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동시에 나타난 시간의식의 특성을 살펴보고 그 교육적 의미를 탐색한 연구이다. 동시의 장르적 특성으로 인하여 동시에 드러나는 시간 의식은 주로 어린이 삶의 시간대에 집중되어 있다. 동식물을 의인화하거나 대상화하여 시간의식의 다양하게 드러내기도 하고, 은연중에 어른의 목소리를 포함하기도 한다. 또한 과거의 시간을 호출하여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되돌리거나 미래의 시간을 앞당기기도 하는데, 이러한 시간의식은 결국 유한한 시간을 인식하는 문제와 그 속의 존재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찾는 일과 닿아 있다. 동시의 시간의식은 시간의 선조성을 해체하고 유한한 시간속의 존재로서 어린이의 자기정체성 형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시적 화자의 시간의식을 쫓아 동시를 교육하는 일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동시의 언어 구조를 통해 한 인간의 체험이나 의식을 추체험하는 경로를 제공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학습자는 시적 상황에 대한 기시감을 가질 수 있고, 시적 주체의 내적인 지각과 의식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The education of poetry has been emphasized so far on understanding of human beings and the world by letting the readers read their own life within the poems. Of course, this can be said to be the essential aim for the education of literature, and in this respect the education of poetry has had a full significances. However, the reading of poetry has been mainly limited to the aspect of reflection only without understanding of its genre or extension toward the art theory. The enjoyment of poetry is not imitation of life but something like mind of play. the cardinal point of the consciousness of time in poetry is to achieve free impression space of mental liberation.
Therefore, education of consciousness of time is able to educational contents for appreciations.
체험은 ‘개인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으로 과학적 추상화와는 달리 개인 경험의 느낌이나 감정 혹은 정서와 같은 질적 다양성을 포함한다(Dilthey, 2009). 문학교육에서 학습자의 ‘체험’은 문학교육 활동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최지현 1997, 신헌재 2006, 진선희 2006, 김선희 2007, 유영희 2007, 이향근 2012, 하근희 2013). 문학작품을 읽고 감상하는 활동의 궁극적 목적은 정서체험에 있으며, 정서체험은 인지를 기반으로 일어나는 정신 작용이다. 따라서 학습자의 정서체험 반응은 텍스트 내용을 재진술하거나 분석하고 평가하며 타인과의 대화는 물론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이끌어내는 메타 소통적인 특성을 가진다. 특히 시를 통해 얻어지는 정서체험은 학습자가 텍스트와 거래하면서 경험하는 내면의 변화와 그것이 표현되는 양상을 포함하므로(진선희, 2006), 텍스트에서 드러나는 의식 현상은 정서체험 교육내용의 기본항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학습자의 정서체험 능력은 문학작품이 드러내는 의식현상을 인식하고 자신의 경험과 조우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신장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정서체험의 교육 내용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시간의식’에 집중하고자 한다. 시간의식은 인간이 가진 ‘시간에 대한 지향성’을 말한다. 인간은 경험의 폭과 깊이에 따라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한다.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것들은 인간 내부의 심리적 체험에 따라 의미를 부여 받는 것이다. 시간 역시 인간이 어떻게 인식하고 느끼는가에 따라 개인의 의식 속에서 다양한 실체로 존재한다. 균일한 속도로 흘러가는 뉴튼적 시간이 있다면, 이러한 시간을 인식하고 사유하는 개개인의 상대적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동일한 시간의 경과라 하여도 개인의 활동 여하에 따라 전혀 다른 양태의 체험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시 문학에서 시간의 문제는 시인이 지금–여기의 현실에서 얻어진 마음의 울림과 그것을 통해 호출된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시인의 현재적 발화는 시를 통해서 과거를 향하기도 하고 미래를 전망하기도 하며, 지금–여기에서 멈춰진 순간을 형상화하기도 한다. Lotman은 현실 세계의 시간이 문학적 표지가 되는 과정에는 모종의 구조가 발생한다고 말한다(Lotman, 1991). 자연적인 언어가 문학적인 언어로 변모되는 형상화의 과정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작품에 형상화된 시간은 시인의 체험이나 의식의 흐름과 근본적인 관련을 맺고 있지만, 자연적인 시간이 아니라 텍스트내의 시간으로 재편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독자가 시에 드러난 시간의식을 통해 시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시의 언어 구조에 따라 한 인간의 체험이나 의식을 추체험하는 경로가 된다. 이 글에서는 초등학교 학습자를 대상으로 시를 활용한 정서체험 교육 내용을 구체화하기 위해 동시에 나타난 시간의식의 특성을 살펴보고 교육적 가능성을 탐색해보고자 한다.
최근까지 이루어진 시간의식 연구는 주로 전통 서정시나 모더니즘시에 집중되어 있었다(김미선, 2012). 전통 서정시에서는 당대의 사회 현실에 대응한 다양한 의식 층위와 실존이 주요 특질로 드러났으며, 모더니즘 시에서는 시간의 정지나 무화 혹은 분절과 파편화의 특징을 드러내어 당대의 분열되고 소외된 자아의 형상을 보여주었다. 동시도 시인이 인식한 시간 의식의 언표임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동시는 어른에 의해서 쓰인 어린이를 위한 시이므로 성인문학에서 이해되는 시간의식과는 차이를 보인다. 그 차이는 성인문학에서 보이는 시간의식의 일부를 포함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며, 동시만의 특성을 보태기도 한다. 물론 장르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당위적인 명제라기보다는 실제 작품 사이에서 상호텍스트적으로 존재하는 일종의 인식론적 연결망이다. 그러나 동시는 내포독자를 어린이로 삼기 때문에 텍스트사이에서 자의적으로 형성된 장르적 보편성이 비교적 강하게 존재한다. 동시의 시간의식을 드러내는 표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첫째, 동시는 어린이의 인지적‧정의적‧신체적 발달 수준을 의식하고 쓰이기 때문에, 주로 어린이가 겪었을 법한 삶의 시간대를 다룬다. (가)는 친구랑 싸운 날에 지는 해를 바라고 보고 있는 아이의 정서를 그려내고 있다.
(가)는 친구에게 진 분한 마음과 거기에 겹쳐지는 지는 해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해가 ‘지는’ 현상은 싸움에서 ‘지는’ 행위와 동음이의어로 연결되면서, 이기는 것보다는 지는 것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심리적 위안과 자정 과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동시에서는 어린이 화자가 일상생활에서 겪었을 법한 시간 범주를 다루고 있다.
둘째, 동시는 동물이나 식물, 무생물들을 의인화하거나 시적 화자로 내세워 배역시(rollengedichete)의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다. 배역시에 등장하는 시적 화자는 시인 자신을 연상시키기보다는 허구화된 극적 자아로서 어린이의 동심을 대변하는 목소리(voice)를 가진다. 시에서 배역의 성격을 분석해 내는 일은 작품과 독자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문학의 사회적 측면의 일단을 밝히는 열쇠가 된다(Kayser, 1988). (나)는 보름달의 목소리를 통해 우물 안에서 밖으로 빠져 나가고 싶어 하는 화자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나)에서는 보름달이 누군가에게 호소하는 다급한 목소리를 나타내고 있다. 깊은 우물에 빠져 있어서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사다리를 내려달라고 엄마를 부르고 있다. 한계 상황에 처한 존재가 애타게 구원의 손길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보름달은 진짜 우물에 빠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빠진 것처럼 느끼고 있는 지도 모른다. 시간이 잠시 흐르면 보름달은 우물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 가기 때문이다. 보름달의 목소리를 빌린 배역시이지만, 그 속에는 아이들의 심리적인 고통은 자신을 스스로 가두고 있는 심리적인 우물일 수도 있음을 말하고 싶은 어른의 음성을 숨기고 있다.
셋째, 동시에는 어른이 이해하는 시간의 의미와 어린이가 이해하는 시간의 의미가 복합적으로 존재한다. 어른과 아이 모두 통제할 수 없는 시간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어른에게 이해된 시간과 어린이에 의해 이해될 수 있는 시간은 상대적인 차이가 있다.
(다)에서는 길을 가는 달팽이와 달팽이에게 질문하는 존재가 등장한다. 달팽이에게 묻는 존재는 반말을 하고, 달팽이는 존대말을 하고 있다. 이러한 말투로 인해, 묻는 존재는 어른의 목소리로, 대답하는 달팽이는 어린이의 목소리로 선명하게 구분된다. 어른은 매번 달팽이 아이의 행보를 알아맞히지 못한다. 어른의 목소리는 달팽이 아이의 일상을 이해한다고 확신하고 그것을 확인하려 들지만, 달팽이 아이는 언제나 ‘아니오’로 답한다. 한편 아이의 목소리만 달팽이로 표면화되어 있을 뿐, 어른의 목소리를 내는 존재는 달팽이인지 아니면 다른 동물인지 나타나 있지 않다. 어른과 아이는 다른 존재로서 서로의 의도와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으며 둘 사이의 시간의식이 차이를 발생시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동시에서는 이렇게 어른과 어린이의 목소리가 차이를 드러내며 공존하고 있다. 그런데 (다)와 같이 텍스트 표면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보통 한 목소리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밖에도 현대시의 시간성은 시간을 나타내는 시어나 시제 혹은 완결형식에 따라 파악할 수 있다(김준호, 2010). 서정시의 기본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순간의 서정을 담은 시에서는 주로 현재형 완결형식이 나타난다. 여기서 완결형식은 시어의 형태에 종속되기보다는 텍스트 안의 시간적 쓰임에 따라 과거의 사건을 지시할 수도 있으며 미래를 담을 수도 있다. 주로 리얼리즘 계열의 시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모더니즘 계열의 시에서는 묘사를 통한 무시간성이 드러난다. 또한 산문시에서는 이야기의 재현을 위한 과거시제가 드러나며,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나 행위에 대한 기억을 말하거나 순간적인 감정을 지시할 의도로 현재형을 쓰기도 한다. 따라서 다음 장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동시의 장르적 특성과 함께 시어의 완결형식에 유의하여 동시에 드러난 시간의식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가. 기억의 작용과 의미부여
(라)에는 ‘딸기’를 보고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는 어린이 화자가 등장한다. 주로 과거형 완결형식을 쓰고 있는데, 3~4연부터는 화자의 궁금함을 드러내면서 미래형을 사용하고 있다.
(라)의 화자는 딸기를 먹으며 별명이 딸기였던 민주를 떠올린다. 딸기의 빨간 색깔이 부끄럼이 많아 늘 얼굴이 빨갰던 기억 속의 민주를 불러낸 것이다. 화자는 다시 현재로 돌아와 민주가 무엇을 기억할지 혹은 하게 될지 궁금해 하면서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시적 화자의 시간은 현재의 일상에서 과거의 기억을 회상했다가 다시 현재의 일상으로 돌아오는 흐름을 보인다. 딸기를 먹고 있는 짧은 시간은 딸기에 대한 기억으로 인하여 과거 민주와 함께했던 긴 시간을 호출하며 상대적으로 시간의 길이를 늘이고 있다. 현재 사물과 마주친 짧은 순간이 그간의 시간들을 의미 있게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사물을 통한 의미의 재구성은 (마)에서도 드러난다.
(마)의 화자는 현관 앞에 놓여 있는 신발들을 보며 신발 주인들의 하루 생활을 읽어 내고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동생의 신발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그들의 하루 시간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신발에 묻어 있는 논흙과 밭흙, 기름, 잔반과 모래는 가족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지를 보여준다. 신발을 바라보는 객관적인 짧은 시간은 가족 개개인의 체험적 시간과 만나면서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나고 있다. 시적 화자는 불과 몇 분 동안 신발을 벗으면서 가족들의 신발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몇 분 동안 서로 다른 흔적을 가진 가족의 신발이 눈 앞에 펼쳐졌고, 이것은 가족의 하루 시간을 해석하도록 유도한다. 가족의 하루는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가족의 일상을 만들어 낸다. 각 세대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주기와 순환적 시간으로 해석되는 찰나이다. 객관적 상관물을 통한 의미의 재구성은 (바)에서도 드러난다.
(바)는 사람들이 줄어서 풀벌레 소리가 늘어나고 풀벌레 소리 덕분에 길이 줄어들고, 줄어든 길만큼 결국 달빛이 길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이 줄어들면서 발생한 연쇄적인 사건으로 읽힌다. 그러나 사람들에 의해서 변화되었던 산골의 모습이 사람들이 떠나가면서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산골마을은 자동차와 사람이 북적대는 곳이 아니라 달빛이 길게 파고드는 깊은 산중이었을 것이다. 시적 상황의 물리적 시간은 순행하지만, 북적대는 마을이 점점 산골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시간의 역행을 느낄 수 있다. 영화나 동영상을 거꾸로 돌리는 듯 한 효과를 내는 것이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마을은 머지않아 시간이 멈춘 듯이 고요한 태고의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예상까지 하게 된다.
기억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기억을 통해 인간은 시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자아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기억은 사물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자아를 발견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김준오, 2004:376). 동시에서 보이는 기억의 회상은 대상에게 의미를 부여하도록 유도한다. 기억은 세계와 교감을 이루었던 순간을 떠올리게 하고 현재의 시간과 그 순간을 가치 있게 만든다. 또한 순행하는 시간을 해체함으로써 대상이 지녀야 하는 본원의 모습을 복원하기도 한다.
나. 유한한 시간 인식을 통한 존재의 성숙
인간은 시간 앞에 한계 상황에 처해 있는 노예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죽음의 상황을 벗어날 수 없으며 흘러가는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인간은 그 한계 상황을 벗어나고자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사)는 하루살이가 자신의 시간적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묘책을 보여주고 있다.
(사)는 주어진 시간이 하루밖에 없는 하루살이 화자가 등장한다. 하루살이는 어차피 하루밖에 살지 못한다면 밥 먹는 시간, 말하는 시간도 아끼고 아름다운 하늘을 날면서 사랑을 찾겠다는 결심을 한다. 하늘을 실컷 날고 아름다운 사랑을 찾는 것은 하루살이의 짧은 생애시간을 허무하게 이끌지 않는다. 오히려 유한성의 자각을 통해서 생의 시간이 갖는 중요성이 배가된다.
(아)에서는 개를 죽인다는 뜻의 살구나무가 ‘산다’는 의미를 가진 ‘살구’로 들린다고 말한다. 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소도 살고 너도 나도 함께 산다는 뜻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그 이유는 마지막 두 행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살구꽃의 색깔과 살구의 맛 때문이다. 이 시의 발상에는 살구꽃의 환한 빛깔과 살구맛의 달콤함이 살구가 죽음을 부르는 과일이 아니라 생생한 삶을 북돋는 과일일 것이라는 상상력이 자리하고 있다. 살구에 대한 선입견을 중지시킴으로써 살구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선입견을 거부하면서도 자신을 지배하는 선입견의 힘을 체험하고 있다. 살구의 본 모습은 상대를 죽이는 일에 있지 않고, 환하고 밝은 살구꽃과 살구의 꿀맛을 만드는 일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무엇인가 파괴하는 죽음 앞에 무력하기 보다는 찬란한 삶의 정점에 집중하도록 독자를 이끌고 있다.
동시가 어린이를 위한 시이니만큼 동시에는 그들의 미래를 향하는 시선이 자주 등장한다. 시적 발화는 언제나 현재적이지만 현재를 축으로 하여 과거를 지향하면 기억을 회상하고 미래를 지향하면 미래에 대한 표상을 나타낸다. 현재 지점에서 미래나 과거를 향하게 되는 이유는 현재의 불완전성에 대한 극복과 해방감을 찾아 자신의 삶의 기획하고 투사하려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자)는 감자꽃의 미래를 땅 속에 ‘숨겨둔 주먹’ 즉 감자에서 찾고 있다. 1연은 감자꽃의 왜소함을 ‘작은 꽃잎’, ‘향기 없음’으로 드러내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겨둔 무엇이 있음을 2연에서 보여주고 있으며, 결국 3연에서는 그것이 땅 속에서 자라고 있는 ‘주먹’이라고 말하고 있다. 주먹은 희고 작으면서 향기까지 없는 꽃잎과 대비되면서 숨겨진 강인함이 강조한다. 감자꽃은 현재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이지만 미래의 내적인 완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감자꽃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시간의식은 머지않아 도래할 미래를 향하고 있으며 미래의 그 지점에서 이루어질 완성이 정체성의 원형임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 시에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가능성을 믿으라는 어른의 목소리가 숨어 있다.
(자)의 완결형식은 ‘~마세요’, ‘~게 있다고요’, ‘~이 있다고요’와 같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방식이다. 이것은 평범한 대답이라기보다는 무시하는 말이나 핀잔에 대한 오기 담긴 변명이다. 현재를 긍정하고 사랑하기 위해 미래의 근거를 포착하여 현재로부터의 해방과 자기만족을 이끌어 내고 있다. 시적 화자의 미래의식이 변화와 차이를 수반하는 것은 (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차)에 등장하는 ‘나’는 ‘실눈이’ 별명을 들으며 속상해 하고 있다. 그러나가 자신보다 눈이 더 작은 학생이 전학을 오자 아이들은 전학생을 보고 실눈이라고 한다. 듣기 싫던 별명을 드디어 떼어 냈지만, 화자의 마음은 어쩐지 허전하고 아쉽다. 어느덧 별명과 친밀한 관계가 되어버린 자기 자신을 느끼게 된 것이다. ‘실눈이’라는 별명은 곧 친구들의 관심이었다는 것도 알게 된 것이다. 과거에 대한 반작용은 ‘실눈이’에 대한 시적 화자의 생각을 변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유한성 속에 살고 있다. 유한한 시간에 대한 이해는시간의 멈춤이나 죽음을 인식하는 일과 필연적으로 연결되므로 교육 내용으로서 부담스러운 대상이 아닐 수 없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시간 교육은 주로 물리적인 시간에 초점을 두고 있다. 과학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하루 24시간과 1년 365일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빚어내는 자연현상으로 이해된다. 시간은 오직 과거에서 미래로 한 방향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상으로서의 시간은 인간의 체험과 의식 속에서 개념으로 존재한다.
Bollow는 인간이 시간에 관계하는 방식은 시계로 측정되는 객관적인 시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Bollow, 1971;예철해, 2005에서 재인용). 그에 의하면 인간에게 경험되는 시간이란 구체적으로 경험되는 시간 즉 ‘삶의 시간’이라고 말한다. 삶의 시간은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개개인에 따라 다르다. 개인의 정신적인 상태와 몰입의 정도, 감정의 흐름에 따라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일을 할 때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의 시간을 회상해 보면, 어떤 시간은 느리고 천천히 흐르기도 하고 또 어떤 시간은 아주 빠르게 지나가기도 함을 알 수 있다. 누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서 속도감의 차이는 현저하다. 선조적인 자연현상으로 보이는 시간을 인간의 인식대상으로 본다면, 현재와 과거의 구분이나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뫼비우스 띠처럼 하나로 얽혀서 양방향으로 흐르는 것임이 드러난다.
앞에서 살펴본 동시들은 과거와 관련된 기억이나 시간의 한계성에 대한 인식, 미래 시간을 앞당겨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영속적인 시간의 흐름을 재구성함으로써 과거를 다시 경험하거나 미래를 확인하는 시간의식 체험의 형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동시에 나타나는 시간은 어린이의 동심을 기반으로 하는 문학적 시간이다. 불가항력의 자연 섭리인 시간은 동시 속에서 여러 양상으로 대응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흘러가버린 시간을 잡아두거나 시간의 흐름을 돌이키기도 하고 자아의 소망을 투영하여 독자의 공감과 진실성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아동의 발랄한 상상력으로 시간은 수축되기도 하고 축적되기도 하며 방향을 전환하기도 한다.
(카)는 『일하는 아이들』에 실려 있는 어린이작품이다. 딱지 따먹기 놀이를 할 때 느끼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담고 있다. 상대편 아이가 자신의 딱지를 치려고 하는 순간과 딱지가 넘어가는 순간이 정지 장면처럼 묘사되어 있다. 딱지를 내려치려는 짧은 순간은 마음을 조리는 조마조마한 마음에 걸려 정지되고 긴 시간으로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작은 딱지가 홀딱 넘어가는 순간은 자신이 넘어가는 것과 같은 진동으로 진폭된다. 학습상황에서 이 시를 활용하고자 할 때, 교사는 학습자에게 딱지치기 경험과 자신의 딱지를 잃었을 때의 느낌을 기억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시적 상황이 진행되는 시간에 주목할 수 있다. 이 짧은 순간이 시적 화자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딱지라는 작은 물건에 대한 화자의 애정의 깊이를 이해하게 된다. 시간의식을 추론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직접 경험한 듯한 기시감(旣視感, Dejavu)이 들고, 시적 화자의 정서와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딱지가 넘어갈 때 자신이 쓰러지는 것과 같은 심리적 충격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정서적인 텍스트인 시의 정서를 체득하고 체득하는 과정이다. 학습자가 시간의식을 통해 시를 이해하고 감상하는 일은 다음과 같은 교육적 함의를 갖는다.
첫째, 문학적 시간 체험을 통해서 일상의 직접적인 경험 세계에서 획득될 수 있는 자아 개념을 능가하는 새로운 자아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 동시에서 드러나는 문학적 시간 양상은 표면적으로 현재이지만, 텍스트 내에서 흐르는 의식은 기억과 관련된다. 학습자가 경험했던 과거를 기억하고 그것을 현재와 견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가진 반성 능력의 기반이 된다. 또한 동시에 숨어 있는 어른 화자의 목소리는, 어린이 학습자 자신의 경험은 물론 그동안 어른들에게 쌓아온 공동체의 경험 역시 자신의 경험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현재 어린이 자신의 자아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기억과 어른이 가진 공동체의 기억을 통합함으로써 자기동일성을 확장하는 것이다.
동시 속에 재생된 작가의 경험은 일상의 모호하고 엉켜있는 경험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선별하여 주고 생생한 느낌을 부여해 준다. 문학적 체험을 통한 경험의 성장은 시적 화자가 보이는 각성의 상태와 대상에 대한 몰입의 정도를 내면화하는 것이다. 동시의 내용에 따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과거 경험을 회상하는 내용으로부터 자기정체성을 상상하는 내용으로 위계화할 수 있다.
둘째, 학습자에게 문학적 시간을 체험하고 자신의 삶에서 그러한 시간 경험을 발견해 보는 과정을 통해 시간의식의 다양성을 이해하도록 지도할 수 있다. 문학적인 시간은 시간에 대한 정서적인 반응을 토대로 구성된다. 이것은 시간을 상징적으로 변형시켜 인식하는 것으로 물리적인 시간지각이나 철학적인 시간의식과 구별된다.
근대 이전의 농경사회에서 시간은 선조적이기보다는 순환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지면서 시간을 인식하는 문화도 달라지고 있다. 앞 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시에서 시간의식은 일상적인 시간의식과 구별되는 특별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문학은 세계를 이해하고 경험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일상적인 사고 체계로부터 자유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체험은 말 그대로 물리적인 시간을 경험하는 의미이기도 하고, 특정한 시간의식을 토대로 세계를 경험한다는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동시를 통한 시간체험 교육은 특정한 시간의식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 동시에 나타난 시간 경험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하도록 지도할 수 있다.
인간이 시간을 인식하는 문제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 나아가서는 미래를 종합하고 전유하는 일이다. 학습자의 시간의식은 물리적 시간에 따라 인식되기보다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인식의 차이로부터 출발한다. 문학작품에 나타난 시간의 맥락을 확인하는 일은 문학작품의 정서를 찾는 기제가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창구가 될 수 있다. 문학작품속에 편재되어 다양하게 수축하고 확장하는 문학의 시간을 체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동시에서 어린이의 삶은 어린이가 겪고 있는 세계와 그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드러내 준다. 세계 내 존재로서 실존적인 인간인 어린이의 현존은 물리적인 시간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경험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을 대상으로 한다. 어린이가 겪는 시간도 경험의 막연한 배경이 아니라 내적 심리 상태나 사유와 감정, 욕망의 지점일 때 의미 있는 순간으로 기록된다. 시간의식은 현재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고 과거로부터 발견된 기억을 현재로 이끌어오는 부단한 반복을 통해 형성된다. 시간의식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학습자는 시간의 선조성을 해체하고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기정체성을 추구할 수 있다. 동시 작품 속에 펼쳐진 시간을 체험함으로써 학습자는 과거가 현재에게 주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때로는 시간의 흐름을 멈추게 하는 사물이나 장소와 대면할 수도 있다. 또한 학습자 자신의 심리적 상태와 내적 울림의 폭이 시간의 수축과 팽창을 유도함을 인식할 수도 있다.
정서체험은 개인의식의 지향성에 영향을 받는다. 개인의식의 지향성은 인간이 자신의 세계를 경험하고 인식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하나의 사건이나 경험은 그에 뒤이은 여러 사건이나 경험과의 사이에서 이루어진 관계의 그물 속에 편입됨으로써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사건은 과거의 해석 방식이나 미래의 예기 방식의 연관 속에서 이해되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시간의식이 나타난 동시를 읽으면서 학습자는 인간이 불가항력적인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능동적으로 종합하여 개인과 사회의 역사를 만들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은 2014년 10월 31일 접수하여 2014년 11월 28일 논문 심사를 완료하고 2014년 12월 5일에 게재를 확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