설계하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같은 장소에서도 분묘를 조영한 시기에 따라 시신의 위치가 달라지고 이에 따라 적석의 규모에 차이가 발생하였다(그림 6).

       3. 적석목곽분 성립에 미친 외부 영향의 가능성 검토

    적석목곽분을 만들기 시작한 동기에 대해서는 고고학계에 다양한 견해가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이루어진 연구들은 이 묘제의 기원을 영남지방 및 경주가 아닌,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압록강 중류 또는 몽고지역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에서 찾았다.

    기원 전후 동아시아에는 몇 차례 큰 정치적 변화가 있었고 이의 영향으로 중앙아시아, 만주지방으로부터 사람들이 한반도로 이동하였으며, 한반도에서도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이 있었다. 남부지방 특히 영남지방은 북방계통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았으므로 적석목곽분도 당연히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적 범위를 넓혀보면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의 묘제 뿐 아니라 적석목곽분 이전의 토광묘들도 북방계통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영향의 과정들이 한반도에서 확인되고 있다. 즉, 지석묘는 한반도 전역에서 확인되며, 토광묘도 영남지방에 넓게 분포하고 있다.

    3C 이전에도 신라에는 왕이 있었으므로 이에 걸맞는 분묘가 조성되었을 것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다량의 철정, 철제 갑옷 등이 부장된 경주 구정동의 수혈식 토광묘다. 비록 세 성씨가 바뀌면서 왕위에 오르지만 왕조가 중단되지 않고 이어진 경주분지에서 분묘 양식에 중대한 변화가 생긴 것은 자연환경의 변화에 그 원인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히려 이것은 신라사회에 정치적, 문화적 변화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왕의 계통에 생긴 변화가 원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적석목곽분을 마립간기의 묘제로 보고 김씨 족단의 성장과 관계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주보돈, 2003). 이것은 적석목곽분을 4C 중반 김씨 세습왕조가 성립되면서 시작된 마립간시대의 묘제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적석목곽분이 시작된 시기에 대해서 다양한 주장이 있으므로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적석목곽분의 전통을 가진 이주민의 도래를 고려할 수 있다. 현재까지 고고학계에서 논의된 사실로 볼 때, 3C 경에 처음으로 적석목곽분 문화를 가진 유이민 세력이 과연 경주분지에 들어와 신라의 수장이 되었는가에 대해 분명한 근거를 제시하기 어렵다고 생각되므로, 이에 대한 연구결과도 지속적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중앙아시아 및 몽골에서 적석목곽분을 조영한 사람들이 청동기시대 동안 경주지역으로 이주하고 후대에 그들 조상의 문화적인 전통을 복원하여 적석목곽분을 조영하였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지만, 논리적으로 해결하여야할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다. 북방에서 전파되는 문화적 영향이 경주에 와서 다시 주변지역으로 전파되는 것은 거점을 통한 문화의 전파로 설명할 수 있으므로 이론적으로 가능하지만 실질적인 측면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다. 이 문화가 해양을 통해 들어왔다면 가능하겠지만, 육상으로 들어왔다면 중부지방이나 영남 북부, 호남지방에도 흔적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한반도는 중앙아시아의 초원지역과는 달리 산지가 넓게 분포하고, 동-서 방향의 하천이 많으므로 말을 타고 짧은 시간에 이동하는데 불리하다.

    따라서 어떤 외부 문화의 영향을 부정하기 어려우나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이 묘제가 채택되었는가에 대하여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의 영향을 받았을 경우 전파된 경로를 따라 적석목곽분들이 분포하여야 하는데 현재까지 제시된 자료로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외부의 영향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결과가 더 보충되면 구체적으로 논의될 것이다.

    이와 같은 형식의 묘제가 나타난 계기를 적석목곽분이 조영되기 전후 경주지역 내의 문화적 요소에서도 추출할 수 있다. 신라 전기 이래 토광목곽묘와 적석목곽분의 공존기가 있었다. 이 시기동안 상위계층에서는 적석목곽묘, 하위계층에서는 토광목곽분이 일반적이었다. 경주에 적석목곽분이 주묘제였던 5C 경부터 경주를 제외한 영남지방에서는 토광목곽분의 구조와 입지를 계승한 수혈식목곽분이 주 묘제였다. 즉, 경주에서 적석목곽분이 일반화되기 이전 경주를 비롯한 영남 지방에는 토광목곽묘가 주류였으며, 경주에서 적석목곽분이 조영되던 시기는 수혈식석곽분이 경주를 포위하는 형상으로 영남지방에 분포했다.

    적석목곽분이 토광목곽묘와 수혈식 석곽분의 영향을 받은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서 유추할 수 있다. 첫째, 규모에서 토광목곽묘는 적석목곽분에 비해 훨씬 작다. 둘째, 일부를 제외하면 토광목곽묘는 적석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유사한 점도 있다. 첫째, 부장품을 넣을 수 있는 목곽을 만들었다. 둘째, 조양동 유적 등 경주 외곽이 아닌 경주선상지에 조영된 토광목곽묘는 토광이 깊지 않고 묘광의 깊이가 40~90cm이므로 지상식 내지 반지하식 적석목곽분과 유사한 깊이이다. 적석목곽분이 조성되기 이전부터 조성된 토광목곽묘가 경주 선상지에서는 규모에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 지상식으로 조성되었다.

    그러나 이 묘제는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무덤으로는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국가체제가 정립되고 국가의 부가 축적되면서 국왕을 비롯한 왕족과 귀족들이 죽으면 많은 부장품이 시신과 함께 매납되었다. 부장품의 규모가 많아지고 그의 가치가 높아지면서 훼손의 위험이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국가의 규모가 커지고 권력이 강한 지배층이 죽어서 경주의 왕경지역에서 토광목곽묘에 묻힌다면 어떻게 분묘를 만들까. 묘역은 정해져있으나 지하수위가 높아 토광을 깊게 팔 수 없는데 시신과 금관을 비롯한 부장품을 훼손당하지 않고 방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는 문제에 봉착하였으며, 적석목곽분과 같은 형식을 창출한 것으로 생각된다.

    새로운 문화가 성립되는 것은 외부의 영향에 의한 것도 있지만, 기존에 그 지역에 있던 것을 환경의 변화에 조화롭게 변화시켜 새롭게 만들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던 사람들은 자연환경의 특징을 잘 알고 있으므로 환경의 변화가 생기면 새로운 방식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석목곽분은 이전에 경주분지에서 일반적으로 조영되던 묘제와 완전히 다른 양식이 아니라, 기존의 토광목곽묘를 정치·경제·사회적 변화에 의해 발생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시키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적석목곽분에 매납된 매장물품들이 이전 시기의 것들과 크게 다르고, 중앙아시아 스키타이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것에서 중앙아시아 지역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남지역에 분포하는 모든 적석목곽분은 경주의 것보다 나중에 조영되었으며 이것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적석목곽분은 영남지역에서 일반화되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적석목곽분을 만들 필요없이 토광목곽묘 또는 수혈식 석곽묘로도 충분히 분묘로서의 기능이 가능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북쪽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나 북쪽으로부터 문화적 전파가 경주지역에 국한하여 정착하거나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이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고구려의 영향이라면 경주보다 중부지방에서 적석목곽분이 더 일반적이고 분포밀도도 더 높아야 할 것이다. 특히 고구려와 계통을 같이하는 초기 백제의 중심 지역에서는 적석목곽분이 보다 보편적인 묘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VI. 결론 및 요약

    1. 경주시 왕경지역에서 적석목곽분은 노서동, 노동동, 황남동, 황오동, 인왕동, 교동 일에 한정되어 분포한다. 이 구역은 경주선상지 선단부와 범람원을 포함한다. 선상지 선단부에서도 주변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간 높은 곳을 선택하였으나, 지하수의 영향을 직접 받는 범람원에도 적석목곽분을 조성하였다. 경주선상지의 왕경 구역은 하계의 우기에는 지하수위가 지표면 부근까지 상승하므로 무덤의 입지로 적합한 공간은 아니다. 다만 적석목곽분에 사용된 boulder급, cobble급 및 pebble급 자갈은 선상지 퇴적층, 북천과 서천의 하상에서 공급할 수 있다.

    2. 노동동과 노서동 지역에는 서봉총, 금관총과 같은 지상식과 금령총, 식리총, 호우총, 은령총과 같은 지하식이 함께 조영되어 있는데, 봉분 및 적석의 규모가 지하식이 훨씬 작으므로 적은 비용으로 무덤을 조성할 수 있다. 지하식 고총고분이 후기에 많이 조영된 것은 지하수위의 변화와 관계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왕경 지역의 용수는 지하수에 의존한다. 초기에는 경주 선상지에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었으므로 용수 수요가 적어 지하수위가 높았으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경주선상지에 인구가 증가하고 취락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지하수를 많이 사용하였으므로 지하수위는 낮아지게 되었으며, 적석부의 규모를 축소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3. 적석목곽분 가운데 천마총을 비롯한 지상식 대형분의 경우 유물이 확인되는 목곽 바닥 토양색은 검다. 이것은 토양에 유기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유기물들은 대부분 형체를 구분할 수 없으나, 박테리아에 의해 완전히 분해되지 않았다. 이것은 지하수위가 상승하면 목곽 바닥까지 지하수의 영향을 받을 수 있어서 토양수분이 풍부한 환경이 지속되었음을 의미한다.

    4. 적석목곽분은 초기 국가의 기틀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왕권을 대내외에 과시하여야 하는 시기에 금을 비롯한 많은 부장품이 들어간 거대한 분묘로서 권력자로서의 권위를 높이고, 사후 삶터인 무덤의 훼손 위험을 최소화 할 수 있는 구조였다. 적석목곽분은 가장 경제적으로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는 분묘이면서 이 지역의 자연환경에 가장 적합한 양식이었다.

    5. 왕경지역의 지하수위가 높은 것은 당시 경주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시신의 위치를 지표면보다 크게 낮출 수 없으므로, 곽이나 관을 지상에 얹거나 지표면을 약간 파고 거기에 안치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시신을 지하 수위보다 높은 위치에 두었으나, 결과적으로 거대한 봉분을 조성하면서 모세관현상이 생겨나 분묘의 지하 수위가 주변의 평지보다 높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6. 적석은 무덤 양식의 가장 독특한 형식 가운데 하나이다. 매장주체부를 지상식으로 조성할 수밖에 없으므로 적석이 아닌 토양만으로 봉분을 만든다면 시간이 경과하면서 중력에 의한 토양 이동으로 지상에 설치된 곽이나 관이 노출될 가능성이 커진다. 그리고 봉분을 토양으로 조성하여 발생하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무덤의 장경을 크게 잡아야한다. 따라서 분묘 조성에 막대한 양의 토양이 소요되는데, 경주선상지 지형면에서 토양을 파내면 높아진 지하수위 때문에 왕경지역은 토지이용에 제약을 받는다. 한정된 공간에 많은 분묘를 조영하고 권력자로서 권위를 나타내고 훼손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는 거력을 두껍게 쌓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

    7. 적석목곽분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최고 수준의 초기대형분인 황남대총 남분, 황남대총 북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중에 조영된 천마총, 금령총은 간략, 축소, 생략되어 있다. 이것을 마립간기 왕권의 안정과 사회의 내실화로 장자세습이 정착된 결과로 보고 있으나, 지하수위의 하강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8. 적석목곽분이 외부의 영향에 의해 만든 것으로 보는 견해들은 이 묘제의 기원을 영남지방 및 경주가 아닌,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압록강 중류 또는 몽고 지역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에 두고 있다. 적석목곽분 문화가 북방에서부터 직접 경주에 와서 다시 주변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은 거점을 통한 문화의 전파로 설명할 수 있으므로 이론적으로 가능하지만 실질적인 측면에서 설명되어야 하는 점들이 있다. 이 문화가 해양이 아니라, 육상으로 전파되었다면, 경주에서 적석목곽분이 조영되던 시기에 중부지방이나 영남 북부, 호남지방에도 적석목관분 및 이것과 관계있는 고고학 발굴 자료들이 확인되어야 한다.

    9. 적석목곽분이 조성되기 이전부터 나타난 토광목곽묘는 경주 선상지에서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 지상식이었다. 그러나 이런 소규모 무덤을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무덤으로 사용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국가체제가 정립되고 국가의 부가 축적되면서 시신과 함께 매납되는 부장품의 규모가 많아지고 그의 가치가 높아지면서 훼손의 위험이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왕경지역에 묘역은 정해져 있으나 지하 수위가 높아 토광을 깊게 팔 수 없는데 시신과 금관을 비롯한 부장품을 훼손당하지 않고 도굴을 방지하는 방법을 고안한 결과 적석목곽분과 같은 형식이 창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10. 새로운 문화가 성립되는 것은 외부의 영향에 의한 것도 있지만, 기존에 존재하던 것을 변화하는 환경에 조화로운 양식으로 새롭게 만들 수도 있다.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자연환경 특성을 잘 알고 있으므로 환경 변화가 생기면 방식을 바꿀 수 있다. 적석목곽분은 이전에 경주분지에서 일반적으로 조영되던 묘제와 완전히 다른 양식이 아니라, 기존의 토광목곽묘를 경주지역의 자연환경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정치·경제·사회적 변화에 의해 발생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11. 영남지역에 분포하는 적석목곽분은 경주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 묘제가 경주 이외 지역에서 일반화되지 못한것은 경주와 자연환경이 다르므로 적석목곽분을 만들 필요가 없으며, 토광목곽묘 또는 수혈식 석곽묘로도 분묘로서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에 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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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림 1> ]  경주, 천북 지역의 선상지 지형면 분포(윤순옥·황상일, 2004)
    경주, 천북 지역의 선상지 지형면 분포(윤순옥·황상일, 2004)
  • [ <그림 2> ]  경주 왕경지역 20C 초 토지이용과 지형개관(황상일, 2007)
    경주 왕경지역 20C 초 토지이용과 지형개관(황상일, 2007)
  • [ <표 1> ]  구조 특성 분석 대상 적석목곽분 목록
    구조 특성 분석 대상 적석목곽분 목록
  • [ <그림 3> ]  경주분지 내 중심고분군의 분포(심현철, 2013)
    경주분지 내 중심고분군의 분포(심현철, 2013)
  • [ <그림 4> ]  잔존봉토 직경과 적석 장경과의 관계
    잔존봉토 직경과 적석 장경과의 관계
  • [ <그림 5> ]  잔존봉토 직경과 잔존봉토 높이와의 관계
    잔존봉토 직경과 잔존봉토 높이와의 관계
  • [ <그림 6> ]  적석목곽분 조영 시기와 목곽바닥의 위치
    적석목곽분 조영 시기와 목곽바닥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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