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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A Comparative Study on the Discussion on the Role of Women During the Liberation Period(1945-1950) and Modernity in South and North Korea 해방기 남북한 영화에 나타난 근대성과 여성담론 비교 연구*
  • 비영리 CC BY-NC
ABSTRACT
A Comparative Study on the Discussion on the Role of Women During the Liberation Period(1945-1950) and Modernity in South and North Korea
KEYWORD
Modernity , Experience Of Women , Equality Of Sexes , Education , Political Activity , Social Labor
  • 1. 들어가는 말

    일제 강점기에 여성은 정치, 경제, 문화 모든 영역에서 거의 어떠한 권리도 가질 수 없었다. 전체 여성 가운데 90%에 달하는 여성이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해 문맹 상태였고 여성노동자는 16시간 이상의 노동에 시달리며 착취를 받았으며 식민과 봉건문화가 착종된 체제에서 노예적 생활에 시달렸다. 따라서 여성은 해방과 동시에 일본제국주의와 가부장적 봉건제도라는 두 가지 족쇄로부터 풀려날 것을 기대했다. 민족국가와 봉건타파는 근대를 향해 가는 길목에서 넘어야 할 문턱이었으므로 민주주의적 인간관계와 남녀평등에 대한 요구는 중요한 해방 과제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맞은 여성의 기쁨과 각오는 매우 높았으며 남북을 분할 점령한 미소군정의 민주주의 정책과 여성정책에 대한 기대도 고양되었다. 해방군의 이미지는 여성해방군의 이미지와 호환작용하며 해방은 사회 전체적으로 그리고 여성에게도 자기를 재정립하고 자기 아이덴터티를 재구축하는 계기로 인식된 것이다.

    여성에 관한 정책은 남한의 경우 미군정이 1946년 보건후생과에 부녀국을 설치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건설차원에서 여성관련 법령을 마련하며 시작되었다.‘민주주의 질서의 확립’을 표방한 미군정은 남녀평등권의 실현을 추구했으며 이는 구체적으로 부녀국의 설치, 공창제 폐지, 여성참정권, 교육정책으로 나타났다. 1946년 9월 14일 군정법령 제 107호에 의해 미군정은 행정부서 내에 여성관련 업무만을 전담하는 부녀국을 설치하였고4) 1947년 10월 28일 공창폐지령 제 7호의 발표로 공창제를 완전 폐지하였으며 1948년 3월17일에는 남한단독선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하였다. 북한은 소련의 영향을 받아 근대적 제도를 세우는 과정에서 남한보다 앞서 남녀평등정책을 추진했다. 1946년 7월 ‘남녀평등법’을 발표하였고 동년 11월 인민대의원 선거에서는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해방을 맞은 남북의 여성은 교육기회와 정치적 권리, 사회적 노동에의 참여기회를 얻었다. 근대와 여성의 관계 속에서 등장한신여성담론은 극소수이긴 해도 이미 일제 강점기인 1920-30년대에도사회적 이슈를 제공한 바 있었지만 해방공간에서 더욱 확대되었다. 해방 후 ‘오피스걸’로 불리는 사무직에 종사하거나 전문직에 종사하는여성들이 증가하며 자연스럽게 여성들의 사회활동도 늘어났고 여성의투표권의 획득도 이루어졌다. 해방으로 자유로워진 분위기는 여성들의패션과 머리에서 나타났고 여성도 교육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 며 여성교육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유지해온 유교적 풍습의 영향으로 여성의 자리는 복잡미묘할 수 밖에 없었다. 남한에서 미군정기 동안 찬미와 반미의정서 모두에 여성이 자리하고 있는가 하면5) 북한에서도 유교적 언술이종종 여성정책에 활용되기도 했다. 해방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들은 남성이냐 여성이냐에 따라 역할이 나뉘기 시작했고 이런 역할나누기는 소설, 라디오 드라마, 영화 등을 통해 담론화되었다.6) 따라서남북에서 최초의 해방영화로 지칭되는 <자유만세>(1946), <내 고향>(1949)그리고 해방기7)에 제작된 또 다른 남한영화들 <독립만세>(1948), <검사와 여선생>(1948), <마음의 고향>(1949)이나 북한영화 <용광로> (1950)8)와 같은 작품들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 영화들은 당시 일반적이었던 계몽적 성격의 영화규범을 따랐고 따라서 해방 후 달라지고 있는 여성들의 ‘욕망의 방향’을 담았다기 보다 여성의 규범적 모습, 여성정책의 지향성, 사회문화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당위, 위로부터 의 요구에 보다 방점이 찍혀 있었다.

    여성문제는 단순히 여성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적 세력들이 사회변동의 방향에 대해 가지는 정치적 견해나 전망을 보여준다고 할 때9) 당시 남북의 영화가 재현하는 여성상은 여성담론 뿐 아니라 해방 후문화의 재구축 과정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해방기 남북의 영화를 통해 근대성과 젠더가 교차하는방식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민족독립과 민중의 계몽 등 집단적 대의에 대한 헌신을 요구받은10) 조선의 여성에게 부여된 여성해방의 과제를 남북의 분열속에서현실과 담론을 교차하며 분석하기로 한다.

    2)김영석, 「혜란의 수기」, 『부인』창간호, 조선출판문화사, 1946년, 50-52쪽, 이임하, 「해방 뒤 국가건설과 여성노동」『역사연구』제 15호, 역사학연구소, 2005년 12월호, 33-34쪽에서 재인용.  3)「선거해석사업에 여성동맹활발」『조선신문』, 1946년 10월 2일.  4)군정법령 제 107호는 부녀국의 업무를 1)조선부인의 사회, 경제, 정치 및 문화적 개선에 관한여 군정장관에게 진언함 2) 조선부인의 지위 및 복지에 관한 자료를 모집하여 그 조사연구에 결과를 발표함 3) 조선부인의 복리증진을 위하여 좌기 사항에 관한 의견을 정부기관에 구신하며 그 표준과 방책을 제정함 으로 밝히고 있다. 이배용, 「미군정기, 여성생활의 변모와 여성의식」『역사학보』150호, 역사학회, 1996, 159쪽.  5)이윤미, 『한국의 근대와 교육』, 문음사, 2006, 334쪽.  6)이임하, 앞의 논문, 35쪽.  7)이 논문에서 해방기는 1945년 해방에서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소위 해방공간으로 불리는 시기를 말한다.  8)이 논문에서 언급되는 남한영화 4편과 북한영화 2편은 해방공간에서 제작되어 현재 한국영상자료원과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 영화가 남아있는 작품이다. 최인규 감독의 남한 영화 <자유만세>는 독립투사 한중이 감옥을 탈옥해 무장투쟁을 벌이다 일본의 앞잡이 남부에게 잡히지만 대학병원의 간호부인 혜자의 도움으로 다시 탈출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남한에서 최초의 해방영화로 인식되며 대중과 평론의 관심을 받았다. 최인규 감독의 다른 영화 <독립만세>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전야에 4명의 남녀가 전당포 주인 민가에게 복수극을 벌이다 부모형제를 찾고 독립된 나라에서 일할 것을 다짐 한다는 내용이다. 윤대룡 감독의 <검사와 여선생>은 남편의 살해범으로 몰린 여선생을 가난한 고학생 제자가 검사가 되어 무죄를 변론한다는 이야기이다. 윤용규 감독의 <마음의 고향>은 함세덕의 극본 <동승>을 영화화 한 것으로 어머니를 그리는 동승이 아들의 제사를 지내러온 안대감집 아씨에게 모정을 느끼는 과정을 그린 영화로 평론과 관객 모두의 지지를 받은 작품이다. 북한영화인 <내 고향>은 강홍식이 감독하였으며 소작인 관필이 최지주의 행패어 저항하다 감옥에 가서 그곳에서 김선생에게 사회주의에 대해 배우고 감옥을 탈출해 유격대로 활동하는 이야기이다. 북한 최초의 장편 극영화로 이 영화가 받은 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내 고향>과 동시에 제작되었으나 개봉시기가 늦은 <용광로>는 월북한 민정식이 감독한 영화로 주인공 용수가 내화벽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주의 노동과 창발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9)김수진, 『신여성, 근대의 과잉』, 소명출판, 2009, 25쪽.  10)김경일,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 푸른역사, 2004, 340쪽.

    2. 남북의 여성 교육 담론

    해방은 일제 강점기에 억눌려있던 대중 교육에 대한 집단적 욕망을 풀어놓는 계기가 되었다. “8ㆍ15이전에 이 땅의 교육은 참된 의미에 있어서 교육이 아니”11) 라고 인식될 만큼 일제는 조선인에게 보통교육이상을 허용하지 않았고 때문에 고등교육과 전문교육에 대한 잠재되었던 열망이 해방과 더불어 분출하였으며 집에서 살림만 하는 여성의 제도교육의 필요성도 제기되어 교육인구를 증가시켰다. 개화시기부터 이미 근대적 여성 제도교육이 시작되었지만 새로운 제도는 기존의관념을 새롭게 뒤엎고 해당 사회의 특정 문화적 맥락에 수용될 수 있는 과정 즉 기존의 규범내로 편입되고 조정되는 시간이 요구되었다.12) 그러나 일제강점기는 의식의 정체기로서 그러한 사회적 조건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에서 이루어진 제도교육의 실태를 총괄적으로 보여주는 조선총독부의 비밀보고서를 보면 1944년5월 1일 현재 조선에서 거주하는 남자 가운데 33%만이 교육을 받았고 이 가운데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0.2%이며, 여성은 89%가 무교육자이며 중등교육 및 고등교육 이수자는 각각 0.3%, 0.02%로 미미한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13) 해방은 이러한 정체를 해결하고 확대할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여겨졌다. 통계가 보여주듯 여성의 문맹률은 특히 높았고 중등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도 극히 미미해 여성은 교육의소수자에 속했다.

    남북을 각각 점령한 미국과 소련의 입장에서 교육정책은 점령지에자국의 이데올로기를 보급 확산하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미군정은 1945년 11월 ‘조선교육위원회(KCE: The Korean Committee on Education)’와 ‘조선교육심의회(NCEP: The National Committee on Edu-cational Planning)’를 설치하고 교육이념, 교육제도, 교육내용에 관한 전반적인 기획을 단행했다. 이 때 채택된 개방적 단선형 학제14)는 교육기회를 확대시켜 교육인구의 급격한 팽창을 가져왔다. 일례로 1949 년 조선은행조사부의 조사를 참조하면 1943년 2만명이 조금 넘던 남자 중학생은 1946년 6만명에 육박했고 1943년 2만명에 훨씬 못 미쳤던 여자중학생도 1946년에는 4만명에 거의 육박했음을 알 수 있다.15)또 조선교육심의회가 제안한 남녀공학제는 여성의 고등교육기회를 확대하는데 일조했다. 1946년 6월 서울사범대 부속 중학교가 남녀공학 으로 설립되고 동년 9월에는 연세대학교가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처음으로 남녀공학을 실시했다.16) 해방직후 여자대학교는 남한의 경우 이 화여대, 숙명여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뿐이었는데 이 가운데 이화여자대학교가 종합대학교로 승격하고 다른 대학들도 남녀공학제를 실시하자 여성들의 교육기회가 확대된 것이다. 이와 같이 여성의 중고등교육의 증가는 여성들이 근대문물을 접할 기회가 확대되었음을 뜻한다.

    남한의 첫 해방영화 <자유만세>에서는 미향(유계선 분)과 혜자(황려희 분)라는 뚜렷하게 대비되는 두 여성이 등장한다. 두 여인 공히 독립투사인 한중을 돕는 조력자 역할로 나오지만 부정적인 이미지로 재현되는 미향에 비해 혜자는 대학 병원의 간호부로 일하고 있는 전문직 여성으로서 소개되고 있다. 혜자는 해방 당시 확대된 여성교육의 혜택 즉 적어도 중등이상의 교육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당시 여학교의 교육과정이 비록 재봉이나 수예 등 실기수업의 비중이 높긴했어도 여성들이 근대문물을 접하는데 있어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음 을 감안할 때 혜자는 근대화된 신여성의 이미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있다.17)

    또한 혜자가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순간은 교회당을 배경으로 하여성경책과 목사부인이 직접 주었다는 꽃다발을 든 모습으로 화면화 되는 것인데 이는 서구를 매개로 이루어진 근대화의 혜택을 받은 인물임을 시각화한 것이다. 한국에서 기독교는 유교적 가부장제의 제한들로부터 여성을 이끌어 낸 ‘근대적’ 종교로 인식되었으며18) 단순히 종교로서가 아닌 서구화와 미국화의 매개로 여겨졌다. 기독교의 서구친화성은 일제 강점기보다 해방 이후 남한이 미군정의 지배를 받으면서더욱 강화되었다. 따라서 혜자의 첫 등장을 보여주는 화면은 그녀가기독교/서구 교육을 받은 근대화된 여성임을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이미지를 동반한 것이다. 또한 혜자의 인물구성은 교육받은 여성에 대한 당대 대중들의 기대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혜자는 미향과 대조적으로 첫사랑에 빠진 처녀로 그려지며 이러한 순결성은 하얀 간호복을 통해 더욱 강조된다. 따라서 미향이 한중의 독립운동을 도우려다 오히려 그를 위기에 빠트린데 비해혜자는 그러한 위기에서 한중을 구해냄으로써 남성의 조력자이자 파트너로서 민족과 국가의 임무를 완수하길 요구하는 당시의 신여성에대한 기대를 구현해내고 있다.

    <검사와 여선생>에서 여선생(이영애 분)은 고학생인 장손이 며칠동안 굶어 운동장에서 쓰러지자 그에게 도시락을 싸다주고 교과서를 사주기도 하는 등 교사와 어머니의 이미지를 공유 한다. 빌딩 사이로 전차가 다니는 도시 중심가는 장손이 살고 있는 판자촌이나 선생이살고 있는 한옥마을과도 대조되는 공간인데 선생은 교과서를 사주기위해 장손을 그곳으로 데려간다. 이는 교육받은 여성이 제자/아들에게근대의 성과물과 근대 교육담론의 다이제스트라고 할 수 있는 교과서를 전달해주는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여선생의 행위는 그녀가 이후에 살인죄로 기소되었을 때 검사로 성장한 소년의 증언에 의해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면죄의 근거가 된다. 영화가 말하는 것은 교육받은 여성은 자신뿐만 아니라 어머니로서 후대의 교육에도 책임이 있기 때문에그것을 적절하게 수행했을 때, 여선생이 남편과 법의 속박 양자로부터벗어났듯이 진정한 ‘해방’여성이 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이다.

    아직까지도 교육받은 여성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고 따라서 이들에게 요구되는 도덕성과 사회적 책임은 매우 높았다. 일제 잔재의 청소와 근대 민족국가의 구성이라는 해방의 정치적 과제는 여성들의 헌신을 요구했다. 특히 교육받은 여성들은 남성들을 도와 이러한 과제를실현할 것이 요구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여학교가 일제잔재청소와 여성으로서의 덕목 양성이라는 정부의 교육정책에 따라 ‘여성을 여성으로서’ 기르고 ‘국가에 도움이 되는’ 여성을 양성한다는 것을 목표로내세웠던 것도 이러한 요구의 일환이었다.

    한편 북한은 사회주의교육의 목표에 따라 여성교육을 실시했다. 사회주의 교육은 “공산주의 사상을 넣어주며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에필요한 지식을 가르쳐”19) 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북한은 소련식 교육제도를 도입해 1945년 ‘북조선 학교교육 임시조치 요강’을 발표했고 1946년에는 김일성 20개정강에서 교육정책을 최초로 언급했으며, 1947년 최초로 공식 학제를 인민학교 4년, 초급중학교 3년, 대학 4년체제를 선택했다가 1949년 개편하여 1년제 유치원을 3년으로, 인민학교를 5년으로 개정했다.

    북한의 첫 해방영화인 <내 고향>에서 관필이 야학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사회조건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나 관필이 들려준 한글강습을 통해 관필의 어머니(유경애 분)와 옥단(문예봉 분)이 관필의 깨달음을뒤이어가는 과정은 여성에게 교육이 왜 필요한가를 역설해주고 있다.“우리의 적은 일본놈과 지주”라는 어린 시절 관필이 책 읽던 소리는 중요한 장면마다 반복 호출되며 어머니와 옥단을 교육시킨다. 과거 사운드의 환기를 통해 어머니와 옥단이 민족의 적이 단순히 비민족인일제만이 아니라 지주계급도 포함하는 것임을 배우는 과정은 북한의 교육 목적이 공산주의 사상을 대중에게 가르치는데 있었음을 장면화 하는 것이다.

    공식 교육 외에도 북한은 1947년 11월 15일 ‘문맹퇴치사업조직에 관한 결정서’를 통과시키고 문해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북한 여성 가운데 95%가 교육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문맹퇴치사업을 통해 교육의소외계층인었던 여성은 교육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문맹을퇴치함으로써 인민들의 문화지식 수준을 더욱 높이며 주체적인 새 민 족문화건설의 전제를 확고히 마련해 놓을 수 있게 되었다”20) 이와 같이 문맹퇴치사업은 단순히 글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영역으로 불러와 활동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보다 직접적으로 여성교육 문제를 제기하는 또 다른 북한영화 <용광로>에서는 한글도 모르는 용연(문예봉 분)이 남편에게 온 급한 편지를 전달해주지 않아 낭패를 당하고 남편의 조수로 일하는 혜영에 대한 근거 없는 질투를 하다 연구소 방화범으로 몰리는 수모를 당하기까지 한다. 혜영은 남한영화 <자유만세>의 혜자와 마찬가지로 교육받은 여성으로서 남성 주인공 용수를 보조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기 때문에 사회주의 새일꾼에게 어울리는 여성으로 인식되고 있다. “여편네가 집에서 애 잘보고 집안일이나 잘하면 되지. 난 정말 글만은 못 배워”라고 말해 ‘알무식쟁이 여편네’라는 소리를 듣던 용연은 구시대의 망상에 사로잡혀 남편과 혜영의 ‘동지’로서의 관계를 이해하지못하고 석만일당에게 이용당하기까지 했으나 성인학교에서 한글을 배우면서 사회주의 생활의식을 익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용연과 혜영은겉모습으로는 남한 영화의 혜자와 미향의 차이만큼 구별되지는 않지만 남자동료들을 ‘동지’라고 부르며 거침없이 악수를 나누는 혜영은교육받은 북한의 신여성을 보여주는 것이자 북한 교육의 결과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성교육이 곧 여성을 사회주의화시킬 수 있는 방편임을 간파했기에 북한은 여성교육을 강조했다.

    해방 이래 교육담론은 정치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고 할 수있을 정도로 정치권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남북한이 분단된 상태에서 이념대립이 심각하게 전개되었고 교육정책은 이념교육 중심으로 전개되는 등 정치적 영향이 남북의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것이다.21) “....사회를 무시한 예술은 반대로 사회에서 무시당할 것이다....이런 의미에서 영화는 또 과학과 도덕과 정치와도 절대 분리할수 없는 것이다”22)처럼 체제를 불문하고 당시 영화는 공공연히 계몽적 요구 하에 있었던 만큼 영화는 교육담론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요컨대 영화 속의 여성인물들은 교육 정도에 따라 그위상이 갈라지며 교육을 통해 체제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것을 내화했음을 표상했다.

    11)안호상, 「건국기의 교육론」, 이길성ㆍ오만석 공편, 『한국교육사료집성-미군정기편 Ⅱ』,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5쪽.  12)이윤미, 앞의 책, 291-292쪽.  13)김수진, 앞의 책, 67쪽.  14)조선교육심의회에서는 6-3-3-4의 학제를 도입했는데 하급학교와 상급학교의 연결이 개방적이고 동급의 학교 사이에서 학생의 이동이 자유로우며 교육의 기회균등이 보장된 다는 이유였다.  15)이배용, 「미군정기, 여성생활의 변모와 여성의식」『역사학보』50집, 1996, 174쪽.  16)한국여성개발원, 『한국 여성교육의 변천과정 연구』, 한국여성개발원, 2000, 169쪽.  17)김수진, 앞의 책, 76쪽.  18)윤치호 선생은 “기독교가 한국에서 다른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하더라도 여성교육을도입한 것만으로도 우리의 영원한 감사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말한바 있으며 이화여대총장을 지낸 김활란도 자신은 기독교를 통해 서양의 문명을 흡수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윤미, 앞의 책, 각각 305쪽, 317쪽.  19)김일성, 「전국교원대회에서 한 연설」, 한국여성개발원, 『북한의 여성교육에 관한 연구』, 한국여성개발원, 2001, 25쪽.  20)김창호, 『조선교육사』3, 사회과학출판사, 1990, 248쪽, 신효숙, 『북한의 문화형성과 대중 교육』, 교육과학사, 2001, 21에서 재인용.  21)한준상ㆍ정미숙, 「1948-53년 문교정책의 이념과 특성」, 정해구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4』, 한길사, 2006, 343쪽.  22)김영신, <영화예술과 사회>,≪인민예술≫, 1945년 12월 창간호. 인용문 중 *표는 원문이 파손되어 해독이 불가한 글자임.

    3. 남북한 여성과 소비 담론

    해방으로 여성교육 인구가 증가하면서 여성의 사회진출과 경제활동의 계기가 새롭게 마련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에서도 일정정도 산업화와 근대화가 진전되었지만 조선인여성의 직업구조에는 큰 영향을주지 못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교육기회에서 제한을 받았을 뿐 아니라 고등교육을 받더라도 대부분 괜찮은 일자리는 일본여성이 차지하고 있어 조선인 여성의 자리는 그만큼 협소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해방이후 남한에 거주하는 여성인구는 1947년말 현재 약 1천만으로 추산되며 이 가운데 15세이상 인구는 약 530만이며 취업자는 약 180만이었다.23)

    여성의 전문직 진출의 증가는 앞서 본 여성의 교육증가와 밀접한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여전히 여성의 직업에서 농업(91%)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지만 미군정기에 교사, 의사, 간호사 등 여성의 전문직진출기회가 확대되었고 여경과 같이 새로운 여성의 경제활동영역이개척되기도 했다.24) 1946년 통계자료에 의하면 남한에서 여교사는 총 4,172명으로, 3,644명이 초등학교에, 430명이 중등학교에, 16명이 정규학교에 그리고 82명이 고등교육기관이나 전문대학에 종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25) 여성의 직업으로서 교사라는 직업이 이전부터 선호도가 높았기에 새로울 것은 없지만 그 증가양상은 뚜렷했다.

    이와 같이 여성의 경제활동이 늘어나고 해방의 자유로운 분위기의 형성 그리고 전재민들의 유입은 새로운 문화유입의 조건이 되었다. 남한에서는 미군정의 영향으로 미국문화로 대표되는 서양문화가 급속하게 퍼지면서 양장, ‘파마’머리, 색조화장 등이 유행했다. 1948년 2월 ≪경향신문≫에서 마련한 한 좌담회를 보면 참가자들이 양장과 파머 머리를 여성이 미를 지니는 신생활의 방식이라고 동의하는26) 등 서양식 생활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한편에서는 경계 의 시선도 만만치 않았다.

    위의 두 기사는 서로 다른 신문에서 발췌한 것이지만 해방 후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여성들의 서구식 옷차림이나 유행에 대한 경계를 풀어놓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해방의 씩씩한’ 분위기를 여성들이기괴한 옷차림으로 망치고 있으며 서구식 생활을 급하게 받아들여 결국 탈이 나게 될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근대에 대한 선망만큼이나 가중된 방어의식을 유연하게 변화를 흡수하고 있던 여성에게 덧씌워 놓았던 것이다.

    <자유만세>에서 미향의 방은 이러한 동경, 불안감 그리고 혼란감을 표상하고 있다. 미향의 방은 큰 침대, 피아노, 응접세트, 선풍기, 축음기, 유리찻잔 등 서구식 근대를 보여주는 물건들과 한쪽 벽면에 크게 걸린 서양화가 보여주듯 서구식 볼거리로 가득한 방이다. 이런 양풍물건들과 입식 생활은 일제시기부터 이미 서양영화를 통해 보여졌고 대중들 사이에서는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29)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향의 파머 머리와 짙게 칠한 그녀의 손톱은 미향을 부정적 이미지로 그리는데 일조한다. 한중은 미향에게 “당신이 한국 사람이라면날 좀 구해줘야겠소”라며 민족주의를 강요하지만 그녀에 대한 불신과 경계심을 버리지 않는다. 때문에 미향의 실수로 자신들의 아지트가 폭 로되자 한중은 그녀에게 거의 신경증에 가까운 폭력을 행사한다.

    <독립만세>에서 전당포 주인 민가에게 겁탈 당할 뻔한 선희가 경일(최인규 분)의 도움으로 피신해 몸을 숨기는 창고는 당시 한국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기 전날인 이 날밤 창고에 들른 사람들은 아편쟁이, 양품장사, 취객과 기생, 도박단과 형사로 해방기 신문지면에 단골로 오른 사회적 이슈의 주인공이다. 여기에서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싸움과 배신, 겁탈과 살인의 원인이되는 것은, 다름아니라‘돈이 되는’ 시계, 양담배, 만년필과 같은 양품이다.

    <마음의 고향>에서 서울에서 온 아씨(최은희 분)의 소지품은 첩첩산중의 절에서는 볼 수 없는, 도성(유민 분)으로서는 모두 처음 보는 물건이다. 아씨가 들고 온 양산, 양과자, 깃털부채는 도성에게 서울이자 어머니의 이미지를 대신하는 기호이다. 그러한 상품은 도성이 다시돌아보고 훔쳐보고 꿈에서도 볼 만큼 매혹적이다. 앞의 두 영화와 달 리 이 영화에서 서울 아씨의 양품들은 매혹적이되 단순히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도성의 친모와 달리 이러한 물건들을 소유하고 있는 서울아씨가 도성에게 양복도 사주고 대학까지 공부도 시켜줄 수 있는 인물이라고 여겨질 만큼 근대화의 산물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물건들은 도성에게 서울과 상품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도성이 깃털부채를 만들기 위해 과자를 새총으로 바꾸고 그것으로 산비둘기를 잡는 등 공동체의 규범을 어기고 살생을 하도록 유도한다. 근대의 물건들은 서울 아씨와 마찬가지로 아름답고눈길을 돌릴 수 없는 것이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으로 이끄는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북한에서도 여성교육의 증가, 여성대의원의 선출, 민주주의여성총동맹(이하 여맹)30)등 여성단체의 증가로 여성의 사회 및 경제활동이 증가했다. 각종 대학에서 340여명의 여학생이 고등교육을 받고 성인학교에서 36만 9천 7백여명이 문자교육을 받았다.31) 여맹의 회원수는 1945년 15만명이었는데 불과 1년 후인 1946년말에는 103만명으로 증가32)하여 활발히 조직사업을 펼쳤다. 또 1948년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총 572명 가운데 12%인 69명이 여성대의원이었으며 다른 전문직에서도 여성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최고재판소에 판사 2명, 도시군 재판소에 19명, 그리고 교장 및 교원 5,273명, 의사 47명이 활동했다.33) 또한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원칙에 의거해 여성의 경제기반이 확충되고 경제 기여도도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매체들은 이러한 현실의 변화와 일제시기에 비해 풍족해진 현실을 앞다투어 다루었지만 북한의 소비 개념은 남한과 대비되었다.

    북한에서는 사유제를 폐지해 개인, 가족적 단위의 소비경제를 사회적 단위의 소비경제로 전환34) 하기 위해 소비의 의미 자체를 바꾸고 자 했다. 레닌의 여성해방에 대한 견해를 토대로 북한은 사유제의 철폐가 사회구조의 평등적 변화를 가져온다고 믿었다. 사유제 이후 여성이 경제적으로 남성에게 종속되어 남녀불평등이 생겼으므로 사유제를 제거하면 여성의 해방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1946년 5월 소비조합을 창립해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함으로써 중간 이윤을 줄이고 유통단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폐해를 줄이고자했다.35) 노동인민이 요구하는 생활필수품을 직접 생산자로부터 구입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함으로써 중간 이익과 모리 간상배들의 부정을 막자는 취지였다. 북한에서는 각종 소비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소비만이 건전한 것으로 여겨졌고 이에 비해 사치와 낭비, 유행, 서양식 생활은 모두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락후하고 퇴폐적인 짜즈에 홀려 나락의 구렁텅이로 흘러드는”36) 남한의 여성들은 북한의 여성과 대비되어 그려졌다. 북한은 이러한 현실을 남한의 현실로 치부하고 북한의 매체에서 감춰버렸다. 따라서 소비와 관련된 담론에서 여성을 가정의 소비자로서 절약하는 생활을 통해 가정경제를 이끌어야 하는 주체로 만들고자 했다.

    이제 여성은 사회에서는 생산능률을 올리려는 건국의 투사이지만 가정에서는 “수입과 소비를 원만히 조절하여 한 집안 살림살이를 가장 원만히 운영할”37) 책임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여성은 남성과 달리 생산성 향상에만 전념해서는 안 되며 소비자로서 절약하고 낭비를 경계해야 한다는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북한영화에서 여성의 소비는 각 직장에 설치한 소비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국가가 잘 살게 해주었으므로 국가의 물건을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다”38)는 모범적 인식으로만 재현되었다.

    이와 같이 남북한은 근대화의 불안감을 여성의 이미지로 떠넘기려고 했다. 해방후 남북은 빠르게 전개되는 문화의 변화와 대중들의 풍족한 생활에 대한 기대감, 서구생활에 대한 동경에 대해 각종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의심과 경계를 보냈다. 영화에서 부정적인 여성은 서양식 생활이나 유행을 따르는 여성으로 재현되며 그것은 근대화가 촉발한 불안감과 두려움을 여성으로 치환하여 단속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3)문경란, 「미군정기 한국여성 운동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 1989, 25-26쪽.  24)1945년 12월 10일에 이화여자대학교에 의과대학이 신설되었고 1948년 5월 22일에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서울여자의과대학으로 승격하는 등 전문직으로 진출할 여성을 위한 교육기회도 증대했다. 이배용, 앞의 글 204쪽.  25)Summation of Millitary Goverment Activities in Korea, Vol. 34(1948년 8월호),pp.187-188, 이배용, 앞의 글, 204쪽에서 재인용.  26)<신생활을 말하는 여성좌담회>, ≪경향신문≫, 1948년 2월 1일.  27)<남성이 본 여성 화장과 의상>,≪서울신문≫, 1946년 10월 20일.  28)<문화풍속도/양풍과 유행>≪경향신문≫, 1948년 10월 23일.  29)연구자가 2010년 6월 25일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57명의 어르신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 해방 후 외국영화를 보며 풍족한 삶이나 서구식 물건들을 부러워했다는 대답이 많았다. 김용철(1927년생, 남자)은 외국영화를 보며 기계화되고 편리한 가정생활, 가스나 냉장고 등의 물건을 구경했고 결혼 후 가정을 그와 같이 꾸미고 싶어했다고 말했으며 유설자(1930년생, 여자)는 셜리 템플이 영화에 입고 나온 옷을 본따 직접 옷감을 사서 의상을 만들어입었다고 밝혔다. 이명자, 「미군정기(1945-1948) 외화의 수용과 근대성」 『영화연구』제45호, 한국영화학회, 2010, 302쪽에서 재인용.  30)1945년 11월 18일 ‘조선민주여성총동맹 북조선위원회’로 출발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배경을 안고 있다. 북조선 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는 1945년 10월 당주위에 군중을 결속시키기 위해 각 사회단체를 조직할 것을 제시했다. 뒤이어 김일성은 「현 국제국내 정세와 여성들의 과업」이라는 연설에서 “녀성들이 하나의 민주주의적 조직을 내오고 모두가 거기에 망라되어야 단결된 조직으로 새 조국 건설에 이바지 할 수 있으며 민주주의적인 교양과 조직적인 훈련을 받고 훌륭한 일꾼으로 자라날 수 있다”는 요지의 연설을해 여맹이 탄생하도록 유도했다.  31)<남녀평등권법령 발포 1주년과 북조선 여성들의 신생활>, ≪순간북조선통신≫, 1947년 8월 상순호, 국사편찬위원회, 『북한관계사료집』27, 국사편찬위원회, 1997, 37쪽.  32)국토통일원, 『조선노동당대회자료집』1, 국토통일원, 1980, 48쪽.  33)<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전체 녀성들에게 고함>,≪조선녀성≫, 1949년 2월호, 3쪽.  34)최선영, 「북한여성의 지위와 역할 변화:관련 법령분석을 중심으로」 『동북아연구』vol.23 no.1, 조선대 동북아연구소, 2008, 96쪽.  35)조흥희, 「북조선소비조합 탄생 2주년에 제하여」『소비조합』,1948년 5월호, 국사편찬위원회, 『북조선관계사료집』32, 국사편찬위원회, 1999, 127쪽.  36)「남녀평등권법령 실시 후 3년간」『조선여성』, 1949년 7월호, 44쪽.  37)김치순, 「우리 직장녀성은 이렇게 소비조합상점과 생활한다」『소비조합』, 1948년 12월호, 국사편찬위원회, 『북한관계사료집』32, 국사편찬위원회, 1999, 332쪽.  38)영화 <용광로>에서 용연의 대사 중

    4. 남북한 여성과 노동 담론

    해방은 다양한 해방과제를 산출하며 당위적으로 여성에게도 국가건설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여성이 해방과제에 참여하는 길이 여성에게 실제로는 호의적으로 개방되어 있지 않았다.

    미군정하 남한에서 미군정과 여성단체들은 여성노동에 대해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았고 대신 노동자 조직이었던 전평과 대한노총이 여성노동자를 호명했다. 좌파적 성격이 강했던 전평은 여성노동자에게 “인습을 버리고 건설에 나서라, 도탄에 빠진 민족을 구하는데 앞장서라”며 여성노동자를 “해방의 중심이요 가장 강력한 전위부대”라고 강조 했다.39) 이에 비해 대한노총은 전평과의 대립 속에서 여성노동자를 ‘생산전사’ 또는 ‘산업전사’로 호명했는데 이는 노동자의 생산성만 강조한 것으로 건국에 이바지하기 위해 무엇보다 생산을 많이 해야 하는 것이 노동자의 의무라는 사항만을 강조하고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40)

    전평 가입자 중 여성노동자의 비율이 25%이고 주로 여성노동자로 구성된 섬유조합원이 남한에만 2만명이 넘게 있었음에도41) 미군정은 공식적으로 여성노동에 대해 함구했고 그러한 태도는 영화에도 반영되었다. 미향과 혜자의 대립구도는 노동하는 여성(혜자)과 노동하지 않는 여성(미향)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러한 시각은 거의 배제되어 있다. 오히려 이들의 대립은 새 국가건설에 적합한 여성과 부정적인 여성, 남자주인공 한중에게 어울리는 여성과 그렇지 못한 여성이라는 대립으로 설정돼 있다. 대학병원의 ‘간호부’라는 혜자의 직업은 미향과 구별되는 혜자의 긍정적 이미지 구축과 훗날 부상을 입고 일제에 붙잡혀병원으로 호송된 남자주인공 한중을 구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검사와 여선생>에서 여선생은 결혼과 함께 학교를 그만두고 <마음의 고향>에서 노동계급인 도성의 친모가 ‘먹고살기 힘들어’ 자식을 절에 맡기고 떠났지만 ‘자식을 버린 야차같은 여자’로 말해지며 모성의 박탈을 경험하는 대신 ‘노동하지 않는 어머니’ 서울아씨는 도성을 제대로 키울 수 있는 ‘진정한’ 어머니로 말해진다. 요컨대 남한에서 노동하는 여성의 현실은 있었으나 이러한 여성에 대한 담론은 관련단체외에 영화를 통해 적극적으로 담론화되지 않았다. 당시 영화는 대중 계몽적 역할이 컸는데 영화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했다는 것은 노동여성을 부재로 표상하기 위한 전략으로 여겨진다.

    북한에서 김일성은 이미 여성노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김일성은 “여성동맹의 금후 과업”이라는 연설을 통해 “특히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로 건국사업에 적극 조직 동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의”42)가 있다며 여성동맹조직과 남녀평등권 법령반포가 여성과 남성을 동등한 주체로 규정한 것이라고 했다. 1946년 7월발표된 남녀평등권 법령은 전문과 본문 9조로 이루어져있는데 전문에는 “일본 식민지적 착취의 잔재를 숙청하고, 낡은 봉건적 남녀간의 관 계를 개혁하고 여성들로 하여금 문화와 사회 정치생활에 전면적으로 참여시킬 목적”으로 제정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본문에서는 동등한남녀평등권 및 동일임금과 사회보장과 교육의 권리, 자유결혼의 권리,자유로운 이혼의 권리, 결혼연령 규정, 일부다처제 및 공창, 사창, 기생제도의 금지, 남녀의 동등한 재산권 및 이혼시 재산 및 토지분배권, 조선여성의 권리에 관한 일본제국주의 법령과 규칙의 무효 등을 규정 하고 있다. 또한 1946년 9월 14일 채택된 ‘남녀평등권에 대한 법령 시행세칙’에서 여성은 남성과 같이 지방 및 중앙위원회 위원을 선거하며 또 위원에 피선될 권리를 가진다고 하여 앞서 보았듯이 제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여성대의원이 전체의 12% 가량 선출되었다. 이는 사회주의가 노동에 대한 시각을 바꾸었듯이 여성노동에 대해서도 긍정적 의미를 새롭게 구축해낸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가사노동을 사회노동으로 바꾸면서 여성을 사회로 이끌어낸 이면에는 여성의 노동력을 국가건설에 동원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내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섬유공장의 노동자로 고통 속에 갇혀 살던 옥단은비로소 해방이 되자 남자와 똑같이 토지를 받고 자기 땅에서 농사를지을 수 있게 되었다. 용연은 동생 정순으로부터 집에서 살림만 하려하고 여맹에도 무관심하며 국가건설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심하다는 말을 듣는다. 용연은 노동자의 연대나 우정을 믿지 않고 남편과 혜영 사이를 오해해 가출까지 했으나 동생 정순의 손에 이끌려 한글을 배운 후 용광로 건설을 방해하려는 석만의 음모를 밝히는데 일조하고 노동자 남편 용수의 성공을 돕는다. 이와 같이 토지개혁을 포함한 여러 민주개혁으로 여성들은 자기 땅을 소유하는 농민노동자로 활동하거나 국유화된 산업시설에서 ‘사회와 자기를 위한 노동’을 할 수 있는 경제기반을 확립할 수 있었다.43)

    그런데 남북한 영화에서 노동여성의 현실을 그리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해방기 남북에서 전형적인 ‘가련한 누이’로서 여성이미지가 재생반복되었다. 혜자는 한중을 연모함에도 불구하고 섹슈얼리티가 배제된순결한 누이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혜자의 이미지는 상황과 관계없이 교태를 부리는 미향과 대비되어 여학생이나 소녀의 이미지로 관객에게 각인된다. 혜자가 첫 등장에서 들고 있는 백합꽃이나 그녀의 하얀 간호복, 밤마다 남몰래 쓰는 일기는 이러한 소녀이미지를 강화하기위한 도상이다. 한중의 체포소식을 접한 혜자가 고민하며 길을 가던 도중 보게 되는 두 아이의 싸움은 강대국에게 점령된 약소국을 이미지화 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독해된다. 혜자가 작은 아이를 구해주자큰 아이가 혜자의 등에 진흙덩이를 던지는데 이는 흔히 여성을 통해민족을 말하는 것으로 더러워진 혜자의 간호복은 더러워진 민족의 순결성을 비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 가는 혜자의 뒤로 덮치듯 달려오는 군용트럭은 군국주의 지배 앞에 놓인 약소민족을 다시 한번 은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혜자는 폭력적 위험 앞에노출된 나약한 따라서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대상이 된다. <독립전 야>의 옥란과 선희는 밤거리의 폭력과 겁탈의 위협 앞에 노출돼 있는데 이들을 독립의 아침으로 인도하는 매개자는 남성이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옥란은 송의 도움을 받고 선희는 민가의 겁탈 위기에서 경일의 도움으로 겨우 도망친다. 내일이면 독립이 이루어지겠지만오늘은 민족에게도 여성에게도 아직 암흑이고 여명이 올 때까지 남성들의 도움은 필요불가결하다.

    북한영화 <내 고향>에서도 옥단은 남성을 매개로한 해방이 구원해주어야 할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옥단은 비록 관필을 통해 야학의 이야기도 듣고 글도 배웠지만 자신의 상황을 스스로 명확하게 인식하지는 못한다. 그녀는 그저 그것을 ‘가난뱅이 시름’으로 간주할 뿐이다. 그녀의 현실은 혁명동지들에게 자신의 고향이야기를 들려주는 관필의 내러티브에서 구체화된다. 일제에 의해 공출되어 강제로 고향에서 떨어진 어느 공장 노동자로 방직기계 앞에서 힘겹게 노동하고 있는 옥단의 이미지는 관필이 해방을 안겨주어야 하는 누이의 제유이다. 이장면은 공장 폭파, 다리 폭파 등 이후에 펼쳐지는 관필의 무장투쟁을 정당화하는데 기여한다.

    요컨대 남북한 노동담론은 여성을 국가건설로 불러들였지만 남한의 미군정은 공식적인 관여를 하지 않음으로써 노동과 여성관계를 전략적으로 은폐했고 북한은 여성노동력을 사회노동으로 끌어내기 위해 국가차원에서 노력을 기울였음을 확인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구원받아야 할 ‘누이’의 자리에 놓음으로서 당시 여성들의 소망이던 독립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은 미결의 과제가 되었다.

    39)이임하, 「해방 뒤 국가건설과 여성노동」『역사연구』제15호, 2005, 46쪽.  40)이임하, 앞의 글, 48-49쪽.  41)통계수치는 안태정,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현장에서 미래를, 2002, 94쪽, 111쪽, 이임하, 앞의 글, 52쪽에서 재인용.  42)김일성, 「여성동맹의 금후 과업」『김일성 저작집』2권, 조선로동당출판사, 1979, 214쪽.  43)박현선,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기의 여성정책」, 『해방전후사의 인식』5, 한길사, 1989, 426쪽.

    5. 맺음말

    해방은 남녀를 불문하고 조선 민중에게 기쁨과 환희를 안겨주었다. 특히 해방의 분위기는 여성에게 “조선인으로서 민족적 해방이라는 기쁨과 여성으로서 사회적 해방”44)이라는 기대감으로 들뜨게 했으며 한껏 여성들을 부풀려놓았다. 영화 특히 외국영화는 여성의 이와 같은 기대감에 일조했다. 해방 당시 조선영화의 제작기반이 무너져 내린 상황에서 일제 강점기에 한동안 수입이 금지되었던 외국영화들이 남북영화관을 차지했다. 남한에서는 미국영화가 주종을 이룬 가운데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의 유럽영화도 상영되었는데 이들 외화는 남한의 대중에게 서구식 생활방식과 문화 그리고 서구 민주주의를 소개해주었다. 북한에서는 소수의 중국영화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소련영화가 상영되 었으며 이를 통해 북한의 대중들은 소련의 사회주의화 과정과 사회주의 공동체와 노동, 사회주의 관계 등 새로운 생활양식을 경험했다. 그런데 이들 영화는 조선의 대중에게 특히 여성관객들에게 남녀의 민주적 관계, 남녀평등과 같은 새로운 의식을 불어넣어주었다. “서구문화가 소녀들에게 허용한 발랄함, 독립성을 선망”45)해서 외국영화를 좋아했다는 대답처럼 당시 영화관을 거의 독점한 외국영화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여성에게 새로운 남녀관계와 독립적인 여성상을 보여주며 조선여성의 현실을 반추하게 했다.

    그러나 남북한의 여성정책은 그 출발점이 여성자신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하고 국가에 의해 이루어졌고 혼란한 해방 정국에서 여성의 해방에 대한 좌우익의 시각은 매우 달랐다.

    앞의 두 인용문이 보여주는 것은 우익의 ‘현모양처론역할론’으로 전통적 남녀역할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두 기사는 여성은 ‘건국대업에 반분의 힘’이라도 보태야 하지만 ‘주책없이 여성의 본분을 벗어나서는’ 안되고 이것이 자기와 가정을 살리는 가장좋은 길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본질론적인 여성의 역할을 전제로 여성의 본분을 벗어나는 여성해방은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마지막 인용문이 대변하듯 좌익은 선(先) 민족 해방, 후(後) 여성해방론을 폈다. 여성해방이 중요한 과제이되 민족과 계급의 해방이 선차적으로 이루어질 때 의미가 있다는 논리이다. 초기 북한은 이러한 논리를 받아들여 여성해방의 의미를 평가했다. 남녀불평등을 사유제의 시작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북한은 “녀성문제의 계급적 기반을 보지 아니하고 초계급적인 녀성해방을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49)며 계급해방이 여성해방에 앞서는 중차대한 문제임을 분명히 했다.

    결과적으로 해방에 대한 여성의 기대는 상당부분 해방정국의 혼란과 길항하여 외면 받았다. 좌우대립과 남북분열이 기정사실이 되고 국민국가형성에 박차를 가하면서 여성들은 해방직후 가졌던 이중의 해방이라는 소망을 충족하기보다 이중적 젠더수행을 요구받게 된 것이다. 국가의 일꾼이자 가정에서의 부인이자 어머니라는 수행과제가 여성에게 할당되었고 이것은 체제의 다름과 관계없이 남북한 여성의 현실이 되었다. 해방이라는 혁명적 변화를 겪었지만 오랜 역사동안 구축한 봉건적 문화는 체제를 가로질러 여성의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북 한에 비해 남한에서는 입장이 다른 세력이 여성해방에 대한 의견을 개진했기에 단순화 하기 어렵지만 현모양처역할론을 주축으로 하는 우익세력의 득세로 교육받은 신여성은 국가건설에 참여할 것을 요구받으면서도 가정에서는 현모양처를 요구받았다. 좌파세력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정권을 세운 북한에서도 봉건적 남녀관계가 모두 바뀐 것은 아니었다. 북한의 여성은 국가건설에 남자와 동등하게 참여하는 노동일꾼으로 호명되면서도 계급, 산업화와 같은 남성적 과제를 위해 여성문제는 일단 유보한 채 남성을 도울 것을 요구받았다. 그 결과 거대 한 정치사회 격변 속에서 여성문제는 봉건적 현모양처론으로 패착하거나 국가과제의 가장 후순위로 밀려났다.

    혼란스럽게 착종된 담론에 놓인 여성은 영화 속에서 이러한 모순을 담지했다. 해방기의 남한영화 <자유만세>의 혜자는 교육받은 전문직의 여성이지만 순결한 소녀의 이미지로 한국과 동일시된 한중50)을 돕는 것이 독립운동 곧 국가의 과제를 수행하는 데 여자가 참여할 수 있는 길임을 보여준다. 미향 역시 자신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남자 주인공 한중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아이러니에 처한다. 혜자나 미향 모두 국가의 과제로 동원되지만 그녀들이 그 과업에 직접 나서거나 뛰어들어서는 것은 금지돼 있다. 여성은 남성 한중이 국가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도록 조력자의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 금지를 넘어서 한중의 독립운동 아지트로 들어온 미향은 일제의 앞잡이 남부의 미행을 당함으로써 한중과 국가과제 모두에 위협이 될 뿐이다. 그녀의 죽음은 남성의 과제를 감히 침범한 여성이 얼마나 가혹한 처벌을 받는가를 보여주는 경고의 메시지에 다름 아니다. <독립전야>에서 여성인물들은 더욱 수동적이 되어 여명/독립이 올 때까지 남성의 보호를 받으며 기다리고 <검사와 여선생>, <마음의 고향>에서 여성은 아들세 대를 키워내는 어머니의 자리에 머무른다.

    북한영화 <내 고향>의 옥단은 남성의 기억 속에 불행한 존재로 각인돼 무장투쟁의 동인으로 작용하지만 그녀의 존재는 현실보다 남성주인공 관필의 기억과 언술 속에서만 생생할 뿐이다. 또 다른 영화 <용광로>의 용연은 국가가 준 과제 곧 내화벽돌을 만드는 과제를 수행하는 남편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낸 결과 친정으로 보내지는 처벌을 받지만 석만 일당의 음모를 밝히는데 공헌해 남편의 내화벽돌이 성공적으로 나올 수 있게 되자 다시 가족 안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와 같이 해방기 남북 영화는 동일하게 남성이 주어진 국가의 업무를 잘 수행하도록 돕는 조력자로 여성을 의미화하여 여성의 정체성의 재구축이란 문제가 남성에게 부속된 문제임을 암시한다.

    다만 남한영화에서 계급적 시작은 철저히 단속된 바 여성노동자 문제를 전략적으로 배제하고 있으며 북한에서는 해방된 문화분위기를 사회주의 문화구성으로 수렴시키기 위해 근대화의 자연스러운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욕망을 남한 사회에 유폐시키는 것으로 자신들 사회에 내재된 불안감을 감추고자 했다.

    여성재현에 있어 정치적 올바름이란 문제를 떠나서 남북의 대중의 요구가 변화하고 여성상이 변화하고 있었던 현실이 영화에 반영되는 가하면 당위적 여성상이 영화에 재현되기도 했다. 그러나 남성주인공의 보조인물로 등장하는 여성은 그 등장 자체로 해방과제의 중요도에서 그만큼 뒤로 밀려난 여성 해방과제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문화의 변화를 민감하게 흡수한 여성이지만 전통사회의 내구성과 긴장관계를 조성하며 현실과 담론의 틈을 드러내거나 다른 한편 그 공고화에 역이용되는 여성의 복잡한 위상을 남북의 해방기 영화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방기 영화 속의 여성과 근대성 담론의 교차분석은 현대 남북한의 정치, 경제, 문화의 토대가 구축된시기로 평가되는 해방공간에서 남북한 여성의 문화경험의 차이를 인지하고 남북의 문화구축 방향과 그 과정을 비교함으로써 현대 남북한 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44)이각경, 「해방과 여성」『적성』창간호, 적성문화사, 1946년 31쪽, 이임하, 앞의 글, 36쪽에 서 재인용.  45)유설자(1930년생, 여자) 설문 중, 이명자, 「미군정기(1945-1948) 외화의 수용과 근대성」 『영화연구』제45호, 2010년 9월호, 한국영화학회, 2005, 305쪽에서 재인용.  46)최규동, <해방된 조선여성의 과오>, ≪부인≫창간호, 조선출판문화사, 1946, 41쪽, 이임하. 앞의 글, 39쪽에서 재인용.  47)현석술, <인테리 아내와 살림꾼 아내≫, ≪부인≫제2권 1호, 부인사, 1947, 16쪽, 이임하, 앞의 글, 39쪽에서 재인용.  48)이태준, <선후의 분별>, ≪여성문화≫창간호, 여성문화사, 1945, 10쪽, 이임하, 앞의 글, 38쪽에서 재인용.  49)리유남, <녀성문제와 녀성운동의 변천>, ≪조선녀성≫, 1949년 8월호, 38쪽.  50)한중은 스스로 한국이 자신의 애인이라고 말하는데 한중의 동료는 혜자에게 한중을 구해줄 것을 부탁하며 “최형을 구하는 것이 한국을 구하는 것이오‘라고 말하고 있어 한중이 한국과 등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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