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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필름 느와르(film noir)의 역사적 특수성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Historical Distinctiveness of Film Noir
  • 비영리 CC BY-NC
ABSTRACT
필름 느와르(film noir)의 역사적 특수성에 관한 연구*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plore various historical and social background of film noir occurred in the United States in 1940s and to explore what historical events had directly and indirectly influenced its birth. The side effects of Volstead Act has made aware of the existence of unreasonable and absurd reality due to illegality and criminality, and the economic downturn and chaos of the Great Depression occurred before and after the 1930 have serious threatened the traditional American values and identity, and the mitigation of film censorship on sex and violence following the Second World War with the effect of narrative structure and character of hard-boiled fiction, impact of themes and styles, and a single unified mechanism of historical flow gave birth to the film noir. The film noir has reflected the ever increasing murky worldview and cultural attitudes on the screen before and after the great history called the Second World War. The public has recognized the immorality and contradiction and absurdity of reality through film noir and within it experienced the catharsis of escapism and vicarious satisfaction. In conclusion, with the accumulation and association of characteristics of film noir and the historic and social distinctiveness which becomes its background, it has played a hidden role of film by creating a style of film aesthetics of new realism called the American expressionist. It is because the film is the projection of life and history and the film noir also cannot escape from its principles.

KEYWORD
필름느와르의 역사적 특수성 , 금주법 , 대공황 , 2차 세계대전 , 영화검열 , 하드보일드 소설 , 미국식 표현주의 , 미국적 가치와 정체성
  • 1. 서론

    필름느와르(film noir)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할리우드에서 1940년대를 통해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영화를 일컫는 용어다. 그 등장의 배경이나 스타일에서 드러나는 특성들이 이를 하나의 장르로 구분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란을 일으킬 정도로 특이하다. 그래서 이제는 그 누구도 필름 느와르를 정의하려 들지 않는다. 장르인지, 스타일인지, 분위기이지 또는 하나의 현상인지 운동이었는지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다. 실제로는 그 용어가 발생한 이래 정체성을 밝히려는 시도는 계속 반복적으로 연구돼왔으나, 놀랍게도 필름느와르를 정의하면 할수록 그것을 반박하는 논리도 더 늘어났고, 정교하게 다듬으면 다듬을수록 결과는 더 모호해진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필름 느와르는 확연히 뭐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영화를 보면 그것만의 공통된 특성 즉, 묵시적으로 동의 할 수 있는 일련의 작품군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는 필름 느와르가 어떤 장르보다도 작품의 주제와 스타일을 포함한 영화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다양한 정체성의 혼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필름 느와르는 ‘느와르noir’라는 단어에서 드러나듯이 순수한 미국 용어가 아닌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용어다. 1946년 프랑스 비평가 니노 프랑크(Nino Frank)가 자국에서 상영되는 미국영화가 그 이전의 작품과는 다른 내용과 스타일이다는 것을 인식하고 차별화하기 위해 일련의 영화들의 ‘검은 영화(film noir)’라는 뜻의 명칭을 부여했다.1) 여기서 ‘검은 의미’는 영화의 특성을 분석해 구별 가능한 몇 가지 스타일의 기초한다. 흔히 언급되어지는 것으로, 전형적인 캐릭터와 도시의 질서라는 이슈, 어두운 영화화면과 극심한 명암의 빛의 시각적 효과, 내용이 폭력적이고 성적이며 해피엔딩의 영웅주의 이야기가 아닌 우울하고 비극적인 결말 그리고 시대적 구분 등이다. 이러한 특성들을 통해 일반론은 필름 느와르가 독일의 표현주의와 프랑스의 시적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았으며, 내러티브의 구조에서 갱스터와 차별적인 유사성을 지닌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또한 할리우드의 팬크로매틱 필름(panchromatic film)기술 및 장비의 진보로 인하여 조명의 시각적 효과에 대한 특성을 유도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린 분석에 의한 여러 가지 배경 원인들은 하나의 큰 궤를 이루지 못한다. 오히려 그 내면의 흐르는 당대 미국사회, 더 나아가서는 세계역사 흐름이 하나의 통일된 작용으로 필름 느와르(film noir)를 만들어 냈다고 보는 것이 필름 느와르에 대한 바른 접근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필름 느와르의 중요한 점은 그것이 2차 세계대전이라는 큰 역사의 전⋅후에서 점차 암울해져가는 세계관과 문화적 태도를 스크린 위에 반영했다는 점이다. 이제부터 언급하게 될 여러 가지 당대의 사회적 측면 중 상당부분은 필름 느와르가 등장한 시대보다 20여년 이전의 것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과정이 이어져 그결과를 낳는 것이고,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문화로 투영되기 까지는 일정정도 필요한 시간이 중간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포함시켜야 할 것들이라 생각한다. 필름 느와르의 영향을 끼친 사회적 측면은 앞서 언급했듯이 당대의 것의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단순한 사건들만으로 보자면 그것들은 몇 가지로 손으로 꼽을 수 있다. 즉 역사의 있어 언제나 반복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외견상 단순해 보이는 사건 하나가 그 파생되는 여러 가지 작용의 힘으로 사회전체를 변화 시키고 하나의 흐름을 이루는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몇가지 역사적 사건들을 고리로 삼아 필름 느와르의 영향을 준 당대의 사회적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1)장윤정, 「모더니즘 알레고리와 비전으로서의 필름느와르」,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4, 5쪽.

    2. 금주법

    1920년 1월 미국의 주점들은 ‘마지막 술잔’을 기념하는 사람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마치 지구 종말을 맞는 인류의 마지막 밤과 같이 미전역은 술로 광란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의회가 알코올을 제조, 운반, 판매하는 행위를 일체 금지하는 헌법수정안 제18조를 통과시켰기 때문이었다. 사실 미국에서 금주 운동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메이플라워호가 미 신대륙의 도착해 이주한 이래로 미 국민들 사이에는 기독교적 윤리 의식이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금욕과 절제를 강조하는 청교도 정신의 따라 술은 악의 원천으로 인식되었고, 술의 주조와 판매가 금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이미 오래 전부터 제기되었었다. 그러나 금주를 법으로 강요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인류 역사상 어떠한 나라도 알코올을 법으로 금지한 경우는 없었고 심지어 수백 만 명의 사람을 죽인 나치 독일이나 스탈린의 소련조차도 실행하지 못했던 조치였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전대 미문의 금주법이 실현된 것은 표면적으로 알코올 중독이나 범죄를 줄이기 위한 명분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제 1차 대전 참전으로 인해 미국에서 독일의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금주법을 통해 당시 양조업의 종사해 경제적 호황을 누리고 있던 많은 독일 이민자들의 대한 견제와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여성의 권리가 급격히 신장된 즈음 알코올 중독의 남편들로부터 고통 받던 여성들이 전쟁 와중의 알코올의 제조, 운반, 판매를 일절 금하는 금주법안을 국회의 제출했기 때문이었다. ‘고귀한 실험(noble experiment)’이라는 이름아래 제정된 이 법의 통과 주역은 바로 혁신주의적인 개혁가들, 그리고 농촌의 경제적 기반을 둔 근본주의 사고의 입각한 중산계급 편협주의자들의 도덕적 발로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금주로 사회를 정화하려는 그들의 기대는 채 1년도 안 돼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금주법은 사람의 음주벽을 고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밀주⋅밀매 같은 범법 행위를 성행시켰기 때문이다. 최초의 단계에서는 새로운 법의 활기찬 시행이 기대 되었으나 국가가 활용 가능한 방책은 극도로 불충분했다. 술의 유통을 금지시키기 위해서는 18,000마일의 해안선과 수천마일 이상의 국경선의 대한 지속적 순찰과 연간 5천7백만 건의 공업용 알코올 감시가 필요했다. 또한 불법적인 양조업소와 ‘주류 밀 매점’으로 알려진 비밀술집과 주류조직의 대한 색출 수사가 절실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미 정부가 그나마 적은 월급으로 그런 일의 종사하도록 고용한 숫자는 고작 1,500명의 불과했다.2) 곧 미국 내에서는 불법화 된 술을 입수하는 것이 합법이었을 때 술을 사는 것보다 쉬워졌다.

    그러나 이러한 법의 모순 속에서 더 놀라운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 했으니 그것은 금주법이 대도시의 조직적인 범죄단체를 기승부리게 했다는 것이다. 막대한 이익이 남는 그 사업은 합법적인 기업가들에게는 그 당시 금지 되었고, 대신 지하세계의 인물들이 순식간에 그 사업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금주시대는 불법과 지하세계의 갱이 난무하는 갱 시대의 대명사가 되었다. 시카고에서 밤의 제왕이라 불리는 알 카포네(Al Capone)3) 는 알코올의 기반을 둔 엄청난 부와 범죄제국을 건설 하였다. 이러한 범죄조직들은 계속 생겨났고 그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범죄가 발생했다. 이러한 금주법의 부작용은 도시의 일반인들에게도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1928년에 시행된 미국 대통령 선거의 최대 쟁점은 금주 법이었다. 금주를 지지하는 공화당 후보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와 법을 반대 하는 민주당 후보 앨 스미스(Alfred E. Smith)간의 경쟁은 가톨릭 신도인 민주당 스미스 후보를 제치고 공화당 후버가 당선됨으로써 결국 금주법 개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금주법 옹호론이 더욱 거세 어져 날이 갈수록 범죄와 사건은 더욱 늘어만 갔다. 금주법 이후 범죄율이 24% 증가하였으며, 살인이 12.7%, 날치기 총기난사 등이 13% 늘었고, 마약중독자 증가율이 44.6%에 달했다.4) 결국 이러한 혼란과 부작용으로 금주법은 1933년 미 의회가 폐지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 영화는 ‘갱스터’라는 중요한 캐릭터를 얻는다. 물론 당시까지의 미국사회에서 갱의 존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금주법 시대부터 그들의 세력은 도시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어 동네 어린아이까지 알 정도로 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어느 정도는 동경의 대상으로 까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언 캐머런이 지적한대로 모든 영화장르들 중에 범죄영화가 가장 외적인 요소들의 의해 형성되고 있다. 갱스터 영화는 금주법의 영향에 대한 신문 제1면 기사들(혹은 전직 기자들이 쓴 시나리오)로 시작되었다.5) 이러한 갱스터가 영화의 한 흐름을 이루고 물론, 양자사이의 분명한 차이로 구별되어지기는 하지만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필름 느와르(film noir) 태동의 하나의 모티브가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금주법이 필름 느와르의 미친 영향중에서 이런 갱스터의 등장은 너무나 미약한 것이었다. 그 보다는 갱스터라는 불법적 세력이 현실에서 강력한 힘으로 당당히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당시 미국사회의 분위기가 오히려 더 큰 문제였다. 당시까지 미국인들은 청교도적인 도덕관과 세계관 속에서 살아왔고 할리우드 영화 또한 그러한 것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현실세계는 숭고한 정의관과 사랑이 이루어지는 무대였다. 하지만 금주법 시대 이후로는 현실세계의 hero 보다는 anti-hero가 확고히 세력을 갖게 되었다. 사회는 반드시 정의로운 것은 아니었고, 악이 선을 이길 수 있으며, 불합리와 부조리한 부분들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러한 현실 속에서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그 세력에 짓밟히고 희생당하는 무고한 개인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이는 기존의 아메리카의 세계관을 깨뜨리는 것이었고 훗날 필름 느와르가 등장하게 되는 가장 큰 사회적 배경이 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금주법 폐지의 필요성에 대해 강력한 반대를 표했던 사람들은 농촌으로 대표되는 보수적 중산층이었다. 그들에게는 음주로 대표되는 도덕적 방탕함과 악의 모습들이 자신들의 청교도적 세계관의 대한 공격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그것은 도시가 지니는 정형화된 이미지이기도 했다. 훗날 그들도 자신들의 세계관이 깨지게 되고 그들의 다음 세대가 도시로 몰려가면서 도시가 사회의 중심이 되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필름 느와르(film noir) 는 도시의 대한 어두움과 단절의 이미지를 얻게 되고 단순히 하나의 배경보다는 자본주의 이미지로 주인공의 인과성이나 주제의 은유로 작동되는 기제를 갖게 된다. 그 상황에서 도시와 밤의 이미지는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어울리기 시작했고 극단적인 조명의 대비와 화면상의 닫힌 공간구조로 필름 느와르의 공간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2)http://nasanha.egloos.com/viewer/10982852  3)알 카포네는 1899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태어나 면도사인 아버지를 따라 1893년 뉴욕 빈민가로 이민을 왔다. 이미 소년 시절부터 범죄 조직에 관계했던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를 중퇴하고 조니 토리오가 이끄는 ‘제임스가 소년단’에 가입, 토리오의 보디가드로 활약했다. 뒷골목 싸움에서 칼에 얼굴을 찔려 귀에서 입술까지 커다란 상처를 입었으며 그 때문에 후일 사람들은 그를 ‘스카페이스’(scarface, ‘칼집 난 얼굴’이라는 뜻)라고 불렀다. 드디어 1925년 토리오의 뒤를 이어 암흑가의 제왕으로 올라섰다. 1925년부터 1931년 은퇴할 때까지 카포네는 ‘마피아’라는 시카고의 강력한 범죄 조직을 이끌며, 공무원 매수, 도박, 매춘, 밀주와 밀매 등의 방법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1927년 한 해 동안 공식 수입만도 1억 달러가 넘었다. 특히 1929년 2월 14일 성 밸런타인 축제 때 경찰로 위장한 그의 부하들이 시카고의 라이벌 조직이었던 조지 벅스 모런 파의 조직원 7명을 기관총으로 무자비하게 살해해 미국인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일도 있었다. 5년 동안 미국의 암흑가를 지배하며 밤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카포네도 결국 1931년 탈세 혐의로 기소되어 8만 달러의 추징금과 함께 징역 11년을 선고받고 샌프란시스코 연안의 유명한 앨커트래즈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39년에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마이애미에서 ‘편안한’ 은둔 생활을 하다가1947년1월 폐렴으로 사망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70711&cid=43055&categoryId=43055 [네이버 지식백과]밤의 제왕 알 카포네 - 금주법 시대(1919∼1933년) (미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10.22, 가람기획).  4)http://nasanha.egloos.com/viewer/10982852  5)제프리 노웰-스미스 책임편집, 『옥스퍼드 세계영화사』, 이순호 외 옮김, 열린책들, 2005, 369∼370쪽.

    3.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은 풍요와 평온함의 세계였다. 그들에게 모든 것은 낙관적으로 보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로 지난 몇 년 동안의 호황일로의 번영이 계속 지속될 뿐만 아니라 더욱 가속화되어 근대문명의 생활양식과 사회적 진보의 활기찬 시대가 뒤따라 올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미 대통령 후버(Hoover)는 1928년 8월에 “오 늘날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제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도 보지 못한 빈곤극복의 결정적인 개가의 문턱에 다다랐다. 구빈원은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라고 자신 만만 했다. 게다가 대공황이 일어나기 불과 두 달 전 까지도 “이제 가난은 우리 사회에서 자취를 감춰 가고 있다”고 말하는 등 오락가락하며6) 번영의 성과에 대한 자랑으로 충만했었다. 그때 당시만 해도 누구하나 미국 경제의 그러한 낙관적 견해에 우려조차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1929년 가을 지나치게 거품으로 고조 되었던 뉴욕의 증권 거래소(The New York stock exchange) 는 갑자기 모든 것들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훗날 “암흑의 목요일(Black Thursday)”로 불리게 된 10월 24일에만 1,300만 주가 시장에 쏟아져 나와 거대기업들의 주가는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유명한 ‘비극의 화요일’에 비하면 가벼운 편으로 이날은 1,600만 주가 쏟아져 주가지수는 9월 최고가에 비해 평균 50% 하락했고 이로 인해 금융손실은 1929년 말까지 약 400억 달러를 넘어섰다. 대공황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 공황은 미국경제 전체를 흔들었고 하나로 유지되어 오던 흐름을 일시에 정지시켜 버렸으며 1920년대의 영원한 번영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 여파는 곧 생활경제의 파탄과 실질자의 엄청난 폭발로 이어졌고 세계경제 전체를 휘청거리게 했다. 1932년 통계에 의하면 미국 노동력의 25%가 실업상태였다. 실직된 노동자들은 있지도 않은 일자리를 찾아 거리를 배회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처참한 상황은 일반국민들에게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뉴욕의 고층빌딩에서는 연일 투신자살소동이 벌어졌으며 전국도시에서는 빵을 배급받기 위해 줄을 선 인파로 가득 찼다. 생계를 구호단체의 배급식사에 의존하는 수가 늘어났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특히 대공황은 남성들에게 무기력과 패배감을 주어 무능자라는 낙인을 찍게 했다.7) 대공황 이전에도 힘들었던 농촌은 더욱 피폐 해졌다. 흉작이 겹친 데다 농산물을 생산해도 수요가 없어 생활유지가 어렵게 됐다. 젊은이들의 이농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히치하이크로 고속도로가 메워지기 시작했으며 전통적인 가정이 파괴되어 갔다. 미국 인들은 전통적인 가치관과 미국사회 구조에 대한 낙관적 신뢰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후버 정부의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공황은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할 당시 최고조에 달했으며 그에 따른 사회 혼란은 뉴딜정책 시작 이후까지도 미국사회를 지배했다. 사실 1929년 대공황은 인류문명사의 큰 재앙을 초래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소비라는 개념이 재탄생했다.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소비(consumption)’ 라는 단어는 소진, 낭비, 약탈, 탕진, 고갈 등과 같은 부정적인 뜻으로 쓰였으며 심지어 폐병을 뜻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비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는 대공황 이후 대중광고와 마케팅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긍정적 이미지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소비’라는 단어는 ‘선택’ 과 동일시되면서 ‘축복’으로 다시 태어났다. 제러미 리프킨에 따르면 “아메리칸 드림을 가지고 미국 땅으로 몰려든 이민자들이 못내 부러워한 것은 교실과 공식석상에서 찬양하던 시민적 참여의 이상이 아니라 탐나는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는 궁전처럼 으리으리한 백화점에 가서 원하는 물건을 마음껏 사는 것이었다. ‘참여’는 정치적 영역의 고매한 횃대에서 굴러 떨어져 상업적 영역에서 소비자로서 마음껏 선택할 수 있는 기회로 격하되었다.”8) 이러한 소비시대에 사람들이 단지 필요해서가 아니라 편의와 쾌락을 추구하려고 상품을 구매 했다. 중간계급 가정은 전기냉장고, 식기세척기, 진공청소기를 샀다. 사람들은 손목시계를 찼고 담배를 피웠다. 여성은 화장품과 패션 의상으로 치장했다. 자동차는 보통사람들의 필수품으로 3,000만 대가 넘는 자동차가 미국의 도시를 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소비를 촉진하는 데는 광고가 한몫을 톡톡히 했는데, 그 한 예가 여성의 흡연율 증가다. ‘담 배를 여성해방이라고 하는 자유의 횃불’로 연결시켜 광고를 크게 히트시킴으로써 공공장소에서 남성들과 함께 맞담배를 즐기는 여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일명 ‘새로운 시대’로 일컬어지는 1920년대 여성들은 기존의 엄격한 빅토리아적 여성에서 해방된 삶의 방식을 의미 하는 현대여성 개념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 많은 여성은 남편과의 성적관계를 출산만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낭만적 사랑의 절정으로서그 자체가 중요하고 즐거운 경험으로 생각했게 되었고 기존의 어머니 역할도 재정의 될 만큼 전통적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 새로운 면모를 보였다.9) 미 국민들은 이러한 도시적이며 소비지향적인 삶으로 점차 비슷한 생활방식의 따라 비슷한 의식을 갖게 되어 동질적 문화로 인해 새로운 가치관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적 풍요한 삶속에 그림자처럼 항상 뒤따르는 정신적 불안과 소외, 범죄와 불평등도 함께 상승되어 현실 도피주의가 고조되었다.

    미국의 경제가 침체되어 있던 이 시기가 역설적으로는 할리우드의 가장 비옥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필름 느와르의 실마리라고도 볼 수 있는 갱스터 무비다. 물론 양자는 명백한 차이와 차별성을 갖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더라도, 이전 20년대의 금주법에 의한 영향이 나타난 30년대의 갱스터 무비는, 그 자체가 하나의 바탕이 되어 30년대 대공황의 절망적이고 음울한 도시의 이미지를 더 한 채 30∼40 년대의 필름 느와르라는 모습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즉 이 대공황시기에는 20년대 들어 시작된 정통적 가치관의 붕괴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인식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사람들은 부도덕한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일그러진 삶의 관계에 흥미와 함께 동질감을 느끼기 시작 했다. 밤, 콘크리트 벽, 그림자, 폐쇄된 공간으로 상징되는 어두운 도시의 이미지 또한 20년대의 무법지대였던 도시의 사람들에게보다는 오히려 직장을 잃은 채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더 가깝게 느껴졌다.

    돌이켜볼 때 당시의 상황에서 전후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까지는 아니더라도 존 포드(John Ford)의 ‘분노의 포도’ 같은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의문이 가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할리우드가 지금껏 전통으로 이어지게 된 속성이며 당시의 상황이 필름느와르에게까지 미친 영향이다. 즉 영화에서 사람들은 이전과 같은 역할 외에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는 마약으로서의 효과를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사회에 만연하기 시작한 도피주의의 풍조와 맞물려나가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몰론 이러한 현실 도피적 특성에좀 더 잘 부합하는 것은 당시의 대작 스타일의 작품이나 뮤지컬, 로맨틱코미디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제작비와 제작시스템의 형태에서좀 더 당시의 배경에 적합하고 영화의 내용과 배경에서도 부조리한 현실의 모습을 파괴적으로 대리만족시켜주는 필름느와르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대공황 즈음부터 시작된 B급 영화의 전통은 할리우드의 공장식 제작형태 하에서 감독의 작가적인 창조역량을 보장해주어 그 표현양식이나 언어에서는 진보된 모습을 보이고 인물이나 내러티브에서도 일견 현실을 반영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정작 역사 속에서 관객의 수용이라는 영화산업의 마지막 단계를 거칠 때 현실보다 더 왜곡된 모습을 보이는 필름느와르의 일그러진 특성을 낳게 된다. 이는 지금까지 일련의 필름느와르로 분류되는 작품들이 프랑스 평론가들의 평가 이후로 그 형식미나 작가주의의 자취에 대한 접근만으로 이루어진데 반하여, 할리우드영 화산업의 중요한 단계인 그리고 영화의 사회학적 접근방식에서의 중요과제인 관객의 수용단계에서 새로운 관점으로 관찰되어야 할 부분을 남기는 것이라 생각된다.

    6)강준만 지음, 『미국사 산책6』, 인물과 사상사, 2010, 53쪽.  7)마이켈 우드 지음, 『영화 속의 미국』, 시찬주⋅성미숙 옮김, 현대미학사, 1994, 75쪽.  8)강준만 지음, 『미국사 산책6』, 인물과 사상사, 2010, Jeremy Rifkin, 『소유의 종말』, 이희재 옮김, 믿음사, 2001, 58쪽 재인용.  9)앨런 브링클리 지음,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3』, 황혜성 외 5인 옮김, Humanist, 2011, 78∼83쪽.

    4. 2차 세계대전과 영화검열

    세계 2차 대전은 1939년 9월 1일 히틀러 독일이 선전포고도 없이 폴란드 국경을 침략하여 전면적인 침공을 개시했고, 이틀 후 영국과 프랑스가 이에 대항하기 위해 독일에 반격을 가함으로서 공식적으로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됐다. 그러나 이에 앞서 세계전쟁은 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일본은 1910년에 이미 대한민국을 무력으로 합병하고 이어 중국대륙으로 세력을 확산하여 북만주를 정복한후 중국대륙을 두고 중국과 일본의 본격적인 전쟁인 중일전쟁(1931∼ 1941)을 벌임으로서 세계는 그야말로 독일, 이태리, 일본 3나라의 침략국에 의해 정글과 같은 양육강식의 형태로 세계질서는 먹고 먹히는대 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에 유지해오던 고립주의와 중립정책을 일관되게 유지함으로써 평화를 구가하고 있었는데, 1941년 기습적으로 일본으로부터 진주만 공격을 당한 이후 미국은 중립을 포기하고 일본에 이어 독일에게 연속 선전포고를 함으로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이자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2차 세계대전은 남북 전쟁이래 그렇게 장기간(약 4년)에 걸쳐 군사 활동을 해 본 적이 없는 미국에게 심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대공황의 여파가 완전히 치유되지 않는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전쟁에 과정과 충격은 기존의 미국이 전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사회, 문화와 윤리, 도덕적 측면 등 다양한 영역에서 미국적 가치와 정체성의 혼란을 초래할 만큼 큰 임팩트와 인식의 변화를 주었다.10) 그 중 하나가 10여년 이상 끌어 오면서 극복하지 못했던 대공황이 세계대전으로 마침내 종지부를 찍으면서 미국 경재와 번영이 다시 도래했다는 점이다. 전시에 군수산업 발전으로 미국의 국민총생산은 1939년 913억 달러에서 1945년 1,666억 달러로 급등 했고 어느 지역에서는 개인소득이 100% 이상 증가했다. 이로 말미암아 1,000만에 가까운 실업자가 해소되었고 1,500만 남 녀 근로자가 병력으로 동원된 상태에서도 민간 노동력은 약 20% 증가율을 나타냈다. 부족한 인력은 어린이, 노년층, 소수인종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수백만의 여성이 그 빈자리를 채웠는데, 전쟁동안 여성의 취업의 수는약 60% 증가했다. 그리고 또 다른 변화는 전쟁기간 동안 풍요함은 미국인의 생활에 큰 활력을 불어넣어 1920년대와 마찬가지로 소비주의는 실제로 미국문화에서 가장 강력한 성향 중의 하나가 되었다. 휴양지의 호텔, 카지노, 경마장 등은 고객들로 붐볐고 무도장은 밴드에 맞춰 춤을 추는 젊은이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춤과 대현밴드는 많은 병사들에게는 남겨두고 전쟁터로 떠나야 하는 일상생활을 뜻했고, 이를 수호하기 위해 싸운다는 믿음의 상징이 되었다.11) 그 중에서 괄목할 만한 부분은 대중오락 산업의 성장인데, 특히 대공황시대 성장산업은 영화였다. 1930년대 전체 인구의 60∽70퍼센트가 매주 영화관을 찾았을 정도로 영화는 일반대중들과 밀착되어갔다. 영화는 공황기의 훌륭한 도피처였기 때문이다. 할리우드는 이른바 B급 영화를 포함한 연간 500편 이상의 영화를 양산해내어 이른바 영화 역사상 황금기를 일궈 냈다. 유성영화와 칼라영화의 등장도 영화 붐을 거들었다. 그러나 언제나 이러한 호황기에 등장하는 것이 영화의 상업성인데 1차 세계대전 이후 20년대 영화들은 ‘광란’과 ‘재즈 시대(jazz era)’나 ‘음주 파티’ 에 대한 이야기를 소재로 많이 다루어 관객들에게 크게 인기를 끌었으나 여론은 좋지 않았다. 이는 영화의 비윤리적 내용과 할리우드 사람의 부도덕한 사생활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12) 따라서 영화계는 할리우드의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정화하고 주 정부나 국가차원의 검열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자율적으로 ‘전미 영화제작배급 협회(Motion Picture Production Distribution Association-MPPDA)라는 조직을 만들어 신교도 공화당 정치인 출신 윌 헤이즈(Will H Hays)를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윌 헤이즈는 영화제작 규약의 대중적인 이름인 헤이즈 규약(Hays Code)으로 영화사에 길이 남게 될 만큼 2차 대전 종전 이후 은퇴할 때 까지 영화의 검열을 포함한 업계 간의 거래관행 기준을 확립하고 영화교역위원회 중재와 표준상영계약 등을 통해 배급업과 극장업계간의 관계를 정립함으로서 미 MPPDA를 혁신적으로 발전시켰다. 1927년 할리우드 최초의 자율 규제 규약은, 명백한 신성 모독과 음탕하거나 외설적인 나체 등 11개 조항은 절대로 영화에 등장해서는 안 될 ‘금지 사항’과 국기의 사용과 무기의 사용 등을 다룰 때는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26개 조항의 ‘주의 사항’으로 구체화 세분화되어 있다.13) 그러나 회사 이익을 최우선하는 영화산업 내에서 헤이스의 검열은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았다. 그 한 예로 1930년대 주류 장르로 자리 잡은 갱스터 무비 중 <리틀 시저(Liitle Caesar)>(1930), <공공의 적(Public Enemy)>(1931), <스카페이스(Scarface)>(1932)등은 헤이스 규약이 금지한 주인공의 갱, 영웅을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미국 현대 도시 생활에 잠재하고 있는 위험과 폭력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의 비극적인 죽음은 은유적으로 미국내 이민자의 아메리 칸드림의 실현불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러한 주제는 헤이스 검열의 명백한 금지사항에 속하는 것이었다. 갱스터 무비의 이러한 느슨한 부분들이 가톨릭 도덕연합 등 종교와 보수적 단체들의 강렬한 비난을 받게 되자 영화계는 MPPDA산하에 ‘영화제작검열위원회(Production Code Administration-PCA)를 설립하여 자체검열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주요 조항은 ‘범죄와 폭력, 섹스의 묘사’ 두 부분으로 1934년 PCA가 본격적으로 검열을 강화함으로서 영화의 재현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먼저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여성 이미지 재현이다. 검열이 유혹이나 간통, 애정과 같은 성적인 부분을 강화하면서 성적인 매력을 이용하여 독립적이고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던 여성들이 화면에서 사라지고 대신 여성다움을 강조하는 모성의 여성이 등장하게 되었 다. 여성의 성적 욕구는 더 이상 스크린화 될 수 없었으며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이제 자신의 만족보다는 가족을 구성하고 성공적인 직업을 갖기 위한 긍정적인 측면에서만 사용 할 수가 있었다. 영화계는 이러한 강력한 법 시행으로 새로운 묘사방법을 고안해낼 수밖에 없었 는데, 그것이 바로 ‘생략과 은유, 암시’ 등이다. 그 예로 필름 느와르의 첫 영화로 언급되는 1941년 존 휴스톤의 <말타의 매>인데, 1929년 대실 하멧(Dashiell Hammet)의 원작 소설 『말타의 매』는 검열의 금지 조항인 동성애, 간통, 살인, 여성의 성적 유혹 등을 다루고 있어서 영화로 충실하게 각색될 수 없는 상황에서 문제의 소지가 될 만한 많은 부분을 제거하거나 생략하면서 남녀 간의 사랑과 에로틱한 성적관계 등을 교묘히 묘사하여 팜므 파탈보다는 모성적 여인의 이미지를 구현 함으로서 검열을 피해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검열이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여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미 연방정부가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여함으로서 완화정책으로 일대전환을 이룬다. 전쟁으로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는 영화들은 다양한 검열기관에 의해 검열을 받게 되었는데, 기존의 도덕적 윤리적 측면을 중시하던 PCA는 그영향력이 약화되고 전쟁정보부(The Office of War Information-OWI) 산하 영화부가 마련한 가이드라인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이전보다 성과 폭력에 대한 부분은 크게 완화되었는데, 기존의 금지된 ‘살인 장면’ 도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합법적인 킬러로 만들면 가능하였고, 사랑의 욕망이나 탐욕, 간통도 로맨틱한 사랑이나 전통적 가치관을 전복하여 대담하게 표현하거나 주제화 할 수 있어 묘사의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다.14) 1940년대 이러한 검열의 분수령을 이룬 것이 영화 <이중배상>이다. 이 영화 등장 이후 비평가들이 필름 느와르라고 이름 붙인 영화들 <밀드레드 피어스>, <빅 슬립>,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와 같이 PCA에 의해 제작 금지되었던 영화들의 제작이 가능해졌다. <이중배상> 역시 1935년 케인의 원작소설 『이중배상』을 각색한 것인데 혼외정사 같은 것은 생략하거나 영화결말 부분은 소설과는 다르게 처리하였으나, 동반자살 사건은 두 남녀가 서로 살해하는 것으로 그리고 범죄자를 동정적으로 그려 살인자에게 관객이 동일감을 느끼게 하는 등 영화 전반적인 부분에서 이전에 금지 되었던 내용이나 묘사가 보다 직접적이고 세부적으로 표현되거나 은유와 부분생략의 기법 등으로 사건의 긴장감과 서스펜스를 창조하여 영화의 극적 효과를 배가시킴으로서 관객들의 호응과 공감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알란 실버(Alan Silver)와 엘리자베스 워드(Elizabeth Ward) 가 1980년 그의 저서 『필름 느와르: 미국 스타일에 대한 백과사전』(Film Noir: An Encyclopedic Reference to the American Style, 1980)에서 느와르 영화라고 주장한 총 268편의 영화 중 1943-43년까지 제작된 영화는 12편뿐이고 44년(17편, 45년 16편)이후 조금씩 증가하다가 46년 (24편, 47년 29편 등)부터 본격적으로 활발하게 제작되었다.15) 여기에서 느와르 영화는 전쟁 끝나가는 시기에 점차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전쟁으로 인해 검열이 완화되고 남성 관객이 증가한 것이 주원인이었는데, 전쟁초기에는 검열과 남성관객의 감쇠로 인해 제작편수가 적었다가 병사들에 귀환이 시작되는 시기에 다시 증가되었다.16) 영화 주제 또한 전쟁터에서 귀향해 이전과 달리 많은 일터와 공장에는 여성인력들로 가득한 미국 내 상황에서 사회적 응에 어려움과 위기감에 봉착해 있는 남성 관객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어둡고 폭력적이며 냉소적인 영화들이 많았다. 영화산업측면에서도 전쟁으로 인해 해외수출이 크게 감소하여 외국인들을 위한 낙관적인 영화보다는 국내관객들을 목표로 한 영화들을 많이 만들게 되었는데, 이 또한 느와르 영화제작의 큰 원동력이 되었다. 이와 같이 느와르 영화제작이 활기를 띤 원인과 배경은 대공황과 전쟁이라는 사회적 변혁에 의한 변화된 관객에 기호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17) 보수주의가 최고조에 달한 전⋅후 시기의 검열제도 내에서 필름느와르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이라는 사회격변과 전쟁으로 인한 검열의 강조점의 변화가 큰 영향을 미쳤고 또 프로파간다 위주의 검열로 폭력과 섹스에 대한 묘사가 가능해져 일부 의식 있는 작가와 감독들에 의해 반 전통적 스타일의 주제를 담아 미국사회의 문제들을 비평적 시각으로 담아 난데서 부상되었다.

    10)정태수, 「미국적 가치의 정체성 혼란, 필름 느와르」, 영화 연구 29호 한국영화학회, 2006, 260쪽.  11)앨런 브링클리 지음, 앞의 책, 236∼257쪽.  12)1921년 코미디언 로스코 팻 알버클이 젊은 여배우의 강간과 살인으로 구속 당했으며 배우인 윌라스 레이드가 몰핀 중독으로 사망한 것은 사회문제화 되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할리우드는 대중에게 타락과 무절제를 조장하는 곳으로 인식되었다. (데이비드 보드웰과 크리스틴 톰슨, 『세계영화사 1』, 주진숙 이용관 외 역, 시각과 언어, 1999), 240쪽에서 인용.  13)제프리 노웰-스미스 책임편집, 앞의 책, 295쪽.(자세한 내용은 본문을 참고하기 바람)  14)장윤정, 앞의 논문, 35쪽.  15)Andrew Spicer, 『Film Noir』, Longman, Person Education Limited, 2002, p.28.  16)Frank Krutnik, 『In a Lonely Street: Film Noir, Genre, Masculinity』,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1, pp.182-187.  17)Marc. Vernet, “Film Noir on The Edge of Doom” in 『Shade of Noir』, ed. Joan Copjec, London: Verso, 1991, pp.20-24.

    5. 하드보일드 소설

    하드보일드18) 소설은 1930년을 전후하여 미국 문학에 새롭게 등장한 사실주의 수법을 의미한다. 불필요한 수식을 일체 빼버리고, 신속 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 올리는 이 수법은 특히 추리소설에서 추리보다는 행동에 중점을 두는 하나의 유형으로써 ‘하드보일드파’를 낳게 하였고,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와 도스 파소스(Dos Passos) 등 미국의 순수문학 작가들에 영향 속에 태어났다. 원래 이 장르는 1920년대 금주령시대의 산물로서 하나의 장르(genre) 라기보다는 스타일(style)을 말하는 것으로 자연주의적이고 폭력적인 주제를 냉철하고 무감한 태도로 묘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문학이나 영화 등 예술 텍스트에서 비정하고 건조한 세계에 일면을 미니멀한 스타일로 담아내는 제반 수법들을 지칭한다. 여기서 ‘비정함’의 속뜻은 캐릭터나 사건이 비정한 것이 아니라 작가(감독)의 표현이 건조 하고 냉정하다는 의미이다. 곧 세계를 대하는 태도 혹은 스타일을 뜻하는데 이는 작가(감독)가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다. 즉 부조리한 세계의 단면을 응시하는 예술가에 냉소적인 시선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드보일드 스타일은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감정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을 배제하고 ‘견해를 덧붙이지 않은’ 건조한 스타일을 구축했다.

    하드보일드 문체는, 사건을 냉정하고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데 유효하다. 이런 문체에 의존하는 이야기에서 화자의 개입은 철저하게 배제 되고 행동과 사건들을 주로 대화와 묘사에 의해서만 제시된다. 이 방법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추리소설은 대실 해밋(Samuel Dashiell Hammett)의 ≪플라이 페이퍼 Fly Paper≫(1929)로 알려져 있으며, 이밖에도 캐롤 존 델리(Carroll John Daly), 레이먼드 챈들러(Raymond Chandler) 등이 활약하였다. 1929년 해밋(Samuel Dashiell Hammett)의 추리소설 『붉은 수확』은 종래의 수수께끼풀이 중심의 미스터리 소설에서, 고독한 사립탐정을 주인공으로 한 리얼한 성격 묘사, 사건의 풀이보다도 등장 인물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한 시점, 비어나 속어를 많이 사용한 속도감 있는 문체, 심리 분석 이상으로 효과적인 경묘한 회화적 묘사를 특징으로 하는 추리소설로 기존의 것에 비해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작법을 선보였다. 이밖에≪몰타의 매≫(1930)≪유령의 열쇠≫(1931) ≪그림자 없는 사나이≫(1932) 등을 발표해 하드보일드파 탐정소설의 제1인자로 인정받았다.19) 그런데 당시 하드보일드 소설이 게재되었던 매체가 권위 있는 문학지가 아닌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펄프 픽션(Pulp Fiction)20)을 게재했던 펄프 잡지(Pulp Magazine)였다는 사실은 하드보일드 소설이 저속하고 부도덕한 문학이라는 부정적 인식을 강화시켰다. 이 소설이 지향하는 세계는 당시 에드가 알랜 포 (Edgar Allan Poe) 등 순수작가들이 추구하는 이성적으로 인식 가능한 세계를 전제로 범죄는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사회체계를 파괴하는 불순한 시도로, 외부 세계는 무질서와 불확실, 부패와 혼돈으로 가득한 임의적인 공간으로 재현되고 사건 종결의 국면은 결코 전지적이고 오류를 범하지 않는 탐정에 의한 범죄의 논리적인 해결이라는 고전소설의 편리한 공식을 파괴하고 있다.21) 따라서 사회통합이나 화해, 미래에 대한 낙관이나 희망보다는 불안이나 혼돈으로 서사를 종결함으로써 정치와 사회, 계급적 이상과 질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음울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범죄는 지배계급이 노동계급과 하위계급에게 가하는 폭력으로 규정되고 법과 권력은 사회구성원의 안전과 평화를 수호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기관이 아니라 자본가와 결탁하여 노동계급과 하위계급을 탄압하는 정의롭지 못한 지배기구로 재현되고 있다. 착취 당하고 억압받는 사회적 약자가 기댈 수 있는 정의로운 권력은 존재 하지 않는다는 전복적인 시각은 “최초의 장편 하드보일드 추리소설” 『피의 수확』(Red Harvest)22)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난다. 범죄에 관한 전복적인 재현은 금주법 시행이후 조직범죄의 증가와 정치적 부패로 인해 미국사회에서 형성된 범죄를 인식하는 방식의 급격한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하드보일드 소설의 극명한 점은 탐정의 재현방식을 통해 강화되고 있는데, 탐정은 범죄자를 체포함으로써 질서와 합리성을 회복시키는 역할이 아닌, 말하자면 사회질서를 복원시키는 초인적인 존재가 아니라 생계를 위해 범죄를 수사하는 보잘 것 없고 얄팍하며 무력감과 좌절, 냉소로 점철된 비정한 존재23)로 그려지고 있다. 이것은 범죄는 뿌리 깊은 사회지층의 구조적인 현상으로 결코 탐정과 같은 인위적이고 개인적 차원의 헌신과 희생으로는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작가의 내포적 의미가 배여 있다.

    이러한 질료를 갖고 있는 하드보일드 소설이 필름 느와르와 연결되는 외양적 요인으로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2차 대전 종전 직후 1946년부터 프랑스 극장가를 점령한 극도로 음산하면서 공통된 캐릭터와 서사구조, 스타일등을 갖고 있는 많은 미국영화들이 1930년대 미국 하드보일드 소설의 특징과 닮았다는 것을 당시 프랑스 비평가들이 지적한 점과, 다른 하나는 1941년에서 1948년까지 만들어진 느와르 영화의 약 20%가 대실 해밋(Dashiell Hammett), 레이먼드 챈들러(Raymond Chandler), 제임스 캐인(James Cain)등 미국작가가 쓴 하드보일드 소설을 각색한 것이었고,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느와르 영화는 1930년대와 1940년의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작가들이 쓴 하드보일드 스타일에 강한 영향을 받은 미국 시나리오 작가들에 의해 쓰여 졌다는 사실이다.24) 2차 대전 중의 할리우드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히는 존 휴스턴의 <말타의 매>(1941), 빌리 와일더의 <이중배상>(1944), 에드워드 드미트릭의 <살인, 내사랑(Murder, My Sweet)>(1945) 영화들은 모두 대표적인 미국 하드보일드 작가들인 대실 해밋, 제임스 케인,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을 영화한 것이다. 특히 챈들러는 이 장르의 진화에 가장 중요한 작가(소설과 시나리오 작가로도 활동)인데 <이중배상(Double Indemnity)>, <살인, 내사랑>, <호반의 여인>, <푸른 달리아>, <날아간 매(The Falcon takes over)>, <빅 슬립(Big Sleep)>, <의혹의 전망(Strangers on a Train)>, <말로우(Marlowe)>, <안녕, 내 사랑>, <롱 굿바이(The Long Goodbye)>등이 그가 원작 소설을 쓰거나 시나리오를 맡았던 영화들이다. 실제로 <말타의 매>는 할리우드 하드보일드의 정형이 된 기본 플롯과 캐릭터를 확립했고 <이중배상>은 확연한 느와르 스타일을 도입함으로서 하드보일드의 기본 골격에 내러티브적 시각적 전략을 제공했다. 그리고 에드워드 드미트릭의 <살인, 내 사랑>은 느와르 스타일과 하드보일드 탐정 이야기에 최초의 성공적인 결합으로 평가된다.25) 이런 영화들이 성공을 거두자 ‘느와르’ 미스터리물이 양산됐다. 영화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주로 소외, 오도된 야망, 동시대 도시인의 성적혼돈이다. 영화가 해결책으로 내놓은 암시는 대개 생존과 자존 유지를 가능케 하는 금욕적 절제다. 그리고 이런 느와르가 찬미하는 것은 법과 질서의 가치나 추리의 위력이 아니라 고립된 영웅의 개성적 스타일이다.

    그리고 내적측면으로 하드보일드소설의 스타일은 필름느와르와 친화성을 갖게 하는 또 다른 원천이다. 특히 작가의 문체를 포함한 사설탐정의 복장과 세계관을 통해 발현된 스타일, 예를 들면 살인자들이 침대의 누워있는 주인공을 쏘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유유히 사라진다 든지,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아무런 초조함과 집착을 보이지 않는 모습 등 분위기와 인물의 성격화를 스토리보다 우위에 놓는다거나 인물을 둘러싼 환경과 그들의 대화 등을 사건의 해결보다 비중 있게 취급하는 등의 스타일면에서 본다면 하드보일드 소설이 필름 느와르에 끼친 영향은 너무나 분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그 스타일이 실존주의 같은 존재론적 인식의 바닥과 닿아 있다는 점 때문에 필름 느와르를 단순히 형식(form)의 관점으로만 접근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26)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놓여 있는 공간과 같으며 역으로 이 공간들은 등장인물들처럼 기능한다. 하드보일드 소설에서 주인공이 마주치는 대상 가운데 하나는 도시의 범죄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들이다. 로스 맥도날드의 지적대로 주인공들은 “거리의 언어를 말하며 미국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계급이 없는 안절부절 못하는 남자들”이다. 이들이 걸어가는 ‘비열한 거리’는 여자에게 안전한 곳이 아니다. 또한 이들의 언어는 여자보다도 지적파워를 갖지 못했고 언어 통제를 하면서 재치로 캐릭터를 유지해나간다. 반면 여성은 느와르 주인공을 두 가지 차원에서 도전하고 위협하는데, 하나는 남성 지배적 사회의 도전과 지위향상으로 가정 중심의 전통적 가치관에 위협을 제기함으로서 가정을 파괴하고 부정한다. 따라서 범죄를 가족 안으로 끌어들이고 범죄를 저지르는 계기를 남자 못지않게 여자가 제공 함으로써 남편을 살해하거나, 아내를 죽이거나 죽이려는 남편, 부모나 계부를 죽이려는 자녀 등으로 구성된다. 또 하나는 심리적 공포로서의 여성이다. 많은 경우 남자 주인공을 거세 혹은 다른 방법으로 파괴하는 팜므 파탈로 그려진다. 그들은 남성의 성적환상에 볼거리로 구축되어 물신화되고 평가절하 되지만 남성의 욕망으로 인해 힘을 얻은 다음 그들에게 복수한다.27) 이렇듯 욕망과 죽음의 관계야말로 필름느와 르의 중심적 요소다. 욕망하는 주체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욕망하는 남성 혹은 여성은 결국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필름느와르가 처음 발견한 형식이다. 이를 통해 필름 느와르는 결국 죽음과 욕망 그리고 존재의 문제를 건드리면서 할리우드 영화의 차별성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필름 느와르는 하드보일드 소설과 그들의 작가를 통해 미국영화의 표현주의라고 일컫는 정도의 새로운 리얼리즘의 영화미학을 창조함으로서 영화사에서 특이한 존재를 넘어 ‘할리우드와 대비’되는 의식을 담아냈다는 큰 의미를 지닌다.

    18)하드보일드(hard-boiled)는 원래 계란 따위를 삶으면 껍질이 단단해지는 의미의 형용사인데, 1차 세계대전 때 미군 신병 훈련소의 훈련 교관이 입었던 빳빳하게 다림질한 옷깃의 제복을 뜻하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문학용어로 전의(轉義)되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또는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냉혹, 비정, 냉담한 태도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19)[네이버 지식백과] 하드보일드 [hard-boiled] (영화사전, 2004.9.30, propaganda).  20)펄프픽션은 1920년에서 1955년 사이에 값싼 펄프 종이에 인쇄되어 간행되던 대중소설을 지칭한다. 하드보일드 소설은 1920년대 초반 『블랙마스크』(Black Mask)를 통해 최초로 등장했는데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표지로 대중의 흥미를 자극했고 잡지의 상당부분을 광고로 채웠다. 그런 점에서 하드보일드소설은 폭력과 섹스를 통해 판매부수를 늘려 광고효과를 극대화시키려는 저급한 잡지의 부도덕한 싸구려 소설로 인식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Lee Server, Danger is My Business: An Illustrated History of the Fabulous Pulp Magazines (San Francisco: Chronicle, 1993)를 참조할 것.  21)계정민, 「계급, 남성성, 범죄-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사회학」, 영어영문학 제58권 1호, 2012, 4쪽.  22)Dennis Porter, 『The Pursuit of Crime: Art and Ideology in Detective Fiction』, New Haven: Yale UP, 1981, p.176.  23)Frank MacShane, 『The Life of Raymond Chandler』, London: Hamilton, 1986, p.70.  24)존 벨튼 지음, 『미국영화/미국문화』, 이형식 옮김, 한신문화사, 2000, 198-200쪽.  25)토마스 사츠 지음,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 한창호⋅허문영 옮김, 한나래, 1995, 201쪽.  26)이영기, 『필름 느와르를 역사화하기』, 한나래, 1998, 13-14쪽.  27)존 벨트, 앞의 책, 213-215쪽.

    6. 결론

    필름 느와르는 2차 대전 직후 미국에서 발생한 새로운 형태의 영화 이다. 그러면서 그 존재와 정체성, 시기 등에 관해 가장 논쟁적 담론을 많이 생산해내게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정의되고 지칭 되는 장르이외에, 문화, 스타일, 분위기, 모티브, 톤(tone)등 많은 연구 자들에 의해 세부적으로 연구되어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마르크 베르네 같은 비평가는 필름 느와르는 영화적인 대상이나 실체와 관계없는책 속에서만 발견되는 하나의 “개념”일 뿐이라고까지 단정한다. 다시 말하면 필름 느와르는 ‘시네마의 역사’에 속하기보다는 하나의 개념으 로서 ‘영화 비평의 역사’에 속하며 나아가 미국영화를 사랑하고 미국 영화의 이미지를 형성하기 원했던 사람들의 역사에 속한다는 것이다.28) 필름 느와르에 영향을 준 요소 또한 다양하다. 본문에서 언급한 내용이외에 유럽의 모더니즘, 독일의 표현주의, 프랑스의 실존주의와 시적 리얼리즘,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등이 동원된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필름 느와르에 대한 실체규명은 하늘에 떠있는 구름처럼 잡히지 않고 더 멀리 도망가는 형국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보다 분명하게 제시되는 것은 필름 느와르가 프랑스 비평가들에 의해 용어나 개념이 형성되었고, 1920부터 40년대 사이에 금주 법, 대공황,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범죄증가, 전통적 가족관 붕괴와 성인식 혁명, 직장여성증가에 따른 남성들의 공포감29) 등 미국 내에서 일어났던 획기적인 역사적 사건의 영향으로 삶과 의식, 가치관 등의 변화 속에서 당대의 문화와 정신을 반영하며 그 어떤 장르나 사조보다도 미국식 영화 스타일이 두드러지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필름 느와르의 유기체적 변모에 대해 폴 슈레이더(Paul Schrader)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필름 느와르는 자신의 사회적 조건을 공격하고 해석해 냈으며 느와르 시대의 종언기에는 단순한 반영을 뛰어 넘는 새로운 미학적 세계, 즉 반영이라기보다 창조물인 미국적 매너리 즘의 악몽 같은 세계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느와르가 무엇보다 스타 일이기 때문이고 갈등을 논리적이 아닌 시각적으로 해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잘 알고 있었고 사회학적문제들에 대해 미학적 해답을 창조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30) 필름 느와르가 대다수의 다른 할리우드 영화장르와 구별되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관객대중에게 도피처를 제공하고 그것으로 어떤 의도적인 현실괴리를 꾀했던 다른 장르와 달리 필름 느와르가 갖는 현실도피와 대리만족의 역할은 역사적⋅사회적 배경으로부터 생겨난 자연발생적인 것이었고 그만큼 더 절실한 것이었다. 이것은 비슷한 역할을 했던 스타시스템하의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물의 경우처럼 확연히 드러나는 형태의 것이 아니다. 전자가 거의 의도된 작용이었다면 필름 느와르는 사회에서 영향을 받아 그를 반영하고 그 안에서 스스로 유기체적인 변화를 일으켜 반작용으로 나타난 작용이다. 그것은 필름 느와르가 지닌 또 다른 성격, 즉 대공황과 전쟁이 일반대 중에게 강요했던 낙관주의적 미래상의 실현이 지체되는데 대한 반응으로서의 필름 느와르의 또 다른 숨겨진 역할이다.

    흔히, 필름 느와르는 그 명칭의 유래가 먼저 이야기되어지고 이어서 특징적인 시각적, 구조적 형식미에 그 분석이 집중되어, 영화사 가운데 갑자기 내던져진 특이한 존재처럼 인식되기 쉽다. 그러나 필름 느와르가 지닌 그러한 특성과 배경이 되는 역사적, 사회적, 특수성이 연계되어 고찰된다면 필름 느와르의 스타일이 왜 평가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바른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영화는 삶과 역사의 투영이고, 필름 느와르라고해서 그 수 없이 검증되어진 원칙에서 벗어날수 없기 때문이다.

    28)이영기, 앞의 책, 12쪽.  29)Joan Copjec, 『Shades of Noir』, Verso, London⋅New York, 1993, p.Ⅶ.  30)Paul Schrader, “Note on Film Noir”, 「Film Comment」(Spring), 1972,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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