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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The Cinematic Insular Landscape as the beginning and the end 시작과 끝으로서의 영화적 섬의 풍경
  • 비영리 CC BY-NC
ABSTRACT
The Cinematic Insular Landscape as the beginning and the end
KEYWORD
Cinematic landscape , Island , Insular landscape , closing and opening , Antonioni , Tarkvosky
  • 1. 들어가는 말

    일반적으로 서구 극영화 속에서 자연풍경은 영화연구에 있어서 커다란 주제가 아니었다. 자연풍경은 야외에서 촬영된 영화라면 너무나 흔하게 발견될 수 있는 것이기에, 영화에서의 자연풍경은 영화 미학적인 관심을 깊이 끌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1) 물론 벨라 발라즈 혹은 에이젠슈타인 처럼 자연풍경을 영화 미학적으로 정립하려는 시도도 있었고, 거대한 자연 풍경이 중심이 된 영화들이 영화사 초기에도 분명히 존재했었다. 예를 들면, 레니 리펜슈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1930년대 독일의 산악영화 (Bergfilm)나 로버트 플레허티의 <아란의 사람>(Man of Aran, 1934)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와 같이 영화에 있어서 풍경에 대한 관심은 주로 영화사 초기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어떻게 영화가 독창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할 것인가에 대해서 집중하고, 그 구조를 구축해 갔던 영화사 초기를 지나 영화가 본격적으로 자유롭게 내러티브 구조를 가졌을 때 자연 풍경은 단지 배경의 의미로서 의미가 많이 축소되는 경향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풍경이 영화 속 인물보다 더욱 강조될 경우 분명히 영화의 내러티브 진행에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영화적 풍경의 문제를 마틴 르페브르는 두 가지 측면으로 설명한다. 한 영화 속에서 풍경이 등장할 때 관객은 내러티브적 모드와 스펙타클적 모드로서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 두 가지 모드는 같은 풍경 속에서 동시에 등장할 수 없는 것이며, 특히 스펙타클적 모드로서 등장하는 풍경은 내러티브의 전개를 정지시키며, 이 두 가지 모드는 한 영화 전체안의 긴장 관계 속에서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2) 만일 현대 영화가 단순한 내러티브 전개 보다는 내러티브를 자주 정지시킴으로서 관객에게 사유할 기회를 주는 경향성을 띈다면 바로 스펙타클적 모드로서의 자연풍경의 이미지는 그러한 역할을 맡게 된다.

    세계대전 이후의 인간존재의 무기력함과 이성의 폭력성을 예술가들이 인식하면서, 현대 서구 영화 속에 이 세계 속에서 중심으로서 주체로서의 인간-주인공의 자리가 해체되며, 하이데거의 용어처럼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강조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등장한 네오 리얼리즘 이후부터 시작되는 본격적인 야외에서의 영화촬영은 풍경의 의미를 배가 시켰으며, 풍경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새로운 리얼리즘을 구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된다. 특히, 현대영화 속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무기력한 주인공 앞에 등장하는 자연풍경은 바로 자연이라는 원초적 세계의 거대함3)속에서, 인간의 오성으로서 감지할 수 없는 숭고의 새로운 영화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자연풍경을 중요시하는 현대 영화 예술가로서 안토니오니와 타르코프스키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두 명의 작가의 대표작인 안토니오니의 <정사> (L'Avventura, 1960) 와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 (Solaris, 1972) 는 서구문명의 시작점인 섬의 문명권이었던 그리스의 문화로 인해 서구의 문화의 원초적 자연 풍경이라고 할 수 있는 섬의 풍경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이 글에서는 바로 섬의 풍경을 중심으로 이 두 영화를 비교 분석해 보고자 한다.

    1)영화 속의 풍경에 대한 본격적인 서구의 영화 미학적 연구에 관한 저서들은 주로 90년대 이후에 등장한 상당히 최근의 현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영화 속의 풍경에 대한 관심의 이유에 대해서는 풍경을 인물만큼이나 중요시 여기며 풍경을 하나의 세계로서 드러내는 최근 영화 (예를 들면 구스 반 산트의 , 알베르 세라(Albert Serra)의 <새들의 노래>(Le Chant des oiseaux, 2008)등) 의 경향성도 중요한 영향이 있겠지만, 50년대 이후에 등장한 프랑스의 인문학적 지리학에서의 풍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예를 들어 볼 수 있다. 이러한 인문학적 지리학의 대표자 격인 에릭 다르델 (Eric Dardel)의 저서인 『인간과 땅』 (L'Homme et la Terre, CTHS, 1990, 이 책은 원래 1952년에 출간된 책이나 계속 잊혀져 있다가 1990년에 다시 출간되어 프랑스 인문학적 지리학의 주요한 저서로서 재평가 되었다)은 하이데거 철학에 영향을 받아, 풍경을 단순히 계량적으로 보던 기존의 지리학적 태도를 넘어서 지리학 안에 현상학을 끌어들여 풍경을 세계를 사는 인간의 존재론적 장소로 까지 언급하는 인문학적 지리학의 입장을 만들게 된다. 이러한 풍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현재 프랑스 학계 같은 경우 여러 분야에 넓게 퍼져 있는데, 지리학의 경우 장 마크 베스 (Jean-Marc Besse), 문학의 경우 미셸 콜로 (Michel Collot), 영화의 장 모테 (Jean Mottet) 등 다양하게 풍경에 대한 인문학적인 연구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더구나 철학적으로는 한스 요나스 (Hans Jonas)같은 철학자들의 자연 생태계에 대한 철학적 관심들, 현대 예술에서는 랜드 아트의 등장과 같은 자연에 대한 새로운 미학적 해석들 또한 영화 속의 풍경에 대한 연구에 대한 관심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와 풍경에 관한 연구들로 다음 책들을 참고하라. Martin Lefevre (edited by), Landscape and Film, Editions Routledge, 2006, / Jean Mottet, L’Invention de la scène américaine : cinéma et paysage, L‘Harmattan, 1998, / Jean Mottet (sous la direction de), Les Paysages du cinéma, Editions Champ Vallon 1999, / Maurizia Natali L’Image-paysage, Iconologie et cinéma, PUV, 1996, / G. Harper et J. Rayner (edited by), Cinema and Landscape, Film, Nation and Cultural Geography, Chicago University Press, 2010 등.  2)Martin Lefevre, “Between setting and landscape in the cinema”, in Landscape and film, Ibid., p.29.  3)이러한 인간 앞의 거대한 자연의 모습은 이 글 앞에서 언급한 1930년대 독일의 산악영화나 플레허티의 <아란의 사람>에도 등장하지만, 그 자연을 이겨나가는 인간의 강렬한 의지 (특히 레니 리펜슈탈 의 산악영화에서는 독일인의 의지)가 더욱 강조된다.

    2. 섬 풍경의 이미지-이중성에서 추상성으로: 닫힘과 열림의 변증법

    섬의 문화였던 그리스 문화를 그 시작점으로 간주하는 서구의 역사에서 섬은 풍경의 이미지들 중에서 중요한 이미지중 하나이다. 인간 존재가 섬으로부터 느끼는 이미지는 근본적으로 이중적이다. 즉, 섬의 이미지는 항상 고독 그리고 자유의 이미지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데, 섬의 이러한 이미지는 공간적 혹은 물질적 차원을 넘어서 이미지의 복잡성을 일으킨다. 세계위의 지리적 공간 중 어느 곳도 결코 단순하고 순수한 공간의 이미지 일 수 없는 것처럼, 섬 또한 인간 존재가 오래 전부터 창조한 이미지들이 축적된 공간이며, 역사성에 영향을 받은 공간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 문화로부터 비롯되는 서구적 문화의 자연 풍경의 중요한 원형으로서, “섬은 섬의 재현으로 존재 한다”4)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의 다른 공간들과 분화되면서, 바다와 하늘이라는 무한의 두 개의 공간들의 경계에서 나타나는 섬의 존재적 특성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즉, 섬은 무한한 이 두 개의 공간들 사이의 균열처럼 존재하는 유한한 존재의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섬은 성스러움의 무한한 공간을 향한 인간존재의 초월의 욕망을 상징하는 공간이 된다. 특히, 섬의 풍경은 서구의 역사 안에서 천국이나 유토피아로서 자주 등장한다. 동시에, 역설적으로 섬은 더 이상 멀리 갈수 없는 인간 존재의 가능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공간이 된다. 즉, 섬은 지옥 혹은 감옥의 이미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피에르 브느와 (Pierre Benoît) 의 문학적 주석가였던 쟝 세브리에 (Jean Chevrier) 는 이런 면에서 쓰길 “섬은 사람들의 정신을 완전히 사로잡으면서 근본적으로 환상적이면서도 동시에 저주스런 모습으로 모호하게 나타난다. 섬은 모든 유토피아의 특권화 된 공간이기에, 가장 아름다운 꿈의 탄생을 만들게 한다는 측면에서는 환상적이면서도, 섬은 아주 단련된 인간의 정신을 무너뜨리게 하는 위험한 독, 판타즘, 집착, 가책을 퍼트린다”.5) 섬은 바로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이미지인 것이다.

    섬의 일반적인 정의는 물로 둘러쌓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섬은 물 때문에 닫혀있는 땅이 되는 것이다. ‘닫힘’은 섬을 정의 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미지인 것이다. 질베르 뒤랑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장소를 성스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장소가 닫힌 곳이 될 때이다”6)라고 말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 신화의 신들의 대부분은 섬에서 태어나거나 섬 풍경과 연관된 장소에서 태어난다: 제우스는 크레타 섬에서, 헤라는 사모스 섬에서, 헤르메스는 펠롭스 섬에서, 아폴론은 델로스 섬에서, 아프로디테는 시테라 섬에서 태어났다. 바로 섬은 신들의 성스러움을 보장하는 닫혀있는 땅인 것이다. 더구나, 유대-크리스챤 문화에서도 에덴동산은 신에 의해서 창조된 완벽하게 성스러운 공간으로서 마치 닫혀있는 땅처럼 묘사 된다.7) 에덴동산 또한 일종의 섬과 같은 이미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섬의 닫힘이 성스러움의 섬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닫힘이 세계로부터 고립되어진 곳이라는 의미에서 볼 때, 섬은 자연스럽게 죽음과 슬픔, 지옥과 감옥의 공간이 된다. 그러나, 섬을 둘러쌓고 있는 물이 항상 걸림돌이 아니라 때때로 다른 세계로 나갈 수 있는 항해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섬은 알려져 있는 세계와 연관되어 새로운 세계로서 나아갈 수 있는 이미지로서 섬을 특징지을 수 있는 것 만큼이나, 섬은 창조와 재탄생을 위한 ‘열림’의 새로운 공간이 된다. 이런 면에서 프랑스의 지리학자인 안 마이스터샤임 (Anne Meistersheim)은 섬의 이미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섬 풍경 속에서, 열림과 닫힘은 서로 공존하며, 서로 맞서지만, 또한 서로 섞이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과정의 끝에서, 섬의 이미지는 추상성의 이미지에로 다가서게 된다.9)

    시각예술의 차원에서, 추상의 의미는 구상의 의미와 부딪힌다. 즉 추상은 비구상적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형상을 해체하는 것을 시도하는 실험영화의 경우를 제외하고, 극영화에서 추상을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극영화가 그 자신만의 언어체계를 구성한다 할지라도, 영화는 대상의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재현한다는 자신의 특성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일 추상이 단지 구상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고려된다면, 추상의 의미는 축소될 것이다. 예술은 결코 대상을 있는 그 자체로 그대로 형상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가 실재와 훨씬 가까운 이미지를 만드는 기계복제 방식인 사진 혹은 영화에 의해 대상을 보여줄 때마저도, 대상은 예술가의 생각과 감정에 따라서 새로운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대상은 항상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리얼리즘적 이라고 부르는 예술마저도 모든 가시적인 겉모습을 충실하게 복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예술은 근본적인 독특한 특성들을 축약하고 ‘추상화 하는 것(abstraire)’ 이다. 예술은 그 특성들을 특권화하고, 대상의 구성의 내부에 있는 엄청난 중요성을 그 특성들에 부여하면서, 강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10)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든 (시각적) 예술은 일종의 ‘추상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시적 세계의 이미지로부터 완전하게 분리된, 순수한 추상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가를 포함해, 인간존재는 세계 -내- 존재로서 감각적 세계, 특히 시각적 세계 안에서 살면서 여러 가지 것들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추상적 이미지도 세계 속에서 사물들의 이미지가 주는 힘으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되거나,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시각적) 예술은 항상 ‘구상적’일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이 시각적 실재를 구상화하고 그리고 추상화하는 형식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면에서, 모든 예술은 추상적인 동시에 구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11) 구상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사이에서, 시각예술에는 ‘형태변용 (déformation)’의 정도의 문제가 있을 뿐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극영화에서 추상적인 것으로서 이미지를 묘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발상과 연관 지어서 볼 때, 특히, 섬 풍경의 닫힘과 열림의 변증법으로부터 오는 복잡성은 섬의 특성 안에서 추가적인 추상성의 정도(定度)의 느낌을 가지고 온다. 섬 풍경은 영화 카메라를 통해 쉽게 정의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섬이 롱 샷에서 등장할 때, 우리는 섬과의 거리감속에서 대륙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섬의 풍경을 지각하고 느낄 수 있지만, 반면 카메라가 섬의 내부에서 섬을 배경으로 하여 그 안의 대상들을 중간 샷 이나 근접 샷으로 잡을 지라도, 섬의 풍경은 대륙 안에서의 해변가의 풍경과 명백하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풍경의 섬성 (insularité, 島性)은, 섬의 풍경은 숨겨지고, 사라져 버린다. 다른 말로 하면, 섬의 형상은 부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알랭 레네는 자신이 <미국인 삼촌 (Mon oncle d'Amérique, 1980)>에서의 섬의 시퀀스를 찍을 때 어려웠던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지만, 흥미롭게도, 섬의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고, 섬의 공간적인 특성은 닫힘과 열림의 분위기 속에서, 섬 위의 사물들과 인물들을 ‘추상화 한다’. 위대한 영화작가의 극영화 속에서, 섬은 풍경은 실질적으로 단지 내러티브 진행을 위한 배경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영화의 섬성이 사물들에 파고들고 인물들에 스며들어서 새로운 이미지들을 창조해 내게 된다. 영화의 섬의 풍경은 ‘추상적 구상 (figuration abstraite)’ 를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공간의 유형에 접근하게 된다. 섬 풍경의 이러한 추상성 때문에, 섬 풍경이 극영화의 장소가 되었을 때, 다른 말로 하면, 섬 풍경이 가지는 그 복잡성의 이미지를 잘 알고 있는, 영화예술가가 추상성에 이르기 까지 그 복잡성을 영화이미지 속에서 현실화시킬 때, 섬은 시각적 실재 그 자체의 모호함과 신비가 재현되는 장소로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존재의 불안정한 정체성과 잡을 수 없는 진리의 흔적을 형상화 하려고 시작하는 현대영화에 있어서, 섬 풍경은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즉, 루키노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 (La Terra trema, 1948), 로베르트 로셀리니의 <스트롬볼리> (Stromboli, 1950), 잉마르 베리만의 <모니카의 여름> (Sommaren med Monika, 1952),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정사> (L’Avventura, 1960), 장 뤽 고다르의 <경멸> (Le Méris, 1963), <미치광이 삐에로> (Pierrot le Fou, 1965) 등처럼 대표적인 현대영화 속에서 섬 풍경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풍경을 중요시하는 현대영화예술가로서 안토니오니와 타르코프스키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두 명의 작가의 대표작인 안토니오니의 <정사>(L'Avventura, 1960) 와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 (Solaris, 1972) 는 섬의 풍경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이 다음 글에서 부터는 바로 섬의 풍경을 중심으로 이 두 영화를 비교 분석해보고자 하며, 닫힘과 열림의 이미지로서 나오는 섬의 추상성이 어떻게 영화 미학적으로 구현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4)M. Trabelsi의 서문 in M. Trabelsi (études rassemblés par), L’Insularité, Presses Universitaires Blaise Pascal, 2005, p.6.  5)E. Jouve에 의해 인용됨 «Le thème de l'insularité dans l'oeuvre de Pierre Benoît» in A. Meistersheim (textes rénis par), L'Île laboratoire, Paris, Edition Alain Piazzola, Ajaccio, 1999, p.379.  6)G. Durand, Les Structures anthropologiques de l’imaginaire, Paris, Bordas, 1982, p.281.  7)창세기에서 신에 의해 창조된 낙원은 정원으로서 표현된다. 이 정원은 다른 땅들과 분리되는 경계에 의해서 구성되어 진다. 즉, 닫힘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구나, 인간의 타락이후 그 어떤 인간도 들어올 수 없는 더욱 닫힌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창세기 3장 24절에 따르면 “이렇게 아담을 쫓아내신 다음 신은 동쪽에 천사들을 세우고 돌아가는 불칼을 장치하여 에덴동산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창세기 신화에서도 거룩한 장소인 낙원 또한 닫힌 장소인 것이다.  8)A. Meistersheim, «Figure de L'iléité image de la complexité», in D. Reig (rénis et préenté par), L'Îles des merveilles: mirage, miroir, mythe, L'Harmattan, 1997, p.112.  9)‘추상 (asbtraction)’의 어원적 의미는 라틴어 abstractio (1361년경) 에서부터 오는데, 그 의미는 아이러니 하게도 섬의 이미지와 가까운 분리와 고립 이었다(2007년판 Petit Robert 사전 참조). 특히 1370년 니콜라스 오레스메 (Nicolas Oresme) 는 추상을 “관찰에 집중하기 위해서, 전체를 요소들로 분리시키는데 작동하는 정신의 작용으로서” 정의한다(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대한 니콜라스 오레스메의 번역(Edition Menut VI, 10, p.347) 에서 온 정의). 특히, 그는 분리시킨다는 말을 강조하는데 이는 또한 고립시킨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더구나, 현대 예술에서 추상의 의미는 추상미술과 함께 더욱 커진다. 칸딘스키 혹은 말레비치의 방식들에 따르면, 우리는 자연을 넘어서, 추상예술과 연결된 비-객관성(non-objectivité) 의 표현의 질(qualité) 로서 추상의 개념을 정의하려고 시도한다. 즉, 재현의 내용의 예술로서 아니라, ‘정신적인 것’ 혹은 ‘내적인 것’의 순수 형식의 예술이 되려는 것이다. 객관성은 ‘대상의 충실한 재현을 보여주는 질’로서 정의될 수 있다면, 그 이미지의 복잡성으로 인해서, 섬을 단지 충실한 재현을 통해 표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열림-닫힘’의 복잡한 공간으로서 섬은 단지 자연적인 공간일 뿐만 아니라, 결국 닫힘과 열림의 변증법속에서 인간의 의식의 이미지의 공간으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순수오성을 섬으로 비유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순수오성의 나라 그 나라는 섬이다.” Critique de la raison pure, Livre II, Ch. III, PUF, 2001(6e édition), p.216). 이런 의미에서, 섬 풍경의 이미지의 그 근원적인 추상성 때문에,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섬들의 집합 안에서는 그 어떤 객관적인 통일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 섬은 단지 인간의 꿈인 것이며, 인간은 섬의 순수한 의식일 수 있는 것이다. (Gilles Deleuze, “Causes et raisons des îles désertes” in L'Île désertes, Textes et entretiens 1953-1974 (édition préparée par David Lapoujade), Editions de Minuit, 2002. pp.13-14)”.  10)M. Pichon, Esthétique et Epistémologie du naturalisme abstrait, avec Bachelard: rêver et peindre les éléments, L'Harmattan, 2005, pp.99-100.  11)Ibid., p.102.  12)S. Liandrat-Guigues et J.-L. Leutrat, Alain Resnais, Liaisons secrètes, accords vagabonds, Editions Cahiers du cinéma, 2006, p.236.

    3. 시작과 끝으로서의 섬의 풍경

    안토니오니의 <정사>와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는 장르적인 면에서 보자면, <정사>는 일종의 멜로드라마 이고 <솔라리스>는 일종의 공상 과학 영화이다. 그렇지만, 이 두 영화가 만나는 지점은 <정사>가 멜로드라마 인 척 하면서 멜로드라마13)를 스스로 해체하고, <솔라리스>는 공상과학영화14)를 넘어서 전혀 다른 지점에 이르기 때문이다. 특히, 이 두 영화는 현대적 사랑이라는 리얼리티 (<정사>)와 인간의 의식 혹은 죄의식의 리얼리티(<솔라리스>) 라는 두 가지 리얼리티가 섬의 풍경을 통해 등장하는 영화들이라는 점에서 연결된다.

    <정사>는 그의 영화의 초반부에 세 번째 시퀀스에서 섬이 등장하지만, 영화의 나머지 부분에는 전혀 섬이 등장하지 않는다. 즉, <정사>는 섬의 풍경에서 사건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들이 섬을 떠나 다시는 섬으로 돌아오지 않는 영화이다. 반대로, <솔라리스>는 영화의 대부분에 섬이 등장하지 않다가, 영화의 마지막 샷에서 우리는 갑작스럽게 섬의 풍경을 만나게 된다. 즉, <솔라리스>는 다른 공간에서 시작해서, 섬으로 끝나는 영화인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정사>에서 섬의 풍경은 영화의 시작의 이미지이고, 반면 <솔라리스>에서 섬의 풍경은 영화의 끝의 이미지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들은 계속적으로 섬의 풍경 속에서 머무는 영화이다. 즉, 이 두 감독은 섬의 풍경의 이미지의 본질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1) 안토니오니의 <정사>-시작으로서의 섬

    안토니오니는 그 어떤 감독보다도 공간에 대한 민감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그는 인터뷰에서 말하길,

    즉, 안토니오니에게는 항상 인물이나 이야기보다는 먼저 장소와 풍경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장소와 풍경은 항상 인물과 이야기를 밀어내고, 그의 영화 속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이런 맥락에서 <정사>에서 그가 섬을 중요한 공간으로 정했을 때 이미 섬은 섬의 이미지의 진부함을 넘어서서, 새로운 의미의 공간으로 등장하게 된다. 특히, 원래 <정사>의 제목은 섬이었다.16) 영화의 절반이상이 섬이 등장하지 않더라도 <정사>는 섬의 이미지로 가득한 영화가 되는 것이다.

    안나는 섬의 시퀀스 시작 후 약 16분 정도 후에 사라진다. 즉, 영화의 초반부의 시퀀스는 안나를 중심으로 샷이 진행되므로, 관객이 생각했던 여주인공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은 히치콕의 <싸이코>(Psycho, 1960)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여)주인공의 자리로서의 주관성 (subjectivité) 에 대한 이 두 감독의 관점을 다르다. <싸이코>에서는 여주인공이 살해되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여주인공의 자리는 또 다른 인물과 또 다른 사건으로 메워진다. 하지만, <정사>에서는 그녀가 사라짐에도 불구하고, 안토니오니는 그녀가 죽었는지 아직도 살아있는지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래서 계속 그녀의 부재의 자리의 ‘현존’은 <정사>의 샷 속에서 끊임없이 계속 드러난다.17) 예를 들면 안나를 찾기 위해서, 클라우디아와 산드로는 어느 작은 마을에 방문하게 되는데, 그 마을에서 약사부부를 만난다. 그들이 다시 약국으로 들어간 후, 즉 샷에서 사라진 후, 우리는 클라우디아의 뒷모습만 남은 근접 샷에서 그녀 옆자리의 부재의 자리를 보게 된다. 그의 연인 산드로는 샷 바깥에 있고, 그의 목소리로만 들릴 뿐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유령의 마을인 듯 한 곳에 있는 텅 빈 교회를 지켜본 후 떠난 이 둘의 모습 뒤로 남은 텅 빈 공간의 풍경을 카메라는 계속 응시한다. 바로 안나의 부재의 자리는 텅 빈 공간의 풍경을 영화 속에서 계속 만들어 내며, 이 텅 빈 자리가 만들어내는 인물들 간의 거리감은 바로 이 인물들의 모습을 하나의 섬들의 풍경들로 만들어 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섬의 시퀀스에서 그들이 원래 있었던 섬들 뒤의 배경으로 보이는 다른 섬들의 모습들은 그들 자신의 관계의 부재의 풍경이 되는 것이다.

    특히 섬의 시퀀스에서 안토니오니는 섬의 전체적인 풍경을 보여주기 보다는 각 인물들의 시선과 행위를 따라다니기 때문에, 이 시퀀스는 파편화된 샷들로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프랑스의 안토니오니 전문가인 조세 무르 (Jose Moure)가 말하는 것처럼, “<정사>의 섬은 전체적인 비전의 불가능성에 이르기를 원하는 것 같은 인물들을 대면한다. 이 영화의 섬은 (형태가 확실하지 않은 바위들의 이미지의 연속에 의해) 단조로움 혹은 뚜렷한 균질성으로서의 장소의 통일성을 해체하고, 장소의 모든 부분을 관통하고, 이 장소를 결함 있고 혼돈스럽고, 산만한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 땅의 끊임없는 예측 불가능한 모습 (깊이 파인 골, 흙과 돌더미 등)에 의해 충돌하는 자갈투성이의 거친 배경으로서 보여진다”.18) 다른 말로 하면, 인물들의 안나를 찾는 움직임들이 완벽하게 그 움직임의 개념 안에서 나름의 통일성을 가지고 구성되어진다고 할지라도, 섬을 구성하는 물리적, 공간적 요소들의 불규칙함이 촉발하는 이질성 속에서, 섬에서의 그 움직임은 행위의 확실한 읽기의 모든 가능성을 부숴버리는 “우발적 운동 (우연의 열매)의 효과”19)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고전적인 영화에서 주체의 시선과 행위에 의해서 이야기의 균질성을 구성하는 주인공이 사라진 후의 혼돈과도 같다.

    즉, 이 여러가지 독특한 형태의 돌들만으로 이루어진 섬의 풍경의 분위기가 그 주체의 사라짐의 혼돈을 더욱 강화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탈리아의 안토니오니 전문가인 산드로 베르나르디는 말하길, “영화의 첫 부분에서, 안나가 사라지는 에피소드는 인간과 세계 사이의 단절을 보여준다. 세계를 보면서 거기에 형태를 부여하는 주체는 이 순간부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구조화된 질서가 되길 멈춘 세계는 혼돈이 되어, 사물들과 사건의 혼돈스러운 총체가 되는 것이다.”20) 이러한 혼돈은 서구의 사상에서 구성해왔던 순수한 주관성의 해체이후의 발현되는 현대 철학에서의 주체의 인식론적 확실성에 대한 회의와 경향성과 유사하다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세계의 균일성을 구축하는 주체의 자리가 해체되고, 세계에 관한 다양한 시선들이 타자들의 개입을 통해, 이질적으로 세계의 이미지가 구축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의 의식의 주체성에 대하여, 철학자 존 설은 말하길

    즉, 세계에 대한 개념은 항상 순수한 주체의 시선이 아니라, 여러 개의 주체들의 시선들로 구성되는 모호한 이질성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섬의 풍경의 시퀀스에서, 안토니오니는 주체의 시선의 불안정한 상태의 측면을 드러낸다. 이런 의미에서 프랑스의 영화미학자인 쟝 모테는 <정사>의 섬의 시퀀스에 대하여 말하길, “안토니오니가 <정사>의 섬에서 우리들에게 보여 주려고 한 것은, 특정한 지리적인 장소의 명칭으로서 리스카 비앙카 섬이 라기 보다는 시선에 대해 드러나는 공간인 것이다.”22) 따라서, 이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주체의 시선의 주관성에 관한 문제 제기 속에서, 섬은 지리적인 정체성을 상실한 추상적 공간으로 변하게 된다.

    서구 사상과 예술의 전통 안에서 원근법에 의해서 그려진 그림의 경우처럼, 보이지 않는 자의 ‘순수’한 주관성의 시선은 마치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유한한 인간의 시선이기 보다는 신의 시선, 혹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유령의 시선과 같은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섬의 시퀀스에서 등장하는 섬의 풍경과 안나를 찾기 위해 움직이는 인물들의 배회 속에서 우리는 알 수 없는 유령의 시선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 시선이 섬에 남은 인물들의 유한한 시선들과 섞여 버리기 때문에, 이 시선은 초월적일 뿐 아니라 내재적인 시선이 된다. 이 시선은 닫힘과 열림의 이중적 이미지로서 섬의 풍경의 추상적 이미지의 신비로부터 촉발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안나가 사라진 곳은 바로 섬 위에서 이다. 그녀의 사라짐의 순간은 섬의 풍경의 신비가 마침내 영화에 다가가는 순간인 것이다. 예를 들면, 카메라는 중간 샷으로 안나를 찾고 있는 클라우디아를 보여주다가, 전혀 이 샷과 연결되지 않게 수직 아래쪽으로 움직여서 갑자기 섬의 암석(巖石)적 이미지를 응시한다. 이것은 누구의 시선인가? 즉, 카메라는 클라우디아의 행위를 보여주는 객관적인 시선인 듯 하다가, 돌의 이미지를 보여 주며 갑작스럽게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시선으로 돌변한다. 그것은 유령이 시선이며 혹은 사라진 안나의 시선일수 있다. 이 샷 이후에, 카메라는 섬 위의 또 다른 인물들의 시선을 추적한다. 들뢰즈의 표현을 따르면 “이상한 비가시적 주관성 (une étrange subjectivité invisible)”23)으로부터 오는 시선인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영화의 초반부에 안나는 사라지지만, 영화 속 거의 모든 샷은 그녀의 시선에 의해 사로잡혀 있다. 단지 세상을 바라보는 일상적 주체의 시선으로서가 아니라 이미 유령이 된 부재하는 존재로서의 그녀의 시선은 들뢰즈의 말처럼 이상한 비가시적 주관성의 시선이 된다. 그리고 영화 속 공간은 자주 그녀의 이상한 비가시적 주관성속에서 파편화되고 해체되어 진다.

    영화의 마지막 샷은 섬의 풍경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이 샷은 섬의 풍경을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섬의 시퀀스에서 안나가 사라지기 전에 놓여진 씬과 다른 인물들이 사라진 안나를 찾는 씬 들로 이어지는 사이에 우리는 미스터리한 한 샷의 등장을 보게 된다. (<포토그램 1>을 보라). 이 샷은 왼쪽 면의 절반은 섬의 절벽의 암석적인 이미지로 채워지고, 나머지 절반은 수평선이 보이는 바다이다. 수직선의 절벽의 이미지와 수평의 바다 이미지는 그녀가 사라지는 신비를 만들어내는 긴장감을 만들어 낸다. 또한 이 절벽이 보여주는 암벽적인 이미지는 그 다음 씬 들에서 공간을 보는 시선을 방해하고, 각 인물들 간의 하고 인물들의 관계의 거리감을 만들면서 그들을 소통불가능하게 하는 섬의 파편화된 돌의 이미지들로 연결된다.

    <정사>의 마지막 샷에서는 샷의 오른쪽을 커다란 건물의 벽이 채우고 있다(<포토그램 2>를 보라). 즉, 그것은 섬의 절벽이 보여주는 암석적 이미지의 확장이며, 섬의 시퀀스에서의 인물들의 샷 안에서의 거리감이 되는 돌로 만들어진 인공적 건물로서 보여지는 돌의 이미지의 문화적 상징화라고 볼 수 있다. 이 벽의 왼쪽 옆면에는 열린 공간으로 롱 샷 안에서 산드로와 클라우디아가 앉아 있고, 저 멀리 눈 쌓인 산이 보인다. 그리고 이 둘 앞에 철로 된 긴 난간이 수평으로 길게 설치 되 있다. 섬 풍경 안에서의 안나가 바로 사라지기 직전의 신비로운 샷 안에서처럼, 수평선과 수직선의 만남이 반복되는 것이다. 특히, 이 마지막 샷에서 바다는 산으로 대치된다. 바다의 이미지처럼 산24)이라는 이 거대한 숭고의 이미지는 세계에 기투된 인간 존재의 공포와 불안함을 더욱 깊게 만들면서도 미묘한 상승의 열림의 가능성을 담지 한다. 즉, 마지막 샷25)까지 안토니오니는 섬의 풍경의 이미지를 잊지 않은 것이다. 즉, 마지막 샷은 안나가 사라진 후의 바로 그 다음의 섬의 샷의 이미지의 구조를 다시 반복함으로서, 마치 안나의 돌아옴을 기다리는 샷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마지막 샷은 이 영화의 내러티브적 닫힘이면서 또한 잠재적인 새로운 열림으로 나아간다.

       2)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끝으로서의 섬

    <정사>와는 달리, <솔라리스>에는 섬의 풍경이 맨 마지막 샷을 제외하고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타르코프스키의 대부분의 영화에서처럼, 이 영화 속의 가장 주된 물질적 이미지는 물이며, 바로 그 물의 이미지가 주인공의 현재의 의식과 기억들과 섞이게 한다. 또한 이 영화 속의 가장 주된 공간은 바로 우주선이다. 에스에프의 또 다른 걸작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2001: A Space Odyssey)는 우주선의 바깥과 내부의 리듬을 살려가며, 큐브릭은 우주선을 외부세계와 소통하며 외부세계에 의해서 자극받고 작동하는 인간의 뇌26)의 상징처럼 고려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솔라리스>의 우주선의 씬 들은 항상 우주선 안에서만 머문다. 즉, 우주선은 여기서 철저히 닫힌 공간이다. 독일의 철학자 슬로터다이크는 인간이 창조해 낸 공간들을 섬의 상징성으로 해석해 내는데, 그에 따르면, 우주선이야말로 절대적 섬의 공간이다. 그는 말하길

    슬로터다이크의 말처럼, 절대적인 섬으로서 우주선은 절대적 섬으로서 닫힌 공간이지만, 동시에 열린 공간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생물적 한계와 그 연약함 때문에, 우주선 외부의 적대적인 환경에 맞서서 우주선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우주 안에서 절대적인 닫힘의 공간이 되어야 하지만, 그 우주선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환경으로서 동시에 열린 공간이 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솔라리스>에서 대부분의 씬들이 닫힌 공간으로서 우주선의 내부에서만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솔라리스>의 우주선은 이런 닫힘과 열림의 공간을 이루는 절대적 섬의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솔라리스 혹성의 바다의 이상한 힘 때문에 우주선은 새로운 만남의 열림의 공간이 된다. 이것은 마치 지구상의 섬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가 섬을 고립시키는 방해물이 되어 섬을 닫힘의 공간을 만들면서고, 반대로는 다른 세계로 나가게 하는 항해의 열림의 공간의 이중성을 띄는 것과 마찬가지 인 것이다. 솔라리스 혹성의 바다의 이상한 능력은 인간의 과거의 정신적 상처로 남아있는 인물들을 물질화함으로서, 주인공인 크리스 켈빈은 우주선 안에서 자신의 죽은 부인과 만나게 되며, 자신의 과거로 회귀하게 된다. 즉, 이런 의미에서 점점 우주선은 그 기계적인 물질적 의미를 넘어서서 정신적인 섬으로서 전환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영화 <솔라리스>는 인간존재의 정신적 우주로 들어가게 된다. 즉, “사유의 세계인 내부가 솔라리스 바다에 의해 포섭된 물리적 사물들의 세계인 외부가 되는 그러한 방식을 통해 모든 우주의 차원으로 인간존재를 확장시킨다. 필연적 귀결로서, 물리적 사물의 세계인 외부는 반대로 사유의 응고물이 되는 것이다.”28)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를 여는 샷은 영화의 처음 시작 샷인 물속에서 물의 흐름에 따라 흐늘거리는 식물을 보여주는 샷과 같다. 즉 이 샷 때문에 우리는 주인공인 크리스 켈빈이 다시 지구로 돌아온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다음 샷은 이 샷과 연결되지 않는다. 호수는 얼어있고, 숲은 죽어있다. 즉, 시간이 멈추어져 있는 것이다.29) 아버지의 집에서 크리스 켈빈과 그의 아버지의 만남을 보여주며, 이 샷으로 시작해서, 롱 트래블링으로 카메라는 점점 더 위로 올라간다. 마침내 솔라리스의 “바다-뇌(ocean-cerveau)”30)의 중심에 집이 놓여져 있는 조그만 섬이 드러난다. (<포토그램 3>을 보라.)

    즉 크리스 켈빈은 지구로 돌아온 것이 아니며, 이 마지막 시퀀스는 바로 솔라리스의 바다에 의해서 물질화된 그의 정신적 이미지인 것이다. 시간이 멈추어져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은 그의 과거의 기억의 공간속임을 상징한다. 타르코프스키는 이 마지막 시퀀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솔라리스>의 마지막 샷의 집은 솔리리스 바다의 가운데에 있는 섬에 위치한 집인 것이다. <솔라리스> 에서처럼, 섬 위의 집은 <정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섬 풍경 속에 있는 이 두 집들은 그곳에 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풍경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바슐라르가 말한 것처럼, 집은 “인간영혼에 대한 분석의 도구”32)이며 “인간의 기억들과 꿈들에 대한 통합적 장소들 중 하나”33)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영화에서 집의 이미지는 서로 다르다. <정사>에서 등장인물들이 폭풍우를 피하기 위해 피신한 집은 섬 위에 버려진 집이 아니라, 어부의 집이다. 이 집은 영화 첫 번째 시퀀스에서 등장한 현대적이고 잘 갖추어진 산드로의 집과 대조를 이룬다. 섬 위의 이 누추하고 작은 이 집은, 도시나 인간에게 속한 집이 아니라, 자연에 속한 집처럼 보인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집은 섬 위의 또 다른 하나의 섬인 것이다. 집안에 있는 사진들은 어부의 기억들을 말하는 이미지들이다. 즉, 이 집은 기억의 보존의 장소와 같다. 자연에 속한 인간으로서 어부가 이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도시에서 온 이 모던한 인물들을 보고 깜짝 돌라며 그들을 다시 쳐다본다. 이 씬은 우리에게 로셀리니의 <스토롬볼리>에서 스트롬볼리의 섬사람들과 부조화를 이루던 여주인공의 모습의 씬을 떠올리게 한다. <정사>의 등장인물들은 집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섬 풍경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그들이 섬 풍경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끼게 되는 것은 바로 창문에 의해 보이는 섬 풍경의 모습을 통해서 이다. 창문이야말로 자연에 대한 문화적 틀의 상징인 것이다. 즉, 자연에서 살고 있는 어부와 달리, 모던한 인간들인 등장인물들은 세계의 대상들과 자연을 문화적 장치로서만 볼 수 있도록 잡혀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정사>의 섬 위의 집은 자연에 속해 있는 어부의 집인 동시에 문화와 자연 사이에 단절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장소가 되는 것이다.

    <솔라리스>의 섬 위의 집은 주인공인 크리스 켈빈의 어린 시절의 집으로서 나타난다. 이 집은 <정사>의 어부의 집처럼 기억의 장소이며 또한 그의 기억속의 아버지와의 만남을 만들어내는 초월적인 장소이다. 인류학적으로 말하면, 집은 자연의 힘으로부터 인간스스로를 보호하는 일종의 피난처라고 할지라도, <솔라리스>의 섬의 집은 자연에 속한 장소가 된다. 즉, 크리스 켈빈의 아버지는 집의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혹은 비)을 막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신체가 물에 젖도록 놔두어 버린다. 이런 의미 에서 타르코프스키는 말하길, “나는 무엇보다도 비는 내가 자랐던 지역의 자연적 특성이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 있다. 비, 불, 물, 눈, 이슬, 땅위에 낮게 일던 바람 등은 각각의 것들이 우리가 사는 물질적 장소의 요소들이고 우리들 삶의 진실인 것이다.”34) 물이 쏟아지는 섬 위의 집 덕분에, 타르코프스키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자연이 하나 되는 장소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의 집이 만들어진 곳은 바로 의식의 공간으로서의 섬인 것이다. 즉, <솔라리스>의 마지막 샷의 이 섬은 그의 기억의 조각인 것이며, 그의 정신 속에 떠도는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 중 하나가 섬의 형상으로 물질화 된 것이다. <솔라리스>의 바다가 인간의 뇌와 같다면, 그 위의 떠있는 이 섬의 풍경은 그 뇌가 간직하고 있는 인간의 본질로서의 기억의 시간의 세포가 되는 것이다. 즉, 안토니오니는 닫힌 공간 안에서 인간존재의 감각 속에서, 인물들 간의 거리감의 감정 속에서, 그리고 안나의 부재의 시선 속에서, 섬의 돌들의 암석적 이미지를 통해 섬의 물질성을 공간적으로 확장 했다면, 타르코프스키는 공간과 시간이 섞여 버리는 기억속의 장소들과 인물들의 샷을 통해, 섬을 정신적 이미지로서, 즉, 추상적 이미지로서 전환하고 있다. 섬의 이미지의 존재론적 본질로서의 추상성을 새롭게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13)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영화의 마지막에 영화속 어떤 인물이 클라우디아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멜로드라마가 해결책은 아니야”  14)타르코프스키는 그의 책 『봉인된 시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스토커>나 <솔라리스>에서 공상 과학적 분위기는 전혀 나에게 관심사가 아니었다.” Le Temps scellé: de l'Enfance d'Ivan au Sacrifice, traduit du russe par Anne Kichilov et Charles H. de Brantes, Editions de l'Etoile / Cahiers du cinma, Diffusion Seuil, 1989, p.182.  15)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의 인터뷰 중에서, La maladie des sentiments, Cahiers du cinéma No. 459 septembre 1992, p.54.  16)안토니오니는 말하길, “원래 항상 외부적이고 구체적인 요소가 중요하다. 그래서, <정사>를 만들 초반부에 영화의 제목은 <섬>(L'Isola)이었다.” Michelangelo Antonioni, Ecrits, Editions Images Modernes, 2003, p.123.  17)이런 면에서 <정사>는 사이코 보다는 오히려 히치콕의 <현기증>(Vertigo, 1958)에 가까운 영화가 된다. <현기증>에서 이미 죽은 그녀는 계속 남자주인공 앞에 돌아오지만 그녀는 예전의 그가 알았던 같은 그녀가 아니다. 즉, 새로 돌아온 그녀는 부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는 유령이다. 바로 그 유령의 이미지는 영화 속에서 회오리의 기하학적 형태의 모습 (영화 타이틀 시작에서의 계속 돌아가는 회오리 형태, 여주인공의 뒷머리스타일, 위에서 본 밑의 계단의 회오리 같은 모습 등등)으로 등장하여 남자주인공의 의식을 점유한다. 안토니오니는 이러한 <현기증>의 계단의 회오리 모습을 <여자의 정체성>(Identificazione di una donna, 1982)에서 반복한다. 또한, <정사>에서는, <현기증>에서처럼, 섬에서 유령이 되어버린 여주인공의 시선을 찾게 되는 것이다.  18)J. Moure, Michelangelo Antonioni, cinéaste de l’évidement, L‘Harmattan, 2001, p.36.  19)F. Maunier, “De Stromboli à l'Avventura: de l'.île de la révélation à l'.île de la disparition” in D'îles en îles, Simulacres No. 3 Eté 2000, Rouge Profond, p.51.  20)S. Bernardi, Antonioni, Personnage Paysage, PUV, 2006, p.92.  21)John R. Searle, La Redécouverte de l'esprit (1992), Paris, Gallimard, Coll. nrf essais, 1995, p.140.  22)Jean Mottet, “Le paysage, les corps, la surface” in Jean Mottet, (sous la direction de), Les paysages du cinéma, Editions Champ Vallon 1999, p.213.  23)Gilles Deleuze, Cinéma 2, L'Image-temps, Les Editions de Minuit 1985, p.16.  24)철학자 알랭 로제에 따르면, 산의 이미지는 서구에서 18세기 이전까지는 공포스런 땅이라는 부정적 이미지였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산 공포증 (orophobie) 라고 부른다. 하지만, 루소의 소설 『누벨 엘로이즈』 (La Nouvelle Héloïse)에 영향에 의해, 산은 공포스런 땅이 아니라 꽤 아름다운 풍경으로 변모하게 된다(Court trait du paysage, Editions Gallimard, 1997, p.86-98). 그러나 산의 이미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산 공포증의 이러한 경향성은 꽤 자주 영화 속에서 다시 등장하게 된다. 예를 들면 큐브릭의 <샤이닝>(Shining, 1980)에서 산과 함께 나타나는 광기의 이미지 혹은 데이빗 린치의 <트윈 픽스>(Twin Peaks, 1992)안에서 타냐토스와 도착적 성적 욕망의 이미지로서의 산의 모습 등이 나타난다. 하지만, 동시에, 18세기에 나타난 산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 또한 영화에 드러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로셀리니의 <스트롬볼리>의 화산의 주변에서 나타나는 성스러움의 경험의 이미지 등. 이러한 산에 대한 이중적 이미지가 <정사>의 마지막 샷에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5)안토니오니는 이 영화의 마지막 샷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쪽 편에는 눈 내린 하얀색의 에트나 산이 있고, 또 다른 편에서 돌 벽이 있다. 벽은 남자주인공의 자리와 일치하고, 에트나 산은 여자주인공에 의해 점유된 자리와 일치한다. 포토그램은 따라서 완벽하게 둘로 나뉘어 진다. 벽이 있는 쪽은 비관주의적인 것과 연결되고, 다른 쪽 면은 낙관적인 것과 연결 된다(Sandro Bernardi, Antonioni, Personnage paysage, op.cit., p.99에서 인용됨).” 즉, 안토니오니의 말처럼, 이 샷에는 열림으로서의 낙관주의와 닫힘으로서의 비관주의처럼, 전혀 다른 두개의 상징성이 공존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안토니오니의 이 샷은 샷의 공간을 더욱 다이나믹 하게 활용하여 사물을 구성하는 낭만주의의 그림의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지만, 한 샷 안에서 이중적 분위기를 사용한다는 면에서, 낭만주의 화가인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Le Radeau de La Méduse, 1819)과 같은 낭만주의적 아이러니의 상징성을 보여준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정사>의 마지막 샷처럼, 돛대를 축으로 완전히 두개로 나뉜다. 제리코의 이 그림 속에서, 오른쪽 편은 수평선 멀리 보이는 배를 보고 손을 흔드는 인물들의 모습은 삶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다면, 반대 왼쪽 편의 배경에서 등장하는 큰 파도와 그 파도 밑의 죽은 시체들과 절망하는 노인은 삶에 대한 허무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으므로,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공존하는 삶의 아이러니를 이 그림 안에서 동시에 표현한다. 또한 안토니오니의 영화 속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 공간인 산이 그의 말처럼, 긍정성을 표현한다면, 또 다른 낭만주의 화가인 프리드리히의 그림에서의 산의 빈번한 등장과 연결시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프리드리히에게 있어서, 산은 신과 성스러움을 만날 수 있는 긍정적인 장소였고, 신비스런 장소였다. 즉, 이 마지막 샷은 묘하게도 안토니오니와 낭만주의적 예술과 연관성을 말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더구나 만일 멜랑콜리가 안토니오니의 작품에서 중요한 주제라면, 멜랑콜리 또한 낭만주의의 중요한 주제이다. 그러나 멜랑콜리를 표현하는 안토니오니의 방식은 낭만주의의 방식과 다르다. 안토니오니 작품에서 멜랑콜리가 주로 인물이 부재한 풍경과 연결된다면, 반대로 낭만주의적 멜랑콜리는 자연의 거대함 앞에서 인간의 빈약함, 강렬한 색의 대비, 형상의 모호함 등에 의해서 표현되기 때문인 것이다.  26)이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말하길, “큐브릭 영화에는 뇌의 영화가 있다 우리는 얼마나 뇌가 미장센 되었는지를 보는 것이다”. Gilles Deleuze, Cinéma 2, op.cit., p.267.  27)Peter Sloterdijk, Ecumes, Hachette Littratures/ Maren Sell Editeurs, 2005, pp.291-292.  28)Maxime Scheinfeigel, Jean Rouch, ENRS Editions, Paris 2008, pp.164-165.  29)즉, 이 마지막 시퀀스의 처음의 샷은 이 마지막 전체 시퀀스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이 시퀀스는 겨울의 시퀀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잉여로서의 이 샷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이 샷은 크리스 켈빈의 지구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볼 수 있다. 하지만, 더 깊게 보자면, 이 시퀀스가 크리스 켈빈의 과거 기억 안에 자리잡고 있다면, 이 샷은 플래쉬 백을 역할을 하여야 하는데, 이 샷은 전혀 그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타르코프스키는 시간의 감독이다. 그는 말하길, “시간은 우리들의, 나의 실존의 조건인 것이다. 시간은 자신의 인격을 실현하기 위해 살을 가진 인간에게 필연적인 것이다. 시간과 기억은 한 동전의 앞뒷면처럼, 서로서로에게 의지해 있는 것이다” (Le Temps scellé, op.cit., p.55) 그리고 “영화에 있어서 시간은 음악에 있어서 소리처럼, 그림에 있어서 색채처럼, 기본들 중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Deleuze의 인용, Cinéma 2, op.cit., p.60). 즉, 시간의 본질로서의 인간의 기억을 사유하는 타르코프스키는 사건의 원인으로서 과거를 논리적으로 재현하는 고전적 의미의 플래쉬 백이 아니라, 이 샷을 통해서, 복잡한 시간 속에서 인간의 파편화된 기억의 이미지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퀀스에서의 이미지들이 솔라리스 바다에 의해 물질화 된 것 이라면, 오직 이 샷은 마치 순수 기억으로서 물질화되지 않는 기억의 부분의 샷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안토니오니의 <정사>에는 단 한 번도 플래쉬 백, 특히 안나에 대한 플래쉬 백이 등장하지 않는다. 즉, 영화는 계속적으로 현재의 시간에 머무르며, 안나는 과거의 여인이 아니라, 그녀의 부재의 시선 속에서 유령처럼 현재의 시간에 계속 존재한다. 이러한 과거의 시간의 배제 속에서 공간은 더욱 강조되며, 공간은 과거의 기억과 연결되기 보다는 공간은 공간 그 자체로서 존재하게 됨으로써 공간의 물질성이 더욱 강화된다. 반대로 <솔라리스>에서는 주인공인 크리스 켈빈의 기억의 샷들이 이야기의 논리적 전개와 관계없이 (즉 플래쉬 백 없이) 계속 현재의 시간에 끼어들어감으로써 공간과 시간은 섞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솔라리스> 이후 타르코프스키의 다음 영화가 어린 시절의 기억의 이미지로서만 이루어진 <거울>(the Mirror, 1974) 이란 사실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런 면에서 말하자면, 공간의 감독으로서 안토니오니가 <정사>에서 섬을 물질적인 암석적 이미지를 통해 인간과 공간의 관계의 복잡함을 확장한다면, 시간의 감독으로서 타르코르프스키는 섬의 이미지를 이러한 시간과 인간의 기억의 장소로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30)Marie-Claude Tigoulet La solitude du cosmonaute, Solaris, in Andreï Tarkovski, Etudes cinématographiques, no.135-138 p.57.  31)“Le propos d'Andreï Tarkovski”, in Le cinéma russe et soviétique, sous la direction de Jean-Loup Passek, Centre Georges Pompidou / l'Equerre, 1981, p.279.  32)G. Bachelard, La Politique de l'espace, PUF, Paris 1992, p.19.  33)p.26.  34)A. Tarkovski, Le Temps scellé, op.cit., p.194

    4. 나오는 말

    영화 속의 자연풍경은 너무나 흔하게 발견할 수 있지만, 영화 예술가의 스타일과 그 자신만이 만들어내는 독창적인 이미지들 속에서 변주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특히, 서구자연풍경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 섬의 풍경은 현대 영화 예술가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던 풍경중의 하나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다양한 시선 들 속에서 섬의 풍경은 다양하게 표현된다. 고립과 자유, 지옥과 낙원이라는 이 대비되는 닫힘과 열림이라는 섬의 이미지 속에서, 그들은 인간존재의 삶의 실존, 꿈의 이미지, 이미지의 한계를 실험하는 것이다. 안토니오니의 <정사>와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는 섬의 풍경을 영화 속에서 전적으로 담지 않으면서도, 섬의 풍경의 이미지가 주는 그 잠재적 효과를 통해, 영화전체가 섬성 (insularité, 島性)의 이미지가 가득 차게 만든다. 열림과 닫힘이라는 섬의 풍경의 변증법속에서, 이 두 감독을 통해 섬의 이미지는 또 다른 차원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와 인간 존재를 향한 영화적 시선의 시작과 끝으로서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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