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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세계화의 여성주의적 전유 Feminist Appropriation of Globalization
ABSTRACT

In lig ht of recent theoretical discussions on cosmopolitanism and cosmofeminism, this article sets out to find a new feminist vision and aesthetic in Lynn Nottage’s 2009 Pulitzer Prize winning play Ruined(2009) that can counteract both nationalism and globalization. First, problematizing both the patriarchal ideology of nationalism and its counterforce globalization, which is easily coopted by neoliberalist global capitalism, I suggest cosmopolitanism as an alternative ethical/aesthetic project determined to conceptualize and develop communities across cultural borders. Second, I trace the genealogy of cosmofeminist discourses that combine cosmopolitanism and feminism from Virginia Woolf’s Three Guineas and Robin Morg an’s “Global Sisterhood” to the most recent addition of Susan Stanford Friedman’s thesis on “cosmofeminism from the side.” Thirdly, drawing on Friedman’s delineation of “cosmofeminism from the side,” I analyze how Ruined challenges not only patriarchal nationalism and global capitalism but also the binary rhetorics of cosmopolitanism of “above” and “below,” “old” and “new,” “elite” and “vulgar,” and thereby creates a space for “horizontal cosmopoetics.” The essay particularly delves into how the play conceives ‘home’ as a part of the cosmopolitan that is itself a vital interlocutor in public laws and ethics and how Nottage’s dramaturgy achieves “gentle balance” and “fragile hope” by valorizing affective emotions and popular culture that had been ostracized by second-wave feminism. Finally, in the conclusion, I discuss three choices given to millenium feminist drama–postfeminism, postmodernism, cosmofeminism–of which I turn to the last as the most viable direction we should take.

KEYWORD
globalization , nationalism , cosmopolitanism , cosmofeminism , utopian sensibilities , popular aesthetics
  • 1. 서론: 민족주의와 세계화에 대한 여성주의적 대안

    몇 해 전 학술대회의 주제를 정하는 한 인문학 연구소의 회의에서 ‘탈민족주의’가 하나의 주제로 제시되자 참석자들의 냉소적인 반대의견이 쏟아졌다.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에 맞서는 식민국가들의 유일한 자구책이자 가장 효과적인 방패막이며, 결국 탈식민주의 논의는 미국을 필두로 한 (신)제국주의자들의 지적 회유책이자 속임수일 뿐이고 따라서 작금의 탈민족주의 열풍은 학문적 낭비이자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탈민족주의에 대한 익숙한 비판이었고 이 모두가 결국은 민족주의 담론이 심화, 성숙되는 과정으로 봐야한다고 가볍게 넘기면 될 일이었다. 더구나 한국위인전에 포함되어 있는 유일한 여성이 유관순 ‘누나’였던 우리 세대에 민족주의는 ‘남성적’ 담론이었고 필자는 참석자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정작 필자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민족주의에 대한 그들의 절대적 신뢰와 ‘미제국주의’에 대한 확고한 (동시에 매우 편리한) 적의에 강한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적 결단은 또다시 식민주의의 희생자가 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외부의 적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민족국가에 대한 갈망은 결국 시민사회에 대한 국가 권력의 헤게모니를 강화시켜주는 기제가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제국/가해자와 식민/희생자라는 민족주의의 이분법적 세계관은 삶의 다양한 문제를 민족문제로 환원시키고 계급과 성을 비롯한 여타의 정체성을 민족적 정체성에 종속시킨다.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억압이 민족의 이름으로 은폐되고, 민족주의 엘리트의 헤게모니가 민족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저서 『적대적 공범자들』에서 임지현은 민족주의가 국가주의의 동원전략과 국민 참여의 메커니즘을 전유하면서 권력지향적, 배타적 억압의 속성을 띠게 되는 점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최근 이스라엘의 폭격에 무참히 파괴된 가자지구의 상황을 보도하는 뉴스를 통해 ‘희생자’ 이스라엘이 ‘가해자’가 되어가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자기반성과 성찰이 없는 민족주의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경고를 다시한번 떠올리게 된다.1) 저항적 민족주의와 제국적 민족주의는 그 역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같은 권력 메커니즘을 공유하고 있다. 소위 저항적 민족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자행해온 내부적 억압과 자기모순에 주목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2)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탈민족주의적 해체는 이러한 자기반성과 성찰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신자본주의가 이끄는 글로벌 시장경제가 추동하는 세계화의 급류에 휩쓸린 결과라고 봐야한다. 본 연구의 목적은 로컬과 글로벌의 복잡한 역학 속에서 민족주의와 세계화 모두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여성주의적 비전을 구체적인 작품 속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글의 전반부에서는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코스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의 탈민족주의적 동력에 관한 이론적 논의를 살펴보고 그 중에서도 남성중심/경제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현재의 세계화에 대한 여성주의적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코스모페미니즘(cosmofeminism)의 의미와 의의를 고찰한다. 논문의 후반부는 이러한 논의를 미국의 여성연극에 적용하여 동시대 여성작가의 작품 속에서 코스모페미니즘적 사상과 미학을 추적해본다. 1970-80년대의 제2물결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계승하되 새로운 형태의 여성주의적 미학과 연대를 모색하고 있는 흑인여성 극작가 린 노티지(Lynn Nottage)의 작품 『폐허』(Ruined, 2009)를 통해 연극적 상상력이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을 넘어서는 방식을 살펴볼 것이다.

    1)바우만은 2003년 임지현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도덕성은 자신을 정당화하고 자기 성찰ㆍ자기 비판의 기회를 박탈한다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위험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임지현 대담,「‘악의 평범성’에서‘악의 합리성’으로」,『당대비평』 21 (2003): 12-32.  2)민족주의에 내재해 있는 배타성과 폭력성에 대한 비판적 연구는 국내외적으로 많이 진행되어 있는 상황이다. 영미권에서의 민족주의 비판은 근대성에 대한 비판과 연계되어 이루어지거나 탈식민주의 담론의 한 부분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도 이 주제는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일본 역사학자인 우에노 치즈코는 『내셔널리즘과 젠더』에서 “페미니즘은 국경을 넘을 수 있는가?”라는 화두를 던진 바 있다.

    2. 세계화, 지역화, 코스모폴리터니즘

    동서를 막론하고 세계화(globalization)가 21세기의 화두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의와 해석은 다양하다. 혹자는 세계화의 시작이 인류 문명의 시작과 때를 같이 한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이들은 세계화를 21세기 특유의 문화적, 경제적 특성으로 파악한다. 어떤 이는 세계화가 인류를 보편적 부와 번영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고 낙관하고 어떤 이는 그 끝에는 전지구적 재앙과 멸망이 있을 뿐이라고 경고한다. 사회학자인 롤랜드 로버트슨(Roland Robertson)은 세계화를 의식의 확장으로 이해한다. 기술과 교통의 발달로 세계가 좁아지면서 하나의 세계라는 의식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8). 개인/지역 의식의 전지구적 확장은 지구온난화와 같이 공동의 재난에 대한 각성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었으며 이는 타자에 대한 존중과 도덕적 관심을 키워갈 수 있는 기회와 계기를 제공하였다. 세계화란 일차적으로 문화적 현상이라고 보는 이들도 많다. 이전보다 활발해진 문화 교류를 통해 전지구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세계문화’(world culture)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의 ‘세계문화’는 강대국 문화로의 흡수를 통한 문화적 동질화, 또는 다양한 문화의 융합과 공존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러나 『문명의 충돌』의 저자인 새뮤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은 흡수도 융합도 아닌 “충돌”을 세계화의 귀결점으로 보았다. 따로 존재할 때 오히려 공존이 가능했다면 세계화로 인한 접촉의 증가는 불가피하게 충돌의 증가를 초래하게 된다. 9/11 테러는 헌팅턴의 불길한 예언이 현실로 나타난 순간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세계화를 추동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의식도 문화도 아닌 ‘돈’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웨인 엘우드(Wayne Ellwood)는 세계화의 근본 원인으로 “글로벌 경제의 통합,” “무역장벽의 해체,” “다국적 기업의 정치적, 경제적 파워의 확장”을 꼽았다(12). 세계화의 실체는 대량 생산, 대량 공급, 대량 소비를 위해 자본과 노동의 순환을 가장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글로벌 마켓의 개척에 다름 아니다. 연극계의 대표 세계화 상품은 브로드웨이 대형뮤지컬로 대변되는 소위 “맥씨어터(McTheatre)”이다.3) 『캣츠』(Cats, 1981)를 필두로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 1981),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 1986), 『미스 사이공』(Miss Saigon, 1989), 『라이언 킹』(Lion King, 1997), 『맘마 미아』(Mamma Mia, 1999)와 같은 대형뮤지컬은 현재까지도 전 세계 주요 도시를 휩쓸면서 막대한 이윤을 남기고 있다. 『오페라의 유령』의 경우 2009년까지의 집계에 따르면 글로벌 박스오피스 수입의 총계는 미화로 50억 달러($5 billion)를 넘는다. 이는 현재까지 역사상 최고의 흥행을 거둔 4개 영화의 총수입을 합친 것과 맞먹는 금액이다(Rebellato 40). 이들 뮤지컬의 세계적 성공의 비결은 철저한 팩키지 판매에 기반한 판권 관리에 있다. 판권을 사는 순간 스토리와 음악은 물론 연출, 무대장치, 무대의상, 조명, 포스터, 홍보전략 등 전체 패키지를 구입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런던, 토론토, 시드니, 도쿄, 싱가폴, 서울 등 지역에 상관없이 관객은 언제나 동일한 내용과 품질의 공연을 접하게 된다. 이는 품질의 표준화, 규격화를 통해 세계시장을 석권하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체제와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다. 한 뮤지컬 연출가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이건 더 이상 연극, ‘플레이’가 아닙니다. 공장의 조립라인과 똑 같아요, 회사지요. . . . 마치 공장의 한 지점을 운영하는 기분입니다”(Burston 75).

    세계화가 지배적인 흐름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이에 대한 저항도 거세지기 시작했다. 지역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은 무역장벽을 높여 지역경제를 보호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글로벌 푸드산업의 팽창을 억제하는 등 지역화를 위한 다양한 정치, 경제, 환경 정책을 실행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글로벌 자본으로부터 지역을 지켜줄 방어벽과 보호막을 강화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이를 전지구적으로 실행하고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글로벌 체제를 필요로 한다는 아이러니를 내포한다. 문화적 지역주의 역시 각각의 문화정체성을 단일하고 고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문화적 상대주의로 고착될 위험을 안고 있다. 제3세계 자민족의 문화적 가치에 충실한 것이 반드시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전근대적 민족주의와 가부장적 권력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이슬람의 명예 살인, 아프리카의 여성할례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문화적 고유성이 아닌 보편적 인간 윤리의 기준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지역화가 세계화의 생산적 대안이 될 수 없다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무엇인가? 댄 레벨라토(Dan Rebellato)는 코스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을 제3의 돌파구로 제시한다. 코스모폴리터니즘은 “모든 인간이, 저마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동등한 도덕적 보호를 받을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며 “전지구적 윤리 공동체를 육성하고 확장함으로써 그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다(60). 레벨라토는 코스모폴리터니즘의 초문화적 연대는 스스로를 세계시민으로 자각한 개인들의 자발적 참여와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제국주의적/자본주의적 기획에 의한 민족주의의 해체와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세계화가 초래한 불평등, 불의, 딜레마를 타계할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61). 샤밈 블랙(Shameem Black) 역시 코스모폴리터니즘을 진보와 계몽의 뉘앙스를 풍기는 ‘세계화’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제시한다.

    민족국가의 지경을 넘어 세계시민으로 자아를 확장하고자 하는 코스모폴리터니즘은 세계화만큼이나 그 역사가 길다. 이미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가 자신을 ‘세계시민’이라는 의미의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kosmopolitês)으로 지칭하였으며 근대 이후 코스모폴리터니즘은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칸트(Immanuel Kant), 마르크스(Karl Marx) 등의 철학자들에 의해 더욱 정교한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코스모폴리터니즘이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을 겸비한 엘리트 계층의 특권과 책임의식을 강조하는 “위로부터의 코스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 from above)이었다면 최근 새로운 관심을 받고 있는 코스모폴리터니즘은 급격히 진행되는 세계화 속에서 날로 늘어가는 난민, 망명자, 이민자. 이산자 등 서구 자본주의의 희생자들의 세계시민성에 대한 관심, 즉 “아래로부터의 코스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 from below)이다. 이들 이론은 빅토리아 시대의 ‘댄디’나 20세기 모더니스트 여행자, 그리고 오늘날의 항공사 단골 고객(frequent flyers)과 연관되는 “위로부터의” 세계시민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세계시민을 진정한 코스모폴리탄으로 정의한다(Robbins 1). 폴 길로이(Paul Gilroy) 역시 위로부터의 코스모폴리터니즘을 “갑옷을 두른 코스모폴리터니즘”(60)으로 비판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코스모폴리터니즘의 도래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와 같이 코스모폴리터니즘에 대한 최근 담론의 특징은 ‘위(above)’ vs. ‘아래(below)’ ‘구(old)’ vs. ‘신(new)’, ‘고급(high)’ vs. ‘통속(vulgar)’ 등 두 개의 극단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코스모폴리터니즘과 페미니즘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 코스모페미니즘은 이러한 지형 안에서 아래/신(新)/통속의 영역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겠으나 동시대 미국여성연극에 나타난 코스모페미니즘의 양상은 그와 같은 이론적/남성적 이분법의 경계를 매개하고 융합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 앞으로 전개할 이 글의 주요 논점이 될 것이다.

    3)“맥씨어터”란 글로벌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 맥도널드(McDonalds)에서 따온 용어로 전세계 어디서나 동질화된 ‘상품’을 공급하는 대형 프랜차이즈 뮤지컬을 의미한다. 다음(Daum) 영어사전은 맥씨어터를 “선전이나 특수 효과는 요란하지만 음악성·예술성은 부족한 대규모 예산을 투입한 대형 뮤지컬”로 정의하고 있다.

    3. 코스모페미니즘의 계보

    오랫동안 페미니스트 작가/학자들은 국경을 넘어서는 여성주의적 연대를 실현할 방안을 모색해 왔다. 그 중에서도 『3기니』(Three Guineas, 1938)를 통해 널리 알려진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유명한 선언은 탈민족주의적 페미니즘의 중대한 분수령을 이룬다.

    이 선언으로 울프는 페미니즘과 코스모폴리터니즘, 그리고 평화주의를 융합한 코스모페미니즘의 가능성을 열었다. 『3기니』는 유럽이 전쟁을 향해 박차를 가하고 있던 1930년대에 쓰인 울프의 반전 평화선전문으로, 전쟁을 막기 위한 활동에 기부금을 내 달라는 남성 변호사에게 보내는 답장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울프는 자신이 가진 3기니 중에서 1기니는 여성의 교육을 위한 대학 기관 설립을 위해 기부하고 두 번째 기니는 여성의 전문직 진입을 돕는 데 기부하겠으며, 마지막 세 번째 기니만을 편지를 보낸 남성에게 보내겠노라 답한다. 전쟁을 막기 위한 근본 대책으로 여성의 교육과 사회진출의 중요성을 제시함으로써 남성 중심의 영국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한 것이다. 울프는 또한 군대, 정부, 법 등 국가의 주요 시스템으로부터 배제된 여성들이 민족국가 체제에 대항할 새로운 가치형성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울프가 코스모페니미즘의 창시자에 해당한다면 로빈 모건(Robin Morgan)은 울프의 선구적 이상을 이어받아 흩어져 있는 세계의 페미니스트들이 공유할 수 있는 공동의 가치를 구상할 것을 주장한 1980년대 미국의 여성운동가이다. 모건에 의하면 민족국가의 근간이 가부장주의인 이상 “모든 여성은 문화권을 불문하고 민족주의와 근본적으로 적대관계에 있다”(23). 모건의 국제 여성운동 선집인 『자매애는 전지구적이다』(Sisterhood Is Global: The International Women’s Movement Anthology, 1984)는 페미니즘이 “세계시민사회를 위한 전지구적 시금석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담고 있다(Black 229).

    그러나 글로벌 페미니스트 공동체라는 울프와 모건의 이상은 서구/백인 여성 중심의 보편주의적 기획이라는 “아래로부터의” 비판을 피해가지 못했다. 제3세계, 유색인종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 가부장주의만큼이나 그들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인종주의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민족이라는 보호막이자 공동체의 토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탈민족주의적 여성연대가 실재하는 무수한 차이들을 간과하고 여성의 힘을 서구/미국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하는 또 다른 제국주의적 기획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전지구적 자매애라는 구개념을 대체할 새로운 형태의 연대가 필요하다. 따라서 현재의 코스모페미니즘 논의는 지역에 뿌리박은 차이를 인식하고 존중하면서 초국가적, 초문화적 연대를 이룰 수 있는 방안을 함께 모색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최근 발표된 수잔 스탠포드 프리드만(Susan Stanford Friedman)의 연구는 매우 유효한 새로운 개념틀을 제시한다. 프리드만은 논문 「전쟁시기의 코스모폴리터니즘: 버지니아 울프의 『3기니』와 마제인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에 나타난 코스모페미니즘」(“Wartime Cosmopolitanism: Cosmofeminism in Virginia Woolf’s Three Guineas and Marjane Satrapi’s Persepolis”)에서 위/아래, 구/신, 고급/통속 등의 이분법적 구분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현재의 코스모폴리터니즘 논의가 기존의 계급적, 인종적 구분을 더욱 강화하는 부작용을 양산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코스모페미니즘을 통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프리드만은 울프의 『3기니』와 이란계 프랑스인 예술가 사트라피의 회고록 『페르세폴리스』(2000)를 각각 “위로부터의 코스모폴리터니즘”과 “아래로부터의 코스모폴리터니즘”의 예를 설명한 뒤 이들이 인종적, 지역적, 역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젠더를 기반으로 한 폭력에의 저항과 자국의 전쟁 앞에서도 세계시민주의적 평화를 옹호하는 여성주의적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울프와 사트라피의 작품은 각자가 처한 구체적 상황과 맥락에 근거한 여성주의적 비판을 시도하고 있지만 동시에 인종적, 역사적, 계층적 구분을 넘어서는 코스모페미니즘의 유토피아적 열망을 공유하고 있다. 프리드만은 이를 “옆으로부터의 코스모페미니즘”(cosmofeminism from the side, 25)으로 명명하고 차이를 아우르고 포용하면서 서로의 곁에서 작동하는 새로운 개념의 코스모페미니즘의 특징을 논문 전반에 걸쳐 상세하게 논의한다.

    프리드만이 설명하는 “옆으로부터의 코스모페미니즘”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옆으로부터의 코스모페미니즘”은 역사적, 인종적, 계층적으로 이질적인 작품/관점의 병치(juxtaposition)와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특징으로 한다. 옆에 두면 홀로 있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드러난다. 2. “전지구적 자매애”(global sisterhood)라는 보편주의적인 관점을 지양하고 종교, 인종, 계급, 젠더 등에 의해 소외되고 배제된 경험을 공유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잠재적 “입장”을 선택한다. 3. 교차 정체성(intersectional identities)의 유동성과 복합성을 반영하고, 수직(above/below)이 아닌 수평(beside)적 레토릭 안에서 작동하며, 결과적으로 전이적, 매개적, 경계적 특성을 갖는다. 4. 인류를 정형화된 그룹으로 나누고 분류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변화하는 권력관계에 주목한다. 5.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을 나누는 경계를 허물고 통합하는 “코스모포에틱스”(cosmopoetics)를 지향함으로써 다층적인 텍스트성, 생산성, 수용성을 함양한다. 6. 민족국가의 정체성과 정서적 연대를 통째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를 계속적으로 문제화함으로써 그 형성과정에 더욱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한다. 7. 전이적이고 통합적인 코스모포에틱스는 민족과 지역을 초월하여 자유롭게 부유하는 포스트모던적 유희성과 구별된다. 차라리 그것은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 처해있으나 그것이 부과하는 지리적, 문화적 상상력의 한계와 경계를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다. 8. 옆으로부터의 코스모페미니즘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글로벌과 로컬의 접속에 깊숙이 관여한다.

    한편 코스모폴리터니즘 담론 확장에 기폭제 역할을 한 『코스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의 편집자들은 코스모페미니즘을 기존의 민족주의와 세계화가 제기한 문제점을 젠더를 중심으로 접근하는 입장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들은 사회, 정치문제 등 거대담론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주류 코스모폴리탄 담론들과 구별되는 코스모페미니즘의 특징으로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 내재한 세계시민성에 대한 탐구를 지목한다.

    본 논문은 프리드만의 이론적 통찰을 현대미국연극에 적용하여 동시대 여성극작가의 작품 속에서 “옆으로부터의 코스모페미니즘”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밀레니엄 여성연극의 지형 속에서 그 정치적, 문화적, 미학적 의미를 규명하고자 하는 큰 프로젝트의 첫 장에 해당한다.4) 이 글은 그 첫 작품으로 미국의 흑인여성 극작가 린 노티지의 『폐허』(2009)에 집중하여 이 작품이 위/아래, 고급/통속의 이분법적 레토릭을 매개, 융합함으로써 “옆으로부터의 코스모페미니즘”의 수평적 미학을 만들어 가는 방식을 추적하고자 한다. “세계시민성의 일부로서의 가정 공간에 대한 비평적 실천”이라는 코스모페미니즘의 특징에 천착하여 기존의 가정/가족의 개념이 글로벌 자본과 기술이 유입되면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살펴보고 그 과정에서 극 중 여성인물들이 가부장적 국가주의와 획일적인 세계화에 대항하는 제3의 대안을 만들어 가는 방식을 상기한 코스모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4)향후 이 프로젝트에서 다룰 동시대 미국여성극작가의 작품에는 린 노티지 외에 키아라 알레그리아 휴디스(Quiara Alegria Hudes)의 엘리어트 삼부작—『엘리어트, 한 병사의 푸가』(Elliot, A Soldier’s Fugue), 『물 한스푼씩』(Water by Spoonful), 『가장 행복한 노래는 마지막에』(The Happiest Song Plays Last)—새라 룰(Sarah Ruhl)의 『죽은 남자의 핸드폰』(Dead Man’s Cell Phone), 배쉬 도란(Bash Doran)의 『친족』(Kin) 등이 포함될 것이다.

    4. 린 노티지의 『폐허』: 글로벌 자본과 비평적 실천 공간으로서의 “홈”

    수잔 로리 팍스(Suzan-Lori Parks)에 이어 흑인여성 극작가로서 두번째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린 노티지의 『페허』는 내전으로 망가지고 폐허가 된 콩고 여성들의 삶을 다루고 있는 연극으로 그 주제에서부터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국가정체성을 뛰어넘는 작가의 코스모폴리터니즘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노티지는 21세기 버전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Mother Courage and Her Children)을 구상하던 중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피해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콩고 내전의 참혹한 현실을 알게 된다. 이 작품에서 노티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있거나 언론 보도를 통해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하고 있는 콩고의 분쟁 사태를 널리 알리고 특이 어린아이들과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것임을 고발하고 있다. 무엇보다 1960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이후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내전의 근본적인 이유가 콩고의 풍부한 광물자원에 대한 글로벌 차원의 이익 다툼에 있음을 고발하고 콩고 내전의 장기화로 인해 경제적, 정치적 이득을 챙기고 있는 강대국들, 초국가적 기업들, 그리고 콩고의 가부장적 남성 지도자(반군과 정부군 모두)의 추악한 연결고리를 폭로한다.

    노티지가 드러내는 전지구적 연결고리는 콩고 내전을 자칫 이국적 뉴스거리로 넘겨버릴 수도 있는 평범한 관객까지도 포함시킨다. 콩고의 풍부한 자원 중에서 전 세계 매장량의 80퍼센트를 보유하고 있는 콜탄이라는 검은 광석은 휴대전화를 비롯한 전자기기의 과열을 방지하는 부품의 주원료로 사용된다. 21세기에 들어 전세계적으로 휴대폰 및 전자기기의 사용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글로벌 시장에서의 콜탄의 가격이 폭등하자 이를 선점하려는 국가간, 기업간, 종족간 투쟁이 악화되고 콩고의 내전 또한 더욱 참혹하고 극렬한 양상으로 치닫게 된다. 그러므로 콩고 내전은 단지 아프리카 종족간의 민족분쟁이 아니라 글로벌 전쟁이다. 전 세계의 휴대폰 구매자들, 전자기기 사용자들도 글로벌 자본주의의 체제 안에서 콩고의 분쟁을 초래하거나 유지하는데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먼 나라 콩고의 공포와 참상이 이제 내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핸드폰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 모두가 전지구적으로 연결된 치밀한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그러므로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 폭력에 대해서 그 누구도 무죄일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전 세계 흑인 여성에 대한 노티지의 강한 코스모페미니즘은 본격적인 극작의 길에 들어서기 전에 국제사면위원회의 언론담당관으로 일한 경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페허』를 준비하면서 그녀는 책상에만 머물지 않고 두 번이나 아프리카를 방문하여 피난민 수용소에 기거하는 수많은 전쟁 피해 여성들을 직접 만났다. 인터뷰에 응했던 여성들은 민족과 종족의 이름으로 지속되고 있는 전쟁 속에서 상대편의 가정과 종족을 파괴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행된 무수한 성폭력을 통해 철저하게 “망가진”(ruined) 여성들이다.5) 그러나 노티지는 그들에게서 피해자의 위치에만 머물지 않는 강인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결국 『억척어멈』의 현대 버전을 쓰려던 애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상처와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그들의 강인함과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작품을 쓰기로 결심한다(“Out of East Africa” 68).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억척어멈』의 강한 사회주의적 비판보다는 여성의 경험과 그 극복의 가능성에 초점이 맞추어진 “인본주의적 보고서”에 더 가까운 연극으로 탄생한다(Gerner 21). 그러나 동시에 제목을 『억척어멈』의 대사에서 따오고,6) 주인공의 이름을 “마마”로 설정하는 등 억척어멈과의 병치와 상호텍스트성을 유지함으로써 “옆으로부터의” 정치적, 미학적 의미를 생산하고 있다.

    극의 배경인 콩고의 작은 탄광마을에서 주인공 마마 나디(Mama Nadi)가 운영하는 술집이자 사창가는 제국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의해 무참히 망가진 콩고 여성의 상황을 함축하는 메타포이면서 동시에 이에 대한 노티지의 여성주의적 대안이 실험되는 이중적 상징의 공간이다. 『폐허』는 성폭력 이후 자신의 가족과 종족으로부터 추방되어 마마 나디의 술집으로 흘러들어 온 여성들의 이야기로 마마의 술집은 그들의 ‘사업장’이자 ‘집’이며 마마는 그들의 ‘고용주’이자 ‘마마’이다. 그녀의 술집에 물건을 공급하는 세일즈맨 크리스챤(Christian)이 집단 강간으로 불구가 된 자신의 조카 소피(Sophie)와 집에서 반군에 의해 납치되어 그들의 캠프에서 수개월 동안 성폭력을 당한 뒤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살리마(Salima)를 데리고 와서 마마에게 부탁할 때 그녀는 마치 억척어멈처럼 “나는 사업을 하는 것이지 선교를 하는 게 아니다”(14)라고 냉정하게 대꾸하지만 결국 두 사람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보호자를 자처하게 된다. 후에 마마는 망가진 소피의 몸을 치료하기 위해 오랫동안 간직했던 다이아몬드를 아낌없이 내놓고 살리마를 받아들이면서 “이제 여기가 너의 ‘홈’”이라고 말한다(This is your home now, 66). 노티지 자신도 이러한 마마의 양면성을 인지하면서 “그녀가 그들을 착취하지요, 그러나 동시에 다소 뒤틀린 방식으로 그들을 양육하고 생존하게 해줍니다”라고 설명한다(Gerner 21). 마마 나디는 비윤리적인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인물로 그녀의 냉정함과 단호함은 그녀의 ‘집’에 머무는 젊은 여성들의 ‘가모장’으로서 요구되는 현실적 능력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마마는 억척어멈보다는 담배공장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계속 돕기 위해 무자비한 자본가 슈이타(Shui Ta)가 필요했던 『사천의 착한 사람』(The Good Woman of Setzuan)의 센테(Shen Te)와 닮았다. 마마는 변장이라는 트릭도 없이 센테와 슈이타 두 역할을 혼자서 감당하는데 그러한 양가적이고 모순된 역할은 그녀의 사업장이자 ‘홈’인 술집에 그대로 투영된다. 전연희는 마마의 술집을 “화해와 치유의 공간”으로 명명하면서 “그녀가 자신만의 엄격한 상업적 원칙을 바탕으로 자신의 공간에 맞는 법과 규칙을 철저히 고수하는 인물”이라고 분석한다(184). 실제로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정부군 최고 사령관인 오셈벤가(Osembenga)도, 반군 지도자 키셈베(Kisembe)도 동일하게 바깥세상의 남성적 “무기”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나 마마가 자신의 공간을 “어떠한 외부의 규칙도 허용하지 않는독립적인 공간으로 지켜 나간다”(184)는 전연희 주장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고수하는 “정치적 이념으로부터 독립된 규칙”이란 철저하게 “상업적인 원칙”이기 때문이다. 정부군, 반군, 광부, 다국적 중개상 등 민족적, 이념적 차이를 불문하고 모든 남성들에게 술과 몸을 파는 그녀의 술집은 돈으로 모든 권력관계가 결정되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공간이다. 여성의 몸/콩고의 땅을 폭력적으로 착취하고 지배하는 로컬/글로벌 전쟁이 벌어지는 바깥세상의 권력구조가 마마의 술집에도 그대로 투영되기에 그녀의 집은 결코 그녀만의 “독립적인 공간”이 될 수 없다. 이는 살리마의 집도 마찬가지다. 반군은 아이와 함께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그녀의 집을 침입하여 그녀를 납치했으며, ‘망가진’ 그녀를 그 집은 결코 받아주지 않았다. 살리마의 ‘집’도 마마의 ‘집’도 민족주의 분쟁과 글로벌자본주의를 추동하는 가부장적 가치와 규범으로부터 그들을 완전히 지켜주지 못한다. 코스모페미니즘이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을 세계시민성이 투영되고 협상되는 비평적 실천의 공간으로 파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마마의 ‘집’이 다른 가부장의 ‘집’과 다른 점은 마마가 자신의 집/가정을 “법, 정치, 공적 윤리의 중대한 교섭자”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마는 바깥세상의 규범과 법을 전면적으로 수용하지도, 극단적으로 거부하지도 않고 충돌하는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갈등과 젠더 이데올로기들 사이에서 계속적으로 “교섭”과 “협상”을 시도한다. 그 결과 마마의 집은—그녀 자신처럼—외부에서 벌어지는 공적 전쟁의 연장이자 그로부터의 사적 피난처라는 이중의 상징성을 가지게 된다. 마마는 자신의 집에 머무는 젊은 여성들을 상업적으로 착취하지만 바깥세상의 더 큰 착취와 불행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한다. 이 때 ‘바깥세상’에는 기존의 가정도 포함되는데 후에 살리마의 남편 포춘(Fortune)이 찾아와 그녀를 다시 내놓으라고 협박하자 다시 ‘가정’으로 되돌려 보내야 한다는 다른 여성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마마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내 아이들은 . . . 그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마을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여기 있는 편이 낫다. 그들의 집에 있는 것보다 나와 함께 있는 게 더 안전해”(86). 마마의 ‘유사 가정’은 바깥세상의 합법적 가정보다 더 안전하다. 가족도 사업도 합법적이지 않은 마마의 ‘홈’은 그들에게 공적 정체성을 부여할 수 없지만, 바로 그 때문에 공적 박해와 폭력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다.

    마마는 이러한 양가성, 개방성, 유연성을 자신의 집을 지켜낼 수 있는 중요한 전략으로 파악한다: “술집의 출입문은 양쪽으로 흔들리며 열리고”(86), “내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서 문제가 여기 고여 있지 않는다”(76). 주인공 마마와 그녀의 ‘집’이 가지는 이러한 경계적, 다층적, 유동적 특징은 식민주의와 민족주의의 정형화된 공간/정체성의 이분법을 해체함과 동시에 글로벌 자본주의의 획일적 지배에 균열을 가져온다. 이를 통해 글로벌과 로컬의 밀접한 관련성을 제기하고 ‘가정’이라는 민족주의의 ‘이상적’ 안식처를 세계시민성을 담지한 복합적 지형으로, 법, 정치 등 남성적 윤리와의 교섭을 수행하는 여성주의적인 “비평적 실천의 공간”으로 재전유한다.

    5)콩고 민주공화국은 “전 세계 강간의 수도”라고 불리워질 정도로 내전에서 강간은 효과적인 “전쟁의 무기”로 사용된다. 2010년 미국 의학협회지에 따르면 콩고 동부 지역 여성의 39.7%가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여성 다섯 명 중 두 명이 강간을 당한 것으로 나타난다(김소임 447).  6)“사람들은 나를 억척어멈이라고 부르지. 파멸당하는 게 두려웠거든 그래서 빵 50 덩어리를 수레에 싣고 미친 여자처럼 전쟁터를 휘젓고 다녔지(They call me Mother Courage because I was afraid I'd be ruined, so I drove through the bombardment of Riga like a madwoman with fifty loaves of bread in my cart)"(Mother Courage and Her children 10).

    5. “옆으로부터의 코스모페미니즘”: 유토피아적 결말과 대중적 미학

    『페허』는 페미니즘과 반전주의, 그리고 전 세계를 “내가 속한 나라”(my country)로 인식하는 코스모폴리터니즘이 결합된 울프의 코스모페미니즘을 계승할 뿐만 아니라 고급과 통속,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적 경계를 넘어 새로운 연대를 모색하는 코스모포에틱스(cosmopoetics)의 특징을 보여준다. 우선 『폐허』는 노티지의 다른 작품에 비해 가장 높은 대중성을 갖춘 작품이다. 이는 무엇보다 이 작품이 채택하고 있는 사실주의적 형식에 기인하는 바가 큰데 이전까지의 노티지의 작품은 실험성이 강한 표현주의와 아방가르드적인 반사실주의가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Shannon 196). 강한 사실주의적인 특성은 사회문제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보다 넓은 관객층과 소통할 수 있는 ‘보편성’에 대한 노티지의 의지가 녹아 있다고 봐야 한다. 그녀는 2009년 이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이후 『LA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선동적이지 않는 이야기, 보편적이면서도 서사적이고 뻔뻔스러울 정도로 연극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진실하면서도 즐거운 무엇인가를 말이다”라고 밝히고 있다(김소임 441 재인용). 하루 빨리 보다 많은 이들이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콩고 여성의 참상을 전해야한다는 절박함도 사실주의적 틀을 선택한 중요한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폐허』가 전형적인 사실주의의 틀에서 벗어나는 지점에서조차 브레히트의 정치극과 같은 아방가르드쪽으로 선회하지 않고 ‘멜로 드라마’라는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방향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이 학자와 비평가들로부터 가장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은 장면 중간 중간에 삽입되는 노래와 춤—2장에서 소피가 부르는 “당신은 잊기 위해 여기 왔어요”(You C ome Here t o Forg et), 4 장에서 부르는 “희귀한 새”(A Rare Bird), 2막 1장에서 마마와 소피가 부르는 “전사”(A Warrior)—그리고 마마와 크리스챤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 “유토피아적 결말”(utopian denouement)이다. 이 극에서 노래의 사용은 브레히트의 서사극과 정 반대의 기능을 수행한다. 서사극에서의 노래가 극중 인물과의 감정 이입으로부터 거리를 만들어 인물의 상황과 생각에 대한 관객의 비판적 성찰을 유도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면 『폐허』에서 소피와 마마가 부르는 노래는 오히려 극 중 인물들의 감정을 섬세하고 강렬하게 표현함으로써 이에 대한 관객의 연민과 감정적 몰입을 유도한다.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노래와 춤이 작품의 어둡고 무거운 정치적 메시지를 희석시킨다는 비판을 받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극 중 소피와 마마의 노래와 춤이 사창가에 온 ‘고객’들을 대상으로 공연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노래와 춤이 남성의 성적인 응시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김소임 457).

    그러나 자신의 노래가 “스토리의 조화로운 질서를 말하려는 외침/울음”(A cry that tells a story, harmonious, 38)이라는 소피의 강변은 그녀가 현실의 혼돈과 무질서에 대비되는 노래의 하모니와 서사적 질서를 통해 강간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치유를 경험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노티지의 드라마터지가 브레히트와 근본적으로 결별하는 지점은 바로 감정과 정서를 통한 소통과 공감을 부끄러워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충분히 예상되는 비판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시도한다는 것이다. 『폐허』에서 노래와 춤의 사용은 일상적 규범과 논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해방적 경험을 제공하는데, 이는 리차드 다이어(Richard Dyer)가 뮤지컬의 특징으로 설명하고 있는 “유토피아적 충동”과 그대로 일치한다. 다이어는 그의 획기적인 에세이 “엔터테인먼트와 유토피아”(Entertainment and Utopia)에서 뮤지컬의 노래와 춤, 이상적 서사는 일상의 불완전성을 넘어서는 대안적 현실에 대한 상상적 경험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현실의 결핍과 대비되는 풍성함, 현실의 무기력과 대비되는 역동성, 현실의 황량함과 대비되는 화려함, 그리고 현실 속의 소외/고립과 대비되는 공동체가 뮤지컬에 내재되어 있는 유토피아적 감성이며 이는 (자본주의 사회가 노정한) 부적절함과 불완전함을 상상적/일시적으로나마 보상해준다(Dyer 26). 현실의 문제와 딜레마에 대한 상상적 해결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뮤지컬의 노래와 춤은 현대적 신화라고 할 수 있다. 노래와 춤이 동시대의 신화적 기능을 수행한다면 그 문화적 미학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관습적이고 논리적인 틀이 아닌 전혀 다른 개념틀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다이어는 뮤지컬과 같은 오락적 장르가 대중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가부장적 주류사회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전달하거나 답습한다고 보아서는 안 되며 그 안에서 역동하고 있는 다양한 이념적 충돌과 갈등을 통찰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무엇보다 뮤지컬과 자본주의의 미묘한 역학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는데 그 이유는 뮤지컬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삶의 결핍과 한계를 그 어떤 장르보다 극명하게 대비적으로 보여주는 장르이면서 동시에 그 성공 여부가 자본에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마와 그녀의 집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고객/관객을 향해 공연하는 노래와 춤 역시 양가적이다. 자본주의적 상업주의와 이에 대한 저항과 비판, 가부장적 성적 응시와 이에 대한 전유와 전복이라는 두 가능성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냐 쿠프티넥(Sonja Kuftinec)은 2011년 오레곤 셰익스피어 페스티발에서 공연된 『폐허』의 공연평에서 이들의 춤이 지니는 양가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관객의 경험의 측면에서 볼 때 일상의 논리와 규범, 그리고 사실주의적 서사의 틀까지도 훌쩍 넘어 “현실에서 주어지지 않은, 그러나 상상할 수 있는, 아마도 실현될 수 있는 그 무엇”을 향해 비상하는 노래와 춤의 정동적(affective) 효과는 어떤 이론적인 비판도 무마시킬 만큼 강력한 것이다.7) 노래와 춤의 ‘날개’를 타고 날아오르는 경험은 논리적으로는 감정의 낭비일 수 있지만 몸/감각에 남겨진 강렬한 기억은 그 “일시성”에 대한 고통으로, 이를 지속적인 현실로 만들고자 하는 실천적 열망으로 전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질 돌란(Jill Dolan)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여 실재하는 차이와 장애를—일시적으로나마—초월하는 유토피아적 경험을 연극의 핵심적 역량으로 제시하면서 연극 공동체가 지니는 전복적인 정치적 잠재력을 “유토피아적 수행성”(utopian performative)이라고 명명한다(460). 정극임에도 불구하고 노래와 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폐허』는 모든 인간의 몸/감각에 공통적으로 어필하는 뮤지컬적 요소를 통해 고급(highbrow)/통속(lowbrow)이라는 기존의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서는 글로벌 차원의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프리드만이 제시한 코스모포에틱스의 수평적 미학을 실현한다.

    『폐허』의 “유토피아적 결말” 또한 “옆으로부터의 코스모페미니즘”의 과감한 코스모포에틱스로 해석할 수 있다. 많은 비평가들은 이성애적 사랑의 결실을 통한 구원이라는 지극히 낭만적인 해피엔딩이 극의 긴장감과 완성도를 떨어뜨린다고 지적한다. 연극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마와 크리스챤의 로맨틱한 춤은 공연 내내 극단적인 폭력과 학대의 서사에 시달린 관객을 위한 작가의 위로일 수 있다. 그러나 노티지에게 『폐허』의 결말은 무엇보다 콩고의 극단적인 리얼리티(들)에 대한 타협이자 균형이었다. “그 문화가 갖고 있는 놀라운 아름다움과 위대함, 실재하는 공포, 시련을 하나로 융합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 작품은 그 둘이 어떻게 공존하는지에 관한 연극입니다. 둘 사이의 부드러운 균형이 제가 찾아야 했던 타협점입니다”(Gerner 21 필자강조).

    1980년대 말 제2물결 페미니즘 담론을 평정했던 유물론적 페미니즘에게 사랑, 타협, 구원과 같은 “부드러운” 것은 경계 대상이었다. 멜로드라마나 로맨스 소설 등 여성의 부드러움을 설파하는 대중문화 역시 페미니즘의 대척점쯤으로 여겨졌고 ‘맹목적으로’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대다수의 여성들은 계몽을 필요로 하는 수동적이고 무지한 대중으로 치부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엘레인 애스톤(Elaine Aston)과 제랄딘 해리스(Geraldine Harris) 등은 세대간, 문화간 차이와 장벽을 넘어 광범위하게 공유할 수 있는 “대중적 페미니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비판, 해체, 거리를 강조하는 “강한”(strong) 이론 “옆에”(beside) 치유, 교정, 사랑의 작용능력을 믿는 “약한”(weaker) 이론들을 나란히 작동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10). 이들의 주장은 프리드만의 “옆으로부터의 코스모페미니즘”와 상통하고, 콩고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강한’ 비판 옆에 치유, 사랑, 희망이라는 ‘(연)약한’ 결말을 나란히 병치하는 노티지의 “부드러운 균형”과도 겹쳐진다.

    극의 초반에 마마는 크리스챤과 하라리의 프로포즈를 모두 거절하면서, “여기 열명의 소녀들이 있어요. 그 얘들은 어떻게 되는거죠? . . . 난 못가요. 어릴 적부터 사람들은 내 집에서 나를 쫓아낼 구실들을 찾아내곤 했지요. 하지만 이젠 도망가지 않아요. 여기가 내가 살 곳이예요, 마마 나디의 집”(90)이라고 선언한다. 그녀의 집이 단지 지리적, 상업적 공간이 아닌 정신적이고 윤리적인 공간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녀는 벨기에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어릴 적 ‘집’에서 쫓겨난 뒤 오랜 방황과 고통 끝에 어렵게 자신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이곳에 마마 나딘으로 오지 않았어요. 나는 그녀를 마치 광부들이 진흙구더기 속에서 광물을 찾아내듯 그렇게 찾아냈어요”(86). 마마는 그렇게 어렵게 일군 집을 다른 여성들과 기꺼이 공유한다. ‘집’은 가족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제시되는 크리스챤과의 사랑도 이러한 공동체의 연장으로 생각할 수 있다. 크리스챤는 다른 곳으로 떠나자고 하지 않고 여기 그녀의 집에 남아 그녀의 일을 돕겠다고 말한다: “당신의 일을 도울께요 . . . 문짝을 고치고, 거울을 달고, 당신을 보호해 주고, 사랑을 나누고”(99). 자신이 보호가 필요한 것처럼 보이냐고 마마가 반박하자 그는 그렇지 않지만 사랑해줄 사람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고 답한다. ‘망가진’ 여성들에 대한 그녀의 공동체 의식은 이 지점에서 함께 성장해 나갈 수 있는 남성인 크리스챤과의 관계로 확장된다. 샤론 프리드만(Sharon Friedman)은 이 극의 마지막 장면을 이전까지의 무대를 전혀 새로운 공간으로 바꾸는 마술적인 변환으로 묘사한다: “전쟁의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조종해온 젠더화, 인종화, 계급화의 작동방식을 낯설고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대안적 공간으로 무대를 변화시킨다”(609-10). 에이프릴 디 엔젤리스(April De Angelis)는 마마가 제시하는 “남녀 간의 새로운 젠더 관계를 위한 연약한 희망(a fragile hope)”은 “여성의 주체적 위치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인정하는 새로운 질서를 지향한다”고 보았다(559). 극중 여성들이 겪은 시련은 모두 남성이 지배하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체제에 의해 자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노티지의 “옆으로부터의 코스모페미니즘”은 기존 페미니즘의 단단한 남녀의 장벽도 넘어서고자 한다. “옆으로부터의 코스모페미니즘”의 비전과 전략은 여성주의적이지만 그 여정은 자질을 갖춘 남녀 모두에게 열려있다.

    7)노래와 춤이 주는 역동적 에너지는 정동(情動)과 감정(感情)의 차이로 설명될 수 있다. 감정보다 더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는 정동은 감각 또는 신경적인 요소와 연관된 것으로 감정의 전염 및 행동으로의 변환으로 이어지는 ‘동력’으로 파악된다. 정동은 일상적 범주에 갇힌 감정들이 새롭게 활성화 되는 정서적인 센세이션으로 관습적인 감각의 작동방식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고, 새로운 변화에 대한 열망과 이를 실천할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최성희 201).

    6. 결론: 코스모페미니즘 연극-포스트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

    최근 퓰리처상 드라마 부문 수상자의 면면을 살펴보면 여성극작가의 약진이 단연 두드러진다. 2009년 수상자인 린 노티지의 『폐허』의 뒤를 이어 2010년에 새라 룰(In the Nest Room, or Vibrator Play)이 최종 후보에 올랐고 2012년에는 키아라 알레그리아 휴디스(Water by Spoonful)가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며 2013년에는 지나 지온프리도(Gina Gionfriddo, Rapture, Blister, Burn)와 애미 허조그(Amy Herzog, 4000 Miles) 두 명의 여성극작가가 최종 후보에 올랐고 2014년 퓰리처는 애니 베이커(Annie Baker, The Flick)에게 돌아갔다. 2000-2008년 사이 수상자 중 여성 극작가는 2002년 수잔 로리 팍스(Susan Lori Parks)가 유일했음을 상기할 때 이는 매우 의미있는 변화이다. 각자 뚜렷한 개성을 지닌 작가들이지만 이들 작품에 공통점이 있다면 감정을 통한 소통을 부끄러워하거나 주저하지 않는 다는 것과 예술적 호평 못지않게 지속적인 대중적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점이다(최성희 200). 연극/예술은 “무수한 차이들이 만나 서로 연계될 수 있는 공동 기반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열망을 공유하는 공간”이다(hooks 29). 새로운 세대가 연계하고 있는 “무수한 차이”에는 2세대 페미니즘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감정과 대중문화가 포함된다.

    21세기 들어 페미니즘 논의는 2세대는 3세대를 비정치적, 개인주의적, 반-페미니스트로 3세대는 2세대 페미니즘을 권위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로 몰아가면서 세대간 비판과 단절의 양상으로 고착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2세대 페미니즘에서 소외되거나 억압되었던 여성의 실제적 욕망을 포용하면서 다문화주의와 다성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3세대 페미니즘이 성취한 해방적 효과는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포스트페미니즘의 과도한 개인주의는 분명한 한계를 노정한다. 포스트페미니즘의 대중적 확산과 더불어 과도하게 섹스, 커리어, 소비문화에 대한 욕망에 집중된 형태로 전개되는 경향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포스트페미니즘의 ‘포스트’는 진정 페미니즘의 유효기간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안식년으로 미국에 머물 때 “I will be post-feminist in a post-patriarchy”라는 문구의 범퍼 스티커를 본 적이 있다.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가부장적 가치체계와 권력구조를 생각할 때 ‘아직은’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새로운 구심점과 원동력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본 연구는 노티지의 작품을 통해 국내 이슈에 대한 사회 비판에 집중했던 2세대의 관심을 전지구적으로 확장함과 동시에 남성중심/자본중심으로 진행되는 세계화의 흐름을 여성주의적으로 재전유할 수 있는 코스모페미니즘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하였다.

    세계화 시대의 여성연극은 세 가지 선택 앞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선택은 포스트페미니즘의 경향을 따라 여성/소수민이라는 불편한 꼬리표를 떼고 극작가 개인의 자유와 역량에 초점을 맞춰 대중적/개인적 관심과 욕망에 따라 자유로운 창작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포스트-페미니즘은 포스트-가부장제가 도래한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두 번째 선택은 고급예술의 비판의식과 차별화된 미학을 추구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연극을 지향하는 것이다. 문학의 전지적 시점의 허구를 지적하면서 현대인의 인식론적 실패와 존재론적 불확실성에 천착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연극의 미학적 특징은 큰 그림을 조망하는 시점(vantage point)도 무대 위 사건들이 흘러가는 방향성(vanishing point)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극(theatre)의 원래 뜻은 “보는 곳”(seeing place)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의 연극은 “보는 장소”인 연극에서 모든 관점을 지워버리고 대신 모든 것을—‘보다’를 어원으로 하는 또 다른 영역인—이론(theory)의 ‘눈’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처럼 자신의 눈을 찔러버린 (포스트모던) 연극은 이론이라는 안티고네의 안내를 받아야만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실명”(blindness)이 하나의 힘이자 해방이라는 주장은 일시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킬 수 있을지 몰라도 (여성)연극의 미래를 위한 지속적인 동력과 방향성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이 글이 세계화 시대의 여성연극에 장기적인 비전과 원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세번째 선택으로 코스모페미니즘을 제안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모든 세상이 무대"(All the world's a stage)라는 세익스피어의 선언과 “모든 무대는 (하나의) 세상”(All the stage's a world)이라는 반대 명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자면, 무대는 하나의 세상일 뿐 아니라 모든 세상이다. 모든 무대는 구체적 지역성을 지님과 동시에 보편적 세계성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타자가 ‘되어’ 행동하는 배우의 연기와 무대 위 타자와의 공감을 통해 자아의 경계를 확장하는 관객의 경험은 자아와 타자의 차이를 넘어서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코스모폴리터니즘과 맞닿아 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연극은 코스모폴리터니즘의 리허설이다. 이 글에서 살펴 본 노티지의 『폐허』는 위로부터의 코스모폴리터니즘과 아래로부터의 코스모폴리터니즘의 지역적 축을 무너뜨리고 고급과 통속이라는 문화적 장벽을 넘는 새로운 코스모페미니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콩고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강한’ 비판 옆에 치유와 사랑이라는 “연약한 희망”을 나란히 병치하는 노티지의 “옆으로부터의 코스모페미니즘”은 수직적 가치에서 수평적 공존으로 이동하는 동시대 여성주의 연극의 변화를 예시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폐허』를 인종, 계급, 민족, 그리고 젠더의 범주를 넘는 수평적 세계시민화를 추동하는 (이)모션으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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