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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2014년 봄 학술대회 “여성의 몸과 성노동” 기획좌담
  • 비영리 CC BY-NC
ABSTRACT
2014년 봄 학술대회 “여성의 몸과 성노동” 기획좌담
KEYWORD
  • 안녕하세요. 오늘 이렇게 많이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사회자로서 제 자신을 소개해야 하겠지요. 저는 헤겔의 법철학을 전공하고 요즘 다문화주의를 연구하고 있는 건국대 연구교수 서윤호입니다. 그리고 몸문화연구소의 총무이기도 합니다.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서 오셔서 좌담을 빛낼 고정갑희 선생님과 김연희씨, 밀사씨, 그리고 김종갑 선생님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영미문학페미니즘학회와 건국대몸문화연구소가 공동으로 학술대회를 개최한 것은 몸문화연구소의 연구원인 저로서는 매우 의미있는 일입니다. 몸에 대한 연구는 페미니즘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 초반에 우리나라에서 몸에 관한 이론들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몸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도 많이 열렸습니다. 그때 그러한 논의를 주도한 것이 여성주의학자들이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성적인 차이가 몸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의 하나인 듯싶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연구소가 포르노를 주제로 『포르노 이슈』라는 책을 출간했으며, 김종갑 소장님은 올해 성의 역사를 다룬 『성과 인간에 관한 책』도 출판했습니다. 이정도면 한국영미문학페미니즘학회와 몸문화연구소가 겹치는 부분이 많다고 할 수 있겠지요. 오늘 화두인 성노동도 연구소가 다루려는 기획의 하나였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성매매의 문제는 매우 불편하고 예민한 사안입니다. 2004년에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된 것을 다 알고 계시겠지요. 성매매 특별법은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과 '성매매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말하는데, 성매매를 불법으로 규정지었습니다. 이전에는 청량리나 미아리와 같은 집창촌 지역의 성매매는 법의 규제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특별법이 그러한 과거의 관행에 철퇴를 가한 것이지요. 이후로 성매매특별법에 대한 논의가 줄을 잇기 시작했습니다.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보호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법이 실제에 있어서는 그러한 여성을 억압하고, 또 범죄자 취급을 한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그 법의 실효성보다는 부작용이 더욱 많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오신 김연희씨는 성매매 비불법화를 주장하는 분입니다. TV에 출연하기도 하고 국회 앞에서 시위를 하는 등 엑티비스트로서 인지도도 높은 분이지요. 밀사씨도 김연희씨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매매 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 고정갑희 선생님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매매라는 부정적인 용어를 성노동이라는 중립적인 용어로 대체하자고 제안한 분이 고정갑희 선생님입니다. 2012년에 고선생님이 출간한 『성이론 : 성관계 성노동 성장치』를 읽어보면 성매매와 성노동의 차이를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성매매라고 말했는데, 이제부터는 대신 성노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겠습니다.

    오늘 좌담의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좌담자 네 분이 5분 이내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서 들려주실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본격적인 좌담과 토론이 이어질 것입니다. 먼저 고정갑희 선생님에게 발언권을 드리겠습니다.

    고정갑희: 안녕하세요? 제 소개를 하라고 하시니 간략하게 그동안의 제 아이디와 연결하여 소개를 해 보겠습니다. 90년대 후반 gofeminist라는 아이디를 사용하고 이후 2000년 즈음하여 goactivist로 바꾸었습니다. 이 두 아이디는 저의 사회운동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gofeminist는 여성문화이론연구소와 goactivist는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Network for Glocal Activism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는 운이 좋아 90년대 한국 사회에서 여성관련 다양한 단체와 그룹들의 출발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출발과 관련하여 저도 여성문화이론연구소>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의 시작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두 단체의 시작을 제안한 사람으로서 저에게 앞의 두 아이디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feminist와 activist 사이에 차이를 느낍니다. 물론 이 둘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92년 영미문학페미니즘학회 출범의 자리에도 있게 되었고, 이프의 출범에도 여성문화예술기획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출범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두 아이디는 제가 좀 더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의지와 관련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성노동자 운동이 자리합니다. 나중에 돌아보니 제가 관심을 갖고 관련된 성노동자운동, 성노동운동은 feminist와 activist 사이의 미묘한 차이와 연관된 것 같았습니다. 매춘이 여성에 대한 억압이고 폭력이라고 보는 입장을 대부분 견지해 온 페미니즘(급진적 페미니즘)의 영향이 성매매방지특별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매춘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피해자이고, 노예노동을 하며 억압을 받고 있으니 구출해야 한다는 논리 하에 성특법이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매춘에 종사하는 여성들(매춘에는 여성으로 불려지는 사람들만 종사하는 것이 아닙니다)이 있고, 이 여성들은 매춘이 직업이기도 하며 이를 통해 생활을 하고 있으며, 구출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feminist로서 매춘을 바라보던 때와 activist로서 바라보는 지점에 차이가 있다고 느끼면서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9월 23일과 6월 29일은 특별한 날입니다. 9월 23일(2004년)은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된 날이고 6월 29일(2005년)은 성노동자의 날입니다. 2004년 성특법이 시행된 후, 몇몇 분들과 고심을 하면서 2005년 4월 국제포럼을 준비하였습니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기획으로 성매매와 성노동 관련 포럼을 진행하면서 인도 DMSC, 대만 COSWAS, 태국 EMPOWER 라는 성노동운동 단체들의 성노동자, 감독, 성노동운동 활동가 등을 초청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매춘은 노동이라는 선언을 하게 되고, 한국의 여성활동가와 페미니스트들이 이 말에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4월에 제가 편집주간으로 있었던 『여/성이론』(12호)은 성매매/성노동의 문제를 특집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2005년에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서 <성노동연구팀>을 만들어 세미나와 대외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세미나는 성노동을 공부하기 위한 것이고, 대외 활동으로는 성노동운동네트워크에 동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네트워크에는 평택 민주성노동자연대 성노동자활동가들,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 노동자의 힘 여성활동가모임, 세계화를 반대하는 여성들의 모임이 <성노동연구팀>과 함께 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의 배경에는 2004년 9월 23일 이후 한국의 집창촌 여성들이 여의도 국회 앞에서와 다양한 지역에서 성특법에 반대하는 삭발, 소복, 단식 등의 다양한 시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움직임들이 2005년 6월 29일에 잠실 운동장에서 ‘성노동자의 날’을 선언하는 것으로 이어졌으며 전국성노동자 연대 한여연과 민주성노동자연대가 출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9년에 성노동자권리모임 지지가 출범하게 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현재 저는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와 지구지역활동가들의 페미니즘학교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이 단체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구지역행 동네트워크는 2009년에 출범하였고, 페미니즘학교도 2009년 출발학교를 시작으로 2010년 3월 8일에 본격적으로 1년 과정의 프로그램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단체는 적녹보라적/지구지역적 운동의 필요성에 입각하여 현장과 이론 활동을 하는 단체입니다. 페미니즘의 대중화가 필요하며 운동의 철학이 새롭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적녹보라 패러다임’과 대안적 ‘감성경제섹슈얼리티’를 모색하는 단체입니다.

    현재 성노동운동과 관련하여서는 2005년 이후 계속해 오는 <성노동연구팀>과 세미나를 지속하고 성노동자권리모임 지지의 멤버로 있습니다. 제 소개는 일단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서윤호(사회): 예, 고정갑희 선생님 말씀 감사합니다. 우리나라 성노동의 역사를 짧게 정리해주셨군요. 두 번째 발언은 김종갑 선생님께서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이 주제에 대한 기본입장도 말씀해주시죠?

    김종갑: 예, 저는 김종갑이고요, 제 전공은 영문학, 그 가운데서도 문학 비평과 이론입니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부터 우리나라에서 영문학을 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고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저쪽 영미권의 학문을 연구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여기 우리나라에 어떤 식으로든 접합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정갑희 선생님처럼 학문의 현장성을 살리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몸보다 더욱 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생각은 저쪽에 가있어도 몸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 여기에 저는 저 혼자가 아니라 발표자, 토론자, 그리고 청중 여러분과 같이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저는 몸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몸이라는 화두를 연구하면서 곧 저 자신의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몸에 대한 연구가 문화사, 의학, 미학, 정신분석, 사회학 많은 영역에 걸쳐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 혼자 연구하기에는 너무 벅차기 때문에 2007년에 저는 뜻을 같이 하는 분들과 함께 몸문화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오늘의 주제와 관련해서 저희 몸문화연구소가 했던 공동작업 하나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작년에 출간한 『포르노 이슈: 포르노로 할 수 있는 일곱가지 이야기』라는 책이 그것입니다. 각자 다른 전공의 학자들 7분이 모여서 관련된 책을 읽고 토론을 하며 1년 동안 준비한 결과입니다. 처음에 우리는 이 일을 어렵게 생각하지를 않았습니다. 포르노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주제이지만 겉으로 대놓고서 이야기하기에는 불편해서 쉬쉬하고 있다가, 음담패설처럼 술자리에서나 화제에 오르는 주제가 아닙니까?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든 접근할 수 있는게 야동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이와 같이 어둠 속에 감춰졌던 불편한 주제를 밖으로 내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소박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오류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주제가 너무나 통속적으로 일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현실에 이론적으로 개입을 해서 학문적으로 뭔가 새로운 주장을 내놓기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철학이나 문학작품, 예술처럼 일상의 현실과는 직결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 깊이 있게 논의하기도 쉽고, 또 난해한 개념이나 이론을 구사하면 뭔가 그럴 듯한 논문으로 완성하기도 쉽습니다. 그런데 야동과 같은 주제에 대해서는 그러한 학문적 방어막 뒤에 숨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개인적으로 입장을 정하는 일이 무척이나 난감했습니다. 그것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와 같은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지요.

    성매매가 주제가 되면 어려움이 갑절로 커집니다. 우리나라에는 성매매특별법이 있습니다. 이 법은 모든 종류의 성매매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성매매를 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이유로, 또 어떠한 상황에서 그 일에 종사하게 되었는지는 따지지 않습니다. 도덕적·사회적인 악으로 낙인을 찍는 것이지요. 만일 우리가 그러한 법적 취지에 공감하고 찬성한다면 성매매에 대한 연구를 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도덕적으로 매도하기에는 이 문제가 너무나 중층적이고 복합적이며 애매모호한 사안입니다. 그렇다면 성매매에 이론적으로 개입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많은 부담을 줍니다. 국가가 불법화했으며 또 도덕적으로 지극히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성매매 불법화에 찬성할 수도, 또 그렇다고 반대할 수도 없는 난감한 지점에 있는 것이지요. 자칫하면 언론의 몰매를 맞기도 쉽고요.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포르노 이슈』의 후속편으로 성매매이슈를 기획했지만, 용기가 나지를 않아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미 2년 전에 저는 이 좌담에 참석한 김연희씨와 밀사씨를 몸문화연구소로 초청을 해서 성매매의 현장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금과 마찬가지의 형식으로 2-3시간 좌담을 했습니다. 끝나고 난 다음에는 다음에 있을 좌담을 녹취해서 책의 일부로 활용하자는 목표도 정하고, 이 주제를 다를 필자들을 물색하겠다고 약속을 했었지요. 그렇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시간만 흐르다가, 다행스럽게도 영미문학페미니즘학회와 공동학술대회를 기획하면서 마침내 현실화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성매매 좌담회의 배경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성매매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근대화의 과정에 대한 또 다른 관심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이 성매매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성매매는 법적으로 허용되기도 하고 금지되기도 했으며, 또 집창촌과 같은 특정 지역으로 제한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고대 희랍의 헤타이라(hetaira)나 중세의 기생(courtesan) 가운데는 유명한 매춘부도 적지 않았습니다. 성매매와 근대가 맞물리는 지점은 근대의 문턱에서 성매매가 국가의 법적 제재와 단속의 대상이 되고 섹스가 부끄러운 쾌락의 행위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제2의 성』에서 시몬느 보부아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육체를 두려워하지 않는 남자에게 매춘부는 푸짐한 육체의 선물이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남자에게 그녀는 악이다.” 황순원의『나무들 비탈에 서다』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매춘부와 섹스를 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금 난 누구보다도 순수한 상태에 있다는 걸 알아야 해, 누굴 사랑한다든가 미워한다든가 하는 그런 구지레한 인간거래를 깨끗이 벗어난 이 홀가분한 기분.” 이 두 인용문에서 성매매는 도덕이나 윤리와 무관하게 순수 쾌락의 영역에 있습니다. 매춘부와의 섹스나 음식점에서 먹는 음식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성매매와 법, 죄책감은 서로 떼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섹스가 법과 도덕의 규제를 받게 것입니다. 이제 법과 도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섹스는 상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섹스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섹스란 무엇일까요? 또 무엇 때문에 우리는 섹스를 할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전근대와 근대, 현대인이 가진 생각은 똑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섹스를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가 출산이라며, 다른 하나는 쾌감입니다. 섹스는 자손을 생산하든지 쾌락을 생산하든지 뭔가를 생산하는 활동입니다. 일부일처제가 등장한 이후로 생식의 기능은 언제나 제도적인 보호를 받았습니다. 특히 가부장제사회에서 자손을 생산하지 못하는 아내는 소박맞을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결혼과 섹스, 생식이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성매매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결혼과 생식의 목적에서 벗어난 섹스는 언제나 존재했습니다. 고대 희랍시대에는 두 가지 유형의 섹스가 있었다고 합니다. 자손을 위해서 아내와 집에서 섹스하고, 바깥에서는 쾌락을 위해서 매춘부와 섹스한다는 것이지요. 성매매는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일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집 안과 집 바깥을 구분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도입되면서 중세에는 육체가 경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그냥 몸이 아니라 타락하고 죄악으로 오염된 몸, 유혹에 약한 몸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수도승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몸에 매질을 하고 가시옷을 입으며 무엇보다도 여자를 멀리하였습니다. 성행위 자체가 죄악이었지요. 결혼한 부부도 쾌락이 아니라 생식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경우에만 잠자리를 같이 해야 했습니다. 그때에도 쾌락이 없으면 없을수록 좋았습니다. 성적인 유혹과 쾌락에 무너진 사람들은 지옥의 형벌을 받을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섹스에서 쾌락이 지워지고 생식의 목적 하나만 남아있게 된 것이지요(섹스-쾌락=생식). 근대로 접어들면서 섹스는 새로운 맥락으로 접어들고, 성적 쾌락이 무조건 악한 것이라는 중세적 금욕관으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무조건적으로 성적 쾌락을 긍정한 것은 아니지요. 연애결혼이 점차 대세가 되면서 사랑+결혼+섹스의 새로운 조합이 등장했습니다. 섹스를 즐기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반드시 합법적인 부부 관계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섹스의 근대화·제도화와 관련해서 고정갑희 선생님도 글을 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섹스가 그와 같이 제도화된 합법적 울타리에서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파리나 런던 같은 대도시의 음지에서는 매매춘이 성행했습니다. 19세기에 백만 명 정도 인구의 도시에 약 오만 명이 매매춘에 종사했다고 합니다. 당시 파리나 런던에는 성매매의 손길이 뻗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보부와르의 말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19세기에도 고대 희랍이나 로마, 중세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매춘부와 섹스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관행과 차이가 있다면, 이제 돈으로 성을 사는 사람들은 동시에 죄책감도 댓가로 지불해야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현대는 어떠할까요? 우리는 근대적인 문제의식에서 벗어났을까요? 현대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학사의 기념비적 사건을 두 개 소개해야 합니다. 하나가 페니실린의 발견입니다. 페니실린으로 인해서 유럽 사람들은 지긋지긋한 매독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입센의 극작품을 보세요. 대부분의 작품에서 매독은 플롯의 전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또한 가지는 라텍스 콘돔과 피임약의 발명입니다. 1900년대 초반에 시중에 나온 라텍스 콘돔이 남자에게 성의 자유를 주었다면, 1960년대 중반에 출시된 피임약은 여자에게 성의 자유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의 발명이 없었다면 1960년대 후반의 성 해방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발명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제 섹스가 생식의 목적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섹스 자체, 즉 순수 쾌락으로서의 섹스가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도식화될 수 있겠지요. 섹스-(생식+결혼)=쾌락. 순수 쾌락, 이것이 우리가 서있는 현대적인 맥락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현대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성매매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근대에 성매매를 집창촌으로 제한하거나 금지했던 주된 이유는 근대국가가 성행위를 결혼+사랑의 결합으로 제도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혼전 성관계를 불법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부도덕한 행위로 낙인찍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토머스 하디의 소설 『테스』를 보세요.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지 못했던 이유는 혼전 성관계 때문이었습니다. 테스가 자신의 순결을 범한 남자를 찾아가 살해해야 했을 정도로 혼전의 순결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혼전 성관계가 절대적으로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혼이나 생식으로 정당화해주지 않더라도 섹스는 그 자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인권과 마찬가지로 현대인에게는 성적으로 즐길 권리가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현대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성매매를 불법화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매매를 금지해야 하는 당위성이 사라진 것이지요.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합니다. 성매매를 불법화해야 할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국가는 그것을 불법화하는 것일까요? 근대 자유주의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던 존 로크는 재산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체에 대한 개인의 권리를 인정했습니다. 국가는 재산권을 보호하듯이 개인이 자신의 몸을 가지고 생계를 유지할 권리도 보장해주어야 합니다. 노동자가 자본주의 시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있다면 성매매자도 성적 서비스를 팔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의 흐름으로 유입되지 않도록 성의 주위에 성벽을 두를 필요가 있을까요? 자본주의에서 성만이 유일한 예외가 되어야 할까요?

    왜 성이 자본의 유일한 예외가 되어야 할까요? 왜 성(性)이 성지(聖地)가 되어야 할까요? 만약 19세기라면 성을 성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성해방의 물결이 세계를 휩쓸고 지나간 후 50여년이 지난, 21세기입니다. 성을 신성시하고 예외화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국가는 성매매를 불법화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어?’라는 말을 자주 듣지요? 한 명이라도 믿을 사람이 있다면 세상은 삭막하지 않으며 그러한 세상은 충분히 살 가치가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그 한 사람은 신이 없는 세계에서 신의 기능을 수행하는 셈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시장경제에서도 ‘믿을 사람,’ 즉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하나쯤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구석구석까지 자본화되고, 아마도 우리는 숨이 막혀서 그런 세상에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이때 돈으로 교환되지 않는 하나의 예외의 역할을 성에게 기대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것에 가격이 있지만 성에는 가격이 없으며, 모든 것을 돈 주고 살 수 있지만 성만은 살 수 없다면, 그렇다면 자본주의도 괜찮다는 말이 되겠지요. 성매매의 금지가 자칫하면 흔들리기 쉬운 자본주의의 버팀목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현대에 성매매금지가 갖는 의미와 역할은 중세에 성모 마리아가 중세인에게 주었던 구원의 메시지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거짓 메시지라는 점에 있겠지요. 이상입니다.

    서윤호(사회): 네, 짧은 시간에 자기소개뿐만이 아니라 성의 역사 전반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발표해 주셨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5분이나 10분 이상 너무 길게 말씀하지 않았으면 고맙겠습니다. 자, 그 다음에는 밀사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시죠.

    밀사: 성노동자권리모임 지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밀사라고 하구요. 밀사라는 이름은 사실 별 뜻 없고 그냥 헤이그 밀사의 그 밀사예요. 그냥 어감이 좋아서 쓰게 됐고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아, 성해방을 위한 비밀의 결사단 입니까? 이런 질문을 받기도 하는데 그럴 때 마다 할 말이 없어요. 음, 제가 최근에 성노동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이슈는 크게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당사자성의 문제예요. 성노동이라는 새로운 관점이 뉴스나 신문 보도들 통해서 대중 사회로 확대되는 과정에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의식이 굉장히 팽배하기 시작했는데, 물론 그 말 자체는 굉장히 중요하지만 거기에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지는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어야하는데 왜 들어야 하는지의 부분인데, 우리는 단지 당사자들에게 성노동, 성산업 문제의 해결을 모두 맡기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됐고, 이 성산업의 문제는 우리 모두가 떠안아야 하는 문제지 그들만이 떠안아야하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발언권이 몰리면 몰릴수록 그 책임도 그들에게 가중되게 되는데, 그거는 옳지 않다는 생각? 그래서 연구자들도 그렇고 활동가들도 그렇고 언론 매체의 시선들도 그렇고, 이런 식으로 성노동자 당사자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려고 하는 시도들이 과연 옳은가, 우리가 당사자들을 대하는 태도는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고, 또 하나는 이제 작년에 특히 유행했던 구호에 ‘성판매 여성을 비범죄화하라’라는 구호가 있는데, 이 구호가 굉장히 허상의 구호라는 것? 현실적으로도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옳지도 않고 성노동자들의 처우에 어떠한 개선책도 마련하지 못 한다는 것? 이것이 반성매매 진영에서 자기 위안을 위해서 만들어 낸 구호는 아닌지 하는 그런 비판들? 그런 것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2011년부터 성노동자권리모임 지지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2010년 말에 성노동 실험이라는 제가 한달 간 직접 조건 만남을 하고 그 경과를 트위터에 올리는 그런 실천을 함으로써 성노동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됐구요. 최근에는 책이 곧 나올 거 같은데, 철수와 영희 출판사에서 대자보라는 시리즈 기획을 하고 있어요. 거기에서 네 번째로 책이 곧 나올 건데, 지승호 선생님과 같이 나눈 대담을 옮긴 책입니다. 나중에 책 출판되면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서윤호(사회): 네, 감사합니다. 기왕 책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잠깐 책 광고 좀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성의 역사와 관련해서는 김종갑 선생님께서 쓰신 책이 최근에 나왔습니다. 제목은 『성과 인간에 관한 책』인데, 앞 자만 따서 간단히 『성.인.책』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부제는 『문학과 예술에 나타난 성의 역사』입니다. 또 김종갑 선생님 책만 소개하면 고정갑희 선생님께서 서운해 하시니까 고정갑희 선생님의 책도 함께 소개하겠습니다, 고정갑희 선생님의 책 『성이론』은 유명하죠. 아까 앞에서 발표하신 이은정 선생님께서도 인용하셨던 책입니다. 자, 이제 다시 김 연희 선생님께 자기소개와 오늘 주제에 대한 기본입장을 부탁드립니다.

    김연희: 안녕하세요? 저는 성 노동자 권리 모임 김연희 입니다. 앞에서 너무 좋은 말씀들 많이 해주셔서 제가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저를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2007년부터 미아리 텍사스 집장촌에서 일을 시작했고요. 그 뒤로 룸살롱과 안마, 휴게텔 등 다양한 성매매 업종에서 종사를 했습니다. 너무나 힘이 들어서 그만 주고 싶은 때도 있었고, 제 자신이 부끄럽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뾰쪽한 대안이 없어서 계속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리고 2011년에 밀사를 알게 되고 나서 이 사회에서 성매매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고, 밀사와 함께 성노동자 권리 모임인 지지운동을 같이 시작했습니다. 사실, 저는 성인이 되자마자 성매매를 시작했기 때문에, 그것은 저에게 그냥 일상이었습니다. 아침에 잠자리에 들고 밤에는 일어나서 출근을 해서 술을 마시며 손님들과 놀고 아침에 퇴근할 때 하루의 일당을 받고, 그러면 집에 와서 아침에 잠자고 . . . 그러한 일의 반복이었지요. 그러한 제가 페미니즘에 대해서 이야기할만 한 소양이 있을 리가 없었지요. 2011년에 밀사를 만나 운동에 합류를 하면서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러한 일을 왜 시작했는지, 그리고 내가 어느 누구보다 힘들게 열심히 일을 하는데 왜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남자들이 왜 나를 이런 식으로 막 대하는 거지? 내가 그들에게 쾌락을 제공하는데 무엇을 잘못했다고 나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 거지? 이런 생각을 많이 했고요, 뭐랄까, 저에게 커다란 변화가 있었습니다. 성매매를 시작하기 전에는 저는 몹시 우유부단하고 마음이 약하며 모질지 못한 성격이었거든요. 그런데 이 일을 시작하면서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특히 진상들2)을 겪으면서 여성으로서는 똑 부러지고 다부지게 살아야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못된 남자가 있으면 앞장서서 혼줄 내고, 진상 같은 손님에게는 더욱 강하게 나가도록 후배를 교육하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저에게 페미니즘은 내가 하고 있는 그러한 일들이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줬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성중심적인 문화의 희생자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남자들은 저희로부터 쾌락을 제공받으면서도 “창녀”라는 낙인을 찍고서 사람 대접을 해주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성매매를 하는 여자들도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들게 일해서 돈을 벌면 나중에 독립해서 행복하게 살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되는 여자는 드물어요. 돈을 벌면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명품을 사는 등 하면서 금방 돈을 써버려요. 그것이 남자들이 찍어놓은 낙인 효과가 아닐까요? 창녀는 다 그렇다는 편견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저는 그렇게 길들여진 삶이 싫어서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페미니즘을 더욱 많이 공부하고 싶고, 그래서 성노동자들이 좀 더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졌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과거에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 손님이 아무 생각없이 가볍게 던지지만 우리에겐 상처가 되는 말들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러한 말을 할까? 사회의 어떤 분위기가 그들이 그런 모멸적인 말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까? 저는 창녀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에 의해 이중으로 억압받고 있는 계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해있는 것이지요. 가장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의 모순과 문제점들을 지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것 중의 하나가 우리를 창녀가 아니라 성노동자로 보는 것입니다. 성노동자와 성매매 산업의 문제는 거기에서 일하는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로 확장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노동자뿐만 아니라 다른 집단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나 페미니즘 학회의 연구자들이 성노동자들의 권리에 관심을 보다 많은 가져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합니다.

    서윤호(사회): 네, 감사합니다, 5분에서 10분 정도 ‘모두발언’을 하시라고 했는데, 다들 길게 말씀하시는 바람에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네요. 사회자로서 시간적 압박감과 위기감을 서서히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 좌담은 프로그램에서 정한 대로 다섯 시 반에 끝나야 하므로, 이제부터는 이렇게 좌담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이미 사전에 메일로 좌담의 개요와 내용을 알려드린 것처럼, 먼저 성매매 개념과 성노동 개념을 어떻게 구분 지을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부터 논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법학을 전공하는 저의 입장에서 볼 때, 일단 성매매는 현재 우리 현행법상 불법입니다. 그리고 성노동은 아직 법적으로 인정된 개념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성매매는 불법 개념이고, 성노동은 합법 개념일 수 있지만 아직 법적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죠. 물론 과거에 윤락 행위 방지법이 있었는데요, 윤락이라고 하는 개념은 사라졌고, 매춘 개념도 지금은 업종명으로는 쓰지 않아요. 그냥 중립적인 용어인 성매매 개념만 쓰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까 논문발표에서 이은정 선생님께서 그 개념의 역사를 잘 설명해주셨죠. 그러니까 기존에 쓰던 윤락이란 개념을 버리고 중립적인 성매매 개념을 쓰고 있지만, 이 중립적인 성매매 개념이 지금 현행법에선 불법으로 다루어지고 있고, 또 지금 좌담을 진행하고 계신 분들은 성노동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려고 한단 말이죠, 그래서 먼저 성매매와 성노동에 대한 개념적인 차원에서의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둘째는 우리 밀사 선생님께서 모두발언에서 성노동자가 가지는 자기의식, 주체성, 당사자성에 대해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김종갑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쾌락과 관련해서도 한번 짚어봐야 될 문제인 것 같고요, 셋째는 이 학술대회를 공동으로 개최한 주체가 페미니즘 학회이다 보니까 성노동과 관련해서 페미니즘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층위들이 존재할 텐데 이것도 함께 논의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넷째는 성노동 운동이 가지는 현재의 지평과 미래 전망은 어떤지 논의를 했으면 합니다. 이렇게 네 개의 논의를 중심으로 다루고자 하는 문제의 큰 줄기에서 많이 벗어나면 사회자로서 제가 제어를 하겠지만, 어느 정도의 일탈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접근하도록 하겠습니다. 가능하면 문제되는 논의의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성매매 특별법에 대한 논의가 나오더라도 가급적이면 법적 논의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론 이 논의에서 성특법에 대한 비판도 당연히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규범적 차원의 문제는 법학자들에게 맡겨두도록 하고, 여기에서 우리는 사회적인 차원에서 성노동이 과연 어디까지 인정될 수 있을 것인지,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은폐되어 있었던 성매매와 성노동이라고 하는 주제를 과연 어디까지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으며 또 받아들일수 있는지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먼저, 이 부분에 대해서 『성이론』이라고 하는 책도 쓰시고 가장 개념 정리를 잘해 주실 것 같으신 고정갑희 선생님께 먼저 발언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고정갑희: 제가 가장 잘 할 것 같진 않고, 실제로 2004년 5년부터는 비판과 비난을 받기도 하면서 초창기에 여기 저기 많이 다니면서 성매매가 아니라 성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2005년 이후 성노동이라는 개념을 놓고 2005년 이후 이곳저곳에 불려 다녔습니다. 지금은 그 때와는 달리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있고,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의 <성노동연구팀>도 두 팀으로 나누어질 정도로 연구활동도 활발하고 성노동자권리모임 지지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까 첫 번째 발표에서 이은정 선생님하고 사미숙 선생님이 얘기하셨던 부분에서 조금 나왔듯이 윤락, 매춘, 매매춘 그리고 성매매라는 개념들이 있었으며 이후 성노동이라는 개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성들을 중심으로 보면서 매춘은 몸을 파는 것이고 윤리적 타락이라고 보았던 데서 여성운동을 통해 매춘은 여성들이 파는 것만이 아니고 남성들이 산다는 점을 강조하여 매매춘이라고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일단 윤리적 타락이 여성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측면이 강조되었던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사고 파는 것인지가 문제가 되는데 ‘춘’이라는 것을 사고 판다라고 하였고 이 ‘봄’을 사고파는 것이라는 상당히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단어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몸을 파는 것이 아니라 봄을 판다는 것인데, 몸을 판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볼수도 있는 개념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춘’은 직접적으로 이야기조차 할 수 없는 금기의 영역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사용된 것일 수도 있고, 기예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사용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봄을 판다고 해도 매춘부, 창녀, 아까 사라졌다고 얘기하는, 윤락녀라고 하는 게, 여전히 사실은 밑에 깔려서 낙인으로 작동한다고 봅니다. 최근에 들어서 한국에서 여성학,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 성매매라는 개념으로 써야 되는 거 아니냐, 사고파는 것 아니냐, 근데 사고파는 것이 춘이 아니라 성을 사고파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성매매라는 단어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때 성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섹스를 성으로 사용했다고 볼 수도 있고, 더 포괄적으로 사용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있게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성매매’라는 개념이 나온 것은 결과적으로 성매매 피해여성, 가해와 피해의 관계로 해서 억압의 지점과 착취의 지점이 있다고 생각을 했던 거고, 그래서 피해를 당하고 있는 피해 여성들을 구출하고 보호해야 되는, 여성을 피해자로 놓고 구출하고 보호해야 되는 계몽주의적인 페미니즘과 이어지는 개념입니다. 영어로 보면 sex-trafficking에 가깝다 하겠습니다. 이후 ‘성판매자’와 ‘성구매자’라는 개념이 이 개념에 덧붙여져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에 성노동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성매매와는 다르게 사용하는 것으로 매춘이 노동이라는 관점을 담고 있습니다. 성특법 시행 이후 본격적으로 사용된 용어로 매춘은 성적 거래이자 노동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성거래’라는 개념은 성노동자활동가들이 성특법 시행 이후 사용한 개념입니다.

    성노동자들이 ‘성거래’라는 개념을 제안한 것은 ‘성매매’라는 개념이 실질적으로 ‘인신매매’와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성적 거래라는 것은 성적 서비스를 거래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매춘이 성노동이라고 하면 성적 서비스를 하는 노동이라는 뜻이라 생각합니다. 매춘은 몸을 파는 것이라는 입장에 대해서 몸은 한 번 팔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곳에 있으며 몸을 통해 성적 서비스를 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이 매춘이라는 뜻에서 성적 서비스 노동이라고 보는 개념입니다. 몸을 팔면, 몸을 한 번 팔면 몸이 닳아 없어지는 건가, 이런 질문들이 있었고, 그래서 ‘몸을 판다’는 게 아니라 ‘성적 서비스 노동을 한다’라는 걸로 다시 정의해야하지 않느냐라는 입장, 저도 그런 입장에 서 있고요.

    성노동과 성거래라는 개념은 매춘과 성산업의 일들을 노동으로 보고 ‘비범죄화’하기 위한 개념이기도 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노동이라는 개념을 성과 연관하여 쓰는 것은 새로운 운동 주체의 출현과 관련된다 생각합니다. 매춘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피해자로 놓지 않고 주체로 생각하고 거기서 사회구조에 대한 운동이 진행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합니다. 이미 그렇게 시작이 되어 진행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성특법은 여기서 매춘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피해자 내지는 범죄자로 놓고 있습니다. 노동자라는 개념은 다른 노동자들과의 연대에도 열려 있음을 의미합니다. 지금은 아직 이런 연대가 많이 열리지 못한 상황이긴 합니다. 성노동자들이 다른 노동운동과는 연대를 하지만, 그 반대로 연대가 활발하진 않은 상황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성노동자 운동이 훨씬 앞서 가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그리고 여성의 일이 노동이고 노동이란 개념이 어쨌든 역사적으로 투쟁의 개념이었기 때문에 투쟁의 가능성, 그래서 주체의 가능성이 열리기 위해 성노동이라는 개념은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제가 쓴 『성이론』이란 책에서 성노동 개념과 생산의 개념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저는 성이라는 개념이 정의되어야 성노동이라는 개념도 정의될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성이란 말은 다양하고 혼란스럽고 복잡하게 쓰이기 때문입니다. 섹스도 젠더도 섹슈얼리티도 성이란 말과 연결되어 사용됩니다. 그래서 제가 이 책에서 사용하는 ‘성’이란 개념은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를 포함하는 통합적 개념입니다. 이 통합적 성은 필요시 성별과 성애, 성행위 등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성관계, 성노동, 성장치 등의 개념에서 성은 통합적 개념입니다. 매춘 혹은 ‘성산업’ 성노동은 포괄적인 성노동의 일부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성노동자 운동 진영에서 사용하는 성노동, 성노동자는 제가 말하는 성노동의 부분 집합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로 매춘노동이라는 개념을 저는 많이 사용합니다. 때로는 성노동을 매춘노동으로 생각하고 쓸 때도 있습니다. 매춘을 사용하는 이유는 매춘이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봄을 판다는 말은 상당히 상징적인 의미까지 포함합니다. 이는 매춘 노동의 쾌락 생산과도 연결됩니다.

    오늘 논의에서 성노동과 쾌락의 관계가 언급되었는데, 저 역시 『성이론』에서 매춘 성노동을 쾌락의 생산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누구의 쾌락인가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으며, 피해와 착취와 억압과 연결되어 있는 매춘을 쾌락과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 불쾌감과 거부감을 드러내는 경우들을 접하곤 했습니다. 쾌락생산은 매춘 성노동의 성격과 연관된다고 생각합니다. 쾌락이 누구의 것이냐는 점에서 저는 먼저 서비스노동을 돈을 주고 사는 쪽이 자신의 성적 쾌락을 염두에 두고 지불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을 하는 성노동자 쪽에서는 이것이 고통일 수도 있고 때로는 쾌락이 동반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매춘 성노동이 어떤 성격의 노동인지, 그것이 어떻게 해서 노동이 되는 지는 이 생산, 비물질적인 생산과 관련이 있습니다. 쾌락을 생산하지만 거기는 다른 여타의 노동처럼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생산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매춘 성노동의 긍정적인 측면도 비물질적인 생산과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서윤호(사회): 네, 감사합니다. 성노동이라는 개념이 가지는 의미의 지점을 정확히 짚어주시고, 또 쾌락으로서의 성노동이 가지는 미래지향성도 함께 정리해주신 걸로 생각을 하는데요, 현장의 경험을 가지고 계신 김연희 선생님께서는 그 점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들어보겠습니다.

    김연희: 제가 이 주제를 가지고 준비를 많이 하지 못했는데, 평소에 생각했던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모든 남자나 여자들, 심지어 저희를 찾는 손님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몸을 팔기 때문에 다른 여성들이 피해를 본다는 말도 합니다. 우리같은 창녀들이 있기 때문에 남자들이 다른 모든 여자를도 창녀로 본다고도 비난하는 여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말들을 우리는 많이 듣는데, 저는 그런 말을 하는 여성들도 가부장제의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여성들이 우리를 비난함으로써 자신이 창녀보다 더 위에 계층이라 생각하고, 그런 식으로 자존감을 채우고 있습니다. 제 주변에도 그렇게 말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성매매하는 너와 친구로 지내는 나도 쉬운 년으로 보인다는 거지요. 그러면 제가 물어봐요. 정말, 궁금해서 물어봐요. “그럼, 다른 여자들과 섹스하는 남자 친구가 너하고 섹스하자고 해서 불쾌하다면, 너는 그런 여자들 때문에 불쾌하냐, 아니면 그 남자 때문에 불쾌하냐?” 이렇게 물어보면 친구들은 대답을 못해요. 그리고 이렇게 물어보기도 해요. “예전에는 혼전에 성관계를 안 하는 것이 룰이었는데 요즘은 혼전에 남자친구와 자는 애들도 있는데,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한 번 같이 잠을 자기 위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파렴치한 남자들이 있는데 그런 남자들이 더 문제가 아닐까요? 그런 남자에 비하면 창녀인 우리는 거래관계가 떳떳하고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친구의 남친이나 남편을 유혹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일하는 장소로 찾아오는 남자들에게 우리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인데 무엇이 잘못되었냐고 따지면 친구들이 할 말을 잊어요. 사실 할 말이 많습니다. 원나잇은 사랑이 없는 섹스인데 그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성노동자들처럼 돈을 받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섹스는 어떻게 볼 것인가? 이렇게 생각을 하다보면 성매매는 집창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문제가 됩니다. 제가 페미니즘이나 섹슈얼리티에 대해 공부를 덜 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왜 여성의 성이 거래되어서는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여성이 섹슈얼리티를 통해서 주체로 일어설 수가 있고, 또 성을 무기로 이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사회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경제 사정이 좋지 않고 노동 환경도 열악한데 우리를 찾는 손님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남자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여자를 만나서 시간과 돈을 투자하며 연애할 여유도 없다. 그리고 남자에게 쉽게 몸을 내주는 여자들을 비난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여자들이 몸을 사리고, 그래서 내가 만나서 가볍게 섹스를 할 여자를 찾을 수도 없다.” 투자한 만큼 피드백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매매 여성과 관계를 하는 것이 감정적으로 더욱 위로가 되고, 섹스 자체도 더욱 만족스럽다고 말하는 손님들이 적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옛날에는 남자들이 그냥 섹스만을 원했지만 이제는 감정적 교감과 소통까지도 원한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변화하면서 구매자들의 성향이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집창촌에서 일했을 때 15분에 2만 5천 원의 화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정신이 없고 엄청 바빠요. 15분이라는 제한된 시간에 사정을 하도록 만들어야 해요. 아주 단순 한 성노동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지금은 사회가 바뀌어서 외로운 남자들이 많아서 그러는지 섹스가 아니라 이야기하기를 원하는 구매자도 많아요. 웃기는 얘기를 하나 하자면, 제 아는 언니에게 어느 날 손님이 기타를 가지고 찾아와서 노래를 들려주었데요. 요새 유행하는 발라드 노래를 불러 줬다고 해요. 또 그런 경우가 많아요. 꽃을 사오는 손님, 일하는 거 힘들다고 먹을 것을 사와서 같이 먹자는 손님들이 있어요. 저에게도 그런 일이 가끔 있어요. 현재 제가 일하는 곳에서는 40분에 7만원을 화대로 받는데, 어떤 손님은 40분 내내 나와 함께 애니팡을 하자는 거예요. 애니팡을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은데 직장 동료들은 아무래도 너무 어색하고, 여자랑 하면 좋은데 마땅한 여자도 없어서 저에게 왔던 거예요. 애니팡만 하다가 섹스도 하지 않고 떠났어요.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고.

    저는 이러한 일에 7,8년 종사하면서 그러한 변화를 직접 몸으로 느꼈습니다. 점점 손님들의 취향이 바뀌는 게 눈에 훤히 보여요. 섹스가 위주였던 것이 감정 교류로 바뀌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 집에서 말 못하는 비밀이나 와이프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그런 것 이야기하다가 섹스도 안 하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하는 일이 단순한 성적 서비스가 아니라 상담사같은 느낌이 들기도 해요. 저는 상담 능력은 없지만 그냥 내가 들어주는 걸로 만족하는 거예요. 그냥 옆에 가만히 앉아 있어줘도 위안이 된다고 말하기도 하고요. 오피스텔 같은 성매매업소에서는 방에 냄비도 같다 놓는다고 해요. 손님들이 와서 음식을 해먹는데요.[하하하] 어떤 언니에게 예약한 손님이 왔는데, 밥을 해놓고 기다리라고 했데요. 그러자 계란을 사가지고 와서는 계란말이를 만들고 언니와 같이 밥을 먹었데요. 그게 너무 좋다고. 자기가 만든 음식을 누군가와 같이 먹는 게 너무 좋데요. 이런 걸 생각하면 우리가 성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노동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친구들에게 나는 감정 노동 위주가 된 섹스 서비스를 한다고 얘길 해요. 이런 변화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어요.

    서윤호(사회): 네, 김연희 선생님 말씀을 통해 성노동 현장에서의 다양성을 살짝 경험한 것 같습니다. 밀사 선생님?

    밀사: 네.

    서윤호(사회): 지금까지 주로 성매매와 성노동에 대한 개념적 차원을 얘기했는데, 밀사 선생님께서 앞에서 살짝 언급하신 성노동자의 주체성, 자기의식, 당사자성 부분도 함께 다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어떠신지요? 아니면 뒤에 별도로 이 문제를 다룰 때 말씀을 하시겠다면, 바로 김종갑 선생님께 마이크를 넘겨도 되고요. 예, 그러면… 김 교수님께는 제가 별도의 주문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학술대회에는 페미니즘 학회라서 그런지 참석자의 대부분이 여성들이신데, 남성의 시각에서 성매매나 성노동을 바라보는 자신의 입장을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종갑: 제가 성노동을 바라보는 시각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모두발언에서 이미 말씀을 드렸는데, 지금 김연희씨의 얘기를 듣고 성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에 대해서 당당하고, 또 성노동자로서의 긍정적 정체성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타인들에게 낙인찍히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김연희씨가 멋있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주체성의 문제는 누가 자신을 정의하는가 하는 문제와 뗄 수 없는 듯이 보입니다. 내가 수동적으로 규정을 당하는가 아니면 내가 능동적으로 내 자신을 규정하는가 하는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주체성의 핵심은 능동성이지요. 과거에 성매매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능동성과 주체성을 빼앗긴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매매라는 용어 자체가 그러한 탈주체화를 조장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한쪽에 성을 사는 고객이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성이 팔리는 성매매자, 이렇게 관계를 일방적으로 못 밖에 놓은 것이지요. 한 쪽에는 하는 능동적 입장, 다른 한 쪽은 대주는, 즉 당하는 수동적 입장으로 역할이 분담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밑구멍 장사라는 말도 생겨나지 않았겠어요? 성을 파는 여자는 생식기로 하나로 환원되고, 그녀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빈 구멍’으로 간주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일방적 관계에서 성매매자가 자신의 주체성을 갖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주체성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녀에게도 능동적인 역할이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김연희씨가 생생하게 들려주었듯이 성매매자는 그냥 수동적으로 대주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몸에 쾌락을 생산해야 합니다. 쾌락의 생산만큼 능동적인 행위를 찾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역할을 성노동자에게 인정을 해줘야 합니다. 그래야만 쾌락의 생산자, 창조자로서 자신의 주체성을 다질 수가 있지요. 김연희씨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실제로 고객인 남자들이 성매매 여성에게 그러한 능동적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매매를 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가 성‘매매’가 아니라 성‘관계’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요즈음 무연사회라는 용어를 자주 쓰는데, 현대사회에서는 편한 마음으로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가 없는 사람들이 꽤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성매매자에게서 가기가 현실에서 가지지 못했던 관계를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쌍방적인 관계, 서로의 인격이나 주체성을 인정해주는 상호 관계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성노동자가 감정 노동과 상담, 치유의 역할까지 동시에 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성노동자가 자신의 일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서윤호(사회): 성매매에만 국한하지 않고, 성 서비스 전반에 대해 광범위하게 접근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드는데요, 나중에 플로어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서 질문이 있으면 함께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성매매, 성노동에 대한 개념적인 부분은 충분히 논의가 된 걸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아, 바로 플로어에서 질문이 들어오는군요. 말씀하세요.

    청중: 언제 어디서 성노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는지, 여성주의자들인지, 성노동자들인지 궁금합니다.

    서윤호(사회): 고정갑희 선생님! 답변해 주시겠습니까?

    고정갑희: 저, 밀사 선생님께서 얘길해 주시는 게 어떨까요?

    서윤호(사회): 네, 밀사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죠.

    밀사: 2005년 6월 29일에 성노동자의 날이 만들어지면서, 그 때 공식적으로 ‘우리는 성노동자다,’ 집결지 성노동자들이 ‘우리는 성노동자고 누군가에게 억압당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주체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라는 취지에 따라, 공식적으로 성노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고정갑희: 한국에서 성노동이라는 말이 쓰인 것은 이성숙선생의 책에서도 나왔고, 2004.9.23 여의도 국회 앞에서 소복삭발시위를 한 집창촌의 여성들이 우리의 일도 노동이라고 하는 데서도 ‘노동’이 언급되었으며 2009년 4월 국제포럼에서도 언급되었으며 6월 29일 성노동자의 날 행사에서 본격적으로 나온 셈입니다.

    서윤호(사회): 아까 이은정 선생님 발표에서 2002년 이성숙 선생님 글에서 처음으로 ‘성노동’이란 용어가 있다고 그렇게 얘기 하셨죠?

    밀사: 그 이성숙 선생님의 성노동은 단순히 ‘섹스 워커’라는 개념의 번역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윤호(사회): 네, 알겠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는 자연스럽게 성노동자의 당사자성이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밀사 선생님 아니면 김연희 선생님 두 분의 얘기를 좀 더 들어보고 논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밀사: 우리가 당사자에 대해서 생각을 할 때 항상 간과하는 것이 있는데, 성노동자를 예로 들면, 성노동자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성노동자는 아니었단 말이죠. 태어나서 부모와 사회를 통한 사회화를 거쳐서 어떤 관념들과 통념들을 습득하면서 자라나는데, 그러다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어서 성노동을 하게 된단 말이죠. 이 상황에서 당사자가 흔히들 말하는 것 중에 하나로, 당사자들이 자신의 일을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느냐, 성노동이란 개념이 과연 의미가 있느냐,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는데, 아까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당사자는 처음부터 당사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성노동은 어떤 부정적인 노동이다,’ ‘성매매는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도덕적인 것이다,’라는 통념이 있고 그것을 온전히 습득을 하면서 자라난 사람이라면, 자기가 어떤 상황에 흘러들어서 성노동을 하게 되는 상황에 처했을 때, 과연 그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얼마나 있겠느냐의 문제죠. 이런 상태에서 당사자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는 것이 무책임하다는 결론에 다다르는 것인데, 일단 이정도 정리하고 나중에 생각나면 더 이야기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서윤호(사회): 네, 김연희 선생님 더 부가하시고 싶으신 얘기 있으신지요?

    김연희: 밀사가 말한 이야기에 저는 동의하는 편입니다. 제 개인적 체험을 조금 말씀드릴께요. 제가 성노동자권리 운동을 하기 때문에 아가씨들이 허물없이 저에게 많은 얘기를 해요. 너 왜 그런 운동하냐고 물어봐요. 그리고 나이 많은 언니들은 성노동자권리운동도 여성단체처럼 머리핀이나 과자 몇 개주고 끝나는 그런 모임이냐고 물어봐요. 기존의 여성운동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아무튼 아가씨들의 인식이 그러해요. 그리고 성매매 종사하는 언니들은 그런 단체가 “너희는 사회의 피해자이다. 앞으로는 성매매를 하지 말아라” 이렇게 말을 하는 게 너무나 싫데요. 이런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잖아요. 직업이 사람의 전부인 것도 아니고. 그런데 여성단체들은 우리의 직업만을 가지고 우리 전체를 판단한다고 언니들은 불평해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이래요. 우리가 성매매를 하니까 그나마 굶지 않고 살 수 있고, 자식들 공부도 시키고 우리도 공부할 수 있다, 이거에요. 이러한 생각을 가진 언니들이 진정 주체적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성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지지와 같은 모임 이야기를 하면 이렇게 말하는 언니들도 있어요. “우리가 어떻게 그런 권리를 누릴 수 있냐? 우리는 일하고 세금도 안 내는데. 다른 일반 사람처럼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제 생각에, 그런 언니들은 아까 밀사가 말한 대로 사회적 편견을 자기 것으로 체득하고 또 사회적 낙인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요. 제 개인적으로도 처음에 저의 일을 노동이라고 생각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제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면, 저는 중학교 2학년에 서른 살 남자와 처음 섹스를 했어요. 정말 해보고 싶어서 그분에게 졸랐거든요. 그런데 그것으로 낙인이 찍힐 줄 몰랐어요. 그게 소문이 났어요. 그러면서 그 파급 효과가 저한테 굉장히 충격적으로 다가왔어요. 원조교제를 하는 아이로 학교에서도 매장을 당하고, 동네에서도 집밖에 나가기 어려웠어요. 그때 이런 억울한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그 분을 선택하고 내가 섹스를 하자고 졸랐는데도 왜 내가 이렇게 모욕을 당하는 것일까? 내가 선물이나 돈을 받은 것도 아닌데, 단지 나이 차가 많은 사람과 섹스를 했다는 이유로 원조교제라는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그렇게 낙인이 찍힌 이후로 저는 ‘뭔가 잘못되었다. 나는 억울하다’는 생각을 쭉 가지고 자랐어요. 일 하면서도 그런 생각이 떠나질 않았어요. 그런데 ‘이 일이 정당한 노동’이라고 받아들이긴 어려웠어요. 왜냐면 불법이었고 항상 경찰들이 단속을 하고,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미아리 텍사스에서 일할 때는 경찰들이 그냥 공짜로 즐기고 갔어요. 화대도 못 받았어요. 그래서 경찰이 오는 날이 제일 싫었어요. 그런데 어디에다 호소할 데도 없고, 또 말을 해도 미친년으로 취급이 됐을 거예요. 이와 같이 아무데도 하소연할 수 없는 사회에서 내가 하는 일이 ‘노동이다’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웠어요. 그리고 저희 일이 노동이라고 생각하는 언니도 경찰 단속에 걸려서 알몸으로 사진 찍히고 욕설을 듣고 하다보면 다른 언니보다 더욱 견디기가 힘이 들었어요. ‘노동’이라고 생각했는데 쓰레기처럼 취급이 되는 현실에서 자존감이 짓밟혀 망가지는 언니들을 많이 봤어요. 이러한 이유로 저는 당사자성에 너무 무게를 두는 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사회에서 범죄자 취급을 받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사회가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우리를 받아들일 때 성노동자도 노동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에야 당사자성도 가능하지요. 지금으로서는 문제의 해결 방안을 당사자한테 맡겨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봐요. 성매매의 현장을 직접 가보고 이야기도 나누고 그러한 다음에 어떤 인권적 차원과 어떤 여성주의적 차원에서 성매매를 접근해야 될 것인지 이야기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당사자가 이렇게 생각하니까, 이렇게 생각해야 돼’ 하는 식의 접근, 이것은 아직은 아닙니다.

    서윤호(사회): 네, 고정갑희 선생님, 말씀해주시죠.

    고정갑희: 네, 당사자성, 사실 여기 계신 분들도 어떤 형태로든 생각해 오셨던 부분일 것 같긴 한데요. 성특법이 시행되면서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법이라는 말이 나왔었지요. 예를 들면, 매춘이 노동이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비범죄화를 주장하는 저의 입장에 대해 당사자들도 모르는 탁상공론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습니다. 집창촌이 사실 여성들이 접근하기는 어려운 공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들 외에는 ‘금녀구역’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성운동 진영에서는 서로 다른 입장에서 당사자성을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창촌에서는 ‘여성단체 사절’이라는 문구를 보기도 하였습니다. 집창촌의 성노동자들과 허심탄회하게 만나기는 어려웠고, 다른 성노동자들도 만나기 어려웠습니다.

    성특법 이후에 오히려 그런 계기가 만들어졌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성매매’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탈성매매하는 여성들과 만나는 경우도 성특법 이전보다는 이후가 더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 경험으로도 지나가면서 동네에서 개인 사업을 하고 있는 분들을 보면서 시선을 피해야 됐던 적도 있었던 거죠. 뭔가 나와는 거리가 있었던 사람들이었던 거고, 저 사람은 저기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고, 그리고 저 사람이 내가 지나가는데 같은 여성인데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서 우리는 왜 이렇게 갈라져 있을까, 라는 고민을 하게 됐던 적이 있습니다. 뭔가 이제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만 막상 무엇이 당사자들에게 좋은 것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구조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노동과 관련하여 억압의 측면도 있고 폭력의 측면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성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고 개인적으로는 2005년 4월 국제포럼을 준비하면서 성노동자 당사자들을 만나고 직접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표현되지 못한 상황에서 2004년 성특법이 시행이 됐고, 시행이 되자마자 집창촌의 성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출이나 재활을 바라지 않는다.’라는 목소리들이 강하게 나오고, 소복 시위를 하고 삭발 시위를 하고, 여의도 앞에서 그렇게 시위를 하는 그 현장을 한국 사회는 목도한거고 저도 본 겁니다. 2000년과 2001년에 군산 대명동, 소위 ‘쉬파리’ 골목이라고 하는 곳에서 성노동자들이 불에 타 죽는 사건이 두 차례 있었습니다. 이 사건들 이후 여성 단체들은 어쨌든 어떻게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던 거고, 실질적으로는 그것을 파악하고 해석하는 방식이 훨씬 더 여성 성노동자들에게 억압적인 방식으로 다가간 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사실은 중요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저는 여전히 당사자들이 함께 하는 성노동운동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밀사가 말한대로 당사자에게만 맡기는 것은 문제이지만 현장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성노동자들을 위한 인권인지를 이야기할 수 있기 위해서도 성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더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성매매와 성노동을 둘러싸고 ‘인권’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하겠습니다. 성매매 종사자 여성들이 억압과 착취를 당하니, 그들의 인권을 위해 집창촌을 폐쇄해야 한다고 생각한 입장이 있고, 성매매종사 여성들이 스스로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는 권리, 노동할 수 있는 권리가 그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한 방법이라는 입장이 있는 셈입니다.

    국가의 법에 의해 자기가 있는 자리를 떠나야 하거나, 단속을 당해 콘돔을 입으로 삼키거나 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인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노동자권리모임 지지가 출범할 즈음에 성노동자 당사자들이 원하는 지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경찰에 불려가거나 끌려가는 성노동자들의 인권을 보장해 줄 변호사 혹은 법적 지원이 가장 필요하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막상 개인적으로 접촉한 변호사나 법관련자들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아는 변호사들도 얼굴을 돌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성노동자운동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에야 이제 조금씩의 지지가 가능해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성노동자권리 모임 지지는 ‘대단한 여자들 Great Girls' 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지지’와 지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지지는 당사자들과 지지자들이 함께 하는 단체이며, 이는 당사자들이 함께 하는 것의 중요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현장과 관련된 특수한 상황 속에서는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내야 되고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성노동 운동’은 ‘성노동자 운동’을 반드시 포함하는 운동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사자들도 주체가 되고 당사자들이 여성주의자가 되고, 그래서 함께 가부장체제든, 성 산업이든, 자본주의 체제든 같이 싸워 낼 수 있는 노동자들로서의 주체도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초기에 생각했습니다. 성노동자 여성들이 여성노동자들로서의 주체도 될 수 있는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2005년 즈음에는 다양한 사회단체의 여성활동가들이 함께 하고, 성노동자 당사자들도 함께 한 네트워크 운동이었습니다. 집창촌의 노동자들이 노조를 형성하고 다른 사회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움직였습니다.

    지금 지지는 성노동자 당사자들과 지지자들이 함께 하면서 성노동운동이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노동운동에 지지가 중심이 되어 있는 상황이라 밀사가 당사자에게만 맡기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이 나올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지적에 동의합니다. 저도 최근에는 다른 활동으로 제대로 시간을 못 내고 있습니다. 당사자주의는 저도 반대합니다. 성노동운동에서 성노동자만 당사자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노동운동이 성노동자들의 운동을 토대로 하면서 당사자주의를 넘어 함께 하는 운동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노동자 운동’ 만으로 되어선 안된다는 데 동의합니다. 밀사가 말한 것처럼 당사자에게만 맡기고 나몰라라 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성노동운동 안에는 성노동자 계급으로서의 인식, 성계급적인 의식이 포함되기를 바랍니다. 상당수의 운동들이 사실 보면 정체성을 기반하여 운동이 시작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당사자들에게서 시작된 운동들이 한계도 분명합니다. 그 당사자들만 하는 운동으로 되거나 당사자들의 이해관계만 이야기하는 쪽으로가 아니라 이 노동이 어떤 노동인지 그래서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갈 건지, 이 운동이 정말 여성 해방과 성 해방과 인간 해방과 노동 해방까지 갈 수 있는 어떤 지점을 우리가 만들어 갈 수 있는지 당사자들과 당사자 아닌 모두 다른 사람들(다른 당사자들)이 함께 하면서 성 노동 운동을 만들어가면 좋겠습니다.

    서윤호(사회): 예, 고정갑희 선생님께서 당사자성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성 노동자 또는 성노동 운동의 전체 현황과 미래 전망까지도 언급하신 거 같아요. 그러면 우리가 다뤄야 할 주제 가운데 페미니즘 내에서의 다양한 층위에 대한 논의만 남은 셈입니다, 지금 시간이 다섯 시 십오 분 가까이 되어가고, 다섯 시 반 정도에는 이 좌담을 매듭을 지어야 하는데요. 이제는 서서히 남은 주제에 집중해서 선생님들의 말씀을 듣고, 일단 이 좌담을 마무리하고 플로어의 질문을 받고 자연스럽게 이어서 종합 토론도 함께 진행을 할까 합니다. 괜찮으세요? 아니면 저녁식사를 좀 더 뒤로 미루고 좌담을 더 진행할까요? 역시 밥이 제일 중요하군요. 그러면 선생님들께서는 서서히 마무리 발언으로 좌담을 진행해주시기 바랍니다.

    밀사: 저는 연희와 거의 동시에 활동을 시작했는데, 연희가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굉장히 많은 뭐랄까… 감동을 받았다고나 할까요, 연희, 처음에 트위터에서 저를 읽기 위해서 트위터를 시작했다고 했는데, 지금은 저 못지않은 훌륭한 트위터가 되었어요. 그래서 자기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하고 자기 생각도 말하기 시작했어요. 아이디를 바꾸고서는 공격적으로 활동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 걸 보면서… 그러니까 성노동자가 어떤 우리들이 바라는 주체로서의 당사자 의식을 가지기 까지는 이제 활동가가 키워지는 것처럼 당사자 역시 키워지고 성장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우리가 그런 의식들을 나눠가면서 함께 성장할 수 있어야 된다고 보고, 그래서 저는 성노동 운동 진영에서 성노동자들이 그런 당사자 의식을 키워나가고 그 의식으로 자신을 긍정하게 되면서 더욱더 힘을 키워 나갈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 고군분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책임감을 느끼고 있고요. 그래서 당사자성에 대한 논의는 이제 성노동자의 당사자성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서 이 당사자성을 어떻게 만들어 가고 계발해 나갈 것인가의 문제를 같이 생각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이정도로 마무리 하도록 할게요.

    김종갑: 역사적으로 성은 언제나 사회적 맥락에서 놓여있었습니다. 결혼이나 출생, 친족관계 등과 맞물려 있었지요. 그런데 성매매는 성을 이러한 맥락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성 자체에 집중하게 하게 계기를 만들어주었어요. 그러한 사회적 장치에서 벗어난 성, 그것이 성의 실재가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실재를 정면으로 직시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우회적인 방식으로, 즉 성을 성이 아니라 결혼이나 사랑 등의 개념을 빌어서 접근하게 되지요. 특히 여자의 경우에는 성을 모르는 것이 특권이었습니다. 성에 대해 모르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 무지의 특권이지요. 그런데 그런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도 그랬지요. 세상물정을 모르는 사람이 양반집 자제이고, 밖에 돌아다니면서 세상이 무엇인지 아는 여자는 화류계 여자나 하녀였지요. 19세기 영국에서도 ‘성’이 무엇인지 아는 여자는 타락한 여자로 간주가 됐어요. 그래서 멋있는 ‘다리’라는 말도 함부로 할 수가 없었지요. 좋은 집안의 여자들이라면 다리라는 말만 들어도 입에 거품 물고 쓰러질 정도로 자신이 성적인 것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어요. 그렇게 무지한 여자만이 화류계의 여자가 아니라 요조숙녀이며 진짜 여자로 간주되었지요.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접대와 같은 문제가 이슈가 되면 신문은 그것이 엄청난 사건인 듯 과장을 하고 사람들은 있을 수 없는 부도덕한 일이라는 듯한 반응을 보입니다. 성접대를 받고 성을 그렇게 가까이서 아는 사람은 나쁘다는 것이지요. 쾌락의 문제가 도덕적 문제로 비화되는 것입니다.

    성매매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보면 무지의 특권으로 모든 것을 얼버무리거나 합리화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입에 담기만 해도 부정 탄거나 불결한 무엇에 오염된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니 성매매나 성노동에 대해서 떳떳하게 이야기를 할 수가 없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져요. 제작년에 TV에서 성매매에 관한 좌담이 있었어요. 그대 어떤 여교수가 토론자의 한 명이었는데 김연희 씨가 ‘성 노동을 하면서 즐거울 때도 있다’고 말하자 그분이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표정을 짓는 것이었어요. 그러면서 그러한 경멸이 당연하다는 듯이 시청자의 동의를 구하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 분은 성노동의 실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 것을 아는 것은 자기와 같이 고상한 여자에게는 모욕이라는 듯한 표정을 짓으면서 연희씨는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고 대꾸했어요. 그 여교수가 믿고 있었던 것은 성매매 할 필요가 없는 다수의 방청객이고 시청자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자기 편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대놓고서 김연희씨에게 모욕을 주었던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무지의 특권을 간판처럼 내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들은 적나라한 성의 실재를 몰라도 될 정도의 신분이라는 것이지요. 저는 성매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이러한 무지의 베일을 벗고서 성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연희: 일단 ‘쾌락’ 이야기가 나왔으니 좀 덧붙일께요. 저는 일할 때 남자친구와 섹스하는 것보다 더 많은 오르가즘을 느낍니다. 제 스스로 성노동자들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지요. 하루에 열 번은 해야 몸이 풀린다고 말하는 아가씨도 있어요. 방금 받은 손님이 몸도 좋고 그것도 좋다고 흐뭇해하며, 그 남자가 다시 왔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해요.

    지금 제가 돌이켜보면 성노동도 전문직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도 진상이 아니라면 그런 관계를 즐기기도 해요.

    그리고 이게 주제와 연결되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다른 직업에 비해서 성노동이 훨씬 깔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학원이나 편의점, 그리고 동물 병원에서 수의 간호사로 일을 해본 적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정당하게 일하고 월급을 받는데도 원장이 선심을 쓰는 듯하고 생색을 내는 거예요. 그리고 회식 자리에서는 가까이 앉아서 술을 따르라고 해요. 월급으로 140만원을 주면서요. 그래서 일반 노동 환경이 성매매보다 더 열악하다는 생각도 드는 거예요. 그리고 성매매가 노동 해방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느낌도 들어요. 우리는 매일 일당으로 급료를 받고, 조금이라도 일을 더 하면 추가로 돈을 더 받아요. 그런데 월급쟁이를 보세요. 제 친구인 바리스타는 신입 들어오면 교육을 시켜야 하고, 손님이 몰리면 한 두 시간 더 일을 하기도 해요. 그런데도 그런 노동이 월급에 추가되지 않는다. 전 그것이 너무 이상합니다. 우리에겐 그런 일이 없거든요. 예전에는 포주가 갑이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포주가 싫은 말을 하거나 돈을 제대로 계산해 주지 않으면 당장 그만두어버리니까요. 우리가 일할 곳은 많으니까요. 배고픈 데 업주들이 족발이나 치킨을 사주지 않았다고 해서 그만둔 언니도 봤어요. 우리에겐 더 좋은 환경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니까요. 일반 노동환경도 이렇게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서윤호(사회): 감사합니다. 김연희 선생님은 전에도 김종갑 선생님과 함께 좌담회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요. 사실 그때는 시간이 많아서 생생한 이야기를 더 많이 들을 수가 있었는데요. 성 노동의 노동 현장은 다른 노동 현장보다 굉장히 인간애가 끈끈하고 오히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노동 건전성, 건강성’ 이라고 해야 될까요? 그런 내용들을 들을 수가 있었어요.

    김종갑: 자매애라고 할 수 있지요. 핍박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는 사람들일수록 그들 사이에 결속력이 강해지지 않습니까? 성노동자들 사이에 자매애가 강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서윤호(사회): 네, 맞습니다. 그런 자매애가 엄청 강하더라고요. 마지막으로 고정갑희 선생님, 마무리 발언을 부탁드립니다.

    고정갑희: 저는 지금 성노동운동의 방향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낙인 없애기, 법적 투쟁, 그리고 다른 노동들과의 연대, 성노동의 긍정적 측면 강조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먼저 낙인과 관련하여 보면 성노동은 다른 노동들과 다른 특수한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서비스노동인데 성적 서비스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성적 서비스는 공장 노동이나 산업 노동 그리고 다른 서비스 노동들과도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당 부분 여성들이 하는 노동이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남성이나 트랜스젠더, 퀴어들의 성노동이 있지만 현재로선 여성들의 노동으로 간주하는 면이 있습니다. 여성들의 정절이나 순결과 관련된 오래된 인습적 사고가 작동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낙인은 ‘성’ 혹은 섹스에 대한 혐오와도 관련됩니다. 정신에 비해 육체가 비하되고, ‘육체적 관계’가 비하되어 왔습니다. 매춘 성노동이 육체적 관계로 인식되면서 혐오의 대상이 되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노동과 관련하여 낙인은 일부일처제 중심의 결혼과 가족제도가 만들어 내는 성관념과 연관이 있습니다. 일부일처제 결혼과 가족제도는 그 바깥의 성적 관계와 노동에 대해 관대하지 않습니다. 낙인이 없어지려면 결혼제도와 가족제도의 문제도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매춘에 대한 낙인은 ‘성’에 대한 관념뿐만 아니라 ‘노동’에 대한 관념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떤 일은 노동이고 가치 있는 것이고 어떤 일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정하는 사회의 인식이 성노동에 대한 낙인과 관련됩니다. 자본주의 가부장체제 하에서 노동과 가치의 관계를 더 면밀히 살피고 대안적 관계를 위한 노동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더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래와 관련하여서도 우리가 하는 모든 거래를 다시 살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적 거래의 범위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매춘 성노동만 금전적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힐 필요도 있습니다.

    매춘 성노동을 둘러싼 낙인을 없애는 것이 성노동운동의 중요한 한 지점이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사회자가 처음 서두에서 법적인 문제보다 문화적이거나 사회적 인식의 문제를 이야기하자는 제안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마지막 발언에서는 법적인 문제도 언급하고자 합니다. 현재 한국의 성노동운동에서 법적 투쟁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법적 승인을 받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 승인이 낙인을 없애기 위한 한 방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매춘 성노동을 통해 가부장적인 성체계에 대한 다른 대안적인 성관계들에 대한 관점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여성들 사이를 갈라놓는 계급적 측면이나 위계적 측면이 무엇인지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매춘 성노동자들과 주부를 가르는 선은 무엇이고, 가사노동자들과 갈라놓는 선은 무엇인지 성노동운동에서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노동운동을 통해 쾌락이나 친밀감, 돌봄과 감정의 관계들을 사회적으로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윤호(사회): 네, 감사합니다. 좌담회가 더 길었으면 좋겠는데, 시간제약상 이것으로 정리를 하겠습니다. 법적 차원에서 성매매는 불법이지만, 그래도 사회적 담론 차원에서는 성노동의 문제와 관련하여 직접 현장에서 일하셨던 선생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아직 생경한 부분도 있지만 조금은 인식의 전환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사회적 인식의 전환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으로 오늘 좌담회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플로어의 질문은 종합 토론에서 한꺼번에 다 받을 생각입니다. 1부에서 발표하셨던 선생님들, 우미성 선생님, 이은정 선생님, 그리고 황혜진 선생님, 이 세 분 모두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휴식없이 바로 종합토론을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좌담하신 네 분 선생님들도 그대로 앉아 계시기 바랍니다. 선생님들께도 질문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자리 정리: 의자 소리, 대화 소리] 목소리 작으신 분들은 마이크 쓰시고요. 뒤에까지 다 들릴 테니까 그냥 마이크 없이 말씀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먼저, 플로어에서 질문이 있으신 분 말씀해주시죠.

    청중: 지금 여기가 페미니즘학회이니까 저도 여성의 하나로서 질문할 게 있습니다. 김연희 씨도 여성의 하나이고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저하고 친한 부부와 관계가 있어요. 남편과 아내, 둘 다 제 친구인데 남편이 아내와 관계를 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성욕을 해결해요. 그런데도 부부가 사이가 좋아요. 제가 김연희씨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가 집에서 살림을 하는 여성도 잊으면 안 된다는 것이죠. 저의 또 다른 커플 친구가 있는데, 거기서도 남자가 밖에서 해결을 한다고 해요. 그래서 저는 성노동자의 해방, 권리, 이러한 주장도 중요하지만, 가정의 여성들이 남편과 쾌락을 누릴 수 있는 권리도 인정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성노동자의 권리 못지 않게 아내들의 권리도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김연희: 제가 대답을 해야 하나요? 사실 저는 결혼을 해서 섹스를 독점하는 것에 대해서 일단 반대하는 입장이고요. 연애 관계에서도 섹스의 독점을 반대합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청중: 김연희씨가 모르는, 성관계에서 소외된 여성들이 많이 있을 수 있어요.

    밀사: 가정 여성의 소외가 성노동자에 의해서 초래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거는 가부장제가 만든 것이 아니나요? 저는 가부장제를 비판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 노동에서 다룰 문제가 페미니스트 전체가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해요. 남편이 밖에서 해결하는데 왜 아내는 밖에서 해결을 할 수가 없을까? 또 성관계에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무엇일까?

    청중: 문제의 핵심은 거기에 있는 게 아니고요. 남편이 밖에서 해결하면 너도 그렇게 해라고 친구에게 말할지 못해요. 여자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현실을 생각해야 하지요.

    밀사: 네, 그것에 대해서는 성노동운동에서도 충분히 고려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서윤호(사회): 예. 다음 질문 받겠습니다.

    청중: 제가 이제 석사 1기이기 때문에 전문적 지식이 없습니다. 다만 일반적인 가정 주부의 입장을 대변할 수는 있습니다. 아까 당사자성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전 성노동자가 아니라 ‘성종사자’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저도 노동에 대한 신성성을 갖고 있거든요. 그래서 성 종사자라고 말씀드리는데, 성 종사자들 가운데는 남자들도 있어요. 남자들도 있죠? 그런데 성을 노동이라고 칭하는 것은 사회적인 직업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 됩니다. 만약에 정당한 노동으로 인정이 되면 당장 아이들 교육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리고 가정에 대한 가치관도 바뀔 수 있어요.

    그리고 섹스와 사랑은 분리될 수 있다고 했는데 저는 동의하지 않아요. ‘여자는 왜 못하냐’고 했지요? 사회적으로 기회가 적기도 하지만 여자의 정신적인 가치관하고도 관계가 있는 거거든요. 만약 여자에게도 성이 개방이 되어서 여자들도 밖에서 성욕을 해소할 수 있다 할지라도, 여자가 섹스에서 느끼는 감정적인 가치하고 남자가 느끼는 감정적인 가치하고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여자가 남편과 섹스를 할 때에는 남편에 대한 신뢰까지도 포함되어 있어요. 그런데 남편이 밖에서 해소하고 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성의 완전한 자유가 우리가 바라는 사회의 모습인지 아닌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과거에 화재가 있었는데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불에 타 죽은 성매매 여성들이 있었지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고 하지요. 저는 이것이 성노동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라고 봅니다. 성을 노동으로 인정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지요.

    그리고 무지의 특권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사실 우리가 조선 시대에는 성매매를 인정했거든요. 직업의 귀천이 있긴 했지만 당시에 성을 직업으로 인정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현재에 성노동을 인정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취지에 맞는지 어떤지 모르겠어요. 아까 당사자란 말을 했는데 성을 노동으로 인정하게 되면 당사자가 되게 많아지는 거예요. 가정을 가진 주부가 될 수도 있고 앞으로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당사자가 될 수 있고, 우리 아이들까지 당사자고. 지금 다 각자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 서로 당사자로 보거든요. 그러니까 이거는 단순하지 않은 것 같아요.

    서윤호(사회): 일단은 사회자로서 잠시 논의를 정리하겠습니다. 지금 질문해주신 내용은 너무 큰 뿌리를 건드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성매매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성노동의 합법화라는 미묘한 문제를 지금 우리의 논의가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성매매 특별법은 매우 특수한 지점에 놓여 있어요. 전 세계적으로도 이런 경우가 없을 정도입니다. 또 성노동의 합법화는 아직 너무 미래의 일이고, 합법화했던 나라들의 경우에도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하고 있지요. 독일의 경우에는 한 십년정도 지나 성노동 합법화에 대한 평가를 했는데 그게 의도했던 것처럼 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논의는 매우 복잡한 지점 속에 놓여 있는데요,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한 것은 성노동 현장에 있었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회적 인식의 차원에서 과연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기존의 성매매 또는 성노동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들을 조금 흔들어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없겠는가를 한 번 논의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요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여기에서 질문으로 받아들이면 우리 모두가 저녁을 포기해야 되는 사태가 올 것 같아서 이 질문은 죄송하지만 정중하게 반려하도록 하겠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청중: 황혜진 선생님, 말씀하신 것 중에서 기생과 관련해서 말씀하신 내용을 잠깐만 더 설명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황혜진: 설명을 하자면 관기는 국가나 관에 속해 있었죠. 그런데 이것을 직업으로 인정하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사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일종의 노예 노동이어서 기생에게는 세 가지 종류의 의무가 있었어요. 첫 번째는 국가의 여흥에 동원되는 예술인으로서 춤추고 노래하는 역할을 해야 됐고, 두 번째는 외국 사신이 오면 접대를 해야 됐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변방 군사들을 위로해야 했습니다. 사실 조선 시대의 근엄한 양반들이 이 기생제도를 혁파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 이 세 번째 이유라고 합니다. 기생이 없다면 누가 변방에 가서 일하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아무튼 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직업으로 인정을 할 수 없고요. 그리고 조선 시대에도 기생에 빠진 양반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그 양반 마님들도 마찬가지 고민들을 했습니다. 야담에 이런 이야기도 있어요. 기생에 빠진 남편한테 마님이 ‘왜 그렇게 나한테는 기생처럼 안 대해 주시오, 왜 나를 사랑해주지 않으시오?’하며 대들었어요. 그랬더니 남편이라는 작자가 ‘당신은 부인이고, 예절을 갖춰 대해야 합니다. 나도 분별이 있는 사람이지 않소.’ 그러자 이 여자가 남편을 때리며 울면서 ‘누가 나한테 분별해달라고 했소? 언제 내가 예절을 갖춰 대해 달랬소?’ 그랬던 걸 보면, 갈등의 역사는 꽤 오래된 것 같습니다.

    청중: 저도 지지에서 같이 활동을 하고 있고, 지금 여성학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선 쾌락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아까 이은정 선생님은 쾌락을 위해서 매춘을 하는 자들을 생계를 위해서 매춘을 하는 자들을 구분했는데, 이게 가능할까요? 그리고 연희씨의 입장을 대변하자면, 성매매에도 쾌락이 가능하다는 것이지 그러한 쾌락을 위해서 성매매를 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생계와 쾌락의 구분이 가능한지 의심이 들어요. 그리고 저는 성노동자가 쾌락을 위해서 노동을 한다 라는 발상 자체도 저는 굉장히 남성중심적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남성적 투사나 환상이 아닐까요?

    김종갑: 쾌락에 대해서 부연 설명을 하기로 하지요. 저도 이은정선생님의 생각과 동의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갈라지는 지점은 쾌락을 담론화, 혹은 공론화할 필요성에 있습니다. 성매매에 대한 기존의 논의에서 성노동자의 쾌락이 언급된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노종자를 가부장제의 희생자, 가난의 희생자, 이런 식으로 희생자화하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지요. 저는 이러한 희생자 논리에 대한 대항담론으로서 쾌락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렵고 힘든 일도 즐기면서 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성노동을 통해서 돈만 버는 것이 아니라 쾌락을 얻는 여성도 있다는 것이지요. 최근에 제가 Live Sex Acts라는 제목의 책을 보았는데, 주로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담아 놓은 책입니다. 제가 그 책에서 신선하게 느꼈던 것은, 좋아서 자발적으로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자들이 있으며 또 그러한 여자들은 비교적 성적 쾌감을 많이 느낀다고 합니다. 정확한 수치는 기억을 못하는데, 성매매 종사자의 약 20%정도가 그러한 쾌감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이은정: 미셀 앙리가 말하는 쾌락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쾌락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말씀드릴께요.

    청중: 성매매특별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법이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단속을 하게 돼있지만 사실은 우리나라의 성매매 정책이 한쪽으로는 금지하지만 다른 쪽으로는 암묵적으로 허용하는 방식을 취해왔어요. 일본의 기생관광을 권장하기도 했지요. 이 점에서 우리나라는 성이 억압된 반면에 또 매우 과잉된 사회입니다.

    서윤호(사회): 네 알겠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한 분만 더 질문을 받겠습니다.

    청중: 저도 쾌락과 관련해서 한 마디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쾌락의 스펙트럼을 너무 작게 잡고 있지 않은가요? 김연희씨가 고객과 애니팡을 하면서 느끼는 쾌감은 정서적인 것이지요. 그리고 자기의 능력에 흐뭇해할 만큼 성노동을 잘 할 수도 있고요. 그리고 가정주부의 성적 쾌락도 넓은 스펙트럼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정주부들이 왜 밖에 나가서 해결을 못하느냐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봐요. 가정주부 당사자도 당사자인 동시에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성장했거든요. 그런데 ‘너는 틀렸으니 그 생각을 바꿔라’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다만 쾌락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각자가 서로 다른 쾌락을 추구하는 통로를 넓혀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쾌락이 지나치게 성적으로만 치우쳐 있다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인 거 같습니다. 우리는 쾌락의 평등보다는 쾌락의 다양성부터 먼저 인정해야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해봤습니다.

    서윤호(사회): 여기 단상에 계신 발표자님들, 좌담에 참석하신 선생님들 중에서 질문에 답변을 해주시죠. 그리고 오늘 학술대회 마무리를 위해 1분씩 최종 발언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먼저 김종갑 선생님 얘기부터 들어보죠.

    김종갑: 네, 한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아까 쾌락을 얘기하면서 헤겔을 잠시 언급했었는데,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두 종류로 쾌감을 분류했습니다. 하나가 Genuss라면 또 하나는 Zufriedenheit입니다. 전자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얻어지는 쾌락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후자는 설악산의 정상에 올라서 우리가 느끼는 쾌감처럼 노력의 결과로 얻어지는 기쁨입니다. 이것은 만족감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쾌감에는 저절로 주어지는 쾌감이 있는가 하면, 노력을 통한 성취에서 오는 쾌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노동자의 쾌감을 논의해야 할 필요성이 이러한 개념의 구분에 있습니다. 성매수자가 관능적 쾌락을 느낀다면 성노동자는 노동에서 오는 만족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양자를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명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지만 이와 같이 종류가 다양한 쾌락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는데 성적 쾌감의 질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고 싶습니다. 쾌감은 본능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치적 역사적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것과는 다른 종류의 쾌감을 우리가 개발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쾌감은 감각과 떼어놓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감각은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쾌감이 정치적일 수가 있지요. 기존의 것과는 다른 감각의 배치, 다른 성감대가 가능합니다. 손으로 만지면서 느끼는 촉각적 쾌감이 있는가 하면, 보면서 느끼는 시각적 쾌감, 달콤한 말을 속삭이면서 오는 청각적 쾌감 등 쾌감의 종류가 다양한 것이지요. 우리가 할 일은 쾌감의 영토를 확대하고 새로운 지형을 만드는 것입니다.

    황혜진: 조선 시대에는 기생이 남긴 문학 작품이 많고, 제가 다룬 작품들, 제 연구에서 언급한 작품들도 기생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어나죠. 그런데 현재 성노동자들의 목소리나 진솔한 모습이 담겨 있는 그런 텍스트들이 너무 없어요. 제가 잘 모르는 부분도 있지만, 성노동자들도 자신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고 그것을 공유하고 공감하면 더욱 연대할 수 있는 그런 길이 열리지 않을까요?

    밀사: 저는 한 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요. 성노동을 인정하는 게 여성주의라고 생각하고요. 그 이유는 여성들이 의도치 않게 혹은 의도로 성 쾌락 노동에 계속 종사해 왔고, 그리고 의도하든 의도치 않던, 그런 어떤 매춘의 경계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인 만큼 그것은 여성의 행위이고 여성만이 해왔던 것이고, 여성의 역사이기도 하거든요. 여성이 비자발적으로 그런 매춘 상황에 빠지는 것은 반드시 비판해야할 요소이지만, 가정주부이든 성노동자이든 성노동을 하지 않는 비 당사자이든 결국 성노동이라는 행위성에서 자유롭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여성의 행위성을 인정하기 위해서라도 성노동을 인정한다는 것은 페미니즘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실천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김연희: 짧게 애기할게요. 성노동 운동이 어떻게 성노동자의 삶을 윤택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예전에는 비범죄화를 위해 운동을 했었는데, 당사자인 언니들에게 법은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에요. 단속에 걸려도 벌금을 물고, 벌금 횟수가 많아지면 지방으로 가고, 최악의 경우에는 1년 정도 구금됐다가 다시 일 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 당장 저의 관심은 문화 운동에 있어요. STD랑 HIV와 같은 성병으로부터 어떻게 우리를 지키며 건강하고 즐겁게 노동을 할 것인가하는 것이지요. 그런 거에 대해서 예전에 집창촌에서는 선배들이 알려줬습니다. 손님을 쉽게 다루는 방법도 알려주고요.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신규 성노동자들이 교육받을 데가 없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런 부분을 저희가 담당했으면 하고요.

    아까 어떤 분이 불에 타 죽는 성매매자를 인권적인 차원으로 보셔야 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정말 그렇게 따로 따로 볼 수 있을까요? 성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미 인권 침해이고, 우리를 폭행하는 손님들이 있는데 그때 우리의 인권을 말할 수가 없어요. 과거에 서로를 보호해주던 집창촌과 달리 요즘은 성매매가 개인화되면서 업주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공간에서 폭행을 당하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그래서 불타 죽는 것만 인권 이슈로 볼 것이 아니라 성노동자들이 노동자로 이야기되지 않고 불법 체제 하에 있는 거 자체가 인권 침해라는 점을 얘기해 드리고 싶어요.

    고정갑희: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을 한 번 더 강조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되겠는데요. 실제로 저는 낙인에 대한 투쟁이 문화적으로 전개되어야 되지만, 불법으로 되어 있는 매춘 성노동에 대한 법적 투쟁도 낙인에 대한 투쟁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법적 투쟁이 노동자의 노동 조건을 바꿀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불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 피해서 숨어야 하거나 외국으로 가야 하게 됩니다. 외국으로 가게 되면 이주 노동자들 중에 남성들은 그냥 이주 노동이 되고, 성노동 관련하여서는 인신매매가 되는 상황들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낙인에 대한 투쟁과 법적 투쟁이 같이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성특법이 불특정 다수와의 섹스, 금전적 거래, 이것을 금지하고 있는데 불특정 다수와의 섹스를 금하는 것은 아까 말씀하신 가정을 유지하는 것과도 연결이 된다고 봅니다. 가정에서 부부간의 관계만 건전한 섹스가 되거나 금전적 거래가 없는 특정인과의 섹스만 건전한 성관계가 됩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돌아서 생각을 해보면 가정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결혼 제도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지금까지 페미니즘이 얘기해 왔던 이 결혼 제도의 가부장적인 문제점 같은 것을 같이 놓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자의 성욕은 인정되지 않는 사회에서 여성들에게도 쾌락이 열리기 위해서 이러한 가부장적인 결혼 제도 자체도 다시 봐야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볼 건가? 저는 성노동자의 운동과 가정주부의 운동은 연동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주부들이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지금 봐야 될 시점이 아닐까 생각해요.

    집창촌이나 음성적인 성 거래가 아이들이 있는 가정이 있는 주택가로 들어온다는 것을 걱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부장체제 하에서 결혼과 가정이 자유로운 곳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금 건너가면 저기에 있는데 여기에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하면서 다 같이 현실을 회피합니다. 사실 아이들은 또 누구이며 아이들은 몰라도 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아이들도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볼 수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보호해 가지고 다음에 어떻게 되는 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서윤호(사회): 예, 모두 장시간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좌담에서 말씀해주신 밀사, 김연희 두 분 선생님께서 활동하시는 성노동자 권리 모임 지지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으로 좌담회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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