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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금지의 명령에서 향유의 명령으로 From the Prohibitive Imperative to the Commandment of Enjoyment
  • 비영리 CC BY-NC
ABSTRACT
금지의 명령에서 향유의 명령으로

This essay reviews cultural changes caused by the growth of capitalism in South Korea from the early 1960s until the 2000s and now. For this aim, this paper uses the Lacanian concept of enjoyment (jouissance). In theoretical view of psychoanalysis, particularly according to those of Lacan and Žižek, what dominates the pure form of capitalism is the obscene superego’s command to enjoy rather than prohibitive injunction of the Other and father’s law as in traditional social order. In this respect, commandment of enjoyment can be defined as the dominant cultural logic of neo-liberal capitalism in the age of globalization. Under the developmental dictatorship of the 1960s and 1970s, Korean subjects of modernization were dominated by the law of strong father and the state that prohibits their enjoyment and demands work ethic and asceticism. After its oscillation between prohibition and enjoyment in the 1980s, Korean society has clearly been in transition to a society of enjoyment with democratization and the growth of consumerist economy since the latter half of the 1980s. This transition did not stop even despite of the economic crisis in 1997, and Koreans of the 2000s see the coming of a society of commanded enjoyment.

KEYWORD
향유(희열) , 라캉 , 문화변동 ,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 정신분석(학)
  • Ⅰ. 라면과 식탐

    어린 소녀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라면을 맛있게 먹고 있는 오빠 옆에서 묻는다. “오빠, 라면 맛있어?” 오빠는 말이 없이 그저 먹기만 할 뿐이다. 소녀는 다시 묻는다. “오빠, 라면 맛있지?” 오빠는 여전히 대답이 없다. 마침내 소녀가 다급하게 외친다. “오빠! 라면 맛 어때?” 그러나 매정한 오빠는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먹어치운 뒤 자리를 떠버리고, 소녀는 빈 그릇을 들여다보며 울음을 터뜨린다.

    1970년대의 이 텔레비전 라면 광고는 지난 개발 연대 우리 사회를 추동했던 욕망의 논리를 얼핏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상품의 판매를 위해 잠재적 구매자에게 상품이 실현시켜줄 사용가치의 약속을 가상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상품미학 전략, 그 전략의 가장 주된 매체인 광고야 항상 잠재적 구매자의 욕망을 부추기기 위해 그 혹은 그녀의 결핍을 환기시키게 마련이지만, ‘결핍(the lack)’은 1960년대부터 ‘조국 근대화’의 기치 아래 본격적으로 구동된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 도정에 국가에 의해 동원되었던 한국사회 주체들의 ‘공언된’ 존재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가 내건 구호는 “잘 살아보세”였고,1)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국가에 의해 근대적 주체, 엄격히 말하면 ‘근대화의 주체’로 호명되는 남한의 모든 사람들은 ‘보릿고개’의 한을 한번 풀어보고자 팔을 걷어붙이고 앞 다투어 경제개발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라캉주의 정신분석 이론에 기댄다면 위의 텔레비전 광고를 이렇게 풀이해볼 수도 있을 성 싶다. 라면을 먹고 있는 오빠의(라는) 이상적 이미지 앞에서 소녀(와 시청자)는 자신이 결핍의 존재임을 절감할 수밖에 없는 ‘욕망(desire)의 주체’이다. 그녀(와 시청자)는 라면을 먹고/즐기고 있는 오빠에게 그 향유(enjoyment; 희열[jouissance])의 실체에 대해 질문하지만, 주체/소녀/시청자가 자신의 욕망의 비밀을 알 것이라 믿는, 따라서 자신의 결핍을 채워 주리라 ― 또는 채워줄 수 있으리라, 아니면 적어도 채워줄 방법을 알고 있으리라 ― 믿는 (큰)타자(the Other)2)/오빠/자본은 이러한 주체의 질문(즉, 요구[demand])에 대답하지 않는다. 게다가 소녀의 욕망의 대상-원인(the object-cause of desire)은 오빠/(큰)타자에게 보내는 소녀/주체의 ‘사랑에 대한 요구’(라면을 나눠달라는 요청)의 매체이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배고픔을 해소하고 욕구(need) ― 식욕 ― 를 충족시켜주는 식품, 즉 ‘식량’이다. 그리고 이 욕망의 대상-원인, 즉 라면은 한국 근대화를 상징하는 식품이기도 하다. 그것은 1960년대 초에 우리 식탁에 처음으로 등장하여 “가난한 시절 끼니를 때우는 주식으로 쌀 걱정을 덜어주고 국민들의 허기를 감추고 시장기를 속이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으며, “고학으로 사법고시를 패스한 가난한 고학생으로부터 육상선수까지, 지금은 억대 스타인 월드컵 축구영웅들에게까지 전해”오는 ‘헝그리정신’을 상징하는 음식이고(마정미, 2004: 144-145), 또한 본격적인 가공식품의 시대를 연 대표적인 ‘인스턴트’ 식품, 즉 노동 주체의 노동력 재생산에 소요되는 시간을 최소화해 더 많은 시간과 노동력을 생산과정에 동원하기 위해 자본이 고안해낸 ‘패스트’푸드이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남한의 텔레비전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그 소녀를 볼 수가 없다. 이제 라면 한 가닥이라도 나눠주기를 기다리는 소녀 대신 텔레비전 화면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넘쳐나는 각종 맛난 음식들과 그것들을 맛있게 먹는 사람들이다. 갖가지 ‘전국 맛 자랑’ 류의 프로그램들이 아침에도 저녁에도 화면을 가득 메우는데, 언제부터 대한민국이 이렇게 미식가들의 나라, 더 냉정하게 말하면 식탐(食貪)하는 존재들의 나라가 되었나 싶을 정도로 텔레비전 카메라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보기에도 먹음직한 음식들을 소개하기에 바쁘다. 이런 프로그램들이 보여주는 사람들은 더 이상 결핍의 존재라기보다는 포만의 존재, 충만의 존재들이다. 그들은 남녀노소 누구 할 것 없이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있을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자신들이 지금 음식을 마음껏 즐기고 있음을 과시하고 강조하기에 열심이다. 그들은 ‘향유의 주체’들이다. 그들은 말하자면 프로이트(Freud, 1953: 509)가 분석한 어떤 아버지의 꿈에 나타나 “아버지, 제가 불타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으세요?”3)라고 묻는 아들, 지젝(Žižek, 1992: 124-125)의 해석에 따르면 “아버지, 제가 즐기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으세요?”(“희열로 불타면서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보이지 않으세요?”)라고 묻는 주체이다. 텔레비전 속에서 사람들은 카메라/시청자/(큰)타자에게 자신들이 음식을 즐기고 있음을, 그 맛을 제대로 즐기고 있음을, 자신들의 향유를 경쟁하듯 과시한다(그들은 정말로 경쟁한다!). 그래서 그들은 맛있게 먹을 뿐만 아니라 게걸스럽게 먹어야 한다. 한술 더 떠, 그들은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고 카메라/시청자/(큰)타자에게 핀잔을 주기까지 한다.

    1)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는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한운사 작사, 김희조 작곡)도 많이 불렸다(조희연, 2007: 164). 몇 년 전에는 바로 이 시대를 배경으로 국가가 강력히 추진하던 가족계획사업을 소재로 삼은 <잘 살아보세>라는 제목의 코미디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안진우 감독, 2006년).  2)이 글에서 라캉의 ‘대문자 타자(the Other)’는 문맥에 따라 ‘큰타자’ 혹은 ‘(큰)타자’로 표기하겠다.  3)“Father, don’t you see I’m burning?” 재간된 열린책들 판 「프로이트 전집」에는 “아빠 내가 불에 타는 것이 안 보여요?”라고 번역되어 있다(Freud, 2003: 593).

    Ⅱ. 자본주의와 향유의 명령

    이렇게 1970년대 텔레비전의 라면 광고와 2000년대 음식 탐방 프로그램들을 단순 비교해보더라도, 그간 한국사회가 겪어온 문화적 변화가 참으로 작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1960년대 초부터 2000년대 현재까지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성장과 더불어 진행된 문화변동을 향유(희열)라는 라캉주의적 개념을 이용하여 개괄해보는 해석적 시론을 시도하고자 한다. 라캉(Jacques Lacan)의 정신분석 이론에 기댐으로써 긴 기간의 문화변동을 주체 형성의 논리와 양식이란 면을 중심으로 일관성 있게 조명해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라캉 정신분석학을 사회이론화하고 향유 개념을 중심으로 그 정치학을 개발하는 데 큰 기여를 해온 지젝(Slavoj Žižek)의 작업들이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4)

    맑스와 엥겔스가 지적했듯이, 자본주의의 창조적 파괴와 항구적인 혁신의 동학은 전통적인 유대를 비롯하여 인간의 모든 사회관계를 파괴하고 단 하나,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계약에 기초한 교환관계로 환원시킨다(Marx and Engels, 2000). 다시 말해 시장에서의 경제적 합리성으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모든 경험적이고 실정적인 내용이 비워진 텅 빈 형식으로서의 주체, 라캉적인 의미에서 기표의 주체(S/ )로 정의될 수 있다(Lacan, 1977: 316). 라캉에게 있어서 결코 기의와 만나지 못하는 기표는 그 표상 능력이란 면에서 근본적으로 무능하며, 이 기표의 무능함 때문에라도 기표에 의해 표상·대리됨으로써 구성되는 기표의 주체는 결핍으로 정의될 수밖에 없다. 이 결핍의 존재는 자신의 결핍을 채워 주리라 기대되는 대상을 쫓아 끝없는 욕망의 환유의 물결을 타게 된다.

    그런데 ‘상품생산사회’로서의 자본주의는 특히 인공적으로 끝없는 욕망의 환유를 창출함으로써 재생산되는 체계다. 상품은 시장에서 판매되어야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며, 광고는 욕망의 무한회로의 인공적 창출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렇게 보면 자본주의에서만큼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는 라캉주의 정언이 명백해지는 사회도 없다고 할 것이다. 지젝(Žižek, 1993: 209)에 따르면, 라캉은 결코 충족되지 못하는 이런 욕망의 악순환 때문에 자본주의를 히스테리 담론의 지배로 특징지었다. 주체는 항상 (큰)타자에게 “무엇을 원하는가?(Che vuoi?)”, 즉 “당신이 내게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하고 궁금해 한다(Lacan, 1977: 292-325). 그런데 「공산당선언」에서 맑스와 엥겔스가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관계와 사회관계 전체를 부단히 변혁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생산의 부단한 변혁, 모든 사회적 조건들의 끊임없는 교란, 항구적인 불확실성과 동요가 부르주아 시대를 그 이전의 모든 시대와 구별지어준다”(Marx and Engels, 2000: 248). 맑스와 엥겔스의 바로 이런 ‘용해적 비전’(Berman, 1988: 87-129)을 정신분석학적 개념들로 재해 석하면서 지젝(Žižek, 1993: 209-211; 2000: 21-25)은 이렇듯 자본주의의 기본적 특징은 내재적인 구조적 불균형이며, 영구적인 과잉의 생산은 일탈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정상적 상태라고 규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한 형태의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것은 주인(master)과 법의 논리라기보다는 차라리 법의 이면으로서의 외설적 초자아(obscene superego)이며, 이 초자아의 정언 명령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향유(희열)를 명령하는 것, 즉 “즐겨라!”이다(Lacan, 1998: 3).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다름 아닌 자본이야말로 가장 빼어난 외설적 초자아 그 자체이며, 이 초자아의 명령은 궁극적인 자본주의 상품, 잉여희열(잉여향유)의 구현체, ‘대상 a’(대상 소문자 a [objet petit a])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코카콜라의 로고에서 직접 표명된다. “Enjoy!”

    자본이 발하는 과잉적인 초자아의 명령, 즉 즐기라는 향유(또는 희열)에의 명령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가동되는 곳에서는 언제 어디서든 행사되지만, 그 명령이 사회 전 영역에 걸쳐 가장 노골적인 형태로 관철되는 것은 아무래도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에 들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자본은 국경의 경계를 넘어 자유로이 이동하고, 지금까지 사회 공동체의 가장 강력한 형식이었던 국가의 힘을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은 전통적으로 주인과 법의 논리에 따른다. 국가와 법은 대표 적인 주인 기표(the master signifier), 아버지의 법이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법은 전통적으로 금지의 명령이다. 이 금지의 명령에 직면하여, 인간은 향유(희열)를 포기하고 결핍의 존재, 욕망의 주체로서 태어난다. 푸코(Foucault, 1990: 145 이하)가 생체권력과 대조적으로 법으로서 표상되는 권력 ― 특히 군주의 권력 ― 을 죽음과 결부시키는 것은 이 금지 명령의 속성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지구화된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논리는 탈규제(‘규제 철폐’)의 이름으로 이 국가와 법의 금지 명령을 자본이 발하는 향유(희열)의 명령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로 규정한 프레드릭 제임슨(Jameson, 1991)의 논의를 원용해, 향유의 명령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지배적 문화논리(the dominant cultural logic)’ 혹은 ‘문화적 지배종(the cultural dominant)’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잘 알려진 제임슨의 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자본주의의 문화적 지배종, 지배적 문화논리로 해석한다. 이때 제임슨이 이론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이 한 사회의 문화(문화구성체)가 헤게모니적 또는 지배적인 것(the hegemonic or dominant), 잔여적인 것(the residual), 부상하는 것(the emergent)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레이몬드 윌리엄즈(Williams, 1980: 108-127; 1982: 152-159)의 입론이다. 제임슨은 윌리엄즈의 이러한 다층적 범주화를 채택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자본주의의 문화적 지배종(지배적인 것)으로 정의하면서, 그러한 정의는 “매우 상이하지만 종속적인 특질들의 현전과 공존을 허용하는 개념화”라고 주장한다(Jameson, 1991: 4). 다시 말해, 한 사회의 문화 혹은 문화구성체는 지배적인 구성요소와 문화논리 외에도 이질적이고 다양한 구성요소와 문화논리 또한 존재하면서 서로 중층결정되어 있는 ‘불균등 발전한 모순적인 복합체’(Althusser, 1977)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글 역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향유의 명령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지배적 문화논리로 정의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도 향유에 대립되는 금지의 정언명령이 잔여적 문화논리로서 남아있을 수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또 다른 문화논리가 출현해 부상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음도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텔레비전 속에서 자신이 잘 즐기고 있음을 과시하는 주체들은 초자아/자본이 발하는 이 향유의 명령에 복종하는 주체들이며, 2000년대 한국 사회의 식탐 문화 ― 혹은 식도락에 탐닉하는 문화 ― 는 지구화 시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문화적 지배종인 향유의 문화의 일부인 것이다.5)

    4)한국의 근대화 및 자본주의화와 관련하여 1950년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지만, 이 글은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국가 주도의 근대화가 현재의 한국사회의 구조와 운동의 틀과 논리가 형성되는 데 직결된다고 보고 일단 1960년대에서부터 출발할 것이다. 문화변동을 조감하기 위해 이 글은 영화, 텔레비전, 광고 등을 넘나들 예정인데, 이로써 분야별 차이와 다양성에 대한 정치한 분석이 희생될 위험이 있다. 대신 장기간에 걸친 한국사회의 문화변동을 전체적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조감하는 작업은 어느 정도 수행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 글이 하나의 ‘시론’임을 감안해, 마땅히 수행되어야 할 분야별 정치한 복합적 분석 작업은 차후의 과제로 미룬다.  5)이와 관련하여 토드 맥고완(McGowan, 2004)의 논의는 흥미로우며 많은 참고가 될 수 있다. 그는 라캉과 특히 지젝의 논의에서 영감을 받아 현대 미국 사회를 ‘(명령된) 향유의 사회(a society of [commanded] enjoyment)’로 정의한다. 그런데 금지의 지배에서 즐기라는 명령의 지배로 바뀌는 변화가 전통 공동체와 그 질서로부터 근대사회와 그 질서로의 이행만큼 큰 변화라 보는 그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글은 근대화가 훨씬 큰 사회변동이고 금지와 향유의 명령은 전통사회와 근현대사회 어디서나 발견된다고 보며,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의 금지의 명령에서 향유의 명령으로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현재 즐기라는 향유의 명령에 의해 점점 더 지배되고 있다는 맥고완의 진단에는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맥고완은 금지의 명령에서 향유의 명령으로의 이행을 이분법적이고 상호 배제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며, 그리하여 하나(후자)가 다른 하나(전자)를 대체하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 글은 본문에서 논의하고 있듯이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론과 윌리엄즈의 범주화에 근거하여 지배적 문화 논리와 문화적 지배종 개념을 이해함으로써 이러한 경향과도 거리를 두고자 한다.

    Ⅲ. 금지의 시대

    금지의 명령과 향유의 명령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본다면, 5·16 군사 쿠데타(1961) 이후 1960년대 초부터 본격 출발한 근대화의 시대, 197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의 ‘개발독재’(이병천 편, 2003; 조희연 2007) 시대에 한국 사회의 문화적 분위기는 가장 강력한 아버지의 법, 향유에 대한 금지 명령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남한 땅에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즉 조국 근대화의 주체로 ‘호명’(Althusser, 1971: 127-186)되어 국가가 주도하는 근대화의 기획 속으로, 경제성장의 도정으로 동원되었다. 남성은 산업역군으로 적극적으로 호출되었고, 여성은 한편으론 노동력 재생산을 담당하는 현모양처로서 가정에 유폐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론 또 다른 산업역군(‘공순이’) 또는 억척같은 경제적 부양자(‘또순이’)로 호출되었다.6) 이 근대화의 주체들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바로 금욕주의와 노동윤리였다. 마치 베버(Weber, 1988)가 분석했듯이 초기 산업자본주의와 그 합리적 경영·조직 원리가 제도화되는 데 프로테스탄트교의 종교 윤리 및 그와 연관된 청교도주의가 일상생활에서 함양하는 금욕주의적 태도가 필요했던 18~19세기 근대 서구 세계의 상황과 같은 양상을 우리 사회에서는 1960~70년대에 경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욕구의 억압으로 정의되는 금욕주의는 이 글의 관점에서 볼 때 곧 향유에 대한 큰 타자의 금지를 뜻하는데, 이 금욕주의는 이 시기 큰타자/국가로서는 또 다른 이유에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즉, 이승만 권위주의 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을 통해 수립된 제2공화국 정부를 군사쿠데타로 다시 전복시키고 성립된 제3공화국 정부, 그리고 1970년대 민주주의의 가장 가냘픈 숨결까지 압살하면서 박정희의 영구집권체제를 제도화하려 한 제4공화국 유신정권은 자신의 부족한 정당성을 보완하기 위해서도 금지의 법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권력은 여당과 재야세력 등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들뿐만 아니라 보통 시민들에게도 반대 의견과 불만을 표현하고 정권을 비판하는 것을 정보기관과 경찰력을 동원하여 금지하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남한 사회에서 신성불가침한 것이었던 반공 이데올로기와 국가안보를 내세운 관련 법률들 ― 무엇보다 국가보안법 ― 및 그 이데올로기는 독재 정권과 권위주의 정권들이 이 금지의 명령을 강요하기 위해 휘두른 전가의 보도였다. 이러한 금지의 강요는 ‘10월 유신’(1972) 이후 수립된 1970년대의 ‘긴급조치 공화국’에서 절정에 이른다.7)

    검열은 아마도 향유에 대한 국가의 금지 명령이 직접 표명되는 국가의 실천 활동일 것이다. 검은 선글라스를 쓴, 작지만 다부진 몸집의 장군은 ‘구국의 결단’으로 한강을 넘자마자 영화 <오발탄>(1961, 유현목 감독)을 상영금지 시켜 빈곤과 고통의 이미지마저 무대 뒤로 추방해버리더니,8) ‘민정이양’을 선포하고 가까스로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선 국가에 의한 영화검열을 헌법에 의해 보장되는 제도적 장치로 만들고(1962년) 영화 <7인의 여포로>(1965)의 감독(이만희)을 남산(중앙정보부)으로 연행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시켜버렸다. 이렇게 위험한 이념과 연결될 수 있는 ― 있다고 국가가 생각하는 ― 표현 뿐 아니라 성적 욕망과 연관될 수 있는 ― 역시 그렇다고 국가가 생각하는 ― 표현도 곧잘 금지되곤 했다. 예컨대, 국가는 영화 <춘몽>(1965)을 만든 감독(유현목)을 외설죄(‘음화제조죄’)로 기소했다.

    국가의 금욕주의 명령은 1960년대와 70년대 내내 한국인의 일상생활 전반에 간섭했다. 국민들은 항상 근검·절약을 강요받았고, 학생들은 혼·분식 규정을 잘 지키는지 도시락 검사까지 받아야 했다. 1970년대 국가는 국민들의 머리카락 길이와 치마 길이까지 신경을 쓰는 세심함까지 발휘했다(장발족 단속과 미니스커트 단속). 이렇게 국가는 사람들을 국민이자 근대화의 주체로 호명하는 동시에 ‘훈육’해내고 있었고, 따라서 이 시기 한국 자본주의는 베버와 함께 푸코(Foucault, 1979)의 규율(훈육) 권력 이론으로 잘 설명될 수 있는 방식으로 국가의 절대적 후견 아래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도덕적 훈육국가’(조희연, 2007: 175-177)9)의 지배와 계도 아래서 이 시대 일반 한국인들에게 있어 향유는 말 그대로 라캉적 의미에서의 ‘실재계(the Real)’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고, 판타지 속에서 상상적인 방식으로서나 ― 그것마저 국가와 법의 간섭이 심했지만 ―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시기 판타지를 통한 상상적 방식의 향유를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1960~70년대에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진로소주 광고가 있다.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걸작 <홍길동>(1967)을 제작했던 신동헌 감독이 만든 이 애니메이션 광고에선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 위의 선원들이 춤추고 노래하는데, “야,야야,야야야,차차차~”로 시작하는 노래로 잘 알려졌던 이 흥겨운 향유의 공동체는 육지에서 ― 그러므로 시청자로부터 ―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 원주민들이 춤추고 있는 남국의 어느 섬, 말 그대로 파라다이스에 상륙한다. 즉, 라캉 식으로 말하자면 향유는 상징적 질서 저 편에서 오직 판타지 속에서만 실현되는 것이다. 이 진로소주 애니메이션 광고는 2탄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는 예의 그 노래 속에 외항선원들이 아니라 일단의 직장인들이 등장함으로써 그에 따라 욕망의 대상, 즉 향유의 실체가 일상생활의 현실(reality) 속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이 직장인들은 값비싼 양주나 고급 주종 대신 ‘서민적인’ ― 따라서 훨씬 현실적인 ― 소주를 마시기로 ‘의견일치’를 보며, 아마도 술집이 있을 어느 건물 안으로 몰려 들어감으로써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렇게, 그들의 향유 자체(향유의 실체와 그들이 향유를 누리는 모습)는 재현되지 않는다.10)

    이 시기 향유를 금지하는 명령은 강력한 아버지의 법이 발하는 명령이었다. 독재 시절 국가와 법은 강력한 아버지 형상(father figure), 국민들에게 금욕주의를 강제하고 스스로 금욕주의로 무장한 최고 권력자 대통령으로 의인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11) 근대화의 지도자로서 박정희는 논두렁에 앉아 농부들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소탈한 대통령의 이미지로 자신을 감싸고 있었고, 뒤에 사람들의 소비 욕구를 부추기게 될 컬러텔레비전의 방영을 죽을 때까지 허용하지 않았다.12) 이렇게 1960~70년대 한국 사회는 급속히 자본주의화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억압적인 정치적 환경 속에서 강력한 아버지의 법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전통적 아버지가 아니라 전통과의 결별을 표방하는 새롭고 근대적인 아버지였다. 이는 대중적 판타지들에서도 표현되었는데, 특히 ‘조국근대화’ 프로젝트가 본격 가동되기 시작한 1960년대 초두에 더 분명했다. 예컨대 이 시기 영화들에서 전통적인 아버지는 사람만 마냥 좋을 뿐 무력하기 짝이 없고 기껏해야 연민의 대상이거나(이런 아버지 상은 배우 김승호의 이미지로 집약된다) 아예 부재하기까지 하며(<오발탄>), 그 아버지의 자리는 이제 아들 세대의 근대화와 산업화의 역군들이 차지한다(김선아, 2001). 그리고 무력한 아버지를 대체하는 이 능력있고 남성적인 영웅들은 종종 강력한 아버지 형상으로서의 권력자/지도자를 암시하곤 했다. 특히 신상옥 감독의 1963년작 <쌀>이 노래하는 것은 노골적인 박정희 찬양이었다.13)

    그러나 이 시대가 국가/법의 금지 명령에 의해 지배된다고 해서 향유의 비전마저 완전히 부재했던 것은 아니다. 국가 자체가 이미 국민들을 근대화의 주체로 호명함으로써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일정한 욕망의 주체를 훈육해내고 있었고, 국가와 결탁하여 본격적으로 성장하고 있던 자본은 상품과 광고를 통해 욕망의 주체들을 유혹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1960년대의 영화와 1970년대 급격히 보급률이 높아지고 있던 텔레비전 ― 비록 흑백화면이었지만 ― 은 온갖 욕망의 이미지들을 끊임없이 내보내고 있었다. 한국사회는 이미 본격적인 대중문화의 시대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에 의해 호명되어 공동체의 결속과 ‘발전’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고 향유를 희생하는 근대화의 영웅/주체가 스크린에서 ‘신필름’14)의 신영균(<쌀>의 농촌지도자)과 최은희(<상록수>[1961, 신상옥 감독]의 여성 농촌지도자,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신상옥 감독]의 정숙한 젊은 과부 옥희 엄마)에 의해 재현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욕망의 표현에 보다 솔직하고 비록 숨어서라도 향유를 누릴 줄 아는 김희갑과 도금봉(<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계란 장수와 식모)15)을 자신들의 이면 혹은 짝으로서 또한 필요로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1960∼70년대의 개발연대 시기 한국사회의 문화는 금지의 명령이 지배적인 문화논리로서 기능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급속한 자본주의적 산업화와 경제성장에 토대를 두고 향유의 문화가 출현해 부상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욕망과 욕구를 일방적으로 포기하기보다 상대적으로 더 솔직하게 표현하는 주체도 여전히 큰타자의 법이 발하는 금지 명령의 지배 아래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계란 장수와 식모도 ‘숨어서’ 그들의 향유를 즐겼고, 옥희의 엄마와 할머니 앞에선 괜히 움츠러들기만 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향유(희열)란 큰타자의 법에 의해 금지됨으로써 비로소, 애초부터 포기된 향유(희열)로서 존재하게 되는 역설적인 것이기 때문이다(Lacan, 1998). 향유가 존재하기 위해선 큰타자(의 금지 명령)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 중의 하나가, 사회구성원 누구보다도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훈육 과정 속에 있던 존재인 중고등학생들을 독자로 삼고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조흔파의 인기소설 『얄개전』16)을 영화화했던 <고교얄개>(1976, 석래명 감독)의 도입부 시퀀스에 등장한다. 그 장면에선 ‘하이틴스타’ 이승현이 연기한 ‘얄개’ 나두수가 수업시간 중에 몰래 자명종시계의 벨을 울리고, 이 소리를 수업종료를 알리는 벨소리로 착각한 선생님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수업을 마치고 나가자 학생들은 환호한다. 이 영화 이후 수많은 얄개 시리즈가 쏟아져 나와 억압적인 교육제도 속에서 허덕이던 학생들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그러나 70년대의 학생청춘영화들과 얄개 시리즈에서도 역시 청소년·소녀들의 일시적 향유는 그들을 국가가 호명하는 ‘총화단결’의 주체들로 준비시키는 장치에 불과했다.17) 못 말리는 개구쟁이지만 엄연한 우등생(!)이기도 한 얄개 역시 아버지 형상(학교 선생님이자 미래의 매형)에 의해 한층 더 ‘성숙’한다. 그래서 2년 뒤 <소리치는 깃발>(1978, 이성민 감독)에서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반항하는 눈물의 청춘을 연기하는 얄개 이승현의 ‘변신’은 그만큼 자연스럽다.

    얄개가 때로 골탕을 먹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인정을 받기 위해 눈물겨운 몸부림을 쳤던 1970년대의 아버지는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큰타자였다. 이 아버지는 그 자신이 1960년대 초두에 무력하거나 부재하는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했던 새로운 근대화의 주체에 다름 아니었지만, 이제 유신체제 하에서 더 새로운 근대적 주체인 자신의 아들딸들의 향유를 억압하고 금지했다. ‘통·블·생’(통키타, 청바지, 생맥주)으로 요약되던 청년문화에서 알 수 있듯이 대학생을 중심으로 1970년대의 젊은 세대들은 이전 세대보다 더 자유와 쾌락을 추구할 줄 아는 주체들이었고, 따라서 향유의 논리에도 상대적으로 더 부합될 수 있는 새로이 부상하는 문화적 요소를 대변하는 존재들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도덕적 훈육국가는 이 젊은이들과 청년문화에 더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대처했다. 이 아버지/큰타자의 억압적 권위와 그 아래서 숨 막혀 하는 1970년대 젊은 주체들의 모습은 하길종 감독의 문제작,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에서 잘 그려지고 있다. 병태의 친구 영철(하재영)의 아버지처럼, 1970년대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큰타자 아버지는 아들 세대와 더 이상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아버지다. 이 영화에서 영철의 아버지의 모습이 1960년대 전반기 박정희의 선글라스를 연상시키는 거울 같은 차창유리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자신의 질문/요구에 대답하지 않는 큰타자와 직면하여,18) 저항하기에는 너무 거세되어 있던 70년대의 청년은 하릴없이, 도피하듯 입영열차에 몸을 싣거나(병태. 영자의 입맞춤은 그에게 한 가닥 위안이 될 것이다), ‘고래를 잡으러’ 동해 바다로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영철).

    6)근대화 프로젝트로의 여성의 이러한 이중적 동원에 대해서는 김은실(2000) 참조. 이 시기 영화에서 재현된 노동하는 여성의 이미지, 그리고 특히 ‘또순이’ 이미지에 대해서는 변재란(2001)을 참조.  7)이를 대표하는 것이 1975년 5월 13일에 선포되어 박정희가 시해되고 유신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 ‘긴급’조치임에도 불구하고 ― 계속 유지된 악명 높은 ‘긴급조치 9호’이다. 그동안 선포된 긴급조치들을 종합·보완한 이 조치는 유신체제의 영구화를 기도하여 체제·헌법·대통령·국가·정부 등에 대한 정치적 논의를 원천적으로 금지함으로써 민주주의가 가진 일체의 유연성을 박탈하는 극단적인 조치였으며, 1979년 12월 7일에 철폐될 때까지 4년여 동안 800명의 구속자를 낳으며 ‘전 국토의 감옥화’, ‘전 국민의 죄수화’라는 유행어를 낳았다(조희연, 2007: 184-185).  8)<오발탄>은 1961년 4월 13일 국제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어두운 현실 묘사에도 불구하고 4·19 이후 새로 발족한 민간 주도의 영화윤리위원회의 검열을 통과했으나, 5·16 이후 군사쿠데타 세력은 서울 시내 극장에 5일 동안 영업정지령을 내리고 <오발탄>을 재검열을 이유로 ‘상영중지’시켰다. 내용이 너무 어둡고 사회의 부정적인 면만 그렸으며 영화에서 노모가 외치는 “가자!”라는 절규가 북한으로 가자는 암시가 아닌가 하고 문제 삼았던 것이다. 그 후 성남극장과 한일극장에서 재개봉하게 될 즈음에 혁명정부로부터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다(1961년 7월 17일). 그렇지만 제7회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 출품하게 된 것을 계기로 1963년 을지극장에서 다시 빛을 볼 수 있었다(김학수, 2002, Ⅰ권: 197-198; 이영일, 2004: 288).  9)박정희 정권 하에서 남한사회는 군사작전 식 경제개발, 공작정치와 사찰을 통한 정치적 억압, 공권력에 의한 도덕적 훈육 등이 서로 결합되고, 여기에 1960년대 말 연이은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 전쟁 직전까지 치달은 남북관계의 악화라는 한반도 긴장이 매개되면서 훈육국가를 넘어 실질적으로 ‘병영국가’가 되었다. 한홍구(2003)는 병영국가의 형성 계기를 베트남전쟁 참전과 연관시켜 살펴보고 있다.  10)게다가 이들은 자신들의 길을 가는 도중에 고급 요정이나 더 비싼 술집, 즉 향유를 약속하는 사치스러운 장소로부터 눈을 돌리기까지 한다. 물론 광고의 대상이 무엇인가(소주)를 고려하면 이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는 광고 속의 이 직장인들이 ― 따라서 이 시기 대중이 ― 향유의 능력이 제한되어 있는, 금지의 명령 아래 있는, 근본적으로 결핍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1)라캉의 이론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세 가지 아버지 형상에 대해선 쥘리앵(Julien, 2000) 참조.  12)그는 컬러TV 방영이 계층 간 위화감을 조장할 것을 두려워했다고들 한다(강준만, 2003 1권: 274).  13)<쌀>은 명백히 조국 근대화와 강한 민족 지도자를 찬양한다. 논밭에 강물을 끌어오기 위해 굴파기 작업을 선도하는 이 영화의 주인공 용이는 박정희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주창규, 2000: 196; 김선아, 2001: 64). 그는 군인이었고, 좌익으로 의심받은 전력이 있는 박정희처럼 ‘빨갱이’로 오인받기도 하며, 마을 사람들에게는 굴이 뚫리는 5년만 참으라고 하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로 축약되는 전형적인 ― 시대를 앞선 ― ‘새마을 운동’으로 볼 수도 있다(주창규, 2000: 196). 또, 영화는 마을을 지배해온 전통 습속을 과학의 이름으로 미신으로 명명하여 타자화하면서 근대화를 정당화하며(변재란, 2001: 101), 마지막에 군사정부의 화약 지원을 받는 설정을 하여 노골적으로 “군사정부야말로 민중의 편에서 문제를 해결해주는 존재로 부각”(변재란, 2001: 102)한다. 또, <쌀>은 민족국가가 국민을 창조하고 동원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용이의 지도 아래 지주의 딸, 빈농, 하인, 심지어 무당까지, 모든 사람들이 굴파기 작업에 자발적으로 협조하게 되며, 군인과 공무원까지 합세한다(김선아, 2001: 64).  14)<쌀>을 만든 신상옥 감독이 설립한 영화사로서 군사정부의 영화사 대기업화 정책에 적극 부응하며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영화산업을 대표했다(안재석, 2001 참조).  15)그러나 도금봉은 여성 노동주체인 <또순이>(1963, 박상호 감독)이기도 했다(변재란, 2001: 106-112).  16)이 소설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던 1954년에 당시 유일한 학생잡지였던 『학원(學園)』에 선보인 후 학생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1970년대에도 당시의 학생잡지들에 연재되기도 하면서 중고등학생 사이에서 많이 읽혔다. <고교얄개>가 나오기 이전 1965년에 소설과 같은 제목의 <얄개전>으로 이미 영화화된 바 있었다(정승문 감독).  17)1970년대 ‘하이틴영화’의 이러한 기능에 대해서는 배경민(2004)을 참조.  18)방금 거론한 장면에서 영철(아들)은 차창유리/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미지)을 향해 말할 수 밖에 없다는 점 역시 의미심장하다.

    Ⅳ. 금지와 향유 사이에서

    1980년대는 강한 아버지의 이마고를 체현하던 최고 권력자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었다. 앞선 1960~70년대에 비해 1980년대에는 아버지의 법이 갖는 권위, 상징적 아버지(symbolic father)의 지위가 많이 훼손되었다. 그러나 이 훼손 과정은 바로 그 개발독재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쿠데타로 집권한 ‘혁명정부’ 초기부터 이미 정치권력의 남용과 부패로 인한 각종 스캔들이 터져 나왔다. 1962년경부터 논란이 일기 시작한 ‘4대 경제의혹 사건’, 즉 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빠찡꼬 사건은 대표적인 사건들이었고 또 그 시작이었다(강준만, 2004, 2권: 152-158; 조희연, 2007: 54-55). 특히 1970년대 벽두에 일어난 정인숙 사건(1970)은 큰타자의 외설스러운 이면, 아버지도 향유하는 주체라는 사실을 대중에게 비스듬히 드러내주었으며, 궁극적인 아버지 형상이던 독재자가 자신의 향유의 장소 ― ‘궁정동 안가’ ― 에서 부하의 손에 살해당함으로써 유신정권이 피날레를 맞았다. 게다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유신정권의 잔존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후배였던 신군부 세력에 의해 부정축재자의 낙인이 찍히고 재산이 환수 당하는 수모까지 겪었던 것이다(즉, 그들이 향유의 주체라는 사실이 크게 공표되었다).

    그런데 80년대 신군부 정권 하에선 큰타자로서의 국가권력의 어두운 이면, 외설스러운 초자아(obscene superego)의 측면이 이전 시대보다 더 공공연한 비밀이 되고 말았다. 최고 권력자와 여배우와 영부인의 삼각관계에 대한 확인할 수 없는 소문, 이전 시대의 그것보다 훨씬 노골적이고 난폭한 소문이 대중의 판타지의 주요한 부분을 형성했고, 예전 같으면 반공 이데올로기를 핑계로 둘러대며 북한 정권을 소재로 삼아서나 유통될 수 있었을 법한 ― 예를 들면 ‘반공실화극화’를 표방한 만화 『김일성의 침실』(박부길 작화) 등과 같은 부류의 ― 권력의 음탕한 쾌락에 대한 외설적인 판타지가 공공연히 대중문화의 장면들을 구성했다. 예를 들어 왕의 성애 장면을 등장시키고 있는 이장호 감독의 <어우동>(1985)과 이 영화가 거둔 성공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19) 더 결정적인 것은, 신군부 세력이 광주 시민의 피를 대가로 집권한 학살원흉이라는, 제5공화국의 국가권력이 가진 원죄였다. 이로써 ‘5공’의 국가권력은, 그것이 여전히 아버지로 형상화될 수 있다면, 자애로운 상상적 아버지이기는 커녕, 법 또는 이름으로서의 상징적 아버지로서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오히려 여자들을 독점하고 아들들을 잡아먹는 폭력적이고 외설적인 실재(계)적 아버지의 형상으로 다가오게 되었다.20)

    따라서 1980년대 한국사회에서는 대통령이 ‘인간백정’으로 불리기도 할 만큼 폭압적인 국가권력 아래서 오히려 법의 금지 명령이 행사하는 힘, 적어도 ‘아버지’의 법이 주체에게 부과하는 금지는 상대적으로 허약한 것이 되고 말았다. 비록 매일같이 9시 시보가 땡하고 울리자마자 텔레비전의 메인 뉴스는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로 시작했지만(이른바 ‘땡전뉴스’), 완벽한 주인 기표로서 기능하기에는 5공의 독재자는 자신의 선배보다 무언가가 부족했다(“기표로서의 남근은 가려져 있을 때에만 자신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라캉[Lacan, 1977: 288]의 말을 상기할 수 있다). 이 부족함은 역설적으로 국가권력이 이제 충만한 향유의 주체처럼 형상화되기 때문이다. 즉, 국가권력은 이전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법의 형상보다는 오히려 폭력적이고 외설적인, 스스로가 즐기는 초자아의 형상에 가까워진 것이다. 전두환은 완벽하진 않아도 항상 화려했다. 그가 아무리 이웃집 아저씨 같은 ‘스포츠 대통령’임을 강조했어도 결코 박정희와 같은 소박함의 이미지를 둘러쓸 수는 없었다. 그와 그의 측근 주위에는 ‘큰손’ 장영자 사건(1982)과 같은 천문학적 액수의 스캔들이 항상 맴돌았던 것이다.

    그 결과 1980년대는 대체로 보아 한국사회가 금지의 명령과 향유에로 열린 문 사이에서 요동하던 시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군부 정권이 언론기본법과 소위 3S(스크린, 스포츠, 섹스) 정책이라는, 채찍과 당근을 동시에 구사했던 것은 이 양극 사이의 요동이 국가 권력의 통치술과 직접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신군부 정권은 언론기관들을 강제로 통폐합하고 ‘보도지침’을 강요하는 동시에 아파트를 한 채씩 안겨주며 기자들을 회유했다. 이렇게 해서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은 국가 권력은 프로야구를 출범시키고 올림픽 게임을 유치했으며, 정치적·사회적 소재에는 엄격한 검열의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낯 뜨거운 성애 장면의 묘사는 묵인함으로써 경향 각지의 스크린이 ‘에로영화’의 축축함으로 끈적거리게 했고, 개발독재 시대 한국식 경제성장 과정에서 굳어진 정경유착과 접대문화의 산물인 향락산업이 번창하는 것을 방임함으로써 향유의 문을 열어젖히고 시민들의 탈정치화를 유도했다.

    이렇게 하여 1980년대 한국사회에서는 이전 개발독재 시대에 억압되었던 욕망이 귀환하고 향유의 이미지와 공간이 번성했다. 박정희 정권에 비해 전두환 정권은 확실히 향유의 통치술을 보다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21) 이 통치술은 ‘자유화 정책’으로 불렸다. 그 중에서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일대 혁명적 변화를 몰고 온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야간통행금지의 해제였을 것이다. 정부는 1945년 군정포고 1호에서부터 시작되어 1981년까지 37년간 지속되었던 야간통행금지를 1982년 1월 5일 12시를 기해 해제했다.22) 야간통행금지 해제는 시민들에게 엄청난 해방감을 안겨주었고, 향락산업의 폭발적 성장을 부추겼으며, 심야극장을 통해 스크린이 벗은 몸뚱어리들로 가득 차게 되는 데에도 일조했다(강준만, 2003, 2권: 83-91).

    “87년 제작된 영화의 30%가 에로성이었다”는 당시 잡지 기사에서도 미루어 알 수 있듯이(김수미, 2001: 277), 에로영화는 1980년대를 통 털어 가장 많이 만들어진 영화 장르였다. 그런데 국가의 검열과 정치적 목적에 따른 영화정책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1970년대 한국영화들이 향락산업의 노동자인 호스티스들의 옷을 벗겼다면, <애마부인>(1982, 정인엽 감독)을 필두로 한 1980년대 에로영화들은 “성적 욕망을 채우지 못한 유부녀의 몸부림”을 키워드로 삼아 “성을 억제하면 비극적이지만, 해방적인 성은 즐겁다”23)는 향유의 메시지를 애써 강변했다. 변두리 소극장의 침침한 스크린뿐만 아니라 도심 한가운데 커다란 극장 간판까지 점령한 그녀들을 위한 면죄부로 내세워지곤 했던 불능의 남편들 역시, 접대 업무를 위해서든 자신의 일그러진 욕망의 배설을 위해서든 유흥가와 사창가를 찾아 술과 여체에 몸을 담갔는데, 이 향유의 공간은 심지어 대학가까지 파고들었다. 하숙촌 바로 옆에는 스트립쇼를 벌이는 나이트클럽과 에로영화를 틀어주는 비디오방들이 들어섰고, “탱크로 광주를 깔아뭉 개며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폭압과 자유화라는 양날의 정책을 썼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우리는 참으로 그로테스크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낮에는 전두환의 폭압정치에 맞서 돌을 던지고 밤에는 전두환의 자유화 정책에 발맞춰 싸구려 에로영화를 보며 킬킬댔던 것이다”24)라는 회상이 증언하듯 ‘파쇼정권’과 투쟁하던 대학생들은 일종의 정신분열증과 같은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1980년대 욕망의 귀환과 향유의 메시지는 국가의 통치술에 의거한 것만은 아니었고,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과 변화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유신 정권의 몰락을 초래한 1970년대 말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 신군부 정권은 시민들의 탈정치화를 부추기는 동시에 전자산업을 구제하기 위해 1980년 12월부터 컬러텔레비전 방송을 개시했다. 컬러TV의 판매는 빠르게 성장해 1981~82년에 이미 200만대를 돌파하고, 1985~86년에는 500만대를 돌파하여 공식적으로 전 가구의 51.4%에 보급되었다. 컬러텔레비전 방송은 먼저 이산가족 상봉의 최대 공신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가장 큰 역할은 소비문화의 첨병 역할이었다. 대통령의 “복장에서부터 화장품 광고에 이르기까지 컬러 TV는 한국 사회에 새로운 ‘색의 혁명’을 일으키면서 본격적인 소비 자본주의 체제로의 편입을 가속화”시켰고, “컬러 TV가 선도한 컬러화 선풍은 모든 분야에서 소비패턴의 고급화와 다양화로” 이어졌던 것이다(강준만, 2003, 1권: 280).

    또한, 신군부 정권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성장주도산업으로 자동차 산업을 선정하고 집중 지원했다. 1970년에 6만 대에 불과하던 자동차 보유대수는 1980년에 50만 대를 돌파하고 1985년 5월에는 100만 대를 넘어설 정도로 급신장했다. 그런데 자동차 산업의 비약적인 성장은 많은 부분 내수시장 활성화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특히 자가용 승용차의 증가가 전체 자동차 증가를 이끌었고 운전면허 소지자도 1980년 186만 명에서 1985년에는 408만 명 이상으로 크게 늘어났다. 이렇게 ‘마이카’와 ‘오너드라이버’ 시대를 향해 치달으며 빠르게 확산된 자동차 문화는 무엇보다 가족 중심의 여가생활이 일반화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중산층 핵가족이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 것을 편리하게 만들었기 때문인데, 자동차와 가족 중심 여가생활의 상관관계는 1983년에 발생한 5공화국 시기 대표적인 대형 금융비리의 주인공인 명성 그룹이 1970년대 말부터 레저타운 콘도 분양으로 큰돈을 벌기 시작해 몇 년 만에 급성장한 신흥기업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주은우, 2008: 282-289).

    이렇게, 세계자본주의의 난맥상이 초래했던 한국경제의 위기 국면을 넘어가면서 1980년대에는 1970년대의 고도성장을 이어받아 ‘중산층’을 중심으로 소비 수준이 높아지고 그에 따라 소비문화가 적지 않게 성장하고 있었다. 여기에 미국의 심각한 대외 무역수지 불균형과 재정적자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1985년 선진 5개국 간에 맺어진 플라자합의에 의해 조성된 저유가, 저금리, 저달러로 비롯된 ‘3저 호황’은 한국 경제의 외채상환부담을 경감시키고 무역수지를 개선시켰으며 10%에 이르는 고도 경제성장을 가능케 해주면서 소비경제의 성장에 강력한 추동력을 제공했다. 이와 같은 경제적 토대가 있었기에 제5공화국 들어 열린 향유의 문은 닫히지 않고 계속 열려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향유의 문 저편은 여전히 어둡고 컴컴했다. 사회전체의 도덕률에선 아직 금지의 명령이 우세했고, 욕망의 발산은 근본적 수준에서는 억압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에로영화의 그 숱한 ‘부인’들은 소극장의 작고 침침한 스크린에서 더 제자리를 찾은 듯했으며, 그녀들의 향유에는 곧잘 궁색한 변명과 핑계가 덧붙었다. 불야성을 형성하던 향락의 공간들은 대낮의 햇빛 아래서는 초라하고 쓸쓸하기 그지없었고, 연인들은 어두운 카페의 칸막이 사이로 숨어들었다. 앞에서 인용한 당시 대학생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 욕망의 충족은 어디까지나 ‘죄의식을 동반한 꺼림칙한 쾌락(guilty pleasure)’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죄의식이 사라진 쾌락을 향유하는 주체, 새로운 소비의 주체가 머지않아 등장하는데, 그들은 3저 호황의 혜택을 누리며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그 중산층 가족 안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19)<어우동>은 4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당시의 흥행성공작이었다. 강소원(2005: 26)이 말하듯, “임금과 어우동이 벌인 야외주연 신의 외설 시비로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이 교체되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검열관의 입장에서 더 큰 문제는 외설보다 정치였다.” 권력과 섹스에 대한 <어우동>의 알레고리는 민주화 이후 <서울무지개>(1989, 김호선 감독), <빨간 여배우>(1989, 신승수 감독)에서 여전히 에두르긴 했지만 훨씬 직설적인 화법으로 변한다.  20)이 세 가지 아버지에 대해서는 쥘리앵(Julien, 2000)을, 실재(계)적 아버지와 그것의 나타남에 대해서는 지젝(Žižek, 1992: 124-128, 149 ff)을 참조.  21)무엇보다 한국 경제의 규모가 그만큼 커졌기 때문일 것이고, 따라서 이런 통치술이 가능하게 해준 경제적 토대는 결국 박정희 정권에 의해 마련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신군부 정권의 언론정책과 문화정책을 지휘한 허문도가 나치 정권의 선전상 괴벨스(Josef Goebbels)를 자신의 모델로 삼았던 것으로 알려진 것은 이와 관련하여 의미심장하다. 지젝(Žižek, 2001)에 따르면 나치즘의 권력은 외설적 초자아의 권력이었다는 점에서 스탈린 정권의 금욕적인 전체주의 권력과 다르다.  22)하지(John Reed Hodge) 중장에 의해 1945년 9월 치안유지를 명목으로 서울과 인천에 내려졌던 ‘야간통행금지’는 한국전쟁 이후 대상지역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1954년 4월 1일부터 ‘경범죄 처벌법’에 규정됨으로써 법령에 의해 제도화되었다.  23)이 두 표현은 김형석, “1980년대 에로사극, 계급적 억압 넘어선 성적 유희”, ≪스크린≫ 2000년 1월호, 203쪽 참조. 여기서는 문학산(2004: 189)에서 재인용.  24)심산, “<애마부인>의 아버지”, ≪씨네 21≫, 2001년 4월 10일, 102쪽. 여기서는 김학수(2002, Ⅱ권: 16)에서 재인용.

    Ⅴ. 향유의 시대로?

    6·29 선언이 왜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모호한 부분이 많지만, 하여튼 미국은 7년 전과는 달리 제2의 ‘광주사태’는 용인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5공화국 정권에 보냈고 1987년 6월의 시민항쟁은 권위주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국가로부터 민주화 조치를 이끌어냈으며, ‘호헌철폐’를 관철시킨 국민들은 대통령을, 즉 라캉의 용어를 빌리자면 대한민국이라는 상징적 질서를 지탱하는 주인 기표를 자신의 손으로 선출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국민들의 열망을 노회한 정치인들이 배신한 덕에 시민항쟁의 열매는 그해 말 5공 정권의 후계자가 차지했지만, 그럼에도 국가권력이 강압적으로 부과하던 금지의 법은 힘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무엇보다 언론의 자유, 그리고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었다. ‘언론악법’, 즉 5공 정권의 핵심적인 언론통제 기제였던 언론기본법이 같은 해 11월에 폐지되었고, 제6공화국이 수립된 뒤 1989년부터는 공연물에 대한 사전심의가 사라졌으며, ‘문민정부’ 후반기인 1996년에는 대중가요 사전심의제가 철폐되고 헌법재판소는 영화의 사전검열에 대해 위헌 판정을 내렸다. 이로써 1990년대 중반을 경과할 때쯤이면, 여전히 한계가 존재하고 논란이 끊이지 않긴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려는 국가의 시도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길 정도로 국가의 검열 기제는 실질적으로 많이 위축되었다. 이는 6월 항쟁 자체가 “오랜 권위주의 시대 동안 억눌려오고 주눅들어온 대중의 욕구와 욕망이 표면화되고 사회적으로 분출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며, 1980년대 말이래 한국사회가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문화 수용자의 등장이 문화시장 전반에서 중요한 현상으로 나타났음”을 목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김창남, 1997: 418-419). 이렇듯, 근본적으로 형식적 수준에서 진행된 것일지라도 민주화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정치적·사회문화적 분위기를 형성했다. 억압과 금지로 특징지어지는 무겁고 폐쇄적인 엄숙주의적 분위기는 점점 역사의 뒤 안길로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대중은 이제 욕구와 욕망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충족시켜줄 대상을 능동적으로 찾아 나서기 시작했는데, 이는 정치적 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경제적 토대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 개시된 풍요의 시대와 소비경제의 성장은 1990년대 들어서도 계속되어 이제는 “갖가지 다양한 형태의 소비주의가 한국의 일상적 현실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Kim, 2000: 61). ‘3저 호황’은 올림픽 특수, 6공 정부가 ‘국민주’ 등을 통해 조장한 증권투기 붐과 주택 200만 호 건설 정책 및 신도시 건설 추진에 따른 부동산투기, 그리고 소득수준의 상승과 자동차 문화의 확산 등과 결합된 관광레저산업의 성장 등이 맞물려 진행된 ‘단군 이래 최대 호황’으로 이어졌고, 이는 경제력의 재벌 집중을 가속화시켰으며 다시 재벌들은 한국 경제의 버블화를 선도했다. 이 시기 소비경제와 소비문화의 급속한 성장은 무엇보다 광고산업의 성장이 웅변적으로 대변해준다.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에는 광고비가 1조원을 돌파하면서 광고시장은 전년 대비 31.5%라는 경이적인 성장률을 기록했고, 이듬해에는 광고비가 GNP 대비 1%를 넘어섰으며, 1990년대 중반이 되면 한국은 세계 10대 광고비 보유국이 되었다(신인섭·서범석, 1998: 412, 452-453; 2001: 95, 128).

    소비경제의 급성장은 중산층의 소득 증가와 물질적 풍요에 많이 힘입은 것이었다. 1980년대 후반 증권투기, 부동산투기, 그리고 ‘마이카’ 열풍이 중산층을 사로잡은 ‘3대 붐’을 형성했다(강준만, 2003, 3권: 200). 이 시기에 자동차는 “중산층 문화에의 편입의 증표”(박명규·김영범, 1997: 213)로서 개인의 성공과 지위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나라의 경제발전을 상징하는 ‘국가적인’ 소비 품목이 되었다(Nelson, 2000: 96-98). 자동차 대수는 1988년 말 200만 대를 돌파하고 1997년에는 1,000만대를 넘어섰다. 운전면허 소지자는 1990년이면 인구 5명중 1명꼴이 되었다(854만 4,000명). 생활수준이 높아진 중산층 핵가족에 기대 관광·여행 산업 또한 빠르게 성장했는데, 정부는 1989년 해외여행 전면자유화 조치를 단행해 이를 뒷받침했다. 내국인 해외 출국자는 서울올림픽의 해 1988년에 전년 대비 42%나 증가하더니, 해외여행 자유화의 해에는 무려 67% 이상이나 폭발적으로 늘어나 100만 명을 훌쩍 넘어버렸다. 이후 해외여행객은 매년 급증해 1995년부터는 출국자수가 입국자수를 앞질렀고, 외환 위기로 위축된 것도 잠시, 1999년부터는 매년 100만 명꼴로 증가하게 될 참이었다(주은우, 2008: 285-291).

    이렇게 도래한 소비문화는 ‘영상매체의 확산과 결합된’ 소비문화였다(주은우, 2004a: 102). 이미 1984년 다섯 번째로 개정된 새 영화법은 영화사 등록제 전환과 제작과 수입 분리를 통해 영화산업을 자유화시켰고, 1986년 제6차 영화법 개정에는 미국 정부와 할리우드의 영화시장 개방 요구가 반영되어 1988년부터 할리우드 직배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한국 관객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수의 영화를 극장에서 만나게 되었을 뿐 아니라, 1992년부터는 대기업들이 영화산업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부의 신경제5개년계획은 영상산업에 대해 제조업에 준하는 대우를 하게 하여 금융자본이 투자할 여건을 마련해주었다(조준형, 2005). 게다가 1991년 12월 SBS TV가 개국했고, 1990년대 중반에는 케이블 TV 방송(1995년)과 위성방송(1996년)이 개시되어 시청자들은 다매체 다채널 시대에 살게 되었다. 비디오 시장 역시 올림픽 특수를 계기로 비약적으로 팽창하여 1992년에는 전국 가구의 절반 이상이 VTR을 소유하고 시장 규모는 연간 8,500억 원에 달하게 되었으며, 1991년 기준으로 볼 때 전국 2만 5,000여 개에 달하는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을 통해 한국인들은 1년에 7.4편의 비디오 영화를 보았다. 또, 정부는 1995년에는 정보통신부를 신설하고 이듬해 상업 인터넷 서비스를 개시하는 등, 국가적 차원에서 정보통신 기술개발과 산업육성에 박차를 가했다(주은우, 2008: 304-319; 최창봉·강현두, 2001: 316-326).

    이러한 소비문화와 영상문화의 환경이 소위 말하는 ‘문화의 시대’의 실체적 내용을 이룬다. 즉, 1990년대를 흔히 ‘문화의 시대’라고 불렀을 때, 한편으로 그것은 ‘시장논리의 지배를 받는 소비문화’의 시대요, 따라서 ‘소비의 시대’를 뜻했고(강준만, 2006, 1권: 11), 다른 한편으론 정부가 앞장서서 호들갑을 떨었던 ‘문화의 시대’로서 그것은 실질적으로 ‘대중문화의 시대’를 뜻했다(주은우, 2004b: 8-14). 김영삼 대통령과 문민정부의 관료들은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가 만든 할리우드 영화 “<쥬라기 공원>(Jurrasic Park, 1993) 한 편의 흥행수익이 우리나라가 자동차 150만대를 수출해서 벌어들인 것과 같다”는 데 깜짝 놀랐으며(아니면 새삼스럽게 깜짝 놀란 척했을 수도 있다), 이 ‘진실’은 국가적 화두가 되었다. 정부는 ‘문화산업’, ‘고부가가치산업’, ‘국가경쟁력’의 관점에서 문화에 접근했으며, ‘순수예술’은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았고 ‘문화의 시대’에 역설적으로 인문교육과 교양교육은 축소되고 홀대받았으며 문학은 절박한 위기감에 시달렸다. 대중문화를 대하는 태도 역시 바뀌어서, 대중문화의 소비자들은 더 이상 ‘고급문화’ 앞에서 ‘작아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연구자들조차 “스스로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즐기고 있음을 내세웠다”(원용진, 1996: 21).

    이 글의 관점에서 볼 때, 이와 같은 1990년대 문화적 환경과 분위기 속에서 향유의 주체라 할 만한 존재들이 한국사회에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1990년대 초반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신세대’가 바로 그들이었다. 1990년대 신세대는 소비문화와 영상문화의 주인공이었다(주은우, 1994). 1980년대에 축적된 물질적 여유와 소비경제의 성장 속에서 아동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1990년대의 신세대 는 1960년대 초부터 가동된 산업화 과정의 과실을 본격적으로 수혜받기 시작한 첫 세대로서 ‘풍부함에 대한 자연권’(Baudrillard, 1991: 24)을 타고난 세대였으며, 또한 “어린 시절부터 컬러TV와 컴퓨터, 비디오게임 등 새로운 영상문화를 접하며 성장한” “최초의 영상세대”라 일컬어졌다(김창남, 2003: 259). 중산층 부모로부터 풍족한 용돈을 받는 이들 신세대는 문화시장의 유력한 구매자 집단이기도 했다.25) 이들 90년대의 ‘신세대’가 누리고 보여준 문화는 전형적으로 소비적 범주들에 의해 규정되는 문화였다. 물질적 재화가 아니라 기호와 이미지로서의 상품을 구입하고 소비하며, 그런 기호와 이미지를 매개로 개성과 자유를 표현하는 패션과 스타일의 미학을 추구하는 경향, 전면을 유리로 장식한 커피 전문점이나 서구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밝은 인테리어의 카페, 또는 젊음의 배타성과 육체성을 강조하는 록카페 등 새롭게 조성되던 소비공간들이 신세대가 누리는 새로운 문화현상의 특징을 대변했다. 그리고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이 나타나 전혀 생소한 노래와 춤과 패션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세계 전체를 단번에 뒤바꾼 ‘서태지와 아이들’은 90년대 신세대의 영웅이자 신세대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신세대의 감성적 열정과 파워를 적극 지지하던 이들에게 이 3인조 그룹은 동시대 가장 위대한 시인, 역사가, 철학자, 과학자, 아방가르드, 그리고 혁명가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미메시스, 1993: 14-15, 38).

    한 마디로 신세대는 그 이전 어느 세대와도 구별되는 소비의 주체였다. ‘X세대’로 불리기도 했던 1990년대의 신세대는 처음엔 광고회사들이 마케팅 대상으로서 규정하고 호명한 집단이었다. 그러나 신세대의 대변자로 자처했던 미메시스 집단 역시 신세대의 존재 조건을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먹고살기 위한 동물적인 생존의 시대를 넘어섰다”는 데서 찾으며, 자유롭기를 갈구하고 “물질적 풍요 속에서 찬란한 삶의 문화를 꽃피우”기 위해 구세대의 문화와 가치관을 극복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부모의 세대가 어렵게 살아왔다고 해서 그렇게 살아온 자신들의 삶을 이해해달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그 삶을 우리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고 선언했다(미메시스, 1993: 131-132). 그러므로 1990년대의 ‘신세대’, 혹은 ‘신세대’란 기표로 상징되는 문화는 금지 명령으로서의 아버지의 법을 충실히 내면화한 주체와 그 문화라기 보다는 향유의 주체와 문화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그 주체와 문화에 억압은 과거에 비해 자리할 여지가 많이 줄어들었다. 극복의 대상에 불과한 ‘구세대’의 문화와 가치관이 강요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간의 가족계획에 의한 출산력 저하와 산업화에 따른 핵가족화로 인해 사실 ‘신세대’의 부모들도 적은 수의 자식들에게 관대했기 때문이다.

    다른 요인도 하나 덧붙여볼 수 있다. 어느 면에서는 1980년대의 대학생들과 사회 운동세력들 역시 ― 맑스주의를 포함해 ― 국가가 금지하는 이념과 지식을 학습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에서의 향유의 주체였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 역시 1970년대를 통해 성장하고 있던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으며 자라난 최초의 세대라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김동춘(2000: 124)이 지적하듯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절대적 공동체’(최정운, 1999)의 경험에 기원을 둔 일종의 도덕 공동체를 형성하고 이 공동체에 대한 헌신성이라는 도덕률에 의해 여전히 규제되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적 차원에서의 정치적 민주화와 지구적 차원에서의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더불어 이념의 시대가 종말을 고한 1990년대의 ‘신세대’에게서는 그러한 도덕률이나 지도적인 이념은 존재하지 않거나 발견되기 어려웠다.

    ‘신세대’로 대변되는 1990년대의 새로운 문화가 근본적으로 향유의 문화라는 것은, ‘신세대’나 ‘X세대’보다 시간적으로 약간 더 앞서서, 또 이들보다 더 상층에 위치한 자신들의 계급적 위치를 충분히 과시하면서 1990년대 문화의 근본 속성, 즉 즐기고 과시하는 데 유보를 두지 않는 소비주의적 속성을 더 극단적인 형태로 실현하고 누렸던 ‘오렌지족’과 압구정동이라는 그들의 고유한 공간이 가장 명확한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1990년대 전반기 압구정동을 일컬었던 ‘욕망의 해방구’라는 규정은 이들의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이 아버지의 법, 향유에 대한 금지명령을 벗어나 있음을 함축하고 있다. 오렌지족은 세련되고 고급스러워 보이면서도 튀는 의상, 값비싼 외제차들로 치장함으로써 사회적 ‘구별’(Bourdieu, 1995), 차이에 의한 개성의 표현(Baudrillard, 1991)이 이제 한국에서도 현대적 소비의 논리가 되었음을 몸으로 보여주었고, 자신들의 쾌락주의적 놀이문화를 통해 차이와 구별의 과시가 곧 향유의 과시임을 알려주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오렌지족의 고유한 공간이었던 욕망의 해방구 압구정동에서 특징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던 카페 공간이 이 점을 잘 보여주었다. 이전 시대를 특징짓던 두터운 콘크리트 벽 대신 커다란 통유리 창이 설치되어 있어 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은 이 통유리 창을 통해 밝고 화려하게 장식된 내부 공간과 거기서 뭔가를 즐기고 있는 이들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이 소비공간은 자기중심적이고 경우에 따라선 자기도취적이기까지 한 나르시시즘의 공간인 동시에 자신이 즐기고 있는 주체, 향유하고 있는 주체임을 (큰)타자/아버지/공중에게 과시하는 향유의 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에도 향유는 여전히 금지의 법 아래에 있었다고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비록 ‘낑깡족’ 같은 추종자들이 있긴 했지만 오렌지족에게는 사회적 지탄과 비아냥이 쏟아졌고,26) 기성세대는 90년대 ‘신세대’를 굶기를 밥 먹듯이 했던 어려운 시절을 모르는 철부지 혹은 자신의 잇속만 생각하는 계산 빠른 이기주의자들로 간주하기 일쑤였다. 기성세대와 사회의 이러한 곱지 않은 시선의 기저에는 근본적으로 ‘신세대’가 누리는 향유에 대한 반감 혹은 일종의 적대적 감정을 깔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의 향유는 종종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 되며, 그리하여 그것을 대하는 결핍의 주체 측으로부터 공격적 반응을 유발하기도 하기 때문이다.27) 그러나 역사적으로 가능했던 최초의 향유의 주체에 대한 한국사회 전체 차원에서의 그 어떤 의미론적·행위론적 반응도 구체화되기 전에, 따라서 그 어떤 문화적·사회적 관계도 형성되기 전에, 90년대 ‘신세대’의 향유에는 실재(계)적 차원의 구속이 가해졌다. “이 세대는 우리나라의 다양성 1세대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지만 불행히도 이들이 사회에 진출하고자 할 때 한국경제의 영광의 30년이 마감되면서 IMF 경제위기가 발생”(우석훈·박권일, 2007: 180)해버렸기 때문이다.

    25)이런 점에서 1990년대 전반기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신세대’란 경험적 차원에서 계급, 젠더, 학력, 지역 등의 변수에 따라 관찰될 수 있는 젊은 세대의 다양성과 이질성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는 범주이거나 그런 방식으로 논의된 경향이 없지 않다. 이에 대한 비판적 관점으로는 박재흥(1995) 참조.  26)사실 낑깡족 자체도 모방자들로서 그 효과를 겨냥했든 그렇지 않았든 자신들의 행태와 스타일을 통해 자신들이 모방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오렌지족을 패러디하는 효과를 낳았다. ‘낑깡족’이라는 이름 자체도 일차적으로는 낑깡족을 조소하는 효과를 낳지만 모방의 대상인 오렌지족을 패러디하는 효과를 낳는다. 아무튼 ‘오렌지족’과 ‘낑깡족’이라는 이름은 ― 그리고 1990년대 ‘신세대’라는 규정 역시 ― 모두 다른 사람들, 즉 공중, 다시 말해 라캉적 의미에서 (큰)타자에 의해 부여된 이름이고, 보다 기존의 사회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낙인(label)이란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27)향유하는 ― 엄격히 말하면 향유하고 있다(즐기고 있다)고 믿어지는 ― 타자에 대한 주체의 이러한 질투와 적대적 감정, 그리고 공격적 반응은 자신의 향유를 도둑맞았다는 믿음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 ‘향유의 절도’(에 대한 믿음)가 지닌 역설은 주체가 향유를 소유한 적이 결코 없었다, 다시 말해 주체는 결코 한 번도 진정으로 향유해본(즐겨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향유의 절도는 바로 이 외상적인 실재계적 진실을 ― 그럼으로써 주체 자신이 결핍의 존재라는 근본적인 실재계적 진실을 ― 가리고 부인하는 구실 역할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지젝(Žižek, 1991, 1993, 2001)을 참조.

    Ⅵ. 향유를 명령하는 사회와?

    대다수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삶이 정말로 세계화, 즉 지구화의 물결 속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음을 피부로 절감한 것은 1997년 말에 발생한 외환위기와 IMF 구제금융을 통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세계화’를 제창했던 대통령의 임기 말에 터진 외환위기 덕에 한국인들의 삶은 무척이나 폭력적인 방식으로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에 편입되었다.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IMF가 요구한, 워싱턴 컨센서스(1990)에 입각한 구조조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지난 몇 십년간의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 과정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대량의 정리해고와 실직으로 경험되었다.28)

    IMF가 요구한 긴축재정과 국가의 역할 축소, 강도 높은 구조조정과 고용 유연화, 자본시장 개방을 비롯한 자본자유화와 무역자유화 등 신자유주의 정책은 이미 150년 전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에서 서술했듯이 고삐 풀린 자본주의에 의한 온갖 사회관계의 해체를 한국사회에서 현실화시켰다. 위기 극복의 중책을 맡은 ‘준비된 대통령’ 당선자는 국민들에게 ‘고통분담’을 호소하며, ‘한국호’라는 배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배에 타고 있는 이들 중 20%의 사람들의 희생을 감수할 용의가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발화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러한 발언은 ― 라캉 식 용어를 빌리자면 ― 자본에 의한 사회의 해체라는 ‘실재(계)적 진실’을 드러내는 말이었다.29) 이로써 큰타자와 그 법에 대한 신뢰는 심각하게 손상된 셈이었다. 그리고 이제 국가가 규제할 수 없는, 국가의 규제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그 철폐를 요구하는 자본/초자아가 발하는 향유의 명령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IMF 경제위기를 고비로 향유가 명령되기 시작하여, 신자유주의적으로 ‘세계화’된 2000년대 한국 사회에서는 향유에의 명령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국민의 정부’에 의해 20%의 국민을 희생시키는 것도 불사하는 필사적인 구조조정과 대량 해고의 고통을 감내하는 얄궂은 운명을 맞으면서, 전면적이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실현되는 신자유주의화의 급류 속에 휩쓸려 들어갔고, 삶의 모든 영역과 세계의 모든 의미가 급진적으로 바뀌고 알고 있던 모든 기준이 와해되는 문자 그대로의 불확실성의 세상에서 살게 되었다.

    외환위기와 위기 극복을 위한 강도 높은 구조조정 과정은 ‘6·25 이후 최대 국난’으로 불리면서 아이들 돌 반지까지 팔아 빚을 갚자는 금모으기 운동까지 벌어질 정도로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지만, 놀랍게도 소비는 곧 되살아났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 11월 외환위기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선언했고, 12월에 방한한 IMF 총재 캉드쉬(Michel Camdessus)도 한국이 IMF를 졸업했다고 화답했다. 바로 이 1999년부터 다시 소비주의 물결이 한국 사회를 휩쓸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오늘날 대한민국은 소비의 천국이다”(윤혜준, 1999: 189)라는 선언이 나올 정도였다. 이 해 상반기에 벌써 고소득층의 소비 붐이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하고 경제를 다시 거품구조로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는 비판까지 등장할 지경이었다. 실제로, 서민 소비자들이 할인점으로 몰리고 있을 때 서울 강남 지역 백화점들의 ‘명품관’은 꾸준한 매출 신장세를 기록했다.30) 외환위기 발발 직후 크게 줄었던 해외여행객은 엄청나게 높아진 환율에도 불구하고 다시 크게 늘어, 벌써 1999년에만도 국내인 출국자 수는 전년 대비 40% 이상, 관광 지출액은 50% 이상 증가했다.31) 대체로 수요를 빠르게 회복한 것은 이와 같이 해외여행, 사치성 수입 소비재, 고급 대형아파트, 위스키와 외국산 담배 등 고가품이 먼저였다.32) 이렇듯 이 시기 소비의 회복과 증가는 고소득층이 주도했음이 분명하며, 이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낳는 ‘20대80 사회’의 경향(Martin and Schumann, 1997: 1장)과 일치하는 것으로,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이 진행되기 시작했거나 이미 관철되던 양극화 경향이 IMF 사태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완전히 명확해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값비싼 소비재의 구입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1990년대부터 뚜렷하게 관찰할 수 있었던33) 구별을 위한 소비, 기호의 소비라는 소비문화적 경향이 더욱 강화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34)

    구별을 위한 이러한 과시적 소비는 곧 자신이 누리고 있거나 누릴 수 있는 향유를 타자들에게 과시하는 소비다. 더구나 이제는 일부 계층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향유를 과시하는 소비를 하게 되었거나 그런 소비를 하도록 부추겨진다. 어떤 논평자가 말했듯, “오늘날 대한민국에는 소비의 천국을 믿는 사람들이 득실거린다. 생산자로서, 시민으로서, 인간으로서 대한민국 사람들이 결여한 모든 것들을 대한민국 사람들의 소비가 메워준다”(윤혜준, 1999: 189). 이제 모든 사람들이 향유를 유혹받고 명령받기 때문이다. IMF 경제위기 이전과 이후의 소비문화의 차이 중 하나가 이 점일 것이다. 1990년대 초중반에는 소비경제가 성장하고 소비문화가 확산되더라도 여전히 절제가 미덕으로서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렌지족은 지탄받았고 신세대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과소비는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었고, 한국 경제가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뜨린 것 아니냐는 염려가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IMF 경제위기 이후에는 향유가 누구에게나 명령되고 있다. 향유는 권유되고 사회적으로 상찬된다. 따라서 이제 개인들은 거리낌 없이 자신들의 실현된(것처럼 보이는), 혹은 가능한 향유를 과시한다.

    여기서 다시 텔레비전 광고를 참조할 수 있는데, IMF 경제위기 이후 전면화되고 보편화된 향유의 명령을 간명하게 전해준 것으로 어느 신용카드 회사의 텔레비전 광고를 들 수 있다. IMF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사명을 띤 김대중 정부는 경제회복을 위해 내수를 진작시키고자 신용카드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카드 발급을 쉽게 해주었다(카드사들의 카드 남발을 묵인해 주는 듯한 경향까지 보였다). 1999년 6월 말 시점에선 국내 발급된 신용카드가 4,369만여 장에 달했고 시장 규모는 연간 70조 원대에 이르렀으며, 경제위기로 대부분의 금융회사들이 엄청난 적자와 살인적인 구조조정에 시달리던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신용카드사들은 엄청난 흑자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와 비례해 신용카드가 적지 않은 원인을 제공한 개인 신용불량자는 같은 시기 231만 명에 이르고 있었다(강준만, 2006, 3권: 327-329). 바우만이 말하듯, 신용카드는 미래를 소비할 수 있게 해준다. 이 미래의 소비에 신용으로 사는 삶의 감춰진 매력이 있으며, 미래가 어둡고 흉흉한 것으로 여겨질수록 지금 써버리는 것이 좋다(Bauman, 2009: 22). 즉, 신용카드는 미래가 불확실하더라도, 미래가 불확실할수록 그 소지자로 하여금 향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신용카드와 향유의 실현가능성(에 대한 약속) 간의 이런 깊은 관계를 염두에 두면, 신용카드야말로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가장 대표적인 향유의 도구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신용카드 회사의 광고는 바로 그 힘든 시기, 미래가 불확실한 시기에 노동윤리와 결별하고 소비를 즐기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광고 속의 남녀는 멋진 오픈카를 타고 바람을 가르며 여행을 떠나고 있다. 이 시기에 신용카드 시장에 신규 진출한 현대카드가 텔레비전 전파에 실어 보낸 이 광고의 카피 문구는 개발연대 근대화의 노동 주체였던 한국인들에게 이제 향유의 주체로 변신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열심히 일만 했으니 이제는 즐거운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영상은 신용카드를 사용해 미래를 끌어다 쓰는 소비가 실현해줄 것으로 약속하는 향유의 주체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 이미지에 시청자/소비자들이 자신을 투영할 것을 유혹한다. 이런 식으로 이 광고는 말(카피)과 이미지를 통해, 청각과 시각을 통해, 그러므로 명실 공히 초자아의 위치에서 광고를 접하는 주체들에게 향유를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35) 2000년대 한국 사회에서 주체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기치 아래 더 이상 과거처럼 국가와 공동체를 위해 자기 개인의 욕망을 포기하고 향유를 희생할 것을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자신의 인생을 즐기고 자신의 향유를 추구할 것을 명령받는다. 시스템을 위반하고 넘어서는 과잉을 생산함으로써 시스템 자체가 재생산되고 법의 이면으로서 외설적 초자아가 발하는 향유의 명령이 주체를 지배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한’ 자본주의의 논리가 적나라하게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자본주의가 진실로 고도화되었다고 할 만하다.

    모든 것을 시장, 엄밀하게는 자본의 논리와 필요에 종속시키는 신자유주의화에 걸맞게 한국의 국가(state) 역시 중립적인 공적 권위기구로서의 역할보다는 경제적 기능과 경영 마인드로써 자신을 재정립하기 시작했다. 그 연장선에서 ‘상상된 정치적 공동체’라는 국가(nation)의 가장 기본적인 본성마저 왜곡되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럴수록 상징적 큰타자로서의 ‘국가(nation/state)’와 그 법의 권위는 위축되었다. 아주 피상적인 차원에서만 꼽아보더라도, IMF 사태를 전후하여 한국의 대통령들은 스스로 세일즈맨을 자처하고 외국 정상들과 만나 거래선을 뚫기 바빠졌고, 외교부는 외교‘통상’부가, 교육부는 교육‘인적자원’부가 되었다. 은행과 기업들을 외국 자본에 팔아넘기고 금융시장을 개방하면서 급기야는 국가 공동체, 나라 자체가 상품으로 취급되고 브랜드까지 부여받았다(“Buy Korea!”).36) ‘국가 브랜드’는 ‘브랜드 파워’를 강조하니 당연히 ‘국가 경쟁력’이 강조되고, ‘기업 경쟁력’ 담론을 차용한 이 국가 경쟁력 담론은 과거의 지배 이데올로기 반공 담론이나 안보 담론을 압도한다. 이 또한 ‘국가’가 그 의미의 두 수준 모두에서 얼마나 자신의 정치적이고 공적인 성격을 상실하고 사적 기업체를 모방해왔는가를 보여주는, 따로 해석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명백한 징후일 것이다.

    경쟁력 담론은 모든 수준에 적용되는 새로운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사람들은 남보다 더 나은 경쟁력을 갖추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상의 협박이 지배하는 무한경쟁의 세계로 내몰렸다. 이 이데올로기의 내면화는 끊임없이 ‘자기계발하는 주체’(서동진, 2009)를 구성하는 새로운 주체성의 양식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경쟁력은 성과로 입증해야 한다. 따라서 언제부턴가 ‘수행성’이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하고 경영담론이 모든 영역에 일상화되면서 성과주의를 내면화한 주체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세우고 착취하면서 영혼을 소진시켜나가게 되었다(한병철, 2012).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내면화에는 항상화된 구조조정과 인원감축이 문제제기의 여지조차 허용치 않는 객관적인 토대가 있었다. 실직자도, 일상화된 해고의 위협에 시달리는 직장인도, 늘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학습해 스스로를 계발할 것을 기업과 국가로부터 권고 받았고(‘생산적 복지’론과 ‘자기책임’ 담론), 만성화된 구조적 청년실업은 대학생을 비롯해 젊은이들이 기본적으로 소모품을 함의하는 ‘(인적)자원’의 육성을 추구하는 억압적 교육체계 속에서 스스로도 회의적인 ‘스펙 쌓기’에만 절망적으로 몰두하게 만드는 효과적인 훈육 기제로 기능했다. 이렇게 부단한 자기계발을 강요하는 2000년대 이래 무한경쟁의 한국사회는 이에 정확히 상응하는 문화상품을 생산했다. 대표적 ‘한류’상품이었던 TV 드라마 <대장금>(2003-2004)은 사극임에도 현대의 자기계발하는 주체에 비견할 만한 히로인을 형상화했고(Joo, 2011: 22-23), 수많은 ‘서바이벌 오디션’ 류의 프로그램은 자기계발 담론과 성과주의 가치와 무한 생존경쟁의 현실이 결합된 정글 혹은 전쟁터가 된 한국사회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경쟁력 담론의 지배와 성과주의의 내면화, 부단한 자기계발과 자기갱신의 강요 등은 한편으로 푸코가 말하는 규율과 훈육, 통치성의 권력이 작동하고 있음을 뜻한다(서동진, 2009; 한병철, 2012).37) 그런데 2000년대 신자유주의 한국사회에서 이 규율과 훈육의 체계는 또한 향유의 체계이기도 했다. 규율과 향유는 결코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바, 라캉에게 있어 초자아는 향유를 ‘강제’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Lacan, 1998: 3). 결국 경쟁력 제고에 기여하는 지식 ― 이라기보다는 실제로는 정보 ― 과 노하우를 개발하는 사람을 일컫는 ‘신지식인’ 운동이 한국 자본주의의 변화에 조응하는 새로운 주체성 형성의 담론으로서 ‘자기’계발 담론을 본격적으로 예상하고 그 담론 공간을 열어놓았다면(서동진, 2009), <생활의 달인>은 가히 이 신지식인 운동과 담론의 텔레비전 판이라 할 만하다. 지금도 이 장수 프로그램은 수년간 길게는 수십 년간 종사해온 자신의 직업에서 거의 도사가 된 평범한 소시민들의 곡예에 가까운 묘기/노동을 보여주는데, 중요한 것은 이런 메시지일 것이다. 이제 노동은 단순히 근면하게 수행되어야 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자율적으로, 즉 주체적으로 관리·조정할 줄 알아야 하며 무엇보다 즐기면서 수행되는 것이어야 한다. ‘달인’ 본인들이야 어떻든 텔레비전은 그렇게 강변한다. 물론 결과는 자칫 그와 정반대인 것처럼 보이는 것, 푸코의 규율권력론을 연상시키며 테일러리즘의 시간-동작연구가 스펙터클화된 것이라 할 수 있는, 현란하지만 기계화된 신체 움직임이다. 규율의 스펙터클을 공연하는 <생활의 달인>에게, 연장선상에서 스스로를 착취해야 하는 신자유주의 시대 주체에게 명령되는 것이 향유라는 사실은 <개그콘서트>의 또 다른 ‘달인’이 겪는 ‘고통 속의 쾌락’ ― 정확히 라캉의 희열(향유)에 대한 정의 방식의 하나 ― 에서 가시적 형식을 얻었다. 그리고 힘들지 않느냐, 맛이 이상하지 않느냐 하는 MC의 질문에 달인(개그맨 김병만)은 대답하곤 했다. “해보셨어요? 해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향유는 상징계 너머에 있는 것, 상징화될 수 없는 것이다.

    향유의 명령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지배적 문화논리를 형성한다는 견지에서 보자면, 2000년대 한국 텔레비전을 대표하는 장르는 토크쇼가 아닐까 싶다(단순히 양적으로도 대세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 과거 자니윤이나 주병진 등이 시도했던 미국식 토크쇼나 아침 생방송 쇼들과는 달리 저녁이나 심야시간대 토크쇼들은 MC와 게스트가 여러 명일 경우가 많아졌다. 이 단체 출연진들은 더 이상 (큰)타자/시청자가 무엇을 원할 것인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인다. 그들은 자기들만 알 수 있는, 자기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적인 일들을 공적인 매체를 통해 떠벌리고 자기들끼리 웃고 자지러진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큰)타자 앞에 선 히스테리적 주체가 아니다. 그들은 충분히 즐기고 있는 향유의 주체들이다. 또 사적인 것을 바로 드러냄으로써 상징적 (큰)타자의 부재 혹은 약화를 징후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도 향유의 주체들이다. 토크쇼와 강한 친연관계를 갖고 있는 ‘예능프로’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연예인들의 경우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며, 이런 점에서 토크쇼와 예능프로는 이 글의 도입부에서 논한 맛자랑 프로그램을 생각나게 한다. 현재 한국 텔레비전의 스크린은 수다를 통해, 게임을 통해, 입맛을 통해 자신들의 향유를 과시하는 주체들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즐기고 있으며 자신의 이 향유를 과시하는 주체는 이를 보는 다른 주체들에게 선망과 질투를 유발하며, 이는 다시 욕망을 자극·창출하고 향유를 명령하는 좋은 기제가 될 것이다. 다시 텔레비전 광고를 들여다보면, 2008년 말에 등장한 대한항공의 광고는 타자가 누리는 향유에 대한 시청자의 선망과 질투와 경쟁심을 자극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미국, 어디까지 가봤니?” 2005년 해외여행객 1,000만 명 시대에 도달한 이제, 미국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여행했고 너무나 많이 알려져 통상적인 관광 프로그램으로는 신규 시장 창출의 한계가 뚜렷해지자, 이 항공사는 이제 미국 내에서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곳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큰타자의 욕망의 비밀에 도달해 향유의 실체를 즐기는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경쟁적으로 향유를 쫓을 것을 명령하는 듯하다.38) 이를 위해 자신의 모토처럼 이 ‘훌륭한 항공’사는 향유의 실체로 들어가는 ‘탁월한 비행’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Excellent Flight, Korea Air”).

    그런데 큰타자에게는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는가? IMF 경제위기 당시 가장 큰 문화적 화두는 ‘고개 숙인 아버지’였다. 많은 가장들이 정리해고를 당했고, 직장에서 내쫓긴 아버지들은 길거리에서 복직투쟁을 하거나 산에 올랐다. 그런데 경험적·생물학적 아버지들만 무력화된 것이 아니라 상징적 아버지도 무능함을 드러냈다. 국민들은 초국적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초국적 경제기구에게 백기 항복하는 국가의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고,39) 이후 국가가 개인들을 도와줄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사실만 줄곧 경험하고 확인해야 했다. 아버지는 1950~60년대의 전통적 아버지처럼 다시 한 번 몰락하거나 부재하고 연민의 대상이 된 것이다.

    상징적 아버지가 부재할 때 주체는 아버지의 형상을 찾아 헤매거나 다시 세운다. 이런 측면에서 2000년대 한국 영화계에서 주목할 만한 배우가 바로 백윤식이다. 과거 TV 브라운관에서 활약했으나 사실상 대중들에게 잊혀 가던 그는 오십대 중반을 넘긴 나이에 대형 스크린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특히 2000년대의 그는 한국영화에서는 생각보다 보기 드문 ‘아버지 형상’을 주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가 연기한 인물들이 <지구를 지켜라>(2003, 장준환 감독)에서 외계인으로 의심받는 강사장, <범죄의 재구성>(2004, 최동훈 감독)의 사기꾼 김선생, <그 때 그사람들>(2005, 임상수 감독)의 중앙정보부 김부장, <싸움의 기술>(2005, 신한솔 감독)의 비밀에 감싸인 싸움의 달인 오판수, <타짜>(2006, 최동훈 감독)의 도박 고수 평경장 등 외설적인 아버지, 즉 향유하는 아버지라는 점이다.40) 그러나 외설적 아버지, 향유하는 아버지는 상징적 아버지가 아니라 상상적 아버지(판타지 속에 재현되는 실재적 아버지)이며, 따라서 상징적 (큰)타자가 아니라 상상적 타자로서 주체와 적대 관계를 형성하는 경쟁자가 된다. 이것이 주체가 그를 떠나야 하거나, 그가 상처를 입거나(상징적 아버지는 결핍의 공백/구멍이 있어야 한다), 죽거나 제거되어야 하는 이유다(<지구를 지켜라>에서 강사장은 우주선을 타고 떠난다. <그때 그사람들>의 김부장은 체포되어 처형되며, <싸움의 기술>의 오판수는 등에 칼을 맞은 채 자취를 감추고, <타짜>의 평경장은 극 중간에 살해된다. 그리고 <범죄의 재구성>에서 김선생은 주체/아들[박신양이 연기한 최창혁]의 손에 죽음을 맞는다).

    28)플라자 합의로 인한 ‘3저 호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 자본주의 역시 이미 1980년대부터 신자유주의 기조에 영향을 받았고, 부분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추진된 바 있다. 하지만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중반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들은 일부 경제 관료가 주도한 부분적 시도에 머물렀고, 1997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비로소 한국 자본주의는 근본적인 구조적 차원에서, 모든 사람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신자유주의화가 전면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의미론적 차원을 포함해서, 즉 라캉적 의미에서 상징적 질서 전체의 구조적 변환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더더욱 1997년 경제위기를 전환의 계기로 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지주형(2011)을 참조.  29)맥락과 의도는 다르다 할지라도 1980년대 지구적 신자유주의화의 전위병 역할을 했던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영국 수상의 “사회 같은 것은 없다. 개인들이 있을 뿐이다”라는 단언을 결국 인정해주는 셈이라 할 수 있다.  30)예의 그 ‘욕망의 해방구’ 압구정동에 위치한 현대 갤러리아가 대표적인 예였다. 또, 중산층 백화점의 이미지를 갖고 있던 서울 명동 롯데 백화점은 1층의 잡화 매장을 초고가 외국 패션 매장으로 바꾸었다. 강남 지역 백화점들의 ‘명품관’은 주식시장이 활황을 보인 1999년 여름에 최고 100% 이상 매출이 증가하고 있었다 한다(조선일보, 1999.7.20. 참조)  31)해외 출국자 수는 이로써 곧바로 IMF 사태 이전 수준 가까이 다시 늘었고, 2005년에는 일약 해외여행객 1,000만 명 시대를 맞이한다. 관광 지출액도 2000년에 IMF 사태 이전 수준을 거의 회복했고, 역시 2005년에는 1,000만 달러를 훌쩍 넘어섰다. 한국관광공사 「관광통계」 참조(주은우, 2008: 290).  32)골프용품, 승용차, 카메라 등 사치성 소비재 수입은 200% 이상씩 증가했고, 아파트 공급도 소형은 줄어드는데 중대형은 오히려 40% 이상 늘었다 한다(조선일보, 1999.7.20, 1999.12.27).  33)1990년대에 과시소비의 보편화, 질적 소비로의 전환, 소비의 개성화·차별화·다양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남은영, 2007). 요컨대 ‘신세대’의 소비 특징은 사실 폭넓게 공유되고 있었던 것이다.  34)예컨대 IMF 사태 이후 가격을 낮췄던 청바지 업체들은 1999년 상반기 들어 ‘브랜드 리뉴얼’을 내세워 한 벌에 6~7만원하던 청바지 가격을 다시 10만 원대로 끌어올렸는데 대성공을 거두었고, 심지어 19만 원짜리 초고가 청바지는 단 일주일 만에 2천여 벌을 팔아치웠다고 한다.  35)주인기표의 기능, 아버지의 법, 초자아의 명령은 상징계와 상상계의 접합 속에서, 말과 이미지의 결합을 통해, 청각과 시각이 결합되어 작용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지젝(Žižek, 1996)을 참조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광고의 카피 문구는 사상 유례 없는 구조조정과 감원이 휩쓸고 있던 당시 상황에선 마치 해고 통지와 비슷하게 들릴 수도 있었다. 텍스트의 의미는 컨텍스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법이다.  36)주식시장을 개방하고 외국인 투자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이 모토는 국가경제 전체가, 따라서 국민들의 집합적 삶 전체가 시장에 매물(賣物)로 내놓였다는 것을 웅변한다.  37)그래서 푸코적 미시권력의 작동 방식을 병영모델과 시장모델로 구분한 연구도 있다(조원광, 2014).  38)해방부터 IMF 사태까지 미국 자체가 한국에게는 큰타자였던 면이 있다. 주은우(2003) 참조.  39)IMF 구제금융신청은 ‘경제적 신탁통치’에 비유되기도 했고, 이행각서가 캉드쉬에게 전달되어 IMF 관리체제가 출범한 1997년 12월 3일은 ‘국치일’로 표현되기도 했다(강준만, 2006, 3권: 86).  40)묘하게도, 백윤식은 2013년 60대 중반을 넘긴 나이에 30살 연하의 여기자와의 열애로 대중의 부러움을 샀다가 곧 이 연인에 대한 아들의 폭행과 또 다른 연인의 존재 등이 포함된 스캔들이 터짐으로써 마치 향유하는 아버지 형상의 페르소나를 스크린 밖으로까지 이어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Ⅶ. ?그 불안

    2000년대 이후 한국인들은 이 향유하는 아버지 형상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이 영향은 그 힘이 매우 크다. 여기서 현대카드의 텔레비전 광고를 재방문해보자. 2000년대 초에 광고에서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고 부추겼던 이 신용카드사는 2005년의 광고에선 이렇게 노래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정확히 향유를 명령하는 초자아(아버지)의 정언명령, 바로 그것이다.

    이 광고의 주된 영상 이미지는 커다란 곰 인형 머리를 뒤집어쓴 수영복 차림의 ― 몸을 보건대 분명히 ― 청년이 늘씬한 비키니 미녀들에 둘러싸인 채 이 노래에 맞춰 흥겹게 물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형식적으로도 이미지 구성과 표현에 있어 자본주의 세계가 기성의 권위와 제도에 반기를 든 혁명적 물결에 휩싸였던 흥겹고 들뜬 1960년대의 그것을 흉내 낸 듯한 이 광고는 소비 주체가 마치 유아기로 되돌아간 듯한 행복한 무구함의 분위기까지 자아낸다. 그러나 향유를 명하는 초자아는 관대하고 자애롭기만 한 존재가 아니며, 무엇이든 허용할 듯한 향유의 명령은 주체에게 오히려 불안을 야기한다.

    금지의 명령에서 향유의 명령으로 이행해온 지난 50여 년 간의 한국의 문화변동은 소비사회가 쾌락주의 윤리를 함양한다는 고전적 분석(Bell, 1990)이나 2000년대 한국사회는 진정성이 종언을 고하고 속물들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진단(김홍중, 2009)과도 상통한다 할 수 있다. 또, 다니엘 벨이 노동이 요구하는 금욕주의와 소비가 요구하는 쾌락주의의 충돌이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을 이룬다고 갈파한 것처럼, 향유를 문화적 지배종으로 위치 짓는 것 역시 규율과 향유의 상호동반 기제가 보여주듯 향유의 명령과 금지의 명령을 상호배제적인 대체의 관계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향유’라는 개념에 기대면 문화변동을 이데올로기의 내면화와 욕망의 생산을 포함해 주체성의 양식이란 견지에서 재해석할 수 있고,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적인 정서가 왜 불안인지 알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주며, 이에 기초해 이런 문화변동이 품고 있는 정치적 위험까지 경계할 수 있게 해주는 추가적인 이점이 있는 것 같다.

    만약 본능의 억압에 기초한 문명이 ‘불만’을 야기한다면(Freud, 1961), 모든 것이 허용되는 듯한 향유의 사회는 ‘불안’을 야기한다. 견고한 모든 것이 대기 속에 녹아버리고(Marx and Engel, 2000: 248) 유동성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세계의 불안정한 존재 조건이 개인들을 항상적인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게 한다면(Bauman, 2009), 2000년대 한국사회의 일상생활 역시 불안과 두려움으로 특징지어진다(정수남, 2010). 향유의 명령은 이런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 우선,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누구나 무엇이든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심각한 수준에 도달한 경제적 양극화는 날로 심해지기만 하고, 언제 낙오자가 될지 알 수 없어 누구나 전전긍긍하기만 한다. 텔레비전의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의 포맷은 좁아터진 취업문과 일상화된 해고(탈락)로 집약되는 경쟁지상주의의 한국사회를 정확히 복제해놓았다. 그런데 여기서마저 기회균등의 신화는 설 자리가 줄어들고, 강남 부유층이 문화 트렌드마저 주도하는 현실(강내희, 2008: 179-183)을 반영하듯 부유한 집안 출신의 깨끗하게 생긴 출연자들이 노래와 춤 실력마저 우월함을 입증한다. 그런데도 향유의 명령은 모두에게 계속 즐기라고 강요한다. 향유의 명령이 또 다른 억압과 구속이 될 때 천국과 지옥은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게다가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향유의 명령은 그 정의상 불안을 낳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한 적이 있듯이 라캉이 말하는 향유 자체가 아버지/법의 금지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의 법에 의해 금지되기 전에 주체가 누렸다고 상상되는 향유(희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향유(희열)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이유다. 실현될 수 있거나 실현된 것으로 재현되는 향유는 상상적 향유일 뿐, 실재(계)적 향유는 결코 도달될 수 없다. 그러므로 ‘향유의 명령’은 그것이 주체가 이행하기 불가능한 명령이라는 역설을 갖고 있다. 그래서 “즐겨라!”라는 초자아의 명령 앞에서 주체는 오히려 즐길 수 없으며, 그 명령은 불안을 자아낸다. 향유하는 아버지/초자아 앞에 설 때 주체는 숨이 막히게 되는데, 향유의 존재는 꽉 찬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핍이 있어야 할 곳에서 결핍이 아니라 대상을 발견할 때 주체는 불안을 느낀다. 큰타자에게서 결핍을 발견할 수 없다면 주체는 자유의 여지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주체는 자신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무화시키는, 자신의 완전한 존재감을 부정하는 그 꽉 찬 상상적 타자와 경쟁관계에 들어간다(Žižek, 1991).

    따라서 타자(the Other/other)의 향유는 주체의 공격적 반응을 유발한다. 주체는 자신의 결핍을 가리기 위해 자신이 향유(희열)를 잃어버렸다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결핍을 환기시키는(혹은 자신을 결핍으로 환원시키는) 타자가 자신의 향유(희열)를 훔쳤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Žižek, 1989: 124-128; 1993: 201-205). 파시즘은 이 향유를 정치적 요소로서 이용하여 대중을 동원했다(Žižek, 1991, 2001).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자본주의 사회처럼 향유가 명령되는 사회에서 향유의 명령과 향유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실재적 조건 사이의 간극은 외국인 노동자 같은 인종적 타자나 사회적 소수자, 혹은 자신과 정치적 의견이 다른 자 등의 타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파시즘적 테러의 위험을 배양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자기 자신이 성적 소수자(게이)였던 독일의 영화 작가 파스빈더(Rainer Werner Fassbinder)의 경구를 떠올려야 한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41)

    41)파스빈더가 1974년에 만든 영화의 제목이다. (Ali: Fear Eats the S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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