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영화 <한공주>가 지니는 작품의 의미를 연구한 논문이다. <한공주>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로 한국 사회의 비윤리적인 측면을 비판적으로 드러낸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실제 발생한 집단 성폭행 사건을 다루지만 장르적 틀에서 사건과 범죄행위를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이 영화는 사건이후에 벌어지는 상황을 관객으로 하여금 관찰하게 하면서 특별한 감정과 태도를 이끌어 낸다.
주목할 것은 이 영화가 인물의 시선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주인공의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는 과거장면은 객관적인 쇼트가 주를 이루지만 현재의 장면은 주인공 한공주의 시선을 이용해 스토리를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한공주의 시선을 통해 주변 인물들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이미지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카자 실버만(Kaja Silverman)에 따르면, ‘보기(looking)’는 사물과 세계를 드러내 존재하게 해주는 수단이다. 사물은 주체에게 보여지는 한에서만 존재를 드러낸다. 실버만의 관점에 따를 때, 이 영화에서 주인공 한공주의 시선은 익숙한 사실을 새롭게 드러내준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의 시선이 우리의 습관적인 보기에서 벗어나 있는 타자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한공주의 시선을 통해 현실의 사실들을 봄으로써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사실의 숨겨진 의미, 즉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또한 한공주의 시선은 대상을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또한 보여진다. 타자에게 보여지는 시선은 부끄러움의 감정을 유발한다. 부끄러움의 감정은 타자의 시선에 자신을 비춰본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것이고 반성적인 것이며, 그래서 윤리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한공주가 지나치게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면, 다른 이들은 타자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므로 부끄러움을 모른다.
영화 <한공주>는 인물의 시선을 이용해 윤리에 대해 질문한다. 우리가 한공주를 단순히 연민과 동정의 시선으로 보지 않고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이는 타자에 대해 자신을 개방하는 것으로, 사회적 관계를 윤리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다.
This study is to find the deeper meaning and new value in the film
It is worth noticing that how this film used the main actress’ eye. While most flashback scenes were organized by objective shots, the current scenes were mostly organized by the main character’s subjective shots. This let the audience to have a critical distance to the image by showing them around the other characters through the eyes of Han Gong-ju.
According to Kaja Silverman, an American film theorist and art historian, the meaning of 'looking' is to reveals the existence of objects and the world, so that they can be unveiled and finally existed in reality. Any object can be existed only when it is shown to somebody. When following the terms of the Silverman, eyes of the main character, Han Gong-ju, in the film make all those familiar fact to be newly appeared. This is possible because it is the gaze of the other, not our habitual point of view. The audience can find a hidden meaning of reality and face the truth by seeing our reality through the eyes of Han Gong-ju.
In addition, the eyes of Han Gong-ju are not a one-sided look at the subject. She is also shown. The felling of shame is from being shown to others. If the feeling of guilty is associated with the inner conscience, the feeling of shame would be connected to those of the ethical questions because the shameful feeling illuminate the social issue in the sense of seeing their own reflection in the eyes of the others. If Han Gong-ju is too conscious of the eyes of the others in the film, the others can't feel any shame because they don’t feel or see the eyes of others.
2013년에 제작된 이수진 감독의 <한공주>는 밀양에서 발생했던 여중생 집단 성폭행이라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는 영화다. 10대 소녀를 같은 또래의 남학생들이 집단적으로 강간한 이 사건은 당시 한국사회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는데,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 역시 이 사건에 깊은 충격을 받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영화의 제작은 그 사건에 대한 깊은 고민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 영화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건을 영화함에 있어 “누가, 어떻게, 왜 그 사건을 저질렀느냐”라는 ‘행위’ 중심의 연출을 피하고 대신에 사건 이후의 상황, 특히 전학 이후 주변인물과의 관계에 비중을 실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이 영화는 자칫 이런 류의 영화가 빠지기 쉬운 장르적 유혹에서 벗어나 사회적 차원의 의미를 획득해 낸다.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 그러니까 가족의 해체, 학교 폭력, 빈곤과 소외, 계급 갈등 등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가 평단의 호의적 반응을 얻었던 것은 이와 같이 사건자체에 대한 흥미를 쫓기보다 이를 계기로 한국사회의 병리적인 모습을 들춰낸 것이 한 몫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공주>가 우리 사회에 대해 비판적 문제제기를 하고 있지만 그러나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은 특별하다. 우선 이 영화는 주인공 한공주의 시선을 통해 여러 인물들을 거리를 두고 지켜보게 하면서 관객에게서 특별한 태도와 감정을 이끌어 낸다. 하지만 그 거리는 흔히 정치적 영화들에서 발견되는, 관객에게 비판적 사고를 이끌어 내기 위한 브레히트적인 거리와는 다르다. 또한 성적 폭력과 타인의 고통을 선정적으로 소비하는 구경꾼의 거리도 아니다. 그렇다면 주인공 한공주에 대해 연민과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거리인가? 벼랑 끝으로 내몰린 10대 소녀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냉혹한 현실을 그저 동정의 감정으로 바라보게만 할 뿐인 그런 식의 거리는 이 영화에선 오히려 위선적인 것으로 다루어진다.
본문의 내용을 당겨 말해보자면 거리를 둔 ‘보기(looking)’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연민과 동정이 나와 상관없다는 거리감을 전제로 하는 감정이라면, 부끄러움은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있다는데서 오는 감정으로, 여기서 시각주체와 대상 간의 거리는 분리가 아닌 서로를 비추는 거울적 거리가 된다. 이는 부끄러움이 윤리적인 것이 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본 논문은 이 영화가 시선이라는 문제를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병든 윤리성을 비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논하기 위해 두 가지 점에서 시선의 문제를 고찰 할 것인데 먼저 주인공 한공주의 시선이 어떻게 우리 사회의 어두운 진실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이를 죄와 부끄러움의 문제와 연결할 것이다. 시선이 부끄러움을 야기한다면 이것은 감정의 차원에서 타자와의 관계로 인한 것으로 이는 윤리적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제를 거론할 것이며, 마지막으로 영화를 본다는 것의 의미를 그와 같은 맥락에서 간략하게나마 반추해보고자 한다.
영화 <한공주>의 스토리는 시간적으로는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과거는 성폭력 사건에 이르는 과정을, 현재는 사건 이후의 생활을 선생님 가족과 친구들 등을 중심으로 보여준다. 과거 장면과 현재 장면 모두 주인공 한공주에 의해 초점화 혹은 필터링 되어 있는데 특히 현재의 장면은 주인공의 시선을 활용해 제시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영화 시작부에서 전화 통화하는 선생님, 고장이 난 선풍기, 지하철 바깥의 한강과 서울 시내의 풍경, 전학간 학교에서 선생님과 교장선생님이 대화하는 모습 등이 한공주의 시선을 통해 제시된다. 그밖에 영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이와 같은 한공주의 시선은 스토리를 제시하는 핵심 장치로 기능한다. 선생님의 어머니가 동네 부녀자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장면, 선생님이 어머니와 파출소 소장을 만나 식사하는 장면, 아카펠라 연습하는 것을 복도에서 창문너머로 보는 장면, 등등 많은 장면들이 광학적 시점 쇼트의 사용 유무와는 상관없이 크게 보아 한공주의 눈을 통해 비춰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과거장면은 비록 한공주에 의해 촉발된 플래시백이어서 그녀의 주관적 기억 혹은 일종의 ‘마인드 스크린’에 해당된다고 하겠지만 상대적으로 시선을 통해 구성 되어 있지는 않다.
영화에서 시선의 문제, 즉 누가 보느냐의 문제는 내레이션에 있어 중요한 문제로 예컨대 ‘시점(point of view)’ 등, 다양한 개념들을 통해 다루어져 왔다. 나아가 이 문제는 서사이론 뿐만 아니라 영화의 사회적, 정치적 역할을 강조하는 관객성 연구에서도 중요한 이슈였는데, 1970년대 장치이론이 마르크시즘과 정신분석학을 끌어 들여 ‘본다는 것’의 문제에 개재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규명하고자 했던 것도 영화의 시선구조가 영화경험에서 발휘하는 강력한 효과 때문이었다.
관객성 연구의 맥락에서 시선에 대한 이해는 주로 권력관계의 관점에서 이루어져 왔다. 벤담의 판옵티콘에 대한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에는 지배와 통제의 권력관계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따르는 대표적인 이론은 잘 알려져 있듯이 페미니즘 영화이론이었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할리우드 영화는 복잡한 시선의 중계과정을 거쳐 남성을 시선의 주체로, 여성을 보기의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시각적 쾌락을 제공한다. 주류 할리우드 내러티브 영화의 핵심적 쾌락을 낳는 이와 같은 시선구조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기에 페미니즘 영화는 이러한 시선구조를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시선의 주체로서 한공주는 그와 같은 권력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는 비록 바라보지만 시선을 통해 대상을 지배하거나 통제하지 못한다. 오히려 반대이다. 그의 시선은 공격적이기보다는 방어적이며, 보는 주체임에도 늘 다른 인물들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시선이 지닌 기능과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관점을 취할 필요가 있다.
카자 실버만Kaja Silverman은 그의 책 『월드 스펙테이터』에서 플라톤과 하이데거에 의거, ‘본다는 것(looking)’을 대상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사물은 눈에 나타날 때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으로, 따라서 바라보는 것은 주체와 세계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 된다. “세계가 나타나 존재하게 될지 아니면 비존재의 어둠으로 흐려져 사라질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뿐이다. 무엇보다 강조해야 할 점은 우리가 바라봄으로써 사물을 빛으로 이끌어 낸다는 사실이다. 사물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것에 실패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은폐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주체로서 마땅히 해야 할 시각적 작인의 활용을 소홀히 했을 때 우리는 사물을 은폐하게 되는 것이다.”1) 따라서 시각적 주체로서 우리는 세계를 진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주체는 은폐되어 있는 대상의 진리를 밝히기 위해서는 제대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계를 진정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아마도 이 질문은 이 영화의 경우, ‘사실과 진실의 차이’라는 문제로 치환될 수 있을 것 같다.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사실은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는 객관적 사건의 실체들 그러니까 실제 이루어진 일들을 말해. 그럼 진실은?” 사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면 과거에 이루어진 성폭행 사건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진실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사실이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는 것이라면 진실은 제대로 보지 못해 은폐되어 있는 것이다. 진실은 드러남으로써만 존재하게 된다. 실버만 식으로 말해보자면, 우리가 그 진실을 보지 않으면 그것은 은폐되어 있다. 한공주의 시선은 바로 그러한 은폐된 진실을 드러내는 보기의 형식이다.
한공주의 시선이 진정한 보기일 수 있는 것은 그의 시선이 타자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우리의 진짜 모습을 스스로 보지 못할 때 타자의 시선은 그것을 드러내 줄 수 있다. 왜냐하면 타자의 시선은 익숙한 사실들이 새롭게 출현하게 해주는 다른 식의 보기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실버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떠한 개별적 존재를 하나의 단일한 시점에서 볼 때 우리는 그것을 구체화 할 수밖에 없다. 창조물이나 사물을 그것의 존재로 방면(release)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관점의 다양성으로 이를 이해해야만 한다.”2) 관점의 다양성이란 다른 식의 보기를 말하는 것으로 한공주의 시선은 우리에게 그러한 보기가 된다. 그리하여 집을 나가 연락을 끊고 다른 남자와 사는 어머니, 돈 몇 푼에 합의서에 도장을 찍어준 아버지, 정규직 발령을 위해 이 일을 떠맡은 선생님, 파출소 소장과 놀아나다 동네 부녀자들로부터 망신을 당하는 선생님 어머니, 등등이 한공주의 시선을 통해 제시될 때 그 익숙한 사실의 외양들은 우리에게 어떤 진실을 전하는 이미지로 아프게 다가온다.
이와 같은 한공주의 시선과 비교할 만한 것이 친구 은희의 시선이다. 은희 역시 어떤 장면에서 시선의 주체로 등장한다. 예컨대 한공주가 엄마를 만나는 장면이나 연습실에서 혼자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장면에서 은희는 한공주를 지켜본다. 하지만 은희의 시선은 관객에게 진실을 드러내주는 진정한 보기로서 경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은희의 시선은 “타자에게 부주의한 시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회의 통념이라는 틀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식으로 바라보는 시선이기 때문이다. 실버만은 다른 존재들을 바라볼 때 마치 우리 앞에 서 있어 잡을 수 있는 대상인 양 다루는 시선은 그 다른 존재들이 나타나도록 허락하지 않는 시선이라 했다.3) 은희의 시선이 과감히 사회적 통념에 도전하는 시선이었다면 한공주는 단순히 성폭행 사건 피해자라는 사실을 넘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현실의 숨겨진 의미, 즉 진실을 드러내는 존재로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것에 실패했기에 단순히 사실에 차원에만 머문다. 이는 드러내기보다는 은폐하는 시선이다.
1)카자 실버만, 전영백과 현대미술연구회 역,『월드 스펙테이터: 하이데거와 라캉의 시각철학』, 예경, 2010, 15쪽. 2)위의 책, 39쪽. 3)위의 책, 36쪽.
영화이론에서 시선에 대한 논의는 시선의 일방적 구조를 강조하는 경향이 컸다. 다시 말해 바라보는 주체와 보여지는 대상사이의 일방적인 시선의 흐름이 그것이다. 가령, 로라 멀비Laura Mulvey에 의하면 영화에는 세 가지 시선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카메라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고 두 번째는 영화 속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인물의 시선이고, 세 번째는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주류 할리우드 영화는 이 가지 시선을 하나로 연계함으로써 대상에 대해 관객-카메라-인물이라는 시선의 단방향적 지배성을 만들어 낸다. 다시 말해 관객은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등인물의 시선과 동일시하여 대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폴 윌레먼Paul Willeman은 세 가지 시선 외에 또 다른 시선의 존재를 언급하며 관객 역시 보여질 수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해 이미지 역시 관객을 본다는 것이다. 그는 이 시선을 라캉의 대타자의 응시와 연관시키면서 ‘4번째 시선(the forth look)’이라 했다. 그런데 본 논문에서 이 4번째 시선과 관련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폴 윌레먼이 인용한 라캉의 말 가운데 들어있는 ‘수치의 감정’이라는 표현이다. 문장을 재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응시는 관음자에게 놀라움을 주며 혼란스럽게 하고 수치의 감정(a feeling of shame)을 준다.”4) 사르트르 역시 이러한 타자의 응시를 부끄러움과 연결한 바 있다. 그는 『존재와 무』에서 부끄러움의 구조를 지향적으로 보면서 부끄러움은 누군가 앞에서의 부끄러움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내가 타자에 대해서 드러나는 그러한 나에 대해서 부끄러워 한다는 것이다.5) 이처럼 시선의 문제는 부끄러움과 관련해 논의 될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부끄러움을 민족적 특성과 관련해 연구한 책은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일 것이다.6) 이 책은 베네딕트가 일본인의 행동문화를 연구한 책으로 일본인의 행동을 부끄러움의 문화라는 측면에서 설명하고 이를 미국의 죄의 문화와 대비하였다. 선과 악을 판별하는 내면화된 기준(양심)에 비추어 행동이 이루어지는 죄의 문화와는 달리, 체면과 평판을 중요시 하는 일본에서는 자기 스스로에 의해서보다는 타인과의 관계라는 외적 기준에 의해 행동이 결정된다. 여기서 부끄러움은 타자의 가치를 기준으로 자신을 타인의 시선에 비추어 볼 때 생겨난다.
영화 <한공주>는 과거 장면과 현재 장면을 오가며 죄와 부끄러움을 대비시킨다. 플래시백으로 재현되는 과거는 집단 성폭행이라는 범죄의 행위가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이에 반해 범죄 이후의 상황을 보여주는 현재장면은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핵심이다. 현재가 과거의 결과라고 할 때, 이 영화에서 과거 범죄 행위에 따른 현재의 상황은 타당한 것인가? 성경에 의하면,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었고 그 결과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은 부끄러움이 죄의 결과라는 것이다.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부끄러워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나 관련자들은 부끄러움을 느끼는가?
물론 앞서 사르트르나 베네딕트의 견해에서 알 수 있듯이 부끄러움이 꼭 죄의 결과인 것은 아니다. 그 경우 부끄러움의 감정은 무엇보다 타자의 시선 때문에 생겨난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찰서에서 취조하는 형사 옆에 있던 또 다른 형사로 보이는 남자는 “어린년 둘이 동네 쪽 팔리게”라고 말하며 자리를 뜬다.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에게 동네를 부끄럽게 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선생님도 “잘잘못은 법원 가서 따지는 것이고, 사람 사는 세상에 뭐 잘못했다고 죄인이구 그렇지 않았다고 그렇지 않은 것도 아냐, 알려져서 좋을 게 없잖아”라고 말한다. 죄의 유무에 앞서 사건 자체가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한공주는 죄의 유무에 상관없이 부끄러워해야 한다. 영화의 시작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한공주는 “저는 잘못한 게 없는데요” 라고 말하는데 영화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된다. 조여사 집을 나선 한공주를 뒤쫓아 온 김소장이 동윤이의 탄원서를 부탁하며 사과를 전하자 한공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과를 받는데요, 저는 왜 도망가야 되요?” 학부모들을 피해 달아나 숨어야 하는 한공주는 그 이유를 모르지만 타인의 시선을 피해야만 한다. 시선에 노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의사 선생님이 남자냐고 묻는 것이나 PC방에서 타인들의 시선을 피하는 것 등에서 알 수 있고, 무엇보다 친구 은희가 자신을 지켜본 것에 대한 반응, 특히 자신이 노래하는 모습이 영상으로 녹화되어 공개되었을 때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한공주는 지나치게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한공주가 과도하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것에 비해 죄를 지은 자들은 부끄럽지 않다. 그들은 뻔뻔하게도 타자의 시선에 무감각하다. 조여사는 자신의 불륜에 대해 당당하게 반응하며, 아버지는 딸 앞에서 부끄러워 하기는 커녕 자신의 힘이 없음을 강변한다. 무엇보다 가해학생의 부모들은 타인들의 시선이 아예 없는 듯 당당하게 행동한다. 죄를 지은 자가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주변의 시선들을 피해야만 하는 상황, 관객은 이 상황을 바라보면서 집단 성폭행 이라는 범죄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우리 사회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 보기는 결국 우리에게 부끄러움의 감정을 발생 시킨다.7) 우리 역시 영화의 이미지들에 의해 보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4)Paul Willeman, Looks and Frictions: Essays in Cultural Studies and Film Theory, BFI. 1994, p. 107. 5)우카시 사토시, 「어떤 감정의 미래-부끄러움의 역사성」, 《흔적》 1호, 2001, 39쪽. 6)루스 베네딕트, 박규태 역, 『국화와 칼』, 문예출판사, 2008. 7)이러한 장면을 보면서 우리가 부끄러움보다도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다. 가령 슬라보예 지젝이 말한 무능한 응시의 죄책감이 그렇다. 지젝에 의하면 말할 수 없는 공포를 그저 응시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이 그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지젝은 보스니아 내전에서 아버지의 면전에서 강간당하는 소녀를 예로 들고 있는데 이 장면에서 철저하게 무능한 아버지는 죄책감에 빠진다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이만우 역, 『향락의 전이』, 인간사랑, 2001, 149-152쪽.
부끄러움의 감정이 윤리적일 수 있는가? 사회 집단의 일원으로서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를 윤리라고 할 때 부끄러움이 어떻게 윤리적일 수 있을까? 먼저 부끄러움이 윤리적일 수 있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 즉 타인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과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죄책감이 내면의 양심과 관련되어 생겨나는 것이라면, 부끄러움은 자신을 타자와의 관계 속으로 개방하면서 생기는 것이기에 우카시 사토시의 글에 나온 표현을 사용하자면 ‘사회적 감정’이라 할 것이다.
이렇듯 부끄러움은 자신을 타자에 비추어 보는 반성적 감정이기 때문에 윤리적인 것과 연결될 수 있다. 철학자 김상환은 윤동주의 ‘서시’에 나타난 부끄러움을 분석하면서8) 부끄러움을 “인간의 도덕적 자기의식을 향도하는 근본 기분”이라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부끄러움은 단순히 타인의 시선 앞에서 개인이 갖게 되는 주관적 심리상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능력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부끄러움이 윤리적인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이처럼 반성적 자기의식을 끌어내 타자와의 관계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있다.
그러나 부끄러움이 자기의식과 연결된 것이기는 하나 윤리적 측면에서 접근할 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감정이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윤리란 감정보다는 관념이나 의식의 차원에서 작용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부끄러움은 타자의 시선에 직접적으로 노출됨에 따른 것으로 의식적 반성에 앞서는 감성적, 정서적인 것이다.
한편, 윤리에 있어 감성9)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른 바 ‘감성의 윤리학’을 주장한 레비나스에 따르면 감성이란 ‘상처받을 가능성’이다.10) 의식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추상적인 것은 대상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감성과 달리 수용성에 한계가 있어 상처받을 가능성이 크지 않다. 그런데 김연숙에 따르면 상처 받는다는 것은 타자에게 보여진다는 것을 말한다.11) 이와 같은 견해에 따른다면 부끄러움은 윤리적인 감성이 될 수 있다. 타자의 시선이 주는 상처에 노출되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영화 속 인물인 조여사와 은희는 흥미롭다. 조여사는 “난 신앙있는 사람이야, 믿음이란 게 사람 사이에 제일 중요한 거야, 사람 사이에 불신만 가득하다고 생각해봐라 얼마나 불행하겠니?”라고 한공주에게 말했지만 정작 사건의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한공주에 대한 믿음은 아무런 역할을 못한다. 나쁜 놈들이라고 가해자들을 욕하지만 떠나는 한공주를 잡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친구 은희 역시 동영상을 본 이후 한공주에게서 온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아마도 이들이 마지막에 한공주를 외면하는 것은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다시 말해 타자의 시선에 노출되는 것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들은 비윤리적이다.
조여사와 은희가 한공주에게 어떤 감정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아마도 연민과 동정 같은 것일 게다. 그런데 이 감정은 본 논문의 관점에서 보건대 비윤리적이다. 수잔 손탁은 『타인의 고통』이라는 책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라면서,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것”이라 했다.12) 다시 말해 한공주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상처받을 가능성에서 도피하는 것이다. 부끄러움의 감정이 자신을 타자의 세계를 향해 개방하는 것이라면 연민을 느끼는 것은 타자와 거리를 둔 채 안전한 방식으로 감정을 처리하는 것이다.
이미지를 바라본다는 것이 윤리적일 수 있는 것은 타자로서 이미지가 주는 시선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한에서이다. 관객은 일방적 시선으로 영화를 관람하지 않는다. 관객은 4번째 시선에 늘 노출되어 있다. 우리가 그러한 시선을 의식하며 영화를 감상한다면 그것은 윤리적인 것이다. 이 영화에서 한공주의 시선은 우리를 보는 자에서 동시에 보여지는 자로 뒤집어 놓으면서 프리모 레비가 말한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준다. 다시 말해 관객은 자신이 가해자인 인간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해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8)김상환의 글은 네이버에서 인용했다. 김상환, 「부끄러움에 대하여: 윤동주 서시읽기」, 《열린 연단: 문화의 안과 밖》에세이 시리즈 중에서. 9)여기서 레비나스가 말하는 ‘감성’은 본 논문에서 사용하는 ‘감정’과는 용어상의 차이가 있지만 이성이나 관념 등 추상적 사고 작용에 대비되는 점에서 같은 부류라 생각하고 개념적 엄밀성을 고려하지 않고 사용했다. 10)김연숙, 『레비나스: 타자의 윤리학』, 인간사랑, 2001, 221쪽. 11)위의 책, 281쪽. 12)수잔 손탁, 이재원 역, 『타인의 고통』, 이후, 2003, 254쪽.
이 영화의 미덕은 성폭행이라는 실제 사건을 다룸에 있어 범죄행위를 장르적으로 처리해 영화적 재미를 추구하기보다는 부끄러움이 실종된 우리 사회의 민낯을 피해자의 시선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영화가 드러내고 있는 어두운 진실은 우리 사회가 타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간직하고 있는 또 다른 미덕은 그러한 타락에 대해 윤리적 갱신의 가능성으로 시선의 부끄러움을 제기하고 있는 점이다.
윤리적 감정으로서 부끄러움은 죄의 처벌보다도 더 묵직한 생성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부끄러움은 단순히 타자의 시선에 자신을 맞추는, 혹은 타자의 시선에 강제되는 수동적 몰주체성을 속성으로 하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타자와의 개방적 관계를 통해 진정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타자를 대상화하여 자기 안으로 포섭하고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낯섦을 긍정하고 그 타자성에 대해 자신을 열어젖히는 단초가 부끄러움의 감정에는 자리하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윤리적이려면 타자시선 앞에서 부끄러워하면서 주체적으로 죄를 고백해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사회의 생성이 가능한 것이다.
또한 이 영화가 제기하고 있는 중요한 이슈는 영화를 본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는 점이다. 본다는 것은 바라보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상호적 시선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가 영화를 본다는 것은 우리 시선의 일방적 폭력성 속에서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보내는 시선에 화답하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 이미지란 사회적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그 화답은 개별 주체의 단독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집단적 사건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영화 이미지의 윤리학이다. 영화 <한공주>는 인물의 시선구조를 활용해 이러한 의미를 관객에게 반추해보게끔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