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dith Butler, with her theory of performativity, questions the idea of 'stable' identities to insist that identity exists only in a reiterated 'doing' that is coerced by a cultural apparatus. Querying the relation between performativity and performance, this paper first attempts to examine how theatrical performance is ‘othered’ by Austin and Butler who exclude performance from their theories of performativity and also by recent theories of avant-garde theatre—“ideology of modernisms.” Instead of undoing the difference/distance between performativity and performance delineated by Austin and Butler, however, this paper endeavors to re-appropriate the difference from a more dialectical stance. Theatre performance is different from but indispensible “outside” of real life’s performativity. The distance between performativity and performance creates a specific site of seeing that is absolutely necessary for us to reflect on and intervent into the process of making reality. By analyzing the way A Doll’s House exposes, speculates, and communicates gender performativity with focus on three key mis-en-scenes (Doll House, Nora’s Dance, and Nora’s Door), I argue for theatre performance as a site/frame for the investigation on the "concealed or dissimulated conventions" of performativity.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두 저서 『젠더 트러블』
젠더 정체성의 본질이 기실 비어있는 기호이며 오직 본질을 가장한 담론의 효과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라면 ‘위장’과 ‘연기’는 젠더의 수행성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 개념이 된다. ‘위장’과 ‘연기’는 연극의 토대이자 전문 영역이다. 그렇다면 연극 퍼포먼스와의 유사성이 수행성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좌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플라톤이래 연극은 ‘~인 척’하는 인간 행위를 대표하는 장르로, ‘진지한 철학’과 ‘건강한 사회’에서 추방되어야 할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절대불변의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한 현실 세계를 다시 모방한 연극은 그만큼 진실에서 동떨어진 그릇된 허상으로 대중을 미혹하여 사회적 혼란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허상이 현실에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한 플라톤의 우려는 과대망상이 아니었다. 1927년에 만들어진 영화 <메트로폴리스> (Metropolice)가 ‘위장’했던 미래 도시의 모습이 오늘날 뉴욕/서울의 모습과 거의 흡사하고 9/11테러가 헐리우드의 재난영화를 그대로 빼닮았다면 그것은 감독의 예지력 덕분이라기보다 위장을 통해 가시화된 ‘가상(seeming)’이 현실의 ‘씨(semen)’가 되어 현실을 ‘수행적’으로 구성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보이는 것이 씨가 된다 (Seeming is seminal)”는 허버트 블라우(Herbert Blau)의 선언(94)은 그 어느 때보다 적실하다. 플라톤의 가상이 진실을 왜곡하고 현실을 악화시키는 나쁜 ‘씨앗’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가 파악한 연극의 가상은 이데아/현실에 대한 수동적 그림자/반영이 아니라 선택, 해석, 소통의 다층적 과정을 거치면서 적극적인 현실 개입과 현실 구성의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좋은 ‘씨앗’이다. 정 반대의 입장을 견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연극의 언어와 행위가 현실에 미치는 수행적 영향력—전형화, 활성화, 은폐, 전복, 변형, 생성—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극의) 억압도 (연극의) 저항도 모두 ‘수행적’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한 것은 막상 오스틴과 버틀러는 자신들의 수행성 이론에서 의식적으로 연극 퍼포먼스를 배제했다는 것이다. 수행성 이론의 효시2)라고 할 수 있는 오스틴은 연극의 발화는 “공허(hollow)”하다고 말한다:
오스틴은 “불성실한” 연극의 “공허한” 발화를 자신의 언어철학에서 제외시키면서 현실적인 수행 능력이 결여된 연극의 언어가 정상적 언어에 “기생”하는 “언어의 약화/퇴행”이라고 주장한다(“parasitic upon language's normal use--ways which fall under the doctrine of the etiolations of language” 22).
버틀러를 비롯한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수행적인 ‘정상’ 언어와 ‘공허한’ 연극언어라는 오스틴의 구분을 해체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해석은 ‘정상’ 언어의 수행성에 내재한 인용적 ‘공허’를 드러내는데 그침으로써 정상언어의 ‘공허’와 연극언어의 ‘공허’의 차이를 분별하기 보다는 모든 발화의 공허함으로 수렴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버틀러의 경우 오스틴과 정 반대의 이유로 수행성 담론에서 연극적 퍼포먼스를 배제하였다는 것이다. 오스틴에게 연극이 ‘진정성’이 결여된, 그래서 현실에서 즉각적인 수행적 효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불충분한(infelicitous)” 언어였다면 버틀러는 연극적 퍼포먼스를 지나치게 확고한 의지와 목적이 있는 행위로 파악한다. 텍스트라는 모방의 대상이 분명히 드러나 있고 행위자의 ‘의지’와 ‘선택’에 기반한 연극 퍼포먼스는 은폐된 규범에 대한 무의식적이고 반복적 재연인 수행성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버틀러에게 거부된 정체성, 감추어진 것, 억압된 것, 수행될 수 없는 것은 늘 수행되는 것 속에 잠재적 형태로 현존한다. 그러므로 수행적인 것은 역설적으로 “의지”를 가지고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는 연극적 퍼포먼스의 한계를 넘어선다.
그러나 연극이 정해진 텍스트의 명징한 재현이라는 버틀러의 견해는 연극의 오랜 역사 가운데 극히 일부인 리얼리즘 연극, 그 중에서도 매우 제한적 형태(주로 상업주의적 공연)에 국한된 것이다. 여기에는 『인형의 집』 노라의 거실에 부정의 형태로 현존하는 히스테리아, 자코비언 무대를 잠식했던 유령의 비가시성, 행위자/배우의 의지에 대한 베케트의 조롱이 빠져있으며 연극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텍스트와 퍼포먼스 간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간극’에 대한 성찰도 없다. 연극은 단지 텍스트의 언어적 발화도 텍스트의 기계적 인용도 아니다. 인간과 사회의 특정한 감정, 태도, 구조, 관계를 무대화(staging)하는 연극에서 텍스트는 다른 요소들과 함께 그 무대적 재현(RE-presentation)의 ‘일부’로 배치된다. 그러므로 텍스트의 투명하고 분명한 재현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고 오히려 그 불가능성 때문에 연극은 계속되는 것이다.
또한 버틀러는 수행성과 퍼포먼스를 대별하면서 젠더가 수행적이라고 해서 “무대 위 연기”처럼, 혹은 “옷장에 걸려있는 의상”처럼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자유로운 퍼포먼스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물론 젠더를 배우의 역할 연기와 동일시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그러나 연극은 삶만큼, 때로는 그보다 더 엄격한 사회적 기준과 시장의 지배를 받으며 계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수행적’ 과정을 수반한다. 유독 퍼포먼스에만 “자율적 배우”의 안정적 주체를 상정하는 버틀러의 입장은, 모야 로이드(Moya Lloyd)가 지적하듯이 “모든 젠더 정체성은 이미 언제나 모방적이며 수행적이라는 그녀 자신의 이론과 근본적으로 상충되는 것이다”(202). 텍스트와 퍼포먼스 간에 존재하는 ‘안정적’ 주체는 없다. 현실 속에서 이상적 아내이자 엄마를 수행하는 여성처럼 무대 위에서 노라를 연기해야 하는 배우의 의지와 선택 역시 역사적, 물질적 조건과 한계 내에서 수행적으로 이루어진다. 그 밭이 현실의 삶이든 연극 무대이든 ‘가상’의 씨앗은 완벽하게 발현될 수 없다. 설령 일시적으로 가능하다 해도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재연의 반복이 요구되며, 반복은 필연적으로 차이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은 수행성과 퍼포먼스의 차이를 무효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연극의 발화/퍼포먼스를 ‘타자화’하는 오스틴과 버틀러의 시각과는 다른 차원에서 수행성과 퍼포먼스와의 ‘간극’을 생산적으로 전유하고 그 ‘차이’가 만들어 내는 역설적 동력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1) 수행성 이론과 최근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담론적 지형으로부터 동시에 비판/배제되고 있는 리얼리즘과 연극적 재현의 문제를 검토하고 2) 사실주의극의 전범으로 인식되고 있는 입센의 『인형의 집』이 젠더 정체성의 수행성을 드러내는 방식을 분석함으로써 3)억압과 저항이라는 이분법에 함몰되지 않는 수행적 주체의 가능성을 재현이라는 오래된 연극의 ‘약속(convention)’ 속에서 재발견하고자 한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진지하게 반영하는 리얼리스트라는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입센은 삶의 연극성과 연극의 수행성의 상호작용에 누구보다 민감했고 그래서 삶과 예술 모두에서 이상주의와 사실주의를 넘어서는 지평을 열고자 했다. 이 글에서는 그의 대표작 『인형의 집』이 130년 전에 이미 젠더의 수행성이라는 오늘의 주제를 연극의 틀로 사유하는 방식을 살펴볼 것이다.
1)버틀러에 대한 최근의 국내연구로는 행위성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버틀러의 이론적 궤적을 추적함으로써 정치적 실천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전혜은의 글 “근대적 주체 이후의 행위성: 주디스 버틀러의 행위성 이론”(2011) 참조. 2)종래의 언어학이 언어의 주요 기능을 의사소통으로 간주한 데 반해 오스틴은 언어의 기본 기능이 의사소통이 아니라 행위의 수행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오스틴의 화용론의 요체는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말은 재현적인(representative) 것이 아니라 수행적(performative)이라는 것임을 주장한 것이다. 오스틴의 견해에 따르면 말은 단순히 사실관계를 전달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 사실을 ‘수행’하는 세계 변화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언어의 기능을 재현과 수행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설명함으로써 재현 행위에 담겨있는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수행능력’을 간과하는 오류를 범하였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1990년대 이후 드라마/연극 연구 영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포스트드라마’ 담론은 후기구조주의의 수행성 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전통적 의미의 ‘연극성’을 보다 광범위하고 실제적인 ‘수행성’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이들은 전통적 또는 ‘드라마적’ 연극을 텍스트의 수동적 재현으로 규정하고 이과 대별되는 아방가르드 미학과 포스트드라마 연극을 견인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이들은 재현의 허구성, 불가능성을 강조하면서 삶과 무대, 현실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기호학적 몸을 해체하는 아방가르드의 현상학적 몸만이 관객으로 하여금 삶의 진정성을 체험하게 한다고 주장한다.3) 연극의 경계를 지움으로써 연극성과 수행성의 통합을 시도하는 이들 이론은 오늘날 연극이 처해 있는 복합적 지형에 대한 해체적 진단을 통해 기존의 연극연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몸과 언어, 저항과 억압, 현존과 재현의 이분법적 구도에 기대어 ‘사실주의 연극=재현의 연극’을 획일적이고 일면적으로 타자화 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특히 국내 연구의 경우 수행성과 연극 퍼포먼스를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는 오스틴이나 버틀러의 입장에 대한 분석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막연히 연극성과 수행성의 통합을 주장하거나, 수행성 개념에서 전복성과 해방성만을 선택적으로 취하여 아방가르드 연극의 이념적 미학적 우월성을 입증하는데 주력하는 경향이 강하다.4) 오스틴과 버틀러에게 수행성과 구별되는 ‘퍼포먼스’로 배제되었던 연극의 재현은 아방가르드 미학에 와서는 타파해야 할 근대적 유물로 인식되고 있다.
토릴 므아(Toril Moi)는 입센과 사실주의 연극에 대한 광범위한 무지와 적대감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태도는 단순한 오해나 편견이 아닌 모더니즘 이데올로기의 미학적, 이념적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진단한다.5) 므아가 말하는 “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ideology of modernisms)”란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아방가르드 미학 모두를 아우르는(“a broad umbrella that covers modernism, postmodernism, and avant-gardist aesthetics”) 것으로 그녀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입센의 근대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연극이론을 장악하고 있는 “모더니즘의 근본적인 미학적 이상”을 재검토할 것을 제안한다.6)
프레드릭 제임슨(Frederick Jameson)을 경유하여 므아가 제시한 모더니즘 이데올로기의 세 가지 기본 강령은 1.미학의 자율성(autonomy of the aesthetics) 2.언어의 탈인격화(depersonalization of language: 작가/주체의 죽음) 3.언어의 자동화(autonomization of language: 재현불가능성/의미불가능성)로써 “여기에는 그들이 리얼리즘의 기호로 인식한 평범함과 일상에 대한 멸시가 담겨져 있다”(“Ibsen” 248). 제임슨은 이들 모더니즘의 이상을 “부르주아 의식을 초월하는 언어, 스스로 존재의 밀도를 지니고 있는 언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언어, 즉 의미의 경계에 머물거나 아예 뛰어 넘기를 원하는 언어의 미학적 전경화”로 규정한다(72). 1990년대 이후 연극의 “수행적 전환(performative turn)”에 관한 글들을 활발하게 발표하고 있는 에리카 피셔-리히테(Erika Fischer-Lichte)는 이러한 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대표적인 연극학자이다. 그녀는 외부적인 그 어느 것도 드러내지(의미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아방가르드의 몸을 ‘자기지시성’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아방가르드의 현상학적 몸은 거기에 합당한 기의를 연결시킬 것을 요구하는 기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성 속에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 이미 기의가 되기 때문이다. “관객의 연상작용에 의해 제2, 제3의 또 다른 기의로 무한히 확대되면서 결국 무한 증식되는 기표의 유희만이 존재하는 오늘날 공연의 본질적 기반은 끊임없이 순환하는 자기 생산적 피드백이다”(재인용 이경미 156-7).
예술이란 일상, 문화, 역사를 뛰어넘는 자율적 존재이며 재현의 그물망 밖에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라는 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와 그 계승자들에게 현실을 재현하려는 모든 시도는 열등하고 미개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와 같은 태도는 입센과 사실주의 연극에 대한 연구의 전형화와 획일화로 이어진다.
사실주의의 한계와 위험성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관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을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리얼리즘에 대한 무차별적 타자화는 (모더니즘의 차별화된 자의식을 구성하는 구조적 근간을 제공했을지는 몰라도) 입센을 비롯한 사실주의 작품과 그 역사적 맥락에 대한 정치한 분석과 연구 자체를 거부, 포기하는 결과로 이어지면서 기실 입센으로부터 시작된 현대드라마의 연구와 교육의 심각한 공백을 초래하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이정진은 아방가르드 연극의 이론적 유산이 극문학에 대한 연구와 교육 자체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극문학 연구에서 (아방가르드) 유산의 계승양상은 적절한 비판을 동반한 균형 잡힌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비평들은 작품의 실상과 관계없이 무차별적으로 아방가르드적인 예술의제를 읽어내는 것으로 보람을 삼는 듯하다. 이럴 때 퍼포먼스의 이름으로 과거의 극문학 전통 일반을 부정하는 아방가르드적인 예술이념이 비평의 논리로 고스란히 반복된다”(272).
입센의 작품은 모더니즘 이데올로기가 주장하는 언어의 자율성, 예술의 초월성과는 거리가 멀다. 정 반대로 그의 작품은 언어와 문화의 그물에 단단히 묶여있다. 입센의 연극이 재현하는 주 대상은 모더니즘이 경멸했던 일상과 평범함이다. 재현의 능력을 완전히 믿지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도 않는 입센의 작품을 관통하는 근원적 질문이자 근본적인 충동은 “연극이 무엇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메타연극적 질문이었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그의 대표작 『인형의 집』이 젠더의 수행성이라는 오늘날의 주제를 연극의 틀로 사유하는 방식을 세 개의 핵심적 미장센--인형의 집, 노라의 춤, 노라의 문--을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가 일면적으로 타자화한 입센 드라마터지의 근대성을 재규명하고 재현이라는 연극의 ‘약속’ 속에서 억압과 저항이라는 이분법에 함몰되지 않는 수행적 주체의 가능성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3)예를 들면 이경미는 “텍스트 내지 그 의미에 가려졌던 ‘몸’을 적극 전면에 세워 그 몸이 수행하는 ‘행위’에 주목하는 일련의 문화적 현상”을 “수행적 전환”으로 지칭, “90년대 이후 오늘날 서구 공연예술의 중심담론을 이끌고 있는 예술가들이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불과 40여년 전 그들 선배들조차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던 텍스트 또는 서사의 재현이라는 부담감을 단호히 털어내고 있다”고 단언하면서 “이는 곧 연극이 더 이상 ‘재현’을 요구하는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역동적 ‘사건’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137-40). 4)예를 들어 “이처럼 공연을 미리부터 주어진 어떤 것의 표현이 아니라, 모든 참여자들이 함께 그 의미를 구성해가는 행위라고 보았던 것은 확실히 오스틴 및 버틀러의 수행성 개념을 선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주장이나(이경미 161) “의미는 주어지거나 서술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 스스로 구성되어 가는 것이라는 수행성 개념을 다양한 실험을 통해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버틀러는 정체성이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성되었으므로 수행성을 통해 해체할 것을 제안하였다. 퍼포먼스는 수행성을 활용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매체로 추측된다”는 해석(최영주 249)은 버틀러의 수행성 개념(1. 수행성은 억압과 저항 양면과 관계한다 2. 정체성의 전복은 주체의 의식적 행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3. 퍼포먼스와 수행성은 구별되어야 한다)에 대한 오해 또는 선택적 수용의 예라고 할 수 있다. 5)토릴 므아(Toril Moi)의 글 “입센, 연극, 모더니즘 이데올로기(Ibsen, Theatre, and the Ideology of Modernism)” 참조. 6)“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란 제임슨(Frederick Jamson)이 “후기 모더니스트(late modernist)”로 명명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학적 사조(“a belated product, and essentially an invention and an innovation of the years following WW II”)를 말하는 것으로 그 시작은 20세기 초반의 “하이 모더니스트(high modernist)”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으나 종국에는 하이 모더니즘과 결합하여 “모더니즘 이데올로기”라는 미학적 캐논으로 정형화된다(Jameson 179).
시대에 뒤떨어진 작품이라는 일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연극관련 과목에 『인형의 집』을 반드시 포함시키는 이유는 작가 입센이 현대연극, 리얼리즘 연극, 페미니즘 연극 등 다양한 분야의 효시이자 전범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연극사적 의의 이외에 이 작품의 진정한 주제이자 가치는 삶과 연극의 상호작용에 대한 철학적, 미학적 성찰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작품을 읽고 난 학생들의 반응은 분명하게 두 가지로 나뉜다. ‘낭만주의자’들은 노라의 마지막 선택을 못내 아쉬워한다.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집에 남아 ‘긴 토론’ 이후 분명한 태도의 변화를 보이는 남편 토발드와 새로운 출발을 할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반면 인형의 집을 떠나는 노라의 결단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내도 엄마도 아닌 인간(“first and foremost a human being”)으로서의 그녀의 새로운 삶을 열렬히 응원하는 비판적 ‘리얼리스트’들이 팽팽히 맞선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수용은 1880년대 『인형의 집』이 처음 공연되었을 때의 유럽의 평단/관객의 반응과 그대로 겹쳐진다.7) 이러한 상반된 반응은 삶의 가치에 대한 의견의 차이일 뿐만 아니라 낭만주의적 이상주의에서 모더니스트적 리얼리즘으로 가는 전환기에 있던 당시 연극/예술 사조의 생생한 반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형의 집』의 결말을 ‘정치적 혁명’으로 받아들였던 리얼리스트 지지자들 역시 입센의 진정한 미학적 성취, 즉 “그의 연극주의,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연극’임을 강조하는 입센의 메타연극적 주장”은 간파하지 못했다(Moi “First” 275).
『인형의 집』은 ‘있는 그대로의 삶’이 아니라 연극의 프레임을 통해 삶을 바라보게 하는 메타연극이다. 『인형의 집』을 현실의 미메시스가 아닌 ‘메타연극’으로 읽는다면 이 작품은 당시 연극무대를 장악하고 있던 멜로드라마에 대한 패러디라고 할 수 있다. 노라와 토발드의 ‘인형의 집’은 여성의 아름다움, 순수함, 희생으로 인해 남성의 관용, 명예, 남성성이 확인되고 강화되는 멜로드라마의 미적 이상주의가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연기’되는 공간이다. “올바르거나 아름답지 않은 일”은 절대 상종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토발드는 여러 면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낭만적 이상주의를 표방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고매한 취향(such a refined taste)”(37)에 미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부합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해 “추하다(ugly)”는 선고를 내린다. 이것이 누구에게나 자랑스럽게 내보이던 ‘트로피’ 아내 노라가 멜로드라마가 여주인공에게 요구하는 미학적/도덕적 기준에서 벗어나는 순간 “추함의 심연(an abyss of ugliness)”으로 추락하게 되는 이유이며8) 두 사람의 ‘파국’ 이후에도 계속 세상 앞에서(“only before the eyes of the world”) 행복한 결혼생활을 ‘연기’해야 하는 이유이다(80).
노라 역시 이 ‘연극’의 공모자이자 주인공이다. 실제로 토발드와 노라는 연극의 대부분을 멜로드라마적 이상주의의 전형적 인물을 ‘연기’하고 ‘무대화’ 하는데 사용한다. 이를 유지하고 수행하기 위해 노라는 다양한 극적 판타지 사이를 전전한다. 토발드가 노라를 부르는 애칭인 “다람쥐(squirrel)” “종달새(little lark)”에 응답하는 순진하고 귀여운 아내, 남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서명 위조(forgery)라는 범죄를 서슴지 않은 사랑과 용기, 남편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자신의 희생과 고통을 평생 비밀로 간직하는 여성적 겸손과 지혜, 가정의 파탄을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아내이자 엄마, 아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명예를 포기하는 영웅적 남편(에 대한 환상), 그를 구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하는 여성의 숭고한 희생. 노라와 토발드의 ‘인형의 집’을 지탱하기 위해 동원되는 이 모든 극적 판타지는 당시 유행하던 연극적 클리셰의 종합선물세트라고 할 수 있다.
토발드가 모든 사실을 폭로하는 크로그스타드의 편지를 읽으러 서재로 들어간 뒤 이어지는 3막 노라의 독백은 비탄에 빠진 여주인공이 파국 (그리고 이어지는 남자 주인공에 의한 구원이라는 막판 반전) 직전에 과장된 감정으로 쏟아내는 멜로드라마적 클라이막스의 ‘재연’이다. 여기에 당시 멜로드라마의 전형적 소품인 도미노(가장무도회에서 입는 두건 달린 외투)가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닌 치밀하게 계산된 입센의 메타연극적 의도이다.
바로 그 클라이막스의 순간에 결정적으로 멜로드라마의 시나리오가 어긋난다. 실제로 초연 당시 노라 역할을 연기한 배우가 당대 최고의 멜로드라마 스타였음을 생각할 때 이 극의 반전이 관객에게 준 파장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전까지 토발드는 “노라, 당신은 모르지? 난 가끔 당신이 어떤 절박한 고난에 처하길 바래. 그래서 내가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내 몸, 생명, 그 모든 걸 불사하고 당신을 구할 수 있도록”(78)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비탄에 빠진 여성을 구원하는 멜로드라마의 영웅적 주인공과 동일시해왔다. 그러나 실제로 위험이 닥치자 자신의 불이익을 조금도 감수하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본색을 드러낸다. “당신이 내 미래 전부를 망쳐놨어. 한낱 여자의 무책임함 때문에 내가 이런 나락으로 떨어져야 하다니!”(80). 이제 스스로 집을 떠나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토발드의 사회적 책임을 면하게 해주겠다는 노라의 이상적, 낭만적 희생정신은 토발드의 표현대로 “허황된 제스처(grand gestures)”가 되어 버린다.
그들이 멜로드라마의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 멜로드라마의 프레임이 드러나고 관객은 사랑과 결혼에 대한 낭만적 이상주의의 실현과 유지는 그들 스스로를 연극화하는 ‘행위’에 달려 있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협박을 철회하는 크로그스타드의 두 번째 편지가 전달되고 현실적인 위협이 사라지자마자마자 토발드는 곧바로 다시 원래의 시나리오인 멜로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으로 복귀한다.
그러나 현실이 젠더적 이상주의의 스크립트에서 벗어난 순간, 그 모든 구조적 허위와 모순을 깨달은 노라는 “무대 밖(offstage)”으로 나가 “무대의상(costume)”을 벗는다.9) 그녀가 벗어버린 “무대의상”은 일차적으로는 바로 직전에 있었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타란텔라 춤을 추기 위해 입었던 공연의상을 의미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빅토리아 시대의 젠더 이데올로기가 그녀에게 입혀 놓은 낭만적 이상의 옷, 가정이라는 ‘무대’ 위에서 그녀가 수행해온 역할들을 함축한다. 노라의 내면에 일어난 변화를 간파하지 못한 토발드가 홀로 ‘무대’에 남아 벌이는 용서와 평화의 과장된 ‘연극’은 삶과 이데올로기의 연극성에 대한 입센의 통렬한 풍자이다. 노라만이 아니라 토발드도 이 ‘집’의 인형이다. 끝까지 이 집에 남는 토발드야말로 ‘인형의 집’의 진정한 ‘배우’이다.
7)므아(2006) 258-261 참조. 8)“헬머: 8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당신은 나의 자부심이자 기쁨이었어. 그런 당신이 위선자에 거짓말쟁이, 게다가. . .세상에 범죄자였다니! 이 모든 것이 추함의 극단이라구!(For all these years, for eight years now, you've been my pride and joy, and now I find you're a hypocrite and a liar, and worse, worse than that . . .a criminal! The whole thing is an abyss of ugliness!)”(79). 9)헬머: 당신 안에서 뭐해? 노라: (무대 밖에서) 의상을 벗고 있어요. HELMER: What are you doing there? NORA: (Offstage) Taking off my costume. (82)
2막의 마지막 장면인 노라의 타란텔라 춤은 삶의 연극성이 『인형의 집』의 중심 주제라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서명위조라는 자신의 범죄를 폭로하는 크로그스타드의 편지가 들어있는 우편함으로부터 남편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노라는 자신의 몸을 ‘볼거리’로 만들어 그의 시선을 붙잡아 두려 한다. 그녀의 타란텔라는 ‘인형’으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극단적으로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인간의 영혼을 가장 생생하게 표현하는 그림”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처럼 외양적으로 드러나는 춤추는 인형성(dollness)은 고뇌와 불안이라는 그녀의 내면(humanity)을 몸으로 발화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Moi “First” 269).
토발드가 우편함을 열어보기 위해 현관으로 통하는 거실문으로 다가가자, 노라는 피아노로 달려가 타란텔라 춤곡을 치기 시작한다. 남편에게 반주를 부탁하고 노라는 ‘퍼포먼스’를 준비한다. 무대는 피아노와 탬버린 소리, 현란한 숄을 걸친 노라의 춤동작으로 채워지고 “너무 과격하다(It's too violent, Nora!)”는 남편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노라는 통제 불가능의 빠른 속도로(with increasing frenzy) 여기에 자신의 “목숨이 걸린 것처럼 춤을 춘다(You're dancing as if your life depended on it)”(63). 이상주의적 미학의 절제와 균형을 벗어난 격렬한 춤으로 노라의 모습은 흐트러지고 올린 머리는 풀어헤쳐진다. 계속적으로 그녀의 춤을 ‘지도’하고 ‘지적’하는(“issuing constant instructions” 63) 토발드는 영락없는 ‘연출가’ 또는 ‘감독’의 모습이다. 이때 들어온 친구 크리스티나에게 노라는 “와서 구경하라”고 말한다(64).
이탈리아의 춤으로 알려진 타란텔라는 그 이름에 담긴 뜻처럼 거미에 물렸을 때 그 독으로 인하여 주체할 수 없이 추게 되는 춤이라는 속설이 있다. 춤의 강렬한 움직임이 역설적인 해독 작용을 일으켜 독에 물린 이가 살아날 수 있다는 타란텔라의 이중성은 노라의 퍼포먼스에 대한 ‘수행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시각적 메타포이자 연극적 미장센이다. 버틀러를 비롯해서 엘린 다이아몬드(Elin Diamond), 페기 펠런(Peggy Phelan) 등의 페미니스트 학자들이 수행성에 내재한 전복의 가능성을 이데올로기적 규범(독)에 대한 의식적 저항(해독제)이 아닌 미미크리(mimicry), 잉여(surplus), 과장(excess) 등의 ‘동종요법’에서 찾고자 했음을 상기할 때 노라의 타란텔라는 젠더 규범이라는 상징질서에 대한 과도한 수행과 그 잉여를 통해 일시적으로 드러난 여성적 실재를 만나는 순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 노라의 ‘공연’을 바라보는 세 그룹의 ‘관객’이 있다. 일차적으로 그녀의 춤을 감상하며 그 미적 가치를 평가하는 두 남자, 토발드와 랑크 박사가 있고, 그 다음으로 그녀의 춤을 통해 그 내면의 고통을 읽어낼 줄 아는 노라의 친구 크리스틴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노라의 춤과, 그녀의 춤을 감상하는 남자들과, 노라와 남자들과 그들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간극을 함께 바라보는 크리스틴을 모두 함께 바라보는 극장 안의 관객이 있다. 첫 번째 관객인 두 남자에게 노라의 춤은 단지 볼거리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녀의 춤/몸을 대상화하여 감상하고, 판단하고, 평가할 뿐이다. 두 번째 관객인 크리스틴은 춤 속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노라의 실존적 고뇌와 그 영혼의 고통을 읽을 수 있는 관객이다. 그렇다면 입센의 궁극적 관객인 세 번째 관객은 이 장면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 것인가? 무대와 객석이라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거리, 이 장면을 ‘담고’있는 극장의 프로시니엄 틀은 무대 위에 있는 노라, 두 남자, 크리스틴이 볼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관객으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는가?
노라의 타란텔라 장면을 분석하고 있는 국내연구 중 김진나와 지혜는 매우 흥미로운 대조적 해석을 이끌어낸다. 김진나는 노라의 타란텔라를 “주변 분위기와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보는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하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무대 위의 흉측한 이미지”로서 “빛바랜 과거의 유산이며, 효능없는 치유책이며, 와해되어 가는 가정의 일그러진 자화상”으로 바라본다(53). 반면 지혜는 노라의 춤을 “히스테리적 징후”이자 “전복적 저항”으로 읽어내고 있다. 지혜는 첫 등장부터 두드러지는 노라의 지나친 명랑함을 히스테리적 징후로 파악하고 타란텔라가 지니는 전복적 함의를 강조한다.
그러나 노라의 춤은 주어진 역할에 완전히 순응한 수행적 ‘억압’과 자의식적이고 유희적인 수행적 ‘저항’ 중 그 어느 한쪽으로도 단순화 시킬 수 없다. 노라의 춤은 규범적 틀이 강요하는 여성성의 수행적 완성이라고 보기에는 불안과 과잉의 에너지가 너무 크고, 반대로 그녀의 춤을 규범에 대한 유희적 전복이라고 보기에는 그녀의 절망과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노라의 춤은 바로 그 경계, 삶의 진정성과 허구성, 수행적 억압과 저항의 경계 위에서 벌어지는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줄타기 이다.
가정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이 걸린 것처럼 필사적으로 춤을 추는 노라는-이상적 여성/아내/엄마라는 나르시스적 거울이미지와의 동일시의 잘잘못과는 별개로-개인의 역사가 있고, 감정과 영혼이 있고, 그래서 두려움과 고통을 느끼는 인간이다.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수동적 인형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해체’와 ‘전복’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인형’ 역시 아니다. 그렇다면 수행적 저항이 태동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인가? 젠더의 수행성에 연극이라는 프레임을 갖다 대는 ‘퍼포먼스’를 통해 어떤 층위의 수행적 반복, 재연, 개입, 전복이 이루어지는가? 수행성 담론이 배제하고, 아방가르드/포스트드라마 이론이 지우려는 연극의 재현적 틀, 삶과 예술 사이의 거리, 수행성과 퍼포먼스의 간극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용한 것인가? 라는 이 글의 원론적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위에 인용한 지혜의 글의 주어를 바꿔보면, “죽은 자(여성-인형)의 연극성을 전면화시키고” “비극성을 웃지 못할 코메디로 치환”시키며. “‘진정한 여성다움’의 허위성을 풍자”하고 “그녀에게 아내/어머니로서 인형 역할이 일상적으로 강요된다는 것을 폭로하는” 것은 노라가 아니다. 그녀를 “웃지못할 코메디”의 주인공으로 몰아간 구조의 비극성을 전경화, 치환, 풍자, 폭로하는 것은 그 모든 것 위에서 통제하고 유희하는 전능한 노라가 아니다. 이들이 처한 상황의 비극성과 희극성을 동시에 전면화, 치환, 풍자, 폭로하는 것은, 노라라는 개인, 인본주의적 주체가 아닌 바로 연극이라는 틀,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이다. 수행성이 가장하는 삶의 은폐된 구조는 연극이라는 예술의 드러난 구조로만이 그 흔적과 그림자를 (일시적으로나마)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입센의 『인형의 집』은 자아를 찾기 위해 문을 박차고 나간 노라라는 선구적 페미니스트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관계, 제도, 구조를 연극의 프레임을 통해 드러내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무대화의 궁극적 대상은 주인공의 행위 자체라기보다 그 행위의 작동방식, 즉 관습과 인간이 만나는 지점으로서의 ‘집’의 구조이다. 김진나는 『인형의 집』의 무대 이미지에 대한 기호학적 읽기를 시도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무대 위에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4개의 문들은 또 다른 문들로 연결되어 있다. 거실문은 현관문으로, 서재 문과 좌우벽의 문은 집안의 다른 문으로 연결됨으로써, 네 개의 문은 바깥세상과 가정을 향한 선택의 통로를 상징한다. 극이 시작할 때 현관문을 통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노라는 극의 마지막에 같은 문을 통해 인형의 집을 떠나고 ‘무대’ 위에 혼자 남은 헬머, 그리고 객석의 관객들의 귀를 때리는 마지막 소리는 노라가 쾅 하고 닫고 나간 현관문 소리이다. 이제 폐쇄적 거실 속 작은 공간인 소파에 주저앉은 헬머의 모습은 현관문을 열고 거리로 나서는 노라의 동적인 움직임을 상상하게 하고(김진나 48) 이것은 다시 극장의 객석에 숨죽이고 앉아 있는 관객 스스로의 모습과 대비되어 어둠 속에 남은 자들이 아직 넘지 못한 어떤 경계를 생각하게 한다. 경계를 넘지 못한 자와 경계를 넘은 자 사이에 연극이 있다. 연극의 ‘문지방(threshold)’은 그 경계를 드러나게 하고 그 경계를 성찰하게 한다. 그 순간 “인형의 집”은 노라 한 사람의 집(A Doll's House)이 아니라 정해진 젠더 시나리오에 의해 지탱되는 폐쇄적 공간에 남은 모든 이의 집(A Doll House)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과연 문밖으로 나간 노라는 행복했을까? 그녀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작정 길을 나섰다. 오직 한 가지 신념-인형도, 엄마도, 아내도 아닌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찾겠다-만 가지고 친척도, 직업도, 새로운 직업을 얻을 지식이나 기술도 없이 여성을 독립된 인간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 냉혹한 세상(바깥은 눈보라가 치는 겨울이다)으로 나간 것이다. 『인형의 집』이 초연되었을 당시 유럽의 지식인 뿐 아니라 이후 중국의 노신, 조선의 이광수와 채만식 등 동양의 민족주의자 남성 엘리트들이 노라의 문턱 넘기를 미숙한 한 여성의 치기어린 선택으로 바라본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는지도 모른다. 노라의 문턱 넘기는 문제의 해결이 아닌 문제의 시작이자, 그 문제를 풀기 위한 긴 여정의 출발이었다. 그것은 노라를 따라 문지방을 넘어 ‘극장’ 밖으로 나온 신여성들의 삶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10)
문밖에는 또 다른 극장이 있다. 새로운 문을 열고 몇 번의 문지방을 넘어도 그 너머에 또 다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또 다른 극장이 있다. 타인과 함께 하는 한, 타인의 눈이 존재하는 한 “온 세상이 극장(All the World's a Stage)”이라는 셰익스피어의 명제는 불변의 진리이다. 때로 가장 무서운 타인의 눈은 나의 눈이기도 하다. 그것이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운명이다. 그러나 그 숨겨진 극장(삶의 수행성)을 보게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극장(연극의 퍼포먼스)이라는 인위적 프레임이다. 아방가르드 연극(이론)은 그 인위성의 이데올로기적 측면만을 강조하면서 스스로 연극의 ‘안’을 지우고 연극의 ‘밖’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역사는 연극의 안이 사라진 사회는 연극의 밖인 리얼리티도 잃어버리게 된다는 아이러니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회가 온통 ‘극장’이었던 로마에 연극은 없었다. 그리스의 위대한 연극정신을 잃어버린 로마의 극장에서는 비극도, 결국엔 희극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반면 16세기 영국의 엘리자베스 시대는 세계의 연극성(theatrum mundi)을 연극의 퍼포먼스를 통해 성찰하고, 확장하고, 전유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사상적, 예술적, 사회적 발전을 이루어낸 문화의 황금기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인형의 집』의 무대 위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퍼포먼스’가 겹쳐진다. 버틀러가 “행위의 양식화된 반복(stylized repetition of acts)”으로 정의한 젠더의 수행적 ‘퍼포먼스’는 노라와 토발드가 살고 있는 인형의 집의 주춧돌이자 일상적 행위의 ‘스크립트’로 작용한다. 여기에 입센이 전략적으로 차용하고 있는 ‘멜로드라마’의 퍼포먼스가 중첩된다. 멜로드라마는 젠더의 수행성을 ‘재연’(reiteration)함으로써 (수행성과 마찬가지로) 스스로가 반복하는 관습을 은폐하거나 변장한다. 버틀러가 재연 또는 ‘인용’의 과정 속에서 원래의 규범을 변형 또는 전치시킬 수 있는 재의미화(resignify) 역시 가능하다고 보았듯이 멜로드라마도 때로는 균열과 위반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이 긴박하고 절실하게 요청될 때 재연을 통한 내파라는 ‘장구한 혁명’은 그 무의식적이고 은밀한 루트로부터 느닷없이 비상한다. 공이 튕겨 나가듯이, 판이 튀듯이. 입센의 『인형의 집』은 19세기 말 유럽의 사회, 문화, 예술에 혁명처럼 등장한 작품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감상적 낭만주의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세 번째 퍼포먼스를 ‘예술’이라고 부른다. 그것을 부를 다른 이름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인형의 집』은 멜로드라마를 전략적으로 차용하여 멜로드라마 같은 삶의 ‘수행성’을 통렬하게 드러내는 ‘퍼포먼스’이다. 노라와 토발드의 ‘인형’놀이는 관습의 ‘재연’이지만 이를 무대화하는 『인형의 집』이 ‘재현’하는 것은 관습의 제도(regime)이며 이것은 단지 희곡 텍스트 자체만으로는 불가능한 연극의 퍼포먼스, ‘체현’(embodiment)의 형태로 완성된다. 몸과 말이 중첩되는 ‘발화행위’는 말(발화내용)만으로는 완전히 이해될 수 없다. 노라의 춤은 몸의 힘과 심리적 힘의 접점으로서의 발화의 ‘수행적’ 성격을 전경화하면서 화자(노라)의 의도를 초월한다. 몸은 말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초월한다. 발화의 도구로서의 몸이 수행하는 ‘말’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극은 삶의 수행성과 ‘구별’되지만 동시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매우 독특한 형태의 수행적 발화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스틴이 연극적 발화를 정상 언어에의 기생으로 본 것과 마찬가지로 버틀러는 연극공연을 정해진 드라마텍스트의 언어적 재연으로, 텍스트에 ‘기생’하는 ‘공허한’ 퍼포먼스로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어가 담론적 수행을 통해 지시대상을 “enact” 함으로써 행위를 생성하고, 현실을 만들어낸다고 말할 때 “enact”가 법/규범을 ‘제정’한다는 뜻과 배우가 역할을 ‘상연’한다는 뜻을 함께 지닌 용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오스틴과 버틀러에 의한 퍼포먼스의 타자화는 수행성 개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한 ‘담론적’ 과정(늘 차이에 기반할 수밖에 없는)일 뿐 연극성 전체에 대한 배척은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연극 퍼포먼스와의 차이로 수행성의 개념을 드러내고자 했던 버틀러의 담론적 전략은 역으로 연극성이야말로 은폐된 수행성의 구조를 드러내고 개입할 수 있는 입지와 시각을 마련해주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갈 수 있는 ‘문지방’이 될 수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10)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노라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던 일본의 신극 배우 수마코와 한국의 신여성 나혜석을 사례로 신여성과 현대극의 상관관계를 탐구한 최성희의 글 “입센과 동양의 신여성”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