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ris Lessing’s novel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은 누구보다도 긴 노년의 삶을 영위하며 집필활동을 한 작가이다. 1950년 31세의 나이에 첫 작품 『풀잎은 노래한다』(
그러나 레싱이 젊어서부터 중년 이후의 여성에게 이렇듯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폭력의 아이들』의 제1권 『마사 퀘스트』(
그후 1970년대의 레싱의 작품 속에 그려져 있는 중년 여성 즉, 『어둠이 오기 전 그 여름』(
반면, 1980년대의 작품 『어느 좋은 이웃의 일기』(
사실 6, 70대의 노인과 8, 90대의 노인들을 구분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은 고령화가 세계적 추세가 된 최근의 일이다. 과거에는 모두 ‘the old’에 포함시킬 뿐 이들을 세분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요즈음에는 ‘제3연령기’와 ‘제4연령기’로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노인들 간에 개인별 격차가 크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구분하는 것에 대한 반대도 만만치 않다.
소설 속에 재현된 여성 노인을 연구하는 조우 브레넌(Zoe Brennan)은 저서 『최근 소설 속의 노인 여성』(
본 논문은 『어둠이 오기 전 그 여름』에서 노년의 문턱에 선 중년 여성의 두려움 그리고 그에 대한 극복과 성숙과정을 다루었던 레싱이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어느 좋은 이웃의 일기』에서는 죽음에 임박해있는 노인 여성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에 주목한다. 따라서 본 논문은 우선 여성 노인, 특히 초고령 여성들의 주변화된 처지와 사회에서의 유용성에 집중 조명한다. 모디 파울러(Maudie Fowler)라는 노동자 계층의 90세가 넘은 노인 여성 개인과 그녀와 비슷한 또래의 이웃들의 삶을 통해, 이들 소수자들이 어떻게 가족들로부터 버림받고, 사회에서 홀대받고 있으며, 국가는 이들에게 어떤 보상을 해주고 있는지에 대해 연구할 것이다. 반면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으며 어떻게 사회와의 융합에 노력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본 논문은 궁극적으로 곧 도래할 초고령 사회에서 초고령 노인들의 위치는 어떠해야 하고 사회가 이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하며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지에 대한 연구가 될 것이다.
인간의 생애 주기를 개개인의 차이를 무시한 채 일괄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많다. 그리고 학자마다 다른 이유와 근거를 대면서 각양각색으로 구분하고 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65세 이상을 통틀어 고령인구로 분류하는 것이지만, 본 논문에서는 고령인구와 초고령인구를 구분해야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미국의 사회학자 윌리엄 새들러(William Sadler)의 구분을 참고하기로 했다.
새들러는 『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
왁스맨은 『난롯가에서 큰길가로』(
그러나 앞에서 밝혔듯이 본 논문에서는 2차 성장 혹은 성숙을 달성하는 제인의 개인적 문제보다는 제4 연령기의 모디의 무력함과 초고령 여성들이 일반적으로 봉착하게 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춰 이전의 연구와 차별화할 예정이다. 『어느 좋은 이웃의 일기』의 가장 큰 특징은, 『어둠이 오기 전 그 여름』을 포함한 레싱의 1980년대 이전에 발표된 어떤 작품과 비교해보더라도, 각별히 제4연령기 여성들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화자이자 여성잡지사에서 일하는 성공한 커리어 우먼 제인이 모디를 처음 만났을 때는 마침 제인이 삶의 방향을 바꾸고자 노인 친구를 구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나 신문광고를 통해 소개받은 요크부인(Mrs. York)도 이웃인 페니부인(Mrs. Penny)도 제인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반면 우연히 약국에서 만난 모디는 마녀 같은 첫인상과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곧 제인의 관심을 끌게 된다. 젊은 약제사가 준 약에 대해 끈질기게 의심하면서 확인하려는 모디의 삶의 태도 때문이다. “거친 회색 눈썹 아래 사나운 푸른 눈”(20)을 가진 모디는 자신이 진정제(sedative) 혹은 진통제를 원했으나 의사가 “얼이 빠지게 하는 약”(stupefier)를 처방했을 것이라며 제인에게 약을 확인한다. 모디는 의사나 약제사 같은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가난하고 늙은 노인들을 ‘잉여 인간’으로, 즉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곧 사라져야 할 쓸모없는 인간’으로 치부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모디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자존심(pride)과 품위(dignity)를 지키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며 살아간다. 왁스맨은 신시아 리치(Cynthia Rich)의 말을 인용하면서 “노인이 자신이 받은 학대와 충족되지 않은 욕구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주변화 되어 있는 그들의 처지와 너무나 위험한 그들의 세계’를 고려해볼 때 상당히 용기 있는 행위”라고 주장한다(148). 제인은 모디의 바로 그런 용기에 끌린 것이다. 모디에 관한 관심이 커지면서 제인은 자신의 동네에서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던 노인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노인들 특히 여성 노인들이 그동안 사회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받고 있었음을 자각한 것이다.
사실 남성 노인과 여성 노인들이 연로함으로 인해 겪게 되는 경험의 내용은 상당히 다르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는 남성 노인들과 비교할 때 여성 노인들이 노년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게 됨을 주장하면서 “노년은 여성 노인들에게 성적 매력의 상실이자, 사랑의 상실”(Moi 255)을 의미한다고 역설하였으며, 수잔 손탁(Susan Sontag) 역시 유명한 에세이 「나이 듦의 이중 기준」(“The Double Standard of Aging”)에서 “나이가 모든 인간들의 얼굴에 정상적인 변화를 각인시키지만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그에 대해 훨씬 더 큰 벌을 받는다”(Pearsall 23)고 쓰고 있다. “남자들은 여러 방식으로 벌금을 물지 않고도 나이들 수 있도록 허용되지만 여자들은 그렇지 않다”(Brennan 30). 여성들이 노화의 징조를 보일 때 그에 대한 벌금을 물게 되는 이유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일찍 생식력을 잃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노인학 학자들은, 생식력에 가치를 두는 사회에서 동성애자들이 ‘애브젝트’(abject)로 취급당한다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주장을 전용하여, 여성 노인도 ‘애브젝트’로 분류한다(Chivers xxiv). ‘애브젝트’는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용어로, ‘모범적인 정체성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버려진 역겹고 더럽고 위험한 것들’을 말한다. 따라서 여성 노인들은 소수성애자들처럼 현대 사회에서 혐오되고 거부당하고 배제되는 ‘애브젝트’이자 ‘소수자 그룹’이다.
생식 기능이 없어져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여성 노인들이 좋은 이미지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할머니로서 육아를 담당할 때이다. 그러나 육아조차도 도울 수 없게 된 초고령 여성들은 ‘애브젝트 중 애브젝트’로 취급받는다.
성공한 커리어 우먼인 제인은 잡지 속 모델처럼 완벽한 옷차림을 한채 모디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그곳에서 풍기는 냄새와 불결함 때문에 역겨워 한다. 그러면서도 “내가 왜 이처럼 더럽다고 계속 불평하지? 우리들은 왜 이렇게 사람들을 판단하지?
제인의 주선으로 모디가 살고 있는 집의 전기 배선 공사를 하러 온 짐(Jim)도 제인에게 “저런 늙은 사람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32)라고 묻는다. 이제 제인은 ‘인간의 가치를 무엇으로 판단해야 하는가?’의 화두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곧 모디와의 거듭되는 만남 속에서 제인은 변화를 이룩하고, 이 둘은 서로에 대한 유용성을 발견한다.
제인은 모디를 정기적으로 방문하게 되면서 불결한 곳으로만 여겨지던 모디의 집이 어느덧 자신에게 가정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박선화는 논문 「도리스 레씽의 『어느 착한 이웃의 일기』: 노이만의 중심화 이론으로 읽기」에서 모디의 집의 난로에 주목하며 난로가 지친 제인의 영혼을 보듬어 주면서 얼어붙었던 감정의 둑을 허무는 역할을 한다고 쓰고 있다(16).
제인은 마치 어머니나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모디와의 대화에 흥미를 느끼게 되고, 사랑이 깃든 대화 속에서 잡지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도 얻는다. 제인이 만드는 잡지는 1950년대, 60년대, 70년대를 거치면서 급변하는 시장 환경 속에서 새로운 소재 개발, 잡지 이름 수정, 새로운 포맷 구성 등 변신을 거듭하며 생존해왔다. 제인은 모디가 들려주는 과거 회상의 이야기로 잡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기발한 특집기사도 쓰게 되며, 결국에는 모자를 만드는 노동자들에 관한 역사소설 『메럴러본의 모자 장인들』(
제인은 평생을 바친 잡지사에서 바라던 편집장의 직위에 오르지만, 모디와의 우정이 깊어지면서 오히려 잡지사의 일을 줄이고 작가로서 그리고 노인들을 돕는 자원봉사자로서의 삶의 비중을 높여 나가기로 결정한다. 모디로 인해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게 된 것이다.
한편, 모디도 먼 과거를 더듬으며 기억해내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제인 때문에 행복감을 느낀다(96). 직장에서 피곤했던 제인이 모디 집에 들러 가사를 돌보아 준 후 자신도 모르게 한잠 자고 일어나자, 모디는 제인에게 “지금이 내 인생에서 최고의 시간”(130)이라고 말한다. 출산이나 소풍의 경험 같이 짧고 흥분된 행복의 시간이 아니라, 친구 제인이 자신을 방문해줄 것임을 알기 때문에 느끼는 안정된 행복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60년간을 홀로 살아온 모디에게 이런 행복감은 진실된 감정이지만, 제인은 오히려 모디의 말 뒤에 숨어있는 박탈감과 외로움을 새삼 감지하며 당황해하고, 그런 작은 봉사가 가져다 줄 수 있는 큰 행복에 놀란다.
제인에게 일어난 또 하나의 큰 변화는 가장 중요한 일과였던 몸단장에 공을 들이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지금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할 수 없다. 그건 나에게 너무 큰 부담이 되었다”(135). 수잔 왓킨스(Susan Watkins)는 제인이 몸치장에 집착했던 것이 주디스 버틀러가 말하는 ‘여성성의 수행적 구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여기에서 벗어난 제인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재고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한다(Ridout and Watkins 77).
그후 제인은 85세의 애니 리브스(Annie Reeves), 모디와 동갑인 일라이자 베이츠(Eliza Bates)같은 다른 가난한 여성 노인들을 알게 되고 그들의 집에도 정규적으로 방문한다. 애니와 일라이자 역시 과거의 패션, 음식, 문화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제인은 그들의 삶의 경험을 통해 사고가 풍요로워진다. 제인은 또한 노인 친구들을 통해 진정한, 느린, 완전한 즐김(real slow full enjoyment)을 배울 수 있었다(174). 더 이상 노인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그들이 역사로 가득 찬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까지 천천히 기다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사랑하게 되었다.
제인이 보기에 여성 노인들은 지혜로 가득 차 있는 살아있는 역사요 문화이다. 그들은 각자 주어진 환경 속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며 가정, 사회 그리고 국가에 헌신하였으므로, 당연히 가족, 사회, 그리고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들은 사회에서 치워야 할 쓰레기가 아니라 끝까지 보호해야 할 자산이다.
1)조지 베일런트는 『행복의 조건』(Aging Well)에서 성인의 발달과정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특정과업을 어떻게 수행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연속과제로 청소년기에는 정체성(identity)확립, 둘째는 친밀감(intimacy)의 발전, 셋째는 직업적 안정(career consolidation), 넷째는 생산성(generativity)의 과업달성, 다섯째는 의미의 수호자가 되어 과거와 미래를 연결시키는 작업, 마지막으로는 통합(integrity)의 완성 등을 열거하였다. 이런 연속과제들을 성공리에 완수했을 때 성공적인 노화 혹은 성공적인 삶을 산 것이다.
손자를 돌보는 할머니로서의 역할조차 할 수 없는 초고령 여성에게 가정은 무엇인가? 모디는 스스로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을 때조차 집을 떠나 병원으로 가기를 거부하면서 친구인 제인이 돌봐주기를 바란다. 자신에게 익숙한 곳에서 친지의 돌봄을 받으며 임종을 맞이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반면, 일반적인 통념은 부양해줄 가족이 없을 때, 혹은 가족이 부담스러워할 때 초고령 노인들을 요양소나 병원에 보내 전문적인 보호를 받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가족과 요양소, 두 개의 선택 외에 다른 대안은 없는가?
제인도 모디를 만날 때까지는 가족과 국가 둘 중의 하나가 노인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모디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제인이 집에 도착했을 때 70세가량의 이웃인 페니부인이 버터가 떨어져 자신의 도움을 바라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제인은 자기 집 버터를 내어주고는 고의로 문을 세게 닫으며 자신의 죄의식을 털어내듯이, “그녀[페니부인]에게는 아들과 딸이 있어. 그들이 돌보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거지. 내 책임은 아니야”(30)라고 말한다. 이웃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 제인에게는 어머니와 남편이 암으로 죽어갈 때 책임을 다하지 않은 부끄러운 과거가 있다. 가족에게 버림받았다고 페니부인을 냉대하지만, 정작 본인도 남편과 어머니를 돌보지 않은 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제인이 모디를 돌보기로 결심하게 된 것도 이들에 대한 죄책감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제인은 모디를 돌보게 되면서 할머니를 돌보았던 어머니와 어머니를 간호했던 언니 조지(Georgie)가 얼마나 힘든 일을 했는지 새삼 깨닫게 되고,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언니를 찾아간다. 그러나 제인이 알게 된 것은 할머니와 어머니의 병간호에 무심했던 제인에 대한 언니의 원망이 매우 깊다는 사실 뿐이다. 가족을 돌보는 일이 가족 간의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조지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의 두 딸이 제인과 함께 살고 싶어 할 때 제인이 응당 그들을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니 조지가 어머니를 진정으로 기쁘게 간호했다면 어머니를 돌보지 않은 제인에 대해 초연할 수 있을 것이고 어떤 보상이나 보답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언니에게 실망한 제인은 요통으로 꼼짝할 수 없게 되어 다른 사람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에도 언니와 조카들에게 전화하지 않는다. 이처럼 가족을 돌보는 일은 이미 오래 전에 상거래가 되어버렸다.
이런 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에피소드는 이 작품 도처에 나타나 있으며, 그중 가장 두드러진 예가 모디의 언니 폴리(Polly)이다. 폴리는 젊은 시절 모디의 노동을 착취하고 모디의 상속 재산까지 갈취하면서 재산을 모았다. 최고령의 노년이 된 폴리는 그 부(富)를 바탕으로 마치 여장부처럼 가족 위에 군림하며 살고 있다. 폴리는 늙어서 가족의 돌봄을 받으려면 그들에게 그에 대해 보상해줄 수 있는 부가 있어야 함을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다.
조우 브레넌은 소설 속에 재현된 노인 여성들을 분석하면서 ‘할머니’와 ‘독신녀’(grandmother/spinster)의 두 부류로 나눈다. 브레넌에 따르면, ‘가족을 거느리고 있는 할머니’/‘독신으로 늙은 여성’의 이항대립은 ‘처녀’/‘매춘부’(virgin/whore)의 이분법의 연장으로 서양문화에서 반복되는 이미지였다(2)고 한다. 그 이항대립관계를 이 작품에 적용하면, 모디의 언니 폴리처럼 대가족을 거느리며 여장부처럼 사는 것은 가장 성공한 초고령 여성의 이미지이며, 가족도 없이 홀로 스스로를 부양하며 살아가는 모디는 실패한 노인의 전형이다. 이것을 잘 알기 때문에 제인의 가장 절친한 친구 조이스(Joyce)도 직장보다 가족을 선택한다.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자 제인의 가장 친한 친구 조이스는 남편이 미국으로 이민 가기로 결정하자 뭇 여성이 선망하는 직업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직을 포기하고 남편을 따라가기로 결정한다. 남편에게는 이미 다른 여자도 있었지만 가족이 없는 외로운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어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포기한다.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는 유능하고 야심에 찬 필리스(Phyllis) 역시 같은 길을 택하는데, 여성해방 운동에 동조하지만, 제인이 편집장을 그만 둔 뒤 새로 부임한 편집장 찰리(Charlie)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제인이 “여성 모임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필리스는 “그[찰리]는 제가 뭐 하든 신경 안 써요. 실은 매우 재미있어 해요”(224)라고 대답한다. 레싱은 이전 작품들에서도 그랬듯이 페미니즘 운동과 여성의 실제 모습 사이에 큰 괴리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필리스가 찰리를 선택하는 것도 가족에 둘러싸여있는 할머니의 이미지를 선망하기 때문이다.
반면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한 모디는 할머니의 지위를 박탈당한다. 모디는 부유한 가게 주인의 세 번째 딸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술집 여주인과 바람을 피면서 어머니가 사망하고, 자신도 독살당할까 두려움에 떠는 불행한 유년기를 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언니 폴리와 아버지의 정부(情婦)의 공모로 유산을 받지 못하였다. 게다가 폴리는 자신의 일곱 아이의 출산과 육아를 도와달라고 모디에게 요청하곤 했고, 자기 아이들이 모디를 좋아하게 되면 질투를 하며 쫓아내곤 하였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로리(Laurie)와 결혼을 하여 아들 쟈니(Johnnie)를 낳지만, 남편은 방랑벽으로 집을 떠나고 얼마 후 아들도 빼앗긴다. 부모, 형제, 남편, 아들 등 가족 모두에게서 착취당하고 버림받은 모디는 가족의 부양이나 보호를 기대할 수 없다. 말년에 이른 모디는 남편과 아들에 대해서는 생사조차 모르고, 친지라고는 언니와 조카들뿐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모디는 귀찮은 가난한 친척일 뿐이다.
제인은 암에 걸려 죽음에 임박한 모디의 부탁으로 모디의 언니 폴리의 집을 방문한다. 96세의 폴리는 여장부처럼 대가족을 거느리며 풍족하게 살고 있다. 딸들과 손녀들에게는 식사준비를 시키고 아들들과 손주들에게는 이것저것 지시할 정도로 가정에서 군림하고 있다. 그러나 제인은 이들 가족이 사랑으로 뭉쳐있기 보다는 권력과 재산을 얻기 위한 복종관계임을 인지한다. 모디를 데리고 온 제인이 중산층으로 보이는데 대해 의아해진 그들은 모디에게 일종의 자원봉사자인 ‘굿 네이버’(Good Neighbor)냐고 묻는다. ‘굿 네이버’는 “노인들을 방문하여 담소를 나누며 주시하도록 적은 돈을 주고 국가가 고용한 나이 든 여성”(24)을 말한다. 제인은 ‘굿 네이버’가 아니라 ‘좋은 이웃’(good neighbor)이자 진짜 친구라고 분명하게 대답하지만, 폴리는 끝까지 제인을 ‘굿 네이버’라고 부른다. 이들에게는 물질적 이해관계가 없는 진정한 친구관계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디에게 유일한 행복의 원천인 진정한 친구까지 부정하며 빼앗고 있다. 가족을 만나는 동안 제대로 변명조차 하지 못한 모디는 그후 상태가 급속도로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고 몇 개월 후 사망한다. 가족 간의 관계가 물질적 탐욕으로 제 기능을 못하고 있고, 그런 상황에서 가족을 대신하고 있는 ‘좋은 이웃’은 물질적 이해관계로 얽힌 형식적인 관계로 오해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오해는 국가가 부실한 사회복지제도를 시행함으로써 생긴 결과이기도 하다.
모디가 위암으로 병원에서 사망하자 사회복지사 베라 로저스(Vera Rogers)는 모디의 장례식 비용을 가족에게 요청할 수 있을지 제인에게 묻는다. 제인은 모디의 언니 폴리가 재정적으로 풍족하고 모디를 위해 그 정도는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가능할 것이라고 대답하지만, 폴리는 동생 모디가 수년간 장례비를 납부했으니 자신은 한 푼도 보탤 수 없다고 말한다. 모디는 장례보험금(funeral benefit)을 수년간 납부하여 납부한 당시로는 충분한 금액인 15파운드를 만들었다. 모디가 끼니를 거르며 부은 납입금이지만 그동안 물가가 올라 그 돈으로는 원하던 묘지에 묻힐 수 없다. 결국 모디는 정부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묘지에 묻히게 된다.
장례식날 모디의 친척들이 묘지에 모였는데 제인은 모두 부유하게 잘 차려입은 그들을 보고 분노한다. 그리고 폴리의 아들이 제인에게 와서 “이제 다른 일거리를 찾겠네요?”(260)라고 묻는 바람에 더욱 분노한다. 이 작품은 제인이 모디가 평생 분출했던 분노를 자신도 분출하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이 분노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묻는 것으로 끝난다. 모디는 재산도 가족도 남기지 못했으나 제인에게 초고령 여성들의 권익에 대한 문제의식을 전수하였다.
레싱은 가족들에게 헌신했으나 철저하게 버림받은 모디와, 어머니와 남편에게 철없는 아이처럼 굴었던 제인의 모습을 병치시키면서, 인간이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 품에서 맞이한다면 고인에게나 가족에게나 이상적인 임종이 될 것이나, 그것은 이미 현실이 되기 어려움을 주장하고 있다. 모디가 임종 때까지 간직하고 있던 혼인증명서와 남편과 아들의 가족사진 또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잘 증명한다. 온전한 가정과 가족을 지키는 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조이스나 필리스 처럼 자신을 희생한다고 해서 가족이 고마워하며 보상을 하거나 가정이 지켜지는 것도 아니다. 조이스는 후속작품 『노인들이 할 수 있다면…』(
레싱은 『사대문의 도시』같은 이전 작품에서도 혈연으로 맺어진 가정과 가족은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몰입되므로 오히려 여러 다른 인연으로 모여 이룬 공동체가 가정의 이상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모디의 언니 폴리보다도 이웃인 제인이 모디에게 더 좋은 가족의 역할을 하는 것도 같은 논리이다. 후속 작품인 『노인들이 할 수 있다면…』에서는 제인의 골칫거리가 된 조카 케이트(Kate)와 제인의 남자친구 리차드(Richard)의 딸이자 아빠의 감시자인 캐서린(Kathleen)을 잘 보살피고 지도하기 위해, 리차드의 딸은 제인이, 그리고 제인의 조카는 여성해방운동가이자 직장 동료인 해나(hannah)가 돌보도록 결론을 맺고 있다. 가족끼리의 지나친 감정싸움이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내려진 처방이다.
레싱은 결국 이 작품에서 모디와 제인의 관계를 통해 의무적인 가족보다는 진정한 이웃, 그리고 진정한 친구와 더 바람직한 관계를 이룰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런 면에서 진정한 친구의 보호를 받으며 생의 마지막 일년을 보낸 모디는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삶을 마감한 듯이 보인다.
펫 테인(Pat Thane)은 『노년의 역사』(
모디는 어려서부터 모자 공장에서 일했고 숙련된 장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장 주인의 부당한 대우와 제1,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열악한 사회환경으로 인해 최소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았다. ‘사회복지’란 ‘국민 복지에 기본이 되는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사회질서의 회복을 위하여, 제반 급부를 확보하거나 강화시키는 법률, 프로그램, 급여 및 서비스 체계’이다. 따라서 국민이 기본적인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노동에 합당한 대가를 받게 해주는 것도 사회복지의 일환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노동자 계층이었던 모디는 어려서부터 정당한 사회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모디가 모자 공장에서 일하고 있을 때 모디의 재주를 알아본 공장주인은 프랑스에서 그려온 새로운 디자인대로 모자를 만들도록 시켰고 그로 인해 큰 수익을 얻지만 그 이익을 모디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다. 착취당하고 있음을 알게 된 모디는 결혼하면서 직장을 그만 두지만 남편 로리가 집을 나가자 생계를 위해 다시 공장으로 돌아간다. 그녀가 맡고 있던 직장(職長 foreman) 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넘겨졌고 모디가 결혼과 함께 일을 그만 둔 데 대한 앙갚음으로 공장주인부부는 모디에게 가장 힘든 일을 시키곤 했다. 여름같이 일거리가 없을 때에는 일을 쉬어야 했고 경기가 나빠지면 임금은 더 낮아졌다. 모디는 온 힘을 다해 일을 했지만 집세를 내기위해 그리고 아들 쟈니의 양육을 위해 굶주림을 견디어야 했다. 간신히 로리에게서 주당 2 실링의 양육비를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로리는 어느 날 쟈니를 데리고 나가버린다. 쟈니를 찾기 위해 변호사를 찾아갔으나 돈이 없는 모디는 변호사에게 성추행만 당하고 도망 나온다.
모자 공장을 떠난 후 모디는 세탁일, 가정집 하녀 등 소위 임시직의 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다가 연금 혜택을 받게 되었고, 그후 연금으로 집세를 내면서 간신히 연명하며 살고 있다. 모디의 이웃인 애니나 일라이자도 가난한 웨이트리스나 노동계층 출신으로 모디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가난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이들은 모두 가족의 부양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 연금과 사회복지제도에 의존하여 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받고 있는 연금은 간신히 생명을 유지시키는 정도이고 사회복지 혜택은 형식적이다. 평생 가족과 직장에게서 착취당한 모디는 국가가 제공하는 사회복지 서비스를 신뢰하지 못한다. 제인과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모디는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제인에게 ‘굿 네이버’냐고 묻는다. 제인은 이때 처음으로 모디가 말하는 ‘굿 네이버’의 의미가 ‘좋은 이웃’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복지사를 의미함을 알게 된다. 이후에도 제인은 여러 사람에게서 ‘굿 네이버’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만큼 사회에서 ‘좋은 이웃’은 사라졌고 그나마 직업적인 ‘굿 네이버’만이 노인들에게 배려와 보호를 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제인은 모디에게 재가방문도우미(Home Help)제도나 간호서비스를 이용하도록 권하지만 모디는 거부한다. 재가방문도우미들은 시간만 때울 뿐이고 어떤 도우미는 시장을 대신 봐주면서 돈을 훔쳐간다. 모디는 의무적인 사회복지사들보다는 좋은 이웃인 제인의 방문을 원한다.
반면 레싱은 노인들의 재가방문도우미에 대한 불평과 나란히 이들 사회복지사들의 열악한 생활환경도 폭로한다. 마가렛 모앤 로우(Margaret Moan Rowe)는 레싱이 사회복지사들에게 인간적인 얼굴을 만들어주고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의 강점 중 하나라고 평한다(96). 이들 사회복지사들은 아일랜드인이나 서인도제도 출신 등 이민자이거나 가난한 영국인이며, 대개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로, 양육할 아이나 돌볼 가족이 있어 집 주변에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국가에 의해 고용된 근로자들로 가사일과 사회복지사일을 동시에 하면서 초인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 작품 속에 삽입되어 있는 재가방문도우미 브리짓(Bridget)의 하루 일과는 세 아이들, 남편, 그리고 네 명의 클라이언트를 돌봐야 하는 빡빡한 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재가방문도우미들에게 대개는 성미가 칼칼하고 불평이 심한 노인들을 더 성의있게 보살피고 더 큰 배려를 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노인들은 무엇보다도 이야기 상대를 원하지만 시간을 쪼개서 써야하는 재가방문도우미에게 그런 시간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적인 대화가 없는 공식적인 재가방문도우미와 클라이언트와의 직무적 관계는 서로에게 불평만을 낳을 뿐이다. 브리짓의 클라이언트 중 한 사람인 애니는 자신도 아일랜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나가는 브리짓에게 “아일랜드인. 인간 쓰레기들”(196)이라고 욕을 하고 브리짓도 그에 맞서 “당신이 쓰레기”라고 중얼거린다. 서로 돕고 살아야 할 소수자 그룹의 사람들이 제도의 부실함으로 인해 서로를 증오하고 의심하고 핍박하고 있다.
반면 일라이자 베이츠부인은 항상 시중을 받으려는 애니와 달리 독립적이어서 사회복지사들의 사랑을 받는다. 오랫동안 집안에만 틀어박혀 배타적인 삶을 살던 모디나 애니와 달리 일라이자는 꾸준히 여러 사람들과 섞여 살았다. 사회복지사들과도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산다. 제인은 자기가 초고령에 이르면 베이츠부인처럼 살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베이츠부인은 레싱이 제시하는 초고령 여성 노인의 모델이다. 노인복지에 관한 저서들도 한결같이 노인들이 가족 이외의 관계를 형성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리고 베이츠부인처럼 스포츠여가활동, 노인회활동, 자원봉사활동, 친목회활동을 하여 개인적인 대인관계망을 만들도록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베이츠 부인도 가장 가까웠던 친구가 배우자를 만나 떠나버리자 급속히 쇠락하여 사망한다.
초고령 노인들은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병원에 가야할 일에 자주 부딪친다. 의사나 간호사들은 이들이 곧 죽게 될 잉여 인간이므로 성의 없이 대한다. 제4연령기 노인들은 자존심을 지킬 정도의 기본적인 청결을 유지하기도 어렵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이들은 병원같이 사람이 많은 곳에서 여러 사람에게 오물로 더렵혀진 몸을 보이게 되고 그 결과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된다. 따라서 의사와 간호사들은 이해와 배려로 이들을 돌보아야 하지만 이들에게 노인들은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레싱은 “존경받는 원로 의사”(big doctor 249)일수록 노인환자들에게 권위적으로 대하고, 무관심 때문에 그들의 실제 상태에 대해 젊은 의사들보다 더 무지하다고 폭로하는 반면, 간호사에 대해서는 사회복지사에게 그랬던 것처럼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간호사들도 대개는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혹은 쟈메이카나 베트남 출신의 이민자들로, 부양할 가족이 있고 고향으로 송금을 하는 경우도 많다. 고된 노동으로 항상 피곤하고 수면이 부족한 상태인 그들의 모습에서 제인은 모디가 들려준 이야기 속에서 만난 두려움에 떨던 젊은 모디의 모습을 본다. 이들은 병실에서 자주 발생하는 도둑질로 인해 도둑으로 몰리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노인 여성들처럼 “당연시 여겨지는 여자들”(248)로 투명인간 취급을 받고 있다.
레싱이 초고령 여성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들 주변의 여성들, 즉 사회복지사와 간호사들의 불우한 환경에 대해서도 함께 조명하므로, 조우 브레넌은 게일 그린(Gayle Greene)의 분석에 동의하면서, 이 작품의 중요성이 여러 계층의 사람들, 여러 사회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 여러 세대의 사람들,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모디와 제인을 연결고리로 하여 교차된다는 점에 있다고 말한다(Brennan 49). 하류 계층의 사회복지사들과 간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제인의 사고는 확장되었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글쓰기로 실현되면서, 종국에는 나이, 계층, 세대 간의 벽이 허물어질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보여준다는 것이다.
제인은 위암으로 병원에 입원한 모디를 성의를 다해 돌보지만, 모디는 제인이 마치 원수나 되는 듯이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른다. 간호사들은 죽음 을 앞둔 사람들이 겪는 자연스러운 단계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두 번째 단계에서는 화를 내고, 세 번째 단계에서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타협을 한다는 것이다(226). 제인은 92세에 죽음을 맞으면서도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모디의 질긴 생명력에 당황한다.
모디는 암으로 지독한 통증을 느끼지만 정신을 죽인다며 진통제를 아끼며 복용한다. 제인은 심한 통증에 시달리는 모디를 위해 그녀가 빨리 사망하기를 바라지만, 모디는 죽고 싶지 않다. 제인은 모디에게 육체적 통증 이상을 뛰어넘는 해결되지 않은 정신적 부채가 남아 있음을 깨닫는다. 모디의 죽음을 늦추는 것은 암에 걸린 몸이 아니라, 모디의 정신 속에서 “무엇인가에 적응하기 위한--그런데 무엇에 적응하는 거지?”(252-3)--엄청난 과정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모디는 자신의 인생을 도난당한 것처럼 느끼면서 죽음을 수용하지 못한다. 부모에게서 남편과 자식에게서 그리고 언니와 그 가족에게서 생애를 도둑맞은 모디는 베일런트가 말하는 통합(integrity)의 과제를 수행하지 못한다. 통합의 과정이란 살아오며 겪은 수많은 상실들을 내면화하면서, 다시 말해 자신의 일생을 의미있는 스토리로 만들면서, 죽음까지 평화롭게 받아들이는 과정을 말한다. 모디의 죽음에 대한 끈질긴 저항은 초고령 노인들에 대한 사회적·국가적 배려가 아직 상당히 미흡함을 체현하는 것이다.
사실상, 제인은 모디의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간호사의 실수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다. 제인은 모디가 죽기 전날 밤 한 어린 간호사가 부주의로 모디의 약병을 깨뜨리는 것을 목격하였다. 제인은 병원의 권위적인 시스템 속에서 징계를 받을까 두려워 그 간호사가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따라서 모디가 그날 밤 진통제를 복용하지 못해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제인은 다른 간호사들에게서 모디가 자신들에게 “잠깐 기다려”(255)라며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돌보아야 할 다른 환자들 때문에 그냥 병실을 나왔고, 나중에야 모디가 죽은 것을 발견했다는 말을 듣는다. 아마도 모디는 약을 달라고 간호사들을 불렀을 것이다.
제인은 모디가 삶과의 타협의 절차를 완성하지 못한 채 임종조차 타인의 부주의에 의해 그리고 사회와 국가의 소홀함으로 인해 이루어졌다고 결론짓는다.
모디의 장례식은 자신이 열심히 납부해 받은 장례보험금과 국가가 제공하는 장례비용을 합쳐서 치러진다. 모디의 일생을 통해 레싱은 개인의 복지가 개인의 노력, 사회적인 협력, 그리고 국가의 합리적 제도가 합쳐져야 비로소 해결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레싱은 모디의 말년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회복지사와 간호사들의 열악한 직업환경도 폭로함으로써, 노인복지는 노인들의 복지문제 뿐 아니라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살아가는 각종 ‘소수자 그룹’들의 복지가 함께 해결되어야 풀릴 수 있는 문제임을 암시하고 있다.
레싱이 과학소설 5부작 『아르고스의 카노푸스 제국』(
이 작품의 의의를 몇 가지 꼽는다면, 우선 이 작품은 그동안 소설에서 다루기를 기피하던 초고령 여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동안 노년을 앞둔 불안한 여성을 다루거나, 노년이 되어 원숙해진 여성이 지혜를 발휘하는 담론은 있었지만, 이처럼 무기력한 여성, 특히 오물을 뒤집어 쓴 여성을 주요 인물로 그린 적은 없었다. 초고령 여성의 권익을 다루었다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이다.
둘째, 레싱은 노인 복지문제를 주로 다루면서도 사회복지사와 간호사등 다른 소수자 그룹들의 권익문제와 연계시키고 있다. 이들이 가난한 이민자들이나 하류 계층 출신이고 격무에 시달리고 있음을 부각시킴으로써 노인복지 문제가 다른 사회복지 문제와 함께 해결되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레싱은 주변 국가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복지국가 영국이 실상은 여전히 인종, 성별, 계급 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질타하고 있다.
셋째, 레싱은 초고령 여성의 여러 사례를 보여줌으로써, 각박한 사회환경 속에서도 초고령 여성들이 인정받고 사랑받으면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모디는 분노와 의심으로, 애니는 우울증으로 이웃 노인들과의 교류를 회피하였고, 사회복지사들에 대해서도 반감으로 대하였다. 반면 일라이자 베이츠는 최대한 독립적으로 일을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젊은 친구들과 어울려 극장, 런치클럽, 여행, 교회 등에 다니면서 바쁘게 살려고 하였다. 제인은 자신이 그 나이가 되면 일라이자처럼 살고 싶다고 말한다.
넷째, 화자는 초고령 여성과 우정을 맺으며 변화를 달성하였고, 바바라 프레이 왁스만의 용어를 빌리자면 ‘성숙’에 도달하였다. 성숙을 경험한 화자는 글쓰기를 통해 그리고 조카들의 멘토로서의 역할을 통해 그 결과를 계승하고 나눌 것임을 암시한다. 제인은 이미 소설을 한 권 완성하였고 다른 작품들도 구상 중이다. 그리고 조카들과 함께 살게 되면서 이들을 교육시킬 예정이다. 모디는 죽지만 모디로 인한 제인의 변화가 여러 독자들에게 그리고 후세에게 전달됨으로써 세상에 변화의 씨를 뿌리고 있다. 제인은 또한 모디와 달리 ‘의미의 수호자’의 임무를 완성한 성공한 초고령 여성으로 죽음을 맞이 할 기능성이 크다.
다섯째, 모디의 죽음이 간호사의 실수와 부주의에 의한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당시 영국의 의료제도와 사회복지제도가 형식적으로 부실하게 운영되고 있음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레싱은 이 작품의 제목을 ‘어느 좋은 이웃의 일기’라고 붙였고, 이 때 ‘좋은 이웃’이라는 용어가 사회복지사 ‘굿 네이버’인지 진짜 ‘좋은 이웃’인지 구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국가가 만들어놓은 사회복지, 예를 들어 굿 네이버 정책이 오히려 이웃의 관심, 이웃 간의 소통, 공동체 내에서의 협력의 분위기 등을 해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레싱이 『어느 좋은 이웃의 일기』와 후속작품인 『노인들이 할 수 있다면…』을 제인 소머즈(Jane Somers)라는 필명으로 출간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스캔들이다. 이 두 작품은 처음부터 연작처럼 두 권으로 계획되었고 그 결과 각각 1983년과 1984년에 출간되었으며, 1984년에 다시 『제인 소머즈의 일기』(
초고령 여성들인 일라이자, 애니, 모디의 말년의 삶을 지켜보면서 자기-지식을 확장한 제인은 다음 작품에서 이 경험을 바탕으로 문제에 봉착한 십대 젊은이들의 지도에 나선다. “노인들이 할 수 있다면”이란 제목의 뜻은 프랑스의 속담으로 “젊은이가 알 수 있다면 그리고 노인들이 할 수 있다면, 세상에 안 될 일이 없다”2)를 줄인 말로, 노인들과 젊은이들의 상호 소통적 그리고 상호 협력적 관계를 권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제인은 젊은 세대들을 교육시키는 과제에 도전하면서 초고령 여성들의 문제와 십대의 문제들이 연속선상에 있음을 암시한다. 누구나 인간은 탄생, 유년시절, 청년시절, 중년시절 그리고 노년을 거쳐 죽음에 이르는 ‘연속체’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젊은이와 노인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면서 서로 차별하고 비난한다. 레싱은 중년의 제인을 모디, 애니, 일라이자의 노년층과 질, 케이트 등 십대들 간의 연결 고리로 만들 생각이었고, 이 세 세대 간의 관계를 통해 인간과 인간의 삶을 ‘연속체’라는 큰 그림 속에서 보도록 제시할 생각이었다.
2)“If the young knew and if the old could, there is nothing that couldn't be d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