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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John Marshall's <Hunters>, a Western African Ethnographic Film 존 마셜(John Marshall)의 서아프리카 민족지영화*
  • 비영리 CC BY-NC
ABSTRACT
John Marshall's <Hunters>, a Western African Ethnographic Film
KEYWORD
John Marshall , , ethnographic film , Ju/wasi(!Kung Bushmen) , Kalahari Desert , Namibia
  • 1. 들어가는 말

    존 케네디 마셜(John Kennedy Marshall)(1932-2005)은 서아프리카 나미비아에 위치한 칼라하리(Kalahari)사막의 쿵 부쉬맨(!Kung Bushmen)1) (또는 주와시(Ju/wasi)로 불림)의 삶을 기록하는데 한 평생을 바친 민족지영화/다큐멘터리영화감독이자 활동가였다. 존 마셜이 주와시 부족사람들을 만나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초였다. 존 마셜은 사업가이자 ‘서아프리카 탐험연구’를 주도한 아버지 로렌스 마셜(Lorence Marshall)(1989-1980)과 함께 서아프리카로 탐험여행을 떠났고, 첫 번째 탐험여행인 1949년 처음으로 카메라를 접했다. 그 후 존 마셜은 1950년에서 1958년 사이, 여러 차례에 걸쳐 주와시 부족을 방문하면서 영화촬영에 전념하여 16mm 필름으로 300,000 피트(157시간 분량)나 되는 엄청난 분량의 필름을 촬영했다. 존 마셜은 이 필름을 재료 삼아 첫 번째 민족지영화/다큐멘터리영화인 <사냥꾼들(The Hunters)>(1957)을 완성하였다. <사냥꾼들>은 1958년 영국영화텔레비전예술아카데미(British Academy of Film and Television Arts)로부터 최우수 다큐멘터리작품에게 주어지는 로벗 플래허티상을 수상하였으며, 이 영화는 곧바로 이른바 민족지영화2)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사냥꾼들>은 서구에서 민족지영화 및 다큐멘터리영화사에 수업에서 가장 많이 상영되는 영화작품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2003년 미국의회도서관에 의해 “문화적, 미학적,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국가영화유산(National Film Registry)에 등록되었다.

    존 마셜은 <사냥꾼들>을 만든 후, 자신이 이른바 ‘시퀀스영화(Sequence Film)’를 만들기 위해 주와시 사람들의 일상과 사회관계 및 문화를 촬영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존 마셜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다이렉트 시네마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면서 프레더릭 와이즈먼(Frederick Wiseman)과 함께 <티티컷 풍자극(Titicut Follies)>(1967)를 공동 감독하고, 1968-69년에는 <피츠버그 경찰(Pittsburgh Police)> 시리즈를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이 기간 동안 또 다른 민족지영화 감독인 티모쉬 애쉬(Timothy Asch)와 함께 주와시 사회에 관한 광범위한 필름의 편집 작업을 통해 15편의 ‘시퀀스영화’를 완성하였다.

    1978년 존 마셜은 다시 칼라하리 사막으로 돌아가 나이(N!ai)라는 한 쿵(주와시) 부족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 <나이, 쿵 부족 여인의 이야기(N!ai, the Story of !Kung Woman)>(1980)를 만들었다. 그 후 존 마셜은 주와시 부족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단을 설립하고, 식수원 시설, 영농, 지방정부의 설립 등 주와시 부족 사람들을 변호하고 돕는 일을 하면서 1980년대를 보냈다. 이처럼 존 마셜은 주와시 부족 사람들을 위한 실천가로서 활동하면서 주와시 사회의 다큐멘터리 기록을 계속하여 2000년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칼라하리 가족(A Kalahari Family)>(2002)를 완성하였다. 6시간의 장편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사냥꾼들>과 <나이>의 영화장면을 비롯하여 1950년에서 2000년에 걸쳐 주와시 부족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한 이 영화는 존 마셜이 다큐멘터리영화감독에서 활동가로서의 변모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는 2005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주와시 부족사람들을 변호하고 돕는 일을 계속하였다.

    본 논문은 존 마셜의 영화들3) 가운데 그의 첫 번째 민족지영화/다큐멘터리영화인 <사냥꾼들>에 주목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사냥꾼들>은 존 마셜의 첫 작품이자 민족지영화의 고전이라는 점에서 그의 다른 영화들을 논하기 앞서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작품이다. 또한 <사냥꾼들>은 존 마셜의 차후의 작품인 <나이>나 <칼라하리 가족>에 지속적으로 나오는 등 존 마셜의 중요한 영화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본 논문에서는 <사냥꾼들>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사냥꾼들>의 텍스트 분석에만 치우치지 않고 <사냥꾼들>을 둘러싼 제반 맥락을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존 마셜이 아프리카를 접하고 영화에 입문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아버지 로렌스 마셜의 전기적 배경 및 존 마셜 가족의 아프리카 탐험과 <사냥꾼들>이 만들어진 제작배경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어 <사냥꾼들>이 만들어질 당시의 영화기술과 같은 제작환경 등의 맥락도 함께 고려하면서 <사냥꾼들>에 나타난 영화적 방법론을 ‘내러티브의 차용’과 ‘전지적 시각’으로 나누어 비판적으로 고찰하기로 한다.

    국외에서는 민족지영화뿐 아니라 존 마셜의 영화세계에 대해 활발히 연구되고 있으나,4) 아직 국내에서는 민족지영화나 주요 감독 및 작품에 대한 논의가 별로 없는 실정을 감안할 때 대표적인 민족지영화감독인 존 마셜의 영화세계를 소개한다는 점에서 본 논문의 의의를 찾고자 한다.

    1)본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영화 <사냥꾼들>은 북동부 나미비아, 칼라하리사막의 니에 니에(Nyae Nyae) 지역에 살고 있는 쿵 부족, 즉 주와시 부족 사람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여기서 잠깐 ‘부쉬맨’, ‘쿵’ 또는 ‘주와시’라는 용어의 역사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652년 네덜란드 사람들이 처음 남아프리카에 왔을 때 그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을 ‘부쉬맨(Bushmen)’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오늘날 ‘부쉬맨’이라는 용어는 경멸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학자들에 의해 드물게 사용된다. 학술적인 문헌에서는 부쉬맨이라는 용어 대신 소를 방목하는 유목민 코이-코이(Khoi-Khoi)(호텐토트(Hottentot)라고도 알려짐) 사람들이 그들의 이웃부족을 부르기 위해 사용하는 ‘싼(San)’이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인류학자 리차드 리(Richard Lee)는 ‘싼’이라는 말도 코이-코이언어로 ‘원주민’(aborigine)이라는 의미 외에 ‘악당’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어 그리 만족스러운 용어는 아니라고 지적하기도 한다.(Lee 1979:30 참조). 과거 싼 부족은 주로 나미비아, 보츠와나, 앙골라에 걸쳐 살고 있었으며, 모든 북부 싼 부족사람들은 ‘쿵(!Kung)’이라는 언어를 사용하였다. 또한 쿵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3개의 집단으로 나뉘었는데, 이 가운데 한 집단이 <사냥꾼들>에 등장하는 주와시 부족 사람들이다. 나미비아와 보츠와나에 살고 있는 이들은 스스로 ‘주와시(Ju/wasi)(또는 Zhu/twasi)’라고 부르는데, 쿵의 언어로 ‘주(Ju)’는 ‘사람’을 ‘와(wa)’는 ‘진짜, 순수한’의 뜻이며, ‘시(si)’는 복수형 접미사이다. 따라서 주와시는 ‘진짜 사람들’이라는 뜻이 된다. 부쉬맨의 용어에 관한 역사를 종합해서 말하자면, 이들을 부르는 용어는 ‘부쉬맨’-‘싼’/‘쿵’-‘주와시’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2)민족지영화(ethnographic film)는 학자에 따라 그 정의와 범위가 매우 다양하다. 예를 들어, 영상인류학자 제이 루비(Jay Ruby)처럼 “인류학적 주제, 방법론과 시각에서 만들어진 영화”로 좁게 규정하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민족지영화감독인 로버트 가드너(Robert Gardner)처럼 ‘민족지적 ethnographic)’이라는 말을 ‘인간에 대한’의 의미로 해석하여 “인간에 대한 모든 영화”로 광범위하게 해석하는 학자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매우 넓다. 한편, 실제적으로 민족지영화와 관련된 영화제에 출품되고 상영되는 민족지영화를 보면 소재나 영화방법론에서 다큐멘터리영화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 따라서 때로 민족지영화를 ‘민족지적 다큐멘터리(ethnographic documentary)’ 또는 ‘문화적 다큐멘터리(cultural documentary)’라고 부르기도 한다.  3)존 마셜의 영화목록에 대해서는 Sue Marshall Cabezas, “Filmography of the Works of John Marshall,” Jay Ruby, ed., The Cinema of John Marshall, 1993, pp.231-268. Philadelphia: Harwood Academic Publishers를 참조할 것.  4)존 마셜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룬 대표적인 단행본으로는 Jay Ruby, ed., The Cinema of John Marshall, Chur, Switzerland: Harwood Academic, 1993과 R. Kapfer, W. Petermann, R. Thoms, eds., Jäger und Gejagte: John Marshall und seine Filme, München: Trickster Verlag, 1991을 꼽을 수 있다.

    2. <사냥꾼들>의 제작배경

       1) 로렌스 마셜과 주와시 부족 사람들의 만남

    존 마셜이 <사냥꾼들>을 제작하고 한 평생을 서아프리카에서 보내게 된 데는 전적으로 아버지 로렌스 마셜의 영향이 컸다. 로렌스 마셜은 미국 동부 보스톤에서 태어나 보스톤 소재 터프스대학교(Tufts University)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면서 물리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때 뉴욕시의 이스트강(江)의 터널공사장에서 일한 적이 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때 군에 입대하여 포병관측장교로 근무했다. 로렌스 마셜은 전쟁 중인 1918년, 미국장성이 휴전 바로 후 무모한 공격을 내리는 바람에 젊은 병사가 자신의 팔 안에서 죽는 모습을 보고 난 뒤 전쟁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로렌스 마셜은 군 제대 후, 1922년에 레이시온사(Raytheon)를 설립하여 1949년까지 회장으로 근무했다. 로렌스 마셜은 1927년 그의 부인인 로르나 마셜(Lorna Marshall)과 함께 콘덴서에 관해 조사하기 위해 당시 소련의 레닌그라드에 있는 기술연구소를 방문하였는데, 볼쉐비키정부가 러시아 전역에서 마을사람들의 일상생활과 발전된 모습을 영화화하는 프로젝트를 보고 영화의 유용성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당시 소련의 영화작업은 프로파간다용 영화를 만드는 것 뿐 아니라 사회변화의 기록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로렌스 마셜은 프로파간다는 경멸했지만, 기록이라는 아이디어는 높게 평가했다.

    레이시온사는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큰 호황을 누렸다. 이 회사는 연합군이 사용하는 소형레이더에 필요한 대부분의 부품을 생산하였으며, 더 나아가 1945년 뉴멕시코 알라마고도의 핵폭발실험에 사용된 원자폭탄의 뇌관도 개발하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3주도 채 안되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지자 로렌스 마셜은 일종의 충격에 빠졌으며, 핵전쟁에 대해 공포를 느꼈다. 로렌스 마셜은 1949년 9월 소련이 첫 번째 원자폭탄을 실험했을 때 이미 핵전쟁이 실제로 가능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 미국과 소련의 핵개발 경쟁은 로렌스 마셜이 남서아프리카에 가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존 마셜은 “로렌스 마셜이 남서아프리카의 니에 니에(Nyae Nyae)에 있으면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5)고 전하고 있다.

    실제로 로렌스 마셜이 남아공은 처음 찾은 것은 1949년이었다. 그는 로르나 마셜과 함께 레이더를 판매하기 위해 남아공의 케이프타운 항만청을 방문했다. 그 때 로렌스 마셜은 티거버그병원의 외과의사인 판 질(Van Zyl)을 만났다. 판 질은 당시 ‘칼라하리 사막의 잃어버린 도시’를 찾기 위한 탐험을 계획하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탐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로렌스 마셜은 판 질에게 자신도 그 탐험대에 합류할 수 있는지 물었다. 판 질은 흔쾌히 로렌스 마셜을 받아들였다.

    특히 로렌스 마셜은 니에 니에의 주와시 부족 사람들이 다툼이나 전쟁을 하지 않고 서로 조화롭게 사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2) 존 마셜 가족의 ‘칼라하리의 잃어버린 도시’ 탐험

    로렌스 마셜은 회사를 그만두고 서아프리카 탐험여행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 하버드대학 피바디박물관(Peabody Museum) 관장이자 고고학자였던 제이 오 브류(J.O. Brew)와 로리스톤 워드(LauristonWard) 교수를 만났다. 브류는 로렌스 마셜에게 칼라하리사막에 가서 할 일은 “야생 부쉬맨”을 찾는 것이라고 조언해주었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만약 칼라하리 사막에 아직 수렵채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만약 그들을 아프리카 평원에서 발견한다면 어느 누구도 꿈꾸지 못한 먼 옛날 인류의 모습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로렌스 마셜이 아프리카탐험여행을 계획한 또 다른 이유는 가족들 때문이었다. 즉, 로렌스 마셜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회사일로 매우 바빴기 때문에 아프리카탐험여행을 통해 가족과 함께 시간을 갖기를 원했다. 특히 로렌스 마셜은 아들인 존 마셜을 보다 잘 알기 위해 그를 아프리카에 데리고 가길 원했다. 존 마셜 또한 리빙스톤(Livingstone), 스탠리(Stanley), 그랜트(Grant)와 같은 탐험가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하나의 취미일 정도로 늘 아프리카에 가길 원했다. 존 마셜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결국 로렌스 마셜과 존 마셜은 판 질의 ‘칼라하리의 잃어버린 도시’탐험대와 함께 ‘야생부쉬맨’을 찾아갔다. 이 탐험여행의 목적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수렵채집민들의 집단들 가운데 하나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1950년 이전 칼라하리사막의 주와시 사람들은 종종 이웃 반투(Bantu) 사람들, 특히 동쪽의 헤레로 유목민들과 교역을 하거나 싸움을 하기도 했지만, 유럽인들과 접촉은 거의 없었다.

    결국 탐험대는 잃어버린 도시를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로렌스 마셜은 두 명의 주와시 사람들, 즉 아오 “어깨”(//Ao “Shoulders”)와 퀴 “다리”(/Qui “Legs”)를 만났다. 로렌스 마셜은 이들에게 “만약 내년에 모든 가족을 데리고 오면 수렵과 채집으로 순수하게 살아가는 당신들 가족들을 만나게 해주겠냐”고 물었다. 그들은 흔쾌히 로렌스 마셜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곳은 바로 존 마셜이 평생 동안 주와시 부족의 연구 및 영화작업을 위해 생활하였던 니에 니에 지역이었고, 존 마셜 가족이 근처의 춤퀴(Tshumkwe) 지역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곳이다.

       3) 1951년의 니에 니에 탐험연구

    로렌스 마셜은 1차 탐험여행을 마치고 1951년 니에 니에 지역으로 본격적인 탐험여행을 떠났다. 2차 탐험여행은 차후 주와시 부족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을 연구하고 촬영하기 위한 학문적인 여행으로서는 첫 번째 여행인 셈이다. 이 2차 탐험여행은 하버드대학의 피바디박물관이 후원을 했으며, 후에 스미소니언협회가 탐험연구에 합류했다. 로렌스 마셜은 연구의 재정적 후원을 했다. 로렌스 마셜과 브류는 2차 탐험여행에 앞서 아프리카의 수렵채집민들에 관심을 가진 인류학자나 인류학 분야의 대학원생을 찾아다녔으나 한 학생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탐험연구팀은 인류학자 없이 구성되었으며, 로렌스 마셜은 가족들에게 여러 임무를 부여했다.

    결과적으로 1951년의 탐험연구는 하버드대학에 근무하던 고고학자 로버트 다이슨, 『나론과 그의 부족(Naron and His Clan)』(1950)이라는 책을 쓴 독일계 나미비아인 프리츠 메츠가(Fritz Metzgar), 트란스발 출신의 형질인류학자 에릭 윌리엄즈(Eric Williams), 그리고 후에 춤퀴지역의 첫 번째 지역장이 된 클로드 맥인타이어(Claude McIntyre)와 식물학자와 음악학자도 참여하였다. 브류는 1952년 한 달 동안 이 팀에 합류하였다.

    존 마셜 가족은 그때까지 서구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주와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가우차(Gautscha)라고 알려진 커다랗고 영속적인 식수웅덩이가 있는 곳에 살면서 옛 전통대로 수렵채집생활을 하고 있었다. 존 마셜 가족은 이때 차후 <사냥꾼들>뿐 아니라 <나이>를 비롯한 존 마셜의 영화작업을 비롯하여 주와시 사람들과의 관계형성에 많은 도움을 준 부족의 존경받는 지도자인 토마(Toma)와 당시 8살이던 나이를 만난다. 존 마셜 가족은 첫 번째 탐험여행에서 이들과 함께 6주를 함께 보냈으며, 이후 로렌스 마셜과 그의 가족은 1951년에서 1961년까지 7번(1951, 1952-3, 1955, 1956, 1957-58, 1961)에 걸쳐 니에 니에 지역으로 탐험연구를 떠났다.

       4) 존 마셜의 영화입문과 <사냥꾼들>의 제작배경

    앞서 설명한 것처럼 존 마셜은 아버지 로렌스 마셜과 함께 서아프리카 탐험에 참여하게 되었고, 로렌스 마셜의 권유로 영화를 접하게 되었다. 당시 존 마셜이 서아프리카에서 처음 촬영하기 시작했을 때는 불과 17세의 나이였다. 그는 서아프리카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존 마셜은 아프리카에 가면서 처음 카메라를 접했다. 로렌스 마셜은 1차 탐험여행 때 존 마셜에게 16mm 코닥 매거진 카메라와 필름을 사주었다. 영화촬영에 대한 지식이 전무 했던 존 마셜이 영화촬영을 배우기 위해 처음 접한 책은 코닥사가 출판한 일종의 촬영지침서인 『영화제작법(How To Make A Movie)』이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촬영의 기초를 배웠고, 2년 동안 이 『영화제작법』을 교본으로 삼아 촬영을 하였다.

    또한 <사냥꾼들>의 촬영에 영향을 끼친 것은 영국과학진흥학회가 발행한 『기록과 질문(Notes and Queries)』(1929)이라는 책이었다. 『기록과 질문』은 현지조사를 하는 문화인류학자를 위해 일종의 현장연구목록을 수록한 연구지침서였다. 인류학적인 교육이나 연구경험이 전혀 없던 로렌스 마셜과 존 마셜은 이 책을 기초로 연구와 촬영계획을 세웠다.

    실제로 존 마셜은 쿵 부족의 기술 전반에 대해 촬영을 시작하였으며, 당시 정황으로 볼 때 자연스럽게 사냥에 대한 영화를 만들게 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5)Marshall, “Filming and learning,” Jay Ruby, ed., The Cinema of John Marshall, Chur, Switzerland: Harwood Academic Publishers GmbH, 1993, p.23.  6)Anderson and Benson, “Put Down the Camera and Pick up the Shovel: An Interview with John Marshall,” Jay Ruby, ed., The Cinema of John Marshall, Chur, Switzerland: Harwood Academic Publishers GmbH, 1993, p.136.  7)Marshall, op. cit, p.23.  8)Marshall, ibid, p.25.  9)Marshall, op. cit, p.25.  10)Lorna Marshall, The !Kung of Nyae Nyae,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76 참조.  11)Elizabeth Marshall, The Harmless People, New York: Alfred A. Knopf, 1959 참조.  12)Anderson and Benson, op. cit, p.136.  13)Anderson and Benson, ibid, p.137.  14)Anderson and Benson, ibid, pp.136-137.  15)Anderson and Benson, ibid, p.137.  16)Anderson and Benson, ibid, p.139.

    3. <사냥꾼들(Hunters)>의 비판적 분석

    지금까지 존 마셜이 어떻게 <사냥꾼들>을 만들게 되었는지 그 제작 배경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사냥꾼들>에 나타난 영화적 방법론을 ‘내러티브의 차용’과 ‘전지적 시각’이라는 두 가지 각도에서 분석하면서 <사냥꾼들>에 잠재된 문제점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하기로 한다.

       1) ‘내러티브의 차용’

    <사냥꾼들>은 서아프리카의 칼라하리사막을 배경으로 4명의 주와시 부족 사냥꾼들의 5일간에 걸친 기린사냥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영화의 주된 촬영분은 1952년-53년에 스미소니언협회와 하버드대학의 피바디박물관이 후원한 ‘서아프리카 탐험’ 기간 동안 촬영된 것이다.

    <사냥꾼들>은 전체적으로 주와시 부족의 사냥, 특히 ‘기린사냥’을 큰 주제로 삼고 있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가지 부분으로 구분됨을 알 수 있다. 즉, 영화 전체 80분 가운데 앞부분의 약 23분에서는 본격적인 기린사냥의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는다. 기린사냥은 약 23분 경 사냥꾼 4명을 소개하는 장면부터 시작되어 영화의 끝 장면까지 이어진다. 물론 영화의 시작부터 잠깐 기린의 모습을 멀리서 보여주고 두 남자가 그 흔적을 찾아간다는 내용이 나오지만, 기린사냥이 이야기의 주된 내용은 아니다.

    앞부분(영화의 시작-23분경)은 영화촬영지의 지도, 존 마셜의 내레이션에 의한 칼라하리 사막의 환경 및 주와시 부족의 소개, 그리고 춘퀴의 주된 식수원인 물구덩이, 여성의 채집 장면, 사냥을 익히는 어린 아이의 모습, 망구, 야생돼지, 거북이의 사냥, 독화살을 만드는 장면, 활과 화살을 만드는 장면, 여성들의 요리 장면 등이 나온다. 이 전반부의 장면들은, 채집은 여성의 몫이며, 사냥은 남성의 작업이라는 설명에 의해 조합되지만, 한 이야기로서의 내러티브의 연결고리는 약하다. 즉 이들 장면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기보다는 독립적인 느낌을 준다. 이처럼 <사냥꾼들>에서 ‘기린사냥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전의 장면들은 주와시 부족의 삶을 소주제별로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앞서 말한 『기록과 질문』의 영향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특히 여성들의 채집기술이나 남성들이 활과 독화살을 만드는 장면, 그리고 여러 동물들의 사냥기술과 같은 주와시 부족의 제반 기술에 관한 장면들은 기술의 기록을 강조한 『기록과 질문』의 지침에 따라 촬영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사냥꾼들>의 23분경 이후는 ‘기린사냥이야기’가 하나의 커다란 내러티브를 이루고 있다. 존 마셜 또한 <사냥꾼들>을 가리켜 “하나의 이야기”17)라고 밝혔듯이 <사냥꾼들>은 5일간의 기린사냥을 드라마적인 내러티브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즉, <사냥꾼들>의 많은 장면들은, 창과 화살로 기린을 맞춘 뒤, 며칠 동안 부상당한 기린을 추적하고, 마침내 기린을 죽이고, 기린의 고기를 해체한 뒤, 기린고기를 마을로 가지고 와서 모든 부족들이 기린고기를 나뉘어갖는 장면 등 기린 사냥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존 마셜이 <사냥꾼들>을 내러티브를 가진 드라마 형식으로 구성하기 위해 사용한 하나의 영화적 장치는 주인공의 설정이다. <사냥꾼들>은 5일간의 본격적인 기린사냥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사냥꾼 한명씩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때 단지 이름과 얼굴만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냥꾼들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각 인물에 드라마적인 캐릭터를 부여하고 있다. <사냥꾼들>에 등장하는 4명의 사냥꾼들은 토마, 퀴, 아오, 싸오인데, 예를 들어 토마는 “지도자, 원기 왕성하고 능력 있는 사람”, 아오는 “타고난 사냥꾼이자 공상가”, 퀴는 “단순하고 친절하며 낙천주의자, 가끔 동물흉내를 내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 카오는 “솔직하고 겸손하며 조용한 사람. 그리고 최고의 기술자이자 주술치료사”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사냥꾼들>은 각 사냥꾼들에게 개성을 부여하면서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사냥꾼들>은 관객에게 이들을 한 번씩 소개할 뿐 그들의 캐릭터를 구분할 수 있는 시각적인 정보를 거의 제공하지 않아 사실 4명의 주인공의 모습은 한 번의 설명으로 서로 구분하기 힘들다. 이런 연유로 존 마셜은 <사냥꾼들>을 편집하면서 때로 주인공 역할을 하는 4명의 사냥꾼들을 다른 사람들로 대체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존 마셜은 <사냥꾼들>에서 한 인간으로서 각 사냥꾼의 모습이나 생각을 심층적으로 전달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부쉬맨’으로서의 전형적인 사냥꾼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필요할 때 대역을 사용한 것이다.

    4명의 사냥꾼 가운데 끝으로 카오를 소개한 후, 바로 <사냥꾼들>의 기린사냥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어 본격적인 기린사냥이야기와 장면이 이어져 독화살로 어린 새끼와 함께 있는 한 마리의 암컷 기린의 정강이를 맞추는 장면, 여러 마리의 기린들 가운데 어떤 기린이 독화살을 맞은 기린인지 서로 추측하거나 기린의 배설물 등을 보면서 기린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장면, 사냥꾼들이 밤에 불가에 앉아 다음 날 어느 쪽으로 기린을 추적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끝내 부상당한 기린을 발견하고 서로 모여 화살과 창으로 공격하여 기린을 쓰러뜨리는 장면, 그리고 즉석에서 기린을 해체하고 기린고기를 배부르게 먹은 후 무거운 기린고기를 마을로 가져가기 편하게 고기를 나무에 걸어 말리는 장면, 사냥꾼들이 말린 기린고기를 들고 마을로 돌아오는 장면, 마을에 도착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고기를 배분하고 식사를 하는 장면, 끝으로 사냥꾼들이 여러 남자들과 모여 기린사냥의 무용담을 나누는 장면 순(順)으로 기린사냥의 드라마가 전개된다.

    이처럼 <사냥꾼들>은 주와시 부족의 사냥에 관계된 활동의 사회문화적 맥락 및 의미를 탐구하기보다는 기린사냥이라는 하나의 드라마적인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편집되었다. 이런 점에서 <사냥꾼들>은 민족지영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의 이른바 문화의 ‘심층기술(thick description)’, 즉 문화적 해석을 제공하기보다는 서구관객을 위한 주와시 부족사람들의 흥미로운 기린사냥 이야기를 만드는데 목적을 두었다고 비판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존 마셜 또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목적 때문에 <사냥꾼들>이 심층적인 영화가 되지 못했음을 시인하고 있다.

    결국 <사냥꾼들>은 내러티브 스타일을 차용한 편집방식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먼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은 서아프리카 탐험연구를 주도하고 존 마셜에게 영화촬영을 적극적인 권하고 도와주었던 로렌스 마셜이었다. 그는 <사냥꾼들>의 내러티브를 사용한 영화방식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로렌스 마셜은 1950년대에 존 마셜이 영화를 촬영하고 다큐멘터리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것은 로렌스 마셜이 “영화가 니에 니에 사람들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 라는 믿음”21)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던 로렌스 마셜은 2차 탐험여행을 떠나기 앞서 존 마셜에게 “존, 연출하려 하지마라. 예술적이려고 하지마라. 단지 네가 보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행위들을 촬영해라. 나는 기록을 원하는 것이지 영화(movie)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22)라고 말했다. 여기서 로렌스 마셜이 말한 ‘영화’는 픽숀영화 스타일의 <사냥꾼들>과 같은 영화였다. 그는 존 마셜이 니에 니에 사람들의 삶과 문화의 기록에 충실하지 않은 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존 마셜은 후에 이러한 로렌스 마셜의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내러티브방식과 관련된 <사냥꾼들>의 또 다른 문제점은 이야기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편집방식 때문에 <사냥꾼들>이 사실과는 달리 ‘하나의 기린사냥’이라는 환상을 만든다는 점이다. 사실 존 마셜은 <사냥꾼들>의 기린사냥이야기에 픽숀영화적인 연속성을 부여하기 위해 몇몇의 재연장면을 사용하였다. 즉 <사냥꾼들>은 한 마리의 기린을 추적하고 사냥하는 이야기로 전개되지만, 사실 이야기의 연속성을 위해 몇몇의 상이한 기린사냥 장면을 섞어 사용하거나 재연된 장면을 삽입하여 편집된 것이다. 즉 존 마셜의 설명에 의하면, <사냥꾼들> 속의 기린추적과 사냥장면24)은 1953년에 촬영된 것이며, 기린이 죽은 장면은 1952년에 촬영된 것이다. 또한 <사냥꾼들>에서 죽은 기린은 사실 사냥꾼들의 화살에 맞고 죽은 것이 아니라 지프차에서 쏜 4개의 독화살을 맞아 죽었다. 그리고 <사냥꾼들>에서는 사냥꾼들이 들판에서 밤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이들은 기린이 죽은 날 저녁을 제외하고는 밤에 가우차로 돌아와 잠을 자고 다시 그 전날의 장소로 돌아가 이어 기린을 추적하였다. 또한 존 마셜은 1955년 3차 탐사여행에서 보충촬영을 하여 필요한 장면들을 추가 편집하였다. 예를 들어, 4명의 사냥꾼들의 클로즈-업 얼굴, 경계 장면, 사냥꾼들이 골이 패인 곳을 찾는 장면, 이들이 저녁에 골이 패인 곳을 지나가는 장면, 토마와 싸오가 기린을 향해 창을 던지는 장면 등은 이 때 재연 촬영된 장면들이다.25)

    또한 <사냥꾼들>의 내러티브 스타일의 차용에 대한 비판을 가할 부분은 영화가 주와시 부족 사람들의 현실을 무시하고 주와시 부족 사람들, 즉 부쉬맨의 삶에 대한 그릇된 신화를 심어줄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사냥꾼들>에서는 사냥을 둘러싼 문화적인 해석이나 정치경제적인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고, 사회문화적인 맥락은 배제된 체 하나의 사냥이야기로 전개된다. 즉, <사냥꾼들>에서는 관객들이 ‘기린사냥이야기’를 볼 뿐 사냥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읽을 수 없다. 이는 주와시 사회를 보는 역사의식 및 사회문화적인 인식과도 관련이 된다. 한 마디로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수렵채집인들’을 찾아 떠난 ‘아프리카탐험’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사냥꾼들>은 주와시 부족에 대한 역사적인 의식이 전혀 없다. 또한 주와시 부족의 현실에 대한 사회, 정치경제적인 시각 또한 전혀 없다. 그리고 실제로 주와시 부족 사람들의 삶에서 사냥보다는 남성과 여성 모두 참여하는 채집경제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남성들의 사냥이 너무 강조되어 있기 때문에 주와시 부족사람들은 사냥에 의존하여 생활한다는 그릇된 신화를 심어 줄 수 있다. 즉, 주와시 부족의 사회문화적인 맥락에 대한 지식이 없는 관객들은 ‘부쉬맨=사냥꾼들’이라는 도식에 사로잡힐 수 있다. 이에 대한 존 마셜 또한 “<사냥꾼들>의 첫 번째 부분은 내가 완전히 만들어 낸 이야기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사냥이 필요 이상으로 중요하게 그려지고 있다.”26)고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사냥꾼들>은 “그리고 노인들은 기억하였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들었다. 그리고 사냥의 이야기는 말해졌다.”라는 말로 끝나는데, 이러한 영화의 끝맺음 방식은 그릇된 내러티브의 연속성을 암시하고 문화를 정적이고 신화적인 시간에로 투사하는 오류를 초래할 수 있다.

    <사냥꾼들>의 내러티브 스타일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설명할 것은 <사냥꾼들>과 로벗 플래허티(Robert Flaherty)의 <북극의 나눅(Nanook of the North)>이나 <아란의 남자(Man of Aran)>의 유사성에 대한 지적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냥꾼들>은 한 집단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기린사냥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드라마화하고 있는데, 이러한 점에서 혹자는 <사냥꾼들>과 <북극의 나눅>이나 <아란의 남자>의 유사성을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존 마셜은 <사냥꾼들>을 제작할 때 <북극의 나눅>을 보지않았으며, 아래의 내용처럼 기린사냥과 관련된 주와시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북극의 나눅>에서처럼 자연과의 투쟁의 방식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사냥꾼들>을 <북극의 나눅>과 연관시켜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것은 옳은 시각이라고 볼 수 없다.

       2) ‘전지적 시각’

    <사냥꾼들>의 분석을 위해 살펴보아야 할 또 다른 점은 존 마셜의 전지적(universal) 시각이다.

    이처럼 <사냥꾼들>을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존 마셜의 시각이다. 반면, 사냥꾼들을 비롯한 등장인물의 시각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관객들은 <사냥꾼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감정을 읽을 수 없다. 오로지 존 마셜의 생각이나 감정이 전적으로 영화에 투영되고 해석된다. 즉, 주와시 부족사람들의 삶과 생각은 존 마셜에 의해 인위적으로 선택, 촬영되고 편집된다. 존 마셜 또한 후에 이러한 전지적 시각을 인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처럼 민족지영화로서의 <사냥꾼들>의 문제점은 주와시 부족의 삶과 문화를 보는 시각과 재현방식이다. 한 마디로 <사냥꾼들>은 ‘etic’ 즉 외부자의 관점이다. 민족지영화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영화대상자인 내부자의 시각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볼 때 등장인물들의 내부적인 시각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점은 하나의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사냥꾼들>은 전형(典型)으로서의 ‘사냥꾼들’을 재현하려하고 있다. ‘사냥꾼들’이라는 보통명사를 사용한 영화의 제목도 이러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사냥꾼들>에 등장하는 4명의 주와시 부족 사냥꾼들은 각각 정체성을 지닌 한 개인으로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픽숀영화적인 설정으로 재현된다. 또한 <사냥꾼들>은 ‘기린 사냥’이라는 인위적인 내러티브를 설정하고 이에 따라 여러 장면을 연속적으로 편집하는데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사냥꾼들>에서는 주인공의 생각과 감정이 무시되고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사냥꾼들>에서 존 마셜의 전지적 시각을 전달하는 주된 수단은 존 마셜의 보이스-오버(voice-over) 내레이션이다. 빌 니콜스의 이른바 ‘설명적 양식’31)으로 만들어진 <사냥꾼들>은 전체적으로 존 마셜의 해설이 전체적인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따라서 존 마셜이 부쉬맨들의 문화와 등장인물의 삶과 생각을 설명하는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은 ‘신의 목소리’32)처럼 절대적인 권위와 설명력을 지닌다.

    존 마셜이 이처럼 <사냥꾼들>에서 전지적인 시각을 사용한 것은 크게 몇 가지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존 마셜의 전지적 시각은 앞서 말한 내러티브 스타일의 차용과 관계가 있다. 즉 <사냥꾼들>은 하나의 인위적인 내러티브의 틀을 설정해놓고 편집을 했기 때문에 영화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자신의 해설에 의한 전지적인 방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에 의존하는 다큐멘터리영화의 방식은 존 마셜이 <사냥꾼들>을 만들던 당시 유행하던 영화제작방식이었다. 즉 빌 니콜스의 이른바 ‘설명적인 양식’은 <사냥꾼들>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주지하다시피 다큐멘터리영화의 역사에서 다큐멘터리영화가 해설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영화제작 방식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말부터이다. 존 마셜 또한 <사냥꾼들> 이후에는 전적으로 해설에 의존하는 영화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한편, <사냥꾼들>의 제작 당시, 또는 그 이전에 많은 다큐멘터리영화가 권위적인 제3자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에 의존하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존 마셜 자신의 목소리에 의한 해설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나마 진일보했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 세 번째 고려할 점은 기술적인 측면이다. 사실 1960년대 이전의 다큐멘터리영화의 재현방식은 어느 정도 카메라, 녹음장비를 비롯한 영화기술과 관계가 있다. <사냥꾼들>도 마찬가지였다. 존 마셜은 <사냥꾼들>을 촬영하기 위해 벨 앤 호웰 카메라를 사용하였는데, 이 카메라를 사용하여 필름 한통 분량으로 연속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10분 남짓이었다. 따라서 존 마셜은 하나의 사건을 자연스럽게 이어 촬영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장면들을 짧게 끊어서 촬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을 이야기로 연결하기 위해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에 의한 해설방식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존 마셜은 <사냥꾼들>을 촬영하면서 주로 삼각대를 이용하였다. 따라서 피사체의 동작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촬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고, 피사체와 카메라 간의 촬영거리나 각도의 변환이 자유롭지 않아 다양한 쇼트의 촬영이나 각 등장인물의 정교한 묘사를 할 수 없었다. 존 마셜이 <사냥꾼들>에서 사냥꾼들의 몇 몇 클로즈업 장면을 후에 보충 촬영한 것은 이러한 이유였다.

    그리고 당시는 동시녹음장비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와시 부족사람들의 대화를 생생하게 현장에서 담을 수 없었다. 존 마셜도 밝힌 바와 같이 주와시 부족사람들은 매우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의 대화를 가까이서 듣고 녹음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기술적인 제약은 <사냥꾼들>의 제작방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존 마셜의 내레이션이며, 현장음은 주와시 부족의 전통음악이 대신하였다. 결국 이러한 기술적인 제약은 <사냥꾼들>이 존 마셜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에 의해 지배되는 ‘전지적 시점’의 영화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러한 점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사냥꾼들>의 주된 특징은 존 마셜의 전지적인 시각과 앞서 말한 내러티브 장치가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사냥꾼들>은 ‘기린사냥’이라는 내러티브의 틀에 따라 이야기되고 해설된다. 따라서 <사냥꾼들>은 부쉬맨들을 비롯한 주와시 부족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이들의 삶을 관찰하고 촬영하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은 드라마적인 내러티브 장치와 존 마셜의 전지적 시각과 해설이다.

    17)Anderson and Benson, ibid, p.140.  18)Marshall, op. cit, p.37.  19)Marshall, ibid, p.36.  20)Anderson and Benson, op. cit, p.139.  21)Marshall, op. cit, p.26.  22)Anderson and Benson, op. cit, p.137.  23)Marshall, op. cit, p.39.  24)<사냥꾼들>의 기린사냥에 대한 진실공방에 대해서는 Gonzales, “An Argument about a Film,” Jay Ruby, ed., The Cinema of John Marshall, Harwood Academic Publishers, pp.179-193을 참조할 것.  25)Marshall, “The Hunter,” R. Kapfer, W. Petermann, and R. Thoms, eds., Jäger und Gejagdte: John Marshall und Seine Filme, 1991, p.118.  26)Marshall, ibid, p.122.  27)Loizos, Innovation in ethnographic film, Chicago: The Chicago University Press, 1991, p.22.  28)Marshall, op, cit, 1993, p.40.  29)Marshall, ibid, p.36.  30)Marshall, ibid, p.36.  31)Nichols, Representing Reality, Bloomington: The Indiana University Press 참조.  32)Nichols, ibid.  33)Marshall, op. cit, p.36.  34)Marshall, ibid, p.35.

    4. 나오는 말

    본 논문은 존 마셜의 첫 번째 장면 민족지영화/다큐멘터리영화인 <사냥꾼들>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본 논문은 <사냥꾼들>의 텍스트뿐 아니라 <사냥꾼들>을 둘러싼 여러 맥락을 함께 살펴보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이를 위해 <사냥꾼들>의 텍스트 분석에 앞서 존 마셜이 서아프리카와 인연을 맺고 영화제작에 입문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존 마셜의 아버지 로렌스 마셜의 전기적 배경과 아프리카 탐험여행의 배경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어 아프리카탐험여행 경험이 어떻게 존 마셜의 <사냥꾼들>의 제작으로 이어졌는지 그 제작배경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사냥꾼들>에 나타난 존 마셜의 영화적 방법론을 ‘내러티브의 차용’과 ‘전지적 시각’이라는 두 가지 각도에서 영화텍스트의 특징을 분석하는 동시에 이러한 두 가지 영화적 방법론에 잠재적인 문제점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살펴보았다.

    <사냥꾼들>을 분석, 고찰하면서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사냥꾼들>이 차후 존 마셜의 영화방법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한 <사냥꾼들>를 통해 이후 존 마셜의 영화제작스타일이나 관심사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존 마셜은 <사냥꾼들>을 만든 후, 여러 상(賞)을 받으면서 민족지영화감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존 마셜은 자신의 작품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리고 <사냥꾼들>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비판을 받아들였다. 존 마셜의 이러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성찰적인 태도는 그 다음 영화작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 한 예로 이른바 ‘시퀀스영화’를 들 수 있다. 존 마셜은 <사냥꾼들> 이후 ‘시퀀스영화’라는 일종의 단편민족지영화에 몰두하였다. 존 마셜의 시퀀스 영화들은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를 중심으로 영화를 전개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주와시 부족 사람들의 미시적인 사회문화적 현상의 기록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존 마셜의 15편의 이른바 ‘쿵 부족 시리즈’라는 시퀀스영화 가운데 한 작품인 <고기싸움 (The Meat Fight>(1974)은 사냥 및 고기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주와시부족원들 간의 갈등의 문화적 의미를 깊이 있게 보여준다. <사냥꾼들>에서는 사냥꾼들이 기린고기를 사냥하고 모든 구성원들에게 나누어주는 이야기로 끝날 뿐, 고기분배가 사회문화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는 전혀 다루고 있지만, <고기싸움>은 ‘고기분배를 둘러싼 싸움’이라는 미시적인 문화적 사건에 주목하면서 인류학적/문화적 의미를 드러내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주와시 부족을 대상으로 한 시퀀스영화는 존 마셜의 영화경력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존 마셜의 각 작품은 차후 작품이나 그의 인생사에 연속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즉 앞서 말한 바대로 존 마셜은 <사냥꾼들> 이후 시퀀스영화를 만들었고, 그 이후 1970년대 말에는 <나이, 쿵 여인의 이야기>이라는 민족지영화/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 영화는 <사냥꾼들>을 주요 텍스트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나이> 또한 존 마셜은 차후 인생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존 마셜이 이 영화제작 이후 주와시 부족을 위한 실천적 삶을 살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존 마셜은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인 2002년에 주와시 부족과 함께 살아간 50여년의 삶을 다룬 <칼라하리 가족>이라는 6시간의 장편 다큐멘터리를 선보인다. 5편으로 구성된 <칼라하리 가족>은 존 마셜이 1950년대에 촬영한 <사냥꾼들>의 장면에서부터 <나이, 쿵 여인의 이야기>의 장면, 그리고 <나이, 쿵 여인의 이야기> 이후 존 마셜이 실천적 삶을 살아오면서 경험한 이야기 등 50년에 걸친 촬영장면을 담고 있다.

    이처럼 본 논문에서 살펴본 <사냥꾼들>은 존 마셜의 주요 작품에 자주 등장하면서 영화로서의 생명을 이어갔을 뿐 아니라, 영화적으로 뿐 아니라 존 마셜의 삶과 주와시 부족 사람들의 역사와 삶의 궤적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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