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is paper, I attempt to analyze Zhang Lu’s films from a perspective of diaspora. This discussion focuses on women characters in Mang-zhong, Desert Dream, Iri, Dooman River, written and directed by Zhang Lu, in order to investigate how those films describe diaspora. I try to discuss it in term of form as well substance in those films. Zhang Lu has dealt with the issues of diaspora constantly-and the women’s lives which can be said the lowest stratum of diaspora at that. Women in those films have lived floating lives with deep hurts. Their painful lives are filled with the limitations and contradictions of nation, class, or gender. He records through a camera watching their lives calmly without overstating them. Thus, we can find some rootless lives in his films: some beings who had left their homeland as a bad effects of imperialism, or their descendants who have not settled down in an unfamiliar foreign land, nor gotten back to their homeland. We will be aware that they also overlap our image in a overdeveloped capitalistic society.
1. 문제 제기-장률 영화는 디아스포라와 어떻게 만나는가?
장률은 1962년 길림에서 태어났고, 연변대 중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에서 중국문학 교수를 지냈다. 소설가로 활동했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이래 <당시>(2004), <망종>(2005), <경계>(2007), <중경>(2007), <이리>(2008), <두만강>(2011) 등을 연출했고, 이 가운데 <망종>으로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경계>로 베를린영화제 경쟁 부분, <두만강>으로 베를린영화제 제너레이션 부문에 진출했다. 이것은 장률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와 그의 영화세계에 대한 지극히 피상적인 설명에 불과하다. 그의 영화 내부로 들어가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장률은 길림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영화 작업은 중국과 남한을 오간다. 때문에 단순히 중국 출신의 조선족 감독이라고 하기에는 장률 영화의 특이함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그는 남한과 북한, 중국과 몽골을 아우르는 영화를 만들고 있다. <당시>, <망종>, <중경>, <두만강> 등은 중국에서 촬영했고, <이리>는 남한에서, <경계>는 몽골에서 촬영했다. 두번째 영화 <망종>부터 제작비는 주로 한국의 예술 영화나 독립영화지원기금을 통해 조달했다. 촬영 작업은 주로 중국의 시스템과 인력을 동원했지만, 편집과 녹음 등의 후반 작업은 한국의 시설과 인력을 이용했다. 출연 배우로는 엄태웅, 윤진서, 서정 등의 한국 배우, 왕동휘, 유연희 같은 중국 배우, 바트 을지 같은 몽골 배우까지 동북아의 여러 배우들을 망라했다.1) 이런 영화 제작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영화가 일찍이 세계영화제에서 소개되면서 명성을 쌓았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 내에서나 남한에서 그리 흥행력을 갖춘 감독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장률의 영화 작업은 철저하게 동북아시아라는 테두리안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이 있다. 장률의 영화는 디아스포라와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동북아의 많은 나라에서 여러 배우를 기용해 영화를 만들지만 그가 하는 이야기는 어쩌면 단순하다. 남한과 중국, 몽골을 배경으로 하고 새터민까지 등장하지만,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뿌리 뽑힌 삶을 살고 있다. 장률은 그것을 매우 냉철하게 바라본다. 때문에 그가 그리고 있는 영화라는 풍경은 우리가 익히 보아온 기존의 남한 영화나 중국 영화의 그것과는 다르고, 방식에서도 차이점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개인사와 만나야 한다. 할아버지가 경북 의성 출신이었던 중국 국적의 장률. 어린 시절부터 그는 자신이 중국인이 아니라 조선족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장률에 의하면, “그냥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과 달랐어요. 우리는 한족 마을에 살았는데 집에서는 어머니랑 누나들이 조선말을 했고. 누나들도 몇 년이 지나니 중국말과 조선말을 섞어서 하고요. 부모님도 그걸 꼭 강조했고, 부모님의 습관은 나도 모르게 닮아 갔습니다. 특히 음식! 음식이 제일 영향을 준 것 같아요.”2)라고 말했다. 이처럼 그에게 이산(離散)은 그가 처한,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프랑스 영화 감독 자크 리베트는 “촬영하고 있는 영화에 대해 감독이 취하는 태도는 세상과 사물에 대해 그가 갖고 있는 태도”3)라고 말 했다. 장률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때문에 그의 영화를, 그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의 변별점을 디아스포라라는, 그가 살아오면서 뼈저리게 느꼈던 고통과 상처로 해석하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해진다. 다시 말하지만, 특정 영화가 특정 감독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표출하는 도구라면, 장률은 철저하게 자신의 세계관과 예술관을 영화 속에 녹이는 감독이다. 소설을 썼던 문필가에서 영상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영화 감독이 되고나서 그는 더욱 강한 자의식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장률 영화에서 디아스포라라는 단어와 만나지 않을 수 없는 것 은 단지 그가 조선족이기 때문은 아니다. 본문에서 논의하겠지만 그는 디아스포라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많은 고민을 영화 속에 그려낸다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어원적으로 디아스포라는 그리스어 전치사 dia(영어로 ‘over,’ 우리말로 ‘∼를 넘어’)와 동사 spero(영어로 ‘to sow’, 우리 말로 ‘뿌리다’)에서 유래되었다.”4) 대문자의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말은 원래 ‘이산’(離散)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이자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것은 사전상의 의미일 뿐이다. 오늘날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인, 팔레스타인인 등 다양한 이산의 백성을 좀더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소문자 보통명사diaspora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즉 디아스포라‘들’을 지칭하는 것이다.5)
굳이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을 풀어서 살펴보는 것은 용어의 적용 범주와 성격이 한국인의 역사ㆍ문화적 상황과 너무도 많이 닮아있는 까닭에서다. “조선 사람들 역시 과거 한 세기 동안 식민지배,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군사정권에 의한 정치적 억압 등을 경험해, 상당수에 달하는 사람들이 뿌리의 땅인 한반도로부터 세계 각지로 이산했다.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총수는 현재 대략 600만 명이라고 한다.”6) 대 이후 일제의 침탈과 강점기를 거치면서 발생한 중국 및 중앙아시아로의 집단 이주, 징용ㆍ징병과 관련된 일본으로의 이주, 궁핍한 생활 속에서 노동자 수출로 시작된 미주로의 이주 등이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와 유사한 모형을 이루고 있다. 동시에 각 지역에서 우리말을 사용하면서 확보한 민족 공동체의 형성이나, 그로 인한 지역 내 이민족의 배타적 혐오감 또한 유사하다.7)
본고에서는 디아스포라의 정의를 명확히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않는다. 디아스포라라는 역사의 아픔이 개인이 만든 영화에 어떻게 내용과 형식으로 드러나는지를 조명하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고에서 주목하는 디아스포라에 대한 정의는, 본인이 디아스포라의 고통과 상처를 누구보다 심하게 겪었던 서경식의 정의이다. 다음을 보자.
크게 보면 서경식은 디아스포라를 제국주의의 침략과 전쟁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들의 디아스포라와, 전(全)지구화된 시장 경제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기원지를 떠난 이들의 디아스포라로 구분한다. 이들의 공통점으로는 폭력적으로 공동체를 떠난 이후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정착지의 공동체에는 소속되지 못해 소외감과 고립감을 느끼고, 기원지로 도 돌아가지 못한다. 서경식은 자신의 처지를 두고 이렇게 탄식하듯 고찰했다. 흥미로운 것은 장률 역시 그런 존재라는 점이다. 그는 조선어를 구사할 수 있지만 아직 읽지는 못하는 이산 3세이다. 그는 조선인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지만 남한에서나 북한에서 살고 싶지는 않고 그렇다고 중국에서 사는 것이 편한 존재도 아니다.
본고에서는 영화감독 장률의 영화세계를 디아스포라의 시각에서 분석할 것이다. 장률에 대한 기존의 연구에서도 이미 “장률의 영화는 고통, 사회적 억압, 특권을 누리지 못한 이들의 희생과 침묵을 강조함으로써, 오늘날 문화비평 분야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마이너리티 담론의 많은 쟁점에 동참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영화는 소수민족, 혹은 마이너리티의 기표가 되어 세계영화제를 통해 유통된다.”9)라고 분석한 바있다. 논의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 그의 최근작 <두만강>까지로 텍스트를 넓혀 마이너리티로서의 디아스포라가 장률 영화에 어떤 내용과 형식으로 그려지는지, 장률 영화 속 여성을 중심으로 분석할 것이다. 구체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올려놓은 것은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네 편의 영화 <망종>, <경계>, <이리>, <두만강> 등이다.
1)육상효, 「침묵과 부재 : 장률 영화 속의 디아스포라」,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09 Vol. 9 No. 11, 2009, 164쪽. 2)정성일,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바다출판사, 2010, 316쪽. 3)엠마누엘 시에티(심은진 역), 『쇼트-영화의 시작』,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6, 127쪽. 4)윤인진, 『코리안 디아스포라-재외한인의 이주, 적응, 정체성』,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4, 5쪽. 5)서경식, 김혜신 역, 『디아스포라 기행-추방 당한 자의 시선』, 돌베개, 2006, 13쪽. 6)같은 책, 14쪽. 7)김종회, 『디아스포라를 넘어서: 경계에 선 문학의 운명』, 민음사, 2007, 176쪽. 8)서경식, 김혜신 역, 앞의 책, 14쪽. 9)주진숙, 홍소인, 「장률 감독의 영화에서의 경계, 마이너리티, 그리고 여성」, ≪영화연구≫ 42호, 2009, 608쪽.
2. 장률 영화의 디아스포라와 여성-중첩된 민족적, 계급적, 성적 모순
장률의 영화 속 인물들은 떠돈다. 그들에게는 정주할 곳이 없다. 정주할 곳이 있다면 그들의 삶은 디아스포라와 긴밀한 연관을 지니지 않을지도 모른다.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지만 정착한 곳에서도 거주하지 못하는 삶, 그런 삶이 장률의 영화 속에 내내 등장한다. <망종>에서 최순희는 아들과 함께 북경 근처의 작은 소도시에 살면서 노점으로 김치를 팔아 연명한다. 그러나 그녀의 상업 행위는 불법이기때문에 언제나 불안에 떨어야 한다. <경계>에서 최순희는 아들 창호와 함께 탈북해서 몽골의 초원으로 온다. 그곳에서 게르의 주인 항가이와 함께 어색한 동거를 하지만 그들에게 그곳은 정주지가 아니라 다시 떠나야 할 임시 거주지에 불과하다. 게다가 새터민을 잡아 당국에 넘겨서 돈을 챙기려는 사냥꾼들이 있어 불안에 떨어야 한다. <이리>에서 진서는 경로당이라는 임시 거처에서 오빠와 함께 살아간다. 이리 열차 사고 당시 어머니의 태 중에서 상처를 받은 그녀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한다. 너무도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고 있지만 사회는 그녀를 이용하기만 한다. <두만강>에서 벙어리 누나 순희와 동생 창호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간다. 아버지는 어릴 적 죽었고 어머니는 남한에서 돈을 벌고 있다. 젊은 사람은 돈 벌러 남한이나 도시로 떠났기 때문에 남아있는 이들은 무기력한 노인들이나 아이들이다. 북한에서 건너오는 이들도 잠시 이곳에 들렀다가 중국으로 들어가거나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장률의 영화 속 인물들은 정주하지 못하고 떠돌며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영화가 끝이 날 때는 그곳을 떠나간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장률이 다루는 영화 속의 주요 인물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이다. <망종>의 조선족 최순희, <경계>의 새터민 최순희, <이리>의 열차 폭발 사고로 정신지체아가 된 진서, <두만강>의 말을 하지 못하는, 할아버지와 동생을 데리고 살아가는 순희 등 주요 인물은 대부분 여성이다. <이리>의 앞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중경>의 쑤이 역시 여성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고통 받는 삶을 살고 있는 여성이다. 연변에서 북경 근처의 소도시로 나와 아들과 함께 힘겹게 살고 있는, 남편은 사람을 죽여 감옥에 있는 여성, 두만강을 건너 멀고 먼 길을 걸어 몽골로까지 온, 그 과정에서 남편이 북한군의 총에 맞아 죽은, 홀로된 여성, 열차 폭발 사고로 비정상적인 삶을 살게 된, 심성은 곱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이용하기만 하는 여성, 할아버지와 동생 밥을 해먹이고 살림을 하는, 어릴 적 사고를 겪어 말을 하지 못하는, 재워주고 먹여준 새터민에게 강간을 당해 낙태 수 술을 해야 하는 여성 등이 주인공이다. 결국 장률은 “세상의 모든 긴장과 갈등이 섞여 있는 것을 여성의 몸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10)이다. 그렇다면 물어야 한다. 왜 장률은 고통스런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일까? 이유는 간단해 보인다. 장률이 그의 영화에서 주로 다루는 디아스포라는 디아스포라의 모순을 최하위에서 받고 있는 여성의 삶을 통해 고찰하는 디아스포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장률은 “제국주의 식민 지배 시대와 전지구화 자본주의 시대에 이루어지는 민족사의 순환 고리적 ‘이산’과 민족과 젠더의 경계에 선 여성의 삶과 몸의 체험 속에 중첩된 민족적, 계급적, 성적 모순의 양상”11)을 탐구하는 것이다.12)
이렇게 보면, 장률이 그리는 디아스포라의 모순은 삼중의 모순을 지니고 있다. 디아스포라가 발생한 근원적인 이유인 민족적 모순의 문제, 즉 기원지에 살지 못하고 제국주의의 양육강식과 전쟁 때문에 떠나와야 했던 모순, 그리고 전(全)지구화된 자본주의 앞에서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는 하층민의 모순, 마지막으로 남성보다 더 심한 차별과 고통을 당하는 여성의 문제라는 성적 모순이 세 겹으로 집약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장률 자신의 영화에서 ‘민족’의 문제 때문에 기원지를 떠나, 다시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도시로 나오거나 초원을 떠도는 ‘여성’의 문제를 냉철하게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문제와 자본주의의 문제가 중첩화되고 다시 그곳에 여성의 문제가 쌓인 곳, 장률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좀 더 구체적인 분석을 위해 텍스트로 삼은 영화들을 분석해 보자. 저 <망종>. 제목이 의미하는 ‘망종’은 절기상으로 가장 바쁜 때를 말한다. 보리를 벤 후 모내기를 해야 하는 절기로, 도시에 나와 있는 이들이 이 시기만큼은 고향으로 돌아가 일손을 거드는 시기이다. 이렇게 보면 망종이라는 단어 속에 이미 디아스포라가 녹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업화 이후 많은 이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나와 일을 하지만 마음에 그리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영화에는 순희의 옆방에 사는 거리의 여인들이 벽보에 적힌 글을 읽는 장면이 있다. “망종 때가 다가오니 동네방네 모든 이들이 곡식을 거둬들이는구나. 건강에 신경 쓰고 사전 예방에 힘써라. 망종, 망종 한 해 중 가장 바쁜 때이 거늘 올해도 찾아왔구나. 어서 고향에 가야지.” 그러나 그녀들은 결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아니 돌아갈 수가 없다.
그녀들과 함께 살아가는 조선족 최순희와 그녀의 아들 창호의 처지도 마찬가지다. 창호와 어머니는 짧은 대화를 나눈다. “엄마 우리 언제 돌아가?” “돌아가긴, 어디로?” “우리 옛날 집” 어머니는 대답이 없다. 그녀는 자신과 아들이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창호의 아버지는 사람을 죽여 감옥에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 사건 때문에 연고라는 없는 북경 근처 소도시에서 살고 있(는것 같)다. 그녀의 처지는 거리에서 몸을 팔고 있는 옆방의 여성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성을 매개하고 만다.
유심히 살펴볼 것은 <망종>에서 최순희가 아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녀는 조선 새끼라면 조선말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조선족의 아이덴티티를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중국의 소수 민족, 장률의 말을 빌리면 5천만 명 가운데 200백만 명은 숫자가 꽤 되지만, 14억 가운데 200백만 명은 지극히 적은 숫자에 불과할 만큼 조선족은 소수이다. 게다가 디아스포라를 통해 기원지를 떠나온 족속들이다. 그런데 그녀는 아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친다. 중국어에 익숙하고 현장에서 사용되지도 않는 조선어를 아들은 열심히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머니는 계속해서 가르친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 장면은 서경식의 경우, “아이덴티티란 ‘나는 누구인가’라는 끈질긴 물음일 것이다. 많은 다수자들은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경우가 거의 없고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재일조선인이 그렇듯 디아스포 라의 특징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13)과 같은 경우이다.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것은 최순희가 팔고 있는 노점의 음식이 김치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최순희가 김치를 팔고 있는 것을 본 조선인 김씨는 단번에 그녀가 조선족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장률 자신도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것을 인식한 것이 어릴 적부터였다고 한다. 특히 언어와 음식에서 많이 달랐다고 한다. 그런 경험이 영화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조선족이기 때문에 조선어를 사용하고 김치를 팔고 있는 최순희에게 시련이 다가온다. 그것은 남편이 부재한 가운데 어린 아이를 키우는, 그러나 얼굴이 반반한 여성에 대한 시선의 차이에서 온다. 세 명의 남자가 그녀에게 접근한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하다. 조선족이면서 가난한 여성인 그녀를 성적으로 착취하는 것이다. 자동차 운전학원의 식당 지배인은 순희에게 식당의 김치를 정기적으로 납품하라고 하면서 섹스를 강요하고, 조선족 김씨는 그녀와 연애를 하지만 섹스 현장에서 부인에게 발각되자 순희를 창녀라고 해 유치장 신세를 지게 만 들며, 노점상 허가증을 내주도록 도와준 파출소의 왕 경찰도 유치장에 있는 순희를 겁탈한다. 무엇보다 조선족이라서 마음을 준 김씨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를 배반한 것은 순희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이 사건 이후 순희는 창호에게 조선말을 더 이상 가르치지 않고 단어장을 버리라고 한다. 같은 조선족에게 배신당했을 때 그 상처는 더욱 큰 것이다. 결국 조선족의 아이덴티티를 더 이상 주장하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된다.
순희의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들 창호가 사고로 죽는다. 이제 그녀는 삶의 의지를 상실하기에 이른다. 왕 경찰의 결혼식에 쥐약을 탄 김치를 가져다 놓은 후 순희는 기차역을 지나 보리밭을 지나 암흑 속으로 사라진다. 이것이 영화의 엔딩이다. 그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자살하는 것일까? 감독은 관객들에게 해석을 맡긴 채 종영을 고한다.
<경계>는 <망종>의 다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 할 수있는 단적인 이유는 두 영화의 주인공, 즉 여자와 아이의 이름이 같다는 것이다. ‘애비 없는 자식’과 ‘서방 없는 에미’의 방랑, 아버지가 없으니 의지할 곳이 없어 방랑한다. 즉, 디아스포라인 것이다. <망종>에서 어머니와 연애하는 조선인 김씨에게 돌을 던지며 엄마를 지키려는 아들의 저항은 <경계>에서는 어머니와 연애 하는 몽골의 군인을 총으로 위협하는 것으로 바뀐다. 무엇보다 조선족과 새터민이라는, 같은 민족이 이민족의 생활 공간에서 겪는 고난을 다루고 있다. 지금 한민족의 디아스포라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새터민일 것이다. 탈북에 성공한다고 그들의 생이 행복과 직결되는 것도 아니다. 남한으로 갈 확률도 그리 높지 않고,14) 중국 공안에 잡혀 재입북 되면 생명을 잃을 가능성도 높다. 말 그대로 생사의 경계에 서 있는 것이다.
<경계>는 그런 인물을 그리고 있다. 두만강에서 남편은 죽고 수만리를 걸어 몽골로 온 모자(母子)의 이야기이다. 영화의 표면적 주인공은 항가이라는 몽골인이다. 다른 이들은 모두 떠나는 초원에서 그는 나무를 심으면서 유목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부인은 아이의 병을 핑계로 도시로 나가 버린다. 때문에 혼자 살고 있는 항가이의 삶 자체가 이미 뿌리 뽑힌 디아스포라를 상징한다. 언제든지 철수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하는 게르에 살고 있는 그의 모습도 그렇고, 사막을 초원으로 만들기 위해 나무를 심지만 바람이 불면 모두 뿌리 뽑혀 죽는 나무를 봐도 그의 정처 없는 삶을 감지할 수 있다. 나무를 심어 정착하고 싶지만 그것은 세찬 바람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절망해 나무를 뽑는 항가이에 비해 순희가 더욱 절실히 나무를 심는 것을 봐도 그렇다. 물론 순희가 나무를 심는 것은 “그녀가 남한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15) 믿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항가이는 점점 사라져가는 초원, 초원의 사막화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특이한 것은 이들이 어색하게 동거하는 형태이다. 먼저 이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몽골말을 사용하는 항가이와 조선말을 사용하는 순희 모자는 어떤 소통도 할 수 없다. 결국 순희 모자는 그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다시 떠돌아야 할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문화도 통하지 않는다. 창호가 게르 안에 걸어놓은 물통을 만지자 그것이 천막을 쓰러지지 않게 해 준다며 못 만지게 하지만 아이는 알아듣지 못한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얼핏 보면 이들의 삶은 ‘유사 가족’을 이루고있다. 특히 창호는 항가이에게 부정(父情)을 강하게 느낀다. 그러나 항가이와 순희는 섹스를 하지 않는다. 술에 취한 항가이가 순희를 안지만 그녀는 강하게 저항한다. 말이 통하지 않아 우리 속의 양을 죽여, 말 그대로 ‘희생양’을 만들어 자신의 순결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다. 결국 항가이는 여행하는 다른 몽골 여성과 섹스를 나누고, 순희는 젊은 군인과 섹스를 나눈다. 둘은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순희의 입장에서 보면 <경계> 역시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본 디아스포라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편 없이 아들과 함께 떠도는 것 자체가 생사를 건 싸움이고, 조선족을 잡혀 팔아먹으려는 사냥꾼들이 사방에 존재하는 위험한 상황이다. 특히 우연히 머물게 된 게르에서 주인 항가이의 요구를 거절해야 하고, 젊은 군인에게는 겁탈을 당해야 한다. 여성의 성을 도구화 하거나 팔아야 하는, 디아스포라라는 모순의 최하층을 보여주고 있다.
<이리>의 배경은,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전북 이리, 지금의 익산이다. 1977년에 발생한 이리 열차 폭파 사고 때 어머니의 태 중에서 큰 충격을 받아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진서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 영화는 <중경>과 연작이다. 중국의 중경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중국어를 가르치는 쑤이는 그곳에서 이리 사고 때 다리와 고환을 다친 김광철을 통해 이리에 대해 알게 된다. 점점 타락하는 물질 문명 속에서 자신도 점점 더러워져 결국 그녀는 이리로 오게 된다. <이리>의 마지막 장면이 익산으로 온 그녀에게 진서가 인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이리>에도 디아스포라의 삶이 잘 그려져 있다. 가난한 ‘아침의 나라’에서 세계 경제 10위권의 나라로 발전한 지금 남한에는 많은 이주노동자가 와 있다. 영화에는 그들의 삶이 세세히 그려져있다. 영화의 디아스포라는 중국 교사와 동남아 이주노동자를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그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진서의 모습을 통해 역사성 을 획득하게 된다. ‘우리 안의 파시즘’과 불관용의 문제를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목공소 직원은 진서와 가깝다. 진서는 그의 옷을 빨래해 준다. 그러나 경찰이라는 말에 도망가야 하는 불법체류자이다. <망종>에서 불법 노점 때문에 도망가야 했던 순희와, <경계>에서 사냥꾼과 군인을 피해야 했던 순희의 모습이 이곳에서 다시 재현되는 것이다. 아이와 부인과 노모가 고국에 있지만 언제나 불안한 상황의 그는 수시로 전화로 가족과 통화한다. 착하고 성실한 그는 그러나 윤서를 도와주려다가 태웅의 오해를 받아 경찰에 잡혀 자살을 기도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중국어 교사의 처지도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진서가 가장 좋아하는 이가 바로 중국어 선생인데, 누구보다 중국어에 애착을 느끼고 있는 진서는 중국어 선생과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다. 영화에서 가장 따뜻한 부분 가운데 하나인, 중국인 선생과 진서가 곱창집에서 이야기할 때 진서는 중국어로 언니와 동생을 물은 뒤 그런 사이로 지내자고 한다. 선생도 당연히 그렇게 하자고 한다. 진서는 자신이 열차사고 때 태 중에 있어서 비정상이 되었다고 솔직히 이야기한다. 그러나 둘의 우정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녀 역시 거의 매일을 중국에 두고 온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전화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으며 남한에서 살고 있는 이주노동자이다. 방글라데시의 불법 체류자에 비해 다소 안정적이지만 그녀 역시 일정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곳을 떠나고 만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중경>의 주인공이었던 쑤이가 새로운 중국어 선생으로 익산역에 도착한다. 그녀는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중경에서 그녀는 사투리를 사용하지 않는 중국어 선생이었다. 아버지의 춘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경찰서장과 불륜의 관계를 맺고 그 슬픔을 회복하지 못해 그녀는 방랑했다. 그녀의 익산에서의 삶은 중경에서의 삶보다 나을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리 폭발 사고로 성불구가 된 인물이 <중경>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고 난 그 지역에서 그녀는 진서의 삶을 반복할 것이다. 그녀의 미래를 이미 진서가 보여주었다. 그래서 극 중에서 이미 죽은 진서가 살아서, 영화의 마지막에 그녀에게 인사를 건널 때, 그 긴 육교의 황량함 만큼이나 슬픈 미래가 예정된다. 결국 “그녀들이 동일한 운명의 축에 꿰어진 존재들”16)이기 때문이다.
장률이 그리는 여성의 성적 모순 문제는 <이리>에서도 드러난다. 진서는 수시로 성 폭행을 당해 임신을 한다. 영화에서도 젊은 학원 남자, 노인정 노인, 동네 베트남 참전 용사들의 성 폭행의 대상이 된다. 진서와 친한 여자로 다방의 아가씨가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 폭력 앞에 진서는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 진서 남매는 동네 경로당에서 살고 있다. 그들의 삶은 정주된 삶이 아닌 것이다. 진서의 오빠 태웅의 직업이 택시 운전사인 것도 상징적이다. 저임금과 장시간의 노동, 병의 위험, 사회적 인식 등 떠돌아다니며 손님을 필요한 곳으로 데려다 주지만 인정은 받지 못한다.17) 그런 태웅에게 새로 온 중국어 선생이 노래방에서 오랄 섹스를 하는 것 역시 매우 상징적이다. 말 그대로 정처 없는 태웅보다 더 불안한 디아스포라 중국어 선생의 처지, 고독, 불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이리>는 정처 없는 진서 남매와 그들보다 더 불안한 이주노동자의 디아스포라를 담담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장률이 자신의 고향을 배경으로 만든 <두만강> 역시 디아스포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자신의 고향을 다루기 때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디아스포라의 문제를 그리고 있다. 지리적으로 두만강은 한 쪽은중국, 다른 한 쪽은 북한과 접해 있다. 양쪽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같은 뿌리를 가진 동족으로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단지 중국 쪽 사람들은 예전에 이주하여 건너갔기 때문에 국적이 다르고 삶의 형태 역시 다를 뿐이다. 영화의 주인공 중 창호는 중국 쪽에 살고 있고 정진은 북한 쪽에 살고 있다. 북한 난민들이 몰려들면서 두만강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라도 반드시 건너야 할 장벽이 돼 버렸다. 창호와 정진은 우연히 알게 되어 친구가 되지만, 서로 간에 오해와 질투, 심지어 증오를 경험하면서 마침내는 목숨으로써 우정과 충성, 존경의 귀중함을 깨닫는다.
이렇게 보면 영화는 “절대적 타자가 아닌 친밀한 타자, 동족이 새터민, 난민으로 국경을 넘을 때 그 동시적 친밀성과 타자성이 어떠한 기회, 재앙으로 이어지는가를 사유하고 있다.”18) 마치 남한 사람들이 조선족이나 새터민을 같은 민족이지만 다른 민족인 것처럼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연변에서도 조선족과 북한 난민의 차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조국을 떠나온 조선족이 조국에 살고있는 북한 난민보다 더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터민이 조국을 떠나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야 하는 역설이 영화 속에 그려진다.
이런 과정 속에서 역시 디아스포라의 고통을 당하는 것도 여성이다. 할아버지와 창호가 집을 비운 사이 말을 하지 못하는 누이는 북한 난민에게 밥을 주고 술을 주는데, TV에서 김정일에 열광하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을 본 그는 술에 취해 순희를 겁탈한다. 그리고 순희는 임신을 한다. 북한 난민은 도망을 갔지만 그녀는 그런 슬픔을 말도 하지 못한 채 묵묵히 견뎌야 한다. 여기서 비교할 것은 <두만강>의 순희의 대처 방식이 <망종>의 순희나 <경계>의 순희와는 다른 방식이라는 점이다. <망종>의 순희는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되는 남자의 결혼식에 쥐약을 썩은 김치를 배달해 복수를 하고, <경계>의 순희는 항가이의 요구를 명확히 거부한다. 그러나 <두만강>의 순희는 말도 하지 못하는 벙어리인 데다가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약한 북한 난민의 성적 폭행을 고스란히 겪어야 했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다.심지어 낙태 수술을 쉽게 결정하지도 못한다. 장률의 영화에 그려진 여성 가운데 <두만강>의 순희가 가장 소극적이고 나약하다.
장률의 네 편 <망종>, <경계>, <이리>, <두만강>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이다. 민족적 모순, 계급적 모순, 성적 모순의 교집합 안에 디아스포라의 여성이 존재한다. 장률은 그것을 그만의 독특한 형식으로 그린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논해야할 것은 남성과 여성의 몸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특이하게도 장률은 여성의 벗은 몸은 보여주지 않고 여성에 의해 벗겨진 남성의 몸을 집중적으로, 그것도 성기까지 보여준다. 장률의 의도는 명확해 보인다. 삼중 모순의, 디아스포라 속에 있는 여성의 성을 그의 영화에 주로 그렸지만, 그녀들의 성이 관음증의 도구가 아니라 그들을 폭행하고 성적으로 이용하려는 남성들의 벗은, 그 누추한 몸을 통해 반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성을 강제로 겁탈하는 남성의 욕망이 솔직하게 드러나면서 영화를 보는 남성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옷을 벗으면 아름다운 육신이 드러나는 여성과 달리 남자들은 “옷을 벗겨놓으면 다들 멍청하고 바보 같”19)기 때문이다. 장률이 여성의 고난을 그린다고 해서 남성을 우월한 존재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10)트랜스 편, 「장률 감독과의 대담 : <중국과 한국의 경계」, ≪트랜스 : 아시아 영상문화 연구≫ 제4권, 2010, 215쪽. 11)오경희, 「민족과 젠더의 경계에 선 여성의 이산-강경애의 『소금』과 허련순의 『바람꽃』비교」, ≪아시아여성연구≫ 제46권 1호, 2007, 185쪽. 12)이런 시각에서 보면, 장률 영화에서 어린이 역시 같은 모순의 재현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망종>의 창호나 <경계>의 창호, <두만강>의 창호는 모두 약한 어머니나 누이,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간다. 아이의 천진난만한 귀여움은 장률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무거운 고통이 그들의 어깨를 짓누른다. 결국 <망종>과 <두만강>의 창호는 죽고 만다. 이들의 이름이 모두 같은 창호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다른 개인들이지만 결국 같은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13)13) 서경식, 김혜신 역, 앞의 책, 103쪽. 14)박정범 감독의 <무산일기>(2011)은 새터민의 남한 삶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그린다. 영화는 새터민의 남한에서의 삶을 핸드 헬드 카메라로 담담하게 따라가면서 조망하듯이 스크린 속에 담고 있다. 주연을 겸한 감독의 표정 없는 연기 속에, 신자유 주의 시대 남한의 생존 경쟁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어디에도 희망이 없는 삶. 목숨을 걸고 넘어온 남한에서의 삶이 과연 이것이었던가, 그들은 진지하게 묻는다. 15)김영진, 「변방의 중심 의식, <경계>」, 『2008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작가, 2008, 12쪽. 16)맹수진, 「광폭한 탐욕이 휩쓸고 간 자리, 중경에서 이리까지」, 『200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작가, 2009, 115쪽. 17)정은경은 “거리에서 떠돌며 사회 현실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마이너리티로서의 자의식을 지닌다는 점에서 택시 기사들의 삶은 디아스포라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라고 지적했다. 정은경, 『디아스포라 문학』, 이룸, 2007, 230쪽. 18)김소영, 「한국영화의 국경의 문제, 경계의 기억-장률의 <두만강>을 중심으로」, ≪오늘 의문예비평≫ 80호, 2011년 봄, 2011, 149쪽. 19)정성일, 앞의 책, 336쪽.
민족적 모순, 계급적 모순, 성적 모순의 교집합을 이루는 이들의 처절한 디아스포라를 그리는 장률의 영화는 지극히 단순한 영화적 테크닉을 구사한다. 미리 요약하면, 카메라는 거의 이동하지 않고 인물이 등장해서 지나갈 때까지 지켜보기만 한다. 심지어 인물이 지나가고 나서도 텅 빈 공간을 잠시 비춰준다. 인물은 카메라의 전경에 등장하지않고 중경이나 후경에 있으며 위치도 가운데에 있지 않고 구석에 있는 경우가 많다. 편집은 신이 끝나면 다른 시퀀스가 이어지는 정도로 극소화되어 있고 미장센도 지극히 미니멀하다. 세트라는 것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이거나 지독히도 단순한 가구만 배치한 세트 같다는 느낌을 준다. 외재적 영화음악은 거의 사용되지않고 인물의 대사도 별로 없다. 심지어 <망종>의 첫 대사는 영화가 시작되고 6분이 지나서야 등장한다. 이런 것을 통해 장률은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언어로 서사를 만드는 소설가에서 영상으로 서사를 만드는 이가 왜 대사의 능력을 많은 부분 포기하고 지극히 영상적으로 승부하는 것일까? 이제 장률 영화의 형식적 특징을 고찰해보아야 할 것 같다.
논의한 것처럼 장률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고정카메라이다. <망종>을 보면 카메라는 철저하게 고정되어 있다. 고정된 카메라의 좌나 우에서 인물이 등장해 천천히 지나간다. 자전거에서 김치를 팔고 있는 순희는 여자의 힘에 부친, 김치를 실은 자전거를 타고 화면의 좌에서 천천히 우로 이동한다. 그 공간을 카메라는 가만히 지켜본다. <이리>에서 노인들이 놀고 있는 경로당에 진서가 전경에서 등장해서 중경을 지나 후경으로 갔다가 다시 반대로 나오거나, 후경에서 등장해서 중경을 지나 전경에서 다시 반대로 나가는 장면이 차분하게 이어진다. 카메라는 인물의 얼굴에 집중하지도 않고 단지 상황을 지켜볼 뿐이다. <망종>에서는 전경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 중경과 후경이 존재한다. <경계>에서는 초원이나 사막과 같은 거대한 공간에 놓여진 인물들의 왜소함을 강조하기 위해 카메라는 지독히도 먼 거리에서 인물들을 잡는다. 영화가 끝날 때쯤 순희와 창호가 떠날 때 카메라는 사막 저 멀리, 초원 저 멀리 사라져가는, 점처럼 작은 두 인물을 보여준다. <그림 1>에서처럼 인물이 화면 앞으로 다가오더라 도 마치 작은 점처럼 처리해 그들의 험난한 앞날을 예고한다. <두만강>의 첫 장면은 고정카메라로 얼어붙은 두만강의 풍경을 보여주다가 시간이 지나 두 사람이 강으로 다가오면서 누워있는 창호에게 다가가논의한 것처럼 장률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고정 카메라이다. <망종>을 보면 카메라는 철저하게 고정되어 있다. 고정된 카메라의 좌나 우에서 인물이 등장해 천천히 지나간다. 자전거에서 김치를 팔고 있는 순희는 여자의 힘에 부친, 김치를 실은 자전거를 타고 화면의 좌에서 천천히 우로 이동한다. 그 공간을 카메라는 가만히 지켜본다. <이리>에서 노인들이 놀고 있는 경로당에 진서가 전경에서 등장해서 중경을 지나 후경으로 갔다가 다시 반대로 나오거나, 후경에서 등장해서 중경을 지나 전경에서 다시 반대로 나가는 장면이 차분하게 이어진다. 카메라는 인물의 얼굴에 집중하지도 않고 단지 상황을 지켜볼 뿐이다. <망종>에서는 전경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 중경과 후경이 존재한다. <경계>에서는 초원이나 사막과 같은 거대한 공간에 놓여진 인물들의 왜소함을 강조하기 위해 카메라는 지독히도 먼 거리에서 인물들을 잡는다. 영화가 끝날 때쯤 순희와 창호가 떠날 때 카메라는 사막 저 멀리, 초원 저 멀리 사라져가는, 점처럼 작은 두 인물을 보여준다. <그림 1>에서처럼 인물이 화면 앞으로 다가오더라 도 마치 작은 점처럼 처리해 그들의 험난한 앞날을 예고한다. <두만강>의 첫 장면은 고정카메라로 얼어붙은 두만강의 풍경을 보여주다가 시간이 지나 두 사람이 강으로 다가오면서 누워있는 창호에게 다가가는 것으로 시작되고, 마지막은 두만강에 설치된 상상의 다리를 흰 눈속에서 건너가는 이장 어머니의 모습을 롱테이크의 고정 카메라로 멀리서 촬영한 것으로 맺는다.
감독은 인물들이 연기에 치중하는 것보다 상황 속에 놓여 있는 것을 선호한다. 이것은 떠도는 인물, 뿌리 뽑힌 삶에 개입하지 않고 단지 지켜보는 카메라의 방식이다. 카메라가 상황에 개입해서 클로즈업을 취하고 그래서 감정을 조작하면서 그들이 처한 상황과 인물의 감정을 강조할 수 있지만, 장률은 그것이 감독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나아질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하는 것은 그 인물들의 삶을 제대로 그린 것이 아니게 된다. 더 나가 감히 그들의 삶에 개입하는 것이 된다. 그러면 영화는 부자연스러운 것이 되고, 부자연스러운 만큼이나 왜곡하는 것이 된다. 무엇보다 그런 개입은 조선족으로서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장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나약한 주변인으로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습관처럼 느낀 감정을 영화의 그런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어떤 상황을 고정 카메라로 지켜보기만 할 뿐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장률 영화의 테이크는 길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편집에서도 문제가 발생한다. 인물의 대화를 찍을 때에도 샷과 리버스샷을 사용해 편집하지 않고 두 인물을 동시에 담아 멀리서 지켜볼 뿐이니 편집을가급적 최소화시키게 된다. <망종>과 <이리>, <경계>, <두만강>의 상황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길게 멀리서 카메라가 바라본 인물의 움직임을 담담히 기록하는 것이다. 이런 편집 방식에 대해 장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국 나약한 주변인으로서 인물이 겪은 슬픔과 아픔을 장률의 영화는 멀리서 지켜보면서, 그래서 클로즈업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롱 테이크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률의 영화가 소중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장률의 이런 자세에 있다. 그는 영화를 흥행을 목적으로만 만들지 않는다. 디아스포라라는 거대한 사회의 벽 앞에서 고뇌하는 인물들의 삶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최대한으로 예의를 갖추어 표현하는 것이다. 함부로 개입하지 않고 자신이 창조해 놓은 영화 속 인물의 감정을 최대한 존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자신의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 자신이 표현하고 자 하는 대상에 대한 절절한 애정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방법이다. 그는 영화를 통해 세계관과 인생관을 구현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감독이다. 장률의 영화가 영화적으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다만 <경계>에서는 샷/리버스 샷을 대신해 팬으로 반응샷 역할을 한다. 일차적으로 이것은 “몽골에서 살며 현지인들이 체화한 시선의 움직임을”21) 모방한 것이다. 가도가도 초원과 사막밖에 없는 곳에서 사람들은 급하게 대상을 바라보지 않고 유유히 흐르는 카메라의 느린 흐름처럼 대상을 바라본다. 그것이 몽골 현지인들의 대상에 대한 시선의 자세이다. 그러나 이차적으로 이것은 “부유하는 디아스포라의 시선을 상징한다.”22) 이 때 카메라는 천천히 흔들리는 핸드헬드를 사용하는데, 이것이 바로 떠돌아다니는 인물의 시선이라는 말이다. <두만강>에서는 시점 샷에 맞추어 카메라를 흔들며, 지나가기도 한다. 그것은 화가 난 인물의 심리를 표하거나 불안한 인물의 심리를 효율적으로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이다. 그러나 이런 카메라는 지독히도 절제되어 있어 그리 많이 사용되지 않는다. 대부분 <두만강>의 카메라는 인물을 가만히 지켜보는 고정된, 롱 쇼트의 카메라이다.
장률의 영화에서 또 하나 거론해야 할 것은 최대한으로 단순한 세트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에 그려진 인물들이 살아가는 공간은 최소한의 도구만 갖춘 살림집이다. 그래서 살림이 불가능해 보인다. <망종>의 집에는 선풍기와 작은 식탁, 침대만 있다. 부엌에도 아주 간단한 도구만 있다. 벽은 하얗게 비어 있고, 공간은 텅 비어 있다. 그런 곳에 인물이 산다. 그들이 이용하는 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노래방이나 술집도 최소한의 가구만 있다. <망종>의 노래방이나, <경계>의 술집을 보면, 의자와 탁자만 썰렁하게 놓여있고 손님도 그들뿐이다. <경계>의 게르가 오히려 살림살이가 좀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언제든 걷어서 이동해야 할 것들이다. <이리>의 경로당이나 진서 자매가 머무는 곳도 가구나 생활도구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두만강>의 연변 마을은 배경이 겨울이다. 하얀 눈이 세상을 덮은 이 마을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 있지만 눈 때문에 많은 부분이 비어있는 것 같다. 조선족이 사는 집은 간단한 가재도구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세트를 통해 정처 없이, 뿌리 뽑힌 인물들의 디아스포라적 삶을 효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망종>의 순희는 떠나고, <경계>의 순희도 떠나며, <이리>의 진서는 죽고, <두만강>의 창호는 죽는다. 그들에게 잠시 머무는 곳이 무슨 큰 의미가 있어 살림살이를 모으겠는가. 이런 인물들의 삶을 장률은 단순한 세트로 그리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장률의 영화에는 식사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도 혼자 식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모여 식사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중경>에서 거의 대화를 하지 않는 부녀(父女)는 식사자리에서는 함께 앉아 있다. <경계>에서 항가이와 순희 모자(母子) 역시 최소한의 대화만 식사 자리에서 나눈다(물론 이들이 말이 통하지 않으니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도 하다). <망종>에서도 순희 모자(母子)는 말없이 식사를 나누고, <두만강>에서도 대사는 최소화된 가운데 식사를 한다. 그러나 장률의 영화 가운데 식사를 하는 장면이,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고 인물들의 배치도 획일적인 정도로 단순하고, 샷도 상황설정샷처럼 촬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족이 같은 자리에 모여 식사를 나누는 것의 즐거움이 화면에 강하게 배어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장면을 통해 어두운 장률 영화에서 그들이 서로 외면하지 않고 지켜주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경계>에서 항가이는 창호와 식사를 하면서 의사(pseudo) 아버지가 되고, <중경>에서 쑤이는 창녀와 놀아난 아버지와 식사를 하면서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특히 <그림 2>처럼 <두만강>에서는 말을 하지 못하는 누나도 북한 난민인 정진의 입장을 이해해서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여 보낸다. 장률의 영화가 뿌리 뽑힌 이들의 고통을 그리고 있지만, 고통을 함께 나누는 가족의 식사 자리를 통해 그 아픔을 함께 하려는 가족공동체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한편으로 장률은 자신의 영화 속에 갇힌 이미지를 즐겨 사용한다. <그림 3>처럼 <망종>의 첫 장면은 자신의 방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는 순희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은 파란 창틀에 가려져 마치 파란 창틀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갇힌 이미지는 뿌리뽑힌 인물의 삶을 옥죄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순희는 조선족 김씨의 거짓말로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노점의 허가증이 없어 언제나 쫓기며 살았다. 이런 갇힌 이미지는 <이리>의 감옥, <경계>의 게르, <두만강>의 연변 마을로 이어진다. 인물들은 현실을 벗어나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음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경계>에서 두 인물이 게르를 떠나지만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은 떠나고 싶은 욕망을 항시 지니고 있다. 아무래도 현실의 고통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장률은 이런 욕망을 기차와 기차역의 이미지를 통해 보여준다. <망종>과 <이리>의 첫 장면은 기차역이다. <망종>에서 인물이 살고 있는 곳은 기차가 다니는 철로 변이다. 그곳에서 기차역은 바로 옆에 있다. 철로에서 일하는 인물이 와서 물을 먹는 곳이다. <이리>도 익산역에서 시작하며 진서가 일하는 중국어학원도 철로 옆에 있다. 몽골의 초원에서 촬영했던 <경계>는 기차 대신 탱크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광활한 초원과 사막을 힘차게 가로질러 가는 탱크를 통해 떠나고 싶은 욕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두만강>에서는 마을과 도시를 잇는 마을 버스로 표현한다. 기차와 기차역, 탱크, 마을 버스를 통해 디아스포라적 삶을 사는 인물들의 불안정한 삶, 떠나야 하는 삶, 떠나고 싶은 삶, 허가 없이 사는 삶, 쫓겨가는 삶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떠나는 것이 아니고 정착하지 못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20)정성일, 앞의 책, 331쪽. 21)김영진, 앞의 글, 17쪽 22)육상효, 앞의 글, 169쪽.
일제 강점기인 할아버지 대(代)에 만주로 이주한 장률(張律)의 가족사는 조선과 중국이라는 두 나라를 필연적으로 경유하게 된다. 때문에 장률은 쉽게 정의하기 어려운 감독이다. 그는 중국에서는 최초의 조선족 감독이지만, 남한에서는 최초의 중국 출신 동포 감독이다. 이때 ‘최초’라는 말은 여러 의미를 포함한다. 처음이라는 시초의 ‘대단함’이 라는 의미는 그만큼의 고통을 내포한다. 조선족이라는 용어가 지니고 있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중국과 조선이라는 두 나라의 관계는 결코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두 나라, 여기에 북한을 포함하면 세 나라 사이의 어딘가에 놓여있고, 그의 영화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장률은 중국에서도, 남한에서도 ‘변방의 감독’이다. 마치 그가 처한 위치처럼. 중국에서는 조선족이기 때문에 큰 대접을 받지 못하고, 남한에서는 중국 동포이기 때문에 큰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장률이야말로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제대로 그리고 있는 몇 안 되는 감독이다. 특히 “전 지구적 자본화와 더불어 더 욱 가속화될 수밖에 없는 현 상황을 생각해 볼 때, 결국 디아스포라는 특정 소수민족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근대 ‘이후’의 보편적인 삶의 문제로 등장할 수밖에 없”23)는 실정에서 이런 문제에 깊이 천착하고 있는 장률의 영화가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장률은 끊임없이 디아스포라의 문제를 다룬다. 그것도 디아스포라의 최하층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장률의 영화들은 계급, 민족, 젠더의 층위에서 중층적으로 타자화된 인물을 통해 극단의 소외를 보여줌으로서 마이너리티 담론에 개입한다.”24) 이렇게 장률은 민족적, 계급적, 성적 모순의 양상을 과장하지 않지 않고 차분히 지켜보는 카메라로 담담히 기록한다. 그래서 장률의 영화를보고 있으면 제국주의의 폐해 때문에 고국을 떠난 이들이 돌아가지도 못하고 안주하지도 못하면서 뿌리 뽑힌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시대에 조선족과 새터민의 현실과 겹치기 때문이고, 더 나가 지금 우리의 모습이 바로 이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률의 영화는 과거의 영화가 아니라 현실의 영화이며 미래의 영화이다.
물론 장률의 영화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장률이 여성의 삶을 그리다보니 “지식인 계급이 하층 계급을 대변함으로써 지식인 계급은 자신이 수행하는 작업에 대해 보상을 받는 반면, 하층 계급은 다시 한 번 침묵하게 된다.”25)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즉 하층 여성의 침묵을 그대로 그림으로써 서발턴(Subaltern)이 말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 역시 침묵을 강요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 말을 할 수 없는 현실의 상황을 영화 속에 그대로 그리는 것이 과연 그들을 침묵하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영화를 통해 화두를 던져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인지는 꼼꼼히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이 부분에서 대해서는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 여러모로 장률의 영화는 화두가 된다.
23)정은경, 앞의 책, 11-12쪽. 24)주진숙, 홍소인, 앞의 글, 617쪽 25)같은 글, 6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