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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구원의 자궁에 대한 환상성 The Fantasy about Womb of Salvation
  • 비영리 CC BY-NC
ABSTRACT
구원의 자궁에 대한 환상성

As in the film Samaritan Girl, Pieta illustrates women as the agent of salvation. Kim Ki-duk does not believe that humans can be saved by a religion. In the film, Gang-do ends up in a buddhist temple wandering around to find his mom, and encounters a monk on a wheelchair. However, the ‘crippled Buddhism’ fails to see the world beyond its stone wall. Was the director then aiming for a Christian salvation as many critics have mentioned? He certainly was not.

Capitalism has made Gang-do a cold-hearted devil who is severely deprived of love since he has never been loved. He starts to recover a human side after he experiences a maternal love. Gang-do is a person who wishes he could go back to his mother's womb. He attempts to go inside his mother's womb to confirm if she is his real mother. After the mother kills herself, Gang-do digs her grave and lies down crouching like a fetus next to her and her real son. His desire to go back to the womb is an expression of his desire to be born again. This is in line with what Jacques Lacan said about how all human desire comes down to the desire to be saved by going back to the mother's womb.

Another character in the film that reconfirms the message that salvation can only come from women is the truck-driving lady. She is willing to sell her body, in other words, her womb, to stop the loan sharks from crippling her husband. She does not abandon her husband even after he is crippled and takes to the road driving her truck to feed her family. It is an illustration of a woman as an agent of salvation. That is why Gang-do crawls under the lady's truck after losing his mother; He wants to cleanse his sin by doing so.

However, such attempt fails. The failure was hinted in an earlier scene in which Gang-do tries to rape his mother in an attempt to go back to her womb but fails. Most sinners in Kim Ki-duk films seek for atonement in the poorest, most brutal way. However, atonement itself cannot bring self-salvation. Gang-do ties himself to the bottom of the truck of the lady whose life he mercilessly ruined, so he can pay for his sin and earn salvation. This may be his attempt to offer the lady an opportunity of revenge and to cleanse his sin. Through such act of atonement, he wishes to be saved and born again. However, the truck continues on its journey only leaving a trail of blood.

Salvation is a gift that only those who are forgiven can enjoy. One can only be saved by god if he is forgiven by the victim of his wrongdoing. Gang-do can not be forgiven by the lady by tying himself under the truck. Nor is that the salvation by god. Imagine how the lady would feel when she gets off the truck and finds out the bloody death of Gang-do. She would be horrified once again by the cruel choice of Gang-do to pay for his sin. The director chose such dreadful ending to highlight the message that capitalism ultimately is a merciless ride leaving a trail of blood, and that humans cannot be saved by any act.

KEYWORD
Kim Ki-duk , Pieta , Capitalism , Atonement , Mercy , Fantasy , Salvation , motherhood
  • 1. 잔혹 상상력

    예술가의 상상력은 근본적으로 불온하다. 시대의 보편적 가치에 순종하지 않고 자꾸 불화를 일으키며 역행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감독 김기덕은 시대와의 불화가 가장 많은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다. 2013년 지금까지 그가 만든 18개의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충격과 전율을 불러일으키며 찬반양론이 대립각을 세웠다. 작품이 대중 앞에 공개되었음에도 날카로운 각이 세워졌다는 것은 보편적 공감을 얻는 데 실패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만큼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불온하고 불화스럽고 불편했던 것이다.

    김기덕은 모두가 피해가는 그 진실을 찾기 위해 초지일관 세상과 싸우며 비타협적이었다. 김기덕의 영화는 상당히 거북하다. 형용사 ‘거북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상태가 썩 좋지 않아 답답하고 편치 않다’이다. 대중들이 그의 작품을 거북하다고 외면할수록, 진실을 직시하라며 더 불편한 작품을 만들었다. 대중의 보편적 공감을 차단한 불편함의 정체는 대부분 표현의 잔혹성일 것이다. <섬>(2000)에서 회를 반쯤 뜬 물고기를 다시 놓아주는 장면이나 낚싯바늘을 삼키는 장면, <피에타>(2012)에서 신체포기각서를 쓰도록 강요하고 강제로 손발을 절단하는 장면 같은 것들이 부지기수다. 또한 여성을 극단적으로 혐오 하며 묘사하는 가학적인 이미지들이 잔혹성을 배가시킨다. 아이를 버리는 엄마나 성적 집착과 욕정에 사로잡히는 소녀나, 아들의 자위를 도와주는 어머니의 모습 같은 장면들이 허다하다. 또 다른 불편은 우리가 상식이라 부르는 보편적 질서를 위반하는 데 따른 정서적 거부 반응에서 비롯된다. <악어>(1996)와 <파란대문>(1998)에서 여자들은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 남자에게 복수 대신에 용서와 자비를 베푼다. 심지어 <나쁜 남자>(2002)에서는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창녀로 만들고, 여자는 그 남자를 용서한다. 그러한 파격적인 설정이 관객들의 정서를 불편하게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보다도 더 중요한 불편의 정체는 그 잔혹하고 혐오스런 이미지들이 역설적이게도 매우 현실적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토록 외면하며 부정하려고 애썼던 불편한 진실들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며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김기덕은 국내의 악평과 흥행실패와는 달리 세계 3대 국제영화제인 베를린, 베니스, 칸에 가장 많이 초청되고, 장편 영화로 수상을 한 유일한 한국 감독이다. 외국에서의 극찬과 수상실적들이 혼란을 주며 우리를 더욱 불편하게 했다. <피에타>가 그 절정을 이룬 대표적인 예이다.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의 황금사자상 수상이 증명하듯 외국에서는 현존 최고의 작가주의 감독 가운데 한 명으로 인정받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비교적 소수 마니아 감독으로서만 평가 절하되는 것이 현실이다. <빈집>(2004)의 경우 베를린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두고 해외 35개국에서 개봉되었지만, 국내 실적은 전국 합계 스크린 수 60개, 누적관객 수 71.559명에 그쳤다.1)

    유럽 관객들에게 김기덕은 언제나 새로움을 던져주는 ‘나쁜 남자’ 다. 영화문법이나 구원의 방식이 특이하기 때문이다. <피에타>는 김기덕 영화에서 탐색해 온 세계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김기덕의 작품 세계는 인간의 원초적 폭력성에 대한 집요한 탐색과 그 세상을 정면으로 돌파해도 극복할 수 없다는 절망적인 인간의 비애로 압축된다. 지옥처럼 잔혹하고 정글처럼 난폭한 이 세상을 견뎌내야만 하는 삶의 근본적 모순과 아이러니. 이것이 바로 김기덕이 말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몇 해 전 아르헨티나의 영화평론가 마르타 쿠를랏(Marta Merajver-Kurlat) 과의 인터뷰에서 “검은 색과 흰 색은 같은 것이다.”라고 김기덕은 말했다. 김기덕은 선과 악, 순진과 타락이 공존하는 상황을 보여주고 결국 그것은 둘 사이의 경계와 모순, 간극을 넘어 수평적 경지로 나아간다는 것을 증명해 내려고 애쓴다. 이원론적 세계관을 넘어서려는 그의 의지는 “오랜 세월 무형의 형태들의 일부를 소위 악이라 설정하고 그들을 피해 극복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것은 알고 보면 지속적인 악이 아님을 깨달았고 나의 모습 속에 존재하는 것을 발견했다.”2)라는 문장으로 직접 표명되기도 한다.

    영화 <나쁜 남자>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한기와 선화는, 재회 후 트럭을 개조해 침대를 만들고 또다시 매춘의 길로 떠난다. 끝까지 철저히 인간적인 양심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는 ‘나쁜 영화’로 끝나며, 한기 역시 끝까지 ‘나쁜 남자’로 남는다. 사랑하는 여자를 창녀로 만들고, 창녀가 그 남자를 용서한다는 파격적인 설정에 대한 뜨거운 논란은 계속 되었다.3) 도시 안에서 아무리 올바르게 살려고 경계해도 나도 모르게 나쁜 인간으로 살아가는 나쁜 남자- 그는 한 여자의 일생을 불행으로 바꾼다. 김기덕은 그러한 삶이 우리의 운명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세계에서 인간의 폭력성과 종교적 구원이 두 가지 중요한 주제인 것은 분명하다. <피에타>는 그의 어떤 영화보다도더 종교적 질문에 닿아 있다. 김기덕은 종교를 통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지 않는다. 여성이 구원의 주체로 등장하는 영화 <사마리아>와 마찬가지로 <피에타>에서도 종교가 아닌 ‘여성’을 구원의 주체로 인식한다. 모성을 획득한 강도는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변한다. 강도를 참회하게 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 ‘모성’인 것이다. 강도는 자신이 저지른 악행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자신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엄마를 납치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그를 찾아 나선다.

    그런데 그를 찾아 나선 목적은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다. 강도는 그들을 만나면서 상대방의 고통에 공감하기 시작하고 자비를 바라며 구원을 갈구한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피에타>가 거래하는 것은 ‘엄마’라는 자리를 놓고 자본과 벌이는 기괴하고 슬픈 부등가 교환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4) 시간을 역순행하며, 자신이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을 하나씩 찾아가 피해자들로 하여금 분노할 기회를 주고, 그들의 분노를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다. 강도가 ‘악마’를 벗고 ‘속죄’의 순례를 떠나는 것은 ‘모성’만이 구원의 가능성을 가진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동안 김기덕의 영화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부패를 밑바닥까지 주시하면서 우리가 공범임을 자각할 것을 요구해 왔다면, <피에타>는 거기서 자비와 구원의 문제로까지 한 단계 더 나아갔다는 점에서 김기덕 영화의 주제가 확장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자기구원은 ‘용서 받은 자’만이 얻을 수 있다. 가해자는 ‘속죄’를 통해서 가해자에게 ‘용서’받아야만 신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강도는 목숨을 바쳐서 속죄하고자 한다. 강도가 트럭 밑으로 기어들어가서 자신의 목숨을 재물로 바치는 속죄 방식은 피해자에게 결코 용서 받을 수 없으며, 피해자의 용서를 받지 못한 ‘속죄’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강도가 만들어 낸 유혈의 질주를 보여주며 ‘자비를 얻을 수 있겠는가, 구원에 이를 수 있겠는가.’를 우리에게 묻는 영화가 <피에타>이다.

    정리하자면, 자본주의 사회는 결국 무자비한 유혈의 질주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하에서종교는 인간의 욕망을 채워줄 수 없으며, 자비를 베풀 수도 없기에, 인간은 가장 완벽한 유토피아인 모성, 즉 자궁 회기를 통해서 구원받고자 한다. 그러나 강도의 자궁회기는 실패한다. 속죄를 통해 구원 받고자 하지만 그것 또한 실패한다. 결국 자궁회귀의 욕망과 속죄를 통해 구원받고자 하는 욕망 모두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자본주의 하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무자비함을 목도하게 하는 영화가 바로 <피에타>이다.

    사실 김기덕이 말하고자 하는 ‘불편한 진실’은 이미 우리 삶의 모든 부위에 포진하고 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을 두려워할 뿐이다. 김기덕의 영화가 불편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 체제 아래에서 약자들은 끝내 무자비함에 희생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불편한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무엇을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김기덕은 이토록 지독한 결말을 택했다. 우리는 확인하기 두렵더라도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야만 한다고 김기덕은 끝내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본 논문은 영화 <피에타>의 분석을 통해 이러한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목적이 있다.

    1)영화진흥위원회 홈페이지 (http://www.kofic.or.kr) KOBIS (발권)통계. 통계기준일 : 2013.05.20  2)김기덕, 「김기덕이 김기덕을 쓰다」, 정성일 편, 『김기덕-야생 혹은 속죄양』, 행복한 책읽기, 2003, 70쪽.  3)김기덕에 대한 논쟁 중 <나쁜 남자>에 대한 논쟁을 다룬 논문과 평론이 가장 많다. 김호영, 「김기덕의 <나쁜 남자>와 이미지-텍스트로서의 영화」, 『역사와 사회』, 3권29집, 2002. 백상빈·정과리,<국문학자와 정신과 의사가 <나쁜 남자를 논하다>, ≪씨네 21≫, 338호, 2002, 2. 주유신, 「한국영화의 성적 재현에 대한 연구」, 중앙대 박사학위 논문, 2003, 68-79쪽. 주유신, 「김기덕의 영화세계,‘사마리아인의 선행’으로 위장한 ‘성적 테러리즘’」, 『영상예술연구』, 4호, 2004. 김소연, 「김기덕 혹은 (불)가능한 사랑의 연대기-욕망과 사랑에 대한 라캉의 관점을 통한 접근」, 『영상예술학회』 10호, 2010.  4)정성일, <[정성일의 영화로 세상읽기]다시 말하기 시작한‘피에타’>, 경향신문, 2012, 9 월 23일.

    2. 본론

       1) 모성의 부재에서 획득으로

    <피에타>의 배경은 프레스공장과 주물공장, 철공소 등이 밀집한 청계천 4가 주변이다. 원금의 10배를 고리대로 받는, 악랄한 대금업자의 하수인인 주인공 강도- 그는 빚을 갚지 못한 자들을 강제로 상해보험에 가입시키고, 프레스에 손을 절단시킨다. 그리고 수령한 보험금으로 원금과 이자를 변제하는 무자비한 악마와 같다. 김기덕은 현대사회의 정신적 고통만 보여주지 않고 육체적 고통도 대등하게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관객들의 시각적 고통과 적당히 타협해 잔혹하거나 불편한 장면들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피에타>에서는 채무자의 손을 강제로 프레스에 집어넣거나, 고층건물에서 추락시켜 신체불구자로 만들어버린다. 자본주의 사회체제 아래서 인간이 겪는 불가피한 육체적 고통을 관객들도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관객을 길들이려고 한다.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갖는 대신 남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애원하며, 몸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자비를 간구하는 여자가 있다. 강도는 여자의 브레지어로 폭행을 가하고 여자의 남편을 향해 브레지어를 집어 던진다. 그 후에 남편의 오른손 또한 강제로 자르자 그녀가 오열하면서 “쓰레기 새끼! 천벌을 받을 거야!”라고 저주를 퍼붓는다. 그러자 강도가 남편의 말을 빗대어 “남의 돈을 빌려 써놓고 ‘설마 어떻게 하겠어’하는 니들이 쓰레기지.”라고 비난한다. <나쁜 남자>의 김기덕이라면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을 폭력성 짙은 장면을 <피에타>에서는 관객의 상상에 맡기며 다음 장면으로 건너가는 부분이 많다. 이점도 이전의 영화와 차별성을 갖는 부분이다. 강도는 그야말로 자본주의가 낳은 악마다.

    그런데 강도가 악마로 변한 원인을 자본주의 시스템 하나로만 설명하려면 다소 무리가 따른다. 예컨대 강도의 방에 걸려 있는 여성의 초상화와 거기에 꽂힌 칼, 그 같은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강도에게 여성은 경멸과 증오의 대상이다. 본능적으로 칼을 꽂고 싶은 폭력의 대상인 것이다. <그림 1> 그러므로 강도는 여성에게 성적 욕망도 느끼지 못한다.

    젊은 남자의 왕성한 성욕도 몽정을 통해서만 해소된다. 또 여자가 자신의 몸을 가지는 대신 남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옷을 벗었을 때, 강도가 쓰레기 줍듯 브레지어를 주워서 여자를 때리는 부분도 마찬가지다. 여자는 그에게 주물공장에 흩어져 있는 공기구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공기구는 공장에서는 생산적 도구이지만 강도의 손에서는 폭력의 도구다. 김기덕 영화에서 보듯 폭력은 욕망을 매개로 또다른 폭력을 부른다. 그 중심에 욕망이 거세되었거나 남자들의 폭력에 노출된 여자들이 존재한다.

    국내 첫 시사회에서의 인터뷰에서 김기덕은, “기계 산업의 근간이자 자본주의가 흘러들어간 청계천을 배경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있어서 우리는 공범이며, 신의 자비를 기다려야 하는 존재임을 영화를 통해 그리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돈 때문에 자살한 남자에게 다가가 “죽으면 끝이야?”라고 짜증을 내는 강도를 통해서 청계천엔 부채와 죽음만이 남아 있음을 우리는 직시하게 된다. 또한 가짜엄마 미선의 입을 빌려 자본주의의 무자비함을 간명하게 정리한다. “돈은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지.” 김기덕은 화폐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제도 하에서는, 인간은 없고 악마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강도를 통해 보여준다.

       2) 모성의 부재에서 모성의 획득으로

    어느 날, ‘엄마’라고 자처하는 한 중년의 여자가 찾아오지만, 강도는 실성한 여자 취급을 하며 거부한다. 하지만 여자는 ‘내가 너를 버려서 미안하다’며 강도에게 자비를 호소하면서, 부재했던 엄마의 자리로 진입하기 위한 끈질긴 노력을 한다. ‘진짜 엄마’라면 이걸 먹어 보라고, 강도가 그의 다리에서 도려내어 들이미는 인육(점)을 받아먹고, 자신이 나온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가겠다는 강도를 밀쳐내지 못한 채 오열한다. 엄마로 인정받기 위한 모든 관문을 통과한 그녀를 강도는 마침내 ‘진짜 엄마’로 받아들인다.

    영화 <빈집>에서 보여주었듯, 김기덕의 영화에서 가족을 형성하고자 하는 이들은 밥을 짓고 함께 먹으며 청소를 한다. 온기 없는 서늘한 집에 훈훈한 기운을 불어넣는 것이다. 엄마는 따뜻한 밥상을 차리고, 스웨터를 짠다. 강도와 엄마는 우스꽝스러운 안경을 쓰고, 마치 꿈속을 헤매듯 시내를 구경하러 다닌다. 엄마 옆에 누워 자려다가 거부당한 강도가 “내가 뭘 잘못했어?”라고 말하며 슬퍼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서 완벽한 모자관계가 형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제 강도는 엄마 없이는 살 수 없는 어린 아이가 되었다. 엄마가 다시 사라질까봐 두려워하며, “이제 다시 혼자가 되면 못 살 것 같아”라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이제껏 강도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일 수 있었던 잔인함의 근원은 모성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성을 획득한 강도는 순식간에 온순한 어린아이로 변한다. 악마가 온순한 아들로 변하는 과정은 결핍이 채워진 순간부터 비약적으로 진행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존재인 ‘엄마’- 그러나 엄마는 가짜다.

    그녀가 ‘가짜엄마’일 것이라는 암시는 여러 번 등장한다. 순간순간 강도를 외면하는 섬뜩한 눈빛과, 엄마에게 받은 것이므로 강도가 먹지 못하고 어항 속에 넣어 기르는 장어를 무자비하게 토막 질 할 때의 차가운 눈빛, 그리고 강도가 외출한 후 혼자 식탁에 앉자 태연하게 그 장어를 씹어 먹는 모습, 짜던 스웨터를 강도가 자기 것인 줄 알자 신경질적으로 빼앗는 손길을 보며 우리는 그녀가 가짜엄마일 것임을 예상하게 된다. 또한 강도가 “하고 싶은 거 없어? 죽이고 싶은 사람은?”이라고 물었을 때, 강도를 쏘아보는 매서운 그녀의 눈빛을 통해 앞으로 펼쳐질 무서운 반전을 직감하게 된다.

    그런데 모성결핍이 채워지는 시간이 억지스러울 만큼 너무 빠르게 진행된다. 그것은 아마도 미선이 통과의례를 무난히 치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강도의 극심한 모성결핍이 순식간에 채워지고 착한 어린아이가 되는 것은 다소 현실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우스꽝스러운 안경을 쓰고 시내를 구경 다니는 부분이 마치 강도가 꾼 꿈속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강도가 자기 환상에 빠져서 꿈을 꾸는 듯한 체험을 하고 있음을 관객들에게 제시하기 위한 기제인 것이다.

       3) 자비는 없다

    어쨌든 가짜 엄마 미선은 자신이 짠 시나리오대로 강도의 엄마가 되는데 성공했고, 강도는 엄마를 얻음으로써 결핍을 채웠다. 바로 그 순간, 엄마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존재가 갑자기 사라진 자리에서 그는 엄청난 공포와 고통을 느낀다. 엄마는 ‘진짜 아들’상구의 생일날, 자신이 만든 스웨터를 들고 강도 때문에, 돈 때문에 자살한 아들의 공장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오열한다. 그때부터 엄마의 복수가 시작되는 것이다. 강도는 자신이 무자비하게 고통을 가한 채무자들 중 한 사람이 엄마를 납치해 복수하는 것이라고 믿고, 그들을 하나씩 찾아 나선다. 그리고 엄마는 죄가 없으니 살려달라며 자비를 호소한다.

    하지만 강도가 채무자의 어머니로부터 빼앗아 온 토끼가 살기 위해 강도의 집을 탈출하다가 차에 치어 죽는 모습을 감독은 이미 보여주었다. 자비는 없고 무자비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영화는 이미 암시했다. 자비와 무자비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돈과 죽음의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다. 가해자인 강도가 엄마를 빼앗긴 피해자로 전락한 순간, 이영화의 알레고리가 ‘뫼비우스의 띠’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직감할수 있다. 피해자인 가짜 엄마의 복수가 윤곽이 드러나면서 극의 흐름이 빨라지며 긴장감은 높아진다. 그녀의 복수가 성공하려면 강도에게 ‘가족을 잃은 고통’을 똑같이 되돌려주어야만 한다.

    미선의 내면 심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으니, 너는 사랑하는 엄마를 잃어야 한다. 하지만 너에게는 엄마가 없으니, 내가 너에게 엄마를 주겠다. 그 후에 엄마가 자살하는 것을 너는 지켜보아야 한다. 너는 그 고통이 얼마나 잔인한 형벌인가를 이제부터 온몸으로 겪어야 하는 것이다.’

    강도의 모성결핍을 정확히 파악해 내고 그 결핍을 온전히 채워주었기 때문에 미선의 복수는 성공할 확률이 매우 높다. 예전의 김기덕이 라면 ‘복수’에만 초점을 맞춰 영화의 서사를 전개해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피에타>의 전개방식은 상당히 다르다.

    악마 강도는 엄마를 납치했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이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나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을 확인하고 자비를 바라며 구원을 갈구한다. 시간을 역순행하며, 자신이 악행을 저지른 사람 들을 하나씩 찾아가 피해자들로 하여금 분노할 기회를 주고, 그들의 분노를 자신이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다. 그동안 김기덕의 영화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부패를 밑바닥까지 주시하면서 우리가 공범임을 자각할 것을 요구해 왔다면, 이번 영화는 거기서 자비와 구원의 문제로까지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이전의 영화와 비교할 때 두드러진 이러한 차이점과 더불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것이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 결과 <피에타>는 전국 합계 스크린 수 326개, 누적 관객수 603.238명을 기록할 수 있었다.6)

    하지만 ‘복수’를 목표로 강도에게 접근한 미선의 계획은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미선은 생모로 위장하는 ‘속임수’의 단계에서는 성공하지만, ‘복수 실행’의 단계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다. 미선은 강도와 함께 지내면서 복수의 대상인 그에게 연민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강도가 무자비하게 폭력을 가해서 다리를 못 쓰게 된 남자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미선의 목숨은 위기에 처한다. 그 순간, 강도는 목숨 바쳐서 엄마를 보호한다. 이 때 미선은 처음으로 강도를 안아 준다. 그 후 강도가 몽정을 하는 장면에서 미선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강도에게 연민을 느끼고, 그의 자위행위를 도와준다. 자신의 성욕을 몽정을 통해서 해소할 수밖에 없는 강도의 결핍을 목도한 순간, 복수를 해야 할 대상에게 연민의 감정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묻은 강도의 정액을 보며 미선은 서글프게 운다.

    장면이 바뀌면 미선이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그 정액을 신경질적으로 씻어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넋 나간 사람처럼 바라본다. 분열된 자아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복수를 향해 매진해야 할 자신의 감정이 강도에 대한 연민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가장 완벽한 복수를 위해서 어머니가 되어주기로 한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미선은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데 일부 실패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계획을 실천한다. 강도가 보는 앞에서 투신하는 것이다. 그녀도 예상치 못한 결과로 강도에게 모성을 느끼지만,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목도하는 고통을 강도가 경험하게 하고자 자살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나 강도에 대한 감정은 미선의 투신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그 장면은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데 균열을 일으키기도 한다. 미선이 건물에서 추락하기 직전, 자살한 자기 아들 상구를 향해 “근데 왜 이렇게 슬프니. 상구야, 미안해. 이럴 마음이 아니었는데⋯⋯. 놈도 불쌍해. 강도 불쌍해.”라고 흐느끼면서 독백조로 말하는 부분이다. 이 대사는 강도에게 자비를 베풀고자 하는 미선의 심리가 직설적으로 드러나며, 영화를 신파극으로 만들 여지가 있다. 하지만, ‘결국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는 우리 모두가 피해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 된 구성요소로 보인다.7)

    또한 미선은 자신의 죽음이 강도에게 미칠 결과를 예측하는 데도 실패했다. 왜냐하면 강도는 실종된 엄마를 찾아 나선 후 자기가 손발을 잘라 불구자가 된 사람들의 고통을 순례하면서, 자신의 악행을 자각해버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선의 투신자살 이후, 강도는 모든 것이 가짜 엄마가 꾸며낸 복수극임을 알게 되지만, 배신감에 분노하거나 고통 속으로 추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강도는 엄마가 부탁한 자리에 땅을 파고, 자신이 자살을 강요했던 엄마의 진짜 아들과 엄마 옆에 태아처럼 웅크리고 눕는다. 가장 평화로운 표정으로 말이다. 미선의 죽음은, 강도가 악마의 모습을 벗고 거듭 태어나게 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은 샘이다. 그리고 진짜 아들이 입고 있던, 엄마가 짠 스웨터를 벗겨서 자신이 입는다. 이 것은 엄마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상징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그 무덤에 나무를 심고 물을 준다. 세 사람 모두 생명의 구원을 얻고 부활하기를 꿈꾼다.

    자본주의 제도 아래에서 돈 없는 자가 자비를 꿈꾸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다. 누구도 자비를 베풀 수 없는 쇠사슬 구조 안에 우리는 이미 ‘감금’되었다. 엄마의 등장 이후 강도의 눈빛에서 악마가 사라진다. 돈을 받기 위해 채무자를 찾아 간 자리에서, 곧 아빠가 될 것이라며 기쁨에 들떠 있는 그의 모습을 강도는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가 태어날 아이를 위해 돈이 필요하니, 자기 손가락을 잘라줄 것을 원할 때 유독 강도의 눈빛이 흔들린다. “넌 엄마 없어?”라고 묻는 그의 말에 강도는 보험서류를 내려놓고 자리를 뜬다. 자비를 베풀고자 하는 것이 다. 하지만 돈이 필요한 그는 스스로 손가락을 프레스기에 밀어 넣는다. 자비를 베풀고 싶을지라도, 자본주의 시스템의 약자일 수밖에 없는 우리들은, 자비를 베풀 권리조차 없음을 강조하는 중요한 장면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자비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4) 구원의 자궁에 대한 환상성

    김기덕의 작품세계에서 인간의 폭력성과 종교적 구원이 두 가지 중요한 주제인 것은 분명하다. 겉으로는 <피에타>가 처녀작인 <악어>(1996)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이나 <사마리아>(2004)보다도 더 종교적 질문에 닿아 있다. 폭력과 생존과 죽음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받는 관객들로서는 충분히 당황하고도 남는다. 김기덕 만의 미묘한 이중성과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또 피해서는 안 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들이다. 그것은 제목 때문에 더욱 하중을 받는다. 실제로 김기덕은 <피에타> 제작보고회에서 “무게가 있는 만만치 않은 제목이다. 많은 후보제목 중에서 최종적으로 이걸 결정한 이유는 결국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의미가 중요했기 때문이다.”라고 제목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김기덕의 영화에서는 예수와 부처 등의 종교적 이미지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불교적 이미지들이 많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대표적이다. 봄은 유년기, 여름은 청년기, 가을은 장년기, 겨울은 노년기, 또 새로운 봄은 다음세대의 유년기다. 이 같은 흔한 비유가 새로울 수 있었던 것은 불교의 윤회와 업을 결합해 형상화시켰기 때문이다. 가을이 되자 이미 성인인 된 소년은 아내를 살해하고 수배자가 되어 돌아온다.

    스승은 제자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바닥에 ‘반야심경’을 적어 조각하게 하고 마침내 그를 체포하러 온 경찰과 함께 다시 절을 떠난다. 겨울이 되어 감옥에서 출옥한 제자가 다시 돌아와 불상을 안고 돌을 메고 힘겹게 산을 오른다. 어릴 때 물고기와 개구리와 뱀을 돌로 치며 장난했던 자신의 업보를 오체투지와 같은 고행으로 묵묵히 씻어내는 것이다. 고행 그 자체가 자기구원의 은유이며 그 다음은 다시 봄이 와 유년기가 시작된다. 그럴수록 노승의 “욕망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살의를 품게 한다.”라는 말이 더욱 귀를 울린다.

    여성이 구원의 주체로 등장하는 영화 <사마리아>는 스토리의 나열 보다도 은유와 비유로 풀어가는 매우 시적인 작품이다. 인도의 바수밀다라는 창녀 얘기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이는 이 영화는 단순히 원조 교제하는 여고생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그 창녀와 잠만 자고 나면 모든 남자들이 독실한 불교신자로 변한다고 한다. 선악의 경계도 없고 옳고 그름의 객관적인 가치판단 기준도 없고 용서와 책임의 구분도 없다. 감정대로 행동하고 죽이기도 하지만 죄책감은 인간에 따라 다 다르다.

    김기덕은 항상 인간의 사악함에 주목한다. 원조교제 후 죽은 재영이가 남자들로부터 받았던 돈을 여진이가 대신 차례로 돌며 돌려주자, 남자들은 오히려 평안을 얻는다. 잠자리 이후 남자들을 독실한 불교신자로 만든 인도의 바수밀다처럼 여진 또한 관계한 남자들을 차례로 정화시켜 나간다.

    여진이라는 이 어린 ‘여성’을 구원의 주체로 삼듯 <피에타>에서도 마찬가지다. 김기덕은 종교를 통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지 않는다. 엄마를 찾아 헤매다가 우연히 들른 절에서 강도는 휠체어에 앉은 스님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미 ‘불구로 변한 불교’는 담장 밖의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한다. 한 번만 저 담장 밖의 세상을 보고 싶다는 스님의 원을 풀어 주는 것은 오히려 죄인의 업보를 쌓은 강도다. 강도가 휠체어를 번쩍 들어 올리자 스님은 비로소 담장 너머의 세상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김기덕은 많은 평론가들이 거론했던 기독교적 구원을 꿈 꾼 것인가.

    자본주의가 낳은 악마 강도는 사랑을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애정결핍의 응결체다. 그런 강도가 사람의 체온을 되찾으며 악마에서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은 모성, 즉 엄마의 사랑을 체험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강도는 엄마의 자궁 속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자이다. 미선이 진짜 엄마인가를 확인하려고 시도할 때도 엄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려고 애쓴다. 또 엄마가 자살한 뒤에도 땅을 파고 엄마와 그녀의 진짜 아들 옆에 태아처럼 웅크리고 눕는다. <그림 2>

    그런 행위를 통해 엄마의 자궁 속으로 회귀함으로써 거듭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은 <피에타> 전반에 표출되어 있다. 미선이 진짜 아들 상구에게 짜 입힌 스웨터를 벗겨서 강도 자신이 입고, 엄마와 상구를 묻은 자리에 나무를 심고 물을 주는 모습을 통해서 강도 스스로는 엄마의 진짜 아들로 거듭났다고 믿는다.

    <피에타>에는 자궁에 대한 환상성이 매우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인간은 집단 무의식의 원형으로 회귀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지녔다고 말했다.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식으로 말하면, 가장 편한 상태인 엄마 뱃속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모성회귀본능의 한 형태라 할 수 있겠다. ‘무한-결 핍’, ‘텅 빈 곳’에 주목하던 라캉(Jaques Lacan, 1901-1981)이 후기에 했던 말을 빌리자면, 상처와 환상을 가로지르는 ‘증환’과도 연관된다.8) 라캉의 눈을 빌려 강도를 보자면, 자신이 가진 결핍을 채우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강도가 꿈꾸는 환상- 그것은 자궁회기를 통해 구원 받고자 하는 강도의 욕망인 것이다. 강도의 자궁회기 욕망은 모성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에게 가장 완벽한 유토피아는 엄마의 자궁이며, 자궁으로의 회기를 통해서 구원받고자 한다.

    구원이 주체가 ‘여성’밖에 없음을 한 번 더 확인시켜 주는 인물이 있다. 바로 트럭을 운전하는 여자다. 남편을 위해 강도에게 몸, 즉 자궁을 재물로 바쳐서라도 남편의 사지 절단을 막으려는 여자, 병신이 된 남편을 버리지 않고 생계를 이끌어 나가는 여자, 불구가 된 남편이 욕설을 퍼 부어도 그를 버리지 않는 여자, 날이 밝으면 남편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 먹이고 아이를 품에 안는 엄마처럼 그를 안아주고 일용할 양식을 마련하기 위해 길을 나서는 여자의 모습에 주목하자. 자본주의가 낳은 악마에 의해 불구가 된 남자를 ‘구원’한 이 여자야 말로 속죄하는 강도를 구원해 줄 가능성을 지닌, 구원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림 3> 그래서 엄마를 잃은 강도는 그 여자와 한 몸인, 목숨과 같은 생계수단인 트럭 밑으로 기어들어 간다. 마치 여성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듯 어두운 트럭 밑으로 기어 들어가서‘속죄’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성경은 여자의 자궁을 하나님의 자비를 묘사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하나님을 예찬할 때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은 자궁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모성이 우리에게 베푸는 자비로움을 모두가 공감하기 때문이다. ‘자비’의 동의어로 ‘긍휼’이라는 단어가 있다. 성경에는 특히 ‘긍휼’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온다. 이 ‘긍휼’은 영어로 컴패션(Compassion)인데 ‘긍휼, 자비, 불쌍히 여기다, 가엽게 여기다’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긍휼’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어 사전에서 찾으면 ‘라하밈’ (ra'ha'mim)인데, 이것은 ‘자궁’(womb)이라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예찬할 때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은 자궁과 같다”고 말하는 것 또한 모성이 우리에게 베푸는 자비로움과 편안함 때문이다. 그러한 모성, 자궁의 자비로움을 가졌기에 예수도 병든 자와 함께하고 고치고 인류의 대속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여자의 자궁을 하나님의 긍휼(compassion)을 묘사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구약성서 이사야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사야 49장은 바벨론에 나라를 빼앗긴 이스라엘 사람들이 절망에 빠진 채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살던 시절의 이야기를 전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이해시키기 위해 어머니의 긍휼을 예로 들어 말씀하신다. 어머니는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없으며, 제 자궁에서 나온 아들을 긍휼히 여길 수밖에 없다.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난 절대로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너의 이름을 나의 육체, 즉 손바닥에 새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너와 나는 이제 하나이기 때문에 곤경에 처한 너에 대해 내가 긍휼을 베풀 것임을 믿으라는 메시지이다. 하나님을 남성으로만 보는 사람들에겐 생소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표현할 때, 이처럼 자신을 여성의 이미지로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김기덕은 총회신학교 신학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한 경력이 있다. 자비로운 하나님의 자궁과 같은 안식처가될 수 있는 ‘여성’을 구원의 주체로 인식하는 데 있어서 김기덕이 가진 성서에 대한 지식은 자연스럽게 영화 전반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5) 그러나 구원은 없다

    김기덕의 영화에 나오는 죄인들은 가장 열악한 곳에서 가장 참혹한 방식으로 속죄한다. 김기덕은 이전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참회하는 강도의 모습을 통해 속죄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묻는다.

    신약성서 누가복음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함께 못 박힌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누가복음 23:42)라고 참회하는 모습은 <피에타>의 주인공 강도의 모습과 유사하다. 그러나 대속(代贖)이 곧 자기구원은 아니다.

    강도는 속죄를 통해 구원을 얻고자 예전에 가장 무자비하게 고통을 준 부부의 집을 찾아간다. 이른 새벽, 비정한 자본주의에 의해 불구가 된 남편에게 아내는 아침상을 차려준다. 일 나가는 아내의 품에 외팔이 남편은 고요히 얼굴을 묻는다. 그리고 자신들을 처참하게 굴복시킨 돈을 벌기 위해 트럭에 올라 새벽길을 달리는 여자- 영화 속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평온한 표정을 그 여인을 통해 만난다. 무자비한 고통 속에서 걸어 나온, 다시 일상의 행복을 예감케 하는 여자의 평온한 표정이다. 하지만 그 여인의 트럭 밑에서는 유혈의 질주가 이어지고 있다.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주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주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 노래가 울려 퍼지는 새벽을 보여준다. 여자가 강도에게 복수하고 싶어 했던 방식대로, 강도는 쇠사슬을 목에 감고 여자의 트럭 밑으로 기어들어 간다. <그림 4> 쇠사슬을 목에 감아 트럭에 묶어서 질질 끌고 다니며 죽이고 싶다고 여자가 말한 것은 강도의 무자비함에 대한 분노를 언어로 표출한 피 끓는 절규였다. 하지만 그것은 자본주의가 낳은 악마 강도에 분노를 표출한 것일 뿐,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악함은 여자에게도 우리에게도 없다. 영화는 끝까지 무자비함만을 보여준다.

    트럭에서 내린 뒤 혈흔이 낭자한 강도의 죽음을 마주할 여자의 심정에 감정을 이입해보자. 여자는 그 무자비하고 자기중심적인 강도의 속죄방식을 눈으로 확인하고 경악할 것이다.9) 강도는 참회의 속죄를 통해 구원을 얻고자 했지만, 강도의 속죄 행위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속죄란, 피해자가 가해자의 속죄 행위를 통해 상처 치유의 가능성이 있을 때에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철저히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하여 그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피해자의 입장에 서지 않고 가해자가 일방적으로 선택한 속죄방식은 가해자의 욕망 표출, 욕망의 배설일 뿐이다. ‘용서 받고 싶은 자의 자기중심적 욕망 표출’일 뿐, 용서와 구원 그 어느 것에도 이르지 못한다. 부적절한 속죄 방식을 택하여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할 때, 그것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2차 폭력을 가하는 것과 같다. 피해자에게 진정한 용서를 빌기 위해서는 가해자 본인 위주의 속죄 방식이 아닌, 피해자의 치유를 위한 속죄 방식을 택해야 한다.

    강도가 택한 속죄방식은 피해자에게 가한 1차 폭력보다 더 큰 폭력을 가한 것이다. 그 행위는 피해자를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것은 물론, 피해자를 가해자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여자는 자신의 트럭 밑에서 유혈의 질주가 이어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평온한 표정으로 운전대에 앉아 있다. 하지만 트럭에서 내렸을 때 그 상황을 목도한다면, 과연 강도의 죽음을 통해서 과거에 겪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위안을 얻을 수 있겠는가. 강도의 죽음에 있어서 의도치 않은 가해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더 혹독한 고통 속으로 추락할 것이다. 이것은 강도가 여자에게 가한 1차 폭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자비한 폭력을 가한 것과 같다.

    <피에타>에 대한 대부분의 평론들이 강도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에 비유한다. “강도의 죽음은 미선이 반복했던 예수의 죽음을 다시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가장 악마적인 피를 제 몸에 모두 묻힌 채 이루어진 대속(代贖)의 죽음이기도 할 것이다.”10) 라고 강도의 죽음을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강도가 택한 폭력적인 속죄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를 간과한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철저한 자기희생이자 모두의 구원을 위한 대속 행위였다. 강도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에 비유하는 것은 강도가 저지른 2차 폭력에 대한 논의가 부재한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속죄방식을 택한 것은 영화 <피에타>의 한계인가.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는 결국 무자비한 유혈의 질주일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또한 아무리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외칠지라도 약자들은 끝끝내 자본주의의 무자비함에 희생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본주의가 낳은 악마 강도 또한 그 무엇을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김기덕은 이토록 지독한 결말을 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트기 전, 어두운 도로를 달리는 트럭 밑에서 흘러나오는 강도의 피. 자본주의 대로를 붉게 물들이는 그 잔인한 죽음의 의식을 우리는 직부감(直俯瞰)의 카메라 앵글, 곧 ‘신의 위치’에서 고통스럽게 내려다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3. 피할 수 없는 피에타

    “검은 색과 흰 색은 같은 것이다.”라는 마치 선문답 같은 김기덕의 선언은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화살과 같은 화두와 다름없다. 그 화두를 붙잡고 씨름한다면 “김기덕의 영화는 욕망이 어떻게 사랑을 품고 있는지, 왜 궁극에는 흑백이 동색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도정인지”11) 충분히 풀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계는 대칭으로 이루어져 있어 검은 색을 알고자 한다면 흰 색을 알아야 하고 흰 색을 알고자 한다면 검은 색을 알아야 한다. 결국 그것은 둘 사이의 경계와 모순, 간극을 넘어 수평적 경지로 나아간다.

    자기구원은 ‘용서 받은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 가해자는 ‘속죄’를 통해서 피해자에게 ‘용서’받아야만 신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강도가 트럭 밑으로 들어간 속죄방식은 결코 용서 받을 수 없으며, 피해자의 용서를 받지 못한 ‘속죄’는 신의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강도는 목숨을 바쳐서 속죄하고자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강도가 만들어 낸 유혈의 질주를 보여주며‘이제 강도는 신의 용서를 받을 수 있겠는가. 끝내 구원에 이를 수 있겠는가.’를 묻는 영화가 <피에타>이다.

    <피에타>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자본주는 무자비한 유혈의 질주일 수밖에 없고, 자본주의 하에서 종교는 인간의 욕망을 채워줄 수도 없으며 자비를 베풀 수도 없기에, 인간은 가장 완벽한 유토피아인 자궁으로의 회기를 통해서 구원받고자 한다. 그러나 자궁회귀의 욕망과 속죄를 통해 구원받고자 하는 욕망 모두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사회인 자본주의 하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김기덕이 던지는 ‘불편한 진실’의 실체를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단지 그것의 잔인한 실체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을 두려워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 사회 체제 아래에서 약자들은 무자비함에 희생될 수밖에 없다. 또한 그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구원 받을 길도 없다. 비록 확인하기가 끔찍한 ‘불편한 진실’일지라도 우리는 외면하지 말고 마주해야만 한다. 이것이 김기덕이 <피에타>를 통해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다.

    5)씨네21 취재팀, <김기덕을 말하다>, ≪씨네21≫ 872호, 2012, 10.  6)영화진흥위원회 홈페이지 (http://www.kofic.or.kr) KOBIS (발권)통계. 통계기준일 : 2013.05.20. 김기덕의 영화 중에서 합계 스크린 수와 누적 관객 수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한 영화가 현재 까지는 <피에타>이다.  7)본인이 2012년 11월에 문학계간지에 발표한 영화<피에타> 비평문에서는 이 부분을 다르게 해석한 바 있다. ‘이 영화에는 인물에 대한 연민의 감정으로 자본주의의 폭력을 무마해 버리는, 주제 전달에 실패한 장면도 없지 않다. 엄마가 건물에서 추락사하기 직전에, 자살한 아들에게 “상구야, 강도도 너무 불쌍하다”라고 독백조로 말하는 부분을 보자. 이 장면은 영화를 ‘우리모두 약자이고, 불쌍한 존재’라는 신파극으로 만들어 버린 다. 이 대사는 삭제했어야 김기덕의 주제 전달에 방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박상미, <박상미 문화비평- 김기덕의 피에타, 자비는 없다>, ≪월간 우리시≫ 293호, 2012, 11)그러나 이후에 김기덕 <피에타>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면서, 이 대사는 영화를 신파극 으로 만들 여지가 없지 않지만, ‘결국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는 우리 모두 피해자’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 된 구성요소로 보게 되었음을 밝힌다.  8)김응교, 『문학과 숨은 신』, 새물결 플러스, 2012, 358쪽 재인용.  9)신약성서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예물을 재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태복음 5:23-24절) 예수는 분명 원망을 품고 있는 이웃과 먼저 화해할 것을 설파하고 있다. 원망을 품고 있는 이웃과 화해한 자의 예물을 신은 받아들일 것이며, 구원은 그 다음 문제인 것이다.  10)신형철,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그녀는 복수를 했는데 그는 구원을 얻었네>, ≪씨네21≫ 872호, 2012, 10.  11)김소연, 「김기덕 혹은 (불)가능한 사랑의 연대기-욕망과 사랑에 대한 라캉의 관점을 통한 접근」, 『영상예술학회』 10호, 2010, 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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