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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Analysis of the Movie <Konggi-Inhyung(A Sex Doll)> through the Application of an ‘Uncanny’ Conception. ‘언캐니(Uncanny)’ 개념의 적용을 통한 영화 <공기인형> 뒤집어 읽기
  • 비영리 CC BY-NC
ABSTRACT
Analysis of the Movie <Konggi-Inhyung(A Sex Doll)> through the Application of an ‘Uncanny’ Conception.
KEYWORD
Sigmund Freud , Uncanny , Sex Doll , Flaneur , Zombie , Projection of Desire
  • 1. 들어가는 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일찍이 <원더풀 라이프>(1998)를 비롯해,<아무도 모른다>(2004), <하나>(2006), <걸어도 걸어도>(2008), 등의 작품들에서 삶과 죽음, 부조리한 사회의 단면, 가족문제 등 현대인을 둘러싼 다양한 주제를 탄탄한 스토리와 통찰력 있는 시선, 그리고 섬세한 연출력으로 그려온 일본의 중견 감독이다. 그는 겉모습 화려하지만 실상은 결여와 공백 투성이로 도시 속에서 파편화되어 외롭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깊이 있게 담아내왔다. 그의 최신작 <공기인형>(2009)은 지난 2000년에 출판된 바 있는 고다 요시에의 단편만화 「공기소녀」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사랑하는 남자에 의해 공기가 채워지는 인형의 이야기였는데, 이것을 오랜 기간에 걸쳐 숙성시켜 물건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일찍이 몇 편의 할리우드 영화들, 예컨대 <바이센테니얼 맨>, , 등을 통해 로봇이나 사이보그가 인간의 성정을 갖게 되는 이야기들을 보아왔다. 어떤 인간보다도 더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면서, 참 ‘인간다움(정체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이 이 이야기들이 내세워 왔던 주제의 핵심이었다. 그런 면에서 영화 <공기인형>을 보지 못한 이 글의 독자라면 다음과 같은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질지 모르겠다. 즉, 인간의 감정을 갖게 된 싸구려 섹스돌이 등장하는 <공기인형>은 할리우드가 보여주었던 소재의 기술적ㆍ질적 수준에 한참 뒤처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 말이다. 그러나 <공기인형>은 앞의 할리우드 영화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주제에 접근하고 있고, 그 주제의 내용도 차별성이 있다. 인간보다 더 우수한 지능과 사고력, 운동능력,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갖춘 복잡한 매커니즘의 로봇이나 사이보그들이 제기하는 존재론적 지위나 정체성 문제가 아니다. 속세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은 섹스돌(sex doll) 역시 갖고 있지만, 그녀의 속은 텅 비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녀의 몸은 차갑지만, 마음은 세상 누구보다 여리고 따뜻하다. 그러한 그녀의 그 모습은 회색빛 거대 도시, 군중 속에서 파편화 된 개인으로, 무언가가 결여된 채(인간다운 온기를 잃은 채) 고독하게 살아가는 인간군상을 매우 적절하게 환유하는 기제로 작동한다는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2. 언캐니(Uncanny) 개념

    ‘언캐니’(uncanny)라는 말은 본래 독일어 ‘운하임리히’(unheimlich)의 역어이다. 심리학자 에른스트 옌치(Ernst Jentsch)가 호프만(Ernst Theodor Amadeus Hoffmann)의 소설집, 『밤의 이야기들』1)에 수록돼 있는 「모래인간」이라는 환상소설2)을 분석한 논문, 「두려운 낯설음의 심리학에 대하여(Zur Psychologie des Unheimlichen, 1906년 발표)」 에서 도입한 개념이다. 옌치는 밀납 인형, 마네킹, 자동인형들에서 우리가 받는 인상들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언캐니의 감정이 생겨나는 때는 “어떤 한 존재가 겉으로 보아서는 꼭 살아 있는 것만 같아 혹시 영혼을 갖고 있지 않나 의심이 드는 경우, 혹은 반대로 어떤 사물이 결코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영혼을 잃어버려서 영혼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경우”3) 등으로 보고 있다.

    옌치의 논문에 자극을 받은 프로이트는 논문 「두려운 낯설음」4)에서 운하임리히와 하임리히의 언어학적 기원과 발전과정에 대한 지루할만큼 장황한 탐색을 통해 운하임리히는 하임리히의 일종5)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에 의하면 양자는 아주 오래 전의 것이지만 친근한 것과, 친근한 것이지만 아주 오래 전의 것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운하임리히는 실제로는 새로운 것도 낯선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정신적인 움직임에서는 언제나 친숙한 것이었고 또 낯선 것이 된다 해도 그것은 단지 억압 기제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6) 또한 운하임리히에서 접두사 un은 억압의 표식7)이며, 두려운 낯설음의 기원을 억압된 친숙한 것(das Heimische)에서 찾아낸다.8)

    이러한 토대 위에서 프로이트는 옌치가 자동인형을 중심으로 언캐니를 발견하고 설명했던 것과는 달리, 아이들의 눈알을 빼가는 ‘모래인간 모티프’에 방점을 두고 논지를 펼쳐나간다. 그는 눈을 잃어버려 장님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를 거세불안의 변형으로 읽는다. 모래인간이 자아내는 두려운 낯설음의 감정을 어린 아이의 거세 콤플렉스로 환원시켜 설명하는 것이 이 논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프로이트의 언캐니는 본래 익숙했던 것이었으나 억압에 의해 낯선 것이 되어버렸다가 어떤 계기로 그것이 되살아날 때 느끼는 감정과 관련돼 있다. 억압되었던 것이 어떤 계기로 인해 되살아나면 주체는 모호한 불안감에 휩싸이는데, 바로 그러한 결과로 언캐니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강렬하게 두려운 낯설음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죽음, 시체, 죽은 자의 생환이나 귀신과 유령 등에 관한 것이다”.9) 그리고 “두려운 낯설음의 감정은 환상과현실의 경계가 사라진다거나, 이제까지 공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 눈앞에 나타난다거나, 어떤 한 상징이 상징하고 있던 사물의 모든 의미와 기능을 그대로 갖추고 나타날 때 흔히 쉽게 발생한다”10)고 보고 있다. 이러한 논의를 근거로 우리는 언캐니 개념을 ‘친숙하지만 생각해 본적이 없던 낯선 것, 평상시에 보(이)기는 했지만 눈여겨보지 못한 것, 눈여겨보면 안 되는 것, 그래서 현실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생각지 못했던 것들’로 한정해서 영화 <공기인형>에 적용해 볼 것이다.

    그에 앞서 모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매우 건조한 작업이지만 작품전체를 씬 단위로 상세하게 분절을 행한 다음 본격적인 논의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업은 하나의 서사 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내용과 형식 등 제반 국면들에 대한 일목요연한 간추림이며, 모든 분석(비평)적 연구의 출발점11)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이 작품은 훗날 오펜바흐가 작곡한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들>의 주축을 이루게 된다. 특히 「모래인간」에 나오는 자동인형 올림피아는 제 1막에 등장한다  2)이 소설의 스토리 개요는 다음과 같다. 이야기는 ‘나타니엘’이라고 하는 대학생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특히 하녀가 들려주는 ‘모래인간’이야기는 어린 나타니엘의 마음속에 공포감을 깊게 각인시켰다. 밤에 잠을 자지 않는 아이들에게 모래인간이 찾아와서는 아이들 눈 속에 모래를 뿌리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눈알들을 뽑아내 자루에 담아가지고 가서 자기 아이들에게 주면, 갈고리처럼 생긴 부리로 말 안 듣는 아이들의 눈을 쪼아 먹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야기에 공포심을 갖고 있던 나타니엘이 변호사 코펠리우스를 모래인간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과 폭발 사고로 아버지가 죽는 공교로운 사건은 그의 두려움을 증폭시킨다. 결국 나타니엘의 마음 속 깊숙이 각인된 공포의 실체인 모래인간은 나타니엘과 약혼녀인 클라라 사이를 갈라놓고, 그녀의 오빠는 그와가장 절친한 친구 사이였지만, 그 사이도 갈라지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게다가 모래인간은 나타니엘의 두 번째 사랑의 대상이었던 아름다운 자동인형 올림피아도 파괴하도록 했고, 어렵게 되찾게 된 클라라와의 결혼을 목전에 둔 그를 자살로 내몬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나타니엘은 스팔란차니 교수의 아파트를 엿보다가 올림피아를 보는순간 마치 벼락 맞은 것과 같은 반응을 보이며, 자신의 약혼녀인 클라라를 잊어버리고 만다. 나타니엘은 결국 그녀와 만나 입을 맞추다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입술에 섬뜩함을 느낀다. 스팔란차니 교수의 딸로 알고 있었던 올림피아는 교수가 만든 자동인형이었던 것이다. 옌치는 바로 이러한 장면이 운하임리히의 전형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3)지그문트 프로이트 : 『프로이트 전집 14, 예술 문학, 정신분석』 중 「두려운 낯설음(Das Unheimliche, 1919)」, 정장진 역, 열린책들, 1997. p. 412에서 재인용.  4)위의 책 410∼참조.  5)위의 책 p. 411 참조.  6)위의 책 p. 434 참조.  7)위의 책 p. 440 참조.  8)위의 책 p. 444 참조  9)위의 책 p. 434 참조.  10위의 책 p. 439 참조.  11)서정남 :영화 서사학, 생각의 나무,2004, p. 09∼97 참조.

    3. <공기인형>의 씬 분절

    4. ‘노조미’라는 이름의 인형: 회색 도시의 만보객(漫步客), 혹은 좀비(Zombie)

    싸구려 섹스돌인 인형이 사람의 마음을 갖게 되고, 실제 사람처럼 숨을 쉬고 생각을 하고 움직인다. 그런데 앞서 살폈듯이 프로이트가보기에 가장 언캐니 한 물건은 밀납인형, 마네킹, 자동인형들이었다.12)그는 그러한 이유로, 위의 것들은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인간과비인간이 혼재된 원초적 상태를 생각나게 할 뿐만 아니라, 실명(失明)이나 거세, 죽음 등에 대한 유아기의 불안을 떠올리도록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논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바로 우리가 이 영화에서 맞닥뜨리는 노조미라는 이름의 섹스돌(인형) 자체가 언캐니한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이 섹스돌을 그녀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그것이라고 지칭해야 할지를 두고 멈칫거리게 된다. 마네킹이나 자동인형, 밀랍상 등에서 발견되는 양가성, 즉 인간적인 동시에 비인간적인 이상한면모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와 거의 동시대를 함께 했으로 그 이후로도 지속돼 왔던 초현실주의자들의 이미지 작업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초현실주의자들의 바로 그러한 면모를 일찍이 눈치 챈 미국의 미술사가이자 평론가인 ‘할 포스터(Hal Foster)’는 초현실주의 시대의 독일출신 작가 ‘한스 벨머’의 ‘인형’ 연작들을 중심으로 논의를 펼쳐가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한스 벨머와 같은 초현실주의자가 언캐니 한 오브제인 인형을 자신의 작품 중심으로 끌어들인 것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섹스돌이 등장하는 이 판타지 영화를 만들어 세상과 소통하려는 관념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양자 모두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억압된 것들을 불러내고 재구성해서 관객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영화 <공기인형>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영화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된다. 간간이 비가 내리는 밤, 한 남자(히데오; 작품 속에서 그의 이름은 한 번도 언명되지 않는다)가 퇴근하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간단히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다. 식탁에 앉은 그는 맞은편의 공기인형에게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독백)한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어 인형과 섹스를 한다. 그것은 남녀 간의 일상적 섹스의 모양을 취하고는 있지만, 상대의 특수성 때문에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겁탈일 수도 자위일 수도 있는, 미묘한 경계 위에서의 줄타기와 같다. 인형에게는 ‘노조미’라고 하는 이름이 있다. 비가 개인 새 날이 밝아오고 남자는 출근 준비를 한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남자는 거울을 보며 손님을 맞아들이는 인사 연습을 한다. 그는 음식점에서 ‘보이’ 일을 하는 40대의 ‘프리터족’ 독신 남성이다. 그 사이 공기인형은 눈을 깜빡이며 미세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남자가 출근하자 스스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손을 댄다. 이처럼 작품은 인형이 생명을 갖게 된 근원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누가 그러한 일을 가능케 했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 관객인 당신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구렁이 담 넘듯이 경계를 넘어오는 것을 쉽사리 용인해 달라고 한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다. 영혼은 없지만 움직임은 있는 좀비, 혹은 자동인형처럼 움직이던 ‘노조미’는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한다. 이렇게 인간의 감정을 갖게 되고 세상을 배워가는 공기인형이 대도시를 배회하는 만보객이 되어 만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14) 먼저, 공기인형에게 ‘노조미’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그녀’와 함께 살아가는 주인 남자(헤데오)이다. 나중에 주어지는 약간의 단서에 의하면 그는 일찍이 실연의 상처를 겪었으며, 사랑으로 인해 마음을 다칠까봐 공기인형에게 ‘노조미’라는 옛 연인의 이름을 부여하고 프리터로 일하며 살고 있다. 이어서 세상과 단절된 채 오직 먹는 걸로 삶을 이어가는 폭식/거식증 환자, 젊은 여사원의 등장으로 인해 지레 위축된 모습을 보이며 늙는 것을 두려워하는 직장인 노처녀, 혼자 살아가는 비디오 대여점 사장, 유치원에 다니는 ‘모에’라는 이름을 가진 딸을 홀로 키우는 젊은 아빠, 인형에게 이 도시의 모든 이들이 하루살이처럼 비어있다고 말해주던, 하루 종일 공원에서 망연히 시간을 보내는 할아버지, 매일 세상에서 벌어지는 강력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할머니, 자신의 삶은 뒷전인 채 혼자 숨어서 남들의 삶을 훔쳐보는(애니메이션에 열광하는) 오타쿠 청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그들은 모두 혼자이거나 무엇인가 결여돼 있다. 그리고 언뜻언뜻 비춰지는 그들의 모습에서 일본이라는 나라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재 상황을 통찰한다.

    이처럼 떠돌아다니는 인형의 시야에 포착되는 사람들은 이야기의 에피소드를 구성해 주고, 한편으로는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로 깊이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그들은 인형이 지나치며 목격하는 도시풍경 속에서 우연히 개입되었거나 혹은 의도적이더라도 조우(遭遇)’할 수밖에 없는 관계성을 보여준다. 특히 그녀가 ‘시네마 서커스 비디오 대여점’에 들어가 보고, 그곳에서 점원으로 일한다는 설정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유사(가짜) 사람과 유사(가짜) 영화의 흥미로운 만남을 환유한다. 그리고 그 작은 세계를 바탕으로 그녀는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게 된다. 무엇보다도‘준이치’라고 하는 젊은 청년 점원과의 만남과 사랑의 감정이 싹트게 된다는 설정은 플롯의 핵심을 이룬다. 그 때문에 그녀는 가져서는 안 되는 ‘사람의 마음’을 가져버렸고, 그런 그녀가 제일 먼저 한 일이 거짓말이라는 점도 모두 준이치와 관계된다. 비디오 대여점 사장이 크리스마스 때 무얼 할 거냐, 함께 지낼 애인은 있느냐며 야한 농담을 건넨다. 그녀는 거짓말을 한 후,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거짓말을 했다고하는데, 그 이유인 즉 마음속에 준이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성욕처리의 대용품인 싸구려 공기인형이라는 사실에 대해 자각한다. 성욕처리 이외에는 별다른 쓸모가 없어서 미안해하기도 한다. 그녀는 준이치와 함께 바닷가와 들에 나가 많은 것을 보고 배운다.

    어느 날 비디오 대여점에서 별장식을 달던 인형은 날카로운 모서리에 찔려 바람이 빠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면서 정체가 탄로 난다. 이때 관객은 준이치의 표정에서 스쳐가는 언캐니를 읽을 수 있다.그러나 그는 너무나 침착하게 후속 조치를 한다. 찢어진 부분을 테이프로 붙여 공기가 새 나오는 것을 막고, 자신의 숨결을 불어 넣어 노조미를 살려낸다. 그 가운데 노조미 인형이 부끄러워하는 모습 역시친숙하면서도 낯설다. 다음날 아침, 인형은 공기펌프를 쓰레기더미에 버린다. 이제는 자신의 몸에 더운 입김(생기)을 불어넣어줄 존재가 생겼다는 뜻이리라. 집에 온 인형은 우주공간을 날아다니는 환상에 젖는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와 거리의 인형 뽑기 기계에 동전을 넣고 조작하기도 하고, 무인 사진기계에서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다. 거리에서 만난 소녀 조각상(동상)을 만져보기도 하고, 조화(造花)가게에 들어가 조화묶음 하나를 들어 향내를 맡아보기도 한다. 뽑기인형이나 사진, 조각상, 조화 등이 환기하는 바는 두말할 나위 없이 모두가 ‘가짜’이거나 그 가짜를 복제해 돈벌이를 하는 방편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인형이 길을 배회하던 차에 만난 노인은 그녀에게 하루살이에 대해 이야기 한다. 하루살이는 몸속이 비어 있고 소화기관이 없는데, 그 대신 알만 있다는 것. 그저 낳으려고 태어난 생물이 바로 하루살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인형이 ‘저도 비어 있어요’라고 한다. 그러자 노인이 ‘이거 인연이네. 나도 비어 있거든.’ ‘다른 사람도 있을까요?’ ‘요즘에는 모두 그래.’ ‘모두?’ ‘응! 특히 이곳(도시, 혹은 그들의 맞은편 고층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너 뿐만이 아니란다.’ 그녀는 비로소 ‘모든 생명은 혼자서는 채울 수 없도록 만들어졌으며, 모든 생명이 가진 빈 공간은 다른 사람(존재)만이 채울 수 있다’는 인식에 도달한다.15) 노인은 예전에 임시교사였으며, 누군가의 대용품으로 살아왔다고 한다. 최근까지 함께 살았던 개마저 죽었고, 몸져누운 노인은 인형에게 “개 따위는 싫어. 맘대로 나이 먹고 나보다 먼저 죽어버리니... 개 키우는 것은 슬픈 일이야!”라며 상실감을 표현한다.16)

    사고로 바람이 빠지며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났던 것은 물론,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던 다음 날, 비디오 대여점에서 다시 만난 준이치에게 인형은 하루살이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던 할아버지의 말처럼 비어있는 사람이 꽤 있다고 들었다는 말을 한다. 준이치는 자신도 똑같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그녀는 너무나 놀라워하면서도 ‘인연’이라며 반가워한다. 준이치는 자신의 집에 온 인형의 몸에서 공기를 빼내고 불어넣어주기를 반복한다. 그의 집에서 나온 인형은 ‘마음을 가지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는 나레이션을 한다.

    이렇게 마음껏 돌아다니던 인형이 어느 날, 창고에 치워져 있다. 밤에 돌아온 남자(히데오)는 누군가(어머니)와 통화를 한다. 인형은 그의 통화 소리를 듣고 있다. 남자는 인형이 그다지 중요한 물건은 아니지만 그것을 버렸는지에 대해 지나가는 말처럼 묻는다. 다음날 비디오가게에 남자가 성인영화를 빌리러 온다. 그를 알아본 인형은 당황하지만, 그는 그녀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 채 비디오를 빌려 나간다. 비디오 가게 사장은 약점을 잡았다는 듯 그녀를 화장실로 끌고 가 겁탈한다. 인형은 무표정하게 그를 받아들인다. 사장은 그녀를 겁탈하며 ‘하루에’라는 이름을 부른다.

    인형은 어두운 창고에 갇힌 채 새 인형을 사들여 생일 축하를 하고있는 목소리를 듣고 있다. 남자는 새 인형에게 ‘노조미’라는 이름을부여하고, 자신이 그 남자에게 처음 왔을 때와 똑같은 내용, 똑같은 방식으로 환영식을 벌이고, 별자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섹스가 이어진다. 남자는 소변을 보기 위해 아래층 화장실로 내려오고, 이때 인형은 창고에서 나와 이층으로 올라가 본다. 이전에 자신이 누워 있던 침대에는 새로운 공기인형이 누워 있다. 남자가 이층으로 올라와 인형을 보고는 너무 놀라 뒤로 물러선다. 남자는 인형이 예전처럼 ‘그냥’ 인형으로 돌아가 주길 바란다. 인형 역시 마음 같은 것은 안 갖는 것이 나을 뻔했다고 한다. 남자는 마음 같은 것이 귀찮아서 널 고른 것이었다고 한다. 상심한 인형은 집을 나가버린다. 남자가 뒤쫓아 가지만 잡을 수가 없다. 인형은 주소를 들고 자신과 같은 인형을 만드는 공장을 찾아간다.17) 공장 주인인 남자가 나타나 ‘어서 와’라며 너무나 자연스럽고 조용한 어조로 인형을 맞이한다. 인형은 ‘다녀왔습니다’라고인사를 한다. 남자는 인형이 마음을 갖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하느님도 모를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용도폐기 된 인형들이 모여 있는(인형들의 무덤) 곳을 둘러보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처음에는 다 같았는데, 이렇게 돌아왔을 때는 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어. 사랑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표정에서 알 수 있어. 그건 이 아이들도 알 거라고 생각해. 얘들은 이다음에는... 일 년에 한 번, 이른 봄에 버려. 안타깝지만 타지 않는 쓰레기야. 뭐... 우리들도 죽으면 타는 쓰레기니까, 큰 차이는 없지만 말야.” 그는 인형의 입술에 새로이 립글로스를 발라준다. 돌아서 나가는 인형에게 남자가 묻는다 ; “네가 본 세계는 슬펐니? 아름답고 예뻤던 것도 있었니?” 인형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행스럽게 여기며 다녀오라고 한다. 인형도 그를 향해 “다녀올게요”라고 인사를 한다.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 인형은 준이치를 만나고 그의 집에 함께 한다.인형이 준이치에게 말한다18); “너를 위해 뭐든지 해줄게. 난 그러기위해 만들어졌으니까.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 준이치는 인형의 몸에서 공기를 빼고 싶어 한다. 그것은 진짜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인형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마침내 침대 위에 알몸으로 마주앉은 준이치가 인형의 몸에서 공기 빼고 바람 집어넣기 놀이를 한다. 그것은 단순한 공기를 넣어주는 것이 아니며, 마음을 가진 인형에게 사람의 숨결 불어넣기라는 의미까지 넘어서는 것이다. 생명을 부여하고 빼앗는 잔인한 놀이이며 굴절된 성행위와 같다. 특히 바람이 빠져버린 노조미가 준이치의 숨결을 주입받는 장면은 그로테스크한 동시에 에로틱하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이기도 한 이 장면은 ‘사랑으로 충만해짐’을 환유하는 더할 나위 없는 장면이다. 마침내 준이치는 잠들고, 사랑스런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인형은 침대에서 일어나 칼과 테이프를 가지고 온다. 준이치의 배를 칼로 긋고, 피가 나는 그곳에 테이프를 바른다. 통증으로 인해 깨어난 준이치에게 인형이 묻는다 ;“마개는 어디 있어? 내가 바람 넣어줄게. 당신이 해줬던 것처럼!” 상황이 심각해진 것을 깨달은 인형이 절망적으로 준이치의 입에 숨결을 불어넣고, 준이치는 그러한 상황을 조용히 받아들인다. 인형은 죽은 준이치를 쓰레기봉투에 담아 밖에 내놓는다(그는 ‘타는 쓰레기’ 봉투에 담겨 있다).

    이로써 인형의 만보 행위도 종착점에 다다르게 된다. 거리를 배회하던 인형은 그동안 사거나 주워 모은 여러 가지 소품들과 구슬이 든 빈병 따위를 발치에 늘어놓고 벤치에 앉아 있다. 그녀는 이따금 팔에 붙인 밴드를 조금 떼어내고 새어나오는 공기(준이치의 숨결) 냄새를 맡는다. 그렇게 빠져나간 공기는 새로이 채워질 수 없다. 시간이 지나고, 그녀는 동네의 쓰레기봉투 더미에 누워 있다. 초등학생 소녀 ‘모에’가 등굣길에 인형에게 다가온다. 소녀는 인형이 끼고 있던 반지를 빼서 엄지손가락에 끼고는, 자기가 들고 다니던 작은 인형을 인형에게 주며 교환하자고 한다. 인형의 주위로 쓰레기봉투들이 던져진다. 인형은 천천히 옆으로 쓰러진다. 인형의 배 위에 올려져 있던 작은 인형도 바닥으로 떨어지며 “엄마! 엄마!” 하는 기계음이 들린다. 인형의 몸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인형이 작은 인형을 두 팔로 당겨서 엄마처럼 품에 안는다. 인형의 얼굴 앞에 민들레 한 송이가 피어 있다.

    그리고 씬 128로 이어진다. 이 장면은 이제 숨을 다해 가는 노조미인형의 환상을 제시한다. 영상은 준이치와 함께 했었던 고급 레스토랑 안을 보여준다. 그녀는 테이블에 앉아 스테이크를 한 점 썰어 입에 넣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갑자기 조명이 어두워지고 작은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 영화에 출연한 모든 사람들이 생일축가를 부르며 케잌을 들고 인형 주위로 다가온다. 그 축가 속에도 그녀의 이름은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너무 기뻐서 울먹인다. 그것은 노조미 인형이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만보객이 되어 돌아다니며 그 속에 진정으로 욕망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인 셈이다. 인간들의 세상에서 언캐니 한 타자로 배척당하거나 소모되거나 버림받지 않고, 단 한 번이라도 진정한 인격체로 인정받고 대접받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인간의 마음을 갖게 된 순간 어쩔수 없이 따라오는 원초적인 것(그만큼 친숙한 것)이지만, 그것을 새삼 환기 받는 관객으로서는 가슴 뭉클하면서도 언캐니 한 장면이 아닐수 없다.

    울먹이던 그녀는 케잌의 불을 끄기 위해 숨결을 불어 넣는다. 장면이 바뀌어 현실로 돌아오면(씬 129) 쓰레기장에 비스듬히 쓰러져 있는 인형 앞에 희고 둥근 홀씨를 가진 민들레 꽃대가 있다. 인형이 꽃대를 향해 마지막 숨을 내뿜는다. 민들레 홀씨들이 도시의 하늘 위로 날아오른다. 그리고 등장했던 모두 앞에 그 홀씨들은 내려앉는다.

    12)지그문트 프로이드 : 위의 책, p. 412 참조.  13)Hal Foster ; Compulsive Beauty,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 전영백-현대미술연구팀공역, 아트북스, 2005. p. 177 참조. 할 포스터의 이 책이야말로 프로이트의 언캐니 개념을 중심 관념으로 하여 초현실주의 시대의 작품들을 미술사적으로, 비평적으로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탁월한 식견을 보여주는 저작이라고 할 것이다.  14)인형이 세상 밖으로 나와서 실제 사람과 의미 있는 신체적 접촉을 처음으로 행하는 장면은 씬 13에서 이루어진다. 서로 손에 손을 잡고 다리 위를 줄지어 지나던 유치원생의 행렬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노조미 인형이 다가가 맨 뒤에 있는 아이의 손을 잡았을때, 아이는 깜짝 놀라며 차갑다고 손을 빼 달아나는 것이다. 아이는 그녀의 실체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온기를 가진 사람이 아닌 인형의 섬뜩한 차가움에 언캐니를 느낀 것이다. 이처럼 그녀가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부여받고) 세상에 나가 만보객이 되었을 때, 그녀는 즉각적으로 언캐니 한 주체이며 사회적 타자가 된다.  15)씬 51∼54 참조.  16)씬 112 참조.  17)씬 113∼118 참조.  18)씬 121 참조.

    5. 히데오의 언캐니

    공기인형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배려해서 사람(여자)의 형상을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실재하는 사람의 모습과 어느 정도는 비슷한 형상이라고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인간과 정신적으로 교감되는 정서가 개입될 여지란 없다. 그런데 그 인형이 사람의 마음을 갖고 움직이며 도시를 배회하는 만보객이 되었을 때, 그것은 일종의 좀비와도 같은 것이다.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으나 산 것이 아니며, 죽었으나 죽은 것이 아닌, 삶과 죽음의 경계에 기묘하게 걸쳐있는 존재가 바로 좀비이다. 그 외양이 너무나 예쁜 좀비여서 우리는 경계심 없이, 재미있게 영화를 볼 수 있지만 그런 존재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내 목전에서 돌아다닌다면 좀 섬뜩하게 느껴질 것도 같다.

    여하튼 삭막한 도시 환경 속에서 파편화 된 개인으로, 게다가 번듯한 직업도 없이 프리터로 그럭저럭 살아가는 개인(히데오)에게 있어 가장 저렴하게 섹스 파트너와 대화 상대를 구매하고 소비하는 방편이 된다. 히데오가 인형에게 ‘노조미’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그녀에게 설명하는 별자리나 여타의 발화 행위들은 대화의 형식을 빌고는 있으나 애초부터 메아리 없는 모놀로그일 뿐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것이 독백일지라도, 일상의 내밀하고도 자잘한 일들을 토설할 대상이 절실했던 것이다. 히데오에게 있어 과거에 그의 곁에 실재했던 ‘노조미’라는 여자의 현재 이미지는 양가적이다. 그녀는 히데오에게 큰 상처를 안기고 떠난 여인이면서도 끊임없이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히데오는 그녀와의 아름다웠던 사랑의 추억들과 그녀가 가졌던 성적인 매력 등에 대해서는 인형에게 투사한다. 그러나 그녀와의 갈등이나 고통스런 이별로 인한 트라우마는 소거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욕망을 억압해 온 것이다. 그의 그러한 모습은 여러 장면들을 통해 조금씩 제시되고 드러난다.

    영화 초반에 집으로 돌아온 히데오가 노조미 인형에게 하는 말은, 낮에 사장이 자신에게 면박을 주며 ‘너를 대신할 사람은 많다’고 했다는 것이다(씬 4). 히데오는 사람들 눈을 피해 야간 산책에 나선다(씬20). 인형에게 커플룩을 입히고, 휠체어에 태우고 어두컴컴한 공원의 벤치에 앉아 무드를 잡으려 한다. 그는 노조미 인형의 차가운 몸에 대한 언캐니가 있기 때문에 뜨거운 캔커피(커플 룩을 입고 밤 공원에 나왔을 때)를 노조미의 손에 끼워주고 있다가 손을 만진다. 한편, 따뜻한 물로 채워진 욕조에서 같이 목욕하며 인형의 차가운 몸에 대해이야기하기도 한다(씬 32). 그러나 그는 여자가 자신을 귀찮게 하는 모습은 견디지 못했던 듯하다. 무조건 자신의 편이 돼주고, 끝까지 자신을 보듬어 안아주며, 그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왜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며, 대들지 않을 대상 말이다. 귀찮게 치근대거나 자기 주장을 강요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순종만 하는 존재. 발로 뻥 차도 아무리 거칠게 다뤄도, 돈을 못 벌어 와도 불평하거나 징징대지 않는 존재. 만약 그런 여자가 있다면 그녀야말로 히데오 뿐만 아니라 모든 남자가 원하는 완벽한 이상형일 터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섹스돌 노조미는 분명 미덕이 있다. 살아 움직이는 진짜 여자처럼 생동감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귀찮게 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히데오로서는 다만 섹스를 나누는 순간에 있어서만큼은 인형이 진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을 터이지만, 그 밖의 일상에서는 오히려 편한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인형이 움직이며 말을 하며 그 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기막힌 언캐니의 감정을 느낀 듯한 모습을 보인다. 기절할 듯 놀라며 뒷걸음질 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노조미 인형은 살아있지 않은 물건이지만, 때로는 살아서 움직이며 자신을 받아주고, 귀찮게 하지 않으며 오로지 순종적으로 자신을 받아줄 것을 한때나마 염원하는 마음을 투사했던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가 전혀 예측하거나 기대하지 않은 순간에 노조미 인형이 실제로 움직이며 나타나 말을 걸어왔을 때, 그것은 죽은 자의 생환이거나 귀신, 혹은 유령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이어서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처럼 씬은 섹스돌에게 ‘노조미’라는 이름을 부여한 히데오라는 인물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 특히 노조미 인형이 마음, 즉 사람의 성품을 갖게 되고, 사람의 성정을 알게 되고, 질문을 해대고, 따지고 들 때, 그는 자신이 무엇에 대해 참지 못하고, 무엇을 귀찮아 해왔는지, 어떤 이유로 ‘노조미’라는 이름을 가진 그의 옛 애인은 그를 떠나갔는지, 그것이 그에게 어떤 트라우마를 남겼는지 등, 모든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도록 한다.

    19)씬 108 참조.

    6. 초등학생 소녀 ‘모에’가 관객에게 주는 언캐니

    공기인형 노조미가 세상 밖으로 나와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이 바로 초등학교 1학년 정도의 소녀 모에와 그 아빠였다. 이들 부녀는 다른 주변 인물들과 함께 이야기가 진행되는 사이사이에서 모습을 보여준다. 모에의 아빠와 엄마는 이혼한 듯한데, 엄마가 떠나가고 아빠 홀로 모에를 돌보는 것이다. 아침 등교 시간에는 아빠가 모에를 챙기지만, 하교 후 집에 혼자 올 수밖에 없고, 집안에는 아무도 없다. 아이는 등하교시에 항상 인형을 손에 들고 다닌다. 하루 종일 아이의 유일한 친구이며 대화 상대는 인형이다. 모에는 인형의 머리를 포크로 빗어 주기도 한다. 인형은 사람이 건드리면 ‘엄마’ 하는 소리를 낸다.

    그런데 준이치가 불어 넣어주었던 숨결이 노조미의 몸에서 시나브로 빠져나가고 이제는 기진해져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그녀는 준이치가 그리운 나머지 상처 난 팔목에 붙였던 테이프를 조금열고 그의 냄새를 맡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의 냄새와 숨결을 느끼는 모습은 너무나 인형다워서, 희로애락의 감정이 절제돼 있어서 오히려 관객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이제는 더 이상 그녀의 몸에 숨결을 불어 넣어 줄 누군가가 없다. 그녀 자신이 펌프로 (숨결이 아닌)공기를 주입할 생각도 없다. 그녀는 처음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제일먼저 목격했던 동네 쓰레기 집하장, 쓰레기 봉투 더미 사이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 이때 등굣길에 나선 모에가 노조미에게로 다가온다. 그리고는 노조미가 끼고 있던 반지를 빼서 자기 엄지손가락에 끼고는 밤낮으로 들고 다니던 작은 인형을 노조미에게 주며 “교환하자”고 한다. 그 반지는 노조미가 동네 문구점(잡화점)에서 산 싸구려 제품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논자가 앞에서 장황하게 언급했던 바, 프로이트의 언급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자. “인형놀이를 하는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이 흔히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을뿐더러 인형을 살아있는 사람처럼 다루는 것이 어린아이들의 특이한 성향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20) 이 말의 신빙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리라고 본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모에의 행동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모에에게 있어서 인형은 단지 자나 깨나 들고 다니던 장난감이라는 1차적 의미를 넘어서는 존재였다. 학교에서 돌아와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놀며 아빠의 귀가를 기다릴 때, 모에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인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기 인형을 자신이 돌보고 있다는 믿음과 확신을 품고 있을 터이다. 남들이 보기엔 모놀로그일 뿐이겠지만 모에에게 있어 인형은 더할 나위 없는 대화 상대였을 터이다. 그런 인형(사람이기도 했을)을 한 순간에 포기하고, 학교 앞 문구점이나 잡화점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싸구려 반지와 바꾼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것은 극의 막바지에서 관객의 감정을 감상적으로 움직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상황일 것이다. 실제로 노조미의 배 위에 올려져 있던 아기 인형이 바닥으로 미끄러지며 ‘엄마, 엄마’하는 기계음을 내는데, 노조미는 마지막 힘을 다해 아기 인형을 두 팔로 당겨서 엄마처럼 품에 안는다. 보기에 따라서는 정말 가슴 뭉클한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과가 아름답다고 해서 무리하게 과정을 이끌어간 것이 모두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모에라는 어린 소녀는 한 순간에 매우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아이가 돼버렸다. 너무나 소중한 친구였으며 돌보아주어야 할 아기이기도 했던 대상을 한 순간에 헌신짝처럼 버리는 잔인함을 보인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장면은 소름이 끼치도록 언캐니하게 다가온다. 감독이 모에의 비인간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만든 상황이 아니라면, 이 장면은 두 말할 나위 없이 감독의 결정적 패착이다.

    20)지그문트 프로이트(정장진 역) : 위의 책, p. 423 참조.

    7. 나오는 말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서 단지 주변인물 중 하나로 등장하는 폭식/거식증을 가진 여성인물에 대해서 약간의 부연이 필요하다. 그녀는 일본의 후지사과 주산지인 아오모리 현 출신(시골 출신)이라는 정보가 언뜻 제시된다. 그리고 엄마와의 통화 장면을 통해서도 집으로 돌아와 사과 농사를 함께 짓자는 이야기가 제시된다. 그녀는 회색빛 메트로폴리스의 후미진 어느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원룸에 기거하고 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두꺼운 커튼으로 꽁꽁 가린 채, 온 방안을 쓰레기장처럼 만들면서 그녀는 밤낮 없이 폭식과 구토를 반복한다. 폭식이란 그녀가 가족과 고향으로부터, 대지로부터 유리된 채 이 낯선 대도시에 안착해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모습이다. 이로 인해 그녀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 한 없이 지연되고 있는 욕망의 충족에 대한 갈망으로 배고프고 목마른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러한 공허함을 단지 먹고 마시는 것으로 충족하려 할 때, 그녀의 몸은 형편없이 망가지고, 몸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음식은 구토를 통해 다시 밖으로 배출돼 버린다. 상징적으로 본다면, 그녀는 이 낯선 도시의 모든 것들을 순조롭게 받아들이거나 스스로 소화할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부적응자로 스스로를 유폐한 채 끝없이 망가져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녀에게 민들레 홀씨가 날아들었을 때,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마음의 결정을 한 듯하다. 그녀는 스스로의 마음에 두껍게 드리웠던 어둡고 무거운 커튼을 열어젖히고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간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방을 어둡게 감쌌던 커튼을 열었을 때, 광명한 세상의 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다. 그녀는 저 아래, 쓰레기장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인형에게로 시선을 준다. 그리고 ‘아름답다’고 말한다.21) 기계생산품인 인형의 마지막 숨결이 민들레 홀씨를 날리고, 그것이 언캐니하게 퇴행해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소망으로 내려앉고, 특히 그 퇴행의 끝자락에서 자폐상태에 빠져 있던 젊은 여성을 일으켜 세운다. 세상 사람들에게 언캐니한 대상으로서의 인형이 오히려 세상 속에서 좌절했던 인물에게 아름다움을 주고, 희망을 선사하고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감독의 의도가 마지막으로 정리돼 보여지는 장면이다.

    종합해 볼 때, 몇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 작품의 전반적인완성도는 매우 높게 평가할만하다. 감독은 특유의 섬세함을 바탕으로 소재를 다루고, 주제를 갈무리해내는데 그 솜씨가 녹록치 않다. 극적상황 설정과 인물들 간의 대화, 혹은 내레이션 형식 등을 통해 캐릭터의 세부를 치밀하게 드러내고 있다. 마음을 가진 섹스돌이라는 기묘한 만보객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제시하는 영상 기법 역시 탁월하다. 텍스트를 세밀히 분절해 보면 이러한 사실을 확연히 살펴볼 수 있다.총 140개의 씬 중 92개가 롱테이크로 이어지는 단 한 개의 숏으로 이루어져 있고, 28개의 씬에서 2∼3개의 숏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20개의 씬들은 4개 이상의 숏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10개 이상의 숏으로 세밀하게 분할해 제시되고 있는 씬은 약 10개 정도 된다. 바로 이 씬들은 극적 전환점 역할을 수행하거나 작품이 드러내고자하는 핵심 메시지들이 응축돼 있는 중요한 장면들임을 알 수 있다.그렇다고 해서 작품의 밀도나 서술적 리듬이 지연되는 것도 아니다. 커팅의 내적 필연성이 없다면 롱테이크로 장면의 연속성을 이어가겠다는 감독의 미학은 탁월한 성취를 이루고 있다.

    기본적인 안목만 가지고 있다면 금세 발견하고 해독해 낼 수 있는 상징코드들을 적재적소에 심어 넣고 있는 점도 칭찬할만하다. 하루살이, 토끼풀, 민들레 홀씨, 대신할 사람, 인형, 사진, 조화, 반지, 잘린꽃, 생일 등등. 또한 현대를 살아가는 회색 도시인의 공허한 삶과 인형의 인간다움을 대비하기 위해 마련한 짝패들, 예컨대 사람과 인형, 생명과 죽음, 타는 것과 타지 않는 쓰레기, 바람과 풍경, 영화와 DVD,폭식과 공허함, 폭식과 구토, 유리병과 구슬 등, 역시 익숙하고 전형적이지만 과하지 않게 적절히 배합해 내고 있어 읽는 즐거움을 더한다. 배두나의 연기가 일본 유수의 영화상 시상식들에서 두루 평가를 받을 만큼 매우 좋았다니 그 점에 대해서는 그대로 믿기로 한다. 때때로 진짜 인형 같아 보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영화 <공기인형>은, 공산품으로 만들어져 수많은 남정네들의 정욕을 말없이 받아내고, 온갖 굴욕과 수모를 받으면서도 반항 한마디, 저항 한 번 못한 채 소임을 다하고 스러져 갔을 이 세상의 모든 섹스돌22)에게 바치는 한 송이 꽃과 같은 작품이다.

    21)그녀의 사야에 들어 온 인형의 모습은 마치 움직이는 실체를 사진 이미지로 고착화 한 것 같다. 그것은 Roland Barthes가 자신의 마지막 저작인 Camera Lucida에서 말했던 바,푼크툼(punctum)과도 같이 그녀의 눈을 찌르고, 가슴 속으로 파고들어 오는 어떤 도저한 울림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녀가 어둠침침한 방에서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을 때, 그녀를 꿰뚫고 들어가 새로운 소생의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의지를 발동시킬 수 있는 매우 공교롭게 위치 지워진 자리에 인형은 누워서 그녀의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이다.  22)그들은 언캐니하게도 불에 타지 않는 쓰레기들이다.

참고문헌
  • 1. 서 정남 2004
  • 2. Hans Bellmer 2002 Petite anatomie de l’image google
  • 3. Hal Foster 2005
  • 4. Roland Barthes 1980 La Chambre Claire ; Note Sur la Photographie google
  • 5. Sigmund Freud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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