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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한국 영화 속 여체(女體)에 반영된 괴물성 연구 Study of monstrous-feminine as reflected in the female body on the Korean films
  • 비영리 CC BY-NC
ABSTRACT
한국 영화 속 여체(女體)에 반영된 괴물성 연구

Study of the monster in the movie analyzed the structure of the female victims and male monster. Such research for most of the monsters in the movie and analyze the dichotomy in the structure of male and female victims monster. However, these monster’s narrative structure has a limit to describe the monster appeared in the Korean movie. Korean in the movie monster has a unique narrative structure narrative to be a duplicate of the female victim and a female monster. This study says that duplicate the victims and the female monster, monster with a feminine body characteristics Korean monster narrative structure.

Taijoo of <Bat>, mother of <Mother>, and boknam of <Whole story of the murder Kim boknam> are the monsters that threaten the order of the symbolic rather than the victims. They are described as horrific monsters who violate the order of the symbolicin, and separate it, and disturb it. However, they are not the batter that was removed because of the threat to the subject. The location of the monster are duplicated the position of the female victims of patriarchal oppression. These films reflect the characteristics of a monster with a woman's body.

KEYWORD
monstrous-feminine , violation , separation , disturbance , abject , abjection , the female body , in- between
  • 1. 들어가며

    프로이트는 이야기를 통해 손쉽게 불안하고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 으키는 데 가장 확실한 전략은 독자를 애매모호한 상태로 방치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불확실한 상태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1)영화 속 괴물의 형상은 인간의 모습과 가장 유사하면서 또한 매우 이질적이고 낯설다. 인간의 형상과 유사하지만 인간이 아닌 괴물은 그가 지닌 애매모호한 형상으로 인해 공포와 불안을 야기 시킨다. 리처드 커니 역시 이방인이나 괴물처럼 우리에게 결코 환대받지 못하고 배척당하는 타자가 사실은 우리 자신의 또 다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2) 즉 괴물은 타자이지만 우리와 전혀 다른 절대적 타자가 아닌 우리 안에 억압된 타자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타자이면서 타자가 아닌 괴물은 그가 지닌 불확실성3)을 통해 불안과 공포의 감정을 의인화한다.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재현되는 괴물은 숭고와 혐오(공포)의 이중적 감정을 재현함과 동시에 타자화 된 인간의 억압된 무의식을 형상화했다. 괴물은 이야기의 의미 고리를 통해 욕망의 저지할 수 없는 환유적 움직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4) 대상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의 크기가 클수록 괴물은 더욱더 흉측하고 위력적인 존재로 형상화되었으며, 그를 통해 획득한 숭고의 감정은 성찰을 위한 설득과 훈육의 도구5)로기능했다. 더불어 괴물이 재현하는 불확실성과 경계적 성향으로 인해 그 사회나 문화가 억압하고 있는 가치나 욕망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이제까지 영화 속 괴물에 대한 논의는 남성괴물을 중심에 두고 여성 희생자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기존 논의에서 여성의 괴물성은 남성 괴물의 일부로 파악되거나, 여성은 남성의 거세된 타자를 재현할 때에만 공포스럽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었다.6) 여성괴물에 대해 본격적으로 분석한 린다 윌리엄스7) 역시 괴물은 ‘남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뒤틀린 육체를 통해 성적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남성에게 거세 공포를 준다는 의미에서 여성에 더 가깝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결여된 남성’을 여성으로 본다는 가부장적 시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영화 속 괴물에 대한 연구들은 남성괴물과 여성희생자의 이분법적 구도 안에서 서사를 구조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괴물 서사 구조는 한국 영화 속 괴물을 분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한국의 괴물은 언제나 가부장제 안에서 억압받던 여성이 귀환한 여성괴물이었으며, 여성괴물/남성희생자의 역전적 구조도 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분석의 틀을 가져온다면 여성괴물=여성희생자가 중첩되는 독특한 서사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이렇듯 한국 영화 속 괴물 서사가 지니는 특이성으로 인해 한국 영화에서 여성괴물은 서구와 다른 한국 사회의 문화적 자질을 대변하는 특징으로 간주되어왔다. 지금까지 한국영화 속 여성의 괴물성 연구는 영화 산업에 기반 하여 공포영화나 괴기영화의 장르적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논의되거나, 여체가 지닌 생물학적 특성과 한국 사회의 문화적 기반과 관련한 젠더적 관점 등 다각도의 측면에서 연구되었다. 먼저 한국 공포영화 속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여성괴물의 형상을 섹슈얼리티와 관련하여 규명함으로써, 당대의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 이는 다시 억압된 타자의 관점에서 당대 사회의 다양한 사회·문화적 억압의 양상이 표출하는 괴물로 여성을 파악하는 관점8)과 여성의 신체가 지닌 괴물성을 통해 여성의 괴물성을 연구하는 방향으로 나뉜다.9)

    그러나 기존 논의들은 여성괴물=여성희생자가 중첩되는 한국 영화의 특수성을 이해하는 데 다소 미약한 부분이 있다. 기존 연구들은 여성에게 가해진 과잉억압에 의한 여귀(女鬼)의 귀환 및 복수담을 기반으로 하는 한국 괴물서사의 자질을 밝히는데 주안점을 두거나, 가부장적 상징질서를 위반하고 교란시키는 모성적 신체가 환기시키는 괴물성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공포 영화 속 여성들은 가부장제 억압당한 희생자만도 가부장을 위협하는 위력적인 괴물만도 아니다. 이 글은 기존 연구들이 지닌 남성 중심적 사유 체계 내에서 여성을 희생자 또는 괴물로 나누는 이분법적 시각을 지양하고, 여성괴물과 희생자가 중첩되는 한국 괴물 서사 구조가 여체가 지닌 괴물성에 있음을 밝혀낼 것이다. 한국 영화 속 여체의 괴물성이 지닌 의미 분석을 위해, <박쥐>의 흡혈귀 태주처럼 형상학적 괴물 외에도 괴물성을 드러내는 여성이 등장하는 영화도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1)지그문트 프로이트(정장진 옮김), 『예술, 문학, 정신분석』, 열린책들, 2006, 413쪽 참조.  2)리처드 커니(이지영 옮김), 『이방인, 신, 괴물』, 개마고원, 2004, 12~13쪽 참조.  3)김일영은 드라큘라의 형상이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는 양가성과 모호한 불확실성을 띰으로써 전환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두려움과 불안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하였다. 김일영, 「불확실성과 “중간자(in-between)”에 대한 공포: 전환기시대의 고딕 <드라큘라>」, 『근대영미소설』 16권 3호, 2009, 참조.  4)피터 브룩(이봉지·한애경 옮김), 『육체와 예술』, 문학과 지성사, 2000, 397쪽.  5)프랑코 모레티는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를 분석하면서 작품 속 괴물들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금기시된 욕망이었던 근친상간과 섹슈얼리티의 구체적 재현이라고 보았다. 금기시된 욕망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과 공포는 크고 위력적인 괴물로 재현되었으며, 괴물이 주는 공포와 숭고의 이중적 감정은 비이성적 사고에 대한 경계나 성적 방종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당시 공포문학이 공포를 통해 획득하고자 했던 설득과 훈육이라는 문학적 효과와 관련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프랑코 모레티(진형준 옮김), 「공포의 변증법」, 『세계의 문학』, 민음사, 1997, 여름호, 232쪽 참조.  6)영화 속 괴물에 대한 선구적인 작업을 시도한 로빈 우드의 견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젠더의 문제를 공포영화에 적절히 끌어오고 있지만,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에서부터 <사이코>에 이르기까지 공포영화에서 항상 위협과 공격의 주 대상은 여성이었다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을 희생자로 인식하고 있다. 로빈우드(이순진 옮김),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 시각과언어, 1995, 244쪽.  7)린다 윌리엄스 (유지나·변재란 편), 『페미니즘/영화/여성』, 여성사, 1993, 참조.  8)김소영, 『근대성의 유령들-판타스틱 한국영화』,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2000. 김소영, 「근대성과 여자 귀신」, 『한국학논집』 30, 계명대학교한국학연구원, 2003. 박주영, 「1998년 이후 한국 ‘귀신영화’에서의 여성 재현」, 연세대 대학원 석사논문, 2005. 백문임, 「한국 공포영화 연구:여귀의 서사기반을 중심으로」, 연세대 대학원 박사논문, 2002. 백문임, 「그녀의 죄는 무엇인가:한국 공포영화의 공감자-분신(sympathizer-double) 주인공」, 『대중서사연구』 9, 대중서사학회, 2003. 박진, 「공포영화 속의 타자들: 정신질환과 귀신이 만나는 두 가지 방식」, 『우리어문연구』 25, 2005. 오현화, 「한국 영화의 여성괴물 재현 양상 연구」, 고려대 대학원 박사논문, 2007.  9)김윤희, 「한국 공포영화 속의 변화하는 모성성 : <월하의 공동묘지>, <올가미>, <4인용 식탁>을 중심으로」,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석사논문, 2004. 손희정, 「한국의 근대성과 모성재현의 문제:포스트 뉴 웨이브의 공포영화를 중심으로」,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석사논문, 2005. 하선화, 「한국 공포영화 속 모성담론의 재해석에 관한 연구:정신분석학적 프랑스페미니스트 논의 개입을 위하여」, 동의대 대학원 석사논문, 2006. 서인숙, 「공포영화속의 여성 섹슈얼리티 -바바라 크리드의 여성 괴물을 중심으로-」, 『영화교육연구』 단일호, 2004.

    2. 경계를 횡단하는 여체(女體)와 괴물성

    ‘희생자’ 또는 ‘결여된 남성’이라는 여성 괴물에 관한 가부장적 논의들과 달리 바바라 크리드는 여성괴물이 여성을 괴물로 구성하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그 이면에 놓인 공포를 폭로하는 경계적 존재10)임을 밝히고 있다. 크리드의 여성괴물은 ‘남성괴물(male monster)’에 상반되는 ‘여자괴물(female monster)’이 아닌 ‘여성괴물(monstrousfeminine)’11)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괴물성 형성에 있어 젠더의 역할이 핵심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크리드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을 남근 중심적 가부장제 질서의 산물로 보고, 여체의 괴물성을 ‘거세된 어머니’가 아닌 ‘거세하는 어머니’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섹슈얼리티에 대한 생물학적 환원주의적 관점을 사회구조적 이데올로기와 연관시키는 논리적 비약으로 인해 균형을 상실12)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체가 지닌 생물학적 특징을 통해 사회구조 속 여체의 젠더적 성향을 분석한데서 오는 과잉해석의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기는 하나, ‘희생자’나 ‘거세된 남성’과 같은 타자적 관점에서 여성의 괴물성을 파악하는 것을 지양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주체와 타자,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출몰하고 횡단하는 경계적 존재로 여성의 괴물성을 분석하고 있는 부분은 한국 영화 속 괴물=희생자가 중첩되는 괴물 서사의 자질을 분석하는 데 유용한 개념이다.

    크리드는 기존 논의들이 간과했던 여성괴물에 대해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abject)’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하고 있다. 크리드13)에따르면 여성괴물은 여체(女體)에 대한 오랜 종교적 혐오의 연장선상에서 여성의 재생산 기능 및 어머니 역할, 즉 모성과 관련될 때에 더욱 공포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한다. 크리드가 논의하는 여성괴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논의의 근거로 삼고 있는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abject)’와 ‘아브젝시옹(abjection)’,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두려움과 공포의 개념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공포의 권력』14)에서 정신분석학에서 도외시되었던 어머니를 복원시켜 모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억압된 어머니의 몸이 결코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주체가 상징계에 진입한 후에도 상징계를 분열시키는 파괴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크리스테바는 깨끗하고 정결한 몸의 경계가 말하는 주체로서, 주체 구성의 기본조건이 되어왔다고 역설한다. 그녀는 ‘아브젝트’와 ‘아브젝시옹’ 개념을 통해, 적합한 주체와 사회성이 어떻게 부적합하고, 더럽고 무질서한 것들을 배제시켰는가를 분석한다.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경계선임에 틀림없는 아브젝시옹은 경계선 중에서도 모호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방해를 제거하면서 주체를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주체를 분리시키는 대신, 반대로 주체에게 끊임없는 위험을 고백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브젝시옹 자체가 판단과 정서, 구형과 심정의 토로, 기호들과 충돌들의 혼합물이기 때문이다.16)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아브젝트는 천하고 더러운 대상을 지칭하며, 아브젝시옹은 적합한 주체성이 형성되기 위해 부적합하고 더러운 것들이 어떻게 배제되어왔는지를 알려주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아브젝시옹은 아브젝트에 관한 주체의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아브젝트는 이런 애매모호함과 경계에 모호하게 위치하는 특성으로 인해 ‘아브젝트’ 즉, 혐오의 대상이나 추방, 배제, 타자와 연관이 깊다. 크리스테바는 주체가 상징계 질서에 진입하기 이전과 이후에 모성적 신체를 지닌 여성의 몸을 ‘아브젝트’한 것으로 간주한다고 한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아이가 일차적 사랑 대상인 어머니와의 분리를 경험하는 것은 주체가 되기 위한 필수 과정이며, 어머니의 몸은 주체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억압되어져야 하는 것이다.17) 그러나 분리 단계에서 억압된 어머니의 몸은 주체와 분리된 후에도 주체의 무의식 속에 흔적으로 남아, 상징계 질서가 수립한 분리 논리의 경계선을 침입하고 이탈하는 전복적인 힘을 지니게 된다. 억압된 주체의 무의식를 점유하는 어머니의 몸은 간헐적으로 상징계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상징질서를 위협하고 교란시키는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또한 여성의 몸은 월경, 임신과 출산 등으로 인해 단일하거나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이다. 경계가 불분명한 몸은 존재성이 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분법을 해체함으로써 그 이분법에 내재되어 있던 위계까지도 해체함을 뜻하는 것이다. 공포영화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혐오스럽고 공포스럽게 재현되는 것은 상징계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유동적이고 모호하며 경계를 횡단하는 여체의 특징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젝트’와 ‘아브젝시옹’ 개념을 통해 여체가 지닌 세 가지 특징에 대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여체는 단일하고 고정된 신체가 아닌 경계를 횡단하고 질서를 위반하는 유동적이고 경계가 모호한 혼합물이다. 둘째, 여체는 주체를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주체를 분리시키고, 동시에 끊임없이 주체에게 위험을 고백하는 분절과 봉합의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셋째, 여체는 경계를 침입하고 이탈하고 전복시킴으로써 상징계의 질서를 교란시키거나 와해시킨다. 여체가 지닌 모호함과 분리, 교란의 경향성은 괴물 서사에서 여성이 주체를 위협하고 교란시키는 공포의 대상이거나 남성 주체에게 희생당하는 괴물 혹은 희생자라는 이분법적 논리를 수정케 한다. 크리드의 ‘아브젝트 한 여성괴물’은 한국 영화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여성괴물과 희생자가 중첩된 괴물 서사의 의미 분석에 가장 적확한 구조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한국 영화의 괴물 서사는 여성이 유발하는 경계적 성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구축된 서사물이라 할 수 있다. 크리드의 논의가 생물학적 환원주의가 야기하는 분석적 결함으로 인해 그의 논의 전반을 차용하기는 힘들지만, 그녀가 제기하는 여체의 경계적 특징은 한국 영화의 괴물 서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유효한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글에서는 여체의 생물학적 특성(sexuality)이 야기하는 근원적 괴물성은 배제하고, 영화가 형상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구조 내에서 기획되고 규정되는 여체의 젠더적 특징을 통해 분석을 시도할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박찬욱의 <박쥐>(2009)와 봉준호의 <마더>(2009), 장철수의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2010)을 통해 여체의 젠더적 특징이 한국 영화에서 괴물 서사를 구축하는 방식과 그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10)손희정, 「경계를 탐구하는 바바라 크리드」, 『여성이론 25호』,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1, 191쪽.  11)이 글에서 사용하는 여성의 괴물성은 ‘남성괴물(male monster)’에 상반되는 형상학적 괴물로서의 ‘여자괴물(female monster)’이 아닌 크리드가 사용하는 ‘여성괴물(monstrousfeminine)’의 개념을 원용할 것이다.  12)최애영은 크리드가 프로이트의 남근중심적 정신분석이론에 대항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적 이론과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뒤섞어 생각함으로써, 상이한 차원의 논지를 한 공간 안에 뒤섞는 방법상의 미숙함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최애영, 「여성은 왜 괴물로 형상화 되어왔는가」, 『여성문학연구』 21, 한국여성문학회, 2009, 312쪽 참조.  13)바바라 크리드(손희정 옮김), 『여성괴물(The Monstrous-Feminine)』, 여이연, 2008.  14)줄리아 크리스테바(서민원 옮김), 『공포의 권력』, 동문선, 2001.  15)위의 책, 25쪽.  16)위의 책, 32쪽.  17)오현화, 앞의 글, 41쪽.

    3. 오염과 위반 - <박쥐>의 태주

    박찬욱의 전작들이 그러하듯 <박쥐> 역시 관객들의 반응은 극과 극을 이루었다. 그의 작품들이 매번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는 그가 그려내는 인물들이 주는 혐오감 때문이다. 박찬욱은 추악한 인간의 본성과 탐욕스러운 욕망을 매번 그의 영화에서 보란 듯이 까발린다. 인간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관객의 눈에서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손을 치워버리는 박찬욱은 어쩌면 가장 잔인한 감독일지도 모른다. <박쥐> 역시 관객을 향해 “자 봐, 이게 바로 당신들의 진짜 모습이야.”라며, 전염병보다 더 치명적이고 무서운 인간의 욕망에 대해 그려나가고 있다.

    크리드는 ‘여성괴물’을 재현하는 대표적 방식으로 경계 개념을 들고 있다. 인간과 비인간, 사람과 짐승 사이의 경계에서, 정상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선한 것과 악한 것 사이의 경계에서, 정상적인 성욕과 비정상적인 성욕 사이의 경계에서, 그리고 정상적 젠더 역할의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의 경계에서 아브젝트가 나타나며, 이로 인해 공포가 발생한다.18) 즉, 인간사회가 규정하고 있는 정상성과 이것에서 이탈한 비정상성을 구분 짓고 경계 지움으로써 발생하는 두 영역 간의 충돌과 대립에서부터 공포와 괴물성이 유발된다는 것이다. 이때 남성의 신체 보다는 생리혈이나 출산과 같은 모성적 기능에 의해 여성의 신체가 아브젝트한 신체로 간주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경계선 상에서 깨끗한 신체와 오염된 신체는 경계 나누기의 중요한 지점이 된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는 고딕소설 이래로 서구 공포물에서 확실한 계보를 형성해온 흡혈귀 모티프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영화이다. ‘타자성’ 혹은 ‘이질성’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온 드라큘라를 전유하면서도 가톨릭 사제를 뱀파이어로 선택했다는 데에 이 영화의 독특한 점이 존재한다.19) 또한 상현과 태주를 통해 상징계의 질서를 위반하는 오염된 신체가 지닌 경계적 성격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형상화하고 있다.

    존경받는 신부 상현은 ‘이브 바이러스’ 감염으로 환자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해외에서 비밀리에 진행되는 백신개발 생체 실험에 자원한다. 그 역시 실험 도중 바이러스 감염으로 죽음 직전에 이르지만, 정체불명의 피를 수혈 받고 생체 실험에 자원한 500명 중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다. 그러나 상현의 생존은 바이러스 감염이 완치 돼 깨끗한 신체로 회복된 온전한 의미에서의 생존이 아니었다. 그는 수혈 받은 피로 인해 온갖 욕망에 사로잡힌 불사의 흡혈귀가 되어 돌아 온 것이다. 가부장적 상징계는 문명화된 행동들과 깨끗한 신체와 질서를 강화하면서, 오염된 신체는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야만스럽고 불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치명적 바이러스에 감염 된 그의 신체는 상징계에 부적합한 오염된 신체에 다름 아니다. 이제 더이상 상현은 아버지의 질서가 요구하는 고결한 성직자가 아니다. 노신부 앞에서 “저는 이제 모든 쾌락을 탐합니다.”라고 고해하는 욕망에 눈이 먼 노총각에 불과할 뿐이다.

    욕망에 눈이 먼 흡혈귀 상현이 태주를 사랑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처음부터 상현이 태주를 탐욕과 욕정의 대상으로 본 것은 아니다. 영화의 표면적 내러티브는 끊임없이 태주를 구원하려는 상현의 모습을 보여준다. 상현은 태주를 구원하기 위해 세 번의 시도를 한다. 첫 번째 시도는 태주를 라여사와 그녀의 남편 강우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강우를 죽이는 것이었다. 몇 십 년 동안 태주를 옭아매던 올가미에서 상현은 그녀를 구원한 것일까? 강우가 죽은 후 그들은 악몽에 시달리고, 상현은 오히려 태주로부터 자신의 가정을 파괴한 파렴치범으로 몰린다. 둘만을 위한 섹스도, 이불 속도, 출렁이는 물침대도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일 뿐인 죄책감과 불안감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해주지는 못한다. 영화는 강우의 죽음으로 인해 남편의 친구, 친구의 아내라는 사회가 규정했던 위치에서 자유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은 강우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진 1>에서 보여주는 상현-강우-태주의 배치는 그들의 죄의식을 형상화 하기 위한 의도적 연출이며, 이는 결국 그들의 관계가 <사진 2>처럼 서로를 옭아매는 갈등관계로 확산될 것임을 반영한다.

    그러던 중 상현은 태주의 몸에 난 상처들이 강우가 아닌 그녀 자신이 자해한 흔적이라는 걸 알게 된다. 태주의 거짓말을 알게 된 상현은 분노로 인해 실수로 그녀를 죽이고 만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태주에게 자신의 피를 수혈해 두 번째 구원을 시도한다. 두 번째 구원을 통해 상현은 그녀를 불사의 몸인 흡혈귀로 만들어 준다. 이브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현의 피로 흡혈귀가 된 태주 역시 아브젝트한 오염된 신체라 할 수 있다.

    불사의 몸을 얻게 된 그녀는 상현조차도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상현과 태주 모두 흡혈귀가 되었지만, 그들의 행동은 상이한 차이를 보인다. 상현이 뇌사 상태에 빠진 환자의 피나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피를 수혈 받는데 반해, 태주는 무고한 사람을 흡혈하고 무자비하게 죽인다. 상현이 자신의 흡혈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한 반면 태주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 뿐이다. 경계의 위반과 대립을 통해 괴물성이 유발되는 것이라면, 자신의 행위에 합적합성을 부여하는 상현은 비록 감염으로 인해 오염된 신체를 지니고 있지만 여전히 정상에 가까운 경계 안에 위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상현은 태주를 향한 욕망과 강우의 살해, 그녀의 폭주를 막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자책한다. 그의 자책과 죄의식은 경계 안의 질서를 위반한 자신에 대한 자기 처벌적 성격이 강하다. 반면, 태주는 경계를 위반하고 와해시키는 위력적인 ‘아브젝트’ 그 자체다. 상현이 흡혈 행위와 태주와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죄의식을 환기하는 것과 달리, 태주는 강우의 죽음 외에는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롭다. 어릴 적 아버지가 버리고 간 뒤 라여사에 의해 양육되고, 그녀의 아들 강우와의 결혼을 통해 태주는 상징계가 요구하는 합적합한 여성으로 자리매김한다. 강우의 아내 자리는 태주가 경계 안에 안착할 수 있는 유일한 위치이다. 태주가 강우의 죽음에 죄의식을 느끼는 것도 경계 안에 위치한 강우의 아내자리만이 상징계 질서에 의해 처벌받고 통제되기 때문이다. 강우의 죽음으로 그의 아내 자리를 상실한 태주는 더 이상 경계 안에 안주할 수 없게 된다. 그녀가 상현과 달리 남편 친구와 불륜을 저지르고, 남편을 공모하여 죽이고, 오염된 신체를 지닌 흡혈귀가 됐음에도 질서를 위반 한데 대한 처벌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경계 밖의 불온한 타자이기 때문이다. 상현의 죄의식이 경계 안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강박에서 비롯되었다면, 경계의 안과 밖을 횡단하는 태주에게 죄의 식은 다소 유동적이고 모호하게 규정된다.

    그들은 처음 남편의 오랜 친구와 친구의 아내로 만나게 된다. 몽유 병을 가장해 매일 밤 맨발로 온 동네를 뛰어 다니던 태주에게 상현은 자신의 낡은 신발을 신겨준다. 태주에게 있어 상현의 행동은 그녀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 본 인간다운 애정이었는지 모른다. 상현의 따뜻한 호의에 태주는 “난 부끄럼 타는 여자가 아니에요.”라며 그를 적극적으로 유혹하기 시작한다. 흡사 아담을 꾀어 선악과를 먹게 해 인류에게 원죄의식을 짊어지게 했던 치명적인 이브를 형상화하고 있다. 욕망으로 가득 찬 자신의 신체를 원망하며 고뇌하던 사제를 불쌍한 노총각으로 만들어버린 건 다름 아닌 태주다. 태주는 존경받는 신부를 파멸시킬 만큼 경계 안의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녀는 결혼한 유부녀임에도 불구하고 상현과의 첫 섹스에서 처녀임이 밝혀진다. 강우가 죽고 흡혈귀가 된 태주는 전보다 한층 욕망에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 상현이 끊임없이 죄의식에 시달리는 것에 반해, 태주의 죄의식이 유동적이고 모호한 이유가 성차에 의한 여체(女體)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선악과를 먹기 전 태고의 처녀 이브에게 부끄러움과 죄의식은 규정할 수 없는 질서이기 때문이다. 이는 상현과 달리 태주가 죄의식에서 보다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이다.

    인간의 원죄에 대한 회개와 구원의 서사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즉 상징계의 질서에 의해 규정된 아담과 이브만이 가능한 일이다. 강우의 죽음으로 경계 밖에 위치한 태주를 향한 상현의 구원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상현은 폭주하는 태주를 구원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를 한다. 라여사는 아들이 죽자 그 충격으로 뇌졸중으로 쓰러지게 되어, 사지가 마비되고 눈만 깜빡일 수 있게 된다. 상현과 태주는 그런 라여사를 죽이지 않고 먹을 것을 주며 돌본다. 마치 그들의 죄를 지켜 볼 목격자가 필요한 것처럼 그들은 라여사 앞에서 태연히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매주 수요일 열리던 마작 클럽 ‘오아시스’에서 라여사는 혼신을 다해 태주와 상현이 강우를 죽인 범인임을 알린다. 자신들의 죄가 발각되자 태주는 마작 멤버들을 모두 죽인다. 그리고 그들은 도피를 위한 여행을 떠난다. 여행 도중 해가 떠오르자 태주는 햇빛을 피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써보지만 상현의 방해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태주를 구원하기 위한 상현의 마지막 시도인 도피 여행에서 그들은 강렬한 햇빛 아래에서 한 줌의 재로 산화한다.

    영화는 줄곧 태주를 구원하기 위한 상현의 시도만이 보인다. 그녀를 구원하기 위한 상현의 끊임없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구원받지 못한다. 오히려 인류 최초의 어머니 이브의 치명적 매력을 지닌 태주를 대면함으로써 상현은 자신 안에 잠재되어있던 욕망을 깨닫게 되고,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탐욕스럽고 절망스러운 것인지 경험하게 된다. 욕망에 충실한 태주의 순수는 가부장 사회의 질서를 저해하는 악이 될 수밖에 없다. 가부장 사회에서 신부를 유혹하고, 남편을 죽인 여자는 지탄의 대상이지 순수의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상현의 마지막 선택은 태주를 향한 그의 구원이 실패했음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상현을 향한 태주의 호명 의식은 또 다른 차원의 구원이 가능함을 암시한다. 태주는 죽기 전 상현이 처음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 신겨주었던 낡고 큰 신발을 다시 꺼내 신으며, “신부님 그 동안 즐거웠어요.”라는 마지막 인사를 한다. 상현은 태주로 인해 욕망으로 인해 파멸한 불쌍한 노총각이 되었지만 결국 그녀를 통해 다시 신부님으로 거듭난다. 태주의 호명의식을 통한 구원 가능성은 그녀가 인류 최초의 어머니인 죄 많은 이브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도, 그를 구원할 수 있는 것도 결국은 모성적 신체를 지닌 여성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18)서인숙(2004), 앞의 글, 78쪽 참조.  19)오현화·정재림, 「종교영화에 나타난 인간 존재론과 구원」, 『서강인문논총』 30,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2011, 210~211쪽.

    4. 분리와 봉합 - <마더>의 마더

    치밀한 서사 주조로 정평이 난 봉준호 감독의 <마더>는 살인 누명을 쓴 아들 도준을 구하기 위한 마더의 고군분투기이다. 영화 속 마더의 사랑은 절대적이다. 마더는 일일이 닭고기를 발라주고, 쫓아다니면서 약을 먹이고, 아들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어떤 위험도 무릅쓴다. 영화 속 마더는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그녀는 그녀의 이름도 포기한 채 보통명사 마더로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 심지어 도준의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도, 돈을 받고 마더를 도와주는 진태도 그녀를 ‘마더(어머니, 엄마)’라 부른다.

    도준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마더의 사랑은 어찌된 연유인지 그녀의 의도와 달리 시종일관 불안해 보인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해줄 것만 같은 영화 속 마더의 사랑이 불안한 이유는 그녀와 도준의 지나친 밀착 관계로 인한 것이다. 오이디푸스적 금기로 인해 어린 아이는 어머니의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어야만 어른이 될 수 있으며, 아버지의 질서가 요구하는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 여전히 마더의 가슴을 만지며 자는 도준이나, 소변을 누는 아들의 성기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마더의 과도한 애정은 그들이 서로 완전한 독립된 개체로 분리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여자랑 자봤냐며 비아냥대는 동네 총각에게 도준은 자신도 여자랑 자봤다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해댄다. 도준에게 있어 여자랑 잔다는 의미는 마더와 잔다는 뜻이다. 이는 마더가 도준을 여전히 자신의 자궁에서 분리해내지 못했고, 도준 또한 마더의 자궁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 자란 도준이 여전히 사회가 요구하는 성인으로서 함량 미달인 이유도 그와 마더의 불완전한 분리에서 기인한 것이다. 물론 크리스테바의 논의처럼 인간은 모두 마더의 자궁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완전한 분리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도준과 마더의 분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태생적 한계를 넘어선다. 과거 마더와 도준은 박카스 병에 든 농약으로 동반 자살을 시도했으며, 그 이후 도준의 뇌는 치명적 결함으로 인해 보통의 아이들보다 지능지수나 행동발달이 더디게 되었다. 도준에 대한 마더의 채무의식은 자살 사건 이후 그들을 쭉 분리가 불가능한 상태를 지속케 한다. 동반 자살의 외상이 마더와 아들의 분리 불안을 가중시켰다.

    발달이론에 따르면 분리 정도에 따라 자식에게 미치는 모성의 위력은 점차 강도가 약해지면서 우리는 아버지의 질서로 구축된 사회에 편입하게 된다. 그러나 마더와의 분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 도준에게 있어 마더의 위력은 그 또래의 남성과 동일할 수 없다. 분리 불안 장애를 겪고 있는 그들 모자에게 있어 처음부터 도준의 유죄 여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도준의 살인을 목격한 노인을 살해하는 마더도, 노인의 살해 현장에 남겨진 마더의 침술통을 몰래 가져다준 도준도 아버지의 질서가 요구하는 규칙이나 법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존 영화 속 모성이 거세당하는 피해자로서의 모습을 형상화 한 반면, 이 영화는 가학적이고 남근적이며 공포스런 원초적 여성성을 드러낸다. 원초적 어머니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된 고대 신화의 처녀생식 모티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원초적 어머니는 가부장적 가족 구조의 바깥에 위치하는 홀로된 부모이다.20) 크리드는 가부장제의 체제 내에서 원초적 어머니는 부정적으로 묘사된다고 보았다. 영화 속 마더의 모습이 자식을 사랑하는 숭고한 어머니라기보다 뒤틀려 보이는 이유는 감독의 의도적인 가부장적 시선 연출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속 마더처럼 자식을 위해 가부장제의 공적 질서를 위협하는 어머니에 대해 우리 사회가 혐오의 시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성괴물=희생자가 중첩되는 한국 괴물 서사의 맥락은 이러한 가부장적 시선이 지닌 폭력성에 기인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살인의 추억>, <괴물> 등을 통해 공권력(가부장)에 대한 불신과 무능함을 드러냈던 감독의 시각은 마더를 통해 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박선아는 영화 속 마더가 아들을 돌보고 희생, 헌신하는 지배담론이 규정한 규범적 이상으로서의 모성을 수행하다, 아들이 살인범으로 몰리자 그 역할에 균열을 가한다고 보았다. 즉 폭력, 살인, 방화, 진실 은폐 등 자신에게 불리했던 사회적, 법적 제도의 경계를 뛰어 넘는 초법적 주체로서 전복된 모성을 수행한다고 하였다.21)마더는 경찰이 진범으로 지목한 아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공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그녀는 물증 확보를 위해 진태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피 묻은 골프채를 획득하고, 증거 훼손을 우려해 비닐장갑을 손에 낀 채 골프채를 경찰서에 가지고 가는 철두철미함까지 보인다. 죽은 아정의 장례식장에 가서도 하찮은 계집애 하나 때문에 귀한 자신의 아들이 죽게 생겼다며 한바탕 소동을 치르고 나온 뒤, 아들을 변호해 줄 변호사를 만나기 위해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뻔뻔함을 보여준다. 드디어 마더는 진태의 도움을 받아 문아정이 살해 되던 날 밤 유일한 목격자가 고철을 수집하던 노인임을 알고 그를 찾아 간다. 도준이 무죄임을 증언해 줄 증인이라 확신했던 노인에게서 들은 진범은 다름 아닌 그녀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속에서 항상 무능했던 경찰이 처음으로 진범을 잡아넣은 순간이다. 그러나 이번 역시 아버지의 법(공권력)은 마더에 의해 그의 무능을 해소할 기회를 잃고 만다. 마더는 매번 진범을 놓치더니 이번 에야 말로 경찰이 진범을 잡았다며 도준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노인을 죽이고 만다. 마더는 도준을 위해 노인을 죽이고 난 뒤, “엄마 나 어떡해.”라며 소리를 지른다. 마더는 아들을 위해 살해 현장을 목격한 노인을 살해하고 완전범죄를 위해 노인의 거주지까지도 불태운다. 그녀에게 있어 더 이상 누가 문아정을 죽였는지는 중요치 않다. 마더에게 진실은 도준이 문아정을 죽인 진범이 아니라는 사실 내에서만 진실로서의 가치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브젝시옹은 “주체를 위협하는 것으로부터의 분리와 반대로 주체에게 끊임없는 위험을 고백”하는 행위와 관련이 있다. 목격자 노인을 제거하여 아들을 위협하는 것으로부터의 분리를 시도한 마더는 자신의 죄를 엄마를 부르는 호명의식을 통해 고백함으로써 아브젝시옹을 시행한다. 도준은 마더의 고군 분투로 무죄 석방되고, 그의 무죄를 입증해 줄 마더가 없는 종팔은 도준 대신 범인으로 지목된다. 문아정을 죽인 범인이 도준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더는 경찰에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다만 무죄를 입증해 줄 마더가 없는 종팔을 위해 오열할 뿐이었다. 마더의 오열 장면을 통해 영화는 문아정을 죽인 진범이 밝혀질 가능성이 제로임을 암시한다. 여기에서 아정이 살해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이유도 드러난다. 아정에게는 그녀를 가난으로부터 보호해줄 마더도, 그녀를 죽인 진범을 밝혀줄 마더가 없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마더가 있는 도준만이 무죄석방 되고 그의 죄에 대한 면죄부를 받고 석방될 수 있었다. 처음으로 진범을 잡았던 경찰도 공권력에 정면 도전했던 마더의 위력에 다시 또 진범을 놓아주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영화는 마더의 춤사위로 시작과 끝을 맺는다. 영화는 첫 시퀀스와 마지막 시퀀스가 오버랩 되는 장치를 통해 영화 속의 사건이 영화 속의 영화 라 할 수 있는 마더의 의식 속에서 재현되며 반추되는 것이 라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22) 자기희생적 모성 신화는 마더로 하여금 주체를 위협하는 것들로부터의 분리와 동시에 끊임없이 위험을 고백하는 비극적 자기모순을 양산했다 할 수 있다. 갈대밭과 관광버스 안에서 무표정하고 넋이 나간 그녀의 괴상망측한 춤은 자신과 자식의 죄를 매장하기 위한 마더의 비천한 몸짓에 다름 아니다. 마더는 영화 내내 “잊고 싶고 안 좋은 기억을 다 없애주는 침자리가 있어. 나만 아는 침자리야.”라며 여러 번 강조한다. 실제 마지막 관광버스 안에서 마더는 그녀의 기억을 없애기 위해 침을 직접 놓는다. 안 좋은 기억들을 다 없애주는 자리에 침을 놓는 마더의 행위는 허벅지 내밀한 곳에 위치한 원죄가 매장 된 자궁의 봉합을 의미한다. 자궁을 지닌 모성적 신체는 죄 지은 자들의 근원이자 도피처이며, 죄 지은 자들의 고해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자식을 위해 그녀가 저지른 살인과 도준의 살인을 봉합하기 위한 그녀의 침술 행위와 춤사위는 그들을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서로를 분리시키고, 반대로 상징계의 질서에 끊임없이 위험을 고백하는 불온한 주체로서의 여체의 괴물성을 드러낸다 할 수 있다.

    20)서인숙, 앞의 글, 79~80쪽 참조.  21)박선아, 「영화 <마더>에 나타난 수행적 모성 정체성에 관한 연구」, 『영화연구』 55, 한국영화학회, 2013, 190~191쪽 참조.  22)전문희는 모성을 주제로 한 대부분의 영화들은 헌신적이고 신성한 모성의 희생이나, 자기희생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성의 두렵고 괴기한 모습만을 강조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모성에 대한 가부장적인 해석만을 답습하는 한계를 드러낼 뿐이다. 그러나 <마더>에서는 마더가 지닌 내면의 고통과 이를 통한 자기 성찰의 가능성을 진솔하고 고통스러운 그녀의 춤사위를 통해 열어두고 있다고 보았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관광버스에 타고 있는 아줌마들의 ‘관광버스 아줌마 춤’이 첫 시퀀스인 마더의 춤과 오버랩 되면서 마더의 춤은 그 의미가 사회적으로 확산된다. 영화는 모성을 향한 과장된 신화와 그 환상이 빚어내는 사회적인 비극에 대해, 그리고 비극의 주인공인 마더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과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희, 「<마더> : 모성의 괴기함 또는 신성함」, 『한중인문학연구』 31, 한중인문학회, 2010, 267~268쪽 참조.

    5. 균열과 교란 -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의 복남

    장철수 감독의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은 ‘살인 사건의 전말’이라는 제목을 통해, 영화가 살인자 김복남이 아니라, 김복남이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영화의 서사가 무도의 질서를 교란시킨 복남에 대한 처벌이 아닌 살인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는 데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감독은 영화 초반부 해원이 폭력 사건의 목격자로 경찰서에 출두하게 되면서 폭력배들의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장면을 통해 가부장적 폭력성이 여성을 가해하는 전형적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제목과 가해자로부터 오히려 위협당하는 무도 밖 해원의 상황을 통해 처음부터 감독은 이 영화의 지향점이 살인 사건의 이면에 깔린 폭력성을 규명하는 데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만종과 철종은 사방이 고립된 외딴 섬 무도에서 유일한 남성이다. 만종과 철종 외에 치매 할배가 등장하기는 하나 거세된 남성으로서 여성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섬의 할머니들이 치매 할배를 통해 성적 욕망을 해소하는 것은 그가 성적 대상인 여성의 위치에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무도는 만종과 철종에 의해 완벽하게 제어되고 통제된다. 섬에서 가장 건실한 노동력을 자랑하는 만종은 ‘만종이 없음 다 죽는다’는 할매들에 의해 가부장으로서의 완고한 지위를 보장받는다. 무도에서는 “모름지기 여잔 남자 좆을 물고 살아야 편하다.”는 동호 할매의 대사처럼 그들에게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주체로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동호 할매가 서울 이야기를 극도로 싫어하고, 서울 이야기가 실린 사회교과서를 절벽 아래로 슬쩍 밀어버리는 것 역시 무도의 질서를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함이다.

    남편의 학대와 시동생에게 매번 윤간을 당하는데도 무도 주민 누구하나 복남을 동정하지 않는다. 복남을 향한 이러한 차별적 시선은 그녀가 끊임없이 무도의 질서를 거부하고 섬을 탈출하려 하기 때문이다. <박쥐>의 태주와 <마더>의 마더가 바이러스에 감염되거나, 아들의 무죄방면을 위해 상징계의 질서를 위반하고 전복시키는 경계 내외부를 횡단하는 여체였던 반면, 복남은 처음부터 상징계의 질서를 거부하는 경계 밖 인물로 설정된다. 섬 주민들에게 복남은 만종과 철종에게 순종하지 않는 감시와 처벌의 대상인 경계 밖 타자였던 것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질서를 위반하는 여성에 대한 가부장의 처벌을 형상화함으로써 상징계 질서가 은폐하고 있는 야만적 폭력을 재현하고 있다. 만종이 복남을 무시하거나 때리는 일은 무도에선 다반사로 자행되는 일이다. 동생 철종이 복남을 종종 겁탈해 왔다는 것을 알기에 복남을 향한 그의 학대는 더욱 가혹해진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만종이 복남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방식의 특이성이다. 만종이 복남에게 직접적으로 성적 접촉을 시도하는 장면은 묘사되지 않는다. 티켓다방여성인 미란을 불러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결하거나, 자신의 딸과 단둘이 낚시를 가거나 매니큐어를 사줌으로써 매춘여성과의 외도나 연희가 만종에게 성적 학대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복남에게 심어줌으로써 간접적으로 학대한다.23)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만종으로 인해 복남은 누군지의 씨도 모르는 딸 연희를 낳는다. 생식능력이 없는 무능한 가부장으로서의 만종의 위기의식이 복남에 대한 학대와 가학행위로 이어졌던 것이다. 무도의 주민들은 복남이 철종에게 성폭행을 당하거나 만종에게 물리적 폭력을 당할 때에도, 연희가 만종에게 성적 학대를 받을 때에도 철저하게 그들을 외면한다. 무도의 질서와 규범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기반에는 복남을 향한 냉대와 학대를 통해 철저한 타자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견고하게 유지되던 무도의 질서는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해원으로 인해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다. 해원의 방문으로 복남이 다시금 무도를 벗어나려는 시도를 계획하기 때문이다. 해원은 어린 시절 복남에게 유일하게 친절했던 인물이며, 얼굴이 희고 예쁜 원피스를 입은 ‘서울’에서 온 아이였다. 복남이 해원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쓰고 전화를 거는 것은 해원이야말로 이 감옥 같은 섬에서 자신을 구출해줄 수 있는 인물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부모 없이 고아로 자란 복남에게 처음으로 인간적인 정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이 무도의 주민이 아닌 뭍에서 온 해원이었음은 그녀가 끊임없이 섬을 탈출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복남에게 무도는 냉대와 멸시의 공간이었던데 반해, 해원이 사는 서울은 그런 그녀를 포용해줄 수 있는 공간이다. 희고 깨끗한 해원에 비해, 복남은 햇볕에 그을린 까만 피부에 억척스럽게 섬의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 하고, 게걸스럽게 밥을 먹는다. 해원과 달리 여성성이 배제된 복남의 외모와 행동은 무도에서 딸 연희와 살아가기 위한 자신만의 순응 방식이었다. 그녀는 섬의 유일한 가임기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만종과 철종 형제에게 폭력의 대상이었다. 그들 형제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복남은 스스로 자신의 여성성을 은폐했다. 복남이 마을 주민들을 살해하고 무도를 탈출하면서, 진한 화장과 여성스런 옷차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야만적인 폭력으로부터 그녀의 여성성을 감출 필요가 없어졌음을 의미한다.

    해원의 방문을 기점으로 시도된 복남과 연희의 무도 탈출은 주민들의 발고와 배신으로 실패하게 되고, 도망치던 복남과 연희를 쫓던 철종이 실수로 연희를 죽이고 만다. 무도 주민들은 “여긴 알아도 모르는 거여.”라며 그들만의 질서를 위해 연희의 죽음을 철저하게 은폐한다. 이제껏 딸 연희를 위해 무도의 질서에 순응했던 복남은 한 낮의 눈부신 태양을 바라보며 “너무 참으면 병이 된다”며 희생자에서 가해자로 변해 광기어린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이제껏 복남은 가부장제의 전형적인 여성희생자였다. <사진4>의 장면처럼 영화에서 낫과 칼은 만종이나 철종 혹은 그들의 폭력을 용인하고 은폐하는 주민들만의 것이었다. 그러나 연희의 죽음 이후 <사진5>처럼 그들이 사용했던 낫을 이제는 복남이 치켜든다. <박쥐>가 오염으로 인해 희생자와 괴물이 중첩되는 태주를 통해 인간의 근원적 욕망과 죄의식의 문제를 표출했다면, 영화 속 복남은 희생자가 가해자(괴물)가 되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그리고 있다. 이는 희생자=괴물이 중첩되는 한국 괴물 서사의 구조적 특징이 가부장적 폭력에 기인하고 있음을 밝혀주는 부분이다. 해원의 무도 방문으로 인해 균열을 보이던 무도의 질서는 복남의 폭주로 인해 한 순간에 와해된다. 딸의 죽음 이후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모성의 상실은 복남을 희생자에서 가해자로 돌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영화는 복남이 야기한 무도의 균열과 붕괴 양상을 통해 상징계의 질서를 교란시키고 전복시키는 아브젝트한 여체의 위력을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무도를 탈출한 복남이 그녀가 유일하게 의지했던 해원에 의해 다시 제거됨으로써, 희생자-가해자-희생자의 반복을 통해 가부장적 사회 구조가 지닌 폭력의 순환을 재현하고 있다.

    23)김아름, 「아버지의 세계에 소환된 환상성의 원리」, 『대중서사연구』 27, 대중서사학회, 2012, 119쪽 참조.

    6. 나오며

    앞서 살펴 본 영화 속 태주와 마더, 복남은 여성희생자보다는 가부장제의 상징계적 질서를 위협하는 여성괴물에 가까운 캐릭터로 형상화되고 있다. 영화는 태주를 경계를 위반한 오염된 신체로, 마더를 가부장적 질서를 위협하는 비천한 모성으로, 복남을 상징계의 질서를 교란시키고 와해시키는 위력적인 괴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이들 영화에서 그들이 단순히 질서를 위협하는 제거해야만 하는 타자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이 타자화 될 수밖에 없는 지점에 가부장제가 억압한 여성희생자의 위치가 중첩됨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서사 구조를 형성하는 데 있어 크리스테바의 ‘주체를 위협하는 동시에 주체에게 위험을 고백하는’, ‘아브젝트’와 ‘아브젝시옹’ 개념이 여체의 괴물성에 작동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여체가 지닌 모호함과 분리, 교란의 경향성은 괴물 서사에서 여성이 주체를 위협하고 교란시키는 공포의 대상이거나 남성 주체에게 희생당하는 괴물 혹은 희생자라는 이분법적 논리를 수정케 했다. 또한 이들 영화에 반영된 여체의 괴물성은 한국 영화의 괴물 서사가 여성이 유발하는 경계적 성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구축된 서사물임을 반증한다. 이 논문의 주된 목적이 한국 괴물 서사에 반영된 여체의 괴물성을 규명하는 데 있다 보니 각 영화의 서사 구조를 확장시키고 풍부하게 하는 영상 미학이나 영화적 장치에 대한 분석이 미비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차후 후속 연구를 통해 영상미학적 관점에서 여체가 지닌 괴물성이 변주하는 의미를 분석키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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