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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A Study on Attentions of North Korean Defector in Films 영화가 탈북자를 다루는 시선들*
  • 비영리 CC BY-NC
ABSTRACT
A Study on Attentions of North Korean Defector in Films
KEYWORD
North Korean defectors , popular films , independent films , diaspora , national division , migrant labour , human rights in North Korea
  • 1. 갑자기 늘어난, 탈북자를 다룬 영화‘들’

    2011년 남한영화계의 주요 흐름 가운데 하나는 탈북자1)를 다룬 영화가 연이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쉽게 보이지 않지만, <두만강>(장률, 2011)을 비롯해서, <무산일기><박정범, 2011), <김정일리아>(N.C. 하이킨, 2009), <댄스 타운>(전규환, 2011)등이 연이어 개봉되었다. 이 리스트에 탈북자 출신의 김규민 감독이 북한에서 겪은 이야기를 영화화 한 <겨울 나비)(2011)를 추가하면 숫자가 더 늘어난다. 모두가 작은 영화들이지만, 그렇다고 그 의미가 결코 적은 것은 아니다. 한 해 동안 탈북자를 다룬 영화가 네 편씩이나 개봉하고, 탈북자 출신의 감독이 연출한 영화까지 개봉한 적은 결단코 없었다. 여기에 작년에 개봉해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의형제>(장훈,2010)를 살짝 얹으면 탈북자를 다룬 영화의 비중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왜, 갑자기 탈북자를 다룬 영화가 많아진 것일까? 탈북자를 다룬 최초의 영화는 아마도 2005년의 <태풍>(곽경택)이 될 것이다. 남과 북, 중국,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탈북자의 상처가 분노로 폭발하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탈북자들의 여러 사연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하지만 2005년에 시작했으니, 남한 영화사(映畵史)에서 탈북자를 다룬 영화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고, 그 종류도 많다고 할 수는 없다. 어쩌면 이제부터 시작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통일 이후에도 이어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미 많은 영화가 그런 것처럼, 탈북이 북한을 탈출해 남한에서 살아가는 것, 그래서 이주노동자로서의 차별을 넘어 안정적으로 정착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통일 이후에도, 그것이 비록 목숨을 건 탈북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우리 사회의 문제로 존재할 것이다.

    여기서 잠시 생각할 것이 있다. 영화는 사회적 무의식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영화를 만든 감독이나 그것을 즐기는 관객은 사회적 무의식이라는 자장 안에서 움직인다. 구조주의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사회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기는 어렵고, 특히 대중적 흥행을 노리는 영화는 더욱 그러하다. 때문에 영화는 아무리 허황된 것을 그리더라도 사회라는 구조 또는 그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요즘 남한 영화에서 탈북자를 그리는 것을 주의 깊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남한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 함께 살고 있지만 분명 타자인 그들을 통해 분단 상황의 고착을 넘어설 수 있는 힌트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을 반면교사로 현재의 우리 모습을 뒤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대중 문화의 정수’인 영화에서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묻는다.

    결국 탈북자를 그린 남한 영화를 분석하는 것은, 남한과 북한이라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동시에 보는 것이며, 그 양면을 넘어 하나의 동전이라는 문화적 동질성을 찾아가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탈북자를 다루는 영화가 대중 장르영화라는 틀 속에서 만들어지든, 상대적으로 제약을 덜 받는 독립영화 진영에서 만들어지든, 아니면 조선족이나, 외국인에 의해 만들어지든, 목적은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을 독재국가로 비판하는 영화조차, 넓게 보면 북한의 독재 정권이 무너져 북한이 남한과 같은 나라가 되거나 남한과 하나가 되는 것을 소원할 것이다. 물론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방법에서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탈북자를 다룬 영화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은 탈북자를 다룬 여러 영화에 나타난 양상을 통해 지금의 모순을 직시하고, 미래의 계획을 그리는 작업이 된다는 것이다.

    탈북자를 다룬 영화가 많아진 외형적인 이유는 지금 ‘탈북자 2만명 시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탈북자를 TV에서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탈북자라는 지위를 내세워 자신을 홍보하는 이들도 공중파에서 자주 접하게 된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다. 사회에서 살아가다 보면 개별적으로 탈북자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그 많은 탈북자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아마도 신자유주의 하에서 살아가기 바쁜 남한 사람들이 탈북자를 조선족이나 동남아 이주 노동자와 비슷하게 인식하고 있어 관심 대상에서 제외시켰기 때문이거나, 비슷한 말투 때문에 탈북자를 조선족으로 오해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남북 관계가 경직되든 아니든, 탈북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길 꺼려하거나, 남한 사람들이 그들의 신분을 알기를 꺼려한다는 것이다.2) 마치 <국경의 남쪽>(안판석, 2006)에서 선호(차승원 扮)가 자신을 강원도 출신이라는 속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떳떳하게 자신의 출신을 말하지 못하는 상황, 이것이 지금 탈북자들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체제에 반대해서 목숨을 걸고 탈출해 남한에서 살아가고 있는, 같은 민족인 이들이 2만 명을 넘었다는 사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들은 이제 사회 구성원의 당당한 일원이며, 어느 분야에서든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3) 물론 남한 사람들의 인식 때문에 쉽지 않지만.

    이 글에서는 2000년대 이후 남한 영화에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 탈북자를 다룬 영화의 여러 양상을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네 부류로 나눌 것이다. 네 부류는 남한에서 만들어진 대중 상업영화, 남한에서 만들어진 독립영화, 국외의 조선족이 만든 영화, 외국인이 만든 영화 등이다. 이렇게 네 부류로 구분하는 것은 동족인 남한 사람이 만든 영화에 드러난 탈북자에 대한 시선과 외국 국적이나 외국인의 영화에 드러난 탈북자에 대한 시선을 먼저 구분하고자 함이고, 다음으로 남한 영화 가운데 대중적 흥행성을 고려한 영화와, 상대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는 독립영화가 탈북자를 다루는 양상이 어떻게 다른지 분석하고자 함이며, 마지막으로 조선족과 외국인의 시각의 차이를 분석하고자 함이다. 네 구분을 토대로 이제까지 만들어진 영화를 시간 순으로 분석한 후 각각의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결국 이 글은 여러 형태의 영화에 등장한 탈북자의 양상을 고찰함으로써 사회적 무의식을 담고 있는 영화가 어떻게 그들을 대하고 있는지 분석하고, 이를 통해 지금 우리 사회를 파악하고 미래의 통일을 위한 걸음마를 준비하고자 함이다.

    1)그간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을 정의하는 용어는 여럿 있었다. 1980년대에는 ‘귀순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다가 1990년대부터 ‘탈북자’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2005년 통일부에서 탈북자가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며 ‘새로운 터전에서 삶을 시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새터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이 용어도 문제가 있다. 가령 북한을 탈출했지만, 남한이라는 새로운 터전에 정착하지 못하고 아직도 떠돌고 있는 이들을 어떻게 칭할 것인가? 2008년부터는 통일부가 ‘북한이탈주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자고 권장하지만 탈북자와 동일한 의미여서 과연 그럴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이 글에서는 가장 명확한 의미, 즉 ‘북한을 탈출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탈북자를 사용하고자 한다. 이 명칭을 사용할 때, 이 글의 논의 대상인 장률의 영화에서, 북한을 탈출했지만 아직 다른 나라에 정착하지 못한 인물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은 탈북자는 맞지만 새터민은 아닌 것이다.  2)“새터민 출신 1호 박사인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아직도 새터민은 남한 사회에서 경계대상이고 소외받는 게 현실인 것 같다”며 “공공기관이나 정부에서 먼저 이들에게 관심을 보여야 한다”고 밝“힐 정도로 남한 사람들은 탈북자를 꺼린다. 김보은, 「[한반도 리포트] 탈북자 2만명 시대… 직업교육 현주소」, ≪세계일보≫, 2011.09.20.  3)영화 <국경의 남쪽>이 북한 거리 세트를 매우 사실적으로 만들거나 북한 말을 잘 구사한 것은 이 영화에 한양대 연극영화과 출신의 탈북자 김철용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국경의 남쪽>은 평양 거리 묘사에 많은 공을 들였다. 다른 영화와 비교하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2. 탈북자를 보는 네 시선

    탈북자를 다룬 영화를 구분하고 이들을 분석하기 전에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이 있다. 탈북자들의 고통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굶주림과 독재가 존재하는 북한에서 살았던 이들이다. 자신을 검열하고 규제해야 하며 기본적인 욕구인 배고픔을 충족시키지 못한 사회에서 살았던 이들이다. 지금 남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 상상할 수 없는 상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탈북자의 고통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사선(死線)을 넘어 북한을 탈출한 후에도 중국에서 다시 사선을 넘는 시간을 견뎌야 했다. 두만강을 건너면서 자신이 보는 앞에서 가족이 죽었을 수도 있고, 중국 공안에게 가족과 형제가 잡혀 끌려갔을 수도 있다. 그렇게 끌려간 가족이 비참한 수용소에서 인간 이하의 생활을 했을 수도 있고, 끝내 총살을 당했을 수도 있다. 이 고통 또한 참으로 가혹한 것이며, 지을 수 없는 상처이다. 마지막으로 천신만고 끝에 남한으로 왔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남한이나 제3세계에 살더라도 결코 편한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이방인의 삶이나 이주민의 삶을 지속해야 한다. 북한과 너무나 다른 남한에서 그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고,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도 느껴야 한다. 하루 하루가 견디기 힘든 나날의 연속이다.

    결국 탈북자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를 느끼거나, 정체성의 혼란이나 문화적 혼란을 경험하게 되고, 또 적응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뿐 아니다. 이들은 가족은 북한에 둔 채 자신만 남한에서 편하게 살아간다는, 또는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한다.4) 밥을 먹어도 편히 한끼 먹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탈북자들의 모습이 스크린에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이제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1) 남한 장르영화의 시선-장르의 새로운 소재

    먼저 남한에서 만들어진 장르영화에 나타난 탈북자의 양상을 살펴보자. 장르영화라는 것은 특정 장르 영화를 선호하는 특정 관객을 상대로 만들어진 영화를 말한다. 이를 다르게 풀이하면, 장르영화는 거대한 자본이 들어간 영화의 특성 가운데 하나로서, 그 장르를 선호하는 이들과의 약속을 내포한다. 가령 공포영화 관객들은 영화 속에 나타난 서프라이즈(surprise), 서스펜스(suspense)를 느끼려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다. 이들은 영화 속에 이런 효과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드러나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집중한다. 그들에게는 다른 것이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장르는 관객과 제작자의 약속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탈북자를 등장시킨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장르의 컨벤션을 지속시키면서 새로운 소재로서의 눈요기에 그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니까 탈북자를 중심에 두고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고정된 장르의 틀 속에 새로운 소재로서 탈북자를 등장시킨다는 것이다. 이 선후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오히려 선후관계가 바뀌었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탈북자를 바라보는 우리 시선을 여기서 은연 중에 느낄 수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보는 영화 속에 그려진 탈북자의 모습이 오히려 남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의 발로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탈북자를 다룬 첫 영화는 <태풍>이다. 남성들의 강한 세계를 주로 다루었던 곽경택은 당시 최고의 스타 장동건과 이정재, 이미연을 내세워 멜로드라마와 스펙터클을 혼합한 ‘하이브리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의 주인공은 탈북자 씬(장동건 扮)이다. 그의 가족은 탈북해서 남한으로 오려 했지만 중국과의 외교 마찰을 우려한 남한이 거부해 북한으로 돌려보내지는 과정에서 씬이 보는 앞에서 가족이 몰살당했다. 씬은 남한에 복수를 하기 위해 동남아에서 해적질로 핵 위성유도장치를 탈취하고 여기에 체르노빌에서 밀수한 핵을 실어 남한 상공에 뿌리려 한다. 이런 사실을 안 남한 정부는 아버지가 순국한 강세종(이정재 扮) 대위를 파견해 둘의 대결이 펼쳐진다. 이 사이에 어릴 적 헤어진 누나를 찾으려는 씬의 노력이 그려지며 멜로적 정서를 자극한다. 간단한 줄거리만 보더라도 <태풍>은 <쉬리>(강제규, 1999)의 자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 게 된)다. 한반도 평화의 위협자로 탈북자를 등장시켜 남한 전체 또는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을 공포에 넣을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이 기본적으로 같고, 강력한 적대세력인 탈북자가 죽기 때문에 한반도의 평화가 유지되고 영화가 끝을 맺는다는 점에서도 같으며, 멜로적 코드와 액션 스펙터클의 요소를 섞었다는 점에서도 같다. 정말로 문제인 것은 <태풍>이 <쉬리>와 똑같은 냉전 사고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태풍>은 거기서 더 나간다. 강세종이라는, 국가주의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신념화한 인물을 가장 선한 인물로 그려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우익 이데올로기의 표본에 가깝다. <쉬리>는 남북 정상이 만나기 전인 1999년에 제작되었지만, <태풍>은 정상회담이 끝나고 남북 관계가 평화적이고 안정적이던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5년에 제작되었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에 그려진 극단적인 국가주의 행동이 관객들의 눈에 거슬렸던 것 같다. 개봉한 2005년의 시점에서 보더라도 이미 대결이 불가능한 북한이 적이 아니라 탈북자가 남한의 안위의 열쇠를 쥐고 있는 설정을 관객들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남성주의 시각의 영화를 주로 만들었던 곽경택은 탈북자 문제를 다루면서도 시류를 읽지 못해 장르의 틀 속에 이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태풍>이 개봉된 다음 해, 정통적인 멜로드라마 <국경의 남쪽>이 개봉되었다. 영화는 조선로동당 창건일에 태어나 평양에서 살면서 만수예술단 호른 연주자였던 선호(차승원 扮)의 회상 나레이션으로 진행된다. 한국전쟁 때 돌아가신 줄 알았던 할아버지가 남조선에 살고 있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비밀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발각되어 탈북해 남한에서 살아가던 그에게는 북한에서 결혼을 약속한 연화(조이진 扮)가 있었다. 그러나 북한과 연락이 쉽지 않았던 그는 연화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 그에게 잘해주는 여성(심혜진 扮)과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는데, (대부분의 멜로드라마가 그런 것처럼) 마침 연화가 탈북해 서울로 온다. 이제 안타까운 이들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국경의 남쪽>이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인 것은 남녀의 사랑이 이야기의 핵심이기 때문이고, 탈북자를 다룬 영화가 되는 것은 남녀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조건으로 분단의 지리적 여건과 현실적 상황을 영화 속에 그리기 때문이다. 멜로드라마에서 가장 가슴 아픈 상황은 두 사람이 너무도 사랑하지만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을 때이다. 그 상황을 만들기 위해 멜로드라마라는 장르는 전쟁이나 질병, 계급 등의 컨벤션을 주로 이용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분단 상황의 탈북을 이용한다. 목숨 걸고 남으로 넘어왔지만 그 남자는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한 상황,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때문에 이 영화는 분단의 아픔에 주목하거나 탈북자의 상황을 예리하게 그리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이제까지 등장한 영화 가운데 평양의 거리가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그려지거나, 아예 굶는 장면이 없는 것도, 탈북 과정의 고통이 상대적으로 덜한 것도 이 때문이다. <국경의 남쪽>은 철저하게 대중적으로 기획되어 만들어진, ‘달달한’ 멜로드라마이다.

    <국경의 남쪽>이 달달한 멜로드라마라면, <크로싱>(김태균, 2008)은 ‘쓴’ 멜로드라마이다. 차인표가 원톱으로 주연한 영화는, 제목이 의미하는 것처럼 탈북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실제 발생했던 사건을 극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2007년, 함경도 탄광마을에 살던 용수(차인표 扮)는 아내, 아들과 행복하게 살아가지만, 폐결핵에 걸린 아내의 약을 구하러 중국으로 건너가 불법 체류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남한으로 가게 된다. 가족에 대한 죄책감과 조바심으로 남한에서 악착 같이 돈을 모은 용수는 비밀스런 조직을 통해 북한의 가족 소식을 파악하지만, 이미 아내는 죽고 아들은 탈북하다가 잡혀 수용소에 있다. 북한 관리들을 돈으로 매수해, 북한으로의 강제 소환이 없는 몽골로 가지만 광활한 국경지대에서 아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죽고 만다. 줄거리만 들어도 가혹한 북한의 생활이 보이는 것 같다. <국경의 남쪽>이 남녀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크로싱>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남한에 정착해 살아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탈북해서 남한으로 넘어오는 과정에 무게를 두고 있다. 결정적으로 장르의 틀에 예민한 <국경의 남쪽>은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밟은 분위기를 유지하지만, <크로싱>은 끔찍한 북한의 굶주림과 독재 상황이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결론에서도 아들은 죽고 만다. 이런 어두운 상황을 통해 지금 북한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탈북이라는 과정이 얼마나 위험한지, 탈북 후 서울에서 생활하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죄책감을 심어주는지 마치 현미경으로 관찰하듯이 세심하게 그린다. 그러나 영화는 이렇게 되다보니 상대적으로 탈북해서 남한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경제적 고통이나 정체성의 혼란, 이에 따른 고통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대신 북한의 처참한 현실에 주목한다. 때문에 <크로싱>은, 멜로드라마의 틀 속에서 지나치게 암울한 내용을 담았기에 흥행에서도 실패했고, 북한 비판에 주안점을 두어 보수적인 시각의 영화라는 비판에서도 벗어나기 어려웠다.5) 특이하게도 이 영화는 탈북자를 그린 영화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기독교를 긍정적으로 그렸다.6)

    2011년 <고지전>으로 자신의 존재를 또 한 번 증명한 장훈 감독의 <의형제>(장훈, 2010)는 표면적으로는 <쉬리>의 전략을 따르지만, 속살은 <공동경비구역 JSA>(박찬욱, 2000)와 닮아있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평양에서 두 손을 잡은 2000년 6월이다. 북한의 특수 암살요원 ‘그림자’가 남파 간첩 송지원(강동원 扮))과 임무를 수행한다. 이를 파악하고도 사건을 막지 못한 국정원의 이한규(송강호 扮)는 파면되고, 에상치 못한 국정원의 추격 때문에 송지원도 북으로부터 의심을 사 버림 받는다. 이로부터 6년 후, 흥신소 일을 하는 이한규는 우연히 송지원을 만나 둘은 동상이몽(同床異夢)으로 함께 생활하면서 일을 하게 된다. <의형제>는 매우 복잡한 전략을 구사한다. 서울에서 총격적인 벌어지는 등 오프닝을 보면 <쉬리>의 재판(再版) 같지만, 조금만 영화가 진행되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송지원은 북에 있는 아내와 아이 때문에 자수할 수 없고, 북에서 의심해 연락이 단절됐기 때문에 간첩활동도 할 수 없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입장이다. 남한으로 귀순한 북한 고위급에게 접근해도 결론은 내려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역시 가장의 짐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한규를 이해하게 되면서 둘은 서로에게 동정적인 시선을 갖게 된다. 영화의 결말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림자가 다시 내려와 송지원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다가 송지원이 그를 사살하고 자신도 크게 다친다. 결국 송지원이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부터 영화는 갑자기 현실과 괴리되어 판타지가 된다. 엔딩은 송지원이 준 영국행티켓으로 비행기에 탑승한 이한규가 송지원의 가족을 만나는 것이다. 남의 요원과 북의 간첩이 의형제가 되는 상황으로 결론 맺지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영화는 따지지 않는다. 그림자가 죽은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송지원이 그의 가족과 함께 비행기에 오르는 것이 가능한가? 짧은 시간 동안 북에서 가족을 데려올 수도 없고 크게 다친 송지원이 그렇게 빨리 회복될 수도 없다. 더구나 그가 언제 많은 돈을 벌어 이한규에게 비행기 티켓을 끊어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왜 <의형제>는 불가능한 판타지의 결론을 맺은 것일까? 여기서 <공동경비구역 JSA>를 떠올려야 한다. <공동경비구역 JSA>처럼 이 영화도 남과 북이 친구나 형제가 되는 내용을 그리고 있지만, <공동경비구역 JSA>가 남북정상회담 직후에 개봉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주인공들이 죽는데, <의형제>는 남북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이명박 정권 시절 개봉했음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의 요원이 죽지 않고 의형제가 된다. 너무나 대조적어라 말이 되지 않는 두 상황. 아마 장훈 감독은 불가능한 현실 조건 속에서 해피엔딩을 만들기 위해 궁핍한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보인다.7)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마치 이명박 정권이 언제든지 남북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하는 것처럼.

    만드는 영화마다 논쟁을 일으켰던 김기덕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제작까지 한 <풍산개>(전재홍, 2011)8)도 탈북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다만 김기덕 식의 특이한 내용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의문의 사나이 풍산개(윤계상 扮)는 신출귀몰하는 능력으로 서울에서 평양까지 3시간만에 무엇이든 배달하는 사나이다. 북한에서 귀순한 고위층이 자신의 정부(情婦)를 데려 오라고 부탁하자 풍산개가 그 요구를 들어주는데, 휴전선을 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사랑이 싹트게 된다. 이제 질투하는 고위층 탈북자와 정부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이 가운데 위험한 일을 했던 풍산개도 남한 정보국에 잡혀 어려움을 겪게 된다. <풍산개>는 김기덕 식의 사랑이야기인데, 단지 소재를 탈북자로 정했다. 그래서 거대한 벽에 갇혀 있는 여성이 자신의 아픔을 헤아리는 남성에게 마음을 주면서 더욱 고통스런 상황에 직면한다는 김기덕의 고정 레퍼토리가 재생되는데, 단지 탈북자가 상황의 중심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인가? 남과 북의 엄정한 현실과 대결, 그 과정에서의 고통을 그리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 국정원의 특수 요원과 북한의 남판 간첩이 등장하지만 이들에게 최정예요원의 기운을 느끼기는 어렵고, 오히려 이들을 통해 남과 북의 분단 상황이 한낱 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한다. 풍산개를 통해 가난한 독재국가 북한과 인간에 대한 애정 없이 물질주의에만 빠진 남한을 모두 비판하기도 한다. 남과 북에 공히 이용만 당하고 버림을 받는 존재가 바라보는 남한과 북한은 같은 얼굴을 한 괴물이다. 탈북자로 시야를 좁히면, 이 영화는 특이하게 북한 고위급 간부의 탈북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대중적인 흥행을 고려해 만들어진 장르영화에서 탈북자는 소재적 차원에 그친다. 현실적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탈북자가 남한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등장하거나, 탈북의 고통보다는 이별의 아픔을 통해 멜로적 정서를 강하게 작동시킨다. 때로는 북한의 억압적 상황과 탈북의 고통스런 과정을 다루지만 아버지의 정(父情)을 강하게 그리거나, 남과 북의 가장이 모두 어려움에 처한 현실을 그리기도 하고, 또 때로는 괴력으로 남한과 북한을 오가는 사나이를 등장시켜 아예 두 체제를 비판한다. 결국 영화에 등장한 탈북은 탈북의 고통스런 현실과 분단의 비정함에 주목하기보다는 그런 상황을 장르적 상황 속에 담아내 흥행을 추구하려 한다. 그래서 분단의 현실이나 탈북자들의 고통스런 정착 과정을 집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다루더라도 그것은 피상적인 차원에 그치고 만다. 상업영화의 한계는 여기에 있다.

       2) 남한 독립영화의 시선-이주민의 고통스런 현실

    이제 남한 독립영화계에서 탈북자를 다루는 시각을 알아볼 차례이다. 충무로 중심의 대중 장르영화와 달리 독립영화계는 자본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감독이 하고픈 말을 직접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곳이다. 물론 독립영화계라고 마냥 편하게 자신들이 하고픈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오히려 장르영화는 투자를 받아 영화를 만들기 때문에 투자만 확정되면 그리 큰 불편을 겪지 않을 수 있지만, 독립영화는 대부분 감독이 직접 제작비를 확보해야 하는 어려운 사정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경우도 숱하게 많다. 그러나 장르영화계가 투자자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에 비해 독립영화계는 그런 간섭이 없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독립영화가 탈북자를 다루는 양상을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된다.

    독립영화계에서 장편으로 탈북자를 다룬 영화로 먼저 꼽아야 할 것은 <처음 만난 사람들>(김동현, 2007)이다. 영화는 철저하리만큼 일관된 시선으로, 탈북 이후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의 모습에 주목한다. 하나원에서 교육을 마친 진욱(박인수 扮)은 임대 아파트에 입주한 첫날, 마트에 갔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린다. 복잡한 거리와 똑같은 풍경의 아파트 때문에 자신의 집을 찾지 못한 것이다. 급하게 택시에 탔지만 헤매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택시 기사 역시 서울 생활 10년차의 탈북 여성이다. 날이 샌 뒤 가까스로 집을 찾은 진욱은 하나원 친구를 만나기 위해 부산으로 가다가 부산행 버스를 잘못 탄 베트남 출신의 이주노동자 팅윤을 만나 그의 옛 애인이 있는 부안까지 동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서서히 서로의 처지에 동정하게 된다. 그야말로 동병상련(同病相憐)인 것이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탈북자 진욱이 처음 만나는 이들 역시 이방인이다. 탈북해서 10년째 택시를 몰고 있지만 아직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사람, 옛 애인을 찾아 베트남에서 남한으로 왔지만 다시 쫓겨나야만 하는 사람이 그들이다. 북한과는 너무나 다른 남한이 그에게는 요지경이다. 도시가 너무도 복잡해 자신의 집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남한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정체성의 혼란은 먼저 내려온 탈북자도 도움을 주지 못할 정도로 심하다. 남한 사람들이 팅윤에게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을 때 진욱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와 팅윤의 처지가 같기 때문이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북조선과 베트남에서 어떻게 남한에 왔는지 서로가 궁금해 하는 것을 보면서,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후 자본주의권으로 급속하게 예편되는 과정에서 느끼는 이들의 어지러움과 고통을 읽을 수 있다. 이주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이방인이 된 탈북자. 그가 이주노동자와 함께 부안으로가 농민과 결혼한 이주노동자의 옛 애인 가족에게 맞을 때 팅윤은 “때리지 마세요. 나도 인간입니다.”라는, 유일하게 배운 한국말을 한다. 그것이 우리가 탈북자를 대하는 태도이며, 이주노동자를 대하는 태도라는 것을 반면교사를 통해 증명한다. 이렇게 탈북자는 이주노동자와 같은 처지의 하층 계급일 뿐이다.

    올해 개봉해서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가히 독립영화계의 기린아로 성장한 박정범 감독의 <무산일기>는 흔들리는 카메라 속에 담긴 어두운 남한의 모습을 직설적으로 담고 있다. 대학원 졸업 작품인 <무산일기>가 왜 이리 유명해졌는가? 죽은 탈북자 친구의 이야기를 그렸기 때문인가, 감독이 주연을 맡았기 때문인가. 아니다. 장르 영화의 틀에 안주하지 않고 묵직하게 남한의 현실을 탈북자의 시선으로 그리면서 결국 남한이나 북한이나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는 매한가지라는 사실을 너무도 노골적으로, 사실적으로 그리기 때문이다. 벽에 선전지를 붙이려고 해도 이미 이권을 장악한 조폭들이 괴롭히고, 그렇다고 탈북자 승철(박정범 扮)을 부려먹는 이들이 잘 해주는 것도 아니다. 종교도 있는 자들의 편이고, 탈북자끼리도 등쳐먹는 세상이다. 결국 승철도 친구를 배신한다. 영화에는 끝까지 해피엔딩이 없다. 엔딩에서 강아지, 버려진 것을 승철이 데리고 와 애지중지 키우고 있는 그 동병상련의 강아지가 죽은 것은 결국 승철이 죽은 것이다. 목숨 걸고 탈북했지만 시급 4천원의 신자유주의 88만원 세대의 삶, 그것이 탈북자의 모습이자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때문에 <茂山일기>가 아니라 <無産일기>가 되어 버린 현실. 이 현실을 감독은 흔들리는 핸드 헬드(hand held) 카메라로 담아내면서, 조명도 그리 신경을 쓰지 않고 세트도 신경을 쓰지 않으며, 있는 모습 그대로 거칠게 담아낸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카메라, 그 속에 담긴 모습, 그것은 승철의 마음이고 그 마음의 표현이며, 곧 불안한 우리들 모두의 마음이다. 사실, 승철은 너무도 우직한 사람이다. 너무도 착실한 사람이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남한 사회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영화에는 기독교가 등장하지만 그것은 말로만 위로하는 기독교일 뿐이다. 교인들도 이미 타락했지만 단지 마음의 위안을 위해 습관처럼 교회에 다닌다. 성가대에서 승철이 부르는 찬송가의 한 구절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라는 그 구절, 이 장면만으로도 남한의 모순과 종교의 위선, 그리고 점점 타락해가는 승철의 모습을 알 수 있다.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는 “행복해지려고 탈출했는데 행복해지지 않는 부조리함”9)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또한 감독의 말처럼) “북한에서 상영되면 체제를 유지하는 도구가 될”10) 정도로 영화는 남한 사회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댄스 타운>은 제목과 달리 춤을 소재로 한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암울한 남한의 현실을 탈북자의 시선으로 깊이 있게 지켜보는 현실 고발적 영화에 가깝다. 전규환 감독은 도시 생활의 어둡고 비정한 면을 그만의 방식으로 차분하게 그려왔는데, 이 작품에서는 서울이라는 공간이 얼마나 고통스런 공간인지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그린다. 정님(라미란 扮)은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월남한 사람이다. 그녀를 감찰하는 국정원 직원, 그녀의 눈에 들어온 임신한 여학생, 수시로 접근하는 경찰관, 이런 인물들이 하나씩 자신들의 이야기를 늘여놓으면서 정님의 삶 속에 들어온다.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님의 서울살이 스펙트럼은 조금씩 넓어지지만, 진전은 더디기만 하고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탈북자를 다룬 영화의 특정 패턴과 마찬가지로, 목숨을 걸고 남한에 왔지만 남한 역시 살기 힘들기는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그 상황을 탄탄한 내러티브로 구축하지 않고, 정님과 관계 맺는 이들의 삶을 한꺼플씩만 벗겨내 관찰하듯이 보여준다. 그 빈 이야기의 사이사이에, 화면의 사이사이에 많은 여백을 두어 관객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마치 당신이 살고 있는 서울과 정님이 살고 있는 서울을 비교하라는 듯이. <댄스 타운>에 등장하는 경찰관이 동남아 노동자들이나 탈북자나 마찬가지라는 말을 한다. 동남아 노동자들이 돈을 벌어 고향으로 부치는 것과 탈북자들이 돈을 벌여 몰래 북으로 보내는 것이 같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탈북자는 국가에서 정착금도 주고 집도 주니, 고생해서 집 한채 사기 어려운 자신들보나 낫다는 말도 한다. 이것이 탈북자를 대하는 남한 사람들의 시각이다. 그러면서 그 경찰관은 결국 정님을, 그것도 겨울 어두운 뒷골목에서 강간한다. 자신과 동무라고 여겼던 그녀를 강간한 뒤 버리고 가버린다. 영화 속에 그려진 탈북자의 눈에 비친 남한 사회에는 탈북자보다 못한 이들이 많다. 장애인과 노인들에게는 집도 구하기 어려운 곳, 그래서 자살을 기도하는 곳이 남한이다. 세세하게 관찰하고 정교하게 짜인 이야기의 힘이 울림 있게 다가가 진중하고 어둡고, 그래서 무서운 이 영화는 지금 우리 삶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또 다른 거울이다.

    <처음 만난 사람들>, <무산일기>, <댄스타운> 같은 저예산 독립영화에서는 탈북자가 주인공이지만 그들의 고통보다는 그들을 고통 속에 처하게 만든 자본주의 남한 사회의 냉철함에 주목한다. 이 영화들은 철저하게 탈북 이후 남한에서의 삶을 이야기한다. 탈북자는 이미 탈북했기 때문에 북한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고, 남한에서 생존해야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탈북자는 남한에서 이주민으로, 이주노동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넘어왔지만, 결국 동남아 노동자와 마찬가지의 처지이다. 탈북자들이 목숨을 걸고 넘어와 일하고 있다면, 동남아 노동자나 조선족은 불법체류하면서 고통 속에서 일하고 있다. 최소한 신분의 안전 면에서는 그들과 비교할 수 없지만 실상은 그리 다르지 않다. 열악한 여건 속에서 차별 받으며 노동을 팔아먹고 사는 삶. 그런 열악한 상황에 독립영화는 주목한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은 독립영화인이 자신들의 프레임으로 바라본 남한 사회의 모습과 일치할지도 모른다. 일을 하지만 먹고 살기 어려운 이국 같은 풍경. 어쩌면 이렇게도 닮았을까?

       3) 조선족의 시선-디아스포라

    탈북자를 다룬 영화는 남한 출신의 감독이 만든 것이 전부는 아니다. 국외의 감독들도 이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다. 이제 그 영화들을 살펴보려 한다. 탈북자 대부분이 중국의 조선족 마을을 거치기 때문에 조선족 출신의 감독이 이 민감한 소재를 다루지 않기는 어렵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족에게 북한은 고향 땅이고, 북한 사람은 고향사람이기 때문이다. 불과 몇 세대 전, 부모는 그곳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왔으며, 지금도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중국 공안의 감시 속에서도 같은 민족이라는 미묘한 동질성이 작동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조선족 출신의 장률 감독은 <경계>(2006), <두만강>(2011)을 통해 디아스포라 감독인 그의 입장에서 또 다른 디아스포라가 된 탈북자를 그린다. 여기서 장률 감독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필요할 것 같다. 그의 할아버지는 경북 사람인데, 일제 강점기 중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해방이 된 이후에도 고국으로 오지 않고 그곳에 머물렀다. 어릴 적부터 그는 조선족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그냥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과 달랐어요. 우리는 한족 마을에 살았는데 집에서는 어머니랑 누나들이 조선말을 했고. 누나들도 몇 년이 지나니 중국말과 조선말을 섞어서 하고요. 부모님도 그걸 꼭 강조했고, 부모님의 습관은 나도 모르게 닮아 갔습니다. 특히 음식! 음식이 제일 영향을 준 것 같아요.”11)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디아스포라에 대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의 영화는 주로 뿌리 뽑힌 인물들을 다룬다. 무엇보다 장률은 뿌리 뽑힌 삶을 살고 있는 여성의 삶에 주목한다.12) 그것은 민족적, 계급적, 성적 모순이라는 삼중 모순13)을 지닌 존재로서의 여성의 삶을 그리려는 그의 인생과 영화에 대한 태도에서 나온다.

    <경계>는 배경이 몽골이다. 중국과 몽골의 국경 시대인 사막에서 살고 있는 항가이라는 사내가 등장한다. 그의 부인과 아이는 도시로 나가 홀로 있는 그에게 탈북자 최순희(서정 扮)와 그의 창호가 찾아온다. 잠시 동안 이들은 의사 가족을 형성해 살아가지만 결국 그들은 떠난다. 이들이 탈북자라는 것을 안 항가이는 이들을 보호해주면 함께 살아가지만, 가족을 이룰 수는 없다. 탈북 도중 순희의 남편은 총에 맞아 죽었고, 항상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남한으로 가려고 한다. 그녀에게 떠돌아다니는 게르의 유목 생활은 갈구의 대상이 아니다. 항가이와 함께 악착 같이 사막에 나무를 심는 것도 그녀의 정착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정착하기 위해 그녀는 떠나야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아이의 손을 잡고 몽골의 광활한 초원과 막막한 사막을 건너간다. 그것이 그녀와 아들의 운명이다. <크로싱>에서 준이가 죽었던 그곳에서 그들은 그래도 살아서 끊임없이 경계를 떠돌고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유랑하는 탈북자의 이미지가 이 영화에는 세밀한 미장센 속에 섬세하게 펼쳐진다.

    자신의 고향인 연변을 영화에서 그리지 않았던 장률이 최근에 만든 영화가 <두만강>이다. 이미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연변의 고향을 그리고 있지만, 그리 평온한 마을은 아니다. 젊은이들이 돈을 벌러 도시와 남한으로 떠난 연변의 마을은 노인과 아이들만 남아있다. 그래서 마을은 쓸쓸하게 죽어있다. 이런 곳에도 먹을 것을 찾아 강을 건너오는 이들이 있다. 12살 창호는 할아버지, 누이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이다. 어느 날 북에서 건너온 정진에게 밥을 주고 쌀을 주면서 친구가 된다. 정진도 마을 대항 축구 시합에서 창호의 마을 대표로 출전하기로 한다. 아이들의 이런 우정과는 반대로 마을에서는 탈북자들의 도둑질 때문에 그들을 경계하게 되는데, 결정적으로 창호의 누이 순희가 탈북자에게 강간을 당하면서 그들을 경계하게 된다. 같은 뿌리의 조상을 두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언어도 같지만, 자신들도 강 건너편에서 와 모진 고생을 하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또 다시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이들이 강을 건너온다. 그리고 그것이 폐해가 되고 폭력으로 다가온다. 이제 이주민에서 정착민이 된 그들이 새로 오는 이주민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뿌리를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황. 그 과정을 장률은 차분하게 지켜본다. 그래도 장률은 같은 민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공안에게 정진이 잡히는 것을 보고 창호가 죽음으로 막아서는 모습과, 이장의 늙은 모친이 상상으로나마 강을 건너 고향인 북으로 가는 장면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조선족이면서 중국 내에서는 소수 민족의 비애를 지닌 장률은 그 비애의 근원으로 가서 기꺼이 손을 내민다. 이렇게 장률은 자신의 영화에서, 자신이 뿌리 뽑힌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 그려진 인물들은 탈북자라 할지라도 그리 처지가 다르지 않으며, 때문에 조선족에게 피해를 주어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14)

    장률은 조선족 출신의 감독답게 끈기 있는 시선으로 탈북자를 그린다. 쉽게 절망하거나 쉽게 미워하지 않고 고통스런 상황 속에 처한 탈북자의 현실과 그들을 바라보는 인물의 모습을 영화 속에 곱게 포개듯이 쌓아 놓는다. 이때 그는 디아스포라인 자신의 상황을 대변하듯 그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의 시선을 보낸다.

       4) 외국인의 시선-미국인의 북한 비판

    조선족이 탈북자를 그린 영화가 있는 반면, 미국의 백인 여성 감독이 탈북자의 현실을 취재한 다큐도 있다. <김정일리아>는 기아, 폭행, 수용소생활, 자유로의 갈망 등의 이유로 탈북한 12사람의 인터뷰로 구성된 다큐이다. 다큐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절규처럼 “내 가족 내 피붙이를 다 죽인 그 원한에 사무친 김정일 정권, 난 정말 눈물 없인 살 수 없고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라는 말로 영화의 내용을 요약할 수 있다. 때문에 <김정일리아>는 ‘정치 영화’를 ‘정치적인’ 방법으로 그리는 영화가 된다. 김일성과 그의 아들 김정일이 지배하는 독재 국가 북한의 모습을 탈북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고발한다. 수용소에서의 비참한 생활, 모든 예술이 정치적으로 선전선동의 수단이 된 사회, 이동의 자유가 없는 사회, 굶주림이 가득한 사회, 이런 곳을 목숨을 걸고 탈출한 이들은 왜 북한이 사람이 살 곳이 못 되는지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차분히 토로한다. 감독은 인터뷰 사이사이에 북한군복을 입은 여성의 춤을 반복적으로 넣기도 하고, 탈북 상황을 재연하기도 하면서, 그 의미를 극대화한다. 어떻게 보더라도 감독의 목적은 명확하다. 탈북자 한 명이 이야기한 것처럼, 김정일 정권이 붕괴되어 김정일을 세계인권재판소에 세우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영화의 제목인 ‘김정일리아’는 김정일을 기념하기 위해 북에서 만든 꽃인데, 북한이 평화ㆍ아름다움ㆍ정의ㆍ지혜를 상징한다고 주장하지만, 감독은 “그런 단어들이 이런 끔찍한 곳에 쓰이”는 “아이러니”15)를 보여주기 위해 제목으로 정했다. 흥미로운 것은 탈북자들 다룬 많은 영화는 탈북한 후 남한이나 제3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고난의 과정을 다루고 있는 데 비해, 이 영화는 철저하게 그들이 떠나온 북한의 실상을 고발하는 것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라는 사실성을 담보로. 여기서 이 영화의 장점과 단점이 동시에 드러난다. 장점이라면 북한의 실상을 고발함으로써 북한 인권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고, 단점이라면 그런 고발을 할 뿐이지 실제적으로 북한의 정권 붕괴나 이후 제 문제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남한 사람 가운데 북한의 인권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쉽게 거론하지 못하는 것은 지금의 국제 정세에서 김정일 정권 이후의 역학적 관계가 너무도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적이 분명해 다소 선동적인 측면도 있고, 뉴스릴 등 다양한 방법 대신 증언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인상도 던져준다”16)라는 비판을 다소 보수적인 언론으로부터도 들어야 했다.

    미국 출신의 다큐 감독 하이킨은 철저하리 만큼 냉정하게 북한의 인권을 고발한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존하면서 북한이 왜 문제가 많은 독재국가인지, 마치 자신이 원한에 사무친 듯이 그려나간다. 이렇게 보면, 장률의 영화와 하이킨의 영화는 확연히 구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든 목적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4)이지영, 「영화 ‘크로싱’을 통해 살펴본 탈북자들에 대한 심리적 이해」, ≪2008 한국심리학회 연차학술발표대회 논문집≫, 300쪽.  5)진보적인 논객조차 미선이 효순이의 죽음처럼 영화 속 주인공의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해내리, 「영화....‘크로싱’에 대해 생각한다-[논객 발언대]‘크로싱’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진보진영에 촉구한다」, ≪신문고≫2008.06.18.  6)영화의 첫 부분부터 성경이 나오고, 사람이 죽는 것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이 있으며, 죽어서 그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독교의 교리를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거론한다. 이는 감독 김태균의 개인적인 신앙이 적용한 결과이기도 하고, 영화에서처럼 실제 북한 인권 단체 가운데 기독교 단체가 많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독립영화계에서는 기독교의 모순과 허위에 주목하는 데 비해, 이 영화는 기독교에 긍정적이라는 점, 남한의 기독교가 북한을 가장 적대시하는 세력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매우 특이한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탈북자와 기독교는 깊은 관련을 맺고있지만, 그 관계는 패턴처럼 정해져 있다. “탈북자 2만여 명 중 상당수가 교회에 연결돼 있지만 이들은 봉사나 선교의 대상이거나 따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에게 탈북자는 선교의 대상이자 그들이 기독교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탈북자와 기독교의 근원적 거리가 발생한다. 김성원, 「[희망목회 현장-서울 평화나루교회] 탈북자 품고 통일 후 북한교회 모델 준비」, ≪국민일보≫ 2011.09.21.  7)<의형제>와 <공동경비구역 JSA>의 비교에 대해서는 김경욱, 「<의형제>의 환상, <경계도시 2>의 실재, 어느 쪽이 우리를 즐겁게 하는가?」(, ≪영상예술연구≫ Vol.17, 2010)를 참조하면 된다.  8)<풍산개>가 대중 장르영화인지, 독립영화인지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예산의 규모나 배급의 규모를 보면 독립영화에 가깝지만 스타가 출연하고 나름 인지도 있는 제작사에서 만든 영화라는 점에서는 대중 장르영화로 구분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영화는 충무로 저예산영화인 셈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탈북자를 다루는 방식은 상업영화의 전략과도 다르고 독립영화의 전략과도 다르다. 오히려 제작자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김기덕의 색채가 농후한 작가영화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다.  9)기선민, 「[영화 리뷰] ‘무산일기’」, ≪중앙일보≫. 2011.04.09.  10)임정식, 「[임정식의 시네마 오디세이] 탈북자의 생생한 남한 생존기 ‘무산일기’」, ≪스포츠조선≫. 2011.03.25.  11)정성일,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바다출판사, 2010, 316쪽.  12)이 글에서 텍스트로 삼은 <경계>와 <두만강> 외에도 <망종>(2005)의 조선족, <중경>(2007)의 학원 선생, <이리>(2007)의 정신지체아 등이 모두 여성이며, 뿌리 뽑힌 삶을 살고 있다. 그의 데뷔작 <당시>(2004) 역시 도시에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남자의 무기력한 삶을 다루고 있다. 이렇게 보면 장률의 영화는 전부 뿌리 뽑힌 삶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3)오경희, 「민족과 젠더의 경계에 선 여성의 이산-강경애의 『소금』과 허련순의 『바람꽃』 비교」, ≪아시아여성연구≫ 제46권 1호, 2007, 185쪽.  14)장률 영화의 디아스포라와 여성의 삶에 대한 분석은 강성률, 「떠도는 인생, 지켜보는 카메라 : 장률 영화의 디아스포라」, ≪현대영화연구≫ 11호, 2011,을 참조했다.  15)변희원, 「있는 그대로 담았더니 비현실적이라고…그게 北의 현실」, ≪조선일보≫, 2011.06.27.  16)송광호, 「<새영화> 냉혹한 北의 현실..‘김정일리아’」, ≪연합뉴스≫, 2011.06.09,

    3. 탈북 문제의 근원은 한국 근현대사

    지금까지 가장 민감한 소재 가운데 하나인 탈북자를 다룬 영화를 분석해 보았다. 남한에서 만들어진 대중 상업영화, 남한에서 만들어진 독립영화, 조선족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 외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 등으로 구분했다. 대중영화에 등장한 탈북은 탈북의 고통스런 현실과 분단의 비정함에 주목하기보다는 그런 상황을 장르적 상황 속에 담아내 흥행을 추구하려 해, 분단의 현실이나 탈북자들의 고통스런 정착 과정을 다루지는 않았다. 독립영화에서는 탈북과정의 어려움이나 북한 생활의 고통보다는 자본주의 남한 사회의 냉철함에 주목했다. 조선족 장률은 디아스포라인 자신의 상황을 대변하듯 탈북자에 대한 따뜻한 애정의 시선을 보내는 데 반해, 미국 출신의 다큐 감독 하이킨은 철저하리 만큼 냉정하게 북한의 인권을 고발한다.

    이렇게 분류하고 설명해 놓고 보면 한 가지 특징을 알 수 있다. 네부류 모두 탈북자를 그리는 데 일정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소재로서 탈북자를 다루기 때문에 장르영화는 탈북자의 아픔과 북한의 현실, 남한 정착의 어려움을 그리고 있지만, 각 영화는 각 상황만 그릴 뿐이다. 가령 <크로싱>은 북한의 어려움을, <국경의 남쪽>은 남한 생활의 괴로움을, <의형제>는 가장의 아픔을 그리는 식이다. 심지어 <태풍>은 탈북자를 위험한 세력으로 그린다. 상업영화계는 왜 이렇게 단편적인 시선으로 탈북 문제를 그리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요구하는 탈북자의 이미지를 이미 정해놓고 장르의 틀 속에 넣었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탈북자를 그린 영화에 대한 비판은 독립영화 진영도 마찬가지다. 독립영화는 모든 영화가 북한의 현실은 외면한 채 남한에서 정착하기 어려운 삶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왜 탈북자가 남한으로 내려왔는지, 내려오면서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 그 가운데 생긴 트라우마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그리지 않는다. 어떻게보면 외면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렇게 됨으로써 독립영화는 통일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지 현재의 생존에만 급급한 상황이다. 미국인 하이킨은 북한을 악으로 규정한 뒤 탈북자의 입을 통해 체제의 냉혹성을 강하게 비판할 뿐이다. 그녀에게 북한은 무너져야할 나라이고, 김정일은 국제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아야 할 독재자이다. 어쩌면 가장 쉬운 방법으로 가장 편하게 다큐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장률은<경계>에서는 만주를 떠도는 모자(母子)의 아픔에만 주목하다가, 자신의 고향인 연변으로 카메라를 돌린 뒤에야 아이들과 노파의 시선을 통해 마을의 부랑자인 탈북자를 그린다.

    여기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왜 탈북자를 다룬 많은 영화들은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영화 내적인 한계일까, 영화 외적인 한계일까? 탈북 문제를 제대로 그리지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탈북이라는 소재에 있다. 탈북자를 다룬 영화는 2005년에야 등장했고, 탈북자도 1980년대에서야 그 존재를 알 수 있었지만, 탈북자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면 분단의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실, 탈북 문제는 한국 근현대사의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다. 탈북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려면, 인민을 굶주림으로 몰고 간 북한의 독재 정권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살펴봐야 하는데, 그 정권은 분단과 한국전쟁 때문에 가능했다는 인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분단과 전쟁의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일차적으로는 식민과 외세의 개입이라는 문제와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탈북 문제는 이런 복잡한 상황을 알아야만 해결할 수 있고, 이 해결의 기본은 분단의 극복이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단지 북한의 독재 정권 때문에 탈북 문제가 발생했다고, 그래서 북한 정권만 무너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며 근시안적으로 파악하면 안 된다.

    <태풍>은 이런 상황을 모두 무시한 채 단지 탈북자가 한반도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그리고, <크로싱>은 북한의 독재와 굶주림만 재현하려고 하며, 독립영화는 남한에서의 정착에만 초점을 맞추고, 하이킨은 북한 독재만 고발한다. 분명 북한의 독재가 가능한 이유가 있었고, 지금 그 독재가 흔들리는 이유가 있다. 중요하게도 장률의 <두만강>은 그 부분을 이야기한다. 강을 건너온 탈북자가 김정일 뉴스가 나올 때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듯이 순희를 강간하는 것은 북한이라는 지금의 상황, 지금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위대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고 강간하는 인민의 나라, 결국 김정일은 더 이상 위대한 지도가가 아닌 것이다. 100년 전 강을 건너 중국에서 살던 이들은 그 오랜 시간을 연변에서 살았지만, 고향인 북한을 그리워하지만, 지금 북한은 어떤 희망도 없는 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세대인 아이들은 북한의 굶주린 아이들이 공안에 잡혀가지 않도록 목숨을 던지고, 노파는 환상이나마 다리를 걸어 천천히 북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지금 아이들의 부모는 남한으로 돈을 벌러 나가 있다. 그 돈으로 탈북자에게 밥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통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조선족이 100년 전에 어렵게 넘어왔듯이 지금도 넘어오고 있는 탈북자를, 그들이 비록 피해를 주지만, 남한에서 벌어온 돈으로 따뜻하게 안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장률은 남한과 북한, 연변의 조선족을 모두 아우르는 큰 영화를 만들고 있다. 다시 말해, 장률의 영화는 탈북자가 발생한 근원적인 상황, 분단의 근원으로 돌아가 지금 상황의 탈북자를 바라보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깊고 넓다. 아마 그가 조선족이기 때문에, 자신의 아픔과 고통에 탈북자의 아픔과 고통을 쌓았기때문에 영화로 체화된 것이리라.

    당연한 말이지만, 탈북 문제는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시선에서 접근해야 한다. 한반도에 평화가 오고 남북이 하나가 될 때 기본적으로는 탈북 문제가 해결된다. 디아스포라 역시 평화가 오고 통일이 되었을 때 그 해법을 모색할 수 있다. 분단된 상황에서 디아스포라의 해법은 그만큼 요원하다. 물론 흡수 통일이나 강제적 통일이 되면, 탈북은 국제 문제가 아니라 ‘지역 문제’로 다시 등장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때문에 영화에서 좀 더 큰 시각에서 탈북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단지 소재적 차원으로 소모하고, 이주노동자의 현실로 그리고, 북한 정권을 비판만 하고 있기에 탈북 문제는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하다.

    아직 탈북자를 다룬 영화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탈북자를 다룬 영화가 만들어진 지 얼마되지 않았고, 그 숫자도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탈북자를 다룬 영화가 최근에 많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그 중요성이 점점 강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영화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 연구에서는 탈북자를 다룬 영화의 유형과 각 영화의 특징들, 한계, 그리고 개선 방안 등을 분석했다. 본격적인 연구라고 하기에는 미흡하다. 이 연구를 바탕으로 좀 더 깊은 연구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것만으로도 본 연구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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